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5화 〉335화
변명이고 자시고, 정말로 카르네와 했던 약속을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던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침묵하고 있을 수도 없어서 입을 열려던 찰나에 카르네가 입을 열었다.
“네가 정 그렇게 돌아다니고 싶으면… 그래, 좋아. 대신 나도 따라갈 거야. 그래도 되지~?”
“뭐?”
충격적인 카르네의 선언에 나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왔다.
“절대로 안 돼. 이제 홀몸도 아니면서ㅡ”
“그럼 너는~?”
내 말을 자르며 카르네가 그렇게 되물었다.
“응? 너는 그럼 괜찮다 이거야~? 우린 홀몸이 아니니까 안 되는데, 너는? 크리샤도, 아르카도, 아샤도 아냐도, 루시아도. 그리고 나까지도 전부 임신시켜놓고서 너만 ‘홀몸’이 아니다, 그런 뜻이야~? 응? 우리들의 뱃속에 있는 아이 보고 네가 우리의 아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 말대로면, 너도 신경 써야 하는 거 아니야? 응? 우리한테만 홀몸이 아니니 뭐니 하는 건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냐구~? 아니면 뭐야~? 혹시 우리 아이들을 아버지도 없는 아이로 만들 생각이라던가~? 응? 내 말이 틀리면 말 좀 해봐.”
갑자기 아버지가 보고 싶어졌다.
응? 하고 이어지는 카르네의 공격에 정신이 아찔한데, 그게 계속해서 이어지면서 팩트로 두들겨대니까 버틸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어찌어찌 정신을 붙잡은 내가 입을 열었다.
“아니,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그런 뜻이 아니면 뭔데~? 들어준다니까~? 말해보든가~? 내가 입이라도 막았어? 아니잖아~? 애당초…”
차라리 정신을 놓는 게 나았을지도.
말 한마디 더 꺼냈다가 재차 이어지는 팩트 폭행에 겨우 붙잡은 정신이 너덜너덜해지고 말았다.
응, 지금 카르네에게 뭐라고 말하던 먹히지 않을 것 같았다.
아니, 애당초 뭐라고 말할 건덕지가 없는, 전부 다 맞는 말이기도 해서,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두 손을 들며 항복을 선언하는 것 뿐이였다.
“미안, 내가 전부 잘못했어…”
“흐응~? 잘못했다고? 뭘~?”
진짜 잘못했으니까 그만해주라…
안 그래도 죽겠는데 가끔 어머니가 제대로 빡쳤을 때 곧잘 나오시던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콤보로 이어질 것만 같은 카르네를 보고서, 그런 어머니 앞에서 정좌하던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린 나는 일단 무조건 잘못했다고 빌기로 했다.
그리고 그런 내 모습에 조금 화가 누그러진 듯한 카르네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
“그래서~? 대답은~?”
“…카르네, 네 말대로 해도 돼. 대신 조건이 있는데 괜찮지?”
카르네가 한 말이 분명 정론이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불안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그렇게 말하는 나를 보고서 카르네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들어보고서~? 그래도, 너무 이상한 거라면 받아주지 않을 거니까 명심해.”
“아니, 내가 하자는 대로 해주기만 하면 나도 더이상 뭐라고 안 할 테니까 그건 걱정하지 마.”
일단 너무 카르네에게 소홀했던 것도 사실이기도 하고, 마땅히 카르네를 만류할 명분도, 방법도 없어서 그렇게 말하자 만족스럽다는 듯이 팔짱을 풀은 카르네가 내 뺨을 꼬집었다.
덕분에 아르카에 이어서, 카르네에게까지 뺨을 꼬집히게 된 내가 양 뺨을 붙잡힌 채로 얼떨떨하게 있자니 카르네가 그런 나를 보며 말을 이었다.
“네가 뭘 걱정하는지는 알겠는데~? 아무리 그래도 날 어떻게 할 수 있는 녀석은 여기에 있는 여섯 정도가 끝이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되거든~?”
“…뭐, 그렇긴 한데.”
상대가 마왕과 관련된 녀석이다 보니 별수 없었다.
근데 이렇게 말하면 아내들이 날 걱정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그야 나도 검은 성녀 문제를 해결해야 한답시고 아내들이 홀로 내려가야 한다고 하면 반대했을 테니까. 그냥 반대도 아니고 뜯어말렸겠지.
