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Allegretto
알레그레토 : 조금 빠르게
유예준 [형, 주말인데 뭐 해요?]
핸드폰을 쥐고 있는 시후는 바지만 입은 상태였다. 운동을 마치고 샤워까지 마친 주말 아침, 뭐 하냐는 예준의 메시지를 읽고 있었다.
“재밌네.”
그는 맨어깨에 수건을 댄 채 나직이 읊조렸다. 턱끝에 맺혀 있던 물방울 하나가 아래로 흘러내렸다. 훌륭하게 갈라진 가슴골 사이로 내려간 액체는 복근에 정착되었다.
물방울이 바닥으로 떨어지든 아니면 말라 사라지든, 시후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보단 지난 새벽의 일을 회상하느라 바빴다.
‘그 말 꼭 지켜야 해요.’
하얀 치아까지 드러내는 예준에게서 기뻐하는 기색이 풍겼다. 어찌나 좋아하던지, 그 환한 기운에 시후까지 전염되어 버릴 것 같았다.
구김살 없는 반응에 시후가 그만 멍한 얼굴을 하고 있을 때였다. 예준은 불쑥 앞으로 상체를 내밀었다. 키스라도 할 듯 아슬아슬한 거리에 정신이 빠르게 돌아왔다.
‘잠깐…….’
막으려는 찰나, 예준이 무언가를 내밀었다.
‘번호 줘요.’
‘……번호?’
예준의 손에 들려 있는 건 핸드폰이었다. 덧붙이는 목소리에 웃음기가 담겨 있었다.
‘네. 형 핸드폰 번호.’
갑자기 핸드폰 번호를 요구할 줄은 몰랐다. 예기치 못한 상황은 당혹스럽기는 해도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맹랑하게 눈을 빛내는 상대가 꽤 재밌기까지 했다. 선선히 제 번호를 알려 준 건 그 때문이었다.
“……주말에 뭐 하냐고?”
읊조리는 음성이 노곤했다. 업무 중에 받은 메시지였으면 답하지 않았을 것이다. 뭐 하냐는 질문에 답할 만큼 한가하지 않으니까.
그러나 지금의 백시후는 꽤 느긋한 주말을 보내고 있었다. 운동을 마친 후의 신경은 평소보다도 부드럽게 풀려 있었으며, 딱히 바쁜 일정이 없다는 사실 역시 그를 만족하게 했다. 메시지에 기꺼이 답해 준 건 그 때문이었다.
[그냥 있어요.]
답을 하자마자 읽음 표시가 떴다. 줄곧 핸드폰을 붙잡고 있기라도 한 건지 재빠른 반응이었다.
유예준 [통화하고 싶어요.]
유예준 [그래도 될까요?]
시후는 한 손에는 핸드폰을, 다른 쪽 손에는 수건을 든 채 거실로 향했다. 그리고 바로 답을 하는 대신 주위를 가볍게 훑었다. 시야 안으로 들어온 건 묵직한 느낌을 주는 인테리어들이었다.
서늘한 분위기의 청색 커튼이 창문을 가리고 있었다. 그 옆에 자리 잡은 소파와 기다란 탁자 모두 검은색이었다. 아래에 깔린 카펫조차 회색빛이라 차분하다 못해 우울한 분위기를 만들어 내었다.
‘우울?’
방금 든 생각에 시후의 눈 부근이 꿈틀, 움직였다. 어두운 색상으로 이루어진 그의 공간은 마음을 착 가라앉히기에 제격이었다. 평온함을 주던 이곳이 별안간 우울하게 느껴질 줄은 몰랐다. 돌연 바뀐 제 생각이 의아해 시후는 고개를 기울였다.
마침 머릿속에 스치고 지나가는 건 예준의 오피스텔이었다. 이곳에 비하면 작고 볼 것 없던 공간은, 그러나 따뜻한 색채와 온기를 머금고 있었다.
창문 안으로 가득히 쏟아지던 햇살, 베이지색 벽지, 비누 향이 나던 욕실 모두 밝은 기운이 한껏 묻어났다.
커튼을 옆으로 밀어 젖혔다. 드러난 유리창 너머로 한강이 보였다. 모처럼 파란 하늘 아래 강물이 희게 반짝이고 있었다. 그 옆으로 유유히 지나가는 차량들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시후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 여보세요?
거실의 정적을 깨뜨린 건 예준의 음성이었다. 반가워하는 티를 숨기지 않는 목소리 끝에는 “하하” 하고 작은 웃음이 따라왔다. 시후는 미술관에서 작품을 감상하는 사람처럼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귀엽다.
귀엽고, 좀 과하다.
시후에게는 선이 있었다. 자신과 타인 사이에 그어 둔 선은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선명해졌다. 자기 고집과 가치관, 그리고 편견 등으로 만들어 낸 그 선을 몇 살이나 어린 꼬마가 자꾸 넘으려고 하고 있다. 꼭 오래 알고 지낸 사람과 대화하듯 웃는 모양새가 그렇다.
― 먼저 전화할 줄 몰랐어요.
“통화해도 되냐길래. 메시지 본 김에 했어요.”
시후는 꼿꼿이 허리를 세운 채 입만 달싹였다.
“별 이유는 없고요.”
뭐 대단한 이유가 있어서 너한테 연락한 건 아니라는 뜻이었다. 건조한 말투에도 예준은 수줍게 웃기만 했다. 귓바퀴를 타고 떨어지는 목소리가 청량했다.
전혀 기분 나빠하지 않는 반응에 시후는 눈꺼풀을 밑으로 내렸다. 무감각하던 얼굴이 허물어지고, 입술에는 미소가 걸렸다.
‘이것 참.’
‘귀여워서 봐준다’라는 말이 제 인생에도 일어나는 일일 줄은, 예준을 만나기 전에는 몰랐다.
― 형.
“말해요.”
― 지금도 그냥 있어요?
“왜. 묻는 이유가 있나?”
슬쩍 반말로 물어보자 예준이 부드럽게 대답했다.
― 응. 있어요, 이유.
‘응’이라. 일부러 반말로 맞받아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시후는 고개를 수그리며 실소를 뱉었다. 어느새 완전히 마른 머리카락이 흔들리며 이마를 간질였다.
― 가게 올래요? 주말엔 일찍 열 거든요, 제가 점심 대접할게요.
“대접?”
― 네, 같이 식사해요. 괜찮으면 연주도 들려 드릴게요.
예준은 선선한 음색으로 설명을 덧붙였다. 주말에는 낮 12시부터 문을 여니 함께 점심 먹기 좋을 것이다. 와서 현석이 형도 보고, 연주도 감상하는 게 어떻겠나.
