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화 (10/17)

10장. Agitato

아지타토 : 성급하게, 초조하게 @nini

말을 좀 재수 없게 하기는 했다. 실수했음을 시후도 인정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봄날처럼 따뜻한 음색에, 거기에 꾹꾹 담긴 미안함과 애정 그리고 반가움과 애틋함에 당황해 퉁명스럽게 대한 것이다.

그렇다고 핸드폰까지 끄며 연락을 차단할 줄은 몰랐다. 시후는 틈만 나면 핸드폰을 들어 노려보았다. 황당해하는 시선에는 약간의 짜증이 깃들어 있었다.

이쪽은 누구 때문에 내장이 터질 뻔했다. 지금도 계단만 내려가면 허리가 지끈거리고 부은 아랫구멍이 고통을 호소한다. 지끈한 통증을 탓하지 않고 먼저 연락을 했건만, 돌아오는 게 무시인가.

얼음처럼 싸늘해진 시후의 얼굴을 보며, 비서들은 무언가 문제가 발생했음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그게 어린 파트너의 잠적 때문인지는 꿈에도 모른 채, 그저 영문을 몰라 하며 당황한 눈동자를 굴리는 게 고작이었다.

여러 사람이 눈치를 보는 동안 시후는 테이블 위에 둔 핸드폰만 뚫어질 듯이 응시하고 있었다. 결코 내가 먼저 연락하지는 않겠다는 듯, 팔걸이를 움켜쥔 채로.

그렇게 두 시간 정도 지났을까, 핸드폰이 잘게 진동을 울렸다. 액정에 뜬 ‘유예준’이라는 이름에 시후의 손등이 꿈틀댔다. 그는 아무 표정 변화 없이, 그러나 평소보다는 빠른 동작으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유예준 [형, 죄송해요.]

유예준 [연락 안 돼서 놀라셨죠.]

놀라? 누가. 괘씸하기는 해도 놀라지는 않았다. 시후는 눈을 가늘게 뜨며 “재밌게 구네” 하고 중얼거렸다. 그의 읊조림을 들은 비서들이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백시후를 빈정 상하게 한 상대가 누구인지 궁금해하며.

유예준 [앞으로도 연락이 안 될 것 같아요. 전화도, 메시지도.]

덧붙임에 시후는 고개를 비스듬하게 기울였다. 이건 또 무슨 소리지.

유예준 [될 때 바로 연락 드릴게요.]

[왜.]

유예준 [핸드폰이 고장 났어요.]

[사 줄게.]

유예준 [괜찮아요.]

고민하는 기색 없이 바로 오는 답장에 신경이 날카로워지기 시작했다. 답만 잘하면서 연락이 안 된다고? 무슨 헛소리야. 그는 머릿속을 되짚어 보며 유예준의 주소를 직접 생각해 내려고 했다. XXXX 오피스텔 80…….

유예준 [택배 부치시면 안 돼요. 당분간 큰형 집에 있을 생각이라서요. 보내셔도 못 받아요.]

“…….”

속이 꿰뚫린 시후는 그만 “하” 하고 실소를 뱉었다. 말려든 것 같은 기분을 떨치기가 힘들었다. 그러는 동안 예준이 한 문장을 덧붙였다.

유예준 [시후 형. 미안해요.]

‘시후 형’. 친근한 부름이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곧잘 형이라고 불렀던 예준은 현재까지도 호칭을 바꾸지 않았다.

그런 맹랑함이 귀엽기도, 또 그 살가움이 좋기도 했다. 이름까지 부르며 웃는 아이의 얼굴을 보고 있자면 업무나 사람에게 얻었던 피로가 사라지는 걸 느꼈다.

긴 속눈썹 아래 드리운 눈매가 가늘어졌다. 미소 짓는 유예준을 그리니 찌르르한 느낌이 목뼈를 타고 올라왔다. 그는 간질간질한 감각을 누르며 손가락을 움직였다.

[언제 돌아오는데.]

담담한 한 문장. 별것 아닌 질문 같지만 시후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떠날 것 같은 사람을, 그것도 섹스 파트너에게 이런 질문을 하는 건 처음이었다. 매사 떠나건 말건 특유의 무신경함으로 놔두었던지라, 시후는 계속 뒷말을 붙이려는 자신이 낯설게 느껴졌다.

“……그만.”

혼잣말을 하며 시후는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그래서 ‘형 집에 간다고 연락까지 안 될 건 없지 않나’라는 다소 구질구질한 덧붙임은 발송되지 않았다.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뒤 시후는 두 눈을 감았다. 짧게 대화를 주고받은 것만으로도 일어난 간지러움이 계속되고 있었다. 손끝을 긁는 느낌이 기묘해 주먹을 그러쥐었다.

* * *

‘안정될 때까지 얼굴 보지 않는 걸로 하지.’

그 말을 꺼낸 게 백시후 자신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 한마디에 허물어지던 예준의 얼굴도, 그럼에도 착하게 말 듣던 모습도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당분간 얼굴을 보지 말자고 했지, 누가 아예 연락을 끊자고 했는가?

그것도 무려 2주 동안이나.

시후는 찌푸려진 이맛살을 한 채로 혀를 찼다.

“쯧.”

붉은 입술 사이로 담배 연기가 흘러나왔다. 그는 손가락 사이에 끼고 있던 담배를 다시 입에 물며 눈동자만 움직였다. 엉망진창인 거실이 시야 안으로 들어왔다. 깨끗하기 이를 데 없었던 집은 담배 냄새가 배 있었으며, 바닥에는 담뱃갑이나 양주 같은 게 널브러져 있었다.

탁자 위에 둔 재떨이를 보며 시후는 연기를 깊숙하게 빨아 마셨다. 물론 애 2주간 안 봤다고 폐인까지 된 건 아니었다. 회사를 나갈 때도 언제나 그랬듯 단정한 차림을 갖추었으며, 업무 중에도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집에만 들어오면, 시후는 예전이라면 좀처럼 하지 않을 짓을 벌였다. 술을 마시고 아무렇게나 놔두기, 집에서도 흡연하기, 입었던 옷은 벗어 던지고는 건들지도 않기 등의 행동들이었다. 매일같이 오던 청소업체조차 끊어 버리니 집은 빠른 속도로 너저분해지기 시작했다.

유예준과 연락조차 끊긴 지 2주. 갑자기 사람 사는 곳이라고 볼 수 없을 만큼 차갑고 정적인 공간이 못마땅해졌다. 제 구두만이 있는 현관에 들어서는 것도, 그래서 아무도 건들지 않는 그랜드피아노를 마주하는 것도 어째 신경질이 났다. 한순간에 정이 떨어져 버린 공간을 엉망으로 대하기 시작한 건 그 때문이었다.

“……기가 막히는군.”

시후는 물처럼 잔잔하고 평온했던 제 일상의 리듬이 망가졌음을 알았다. 우습다. 누가 보면 아주 실연이라도 당한 줄 알겠다. 현실은 연애는커녕, 섹스만을 즐기는 사이였을 뿐인데.

거기까지 생각한 시후의 눈 부근이 경련하듯이 꿈틀거렸다. 섹스만을 즐기는 사이라. 그러기엔 섹스 외의 것도 너무 많이 하지 않았냐는 반박이 뒤통수를 때렸다.

함께 바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대화를 나눈 것도.

