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17)

2장. Ma Non Troppo

마 농 트로포 : 그러나 지나치지 않게

3형제 중 차남.

위로는 형, 아래로는 남동생.

장남으로서 거는 기대감도, 막내로서 받는 애정도 시후에게는 없었다. 그러니 무엇을 해도 형이나 동생만큼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어릴 때부터 일찍이 알아냈다.

시후는 부모님에게 자신을 사랑해 달라고 애걸복걸하지는 않는 대신 조용히 제 능력을 갈고닦았다. 사회에서도 어중간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꾸준한 노력은 빛을 발휘했다. 어떤 방면이든 최상위 성적을 유지했으며, 사람들과의 교류도 능숙했다. 거기에 예리한 눈썰미와 덤덤한 평정심, 그리고 누구에게도 눌리지 않는 카리스마는 시후를 눈에 띄는 인재로 보이게 했다.

만족스러웠다. 모두가 인정하는 엘리트. 쉽게 볼 수 없는, 단단한 힘을 가진 사람이 되었다. 시후는 앞으로도 이렇게 살면 된다고 자신했다.

그런데 왜일까.

느닷없이 고치에 갇힌 벌레가 된 기분이다. 뼛속까지 스며드는 감정은 무기력함이었다. 전에 없는 권태가 시후는 불쾌했다.

찾아야 한다.

끈덕지게 들러붙는 기분을 털어 낼, 숨통 트일 구석을 찾아야 한다.

시후는 그것이 확실하면서도 가벼운 수단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마치 일회용 물건처럼, 한 번 쓰고 갖다 버릴 만한 것으로.

* * *

시후는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은 채 이마를 짚고 있었다. 어젯밤 마신 와인의 숙취가 그를 괴롭혔다. 관자놀이는 터질 듯이 쑤시며 팔다리는 누구한테 맞은 듯 둔탁한 통증이 느껴졌다. 시후는 적 갈라진 목구멍으로 마른침을 넘기며 욕을 뱉었다.

“시발.”

건조한 목소리에는 자기혐오가 담겨 있었다. 이게 무슨 꼴이냐. 술로 스트레스를 풀려 했다고 합리화하기엔 정도가 지나쳤다. 무방비하게 마셔 댄 결과, 지금 자신은 어딘지도 모를 낯선 장소에 있었다.

손을 내려 주위를 신경질적으로 둘러보았다. 넓다고는 볼 수 없는 공간이었다.

투명한 아침 햇살이 쏟아지는 창문, 그 아래 위치한 책상과 책장 모두 처음 보는 것들이었다.

시후는 기침을 한 번 한 뒤 침대를 짚었다. 깨끗한 침대 시트 위에 있는 건 온기를 제외하곤 아무것도 없었다. 질척한 정액이나 콘돔 같은 게 발견되지 않은 것만으로 불행 중 다행이었다.

‘미리 치웠을지도 모르지만.’

인사불성이 된 재벌 3세라. 어디서 협박당할 영상이라도 찍힌 건 아닌지 모르겠다. 술에 취해 누군가를 때렸거나, 아니면 성적인 행위를…….

“성적인.”

혀를 움직여 방금 든 생각을 말로 뱉어 보았다. 어젯밤 있었던 일들이 섬광처럼 스쳤다.

‘가르쳐 줘요.’

‘키스.’

과거의 목소리가 귓구멍을 파고들었다.

‘여기도 약하구나.’

‘입천장과 목덜미. 또 어디가 약해요?’

인상을 쓴 채로 시후는 혀를 찼다. 대학생이자 친구의 바에서 일하는 아르바이트생. 모범생 같은 얼굴을 한 주제에 담배를 피우던.

그게 어울리지 않으면서도 묘한 느낌을 불러일으키던 남자애가 생각났다. 처음인 주제에 겁 없이 키스하던 그를 기억해 낸 순간, 등 뒤에서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따뜻한 음성이 울렸다.

“숙취 괜찮아요?”

이번에는 과거가 아닌 현재에 일어난 목소리였다. 부담스러움에 시후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꼭 오래 알고 지낸 사이처럼 쉽게 걱정하는 상대의 말투 때문이었다.

시후는 얼굴을 굳힌 채로 뒤를 돌아보았다. 경계 어린 시선을 받은 사람은 예준이었다.

아침 햇살 때문일까, 빛을 머금은 예준은 생기로 가득했다. 어젯밤보다 더 화사한 느낌을 뿜어내는 그는 단정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정돈된 머리 모양새, 깨끗한 얼굴, 구김 없는 옷차림이 하나같이 깔끔했다.

시후는 한숨을 삼켰다. 청량한 비누 향이 폴폴 날 것 같은 상대와 달리 제 꼴은 엉망일 게 분명했다. 그는 열기가 맴돌고 있는 이마를 쓸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윽.”

별안간 현기증이 훅 치받쳐 올랐다. 비칠거리던 시후는 무심결에 전신 거울을 바라보았다. 예감은 현실로 맞아떨어졌다. 헝클어진 흑발은 뻗쳐 있기까지 했으며, 불그스름한 눈 부근에는 피로감이 서려 있었다. 살짝 패인 뺨이 건조하게 말라 퀭한 느낌을 주었다.

“…….”

돌연 마주친 제 몰골에 어이가 없어 그는 말문이 막혔다. 가만히 노려보고 있는데 예준이 무언가를 내밀었다. 두 손으로 공손히 건네는 건 잔이었다. 매끈한 도자기 잔 안에는 맑은 물이 가득 담겨 있었다.

마시라는 뜻인 건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물을 응시하고 있자니 메마른 목구멍이 갈증을 호소했다.

시후는 고맙다는 의미로 고개를 까딱인 뒤 잔을 가져갔다. 따뜻하게 데운 물이 갈라진 목 안을 기분 좋게 적셨다.

“더 드릴까요?”

그렇게 묻는 예준은 어느새 제 양손을 모은 채 기다리는 자세를 하고 있었다. 꼭 웃어른이라도 떠받드는 것 같은 모습에 시후는 실소를 뱉었다.

“여기.”

목소리를 가다듬기 위해 시후는 잠깐 뜸을 들였다.

“……여기, 예준 씨 집인가요?”

무슨 생각을 한 건지 예준이 입꼬리를 당겨 올렸다. 선한 미소였으나, 이 상황을 즐기는 듯한 짓궂은 느낌도 없잖아 있었다.

“네.”

“내가 왜 여길…….”

“졸립다고 하길래.”

예준은 그것도 기억나지 않느냐는 표정으로 답했다. 살짝 웃음을 머금은 예준과는 달리 시후의 안면 근육은 그대로 굳었다.

“내가?”

현기증이 빠른 속도로 더해졌다. 잔 손잡이를 쥐고 있던 시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미쳤군.’

손등 위의 핏줄이 도드라진 채 시후는 자기 환멸을 느꼈다. 졸립다고 했다고? 어린애처럼 칭얼대며 상대를 괴롭혔을 자신이 어렵지 않게 그려졌다. 열기가 목덜미를 타고 귓바퀴 위로 올라왔다.

“두고 가지 그랬어요.”

그는 간신히 덤덤함을 가장한 목소리를 내었다. 예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다 큰일이라도 나면 안 되잖아요. 날씨도 추웠는데.”

“……현석이한테 전화하면 됐을 텐데.”

“사장님 바쁘시니까요.”

“그쪽이 바빠지는 건 괜찮고?”

예준은 바로 대답하는 대신 물이 담긴 주전자를 가져왔다. ‘쪼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물이 포물선을 그리며 잔 안으로 들어갔다. 시후는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을 멍하니 구경했다.

“걱정 마세요, 할 만했으니까.”

부드러운 음성이 시후의 귀를 간질였다.

“가게랑 가깝거든요. 업고 걸을 만한 거리예요.”