“……나쁘지 않네요.”
시후는 느릿하게 한마디를 더했다.
“술은 안 마셔요, 그렇게 알아 둬요.”
― 마시고 싶으면 마셔도 돼요.
“그쪽하곤 먹을 일 없을 거예요.”
짧은 침묵이 흘렀다. 곧, 예준은 시후만큼이나 느린 말투로 질문했다.
― 왜요? 또 저와 키스할까 봐요?
역시 만만한 상대는 아니다. 불쑥 상대의 실수를 꼬집어 비트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대놓고 물어 오는 것에 시후는 몇 번 눈을 깜빡였다가 바람 빠진 소리를 내었다.
“너무 기분 나빠하진 말고.”
― ……기분 안 나빠요, 할 말은 있지만.
“할 말? 무슨 할 말.”
주저하는 건지, 아니면 일부러 뜸을 들이는 건지 예준은 바로 답하지 않았다. 그사이 햇빛 한 줌이 내려와 시후의 손을 감쌌다. 겨울 날씨와 어울리지 않는 온기에 그가 손등을 꿈틀댔을 때였다.
― 우리 담배 피울 때, 형 제정신이었잖아요. 그래도 제 손 잘 만졌으면서.
핸드폰을 쥐고 있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뼈마디가 도드라지고, 손등 아래에 있던 푸른 핏줄이 불거졌다. 시후는 눈앞에 예준이 있는 것처럼 가만히 쏘아보다가 입을 열었다.
“하고 싶은 말이 뭐예요.”
― 어차피 제정신이었을 때나, 술 취했을 때나 똑같았다는 뜻이에요. 그러니 술 드시고 싶으면 그냥 드세요.
“됐다고 말했어요.”
― ……궁금해지네.
“뭐가.”
― 맨정신이라고 정말 키스 안 할지. 그게 궁금해졌어요.
당돌한 발언에 시후는 인상을 쓰며 “유예준 씨?” 하고 불렀다. 예준은 못 들은 척하며 금방 말을 덧붙였다.
― 그럼 이따 봐요.
귓가를 긁는 음성에는 어느새 장난기가 서려 있었다. 통화를 마친 시후는 상대가 일부러 자신을 자극했음을 깨달았다. 그는 입꼬리를 비스듬하게 끌어올리며 “하” 하고 소리 냈다.
맨정신이라고 정말 키스 안 할지 궁금하다고?
시후는 핸드폰을 소파 위로 던졌다. 옷들이 진열된 드레스룸으로 향하는 눈동자가 모처럼 빛나고 있었다. 곧 그쪽으로 걸음을 움직이며 그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너야말로 해 달라고 빌지 마라, 꼬마야.”
* * *
“읏…….”
차 안을 가득히 채우는 건 나지막한 신음 소리였다. 소리를 낸 이는 유리창에 뒤통수를 문대고 있었다. 흐트러진 머리와 나른한 눈빛을 가진 사람, 유예준이었다.
예준은 숨을 크게 몰아쉬더니 앞으로 손을 뻗었다. 갈고리처럼 구부려진 손가락 사이로 다른 시후의 손가락이 들어왔다.
자연스레 손깍지를 낀 시후 역시 상기된 눈을 하고 있었다. 뒤로 넘겼던 앞머리 역시 헝클어진 지 오래였다. 머리카락들이 제 눈가를 찌르도록 놔둔 채 시후는 상대와 몸을 겹쳤다.
“아.”
“…….”
“형.”
시후는 가쁜 숨을 내쉬는 예준의 목덜미를 잘근잘근 깨물었다. 가벼운 애무임에도 자극적이었는지 예준이 인상을 썼다. 시후에게 잡힌 손가락에 힘이 들어감과 동시에 커다란 몸을 바르작거렸다.
그러자 시후는 잡지 않았던 다른 손으로 예준의 가슴을 내리눌렀다.
“가만히 있어요.”
낮은 읊조림에 끈적하고 물기 있는 흥분이 배어 있었다. 시후는 손바닥으로 심장이 요동치는 가슴을 쓸며 입술을 포갰다. 이미 한 번의 키스를 하고 난 뒤라, 두 사람 모두 입술이 촉촉하게 젖어 있던 참이었다.
시후는 혀를 내밀어 상대의 입천장을 쓰다듬고, 안에 고여 있던 타액을 스스럼없이 빨아 마셨다. ‘꿀꺽’ 하고 목울대 움직이는 소리를 내자 예준이 눈을 크게 떴다. 그는 목을 뒤로 젖히며 시후의 키스를 피했다.
“……시후 형.”
이름을 부르는 예준의 얼굴이 고요했다. 그러나 차분하기 짝이 없는 안색과 달리 눈동자에는 숨기지 못하는 욕망이 일렁이고 있었다.
“맨정신으론 안 한다고. 언젠가 그런 말을 했었죠?”
시후는 허리를 곧게 펴며 그를 내려다보았다. 긴 속눈썹에 반쯤 가려진 눈동자에는 예준과 같은 빛이 담겨 있었다. 시후는 옅은 미소를 그리며 “아” 하고 제 목을 쓸었다. 거미가 실을 자아내듯 느릿느릿한 동작에는 묘한 진득함이 있었다.
“취소하도록 하죠, 그 말.”
웃음기 어린 속삭임을 내자마자 예준의 입술이 벌어졌다. 놀란 반응을 즐기며 시후는 가만히 상대를 말끄러미 응시했다. 그 상대가 한 손에 힘을 주어 자신을 잡아당기고, 또 다른 손으로 턱을 움켜쥘 때까지도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하아, 읍.”
거칠게 입술을 비비며 시후는 페로몬을 숨김없이 내뿜었다. 오메가였으면 숨조차 쉬기 힘들 만큼 강렬한 향이 차 안을 꽉 메웠다.
입 안으로 들어오는 혀를 맞이하며 시후는 눈을 완전히 감았다. 제 턱과 뺨, 그리고 귓바퀴를 문지르는 손길에 이따금 상체를 떨며.
* * *
차에서 진득하게 혀를 섞기 몇 시간 전, 시후는 지금과 달리 말끔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설마 다시 만난 예준에게 또 손을 댈 것이라곤 예상 못 한 채로.
마찬가지로 앞날을 몰랐을 게 분명한 예준 역시 깔끔한 차림이었다. 지난번 바에서 보았을 때처럼 흰 와이셔츠에 검은 바지를 입은 그는 무언가를 꺼내 내밀었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시후는 그쪽으로 시선을 내렸다. 테이블 위에 올라가 있는 건 다섯 개의 CD 앨범이었다.
