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3화 〉193화
“부르셨나요? 주인님.”
“아, 마야 왔구나. 니아는 보고 왔어?”
“네, 조금 걱정스러웠는데... 생각보다 잘하고 있는 것 같아서 다행이었어요.”
영지 순찰이라던가, 치안 쪽의 일을 니아가 하고 싶다고 했을 땐 걱정이 많았는데 생각보다 잘하고 있다는 소리를 들으니까 안심이었다.
아직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고, 니아와 함께 보낸 바록과 바쿠도 니아에게 뭔가 시키지도 않았을 테니 무슨 일이 생기는 게 더 이상하겠지만.
그보다 마야보다 나이가 많은 니아인데 오히려 걱정하는 쪽이 마야라는 것이 조금 아이러니했다.
뭐, 꼭 언니인 쪽이 항상 믿음직스러워야한다는 법은 없었다. 걱정한다는 건 그만큼 서로 사이가 좋다는 뜻이니 좋게 받아들이기로 하고...
“그럼, 미안하지만 그릇 좀 치워줄래?”
도중부터 식사는 둘째친 나머지 식은 요리들로 가득한 식탁을 가리키며 그렇게 말했다.
“네... 그런데, 아르카네아님은...?”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던 마야가 두리번거리더니 아르카가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서,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몸이 안좋아져서 방에서 쉰다더라.”
“그런... 괜찮으신 건가요?”
“응, 너무 빨아서 그런 거니까 걱정 마.”
“빨아서, 요?”
말실수했다.
내 말에 의아해하는 마야를 보고서 서둘러 말했다.
“별 거 아니란 소리야.”
여전히 잘 이해가 안되는 모양인지, 고개를 갸우뚱하는 마야였지만. 그래도 내 말에 그런가요, 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마야가 보였다.
아무쪼록, 부디 이렇게 바르게 자라줬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그나저나... 시녀장님께 연락이 왔었어요.”
“에루나한테? 뭔데? 크리샤의 일이야?”
덜컥, 에루나에게서 연락이 왔다는 말을 꺼낸 마야 덕분에 머릿속에 든 생각은 크리샤에 대한 것들이었다.
크리샤의 곁에 굳이 에루나를 둔 이유도 그거였기 때문이었다. 아직 불안정한 크리샤를 홀로 두고 오는 것이 불안해서, 당분간은 에루나가 지켜봐달라고 부탁한 거였으니까.
임신했을 때 주의할 점이러던가를 가르쳐주라는 명목으로, 사실상 보호를 부탁한 셈이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동안 그녀가 내게 얼마나 의존했는지는, 그녀의 곁에 있던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같이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들수록, 그녀가 아이에 그토록 집착했던 이유도 바로 그거였으니까.
혹시라도 그녀에게, 그리고 뱃속의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긴건가 싶어서 덜컥 겁이 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하루 만에 큰일이 날거라곤 생각할 수 없었지만... 혹시나라는 것이 있는 법이었다.
언제나 불행이란 녀석은 가장 가까운 곳에서 느닷없이 찾아오는 법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조치를, 에루나를 곁에 붙여주었다고 해도 마냥 안심할 수 없었다.
“아뇨, 자세한 건 저도 잘... 이것만 제 앞에 갑자기 나타난 거라서...”
그렇게 말하며 마야가 내게 건넨 것을 받아들었다.
“수정구?”
한 손에 가득 들어올 정도의 크기의 작은 수정구였다. 그것을 손에 쥐고서 마야를 바라봤다.
“주인님께 전달하라는 쪽지와 함께 왔던 것이에요.”
일단, 크리샤의 일은 아닌 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해보면 애당초 크리샤에게 문제가 생긴 거였다면 이런 식으로 말을 전하는 게 아니라 에루나가 직접 내 앞으로 왔을 테니까 내가 너무 지나치게 걱정한 거였을 뿐이었다.
그렇다면... 이게 뭔가 하는 건데.
손에 든 수정구를 보며 그런 생각을 하다가 혹시나 싶어서 마력을 조급 주입해봤다.
내 예상이 맞았는지 마력을 부어넣는 것과 동시에 우웅 하고 자그맣게 떨리는 수정구가 보였다.
일단 마도구, 라는 것 같은데. 대체 무슨 마도구인가 싶었던 내 눈에, 수정구가 비쳐 보이는 영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둥실하고 떠오른, 살색의 둥그스름한 것이.
“......”
눈앞에 비쳐 보인 광경에 마야가 보기 전에 냉큼 품에 집어넣었다.
“...주인님?”
