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0화 〉250화
조용히 그리고 빠르게 식사가 끝나고서. 입가를 냅킨으로 닦아낸 카르네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빨리 본론으로 갔으면 좋겠는데~?”
밥 먹은지 얼마나 됐다고 하는 말이 저거라니 좀 봐줬으면 좋겠다. 조금 느긋하게 얘기하면 어디 탈이라도 나는 걸까? 그보다 밥 먹을 때는 조용했으면서 먹자마자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자는 건 대체...
적색용, 거기에 화염 속성의 마법을 다뤄서 그런지 성격이 급한 카르네에게 약간 서운함을 느꼈지만 별 수 없는 일이긴 했다. 카르네의 호감도가 높아지긴 했더라도 겨우 30정도였다. 조금 관심을 가지는 정도에 불과할 뿐이란 거였다.
내가 뭘 하던 이해해주는 수준의 호감도인 90을 넘어선 루시아나 크리샤, 아르카에 비한다면 턱없이 부족한 수치긴 했다.
“...본론, 빠르면 빠를수록 좋아. 오랫동안, 영지를 비워둘 수도 없고...”
그리고 그건 샤르도 마찬가지였다. 재촉해오듯이 말해오는 두 드래곤의 말에 내가 머리를 긁적이다가 입을 열었다.
“우선... 아리스에 대한 내기 건 말인데. 그만해줬으면 좋겠어.”
그 말에 루시아가 예상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건 그거라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어째서인가요?”
어째서냐고 묻는 루시아의 말에 내가 어깨를 으쓱이고서 말했다.
“아리스를 안았거든.”
움찔.
세 드래곤이 움찔하더니 나를 바라봤다. 황금빛으로 반짝이는 루시아와 검게 일렁거리는 크리샤, 그리고 녹빛으로 가득한 아르카의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내 말의 진의를 파악하려는 듯 흔들리던 그녀들의 눈동자가 이윽고 쩌적하고 세로로 갈라지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서 내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꼭 그거 때문인 건 아니고... 뭔가 느낌이 쎄해서 그래. 그러니까 부탁해도 될까?”
“...아리스, 라는 그 인간 소녀를 안았다는 건 거짓말이 아닌 거군요.”
“그래, 어차피 나중에 다 들킬 거 미리 말한 거야.”
“...내가 있는데, 거기다가 허락해준 여자도 그렇게나 잔뜩 있는데, 거기서 또 늘렸단 말이지? 우리들을 제외하고서... 대체 몇이야?”
일단 에네스타와 에오시스 자매, 에루나... 이번에 아리스까지 합치면... 좀 있으면 본말이 전도되기 일보직전이긴 했다.
“그건... 할 말이 없네.”
“흐으응, 고작 일주일 정도 관리 안 했다고오, 그새 한 명이 늘어버린 거네에? 아직 아샤랑 아냐랑은 안한 것 같으니까아. 이래서야 곤란한 거얼, 매번 이런 식이면 대체 몇 명이나 더 늘어나는 걸까나아?”
흉흉하게 눈을 빛내는 세 연인들의 시선이 무척이나 따가웠다. 방금까지 반쯤 졸린 표정을 짓고 있던 아르카도 어느새 생생해져서는 나를 노려보는 판국이라서 더더욱 그랬다.
“...그래서, 느낌이 좋지 않다는 건 무슨 뜻인가요?”
후우, 하고 한숨을 내쉬었던 루시아가 그렇게 묻는 것을 보고서 내가 말했다.
“일단 전에... 내가 정보창이란 걸 쓸 수 있다고 말했었지?”
“네, 이지경님이 가진 고유한 능력... 이 세계에 소환되어 얻은 능력을 말씀하시는 거죠?”
“응, 거기에... 아리스의 정보창에 마왕의 저주라는 게 있었거든.”
“마왕의 저주, 인가요?”
루시아가 그렇게 되묻더니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건 아리스라는 인간이... 저희와 같이 마왕에게 저주를 받았던 인간의 후예이기 때문이 아닌가요?”
