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6/17)

6장. Amabile

아마빌레 : 사랑스럽게

유명한 건축가가 설계했다던 상원 그룹 백 회장의 자택은 한눈에 보아도 훌륭한 건축물이었다. 안이 보이질 않는 통유리로 이루어진 진회색 건물은 차갑지만 세련된 분위기가 풍겼다.

그 앞에는 소나무와 향나무들이 연못 주위에 심어져 있었다. 한겨울에도 푸름을 자랑하는 솔잎을 감상하며 시후는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희고 매끄러운 손가락들이 향한 곳은 다름 아닌 자신의 목이었다.

엄지로 목 곳곳을 눌러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손끝에 볼록하게 튀어나온 목젖이 만져지자 묘한 열기가 올라왔다. 그곳을 지분대며 시후가 떠올린 건, 자신보다 어린 남자애였다.

정확히는 얼마 전에 있었던 그와의 오럴섹스를 회상하고 있었다. ‘씨발’이라고 욕하던 나지막한 음색, 자신의 머리채를 움켜쥐던 악력, 그리고 식도 안까지 들어와서는 입도 다물지 못하게 만들던 좆. 그 모든 것이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꾹, 꾹.

목젖을 누르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약간의 고통이 일어남과 동시에 숨쉬기가 다소 버거워졌다. 무표정한 얼굴로 시후는 가만히 생각했다.

‘이러다 서겠군.’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알면 기겁할 내용이었다. 시후는 손을 내려서는 길게 호흡을 뱉었다. 희미한 입김이 하늘 위로 올라가 삽시간에 사라졌다.

놀랍게도 시후는 목구멍이 난폭하게 범해졌던 순간이 나쁘지 않았다. 밀어내려는 저를 무시한 채 계속 허릿짓을 하던 폭력성이, 혀와 입천장을 문지르며 구멍을 빠듯하게 채우던 좆의 존재감이 꽤 좋았다. 부모님이 계신 자택을 코앞에 두고 그때 일을 되새기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고통과 희열이 번져 나가는 걸 느끼며 시후는 제 손을 살폈다. 손금이 그어진 손바닥을 응시하는데 당시의 예준이 했던 말이 기억났다.

‘다시는 안 그럴게요.’

‘그딴 짓, 죽어도 안 할게요. 진짜예요.’

‘……저 미워하지 마세요.’

덤덤함을 유지했으나 사실 시후는 그 말들을 들었을 때 상당히 동요하고 있었다. ‘그딴 짓’에 발정 났다는 사실이 뒤통수를 때린 것이었다. 자신이 꼭 마조히스트라도 된 것 같은 충격에 심장이 세차게 덜컹거렸다.

당시의 당혹감을 곱씹으며 시후는 살짝 인상을 썼다.

“바본가?”

시후는 아무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목소리를 낮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너도, 나도.”

상대가 흥분한 줄도 모른 채 사과하던 너. 목구멍 깊이 박아 주는 게 좋았으니 한 번 더 해 보자는 말을 차마 못 했던 나. 즐겁게 섹스하자고 관계를 시작한 것치고, 두 사람 모두 미련한 행동을 하고 말았다.

물론 지금이라도 연락해 사실대로 말해도 됨을, 시후는 잘 알고 있었다.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저 메시지 하나만 보내면 그만이다.

[다음에도 똑같이 해 보죠.]

그렇게 제안하지 못하는 건, 느닷없이 깨달은 취향이 아직 혼란스러워서였다. 빨리는 게 아니라 빠는 게 더 취향이었나? 숨이 턱 막힐 때까지 박혀 버리는 거에 좋아한 자신이, 이해되지 않는다.

“…….”

시후는 입매를 꿈틀거리며 다시 침묵에 잠겼다. 말끔한 얼굴이었으나, 미세하게 떨리는 눈꺼풀에는 동요하는 기색이 서려 있었다.

“형.”

느닷없는 호칭에 찰나지만 호흡하는 방법을 잊었다. 시후는 눈만 부릅뜬 채로 뒤를 돌아보았다.

“왜 그렇게 놀라?”

유예준을 떠올리게 만든 사람은 길쭉한 다리를 자랑하는 다른 이였다. 굽슬거리는 갈색 머리카락과 여우같이 휘어진 눈꼬리가 매력적인 남자였다.

시후는 대꾸하는 대신 다가오는 남자의 차림을 가만히 살폈다. 후드티 위에는 흰 패딩, 청바지 아래로는 운동화. 거기에 피어싱에 팔찌와 반지들 등 갖가지 액세서리로 치장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정장 차림인 시후와는 정반대의 분위기를 가진 그는 한없이 자유로워 보였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남자를 향해 시후는 조용히 이름을 불렀다.

“백도영.”

백도영. 시후의 친형제이자 동생이었다. 도영은 스스럼없이 다가와선 팔꿈치로 제 형을 찔렀다. 다른 이였으면 어림도 없었을 행동을,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추운데 혼자 서서 뭐 해?”

“……생각.”

“생각? 뭐, 애인 생각이라도 하나?”

말을 마치자마자 도영은 “하하” 하고 가벼운 웃음소리를 내었다. 자신이 말해도 우습다는 반응이었다.

농담임을 바로 알아차린 시후는 그의 질문을 자연스럽게 무시했다. 걸음을 움직이자 도영이 따라 걸으며 능글맞게 미소 지었다.

“얼굴 좀 펴. 오랜만에 만났는데 반갑지도 않아?”

“오랜만은. 회의 때 만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사적으로는 오랜만이지. 누가 보면 형제가 아니라 직장 동료인 줄 알겠다니까. 자꾸 비즈니스적으로만 만나게 되니 말이야.”

시후는 느물거리는 친동생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럼 시간 내.”

“음?”

“시간 내라고, 백도영. 네 말마따나 사적으로도 자주 보게.”

“농담이지?”

“농담 같아?”

당연히 농담이고 빈말이었다. 아쉬운 듯이 너스레를 떠는 도영이 녀석을 골리기 위한 행동에 불과했다.

시후는 속마음을 감춘 채 그를 무표정으로 말끄러미 응시했다. 그러자 도영은 “아이고” 하고 어깨를 가볍게 으쓱거렸다.

“사실 나 요즘 바빠, 많이.”

“그럴 줄 알았다.”

