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7화 〉147화
결국 크리샤에게 한대 쥐어 박힌 나는 레무르가 있는 구석탱이로 향했다.
후후, 하고. 수염에 붙은 불을 끄고 있던 레무르가 뒤따라온 나를 보고는 말을 걸었다.
"고생이 많으십니다. 크리샤클레오시여.“
내가 맞았던 걸 봤었는지, 웃음기가 가득한 얼굴로 그렇게 말하는 레무르가 보였다.
"그렇지. 너만 하겠냐마는."
"……"
나야 주먹으로 끝났지, 불에 수염이 홀딱 타버린 레무르의 몰골은 영 말이 아니었다. 화속성에 대한 내성이 높아서 실질적인 타격은 전혀 없었겠지만, 숯덩이가 된 수염을 매달고 있으니 외형적인 타격은 분명히 있어 보였다.
거기에, 레무르 녀석은 나한테 선물로 준 종족들의 터전을 마련한다는 명목으로, 어젯밤에 강제로 끌려와서 지금까지 일하고 있던 중이었다.
레무르가 크리샤의 속을 박박 긁었던 이유도 아마 그것 때문일게 분명했다. 쉬는 시간도 주지 않고서 일만 시키는 고용주에 대한 불만을 토로한 거라고 해야 하나.
크리샤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으니까, 불덩이만 던지고서 내쫓았던 걸테고. 크리샤 성격상, 레무르에게 쉬는 시간을 준 셈이었다.
정말로 화가 났던 거라면, 드워프가 가진 화속성 내성을 생각했을 때 불이 아니라 바위를 던졌을 테니까. 그것도 아니면 특기인 그림자로 쥐어짰던가.
그런 점에서 고생은 내가 아니라 레무르가 하고 있는 셈이었다. 그것도, 무보수의 야근까지 포함되어있는 고생을.
어쨌거나, 나에게 농담을 던졌던 레무르는 되로 받은 반격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크흠. 헌데... 소인에게는 무슨 일로?"
그런 레무를 빤히 바라보자, 헛기침을 한 레무르가 거뭇거뭇하게 타버린 수염을 숨기며 말했다.
무슨 일이라.
굳이 자기한테 찾아온 이유가 있냐는 듯 묻는 레무르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그랬으니까.
"너한테 볼 일이 있거든."
"...소인에게 말입니까? 혹, 필요한 물건이 있으시온지? 뭐든 맡겨만 주십시오. 이래봬도 아직 쇠를 두드리는 실력은 죽지 않았사옵니다."
드워프에게 볼 일이 있다는 건 무슨 물건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게 보통이었고 레무르 역시 그렇게 생각했는지 불끈하고, 아직도 현역임을 보여주는 팔 근육을 보이며 호언장담했다. 아마,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드워프들의 마을에서 장로를 하고 있는 만큼, 실력은 분명할 거다.
드워프들이 장로를 뽑는 이유가 정치를 잘한다거나, 나이가 많다거나 해서 뽑는 게 아니라 쇠를 두드리거나, 무구를 만드는 실력이 좋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확실했다.
하지만, 딱히 뭔가 필요해서 레무르에게 말을 건 것은 아니였다.
부족한 건 하나도 없으니.
그 대신에.
묻고 싶은 것은 있었다.
"아니, 그거 말고. 테 베르나... 네 마을에 있는 아리스의 소식이 궁금했거든. 그러니 말해보도록. 그녀는 지금 뭘 하고 있는지."
"도착했습니다. 주인님."
그렇게 말한 에루나의 말을 들으며 주위를 둘러봤다. 체감상 나흘 만에, 실질적으로는 거의 일주일 만에 다시 찾아온 곳을.
테 베르나.
드워프들의 마을... 이라고는 하는데 톡 까놓고 말해서 거의 도시 수준인 곳에 도착한 나는 곧장 레무르의 안내를 받아 마을의 구석에 위치하고 있다는 감옥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곧 감옥이라는 이름의, 사실상 만들어진지도 얼마 되지 않아 보이는 자그마한 오두막이 보였다.
"저기가 감옥이라고?"
"그것이, 워낙 급히 만든 것이라..."
어이가 없어서 튀어나온 말에 레무르가 눈치를 보며 말했다. 내 눈치가 아니라, 에루나의 눈치를 본다는 점에서 기분이 묘했지만.
왜 에루나의 눈치를 보는지는 몰라도. 저게 감옥이라는 말은 들었으니 상관없었다.
나는 예의 감옥을 바라봤다. 아무리 감옥으로는 보이지 않았지만 감옥이라니 감옥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하긴 드워프들만 살고 있는 곳에서 범죄같은 게 일어날 리가 없으니 감옥도 있을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감옥을, 갑자기 필요로 해서 급하게 만든 거라면 저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범죄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확신하는 이유가, 이전 세계라면 말이 안 된다고, 이상하다고 생각될지는 모르겠지만. 이 세계에서는 이게 상식이니까 별 수 없었다.