지금 아내들이 나한테 하듯이 말이다. 이런 식으로 역지사지할 줄은 몰랐는데…
뭐, 좋게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여러모로 불안하긴 했지만, 카르네가 도와준다면 그것만으로도 엄청나게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니까.
아무튼, 그렇게 일이 정리되는가 싶었더니 다들 눈살을 찌푸리는 것이 보였다.
“잠깐만, 뭘 멋대로 같이 가니 마니야 카르네?”
“그러게 말이야아, 카르네. 그렇게 안봤는데에. 이런 상황에서 그러면 안되지이?”
“카르네. 이지경님과 함께 내려간다니 그건 너무 위험하다고 생각해요.”
크리샤와 아르카, 루시아가 그렇게까지 말하자 카르네가 흐응, 하고 그런 셋을 흘겨보더니 말했다.
“그냥 솔직하게 너희도 따라오고 싶다고 말하지~?”
움찔하고, 카르네의 말에 셋이 몸을 떨었다. 정곡을 찔린 듯, 말문이 막혀버린 셋을 보며 카르네가 어깨를 으쓱이더니, 이내 나를 끌어안으며 말을 이었다.
“뭐, 아무튼간에 아직까진 내 차례기도 하고. 난 이미 일주일이나 넘게 손해 본 셈인데 여기서 또 떨어지긴 진짜로 싫거든~? 뭐가 어떻게 됐든 간에, 난 이 녀석 옆에 있을 거니까 나머진 너희가 알아서 해~”
그런 카르네의 말에 침묵하는 셋이 보였다. 그리고 그런 셋의 눈치를 살피던 아샤랑 아냐가 슬쩍하고 손을 들며 카르네에게 물었다.
“저기 카르네, 아샤도 따라가도 될까?”
“아냐도 괜찮지?”
“응, 뭐~ 딱히 상관은 없어~?”
“잠깐만요. 아샤, 아냐! 그렇게 성급하게ㅡ”
아샤와 아냐의 선언에 당황한 루시아가 뭐라 말을 잇기도 전에 꾸욱하고, 카르네에 이어서 아샤와 아냐까지 내게 찰싹 달라붙으며 말했다.
“그치만 아샤도 오빠랑 같이 있고 싶은걸?”
“아냐도 떨어지기 싫어.”
“…후우.”
결국 그 모습을 본 루시아가 한숨을 내쉬는 것이 보였다. 아무리 루시아라고 해도 아샤와 아냐의 고집이랄까, 떼를 쓰는 것은 감당할 수 없는 모양이였다. 적어도 에루나쯤은 되야지 아샤와 아냐를 말릴 수 있겠는데 루시아에겐 안타까운 일이지만 에루나는 내 편이였다.
어쨌거나 카르네에 이어서 아샤와 아냐마저 날 편들기 시작하자 골치가 아프다는 얼굴인 루시아를 보면서 카르네가 히죽하고 웃는 것이 보였다.
“그렇다는데~? 그래서, 너희는 어쩔 건데~?”
꾸우욱하고, 그렇게 말하며 보란 듯이 내 팔을 가슴으로 감싸오는 카르네를 보고서 제일 먼저 손바닥을 뒤집은 것은 아르카였다.
“뭐어, 이러면 어쩔 수 없네에. 카르네랑 아샤, 아냐로는 불안하니까 나도 따라가 줄게에?”
“잠깐, 그거 무슨 뜻이야~?”
“글쎄에?”
티격태격하는 둘을 보고서 루시아가 쓴웃음을 짓고는 말했다.
“…이러면 어쩔 수 없네요. 알겠어요, 그렇다면 저도 따라가도 될까요? 이지경님.”
“응, 뭐… 이러면 별 수 없으니까.”
이제와서 루시아만 안된다고 하는 것도 그렇고.
아무튼 루시아마저 의사를 돌리자 남은 건 크리샤뿐이였다. 덕분에 모두가 크리샤를 쳐다보자 얼굴을 붉힌 크리샤가 말했다.
“…아, 알겠어! 알겠으니까 그렇게 쳐다보지 좀 말아줄래? 따라가면 되잖아!”
“으응~? 크리샤가 싫으면 그냥 있어도 상관없는데~?”
“카르네, 너…”
째릿하고 크리샤가 노려보자 날 방패 삼듯이 앞으로 내세우는 카르네.
크리샤는 나도 무서우니까 날 방패 삼아서 그러지 말아줬으면 좋겠다.