“그럴 줄 알았으면서 시간 내란 소린 왜 했어? 뭐, 진짜 바빠서 그래. 하루가 48시간이면 좋겠다니까, 정말.”

마지막 말에는 묘한 즐거움마저 서려 있었다. 묻지도 않았는데도 도영이 녀석은 “아주 바빠 죽겠지. 엄청 바쁘지, 진짜” 하고 재잘거렸다. 그의 밝은 어조에서 자랑하고 싶어 하는 은근한 기미가 풍겨 왔다. 아이처럼 들뜬 기색에 시후는 양미간을 좁혔다.

“가족들 오면 이야기해 줄게, 무슨 일인지.”

“안 궁금해.”

“좀 궁금해해라. 무슨 사람이 이렇게 정 없냐.”

“…….”

“누구는 자기 동생 끔찍하게 생각하던데. 틈만 나면 동생한테 전화해서 안부 묻고. 예뻐 죽으려 해, 아주.”

시후는 전혀 궁금하지 않다는 뜻으로 입을 딱 다물었다. 누가 제 동생을 예뻐하든 말든,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말하는 것을 보니 자신이 아는 사람 같지도 않았다.

묵묵하게 걸어가는 둘째 형을 살피며 도영은 혼자 소리 내어 웃었다. 빨갛게 상기된 얼굴에 나사 빠진 표정이 거슬렸다.

‘약이라도 하는 건 아니겠지?’

그 생각이 미치자 시후는 도영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샅샅이 훑어보았다. 날카로운 시선에도 도영은 당황하기는커녕 실실대기만 했다.

“왜 그렇게 봐?”

“…….”

아무리 봐도 수상하다. 녀석이 무언가 일을 저지를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시후는 제 생각이 틀리기를 바라며 인상을 썼다.

‘약쟁이 동생은 사양인데.’

* * *

얼마 있지 않아 시후는 제 동생이 약쟁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행스러운 일이었지만 그의 얼굴에는 안도감이 아닌 어처구니없어하는 빛이 서려 있었다. 등을 곧게 편 채 시후는 제 주위를 둘러보았다.

“…….”

“…….”

“…….”

침묵 중인 다른 세 사람은 모두 시후의 가족들이었다. 아버지는 눈을 댕그랗게 뜬 채 당황한 기색을 역력하게 드러냈다. 매사 특유의 포커페이스로 엄숙함을 풍겨 내는 기업인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 옆에 앉은 어머니는 무슨 말을 할 듯 입술을 달싹거리긴 했지만 결국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었다.

부모님이 당황해하는 동안, 큰형 역시 제 관자놀이 부근을 손으로 꾹꾹 누르고 있었다. 흔들리는 동공으로 보아 그도 동요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시후는 놀란 가족들을 쭉 훑은 뒤, 홀로 서 있는 백도영을 향해 말을 걸었다.

“그게 네 설날 인사라고?”

도영은 잘생긴 얼굴에 미소를 가득 담아냈다. 화사하기 짝이 없는 예쁜 미소는 흡사 로맨틱 영화의 주인공 같았다.

“응, 왜? 뭐 문제 있나? 어머니가 뭐 하고 지냈는지 말해 달라고 하셨잖아. 그래서 말씀드린 것뿐인데?”

“……아까 한 말 다시 해 봐.”

“좋지.”

묵직한 목소리에 당황할 법한데도, 도영은 전혀 개의치 않는 얼굴이었다. 오히려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소파에 앉은 가족들을 죽 둘러보았다. 시후는 그의 눈동자가 보석처럼 반짝이는 순간을 똑똑히 목격했다.

“저 만나는 사람이 있어요. 진지하게 교제하는 중이고요, 제가 정말 많이 사랑하고 있어요. 이제 가족분들 모두 알아주셨으면 해서 말씀드리는 거예요.”

큰형이 “쿨럭!” 하고 크게 기침을 했다. 그도 잠시,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막냇동생을 바라보며 미간을 구겼다.

“농담 잘한다, 백도영. 순간 진짠 줄 알았네.”

“…….”

도영은 아무 말 없이 미소만 지었다. 그러더니 긴 속눈썹을 밑으로 내리깔며 고개를 살짝 저었다. 살짝 상기된 뺨과 누그러진 눈매에는 놀랍게도 수줍어하는 티가 묻어났다.

매사 장난스럽던 백도영이 진지한 모습을 보이자 가족 모두 입을 벌렸다. 시후 역시 도영이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감지했다.

뺨에 큰형의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자 형이 입 모양으로 ‘알고 있었어?’ 하고 물었다. 미묘해진 공기를 느끼며 시후는 눈빛으로 처음 들었음을 표현했다.

한참 말이 없던 아버지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잇따라 일어난 어머니는 아버지의 등을 짚으며 뭐라고 속삭였다. 이어 부모님은 동시에 도영을 바라보았다.

“도영이, 잠깐 따라와.”

무미건조한 아버지의 부름에도 도영은 움츠리기는커녕 안색만 환해졌다. 곧장 따라나서는 도영의 입매는 여전히 호선을 긋고 있었다. 빠르게 사라지는 가족들의 뒤통수를 보며 시후는 제 날렵한 턱선을 가만히 쓸었다.

‘바쁘다더니.’

그게 연애하느라 바빴던 거였군. 귓전에 도영이 했던 말이 아직도 뱅뱅 맴돌고 있었다.

‘저 만나는 사람이 있어요. 진지하게 교제하는 중이고요, 제가 정말 많이 사랑하고 있어요.’

사랑.

그 단어에 담긴 진심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저 백도영이?

시후는 제 동생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매사 상냥하고 호의적인 미소를 머금고 있지만, 누군가와 진득한 관계를 선호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특히나 연애 같은 건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았으며, 누군가를 좋아할 시간에 여러 사람과 몸 섞을 스타일이었다.

갈아 치운 섹스 파트너들만 여럿. 성관계를 인스턴트처럼 가볍게 즐기는 녀석이, 갑자기 뭐라고?

“사랑?”

혼잣말에 황당해하는 기색이 묻어났다. 시후는 장난기 하나 없던 도영의 얼굴을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미쳤군’이라는 말이 목구멍 위로 튀어나와 혀끝을 감돌았다. 그것을 내뱉기 직전, 형이 바람 빠진 소리를 내었다.

