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6화 〉146화
"상관없어."
내 침대 위에서 노곤노곤한 얼굴로, 음마들, 정확히는 에오시스 자매들에게 안마를 받고 있던 크리샤가 그렇게 말했다. 그런 크리샤는 무척이나 편해 보이는 차림이었다. 하기는, 알몸이 어디 불편할 리가 없었다.
그리고 그 옆에서, 마야와 니아, 그리고 슈슈가 그런 크리샤를 수발들고 있었다.
꼭 어딘가의, 무척이나 여왕님 같은 모습이었지만, 딱히 틀린 말도 아니었다.
루시아가 그녀의 영지인 파라모아에서 여왕이었듯이. 크리샤 또한 그녀의 영지인 슈페리아의 안에서는 여왕과도 같은 존재였다.
여왕님 같은 모습이 아니라, 실제로 여왕이란 소리였다. 인간들이 생각하는 그런 수직적인 관계랑은 조금 다르지만 말이다.
영지를 지니고, 그 곳에서 살고 있는 이들을 다스려왔으니까. 시대에 따라서, 땅의 주인을 부르는 말이 달라지고는 했지만, 결국 그녀가 군주, 여왕이란 것은 변하지 않았다.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이곳은 천공성이고, 나의 영지라고 할 수 있는 곳이며 지금 크리샤의 곁에서 그녀의 시중을 들고 있는 저들은 전부 내 시녀라는 점에서 달랐다.
비록 지금 천공성이 크리샤의 영지인 슈페리아에 속하고 있었지만, 그것도 시간문제였다. 한 이삼 주 뒤면 다음 영지인, 아르카의 영지. 브란시아에 도착할 예정이니까.
그런데도 저들이 크리샤의 명령에도 따르는 이유는 한가지였다.
내가 저들의 주인인 것처럼, 크리샤 역시 나의 부인이었다. 내가 말하기엔 조금 낯간지러운 소리였지만... 이건 내가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니라, 크리샤가 한 소리였다. 어쨌거나, 저들의 주인인 나의 부인이 크리샤이기에, 지금도 저렇게 쩔쩔 매며 크리샤에게 봉사를 다하고 있다는 소리였다.
아무튼 중요한건 그게 아니었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허락을 해준 크리샤를 보며 물었다.
"상관없다고? 정말로?"
"그래, 그 녀석들을 보호하고 있던 이유는,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내 영지에서 살고 있던 녀석들이니까 그랬을 뿐이야. 딱히 그들이 날 떠난다고 해서, 내가 그 녀석들을 강제로 내 땅에 묶어둘 이유도, 의무도 없다는 소리지."
그것도 그렇지만...
크리샤가 가진 의무.
정확히는 드래곤이 가진 의무는 자신의 영지에 존재하는 보옥을 관리하는 것이지, 그 영지에서 살아가는 종족을 보살피는 일이 아니었다.
그런 점에서 크리샤의 말은 틀린 것이 없었다. 오히려 크리샤는 루시아와 비교해서, 자신의 영지를, 보옥을 관리하는 것 외에도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긴밀하게 관여하는 편이였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흔쾌히 허락해줄 줄은 몰랐다.
바로, 크리샤의 그런 점 때문이었다.
다른 드래곤에 비해서, 자신의 영지에 대한 애착이, 그리고 그곳에서 살아가고 있는 종족에 대한 애착이 강한 크리샤가 선뜻, 그들이 나한테 충성을 맹세했다는 사실을, 하고자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인정해줄 줄은 몰랐던 것이었다.
크리샤가 슈페리아를 관리, 지배한 것은 벌써 수십년도 전이었다. 카울과 에클레나 역시, 크리샤를 따른 것도 그만큼의 시간이 지났다는 소리였다.
그리고 전에 봤을 때, 그들이 서로를 대하는 모습을 보면 나름 우호적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대뜸 그들이 나에게 충성한다는 말에 아무런 기분도 상해보이지 않는 크리샤를 보니 기분이 묘했다.
"에루나."
그때 크리샤가 내 옆에 있던 에루나를 불렀다.
"네, 크리샤 아가씨. 부르셨습니까?"
"카울과 에클레나... 그 둘 말고도 더 있지 않았어? 내 기억으로는 그랬었던 것 같은데. 이 바보가... 잠들어 있는 동안, 내가 들은 것만으로도 이것보다 더 많았던 것 같거든?"
