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권 - 7화 (7/17)

@nini

7장. Smorzando

스모르찬도 : 차차 꺼져 가는 듯이

바 전체가 박수 소리로 가득했다. 시후는 몇몇 사람들의 놀라워하는 모습을 포착했다. 그들의 옆얼굴에는 연주에 완전히 압도당한 기색이 풍겼다.

검은 눈동자는 이 모든 걸 만들어 낸 남자 쪽으로 움직였다. 피아노 앞에 서서 인사하는 남자, 예준이었다.

허리를 수그렸다가 펴는 그 역시 들뜬 기색이었다. 제 연주에 한껏 집중했던 건지 눈빛이 나른하게 풀려 있었다.

예준은 고개를 돌려 시후와 시선을 주고받았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떠오르는가 싶더니 시후가 앉아 있는 자리로 빠르게 다가왔다. 상체까지 숙이며 눈을 마주하는 낯빛이 화사했다.

“어땠어요?”

기대감이 어린 질문에는 칭찬해 주길 바라는 마음이 드러났다. 제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모습에 시후는 헛웃음을 뱉었다. 이어 말로 대답하는 대신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놀랐는지 예준은 눈을 크게 부릅떴다. 그것도 잠시, “다행이다” 하고 중얼거리며 입꼬리를 당겨 올렸다. 보조개가 보기 좋게 생겨나는, 예쁜 미소였다. 손을 뗀 시후는 특유의 덤덤하고 느린 말씨를 사용했다.

“몸은 어때.”

“몸이요?”

“그래.”

시후의 눈동자에 웃음이 빠르게 스쳤다.

“열난다고 찔찔댔잖아. 이젠 어떠냐고.”

“……벌써 한참 전 일이잖아요.”

밑으로 처진 예준의 눈꼬리에 서린 건 민망함이었다. 지난주, 예준은 별안간 고열과 감기에 시달렸다. 병원도 안 가고 끙끙거린 그를 간호한 건 다름 아닌 시후였다.

죽을 한 숟가락씩 떠먹였던 때를 회상하며 시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살면서 누가 아프다고 해서 그렇듯 지극정성으로 간호해 본 적이 없었다. 다른 경우였다면 병원에 가라며 돈이나 건넸을까. 직접 팔다리를 움직일 정도의 수고를 해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다음 날 바로 나았어요. 제가 그랬잖아요, 잠자면 괜찮다고.”

“과연 잠 때문일까? 죽 먹이고, 약 먹이고, 잠재우고. 다 누가 해 줬을까, 응?”

“네에, 전부 형 덕분이죠. 생명의 은인으로 쭉 모시고 살게요.”

“받아치는 거 보니 다 낫긴 했군.”

대화를 나누면서 시후는 갑자기 이 아이와 훅 가까워진 것 같다는 기분을 느꼈다. 예준은 전보다 더 장난스러워진 모습을 보였고, 그 역시 한결 가벼워진 말투를 사용하고 있었다.

은근한 즐거움이 팔꿈치를 타고 올라와 귓바퀴를 울렸다. 시후는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별것도 아닌 일에 이 정도로 재밌어할 줄은 솔직히 예상 못 했다.

그사이 예준은 자연스레 시후의 맞은편에 앉았다. 주위에 있던 손님들이 그런 예준의 얼굴을 힐끗힐끗 바라보았다. 그 시선들에는 쾌활한 연주를 선보였던 피아니스트에 대한 호감이 담겨 있었다. 시후는 제 귀 부근을 긁던 감정을 내려놓으며 말을 건넸다.

“연미복 정돈 선물하게 해 줘.”

“연미복이요?”

“곧 큰 무대 서겠다, 싶어서. 피아니스트 유예준 님 말이야.”

담담하게 말하며 시후는 남은 와인을 마저 마셨다. 잔을 내려놓으며 호선을 긋는 입꼬리가 보기 좋게 젖어 있었다.

“옷 한 벌 입히고 자랑 좀 해야겠어. 내가 제일 먼저 발견했다고.”

“……형이 자랑 좋아하는 성격일 줄은 몰랐는데요.”

“몰랐던 거 맞네. 나 자랑 좋아해, 과시하는 게 취미야.”

“그래요? 그럼 최대한 빨리 성공할게요. 형이 날 과시할 수 있게.”

속삭이듯 읊조리는 음성에 애정이 물씬 풍겼다. 시후는 ‘애인 행세하지는 말고’라고 덧붙이려다 관두었다. 쟤가 저런 느낌으로 말하는 게 어디 한두 번인가. 매번 선 긋다가 분위기 싸해지는 꼴은 이제 시후도 달갑지 않았다.

그는 타박을 주는 대신 포크로 고기와 루꼴라를 한 번에 찍었다.

“먹을래?”

말이 끝나자 예준은 입을 벌렸다. 불그스름한 입술과 살짝 보이는 혀에 시후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갑자기 끓기 시작하는 성욕을 느끼며 상대의 입 안에 음식을 넣어주었다.

예준은 입술을 살짝 모으며 포크 끝을 물었다. 뭐 하는 거냐는 시선을 보내자 그의 눈동자가 초승달처럼 휘어졌다. 여우 같은 눈웃음에 전에 없던 야살스러움이 서려 있었다.

시후의 눈썹 사이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포크의 뾰족한 부분으로 상대의 아랫입술을 눌렀다. 탱글탱글한 감촉은 잘 까 둔 귤 조각을 닮았다.

“그렇게 웃는 거 어디서 배웠어.”

둥글게 휘어진 눈꼬리나 그 근처에 박힌 눈물점이 오랫동안 시선을 붙잡았다. 사람들이 없었다면 당장이라도 키스했을 얼굴이었다.

“제가 어떻게 웃었는데요?”

“설명하긴 싫은데.”

높낮이가 없는 목소리에도 예준은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보란 듯이 혀를 내밀더니 포크 끝을 핥았다. 그러고는 먼저 얼굴을 떼며 부드럽게 받아쳤다.

“설명 들었으면 좋겠는데.”

잘 까분다. 지난번의 일이 깊은 친밀감을 준 모양이었다. 어처구니가 없어진 시후는 이맛살을 구긴 채로 그를 말끄러미 응시했다. 다른 사람이 보면 화가 났나 보다고 눈치 볼 만큼 험악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예준은 주눅 드는 대신 소리 없이 웃었다. 기분 좋다는 듯 빙그레 미소 짓는 낯빛이 밝았다. 시후에 대한 애정, 친근함, 고마움 등이 섞인 반응이었다.

좋다고 빙글빙글 웃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맥이 탁 풀렸다. 시후는 한숨을 내쉬고는 와인 병으로 눈짓했다.

“이것도 마실래?”

예준의 보조개가 깊어졌다.

“네.”

그 순간, 시후의 바지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핸드폰이 진동을 울렸다. 여러 번 진동이 울리는 걸로 보아 메시지가 아닌 누군가의 전화인 모양이었다.

“……잠깐.”

그는 짧게 양해를 구하곤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상대이기를 내심 바랐다. 따뜻한 목욕물에 몸을 담근 듯 노곤한 이 순간을 더 즐기고 싶었다.

그러나 시후의 바람은 금방 깨지게 되었다. 핸드폰을 쥐고 있는 손등에 핏줄들이 퍼렇게 섰다. 호선을 긋고 있던 그의 입꼬리가 천천히 내려가는가 싶더니,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시후의 얼굴에 시선 하나가 따라왔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예준이 왜 그러냐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의아함이 담긴 눈빛에 설명해 주기에는, 발신자의 존재감이 지나치게 컸다. 전화 받는 게 급선무였던 시후는 그대로 몸을 돌려 바깥으로 나갔다. 어쩐지 뒤통수에 가시가 박힌 것처럼 따끔따끔했으나 조용히 외면했다.

“네, 전화 받았습니다.”

문 바깥으로 나가자마자 그는 핸드폰을 귓가에 갖다 대었다. 예의를 갖추어 차분한 음성을 내자 상대방이 “어, 그래” 하고 반응했다.

― 시후 지금 어디냐.

