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de Story
1. 유예준
예준은 생각했다. 사랑은 무엇인가?
관심도 없던 분야에 갑자기 신경 쓰게 된 건, 다름 아닌 그의 큰형 때문이었다.
열두 살이나 많은 형은 어른스럽지만 경직된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이었다. 막내인 예준에게는 많은 애정을 베풀었으나, 그 외의 사람들한테는 보이지 않는 선을 그어 버릴 때가 빈번했다. 단호한 면이 없잖아 있는 장남을 보며 부모님은 한탄하듯 이렇게 말했다.
‘결혼은커녕 연애도 못 하겠다.’
그럴 때마다 형은 별말 없이 미소만 살짝 지었다. 예의 바르지만 무심한 느낌이 묻어나는 반응이었다.
어느 날, 그렇게 무뚝뚝했던 형이 사랑에 빠졌다. 애인과 함께 서 있을 때마다 그는 가족들한테도 잘 보여 주지 않는 화사한 웃음을 터뜨렸다. 환한 생기와 애정이 함께 넘쳐흐르는 모습이었다. 그러면 상대는 홀린 듯이 바라보다 함께 미소를 지었다.
예준은 두 사람의 눈동자에 서린 애정을 감상하며 한 번 더 생각했다.
‘사랑은 무엇인가.’
언제나 예준의 주위에는 사람이 많았다. 가족과 친구들, 그 외 수많은 사람들.
기본적으로 정이 많은 성격인 예준은 그들을 아꼈다. 하지만 제 형과 그 애인처럼 세상에 둘도 없는 듯 누군가와 깊게 사랑해 본 적은 없었다.
그러니 둘을 볼 때마다 신기함과 동시에 사랑이라는 감정을 곱씹어 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대체 어떤 기분이길래 저렇게 좋아 죽는 걸까, 하고.
그 느낌을 조금이나마 체감하게 된 건, 스물세 살의 어느 겨울이었다. 흰 눈이 도시를 죄 덮어 버릴 기세로 펑펑 내리던 날, 한기에 신발 속 발까지 얼어붙을 것 같던 추운 밤이었다.
예준은 일하는 곳인 바에 바로 들어가는 대신 건물들 사이로 걸어갔다. 잠시 후,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건 희멀건 담배 연기였다. 물처럼 말갛던 얼굴에 쓴웃음이 올라왔다.
‘좋아, 다 좋은데 말이야.’
머릿속에 떠오른 사람은 예준의 동기였다. 전공인 클래식뿐 아니라 여러 장르에도 도전하는 예준을 좋아하며 살뜰히 도와주는 친구이기도 했다. 어느 드라마 OST 공모전에 내기 위한 곡을 살펴 주며 동기는 복잡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음, 여기 적혀 있잖아? 사랑에 어울리는 재즈 스타일의 OST를 작곡해 주세요.’
예준은 본론을 말해 달라고 부탁했다. 침묵하던 동기는 공모전 포스터에 펜을 갖다 대었다. 곧 ‘사랑’ 아래에 ‘X’자가 그어지게 되었고 그것을 바라본 예준은 실소를 흘렸다. 화가 나지 않을 정도로 정확한 지적이었다.
담배를 입에 물며 눈을 가늘게 떴다. 마음속의 또 다른 예준은 솔직담백하게 제 상태를 고백했다.
‘어렵네.’
손조차 대기 힘든 퍼즐을 마주한 기분이었다. 사랑에 어울리는 곡이라. 어떤 느낌으로 시작해야 할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예준은 자신이 연애는커녕, 누군가를 눈여겨본 적도 없었음을 새삼 자각했다.
어두컴컴한 어둠 위로 다시 연기를 흘리며 눈을 감았다. 뺨에 달라붙는 바람은 차고 건조했다. 예준은 형을 볼 때마다 들었던 질문을 다시 꺼냈다.
‘사랑이 뭔데.’
답을 찾을 수 없는 질문을 곱씹고 있자니 맥이 탁 풀렸다. 혼자 서서 머리를 굴려 봤자 뭐가 달라지는가. 책을 읽든, 드라마를 보든. 아니면 주위 커플들에게 질문이라도 해야겠다.
다른 공모전을 도전해 보는 게 어떨까, 하는 유혹이 서렸지만 금방 마음을 잡았다. 모르겠다고 포기하는 건 매사 열심히 살아온 예준의 성미에 맞지 않았다.
다시 눈을 뜨며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손바닥 안으로 포켓이 금방 잡혀 들었다. 이만 정리하고 자리를 뜨기로 결론을 내렸다. 아직 벌건 불이 붙어 있는 담배로 시선을 두었을 때였다.
피로함과 심란함이 깃든 뺨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달라붙었다.
“……담배만 버렸군.”
색소 옅은 눈동자에 빛이 돌았다. 건조한 중얼거림은 꼭 자신이 한 말 같았다.
예준은 고개만 돌려 음성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사람은, 순간적으로 눈이 커질 만큼의 미남자였다.
꿈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남자는 이 어둡고 더러운 공간과 어울리지 않는 외양을 하고 있었다. 곧은 등과 긴 다리를 돋보이게 하는 옷차림은 한눈에 봐도 값비싼 것들이었다.
함부로 대하기 힘든 느낌을 주는 건 옷뿐만이 아니었다. 예준은 숨조차 죽인 채 낯선 이의 옆얼굴을 관찰했다.
창문과 간판, 그리고 크고 작은 조명에서 흘러나오는 빛깔을 머금은 남자의 얼굴은 날카로운 분위기를 풍겼다. 새까만 머리카락에 쌍꺼풀 없이 올라간 눈매가 만든 느낌일 확률이 높았다. 아니면 힘을 주어 구겨진 굵은 눈썹과 일자형의 입매 때문일지도 모른다.
평소라면 금방 시선을 떼었을 텐데도, 예준은 관찰을 멈추지 못했다. 왜일까. 보기 좋게 넘긴 머리카락이 바람에 조금 헝클어져서? 아니면 목소리가 어쩐지 지쳐 있는 것처럼 느껴져서? 귀 아래 혈맥이 제멋대로 팔딱팔딱 뛰기 시작했다.
요란한 소리에 당황한 예준은 그제야 시선을 거두었다. 초면인 이를 진득하게 훑어 버렸다는 사실을 자각하자 열이 올랐다. 내가 왜 이러지. 입이 바짝 메마를 때였다. 긴장한 귓구멍으로 파고드는 건 남자의 발소리였다.
이만 자리를 뜨려는 신호에 예준이 한 행동은, 인기척을 내는 것이었다. 일부러 쌓인 눈을 밟으며 담배를 깊숙하게 들이마셨다. 급히 빨아들인 연기가 목구멍을 찔렀으나 기침을 눌러 참았다. 혼란스러워하는 와중에도 예준은 자신이 남자를 잡고 싶어 함을 알아차렸다.
‘왜.’
질문에 답을 찾을 시간도 없었다. 의외로 남자가 걸음을 멈춘 채 뚫어질 듯 응시했기 때문이었다. 제 뺨에 달라붙는 시선이 불처럼 뜨거웠다. 건조하게 생긴 외양과 달리 눈빛이 짙었다. 예준은 고개만 돌려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남자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당황하지 않는 예준에게 흥미를 느꼈다는 반응이었다.
“날이 춥네요.”
먼저 말을 건넨 건 예준이었다. 남자에게 호감을 불러일으키고 싶었다. 친한 사람들한테나 보이는 미소까지 곧잘 그린 건 그 때문이었다.
“……그래요.”
몇 초간의 침묵이 흘렀을까, 무시할 줄 알았던 남자는 의외로 대답을 해 주었다. 예준은 그의 검은 눈동자에 호기심이 섬광처럼 스쳐 지나갔음을 포착해 냈다. 어쩌면 상대는 자신과 똑같은 기분일지도 모르겠다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한눈에 보자마자 불꽃이 일었던 짜릿한 충격을, 저 사람 역시 느낀 게 아닐까.