“그래도 우리 셋 중엔 제일 낫네. 사랑하는 사람도 찾고 말이지.”

시후가 인상을 쓰자 큰형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왜?”

“형이 이렇게 낭만적인 사람인 줄은 몰랐는데. 아까 못 들었어? 상대가 비서라잖아, 그것도 여섯 살 많은 남자.”

시후는 부모님과 도영이 사라진 방향으로 눈동자를 옮겼다.

“부모님께서 받아 주시겠나.”

“받아 주시지, 당연히.”

그 말을 듣자마자 시후는 다시 시선을 돌려 형을 바라보았다.

“쟨 막내잖아.”

형은 오른손을 가볍게 흔들며 고개를 까딱였다.

“우리 부모님, 도영이한테는 껌뻑 죽는 거 잘 알면서. 너나 나면 모를까, 쟤 고집을 꺾으실 순 없을 거야.”

“…….”

“오히려 지지해 주실 수도 있고. 거기다 그 좋아한다는 사람이 유연우 씨잖아. 뭐, 유연우 씨 유능한 건 우리 다 알고 있고, 또…….”

시후는 집중력을 잃었다. ‘너나 나면 모를까’라는 말 한마디가 귓전을 뱅뱅 맴돌았기 때문이었다.

형의 주장은 꽤 일리 있었다. 부모님은 막내인 백도영에게만 유독 너그러웠다. 도영이 훌쩍 미국으로 떠났을 때도, 나중에 귀국 후 사고들을 칠 때도 마찬가지였다. 정장 차림이 필수인 중요 모임조차 도영은 반항하듯 청바지를 입고 나타났지만, 부모님은 혀만 끌끌 찰 뿐 그 이상 꾸짖지는 않았다.

‘우리가 말한다고 듣겠니?’

언뜻 피로한 것 같은 어조였지만 거기에는 막내에 대한 사랑과 이해가 가득 풍겨 왔었다.

“……그래, 이랬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지.”

“거봐.”

“…….”

“설득할 거야, 도영이가. 저 녀석, 말도 잘하잖아.”

형의 목소리에 어쩔 수 없다는 웃음이 있었다. 시후는 입을 닫은 채 소파 팔걸이를 매만졌다. 편애에 대해 이렇다저렇다 할 생각이 드는 건 아니었다. 뭘 한다고 나이 든 부모님이 갑자기 바뀌실 리가 없음을 알아서였다. 서른 넘은 지금, 애처럼 굴고 싶지도 않고.

그런데도 못마땅한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얼굴이 왜 그래?”

시후의 표정을 읽은 형이 눈을 깜빡거렸다. 그러더니 “어어, 너” 하고 뜻 모를 소리를 내며 옆으로 다가왔다.

“설마 연애해?”

이건 또 무슨 소린가.

“뭐?”

“연애하냐고. 그래서 내심 걱정하는 거 아냐? 부모님이 너 반대하실까 봐.”

“…….”

“왜 아무 말이 없어? 진짜야?!”

별안간 큰 소리를 내는 형은 잔뜩 신이 난 눈치였다. 시후는 황당해하는 기색을 숨기지 않은 채로 그를 훑어보았다.

“……말할 가치가 없군.”

“아, 뭐야. 진짜 없어?”

시후는 질문이 끝나자마자 고개를 끄덕였다. 묵묵한 얼굴에는 조금의 동요도 나타나질 않았다. 진심임을 알아차린 형은 흥이 식었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어디까지 상상한 거야, 대체.”

“들어 볼래? 일반인과 비밀 연애하는 백시후. 그것도 모르고 부모님은 어느 기업 자녀를 소개하는 거지. 강제로 보게 된 선 자리에서 백시후는 애인이 있다며 자리를 파투…….”

“신났네.”

심드렁하게 읊조리며 시후는 한숨을 삼켰다. 연애라니. 생각만 해도 피곤해진다. 자신에게만 몰두해도 바쁜 와중에 그런 진득한 관계에 얽매이는 건 사양이다.

자연스레 예준의 얼굴이 눈앞에 그려졌다. 그 아이에게 필요 이상의 에너지를 쏟지 않을 수 있는 이유. 그것은 일절 연애 감정이 섞이지 않아서임을, 시후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저 미워하지 마세요.’

조심스럽던 목소리가 귓전을 맴돌았다. 혈색 좋은 뺨도, 살짝 처진 눈매도, 그날따라 슬픈 느낌을 만들어 내던 눈물점도 머릿속에 그려졌다. 꼭 큰 잘못을 저지른 강아지 같아 시후는 소리 없이 미소 지었다. 현 사태에 대한 불쾌감이 식고 즐거움이 손끝을 살살 긁었다.

“형들 아직 앉아 있었네?”

때마침 도영이 홀로 나타났다. 느릿하게 걸어온 그는 두 형제를 보고는 고개를 까딱였다. 알 수 없는 반응에 시후는 막내의 분위기를 살폈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도영이 기쁨을 꾹 참고 있음을 알아냈다.

과연, 도영은 눈꼬리를 둥글게 휘며 웃어 보였다. 초승달 모양의 눈동자에 반짝이는 건 승리감이었다.

“백도영.”

시후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넥타이를 가볍게 정리했다. 다음으로 이어지는 목소리가 담담했다.

“나가서 이야기해.”

* * *

동생이 연애를 한다. 다른 사람이었으면 그러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았을 것이다. 하물며 큰형이었다면, 언젠가는 그럴 줄 알았다며 고개만 한 번 끄떡였을 게 분명했다.

그러나 백도영은 달랐다. 연애하고는 전혀 거리가 멀어 보였던 아이가, 수줍어하는 티까지 내며 그 사람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말간 얼굴에 떨리는 목소리. 지금까지 시후가 알고 있던 도영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사람이 참 다정해. 웃을 때도 예쁘고. 그렇게 안 생겼다고? 그 점이 매력인 거야.’

어떤 점이 좋냐고 물었다가 시후는 알고 싶지 않은 정보들을 모조리 듣게 되었다. 저 잘난 맛에 사는 도영이 놀랍게도 먼저 좋아했다는 이야기. 그 상대는 상냥하고, 일도 잘하고, 어른스럽고, 잘생겼고, 점잖으며, 제 가족들한테도 잘하고, 세심하다는 사실.

