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3화 〉243화
처음에는 아무도 없는 줄 알았다. 사람 높이만한 서류들이 책상 위로 잔뜩 쌓여있을 뿐, 아무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종이 너머로 사각사각, 하고 펜을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렇다. 사람 높이만한 서류들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았을 뿐이지, 분명 이 산더미 같은 서류 너머로는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여기... 베헤모아의 중심지에 위치한 이곳에 있는 사람이라고는 뻔했다.
“슈슈인가요? 오늘은 일이 별로 없다고해서 게으름부리다가는 하루 종일 끝내지 못할 거에요?”
서류 너머로 내가 누구인지 마찬가지로 가로막혀 보지 못한 아리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를 슈슈라고 생각했는지 농담하듯 말을 건네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조금 따스했다.
항상 나만 보면 털을 잔뜩 곤두세우고 하악거리는 고양이마냥 굴던 아리스에게서는 듣지 못했던 목소리였다.
나 때랑은 달리 동료의식이라던가, 동질감, 혹은 같은 고생을 하고 있는 사람사이의 유대, 뭐 그런 것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하긴 그럴 만도 했다.
지금 내 눈에 비쳐보이고 있는, 이 산더미같은 서류들이 베헤모아의 관리를 위해 처리해야하는 일이라는 것은 대충 바닥에 흩어져있던 서류 몇 개를 보고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하루에 매번 이 정도씩, 아니 그나마 이게 적은 편이라면... 매일 이보다 훨씬 많은 일들을 슈슈와 같이 처리해왔으니 당연히 동료의식이 싹틀 만 했다.
아니 이 정도라면 없던 정마저 싹틀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아마 철천지원수사이인 사람 둘을 가둬다가 이 일을 시키다보면 금새 어깨동무할 정도로 친해질 정도로.
무려 20만이 넘는, 아무리 작다고는 해도 도시급의 크기인 베헤모아에서 하루 동안 일어나는 일들은 그만큼, 실로 살인적인 양이였다. 아리스와 슈슈, 단 둘이서 처리하고 있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덕분에 얼마나 흉악한 짓거리를 둘에게 시키고 있었던 건지 새삼스럽게 알게 된 나는 침묵했다.
그야말로 마왕이나 할 법한 짓거리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버렸기 때문이었다.
...아리스랑 슈슈에게 떠넘기지 않았더라면 내가 하고 있었을 일들이지, 이거?
생각보다 마왕 소리를 듣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은 일인 것 같았다.
이런 일을 떠넘겨도 마왕이니까 대충 넘어가고, 악명이 오른다고쳐도 오히려 내겐 능력치가 오르는 일이 될 뿐이었다.
“슈슈?”
대답이 없는 것을 의아해하며 서류 너머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던 아리스가 나를 보고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는 것이 보였다.
그런 아리스를 향해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다, 아리스.”
“어째서 당신이 여기에 있는 거죠?”
나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을 일으켰던 아리스의 밑으로 후두둑하고 책상 위로 쌓여있던 서류들이 엎어져 떨어졌다. 하지만 그런건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나를 바라보며 그렇게 묻는 아리스에게 말했다.
“내가 내 영지에 온 게 그렇게 이상한 일인가?”
정론이었다. 내가 내 영지, 하물며 집 앞마당이나 마찬가지인 곳으로 나왔을 뿐인데 왜 여기에 있느냐고 묻는 아리스가 이상한 거였다. 하지만 그런 내 말에 더더욱 경계심으로 가득한 눈으로 나를 보는 아리스가 보였다.
그게 이상한 일이거든요? 하고 묻는 듯한 시선이었다.
알고 있다. 내가 그 집 앞마당이나 마찬가지인 곳으로 도통 나오지 않기는 했다. 그래도 최근에는 몇 번인가 나온 적이 있긴 했는데... 생각해보니 그마저도 볼일만 보고 바로 돌아갔었다. 이래서야 그냥 방구석에 처박혀있던 시절이랑 비슷한 것 같았다.
근데 아마 너였어도 길 한복판에 자기 동상 같은 게 떡하니 세워져 있으면 나오기 싫을 걸? 심지어 그게 알몸이라면 더더욱.
어쨌거나, 그런 아리스의 시선을 받으면서, 내가 입을 열었다.
“나도 널 보는 게 썩 달갑진 않으니 그런 눈으로 보지 말고.”
