〈 118화 〉118화
“에루나...?”
“네, 맞습니다. 주인님의 시녀이자, 오직 주인님만을 위한 종, 에루나 투아레입니다.”
어디서 많이 본 태연한 얼굴로 에루나를 꼭 빼닮은, 하지만 에루나와 비교하면 여러 가지로 많이 줄어들어있는 모습의 소녀가 내 말에 긍정하며 그렇게 말했다.
“잠깐만... 어떻게 된 거야? 그 몸은... 또 뭐고?”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지금에 와서는 또렷하게 떠오르는, 에루나의 마지막 모습과 눈앞에 있는 소녀의 모습이 전혀 매치가 되질 않았다.
그야 당연했다.
아무리 에루나를 꼭 빼닮았다고는 해도, 이제 겨우 열 살을 넘겼나 싶은, 로로나 마야, 니아와 같은 또래로 밖에 보이지 않는 소녀가 에루나라고 생각될 리가 없으니 말이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의문의 대답을 눈앞의 소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꺼냈다.
“별 거 아닙니다. 주인님의 의식이 없는 동안, 여러 일이 있어서 불가피하게 예비용 신체로 옮겼을 뿐입니다.”
“예비용... 신체?”
“네, 저는 골렘입니다. 만약을 대비해서 만들어진 예비용 신체 하나 둘 정도는 있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 한마디에 뭔가 전부 납득이 되어 버리려고 했지만 그것보다 궁금한 게 수두룩하게 많았다.
“그럼 그때, 나한테 했던 말은...”
좀 더, 제대로 보필하고 싶었다고. 아쉽다는 듯이, 슬픈 듯이 말했던 에루나를 떠올리며 물었다. 그때, 에루나에게서 전해져오던 감정은, 거짓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때 에루나는 분명히 슬퍼하고 있었으니까.
그 말에 두 눈을 깜빡이던 에루나, 라고 주장하는 소녀가 입을 열었다.
“그거라면... 주인님께서 보시기엔 이 몸이 어떻게 보이십니까?”
“그야 뭐... 어린 애?”
소녀의 주장대로라면 원본, 이라고 해야 하나. 본래 에루나의 신체와 비교하면 지금의 모습은 에루나를 꼭 빼닮고 있기는 했지만 아무리 관대하게 봐준다고 해도 소녀, 그 이상은 아니었다. 그나마 가슴만큼은 이전의 에루나가 루시아 다음가는 크기였던 것처럼, 지금도 어려보이기만한 외모 치고는 생각보다 있는 편이기는 했지만...
아무리 가슴이 있다고 해도 어린 게 어디로 가는 건 아니었다.
그런 대답에 에루나로 슬슬 확정되어가고 있는 소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습니다. 그리고 보시다시피, 몸이 이렇다보니 아무래도 주인님께 봉사하는 데에 차질이 생기는 바람에... 뭐, 아주 불가능한건 아니겠지만 말입니다. 봉사를 위해 필요한 게 꼭...”
“그 이상은 말할 필요 없으니까 스톱.”
그러니까, 그 말은... 그때 내게 전해져왔던 아쉬움이나, 슬퍼하던 감정이 전부 다. 그저 앞으로 그렇고 그런 짓을 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해서 그런 거였다는 소리란 뜻인가?
정말로?
도저히 믿기지가 않아서, 아니, 믿고 싶지 않아서, 내가 물었다.
“...그게 끝?”
다른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 아니, 있어줬으면 좋겠다는 심정으로 물은 내 질문에 소녀가 대답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습니까?”
뻔뻔한 얼굴로, 그렇게 대답하는 소녀를 보고 확신했다.
이 소녀는 에루나였다.
이런 소리를 하는 게 이 세상에 하나 더 있을 리가 없었다. 아니, 있어서는 안됐다. 내 정신건강을 위해서라도 말이다.
하지만 아직도 궁금한 건 남아있었다.
“그럼, 아까까지 자리에 없었던 이유는 또 뭔데?”
