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0화 〉 370화 (完)
* * *
뚜벅뚜벅, 걸음을 옮겨 다다른 곳은 아버지가 있는 방입니다.
“들어갈게요.”
대답은 없습니다. 하지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눈이 부시도록 빛나고 아름다운 깃털을 가진 날개로 둘러싸인 아버지가 보였습니다.
저것을 과연 아버지라고 할 수 있다면, 그렇다는 소리지만요.
다만 저것을, 어머니들께서 아버지라고 부르라 하셨기에 그렇구나, 하고 여길 따름입니다.
하지만, 설령 그렇다고 해도 아버지로 여기기로 한 것은 맞기에, 그런 아버지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드립니다. 그러고는 조심스레, 나는 아버지의 앞에 무릎을 굽혀 앉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아버지를 바라봤습니다.
“저, 왔어요.”
여전히 대답은 없습니다.
“당신의 딸, 아이샤에요.”
여전히, 대답은 없습니다.
아버지는 제가 태어나기 두어 달 전에, 이 세계의 멸망을 막기 위해서 신이 되었다고 어머니들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고는, 정말로 신이 되셨는지 멸망할 예정이었던 세계가 멀쩡하게 바뀌어버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열려있던 마계와의 통로가 닫혀버리고, 보옥이 그 힘을 잃었음에도 이 세계가 무너지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다만, 그 탓으로 아버지는 신이 되어서... 저 위의 천상이란 곳에 올라가서 돌아오지 못했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어째서 아버지가, 굳이 아버지가 그 신이라는 것이 되셔야 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어머니들은 다만 우리를 사랑했기에, 그렇기에 그러하셨다고만 말씀하셨습니다.
정말로, 정말로 그랬던 걸까요?
아버지께서 정말로 우리를 사랑하셨더라면, 조금이라도 곁에 있어 주시는 것이 맞지 않았을까요?
이렇게 아무리 말을 걸어도 대답조차 할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 정말로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그런 건가요?
한 번은 그렇게 어머니들께 물은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질문을 드린 것을 후회했습니다. 내 말에 무척이나 슬픈 표정을 짓는 어머니들을 보는 것이 가슴 아팠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나를 끌어안으며 아버지께서는 진실로 우리를 사랑했다고만을 반복하며 말씀하시는 어머니들이, 울음을 참으며 떠는 모습을 보는 것이 안타까웠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깨달았습니다.
어머니들도 사실은 알고 계신 겁니다. 다만, 그렇게 믿고 싶은 것에 불과했던 겁니다. 아버지가 아직 여기에 있노라고, 설령 닿지도 보이지 않는 저 위에 있다고 한들, 그곳에서 자신들을 지켜보고, 또 지켜주고 있다고 그렇게 믿고 싶은 것에 불과했던 겁니다.
“천상에 계신 우리 아버지.”
정말로 그 위에 계신 것이라면, 다만 여기에 남은 것은 빈껍데기에 불과할지언정, 당신은 정말로 그곳에서 우리를 보고 계신다면.
그렇다면 아버지께 묻고 싶은 게 있어요.
“아버지는 정말로 저희를 사랑하셨나요?”
내가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검은 머리카락은, 동시에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렇기에 어머니들은 그런 나를 볼 때마다 항상 슬픈 표정을 지으십니다.
내가 가진 머리카락의 색을 볼 때마다, 당신을 닮은 내 모습을 볼 때마다, 당신을 떠올리기 때문에 항상 슬퍼지는 모양입니다. 하지만 어머니들은 내게 그런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십니다.
언제나 웃는 낯으로, 나를 보시려고 노력하십니다.
슬픔을 삼킨다, 책으로 읽은 그 표현이 어떠한 것인지, 저는 덕분에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표정을 짓는 이가, 사실은 얼마나 슬퍼하는지도 알 수 있었습니다.
그 모두가 아버지, 당신이 돌아온다 약속하시고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란 걸 알고 있으신가요?
제 자식을 보는 것조차도 슬퍼하는 어머니들을, 하지만 그런 티를 내지 않으려 슬픔을 삼키시는 어머니들을, 아버지는 가엾다고 여기지 않으시는 모양입니다.
“아버지... 대답해주세요. 정말로 거기에 계신다면... 한 번이라도 좋으니까요.”
하지만 언제나 같습니다. 아무리 바래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대답이 돌아올 리가 없다는 것쯤은.
어머니들께 아버지에 대한 것을 듣게 된 여섯 살 이후로, 그리고 이곳에 와서 아버지를 보게 된 이후로. 매일 같이 와서 물어보아도 대답이 들려오지 않는 이유는, 단 하나뿐입니다.
다만 당신이 천상에 거하시기에, 그 대답이 여기까지 닿지 않는 걸까 하는 어린 생각은 이미 버렸습니다.
막연하게, 그렇게 바랬던 희망도 버렸습니다.
이제는 저도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그곳에 계시지 않다는 걸.
아직 죽음이라는 개념을, 우리가 받아들이기 어려워할 것이라고 어머니들이 생각했기에, 그렇기에 아버지께서 그곳에 계신다고 우리에게 말씀하셨던 거겠죠.