피아노를 치고 그 연주를 듣는 것도.

아프다고 간호를 하거나, 힘들어 보인다고 집 바깥에서 기다리는 것도.

그 외의 소소한 기억들이 머릿속을 채웠다. 두통이 일어난 시후는 담배만 계속 뻑뻑 피워 댔다. 인상을 쓴 그의 눈 밑에 거먼 그림자가 드리웠다.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병원에 가둬 놨어야 했다. 1인실 병동에 넣고 경과를 두 눈으로 봤어야 했는데. 넘실거리는 유예준의 페로몬을 신경 쓰느라 쫓듯이 내보낸 게 문제였다.

사람 시켜 어디 있는지 찾아내 볼까. 돈만 있으면 다 해결되는 자본주의 세상에서, 그 정도 일은 문제도 아니었다. 마음먹으면 한 시간 안으로도 주소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시후는 장담했다.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건, 어째 굴욕감이 들어서였다.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인가. 애 신상까지 털어 내 찾아가려 들고.

“…….”

정면을 노려보듯 응시하며 시후는 재떨이에 담배를 꾹 눌렀다. 꺼지지 않는 연기의 매캐함이 코끝을 건드렸다. 다른 생각을 해 보려고 해도 계속 유예준과 관련된 질문만 떠오른다.

왜 아직도 아무 연락이 없어?

설마 남 뒤 따먹고 튄 거냐. 그럴 애는 아닌데.

……그럴 애가 아닌지는 내가 확신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아니면, 많이 심각한가. 연락하기 힘들 만큼.

생각이 꼬리를 물고 늘어질 때, 느닷없이 핸드폰이 진동을 울렸다. 약간 놀란 듯 커진 눈은 곧 평소의 크기를 찾았다. 핸드폰을 귓가에 가져다 댈 때 역시 무감각한 얼굴이었다.

― 여보세요?

“왜.”

높낮이가 없는 음성에 상대가 “쌀쌀맞게”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언제부터인가 나사 빠진 사람처럼 웃음이 많아진 놈, 동생 백도영이었다.

― 시현이 형, 그분과 만난대.

“그분?”

― 그래, 그분. 기 회장님네 둘째 따님 말이야. 형이 둘이 만나게 하라고 조언했다며, 아버지한테. 쿵짝이 아주 잘 맞는다나?

“…….”

― 큰아들 연애한다고 좋아하시더라.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신났고. 형은 뭐, 누구 만나는 사람 없고?

시후는 대꾸하는 대신 핸드폰을 잡지 않은 손으로 눈썹 주위를 꾹꾹 눌렀다. 피로감이 짙어졌다.

“그딴 말 하려고 연락…….”

― 요즘 상태 이상하다며. 어디 아파?

의미심장한 질문이었다. 시후는 고개를 비스듬하게 기울인 채 건조한 목소리를 내었다.

“누가 그래.”

― 한두 명 쑥덕대는 게 아니라서 말이지. 요즘 분위기 살벌하다며, 형네 쪽?

“…….”

― 꼭 뭔 사달이라도 난 것처럼.

시후는 입 모양으로만 욕을 중얼거렸다. 회사에서 아무 문제 일으키지 않았다고 확신했건만, 제 오만한 착각에 불과했던 모양이었다. 한없이 부정적인 감정이 가슴을 꾹꾹 찔러 댔다. 타인들의 눈에 제 꼴이 어땠을지 생각만 해도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 지금 나올래?

침묵 속에서 도영이 부드러운 목소리를 내었다. 둘째 형의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인지한 모양이었다.

― 바람 좀 쐬자. 나랑 연우 형, 이따가 백화점 갈 건데. 형도 이쪽으로 와.

커플들 사이에 끼라고? 놀리려는 건가 싶었으나, 그러기엔 백도영의 음성이 꽤 다정했다.

“네가 왜 날 신경 쓰지? 언제부터 이랬다고.”

― 신경 써 줘도 의심받네. 정말 서운하다아!

“…….”

― 그거야 뭐, 내가 엄청 착해서지. 애인 목에 페로몬도 묻히는 형까지 챙기고 말이야. 그렇지?

그걸 아직도 기억하고 꿍해 있었나 보다. 시후는 한숨을 삼키며 거절을 하려고 했다. 그의 생각을 읽은 걸까, 도영은 한 옥타브 높은 목소리를 내었다.

― 나와, 그냥. 연우 형도 형 보고 싶대.

아, 이거군.

“……연우 씨가 보고 싶다고 해서 나오라는 거지?”

― 음! 난 착한 애인이기도 하거든.

맑은 목소리가 오늘따라 신경을 긁는다. 누구는 연락 두절된 꼬마 때문에 담배나 피우고 있는데, 누구는 행복에 겨워 죽고 있다.

네 뜻대로 해 줄 마음 없다고 하려다 생각을 바꾸었다. 유연우 씨와 일대일로 만났을 때, 성질내며 쫓아온 백도영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평소의 능글맞은 면상은 어디로 가고, 씩씩대며 쳐들어온 꼴이 꽤 재미있긴 했다.

세상 즐거운 목소리를 내는 녀석의 기분을 잡치게 하면, 제 짜증이 조금이나마 풀릴 것 같았다. 화풀이 대상을 찾은 시후의 입꼬리가 비스듬하게 올라갔다.

* * *

그러나 몇 시간 뒤, 시후는 뭐라도 씹은 것 같은 얼굴을 하게 되었다. 그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동생 커플 때문이었다.

“뭐 하러 이런 걸 사요.”

“뭐 하러 사긴요. 형한테 잘 어울릴 것 같으니까 샀지.”

“나한테 너무 과분한데…….”

“과분한 건 저것들이지.”

백도영이 말하는 ‘저것들’은 의자 위에 쌓여 있는 쇼핑백들이었다. 큼지막한 네모 모양의 쇼핑백들엔 저마다 유명 브랜드의 로고가 박혀 있었다. 천 단위의 물건들을 아무렇지 않게 골라 샀을 도영을, 시후는 어렵지 않게 짐작했다.

“다음번엔 나랑 상의하고 사요. ……저런 물건 관심 없다는 거 알면서.”

“알았어요, 알았으니까 일단 손목 줘 봐요.”

점잖게 말하는 연우 쪽으로 도영이 허리를 수그렸다. 그의 손에 들려 있는 건 고가의 손목시계였다. 다른 손으로 연우의 팔을 잡더니 자연스레 시계를 채웠다. 장미꽃처럼 화려한 미모를 가진 얼굴에 웃음이 피어났다.

“역시. 잘 어울려요.”

부드러운 음성에 애정이 서려 있었다. 제삼자인 시후의 머리털이 쭈뼛 솟을 정도로 다정다감한 속삭임이었다.

‘별꼴이다.’

환하게 웃는 백도영은 일견 얼이 빠진 사람처럼 보였다. 그러면서도 어떤 시련이나 고난, 우울함 같은 부정적인 감정이 없는 얼굴은, 워낙 행복해 보여 자꾸만 눈길이 갔다.

어이없음과 신기함 속에서 시후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혀를 적시는 쌉싸름한 맛 때문일까, 이상하게도 속이 쓰려 왔다.

“고마워요.”