……확인해 보자.
발을 움직여 불쑥 거리를 좁힌 건 그 때문이었다. 경계나 어색함 같은 건 조금도 없었다.
홀린 채 걸어가며 예준은 웃음을 삼켰다. 꼭 불꽃을 마주한 나방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뜨거운 빛에 날개가 타들어 가든 말든, 무작정 돌진하는 나방.
예준은 그런 제 상태가 재미있었다. ‘사랑’에 대한 고심이나 어려움 같은 건 다 잊을 만큼.
“네. 담배 피우기 좋은 날씨는 아니죠.”
가까이 다가간 예준은 입꼬리를 더 당겨 올렸다. 자신이 상대방의 외양에 시선을 떼지 못하는 만큼, 그 역시 자신을 좋게 봐 주길 기대하며.
남자는 그런 예준을 꼭 신기한 물건이라도 되는 듯 가만히 바라보았다. 대놓고 남의 얼굴을 구석구석 훑는 모양새는 누가 봐도 무례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그것조차 꽤 매력적일 만큼, 남자는 독톡한 분위기가 있었다.
예준은 뺨에서 턱으로 떨어지는 제 선을 어루만지는 시선 속에서 눈을 빛냈다. 재미가 점점 더 짙어지고 있었다.
즐거움을 느낀 건 예준만이 아녔던 모양이었다. 묘한 열기가 서린 공기 속에서 남자는 귀엽다는 표정을 대놓고 지었다. 우아하며 여유가 풍기는 모습에 이유 없이 팔꿈치가 저릿저릿했다.
갑자기 남자가 시선을 고정한 채 연기를 뿜었다.
“……콜록.”
“이런.”
매캐한 연기에 기침하는 순간, 남자가 돌연 예준의 손을 움켜잡았다. 놀란 것도 잠시, 열이 머리 꼭대기까지 치받쳤다. 엄지를 세워 피부를 쓰다듬는 상대의 스킨십에는 성적인 의도가 노골적으로 서려 있었다.
쿵, 쿵, 쿵
숨이 거칠어지고 가슴이 터질 듯이 부풀었다. 귓바퀴가 홧홧하게 달아오름과 동시에 상대와 눈을 마주했다. 그는 나른하게 접히는 눈매를 보인 채로 살짝 웃었다. 어린애 보듯 응시하는 눈빛에는 깔보는 느낌이 없지 않아 담겼다.
“뭐, 하신 거예요?”
“손잡았는데.”
이미 손은 놓은 지 오래였지만 감촉만은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 제 피부 이곳저곳을 누르고, 쓰다듬고, 살살 비비던 느낌이 아직도 생생했다.
머릿속이 거품처럼 부글부글 끓는 동안 남자는 먼저 자리를 떴다. 코트 자락을 휘날리며 느릿하게 걷는 남자의 뒤를 예준은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야릇한 흥분이 정전기처럼 일었다. 불현듯 그는 어느새 제 다리 사이가 딱딱하게 굳어 있음을 깨달았다. 가뜩이나 발갛던 귓바퀴의 색깔이 더욱 짙어졌다.
“……미쳤지.”
바람에 헝클어진 머리를 한 채로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방금 있었던 일이 꼭 꿈처럼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초면인 남자와 주고받았던 시선, 대화, 터치, 공기. 그 모든 것들이 온몸 구석구석을 콕콕, 자극했다.
자신도 모르게 숨을 뱉던 예준은 그 끄트머리가 살짝 떨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짧은 시간에 이만큼 동요한 스스로가 낯설었다.
홀로 머무적대던 예준은 결국 주위만 뱅뱅 맴도는 수밖에 없었다. 귓등에 달라붙은 열기가 사라지지 않아서, 그리고 발기한 성기가 원 상태로 돌아오지 않아서였다.
* * *
잠시 후, 예준은 상기된 얼굴을 감추지 않은 채 속으로 웃었다.
‘말도 안 돼.’
가까스로 몸과 마음을 가다듬은 뒤에야 바 안으로 들어섰다. 문을 열며 예준은 좀 전의 일을 너무 곱씹지 말자고 결론지었다.
우연히 만난 남자는 정신이 아찔해질 만큼 매력적이었으나, 이미 바람처럼 사라진 직후였다. 전류처럼 찌르르한 감각을 두 번 겪지 못할 바에야 빨리 잊는 게 옳다고 여겼다.
그렇게 기껏 생각을 정리했건만, 아르바이트를 하는 장소에 의외의 인물이 있었다.
바글바글하게 모여 있는 손님들 가운데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남자. 홀로 가라앉은 느낌을 풍기고 있는, 청회색 분위기에 시선이 가지 않을 수가 없는 남자. 놀리듯 제 손을 만지작댔던 그 사람이었다.
가슴이 전에 없이 세차게 뛰었다. 머리가 울릴 정도로 쿵쿵, 뛰는 심장 소리를 들으며 예준은 기뻐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내가 일하는 곳의 손님이라니. 이런 우연이 있을까.
“안녕하세요.”
인사를 건네자 남자의 시선이 예준에게로 꽂혔다. 묘하게 지쳐 보이던 얼굴에 놀란 기색이 떴다. 그 역시 함께 맞담배를 피운 아이를 다시 만날 줄은 몰랐다는 반응이었다. 허물어지는 표정에 희열이 더해졌다.
* * *
옷을 갈아입을 때도, 피아노를 칠 때도 모든 신경이 그에게 쏠렸다. 그러는 동안 남자는 계속해서 와인을 마셨다. 덤덤해 보이는 얼굴이었으나 연신 그를 관찰했던 예준의 눈에는 취한 기색이 쉽게 읽혔다.
풀린 눈빛, 점차 숨기지 못하는 피로감, 비스듬하게 기울여진 고개.
저러다 쓰러지겠다 싶어 곁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본래 가지고 있는 다정함을 드러내었다.
“괜찮으세요?”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예준의 눈가가 잘게 꿈틀거렸다. 선량한 의도로 말을 붙였건만, 불그스름해진 뺨을 보자마자 성욕이 불쑥 올라왔다. 새삼 그와 손을 잡은 이후 딱딱하게 발기했던 제 성기가 떠오르고 말았다.
저 얼굴을 붙잡아 보고 싶다는 충동과 함께 자책이 들었다. 취한 사람의 상태를 살피기는커녕, 만지고 싶다는 생각에나 사로잡혀 있다니. 나름대로 도덕적으로 살아왔다 자신했던 인생이 어그러지는 순간이었다.
손을 움직여 물이 담긴 잔을 내밀었다. 남자는 여전히 시선을 고정한 채 그를 말끄러미 응시하고 있었다. 얼굴을 훑는 시선은 지나치게 진득하며 지나치게 뜨거웠다. 억누르려 노력했던 감정을 모조리 들킨 기분이었다.
“한 곡 더 연주해야 해요. 제가 챙겨 드릴 수 없단 말이에요.”
상대의 검은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그쪽이, 날 챙긴다고?”
무섭게 생긴 얼굴과 달리 말씨만큼은 꽤 나긋했다. 예준은 취기에 부드러워진 게 분명하다고 확신했다. 처음 마주쳤을 때만 해도 함부로 대하기 힘든 위화감이 존재했으니까. 그 순간과 비교해 보면 지금의 남자는 경계심을 어느 정도 누그러뜨린 것 같았다.
……꽤 기분 좋은 일이다.
“……좋아하는 곡 있으세요?”
들뜬 나머지 예준은 자신도 모르게 제안했다. 살며시 묻는 목소리는 제 귀로 듣기에도 호의가 가득했다. 이 초면인 남성에게 걷잡을 수 없이 끌려 하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서로 다른 극의 자석처럼 달라붙고 싶어 하는 자신을 느낀 예준은 헛웃음을 삼켰다.
“……음악에 대해 잘 아는 건 아니라서.”
그러면서 남자는 한 손으로 뺨을 괴고는 고개를 비스듬하게 기울였다. 지나치게 잘생긴 얼굴에 은은한 미소가 감돌았다.