어쩌면, 어머니들조차도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싫어서 그렇게 여기기로 한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아버지가 저 위, 천상이라 부르는 곳에 계시지 않는다는 것만은 확실했습니다.
아버지가 신이 되셨다고 한들, 그래서 그곳에서 오지 못하게 되었다고 한들, 신이라는 존재가 단 한번이라도 그런 어머니들에게, 그리고 나에게 무언가 증표라도 내려주지 못한다는 것은 말이 되질 않으니까요.
이젠, 저도 열 살. 어느 정도 진실을 알 수 있는 나이가 됐습니다.
아무리 이곳으로 와도 아버지가 돌아올 리가 없다는 것도.
눈앞에 있는, 저 아름다운 깃털로 둘러싸인 존재가 아버지였던 존재일지언정, 지금도 아버지인 것은 아니란 것도.
이제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데도 매일 같이 이곳에 오는 이유가 뭘까요?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곳으로 와서, 아버지를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해지는 기분이 들어서 그런 걸지도 모릅니다.
그것도 아니면, 아직 어린 제 동생들이...
저보다 훨씬 작은 주제에, 힘은 무진장 강하기만 동생들이 아직은 이곳에 들어올 수 없어서 그런 걸지도 모릅니다.
아니, 거의 대부분이 단지 그것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은, 네레시우스랑 에우리비아가 샤이나를 괴롭혔어요. 저랑 나이 차이도 거의 안 나는데, 왜 제 동생들을 그렇게 어린지 모르겠어요. 그나마 에네스타 어머니가 낳은 동생인 시아니아스는 저만큼은 아니더라도 어른스러운 편인데.”
그런 시아니아스와는 달리, 하나같이 말썽꾸러기들인 동생들은 정말이지, 저랑 몇 개월 차이도 안나는 동생들이라고는 여길 수 없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특히나 말썽이 많은 것은, 아샤 어머니와 아냐 어머니가 낳은 동생들인 네레시우스와 에우리비아입니다.
아샤 어머니와 아냐 어머니도 그런 경향이 없잖아 있긴 하지만. 성격도 유전이 되는 걸까요?
“아무튼, 그 두 녀석은 특히나, 정말로 말을 지지리도 안 들어요. 제일 작은 동생인 샤이나를, 그것도 둘이서 괴롭히다니요. 그 두 녀석은 놀아줬다고하지만, 그랬다면 샤이나가 그렇게 울었을까요? 언니랑 오빠가 됐으면 그러면 안 되잖아요? 그래서, 제일 큰 언니인 제가 꿀밤을 때려줬더니, 둘이 덤비지 뭐에요?”
그래서 꿀밤을 두 배로 때려줬어요.
아버지께 하는 이야기는, 맨 처음의 하소연을 제외하곤 대부분 이런 식입니다.
오늘 있었던 일, 내가 한 일들, 어머니들의 일들, 그 밖에도 여러 가지를, 혹시나... 어쩌면, 하는 마음으로 아버지께 이야기합니다.
“...그랬더니 제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더라고요. 그래서 발로 차 줬죠.”
키도 제 절반도 오지 않는 쪼만한 것들이 힘만 세다고 덤벼대면 그렇게 당하는 법입니다. 자고로, 싸움이란 것은 힘이 아니라 머리로 하는 법이라고 에네스타 어머니와 에루나가 가르쳐줬습니다.
제가 그 둘보다 다리가 길고, 팔이 길다는 건 큰 장점입니다.
그게 아니꼬우면 자기들도 자라라고 하든지요.
나랑 몇 개월 차이도 안나면서 그렇게 작은게 잘못한 겁니다.
그렇게 차더라도, 그 둘은 간지럽지도 않은지 계속 덤벼들긴 했지만요.
네, 맞습니다. 아무리 싸움이 힘이 아니라 머리라고 하더라도. 힘이 없으면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긴 하니까요.
싸움이란 본디 그런 겁니다.
적어도 꿀밤을 먹이던, 다리로 걷어차던, 아무런 피해도 주지 못하면 성립되지 않는 법입니다.
결국 저는 우는 샤이나를 안고서 도망치듯 어머니들에게 달려가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네레시우스와 에우리비아, 그 말괄량이 녀석들도 어머니들 앞에서는 꼼짝도 못하니까요.
어머니들 중 한 분만이라도 나서도, 그 둘은 지옥의 꿀밤을 경험하게 되니까요.
“...왜 저는 이렇게 약한 걸까요?”
제 어머니, 크리샤 어머니는 어머니들 중에서도 가장 강한 드래곤이라고 하셨습니다. 실제로도 그렇고요. 그런데, 그런 어머니의 딸인 저는 제 동생들보다 훨씬 약합니다.
동생들보다 성장만 빠를 뿐이지, 힘은 제일 어린 샤이나보다도 약합니다.
성장이 빠른 덕에 에네스타 어머니와 에루나에게 먼저 단련을 받아서, 그 이점을 가지고 동생들과 어느 정도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이지... 네레시우스와 에우리비아, 그 악동들에게 잘못 걸리면 엄청 고생하게 되는 겁니다.
이래서야, 가장 언니라는 위엄이 사라질 지경입니다.
“아버지가 오셔서 그 두 녀석 좀 어떻게ㅡ 아...”
