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화 〉195화
“오랜만이네요, 에루나. 당신이 꾸짖는 모습을 보는 것은.”
그렇게 말한 루시아 아가씨가 희미하게 미소를 띤 채로 보란 듯이 다리를 꼬며 말했다.
“그래서, 에루나. 할 얘기가 있어 보이는데... 무슨 일인가요?”
새하얀 살결의 탄탄하지만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는 허벅지와 다리가 아슬아슬한 간격을 그리며 교차했다.
다리와 다리 사이로 보일 듯 말듯하다 끝내 보이지 않는 것이 요부나 할 법한 몸짓이었지만... 당연히 그것이 자신을 향한 게 아니란 것쯤은 알 수 있었다.
명백하게 자신이 벌이고 있는 일을 눈치 채고 있는 듯한 루시아 아가씨를 보며 입을 열었다.
“한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루시아 아가씨께도, 그리고... 크리샤 아가씨께도.”
“...나한테도?”
조금 멀찍이서 다리만 담군 채 온천을 즐기고 있던 크리샤 아가씨가 자신을 가리키며 그렇게 말하자, 에루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자신을 보면서 루시아 아가씨가 입술을 열었다.
“질문이라... 에루나, 당신에게 질문을 받는 날이 오긴 오는군요.”
“과거와 달리 아가씨들 역시 성장하셨으니 말입니다. 아직은... 멀으신 분들은 계십니다만.”
“아샤나 아냐는 특별하니까요. 둘은 둘이서 하나, 힘도, 지식도 둘로 나뉘어져서... 둘로서 온전하니까요. 오히려, 본래 드래곤이라면 저희 또래들은 모두 저 둘과 같은 게 정상 아닌가요?”
비정상적인 것은, 오히려 자신들이 아니냐고. 그렇게 묻는 루시아 아가씨를 바라봤다.
수천년을 살아가는 드래곤의 일생으로 따지자면, 알에서 부화한지 이제 겨우 100년도 채 지나지 않은 자신들이, 벌써부터 하나의 드래곤으로써의 몫을 하고 있는 것이 더 이상한 것이 아니냐고, 그렇게 자조 어린 농담을.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본래 드래곤이 어릴 적은 어쩐지 몰라서 말입니다.”
에루나는 그저 모른다고 대답했다.
정말로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대답했다.
그 말에, 쿡쿡하고 미소 지은 루시아 아가씨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질문이 뭔가요? 저랑 크리샤에게 묻는 거라면, 이지경님에 대한 일인가요?”
말해보라는 듯이 그렇게 말하는 루시아 아가씨를 보고서, 고개를 돌려 크리샤 아가씨를 바라봤다.
“글쎄, 별로 상관없으니까 얼마든지 물어보던가? 그 바보의 일이라면 나랑도 관계있으니까.”
사랑스럽다는 듯이, 하지만 여전히 조심스레 배를 어루만지며 그렇게 말하는 크리샤 아가씨를 보고서, 둘의 의사를 확인한 에루나가 입을 열었다.
“서운하시지는 않으십니까?”
아주 짧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서운하다니요?”
“...대체 뭐가 서운하다는 건데?”
그리고 그 짧은 침묵을 두 사람의 목소리가 깨며, 그렇게 물었다.
말이 겹친 크리샤 아가씨와 루시아 아가씨가 서로를 보고서는 무안하다는 듯이, 고개를 돌리는 것이 에루나의 눈에 비쳐보였다.
그런 둘을 보면서 에루나는 말을 이었다.
“주인님께서, 따로 아가씨들께 연락을 취하지 않는 것이 서운하지는 않으십니까?”
“잠깐, 에루나. 그건...”
크리샤 아가씨가, 그런 나에게 뭐라고 하기도 전에. 루시아 아가씨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갑자기 너무 아픈 곳을 찌르는 게 아니에요? 에루나.”
“죄송합니다.”
갑작스런 질문이란 것은 알고 있었다. 바로 얼마 전까지도 주인님과 함께 있던 크리샤 아가씨는 몰라도, 그보다 더 오랜 시간 떨어져 있었던 루시아 아가씨에게 있어서는 겨우 아문 상처를 찢는 듯 한 행위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또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걸 물어볼 수 있는 것 또한 지금 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더욱 뜸을 들인다면, 더더욱 말할 수가 없어질 테니까. 그렇게 되면 더더욱 바뀌기 힘들어지게 된다.
그러니까. 그저 고개를 숙이고서, 말을 기다렸다.
그리고, 귓가에 루시아 아가씨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 드세요, 에루나. 당신에게 사과 받을 생각은 없으니까요. 그리고 그 질문의 대답은...”
그 말에 고개를 든 에루나가 빤히 바라보자, 큼 하고, 헛기침을 한 루시아 아가씨가 말을 이었다.
“뭐, 전혀 아니라고는 할 수 없겠죠. 저에게 이런 감정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지만요. 정말로, 정말로요.”
살짝 얼굴을 붉히며 그렇게 말하는 루시아 아가씨를 보고서.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까.”