애인에 대해 이것저것 이야기하는 동생을 보고 있자니 이제 걱정마저 들었다.

이 녀석, 사람 제대로 보고 만나는 것 맞나?

사랑에 미친 동생의 모습은 활활 타오르는 불길에 무턱대고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저러다 그 애인에게 뒤통수라도 맞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리 있는 추측이 불안을 끌어와 찌르르, 목뼈를 울렸다. 시후는 혀를 가볍게 차고는 낮게 중얼거렸다.

“믿을 수가 있어야지.”

사실 도영과는 살갑다기보단 빈정거림을 아무렇지도 않게 주고받는 형제 사이였다. ‘너는 왜 이렇게 망나니처럼 사냐’, ‘그러는 형은 왜 이렇게 꼰대 같냐’ 같은, 남들이 들으면 기겁할 발언들을 두 사람은 표정 변화 하나 없이 내뱉곤 했다.

그렇다고 제 하나밖에 없는 동생을 싫어하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이 세상에 시후가 애틋함을 가지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기까지 했다. 그 마음을 굳이 다정한 말로 표현하지 않는 것뿐이었다.

이번에도 시후는 제 걱정을 말로 건네는 대신 행동에 옮기기로 했다. 다짜고짜 동생의 애인이자 비서인 남자를 만나러 간 건 그 때문이었다.

“유연우 씨?”

그 유연우라는 사람은 막 주차장을 가로지르려던 참이었다. 미리 기다리고 있었던 시후는 상대의 얼굴을 꼼꼼하게 살폈다. 멀지 않은 거리에 서 있는 연우는 의아해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백도영의 친형이 왜 여기 있는지 이해되지 않는다는 반응이었다.

“일찍 온다더니 정말이군.”

먼저 말을 붙이며 시후는 그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가까워진 연우는 냉랭한 느낌이 나는 미남이었다. 반듯하게 넘긴 머리칼, 안경 너머의 날카로운 눈매, 구김 하나 없는 정장 차림은 깔끔하여 이지적인 분위기를 내었다.

“…….”

연우의 얼굴에는 여전히 물음표가 서려 있었다. 크고 까만 눈동자에 서린 빛은 또렷하여 묘한 감정을 일으켰다. 시후는 그에게 시선을 붙인 채 그 감정의 이름을 찾아보려고 했다.

그리고 몇 초 지나지 않아, 자신이 느끼고 있는 것의 이름이 기시감임을 알아차렸다.

‘누굴 닮았는데.’

왜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드는 건지 모르겠다. 도영의 전속 비서인 유연우는 이전에도 몇 번 얼굴을 본 사람이었다. 그런 연우에게 별안간 누굴 닮은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런 시후가 부담스러웠던 건지 유연우는 금방 눈을 밑으로 내리깔았다. 말할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뜻에 시후는 제 탐색을 그만두기로 했다.

그래, 누굴 닮았을 리가. 괜한 생각이다. 시후는 크고 단단한 손을 내밀며 정적을 깨뜨렸다.

“사적으로는 처음 이야기 나누네요.”

일단은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부터 알아내는 게 급선무다. 시후는 특유의 점잖으나 위화감이 풍기는 목소리를 내었다.

“잠깐 시간 좀 냈으면 하는데.”

예상 못 한 말이었는지 연우의 눈꼬리가 꿈틀거렸다.

“지금, 말씀입니까?”

“그래요.”

“…….”

연우는 입을 꾹 다문 채 이유를 묻는 눈빛을 던졌다. 어쩌면 도영이 가족들에게 폭탄선언을 했음을 모르는 걸지도 모르겠다.

“별 얘기 아닙니다.”

“네?”

“연애 이야기 좀 들을까, 해서 찾아온 거니까. 별 얘기 아니니 긴장 풀란 뜻입니다.”

주차장을 가로지르며 찾아온 용건을 알려 주었다. 시후가 말을 마치자마자 “흡” 하고 숨을 크게 들이마시는 소리가 울렸다. 어느새 연우는 석고상처럼 쩍 굳어 있었다. 멈춰 서 있는 그의 안색이 낮달처럼 창백해졌다. ‘연애 이야기’라는 말에 자신이 모르는 뭔가가 벌어졌음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역시.’

아무것도 몰랐던 게 분명했다. 시후는 경악에 찬 상대를 향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따라와요.”

한마디 짧게 건네자 연우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그러나 오래 서 있을 생각은 없었는지, 곧 긴 속눈썹을 밑으로 내리깐 채 시후를 따라 걸었다. 바닥만 죽 쳐다보는 옆얼굴에 복잡한 빛이 서려 있었다.

그런 연우의 옆얼굴을 살피며 시후는 “흠” 하고 나지막이 소리 내었다. 충격에 빠져 있는지 연우는 끝까지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일직선으로 굳게 닫은 입매를 관찰한 뒤 시후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낯익은 느낌을 계속 떨쳐 내려고 하면서.

* * *

“부족한 건 도영 씨가 아니라 접니다.”

연우의 발언에 시후는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직장인들이 바삐 오고 가는 회사 근처의 카페. 구석진 자리에 앉아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시후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연우를 향해 물었다. 어떤 점이 그렇게 좋았냐고. 그러면서 일부러 이런 말을 덧붙였다.

‘나이도 어리고, 가볍고. 시답잖은 장난도 잘 치는 성격일 텐데요. 애인으로서는 좀, 부족하지 않나 싶어서.’

슬쩍 도영의 단점을 말하자마자 얌전했던 연우의 표정이 바뀌었다. 부릅뜬 눈동자에 반박하고 싶어 하는 뜻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과연, 그는 인상까지 쓰며 울컥한 목소리를 내었다. 부족한 건 도영이가 아니라 자기라고.

빈말이 아님을 시후는 쉽게 알 수 있었다. 좋아서 입이 찢어져라, 웃을 백도영의 얼굴이 그려졌다.

“어떤 점이?”

“네?”

“어떤 점이 그렇게 좋냐고 묻는 겁니다.”

“다정하고, 섬세하고.”

“흐음.”

도영도 같은 소리를 했다. 자기들끼리 참 잘 논다고 생각하며 시후는 계속 말해 보라는 눈빛을 던졌다.

“또 여러모로 제가 빚이 많습니다, 이사님께. ……그러니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죠.”