무심코 내뱉었던 말을, 도로 삼키면서 아버지를 올려다봅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오늘은 이쯤으로 할게요. ...안녕히 주무세요.”
그곳에서도, 혹은 어딘가에 계실지도 모르는 아버지가 있는 곳이 밤일지 아닐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그렇게 인사하고선 몸을 일으켜 세웁니다.
그리고, 그때였습니다.
땅이 흔들렸습니다.
“지진...?”
그럴 리가 없습니다.
여기는 천공성.
하늘을 떠다니는 천공성이었습니다. 지진 같은 게 일어날 리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성이 흔들리는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아...”
그리고, 저는 보았습니다.
스르륵, 하고 날개가 서서히 펼쳐지고 있음을.
“아이샤...!”
벌컥, 하고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제 어머니, 크리샤네아 어머니였습니다. 어머니는 그런 저를 안아 들고서 말했습니다.
“하늘이... 하늘이 열리고 있어. 그리고...”
그곳으로부터, 수많은 드래곤들이 넘어왔다고 어머니가 말했습니다.
드래곤이라니?
어머니와 저희를 제외하곤, 이 세계에 드래곤은 남아있지 않은데.
아니, 그보다 저는 말해야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어머니, 아버지가ㅡ”
“혹시 모르니 우선 피신해있으렴. 에루나가 너희를 지켜줄거야.”
그렇게 말한 어머니의 몸 위로 마력이 솟구쳤습니다.
저보다, 수십 배... 아니, 수백 배는 많은 마력을 흘리며 어머니가 말했습니다.
“...너희들은 반드시, 그 바보 녀석이 지켜줄 테니 안심하렴.”
그것이 어머니가, 단지 그렇게 됐으면 하고 바라고 있는 것임을 저는 알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를 다시 봅니다.
서서히 펼쳐지고 있었다고 생각했던 날개는, 움직이지 않고 있었습니다.
제가 잘못 본 거였을까요...?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느닷없는 지진에, 무서움을 느껴버려서 무심코 그렇게 여겼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보다, 아이샤. 아버지라니?”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동생들을 데리고 에루나한테 가볼게요.”
“...그러니, 고맙구나. 아이샤.”
그렇게 말하며, 어머니는 제 이마에 입술을 맞췄습니다.
“사랑한다, 아가야. 나의 보물.”
“...저도 사랑해요, 어머니.”
“정말이지, 이럴 땐 예전처럼 엄마라고 불러주렴.”
그렇게 말하며 살포시 웃은 어머니가 저를 내려주었습니다.
뿌득, 뿌드득하고. 그런 어머니의 몸이 서서히 거대해져갑니다. 용화, 본신의 모습으로 돌아갑니다. 저나 동생들은, 아직은 드래곤의 모습을 취할 수 없었습니다. 부분적으로는 가능했지만, 전부는 아직 무리였습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피가 많이 섞여있기 때문이라고, 어머니들은 말씀하셨습니다.
...저희가, 드래곤이 될 수 있었더라면.
지금의 어머니를 도와줄 수 있었을까요?
“가렴.”
“...네, 엄마.”
저는 고개를 끄덕이고서 그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달렸습니다.
우선 제일 어린 동생, 샤이나부터 챙겨야 합니다.
“왔나요?”
이미 거대한 용의, 황금빛의 깃털을 가진 황금용의 모습으로 돌아가있는 루시아의 말에 크리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샤에게 다들 데리고 에루나의 곁으로 가라고 했어.”
“...다행이네요. 하지만.”
저 멀리 하늘을 올려다보는 루시아를 따라 하늘을 본 크리샤는 침음성을 흘렸다.
하늘 가득을 메우고 있는 수많은 드래곤들이 보였다.
하나같이, 전대의 드래곤의 힘을 물려받아, 일반적인 드래곤들의 두배나 강한 자신들보다 훨씬 강한 드래곤들이.
“...어때?”
“...막을 수 없을 것 같아요. 그동안 준비해두었던 안배들을 모조리 쏟아부어도, 하나는 쓰러트릴 수 있을까 싶네요.”
“그래.”
그 바보 녀석이 지킨 세계였다.
자신을 바쳐서, 끝끝내 지키고서... 결국 돌아온다 약속해놓고서 돌아오지 못한 바보 녀석이 지켜준 세계였다. 우리들과 아이들을 위해서.
그런 세계가, 어디에서 온 지도 모를 드래곤들로 가득 했다.
“...지켜야지. 그 녀석이 그랬던 것처럼. 설령 목숨이 다한다고 하더라도.”
아이들은, 에루나가 데리고서... 그 바보 녀석을 소환했던 마법진이 있던 방으로 향하게 해뒀다.
우리들이 모두 죽는다면, 우리들의 마력으로 하여금 마법진이 발동되서... 그 바보 녀석이 왔던 세계로 아이들만은 피신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때, 한 드래곤이 하늘을 배회하다, 이윽고 천천히 내려왔다.
그 모습에 하나같이, 숨결을 토해낼 준비를 하는 자매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크리샤 역시, 숨결을 토해낼 준비를 했다.
그리고...
“......”