연우의 들릴 듯 말 듯 낮은 목소리에도 똑같은 기색이 풍겼다. 시후는 커피 잔을 든 채 눈동자만 옮겨 연우를 보았다. 손목을 만지작대는 남자의 뺨이 발갛게 올라 있었다. 난처해하면서도 기뻐하는 그 얼굴이, 어째선지 낯이 익었다.

“…….”

시후의 미간 사이에 힘이 들어갔다. 지난번에 만났을 때도 그렇고, 연우는 알 수 없는 기시감을 느끼게 했다. 비슷한 이목구비를 가진 사람이 있는지 머릿속을 되짚어 보아도, 딱히 떠오르는 이는 없었다.

“형, 어때? 잘 어울리지.”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도영이 말을 걸며 연우의 손목을 잡아 올렸다. 카페의 불빛에 반사되어 시계가 영롱하게 반짝였다.

“뭘 그런 걸 물어요.”

연우가 당황해하며 급히 밑으로 손목을 내렸다. 시후는 해당 신체 부위 쪽으로 시선을 내렸다. 관찰하는 눈매가 점차 가늘어져 갔다.

문득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다른 이의 손목이었다. 푸르스름한 핏줄이 불거져 있는 그의 손목은, 연우는 물론이고 시후보다도 굵은 두께를 자랑했다. 일전에도 그 위에 시계를 채워 주고 싶다는 충동이 일곤 했다. 당황해하면서도 기뻐할 얼굴을 감상하는 것도, 피아노를 치기 위해 그것을 끌러 내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아서였다.

시후의 얼굴에 미소가 떴다가 빠르게 사라졌다. 핸드폰을 들어 액정을 확인하는 눈빛 역시 가라앉았다. 밤 8시, 오늘도 예준의 연락은 오지 않았다.

“……폰이 고장 났다고 연락을 안 해?”

자신도 모르게 혼잣말을 중얼거린 시후는 인상을 쓰고 있었다. 구질구질하게 이게 뭐 하는 짓이냐. 연락 오지도 않는 애나 계속 신경 쓰고. 이럴 바에 아예 유예준의 존재를 지우고픈 마음이 강해졌다.

그래, 그러면 되는 거 아닌가. 섹스할 상대야 유예준이 아니더라도 차고 넘쳤다. 이렇게 신경을 건드리지 않을, 아주 편하고 고분고분한 상대를 택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생각과 달리 거부감만 올라왔다. 시후는 “쯧!” 하고 혀를 찼다. 답이 나오지 않는 제 상태에 가슴이 부글부글 끓었다.

“왜 그래?”

그런 시후의 정신을 돌아오게 한 건 도영이었다. 시후는 무표정을 가장하며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평온한 얼굴이었으나 도영은 오히려 이상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누가 형 연락 안 받아? 누군데.”

“……그런 게 있어.”

대충 대답하려 했던 시후는 인상을 굳혔다. 어째 더 의미심장한 답이 되고 말았다는 기분을 떨치기 힘들었다. 결국, 바로 입술을 달싹여 한마디를 덧붙이는 수밖에 없었다.

“일 문제, 야”

“일 문제 맞아?”

“…….”

“걱정이 가득한데. 애틋한 얼굴이야, 아주.”

그 말에 시후의 눈 부근이 꿈틀거렸다.

“내가?”

도영이 너스레를 떨었다.

“표정 한번 살벌하네. 그냥 보이는 대로 설명한 것뿐인데.”

헛소리. 맞받아칠 가치도 없다. 그는 고개를 돌려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셨다. 그런 시후의 뺨에 시선들이 꽂혀 왔다.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도영과 연우가 그를 말끄러미 응시하고 있었다. 괜찮냐는 표정을 짓고 있는 두 사람은 이미 비즈니스 때문이 아님을 눈치챈 얼굴들이었다.

여기서 더 아니라고 부정하면 의심만 살 것 같았다. 무시하려던 시후는 말없이 한숨을 삼켰다. 백도영을 골리고자 나온 자리인데, 막상 나오니 속을 긁을 힘이 나오지 않았다. 그보단 유예준의 존재감이, 그의 부재가 계속 신경을 잡아채고 있었다. 시후는 다시 핸드폰을 바라보려다 연우와 눈이 마주쳤다.

연우는 뭐라고 말을 건네는 대신 상체를 앞으로 숙이며 두 팔을 테이블 위에 두었다. 안경알 너머로 보이는 눈빛이 퍽 진중했다.

우연히 시선을 마주하게 된 시후의 입꼬리가 움찔대었다. 이야기를 들어 보고 싶다는 자세에 마음이 미약하게나마 움직였다.

“……아는 동생이 있습니다.”

말을 꺼낸 시후는 그런 자신에게 조금 놀랐다. 잘 알지도 못하는 상대에게 이 이야기를 꺼낼 줄은 몰랐다. 알 수 없는 제 상태에 묘한 기분이 들어 그는 잔을 툭 내려놓았다.

달그락거리는 소리는 꽤 차가웠지만, 연우는 당황하는 대신 계속 시후를 바라보고 있었다. 편히 얘기하라는 시선이 따뜻했다. 냉정한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는 눈빛이라고 생각하며 시후는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그 친구가, 최근에 심상찮은 일을 겪어서 말입니다. ……갑자기 알파로 발현이 됐거든요.”

“발현이요?”

연우는 눈을 크게 뜨더니 금방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많이 힘들겠어요.”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에는 연민 말고도 무언가 잘 알고 있다는 기색이 풍겨 났다. 과연, 연우는 연민 어린 얼굴로 설명을 덧붙였다.

“저도 그랬거든요.”

“저도?”

“네. 성인이 된 이후에 발현되었죠, 오메가로.”

“……아.”

후천적으로 발현된 사람은 예준 말고 처음 보았다. 실제로 겪은 사람을 만날 줄은 몰랐기에 시후는 똑같이 허리를 수그렸다. 꼬고 있던 다리 역시 푼 채로.

“갑자기 발현됐으니 한동안 컨트롤이 안 될 거예요. 처음 겪는 상태에 대한 충격도 꽤 있을 테고.”

“충격?”

“시도 때도 없이 몸이 뜨거워지는 건, 자신이 몹쓸 존재가 된 기분이 들게 하거든요. 심지어 억제제도 잘 듣지 않으니까요.”

한마디로 제멋대로 발정 나는 몸뚱이에 환멸을 느낀다는 뜻이었다.

억제제가 잘 듣지 않는 알파. 심지어 시시때때로 러트가 찾아오기까지 한다.

시후는 발갛게 오른 얼굴로 힘겨워하던 예준을 떠올리곤 주먹을 쥐었다. 흰 손등 위로 여러 갈래의 핏줄이 도드라졌다.

“힘들다는 건 알고 있었습니다. ……찾아봤거든요, 후천적으로 발현된 사람들에 대해.”

“그래서 걱정하셨구나.”

“걱정이라.”

시후는 옅은 실소를 뱉었다.

“그런 좋은 인간은 못 됩니다. 걱정보단 짜증이 났죠, 연락이 안 되니.”

“걱정돼서 짜증 나신 게 아닐까요.”

아니. 자신은 그저 불쾌하기만 할 뿐이었다. 감히 연락이 되지 않는다는 게, 감히 제 신경을 건드리고 있다는 게 기분 나빠서. 그제야 시후는 철없는 애처럼 굴었다는 생각이 들게 되었다.

‘시발.’