일이 없었더라면, 굳이 여기까지 올 생각은 전혀 없었다. 더 이상 그녀를 통해서, 한나를 떠올리는 일은 없었지만 그래도 한나를 꼭 빼닮은 아리스가 날 저런 눈으로 본다는 사실은 유쾌하지만은 않은 일이었다.
그런 점에서 아리스와 적당한 합의가 이루어진 바였다. 서로가 달가워하지 않으니, 서로가 좋게 얼굴 볼 일이 없도록 떨어진 채로 지내기로 한 것이 바로 그거였다. 본래 몇 십 미터가 채 안되던 목줄의 반경을, 천공섬만큼 늘린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어쨌거나 그렇게 된 고로, 앞으로도 어지간하면 얼굴 볼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마누라들이 사고만 치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그 마누라들 중 한 명... 아니 아직은 예정인, 하지만 사고 친 장본인들 중 하나인 아샤의 머리 위에 손을 얹자, 에헤헤하고 웃는 아샤가 보였다.
딱히 좋으라고 그런 건 아니었는데. 보아하니 아까 혼났던 건 또 그새 까먹은 듯 싶었다. 뭐 상관없기도 해서 그런 아샤에게 말했다.
“아까 그거 이리 줘 봐.”
“응, 여기 있어. 오빠!”
활기차게 대답하는 아샤에게서 원경의 구슬 짝퉁을 건네받은 내가 휙하고 아리스에게 던졌다. 그런 구슬을 받아든 아리스가 나를, 정확히는 내 옆에 있는 아샤와 아냐를 보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 아리스의 눈빛에서 언뜻 혐오와 경멸의 감정이 스쳐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대충 뭐라고 할지 예상이 가는 눈이었다. 또 새로운 여자가 늘었느니 뭐니 하겠지, 그리고 아샤와 아냐를 보고서 너무 어리지 않냐고 말할 게 분명했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랬다.
“또 여자가 늘었군요. 게다가 이번에는 이렇게나 어린 아이까지... 당신은, 정말...”
내게 찰싹 달라붙어있는 아샤와 아냐를 보며 그렇게 말하는 아리스를 보고서 입을 열었다.
“얘네가 너랑 나보다 나이 많거든?”
정신연령은 몰라도 나랑 아리스의 나이를 합치더라도 여기 있는 아샤나 아냐보다 어렸다. 아샤와 아냐에게 오빠라고는 불리고 있지만 난 아직 팔팔한 이십대였다. 아무튼 듣자하니 신나서 매도해오는 아리스를 보며 말을 이었다.
“거기에 얘네가 어리면 넌 뭐야? 위로만 자랐지 가슴은 얘네랑 비슷비슷하잖아.”
그렇게 말하자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은 아리스가 가슴 위를 손으로 가리며 날 노려봤다. 그런 아리스를 보며 비웃듯이 입술을 비틀었다.
화악, 하고 귀까지 발갛게 물드는 아리스가 보였다. 내 승리였다. 가슴이 작은 녀석 상대로는 응, 너 가슴 작아 한 방이면 죄다 저런 표정을 짓고는 했다.
크리샤도 그랬었지. 그땐 정말 무서웠는데...
“...오빠?”
“......”
하지만 내가 간과한 사실이 하나 있었다. 아리스를 놀려먹기 위해 작은 가슴을 운운해버린 나머지 같이 데미지를 입어버린 아샤와 아냐였다. 크리샤와 동급인 두 드래곤의 시선이 나를 훑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그런 둘의 머리 위로 손을 얹었다. 그리고 마구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너희는 금방 클 테니까 제외하고, 실제로 요즘 조금씩 자라고 있잖아? 금방 쟤보다 커질 거야. 쟤는 이미 다 컸는데도 저 모양이니까.”
내 말에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은 아샤와 아냐가 아리스에게 보란 듯이 가슴을 쭉 펴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런 둘의 가슴과 자신의 가슴을 비교해보더니 한층 더 침울해진 얼굴이 되어버린 아리스도 보였다.
내가 틀린 말은 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었다.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더 작은 아샤와 아냐와 별 차이가 없는 자신의 가슴을 보던 아리스 입술을 깨물면서 나를 노려봤다. 그 시선을 받으면서 머리를 긁적거렸다.