서서히 내려온 붉은 용이, 카르네보다도 훨씬 몸집도 크고, 그 힘도 커다란 드래곤이 입을 열었다.
“...당신들이, 바로 그...”
다가온 드래곤의 시선이 무언가 이상했다.
적대심이라고 하기엔 애매했지만, 그렇다고 이쪽을 좋게 보는 듯한 눈은 아니었다. 그러나, 명백하게 이쪽을 공격하려는 생각은 없는 그런 느낌의... 이런 걸 어디서 봤었더라?
어디서 많이 보았던 시선의 정체를 크리샤가 떠올리려던 찰나에, 드래곤이 말했다.
“...저는, 라그나로아.”
펼친 날개를 접으며, 고개를 숙인 드래곤이 말했다.
“역병을 먹어치우는 자, 죽음을 마시는 자, 포악한 신들의 포식자, 모든 용들의 아버지.”
하나같이 어마무시한 이름들이 드래곤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설마, 자신의 위업으로 위협하려는 걸까 하던 생각은, 마지막에 있던 아버지라는 말에 의문을 갖게 했다.
명백하게, 눈앞에 있는 드래곤은 여성성을 지니고 있었다.
근데, 아버지?
“......그리고, 제가 사랑하는 분. 위대하신 베헤노스의 반려들을 뵙습니다.”
“.........뭐?”
시간을 멈춘 듯, 라그나로아라고 밝힌 드래곤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크리샤는 멈칫했다. 그리고, 미처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주변에 있던 자매들이 입을 열었다.
“뭐라고요? 지금, 뭐라고 했죠?”
“지그음, 내가아... 뭘 잘못들었나아?”
“이 빨갱이가 지금 뭐라고 한 거야~?”
“카르네, 너도 빨개.”
“맞아, 너도 새빨가면서.”
“시끄러워~?! 지금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니잖아~?!”
“...맞아, 지금은 그것보다. 어째서 그 이름을 저자가 아는지가 중요해.”
“...응, 그 이름은 우리밖에 모르는 거니까.”
샤르와 로로의 말대로였다.
베헤노스.
그리운 이름이었다.
그건 그의 이름, 이곳에서... 우리들이 그에게 지어주었던 이름이었으니까. 그랬던 이름이, 저 드래곤의 입에서 나올 줄은 몰랐지만.
하물며,
“사랑하는 분, 이라고 했지. 지금?”
난생처음 보는 드래곤이, 그런 그를 사랑한다며 말하는 것도 몰랐지만.
이제야 알았다.
자신들을 바라보았던, 저 드래곤의 시선이 어떤 건 줄.
그건...
질투하는 눈이었다.
자신이 갖질 못한 걸, 남이 가진 것을 보고서 부러워하는 눈. 그 바보 녀석이, 다른 여자를 안고 있을 때, 언제나 그런 그를 지켜봤을 때, 나 또한 그런 시선으로 그들을 보았으니까 잘 알고 있었다.
그렇구나.
그 녀석이 살아있었다.
아니, 살아있다고는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이곳에 남기고 가버린 그것이, 그 녀석이 아님은 알고 있었다. 분명, 이곳에 있으나 그는 다른 어딘가에 있음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떤 이유로 이곳에 오지 못하게 됐다고 그렇게 여겼다.
그랬는데...
...그랬는데, 뭐?
10년간 어딘지도 모를 곳에서, 그래, 우리들을, 지 자식들을 내팽개쳐놓고서... 딴 여자를 꼬셨다 이거지?
“...이 새끼가?”
움찔, 하고 서슬 퍼런 크리샤의 으르렁거림에 라그나가 몸을 떨었다.
눈을 뜨자 보인 것은, 꿈에서나 보아왔던 내 침실의 모습이었다.
“이야... 이게 얼마 만이야.”
정말로 오래 걸려서 돌아왔다.
이쪽의 시간으로는... 고작 10년밖에 지나지 않았다 싶었지만, 사실 10년밖에 지나지 않았다고 하기엔 조금 그랬다.
무려 10년이나 지나버렸다고 하는 것이 옳겠지.
...정말로, 오래 걸려서 돌아와 버렸다.
“...그나저나 좀 좁은걸.”
방이 좁아졌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여전히 나 혼자 쓰던 방이었던 것치고는 이걸 방이라고 해야 할지, 저택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넓었으니. 사실 내 방을 나 혼자 쓰던 경우는 얼마 안 됐지만, 아무튼 그러했다.
좁아진 건 방이 아니라 내 육신 쪽이었다.
신의 육체로 만들어지고, 신의 육체로 완성되었던 몸이었는데, 그 안에 날 집어넣으려했더니 꽉 끼는 옷을 입은 것마냥 몸이 영 익숙하지 않았다.
“너무 먹었나...”
먹기는 진짜 많이 먹었지.
하물며 내 절반은 이미 천상에 있는 권좌에 앉은 상태로 나머지 절반만이 내려온 것인데도 이랬다. 전부 내려오려고 했더라면 몸이 버티지 못하고 터지지 않았을까 싶었다.
“우선...”
날개를 접었다. 그리고, 괜히 눈부시게시리 빛만 뿜어댈 뿐인 고리도 집어넣었다.
“음...”