욕설을 삼킨 그는 손으로 이마를 꾹 눌렀다. 그런 시후의 귓가에 “허어” 하고 놀라워하는 소리가 달라붙었다. 도영은 팔짱을 낀 채로 눈을 댕그랗게 뜨고 있었다. 제 둘째 형이 누군가를 그토록 염두하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한 모양이었다.

“괜찮을 거예요.”

제 친형을 꼭 신기한 물건이라도 되는 듯 대놓고 구경하는 인간과 달리, 유연우는 세심하고 다정한 사람이었다. 그는 이해한다는 얼굴을 하며 차분히 말을 이어 갔다.

“저도 초기엔 아무하고도 연락 안 했어요. 몸이 그렇게 되니 혼자 있고 싶었거든요. ……그것 때문에 주위 사람들 걱정을 많이 끼쳤죠.”

“……그래요?”

“그 동생분도 같은 마음일 테니 조금만 더 기다려 보세요. 진정되면 먼저 연락 줄 거예요. 많이 미안해하면서.”

말을 마친 뒤 연우는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단단한 사람임을 알 수 있는 부드러운 웃음이었다. 그런 상대를 응시하던 시후의 눈빛이 차츰 누그러져 갔다.

“역시.”

바람 빠진 소리를 낸 뒤 시후는 제 동생 쪽으로 한 번 턱짓했다.

“과분한 것 같군요, 백도영한테 연우 씨는.”

“무슨 말씀을…….”

“응, 나도 그렇게 생각해.”

애인 칭찬이 좋았는지 도영이 눈꼬리를 휘며 고개를 끄덕였다. 연우는 그러지 말라는 표정을 지으며 도영의 어깨를 툭, 쳤다.

다시 시작된 두 사람의 연애질을 못 본 척하며 시후는 커피를 마셨다. 아까와 달리 커피는 더 이상 쌉쌀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 * *

시후는 백화점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바람에 코트 자락이 거세게 휘날렸으나 추워하는 기색 하나 없이 시선만 밑으로 내렸다. 시야 안으로 들어오는 건 가죽 장갑과 소매 사이에 위치한 시계였다.

때마침 그의 검은 차가 모습을 드러냈다. 운전기사가 있을 차를 향해 걸음을 움직일 때였다. 도영이 다가와서는 뜻밖의 제안을 건넸다.

“술 마실래?”

가까이 다가온 도영은 어느새 혼자가 되어 있었다.

“연우 씨는.”

“동생 만난대, 여기서. 그 친구도 백화점에 있었다고 하더라.”

동생이 있었나. 시후는 별생각 없는 얼굴로 “그렇군” 하고 낮게 중얼거렸다. 그러다 어느새 도영이 저를 빤히 응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느꼈다.

“왜.”

“동생 하니까 생각나서. 누구야, 형의 그 동생이라는 애는?”

그러면서 도영은 대놓고 질문을 던졌다.

“좋아하는 애야?”

좋아하냐는 물음에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예준의 고백이었다. ‘좋아해요’라는 떨리는 음성이 귓전에 맴돌기 시작했다. 시후는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침묵을 지켰다. 날렵한 선을 자랑하는 옆얼굴에 생각하는 빛이 떴다.

“아니.”

읊조리는 입술 사이로 희멀건 입김이 흘러나왔다. 도영이 “하지만” 하고 뭔가 말하려던 순간, 시후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신경 쓰이긴 하지.”

찌르르한 감각이 목뼈를 울렸다. 그는 주머니에 꽂았던 손을 올려 제 목덜미를 만지작대었다. 귀 아래 위치한 혈맥이 팔딱팔딱 뛰고 있었다.

“……와, 뭐 그런 간지러운 소릴 다 하냐.”

“본인이 연우 씨한테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나 보군.”

“아하하!”

도영은 크게 웃기는 했지만 멋쩍어하거나 민망해하는 기색은 없었다. 당당한 동생의 모습을 지켜보며 시후는 낮게 한숨 쉬었다.

“연우 씨한테 고맙다고 전해 줘. 그리고 미안하다고도.”

“사과는 왜? 아, 연우 형 목에 페로몬 묻힌 거?”

화를 낼 줄 알았던 시후의 예상과 달리, 의외로 도영은 입꼬리를 보기 좋게 올렸다.

“우린 괜찮아. 덕분에 그걸로 잘 즐겼거든.”

의미심장한 말에 시후는 인상을 썼다. 뭘, 어떻게 잘 즐겼을지 절대 알고 싶지 않았다.

“너한테 사과 안 했어, 연우 씨한테만 했지.”

“연우 형한테 사과한 게 나한테도 한 거지. 우리는 일심동체거든.”

“…….”

“욕하고 싶다는 얼굴이네.”

말을 말자. 시후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차 쪽으로 걸었다. 그러자 도영은 순순히 보내 주는 대신 옆으로 몸을 바짝 붙였다.

“왜 이래.”

“술 마시자니까. 기분도 안 좋아 보이는데 이럴 땐 가족이 있어 줘야지. 연우 형도 그렇게 하래, 형 걱정 좀 덜어 주라고.”

“유연우 씨가 고생이 많네, 백도영 사람 만드느라.”

무뚝뚝한 말투였지만 거기에는 옅게나마 온기가 담겨 있었다. 그런 제 형의 마음을 알고 있는지, 도영은 어린 소년처럼 키득거렸다.

“고생이 많지. 나 사람 만드느라, 아픈 아기 챙기느라.”

“……뭐?”

순간 떠오른 건 ‘혼전 임신’이라는 단어였다. 저게 설마……. 미간까지 찡그리며 노려보자 도영이 눈을 끔뻑거렸다. 왜 자기를 쏘아보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너, 연우 씨한테 무슨 짓 했어.”

“무슨……. 아, 미친.”

그제야 형의 생각을 읽었는지 도영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다. 보기 드물게 당황한 모습에도 시후는 계속 눈살을 찌푸렸다. 미쳤냐는 시선을 보내자 도영은 두 손까지 내저었다.

“나 정관수술 한 거 기억 안 나?”

“연우 씨 몰래 풀었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

“씨발, 미쳤어?! 연우 형한테 그런 짓을 왜 해!”

팔팔 뛰는 꼴을 보니 이상한 짓을 벌인 건 아닌가 보다. 시후는 자신이 생각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에 마음을 놓았다.

“그 형 동생이야, 막냇동생! 나이 차가 많이 나서 그렇게 부른댔어.”

“……자기 동생더러 아기라고 부른다고?”

묻는 목소리에 혐오감이 묻어났다. 똑같이 동생을 둔 입장으로서, 유연우가 그딴 호칭을 부른다는 게 믿을 수가 없었다. 뭐 씹은 얼굴로 바라보자 도영이 코웃음을 쳤다.

“응, 누구와 달리 성격이 좋아서. 형도 본받도록 해.”

“그래, 알았다. 앞으로 아기라고 불러 주지.”

“……하지 마.”

어차피 자기도 질색할 거면서 쓸데없는 소릴. 시후는 실소를 뱉고는 문을 열었다. 그러다 문득 든 생각에 도영 쪽으로 다시 시선을 주었다.

“동생이 많이 아파?”

다른 사람이었으면 관심도 두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연우는 꽤 마음에 드는 사람이었고, 무엇보다 조곤조곤하게 조언해 준 점이 고맙기도 했다. 아는 병원장이라도 소개시켜 줘야 하나, 생각하는 사이 도영이 뜻 모를 말을 했다.