“그래도 괜찮다면 피아졸라, <겨울>로.”
본인과 잘 어울리는 선곡이었다. 동그랗게 변한 예준의 눈동자에 밝은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겨울>.”
“할 수 있어요?”
손끝을 타고 올라오는 뜨거움의 이름은 열망이었다. 당장 자리에 앉아 피아노를 치고픈 기분이 영혼을 뒤흔들었다. 이토록 강렬한 이끌림을 받아 본 적은 태어나 처음이었다.
예준은 여전히 취기가 서려 있는 남자의 얼굴을 꼼꼼하게 살핀 뒤 피아노를 향해 걸어갔다. 한 음을 조심스럽게 눌러 보자마자 입꼬리가 저절로 호선을 그었다.
예준은 곡을 신청한 남자의 얼굴을 떠올리며 연주를 시작했다. 차가운 느낌을 주는 눈매와 흰 피부는 겨울을 닮았다. 머릿속에 그리는 것만으로도 손가락 끝이 간지러워진다. 시린 분위기를 만들어 내려던 연주에 열기가 더해져 가는 건 그 때문이었다.
밑으로 내리깐 예준의 긴 속눈썹이 꿈틀거렸다. 어느새 겨울이 아닌 물기가 흥건하게 배인 여름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잘못 그려 냈다고 생각하면서도 움직임을 멈출 수가 없었다.
상대가 제 손을 누르던 감촉이, 얼굴 구석구석을 훑던 시선이 모두 생각난 탓이었다. 볼이 붉게 익어 가기 시작했다.
‘아.’
이렇게까지 깊이 몰두해 본 적이 있었던가. 자신이 만든 음악에 눌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귓구멍을 파고드는 음이 어쩐지 야릇하다고 생각하며 눈을 떴다. 갈색 눈동자가 향한 곳은 다름 아닌 그 남자였다.
남자는 긴 다리를 꼰 채 예준만을 말끄러미 응시하고 있었다. 시선은 예준의 얼굴과 목, 그리고 어깨에서 가슴으로 떨어지는 선을 집요하게 훑어 댔다. 순간 현기증이 일 정도로 강렬한 느낌이 가슴을 세차게 두드려 대었다.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은 느낌 속에서 예준은 건반 쪽으로 다시 시선을 떨어뜨렸다. 느닷없이 웃음이 올라왔다. 상대가 자신만을 빤히 응시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체온이 한층 올라갔다.
뭐, 첫눈에 반하기라도 한 건가?
장난스레 생각해 보았지만, 의외로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기 힘들었다. 오히려 ‘반하다’라는 말이 가슴에 남아 계속해서 맴돌기까지 했다. 눈동자에 깨달음의 빛이 파도처럼 일렁거렸다.
아무래도 그런가 보다. 겨울을 닮은 저 남자에게, 초면에 얼굴에다 담배 연기를 내뿜고 성적인 희롱을 건네던 저 사람에게, 아무래도 자신은 푹 빠져 버린 모양인가 보다.
예준은 여전히 입꼬리를 올린 채 눈을 감았다. 의외로 부정하고픈 마음은 그다지 들지 않았다. 그저 제 가슴을 잔잔하게 적시는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 낼 뿐이었다. 사랑이 무엇인지 내심 궁금해했으니, 이참에 조금이나마 알아보자고 생각을 하며.
상대가 알면 미친놈이라고 질색할 게 분명했다.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반했다는 생각이나 하냐면서.
그렇기에 예준은 남자의 심기를 긁는 대신, 피아노 연주에 제 감정을 담아내기로 했다. 여름의 찬란함을 계속 만들며 예준은 실소를 흘렸다. 입가에 뜬 미소에는, 이제 숨기지 않기로 한 진득함이 더해졌다.
* * *
예준은 그때의 일을 회상하며 낮게 웃었다. 과거의 감각이 벼락처럼 환기되어 몸을 울렸다. 그 남자, 백시후를 만났을 때 받았던 강렬함이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었다.
이게 사랑인 걸까? 사과를 깎던 과도를 잠시 멈춘 채 생각에 잠겼다. 더 세찬 속도로 심장이 덜컹거렸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곱씹어 보는 것만으로도 몸이 반응하고 있었다.
바람 빠진 듯한 소리를 내며 예준은 고개를 수그렸다. 부드러운 갈색빛 머리카락이 이마 위에서 살랑거렸다. 자신의 ‘사랑’은 다른 이들과 달리 음험하고 위험한 느낌을 풍긴다. 온전히 독차지하고 지배하여 깔고픈 욕정이 함께하기 때문이었다.
그래, 자신은 시후를 욕정하고 있다. 할 수만 있다면 그를 누르며 그의 몸 안에 제 성기를 집어넣고 싶다. 꽉 조여 대는 구멍을 억지로 벌리며 서로 연결되고 싶다. 그렇게 세상 잘난 남자를 멋대로 깔아뭉개며 소유하고픈 열망이 강하게 솟구쳤다.
예준은 이 검은빛 감정이 자신이 단순히 알파가 되어서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우성 알파로서 갖는 지배욕이라고 보기엔, 진작부터 이러한 열망을 가슴속에 죽 품고 있었으니까.
‘형이 알면 가만 안 놔두겠지.’
처음부터 당신을 깔고 싶었다는 고백을 들으면 어떻게 반응할까. 머리나 멱살을 잡을지도 모른다. 그러고는 건방지다며 특유의 조롱기가 다분한 미소를 그릴 것이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하반신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자신이 우위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그 얼굴은, 매번 성욕을 동하게 하는 매력이 있었다.
“하하.”
발정 난 짐승이 된 것 같은 기분에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런 예준의 등 뒤로 인기척이 느껴졌다. 어느새 시후가 바로 뒤에 붙어 서 있었다.
“아, 형.”
“뭐 해.”
읊조리는 목소리가 평소보다 느슨했다. 아침이 주는 나른함에 잠겨 있었던 모양이었다.
예준은 당신을 상상하며 발기했다는 대답은 하지 않기로 했다. 그에게 저급한 욕망을 풀고픈 마음보다는 예쁨받고자 하는 소망이 더 컸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이 타이밍에는 발랑 까진 모습을 보이는 것보다는 순수한 느낌을 내비치는 게 맞을 것이다. 자신의 감을 믿으며 예준은 백시후가 좋아하는 눈웃음을 그렸다.
“사과 깎아요.”
“……사과도 깎을 줄 알아?”
“네, 부모님께 배워 놨거든요. 같이 먹어요, 아침에 먹는 사과가 몸에 좋대요.”
그러면서 예준은 슬쩍 장난스러운 음성을 내었다.
“건강 챙기셔야죠, 형.”
이 정도 개기는 건 귀엽게 봐준다는 걸 알기에 건넨 덧붙임이었다. 과연, 시후는 어이없다는 듯이 실소를 뱉었다.
“지금 알파 건강을 걱정해?”
“사람 일은 모르는 거잖아요.”
“웃긴 놈, 그러다 볼 꼬집히는 수가 있다.”
볼 꼬집히기라니. 덤덤한 듯해도 예뻐하는 티가 묻어나는 대꾸였다. 시후는 긴 팔을 뻗어서는 과일이 든 쟁반을 들었다.
“식탁에 갖다 놓으면 되지?”
“제가 할게요.”
“됐고. 너도 이만 과도 내려놔. 아침부터 혼자 무슨 고생이야.”
무뚝뚝하게 거절한 시후는 곧 식탁 위에 쟁반을 내려놓았다. 달그락, 달그락. 고요한 정적 속에서 찻잔을 내려놓는 소리만이 울렸다.
지켜보던 예준의 눈꼬리가 반달 모양으로 휘어졌다. 제 공간 안에 시후가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레 기뻤다.