왜 지 가슴이 작은 걸 탓하지 않고 날 노려보는 건지 전혀 모르겠다. 꼬우면 너도 마사지라도 받을 거냐고 물어보려다가 그런 말을 했다가 괜히 상황만 악화될 것 같아서 참았다. 그 대신, 아샤와 아냐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여전히 원경의 구슬 짝퉁을 손에 쥐고만 있는 아리스에게 말했다.
“됐고, 거기에 마력이나 넣어봐.”
내 말에 미심쩍어하면서 구슬을 바라보는 아리스가 보엿다. 뭔가 이상한 수작을 부리진 않았는지 확인하듯, 구슬을 보던 아리스가 날 바라봤다.
띠링~ 하고, 그 순간에 귓가에 알림이 들려왔다.
[플레이어 ‘이지경’님을 향한 ‘아리스 라 브란데냐 블론드 데 드네아’의 기능 ‘혜안’이 감지되었습니다.]
예전에도 당했던 적이 있었던 그거였다. 지금은 주시자의 눈이 없어서 자동으로 막지는 못했지만... 그게 없다고 그냥 당하고 있을 만큼 아무런 대책도 세워두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결국, 기능이란 것은 이 세계에 포함된 무언가의 구현이었다. 당연히, 그를 막는 방법도 있었다.
[플레이어 ‘이지경’님의 특성 ‘개변자’가 현 상황에 대응합니다.]
마도의 이치와 마력 장악을 개변시킨다. 그 순간 내 발밑에서 솟구친 그림자들이 내 몸을 훑어오는 아리스의 마력을 장악했다. 허공에서 아리스의 마력을 붙잡은 그림자의 손들이 꿈틀거리는 것을 보고 있자니, 귓가에 또다시 알림이 들려왔다.
[플레이어 ‘이지경’님의 정보가 일부 차단되었습니다.]
전과 달리, 내게 혜안인지 뭐시기를 쓰자마자 즉시 차단했던 주시자의 눈이 없어서 그런지 일부는 보여진 모양이었다. 뭐, 그래봤자 일부였다. 신경쓰지 않고서, 나는 손가락을 튕겼다.
아직 내 주위에는, 그림자의 손에 잡히지 않은 아리스의 마력이, 내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일부러 차단하지 않은 마력이었다. 손가락을 튕기는 것을 신호로, 그림자의 손들이 그런 아리스의 마력을 향해 뻗쳐나갔다.
아리스가 뭔가 낌새를 눈치챘는지 급히 그런 마력을 거둬들이려고 했지만, 내쪽이 더 빨랐다. 미처 거둬들이지 못한 마력마저 붙잡고서, 아직 끊어지지 않은 아리스와 마력 사이의 연결에 내 마력을 쑤셔 박아 넣었다.
심연을 들여다보는 자, 심연 또한 너를 들여다본다는 말 그대로. 이번에는 내가 들여다볼 차례였다.
“으읏?!”
움찔, 하고 연결된 마력을 길로 삼아서 덮쳐드는 그림자의 손들에 몸을 움츠렸던 아리스의 안으로 스며들 듯이 그림자의 손들이 사라져갔다.
[불가! ‘아리스 라 브란데냐 블론드 데 드네아’의 기능 ‘혜안’이 정보감지를 차단합니다.]
이것도 예상은 해뒀다. 전에도 통하지 않았으니, 하지만...
다시 개변자.
귓가에 들려온 알림에 이번에는 내 몸에 둘러져있는 특성들을 활용했다. 차원을 넘은 자와 포식자를 개변시킨다. 이 둘은 최근에 꽤 자주 사용해서 손쉽게 개변됐다.
이윽고, 차원을 넘은 자를 통해 이 세계의 법칙과 분리된 그림자의 손이 다시 한 번 아리스의 몸을 덮쳐들었다. 그리고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발동되는 온갖 기능들을 포식자들이 말 그대로 붙잡고 찢어발겨서, 집어삼켰다.
으직으직, 하고 아리스의 마력이 그림자의 손에 붙잡혀서, 그대로 삼켜지는 것이 보였다.
이윽고...
[대상 ‘아리스 라 브란데냐 블론드 데 드네아’의 기능 ‘혜안’을 플레이어 ‘이지경’님의 특성 ‘포식자’가 집어삼킵니다.]
그런 알림이 귓가에 들려왔다.
“정보창.”
귓가에 들려온 알림소리에 나는 아리스를 바라보며 정보창을 열었다.