“그 동생 때문에 형 걱정이 더 남 일 같지 않았을걸.”

한국말인데도 도통 이해가 가질 않았다. 시후는 무슨 소리냐는 표정을 지었다.

“동생도 발현됐거든.”

“발현?”

“그래, 형네 그 애처럼. 알파래, 그것도 우성 알파.”

말을 마친 뒤 도영은 차 문을 열고 들어가려 했다. 그런 도영의 앞을 막은 사람은 시후였다.

“언제 발현됐는데.”

그렇게 읊조리는 시후의 얼굴은 딱딱하게 경직되어 있었다.

“음, 한 2주 됐나?”

“……2주.”

2주라고. ‘설마’ 하는 생각이 점차 강해져 갔다. 그 동생 지금 어디 있냐고 물으려던 시후는 직전에 질문을 바꿨다.

“그 동생, 지금 유연우 씨 집에 있어?”

도영이 눈을 크게 떴다.

“어떻게 알았어?”

“…….”

“방학이겠다, 연우 형 집에 들어가 있는 중이지. 병원에 입원시킬까 했는데 두 형제 다 반대하더라고.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괜찮을 거라나? 고집들 세, 유 씨 형제.”

‘유 씨’라는 단어가 가슴에 와 박혔다. 시후는 습관처럼 장갑 낀 손을 올려 제 이마를 짚었다. 긴 속눈썹에 반쯤 가려진 눈동자가 미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유 씨라고?’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려 했으나 좀처럼 되질 않았다. 대신 연우를 볼 때마다 느꼈던 익숙함을 기억해 냈다. 이목구비는 전혀 다르지만 묘하게 닮은 구석이 있었다. 눈빛, 말투, 대화하는 도중 보이는 단단함.

“이름이 뭔데.”

계속되는 질문에 도영은 이제 대답해 주지 않았다. 놀란 기색이 가시고 심각해하는 표정이 얼굴에 떴다.

“설마. 아니지?”

답답해진 시후는 신경질적인 목소리를 내고 말았다.

“내가 어떻게 알아. 이름이나 말해.”

“형, 미쳤어? 예준이 이제 스물네 살이야, 그것도 아직 학생이라고.”

너희들도 나이 차 나지 않냐고 반박하는 대신 시후는 도영의 팔을 움켜잡았다. 그는 갈고리처럼 휘어진 손가락으로 동생을 붙든 채 입을 달싹였다.

“어딨어.”

가라앉은 속삭임에서 쇳소리가 났다.

“두 사람, 지금 어디 있냐고.”

도영은 대답하는 대신 눈을 게슴츠레 떴다. 갈색 눈동자에는 말을 해 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는 고민이 보였다.

그 순간, 도영의 핸드폰이 진동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주머니에 울리는 소음에 두 형제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

“…….”

도영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어이없다는 듯, 그러면서도 호기심이 묻어나는 웃음이 시후의 속을 긁었다.

“왠지 연우 형 같지 않아?”

“…….”

“기다려. 받아 볼 테니까.”

나른해진 음색은 이 상황을 즐기겠다는 뜻이 서려 있었다. 시후는 팔을 움켜쥔 손을 놓고는 가만히 노려보았다. 빨리 받으라며 번득이는 눈동자가 칼처럼 날카로웠다.

도영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과장하며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액정을 향해 시선을 내리던 그는 곧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음.”

핸드폰을 귓가에 갖다 댄 도영은 뜸을 들이다가 입술을 떼었다.

“……어, 예준아. 무슨 일이야?”

시후의 얼굴이 멋지게 일그러졌다. 누구라고? 뱃속이 불덩이가 들어온 듯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형이 전화를 안 받는다고? 아, 위치. 응. 알지, 아는데. 음…….”

힐끗. 도영이 곁눈질로 제 형을 보았다.

“……XXXXX 매장 앞. 1층에 인공 폭포가 있는데 그 근처에 있을…….”

도영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시후는 백화점으로 발길을 돌렸다. 달리다시피 급한 걸음은 도영의 부름에도 멈추지 않았다. 그런 시후의 얼굴은 겨울바람만큼이나 싸늘하게 변해 있었다.

[앞으로도 연락이 안 될 것 같아요. 전화도, 메시지도.]

예준의 마지막 메시지가 뒤통수를 거세게 때렸다.

[핸드폰이 고장 났어요.]

자신한테는 아무 연락 없던 녀석이, 백도영한테는 잘도 전화했다. 그것도 제 형을 만나겠다고. 집에만 처박혀 있을 줄 알았던 놈이, 사람 많은 백화점에서.

[시후 형. 미안해요.]

욕설이 턱끝까지 차올랐다. 언제부터 싸돌아다녔던 걸까? 그런 줄도 모르고 얌전히 기다려만 주었다. 어디 잘못된 건 아닌가, 내심 신경 쓰면서. 설마 이대로 연락이 끊어진 게 아닐까, 온 신경이 곤두세워진 채로.

“하.”

시후는 짜증으로 굳어 있던 눈매를 휘며 웃었다. 회사 사람들이 알아차릴 정도로 엉망이 된 컨디션, 언제 깨끗했냐는 듯 쓰레기장이 되어 버린 집, 연신 핸드폰만 확인했던 제 꼬락서니. 그 모든 것들의 원인 제공자를 찾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인공 폭포가 맑은 물소리를 내며 흘러내리고 있었다. 근처 설치된 벤치들에는 사람들이 앉아 있었고, 폭포 앞 설치된 나무들 사이에서 어린아이들이 노닐고 있었다. 아름다운 설치물들과 클래식 음악이 어우러진 공간, 시후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의 안색이 밝았다.

“뭘, 어쩌려고 그래.”

어느새 쫓아온 도영이 그의 어깨를 잡아 멈춰 서게 했다. 집중력을 깨뜨리는 악력에 이맛살을 구길 때였다. 시후의 눈가가 잘게 꿈틀거렸다.

“…….”

시후는 손가락을 말아 주먹을 쥔 채 어딘가를 뚫어지듯이 보았다. 현실인지 아닌지 판단하듯 눈꺼풀조차 깜빡이지 않는 얼굴이 차가웠다.

멀지 않은 곳에 익숙한 두 사람이 서 있었다. 연우는 은은한 미소를 머금은 채 뭐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런 연우의 맞은편에 있는 건, 유예준이었다.

예준은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고개를 주억거렸다. 갈색 머리카락과 색소 옅은 눈동자가 인상 깊은 얼굴에는 환한 웃음이 가득했다. 눈에 힘을 준 시후는 그의 입가 주변에 보조개가 있음을 발견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두 형제는 뭐라고 계속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다 연우는 귀엽다는 듯이 그를 보더니 곧 손을 들어 예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어 손바닥으로 등을 두드리는 동작에는 동생을 아끼는 기색이 역력했다.

시후는 입을 꾹 다문 채로 천천히 시선을 떨어뜨렸다. 아래로 미끄러지는 눈길은 이제 예준의 손에 고정되어 있었다. 왼손에는 백화점 이니셜이 박힌 쇼핑백 하나가 들려 있었다. 그리고 오른손에 들려 있는 건, 핸드폰이었다.

‘잘 노네.’

저걸 어떻게 할까, 고민하며 시후는 실소를 흘렸다. 손끝이 불에 닿은 듯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 열기가 팔꿈치를 타고 몸 전체로 번지는 순간, 예준이 고개를 돌렸다.