한때 이름조차 알려 주지 않으려 했던 사람이, 지금은 익숙하게 제집에서 찻잔을 내려놓고 있다. 예전에는 상상도 못 했던 일이었다. 시후의 옆얼굴에 서려 있는 편안함을 발견하자 벌써 차를 마신 듯 마음이 훈훈해졌다.
“또 웃네.”
시후는 무심한 목소리를 내었다. 그러나 연붉은 입술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는 걸 예준은 바로 알아차렸다.
“좋아서요.”
마치 기다렸다는 듯 바로 대답했다. 간질간질한 느낌이 혀 위에서 맴돌았다. 참을 수 없어 한마디를 더 했다.
“형이 좋아서.”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고 싶었는데, 잘 되질 않았다. 예준은 제 입에서 나온 말을 제 귀로 듣는 순간 떨려 하는 티를 냈음을 바로 감지했다. 멋쩍음에 목덜미 부근이 달아올랐다.
그런 예준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시후는 사과를 베어 물었다. ‘사각’ 하는 소리가 남과 동시에 붉은 입술이 촉촉하게 젖어 들어갔다.
“왜 내가 좋은데?”
사과 한 조각을 다 먹은 후에야 시후는 질문을 꺼냈다. 의외의 물음에 예준은 눈을 크게 떴다. 생각도 못 했다는 반응을 보이자 시후는 비스듬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샤워한 후 내렸던 앞 머리카락이 이마 위로 흩어졌다.
“궁금해지더라고. 나이 많은 사람 뭐 하러 이렇게까지 좋아하나, 싶어서.”
“형 나이 안 많잖아요.”
“너에 비하면 많지. 스물네 살이잖아, 너.”
“얼마 차이 안 나네요.”
뻔뻔하게 받아치자 시후는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소리를 내었다.
“그래서 왜 좋아하는데. 속궁합 잘 맞아서?”
“…….”
“잘생겨서?”
나긋나긋한 어조에는 상대가 당황하기를 바라는 은근한 기미가 풍겼다. 시후가 능글맞은 면을 보일 때마다 예준은 새삼스레 놀랐다. 바위처럼 딱딱해 보이는 외양과는 퍽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기 때문이었다.
“한번 날 잡아서 발표해도 돼요?”
놀라움은 곧 즐거움으로 바뀌었다. 예준은 시후가 장난칠 때마다 한술 더 뜨고픈 열망에 사로잡히곤 했다. 마치 지금처럼.
“뭐, 피피티라도 만드시게?”
“그래도 될까요?”
“……진짜로 할 애라서 뭐라고 말을 못 하겠다.”
“할 말이 많아서 그래요, 왜 형을 좋아하는지.”
“많다고?”
“네.”
당장 생각나는 이유만 해도 여러 개였다. 형을 보고 있으면 따뜻한 감정이 퐁퐁 솟아오른다. 그 감정을 연주에 담으면 자신이 들어도 만족스러울 만큼 좋은 결과물이 만들어진다.
거기다 단순히 영감을 줘서 애정을 느끼는 것만이 아니다. 짜증 난 척, 귀찮은 척 매정하게 굴다가도 꾸준하게 나를 살피는 당신의 섬세함이 좋다. 머리칼을 반듯하게 넘기고 멋지게 옷을 차려입은 모습도, 지금처럼 비누 향을 풍기며 느슨하게 풀려 있는 모습도 좋다.
낮고 고요한 목소리가, 푸르스름한 핏줄이 튀어나와 있는 흰 손등이, 의외로 성감대인 당신의 귀가 좋다.
예준의 입가에 미소가 떴다. 좋다. 시후 형이, 좋다.
“난 그런 애정 싫어.”
찬란한 빛깔의 감정이 더욱 짙어지기 직전, 시후가 막아섰다. 그는 검고 긴 속눈썹을 밑으로 내리떴다.
“무겁고 질척거리잖아. 질색이다.”
“…….”
“자중해, 유예준.”
푹.
포크의 날카로운 끝부분이 사과를 쑤셨다. 그것을 입에 물기 전 시후는 다시 예준을 바라보았다. 새까만 동공이 좌우로 미미하게 흔들렸다.
예준은 그의 동요를 이해했다. 그래서 그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그만 웃어 버리고 말았다.
“왜 웃지.”
묻는 그의 목소리에 의아해하는 기색이 옅게 묻어났다. 예준은 바로 대답하는 대신 제 포크를 들어 배를 찍었다.
“배도 먹어 봐요, 꽤 달아요.”
“왜 웃냐니까.”
“기쁘니까 웃죠.”
예준은 받으라는 듯 포크를 앞으로 내밀었다. 형광등 불빛에 반사된 배가 탐스럽게 번들거렸다. 그런데도 시후는 그게 꼭 독이 든 과일이라도 되는 듯 인상만 구겼다.
“두 달 전만 해도 형 안 이랬어요. 애인 행세 하지 말라고 짜증 냈지.”
“……지금도 마찬가진데. 자중하라고 했잖아.”
“짜증이 없잖아요, 목소리에. 거기다 왜 좋아하냐고 묻기까지 하고.”
예준의 지적에 시후의 눈 부근이 꿈틀거렸다. 당황한 것 같기도, 어이없어하는 것 같기도 한 반응이었다.
“장족의 발전이라고 생각해요, 이 정도면. 기뻐요.”
속삭이듯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정적을 울렸다.
“형이 날 어디까지 받아 줄지 궁금해지거든요.”
“사람 웃기는 방법도 가지가지다.”
시후가 입꼬릴 당기며 시니컬한 말씨를 사용했다. 비스듬하게 올라간 입매에 약간의 아쉬움을 느끼려던 찰나, 예준은 제 눈에 힘을 주었다. 상대의 귓바퀴가 붉게 달아올랐음을 발견하는 순간 걷잡을 수 없는 열기가 솟구쳤다.
‘거봐요, 형.’
갈색 눈동자가 샛별처럼 반짝였다. 그 빛의 이름은 희망이었다.
‘장족의 발전 맞잖아요.’
내 고백에 형이 귀를 붉히는 날이 다 오다니. 더 세찬 속도로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희열이 풍선껌처럼 둥글게 부풀어 오름을 느끼며 예준이 상체를 내밀었다. 그 모습에 맞은편에 있던 시후가 양미간을 좁혔다. 경계 어린 태도에도 예준은 싱글싱글 웃었다.
“시후 형, 오늘 주말이잖아요.”
“……그런데?”
“나랑 같이 있어요, 계속”
그러면서 배를 찍은 포크를 가볍게 좌우로 흔들었다. 시후는 그것을 받는 대신 실소를 뱉었다.
“이미 밤새 같이 있었잖아. 그래도 부족해?”
“부족하죠. 형 좋아한다니까요. 좋아하는 사람과 계속 같이 있고 싶은 건 당연한 거죠.”
“…….”
시후는 말문이 막힌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성격 나쁜 미소를 그리던 입꼬리가 일직선으로 내려앉았다. 이렇게까지 유예준이 적극적으로 들이댈 줄은 몰랐다는 반응이었다.
예준은 아직도 그의 귓불이 불그스름하다는 사실을 살피며 다정하게 물었다.
“포크 좀 받아 주면 안 돼요?”
“무거우면 내려놔.”
“아, 혹시 한 손으로 줘서 그런 거예요?”
“뭐?” 하고 묻는 시후의 반문을 못 들은 척하며 예준은 다른 손을 들었다. 그러고는 두 손으로 포크를 쥐며 공손하게 내밀었다. “드세요”라고 정중하게 말하자마자 시후의 눈꼬리가 올라갔다.
“죽을래?”
“아하하.”
“한 번만 더 까불면 이대로 나갈…….”
“알았어요, 안 그럴게요.”
포크를 받는 시후의 손 위로 슬그머니 예준이 제 손가락을 갖다 대었다. 손가락 아래 꿈틀거리는 상대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안 그럴 테니까, 같이 있어 줘요.”
“…….”
“시후 형, 응?”