“나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까 그게 아니더라고. 너희한텐 마왕의 저주라는 게 없었거든.”
“...저희한테는 없는데, 그 인간에게는 있었다고요?”
그 말에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하는 루시아를 보고서, 어떻게든 이해시켰다고 생각했는데 크리샤가 말했다.
“근데 그게 뭐 어쨌다고? 그거랑 그 인간을 안은 거랑 대체 뭔 상관인데?”
지당하신 말씀이였다. 그거랑 이거랑은 정말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긴 했다. 나도 도중에 알게 된 거였고, 그거 때문에 아리스를 안았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미안, 그 대신에 이거 줄 테니까...”
“내가 고작 물건 같은 걸로...”
크리샤가 말을 잇다가, 내 손 위에서 꿈틀거리며 만들어진 것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이거 때문에 내기한 거라며? 그냥 나한테 말하지 그랬어.”
제국이나 되는 나라가 고작 이런 거 때문에 휘청거렸다는 걸 저 밑에 인간들이 알게 된다면 대체 무슨 생각을 할까. 지도자층은 아마 자괴감으로 꿈틀거릴 지도 모르겠다. 애당초 이런걸 어떻게 에루나가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르겠고.
“아, 아무튼...! 그 인간 여자를 안은 이유나 말하란 말이야!”
휙휙, 고개를 내저은 크리샤가 유혹을 이겨내고서 재차 나를 압박하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서, 나는 비슷한 걸 하나 더 만들었다. 이쪽은 조금 더 작은 사이즈긴 한데... 아마 크리샤에겐 이쪽이 더 익숙할지도 모르겠다.
크리샤와 할 때 주로 했던 사이즈니 말이다.
“......”
흔들리는 크리샤의 눈동자를 보고서, 대충 먹혀들었다는 걸 확인한 내가 말했다.
“어때? 크리샤.”
“......아이.”
낮게 중얼거리듯이, 크리샤가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아이, 이름은 확실히 정해뒀겠지? 다음에 보면... 말해주기로 했었잖아.”
“그럼... 누구랑 한 약속인데. 아이샤그라, 이쪽의 말로는 찬란한 미래랬던가? 줄여서 아이샤라고 불러도 좋고... 아, 내가 살던 세계의 이름으로는 찬미라고 지었는데 어때? 마음에 들어?”
“...아이샤그라, 아이샤그라... 좋아, 이번만 봐주는 거야. 또 다시, 내가 모르는 사이에 여자를 늘렸다가는...”
“알고 있어, 다신 안 그럴게.”
내 말에 미심쩍다는 듯이 나를 보는 크리샤를 보고서 쓴웃음을 지었다. 이미 전례가 수두룩한 나였다. 나라도 믿지 못하겠다.
“...그보다, 그쪽 세계의 이름은 왜 짓는 건데?”
그런 나를 보고서 푹, 한숨을 내쉬었던 크리샤가 그렇게 묻는걸 보고서 내가 말했다.
“혹시 모르잖아.”
내가 이 세계에 소환됐듯이, 언제 아이샤그라가 그쪽 세계로 갈지 어떻게 알겠는가.
뭐, 그럴 일은 없겠지만...
아무튼 두 선물과 아이의 이름을 잊지 않고 지어놓은 것이 주효했는지 기세가 누그러진 크리샤를 보고 식탁 밑에서 주먹을 움켜쥐고 있자니, 아르카가 입술을 핥더니 말했다.
“헤에, 아이의 이름이라아. 저기이? 우리 아이의 이름도 분명 지어둔거겠지?”
“......”
예상치 못한 복병에 침묵하고 있자니 크리샤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아이샤그라, 아이샤그라... 좋은 이름인걸, 그치? 아르카?”
“그러네에, 좋은 이름이야아. 분명, 우리 아이 이름도 좋은 이름이겠지이? 그치이?”
눈치껏 내가 아르카와의 아이의 이름을 짓지 않은 걸 알아차렸는지 콧소리를 내며 자랑하듯이 말하는 크리샤와 그런 크리샤에게 적당히 맞장구치며 이쪽을 지그시 바라보는 아르카가 보였다.