무슨 이유로 내가 의식을 잃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내 곁에서 에루나가 자리를 비울 리가 없었다. 저런 성격이기는 하지만 에루나의 충성심은 누구도 따를 수 없을 정도로 강하니 말이다.
그 충성심이 지나치게 강해서 곤란한 것 뿐이지. 그런 내 물음에 에루나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실례, 몸이 이렇게 돼서 바뀐 것은 외모만이 아닙니다.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이나, 전체적인 육체의 성능이 줄어들어서... 주인님께서 일어나신 것은 알 수 있었지만 바로 복귀할 수는 없었습니다.”
“복귀라니... 어디라도 갔었던 거야?”
“식사 준비를 위해서, 재료를 구하러...”
그 뒤에도 몇 가지 질문을 했지만, 전부 에루나답다면 에루나 다운 대답이 돌아왔다. 결국, 눈앞에 있는 소녀... 아니, 에루나가 진짜임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아. 그러고 보니.”
그때 에루나가 무언가가 떠올랐다는 듯이, 그렇게 말하고서는 나를 바라봤다.
“무슨 일인데?”
그보다 이제 궁금한 것도 다 풀렸으니까 내 배 위에서 내려와 줬으면 좋겠는데... 몸이 바뀌어서 그런지, 딱 어린 아이정도의 무게였던지라 별로 무겁지는 않지만, 그... 뭔가 느낌이 묘해서 불편했다.
거기에...
“......”
뭔가 이쪽을 보고 있는 크리샤의 시선도 점점 무서워져가는 기분이기도 하고.
“중요한 사실이 떠올라서 말입니다. 분명 아까 전에, 주인님께서 저한테 좀 더 어리광을 부려도 좋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뭔가 느낌이 쌔한데. 이미 나온 말부터, 뒤에 나올 말은 듣지 않아도 될 만큼 불길하기 짝이 없는 에루나의 말에, 내가 말을 돌리려고 했지만 그보다 에루나의 행동이 더 빨랐다.
입고 있던 치마의 끝단을 잡아 올리며 에루나가 말했다.
“그렇다면, 이런 어리광도 받아주실 수 있으십니까?”
언젠가 봤던 기억이 있는 것 같은, 검은색의, 가터벨트 끈이 인상적인 팬티가 보였다. 에루나의 팬티였다. 그때는 색기가 넘쳤던 것에 반면 이번 것은 뭔가 귀여웠지만...
이와중에 색기가 넘쳤다느니, 귀엽다느니 하면서 생각하고 있는 내가 정말이지, 여러모로 에루나에게 익숙해졌다 싶었다. 워낙 단련된 나머지 이제는 이런 일로 움찔도 안하게 되어버렸으니 말이다. 골치야 아프긴 하지만.
뭐,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였다. 물어볼 건 물어봐야했다.
“한 가지 묻겠는데, 대체 무슨 어리광인데 속옷을 다 드러내고 난리야?”
“글쎄요, 주인님은 어떤 게 좋습니까?”
내가 먼저 물어봤잖아. 한숨을 내쉬며 그런 에루나의 치마를 잡아 내리려고 했다. 그보다 먼저, 에루나의 몸이 쭈욱하고 위로 들어 올려졌지만 말이다.
덕분에 정면에서 보이던 팬티가 내 머리 위로 올라갔다. 덩달아 시선을 올린 나는 그런 에루나를 들어 올린 사람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자, 이제 네가 원하던 에루나가 무사한 것도 확인했으니까 됐지? 에루나... 너도 이제 비켜. 널 보자마자 멀쩡해진 게 아니꼽긴 하지만... 일단은 저 녀석, 방금까지는 환자였으니까.”
어느새 다가왔는지 그런 에루나의 뒷덜미를 붙잡은 크리샤가 날 내려다보며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에루나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크리샤 아가씨, 흔치 않은 기회라서 저도 양보할 수가 없습니다.”