“업었, 다고요.”

시후는 드물게 말을 더듬어 버렸다. 매끄러운 언변을 구사하는 그로서는 좀처럼 없는 일이었다. 시후의 지인들이 알면 깜짝 놀랄, 혹은 흥미로워할 상황 속에서 예준은 순하게 눈만 깜빡였다.

‘가지가지 한다.’

취해서 애한테 업혀 갔을 모습이 어렵지 않게 그려졌다. 시후는 욕을 삼키며 물을 한 모금 더 마셨다. 그런 시후를 살피던 예준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렇게 안 부끄러워해도 되는데. 괜찮아요.”

너라면 괜찮겠냐? 시후는 잔에 입술을 댄 채로 한쪽 눈썹을 올렸다. 꼴사나운 몰골을 보였다는 사실에 신경이 송곳처럼 곤두세워졌다. 날카로워진 시선은 특유의 위압감이 있었으나, 예준은 주눅 들지 않았다.

“주정 같은 것도 없었고요. 여기 와서도 죽 주무시기만 했어요.”

물로 목을 축인 후 시후는 물었다.

“내가 부끄러워하는 것처럼 보였나요?”

“네.”

“왜?”

“귀가 빨개졌거든요.”

“…….”

혀를 씹을 뻔했다. 눈동자만 옆으로 돌리니 과연 빨간 귀를 한 자신이 거울에 있었다. 둥근 귓바퀴가 홧홧해진 걸 느끼며 시후는 눈을 천천히 감았다가 떴다. 잠시 후, 그의 입술 사이로 피곤해하는 음색이 흘러나왔다.

“미안해요, 고생시켜서.”

“괜찮다고 말씀드렸잖아요. 빈말 아니에요, 그거.”

예준은 문을 더 활짝 열었다. 그의 뒤로 다른 공간이 어렴풋하게 보였다.

시후는 그런 예준을 밀치며 건물 바깥으로 도망치고픈 충동이 들었다. 하지만 제 원하는 대로 행동하는 대신 시후는 다른 소리를 꺼냈다.

“욕실 좀 써도 될까요.”

아직은 예준을 믿을 수가 없었다. 정말로 잠만 잔 게 맞는지, 사실은 무슨 짓을 벌인 게 아닌지, 유예준 너는 그사이 무엇을 했는지 알아야겠다. 그래야 마음 한구석에 있는 찝찝함을 완전히 씻겨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쪽으로.”

시후가 머리를 굴리는 동안 예준은 욕실로 그를 안내했다. 고작 몇 발자국 걸으면 갈 수 있는 욕실 앞에서, 그는 이곳이 작은 투룸임을 어렵지 않게 깨달았다. 예준이 다시 방으로 들어간 사이 시후는 고개를 돌려 주변을 훑었다.

깨끗하게 정돈된 공간은 주인을 닮았다. 먼지나 자국 같은 것들이 없는 걸 보아 틈나는 대로 청소하는 게 분명했다. 말끔한 물건들과 바닥으로 이루어진 이곳에서 흐트러져 있는 건 시후 자신밖에 없었다.

그때, 시후의 시선이 어느 한곳에 고정되었다. 그의 시선을 잡은 건 식탁 위였다. 뭐라고 빽빽하게 메모된 악보와 클래식 공연 책자, 그리고 작은 액자가 있었다. 시후는 액자 안에 담긴 사진 쪽으로 고개를 수그렸다.

“…….”

거기에는 유예준이 있었다. 검은 정장 차림의 예준은 머리까지 옆으로 넘긴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사진 찍히는 줄도 몰랐는지 무언가를 응시하는 얼굴이 덤덤했다. 건조한 모습은 의외로 서늘한 느낌을 풍겼다.

“아!”

등 뒤에서 당황한 소리가 터졌다. 예준은 급히 식탁으로 걸어와 액자를 덮었다. 다른 손에는 곱게 개킨 옷가지들이 들려 있었다.

“봤어요?”

그렇게 묻는 예준의 뺨이 붉어져 있었다. 시후는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왜 이렇게 민망해하지. 보라고 올려 둔 액자 아닌가?”

“아……. 사실 제가 갖다 놓은 액자가 아니에요.”

예준은 멋쩍게 웃었다.

“저희 형이 둔 거예요. 치워 둔다는 걸 깜빡했네요, 부끄럽게.”

“왜 치워요, 보기 좋던데.”

시후는 어젯밤 피아노 치던 예준을 떠올렸다. 피아노 한 대로 많은 사람의 이목을 끌던 그는 마치 보석처럼 반짝거렸다. 건반 위에서 자유롭게 노닐던 손가락들을 회상하며 시후는 다시 입술을 움직였다.

“대회라도 나갔던 거예요?”

“뭐, 그렇죠.”

대충 대답하며 예준은 손에 들고 있던 것들을 그의 품에 안겨 주었다. 얼결에 받은 옷가지들에서 포근한 섬유 유연제 향이 났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날이 선 이미지인 시후에게는 도통 어울리지 않는 냄새였다.

그러나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거부하기엔 자신의 꼴이 지나치게 엉망이었다. 시후는 순순히 받으며 감사 인사를 건넸다.

“고마워요.”

옷을 받다가 서로의 손가락이 맞물렸다. 시후는 상대방이 놀라 숨을 멈추는 걸 느꼈다.

“잘 씻을게요.”

한마디 덧붙이자 예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는 1초 정도 정적을 지키더니 곧 어설픈 미소를 머금었다.

“편안하게 씻으세요.”

시후는 욕실 문을 닫기 직전, 우두커니 서 있는 예준을 쳐다보았다. 어느새 그는 뺨을 문지르며 바닥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여유가 사라진 예준은 어느새 바짝 긴장한 소년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탁.

문이 완전히 닫히고, 시후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떴다. 그래. 키스한 사이치고 너무 덤덤히 대한다, 싶었다. 심지어 저쪽은 첫 경험이라고 하지 않았나.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당시 나누었던 대화가 귀를 자극했다.

‘어때요. 뭐 좀 배웠어요?’

‘음, 잘 모르겠어요. 한 번 더 하면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입술을 붙였던 감각이 달콤하게 솟았다. 서로의 치아가 맞부딪쳤다가 떼어지던 순간도, 처음인 주제에 성큼 입속으로 들어오던 예준의 혀도 모두 기억났다.

단숨에 머릿속을 채워 버리는 기억들 때문에 어지러움이 더해졌다. 시후는 샤워기를 틀어 몸을 씻었다. 귓바퀴와 목덜미 위로 물이 미끄러져 떨어졌다.

‘그리고? 그리고 뭘 했지?’

취기에 정신이 혼미했던 나머지 이후가 기억나질 않았다. 마지막으로 떠오르는 건, 예준이 자신의 코트 안으로 손을 밀어 넣은 장면이었다. 시후는 깃털같이 가벼운 한숨을 뱉었다.

“……하.”

정말로 잠들어 버렸나 보다. 잠든 채 들쳐 업힌 자신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수치심이 들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해 본 적 없는 실수가 짜증을 불러일으켰다.

시후는 물에 젖은 손을 들어 얼굴을 신경질적으로 문대었다.

* * *

샤워를 마친 시후의 눈에는 차분함이 되살아났다. 당혹감과 불쾌감, 멋쩍음과 자기혐오 같은 감정을 눌러 낸 그의 눈동자에는 잔잔한 일렁임만이 깃들어 있을 뿐이었다.

그는 문만 살짝 열어 팔을 뻗었다. 바닥에는 예준이 줬던 옷가지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들을 집으며 시후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식탁 의자에 앉아 있던 예준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까 발견했던 악보들을 쥔 채였다.

“예준 씨.”

갑자기 부를 줄 몰랐는지 예준이 눈을 댕그랗게 떴다.

“네, 네?”