“네, 아가씨의 영지에서 살고 있던 여든 일곱의 종족 중에서, 그 절반 정도인 마흔 두 종족들... 그 대표들이 주인님께 비슷한 청을 드리고자 만나달라고 요청해왔었습니다.”
“그래? 그 녀석들도, 아직도 마음이 변하지 않았고?”
“오히려 카울과 에클레나의 일로, 주인님께서 일어나신걸 알게 되어 더욱 성화입니다.”
그 말에 크리샤가 눈을 찌푸리는 것이 보였다.
카울과 에클레나는 제외한다치더라도, 역시 절반에 가까운 종족들이 자신이 아닌, 나에게 충성을 맹세한다는 소리가 영 껄끄러운 모양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던 내 귀에 크리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네, 라고 했던가? 너무 힘주지 마. 거긴 아직 아프단 말이야."
"죄, 죄송합니다. 크리샤네아님."
그게 아니었지만.
허리를 주무르고 있던 모네에게 그렇게 말하는 크리샤가 보였다. 아무리 드래곤이라고 해도 허리가 빠진 건 하루아침에 낫는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눈살을 찌푸리며, 모네에게 좀 더 제대로 주무르라고 명령한 크리샤가 다시 내쪽을 보더니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너."
이번에는 누굴 부르는지 알았다. 크리샤가 똑바로 날 보면서 그렇게 말했으니까 당연했다.
"왜?"
"루시아가... 너한테 준 것들이 에네스타랑, 그 검이라고 했었지?"
에루나와 마찬가지로, 내 옆을 지키고 있던 두 명 중 하나. 로로와 함께 나를 호신하고 있던 에네스타와 내 허리춤에 있는 검, 루시아의 이빨로 만들어진 광휘를 보며 그렇게 말한 크리샤를 보고서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거 말고도 받은 건 많았다.
옷이며, 온갖 보석들이며, 심심풀이로 읽을 책들도 잔뜩 받았다. 옷이나 책 외의 받은 장신구들은 따로 보관해뒀을 뿐이긴 했지먼 말이다.
그 외에도 내가 마음에 들어했다는 소식을 에루나에게 듣는 날이면 어김없이 그 다음날에 그것이 선물로 쏟아져내렸다. 그렇게 쌓인 것들이 천공성 어딘가에 쌓여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당장 크리샤의 몸을 주무르며 안마하고 있는 에오시스 자매들과, 그 옆에서 수발을 들고 있는 낙시안 출신의 마야와 니아, 슈슈 또한 어떻게 보면 루시아에게 받은 것들이었다.
받은 것, 이라고 하기엔 조금 그랬지만.
그리고 그런 나를 보건 크리샤가 곰곰이 무언가 생각하는가 싶더니, 입을 열었다.
"흐응... 좋아. 에루나, 이 바보한테 충성을 맹세하고 싶다고 했던 녀석들한테 전해줘. 난 상관하지 않을 거라고. 오히려 그들의 선택을 나, 크리샤네아 슈페리아의 이름으로 축복한다고 말이야."
그렇게 말하고서.
크리샤가 나를 보며 말했다.
"받아둬. 내 선물이니까."
마흔 두 종족.
모두 합쳐서 10만이 훌쩍 넘는 숫자의 종족들이 선물이란 이름으로 도매로 넘겨온 순간이었다.
그 다음날. 난데없이 10만이 넘는 종족을 거느리게 된 나는 받는 건 받는 건데 걔네들을 나보고 어쩌라는 거냐고 물었다. 그리고 그런 내 말에, 크리갸가 이렇게 말했다.
'내버려두면 알아서 잘 살 텐데 무슨 걱정이야?'
그런 크리샤에게 내버려둘 곳도 없는데 당연히 걱정하지, 그렇게 말했던 것을.
지금 후회하고 있었다.
쿠구구궁...!
지금 이 순간에도, 점점 크기가 커져가는 천공성을 바라봤다. 아니, 크기가 커진다고 하기엔 조금 그랬다.
정확히는, 천공성 주위로. 크리샤의 마법으로 만들어진 대지가 쭉쭉 뻗어나가고 있었다. 하늘에 외로이 떠다니던 성이었던 천공성 주위로, 마치 섬처럼, 점점 뻗어나가는 대지를 바라봤다.
장관이었다.
아니, 장관이라는 말로는 부족했다.
무진장 멋졌다.
저게 나랑 아무런 상관도 없는, 그저 보기 드문 경관에 불과했더라면 이렇게 마음 졸이며 보지는 않았을 텐데.
공간 마법.
그리고 대지 마법.
