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88화 〉288화 (288/370)



〈 288화 〉288화
“...용서받은 건가?”

뭔가 갑작스레 끝나버려서 여전히 불안한 심정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러다 문득 머릿속에 떠오른 것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샤르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그것은 얼마 전에 우연히 보았던 과거의 기억이였다. 그녀들로부터 들었던, 이세계의 과거와는 조금 다른 그런 이야기를 입에 담는, 드래곤들의 모습이 비쳐보였던 기억.

내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른 이유로 멸망을 거론하던 드래곤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눈치가 없는 나라도, 그 기억 속에서 유일하게 지금과 과거의 모습이 전혀 달라지지 않은 샤르에게 무언가가 있다는 것쯤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제부터 알면 그만이였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내가 입을 열려고 했을 때였다.

“...쉬잇.”

샤르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그런 내 입술을 가로막았다. 얼음처럼 차갑고, 투명한 눈동자가 나를 올려다봤다. 방금까지 무표정하지만, 장난스레  뺨을 찔러댔던 그 샤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얼굴로.


“...예정된 안배. 그에 대한 질문이라면, 아직은 때가 아냐.”


내가 뭐라고 말하려고 했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이, 그렇게 말하는 샤르를 보고서 내가 뭐라고 말하려고 할 때였다.

“...그런 것보다.”

그런 나를 보며 샤르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더 이상 늦으면, 아마 다시 화낼지도.”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린 내가 몸을 일으켰다.


생각해보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긴 했다.

크리샤도 빨리 오라고 했었고.

벌떡 몸을 일으킨 내가 옷을 갈아입다가, 다시 샤르에게 물었다. 혹시나 얼렁뚱땅 넘어가는 걸지도 몰랐으니까.


“지금이 때가 아니라면, 나중에는 괜찮다는 거지.”


그런  말에 입가에 미소를 짓는 샤르가 보였다. 처음으로 본, 그녀의 미소에 내가 멈칫했다.


“...응, 내 차례가 오면. 그때는 알려줄게.”

그리고 그렇게 말하는 샤르를 보며,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으로 미뤄지긴 했지만, 비밀로 하겠다고 하는 것도 아니였다. 더군다나, 샤르의 차례라고 해봤자 얼마 기다리지 않아도 됐다.

알려준다고 했으니, 알려줄 것이다. 드래곤은 약속을 허투루 하지 않는 종족이니까. 굳이 맹세를 하지 않아도, 드래곤이나 되는 존재의 말에는 힘이 담겨있는 법이었다.


“그럼, 그렇게 알고... 아샤, 아냐. 너희도 어서 옷 입어야지.”


크리샤가 다시 분노를 터트리기 전에, 아직 어영부영하고 있는 쌍둥이들을 챙겼다.


서둘러서 걸음을 옮겨 식당에 도착하자, 코를 찌르는 듯한 기묘한 악취가 느껴졌다. 그 악취가 어딘가 익숙하다는 느낌이 든다는 사실에, 뭔가 느낌이 좋지 않아 멈칫했다.


하지만 직감이란 녀석은 항상 조금 늦게 내게 경고해주고는 했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뭐해? 빨리 앉지 않고.”


이미 자리에 앉아 기다리고 있던 크리샤가, 문 앞에서 멈춰서있는 나를 보고서 그렇게 말했으니까.


하는 수 없이 엉거주춤하며 자리에 앉자, 식탁 위에 놓여있는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건 뭐라고 형용할 수 없을 만큼 끔찍한 것들이었다.


여태껏 에루나가 차려줬던 호화로운 음식들과 비교하면, 지옥에서나 나올 법한 몰골의 요리가  자리에만 놓여있는 것이 보였다.


혹시나 싶어서 크리샤와 아르카, 카르네, 그리고 나와 같이 왔던 루시아나 아샤, 아냐, 샤르의 자리도 확인해봤지만... 그녀들의 요리는 멀쩡했다. 아니, 멀쩡한 게 아니라... 딱봐도 에루나가 차린 것이 분명해보이는 요리였다.