“그냥 불러 봤어요. 너무 빤히 보길래.”

예준은 황급히 “죄송해요” 하고 웅얼거리며 급히 시선을 거두었다. 시후는 악보를 뚫을 기세로 노려보는 그의 옆얼굴을 감상하다가 옷을 마저 집어 들었다.

잠시 후, 두 사람은 식탁을 사이에 두고 마주하게 되었다. 예준은 시후가 의자에 앉자마자 피아노 악보를 옆으로 치워 두었다.

악보를 보고 있자니 어린 시절 기억이 어렴풋하게 떠올랐다. 시후에게 있어서 악기 연주는 취미로도 남기 힘든 영역이었다. 건반을 눌러도 와닿는 건 희열이나 만족감 대신 짜증이었다. 제 손가락이 뜻대로 움직여지질 않는 게 부정적인 감정의 가장 큰 원인이었다.

그런 피아노를 자유롭게 다루던 상대가 새삼스레 신기했다. 어쩌다 피아노를 치게 되었을까. 시후는 수건으로 머리를 문지르다가 식탁의 달라진 점을 알아차렸다.

“액자 치웠네요.”

차갑고 예민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게 신선했는데, 그걸 금세 치운 모양이다. 예준이 쑥스럽다는 듯이 대꾸했다.

“아까 치워 놨어요. 다시 봐도 부끄러워서.”

풋풋하고 선한 목소리가 시후의 머리를 울렸다. 시후는 미소를 머금은 상대방의 얼굴 위로 시선을 굴렸다. 술 취한 사람과 초면에 혀를 섞을 정도로 난잡해 보이지 않았다.

물론 시후는 반듯한 느낌과 달리 여우같이 휘어지던 눈매와 야한 느낌을 주던 보조개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을 벽에 밀어붙이더니 먼저 입을 겹치던 대담함도.

“나랑 혀 섞은 건 안 부끄러웠고?”

시후는 생각나는 대로 말을 툭 뱉었다. 덤덤하다 못해 무심한 음성에 예준의 입매가 꿈틀거렸다. 상대가 대놓고 간밤의 일을 거론할 줄은 몰랐다는 반응이었다.

당황한 예준과 달리 시후는 평정심을 유지했다. 샤워하는 도중 감정을 잘 가다듬은 덕분이었다.

“예준 씨한테 키스한 것까진 기억하고 있어요.”

“아…….”

“고생했어요, 술주정 받아 주느라.”

“술주정이요?”

“그래요, 술주정. 맨정신으론 안 할 짓이에요.”

느릿느릿한 시후의 목소리가 한없이 고요했다.

“절대.”

예준의 매끈한 이마에 힘이 들어갔다.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기분이 좋아 보이지도 않았다.

“고생 안 했어요.”

잠시 후, 예준이 입술을 열었다.

“좋기만 했으니까.”

솔직담백한 고백이 시후로서는 꽤 신선하게 느껴졌다. 나도 저렇게 당돌할 때가 있었나? 머릿속을 되짚어 봐도 비슷한 일 같은 건 떠오르지 않았다.

고개를 비스듬하게 기울인 채 시후는 부드러운 미소를 그렸다. 인상 쓰는 예준에 비하면 나긋하며 여유롭기까지 한 어른의 웃음이었다.

“좋았다니 다행이고.”

“형은요?”

어제도 그러더니 오늘도 어김없이 ‘형’이다. 시후는 컵을 들어 물을 마신 뒤에야 대답했다.

“좋았냐고? 글쎄.”

“…….”

“기억이 잘 안 나서.”

반은 거짓이고, 반은 진실이다. 좋았다고 답하기엔 아쉬운 점이 많았다. 취기에 녀석의 혀뿌리를 제대로 빨아 보지도 못했다. 저 선홍색 입술을 음미할 시간 역시 부족했고.

“그럼.”

그때 예준이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이어 무언가를 말하고 싶은 건지 뜸을 들였다. 시후는 할 말 있으면 하라는 시선을 던진 뒤 컵 손잡이를 두드렸다.

톡, 톡, 톡.

“다시 할까요?”

손잡이를 건드리던 움직임이 멈췄다. 제안한 예준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입매 옆에 생기는 보조개에서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풍겼다. 꼭 고백이라도 한 듯이 멋쩍어하는 반응에 시후는 그를 말끄러미 바라만 보았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까. 침묵을 깬 사람은 시후였다.

“아뇨.”

“……왜요?”

흔들리는 눈동자를 한 주제에 다소곳하게 묻는 예준의 말씨가 마음에 들었다. 시후는 흡사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님처럼 느릿느릿하게 설명했다.

“말했잖아요, 맨정신으로는 안 할 짓이라고.”

“…….”

“예준 씨와 키스한 건 사고예요. 그걸 또 저지를 순 없죠.”

예준의 뺨과 귓불이 발갛게 물들어 갔다. 수치감이 역력한 얼굴에 시후는 실소를 삼켰다. 누가 보면 좆이라도 잡아 흔들어 준 줄 알겠다.

시후는 그의 성기 대신 잡고 있던 컵 손잡이를 놓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들어가는 움직임은 차분했다. 코트를 입으며 개켜 둔 제 옷가지들을 들어 보일 때도 마찬가지였다.

“잠깐만요!”

그 말과 동시에 등 뒤에서 의자 움직이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어느새 일어나 있는 예준의 낯빛이 어두웠다.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 돌이켜 보는 표정이 조금은 애처로웠다.

어쩔 수가 없다. 뒷일 생각하지 않고 저지르는 건 시후의 성격에 맞지 않았다.

크고 작은 일에도 머리를 굴리는 사람, 그래서 아무것도 잃지 않고 아무것에도 약점 잡히지 않으려는 인간. 그게 백시후였다. 어제야 술에 취해 사고 쳤다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지극히 맨정신인 상태에서, 시후는 본래의 성격대로 행동했다.

“궁금한 게 있는데.”

“…….”

“어젯밤, 예준 씨한테 잘못한 게 정말 없나요?”

예준은 눈을 반쯤 내리떴다.

“네, 없었어요. 걱정 안 하셔도 돼요.”

그러나 시후는 그렇냐며 안도하는 대신 목소리를 한결 낮추었다.

“그럼 예준 씨가 나한테 잘못한 건?”

“……네?”

“자는 사이 손을 댔다거나, 이상한 영상이라도…….”

“지금, 무슨 의도로 그런 질문을 하는 거죠?”

어이가 없었는지 예준이 고개를 바짝 들었다. 황당해하는 시선을 마주하며 시후는 어깨를 으쓱댔다.

“혹시 모르잖아요.”

“그런 거 안 했어요.”

울컥한 말투가 시후의 귓등을 긁었다.

“그냥, 걱정만 했어요. 아무리 흔들어도 못 일어나길래, 혹시 잘못된 건 아닐까. 그런 생각만…….”

가만히 듣던 시후는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순한 말씨와 억울해하는 내용. 길게 들어 봤자 달라질 게 없음을 직감한 순간, 예준의 어깨를 쥐어 말을 막았다.

“그래, 미안해요.”

갑자기 사과할 줄은 몰랐는지 예준은 말문 막힌 표정을 지었다. 어지간히 억울했는지 아직도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시후는 입매만 당겨 올렸다.

“혹시나 해서 물어본 거예요. 워낙 험한 세상이니까.”

억울해하는 걸 보니 곤란할 일은 만들지 않은 게 분명했다. 겉과 속이 투명하게 보이는 아이라 다행이다. 시후는 그의 어깨에 손바닥을 얹고 가만히 도닥여 주었다.

“이해해 줘요.”

고맙다는 뜻이었는데도 어째선지 예준의 얼굴은 싸늘하게 굳기만 했다. 퍽 차가운 눈빛은 액자에서 보았던 모습을 연상시켰다. 금방이라도 제 손등을 뿌리칠 것 같은 기세에 시후는 먼저 뒤로 물러섰다.