중후한 목소리의 주인은 아버지였다. 예상 못 했던 연락에 긴 속눈썹이 드리워져 있던 눈동자가 미미하게 흔들렸다. 시후는 바로 대답하는 대신 자신이 들고 있는 핸드폰을 잠시 응시했다. 액정에는 분명히 ‘아버지’라는 이름이 떠 있었다.

“바깥입니다.”

― 아아, 그래. 잘 지내고 있고?

늦은 밤에 서로 안부 전화를 나눌 정도로 살가운 분은 아니었다. 물론 어디 영화나 드라마에서 나올 법한 가부장적이고 폭력적인 성격이라는 건 아니다. 아버지는 한 번도 자식에게 손을 올린 적이 없었으며, 폭언이나 학대에 가까운 언행 역시 벌인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다정다감한 아버지냐 하면, 그것 역시 아니었다. 적어도 차남인 자신한테는. 시후는 헛기침을 하며 어색해지려는 기분을 가다듬었다.

“네, 잘 지내고 있습니다. 아버지는요?”

― 나야, 뭐. 지내던 대로 지내지.

“……네. 따로 시키실 일이 있으신가요? 아니면 의논해야 할 거리가 있다거나.”

― 녀석, 그런 게 있으면 회사에서 호출했겠지. 내가 뭐 하러 이 시간에 전화했겠니.

“…….”

그럼 왜 연락하신 거냐는 질문이 목구멍 위로 올라왔다. 그것을 입 바깥으로 뱉을까, 고민하는 동안 아버지가 먼저 말을 건넸다.

― 내일 저녁 식사 좀 같이하자. 시현이와 시후 너, 그리고 아비랑 셋이서.

셋이서 식사? 예상 못 한 제안에 시후는 고개를 비스듬하게 기울였다. 이해하지 못하는 아들의 마음을 읽은 걸까, 아버지가 혀를 찼다.

― 쯧쯧, 왜 아무 말이 없어? 뭐, 일이라도 시킬까 봐? 그러려고 부르는 거 아니니까 마음 편히 와.

“…….”

― 시후야?

가만히 듣던 시후는 핸드폰을 들고 있지 않은 손으로 제 목을 쓸었다. 일 시키려고 부르는 게 아니라니. 그럼 뭐, 오붓하게 셋이서 밥이라도 먹자는 건가.

어색함이 더해지는 한편, 썩 나쁘지는 않다는 생각도 들었다. 듣고 보니 가족끼리 사적인 식사 모임을 가진 지 꽤 오래되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다시 입을 열었을 때, 시후는 확실히 아까보다 누그러진 목소리를 내게 되었다.

“어머니나 도영이는요?”

― 네 엄만 어디 모임에 나간다고 하더라. 도영이 녀석은 뭐, 쯧, 빼고 만나자.

웬일로 사랑해 마지않는 막내를 빼신다는 걸까. 여전히 의문이 풀리지는 않았으나 시후는 계속 질문하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자리에 가 봐야 이 모든 궁금증이 풀릴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 * *

[아프면 병원 가라.]

유예준 [형]

유예준 [저 진짜 괜찮다니까요.]

바로 답하는 메시지에서 멋쩍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시후는 자연스럽게 휘어지는 눈을 접으며 웃었다. 나른하게 미소 짓는 그는 깔끔한 차림을 갖추고 있었다. 흰 와이셔츠에 금색 테두리가 박힌 넥타이, 그리고 허리를 꽉 조이는 검은 조끼. 그 아래로는 정장 바지를 입은 다리가 길게 뻗어 있었다.

코트를 받아 든 종업원이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며 안내했다. 시후는 익숙하게 그의 뒤를 따라 걸어갔다. 고요한 복도에 구둣발 소리가 은은하게 울렸다.

종업원은 어느 미닫이문 앞에 서서는 가볍게 노크했다. 이어 뭐라고 말할 듯 입을 벌리는 순간, 문이 먼저 열렸다. 안에 있던 이가 손까지 흔들며 시후를 맞이했다. 그의 형, 백시현이었다.

“들어와. 추운데 오느라 고생했다.”

잠시 후, 문이 닫히고 두 형제는 비단 방석에 앉아 서로를 마주 보게 되었다. 종업원이 나갈 때까지 아무 말 없었던 시후는 뒤늦게 입을 열었다.

“일찍 왔네.”

그러면서 무심히 형의 옷차림을 살폈다. 똑같은 정장 차림으로, 갈색 넥타이와 조끼가 말끔한 인상을 돋보이게 했다. 특히나 넥타이를 장식한 핀은 가넷과 금으로 이루어져 포인트를 주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불빛 아래 반짝이는 가넷에 시선을 둔 채로 시후는 “흠” 하고 낮게 소리 냈다. 계속 눈길이 가는 걸 보니 새 넥타이핀을 구매할 때가 된 모양이다. 여러 디자인을 생각해 보는 동안 형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어쩌다 보니 일찍 오게 됐지. 아, 아버지도 곧 도착하신대. 방금 연락 오셨어.”

“…….”

“그런데 시후 너, 아버지가 왜 부르신 건지는 알고 있지?”

시후는 넥타이핀에 대한 관심을 거두고 형의 눈을 바라보았다. 무슨 뜻이냐는 눈빛을 보내자 형은 조금 놀란 듯 마주하다가 미소 지었다.

“몰랐구나. 어쩐지 너무 차분하더라.”

자상한 말투에도 속이 살짝 뒤틀렸다. 어쩐지 신경이 거슬린 시후는 눈썹 사이에 힘을 주었다.

“그러는 형은. 왜 부르신 건지 알고?”

“그렇지.”

“……안다고?”

“응, 나한테만 말씀 주셨나 봐. 내가 너한테 전해 주면 되니까.”

형은 미리 알려 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식으로 사과를 덧붙였다. 시후는 무감각한 눈으로 한쪽 입꼬리만 끌어올렸다. 크게 놀랄 일도, 짜증 날 일도 아니었다. 사업에 정신없는 아버지는 매번 이런 식으로 형에게만 통보하곤 했다.

“왜 부르신 거냐면…….”

그 순간 노크하는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동시에 고개를 돌린 형제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이 열리면서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두 형제의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정장 차림을 한 아들들과 달리 회색 등산복을 입고 있었다. 한눈에 들어오는 넓은 어깨와 두꺼운 몸통을 자랑하는 아버지는 낮게 웃음을 흘렸다.

“뭐 이리들 차려입었어?”

그러고는 제 뒤에 서 있던 비서실장과 경호원들에게 눈짓했다. 한 번의 눈짓만으로도 뜻을 읽은 사람들이 신속하게 자리를 떴다. 아버지, 백 회장은 직접 문을 닫고는 형의 옆에 앉았다.

“다음부터는 편하게들 입고 와. 쯧쯧, 고지식한 놈들. 도영이였으면 패딩 하나 걸치고 왔을걸.”

시후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받아쳤다.

“도영인 정도가 심하죠.”

“그건 그렇지. 고놈은 순 제멋대로니까. 뭐, 그런 점이 귀엽긴 하지?”

“…….”

“아들 셋 다 모범생일 필욘 없잖나. 고런 막둥이가 있어야 살맛 나지, 허허.”

그다지 공감이 되지 않았던 시후는 눈만 밑으로 내리깔았다. 성격 좋은 형이 “귀엽긴 하죠” 하고 대신 맞장구를 쳤다. 덕분에 한층 밝아진 분위기 속에서 백 회장은 등산복 점퍼를 벗었다.

“기 회장, 등산 좋아한다더니 순 다 거짓말이야. 정상의 반도 못 올랐는데도 쓰러지려 하더라. 쯧쯧, 한 기업의 회장이라는 인간이 그리 체력이 약해서야.”

“기 회장님과 등산 가신 거예요?”

백 회장은 큰아들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차를 한 번에 들이마시곤 시후를 바라보았다. 굵은 눈썹 아래 있는 눈동자가 잘 벼린 칼날처럼 예리하게 반짝였다.

아들의 얼굴을 샅샅이 훑어보는 시선에는 무언가를 찾으려는 의도가 있었다. 시후는 그런 아버지의 눈빛을 덤덤하게 받아 냈다. 점잖게 침묵을 지키자 아버지는 소리 없이 미소를 그렸다. 감정을 읽을 수 없는 웃음이었다.