“......”
시벌탱.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고서, 빠르게 머리를 회전시켰다. 위기상황에 자동으로 생존본능이 활성화되면서, 평소보다 맹렬한 속도로 회전하기 시작한 두뇌가 이윽고 다섯 자의 이름을 뱉어냈다.
“루카르디네... 어때?”
“루카르디네라아... 노래 부르는 작은 숲... 방금 지은 것치고는 좋은 이름인 거얼?”
“방금 지은 게 아니니까 당연하지.”
입술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해서 그렇게 말하자, 흐으응, 하고 나를 살펴보던 아르카가 입을 열었다.
“뭐어, 좋아. 나도 이번만 봐줄 게에. 이렇게 되지 않을까 예상하기도 했었고오, 그 대신에... 크리샤처럼 저거 두 개 줘야 돼애.”
“그거야 쉽지. 그보다 나에 대한 신뢰도가 너무 낮은 거 아냐?”
“네 하반신한테 물어보지 그래애?”
아르카의 말에 딱히 할 말이 없어져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아르카의 몫으로 또 다시 예의 물건을 두 개 만들고 있자니 이번에는 루시아가 말했다.
“크리샤랑 아르카는 각각 아이의 이름과... 이지경님이 직접 만드신 선물인가요. 아이가 없는 저는 조금 손해 보는 기분이 드는 걸요.”
“......”
첫 연인이기도 한 동시에 나와 관계를 맺은 연인 중에서 유일하게 아이가 없는 루시아의 말이 비수가 되어 내 양심을 푹, 하고 찔렀다.
솔직히 말해서, 나와 아이를 갖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했던 루시아인만큼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때는 아직 용화한 드래곤 슬레이어라는 편법 같은 것도 없었고, 그냥 생으로 박치기하는 것에 불과해서 어쩔 수 없었지만.... 그때는 그때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했긴 했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고는 해도, 결국 루시아만 아이가 없다는 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지금이야 당장 루시아도 임신시킬 자신이야 있긴 한데... 여기서 그런 짓을 했다가는 일단 두 드래곤한테 좌우로 잡혀서 반으로 갈라질 게 분명했다.
그 다음엔 하반신을 누가 가질지 싸우지 않을까.
그래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자니 그런 나를 보던 루시아가 생긋하고 웃더니 말했다.
“...뭐, 농담이랍니다. 좋아요, 이지경님이 스스로 늘린 장난감을 어떻게 할 생각은 없으니까요. 거기에 내기의 중단 건도... 이지경님이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야, 확실히 알아봐야할 부분이긴 하겠죠. 그렇지만 저도 크리샤와 아르카에게 준 선물은 주셔야 되는 거, 아시죠?”
“...그럼. 알고 있지.”
이걸로 연인들인 세 드래곤의 용서와 허락을 얻자, 다른 드래곤들도... 정확히는 카르네만 주변의 눈치를 보다가 물었다.
“저게 대체 뭐길래 다들 저러는 거야~?”
“으응, 좋은 거야. 카르네!”
“응, 기분 좋은 거. 아, 오빠. 나랑 아샤 언니도 그거 줘야하는 거 잊지 마?”
일단 아직 관계를 맺진 않았지만, 여러 장난감을 통해 저게 뭔지 확실히 알게 된 아샤와 아냐의 말에 더욱 아리송한 표정을 짓던 카르네가 말했다.
“뭐, 좋아. 다들 갖고 있는데 나만 없는 것도 싫으니까~ 나도 저거 주면 용서해줄게~ 아, 나는 아직 아이가 없으니까, 세 개 어때?”
나와 별다른 관계도 없지만, 드래곤 특유의 탐욕을 발휘해서 세 개를 요구하는 카르네를 보고서, 아샤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에? 세 개나 들어가?”
“어? 저거 어디다가 넣는 거야?”