「정보창」
「이름 : 아리스 라 브란데냐 블론드 데 드네아」
「칭호 : 천검의 주인(상실), 성녀, 검의 천재」
「성별 : 여성」
「나이 : 17세」
「직업 : 기사, 성녀, 용사, 관리자」
「종족 : 인간」
「근력 : 111(S)」
「민첩 : 134(S)」
「체력 : 99(A)」
「지력 : 98(B)」
「마력 : 22[-50](D)」
「매력 : 92(A)」
「행운 : 96(A)」
「생명력 : 990/990」
「마나력 : 220/720」
「지구력 : 45%」
「고유 특성 : 마왕의 저주(S) 검의 천재(S), 천의 재능(S)」
「보유 특성 : 검은 용의 목줄(S), 검사(A), 성녀(A), 투기(B), 행정관(B), 귀족(B)」
「보유 기능 : *혜안(S), 라이어스 제국 검술(A), 기승(A), 드네아 검술(A), 제왕학(A), 신속(B) 이중 베기(B), 근력 초강화(B), 집중(B), 회계(B), 행정(B)...」
「상태 : 경계 (모, 몸에 힘이... 하나도...)」
「호감도 : 14」
「예속도 : 100」
평소에도 드래곤의 어마무시한 마력을 집어삼키던 포식자였다. 그런 포식자에 의해 마력을 먹힌 아리스의 정보창이 훤히 들여다보이게 됐다.
혜안을 사용할 수준의 마력을 통째로 집어삼켰으니,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는 게 당연했다. 정작 그 정도의 마력을 먹어치운 나는 간에 기별도 안가긴 했지만 말이다.
내 감상으론 살짝 맛만 본 수준인데도 뭉텅이로 빨려나간 마력에, 힘이 쭉 빠졌는지 흐리멍텅해지는 의식을 부여잡으려는 아리스가 보였다.
이거 잘만 쓰면 공격용으로도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아리스를 바라봤다. 정확히는, 그녀의 정보창을 바라봤다. 덕분에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주시자의 눈을 차단했던 혜안이 고작 S등급이라는 거였다.
대체 어떻게 막았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기능이니 특성이니 하는 것들은 내게 있어서만 그런 것뿐이지 이 세계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있어서는 그저 자신들이 얻은 기술이나,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었던 재능처럼 당연한 것들이었다.
어떻게 S랭크인 혜안으로 EX랭크의 주시자의 눈을 막았냐고 물어봐도 아마 모를 게 분명했따다. 뭐, 그런 궁금증을 해소하는 건 나중으로 미루기로 하고, 나는 까발려진 아리스의 정보창을 하나하나 훑어봤다.
내게 홀라당 벗겨진 꼴이 된 거나 마찬가지인 아리스가, 정보창을 훑어보는 내 시선에 쭈뼛거리는 것이 보였다.
드래곤인 루시아나 크리샤도 정보창을 보면 저랬었는데... 아무래도 감이 좋은 모양이었다.
아무튼, 대충 아리스가 가지고 있는 특성이나 기능들을 확인한 내가 입을 열었다.
“이상한 수작부리지 말고, 아무 짓도 안했으니까 빨리 마력이나 넣지?”
꾸물럭거리면서, 자신의 주위를 맴도는 그림자의 손에 침을 꿀꺽 삼킨 아리스가 입을 열었다.
“...마왕인 당신의 말을, 제가 어떻게 믿죠?”
단번에 절반 가까이 마력을 빼앗겨서 힘들어하는 주제에 자존심은 더럽게 강했다.
「상태 : 경계 (그때처럼, 또 이상한 짓을 하려 한다면...)」
그런 아리스의 정보창을 통해서,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훤히 들여다보였다.
정보창이 뚫려버린 이상, 더 이상 내게 속마음을 감추는 게 불가능하다는 소리였다. 원래는 일정 이상의 호감도가 있어야지 볼 수 있었지만... 호감도를 대신한, 예속도에 의해 알짤 없이 보이는 아리스의 생각이 보였다.
이상한 짓이라...
기억은 안 나지만, 내가 아리스에게 이상한 짓을 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였다.
내가 손가락을 까닥이자, 촤르륵하고. 아리스의 새하얀 목 위로 질척거리며, 검은 목줄이 떠올랐다.
“못 믿으면? 어쩔 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