“...하? 양보? 이상한 소릴 하네, 에루나. 내가 언제 양보해달라고 했어?”
“실례했습니다. 그리고 양보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면 저도 굳이 비킬 이유가 없습니다.”
“...좋게 말할 때, 비켜.”
“싫습니다.”
아니, 정작 나는 떡 줄 생각도 없는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 에루나는 둘째치고서 크리샤는 또 왜 저러는지도 모르겠고. 거기에 싸울 거면 내 위에서 그러지 말고 일단 밖으로 나가서... 그런 생각을 하며 둘을 멀뚱히 보고 있자니, 불똥이 나한테로 튀었다.
“그리고 넌 뭘 좋다고 계속 보고 있어?!”
“내가 뭘 했다고?”
내가 정말로 좋다고 이 상황을 즐기고 있던 거라면 몰라도, 지금은 억울했다.
“뭘 했냐고? 그야... 나한테 뭘 말하게 하려는 거야?! 이 변태!”
“아니, 진짜로 억울한데?”
“억울하긴 뭐가 억울해?! 아까부터 멀뚱멀뚱, 음흉한 눈으로 에루나의 속옷이나 훔쳐봤으면서!”
에루나의 팬티를 본 건 맞지만 훔쳐본 건 아니라서 그렇게 매도하는 걸 듣고 있자니 기분이 나빠졌다. 훔쳐본 게 아니다. 보여줬으니까 본 것뿐이지. 애초에 이쪽은 아까부터 배가 고파서 손가락 하나 꼼짝하기 싫었다. 그러니까 자연스레 볼 수 있는걸 본 것뿐이고, 그게 에루나의 속옷일 뿐이었다.
딱히 다른 이유는 없다는 거다.
하지만 크리샤가 저렇게까지 말하니 하는 수 없었다.
“이제 됐냐?”
그래서 양 손으로 두 눈을 가리며 그렇게 말했다.
“......”
크리샤가 날 노려보고 있는 것 같았지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신경 쓰면 안 될 것 같기도 하고.
그때, 내 뱃속에서 꾸르륵하는 소리가 들렸다.
꽤나 소리가 크게 울렸다.
정말로 커서, 무안해진 내가 진심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자니 그런 내 귓가에 에루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고 보니, 식사 시간이 됐었군요.”
크리샤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넌 또 왜 배고파하고 난리야?!”
아니, 배고프다고 아까부터 그랬었는데... 이제는 배고프다고 구박받는 신세가 되어버린 모양이었다. 서러워서 진짜... 심지어 에루나도 아니고, 내 밥을 챙겨주는 것도 아닌 크리샤가 구박을 하니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크리샤 아가씨.”
“...알아, 안다고. 그러니까 자꾸 보채지마!”
그렇게 말하는 크리샤의 목소리와 함께, 꾸욱하고 내 팔목을 누군가가 붙잡았다.
“엇...”
그대로 잡아당겨진 내가 놀란 눈으로, 내 팔목을 붙잡고 잡아당긴 장본인인 크리샤를 바라봤다. 대체 무슨 짓이냐고 묻기도 전에, 나를 보며 크리샤가 말했다.
“우선... 착각하지 말아줬으면 좋겠는데, 내가 원해서 하는 게 아니거든? 그러니까... 으으, 진짜... 내가 왜 이딴 짓을 해야 하는 거야?”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설명부터 해줬으면 좋겠는데.”
밥 먹으러 가자고 부축해주려는 것도 아닌 모양이고. 그런 내 말에 얼굴을 잔뜩 붉힌 크리샤가 말했다.
“제발, 그 입 좀 닥쳐.”
입만 열었다하면 닥치라는 크리샤에게 뭐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정확히는, 일어나지 못했다.
“읍...!”
그대로, 크리샤의 입술이 내 입술을 덮어버렸으니까.