“!”

놀랐는지 예준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커다란 몸이 석고상처럼 굳어지는 걸 보자마자 시후는 자신도 모르게 발을 움직였다. 걸음을 움직일 때마다 구두 소리가 차갑게 터졌다.

“형, 진정하고…….”

“비켜.”

도영이 말릴 듯 다가오자마자, 시후는 옆으로 떠밀었다. 울화를 꾹 누른 잇새 소리에 당황했는지 도영이 더는 그를 잡지 못했다. 그사이 시후는 예준의 앞에 서서 속눈썹만 밑으로 내렸다.

“아.”

예준이 뜻 모를 소리를 내더니 손에 쥐고 있던 쇼핑백을 뒤로 숨겼다. 민망한 듯 빨갛게 변해 가는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시후는 그의 팔뚝을 움켜잡았다. 물풀처럼 휘감는 악력에 예준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시후, 형.”

“핸드폰 고장 났다더니?”

“…….”

“재밌네, 응?”

그렇게 말하는 시후는 이제 시니컬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재밌어서 아주 좆같아지려고 해.”

읊조림에 서린 숨이 살짝 떨렸다. 예준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여전히 쇼핑백은 뒤로 숨겨져 있었다. 만난 후에도 무언가를 숨기는 꼴에 짜증이 들끓었다. 열받은 몸에서 페로몬이 나온 건 그 때문이었다.

평소에는 숨 쉬듯 자연스럽게 통제했던 페로몬이, 이 순간만큼은 거침없이 뿜어져 나왔다. 어느 때보다 강렬하고, 어느 때보다 폭력적이었다.

그것은 그대로 예준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몸을 짓누르는 알파의 공격에 힘들 법도 하건만, 예준은 인상 한 번 찡그리지 않았다.

버텨? 시후는 고개를 비스듬하게 기울이며 눈을 가늘게 떴다. 검은 눈동자에 서슬 퍼런 빛이 맴돌기 시작할 때였다.

“지금 무슨 상황, 윽!”

그런 시후의 행위를 멈추게 만든 건 다름 아닌 유연우였다. 얼떨떨한 얼굴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던 그는 곧 제 목을 부여잡았다. 괴롭다는 듯 비칠거리는 사람을 보고서야 시후는 이성을 찾았다. 뒤늦게 그가 오메가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연우 형!”

“형!”

페로몬이 사라지자마자 도영이 연우를 끌어안았다. 동생인 예준 역시 당황해 제 친형의 기색을 살폈다.

여기 있다가 상황만 꼬이겠다 싶어, 시후는 손을 앞으로 뻗었다. 검은 장갑을 낀 손이 향한 곳은 다름 아닌 예준의 팔이었다.

굵은 팔뚝을 물풀처럼 휘감은 채 시후는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강한 악력에 예준은 그쪽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무언가 말을 할 듯 입을 벌렸으나, 시후는 듣고 싶지 않았다.

“다물고 따라와.”

그는 상대를 움켜잡은 채로 걸음을 움직였다. 의외로 예준은 그런 시후를 말리지도, 멈춰 서지도 않았다. 오히려 자신을 부르는 연우의 목소리에 이렇게 말하기까지 했다.

“괜찮아, 나중에 봐.”

부드럽고 차분한 말씨가 어른스러웠다. 침착한 태도에 시후는 분기가 머리끝까지 치받치는 걸 느꼈다. 자신이 왜 이렇게까지 화가 나는 지 제대로 이해 못 한 채.

* * *

백화점을 나가 인도를 계속해서 걷고 있을 때였다. 묵묵하게 앞만 보며 걷는 동안, 갑자기 예준이 시후를 불렀다.

“형.”

“…….”

“시후 형, 이제 멈춰 봐요.”

귀에 달라붙는 음성을 무시하려고 했으나 쉽지 않았다. 예준이 잡히지 않은 손으로 시후의 어깨를 잡아 세웠기 때문이었다. 쉽게 뿌리치지 못할 정도로 단단한 악력이었다.

이걸 어떻게 쳐낼지 생각하는데 예준의 손목에 걸린 쇼핑백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을 주시하려고 하자마자 예준이 먼저 어깨를 놓아주었다.

“아파 보여요.”

“무슨 헛소리야.”

“해쓱해졌잖아요, 몰랐어요?”

그 말을 듣고서야 시후는 최근 제 얼굴을 제대로 확인해 본 적이 없음을 깨달았다. 멈칫하는 동안 예준은 그의 얼굴을 말끄러미 응시했다. 병색이라도 찾아보려는 건지 뺨에서 턱으로 떨어지는 선을 훑는 시선이 집요했다.

정말로 해쓱해졌다면 그 원인은 모두 저 녀석일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른 채 걱정 어린 표정을 짓고 있는 모습에 속이 뒤집혔다. 시후는 쥐고 있던 팔을 차갑게 놓았다. 냉랭한 행동에도 예준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그의 안색만 계속 살피고 있었다.

‘착한 척은.’

안 만났으면 끝까지 연락 안 했을 거면서. 그런 줄도 모른 채 유연우의 이야기를 들으며 걱정했던 자신이 멍청했다. 스스로 걱정했음을 시인한 사실을 자각 못 한 채로, 시후는 턱을 살짝 들어 올렸다.

“아가.”

“……네?”

느닷없는 호칭에 예준이 천연하게 눈을 깜빡였다.

“너, 아가라고 불린다며.”

조롱기가 다분한 음성이었다.

“너희 형한테.”

멍하니 쳐다보던 예준의 뺨이 벌겋게 변해 갔다. 창피했던 건지 붉은빛이 귓바퀴와 목덜미로까지 퍼졌다. 부정하지 못하는 걸 보니 정말로 아가라 불리는 모양이었다.

“예쁨 많이 받네. 형제끼리 아가라고 부르는 건 또 처음 봤어.”

“……나이 차이가 많이 나서 그래요.”

창피함을 숨기지 못하는 대꾸였다. 그러든 말든 시후는 “아, 그래” 하고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유쾌하다고는 보기 힘든 웃음이었다.

“연락 잘 하던데? 형 어딨냐고, 곧잘 전화하더군. 이쪽한텐 핸드폰이 고장 났다느니, 연락 못 한다느니 늘어놓곤.”

예준은 무언가 말할 듯 입을 달싹였으나 시후는 듣지 않았다.

“왜 이렇게 비싸게 굴어, 예준아.”

움직이려던 예준의 입매가 굳었다.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간 시후는 눈동자를 위로 치켜떴다. 살짝 드러난 삼백안이 서늘한 느낌을 주었다.

“고분고분한 맛이 좀 있으면 좋겠는데. 속 썩이는 파트너는 질색이라서.”

“…….”

두 사람의 눈빛이 허공에서 쟁강, 부딪쳤다. 방금까지 붉어져 있던 예준의 뺨이 원상태로 돌아왔다. 상대를 구석구석 살펴보는 눈동자는 의외로 화가 난 것 같진 않았다.

차분한 눈빛에 오히려 짜증이 일어난 건 시후였다. 저쪽이 유리한 위치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떨치기가 어려웠다.

“……그놈의 파트너.”