오직 나만이, 숯처럼 타서 알아보기도 힘든 형상의 고기가 놓여있었다.


“...이게 대체.”


뭐냐고, 그렇게 물으려던 내 말을 자르며 크리샤가 말했다.

“그거, 내가 직접 구운 거니까 전부 먹어야 한다?”

 밖으로 나오려던 말이 생존본능이 극대화시킨 반사신경과 함께 극적으로 도로 목구멍으로 밀려내려갔다.


 대신에,

“크리샤. 너, 요리도 할 줄 알았어?”


결과물을 보면 요리를 못하는  확실했지만.

그런 내 예상대로, 크리샤가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한  없지. 현생에도, 전생에도. 이번이 처음이네. 그래서 뭐? 불만 있어?”

“아뇨...”


있어도 없어야 할 판이였다. 근데, 크리샤의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고기를 바싹 태워놓은 것이 크리샤가 만든 거라는  알겠는데, 그 옆에서 부글부글 끓으며 기포를 터트리고 있는 녹색의 액체가 담긴 컵은, 또 뭔가 싶었다.


아마 식당에 들어설 때 맡았던 기묘한 악취, 그리고 어딘가 익숙했던 냄새는 여기서 난  싶었다. 지금도 퐁, 퐁 기포가 터질 때마다 그 냄새가 코에 진득하게 달라붙어왔으니 말이다.


안 그래도 생존본능과 함께 예민해진 오감 덕분에 죽을 맛이였다.

“설마 이것도...”

네가 만든거냐고, 그렇게 크리샤에게 물으려하다가, 반짝반짝 눈을 빛내며 나를 보고 있는 아르카의 시선이 느껴졌다.


“...아르카?”


“응, 그건 내가 만든 거야아.”


아르카의 작품이였다.

나는 아연실색하면서, 눈앞에 놓여져 있는 것들을 바라봤다. 정말로 싫지만... 내 미래가 눈앞에 그려지는 것 같았다.

둘의 정성이 아주 가득 담긴 듯한 그것들이, 어떤 이유로, 식사 시간에, 내 앞에 놓이게 됐는지야 금방 알 수 있었으니까.

빙글빙글, 크리샤와 아르카가 웃는 것이 보였다.

아직 전부 용서해준건 아니거든,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웃는 낯이지만, 전혀 웃고 있지 않는 둘의 눈동자를 보고서.

나는 겸허하게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리고, 그런 내게 둘이 예상했다시피 한 말을 꺼냈다.


“몸에 좋은 거니까,  점도 남기지 말고 전부 먹어.”


“남기면... 알지이?”


재촉하듯이, 나를 바라보는 두 시선을 마주보고서. 꿀꺽, 침을 삼킨 나는 천천히 포크와 나이프를 손에 쥐었다.




“끄으으윽...”

어떻게든 남기지 않고 전부 위장에 쑤셔넣고서, 에루나가 가져다준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조금 속이 진정될까 싶어서 그랬던 건데, 오히려 역효과였는지 부글부글 속이 끓는 기분이었다.


갑작스런 사태에 놀란 위장이 비틀어대며 나를 원망하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일단 살고 봐야 했으니까.

그리고, 내가 전부 먹어치우고 나서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크리샤와 아르카를 보고서, 이제 정말로 둘에게서 용서받았다는 실감이 들었다.


입과 위장이 조금 고생하고서, 둘에게 용서받은 셈이니 싸게 먹혔다면 싸게 먹힌 셈이라 쓴웃음을 짓고 있자니,


띠링~


귓가에 알림소리가 들려왔다.

[플레이어 ‘이지경’님이 ‘특제 보양식’을 섭취했습니다. 일시적으로 근력과 체력이 각각 8씩 상승합니다. 장복시 영구히 근력과 체력이 3만큼 상승합니다.]