그리고는, 가장 먼저 아내들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확인했다.
곧 그녀들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미리 기별하러 보냈던 라그나 녀석의 곁에 다들 모여있는 것이 느껴졌으니까. 마음이 조급해서 너무 서둘렀는지, 내가 돌아온다는 것을 미처 전해 듣지는 못한 듯 천공성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곳에 있는 아내들을 보고는 입맛을 다셨다.
눈을 뜨자 보인 것이 사랑하는 아내들의 얼굴이 아니었다는 건 조금 아쉬웠지만, 미리 말을 하지 않고 돌아온 내 탓이 크니 할 말은 없었다.
“뭐, 돌아왔다는 게 중요한 거지.”
딱히 누가 날 부른 것도 아니었는데, 예상보다 빠르게 내려 와버렸지만 그게 나쁘단 건 아니었다.
어차피, 금방 내가 있는 곳으로 다들 올 테니...
“저건, 에루나겠고. 그 곁에 있는 건...”
몸을 움직이는 것에 익숙해지는 겸, 기감을 더더욱 넓게, 더더욱 날카롭게 펼치자 몇 중이나 되는 결계로 둘러싸인 방에 에루나와 익숙하면서도, 처음 느끼는 기운들이 잔뜩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저건...
“...내 아이들이겠네.”
기운을 느낀 것만으로도 얼추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알 수 있어서, 더더욱.
직접 내 눈으로 아이들을 보고 싶었다.
나는 내 모습을 살펴봤다.
오랫동안 잠들어있던 셈이나 마찬가지인 내 몸은 먼지 한 톨 없이 말끔했다.
즉, 이대로 아이들을 보러 가도 아무 문제 없었다.
조심스레 아공간도 살펴봤다.
아공간 안에 넣어두었던 물건들도 멀쩡했다. 여러 차원을 오가면서, 아내들과 아이들을 위해 챙겨놓은 이러저러한 것들이 잔뜩, 정말로 잔뜩. 거의 무한하다시피한 아공간에 가득하게 있었다.
“좋아.”
어째 장기출장 갔다 와서는, 아이들에게 밉보이지 않도록 장난감을 사서 들어오는 아버지 같은 모습이 됐지만... 이걸로 마음이 풀린다면 오히려 그편이 싼 편이었다.
내 경우엔 장기출장은커녕, 10년 동안 얼굴도 비추지 않았던 아버지였으니까.
고작 이런 거로 용서받기를 바라는 것조차 사치였다.
단지, 조금은 서러웠던 마음을 달래줬으면 싶을 뿐이었다.
...괜찮겠지?
괜찮기를 바란다.
“...아버지, 죄송해요.”
아주 먼 옛날ㅡ 정말로 아득하게 먼 옛날, 내가 마냥 꼬맹이었던 시절에 장기출장을 다녀왔던 아버지를 가리키며 저 아저씨 누구냐고 말했던 것이, 그런 아버지께 얼마나 상처였을지 지금은 뼈저리게 알 수 있었다.
나도 나를 처음 본 아이들이 나를 보며 아저씨 누구냐고 말한다면 그 자리에서 죽을 정도로 고통스러워할 것이 분명했다.
“후우...”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으로 대신격인지 뭔지 하던 놈을 잡아먹었을 적에도 이렇게 긴장되지는 않았는데. 하지만 마냥 이러고 있을 수는 없으니.
“간다.”
나는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에 아이들이 있는 방에 도착했다.
몇 중으로 결계를 펼쳐놨던 하등 상관없이 내가 그곳으로 가고 싶다고 생각하는 순간, 나는 거기에 있을 수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갑작스레 결계를 넘어서 들어온 나를 본 에루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런 에루나의 곁에 있는 아이들의 모습이 보였다.
제일로 큰 아이는... 아이샤인가.
크리샤를 닮아서 조금 고집 세 보이는 얼굴을 한 작은 소녀를 바라본다. 크리샤가 로리화했을 때랑 닮았다면 닮았지만, 좀 더 어른스러워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에루나가 안고 있는 제일 어려 보이는 아이도 바라봤다. 은색으로 반짝이는 머리카락을 가진 작은 꼬마가 에루나의 품에 안긴 채로 나를 보고 있었다.
아이샤랑 비교하면 기껏 해봐야 몇 개월 차이에 불과한데, 성장의 차이는 거의 대여섯은 되어 보였다.
그나마 아이샤의 또래로 보이는 건...
내 시선이, 금색에 은은하게 섞여 있는 녹빛 머리카락을 가진 소녀에게로 향했다. 금방, 그 소녀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에네스타와 내 아이, 시아니아스일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런 시아니아스의 손을 꼭 붙잡은 채, 시아니아스보다 머리 하나는 더 작은 주제에 마치 시아니아스를 지키듯 서 있는 푸른 머리카락의, 서로 꼭 닮은 남자아이와 여자아이를 보았다.
네레시우스, 에우리비아.
물처럼 자유롭게 자라기를 바랐던, 나와 아샤와 아냐의 아이들.