“이건 재즈 피아노 앨범이고, 저건 클래식 피아노 앨범이에요. 조XX 피아니스트 아시죠?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우승했던.”
“이건 왜.”
“피아노에 관심 생기신 것 같아서요. 챙겨 드리고 싶었어요.”
앨범 위로 시후의 손가락이 닿았다. 길고 매끈한 손가락들이 겉면을 쓰다듬는 동안 예준이 말을 덧붙였다.
“듣다가 마음에 드는 곡이 있으면 말해 줘요. 제가 연주해 드릴게요.”
“아무 곡이나 말해도 다 연주할 수 있어요?”
“네.”
곧잘 답하는가 싶더니 예준은 잠깐 뜸을 들였다. 숨을 멈추고 눈썹을 살짝 구기는 모습에서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기색이 묻어났다. 몇 초간의 시간이 흐른 후 예준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못 해도 할 수 있게 연습해 올게요.”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에 온기가 담겨 있었다. 친절에서 우러난 호의였으나 시후는 그것에 고마워하는 대신 상대를 가만히 응시했다. 낮에 연 와인 바는 햇살로 가득했고, 두 사람의 시선과 시선이 뒤얽히기에 적절한 공간이었다.
“원래 이래요?”
침묵을 깨뜨린 사람은 시후였다.
“네?”
“원래 아무한테나 호의 보이냐고.”
예준과 달리 건조하기 짝이 없는 음성이었다. 고저 없는 말투가 당혹스러웠는지 예준은 입을 딱 닫은 채 눈썹을 찡그렸다. 당신이 아직도 이런 식으로 선을 그을 줄은 몰랐다는 듯 못마땅해하는 표정이었다. 시후는 그런 상대의 반응을 외면한 채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일찍 연 바에는 두 사람을 제외하곤 아무도 없었다. 사장인 현석조차 재료를 준비하기 위해 주방 안으로 들어간 지 오래였다. 지나치게 고요한 공간은 때로 부담스러울 수도 있음을 새삼스레 자각했다. 그런 시후의 귓등에 나지막한 속삭임이 내려앉았다.
“아무는 아니잖아요, 우리가.”
예준은 호락호락하게 넘어가질 않았다. 다정하지만 단호한 목소리에 웃음이 올라왔다.
“좀 섭섭해지네요. 형한테 이 정돈 줄 수 있잖아요.”
시후는 다시 시선을 마주하며 이렇게 말했다.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너무 과해서 그래요.”
“…….”
“밥도 자기가 사겠다, 선물도 주겠다. ……좀 부담스럽네요.”
아까와 달리 예준은 동요하는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형한텐 제가 아무일지도 모르지만, 전 아니에요.”
이번엔 시후가 입을 다물었다. 그러는 동안 예준은 느릿하면서도 또박또박하게 말을 이어 갔다.
“그래서 잘해 주고 싶은 거예요. 이런 것도 다, 인연이잖아요.”
“꼭 애인 대하듯 구니까 그렇지.”
“그냥, 앨범 몇 개 드리는 것뿐이에요. 가볍게 받아 줘요.”
“……그래요, 가볍게.”
그는 예준의 입에서 나왔던 단어를 다시 꺼내 읊었다. 만족한 시후는 마음 한쪽이 편해짐을 느끼며 미소를 보냈다.
“그렇다면 잘 받을게요. 고마워요.”
나긋나긋한 말씨로 감사를 표하는 것 역시 잊지 않았다. 예준은 테이블 위에 단정히 모아 깍지 끼고 있던 두 손을 풀었다. 매끈한 얼굴에는 안도와 못마땅함이 복잡하게 교차되어 있었다.
그러나 예준은 제 감정에 대해 이야기하는 대신 영문 모를 질문을 건넸다.
“형은 연애하면 이렇게 해요?”
“음?”
“아까 그랬잖아요, 애인 대하듯 군다고. 형은 애인 대할 때 저처럼 행동하나, 싶어서.”
“…….”
“밥 사 주고, 선물 주고.”
시후는 고개를 비스듬하게 기울이며 머릿속을 되짚어 봤다. 그리고 자신의 삶에서 연애라고 정의 내릴 만한 관계는 한 번도 없었음을 새삼 자각했다.
‘그런 거 안 해 봤다고 말할 순 없겠지.’
솔로인 주제에 뭘 아는 듯이 말했냐고 웃을 게 분명했다. 어째 연애 경험이 없는 사실이 결함이 된 것 같아 불만이 올라왔다. 하지만 시후는 속은 어쨌든 겉만은 담담한 표정을 유지했다.
“뭐, 그렇죠.”
짧게 대답하는 순간 현석이 주방에서 나왔다. 앞치마를 맨 친구를 발견한 시후는 그쪽으로 말을 건넸다. 화제를 바꾸고 싶은 의도가 없잖아 있는 부름이었다.
“재료 준비 다 했어?”
“어, 방금. 아이고, 또 새벽까지 일할 거 생각하면 눈앞이 아찔하다.”
현석은 애매한 정적을 끊거나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만들기에 제격인 사람이었다. 이마를 짚으며 어젯밤엔 어떤 손님이 왔었는지를 곧잘 떠들었다.
재잘재잘 이야기하는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시후는 고기 한 점을 씹었다. 과거 레스토랑에서 일했던 친구는 꽤 근사한 스테이크를 만들어 낼 줄 알았다.
“그런데 둘은 어쩌다 친해진 거야?”
이야기를 마친 뒤 현석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시후가 제 가게의 아르바이트생과 자리를 가진 게 신기하다는 눈치였다.
“친해지는 중이지.”
시후가 안 친하다는 뜻을 담아 대꾸했다. 갑자기 ‘달그락’ 하는 소리가 귓등을 때렸다. 예준이 눈을 댕그랗게 뜬 채 입까지 벌리고 있었다. 그 앞에는 쟁반 위 널브러진 포크와 나이프가 있었다.
벌어진 입 안으로 손가락을 넣어 보고픈 충동이 솟았다. 그리고 시후는 자신이 꽤 어린아이 같은 생각을 했음을 금방 자각했다. 그는 헛기침을 한 번 한 뒤 슬쩍 물었다.
“왜 그렇게 봐요?”
“형이 그런 말 할 줄 몰라서요.”
“?”
“우리, 친해지는 중이구나……. 좋네요.”