[플레이어 ‘이지경’님이 ‘특제 정력제’를 섭취했습니다. 일시적으로 체력이 10만큼 상승합니다. 장복시 영구히 체력이 5만큼 상승합니다.]


알림과 함께 들려온 것은, 끔찍한 맛과는 달리 엄청난 폭으로 상승한 체력 능력치였다. 일시적이라고는 했지만 이미 100을 넘긴 기점부터, 거의 오르지 않다시피한 능력치가 1도 아니고, 무려 10이 넘는 수치가 올라버린 것이다.

게다가 장기적으로 복용시엔, 둘 모두 함께 한다면 8이나 영구히 체력이 상승했다.

그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는 그 누구보다도, 상태창을 통해 객관적으로 능력치를 확인해왔던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장기적으로 먹고 싶은 맛은 아니긴 했지만. 아무튼 놀랍도록 엄청난 효과를 지니고는 있었다.

그리고 그런 나를 보며, 크리샤와 아르카가 말했다.

“응, 얼굴을 보니 제대로 효과가 있긴 했던 모양이네.”

“조금 아쉽긴 하지마안, 뭐어... 나중에  만들면 그만이니까아. 그때도 도와줄 거지? 크리샤?”

“...내 몫도 준다면야.”


“그야 물론이지이.”


둘이 모종의 거래를 하고 있다는 것만은 알겠다.

하지만 그보다도,

“대체  이걸...”

아니, 알림과 함께 들려왔던 요리들의 이름으로도 대충 감은 오긴 했지만...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걸 내게 먹인 건지는 감이  잡혔다.

그런 내게 크리샤와 아르카가 서로의 얼굴을 보더니, 이윽고 동시에 나를 바라봤다. 이 바보는 대체, 그런 표정을 지은 채로 말이다.

그러다가 결국 하아, 하고 한숨을 내쉰 크리샤가 말했다.


“왜긴 왜야? 어차피 이렇게  거... 확실히 하란 말이지.”

확실히 하라니, 대체...


“아.”


“둔감한 남편씨는 이제야 눈치 챈 모양이네에.”

키득거리며 웃는 아르카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수 없었다. 크리샤의 말을 듣고서야, 갑자기 이런걸  먹인 둘의 의도를 알아차린 내가 너무 둔감했던 것이 사실이였으니까.

“루시아.”


그리고, 크리샤가 루시아를 부르며 말했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로드였던 네가 먼저 약속을 어긴 이상, 더 이상 저 바보 녀석과 우리들이 한 약속이 지켜질 거란 보장은 없다는 거, 너도 알고 있지?”

구두로 한 약속이었지만, 그녀들은 내가 내뱉었던 얼치기같은 말을 순응하고, 받아들여줬다. 그것이 단순한 호기심, 혹은 어디 해볼 테면 해보라지? 그런 느낌으로 받아들인 거긴 했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약속은 약속이었고, 드래곤들은 그 약속을 지켰다.

여태까지는, 그 약속은 무사히 지켜지고는 있었다. 그래, 여태까지는. 하지만 이제 1년이라는 기간 동안, 차례대로 그녀들을 만나면서 그녀들을 꼬시기로 했던 약속은  이상 지켜진다는 보장이 없어져버렸다.

다름 아니라, 루시아의 일로 인해, 가장 써먹기 좋은 ‘핑계’가 생겨버렸으니 말이다.

이제 언제 갑자기 크리샤나 아르카, 혹은 이제 같이 있을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아샤나 아냐가 천공성에 들이닥쳐도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일을 저질러버린 루시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고 있어요.”

“덕분에 저 바보가 말한 바보같은 계획이 정말로 실현될 가능성이 커져버렸네. 정말 말도 안되는, 웃긴 계획인데... 그거 말곤 답이 없어진 상황이야. 응? 드래곤 로드이신 루시아, 너 때문에 말이야.”

크리샤의 말에, 그녀가 무슨 의도로 내게 이런걸 먹였는지 눈치챘음에도 불구하고 말려야하나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그러니까, 하고.