“…….”

“…….”

살벌해진 분위기에 시후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코트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지갑을 꺼내 수표를 찾는데 뺨이 따끔따끔했다. 고개를 드니 예준이 여전히 뚫어질 듯이 응시하고 있었다. 갈색 눈동자에 북받쳐 오른 감정이 크게 일렁거렸다.

‘화났네.’

그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업어 주고 재워 주고 옷도 빌려줬더니 돌아오는 게 의심이라. 배은망덕하다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그런데도 시후의 마음에는 별다른 동요가 일어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너와 나는 초면인 것을. 아무에게나 신뢰를 보이지 않는 것이 세상 살아가는 규칙 중 하나라고 무심히 생각할 뿐이었다.

시후는 손에 든 수표를 내밀었다. 예준은 받는 대신 눈썹을 구기며 침묵을 지켰다. 무슨 뜻이냐는 눈치였다.

“약소하지만 받아요.”

“…….”

“드라이해서 돌려주는 것보단, 예준 씨가 새로 사는 게 더 나을 테니.”

“옷값이에요?”

예준은 수표와 시후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재차 물었다.

“이 돈이?”

“부족한가요?”

말문이 막힌 것 같은 예준을 둔 채 시후는 수표 한 장을 더 꺼냈다. 그리고 받으라는 듯이 돈을 앞으로 내밀었다.

예준은 양미간을 좁히며 침묵을 지켰다. 곤혹스러움과 짜증, 어이없음이 한데 섞여 얼굴 위에 나타났다.

“못 받아요.”

“왜.”

“……너무 큰돈이잖아요.”

시후는 제 손에 들린 액수를 확인하곤 고개를 기울였다.

“큰돈……?”

그게 꼭 모욕이라도 된 듯 예준의 입매가 비틀렸다. 의도치 않게 모멸감을 준 모양이었음을 시후는 본능적으로 감지했다.

아직 어려서 그런 걸까? 하긴, 저 나이에는 이게 큰돈으로 느껴질 수도 있겠다.

그는 부담 갖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려다 관두었다. 텅 빈 위장이 슬슬 쓰라리기 시작했다. 뭐라도 먹고 편한 공간에 누워 잠을 자고픈 충동이 강하게 솟구쳤다. 그 모든 본능을 누른 채 조곤조곤 이해시키기에는, 시후는 썩 상냥한 인간이 되질 못했다.

그래서 시후가 한 행동은, 걸음을 움직여 예준의 발치까지 다가가는 것이었다.

“무슨…….”

그는 작게 중얼거리는 상대의 읊조림을 들으며 손을 움직였다. 수표를 든 손은 예준의 허벅지로 향했다. 주머니를 찾기 전 수표 끄트머리로 그곳을 가볍게 터치했다. 유혹하려는 의도는 아니었으나, 그것만으로도 자극받았는지 예준의 단단한 몸이 꿈틀거렸다.

또렷한 반응에 시후가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렸다. 새삼 아까운 마음이 들었다. 취향에 부합되지는 않으나, 반응은 꽤 귀여운 맛이 있었다. 시후는 예준의 바지 주머니 안으로 수표와 함께 손을 집어넣었다.

“지금 뭐 하는 짓이죠.”

예준이 반사적으로 시후의 어깨를 쥐며 으르렁거렸다. 한 음절, 한 음절 토막 내어 발음하는 목소리가 쉬어 있었다. 하지만 시후는 거기에 즐거워하는 대신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

“뭐 하는 짓이냐고요.”

시후의 무표정한 얼굴에는 놀란 기색이 옅게나마 떠올라 있었다. 주머니 안에 수표를 넣을 때, 느닷없이 두툼한 게 만져졌다. 몽둥이처럼 길고 단단한 촉감에 시후는 잠깐이나마 이게 뭔가, 하고 의아해했다. 그것이 다름 아닌 이 아이의 성기임을 깨닫는 데에는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얼마나 큰 거지?’

손을 빼며 시후는 속으로 실소했다. 보텀 성향이었으면 군침이 돌았을지도 모르겠다. 여기서 선을 그어야겠다는 생각은 당장 관두고, 다시 이 꼬마를 유혹했을 확률이 농후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시후는 우성 알파의 본능을 따르는 남자였다. 누군가에게 박히는 것보단, 그 사람의 속에 제 것을 집어넣는 게 취향이었다.

그렇기에 시후는 순수한 감탄만 한 후, 예준의 허벅지를 여유롭게 두드렸다.

“자꾸 안 받으려니까 그렇지. 거절 말고 받아 둬요.”

움찔, 움찔.

별것 아닌 터치인데도 예준은 반응을 크게 보였다. 응시하던 시후의 눈동자에 미소가 떴다. 그러자 예준은 옆으로 물러서며 그의 손등을 때리듯이 치웠다.

탁.

고요한 정적 속에서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자신이 뿌리쳐 놓곤 당황했는지 예준이 눈을 부릅떴다. 시후는 고개를 까딱이곤 짧게 인사했다.

“그럼 이만.”

적당히 점잖게, 적당히 단호한 말투였다. 꼭 대단한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라도 되는 듯 예준은 석고상처럼 쩍 굳어 있었다. 시후는 곁을 지나치며 잠깐 시선을 두었다. 남의 손등 좀 쳤다고 저런 얼굴이라니.

‘누가 보면 내가 때린 줄 알겠군.’

문을 닫으니 오피스텔 엘리베이터가 보였다. 그것을 타며 시후는 주머니를 다시 확인했다. 핸드폰과 지갑 등 빠진 물건은 없었다.

건물 바깥으로 나가자 찬 공기가 그를 맞이했다. 겨울바람이 결 좋은 머리카락을 거칠게 헤집었다. 두피를 건드리는 한기를 느끼며 시후는 걸음을 움직였다.

코트 안에 있는 예준의 옷에서 은은한 향이 올라왔다. 따스하며 은은하고 포근포근한 냄새가 지친 몸을 어루만졌다.

시후는 바람 빠진 소리를 내었다. 그리고 아무도 듣지 못할 정도로 음성을 낮추어 읊조렸다.

“착한 애네.”

예준을 말하는 것이었다. 모르는 사람을 업어다 제집에 재워 주고, 자신을 희롱하는 사람의 손을 뿌리치고는 외려 저가 더 놀라 얼어붙기까지 하고. 사회에, 세상에 닳고 닳은 자신과는 다르다.

그래, 착하고 솔직한 아이. 은근히 밝히는 데가 없잖아 있었으나 그조차 시후의 눈에는 귀엽게만 보일 뿐이다.

시후는 입술을 벌리지 않고 미소 지었다. 자신이 꽤 못됐음을 알면서도 즐거움을 참기 힘들었다.

* * *

나쁘지 않은 해프닝.

시후는 그렇게 평가했다. 오랜만에 한 타인과의 키스는 짜릿했다. 상대는 어설프면서도 대담한 구석이 있어 시후로 하여금 희열을 느끼게 했다. 능수능란했던 과거 섹스 파트너들과는 퍽 다른 반응이 재미있었다.

그렇게 괜찮은 경험으로 끝낸 뒤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였다. 진행 중인 프로젝트를 검토하고 사람들에게 지시한 후 예정된 스케줄까지 살피는 동안, 시후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몸이 가볍다. 아주 오랜만에.

머릿속은 푹 자고 일어난 사람처럼 깨끗했으며, 모처럼 기운이 온몸 전체를 감돌고 있었다. 덕분에 시후는 얼마 전만 해도 버겁게 느껴졌던 업무들을, 이제는 표정 변화 하나 없이 무던하게 처리할 수 있었다.

‘왜?’