예준은 손바닥으로 제 뺨을 문지르며 눈을 밑으로 내리깔았다. 추운 바깥에 오래 서 있다 들어온 사람처럼 얼굴이 붉었다.
“참 귀엽다, 예준 씨.”
그는 순간적으로 든 감상을 입 바깥으로 뱉었다. “으잉?!” 하고 현석이 황당해하는 반응을 내었다. 정작 시후는 덤덤함을 유지할 뿐이었다.
“어려서 그런가? 그건 아닐 텐데.”
“그렇지, 넌 어릴 때도 귀염성 없었어. 아니, 그런데 예준이가 귀엽……나?”
현석은 못 들을 말을 들었다는 듯 반응했다.
“예준이……가?”
“귀여운데. 저거 봐, 자기 안 귀엽다고 삐친 거.”
“……안 삐쳤어요.”
그렇게 말하는 예준은 미간에 힘을 주고 있었다. 솔직한 표정이 시후의 마음에 꼭 들었다. 이건 뭐, 커다란 강아지나 다를 바 없지 않은가. 기분 좋으면 꼬리를 흔들고, 기분 나쁘면 이를 드러내고.
“곧 짖으라면 짖겠어.”
“네?”
“혼잣말이에요, 신경 쓰지 마요.”
“…….”
예준은 뚱한 얼굴로 메뉴판을 집어 들었다. 워낙에 손이 커 잡힌 메뉴판이 작게 느껴질 정도였다.
“드시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하세요.”
짜증 난 표정과 달리 목소리만큼은 친절하다. 시후는 “그래요”라고 대꾸했다.
‘이거 봐. 귀엽잖아.’
모처럼 평온한 기분이 손등을 타고 올라왔다. 주말다운 주말이라고 생각하며 시후는 잠시 눈을 감았다. 선홍색의 생기 있는 입술이 나른한 미소를 만들어 내었다.
* * *
“이걸로 계산해.”
예준이 화장실을 간 사이 시후가 카드를 내밀었다. 계산대 앞에 서 있던 현석이 눈을 끔뻑거렸다.
“예준이가 산다는 것 같던데.”
“어린애한테 어떻게 얻어먹어.”
“그러다 기분 나빠하면 어쩌려고.”
“안 돼, 그래도.”
시후는 특유의 무감각한 목소리를 내었다.
“돈 없는 어린애 벗겨 먹는 거 아니야.”
“쯧, 예준이가 화내도 난 모른다.”
“…….”
카드를 받아 들며 현석은 “나는 아무것도 몰라요” 하고 노래하듯 흥얼거렸다. 시후는 제 손에 들린 앨범들 쪽으로 시선을 내렸다. 그중 ‘JAZZ’라는 영어가 유독 눈길을 잡았다.
단어를 읽고 있으니 예준의 재즈 연주가 자연스레 기억났다. 경쾌하고 밝으며, 힘 있는 음악이 아직도 귓전에 뱅뱅 맴돌았다.
“예준인 모르냐?”
갑자기 현석이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정신이 든 시후는 눈썹 사이에 살짝 힘을 주었다.
“뭘.”
“너에 대해서 말이야. 뭐, 이것저것.”
‘이것저것’에는 그의 집안이나 지위, 사회적 유명세 등등이 들어 있었다. 시후는 고작 이름 하나 알려 줬다고 대꾸하려 했다. 그 순간 뺨에 차가운 공기가 닿았다.
시후는 느닷없는 한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시야 안으로 들어오는 건 문가에 서 있는 예준이었다.
“왔어요?”
“…….”
예준은 문을 반쯤 연 채로 그를 바라만 보았다. 날카롭게 올라간 눈매나 꿈틀거리는 입꼬리에서 부정적인 감정이 보였다. 시후는 그 감정의 이름이 무엇인지까지는 찾지 못했다.
“어어, 예준아. 안 들어오고 뭐 해.”
현석이 말을 걸고서야 예준은 걸음을 움직였다. 느릿하게 다가오는 그를 향해 현석이 몇 마디를 덧붙였다.
“계산은 얘가 했어. 뭐, 부자 녀석이니까 괜히 마음 쓰지 말고. 다음에는 더 비싼 거 사 달라고 그래.”
“그런 말은 뭐 하러 해.”
“왜. 부자인 것도 말하면 안 돼?”
시후는 대꾸하는 대신 예준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예준의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이 없었다. 마치 상대가 계산했음을 진작에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응시하던 시후의 이마에 힘이 들어갔다.
‘내가 계산한 걸 알았다고.’
그럼 아까부터 죽 지켜보았다는 뜻이 되었다. 물론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의 사소한 대화를 나누었으니 문제 될 건 없었다.
하지만 예준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왜요?”
묘하게 날이 선 음성이었다.
“왜 형이 계산했어요?”
이해하지 못한 시후는 고개를 기울였다.
“그게 그렇게 문제 되나요?”
“네.”
“…….”
“제가 대접한다고 말씀드렸잖아요. 그런데 왜 형이 계산해요?”
“…….”
“왜 매번 형 마음대로 하냐고요.”
말을 마친 뒤 예준은 현석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게 어쩐지 너와는 더는 상종하지 않겠다는 듯이 느껴졌다. 시후는 다시 계산해 달라고 카드를 내미는 예준을 보다 손을 뻗었다. 희고 긴 손가락이 그의 손목을 물풀처럼 휘감았다.
“됐고, 나와요.”
꽤 강한 악력이었음에도 예준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시후는 그에게 시선을 둔 채 한마디 더 했다.
“나와.”
반말을 뱉자마자 예준의 눈동자에 빛이 번득였다. 그러더니 시선을 마주하며 먼저 손을 뿌리쳤다. 분개하는 얼굴 아래로 긴 목덜미가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마치 모욕이라도 받은 듯 수치스러워하는 반응이었다.
거기에 의문을 표하기도 전, 예준이 먼저 그의 옆을 지나쳐 걸었다. 문 닫히는 소리가 날카롭다고 생각하는 동안 현석이 “아이고” 하고 손을 내저었다.
“그냥 가서 사과해.”
“……내가 왜.”
“네가 돈 없는 어린애 어쩌고 했잖아. 그거 예준이가 다 들었나 보다.”
말을 듣고 보니 그런 소리를 했던 것도 같다. 별안간 관자놀이가 지끈해지기 시작했다.
“화내도 모른다고 했잖냐, 그래서.”
“후.”
시후는 짧게 한숨을 내쉰 뒤 등을 돌려 나갔다. 건물 바깥으로 발을 내디디니 멀어져 가는 예준의 뒷모습이 보였다.