크리샤도 내가 뭐라고 한 것도 아니니까 노려보는 것도 관둬줬으면 좋겠고.
결국 카르네를 시작으로 전부 날 따라오겠다는 입장이 되자, 이젠 처음부터 끝까지 아무런 의견도 없던 샤르만 남아있을 뿐이였다.
“…샤르, 너는?”
내가 그렇게 보자 날 뚫어져라 쳐다보던 샤르가 이내 입을 열었다.
“……난 여기에 남아있을게.”
조금 고민하는가 싶었지만, 샤르는 천공성에 체류하기로 한 모양이었다. 뭐랄까, 일단 다행이라면 다행인데…
“그래서 이지경님? 카르네한테 달려고 했던 조건 말인데요. 지금 들어볼 수 있을까요?”
“아, 그거…”
루시아의 물음에 대답하려다가 머리를 긁적였다. 막상 설명하려니까 설명하기가 뭐했다.
“일단… 직접 보는 게 편하겠네.”
쩌억ㅡ
공간을 벌려서 인벤토리를 펼쳤다. 그리고 손가락을 까딱이자 척척, 인벤토리에서 여섯 구의 골렘들이 걸어 나왔다.
“이건…”
“잠깐만, 이게 뭐야?”
“헤에에?”
“이거 아냐네?”
“이건 언니고.”
“이런 건 대체 언제 만든 거야~?”
제각각, 자신의 모습을 똑같이 빼닮은 골렘들을 목격한 아내들의 반응에 내가 참회하는 심정으로 고백했다.
“아니, 저번에 말했잖아. 참느라 힘들었다고.”
생각보다 길어진 낙스에서의 시간 때문에 심심풀이 삼아 만들었던 건데… 막상 만들고 나니까 더 참기가 힘들어진다는 부작용이 있었지.
그도 그렇게 아내들을 똑 닮은 골렘들이다. 키부터 체형, 머리카락의 감촉 같은 거까지 최대한 똑같이 만들었더니 힘들어지는 게 당연하다는 소리였다.
덕분에 만들어놓고 고대로 인벤토리에 봉인했던 골렘들인데… 이렇게 다시 꺼내게 될 줄은 몰랐다.
신기하다는 듯이 골렘을 쳐다보거나 만져보는 아샤나 아냐, 그리고 내가 골렘을 꺼낸 이유를 대충 눈치챈 듯한 루시아와 너무 졸려 보이는 거 아니야아, 하고 중얼거리는 아르카까지 제각각 자신의 골렘을 확인하는 아내들을 뒤로하고서 크리샤가 물끄러미 골렘을 쳐다보다가 말했다.
“…흐으응. 잠깐만 확인 좀 해도 될까?”
“응? 아, 뭐 상관은 없는데.”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인 크리샤가 성큼성큼 다가가더니, 자신과 똑같이 생긴 골렘의 드레스자락을 들춰 올렸다.
“크리샤?”
“헤에… 속옷까지 입혀놨네? 어디 보자… 아, 이거 벗겨도 되지?”
“……상관 없긴한데.”
“그래, 그럼.”
내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슥슥, 아무렇지도 않게 골렘을 벗기기 시작하는 크리샤.
뭔가, 기분이 이상한데.
눈앞에서 크리샤가 크리샤를 벗기고 있는걸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한쪽은 그냥 골렘일뿐이기는 한데 일단은 똑같이 생겼으니 말이다.
“아, 없네.”
“뭐가?”
“보지 말이야.”
“?!”
갑자기 튀어나온 말에 사레가 들려서 기침을 하고 있자니 크리샤가 그런 나를 보면서 짓궂게 웃는 것이 보였다.
“난 또, 참기 힘들다고 만들었다길래 거기서 이런 거나 만들어서 혼자 해결하고 있었나 했네. 뭐, 그런 건 아니었나 보네.”
“그럴 리가 없잖아.”
어디까지나 보고 싶어져서 만들었을 뿐이였다. 막상 만들고 나니 참기 힘들어졌던건 사실이긴 한데, 그럴 목적은 없었다.
“뭐, 그럼 됐어. 나랑 똑같이 생겼다고는 해도, 이딴 거로 해결했다면 기분 나빴을 테니까.”
“어…”
“뭐야, 반응이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야.”
처음에야 그럴 목적은 없었지만, 이왕이면 그런 쪽으로도 구현해보려다가 참았던 걸 떠올렸다가 크리샤의 말에 하지 않길 잘했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