더 정확히는, 드워프들에게만 통하는 상식이었지만.
뭐 훔칠 시간에 쇠를 두드리거나 술에 취해서 잠을 자는 것을 더 좋아하는 것이 드워프니까.
심지어 무언가에 몰두하며 만들고 있을 때는 밥을 먹을 시간조차 아까워하는 것이 드워프라는 종족이었다.
엘프들과 마찬가지로, 과거에는 정령이었던 태생을 가진 드워프들은 우직하고, 강인하며, 또 정직한 종족이었다. 그런 종족이 무언가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라면, 당장 굶어 죽을 정도로 굶주렸을 경우 밖에 없었다.
그런 만큼 먹을 것이 부족할리가 없는 이곳에서 범죄를 저지르는 일은 전혀 없다는 소리였다.
즉, 저 감옥이라고 주장하는 오두막은 최근에 이곳에 오게 된, 아리스를 위해 만들어진 곳이란 소리였다.
굳이 저렇게까지 해가며, 이곳에 그녀를 둔 크리샤의 저의가 좀처럼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나한테 숨기려고 했던 것도.
어째서 그랬으려나, 뭐 이상한 거라도 한 건 아니였으면 좋겠는데. 그런 생각하고 있던 나에게 레무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저기... 크리샤클레오시여. 이제 저는 돌아가도 되겠습니까?"
"아, 그래. 수고했다."
우물쭈물, 나를 보며 그렇게 묻는 레무르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여기까지 왔으면 길을 안내해주기 위해 따라온 레무르는 더 이상 필요 없었다. 레무르 또한 당장 돌아가고 싶어 하는 듯 하고.
나는 생긴 것과 다르게 바짝 굳어있는 레무르를 바라봤다. 레무르가 이렇게까지 빨리 돌아가고 싶어 하는 이유는 별 거 없었다.
크리샤의 허락도 없이 여기에 온 것이 첫 번째였고, 두 번째는 아리스에 대한 것을 내게 꼬발렸기 때문이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크리샤는 나한테서 아리스에 대한 것을 숨기려고 했던 모양이었다. 처음에 아리스에 대한 걸 알려달라고 했던 내 말에 정직하기로는 둘째가면 서러운 종족인 드워프, 레무르가 거짓말까지 해가며 발뺌하기까지 했고.
문제는 내가 아무것도 모른 채였다면 속아 넘어갔을지는 몰라도, 아무것도 모른 채로 온게 아니란 거였다.
더군다나, 나 혼자서만 간 것도 아니었다.
곁에 있던 에루나와 에네스타의 도움으로 레무르의 입을 벌리게 한 나는, 아리스가 이곳, 테 베르나에 있다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내게 고해바치게 된 레무르는 크리샤로부터 받을 벌때문인지 지금까지 영 안색이 좋아 보이지 않은 거고.
뭐, 죽지는 않을 거다. 크리샤가 조금 큰 벌을 준다 싶으면 내가 변호해주면 될 테고.
나도 크리샤에게 할 말은 있었으니까.
어째서 내게 아리스에 대한 것을 숨겼는지 라던가...
크리샤가 아리스에 대한 것을 숨기는 이유도, 또 에루나가 그런 아리스와 만나야한다고 한 이유도 아직 모르겠지만, 그건 나중에 듣기로 하고서.
나는 레무르에게 물었다.
"저기에 아리스가 있다는 거지?"
"예, 다른 인간들은 크리샤네아님께서 기억을 조작해서 인간들의 나라로 되돌려 보냈지만, 그, 아리스라는 이름의 인간 여자는 저곳에 가둬두라고 하셨습니다."
내 말에 긍정하는 레무르를 보고서. 나는 옆에 있던 에루나에게 말했다.
"에루나. 레무르를 천공성에 데려다줘."
"제가 가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여러모로 약화된 에루나로써는 공간이동을 하루에 두 번 정도 사용하는 게 고작이었다. 여기 오는데 한 번, 가는데 또 한 번이면 끝이라는 소리였다.
즉, 지금 에루나가 레무르를 도로 천공성으로 데려다주기 위해서 공간이동 마법을 사용하면 하루 동안은 에루나의 도움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에네스타도 있으니까 상관없어."
하지만 딱히 문제는 없었다. 내 곁에는 에네스타가 있으니까. 그리고 그 말에 에루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에루나 역시 에네스타가 있으면 괜찮다고 여긴 모양이었다.
그런 내 말에 조금 감동받은 얼굴로 나를 보는 에네스타의 시선이 부담스러웠지만.
이제 더 이상, 전처럼 발정이 나서 달려드는 것도 아닌데 저렇게 쳐다보면 무척이나 부담스러웠다.
음마라는 종족 특성상, 처음으로 누군가와 살을 섞고자하는 충동을 느껴서 그렇게까지 미쳐 돌아갔다는 걸 알게 된 지금도 저렇게 쳐다보면 어제 있었던 일이 떠올라서 그런지 무심코 피하고 싶어진다고 해야되나...