“…….”

“과분한 사람입니다.”

연우의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부드러워진 눈매와 아련한 표정, 그리고 달싹거리는 입술은 영락없이 사랑에 빠진 사람의 것이었다. 도영에 대한 애정이 주체 못 할 만큼 솟아오른 게 분명했다.

벅차하는 상대를 살피며 시후는 새삼스레 신기해졌다. 어떻게 누군가를 저토록 좋아할 수가 있을까. 시후는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감정이었다.

아주 잠깐, 도영이나 연우처럼 감정에 허우적대는 자신을 상상해 보았다. 느끼한 음식을 먹은 듯 속이 메슥거려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연우 형.”

얼마 있지 않아 도영이 카페 안으로 들어왔다. 성큼성큼 들어온 동생의 얼굴에 경계하는 기색이 가득했다. 언질도 없이 제 사람을 만나러 온 둘째 형한테 열받은 게 분명했다. 다급하게 다가온 도영은 시후를 보고 눈을 번득였다.

“고생했겠다, 저런 사람한테 시달리느라.”

다짜고짜 짜증부터 내는 반응에 연우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까만 눈동자에는 연인에 대한 반가움, 느닷없는 시비에 대한 당혹감이 담겼다.

반면, 시후는 무표정한 얼굴로 백도영을 맞이했다. ‘저런 사람한테 시달리느라’라니. 누가 들으면 유연우에게 물세례라도 퍼부은 줄 알겠다.

“궁금해서 부른 거야, 누가 너와 연애해 주나 싶어서.”

“왜 굳이? 연우 형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전에도 얼굴 본 적 있잖아, 그것도 몇 번이나.”

“비서로서 보는 것과 동생 애인으로서 보는 건 다르니까.”

도영은 계속 날을 세운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인상을 팍 쓰며 지랄하지 말라는 뜻을 보였다.

과한 반응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시후와 도영은 똑같이 우성 알파이며, 원나잇 같은 가벼운 관계를 선호한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그러니 정조 관념 없는 형이 제 오메가인 애인에게 손이라도 댈까, 초조한 게 분명했다.

웃긴 놈이다. 지 애인, 저한테나 예쁘지. 이쪽은 동생의 연상 애인이라는 것 외엔 어떠한 관심도 일지 않는다. 시후는 실소를 삼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저 가 보겠습니다. 다음엔 더 길게 대화 나누죠.”

그러면서 시후는 연우의 목에 제 페로몬 향을 묻혀 놨다. 오자마자 무례하게 굴었던 동생의 속을 긁기 위함이었다.

문을 열고 나가기 전, 시후는 마지막으로 두 사람에게 시선을 보냈다. 그사이 벌써 뭐라고 속닥이는 연인들의 눈빛이 부드러웠다.

“…….”

두 사람만의 세상을 엿보던 시후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을 비서들을 생각하며 발길을 옮겼다.

겨울 냄새가 가득 담긴 바람이 얼굴을 긁었다. 송곳처럼 날카로운 한기에 매끈한 뺨이 꿈틀댔다.

아침부터 애정 행각을 봐서인가? 돌연 입 안이 썼다. 시후는 코트 주머니 안으로 손을 넣어 가장 먼저 잡히는 것을 만지작대었다. 차갑고 매끈한 감촉은 핸드폰이 아닌 라이터였다.

그것이 손바닥을 누르자 자연스레 담배 한 대 피우고픈 욕망이 솟았다. 회사가 아닌 건물 사이에 난 좁은 길 안쪽으로 들어간 건 그 때문이었다.

자연스레 담배를 입에 문 채 시후는 눈을 내리떴다. 등 뒤로 차바퀴가 길게 끄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서울 한복판임을 새삼스레 알리는 소음이었다.

‘그래. 좋은 사람인 것 같긴 해.’

기업가인 시후는 안목과 직감이 남들보다 월등하게 좋은 편이었다. 괜찮은 거래처를 단번에 알아보며, 어느 라인에 서야 상원에 득이 되는지도 판단할 줄 알았다. 무능한 금수저가 아닌 젊고 유능한 엘리트로 호평받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그런 시후의 시야 안으로 들어온 유연우는 꽤 괜찮은 사람이었다. 점잖으면서도 은근히 강단 있었다. 무엇보다 도영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는 점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연붉은색의 입술 사이로 연기가 길게 흘러나와 하늘 위로 올라갔다. 빠르게 사라져 가는 담배 연기에 시선을 고정한 채 시후는 목울대를 꿈틀거렸다. 희고 긴 것을 빨고 있으니 별안간 목구멍 안이 간질거렸다.

그런 자신을 깨달은 시후의 눈이 게슴츠레해졌다. 그는 담배를 들고 있지 않은 손을 올려 입술 가장자리를 훑었다. 불현듯 입술 부근이 찢어질 뻔했던 상황이 떠오른 탓이다.

이상한 일이다. 숨을 못 쉴 만큼 깊숙하게 밀려 들어온 예준의 좆이, 왜 갑자기 생각나는 건지.

“…….”

제 손에 들려 있는 담배를 살피며 시후는 침묵을 지켰다. 그 와중에도 목구멍은 꼭 그때 쑤셔 줬던 물건을 먹고 싶다는 듯 잘게 움찔거렸다.

시도 때도 없이 흥분하는 제 상태가 어처구니없어 “하” 하고 웃음 섞인 숨소리를 뱉었을 때였다. 코트 안에 있던 핸드폰이 진동을 울렸다.

유예준 [회사예요?]

유예준 [날씨가 추워요. 몸 상하지 않게 조심해요.]

뒷 메시지는 조금 더 늦게 나타났다.

유예준 [보고 싶어요.]

나도 보고 싶다. 네 좆 좀 다시 빨아 주고 싶어서.

핸드폰 액정을 응시하는 시후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갔다. 비릿한 정액이나 짙은 체향, 그리고 뜨거운 살덩이는 분명 거북스러워야 했다. 그런데 왜 나는 그걸 아직도 곱씹으며 입맛을 다시는 건가.

시후는 흰 연기를 한 번 더 길게 흘린 뒤 전화를 걸었다. 귓가에 핸드폰을 갖다 대자마자 “여보세요?” 하고 조금 놀란 듯한 목소리가 울렸다.

― 회사 아니에요?