“흠.”

“…….”

“우리 시후가 인물이 좋긴 하지.”

뜻 모를 소리를 하며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후는 제 뺨에 닿았다가 턱선과 어깨로 향하는 시선 속에서 도자기 주전자를 들었다. 비어 있는 잔 위로 찻물이 포물선을 그으며 떨어졌다.

“혼자서도 잘 지내고 있지?”

부드러워진 음성이 시후의 귓전을 스쳤다. 꼭 이제 막 자취를 시작한 대학생한테나 할 법한 애틋한 질문이었다.

‘……새삼.’

이제 막 독립한 것도 아니다. 아버지의 얼굴을 못 본 지 몇 년이나 된 것 역시 아니고. 혼자 산 지 6년이 넘었으며, 불과 3일 전엔 업무 일로 만나기까지 했다.

회장실에서 이야기를 나눌 때만 해도 의미심장한 점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랬던 아버지가 갑자기 퍽 수상하게 행동하고 있었다. 관찰하는 것 같던 눈빛을 기억하며 시후는 고개를 기울였다.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대놓고 짓자 아버지의 미소가 짙어졌다. 불쾌해하기는커녕, 알 수 없는 자부심이 드러나는 얼굴이었다. 의구심이 시후의 속을 더 갑갑하게 만들기 시작했다.

“얼굴이 상해 보여서 그래.”

“…….”

“혼자 사는 게 힘들긴 하지, 안 그러냐.”

본가에 들어오라는 뜻일까. 시후의 눈이 가늘어졌다. 허공에서 두 부자의 눈빛이 쨍강, 부딪쳤다.

놀라울 정도로 닮은 외양을 가진 두 사람은 성격도 서로를 가장 닮아 있었다. 의문 어린 시선을 주고받으면서도 둘 다 제 속을 바로 꺼내지 않는 건 그 때문이었다.

“음식이 빨리 나와야 할 텐데 말이죠. 산까지 갔다 오시느라 시장하시겠어요.”

이번에도 분위기를 누그러뜨린 사람은 형이었다. 산뜻한 음색을 내며 말을 건네자 아버지는 말끄러미 그를 응시하던 눈빛을 거두었다.

“너희들 이따가 그거 한 통씩 가져가라.”

“그거요?”

“발효차. 주지 스님께서 직접 담그신 솔잎차라고, 건강에 그만이란다. 젊어도 건강 챙겨야지, 안 그러면 나이 들어서 고생해.”

그러면서 백 회장은 생각하는 듯 입을 닫았다. 나이가 들었음에도 여전히 잘생긴 얼굴에 미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시현이와 동갑이지? 유 비서 말이야.”

유 비서라면 도영의 연상 애인을 말하는 게 분명했다. 시후는 아버지의 읊조림에 부정적인 감정이 없음을 알아차렸다. 그러자 설날에 기세등등하던 도영의 미소가 자연스레 떠올랐다.

“그 애도 혼자 사니 뭐 좀 챙겨 줘야겠는데. 흠, 어떤 게 좋을지 모르겠군. 너희 또래는 뭘 줘야 할까…….”

그 말에 형과 시후는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시후는 형이 적지 않게 놀랐음을 알아차렸다. 아버지가 이렇게까지 마음을 열었을 줄은 몰랐다는 반응이었다.

“어하, 하하하!”

형은 어색한 웃음을 터뜨리면서 목소리를 한 옥타브 높였다.

“선물 주시려고요? 우리 아버지가 이렇게, 하하, 연우 씰 좋게 본 줄은 몰랐네.”

백 회장은 귀엽다는 듯이 한쪽 입꼬리만 끌어올렸다.

“왜. 내가 반대할 줄 알았나 보지?”

“솔직하게 말씀드려도 돼요?”

“그래, 해 봐.”

“당장 유연우 씨 해고할 줄 알았어요. 아니면 그 집에 찾아가 돈다발이라도 던지며 ‘우리 아들과 헤어져’ 하고…….”

“우리 장남은 누굴 닮아 이렇게 상상력이 풍부한지 모르겠다.”

그러면서 백 회장은 다시 시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안 그러냐, 시후야? 너희 형 참 재밌는 생각을 다 한다, 허허.”

“…….”

시후는 대꾸하는 대신 시선만 밑으로 내리깔았다. 그가 침묵하는 동안 상 위로 음식들이 하나둘 올라오기 시작했다. 한복을 입은 종업원들이 음식이 담긴 접시를 나르는 사이 백 회장은 제 아들들을 둘러보았다. 아까와 같이 무언가를 탐색하는 듯한 눈초리였다.

“그래.”

사람들이 물러간 후에야 백 회장은 입을 열었다.

“처음부터 마음에 들었던 건 아니야. 집안이 너무 평범하다는 생각, 안 해 본 게 아니니까. 그래서 반대를 할까도 싶었고.”

먼저 젓가락을 들어 음식 한 점을 드는 얼굴이 평온했다.

“뭐, 그런데……. 너희 엄마와 대화하다 보니 이런 생각도 들더라. 아들 셋 모두 재벌가 애와 엮일 필요가 있나. 음, 피곤해. 아주 피곤해지는 일이야. 기자들은 재벌들끼리 잘 논다고 떠들어 대겠지. 어디 그뿐이냐? 상대 집안 눈치도 계속 봐야 할 테고.”

시후와 형은 젓가락을 들지 않았다. 먹으라는 아버지의 지시에도 두 아들은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백 회장은 천천히 씹어 삼킨 뒤 다시 입술을 떼었다.

“기세등등한 재벌집 인간보단 유연우 같은 애를 만나도 되겠다, 싶었다. 평범한 집안에서 똑똑하게 자란 애 말이야. 능력 있는 사람이니 도영이를 잘 받쳐 주겠지.”

고요한 정적 속에서 그는 마지막 한마디를 느릿하게 덧붙였다.

“한 명 정도는 괜찮아.”

시후는 그 한마디에 실소를 삼켰다. ‘한 명 정도는’이라. 결국, 이번 일은 백도영만의 특권이라는 뜻이다. 자유롭게 커 온 귀한 막내아들. 그런 막내를 다른 재벌가에게 저당 잡히긴 싫었겠지.

‘나나 시현이 형이 그랬으면? 그래도 인정하셨을까요.’

마음속의 또 다른 시후가 빈정거리는 투로 읊조렸다. 굳이 그 질문을 입 바깥으로 내 분위기를 험악하게 만들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시후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후 차 한 모금을 마셨다. 입 안을 감도는 차의 뒷맛이 쌉쌀했다.

* * *

“시후야.”

모임을 파하고 차로 돌아가는 시후의 등 뒤로 부름이 들렸다. 어느새 아버지가 미소를 띤 채로 다가오고 있었다. 팔꿈치가 닿을 정도로 바짝 선 두 부자는 빼닮은 얼굴로 서로를 응시했다.

“네, 말씀하세요.”

건조한 목소리로 대답하자 아버지가 그의 한쪽 어깨를 잡았다. 오래된 결혼반지를 낀 손은 강하고 단단한 악력을 가지고 있었다.

“오늘 만난 기 회장 말이다. 너를 아주 좋게 보고 있더라.”

“……감사한 말씀이네요.”

“그래, 감사한 일이지. 그 양반, 확실히 안목이 좋아. 좋은 눈썰미로 해낸 성과도 한둘이 아니고.”

시후는 큰형처럼 유들유들하게 맞장구치지도, 도영처럼 ‘뭔데 저를 좋게 보는데요?’라는 식으로 아버지의 속을 뒤집어 놓지도 않았다. 그저 덤덤히 서서 입을 굳게 닫았을 뿐이었다. 차분한 둘째를 살피며 백 회장은 목소리를 한 옥타브 낮추었다.

“시후 너, 이제 선 좀 봐야지 않겠니?”

이거군. 오늘 아버지가 저를 뚫어질 듯이 응시하던 눈빛이 기억났다. 관찰하는 듯한 시선에는 자부심이 은근하게 서려 있었다. 기 회장이 제 둘째 아들을 탐내 한 사실이 뿌듯했던 게 분명하다.