“유예준 씨.”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음에도 들렸는지 예준이 걸음을 멈추었다. 시후는 곧은 목에서 어깨로 떨어지는 선, 그리고 넓은 등에 시선을 고정한 채 입을 열었다.
“뭐가 그렇게 열받아요.”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건 사과가 아니었다. 미안하다는 말을 꺼내기 이전, 시후는 궁금한 점부터 먼저 해결해야 했다.
“내가 사 줄 수도 있는 거지.”
“약속을 잡은 건 나잖아요.”
“그래도 안 돼요. 어린 친구한테 얻어먹을 정도로, 뻔뻔하지 못하니까.”
“어린 친구.”
가만히 듣던 예준이 한숨을 뱉었다. 흰 입김이 하늘 위로 솟았다가 빠르게 사라지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내가 형에 대해 잘 아는 건 아니지만…….”
“…….”
“사람이 좀, 그렇네요.”
빈정거리는 점이 없잖아 있는 말투였다. 제 귀에 와 박히는 음성에 시후는 눈을 가늘게 떴다. 포근하게 감싸고 있던 평온함이나 즐거움 같은 건 없어진 지 오래였다.
“어떤 점이?”
“본인만 잘났다고 생각하는 점이요. 저번에도 그래요. 갑자기 주머니에 수표나 꽂고.”
“…….”
“돈 없는 어린애 운운하면서 바라지도 않은 호의나 베풀고. 남 우스워지는 데에는 신경 안 쓰는 것 같아요.”
읊조리는 말투가 조금씩 건조하게 변해 갔다. 물기조차 없는 버석한 음색을 내며 예준은 고개만 돌려 시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찰나에 보였던 울화 같은 건 이제 어디에도 없었다.
“이럴 거면 형은 왜 날 만나러 온 거예요?”
예준은 입꼬리만 당겨 웃으며 덧붙였다.
“내 연주는 왜 듣고 싶어 했어요.”
그가 말하는 동안 시후는 단 한마디도 내지 않았다. 못 들을 말을 들은 사람처럼 우두커니 서서는 가만히 그를 응시할 뿐이었다. 거센 바람이 불어와 코트를 잡아당기고 머리카락 몇 올을 헝클어뜨리는 동안에도, 매끈한 얼굴에는 아무런 동요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아.”
쇳덩이만큼이나 묵직한 침묵을 없앤 이는 예준이었다. 그는 긴 속눈썹을 밑으로 내리며 다시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는 피로감이 깃든 숨소리와 함께 발길을 움직여 멀어져 갔다. 남은 사람에게 미련 같은 건 없었는지 뒤조차 돌아보질 않았다.
홀로 남은 시후는 주머니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바로 나오느라 지갑에 넣지 못한 카드가 피부를 눌렀다. 그것을 손가락으로 밀어 버리는 행동엔 신경질적인 느낌이 배어 있었다.
* * *
예준이 건넨 말 한마디가 귓전에 남아 오래도록 사라지질 않았다.
‘이럴 거면 형은 왜 날 만나러 온 거예요?’
그때 뭐라도 대꾸했어야 했다. 왜냐니. 단순한 흥미 때문이다. 닳고 닳은 인간들만 대하다 널 보니 신선해서. 대단한 이유 같은 건 어디에도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당시엔 입술이 떼어지질 않았다. 그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어떤 상황이 닥쳐도 알아서 매끄럽게 움직이던 혀가, 그때는 마비라도 된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멍청하긴.”
시후는 눈을 감은 채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긴 속눈썹 아래 드리워진 그림자가 짙어졌다. 주말인데도 새벽 내리 일한 듯 심신이 피로했다.
그는 숨을 길게 토하며 다리를 길게 뻗었다. 소파에 몸을 완전히 누이는 동안, 잔잔한 재즈 음악이 귓전에 내려앉았다. 벽걸이형 CD 플레이어에서 나오는 곡이었다.
벽에 붙어 있는 기계를 쓰게 될 날이 올 것이라곤 예상도 못 했다. 동생이 생일 선물로 사 준 물건 중 일부였지만 음악에 별 관심이 없었던 시후는 그것에 손도 대 본 적 없었다.
그때는 별 걸 다 준다고 생각했건만, 이렇게 쓰일 줄이야.
시후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음악에 집중했다. 콘트라베이스가 피치카토 기법으로 가벼우면서도 낮은음을 내었다. 통통 튀는 음 속에서 피아노 소리가 차분하게 이어져 갔다. 때로는 느릿하게, 때로는 유려하게 흘러가는 연주는 곤두세운 신경을 느슨하게 만드는 데에 충분했다.
톡, 톡.
그는 배 위에 올려 두었던 손가락을 세워 두드렸다. 박자에 맞추어 움직이던 시후는 곧 바람 빠진 듯한 소리를 내었다.
어두워져 가는 어느 주말의 저녁. 홀로 재즈를 들으며 손가락을 두드리고 있다니. 자신이 이런 낭만적인 시간을 보낼 줄 아는 사람이었음을, 시후는 전혀 몰랐다.
“……좋네.”
곡이 꽤 괜찮다. 그러자 자연스레 떠오른 건, 이 좋은 곡이 담긴 앨범을 선물한 사람이었다. 얼굴과 옷차림, 심지어 말투조차 한없이 반듯한 아이.
‘듣다가 마음에 드는 곡이 있으면 말해 줘요. 제가 연주해 드릴게요.’
유예준은 사람을 조금 낯간지럽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 정작 자기는 부끄럽지도 않은지 해사한 낯빛만을 유지할 뿐이었지만.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느릿했던 음이 점차 빨라지기 시작했다. 시후는 머릿속으로 피아노 연주 중인 예준을 상상해 보았다.
지난번에도 그랬듯, 그는 연주에 완전히 집중할 것이다. 옆에 있는 사람이 자신을 뜨겁게 보든 말든, 금방이라도 덮칠 듯 강한 페로몬을 뿜어내든 말든.
자신만의 세계에 빠진 그 모습은 꽤 매력적이었다. 피아노를 치는 예준을 볼 때 시후는 한곳에만 온 신경을 몰두한 얼굴을 가만히 지켜보고 싶기도, 아니면 돌발 행동을 하여 뭉개고 싶기도 한 충동이 들었다.
눈을 뜨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시선이 닿은 건 다름 아닌 다리 사이였다. 예준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물건이 한껏 부풀어 있었다.