하지만 지금은 에네스타의 도움이 필요했다.
“에네스타. 부탁하마.”
그런 내 말에 에네스타가 고개를 끄덕이고서, 한층 더 부담스러운 시선을 보내왔다.
여느 때와는 달리, 은색으로 빛나는 갑옷으로 풀무장한 에네스타가. 눈만 드러난 투구를 쓴 채로 그렇게 보고 있자니 무심코 뒷걸음질 치고 싶었다. 저러고 달려들면, 나는 꼼짝도 못하고 당하겠지...?
아, 참고로 꼬리랑 날개는 갑옷 밑에 둘 수 없어서 흉갑과 그레이브즈가 마개조된 상태라서 등 뒤로 악마의 그것을 닮은 날개와 꼬리는 여전히 드러나 있었다.
그만큼 갑옷을 떼어냈으니 방어력이 떨어지는 게 아닐까 싶었지만... 그런 걱정은 없었다. 그만큼 마법으로 때웠으니까.
노출도와 방어력이 비례하는 게임 속의 갑옷의 비밀을 알게 된 기분이었다.
아무튼.
원래부터 검주 중에서도 상위권에 위치한 에네스타는 음마, 그것도 음마의 여왕이라는 종족으로 탈바꿈하면서 이전보다 훨씬 강해져 있었다.
그런 에네스타가 곁에 있는 이상 무슨 일이 일어날 리가 없었다. 아리스가 조금 강하긴 했지만, 에네스타가 제압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였다. 이전에도 그랬고, 그보다 더욱 강해진 지금은 더더욱 그랬다.
내가 에네스타한테 덮쳐지면 덮쳐졌지, 아리스한테서 무슨 일을 당할 리가 없다는 거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서, 공간 이동으로 레무르를 데리고서 천공성을 돌아가는 에루나를 배웅하고서.
나는 아리스가 있다는 오두막을 향해 걸어 들어갔다.
똑똑...
혹시 몰라서 오두막 앞에 도착한 나는 노크를 해봤다.
하지만 안에서는 아무런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설마 안에 없는 건가 싶었지만, 아무리 모양은 오두막이더라도 감옥이었다. 그것도 크리샤가 직접 뭔가 해둔 감옥. 크리샤가 무언가 손을 쓴 이상, 아무리 검주라고는 해도 아리스가 저곳에서 나올 방법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안에 아무도 없을 리는 없다는 건데.
혹시 다른 이유에서 아무런 말도 못하는 건가 싶었다. 예를 들어, 안에서 무슨 일이 있어서 의식을 잃었는데, 그대로 방치됐었다던가.
그런 생각이 미친 나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때였다.
쉭, 하고 무언가가 내게 날아오고. 내 몸이 순식간에 뒤로 당겨졌다. 그리고, 내게 날아온 그것을 향해, 에네스타가 검을 휘두르는 것이 보였다.
캉!
금속끼리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에네스타의 검에 가로막힌 포크가 튕겨나가는 것이 보였다.
웬 포크?
튕겨나가는 포크를 보며 그렇게 생각했을 때, 후웅하고 그런 에네스타를 향해 돌진해오는 형상이 보였다.
발목에 이상한 사슬을 달고 있는 소녀가.
아리스였다.
내 배때기에 칼빵을 먹였던 검주이자, 한나를 꼭 빼닮은 소녀. 그리고 나를 향해, 다른 손에 들고 있는 포크를 뻗어오는 중인 검주.
그리고 그런 검주, 아리스의 손에 들린 포크를 미약하게 감싸고 있는 투기가 보였다.
저거라면 찔린다면 조금 아플 것 같은데...
찔리지는 않겠지만.
“에네스타. 붙잡아.”
“네, 나의 주.”
내 명령에 에네스타가 달려드는 아리스를 향해 손을 뻗었다. 잡으라는 말에 철저히 따라서. 검이 아닌 맨 손으로 뻗쳐나오는 에네스타를 향해, 아리스가 투기가 둘러진 포크를 휘둘렀다.
그리고.
뿌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에네스타에게 포크를 찔러오던 아리스의 몸이 팔 째로 들어 올려져서, 그대로 땅에 꽂히는 것이 보였다.
그 위를 에네스타가 몸으로 짓누르며 내게 물었다.
"나의 주. 이제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그 뒤는 별 생각 안했는데. 에네스타가 아리스를 제압하는 동안 생각해둘까 싶었는데, 순식간에 제압당해서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아, 그리고...”
그리고 그런 나를 보며, 에네스타가 여전히 아리스를 짓누른 채, 몸을 배배꼬며 말했다.
“그, 실례가 아니라면... 나중에 이 일에 대한 포상을 기대해도...”
그 모습에 아리스보다 에네스타랑 같이 있는 게 더 위험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