웃음이 분수처럼 치받쳐 올라오려고 했다. 역시. ‘한 명 정도는’ 일반인과 연애해도 되지만, 나머지 둘은 아니었던 게 맞았다. 시후는 어떠냐는 표정을 짓고 있는 아버지를 향해 입술을 움직였다.

“형 말입니다, 아버지.”

“음? 시현이 말이냐?”

“네, 시현이 형. 연애하고 싶다고 하더군요. 자기도 도영이처럼 애인 만들고 싶다고. 결혼을 원하는 티도 많이 냈고요.”

당연히 그런 식으로 말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시후는 일말의 거리낌 없이 평온한 어투로 덧붙였다.

“우선 급한 사람부터 선을 보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백 회장은 눈을 크게 뜬 채 그를 보더니 “오호” 하고 탄성을 흘렸다.

“그래? 시현인 아무 말 없던데.”

“본인 입으로 말하기 부끄러웠나 봅니다.”

시후는 등을 곧게 펴며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검은 코트 안에 들어 있는 담뱃갑이 손가락 끝을 찔렀다.

“기 회장님네 둘째 따님 어떨까요. 나이도 비슷하고, 회사 이끄는 능력도 훌륭하고.”

“흐음, 시현이라.”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

아무렇지도 않게 형을 팔아 버린 뒤 시후는 등을 돌렸다. 그런 시후의 귀에 아버지의 질문이 와 박혔다.

“시후 너는.”

“…….”

“연애 생각 없고?”

“…….”

“아니면, 만나는 사람이라도 있는 거냐.”

그 말에 무의식적으로 유예준을 떠올렸다. 언제부터인가 여우같이 눈웃음을 칠 줄 알던 아이. 쌍꺼풀 없는 단아한 눈매를 휘던, 눈물점과 보조개가 매력적인 예준이 생각나 버렸다. 시후는 정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이맛살을 구겼다.

“아뇨, 없습니다.”

그렇게 불쾌한 티가 묻어나는 대답을 해 버린 뒤 시후는 직접 차 뒷문을 열어 버렸다. 대기하고 있던 운전기사가 놀라 눈치를 보았다. 시후는 차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그에게 눈짓했다. 머뭇대지 말고 해야 할 일 하라는 뜻이었다.

백 회장은 차 안으로 들어가는 아들을 보더니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건방진 태도가 어이없다는 얼굴이었지만 기분이 상한 것 같진 않았다.

과연, 그는 인상을 쓰거나 내리라고 윽박지르는 대신 오른손을 휘저었다. 이만 가 보라는 뜻이었다.

차바퀴가 부드럽게 움직이면서 주차장을 가로질렀다. 시후는 차창 쪽으로 오랫동안 시선을 두었다.

아버지는 어느새 뒷짐을 진 채로 비서실장을 향해 뭐라고 지시하고 있었다. 실장은 허리를 수그리더니 곧 핸드폰을 들었다. 형, 시현에게 연락하는 것 같다는 예감이 자연스럽게 들었다.

“……선을 보라고요?”

중얼거리는 시후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서렸다. 그는 창문 쪽으로 고개를 비스듬하게 기울인 채 혼잣말을 했다.

“당신 아들이 걸레인 거, 모르시는군요. 아시면 그렇게 당당하실 수 없으실 텐데.”

상원의 백시후가 남녀 불문하고 무수한 잠자리를 가졌다는 사실을, 기 회장이 알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귀한 자녀를 난봉꾼이 넘보게 둘 순 없다며 펄펄 뛸 것이다. 본인이 그 선 자리를 주선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은 채로.

생각만 해도 골치 아파질 일이라 시후는 상상을 그만두기로 했다. 그는 소리 없이 한숨을 쉬며 시트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다 끝난 일인데도 불쾌한 기분이 끝나질 않았다.

‘연애 생각 없고?’

아버지의 은근한 목소리가 계속해서 신경을 건드렸다. 아들의 정략결혼을 꿈꾸는 당신이, 그런 질문을 할 자격은 있으신 건지. 시후는 정면을 노려보는 채로 한쪽 입꼬리만 올렸다.

거짓말이라도 해 볼걸 그랬나. 사실 어린애랑 연애하고 있다고. 도영이도 허락해 줬으니 나도 그렇게 해 달라고, 그렇게 뻔뻔하게 거짓말이라도 해 볼걸 그랬나.

그러나 시후는 곧 고개를 저었다.

‘잘도 그러시겠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제대로 된 반항 한 번 해 본 적이 없었다. 거기에는 잘났고 훌륭한 아들로만 어필하고 싶은 마음이 은근히 있었다.

서른 넘어서까지 그 욕망이 여전히 남아 있는 지금, 아버지에게 덤비기엔 아직 멀었다. 시후는 인상을 쓰며 오른손으로 이마를 세차게 문댔다.

“……시발.”

나지막한 욕설에 운전기사가 백미러로 힐끗 보았다. 시후는 짜증이 담긴 눈으로 그런 운전기사를 마주 노려보았다. 검은 눈동자에 서린 형형한 눈빛에 기사는 당황해하며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겁먹은 꼴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나아지기는커녕 부정적인 감정만 짙어졌다.

뭐라도 해서 이 불유쾌한 상태를 없애고 싶었다. 시후는 아까 제 손을 찔렀던 담뱃갑을 기억해 내고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러나 손가락 사이로 들어오는 건 담배가 아닌 금속의 딱딱한 것이었다.

그것을 꺼내 든 시후의 얼굴이 묘해졌다. 제 손에 쥐여진 건 핸드폰이었다. 까만 액정을 응시하고 있자니 누구 한 명이 퍼뜩 떠올랐다. 동시에 그를 만나고픈 충동이 거세게 차올랐다.

지겨움과 갑갑함으로 이루어진 나날을 멈춰 준 사람, 이유 모를 간지러움을 주는 사람. ……따뜻한 아이.

거기까지 생각한 시후는 바로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핸드폰을 귓가에 갖다 대는 옆얼굴에 피로감이 가득했다. 그는 핸드폰을 들고 있지 않은 손으로 무릎을 찌르며 낮게 중얼거렸다.

“이게 무슨 추태냐.”

그 순간, 귓구멍을 파고드는 건 시끌벅적한 소음이었다. 뜻밖의 소리에 달싹이던 입술이 멈췄다. 여러 명의 웃음소리가 한데 섞여 어지러웠다. 관자놀이가 지끈거려 이맛살을 구길 때, 바랐던 음성이 귓전을 울렸다.

― 시후 형?

“……친구들인가 보네.”

― 아, 들려요? 잠깐만요!

예준이 “먼저들 가” 하고 누군가에게 말했다. 친구들로 추정되는 아이들이 너도나도 웃음을 터뜨렸다. 재미있는 일이 없는데도 깔깔거리는 음성들에서 들뜬 기색이 역력했다.

그 웃음을 듣고 있자니 괜히 연락했다는 생각이 강해졌다. 시후는 창문에 이마를 대며 뱉듯이 중얼거렸다. 미친.

― 여보세요?

예준은 여전히 온기가 담긴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바랐던 음성인데도 안정감 대신 민망함이 올라왔다. 시후는 차가운 창문에 이마를 문대다 느릿하게 말했다.

“아니, 됐다. 나중에 연락해.”

― 목소리에 힘이 없어요. 무슨 일 있어요?

바로 알아차릴 정도로 티가 났다는 것인가? 목덜미와 귓가가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시후는 인상을 쓴 채로 입술만 달싹였다.

“그런 거 없어. 그냥…….”

뭐라고 둘러댈까. 잠깐 생각하는 사이 시야 안으로 창문 바깥 풍경이 들어왔다. 찬란한 불빛을 자랑하는 빌딩들 사이로 눈이 내리고 있었다.

“……눈이 와서.”

생각나는 대로 읊조린 말은 제 귀에도 이상하게 들렸다. 시후는 한숨을 삼키곤 보다 또렷해진 발음을 내었다.

“끊어.”

― 형, 잠깐…….