좋은 컨디션을 되찾은 이유를 찾아보았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예준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시후는 꼭 그 아이 때문만은 아닐 것이라고 바로 부정했다. 오랜 갑갑함을 단번에 없애기에는, 유예준이라는 존재는 시후에게 있어서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보단 술을 원 없이 마시며 몸의 긴장을 푼 덕분일 게 분명했다.

하지만 얼마 있지 않아, 시후는 제 확신이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불쾌감 속에서 느꼈다. 매끈한 미간에 힘을 준 채 입을 다문 그의 맞은편에는 여러 사람이 왁자지껄 웃고 있었다. 술에 단단히 취한 티가 나는 그들은 모두 시후가 익히 아는 얼굴들이었다.

“예쁘게 좀 봐주세요, 지검장님. 그 기레기 새끼 때문에 진짜 죽겠다니까요, 으휴……. 확실히 도와주시면, 흐흐, 새해 선물 한번! 좋은 걸로 드리겠습니다.”

술을 따르는 인간은 철강업체 고우의 대표. 서울남부지검장을 향해 싱글싱글 웃는 얼굴에는 개기름이 흘렀다. 지검장은 어떤 선물인지 말이라도 좀 해 보라며 허리를 바짝 수그렸다.

“아니, 씨이펄! 형님, 지금 나 중졸이라고 무시하나? 응? 거 자기는 서울대 나왔다, 이거지?”

“아하하, 하하. 아이, 아우님. 그럴 리가 있겠어?”

“공부 못 했다고 무시하면 안 돼. 왜 그런 말 있잖아. 공부 머리 없는 놈이? 응? 일머리는 좋다고. 형님한테 그쪽 땅 사라고 언질 넣어 준 게 누군데.”

“내가 그걸 왜 모르겠어, 응? 자자, 그러지 말고 마음 풀어.”

멀지 않은 곳에는 다른 무리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지검장과 고작 몇 발자국 걸으면 닿을 거리에 있는 남자는 소위 ‘깡패’였다.

다른 때에는 건달 놈이라며 낮잡아 부르던 인간들이 지금은 주위를 둘러싼 채 아부 어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얼마 전 한 국회의원과 손을 잡고 벌인 대규모 부동산 투기가 성공적인 결과를 이끌어 내었기 때문이었다.

투기에 끼어들 겸, 또 시장 후보까지 오른 국회의원의 라인에도 들어갈 겸 사람들은 정신없이 굽신댔다.

언론, 검찰, 정치, 사업과 연예계까지. 어느 기업가가 주선한 모임하에 인간들은 뭐라도 얻기 위해 하이에나처럼 이곳저곳을 맴돌고 있었다.

먹잇감을 물색하는 야수 같은 그들과 달리 시후는 우두커니 서 있었다. 여전히 입매를 일자형으로 유지한 채.

“대표님.”

비서 한 명이 조심스레 불렀다. 정중한 부름에는 가만히 있지 말고 뭐라도 해야 하지 않겠냐는 뜻이 내포되어 있었다. 시후 역시 그 의무를 모르는 건 아니었다. 자신이 맡은 사업을 위해서, 혹은 회장인 아버지를 위해서라도 이 모임에 죽 어울릴 필요가 있었다.

그걸 알면서도 시후는 무표정을 유지한 채 침묵만 지키고 있었다. 사람들의 이목을 이끌며 주도적으로 행동하던 전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비서들은 난처한 듯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어어, 저기 우리 국장님이 계시네!”

안 되겠는지 별안간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은 상원 소속 변호사였다. 검사 출신의 그는 타고난 언변과 뛰어난 사회성으로 수많은 인사와 안면을 튼 사람이었다. 시후한테 눈짓한 뒤 먼저 뛰어가는 변호사에게서는 뭔가를 보이겠다는 야망이 돋보였다.

시후는 그런 남자의 뒤를 천천히 따라갔다. 긴 다리를 느릿하게 움직일 때마다 주변인들이 하나둘씩 쳐다보기 시작했다. 욕망과 야욕을 숨기지 않는 눈빛들이 그의 온몸에 진득하게 달라붙었다. 평소에는 그러려니, 하고 덤덤하게 무시할 수 있었던 그것들이 오늘따라 유달리 불쾌했다.

곧은 이마에 힘이 들어갔다. 모처럼 컨디션이 좋았건만, 왜 또 감정이 제멋대로 날뛰는 것일까. 의욕이 일기는커녕 아무것도 하기 싫다는 무기력함만 깊숙하게 스며들 뿐이었다.

“아이고, 국장님! 잘 지내셨죠? 예예, 이번에 상원으로 들어갔죠. 하하하!”

허리를 굽신거리는 변호사와 시후에게 관심을 보이는 국장. 그리고 오메가 향까지 흘리며 미소 짓는 연예인이 한눈에 들어왔다.

호의 어린 반응에도 시후는 별다른 감정이 일지 않았다. 서글서글한 웃음들은 전부 꾸며 낸 것일 뿐임을 모르지 않아서였다.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정반대의 성질을 가진 존재가 기억났다. 무심결에 떠오른 예준은 차가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지금 뭐 하는 짓이죠.’

수표 두 장에 그는 화를 감추지 못했다. 큰 모욕이라도 받았다는 듯 반응하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술에 얼큰히 취했으면서도 제 이익을 좇아 눈을 굴리는 이들에 비하면, 예준은 수정처럼 맑은 아이였다.

“아하하하! 반갑습니다, 이사님!”

시후를 부르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쩍쩍 갈라져 듣기 흉했다. 훅 올라온 피로감 속에서 시후는 자신조차 예상 못 한 소망 하나를 느꼈다. 그 바람은…….

“……하하.”

굳어 있던 입매를 비스듬하게 올리며 시후는 웃음을 흘렸다. 어쩔 수 없다는 듯, 그러면서도 후련해하는 기색이 없잖아 있는 얼굴이었다.

* * *

사람들이 오고 가는 인도 옆. 검은 차 한 대가 멈춰 섰다.

차 문이 열리고 나오는 사람은 검은 정장 위에 회색 코트를 걸친 백시후였다. 허공으로 갈기갈기 흩어지는 바람을 느끼며 그는 제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했다. 검은 속눈썹이 길게 드리운 눈매가 못마땅하다는 듯 꿈틀거렸다.

모임 중간에 빠져나왔음에도 원하는 시간에 도착할 수 없었다. 새벽 1시라니. 아르바이트생인 예준이 없을 확률이 농후했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구태여 이곳으로 찾아온 이유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였다. 행여 유예준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마음.

시후는 차를 향해 이만 가 보라는 뜻으로 고개를 까딱였다. 얼마 있지 않아, 그의 주위에는 매서운 겨울바람만이 맴돌게 되었다. 빌딩 이곳저곳을 부딪치며 사나운 소음을 터뜨리던 바람은 기어코 시후의 머리까지 건드렸다. 보기 좋게 발라 넘겼던 흑발이 조금씩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버릇처럼 손을 올려 머리카락 몇 올을 정리하고 있을 때였다. 가까이 있던 건물 입구로 누군가 나왔다. 시후는 팔을 내리고는 모습을 드러낸 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시야에 들어온 사람은 다름 아닌 유예준이었다.

가방을 멘 채 나오는 그는 시후에 비하면 자유로운 차림새를 갖추고 있었다. 흰 패딩이 바람에 흔들렸고, 그 안에 있던 청색 니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길쭉한 다리는 청바지로 감싸져 있었고, 큰 발은 검은 운동화를 신어 하얀 패딩과 대조되는 느낌이 있었다.

인도로 걸어가던 예준은 무심히 고개를 돌렸다. 몇 발자국 떨어진 거리에 서 있던 시후는 눈을 크게 뜨는 그의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었다.

“…….”

“…….”