놀란 눈으로, 그런 크리샤를 바라봤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당한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무슨 짓을 당했는지는 이해했지만 다른 누구도 아니고 크리샤가 내게 입을 맞춘다는 짓을 했다는 걸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 내 귓가에 알림이 들려왔다.
띠링~
[플레이어 ‘이지경’님의 기능 ‘흡정’이 발동합니다. ‘크리샤네아 슈페리아’의 마력을 흡수합니다.]
흡정.
예전에, 루시아에 의해 봉인됐었고... 내가 의식을 잃기 전에 다시 부활했었던 기능.
그리고...
머릿속에서, 그때 일어났었던 일들이 떠올랐다.
“읍, 으읍...!”
내가 몸을 버둥이자, 그런 나를 크리샤가 째릿하고 노려봤다. 그 이상 움직이면 진짜로 죽여 버리겠다는 듯이, 눈가에 눈물이 맺힌 채로. 새빨개진 얼굴로 날 노려보고 있었다.
아니, 노려보고 싶은건 나거든? 대체 무슨 짓이냐고 한 소리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자꾸만 저항하는 내 머리를 부둥켜안고서, 눈을 질끈 감은 크리샤가 그대로 입술 박치기를 시전했다.
말 그대로. 입술로 박치기한 것이나 다름없는 짓을 말이다.
입술이 아플 정도로 어설픈 입맞춤.
아니, 입맞춤이라기보다는 입술로 박치기를 한 것에 가까운 크리샤의 행동에 내가 두 눈을 끔뻑이다가, 그런 크리샤의 뒤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에루나에게 구조신호를 보냈다.
“그냥 받아들이면 편합니다, 주인님.”
그런 나에게 에루나가 태연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안 편하거든?! 불편해 죽겠거든?!
무엇보다도 크리샤 녀석 키스가 아주 젬병이여서, 이쪽이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겠다. 하지만 지금의 내 몸에는 크리샤에게 저항할 만한 힘이 전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살기 위해서라도 얌전히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몇 분이나 흘렀을까, 귓가에 새로운 알림이 들려왔다.
[상태이상 ‘굶주림’이 해제되었습니다.]
[상태이상 ‘굶주림’으로 인해 저하되었던 모든 능력치가 회복됩니다.]
뭐?
이곳에 와서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던 알림. 굶주림이라는 상태이상이 해제되었다는 소리와 함께, 능력치가 회복되었다는 알림이 말이다.
실제로도 아까까지만 해도 힘이 하나도 들지 않았던 몸에 활기가 넘쳤다. 무엇보다도... 더 이상 배가 고프지 않았다.
“푸하...!”
그리고서, 내게 입을 맞추고 있던 크리샤도 입술을 떨어뜨렸다. 그런 크리샤를 바라보면서. 나는 방금까지 크리샤의 입술이 닿아있던 입술을 만졌다.
“이게 대체...”
아직까지도 크리샤의 온기가 남아있는 입술을 더듬으면서, 무슨 일인지 물으려고 했지만 그보다 먼저 크리샤가 움직였다.
내 옆에 있던 베개를 집어 들더니, 그대로 내 얼굴에 집어던진 것이다. 하지만 베개는 내 얼굴에 닿기도 전에 툭하고 떨어져버렸다. 그렇게 베개가 떨어지는 걸 본 크리샤가 이내 양 손으로 베개를 집어 들더니 내게 휘두르며 말했다.
“잊어! 잊어버려! 방금 있었던 일, 전부 다! 잊을 수 없으면 차라리 죽어버려!”
퉁, 퉁, 하고 베개가 내 얼굴에 닿기 직전에 ‘차원을 넘은 자’에 가로막혀 튕겨나가는 것을 보는 기분이 참으로 묘했다.
아니, 그것보다...
갑자기 입술 박치기를 당한 건 난데 왜 크리샤가 더 부끄러워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게 무슨 일인데?"
팡, 팡하고 여전히 내 얼굴에 베개를 휘둘러대는 크리샤를 무시하고서, 나는 에루나에게 그렇게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