먼저 통화를 끊은 사람은 시후였다. 핸드폰을 옆으로 던진 뒤, 다리를 꼬았다. 차창을 노려보는데 귀 아래 혈맥이 팔딱팔딱 뛰는 게 느껴졌다.

이 민망함이 새삼스럽다는 건 알고 있었다. 애초 예준을 만나는 이유가 무엇인가. 스트레스 해소용, 그 이하도 이상도 아니지 않나. 그런데도 왜 이제 와 낯이 뜨거워지고 만 것일까.

시후는 제 무릎 위를 손바닥으로 감쌌다. 뜨겁게 달아오른 손이 무릎 전체를 빠르게 녹였다.

시선이 창에서 옆자리에 있는 핸드폰으로 움직였다. 까맣기만 한 핸드폰 액정은 예준에게서 아무 연락이 오지 않았음을 알려 주고 있었다.

그제야 이성이 돌아옴과 동시에 수치스러움이 가셨다. 그는 지금쯤 친구들과 어울리고 있을 대학생의 존재감을 외면하며 입술을 떼었다.

“방향 바꿔요.”

“……어디로 모셔다 드릴까요?”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했는지 기사의 목소리가 적적 갈라졌다.

“글쎄. 집만 아니면 될 것 같은데.”

톡, 톡.

무릎을 감싸고 있던 손가락이 세워졌다. 짧게 깎은 손톱으로 옷을 건드리며 시후는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왔다. 그는 눈 밑에 청회색 그림자가 드리워진 채로 한마디 더 했다.

“일단 다른 길로 가죠.”

* * *

목적지가 없는 차량은 그렇게 여러 길을 지나쳐 갔다. 가끔 묵었던 호텔이 나타나도, 한때 자주 방문했던 술집이 나타나도 시후는 눈길 하나 주지 않았다. 그저 검고 긴 속눈썹을 밑으로 내리깐 채 침묵만 지킬 뿐이었다.

지금 제 감정의 이름을 정확히 찾을 수가 없었다. 화가 나는 걸까? 그러기엔 마음이 호수처럼 잔잔했다. 제 기분에 큰 파동을 일으킬 정도로 아버지가 대단한 발언을 한 건 아니었다. 그저, 자기가 좋게 본 양반의 여식을 만나길 바랐을 뿐이니까.

오히려 시후는 자신이 아버지였어도 똑같이 행동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결혼만큼 집안끼리 끈끈하게 얽히기에 좋은 수단이 없다. 법적 관계를 맺어 사회적으로 많은 이득을 얻을 수만 있다면, 시후 역시 제 자식을 기꺼이 이용할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한 시후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아버지를 이해하면서도, 그래서 화가 치솟은 것도 아니면서도, 곤두선 상태가 계속되고 있었다. 벌써 한 시간 넘게 돌아다니고 있는데도.

“저…….”

의외로 운전기사가 조심스레 운을 떼었다. 어색하다는 듯 헛기침을 하는 목소리를 들으며 시후는 고개를 까딱였다.

“말해요.”

“괜찮으시다면, 음악이라도 틀어 드릴까요?”

그 말에 시후의 입가에 미소가 떴다. 긴 침묵이 어지간히 불편했던 모양이다.

“그렇게 해요.”

그러면서 이만 귀가하자고 덧붙이려고 했다. 제 변덕으로 인해 덩달아 고생 중인 사람을 이만 노동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해 주기 위함이었다.

그가 자신의 검은 눈만큼이나 짙은 붉은색 입술을 열었을 때였다. 느릿한 음악이 차 안을 가득히 채웠다.

“…….”

부드러운 피아노 소리에 시후는 다시 입을 닫았다. 운전기사는 변명하듯 빠르게 덧붙였다.

“아, 음, 좋아하실 것 같아서 틀었습니다.”

“내가요?”

무심코 묻다가 시후는 바람 빠진 소리를 내었다. 요즘 차만 타면 피아노곡을 틀어 달라고 한 자신이었다. 그런 주제에 이제 와 자기가 그랬냐는 식으로 구는 게 어이없었다.

“하하.”

실소는 곧 부드러운 웃음으로 바뀌었다. 시후는 눈꼬리까지 휜 채로 말했다.

“그래요, 좋아하죠.”

그제야 예민해져 있던 상태가 몽글몽글하게 풀어지기 시작했다. 시후는 이만 귀가하자고 덧붙였다. 아닌 척하나 기뻐함을 숨기지 못하는 상대의 반응을 보며 그는 묵묵히 음악을 감상했다.

가만히 듣고 있자니 집에 있는 그랜드피아노와 앨범들이 아른거렸다. 그것들을 접하고 싶다는 열망이 불쑥 솟았다. 시후는 눈을 감은 채로 길게 한숨 쉬었다. 피로해 보이나 아까와 달리 불쾌한 기색은 없는 얼굴이었다.

돌아가는 동안 흩날리는 눈의 굵기가 커져 갔다. 시후는 어두운 밤에도 선명히 보일 만큼 흰 눈송이들을 감상했다. 내일이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주말임을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그렇게 무심한 얼굴로 창문 밖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아파트 정문으로 들어가기 직전, 일자형이었던 입매가 갑자기 꿈틀거렸다.

“잠깐만, 멈춰 봐요.”

읊조리는 목소리에도 당황한 티가 드러났다. 차가 급하게 정차하자마자 그가 뒷문을 열고 나갔다. 놀란 기사가 따라 문을 열었다.

“대표님!”

“신경 쓰지 말고 귀가하세요.”

그렇게 말하는 시후는 뒤조차 돌아보지 않고 있었다. 대신 긴 다리를 빠르게 움직이며 앞으로 나아갔다. 스치듯 보았던 누군가의 모습을 되새기며.

잘못 본 게 아닐까? 그 생각이 미치는 순간, 시후는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한 남자를 발견했다. 우산을 들고 있는 코트 차림의 남자, 예준이었다.

“유예준.”

돌발 상황에 목소리가 적 갈라지고 말았다. 음성을 듣지 못했는지 예준은 우산을 든 채 어딘가를 올려 보고 있었다. 그의 옆얼굴에 걱정이 가득 서려 있음을, 시후는 똑똑히 보았다.

쿵, 쿵, 쿵.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랐는지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요란한 맥박 소리에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동요하는 자신을 가다듬으려는 순간, 예준이 고개를 돌렸다.

시후의 눈에 닿았다가 입술로 미끄러지는 그의 시선에도 놀란 감정이 묻어났다. 그것도 잠깐, 예준은 곧 환한 웃음을 터뜨렸다.

“시후 형!”

이상한 일이었다. 짙은 어둠, 눈발만 흩날리는 겨울은 칙칙하기 그지없는 계절이었다. 그런데도 웃는 예준은 꼭 태양 아래에 서 있는 것처럼 생기가 넘쳤다.

그 생각이 미치자 시후의 걸음이 느려졌다. 마주한 이의 존재감만으로 가슴이 꽉 차 버리고 말았다. 전에 없던 제 변화에 눈동자가 멋대로 흔들렸다.

시후가 머뭇거리는 사이 예준이 발치까지 다가왔다. 급하게 뛰어온 그는 우산을 들고 있지 않은 손을 뻗었다. 크고 뜨거운 손바닥이 시후의 뺨을 감쌌다. 곧, 단정한 얼굴에 안도하는 기색이 떴다.

“왜 우산 안 써요. 그러다 감기 걸려요.”

“네가 할 소리냐?”

뱉듯이 읊조리며 시후 역시 손을 내밀어 상대의 얼굴을 만졌다. 구석구석을 훑던 손가락이 곧 뺨을 꼬집었다. 놀랄 정도로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다.

“아야.”

“감기 나은 지 얼마나 됐다고 이러고 있어?”

예준은 변명하는 대신 들고 있던 우산을 시후 쪽으로 내밀었다. 흰 눈이 그의 넓은 어깨를 빠르게 적셨다. 그 꼴을 보기 싫어 시후는 우산 손잡이를 세게 움켜잡았다.

“네가 써.”

“형 써요.”

“쓰라니까.”