침묵 속에서 시후는 예준을 시선으로 찬찬히 훑었다. 새벽이라 그런 걸까, 그는 처음 만났을 때보다 피로해 보였다. 밝았던 안색은 파리했고, 눈 아래에는 회색 다크서클마저 걸려 있었다.

볼에서 턱으로 떨어지는 선 역시 날카로워진 것 같은 건, 제 착각일까? 시후는 뇌리에 스친 궁금증을 물어보기로 했다.

“힘들었나 보죠?”

“…….”

“그새 살이 빠졌는데.”

첫 마디를 떼자 예준은 놀란 기색을 거둬들였다. 당혹감이 싹 지워진 눈이 알 수 없는 감정으로 반짝, 빛났다.

그는 시후의 앞으로 가까이 다가오더니 이맛살을 구기며 입을 꾹 다물었다. 일직선을 유지하고 있는 입꼬리에 서린 건 떨떠름함이었다. 빛나는 눈동자와는 어울리지 않는 모양새라고 시후는 생각했다.

“현석이는?”

한 번 더 말을 걸었다. 더는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예준은 뒤늦게 입술을 열었다.

“위에 있어요.”

“고생이군. ……유예준 씨도 오늘은 늦게 퇴근하네요.”

“요일마다 퇴근 시간이 달라서요.”

“그래요?”

시후는 잠시 입을 닫았다가 곧 말을 덧붙였다.

“구체적으로 알려 주면 안 될까, 예준 씨 스케줄?”

예준의 눈가가 꿈틀댔다.

“왜죠?”

그렇게 묻는 목소리에 짜증이 묻어났다. 하지만 시후는 만나자마자 가시를 세우는 상대에게 당황하지 않았다. 예준의 눈에 서린 빛의 정체를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이채가 도는 눈은 시후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싶어 하는 욕망이 담겨 있었다.

그 순간 시후의 눈앞에 아부와 경계, 야욕이 깃들어 있던 인사들의 얼굴들이 빠르게 스쳤다. 사회에 찌들 대로 찌든 그들에 비하면 예준의 눈빛은 참 정직하기 그지없었다. 모임 때부터 시후를 괴롭혔던 불쾌감이 빠르게 사그라들었다.

“듣고 싶어서요.”

시후는 드물게 부드러운 음색을 내었다. 예준이 고개를 기울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도시의 밤공기 속에서 두 사람의 눈빛이 쨍강, 부딪쳤다.

“예준 씨 연주 듣고 싶어서. 그래서 물어본 거예요.”

흰 입김을 낸 뒤 시후는 잠시 숨을 멈추었다. 다음 말에 예준이 집중하길 원했기 때문이었다.

“오늘 찾아온 이유기도 하고.”

“……제 연주 들으러 왔다고요?”

“그래요.”

예준은 “하” 하고 바람 빠진 실소를 터뜨렸다. 이 상황이 어지간히 기가 막힌 모양이었다.

시후는 그런 예준의 마음을 이해했다. 맨정신으론 너랑 키스 안 한다며 선을 그은 상대가 다시 찾아왔다. 그것도 피아노 연주를 듣겠다며, 이 새벽에.

‘황당하지.’

자신이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었다. 느닷없이 피아노 연주가 듣고 싶어지다니. 거기다 그 충동을 느꼈을 때는, 한창 비즈니스적 모임에 참여 중이기까지 했다.

이유는 없었다. 그저, 긴 손가락들에서 나오던 자연스러운 울림이 새삼스레 끌렸다. 가만히 앉아 예준의 연주를 듣고 있으면, 피로감이 조금은 가실 것 같았다.

한참 늦은 밤 시간에 이곳으로 찾아온 까닭도 그 때문이었다. 철저하게 계획을 세워 움직이는 게 일상인 그로서는 좀처럼 하지 않을 짓이었다.

‘재밌기도 하고.’

그래, 재미있다. 여긴 왜 왔냐는 듯 미간을 구기는 얼굴을 보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너무 늦게 오셨네요. 이미 끝났거든요, 오늘은.”

예준이 딱딱하게 말하자 시후는 웃음을 그쳤다. 그러나 비스듬하게 올라간 입꼬리는 여전했다.

“그래, 알아요. 지금 퇴근하던 중이잖아요.”

“……안 아쉬워요? 이 시간에 여기까지 찾아왔잖아요.”

예준은 한결 더 낮아진 음색으로 뒷말을 덧붙였다.

“내 피아노 연주 듣겠다고.”

“아쉬워요. 다시 듣고 싶었거든, 맨정신으로.”

“키스는 맨정신으로 못 하겠다고 했으면서.”

“그 얘긴 갑자기 왜 해요?”

나긋나긋한 말씨로 묻자 예준이 입을 다물었다. 반듯해 보이는 얼굴에 괜히 말했다는 후회가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묘한 희열감이 시후의 가슴속에서부터 천천히 번졌다. 누구를 대놓고 놀리는 취미 같은 건 없었는데. 왜 저 애만큼은 이토록 놀리고 싶은 건지 모를 일이다.

“미안해요, 예준 씨.”

“……왜요, 이번에도 수표 주게요?”

“아니. 그건 욕먹을 것 같으니 관둘게요. 돈 주고 욕먹긴 싫으니까.”

시후는 우두커니 서 있는 예준의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갔다. 가뜩이나 가까워져 있던 거리가 한순간에 좁혀져 버렸다.

“그냥, 듣고 싶어져서 온 거예요. 예준 씨 피아노 연주를 들으면…….”

들으면. 시후는 뒷말을 뭐라고 덧붙일지 잠시 고민했다. 그 순간, 입술이 제멋대로 움직이고 말았다.

“피로감이 좀, 가실 것 같아서.”

“…….”

“내가 요즘 제정신이 아니거든. 상당히, 스트레스받을 정도로.”

제 입에서 나오는 말을 제 귀로 듣고 보니 약간의 멋쩍음이 올라왔다. 내용과, 목소리, 그리고 거기에 담긴 감정까지 지나치게 솔직했다. 짧은 읊조림이었음에도 그것을 뱉은 자신이 얼마나 지쳐 있었는지를 단번에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그만하자.’

이제 막 퇴근하는 애 붙잡고 무슨 소린가. 시후는 헛웃음을 삼키곤 고개를 저었다.

“……됐다. 잊어버려요, 그냥.”

그렇게 짧게 인사를 건넨 뒤 등을 돌려 멀어지려던 참이었다. 그 순간, 예준이 그의 손목을 거머쥐었다. 물풀처럼 휘감은 손은 쉽게 뿌리칠 수 있을 정도로 부드러운 악력이었다. 그런데도 왠지 얼얼하게 느껴진 시후는 자리에 멈춰 선 채 뒤를 돌았다.

“본인 할 말만 하고 가는 게 어딨어요.”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 건 예준의 눈이었다. 갈색빛이 도는 눈동자에는 방금까지 서려 있던 짜증이나 곤혹스러움, 경계 같은 부정적 감정이 사라졌다.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한 건 놀랍게도 걱정이었다.

‘네가 날?’

언제 봤다고? 어이없는 한편, 잡힌 손목이 불에 닿은 듯 화끈하게 느껴졌다. 이러다 자칫 말끄러미 응시하는 저 애의 눈빛에 말려들지도 모르겠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손을 뿌리치고 외면해야지 않겠냐는 생각이 스쳤을 때, 예준이 뜻밖의 말을 건넸다.

“따라와요.”

“……어딜?”

예준은 대답하는 대신 그를 어딘가로 끌고 가기 시작했다. 그런 와중에도 손목을 쥔 악력을 풀지 않았다. 시후는 그게 마치 여기까지 찾아온 이상 도망치지 말라는 뜻으로 읽혀졌다.

‘연주만 들으러 온 건데.’

몇 곡만 감상하다 귀가하려 했던 계획이 뭉그러졌다. 그런데도 썩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척척 걸어가는 상대가 무엇을 할지 기대되기까지 했다.