맞닿은 상대의 체온이 올라갔다는 생각이 드는 건, 그저 착각인 걸까.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하려던 찰나, 시후가 포크를 쥐며 손을 뒤로 빼었다. 눈썹을 구기며 미소 짓는 모습에 예준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자기 얼굴 예쁜 걸 알아, 유예준.”
객관적으로 봐도 예준의 얼굴은 예쁨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데도 이런 말을 하는 건 시후가 꽤 좋게 봐주고 있다는 걸 뜻했다. 그 사실을 알기에 예준은 부정하거나 민망해하는 대신 자리에서 태연하게 일어났다.
예준은 맞은편에 있던 시후 쪽으로 걸어갔다. 시후는 배 조각을 베어 물며 고개를 올렸다. 날렵한 선을 자랑하던 뺨이 지금은 볼록하게 변해 있었다.
이따금 보이는 그의 풀어진 모습을, 예준은 참을 수 없었다. 허리를 수그리며 그 뺨에 입술을 갖다 댄 건 그 때문이었다.
쪽.
가볍게 소리를 내며 입술을 떼었다. 시후는 눈을 부릅뜬 채로 가만히 굳어 있었다. 그가 상황 파악을 하기 직전, 예준은 다시 고개를 숙였다. 이번에는 시후의 입술에 제 입술을 포갰다. 보드랍게 겹쳐지자 과일의 달콤한 맛이 혀끝을 적셨다.
기분 좋은 단맛에 웃음이 올라왔다. 예준은 청량하게 웃어 대는 대신, 두 손으로 그의 뺨을 잡고는 두 번 더 뽀뽀했다. 쪽, 쪽.
“……콜록, 큼.”
몸을 떼자마자 시후가 돌연 기침을 해 댔다. 헛기침을 하는 그는 이상하게도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고 있었다. 인상을 팍 쓴 얼굴은 험악했으나, 예준은 그의 귓바퀴가 붉어져 있음을 알기에 겁나지 않았다.
“형 참 이상해요. 섹스는 곧잘 하면서 뽀뽀는 부끄러워요?”
‘섹스’라는 단어를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을 수 있게 된 건 전부 백시후 때문이었다. 귀티 나는 모습과 달리 그는 저속한 단어를 툭툭 꺼내며 예준을 당혹스럽게 만들곤 했다. 섹스니, 좆이니, 뒷구멍이니. 바른 생활을 해 왔던 유예준으로서는 하나같이 낯설기 짝이 없는 것들이었다.
물론 낯설어했던 것도 이제 다 과거의 일이다. 지금의 예준은 시후만큼이나 꽤 저질스럽게 말할 줄 알게 되었다. 무릎을 구부리며 괜히 한마디를 더 했다.
“혀를 빤 것도 아닌데 왜 그래요.”
“차라리 혀를 빨아라.”
“정말요?”
시후는 빠르게 평정심을 되찾았다. 흐트러진 모습을 순식간에 지우고는 느긋한 표정을 그렸다.
“예준아.”
부르는 음성이 친절했다.
“빠는 거 너무 좋아하는 티 내지 마라. 자꾸 그러면 형 후장 빨게 만드는 수가 있어.”
예준은 난처해하지 않았다.
“회음부도 빨아도 돼요?”
그 볼록하게 살찐 부근을 또다시 빨아 보고 싶어 침이 고였다. 예준은 농담으로 한 말이 아님을 증명하듯 혀를 내밀어 제 아랫입술을 핥았다. 그런 예준을 가만히 응시하던 시후는 긴 팔을 죽 뻗었다.
그는 예준의 목을 잡아채 제 다리 사이로 밀어 넣는 행동을 하진 않았다. 대신 무릎까지 구부리며 저와 시선을 맞추고 있던 아이의 뺨을 콱 잡아당길 뿐이었다. 예준이 양미간을 좁히자 귓바퀴에 웃음소리가 옅게 울렸다.
“까불지 마.”
나지막한 목소리가 놀랄 만큼 낮고 섹시했다. 시후는 의자에서 일어나더니 예준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렸다. 정전기가 일어난 머리카락이 나풀나풀 흔들렸다.
“산책하러 가자.”
“산책이요?”
“종일 같이 있자며. 여기에만 있긴 답답해.”
무뚝뚝한 말투지만 다정함이 묻어났다. 네 뜻대로 해 주겠다는 말에 희열이 척추를 타고 짜릿하게 올라왔다. 폭죽처럼 터지는 즐거움을 참지 못한 예준은 얼른 그의 뒤를 따라갔다.
“그렇게 해요! 형, 점퍼 빌려 드릴게요. 편하게 입고 나가요!”
졸졸 쫓아가자 시후의 어깨가 잘게 떨렸다. 슬쩍 옆얼굴을 본 예준은 상대가 입술을 살짝 깨물고 있음을 발견했다. 누가 보아도 웃음을 꾹 참고 있는 모습이었다.
‘……진짜 좋다.’
꾹꾹 압축된 표정을 참기가 힘들었다. 예준은 그의 옆에 찰싹 달라붙어서는 소리 나게 뽀뽀했다. 팔꿈치로 가슴이 찔렸으나 그조차도 행복했다.
* * *
3월 초의 날씨는 아직 쌀쌀했으나 바깥 공기 쐴 만한 정도는 되었다. 골목에 위치한 카페와 책방, 편집 숍을 둘러보던 예준은 곧 제 옆 사람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묵묵히 걸어가는 이는 평소와 퍽 다른 느낌을 내고 있었다. 헐렁한 점퍼나 얼굴을 반쯤 가린 모자 때문이었다. 그런 시후는 내로라하는 호텔의 대표이사님이 아닌 이 동네 사는 잘생긴 청년 같았다.
뭘 입어도 잘생겼다. 예준은 슬그머니 옆으로 몸을 붙였다. 두 사람의 어깨가 가볍게 맞물렸다가 떨어졌다. 찰나의 스침만으로도 만족한 예준은 소리 없이 미소 지었다. 그러자 생각에 잠긴 듯 앞만 보던 시후가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갑자기 생각났는데.”
“네, 말해요.”
“넥타이핀 살 돈은 어디서 났어.”
“저 아르바이트 하잖아요. 그리고…….”
예준은 다음 말에 반응할 시후를 기대했다.
“공모전 상금도 들어왔고요.”
시후는 눈을 댕그랗게 뜬다거나 입을 벌리는 식으로 놀라지는 않았다. 그런 풍부한 감정 표현은 그와 애당초 거리가 멀었다. 대신 현저하게 느려진 걸음으로 방금 발언에 대한 호기심을 드러냈다.
“공모전?”
“네, 드라마 OST예요.”
“방송 쪽에도 관심 있었군.”
“음악과 관련된 거면 거의 다 관심 있어요.”
예준은 농담처럼 덧붙였다.
“한 우물만 깊이 파야 하는데, 그런 끈기가 없죠. 자꾸 여러 방면을 얕게 파게 돼요.”
“얕게 파는 애가 공모전 당선까지 되나? 빈말로라도 스스로를 낮춰 말하지 마.”
“하하.”
실없이 웃자 시후는 가볍게 혀를 찼다. 어처구니없어하는 얼굴에는 안도하는 기색이 옅게 깔려 있었다. 유예준이 삽질할 성격은 아님을 새삼스레 깨달은 모양이었다.
“공모전 당선된 거, 다 형 덕분이에요.”
골목길을 따라 옆으로 방향을 옮겼다. 담장 너머로 산수유 가지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예준은 꽃봉오리 끝이 노르스름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제 며칠 있으면 노란 꽃을 피워 낼 것이라는 예감에 가슴이 설렜다.
‘봄이다.’
“꽤 골치 아팠거든요, 작업하는 내리. 감정이 제대로 담기지 않아서.”
주제가 사랑이었어요. 그 감정을, 전엔 겪어 본 적이 없었거든요. 형을 만나기 전만 해도 나에게 있어서 사랑은, 남의 이야기이기만 했어요.
“그러다 형을 만났어요. 처음 만난 날 기억나죠?”
“기억나지.”