약간의 자괴감이 드는 것도 잠시, 시후는 바지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손아귀에 잡힌 좆은 벌써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손가락들을 움직여 혈관이 돋아난 기둥을 훑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찌걱, 찌걱’ 하고 야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어느새 시후는 상체까지 일으킨 채로 수음을 하게 되었다.
“후.”
불그스름한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탄성이 끈적했다. 그는 단단하게 곧추세워진 성기를 위아래로 훑으며 웃음을 터뜨렸다. 이 무슨 꼴사나운 상황이냐. 볼썽사납다고 생각하면서도 시후는 자위하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큿.”
마침내 짤막한 신음과 함께 손 안이 젖었다. 하얗고 매끈하던 뺨에 붉은 기운이 감돌았다.
졸린 듯 눈꺼풀을 천천히 깜빡거리며 손을 들자 불투명한 흰 액체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것을 가만히 지켜보던 그는 마침내 고개를 돌렸다.
고요하지만 열기를 띤 시선을 받은 존재는, 다름 아닌 낮은 탁자 위에 있던 핸드폰이었다. 잠잠하게 있는 핸드폰은 연락 하나 오지 않았음을 알려 주고 있었다. 흐트러진 흑발에 살짝 가려져 있던 눈이 가늘어졌다.
뱃속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욕구는 목구멍을 메마르게 했다. 갈증 속에서 시후는 제 입술만큼이나 붉은 혀를 꺼냈다. 아랫입술을 핥는 그의 얼굴에 나른한 빛이 맴돌았다. 곧, 정액으로 뒤덮인 손가락들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잠시 후, 핸드폰을 집어 드는 시후는 덤덤한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깨끗하게 씻은 손 역시 비릿한 정액 냄새 대신 비누 향이 흘렀다. 방금까지 자위한 사람답지 않게 멀끔한 얼굴로 시후는 메시지를 보냈다.
[화났어요?]
짧은 질문과 함께 한마디를 더했다.
[얼굴 보고 싶은데.]
아침에도 그랬듯, 이번에도 예준의 답은 빨랐다.
유예준 [보고 싶다고요?]
유예준 [진짜 제멋대로네요, 형.]
어째 뒤에 비속어가 보이는 것 같은 건 착각일까. 시후는 긴 손가락들을 움직였다.
[마음에 걸려서요, 예준 씨가.]
[만나 주면 안 될까?]
만나 ‘주면’. 잘했건 잘못했건, 먼저 수그리는 법이 없던 백시후로서는, 꽤 양보한 셈이었다. 상대는 잠깐 반응이 없다가 이내 답을 해 왔다.
유예준 [알겠어요.]
시후는 다시 갈증을 느꼈다. 목구멍이 홧홧하게 타들어 감을 느끼며 이렇게 답을 보냈다.
[예준 씨 집으로 찾아갈게요.]
* * *
달각, 달각.
시후의 손에 들린 건 은색 지포 라이터였다. 네모 모양의 라이터는 손가락을 까딱일 때마다 청명한 소리를 내었다. 붉음과 푸름이 한데 섞인 불꽃을 응시하는 눈에 담긴 건 피로함이었다.
‘……내가 뭐 하는 건지.’
입술 한 번 비벼 본 애 달래겠답시고 여기까지 왔다.
시후는 라이터를 주머니 안에 넣고 오피스텔 쪽으로 시선을 올렸다. 좁고 깔끔하고 비누 향이 나던 공간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거기서 제게 물을 주랴, 옷을 건네주랴 부지런하게 움직이던 예준의 긴 다리도 눈앞에 그려졌다.
예준과 그렇게 헤어지고 나서 모든 신경이 그쪽으로 쏠려 있었다. 그게 미안함 때문인지, 아니면 단순한 성욕 때문인지는 판단하기 힘들었다.
확실한 건, 유예준이라는 존재가 제 가슴 안을 꽉 채웠다는 사실이었다. 얼굴 보자는 말을 먼저 꺼낸 것도, 직접 집 앞으로 찾아온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조용히 그에 대해 생각하던 도중, 누군가 인기척을 냈다. 고개를 돌리는 순간 바람이 불었다. 거센 겨울바람에 시후의 이마 위에 있던 머리칼들이 나부끼며 눈가를 찔렀다. 버릇처럼 머리칼을 젖히며 상대를 확인하려 할 때였다.
“머리 일부러 안 내리는 거죠? 어려 보일까 봐.”
차분한 말씨가 먼저 귓가에 내려앉았다. 시후는 대답하는 대신 손을 내려 예준의 얼굴을 살폈다. 홀로 나온 그는 얇은 점퍼조차 입지 않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제 공간으로 돌아가겠다는 뜻이 보였다.
“춥겠네.”
“괜찮아요, 바로 들어가면 되니까.”
냉기가 없잖아 서려 있는 말투에도 시후는 동요하지 않았다.
“……좀, 웃기군.”
“뭐가 웃겨요.”
예준의 턱에 힘이 다부지게 들어갔다. 어이가 없었는지 빤히 바라보는 눈동자가 번득거렸다. 시후는 그 눈빛을 헛소리할 거면 돌아가라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발정 나서 쳐다볼 땐 언제고. 왜, 이젠 내가 안 꼴려요?”
“발……. 뭐라고요?”
“발정.”
“…….”
“발정 몰라요? 자지 서는 거 말이야.”
신랄하게 읊조리는 시후의 입술 사이로 흰 입김이 흘러나왔다. 담배 연기를 닮은 그것으로 예준의 시선이 닿았다.
“그렇게 안 봤는데. 형, 꽤 천박하시네요.”
‘천박’이라는 단어에 은근히 악센트를 주었다. 저를 놀리는 이의 낯짝을 엉망으로 만들고픈 욕구가 분명했다. 시후는 그 의도대로 반응할 마음이 없었다.
“천박하지. 초면인 애하고도 혀 섞는 사람인데.”
말을 마친 그는 피곤이 쌓인 속눈썹을 무겁게 깜빡이며 미소 지었다. 졸린 듯 나른하게 처진 눈매 쪽으로 예준의 시선이 닿았다. 한기 어린 정적 속에서 두 사람의 눈빛이 쨍강, 부딪쳤다.
“……왜 오셨어요?”
침묵을 가른 이는 유예준이었다. 티를 내지 않으려 했겠지만, 잘 되지 않는 듯 짜증을 숨기지 못 하는 티가 묘한 희열을 불러일으켰다. 시후는 즐거움이 제 손등을 살살 긁는 걸 느끼며 생각했다. 여기까지 찾아온 보람이 있다.
“대답해 주려고.”