손잡이를 쥐고 있는 두 사람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팽팽하게 힘겨루기를 하면서 시후는 이맛살을 구겼다. 평생 누구한테 힘으로 밀린 적이 없는데. 그러는 동안 예준은 뺨을 만졌던 손을 올려 시후의 머리를 정리해 주었다.

툭, 툭, 눈을 털어 주는 손길에 온기가 담겨 있었다. 얼굴은 얼음처럼 차가운 게 손은 어떻게 이렇게 따뜻한지 모르겠다. 의아한 시선을 보내자 예준이 웃었다.

“주머니에 잘 넣고 있었어요.”

“……여긴 왜 왔어.”

무뚝뚝한 음성에도 예준은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색소 옅은 눈동자에 다정한 빛이 서서히 퍼져 나갔다. 선하게 처지는 눈꼬리를 그대로 한 채, 그가 차분히 대답했다.

“눈이 왔다길래.”

“…….”

“같이 보고 싶어지더라고요.”

나직하지만 분명한 속삭임이 시후의 귀를 자극했다. 그래서 여기까지 쫓아왔다고? 그럴 리가. 분명 걱정되어 온 게 틀림없었다.

예준에게 제 마음을 고스란히 들켰다는 사실에 시후는 자존심이 상했다. 한편으론 친구들까지 버리고 왔을 녀석에게 미안하기도 했다.

“미련하긴.”

솔직하게 제 감정을 표현하는 대신 시후는 서늘한 목소리를 내었다.

“전화를 했어야지. 왜 여기서 얼쩡대고만 있어?”

“해 봤자 안 받았을 거잖아요.”

예준은 도톰하여 보기 좋은 입술로 곡선을 그렸다.

“다 알아요.”

“…….”

“당황했죠? 놀라면 눈 주변이 꿈틀거려요, 알고 있었어요?”

알 리가. 시후는 반사적으로 눈을 가리려다 꾹 참았다. 한참 어린 녀석에게 놀림당하고 있다는 사실이 어이없었다. 그런데 참 알 수 없는 일이다. 기분이 나빠야 할 텐데, 날을 세워야 할 텐데, 웃음만 나온다.

시후는 결국 픽, 하고 바람 빠진 소리를 내었다. 그리고 상대의 발치 앞까지 다가가서는 두 손으로 뺨을 감싸 쥐었다. 그는 얼음처럼 차가운 살결을 녹여 주며 입을 열었다.

“다 안다고? 그럼 맞혀 봐.”

가까워졌다. 예준의 속눈썹이 얼마나 긴지,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숨 끄트머리가 얼마나 떨리는지 알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그렇게 그의 코앞까지 얼굴을 내민 채 시후는 낮게 덧붙였다.

“내가 무슨 생각 하는지.”

한 옥타브 내린 목소리는 어느새 나긋하게 풀려 있었다. 예준은 호흡을 멈추더니 그런 시후의 얼굴을 말끄러미 바라보았다. 눈썹과 눈 주변을 훑던 시선은 뺨을 타고 미끄러져 입술과 턱을 살폈다. 시후는 제 얼굴 구석구석을 쓰다듬는 눈빛만으로도 등허리가 오싹하게 떨렸다.

“알겠어?”

속삭이듯 묻는 음성에 흥분한 티가 묻어난 건 그 때문이었다. 예준의 입가에 미소가 떴다가 사라졌다. 언제 웃었냐는 듯 예준은 진지해진 표정으로 짧게 답했다.

“……네.”

“말해 봐.”

그러자마자 예준이 한 행동은, 시후의 입술에 제 입술을 포개는 것이었다. 오랫동안 바람을 쐬었는지 예준의 아랫입술이 까끌까끌했다.

피부를 긁는 감촉에 시후는 어깨를 잘게 움찔거렸다. 그것도 잠시, 혀를 내밀어 상대의 입술을 적셔 주었다. 부드러우면서도 느릿하게 핥아 주자 예준은 “아” 하고 탄성을 흘렸다.

예준의 뺨을 쥐고 있던 양손에 힘이 풀렸을 때였다. 예준은 고개를 더 깊숙이 숙였다. 말랑한 피부가 서로 비벼질 때마다 흥분이 독처럼 퍼져 나갔다. 걷잡을 수 없는 열기에 올라오는 신음을 삼키며, 시후는 상대의 입맞춤을 받아 주었다.

“맞혔어요?”

그렇게 묻는 예준은 어느새 우산을 들고 있지 않은 손으로 시후의 허리를 잡고 있었다.

“……그래.”

조용히 답하며 시후 역시 한쪽 손을 내려 예준의 손등을 감싸 쥐었다. 제 손바닥 아래 있는 타인의 피부가 싸늘했다.

미련하고 바보 같고, 그래서 예쁜 이 녀석을 집 안으로 들이고 싶었다. 그렇게 이 아이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몽땅 씹어 먹고 싶다는 열망이 뼛속까지 깊숙하게 스며들었다.

“맞혔어.”

쉰 목소리로 덧붙이자 예준이 화사하게 미소 지었다. 기뻐서 상기된 얼굴이 어린아이처럼 천연했다.

쿵, 쿵, 쿵.

귓가에 심장이 요동치는 소리가 울렸다. 시후는 성욕에 의한 떨림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제 얼굴에 서린 감정의 빛깔이 애틋함인지도 모른 채. 고집스럽게.

* * *

현관문이 닫히는 동시에 시후는 신발도 벗지 않고 예준에게 키스했다. 예준의 뒤통수가 문에 부딪히는 소리가 귓등을 긁었다. 시후는 입술을 겹친 채로 손을 올려 더듬거렸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의 감촉이 느껴지자 그것을 느릿하게 쓰다듬었다.

괜찮냐는 뜻을 담아 뒤통수를 만져 주자 예준의 눈꼬리가 휘어졌다. 그는 얼마 전 시후의 흥미를 끌었던 눈웃음을 한 채로 두 손을 움직였다. 큰 손들이 시후의 골반을 움켜쥐는가 싶더니 그대로 제 쪽으로 잡아당기며 하반신을 겹쳤다.

“윽, 너…….”

하체가 비벼지자 시후의 성기가 몸을 키웠다. 미간을 찡그린 채 헛웃음을 뱉자 예준이 그를 꼭 껴안았다. 그러더니 흠뻑 젖어 있던 혀를 내밀어 귓바퀴를 핥았다.

오소소 돋는 소름에 시후의 등이 곧추세워졌다. 예민한 부위에 가해지는 애무는 길고 진득했다. 두 입술이 귓불을 물고 느릿하게 지분거렸다. 젖은 숨이 귓불에서부터 귓등까지 올라왔다.

“잠깐.”

제지하는 목소리를 못 들은 건지 행위가 멈추지 않았다. 귀를 핥던 혀는 어느새 끝을 단단히 세우기 시작했다. 뾰족해진 혀가 귓구멍을 파고들었다.

시후는 인상을 쓰며 고개를 옆으로 젖혔으나 혀는 더 깊숙하게 들어와선 끝을 세웠다. 난잡한 물소리가 진득하게 달라붙는 느낌에 열이 훅 올랐다.

상대의 뒤통수를 만지던 시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머리채를 잡아 뒤로 당기자 예준의 목이 꺾였다. 돌발 상황에도 예준은 아파하는 대신 오히려 미소를 그렸다. 호선을 그리고 있는 입술 사이로 혀가 나오더니 그 주변을 가볍게 핥았다.

식욕이 돈다는 듯 행동하는 모습에 흥분이 더해졌다. 시후는 여전히 머리채를 잡은 채로 예준의 목덜미에 이를 갖다 댔다. 치아 아래 살갗이 꿈틀거리며 맥박 치는 게 느껴졌다.

그는 그것을 잘근 씹은 뒤 목선을 따라 위로 올라갔다. 닿을 듯 말 듯 한 두 사람의 입술이 가쁜 숨을 주고받았다. 하아, 하아. 토막 난 숨의 끄트머리가 떨렸다.

시후가 먼저 입술을 겹쳤다. 제 귀를 희롱했던 아랫입술을 빨아 본 뒤 아프지 않게 깨물었다. 예준이 “음” 하고 소리 내며 입술을 벌렸다. 서로의 혀가 엉켜 들어가고, 맞닿았던 하반신들이 뭉근하게 비벼졌다. 빠르게 솟아오른 흥분 때문에 시후는 전에 없이 마음이 급해지는 자신을 느꼈다.