몸집도 더 작으면서, 보아하니 자신들이 시아니스보다는 몇 개월 먼저 태어났다고 동생을 지키기 위해 저러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셋의 앞에 서 있는 녹색 머리카락의 남자아이는... 루카르디네임이 틀림없었다. 어머니인 아르카를 닮았는지 다소 졸려 보이는 눈을 보니 더더욱 확신했다.
저 아이는 나와 아르카의 아이였다.
마지막으로, 루카르디네의 곁에서 불퉁한 표정을 짓고 있는 붉은 머리의 남자애와 황금빛의, 루시아를 꼭 빼닮은 아이는 카르네와 루시아 사이에서 태어난 내 아이들인 카르데오르와 루미나오스가 분명했다.
잘 자랐구나.
내가 떠나있었던 10년이란 시간이 짧지 않았음을 그제야 체감했다.
셀 수도 없는 수많은 세월을, 차원과 차원 사이를 돌아다니며 보내왔기에 무심코 짧다 여겼던 그 시간이, 결코 짧지 않았음을 그제야 느꼈다.
저 아이들이 자라는 모습을 곁에서 보고 싶었다.
아이들이 기뻐할 때, 슬퍼할 때, 아파할 때, 그 곁에서 지켜봐 주고 싶었다. 아버지로서, 그런 아이들과 같이 기쁨을 나누고, 슬픔을 달래고, 아파하는 것을 위로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래 주지 못했다.
잘, 자라주었구나.
내가 없이, 아버지 없이 잘 자라준 아이들이 대견스럽고 한편으로는 또 서러웠다.
저 아이들이 자라는 동안, 나는 아이들의 곁에 있어 주지 못했다.
그것이 설령, 아이들을 위한 선택이었다고 하더라도 그것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나는, 저 아이들과 보낼 수 있었던 10년을 영영 잃어버리고 말았다.
“나는...”
흐를 리가 없는 식은땀이 흐르는 기분이 들었다. 입술이 바싹 마르는 느낌이라 좀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내가 너희들의 아버지라고 말하고, 챙겨왔던 선물을 나눠주는 것까지 전부 미리 생각하고서 여기에 왔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나를 과연, 아버지라고 저들이 불러줄까?
10년이란 세월 동안 아버지다운 일을 한 번도 해준 적이 없는, 난생처음 보는 나를?
그리고 그런 나를 보던 에루나가, 한숨을 내쉬고서는 곁에 있던 아이샤의 어깨를 두드리는 것이 보였다.
“아이샤 아가씨.”
퍼뜩 놀란 듯 어깨를 움츠리는 아이샤에게 에루나가 말했다.
“...저분이, 아가씨의 아버님. 저의 주인님이신 이지경님입니다.”
“아, 버님...?”
혼란스러운 얼굴로 나와 에루나를 번갈아 보던 아이샤가 중얼거렸다.
“아버지는, 돌아가셨다고만 생각했는데...”
부우욱!
어디선가 무언가가 찢어지는 듯한 소리가 들리는 기분이었다.
내 여린 마음이 갈기갈기 찢기는 소리였다.
“쓰읍...”
과연, 10년이나 얼굴을 비추지 않은 아버지다. 자식이, 그런 아버지를 죽은 줄 알아도 이상할 건 없는 일이었다.
근데 너무 아팠다.
처음으로 잡아먹었던 대신격에게 내 몸이 반으로 찢겼을 때보다 고통스러웠다. 딸아이로부터 우리 아버지는 죽었다는 소리를 듣는 것이 이런 기분이었나.
뿌린 씨앗이 열매를 맺는 것처럼, 자업자득이나 마찬가지였지만 다시는 듣고 싶지 않은 소리였다.
그래, 다시는.
“...그런 말씀을 하시면 주인님께서 상처받으십니다.”
그런 에루나의 말에 아이샤가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을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발걸음을 떼어 내게 다가왔다.
내 앞으로 다가와서, 나를 올려다보던 아이샤가... 조심스레 내 옷 끝을 꼬옥 손에 쥐었다.
작은 손이었다.
그 작은 손이, 어색하게 내 옷 끝을 붙잡고 있었다.
차마 끌어안는 것조차 조심스러워서, 의심과 의혹 사이에서 결정한 끝에. 아주 조금 양보한 끝에 그러기로 한 것처럼, 단지 내 옷의 끝만을 붙들어 잡은 아이샤가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당신이, 정말로 아버지인가요?”
“...그래.”
나는...
저 수많은 차원을 무너뜨리고, 그 수많은 차원에서 핍박받던 드래곤들을 구한 용 해방자가 아니었다.
신들을 먹어치우고, 역병을 먹어치우고, 죽음을 마시던 포악한 영원히 탐식하는 자도 아니었다.
그저, 이 아이들의 아버지일 따름이었다.
몸을 낮춘다. 그리고는 눈앞에 있는 작은 몸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한참을 머릿속에서만 맴돌기만 하던 말을 입 밖으로 꺼냈다.
“너무 늦게 돌아와서 미안하구나.”
그리고 그런 내 말에, 작게 아이샤의 몸이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아, 아버지...”
조금은, 어색하게. 그렇게 떨리는 목소리로 그렇게 내뱉은 아이샤가 물었다.
“정말로... 정말로, 아버지세요...?”
“그래.”