카르네의 말에 고개를 갸우뚱하며 묻는 아샤와 그런 아샤의 말에 마찬가지로 고개를 갸우뚱하는 카르네를 보며 쓴웃음을 짓다가, 나는 아무런 말도 없는 샤르를 보며 말했다.
“샤르, 너는 어떻게 할래?”
내 물음에 샤르의 은빛으로 반짝이는 두 눈동자가 나를 향하더니, 마치 순백처럼 깨끗한 피부와 그에 반면 분홍빛이 감도는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얘기할거랑, 부탁할거라는 건, 이게 끝?”
“응, 일단은 그런데.”
얘기할거라는 건, 아리스를 안았다는 것. 그리고 부탁할 거라는 건 내기를 그만두게 하는 거였으니까 대충은 끝난 게 맞았다.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말하자 샤르가 말을 이었다.
“...그럼, 제안할 거라는 건?”
샤르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다시 한 번 내 쪽으로 모였다.
확실히 내기를 그만해달라고 부탁하는 것과 아리스의 건은 끝났으니 내가 제안할 게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지경님이 제안하실 게 있다고 하셨죠... 그래서, 대체 뭔가요?”
“아 그거...”
사실은 좀 더 나중에, 적어도 아샤와 아냐를 어떻게 하고서, 내 몸에 대한 것도 해결한 다음에 얘기할 거였지만. 일단 얘기만이라면 미리 해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다들 영지를 얼마나 오랫동안 비워둘 수 있는 거야?”
그런 내 물음에 루시아가 대답했다.
“영지에 따라 다르겠죠. 저같은 경우에는 ‘특별한 경우’가 없더라면... 일주일 정도는 비워두더라도 상관없어요.”
그런 것 치고는 루시아 때는 무척이나 바빠서, 거의 저녁쯤에나 볼 수 있었던 것 같은데. 그때는 마침 무척이나 바빴을 때였나?
어쩐지 그런 루시아의 말에 찔린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크리샤가 보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정보창을 보려던 나를 보고서, 크리샤가 말했다.
“나도 마찬가지야 특별한 경우가 없다면 일주일정도는 문제없어.”
“아, 그래...”
크리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서 정보창을 바라봤지만 그새 바뀌어버린 탓에 방금 전에 무슨 생각을 했었는지는 볼 수 없었다.
별 수 없었다. 아쉬움을 뒤로하고서 아르카를 바라보자, 하암하고 하품을 한 아르카가 말했다.
“나느은, 대충 한 달정도려나아. 한 달 정도 아무것도 안하고 잔 적이 있었는데 별 일 없었으니까아.”
대체 어떻게하면 한 달 내리를 잘 수 있는 건지 묻고 싶었다.
“아샤랑 아냐는?”
“우리는 3일 정도?”
“잘하면 4일이정도고?”
가장 짧은 기간이었다. 왜 그런가 궁금해하자니 루시아가 그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아샤와 아냐의 영지는 저희들 중에서 가장 거대하니까요. 거기에... 둘의 영지의 대부분을 차지한 바다는 생각보다 무척이나... 아주 자주 변하니까요.”
“아, 영지의 상태랑도 관련되있는 거구나?”
“네, 마침 이지경님이 제 영지에 머물때는... 갑자기 지진이 일어나서.”
“크흠...!”
크리샤가 헛기침하는 소리가 들려서 고개를 돌렸지만, 모른 척 시선을 돌리는 크리샤가 보일 뿐이었다.
아무튼 대충 이해했다. 한마디로 드래곤이 관리해야할 일이 많을수록, 그녀들이 영지에서 떨어지기 힘들어진다는 거였다.
“카르네랑 샤르는 어때?”
“나는~ 대충 이 주정도려나~?”
“...반년?”
북서쪽에 있다는 사막지대를 영지로 삼고 있는 카르네가 이 주, 그리고 훨씬 더 북쪽에 있는 거대한 얼음들로 이루어진 땅을 영지로 삼고 있는 샤르는 무려 반년이었다.
그녀들의 말에 대충 셈해본 내가 입을 열었다.
“그럼 괜찮겠네. 내 제안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