시후가 입매를 비스듬히 올렸다.
“범생이 같은 얼굴을 한 주제에, 입에 담배 물고. 그게 꽤 꼴렸지.”
“나도 형한테 끌렸어요.”
“……끌린 게 아니라 꼴렸다고.”
“알았어요. 나도 형한테 꼴렸어요.”
“너 점점 나 닮아 가는 것 같다.”
“아하하.”
보조개가 보기 좋게 생겨났다.
“그날부터 감을 잡았죠. 어떤 느낌을 넣으면 되는지 알게 됐거든요.”
마지막 덧붙임을 속삭이기 전, 예준은 숨을 한 번 들이마셨다. 입 안으로 들어오는 초봄의 공기는 차가웠다. 그러나 얼마 있지 않아 따뜻하게 변할 걸 알기에, 그는 시린 공기를 그저 기쁘게만 받아들였다.
“제 뮤즈예요, 형은.”
때마침 정면으로 쏟아지는 햇살에 예준의 머리칼이 더 옅은 빛깔로 반짝였다. 햇빛을 머금은 예준의 얼굴 위로 시후의 시선이 닿았다. 그는 여러 감정이 뒤섞인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얼떨떨해하기도, 어색해하기도, 그러나 썩 나쁘지는 않다는 반응이었다.
“그래, 잘 떠받들도록 해.”
몇 초 후, 시후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목소리는 덤덤했다. 질색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만족한 예준은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너희 형이 네 말 들으면 기절하겠다. 우리 ‘아가’가 아저씨더러 뮤즈라고 하다니.”
‘아가’에만 악센트를 준 건 예준을 놀리기 위함이 분명했다. 얼굴 쪽으로 열이 쏠렸다. 큰형의 애칭을 시후의 목소리로 들으니 민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헛기침을 하자마자 시후가 한 번 더 놀렸다.
“아가야.”
“하지 마요.”
“연우 씨와 우리 동생이 결혼하면, 널 뭐라고 불러야 하는 거지? 사돈총각?”
시후는 걸음을 멈추더니 예준의 발치까지 가까이 다가갔다. 여차하면 입술이라도 포개질 정도로 코앞이었다.
“인생 모를 일이다. 사돈총각 될 사람한테 따먹히는 날이 다 있고.”
은은한 숨결이 뺨에 닿자마자 예준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아, 네가 그랬지. 내가 따먹힌 게 아니라 따먹은 거라고.”
“맞는 말이야” 하고 덧붙이는 부드럽고 사근사근한 속삭임이 예준의 귓구멍을 파고들었다.
“내 아랫구멍으로 네 자질 따먹은 거지.”
석고상처럼 적, 굳어 있던 예준은 뒤늦게 목소리를 높였다.
“왜 그래요, 갑자기!”
“이 정도는 놀려야 당황하는구나, 이제.”
성격 나쁜 사람. 예준은 발갛게 변한 뺨을 한 채로 양미간을 좁혔다. 그만하라는 눈빛을 던지자 시후는 만족스럽다는 듯 제 턱을 만졌다.
“예준아.”
“…….”
또 이상한 소리를 할 것 같아 예준은 입을 꾹 다물었다. 시후는 오른손으로 그런 예준의 어깨를 가볍게 도닥거렸다. 진정하라는 뜻이 담긴 손길이었다.
“곡 들려줘. 들어 보고 싶다.”
그 말에 부끄러움으로 굳어 있던 예준의 얼굴이 금방 풀어졌다. 마음 안에 촛불들이 들어선 듯 환해졌다. 관심을 받았다는 사실만으로 이렇게까지 들뜰 줄은 예전에는 미처 몰랐다.
“집에 가서 들려 드릴게요.”
시후는 고개를 까딱이곤 손을 내려놓았다. 먼저 걸음을 움직이는 뒷모습을 응시하며 예준은 제 어깨를 만지작대었다. 그의 손길이 닿은 곳이 저릿저릿했다.
햇빛에 옅은 갈색이 된 눈동자는 곧 시후의 손을 바라보았다. 마주 잡고 싶다는 열망이 영혼을 흔들었다. 잡아도 될까? ……안 되겠지. 상원 그룹의 자제님인 시후는 일반인이라고 볼 수 없었다. 그러니 남들 이목 끄는 행동은 최대한 자제하는 게 맞다.
아쉬움을 누르며 예준 역시 걸음을 움직였다. 집으로 돌아가면 손부터 잡아야겠다고 생각하며.
그때 시후가 갑자기 고개를 돌리더니 “흠” 하고 뜻 모를 소리를 내었다. 무언가를 말끄러미 응시하는 모습에 예준은 그의 시선을 쫓았다. 입술이 저절로 벌어지게 된 건 2초도 되지 않아 일어난 일이었다.
크고 투명한 유리창으로 이루어진 가게는 깔끔한 내부를 자랑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예준의 얼굴은 토마토처럼 발갛게 물들어 갔다. 간판에 박힌 단어 중 ‘성인용품’이라는 글자를 발견해서였다.
“아!”
자신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낸 예준이 시후의 눈을 손으로 가렸다. 가만히 감상하고 있었던 시후의 입꼬리가 꿈틀거렸다.
“…….”
“…….”
“뭐 해.”
눈앞이 아찔하다. 예쁘고 좋은 동네 풍경만 보여 주고 싶었던 계획이 망가졌다. 언제부터 생겼더라? 대체 언제. 기억을 되짚어 보았으나 성인용품점의 존재에 대해 떠오르는 기억은 없었다.
생각들이 마구 뒤엉켜 버렸을 때였다. 묵묵히 서 있던 시후가 입술을 움직였다.
“사돈총각, 이만 손 치우시죠.”
그 말에 예준은 머무적대다가 겨우 손을 밑으로 내렸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그와 달리 시후의 안색은 평소와 똑같았다. 오히려 웃기다는 듯 실소를 뱉으며 한마디 덧붙이기까지 했다.
“이렇게 보면 아가긴 아가군.”
“형은……. 아무렇지도 않아요?”
“새삼.”
“…….”
새삼이라고? 예준은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상자들을 눈으로 훑었다. 써 본 적이 있는 걸까. ……나하고는 한 번도 안 해 본 건데.
얼굴도 모르는 그의 옛 파트너들에게 또 질투심이 일었다. 이따금 시후가 경험이 많음을 깨달을 때마다 속이 뒤집힐 것 같았다. 와락 쑤시는 통증에 미간이 저절로 구겨질 때였다.
시후가 뜻밖의 제안을 건넸다.
“왜. 써 보고 싶어?”
“네?!”
반사적으로 그런 게 아니라고 말하려던 찰나, 예준은 급히 입을 닫았다. 흔들리던 눈동자가 차분해지며 묘한 빛이 서리기 시작했다.
“……써 보고 싶다면, 해 줄 거예요?”
도발적인 발언에 시후는 눈을 크게 뜨더니 금방 재미있다는 표정을 그렸다. 그는 “흐음” 하고 중얼거리며 팔짱을 꼈다. 가게를 가만히 바라보는 옆얼굴에 예준의 심장이 빠른 속도로 뛰었다.
쿵, 쿵, 쿵.
긴장과 흥분으로 이루어진 시간이 흐를 때였다. 익사 직전의 사람처럼 숨이 턱끝까지 차오른 찰나, 시후는 그런 예준의 눈을 마주 응시했다. 호선을 그리는 입꼬리에는 허락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예준은 호흡하는 방법을 완전히 잊어버렸다.
* * *
재즈곡이 공간 전체를 가득 채웠다. 피아노의 부드러운 건반 소리, 깃털처럼 가볍게 치는 드럼, 그리고 피치카토 기법으로 피아노와 합을 맞추는 첼로 소리로 이루어진 음악이었다. 나긋나긋하면서도 진득한 점이 없잖아 있는 곡을 들으며 시후는 평을 내렸다.
“너무 야한 거 아닌가.”
“곡이 야해요?”
“……윽.”