흥미를 느낀 시후는 예준의 옆으로 서서 걷기 시작했다. 오른 손목까지 계속 내어 준 채.

* * *

먼저 손을 놓은 사람은 예준이었다. 어느 건물 안으로 들어가서야, “아” 하고 중얼거리더니 시후를 놓아주었다.

가만히 제 손목을 문지르며 시후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가운데에는 통로가 길게 나 있었고 좌우로 작은 방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좁은 공간에 답답함을 느끼는 찰나, 나지막한 목소리가 시후의 귓가에 울렸다.

“여기예요.”

“여기?”

예준은 부연 설명을 하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덧 그의 커다란 손이 가까이 있던 방문을 짚고 있었다.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방 안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켜보는 시후의 눈동자에 알겠다는 빛이 서렸다.

방 안에 있는 존재는 다름 아닌 낡은 피아노였다. 그 위로는 여러 악보와 형광펜, 그리고 연필이 널브러져 있었다. 예준이 먼저 들어가 물건들을 정리한 뒤 들어오라는 눈짓을 했다.

큰 체구의 성인 남자가 둘이나 들어오니 공간이 한결 더 비좁게 느껴졌다. 그러나 시후는 의외로 이 작은 공간이 썩 싫지만은 않았다. 고요한 공기와 묵직하게 자리 잡은 피아노는 오히려 알 수 없는 안정감을 주기까지 했다. 시후는 모임에서와 달리 곤두세워졌던 신경이 점차 누그러지고 있음을 느꼈다.

연습실인가. 시후는 손가락으로 피아노의 겉면을 문질러 보았다. 매끈한 촉감이긴 하나 미세하게 긁힌 자국들이 있었다. 예준이 내거나 혹은 그전 연습생들이 만든 흔적임이 분명했다.

“……좋네요.”

솔직한 감상을 뱉자, 이때까지 경직되어 있던 예준의 얼굴이 허물어졌다. 그는 “큼” 하고 헛기침을 한 뒤 목에서 어깨로 떨어지는 선을 벅벅 문질렀다. 계면쩍다는 듯이 행동하던 예준은 곧 입을 열었다.

“네. 제가 제일 좋아하는 공간이에요.”

온도가 달라진 음성이 한결 따뜻해졌다. 예준은 고개를 옆으로 돌려 시선을 바로 마주했다. 동그란 갈색 눈동자에 생기가 가득 담겨 있었다. 시후를 여기로 데려와서인지, 아니면 피아노를 만나서 들뜬 건지는 알 수 없는 변화였다.

“제일 좋아하는 공간에 왜 날 데려왔어요?”

“듣고 싶다고 했잖아요.”

아주 잠깐, 예준의 입술이 주저하듯 달싹거렸다.

“……형이.”

형이라고. 변함없는 호칭에 시후는 그만 미소 짓게 되었다.

“아직도 형이라고 불러 주는 거예요?”

“이름을 모르는걸요. 현석 형한테 물어봤지만 안 알려 주더라고요.”

그렇지. 내가 말하지 말라고 했거든.

시후는 마음속으로 대꾸한 뒤 “그래요” 하고 대충 중얼거렸다. 예준은 그런 시후를 이상하다는 듯 응시했으나 그에 관해 묻지 않았다. 대신 피아노 의자를 끌어다 앉고는 악보를 훑었다.

정말 한 곡 연주해 주려나 보다. 시후의 입꼬리에 걸려 있던 미소가 짙어졌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흥미롭다는 얼굴을 한 채 악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가까워진 두 사람의 옷에서 차가운 겨울 공기 냄새가 흘러나왔다.

“형도 앉아요.”

“내가 앉으면 좁아질 텐데.”

“그렇다고 서 있게 둘 순 없잖아요. 어서 앉아요.”

말이 끝남과 동시에 예준은 왼손을 들어 시후의 팔꿈치를 잡았다. 서슴없는 터치에 시후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든 말든 예준은 여전히 악보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시후를 잡아다 앉혔다.

“잘 만지네, 유예준 씨.”

당황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예준은 ‘픽’ 하고 바람 빠진 소리를 내었다.

“이 정도 터치는 괜찮잖아요. 이래 뵈어도 우리, 업고 업힌 사인데.”

‘업힌’에 은근히 악센트를 주어 말했다. 의도를 읽은 시후는 여유를 잃지 않았다.

“나 창피 주려는 모양인데, 소용없어요. 기억도 안 나는 일인걸.”

“아쉽네요. 형 귀 빨개졌던 모습 다시 보고 싶었는데.”

읊조리는 예준의 목소리에 도발적인 기색이 묻어났다. 귀엽다고 머리 쓰다듬으면 화내겠지? 그랬다간 무례하다며 피아노 연주고 뭐고 당장 쫓겨날 게 분명했다. 그래서 시후는 생각나는 대로 행동하는 대신 질문을 건넸다.

“이렇게까지 해 주는 이유가 뭐예요? 이 새벽에 여기까지 와서 연주해 주는 이유 말이야.”

“그럼 형은요?”

“나?”

“이 새벽에, 내가 가자는 대로 움직여 줬잖아요. 이렇게까지 내 연주를 듣고 싶은 이유가 뭐예요.”

예준은 느릿하게 손가락 운동을 했다. 공중에서 긴 손가락들이 유연하게 움직였다.

“그깟 피로감 하나 때문에?”

“그깟 아닌데, 나한테는. 예준 씨 나이야 한숨 푹 자면 그만이겠지만.”

“……제 나이가 어때서요.”

“어리고 좋다는 거죠.”

“…….”

“난 이미 이야기 다 했어요. 피로했고, 예준 씨가 생각났고, 피아노 연주가 듣고 싶었다고.”

“내가 생각났다고요?”

의외라는 듯이 묻는 목소리에 시후는 눈썹을 구겼다. 마음속 구석구석 꿰뚫리는 것 같은 느낌은 사양이다.

그런 이유로 시후는 네 얼굴과 담배가, 그리고 네 공간과 액자 속의 모습이, 또 조곤조곤하던 음성과 미소까지 모두 떠올랐다고 고백하지 않았다.

“예준 씨가 피아노를 참 잘 치더라고. 그래서 생각난 거예요. 이제 예준 씨가 대답해 봐요. 왜 이렇게까지 해 주는 거죠.”

듣고 싶었던 대답은 아니었는지 예준은 묵묵히 건반만 눌렀다. 그렇게 몇 음을 짧게 내는가 싶더니 느릿하게 입술을 떼었다.

“연주 듣고 싶다고 새벽에 찾아온 사람을, 그냥 보내긴 싫어서요.”

이어지는 덧붙임이 시후의 귓가에 나직이 울렸다.

“……제 마음이 그렇네요.”

말을 마친 예준은 눈을 감았다. 긴 속눈썹과 뺨은 보드랍고 연약한 느낌을 내었다. 그러나 날렵한 턱선이나 그 아래 위치한 어깨는 단단해 보여, 유약한 사람은 결단코 아님을 알려 주었다.

예준은 건반 위에 손을 올린 채로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러자 방금만 해도 있었던 나이 어린 청년은 어디로 가고, 어느새 그는 깊고 진중한 분위기를 풍기기 시작했다.

달라진 공기에 시후는 자신도 모르게 호흡을 멈추었다. 귀 아래 혈맥이 팔딱팔딱 뛰는 소리가 요란해졌다. 제 몸을 감싸 도는 긴장감에 시후는 입꼬리를 꿈틀거렸다.

그저 연주를 듣는 것뿐이다.

그런데 왜 내가 숨을 죽이게 되는 걸까.

의문이 풀리기도 전, 연주가 시작되었다. 예준은 고개를 수그린 채로 손가락들을 움직였다. 눈을 감은 얼굴을 지켜보며 시후는 음악에 귀를 기울였다.