“아직은. 밖에 있어요.”

“곧 들어가야죠”라고 덧붙이자 예준이 낮게 소리 내어 웃었다. 웃음의 의미를 몰라 시후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왜.”

― 좋아서요, 형 목소리 들으니 좋아서.

그러는 유예준의 목소리는 아침이라서 그런지 평소보다 꽉 잠겨 있었다. 쇳소리가 묘하게 섞인 음색은 은근히 야했다. 시후는 잿빛 하늘 쪽으로 눈동자를 옮기며 말을 툭 뱉었다.

“그쪽 대신 다른 거 빨고 있었어요.”

― ……나 말고 누구요?

“다른 놈이라고 안 했어요, 예준 씨. 다른 거라고 했지.”

침묵이 짧게 흘렀다. 그는 예준이 무슨 소릴 하려나, 기다리며 담배를 입에 물고 손을 떼었다. 손가락들이 주머니 안으로 들어가 은색 포켓을 찾을 때였다.

― 그것도 좀 싫은데요.

질투심이 섞인 속삭임에 시후는 그만 크게 웃을 뻔했다. 그는 다시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끼우곤 조롱하듯 속삭였다.

“너도 빨잖아요.”

― 제가요?

“담배.”

― …….

“담배 피우는 것도 질투 나요? 유예준 씨, 까다로운 파트너네. 그렇겐 안 봤는데.”

일부러 ‘파트너’라는 단어를 넣은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애인 행세하지 말라는 일종의 선 긋기였다. 재가 바닥으로 떨어져 구두 앞에 널브러졌다. 그는 그것을 느리게 짓이기며 입술을 움직였다.

“이해해 줘요. 지금 그쪽 거 빨 순 없으니까.”

― 아, 형.

“왜.”

― 나이 들면 다 형처럼 돼요?

시비 거나? 느닷없는 나이 이야기에 시후는 고개를 비스듬하게 기울였다. 흰 이마에 힘이 들어가는 사이 예준이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 그런 말 하는 거에 거리낌이 없잖아요. 30대 되면 다들 그렇게 되나.

“아닐걸. 난 그쪽 나이 때도 이런 말 잘했거든.”

― 형 아직 제 나이 모르잖아요.

예준의 지적대로 시후는 아직도 제 파트너의 나이를 몰랐다. 연령, 다니는 학교, 그 외의 정보를 굳이 묻지 않는 이유는 간단했다. 필요 없으니까. 궁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시후는 호기심보다는 효율성에 집중했다.

내가 뭐 하러 너에 대해 알아야겠냐고 말하려던 순간, 예준이 마른기침 소리를 내었다. 콜록거리는 음성에 담배를 들고 있던 손이 아래로 떨어졌다.

“예준 씨.”

― 네.

“목소리가 잠겼는데. 어디 아파요?”

아침이라서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뇌리에 스쳤다. 과연 예준은 멋쩍게 웃더니 순순히 제 상태를 시인했다.

― 감기 걸린 것 같아요.

“언제부터?”

― 어젯밤부터요. 너무 걱정하진 마세요.

다음 덧붙임에 시후는 자신도 모르게 인상 쓰고 말았다.

― 형 만났을 때는 괜찮았어요. 옮진 않았을 거예요.

“내가 옮았을까 봐 걱정하는 줄 알았어요?”

― 음.

“내 걱정은 안 해요. 알파의 몇 없는 장점이 건강이니까.”

― 그럼 제 걱정하는 거라고 생각할게요.

이야기가 왜 그렇게 되지. 시후는 반박하기 위해 입을 벌렸으나 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그사이 예준이 웃으며 희미하게 읊조렸다.

― 고마워요, 걱정해 줘서. 기뻐요.

별안간 귀 부근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예민하게 비틀려 있던 입매가 꿈틀거리고, 검은 동공이 좌우로 흔들렸다. 몽글몽글하게 풀어지는 자신을 발견한 시후는 어이가 없었다. 저런 말에 감동이라도 받은 건가?

‘미쳤군.’

당황한 그는 핸드폰을 들고 있지 않은 손을 올려 이마를 짚었다. 피로한 표정을 짓던 그는 제 손에 들려 있어야 할 담배가 없어졌음을 발견했다. 아래로 시선을 내리니 담배가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피다 만 담배 끝에서 붉은 불씨가 희미하게 피어났다.

“뭐가 고마워요. 내가 걱정한다고 낫나?”

불퉁하게 중얼거렸으나 예준은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 네, 형이 걱정하니까 좀 나아요.

“많이 아픈가 보네, 헛소리하는 거 보니까.”

― 헛소리라뇨. 진심인데.

“됐고.”

낯간지러워서 참을 수가 없다. 사람 좋게 웃는 예준의 목소리가, 담배까지 떨굴 정도로 흔들리는 제 상태가 전부 간지러워 죽겠다. 시후는 두 눈을 감으며 화제를 바꾸었다.

“집이에요? 일은.”

― 쉬는 날이에요.

“잘됐네, 병원 꼭 가요. 엔간하면 싸돌아다니지 말고.”

― 하하하.

“뭐가 그렇게 웃겨요?”

― 아프다니까 목소리 부드러워졌어요. 계속 아파야겠다, 형한테 예쁨받으려면.

“……끊어요.”

먼저 통화를 끊은 시후는 “웃기네” 하고 중얼거렸다. 걱정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자마자 기세등등해진 게 어처구니없다. 어린 게 눈치 하나는 빠르다고 생각하던 중, 시후는 눈썹 사이에 힘을 주었다. 콜록거리던 예준의 마른기침이 떠올라서였다.

잊으려고 했지만 빨갛게 열이 오른 얼굴이 그려지는 걸 막을 도리가 없었다. 그는 핸드폰에 시선을 둔 채로 계속 인상을 썼다. 그러는 동안 간지러움은 점점 온몸 전체로 번져 나가고 있었다.

손발이 정전기가 일어난 듯 얼얼해질 때쯤에야 시후는 짧게 혀를 찼다. 흰 얼굴에 어쩔 수 없다는 빛이 떠올랐다.

* * *

칼바람이 부는 밤, 시후는 오피스텔의 엘리베이터 안에 서 있었다. 검은 코트에 정장, 가죽 장갑과 구두까지 갖춘 그는 특유의 묵직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러나 오른손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이 하나 들려 있었다.