“정말로... 돌아오신 건가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나를 올려다보던 아이샤가 눈물을 글썽거렸다.
“...꿈, 같은 건 아니겠죠? 사실은, 전부 꿈이었던 건 아니죠?”
그런 아이샤의 물음에 내가 떠올린 것은, 내가 아직 어릴 적의, 무서운 꿈을 꾸었을 때의 일이었다. 아직 어렸던 나는 꿈과 현실을 분간하는 게 어려워서 악몽에서 깨어나고 난 뒤에도 한참을 무서워하며 울었다.
그때, 나의 아버지는 그런 나를 이렇게 달래주셨었다.
나는 아이샤의 손을 잡아다가 내 얼굴에 올렸다. 내 얼굴에 손가락이 닿자, 흠칫하는 아이샤의 손을, 그 위를 내 손으로 덮으며 내 얼굴을 만지게 했다.
“어떠니? 이래도 꿈을 꾸는 것처럼 느껴지니, 아이샤?”
“아, 아... 아아...”
조심스레, 그런 내 얼굴을 더듬던 아이샤가 눈물을 흘렸다. 눈물을 흘리며 연신 내 얼굴을 더듬던 아이샤가, 이윽고 내 품을 끌어안았다.
“아버지...”
내 품에서, 웅얼거리듯 그렇게 말하는 아이샤에게 대답했다.
“그래.”
“정말로... 정말로...”
“그래, 정말로... 여기 있으니, 안심하렴.”
꼬옥, 하고 그런 아이샤를 더욱 강하게 안아주며 말했다.
“다시는, 이제 다시는 어디 가지 않을 테니. 언제나 곁에 있어 줄 테니.”
그런 내 말에 아이샤가 울었다.
울면서, 연신 아빠, 아빠하고. 한 번이라도 말해보고 싶었다는 듯이, 그저 아빠하고 나를 부르며 서럽게 우는 아이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한참을, 한참을 그렇게 쓰다듬었다.
“내가 네 아빠란다. 아이샤.”
10년이나.
아무런 소식도 없었으면서.
돌아온다고 약속해놓고서.
반드시, 반드시 그러겠다고 약속했으면서.
그런데, 뭐?
스스로 라그나로아라고, 이름을 밝힌 드래곤의 말이 떠오른다.
‘......그리고, 제가 사랑하는 분. 위대하신 베헤노스의 반려들을 뵙습니다.’
사랑하는 분.
그렇게 말한 드래곤은, 누가 보더라도 사랑을 하는 여자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자그마치 10년이었다. 아무런 소식도 없던 남편이 돌아온다고 한 약속만을 믿고서, 그저 마냥 기다리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할 수 있는 거라곤 그저 그뿐이었던 10년이었다.
그렇게, 10년.
해가 바뀔 때마다, 썩어문드러져가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지내온 그 10년 동안, 녀석은 웬 드래곤을 꼬셔서 돌아왔다.
그 사실에 분노한 크리샤는 있는 힘껏 문을 걷어찼다.
콰앙!
결계째로 산산조각이 나서 나뒹구는 문 너머로 그 바보 녀석의 모습이 보였다.
10년이나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기억하고 있는 마지막 모습과 전혀 다른 바 없는, 그때 그 모습 그대로인 녀석이 울고 있는 아이샤를 부둥켜안고 있었다.
“......”
아니, 아이샤만이 아니었다. 한 손으로 아이샤의 등을 토닥이며 달래는 녀석의 다른 팔에는, 아직 한참이나 어려 보이는 샤이나도 안겨 있었다.
더군다나 양팔로도 모자라서, 오른 다리와 왼 다리에는 각각 네레시우스와 에우리비아까지 대롱대롱 매달기까지 한 녀석의 머리 위에는 목마를 타고 있는 카르데오르까지 있었다.
그나마 루카르디네는, 혼자 구석에서 책을 읽고 있었지만... 저 아이는 언제나 저래왔으니까 그러려니 할 수 있었다.
아르카의 게으름 부리는 성격을 그대로 물려받아 버린 아이였으니까.
그리고 마지막.
보이지 않는 시아니아스를 찾던 크리샤는 녀석의 등 뒤에 업힌 채로 새근거리며 잠들어 있는 시아니아스를 보고서, 더이상 화가 나지 않게 되어버렸다.
화를 내기엔, 너무 맥이 빠지는 광경이었다.
그리고, 녀석과 눈이 마주쳤다.
쭈우욱, 하고 머리 위에 올라탄 카르데오르에게 양 뺨이 붙잡혀 잡아당겨 지면서, 녀석이 입을 열었다.
“...다녀왔어.”
그리고 그런 녀석을 보면서, 크리샤는 몇 번이나, 몇 번이나 말하고 싶었던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늦었잖아. 이 바보, 멍청이.”
그리고, 뒤늦게서야 실감이 되기 시작했다.
녀석이 돌아왔다.
10년이나 지났지만, 그래도 돌아왔다.
“너무, 너무 늦었잖아... 흑...!”
휘둥그레 눈을 뜨고는, 울기 시작한 자신을 바라보는 아이들이 보였다. 놀랐을 것이다. 아이들에게난 언제나 엄격하고, 무서운 어머니였을 테니까. 녀석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서, 아버지의 역할을 하던 것이 나였으니까.