“하, 씹.”

감정이 뜻대로 통제되지 않자 자신도 모르게 날카로운 소리를 내었다. 그는 제 허리를 잡고 있던 예준의 오른손을 거머쥐고는 거실로 끌고 갔다. 거칠게 벗겨진 신발들이 제멋대로 나뒹굴었지만 시후는 거기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벗어.”

한마디 한 뒤 시후 역시 입고 있던 코트를 벗었다. 예준은 그의 허리를 보기 좋게 조이고 있는 조끼에 시선을 고정 한 채로 옷을 벗었다. 겨울 냄새가 풍기는 찬 옷들이 바닥에 하나둘 떨어졌다. 바지만을 입고 있는 예준을 마주한 시후는 목울대를 꿈틀댔다.

별안간 목구멍이 간질거렸다. 여유 대신 성욕이 머릿속을 꽉 채우자, 시후는 간지러운 목 안을 무언가로 채우고픈 충동이 들었다. 길고 굵으며, 혈관들이 흉악하게 돋아나 있던 그 무언가로. 대뜸 허리를 수그리며 예준의 바지를 잡아챈 건 그 때문이었다.

“……형.”

읊조리는 예준의 목소리 역시 흥분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바지 지퍼를 내리고 드로어즈를 벗기자 진한 체향과 함께 꼿꼿하게 선 성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말갛게 번들거리는 귀두를 보고 있자니 목구멍이 빠듯해지며 숨이 막히려고 들었다. 언젠가 저것으로 목젖까지 꿰뚫렸던 기억이 살아났다.

“형.”

예준이 한 번 더 부르며 시후의 손등 위로 제 손을 겹쳤다. 밑을 내려다보는 갈색 눈동자에 무얼 하냐는 뜻이 담겨 있었다. 시후는 성기 쪽으로 입을 벌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러나 입 안으로 들어오는 건 좆이 아닌 공기 한 줌이었다. 붉은 입술이 살덩이에 닿기 직전, 예준이 뒤로 물러섰기 때문이었다.

“안 돼요.”

“왜.”

“…….”

“기분 좋게 해 줄게.”

“그래서 안 돼요.”

예준은 단호했다. 눈물점 부근이 복숭앗빛으로 물드는가 싶더니, 곧 도톰한 입술을 달싹였다.

“저번처럼 할 수도 있어요.”

“저번 뭐. 네 자지로 내 목젖 찔러 버린 거?”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말했잖아요. 그 약속 깨기 싫어요.”

“상관없어.”

“윽.”

긴 손가락들이 발기한 성기를 움켜잡았다. 예준이 눈썹을 찡그리며 짧은 잇새 소리를 내었다. 차가운 손 때문에 놀란 건지, 아니면 예민한 부위가 잡혀 자극받은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시후는 끈적하게 젖어 있는 기둥을 손톱으로 긁으며 덧붙였다.

“뿌리까지 박아 넣든, 좆물을 목구멍에 싸지르든. 상관없다고.”

그 경험이 짜릿한 기억으로 남아 연신 떠올랐다는 사실은 굳이 이야기하지 않았다. 대신 평정심을 가장하며 상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예준 역시 아랫입술을 깨문 채로 시선을 마주했다. 서로 엉키기 직전의 긴장감이 거실 전체를 에워싸기 시작했다.

먼저 시선을 거둔 사람은 예준이었다. 밑으로 내리깐 속눈썹이 길고 예뻤다.

“역시 안 되겠어요.”

읊조리는 목소리의 끝이 떨렸다. 무언가를 꾹꾹 압축한 음색이 섹시하다고 생각하며 시후는 고개를 기울였다.

“상관없다니까.”

“제가 상관있어요. 형이 제 거…….”

예준은 아주 잠깐 머뭇거렸다. 그도 잠시, 색소 옅은 눈동자를 움직여 다시 마주 보았다.

“……빨면, 바로 쌀 것 같아요.”

“많이 컸네. 옛날엔 빤다는 말도 못 하더니.”

“형 덕분이죠.”

“어쭈.”

“아무튼, 안 돼요. 넣자마자 싸면, 그렇잖아요.”

“참아 봐, 그럼.”

예준은 검지로 아래를 가리켰다. 손에 잡혀 있던 성기가 벌겋게 부풀어 있었다. 금방이라도 사정할 듯, 혈관이 잘게 꿈틀거리기까지 했다.

괜히 하는 소리가 아님을 시후는 쉽게 이해했다. 아쉽지만 할 수 없다. 예준의 반응을 감상하며 끝까지 빨고 싶을 뿐, 바로 정액을 먹겠다는 건 아니니까. “흐음” 하고 못마땅하다는 듯이 입매를 비틀 때였다.

“일단은 제가 먼저 빨게요.”

“네가?”

“네. 제가, 형 거를.”

‘형 거를’이라고 말하며 움직이는 입술 모양이 귀여웠다. 시후의 검은 눈동자에 웃음이 번져 나간 건 그래서였다.

그는 뒤를 돌아 긴 소파 가운데에 앉았다. 허벅지를 벌리며 턱을 치켜든 얼굴에 나른하며 오만한 기색이 풍겨 났다.

“형 거가 뭔데?”

“……다 알면서 그래요.”

“왜, 모르겠는데.”

고저 없는 음성이었지만 장난기가 또렷하게 담겨 있었다. 그 사실을 눈치챘는지 예준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었다. 그러고는 그의 허벅지 사이로 다가와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부끄럽다는 듯 귓바퀴가 홧홧하게 달아오른 것치곤, 꽤 능숙해 보이는 동작이었다.

풋풋함과 대담함. 그 두 가지가 섞인 예준의 모습이, 시후는 좋았다.

열기가 담긴 시선으로 내려다보자, 예준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이어 그가 한 행동은, 얼굴을 앞으로 내밀어 고간 바로 앞에 갖다 대는 것이었다.

예준의 입술이 바지에 닿을 듯 말 듯 아슬아슬한 거리에서 멈췄다. 그 사이로 흘러나오는 은은한 숨결이 지나치게 자극적이었다.

“이거 말한 거예요.”

‘이거’라고 덧붙인 뒤 예준은 입술을 살짝 벌렸다. 도톰하고 붉은 입술 사이에 바지 지퍼가 걸렸다. ‘지이익’ 하는 소리가 시후의 귓등을 긁었다. 당장이라도 녀석의 뒤통수를 잡아채 좆을 밀어 넣고 싶어 머리가 부글거렸다.

드로어즈가 내려감과 동시에 단단히 선 성기가 드러났다. 힘이 들어간 허벅지를 보던 예준이 소리 없이 미소 지었다. 그는 귀두를 빨거나 기둥을 핥는 대신 상체를 곧추세웠다.

갑자기 코앞으로 다가온 얼굴에 시후는 눈을 크게 떴다. 입술 위로 뜨겁고 말랑한 것이 내려앉았다. 예준의 입술임을 자각하는 순간, 몸이 옆으로 가볍게 떠밀렸다. 기습 뽀뽀에 힘이 풀려 있던 시후는 그대로 소파에 쓰러졌다.

“뭐 하는…….”

낮게 읊조리는 사이 예준이 그의 정장 바지와 속옷을 단번에 벗겨 냈다. 종아리에 걸린 제 옷가지들을 본 시후는 말을 마쳐야 한다는 사실을 잊었다.

침묵 속에서 예준은 저 원하는 대로 행동했다. 툭, 투욱, 바지와 속옷이 떨어지는 소리가 고요한 공간을 울렸다.

타인에 의해 시후의 오른쪽 다리가 허공 위로 올라갔다. 손에 잡힌 다리는 정강이까지 덮는 양말을 신고 있었다. 근육이 알맞게 잡힌 종아리를 주무른 뒤, 예준은 옆으로 벌리며 내리눌렀다.

“뭐 하게.”

“빨아 주려고요.”