두 속성 모두, 크리샤의 특기였다.
그리고 그 두 속성의 종주인 드래곤의 마법에 의해, 변해가는 천공성을 나 외에도 십만이 훌쩍 넘는 이들이 기대하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졸지에 선물이라는 이름으로 내게 넘어온, 종족들이었다.
웨어울프와 산악 엘프, 그들을 제외하고서도.
물경 10만을 넘기고 있던 숫자가 한곳에 모여 우글우글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을 한 눈으로 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조금 징글맞았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기능 복속을 활성화시켜봤다.
400,115/401,502
내 한계 장악력에 가깝게 꽉꽉 채워진 것이 보였다. 그중 마물이 아닌, 몬스터들이 아닌 이들이 전부 여기에 모여있는 셈이었다. 저절로 한숨을 튀어나왔다.
이제 어쩐다냐.
그러던 와중에 탄성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소란스럽게 움직이는 소리도.
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봤다.
쿠와아아!
그런 내 눈에, 전에 봤던 토룡이 몸을 일으켜 세우더니 이내 웅크리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다시 쩌저적하고 굳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거기에는 산이 하나 생겨 있었다.
산악 엘프, 그들을 위한 땅이었다.
그거 말고도.
넓어져가는 천공성 주위로 곳곳에 각각의 마법들이 펼쳐지고 있었다. 어느 정도 마법을 다룰 수 있는 종족들이 저마다의 마법으로 자기들이 살 곳을 지어대는 것이었다. 나무가 치솟고, 땅이 움틀며 일어나고, 뚝딱뚝딱하고, 순식간에 지어지는 온갖 건물들이 보였다.
마법을 다루지 못하는 종족들, 예를 들어 웨어울프라던가, 코볼트 같은 종족들은 열심히 마법들로 만들거나, 날라온 자재들을 필요한 곳으로 옮겨대고 있었다. 힘도 엄청나게 좋은지 그들 역시, 마법이라고 부를 수 있을 수준으로 빠르게 건물들을 짓고 있었다.
내버려두면 알아서 한다는 말이 실감되는 순간이었다.
그걸 보고 있는 순간에도 나는 골이 아파 죽겠지만.
크리샤의 골 때리는 선물 스케일에, 두통을 느낀 나는 관자놀이를 주물렀다. 더 이상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여전히 천공성 주변으로 뻗어나가는 대지들을 확장하는데 집중하고 있는 크리샤 쪽을 바라봤다.
그런 크리샤의 곁에, 예의 드워프가 있었다.
테 베르나.
크리샤의 영지에 있는 드워프들의 마을에서 끌려온, 그 드워프 마을의 장로 레무르였다.
그렇다고 드워프까지 내게 충성을 맹세한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예를 들자면, 크리샤의 명령으로 파견 온 건축 총괄 책임자 같은 거였다. 그리고 그 총괄 책임자인 레무르는, 마법을 펼치고 있는 크리샤의 옆에서 무언가 쉴 새 없이 쫑알거리고 있었다.
감각을 늘려서, 뭐라고 하나 들어보니, 이런 말들이었다.
“크리샤네아님, 저쪽이 아니라 조금 더 뒤에 산을 지어야 한다 하지 않았습니까? 보십시오. 저대로 두면 햇볕이 갇혀서... 밤에도 천공성이 부글부글 끓을게 아닙니까? 아니, 조금이라고 했지 그렇게 뒤로 가라고는 하지는... 아, 정말. 그거 그렇게 하는 거 아닌데.”
크리샤의 성질을 돋우는데 열중하고 있는 간덩이 큰 늙은 드워프를 보자, 어쩐지 가슴속 한편으로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 느껴졌다.
별건 아니고...
나한테 두통을 선사해준 크리샤가 짜증내는걸 보니까 조금 묵힌 게 풀린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결국, 크리샤가 집어던진 불덩이에 수염이 새까맣게 타버린 드워프를 보며, 나는 씩씩거리고 있는 크리샤에게 말을 걸었다.
“크리샤.”
"뭐야? 머리가 아프다고 해놓고서 여긴 왜 왔어?"
레무르 때문인지 다소 심통스러운 크리샤가 그렇게 말하면서, 여전히 마법을 펼치고 있었다.
그래도 레무르가 했던 말이 신경쓰이긴 했는지, 토룡으로 만들었던 산을 옮기고 있는 크리샤를 보며, 내가 말했다.
"저기보단 저쪽이 낫지 않냐?"
한대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