먼저 정적을 없앤 건 예준이었다. 그는 손을 올려 제 머리칼을 헝클어뜨린 다음 시후와 시선을 마주했다.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한숨에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왜 이렇게까지 화내는지 모르겠어요.”

색이 옅은 눈동자에 도발적인 빛이 반짝였다.

“어차피 날 섹스 파트너로만 생각하면서.”

시후의 눈가가 움찔거렸다. 저 뻔뻔한 새끼. 사람을 2주 동안이나 기다리게 해 놓곤, 핸드폰이 고장 나 연락 안 된다는 거짓말이나 늘어놓곤. 왜 이렇게까지 화내는지 모르겠다고?

“전 파트너들한테도 이렇게 화냈어요?”

조용조용하게 읊조리는 음성이 살짝 떨렸다. 열받은 시후는 그 동요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아니면, 나한테만 화내는 거예요?”

단지 저 입을 막고 싶다는 충동에 관자놀이가 지끈거릴 정도였다.

그의 장갑 낀 손가락이 말리며 주먹을 쥐었다. 그대로 예준을 쏘아보는 얼굴에 날카로운 분노가 서렸다. 아까와 같은 페로몬이 예준의 손목을 감쌈과 동시에 위로 올라갔다.

상대를 제압하고자 하는 페로몬에 예준의 눈이 가늘어졌다. 얼굴이 굳는가 싶더니 그게 다였다. 바위처럼 꿈쩍도 하지 않는 반응에 시후가 이상함을 느낄 때였다. 별안간 그의 턱 아래에 예상치 못한 것이 닿았다.

부드러우나 약하다고 볼 수 없는 향이 목덜미를 감싸 돌았다. 이어 몸 구석구석을 훑는 향은 시후의 신경을 곤두서게 했다. 제 페로몬과 팽팽하게 겨루는 기세에 시후는 낮게 실소를 뱉었다. 우성 알파로 발현되었다는 정보가 뒤늦게 떠올랐다.

한 걸음만 내디디면 맞닿을 수 있는 거리에서,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만을 응시했다. 언뜻 고요해 보이는 모습들이지만 실은 페로몬들이 사납게 일렁거리고 있었다. 근처에 알파나 오메가가 있었다면 당장 현기증이 일어날 정도의 강렬함이었다.

잠시 후, 예준이 어깨에 힘을 풀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입술 사이로 희고 긴 입김이 흘러나왔다.

“……다른 데서도 이렇게 흘리고 다녔어요?”

“뭘.”

“페로몬요. 저랑 파트너 된 이후에도 페로몬 흘리고 다녔냐고요.”

“…….”

“오메가들이 좋아했겠네요.”

시후는 고개를 비스듬하게 기울인 채 눈살을 찡그렸다.

“발현된 지 얼마나 됐다고 건방지게. 한 번 따먹어 봤다, 이거냐?”

“……무슨 말을 또 그렇게 해요. 그런다고 저 이제 안 놀라요.”

귀나 숨기고 말하지. 삽시간에 빨개진 귓바퀴를 보며 시후는 한쪽 입꼬리를 비스듬하게 올렸다. 비웃는 기색이 역력한 미소에 예준은 긴 속눈썹을 밑으로 내리깔았다.

“그리고.”

부끄러워하는 얼굴과 달리 대담한 발언이 이어졌다.

“……따먹은 건 제가 아니라 형이죠.”

“뭐?”

“제 거 먹은 건 형 아래라고요. 제 말 틀렸어요?”

시후는 드물게 당황해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히 두 사람의 음담패설을 들은 행인은 없는 것 같았다.

“얼굴 빨개졌어요.”

“입 다물어.”

동요하던 것도 잠시, 시후의 눈매가 금방 날카로워졌다.

“거짓말이나 한 주제에 뭐가 그렇게 당당해.”

“그건…….”

“서운한 게 있으면 있다고 말을 하든가. 아님 보기 싫으면 싫다고 하든가. 헤어지고 싶으면…….”

제 귀에도 울화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최대한 감정 없이 말하고 싶었는데 잘 되질 않았다.

시후는 예준을 뚫어질 듯이 노려보다가 몸을 돌렸다. 먼저 멀어지기 직전, 마지막 말은 들릴 듯 말 듯 희미했다.

“……좆같게 사람 속이나 뒤집어 놓곤.”

바람에 나부끼는 코트에서 찬 기운이 풍겨 났다. 서늘한 바람을 고스란히 맞음에도 시후는 한기를 느끼지 못했다. 있는 대로 열이 올라서는 제 머리만 마구 헝클어뜨릴 뿐이었다.

거친 손길에 머리가 엉망으로 뭉개졌다. 머리카락들이 제멋대로 흘러와 이마를 덮도록 둔 채 시후는 눈을 질끈 감았다.

말조차 제대로 못 한 채로 자리를 피한 건 처음이었다. 유치하다. 유치하고, 유치하고, 유치하다. 가슴속에서부터 요동치는 감정은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인가, 유예준에 대한 미련인가. 아니면 그 둘 다인가.

‘미련’이라는 감정의 이름에 시후는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등을 곧게 편 채로 주먹을 말아쥐었다. 뒤늦게 자신이 못 했던 말이 떠오른 탓이었다.

‘헤어지고 싶으면 헤어지겠다고 말을 하든가. 그럼 헤어져 주지, 깔끔하게.’

신경질적으로 꺼내려 했던 발언은, 그러나 뱉지 못한 채 혀 위에서만 맴돌 뿐이었다. 그는 인상을 쓴 채로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잘생긴 얼굴에 혼란스러워하는 빛이 섬광처럼 스쳐 지나갈 때였다.

바로 등 뒤에 인기척이 느껴졌다. 제 몸을 가리는 그림자에 움찔거리는 순간,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

휘청거리던 시후는 곧 호흡하는 방법을 잊었다. 그런 시후를 예준이 강하게 끌어안고 있었다. 뒤에서 허리를 감싸 안은 양손이 돌처럼 단단했다.

“……시후 형.”

끄트머리가 떨리는 음성이 시후의 귀에 내려앉았다.

“미안해요, 내가 잘못했어요.”

나지막한 사과가 귓바퀴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자 어째선지 얼굴이 뜨거워지려 했다. 사과를 바란 게 맞음에도, 막상 백허그를 당한 채 들으려니 멋쩍은 기분이 올라왔다.

“…….”

시후는 제 허리를 붙잡은 손들 쪽으로 시선을 내렸다. 그의 검은 머리카락만큼이나 까만 눈동자가 미미하게 흔들렸다. 눈에 들어온 건 예준의 손가락들에 걸려 있는 쇼핑백이었다. 바람에 좌우로 움직일 때마다, 안에 담겨 있던 내용물이 언뜻 보였다.

“가지 마요.”

“…….”

“형, 가지 마요.”

시후는 손을 움직여서는 쇼핑백을 벌렸다. 예준은 크게 움찔거리기는 했지만, 아까처럼 숨기려는 동작은 하지 않았다. 그렇게 드러난 내용물은 검은 리본으로 묶인 작은 상자였다. 리본 아래에는 시후도 익히 아는 명품 브랜드 로고가 박혀 있었다.

그러자 예준은 허리를 감싸 안고 있던 팔을 풀었다. 찌푸려진 눈썹과 아래로 처진 눈매, 그리고 꿈틀거리는 입꼬리는 큰 잘못이라도 저지른 강아지 같았다. 손가락으로 뺨을 찌르면 울음이라도 터뜨릴 기세였다.