“아니면…… 이거 말하는 거예요?”
속삭이듯 묻는 음성이 다정했다. 꼭 잠들기 직전의 사람을 대하듯 사근사근한 목소리였으나, 두 손만큼은 거칠게 움직이고 있었다. 투둑, 툭. 젤이 떨어져 번들번들하게 빛나는 것은 핑크색이었다.
예준은 그것을 들어 보이며 시후와 시선을 교환했다. 괜찮겠냐는 표정을 짓자 시후는 미간을 구긴 채 사납게 웃었다.
“흥분한 주제에 염려하는 척은.”
“……진심으로 염려하는 거예요.”
“아가님, 네 페로몬이나 지우고 말씀하시죠.”
내 페로몬이 어때서 그렇냐고 묻지 않았다. 모른 척 굴 수 없을 만큼 강한 페로몬이 온몸에서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것은 침대 등받이에 기대어 있는 시후의 피부에 진득하게 달라붙었다.
불쾌할 법한데도, 시후는 눈썹 하나 꿈틀거리지 않았다. 저 평온한 얼굴을 변화시키고 싶어 손끝이 간지러웠다.
“자꾸 아가라고 놀리는데.”
“읏.”
“그 아가한테 묶인 사람이 누구죠.”
말이 끝남과 동시에 예준은 손에 든 것을 시후의 안쪽 허벅지에 갖다 대었다. ‘부우웅’ 하고 소리를 내며 피부를 자극하는 그것은, 다름 아닌 바이브레이터였다.
동그란 성인용품의 소리에 뺨이 빨개진 건 시후가 아닌 예준이었다. 주도권을 쥐고 싶은데, 잘 되질 않는다. 손목이 묶인 시후의 다리 사이에 장난감을 갖다 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흥분이 지나치게 올라왔다.
쿡쿡대는 소리가 예준의 귓등을 긁었다. 시후가 고개를 옆으로 기울인 채로 붉은 입꼬리를 당겨 올리고 있었다. 여유 있는 모습에는 긴장한 기색이 조금도 없었다.
오만하다.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누구 아래 있어 본 적이 없는 듯, 우아하며 거만하다.
예준은 두 가지 감정이 거미줄처럼 교차하는 걸 느꼈다. 꺾고 싶은 충동과 우러러보고 싶은 끌림. 갈색 눈동자에 열기 서린 빛이 퍼져 나갔다.
스윽.
예준은 긴 속눈썹을 내리깔고는 손을 움직였다. 느릿한 동작에 시후는 더 해 보라는 듯 가랑이 사이를 벌렸다. 대리석처럼 새하얗고 매끈한 허벅지와 크고 두툼한 성기가 시야 안으로 들어왔다. 쌓이고 쌓였던 숨이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고, 미끄러져 내려가던 손은 마침내 성기에 닿았다.
“음.”
침대에 앉아 있던 엉덩이가 잘게 들썩거렸다. 약한 진동을 가진 바이브레이터는 위아래로 찬찬히 움직였다. 그럴 때마다 혈관이 툭툭 튀어나와 있던 성기가 꼿꼿하게 세워지기 시작했다. 흥분을 부추기기 위해 에그 모양의 것은 성기 이곳저곳을 집요하게 훑었다.
“후우…….”
시후가 허리를 둥글게 휘며 길게 숨을 토해 냈다. 수갑에 의해 묶인 손에 힘이 들어가며 무릎이 세워졌다.
바이브레이터는 끝을 세우더니 그대로 벌건 귀두를 눌렀다. 굴곡진 선을 따라 살살 움직일 때마다 요도구에서 맑은 액이 흘러나왔다.
찌걱, 찌걱.
야한 소리가 재즈 음악과 어우러지기 시작했다. 마치 이조차 같이 녹음된 듯, 꽤 조화로운 어울림이었다.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야해 예준의 목울대가 크게 꿈틀거렸다. 인내심을 발휘해 제 감정을 꾹꾹 내리누른 뒤 바이브레이터를 손바닥에 두었다. 그리고 그것이 밑으로 떨어지기 직전, 성기와 함께 그러쥐었다. 느닷없는 자극에 놀랐는지 시후가 날카로운 신음을 짧게 뱉었다.
“윽. 이런 건 어디서 배웠, 읍.”
낮게 읊조리는 입술 위로 예준이 제 입술을 갖다 댔다. 말랑한 살을 핥은 뒤 깊숙한 곳까지 혀를 밀어 넣었다. 혀에 닿는 모든 피부가 뜨겁고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예준은 ‘웅웅’ 하고 울리는 진동을 느끼며 고개를 옆으로 꺾었다. 각도가 바뀌며 서로의 혀가 익숙하게 섞여 들었다. 문대고 비빌 때마다 맑은 타액이 혀를 흠뻑 적셨다. 시후의 타액이 섞였을 것이라는 생각에 하반신이 묵직해졌다.
“하, 씹.”
날카로운 욕을 뱉은 건 시후가 아닌 예준이었다. 훅 치받쳐 오른 열기에 자신도 모르게 낸 소리였다. 미간을 구기자 시후의 흥미로워하는 시선이 입술에 달라붙었다.
“너 그럴 때마다 신기해. 욕 같은 건 못 하게 생겨 가지곤.”
“아, 미안해요. 듣기 싫어요?”
시후는 대답하는 대신 눈짓으로 제 중요 부위를 가리켰다. 크고 단단한 손에 잡혀 있는 성기는 한층 더 부풀어 올라 있었다. 흥분한 기색이 역력한 그것은 여차하면 러트라도 올 기세였다.
뜻을 읽은 예준은 말없이 미소 지었다. 화사해진 낯빛에 시후는 알겠냐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이어 그가 수갑으로 묶인 양손을 뻗으며 예준의 목을 끌어안았다. 맞붙은 상체가 비벼지며 쿵쿵, 뛰는 심장 소리가 울렸다. 예준은 빠르게 뛰는 맥박 소리가 상대의 것이기를 내심 바라며 손을 움직였다.
바이브레이터를 쥐지 않은 손가락은 척추를 따라 밑으로 내려갔다. 거미가 실을 자아내듯 느릿느릿한 손길은 엉덩이 골까지 만졌다가 다시 위로 향했다. 그렇게 위아래로 쓰다듬을 때마다 시후는 거칠게 숨을 토했다.
예준은 단정하게 깎은 손톱을 세워서는 시후의 살갗을 살살 긁었다. 예민해져 있었을 등허리가 크게 움찔거렸다.
상대의 반응에 만족해하며 예준은 그대로 체중을 실어 시후를 덮쳤다. 호흡을 정리하고 있던 시후는 인상을 쓰면서도 순순히 뒤로 넘어가 주었다.
침대 위로 널브러진 이의 이마에 입을 맞춘 뒤 예준은 손깍지를 꼈다. 느닷없는 행위가 의아했는지 시후의 눈이 가늘어졌다.
“집에 오자마자 하고 싶었거든요. 형하고 손잡기.”
“……유치하긴.”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시후는 손을 꽉 맞잡아 주었다. 고마움의 뜻을 담아 예준은 그의 손등에 키스를 건넸다. 그러는 동안 살기둥을 누르던 바이브레이터는 밑으로 내려가 음낭에 닿았다.
그것은 말랑한 살덩이를 가볍게 건드린 뒤 볼록하게 올라온 회음부를 문대었다. 젤과 쿠퍼액으로 젖은 둔덕을 쓰다듬을 때마다 아랫구멍이 연신 꿈틀거렸다.
꼭 먹고 싶다는 듯 움직이는 아래를 보며 예준의 눈 부근이 붉어졌다. 순간 눈앞이 아찔할 정도로 야한 광경이었다. 아무 말 못 하자 조롱기 어린 음색이 귓등을 건드렸다.
“왜 얼어붙었어, 새삼.”
“…….”
“이 물건들 고른 사람, 사돈총각이시잖아요.”
예준은 눈만 올려 시선을 마주했다. 눈을 치뜬 그와는 다르게 시후의 새까만 동공은 살짝 휘어져 있었다.