“대답?”
“나한테 질문했잖아요. 이럴 거면 왜 만나러 온 거냐고.”
‘이럴 거면 형은 왜 날 만나러 온 거예요?’
그 한마디가 다시 떠올랐다가 사방으로 갈기갈기 찢겨 흩어졌다. 시후와 마찬가지로 기억해 냈는지 예준이 “아” 하고 탄성인지, 탄식인지 모를 소리를 내었다.
잠잠하던 뺨이 꿈틀거리며 옅게 상기되었다. 부끄러움 때문인지, 아니면 그때의 일을 돌이키니 다시 열이 받아서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시후는 그의 발치까지 다가가더니 손을 뻗어서는 예준의 목 뒤를 잡아당겼다. 돌발 상황에 예준이 비칠대며 얼굴을 내밀었다. 동그랗게 변한 눈에 당황해하는 빛이 번져 갔다. 묘한 기분을 불러일으키는 눈동자를 마주하며 시후는 붉은 입술을 달싹였다.
“줄게요, 답.”
말을 마침과 동시에 시후가 한 행동은, 곧바로 서로의 입술을 포개는 것이었다. 예준이 움찔, 하고 돌처럼 딱딱하게 경직되어 가는 게 느껴졌다.
시후는 눈을 가늘게 뜬 채로 계속 입술을 문대었다. 느릿하게 비벼 댈 때마다 상대방의 살덩이가 촉촉하게 젖어 들어갔다.
“하…….”
꾹꾹 억누른 듯 토해진 외마디 숨소리가 시후의 귀를 자극했다. 그는 끄트머리가 살짝 떨리는 음색을 즐기며 집요하게 입술을 문질렀다. 이어 예준의 입 안으로 혀를 밀어 넣으려는 순간, 어깨가 강하게 붙들렸다.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이죠?”
여전히 거리를 가깝게 좁힌 채로 예준이 낮게 읊조렸다. 느닷없이 저에게 키스한 까닭을 찾으려는지 시후의 얼굴 위로 시선을 굴렸다. 집요하게 훑는 시선을 평온하게 마주하며 시후는 한쪽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렸다.
“알려 준다고 했잖아요. 내가 왜 예준 씨 만나러 왔는지.”
그 말에 예준은 입을 꽉 다물었다. 가쁜 숨을 정리 못 해 목울대를 불안정하게 꿈틀거리며.
“나 그쪽한테 욕정 느껴요.”
시후는 그의 목을 잡고 있던 손을 내려 제 주머니 안에 넣었다. 그러고는 손 안으로 들어온 라이터를 부드럽게 굴리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유예준 씨가 꼴린다고.”
그런 뒤 시후가 한 행동은, 눈으로 예준을 진득하게 훑는 것이었다. 목에서 어깨로, 어깨에서 가슴으로 내리는 시선에 성적인 욕망이 담겨 있었다.
셔츠를 입고 있음에도 보기 좋게 나온 가슴이 근사했다. 잘 갈라져 있을 가슴골을 상상하며 시후는 더 아래로 눈꺼풀을 내리깔았다.
긴 속눈썹에 반쯤 가려진 눈이 보는 건 예준의 바지였다. 정확히는, 청바지에 가려져 있을 그의 물건이었다.
“하, 하하.”
예준이 실소를 뱉었다. 시후는 다시 시선을 위로 올려 그의 얼굴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올라간 입매 근처에 박혀 있는 보조개가 예뻤다.
보조개를 관찰하는 동안, 예준이 커다란 손으로 시후의 등을 받쳤다. 누가 보아도 연인처럼 끌어안고 있는 자세였다. 낯뜨거운 포즈를 아무렇지도 않게 취한 채 예준은 고개를 수그렸다.
무얼 하려는지 가만히 지켜보던 시후는 자신도 모르게 잇새 소리를 내었다.
“윽.”
느닷없이 귓바퀴가 깨물렸다. 아프지는 않았으나 예민한 부위라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일방적으로 당한 일에 양미간을 좁히는데 나지막한 음성이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좀 열받는데요.”
한숨이 섞인 속삭임에 여러 가지 감정이 묻어났다.
“열까지 받아요?”
“네. 형만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아서 짜증 나요.”
예준은 잠시 숨을 멈추었다.
“그리고 형도 나한테 꼴려서 기쁘고.”
굳이 꼴린다는 말을 따라 한 이유가 뭘까. 자극하기 위함이라면 예준은 확실히 성공했다. 시후는 다리 사이로 열이 쏠리는 걸 느끼며 입술을 달싹였다.
“유예준 씨.”
그는 예준의 빗장뼈에 손바닥을 얹고 가만히 쓸어 주었다. 느릿하게 쓰다듬는 행위에 진득한 느낌이 흘러나왔다. 속눈썹이 길게 드리운 예준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혼란스러워 보이기는 했으나 불쾌하지는 않은 반응이었다.
“나 따라올래요?”
예준은 여전히 눈을 가늘게 뜨고 시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다물려 있는 입술의 입꼬리가 움찔거리고 있었다.
시후는 설명하는 대신 고개를 돌려 주차한 차량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이 정도만 해도 충분히 이해했으리라 생각하며.
* * *
“시후 형.”
“하아” 하고 숨소리를 내며 읊조리는 예준의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다.
“여기서 계속 이러고 있을 거예요?”
이상한 감상을 일으키는 낯빛에 시후는 예준의 아랫입술을 손가락으로 훑었다. 타액이 흠뻑 젖어 있는 입술이 보드라웠다. 그 위를 살살 매만지며 그는 웃음기 어린 목소리를 내었다.
“왜. 싫어요?”
예준은 대답하는 대신 고개만 비스듬하게 기울였다. 단정했던 갈색 머리칼이 엉망으로 헝클어져 있었다. 뒷좌석에 앉은 예준을 시후가 바로 짓누르며 쓰러뜨린 탓이었다.
문이 닫히는 소리를 신호 삼아 시후는 원하는 대로 행동했다. 근육이 보기 좋게 잡힌 가슴을 내리누르며 상대의 몸 위에 올라탔다. 체중 때문인지, 아니면 흥분한 건지 예준은 “읏” 하고 신음했다. 하얀 손가락이 그런 예준의 턱을 잡아 올렸고, 곧 질척한 키스가 시작되었다.
혀를 섞는 소리가 열기를 더하고, 흥분한 두 사람은 계속해서 엎치락뒤치락 자세를 바꿔 갔다. 젖은 예준의 입술을 감상하며 시후는 인상을 썼다.