“...너무 차가운 반응인걸요? 에루나.”
“아뇨, 무척이나 감동하고 있습니다. 과연, 저의 주인님. 루시아 아가씨의 마음을 단단히 사로잡았구나, 하고.”
표정 자체의 변화가 적은 것뿐이었다.
“사로잡다니, 뭐... 틀린 말은 아니긴 하지만요... 그러니, 상관없지만... 그, 너무 빤히 보지는 말아주실래요?”
자신이 보고 듣고 있는 광경을, 이지경이 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루시아 아가씨가 뒤늦게 부끄러워진 듯이 그렇게 말했지만 고개를 저었다.
굳이 주인님께 수정구를 통해서, 지금의 모습들을 보여주는 것은. 아가씨들의 모습을 보이기 위해서였다.
루시아 아가씨나, 크리샤 아가씨의 경우에는 근황보고를 겸하기도 하고. 그 외의 아가씨들의 경우에는 앞으로 주인이 어떤 방식으로 아가씨들을 대해야할지에 대한 힌트가 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까, 볼 수 있는 것은, 전할 수 있는 것은 전부 전할 생각이기에 아무리 루시아 아가씨의 말이라도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런 확고한 거절에 루시아 아가씨는 쓴웃음을 지으며, 그런가요, 하고 넘어가고서 이윽고 한숨을 내뱉으며 말을 이었다.
“뭐, 싫다면 어쩔 수 없죠... 제가 당신에게 뭐라고 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요. 아무튼... 전혀 서운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거짓말이겠지만, 후회는 하지 않아요. 알고 있겠지만, 저희들은 모두 질투심이 많잖아요? 만약 이지경님이 크리샤와 함께 있는 동안에도 저와 연락을 계속했더라면...”
그렇게 말하며 루시아 아가씨가 크리샤 아가씨를 바라봤다.
“왜 그렇게 쳐다 봐? 내가 뭔 짓이라도 벌였을 까봐?”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고요? 당신이 전에 뚫어놓은 온천 때문에, 그거 수습하느라 얼마나 고생한 줄은 알고 있어요?”
“온천 뚫어줘서 고맙다고 한 건 언제고?”
“그거야 당연히 그렇게 말하면 좋아할 테니 그런 거고요.”
다시 으르렁거리는 둘을 보고 있자니, 시선을 느꼈는지 서로 큼, 하고 고개를 돌리는 것이 보였다.
“아무튼... 크리샤, 당신도 할 말은 없잖아요?”
“그건... 뭐.”
결국 이대로 가면 한참 맴돌 뿐이라고 생각해서인지, 루시아 아가씨가 그렇게 먼저 말을 건네자 크리샤 아가씨도 부정하지 않는지 말을 잇지 못했다.
사실 이미 크리샤 아가씨에겐 전적도 있었다.
아직 스스로의 감정을 제대로 깨닫지 못한 상태였을 때, 주인님이 관심을 보였던 인간, 지금은 주인님의 시녀가 된... 아리스를 죽이려들었던 것이 크리샤 아가씨였으니 말이다.
그때는 미리 막아냈기에 망정이었지, 조금만 뜸을 들였더라면...
아마 지금과 같은 결과는 없었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런 크리샤 아가씨의 반응을 보고는, 루시아 아가씨가 피식하고 웃으며 말했다.
“할 말 없죠?”
“너, 진짜. 내가 가만히 있으니까...”
“뭐, 저 역시 반대의 입장이였다면, 그러지 않는다고 확신할 수 없으니까요. 당신을 탓하는 게 아니에요, 크리샤.”
그렇게 말하고서, 루시아 아가씨가 말을 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필요한 거에요. 아무리 저라도 아니라고 확신할 수 없어요. 저희에게 있어서, 이지경님은 그런 존재에요. 몰랐더라면 문제없더라도, 알게 되면 돌이킬 수 없어요. 지금처럼, 약간의 제한을 두어야만 이지경님과 거리를 두어야만 자중할 수 있겠죠.”
그래, 필요하니까. 어쩔 수 없으니까. 그래야만 하니까 하는 것이다.
그건 에루나 자신도 인지하고, 납득하고 있는 사실이었다.
자신뿐만이 아니라, 이미 주인님과 살을 섞고. 정을 통하고. 끝내 주인님을 사랑하게 된 루시아 아가씨도, 크리샤 아가씨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됩니다.”
“...안된다고요?”
“네. 안됩니다.”
고개를 끄덕이고서, 자신의 말에 되묻는 루시아 아가씨에게 그렇게 확언했다.
그래서는 안된다고.
그래서는 여전히 불안을 남긴 채로, 끝내 풀리지 않은 채로 고이기만 할 뿐이란 것도 알고 있는 사실이니까.
이번의 사태로 모인 아가씨들에게, 주인님의 것을 본뜬 것을 걸고 내기를 제시했을 때부터. 이미 그 불안의 낌새는 엿보였다.
크리샤 아가씨도, 루시아 아가씨조차도, 주인님의 빈자리를 의식하고 있었다.