바스락.

“…….”

제 귓불을 긁는 소음에 시후는 눈을 밑으로 내리떴다. 시야 안으로 들어온 건 비닐로 된 봉투였다. 불과 한 시간 전, 제 손으로 직접 산 것들이 저 안에 담겨 있었다. 가만히 살펴보는 동안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차가운 공기가 들어왔다.

시후는 망설임 없이 어느 문 앞으로 걸어갔다. 초인종을 누르는 동작 역시 과감했다. 얼마 있지 않아 도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음성을 들을 때도 평온함을 유지했다.

― 시후…… 형?

“문 열어요.”

― 어?

“…….”

― 어? 어어?

예준은 이때껏 들은 목소리 중 가장 당황한 반응을 내비쳤다. 별안간 제집으로 쳐들어올 거라 생각도 못 한 게 분명했다. 시후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 둔 거 문에 걸어 둘 테니 챙겨 먹…….”

말이 끝나기도 전, 문이 열렸다. 현관문에는 눈이 휘둥그레진 예준이 서 있었다. 평소의 단정한 모습과는 한참 거리가 먼 모양새였다. 살짝 뻗친 머리칼, 발갛게 열이 오른 뺨, 자다 깬 것 같은 눈동자는 헐렁한 느낌이 묻어났다.

시후는 그런 예준을 위아래로 훑으며 입꼬리를 올렸다. 따끈해 보이는 모습은 불쌍하면서도 꽤 귀여운 구석이 있었다. 연민과 호감이 섞인 시선을 던지자 예준은 급히 손으로 제 머리를 정리했다.

“아니, 어떻게, 어, 그러니까…….”

시후는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내밀었다. 허둥지둥하던 예준이 그것을 보고 동작을 멈추었다.

“이게 뭐예요?”

“아플 때 필요한 것들.”

“……형이 샀어요?”

“당연한 소리를 하네. 가져가서 챙겨 먹어요.”

“그럼 이만” 하고 인사하려던 시후는 다시 예준의 얼굴을 살폈다. 몽롱하게 풀린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병원은 갔고?”

“아.”

“아?”

안 갔군, 이거. 바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가려던 생각을 접은 시후는 이내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장갑을 벗은 뒤 움찔거리는 예준의 이마에 손을 갖다 대었다. 손바닥 아래 닿는 체온이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생각한 것보다 심각했다. 저절로 짜증이 올라왔다.

“왜 안 갔어요?”

“심한 편은 아니라서……. 아, 저 닿으면 안 돼요.”

“식사는.”

대답하는 대신 예준은 고개를 뒤로 젖혀 그의 손을 피했다. 병균이라도 되는 듯이 도망치는 모양새에 시후가 눈을 가늘게 떴다. 오해를 샀다고 생각했는지 예준이 급하게 중얼거렸다.

“옮을까 봐 그래요.”

“식사.”

“…….”

“밥 먹었냐고.”

“계속 잤어요, 그냥.”

“언제부터 잤는데.”

“……형이랑 통화 마치고부터. 좀 나아졌어요.”

그러니까, 밥도 안 먹고 병원도 가지 않고 잠만 잤다는 거지. 시후는 짧게 혀를 찼다. 이래 놓곤 저에게 몸 상하지 않게 조심하라고 한 건가. 질책 어린 시선을 보내자 예준이 눈동자를 굴리며 못 본 척했다.

“가죠, 병원.”

“괜찮아요.”

“예준 씨가 의사야? 괜찮은지 어떻게 알아요.”

“제 몸이니까 알죠.”

고집스러운 말투에 시후는 그의 목을 쳐서 기절시키는 상상을 했다. 미간을 찡그리자 예준은 멋쩍어하면서도 말을 덧붙였다.

“그냥, 잠 좀 더 자면 돼요.”

“…….”

“…….”

어색한 정적이 흐르고 시후는 입꼬리를 올려 미소를 지었다. 그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부드러운 웃음이었다. 느닷없는 표정 변화에 예준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을 느리게 깜빡거렸다.

“미안해요.”

“네?”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하다고. 미리 연락하려고 했는데, 일이 좀 많았어요. 다 처리하다 보니 시간이 늦었네.”

읊조리는 목소리조차 다정했다.

“내가 와서 불편하죠?”

“아뇨!”

멍하니 듣던 예준은 뒤늦게 화들짝 놀랐다. 큰 손을 흔들기까지 하며 급히 고개를 저었다.

“안 불편해요, 하나도.”

“그래요?”

“네. 그냥 형 집이라 생각하고 언제든지…….”

“알았어.”

시후는 언제 자상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냐는 듯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갔다. 갑자기 바뀐 얼굴과 말투에 예준은 눈을 크게 떴다. 그러든 말든, 그는 자연스레 구두 한 짝을 벗었다.

“뭐 해.”

시후는 다른 구두도 벗기 전에 까칠한 목소리를 내었다.

“비켜. 들어가게.”

“…….”

예준은 당황해하면서도 옆으로 비켜 주었다. 그러자마자 시후는 거침없이 들어와선 턱을 치켜들었다.

“안 불편하다고 네가 말했다.”

그런 뒤 곧장 욕실로 들어가 손부터 재빠르게 씻었다.

잠시 후 비누 냄새가 풍기는 손을 한 채로 시후는 예준의 얼굴을 만지작대었다.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되었는지 예준은 굳은 채로 제 얼굴을 내어 주었다. 못마땅해진 시후는 이맛살을 구겼다.

“형.”

“…….”

“이제 반말하려고요?”

질문에 답하는 대신 시후는 상대의 팔목을 잡아끌었다. 방으로 걸어간 시후는 그대로 예준을 침대에 눕혔다. 이어 손목에 걸어 두었던 봉투를 책상 위에 내려놓고 그 안을 살펴보았다. 혹시 몰라 비상용 약들을 사 온 게 다행이었다.

“형.”

“…….”

“심한 편 아니라서 안 간 거예요, 병원.”

“네가 의사냐고 두 번 물어야 할까.”

“……아니요.”

예준은 길게 숨을 토했다. 이어서 읊조리는 목소리에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감정이 묻어났다.

“형 속상해할 줄 알았으면 병원 갔을 텐데.”