시후는 속으로 헛웃음을 흘렸다. 얼굴 봐라. 귀신이라도 본 듯 사색이 되었다. 저럴 거면서 왜 사람 열받게 해?

거기까지 생각하자 굳어 있던 몸이 빠르게 풀렸다. 살짝 누그러진 시후를 향해 예준이 두 손을 내밀었다.

“?”

내민 쇼핑백에 시후는 고개를 비스듬하게 기울였다. 예준은 길고 촘촘한 속눈썹을 내리깐 채 입술만 움직였다.

“……형 선물이에요.”

“……선물이라고?”

“네.”

바로 받는 대신 시후는 예준과 쇼핑백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다 쇼핑백을 움켜쥐고 있는 양손이 빨갛게 얼어 있음을 발견했다. 한겨울 거리에서 오랫동안 노출되어 있었으니 손이 얼 법도 했다.

“…….”

시후는 말없이 쇼핑백을 받고는 장갑 한 짝을 벗었다.

“껴.”

“괜찮…….”

“안 괜찮아 보여. 그리고 이건 뭐야, 내 선물이라고?”

무엇인지는 몰라도 유명한 브랜드이니 값이 꽤 나갈 것이다. 어린 녀석이 무슨 돈이 있어서. 발현한 바람에 아르바이트도 못 했으면서.

이유 없이 속이 답답해져 왔다. 시후가 한참을 침묵하는 동안 예준은 조심스레 장갑을 꼈다. 단정한 얼굴에 우는 건지, 웃는 건지 모를 표정이 서렸다.

“오늘, 찾아가려고 했어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빈손으로 찾아가긴 싫어서 산 거예요. ……형이 나 때문에 고생 많았으니까.”

“…….”

“연락을 못 한 건…….”

말을 하다 말고 예준은 머무적대기 시작했다. 시후는 상대의 눈동자에 민망해하는 감정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포착했다. 계속 이야기하라는 시선을 던지자, 예준은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느리게 입술 사이를 떼었다.

“자꾸, 러트가 와서요.”

“…….”

“형하고 관련된 것만 마주하면 러트가 왔어요. 목소리만 들어도, 메시지만 주고받아도.”

나지막하지만 분명한 음성이었다.

“그게 겁이 났어요, 또 형 다치게 할까 봐.”

수시로 찾아왔을 러트. 불안정한 상태에 억제제도 잘 듣지 않았을 것이다. 후천성일 경우 어떤 초기 증상을 겪는지 알고 있기에 시후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담배 연기를 닮은 입김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핸드폰 고장 났단 말은 왜 했어.”

“연락하실 것 같아서요.”

“바보야? 내 연락 때문에 러트가 왔다고 말했어야지.”

“그리고 많이 걱정했을 테고요. 형, 정 많잖아요.”

내가 정이 많다고? 이 세상에서 그 누가 백시후더러 정이 많다는 말을 할까. 자신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마음이 누그러졌다. 시후는 어이없어하는 표정을 그리며 혀를 찼다.

“그렇다고 거짓말을 해? 그게 더 사람 피 말리게 하는 거야.”

“미안해요, 거짓말해서.”

“이제 와서 순한 척은.”

말은 그렇게 하지만 이미 사나운 어투는 가신 지 오래였다. 습관처럼 이마를 짚으려던 시후는 제 손에 닿는 머리카락에 멈칫했다. 그제야 열받은 나머지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렸음을 기억해 냈다. 뒤늦은 멋쩍음에 얼굴로 열이 쏠렸다.

‘뭐 하냐.’

성질이란 성질은 다 부리고. 그가 민망함에 손가락을 말아 주먹을 쥐었다 폈다, 반복할 때였다. 살짝 붉어진 귓등으로 읊조림이 내려앉았다.

“시후 형.”

예준이 장갑 낀 손을 내밀었다. 잠깐 머뭇거리던 손은 곧 시후의 뺨을 감쌌다. 얼굴에 맴돌고 있던 열기가 한층 짙어졌다.

시후는 여전히 주먹을 쥔 채로 상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맞닿은 부위에서 전류처럼 찌르르한 감각이 퍼져 나갔다. 검은 눈동자에서 선명한 빛이 일렁이기 시작할 때, 예준이 입술을 움직였다.

“보고 싶었어요.”

“…….”

“많이 보고 싶었어요.”

의심할 필요도 못 느낄 만큼 진심 어린 목소리였다. 그 말을 신호 삼아 시후는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예준의 눈이 살짝 젖어 있었음을 발견할 정도로, 사실은 턱에 힘이 들어가다 못해 가느다랗게 떨고 있음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코앞이었다.

시후는 입꼬리를 느릿하게 올리며 손을 올렸다. 제 뺨을 감싼 예준의 손처럼 그의 손 역시 장갑을 끼고 있었다.

손가락들은 그대로 예준의 목 뒤를 감쌌다. 그가 제 쪽으로 당기자 예준은 순순히 고개를 수그려 시선을 마주했다. 먼저 탄성인지, 탄식인지 모를 소리를 낸 사람은 예준이었다. 입술이 닿을 듯 아슬아슬한 거리에서 그는 여러 감정들이 압축된 숨을 뱉었다.

담배 연기를 닮았다. 처음 만났을 때, 그의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왔던 그 연기를 닮았다. 마침내 입술이 겹쳐지기 직전, 시후는 눈꼬리를 휘었다.

“멍청이.”

길거리 한복판에서 키스할 줄은, 시후 자신조차 몰랐다. 영혼까지 뒤흔드는 열망에 입술을 겹치고서야 깨달았다. 조심성 많던 나날을 잊기라도 한 듯, 먼저 입맞춤을 건넸다는 사실을.

놀라움과 별개로 불처럼 뜨거운 흥분이 올라왔다. 겉면이 까칠했던 입술, 젖어 있던 입천장, 그리고 제 안으로 들어오던 혀는 더 하고픈 충동을 불러일으켰다.

발갛게 충혈된 눈을 한 채로 시후는 상대의 목을 더 세게 거머쥐었다. 손바닥에서부터 느껴지는 혈맥 소리가 요란했다.

쿵, 쿵, 쿵.

예준이 긴 속눈썹을 내리뜨며 숨을 길게 늘어뜨렸다. “형” 하고 부르는 음성이 귓구멍으로 들어와 야릇하게 울렸다. 사람들이 다 지켜보는 길거리라는 사실마저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질 만큼, 자극적인 목소리였다.

시후는 목을 감싸 쥐었던 손을 움직여 예준의 턱선을 쓰다듬었다. 겨울 공기에 얼어붙었을 피부를 쓰다듬는 손길은 부드러우면서도 진득한 면이 없잖아 있었다.

가만히 그 손길을 받던 예준은 입꼬리를 올리며 보조개를 보였다. 그런 채로 제 얼굴을 만지작대는 손바닥에 입술을 대고는 재차 키스를 건넸다.

‘쪽’ 하는 소리가 의외로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간질간질한 것이 꽤 유쾌하기까지 했다.

서로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얽혔다. 아까만 해도 페로몬을 풍기며 날이 선 눈빛을 주고받았던 두 사람은, 이제 제 욕망을 또렷이 드러내고 있었다. 시후는 상대의 눈동자에 일렁이는 빛을 바라보며 입술만 움직였다.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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