크리샤가 말했다.

“그런 짓까지 해놨으면, 확실히 해야지.  그래? 나중에 내가 쓰려고 구해둔 건데, 특별히 널 위해 써준 거니까.”

“...크리샤.”

적잖이 감동 먹은 얼굴로, 그런 크리샤를 보는 루시아가 보였다. 그런 루시아의 반응이 당황스러웠는지, 고개를 휙하고 돌려버린 크리샤가 말했다.

“무, 물론 공짜는 아니니까. 나중에 확실히 대가를 치르게 할 거라고!”

“...네, 알고 있어요. 물론, 아르카. 당신에게도 감사해하고 있어요.”


“응? 뭐어, 내꺼는 금방 다시 만들 수 있으니까 상관 없지마안. 아, 그래도 대가를 치른다면야 사양은 하지 않을 게에. 셋이나 섞으면 어떻게 될지 궁금하기도 하고오.”

...셋?

뭔가 아르카의 말에 내가 들이킨, 그 정체불명의 액체가 뭔가 싶은 의구심이 무럭무럭 피어올랐지만 모처럼 훈훈해진 분위기를 깰 수는 없어서 입을 다물고 있었다.

“아무튼... 그렇게 된 걸로 알고.”

쩌억, 하고 그렇게 말하는 크리샤와 함께, 그녀들의 등 뒤로 공간이 열렸다.

“...방해꾼은 사라져줄테니까, 알아서들 해보라고.”

휙휙, 하고 부끄러움으로 붉어진 얼굴을 숨기려는 듯, 급하게 영지로 돌아가는 크리샤를 따라서 다른 드래곤들도 설렁설렁 천공성을 떠나갔다.


결국, 루시아와 아샤, 아냐. 그렇게 다시 셋만이 남은 천공성을 보고서, 내가 한숨을 내쉬었을 때였다.

“확실히 하려면... 시간이 없겠네요. 저 말고도, 아샤랑 아냐도 있으니까...”


“으응?”

그렇게 말하는 루시아가 나를 바라봤다.

마치 맹수처럼, 무척이나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그러니까... 약효가 가장 좋을 때... 지금이 적격이겠네요. 아샤, 아냐?”

와락, 하고 어느새 다가온 아샤와 아냐가 내 바지와 상의를 붙잡았다. 순진무구한 두 소녀... 의 모습을 하고 있는 맹수들이 거기에 있었다.


“아샤가 벗겨줄게.”

“아냐도 도와줄게.”

“...네?”

촤악, 하고 눈 깜짝할 사이에,  드래곤의 완력에 찢겨나간 옷이 보였다. 스르륵, 하고 그런 내 앞에서 드레스를 벗으며 다가오는 루시아가 보였다.


“우와아, 오빠 자지. 엄청 커졌어!”


“대단해...♥”

정말로 약효 한 번 죽이는지, 평소보다도 훨씬 커다랗게 발기한 드래곤 슬레이어를 보며 감탄하는 아샤와 아냐가 나를 올려다보며 히쭉, 하고 웃어보였다.

“...저기요?”


쩌적, 하고  드래곤의 동공이 갈라지는 것이 보였다. 먹이를 노리는 암사자처럼 나를 바라 그녀들을 보고서.


“...에루나, 식당 문 제대로 닫아둬.”


“그렇게 말씀하실 것 같아서 이미 잠가뒀습니다.”


준비성 하난 진짜 탁월한 시녀였다. 에루나가 그렇게 말하고선, 딱하고 손가락을 튕기자 방금까지 식사했던 식탁과 빈 접시들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지경님...”


“츄웁...♥”

“츄우~♥”


스윽, 하고 두 팔을 내 목에 둘러오며  위에 올라타는 루시아와 그새를  참고 드래곤 슬레이어를 빨기 시작한 쌍둥이의 혀의 감촉을 느끼면서.

나는, 그저  눈을 감고서 현실에 순응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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