시후는 이제 막 씻어 차가운 손으로 예준의 이마를 때렸다. 아픈 애라 차마 힘을 싣지 못한 손은 ‘찰싹’ 하고 약한 소리를 내었다. 혼자서 끙끙 앓았을 걸 생각하니 불쌍한 한편, 열나는 주제에 병원도 안 갔다는 미련함이 답답했다.

“다음부터는 이러지 마.”

“…….”

“등신같이 굴지 말라고. 아프면 병원 가. 그러라고 있는 데야.”

“……네.”

예준은 아직 제 이마 부근에 있는 손을 잡았다. 그리고 살짝 끌어당기며 손바닥에 뺨을 대었다가 떼었다. 옮을까 봐 바로 관둔 게 분명했다.

“다음부터는 그렇게 할게요.”

“…….”

“화내지 마요.”

지켜보던 시후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뱉었다. 덩치는 커다란 게 저러고 있으니 불쌍한 느낌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따라 유독 애 같다고 생각하며 그의 직접 뺨을 만져 주었다. “하아” 하고 떨리는 예준의 숨소리가 귓바퀴를 간질였다.

“잘못한 줄 알았으면 됐고.”

그는 한마디 건넨 뒤 방 바깥으로 나갔다. 고작 몇 발자국을 걷자마자 전기 포트가 눈에 띄었다.

이후 해야 할 일은 어렵지 않았다. 갖고 온 녹차부터 끓여 먹인 후 죽을 배달시켰다. 배달 예정 시간을 살피며 탁자 위로 약 종류들을 늘어놓았다. 그런 시후의 등 뒤로 마른기침 소리가 들렸다.

“…….”

신경 쓰이게. 시후는 살짝 인상을 쓴 채로 열린 방문 안을 살폈다. 예준이 한 손으로 제 입을 꾹 틀어막고 있었다. 기침이 나올까, 참으려고 애쓰는 기색이 역력했다.

마음을 꾹꾹 누르던 감정이 짙어졌다. 그래서일까. 시후는 자신도 모르게 불쑥 침묵을 깨게 되었다.

“너, 우리 집이라도 갈래?”

시후는 문을 열고 누워 있는 예준의 앞까지 다가갔다. 허리를 숙인 채 내려다보자 예준 역시 눈을 크게 뜨고 시선을 마주 보았다.

“죽만 먹고, 움직이는 걸로 하지. ……아픈 애 혼자 두긴 좀 그러니까.”

‘애’라는 단어에 예준은 눈썹을 구겼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상체를 일으켰다. 숱 많은 갈색 머리카락이 잘게 흔들렸다.

“괜찮아요.”

그렇게 말하는 예준의 입꼬리에 은은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열에 들떠 붉어진 뺨을 한 주제에 웃는 모습이 못마땅했다. 시후는 뭐가 괜찮냐는 뜻을 담아 눈 부근의 근육을 꿈틀거렸다.

“여차하면 형 부를게요. 그러니까, 시후 형 말고. 제 친형이요.”

“…….”

“전에 말씀드린 형 말이에요. 사진 찍어 줬다던.”

얼굴도 본 적 없는 친형의 정보 따윈 필요하지 않았다. 그보단 예의 바르지만 확실하게 거절하는 목소리가 거슬렸다.

사실 상대가 아프다고 제집으로 들이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시후로선 그 자신조차도 조금 놀란 제안을, 망설임 없이 밀어내는 예준 때문에 속이 끓었다.

시후는 눈썹을 찌푸렸다. 앞을 응시하는 시선에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감정이 더해졌다. 질책 어린 눈초리에 예준은 죄송하다고 읊조리며 눈을 내리깔았다. 이 와중에 속눈썹이 꽤 예쁘게 느껴지는 건 무슨 까닭일까.

‘손 많이 간다.’

내가 왜 이 녀석한테 이렇게까지 신경 써야 하는 거지? 귀찮음과 짜증이 한데 섞여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이대로 관계를 끝내는 게 어떻겠냐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면 마음 쓰지 않아도 될 텐데.

아프다고 씨근덕거리는 애송이한테, 시선 주지 않아도 될 텐데.

부정적인 기분이 몸을 키우다 못해 마침내 ‘빵’ 하고 터지기 직전이었다. 굳은 얼굴을 하고 있던 시후를 향해 예준이 두 손을 뻗었다. 크고 단단한 손이 손목을 잡아 제 쪽으로 잡아당겼다. 얼결에 시후는 예준과 바짝 몸을 붙이게 되었다.

툭.

가벼운 소리에 시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예준은 시후의 배에 이마를 댄 채로 흐트러진 호흡을 내었다. 손은 떼어진 지 오래였지만 어쩐지 잡혔던 피부가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죄송해요.”

“…….”

“잠깐만, 기댈게요.”

저에게 기댄 모습을 보고 있자니 곤두세웠던 신경이 한순간에 누그러졌다. 시후는 어쩔 수 없다는 얼굴을 하고는 예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뒷머리에 손바닥을 얹고는 토닥여 주는데 알 수 없는 감정으로 가슴이 저몄다.

“쯧.”

날카로운 모양새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시후는 제 가슴을 술렁이게 하는 감정의 이름을 찾아내지 못한 채 예준을 계속 쓸어 주었다.

툭, 툭.

도닥이는 손은 무심한 듯 다정했다.

* * *

“윽, 미친…….”

그때 예준이 앓았던 열병이 무엇인지를 진작 알아냈어야 했다. 죽과 약을 먹이는 게 아니라 응급실이라도 데려갔어야 했다. 단순한 감기에 걸린 거라고 착각한 건 시후의 잘못된 판단이었다.

“하아, 하, 형.”

“천천히 좀, 해. 씹, 읏.”

“형, 시후 형…….”

예준은 감기에 걸린 게 아니었다. 다른 증상이 일어나기 전, 몸이 주는 신호 중 하나였을 뿐이었다. 미리 대비하라는 일종의 메시지를, 예준도 시후도 몰랐다.

사건이 일어나기 며칠 전, 시후는 말끔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예준에게 깔려 온몸이 잇자국과 정액으로 엉망이 된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앞으로 벌어질 일은 꿈에도 모른 채 예준의 피아노 연주를 감상하고 있었다. 입술에는 옅은 미소까지 머금으며.

<2권에서 계속>

@ni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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