단순히 흉내만 냈을 뿐인 장난감에 불과한 물건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것부터 정상적인 드래곤의 모습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겉으로는 태연하게 있을 수 있더라도, 이미 사랑을 알아버린 드래곤들은 더욱 더 갈구하게 될 게 분명했다.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은, 아무리 저항하려하더라도 불가능한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자신은 알고 있었다.
완벽하다고 자신하고, 그렇다고 말하는 드래곤이었지만 그들이 유독 약해지는 구석이 있다는 것쯤은.
스스로를 희생하는 것에도, 자신의 심장을 뽑는 것에도 망설임 없는 이들이, 유독 사랑의 앞에서는 쉽게 무너진다. 쉽게 미쳐버린다.
그것이 드래곤이었다.
가장 강한 생물이고, 가장 여린 존재였다.
그래서는 안됐다.
주인님을 위해서라도, 아가씨들을 위해서라도.
이대로 가면, 자신과 똑같았다.
녹이 슬게 될 것이다.
결국에는 무너지고 말게 된다.
그래서 말했다.
“지금은 괜찮을 지도 모릅니다. 아니, 앞으로 몇 년 동안은 괜찮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문제가 터지겠죠. 주인님은 한 사람뿐이고, 그런 주인님을 아가씨들께서 공유한다는 것은 그런 거니까요.”
하나를, 온전히 하나로써 만족하는 드래곤이.
탐욕적이고, 독선적이고, 이기적이고,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그녀들이. 애당초 하나뿐인 주인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런 것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란 건데? 에루나. 그런 건 나도, 루시아도 알고 있는 거야. 하지만 방법이 없잖아?”
대답이 없는 루시아 아가씨를 보다 못했는지 크리샤 아가씨가, 나에게 그렇게 말했다.
방법이, 없다.
그 말 역시 맞았다.
애당초, 정해진 미래는 그런 거였다.
본래 자신을 제작했던 드래곤들은, 아가씨들의 어버이이자, 선대의 드래곤들은 이미 파멸할 예정인 미래를 상정하고, 주인님을 희생시키려 했다.
마법진에서 소환될 주인님께, 저주를 남겼다.
흡정귀로 만들어 이지를 잃게 만들고, 그저 성욕에 미친 괴물로 만들려고 했다.
그렇게 아가씨들과 살을 섞어, 마력을 흡수해서 조건이 충족되면... 마룡으로 다시 태어나서, 그저 아이를 만들기 위한 ‘도구’로써 사용하려고 했었다.
그런 미래였더라면... 아가씨들이 주인님을 사랑하게 되는, 지금과 같은 일은 없었을 것이었다.
아가씨들이, 이지도 이성도 없는 괴물을 사랑하게 될 일은 없을 테니 말이다.
그렇다면, 지금과 같은 고민을 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희생되는 것은 오직 주인님, 한 분만으로 이 세계는 안정되었을 것이다.
그것을 자신이 무너뜨렸다.
주인을 위해서.
그러니까, 이번의 일 또한 자신이 책임져야했다.
주인을 위해서, 그리고 아가씨들을 위해서.
입을 열었다.
“있습니다.”
“...있다고? 뭔데?”
딱 잘라서 단언한 말에 크리샤 아가씨와 루시아 아가씨가 나를 바라봤다.
그런 둘을 보며,
골렘은, 오직 한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시종은,
“드래곤들의 안배.”
본래는 저주로써 존재했던 것.
본래는 주인님을 희생하기 위해 존재했던 것.
선대 드래곤들이 남긴, 거대한 저주임과 동시에... 그들이 남긴, 거대한 유산.
“선대 드래곤들이 남긴 것을, 주인님께서 온전히 취하시면 됩니다.”
본래, 주인님을 마룡으로 만들기 위했던, 하지만 동시에... 드래곤 하나를 만들어낼 정도의 고도의 술식과, 어마어마한 마력을 가지고 있는 보물.
드래곤들마저, 그저 매개체로밖에 사용하는 방법을 모르는, 고대의 유산.
원래는, 이것을 자신이 숨기고 있을 생각이었다.
사용할 수 있는 방법도 없었다.
설령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파멸만이 있을 뿐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그런 자신의 예상을 주인님은 깨버렸다.
오른쪽 눈과, 깨지고서 자신의 심장으로 대신하게 된 심장에.
그곳에 자리 잡은 두 개의 물건을, 주인님께서 온전하게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휘둘리거나 하는 일도 없이. 다루는 것을 보게 됐을 때 확신했다.
주인님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뚜둑, 하고.
에루나는 품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꾸욱, 하고 밀어넣자 살갗을 찢고서. 가느다란 손가락이 파고들어갔다.
깊숙한 곳.
자신의 몸 깊숙한 곳에 심어넣은 물건이, 손가락 끝에 닿자. 망설임 없이 그 조각을 끄집어냈다.
“...에루나, 너...”
“어떻게, 그걸...”
그런 자신을, 정확히는 손에 들고 있는 조각을 보며 놀라는 두 아가씨를 보며, 입을 열었다.
“신들이 남긴, 편린을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