굳이 눕혀서? 거기다 바지와 속옷은 왜 다 벗기는 것이고. 시후는 긴 양말만 신은 제 꼴이 변태 같아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옷을 찾아 입기 위해 시선을 옆으로 돌렸을 때였다. 조끼에 의해 조여져 있던 허리가 위로 튕겨 올랐다.

“큭.”

잇새 사이로 삼키지 못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귀두 전체를 감싸는 혀가 자극적이었다. 단단하게 힘이 들어간 혀가 위아래로 움직이며 요도구 위를 자극했다. 송곳같이 뾰족한 쾌감이 연이어 터지자 시후는 올라간 허리를 굳힌 채로 인상을 썼다.

핥는 소리가 예민해진 귓구멍에 달라붙었다. 부푼 귀두를 핥던 혀는 이제 요도 구멍을 파고들 듯이 헤집기 시작했다. 고통인지, 쾌감인지 모를 감각에 시후의 눈 부근이 경련하듯 떨렸다.

하지 말라고 말하려는 순간, 예준은 꼭 기다렸다는 듯이 입술을 밑으로 내렸다. 언제 괴롭혔냐는 듯이 기둥을 지분거리는 애무가 부드럽기 그지없었다.

‘잘하는데.’

성기에 숨결이 닿자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샅샅이 훑는 입술을 느끼며 시후는 소리 없이 웃었다. 능숙하게 빠는 실력이 상당했다. 아무것도 몰랐던 아이를 이렇게 만든 사람은 자신이었다. 성취감이 뼈를 타고 저릿하게 울렸다.

“하, 후우…….”

숨을 깊게 내쉬며 시후는 몸에 힘을 풀었다. 기둥 아래 음낭을 핥는 혀가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그는 남의 불알조차 거리낌 없이 빨아 주는 예준에게 새삼 감탄하며 이윽고 완전히 누웠다. 그러자 턱에서 목으로, 목에서 어깨로 떨어지는 선이 꿈틀거렸다. 강하게 솟구친 열기가 몸을 뒤흔든 까닭이었다.

“?”

잠자코 예준에게 하반신을 내어 주고 있을 때였다. 긴 속눈썹에 반쯤 가려졌던 시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별안간 핥아지고 있던 음낭이 위로 들려서였다. 뭘 하려는가 싶어 상체를 일으키려는 순간이었다.

“!”

뜨거운 입술이 음낭에 가려져 있던 부위에 닿았다. 예상 못 한 스킨십에 매끈하던 시후의 이마가 구겨졌다. 몸이 굳어지기가 무섭게 예준의 입술이 아래로 미끄러지듯 떨어졌다. 물기 어린 혀가 닿은 곳은 시후의 회음부였다.

“어딜 핥아.”

낮은 목소리로 묻자 예준이 고개를 들었다. 올려다보는 동그란 눈동자가 말갛게 빛났다. 마치 시후의 체액이 가득 묻은 그의 입술처럼.

“여기도 성감대가 될 수 있대요.”

“누가 그래.”

“자료에서요. 찾아봤어요.”

뭘 봤길래. 시후는 몸을 들썩이며 비웃음 같은 미소를 그렸다. 검은 머리카락이 이마 위로 흘러내렸다.

“별 걸 다 본다.”

대꾸하는 대신 예준은 길고 풍성한 속눈썹을 밑으로 내리깔았다. 시후는 그가 민망해한다고 생각했다. 그 추측이 완벽하게 틀렸음을 깨닫는 데에는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너……! 윽.”

회음부가 쭈욱 빨리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 삽시간에 훅 치받쳐 오른 쾌감이 목구멍을 꽉 틀어막아 버렸다. 예상외의 성감에 시후는 한쪽 팔을 길게 뻗었다.

그러나 쭉 내민 손가락들은 예준을 막아 내지 못했다. 머리라도 밀어 보려던 순간, 입술이 회음부 전체를 덮어 감쌌기 때문이었다. 예준은 그런 채로 “춥, 추웁” 하고 젖은 소리를 내며 살덩이를 거세게 빨아들였다.

쭉쭉, 흡입하는 힘에 시후는 예준 대신 소파를 쥐게 되었다. 불끈거리는 손등 위로 퍼런 핏줄이 도드라졌다.

‘이것 봐라.’

어디서, 뭘 봤길래. 백시후의 얼굴에 서려 있던 미소가 싹 사라졌다. 생각 못 한 애무에 여유를 지킬 틈이 없어졌다. 머릿속이 거품처럼 부글부글 끓었다. 살면서 누군가에게 회음부를 빨리는 날이 올 거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신경조차 써 본 적 없는 부위. 시후의 회음부는 사실 남들보다 통통하게 살이 찐 편이었다.

볼록하게 올라온 그곳에 얼굴을 묻은 채 예준은 시후의 양다리를 잡아 더 높이 올렸다. 허리가 꺾인 시후는 날이 선 목소리로 미쳤냐고 물었다. 그러나 예준은 짜증 섞인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언뜻 화가 난 것 같은 음성의 끝이 흔들리고 있음을 알아서인지, 아니면 회음부를 빠는 데 재미를 들여서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춥, 추웁.”

음탕한 소리가 연신 정적을 긁었다. 예준은 좆을 빨던 실력을 어김없이 발휘했다. 혓바닥을 넓게 펼쳐 둔덕을 거침없이 핥아 대었다. 쉴 새 없이 핥아진 회음부가 타액으로 번들거릴 때, 이번에는 입을 더 크게 벌려서는 살덩이를 쭉쭉, 흡입했다.

“하, 미친……. 읏.”

중얼거리는 시후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미친’이라고 욕을 하자마자 예준은 동작을 멈추었다. 그것도 잠시, 이를 세워서는 불룩한 회음부를 살짝 물었다. 따끔한 쾌감에 시후는 “윽!” 하고 신음하며 다리를 더 높게 치켜들었다. 바르르 떠는 허벅지를 세차게 주무르며 예준은 입술을 떼었다.

“좋으면서.”

그는 나직하게 혼잣말을 하는가 싶더니 혀끝을 단단히 세웠다. 그러고는 자신이 깨물어 생긴 잇자국을 천천히 핥았다. 불끈거리며 힘이 들어간 회음부는 어느새 붉게 익어 있었다.

“별 걸 다 한다. 알파 회음부 빠는 놈은 너밖에 없을걸.”

예준은 혀 대신 손가락으로 벌겋게 오른 회음부를 문대었다. 힘이 들어간 손가락이 둔덕을 누를 때마다 시후의 눈 부근이 꿈틀거렸다. 이상하게도 거기가 눌릴 때마다 성기와 뱃속이 저릿하게 울렸다. 묘한 감각에 마른침을 삼키는 동안 예준이 조용히 읊조렸다.

“여기 빨아 준 사람은 저밖에 없나 봐요? 왜 이렇게 좋아하지.”

예준의 중얼거림에 묘한 설렘이 담겨 있음을 시후는 즉시 포착했다.

“이러다 내 후장이라도 빨겠군.”

자극하려고 던진 말은 아니었다. 별 걸 다 좋아하는 모습이 웃겨서 빈정댄 것뿐이었다.

그러나 그 말을 어떻게 받아들인 건지, 예준은 눈을 크게 뜨며 숨을 멈추었다. 들어 올렸던 다리를 내려놓고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는 그에게서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뭘 그렇게 봐.”

예준이 의아해하는 시후를 향해 눈꺼풀을 밑으로 내렸다. 그는 바로 대답하는 대신 뜻 모를 표정으로 시후를 말끄러미 응시했다. 얼굴 구석구석을 훑는 시선에 열기가 서려 있었다.

알 수 없는 반응에 시후가 인상을 썼을 때였다. 뜻밖의 소리가 귓등을 건드렸다.

“빨게 해 줄래요?”

“……뭐?”

예준은 시후의 허벅지 안쪽을 거머쥐었다. 근육으로 이루어진 부위를 쓰다듬는 손길이 진득했다. 집요하게 주무르는 느낌에 성기가 흥분해서 빳빳하게 세워졌다.

달아오른 그쪽을 잠깐 바라보던 예준은 다시 시후와 시선을 마주했다. 도톰하여 보기 좋은 입술이 달싹거렸다.

“형 후장, 빨게 해 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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