일련의, 수상쩍기 그지 없는 거동을 지켜본 마야가 이상하다는 듯이 나를 보고 있었다. 그런 마야에게 말했다.
“아니, 별 거 아니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그보다... 갑자기 중요한 용건이 떠올랐으니 먼저 일어나마.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아뇨, 제가 해야 할 일이었으니까 괜찮아요.”
고개를 저으며 그렇게 말하고서, 나를 배웅해주는 마야를 뒤로하고서 누가 볼새라 서둘러 방으로 돌아왔다.
에루나가 없는 지금, 이곳에서 가장 안전한 장소. 내 개인 침실에 도착한 나는 주변을 살폈다.
가장 안전하다고는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이야기였다.
이렇게 내 침실에 있더라도, 느닷없이 옆에서 나타날 수 있는 녀석은 에루나 말고도 더 있었으니까.
감각을 펼쳐서, 주변을 확인했다.
에네스타라던가, 로로라던가. 주변에서 느껴지지 않는 요주의 인물들의 기척을 확인하고서야.
품에 넣어두었던 수정구를 다시 꺼내들었다.
수정구는 그새 마력이 다했는지 평범한 수정구로만 보였다. 문제는 마력을 불어넣었을 때, 이 수정구에 비쳐지는 광경이었다.
겨우 1초 남짓한 순간 본 것뿐이지만, 그 순간에 본 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있었다.
가슴.
그렇다, 가슴이었다.
하지만 대체 누구의 가슴인가 묻는다면 도저히 대답할 수가 없었다.
에루나가 보낸 것이니만큼 가장 유력한 후보자라면 크리샤가 있겠지만... 미안하지만 크리샤의 가슴은 방금 본 가슴보단 작은 편이었다.
크리샤의 가슴을, 아무리 그녀를 사랑하는 남편의 눈으로 봐준다고 하더라도 작은 건 작은 거였으니까.
한두 번 본 가슴도 아니니까 확실했다. 크리샤의 가슴은 명백히 방금의 가슴보단 작았다. 중요하니까 한 번 더 말하지만, 작았다.
그렇다고 아주 없다는건 아니지만.
가슴이라고 할 수 있는 수준에서, 조금 더 나온 정도니까 작다고 할 수도 없지만. 크리샤에겐 미안하지만 가슴에 한해서는 절대 강자인 루시아의 가슴을 본 내게 있어서는 작아보일 수 밖에 없었다.
아무튼 크리샤의 가슴은, 아니 크리샤는 용의자에서 제외하자, 용의자라고 할만한 게 에루나밖에 없었다.
내가 크리샤를 부탁한 와중에 이런 짓을 거뜬히 벌일 수 있는 녀석이기도 하고 말이다.
하지만 에루나의 것이라곤... 예전의 에루나라면 작아서 아니고 지금의 에루나라고해도 너무 커서 아니었다.
그러니까, 방금의 가슴은 크리샤의 것보단 크지만, 루시아는 커녕 마야에도 미치지 못하는… 실로 평범하기 그지없는 가슴이라는 거였다.
형태라던가, 가슴과 가슴 사이의 간격이라던가는 예술가가 조각해놓은 것처럼 완벽한 비율이었다.
좋은 가슴이였다는 소리였다.
아무튼 좋은 가슴이었다는 건 둘째치고, 누구의 가슴인지는 도통 알 수 없었다.
그야말로 난제, 알 길이 없는 가슴이었다.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 쪽은...
“카르네인데.”
내가 본 가슴 중에서 방금 본 가슴과 가장 비슷했던 것은 아마 카르네였다.
옷 너머로 본 것뿐이었으니 다소 오차는 있겠지만 말이다.
보는게 아니라 만져본거라면 확실히 알 수 있겠지만. 수정구 너머로 비친 것을 만져볼 순 없잖는가. 거기에 봤다고는 했지만 겨우 1초 남짓정도였고.
게다가 카르네의 가슴이 느닷없이 왜 수정구에 비쳐 보이는지 그 까닭을 알 수 없었다.
애초에 에루나가 있는 곳은 크리샤의 영지였지 카르네의 영지가 아니었다.
“...확인해보면 되겠지.”
그랬다.
확인해보면 그만이었다.
확인하면 가슴의 주인이 누구인지, 궁금증을 해결할 수 있었다.
손에 쥔 수정구를 바라봤다.
마력만 흘려보내면, 그것만으로도 진실을 알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가슴을 볼 수 있었다.
안 볼 이유가 없었다.
보지 않을 생각도 없었다.
우웅, 하고. 손에 쥔 수정구에 마력을 불어넣자 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우…"
천국이 눈앞에 강림했다.