바 전체를 감싸던 자유분방한 재즈가 아니었다. 시후는 속삭이듯 아주 작게 시작되는 음을 들으며 악보에 적힌 제목을 읽었다.

<물의 유희>

제목을 읽은 시후의 입술이 천천히 올라갔다. 유희라. 과연, 맑은 물방울이 이리저리로 튀면서 노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듣고만 있어도 눈앞에 멋진 분수대가 아른아른하게 그려졌다. 햇빛에 반사되어 영롱하게 빛나는 물줄기는 어떨 때는 위로 솟구치고, 어떨 때는 아래로 떨어져 마치 장난을 치는 듯한 모양새였다.

시후의 시선이 점차 아래로 향했다. 유연하게 움직이는 손가락에서 이렇게 맑은 느낌의 음색이 나오는 게 새삼스레 신기했다. 정작 손의 주인은 들뜨거나 흥분하는 기색 없이 덤덤히 연주할 뿐이었다. 음악에 대해 잘 모르는 시후조차도 그가 깔끔하고 섬세한 연주 실력을 가졌음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빠른 물결이 점차 거세지는 느낌이 들었을 때였다. 예준은 등을 곧추세우며 눈썹을 구겼다. 입매를 딱 닫은 채 이맛살만 구기는 옆얼굴에 서린 건 진지함이었다.

완전히 무언가 몰두한 모습에 시후는 그쪽으로 오랫동안 눈빛을 주었다. 검은 동공에 서린 빛이 짙어지고, 그렇지 않아도 날카로운 눈매는 한층 올라가 예리한 분위기를 풍겼다.

정작 예준은 상대가 자신을 빤히 감상하는지도 모르는 눈치였다. 휘몰아치는 물보라를 그려 내면서 팔꿈치로 시후를 꾹 누를 때도, 정작 본인은 당황해하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예상 못 한 겹침에 반응한 건 시후였다.

‘음.’

속으로 탄성을 삼키며 시후는 눈을 가늘게 떴다. 순전히 연주를 위해 맞물린 터치였다. 유혹하려는 의도 같은 건 조금도 없는 덤덤한 겹침이, 이상하게도 야릇하게 느껴졌다.

시후는 손가락을 들어 겹쳐졌던 자신의 어깨와 팔꿈치를 어루만졌다. 전류처럼 찌르르한 감각이 몸에 남아 맴돌고 있었다.

묘한 기분에 그가 괜히 제 몸만 만질 때였다. 예준이 두 손을 들어 올림과 동시에 연주가 끝났다. 허공으로 올라갔던 손가락들은 곧 깃털처럼 가벼우면서도 천천히 아래로 떨어졌다.

“…….”

“…….”

그 느릿느릿한 움직임을 시후는 눈으로 전부 담아내었다. 잠시 후, 예준이 찬찬히 입술을 떼었다.

“이 곡을 썼을 때 작곡가 나이가 스물여섯 살이었대요.”

그렇게 말하는 예준은 어느새 시후를 바라보고 있었다. 연주에 한참 집중하다 깨어나서인지 눈빛이 몽롱하게 풀려 있었다. 본인도 그런 제 상태를 알고 있는지, 그가 오른손을 들어 제 얼굴을 가볍게 쓸었다.

“대단하죠. 나도 스물여섯 살 정도엔 뭔가를 해내고 싶은데. 연주든 작곡이든.”

짧은 말이었지만 무려 두 가지나 되는 정보를 알아낼 수 있었다. 유예준 이 애가 스물여섯 살도 되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연주뿐 아니라 작곡에도 관심이 있다는 것.

“여기 작곡가 주석 있어요. 궁금하면 읽어 보세요, 이해하는 데 도움 되니까.”

악보 제일 뒷장을 꺼내 내미는 예준의 얼굴이 다정했다. 연주를 통해 두 번째 재회로 인한 동요나 불쾌감이 누그러진 것 같았다. 예술로 감정을 다스릴 수 있다니. 뼛속까지 기업가인 시후로서는 꽤 신기한 일이었다.

사락.

긴 손가락에 걸린 종이가 뒤로 넘어갔다. 그것을 바로 펼치며 읽는 동안, 예준은 손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원하는 곡 있으세요?”

악보 뒤에 붙여진 주석을 다 읽었을 때, 예준이 적막을 깼다.

“아니면 저번에 연주했던 곡 다시 들려 드릴까요. 피아졸라의 <겨울>이었죠?”

시후는 원하는 곡을 말하지도, 다시 연주해 달라고 부탁하지도 않았다. 대신 종이를 쥔 채 고개만 돌려 상대의 눈을 마주했다.

회사 직원들이었으면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나, 쩔쩔매며 피할 시선을 예준은 똑바로 응시해 왔다. 갈색 눈동자에 서린 진심을 발견한 시후는 그가 순수한 호의에서 우러나서 한 제안임을 바로 느꼈다.

‘연주 듣고 싶다고 새벽에 찾아온 사람을, 그냥 보내긴 싫어서요.’

아까 예준이 건넸던 읊조림이 떠올랐다. 시후는 악보를 쥐지 않은 손을 내려 주머니 속에 있던 지갑을 꺼내 들었다.

“뭐, 하세요?”

“팁이라도 줘야 할 것 같아서.”

답이 끝나자마자 지갑을 거머쥔 손등 위로 예준이 손바닥을 대었다. 아래로 내리누르는 체온이 뜨거웠다.

“욕먹을 것 같으니 안 한다면서요.”

“그냥 욕먹고 주는 게 맞겠어요. 받아요, 그럴 가치가 있는 연주예요.”

진심 어린 칭찬이었으나 예준은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돈 많으신가 봐요. 지난번에도 그렇고 이번에도 그렇고.”

“…….”

“계속 돈으로 해결하려고 하네.”

잔잔한 말투와 달리 날이 선 점이 없잖아 있는 내용이었다. 시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예의를 지키려는 거예요.”

“…….”

“자본주의 세상에 돈만큼 확실한 게 없으니까요. 예의 지키기에.”

“형 세상만 그런 거 아니에요?”

이번엔 시후가 입을 다물었다. 예준은 손을 떼더니 그렇지 않냐는 눈빛을 보내며 입술을 당겨 올렸다. 호선으로 휘어진 입가에 보조개가 생겨났다. 마주하고 있자니 시후의 손등이 이유 없이 간질거렸다.

“적어도 내 세상은 안 그런데.”

“……어려서 그런 거 아닐까.”

“현석이 형과 친구랬죠? 그럼 서른두 살이겠네. 이제 겨우 30대 초반이신 분께서, 저한테 어리다고 말하는 건 좀 그렇네요.”

가만히 응시하던 시후는 곧 상대와 비슷한 미소를 그려 내었다.

“돈 싫다는 사람도 다 있군. 그럼 다른 걸 요구해 봐요, 공짜로 듣기는 싫으니까.”

빈정거림이 없잖아 있는 음성에도 예준은 화사하게 웃었다. 아까의 미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싱그러운 느낌이 묻어나는 얼굴이었다.

“이름 알려 주세요, 그럼.”

“이름?”

“네. 형 이름.”

몇 초가량 그런 예준의 말간 낯빛을 감상하다 시후는 입술을 열었다.

“……백시후예요.”

“시후…….”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던 예준의 뺨이 상기되었다.

“그럼 이제 호칭을 바꿔야 할까요?”

“됐어요.”

시후는 몸을 비스듬하게 기울인 채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느긋한 목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마음에 든다고 했잖아요. 그냥 형이라고 불러요.”

“시후 형.”

“…….”

“시후 형.”

두 번 반복해서 불러 보던 것도 잠시, 예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게 할게요.”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생기를, 시후는 기분 좋게 흡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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