하지만 이제 상관없었다.
더이상 아버지 역할을 대신할 필요도, 이유도 없어졌으니까.
녀석이 쓴웃음을 짓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아이샤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네 엄마도, 너처럼 울보구나.”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이, 멍청이!”
여전히 얄밉고, 한 대 쥐어박고 싶은 말만 골라하는 녀석에게 안겨서크리샤는 한참이나 울었다.
돌아왔구나.
정말로 돌아왔다.
10년 동안 잔뜩 쌓인 이야기들을, 아이들이 조잘거리며 내게 묻는 것들을 전부 대답해주다 보니 어느새 한밤중이 되어버렸다. 아직, 한참이나 이야기할 것들이 남아있는데도 그러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이제 시간이야 잔뜩 있었으니, 오늘 다 하지 못한 것들은 내일 또 이어서 하면 그만이었다.
“아빠...”
모처럼이니까 다 같이 자고 싶다며, 내 방에서 다 함께 누웠던 아이들은 이미 대부분 꿈나라로 간 지 오래였다. 하지만, 동생들이 대부분 잠들었는데도, 여전히 졸린 눈을 하고서도 좀처럼 잠이 오지 않는지 연신 뒤척이기만 하던 아이샤가 나를 불렀다.
“왜 그러니?”
스윽, 하고 몸을 돌려서 아이샤를 마주 보며 묻자, 그런 나를 올려다보다... 꼼지락거리며 내 품에 안긴 아이샤가 입을 열었다.
“...일어나면 사라지시거나 그러지는 않으실 거죠?”
불안함을 숨기지 못한 채로, 그렇게 묻는 아이샤. 어째서 아이샤가 그토록 수마를 참아가면서 잠들지 않고 있었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되자 가슴이 먹먹해졌다.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서, 그런 아이샤를 안아주었다.
“그래, 다시는 사라지지 않으마.”
진심을 담아서 그렇게 말하자 살짝 떨리던 아이샤의 몸이 차츰 진정되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이윽고, 그렇게 한동안 내 품에 안겨있던 아이샤가 말했다.
“...그럼, 제 소원을 하나만 들어주세요. 아빠.”
“소원?”
“네, 들어주실 수 있죠? 약속해주세요.”
약속.
...어째 뭔가 느낌이 좋지 않은데, 대답이 없는 나를 보더니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은 얼굴로 올려다보는 아이샤를 보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 아이샤. 약속하마. 무슨 소원이니?”
“약속하신 거죠?”
“그럼.”
쏘옥, 하고 그런 내 품에서 벗어나는 아이샤가 보였다.
“...으응?”
“이제 됐어요, 어머니들.”
그리고 그런 아이샤가 그렇게 말하는 순간이었다.
끼익, 하고 문을 열고서 들어오는, 아내들이 보였다. 거기까진 문제없었다. 문제 없는데... 차마, 아이샤가 보기엔 너무 엄한 차림이라는 게 문제였다.
“어...?”
“아버지, 소원을 들어주신다고 하셨죠?”
조금 전까지만해도 아빠, 아빠하고 날 불러줬던 귀여웠던 딸아이는 온데간데없이, 아이샤는 당황해하고 있는 나에게 그렇게 말했다.
“어, 어...?”
“제 소원은... 아버지.”
스윽, 하고 아이샤가 내 귓가에 속삭였다.
“...동생들이 잔뜩 생겼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그렇게 말하고선, 아이샤가 크리샤에게 말했다.
“이제 됐나요, 어머니?”
“잘했어, 아이샤. 역시 내 딸이 최고라니까.”
속았구나.
아이샤가 날 속였어.
할 말이 많았지만, 배신감에 사무쳐서 뭐라 말이 나오질 않는 나를 보며 아이샤가 미안하다는 듯이 말했다.
“어쩔 수 없었어요. 어머니들이 제가 선물했던 소원권을 사용하셨거든요.”
“소원권...?”
“...언제나 슬픈 표정인 어머니들이 조금이라도 기뻐해 줬으면 싶어서, 어릴 적에 드렸던 게 있었어요.”
그러니까, 반쯤은 아버지 때문인 거죠. 그렇게 말하는 아이샤의 말에 할 말을 잃어버렸다. 저렇게 말하는데 할 말이 있을 턱이 없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딸이 동심을 담아 선물했을 소원권을 이런 식으로 사용해버린다고...?
아니, 굳이 그러지 않아도 어차피ㅡ 응, 뭐 됐다.
내 손을 잡아당기며 일으켜세우는 아내들의 손에 잡아끌리면서 나는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그런 나를 본 크리샤가 키득거리며 말했다.
“딸의 소원인데... 모른 척 넘어갈 생각은 아니지?”
나는 그렇게 말하는 크리샤를 바라봤다.
“뭐, 뭐야...? 그렇게 쳐다봐도안 봐줄 거거든? 10년이나 늦었으니까, 그만큼 각오하라고?”
글쎄.
“봐달라고 할 사람이 누군지 두고 보면 알겠지.”
동생들이 잔뜩 생겼으면 좋겠다라.
...그 정도야 얼마든지 들어줄 수 있는 소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