《오직 한사람의 준비된 시종, 에루나 투아레.》
"에루나~ 정말로 안들어올거야?"
주인님께 전했던 마도구가 다시 작동하기 시작한 것을 느끼며, 에루나는 옆에서 그렇게 말을 걸어온 소녀를 바라봤다.
태어났을 때의 모습 그대로, 바위에 걸터앉은 채 두 다리를 까딱거리며 물장구를 치고 있는 소녀, 아샤 아가씨가 잔뜩 뾰루퉁한 얼굴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그런 아샤 아가씨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새하얗고 작은 손이 시녀복의 끝자락을 붙잡았다.
"이렇게 다들 모인 것도 모처럼인데, 에루나도 같이 씻자. 응? 옛날처럼!"
천천히, 그런 아샤 아가씨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다 모였다고 하기엔 아르카 아가씨는 없지 않습니까?"
"응, 뭐 그건 그렇지만… 뭐, 어때? 그런 자잘한 건 신경쓰지말구, 어서~"
어린아이처럼, 시녀복을 당기며 그렇게 졸라오는 아샤 아가씨를 보면서 에루나는 생각했다.
'...지금의 아샤 아가씨를 안는 건 주인님께서도 거부감이 드실 테죠.'
주인의, 이지경의 이상한 곳에서 엄격한 성벽을 떠올렸다.
다른 건 몰라도 아이에게만큼은 전혀 반응하지 않는 이지경을 말이다.
만약을 대비해서 낙스에서 엄선해왔던, 생김새도 성격도 제각각이었던 아이들을 주인인 이지경이 전혀 손대지 않았을 때는 그저 그러려니 했었다.
주인인 이지경은 인간이었고, 낙시안인 그 아이들에게 거기까지 바랬던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저 잘되면 그만이다라는 정도에 불과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오히려 마치 자식처럼 그들을 대하던 이지경을 봤을 때는... 세계가 다르다는 것이 얼마나 큰 차이점을, 얼마나 큰 간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인지 실감했다.
하지만 그런 이지경 역시, 자신이 모셔야할 주인이었다. 주인의 뜻을 존중하고, 그를 따라야하는 것이 시녀로서의 책무였다.
'하지만…'
여전히 어리기만한 아샤 아가씨를 보자니 걱정이 앞섰다.
외견은 둘째치더라도, 아샤 아가씨의 경우에는 속마저 완전히 어린 아이 그 자체니 말이다.
주인님이라면 그런 아샤 아가씨나, 그보다 조금 조숙하고 장난끼가 많은 수준인 아냐 아가씨와 살을 섞어 아이를 만들기는커녕, 둘의 장난에 어울려주면서 시간을 보낼 것이 분명했다.
'이런 몸이 되고 나서부터는 제가 아무리 유혹하더라도 반응하지 않으셨으니 말입니다.'
이전에 밤중에 알몸으로 찾아온다거나 했을 때에도. 지금도 거절했던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혼과 혼으로 이어진 주인, 이지경의 심정을 에루나가 헤아리지 못할리가 없었다.
이전에는 그렇게 거부하더라도 동요가 엿보였던 것이다. 지금은…
'……'
그저 의미없이, 고개를 숙였다. 이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발끝이라던가가, 훤히 보였다.
그때랑 달리, 시야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가슴이 없기 때문이었다.
별 의미없이 평평해져버린 가슴을 노려보던 에루나는 고개를 들어 다시 아샤 아가씨를 바라봤다.
"응? 왜 그래? 에루나."
천진난만하게 고개를 갸웃하며 그렇게 묻는 아샤 아가씨가 보였다. 태어나고서부터, 벌써 수십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어리기만 한 아가씨가.
그 영혼만이 아니라, 몸매마저.
지금의 자신보다 더.
'…가장 중요한 것은, 주인님과 아가씨들. 잊지마십시오, 에루나. 저는 그 다음이면 족합니다.'
어쩌면 그보다 더 뒤로 밀릴 수도 있었다.
이제 주인님의 곁에는, 오직 자신만이 있는 것이 아니였다.
이지경이 딸처럼 여기는 로로와, 니아, 마야. 역시나 자식처럼 여기는 바록과 바쿠, 슈슈가 있었다.
이유야 어찌됐건, 살을 섞고 정을 나눈 에네스타와 에오시스 자매들도 있었다.
더욱.
더욱 많은 이들이 점점 늘어나서, 주인님의 곁을 지키게 될지도 몰랐다.
'그래도 저는 언제나, 당신을 위한 시녀입니다.'
오직 그것만을 위해 존재해왔다.
단 한 명.
단 한 사람을 위해서.
자신은 그저 그뿐이면 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