‘왜 이렇게 덩치가 커, 쉽지 않게.’
그렇게 생각하는 시후는 거친 숨을 내쉬고 있었다. 넓은 어깨를 감싸고 있던 코트마저 반쯤 벗겨져 아래로 흘렀고 목깃은 엉망으로 구겨져 드물게 느슨한 분위기를 풍겼다.
‘더 작았으면 좋았을 텐데.’
예전의 파트너들한테서는 못 느꼈던 버거움이 있었다. 남들보다 체격이 좋은 데다 우성 알파이기까지 한 시후는 제 원하는 대로 파트너의 몸을 뒤집어 가며 섹스하곤 했다. 그러나 예준은 달랐다. 고작 혀 좀 섞는 체위임에도 순순히 끌려와 주지를 않았다.
쓰러뜨리면 다시 일어나 시후를 밀치고, 턱을 붙잡으면 똑같이 잡아채며 창문 쪽으로 누르고. 폭력적인 입맞춤은 짐승들의 서열 싸움을 연상케 했다.
어떻게든 깔리지 않으려는 수컷과, 어떻게든 올라타려는 또 다른 수컷.
“후우…….”
시후는 키스하느라 쌓였던 숨을 길게 흘렸다. 그러는 동안 예준은 몸을 겹친 채로 그런 시후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곧 색소 옅은 눈동자에 웃음이 번져 나갔다.
“정말 취소할 거예요?”
뺨에 닿는 시선이 불처럼 뜨거웠다. 시후는 창문에 뒷머리를 댄 채로 제 앞에 있는 이와 눈빛을 주고받았다. 난잡하게 혀를 섞으며 나누었던 대화가 자연스레 떠올랐다.
‘맨정신으론 안 한다고. 언젠가 그런 말을 했었죠?’
‘취소하도록 하죠, 그 말.’
그 대답이 어지간히도 좋았던 건지 예준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있었다. 보기 좋게 휘어진 눈꼬리와 입가 옆에 난 보조개가 해사한 느낌을 내었다.
그 순간 시후는 저 말간 얼굴을 엉망으로 만들고픈 충동이 솟았다. 머리도 더 헝클어뜨리고, 얼굴은 땀범벅으로, 아니. 기왕이면 더 불투명하고 진득한 액으로.
예로 들면, 그래. 정액이 좋겠다.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느낌이란 이런 건가. 상상하는 것만으로 짜릿함이 정전기처럼 일었다. 무심결에 생각나는 건 코트 주머니 안에 있을 담배였다. 길고 흰 것을 입에 물어 연기를 내고 싶었다. 힘껏 니코틴을 빨아들여야 옅어진 이성이 조금이나마 돌아올 것 같았다.
그러나 담배의 찌든 내가 차에 스미게 만들고 싶진 않았다. 시후는 대신 깨끗한 비누 향이 나는 아이의 얼굴을 쓰다듬는 것으로 상태를 가다듬었다.
얌전히 있던 예준은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그것도 잠시, 고개를 살짝 수그려 시후의 손바닥에 한쪽 뺨을 갖다 대었다. 숱 많은 갈색 머리칼이 보기 좋게 흘러내렸다.
제 피부를 간질이는 머리카락의 감촉을 느끼며 시후는 입매를 당겨 올렸다.
“애교 잘 부리네.”
예준은 부끄러워하는 기색 없이 담담하게 설명했다.
“집에서 막내거든요. 가족들한테 곧잘 해요.”
“막내라고 모두가 애교 부리는 건 아니죠. 내 동생은 이런 거 죽어도 안 하거든.”
“그래요? 전 큰형과 나이 차가 나서 그런가 봐요. 어릴 때부터 해 와서 이런 데에 스스럼없어요.”
그러면서 예준은 시후의 손바닥에 입을 맞추었다. 피부와 피부가 맞닿았다가 떨어지는 소리가 귓바퀴를 간지럽혔다.
“……설마 친형한테 뽀뽀도 하는 건 아니죠?”
“아하하!”
넌지시 묻자 쾌활한 웃음이 차 안을 가득히 채웠다. 시원시원한 웃음소리는 이온 음료처럼 깨끗하고 청량한 맛이 있었다.
시후는 아까만 해도 어깨를 짓누르던 피로감이 사라졌음을 깨달았다. 물처럼 말간 이 아이는, 확실히 스트레스를 풀기에 제격이었다. 실소를 뱉는데 예준이 “형” 하고 불렀다.
“이제 뭐 할 거예요?”
“음, 글쎄요.”
“벌써 기운 빠진 건 아니죠?”
느긋하게 답하자 예준이 눈썹에 힘을 주었다. 이러다 자신을 다시 내보낼까, 불안한 기색이 없잖아 있는 얼굴이었다. 시후는 대답하는 대신 한마디 툭 뱉었다.
“손.”
“?”
“손.”
세 번 말하지는 않겠다는 뜻을 담아 입술을 달싹였다. 예준은 의아해하면서도 커다란 손을 내밀었다.
길고 깨끗한 손가락들이 인상적인 손을 잡은 채 시후는 그 손을 아래로 끌어내렸다. 잠시 후, 얌전하던 손가락들이 깜짝 놀라 움츠러들기 시작했다.
“어때.”
“…….”
“기운 빠진 것 같아요?”
예준은 손을 뒤로 확 빼었다.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는 동작에 놀란 기색이 묻어났다. 시후는 그의 당혹감을 이해했다. 느닷없이 남의 좆을 쥐게 만들 줄은 몰랐을 테니까.
“그쪽 건 굳이 안 만져도 되겠어. 아까부터 계속 날 찌르고 있거든.”
“……네?”
시후의 잘생긴 얼굴에 미소가 감돌았다. 멍하니 지켜보던 예준의 뺨이 빠른 속도로 붉어졌다. 득달같이 덤벼들 땐 언제고, 이제 와 수줍어하는 모습에 시후는 더 크게 웃었다.
“확실해졌네요.”
“뭐……가요?”
“예준 씨 데리고 뭐 할지.”
시후는 상체를 바로 하며 흐트러진 옷을 정리했다. 어깨 밑으로 흘러내린 코트를 바로 입는 동작에서는 아무나 흉내 내기 힘든 우아함이 있었다.
“키스 말고 다른 것도 가르쳐 줄게요.”
마지막으로 검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정리한 뒤 시후는 입술을 떼었다.
“어때요.”
상대가 어떤 답을 할지, 이미 예상하고 건넨 질문이었다. 보기 좋게 올라간 입매가 부드러운 호선을 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