“취향 맞춰 주고 있잖아. 좋아하는 티 좀 내보지 그래.”
귀가 화끈거렸다. 성인용품 가게로 끌고 간 시후는 이렇게 말했다.
‘너 하고 싶은 거 다 골라.’
그 말에 예준은 한참을 머뭇대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고르면, 다 하게 해 줄 거냐고.
백시후는 대답하는 대신 지금과 같은 웃음을 그렸다. 그러고는 크고 단단한 손으로 예준의 목 뒤를 한 번 주물렀다가 떼었다.
왜 나만 이렇게 조급한 걸까. 묶인 사람도, 다리가 벌려진 사람도 전부 시후 형인데. 왜, 나만 안절부절못하는 건지.
불만과 오기로 범벅이 된 감정 속에서 바이브레이터가 밑으로 내려갔다. 분홍색 새알 모양의 것은 구멍 주름을 비집으며 삽입을 시도했다.
“윽.”
막무가내로 들이밀자 시후가 잇새 소리를 내었다. 예준은 못 들은 척하며 바이브레이터를 완전히 쑤셔 넣었다. 이어 지난밤의 정사로 살짝 부어 있던 주름 위로 젤을 흘렸다. 구멍에 힘이 들어가자 액체가 느릿하게 흘러내렸다.
응시하던 예준의 눈동자가 어느새 풀려 있었다. 안개처럼 뿌옇게 된 동공을 한 채로, 그는 침대에 두었던 다른 바이브레이터들을 집어 들었다. 진동을 울리고 있던 것들이 서로 부딪쳐 더 크게 울렸다.
‘작으니까 더 넣어도 되겠지.’
그런 예준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시후가 “잠깐” 하고 막아서려 했다. 하지만 예준은 그의 손가락들이 아래로 향하기 전 안으로 에그를 하나 더 밀어 넣었다. 이미 들어차 있던 것이 ‘지이잉!’ 하고 시끄러운 소리를 내었다. 마지막 것 역시 집어 들며 예준은 쉰 목소리를 내었다.
“걱정 마요, 형. 좋아하고 있으니까.”
좋아하는 티 좀 내보지 그러냐는 말에 대한 대답이었다.
“반항, 이야? 있는 대로 다 처넣, 고.”
순식간에 에그 세 개를 아랫입으로 먹게 된 시후의 목소리가 드문드문 끊겼다. 버거워하는 것 같았으나 예준은 알파 특유의 예민한 감각으로 그가 느끼고 있음을 쉽게 알아차렸다. 입매가 둥글게 휘어지면서 보조개를 만들어 냈다.
베타에서 알파로 바뀐 상태의 장점은, 전보다 백시후의 반응을 더 세세하게 알 수 있다는 것이었다.
예준은 바짝 서 있는 상대의 성기 아래로 손을 갖다 대었다. 그러고는 남들보다 길고 굵은 손가락을 구멍에 쑤셔 넣었다.
“읏!”
시후의 허리가 펄쩍 뛰었다. 움찔거리는 반응을 지켜보며 내벽 안을 휘저었다. 안에 있던 에그들이 달그락거리며 움직이는 것이 손끝으로 느껴졌다. 그것들을 더 깊숙하게 밀어 올리자 시후가 진저리를 치며 뒤로 완전히 누웠다.
“천천히, 해.”
날카로워진 목소리에 열기가 잔뜩 서려 있었다. 예준의 입가에 미소가 설핏 떴다 사라졌다. 그러고는 시후의 허벅지를 잡아 누르며 구멍 안에 넣어 둔 손가락으로 속살을 헤집어 대었다. 질걱, 질걱, 젖은 소리를 내는 점막은 마치 히트 사이클이 온 오메가 같았다.
목덜미가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걸 느끼며 예준은 손가락 두 개를 집어넣었다. 부풀어 있는 전립선을 문지르고, 뿌리까지 손가락을 쑤셔 넣기도 했다.
구멍에 힘이 콱 들어감과 동시에 삐져나와 있던 분홍색 선들이 흔들렸다. 꼬리 같은 모양새에 감상하던 예준의 좆이 딱딱하게 발기했다.
“하아.”
떨리는 숨을 뱉은 예준이 시후의 안쪽 허벅지에 입을 맞추었다. 보드라운 키스에 그의 살결이 꿈틀, 움직였다.
이렇게 박히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용케 톱만을 지향했다. 거기까지 생각에 미치자 희열이 활짝 피어났다. 형이 다른 이와 장난감으로 섹스를 해 봤을지언정, 아래에 넣는 건 처음일 것이다. 그 사실이 기뻐 온몸이 저릿해질 정도였다.
입술이 매끈한 선을 타고 안으로 미끄러지듯 들어갔다. 제 좆에 입술이 닿을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시후가 호흡을 멈추었다.
“틀려요.”
예준은 긴장으로 굳어진 허벅지에서 입술을 떼었다. 흐트러진 갈색 머리카락 아래 위치한 눈동자가 위험하게 번득이고 있었다.
“형 자지 안 빨 거예요.”
……이걸 지켜봐야 해서요.
“!”
시후의 어깨가 높게 치솟았다. 일그러진 얼굴이 벌겋게 익어 가더니 눈동자가 좌우로 흔들렸다.
어느새 예준은 허벅지를 누르던 손을 떼고 있었다. 침대 위를 더듬으며 움직이던 손가락은 마침내 바이브레이터의 버튼에 닿았다. 진동 세기를 조절하는 그것에 손가락을 댄 채로 예준은 최대 강으로 올려 버렸다.
“하……. 미친, 윽……!”
단번에 세기를 더한 장난감들이 시후의 안을 괴롭혔다. 내벽에 달라붙어서는 있는 대로 몸을 흔들어 대었다.
지이이잉! 지이잉!
제 손톱이 아릴 정도의 강한 진동에 예준은 길게 숨을 뱉었다. 내부를 보고픈 열망이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두 손가락을 가위처럼 죽 벌린 건 그 때문이었다.
진득한 소리와 함께 구멍이 벌어졌다. 안에 고여 있던 젤이 녹아 주르륵 흘러내렸다. 엉덩이를 타고 흐르는 액체를 응시하던 것도 잠시, 예준은 보고 싶었던 부위로 시선을 옮겼다.
언뜻 보이는 속살은 붉은색이었다. 강제로 확장된 내부가 꿈틀거리는 모습이 지나치게 야했다. 저 좁은 곳에 바이브레이터들이 세 개나 들어찼다는 사실이 새삼스레 흥분을 부추겼다.
방 안을 채우고 있던 음악이 어느새 멈춰 있었다. 고요한 정적 속에서 장난감들의 진동 소리만이 요란하게 울렸다.
수치 때문인지 쾌감 때문인지, 시후가 뭐라고 욕을 중얼대며 몸을 들썩거렸다. 아래를 감상하던 예준의 눈이 차차 위로 올라갔다. 훑듯이 올라간 시선이 향한 곳은 시후의 가슴이었다.
“아, 흑.”
짤막한 신음을 뱉는 시후는 허리를 둥글게 휘었다. 그에 맞춰 잘게 흔들리는 가슴이 알맞게 삶아 껍질을 벗겨 놓은 달걀처럼 새하얬다. 근육으로 이루어져 보기 좋게 부풀어 있는 가슴과 갈라진 골을 지켜보던 것도 잠시, 예준은 “아” 하고 탄성 비슷한 소리를 내었다.
그를 감탄하게 만든 건 시후의 유두였다. 연약한 구석이라곤 하나도 없는 얼굴과 달리 가슴에 달린 유두는 여린 분홍빛이었다.
저것을 만지면 어떻게 될까, 하는 호기심이 들었다. 그러자 다음으로 든 생각은, 백시후가 묶여 있다는 사실이었다. 절대 가슴을 만지게 해 주지 않던 남자, 이 자존심 세고 오만한 이의 손목이 결박되어 있다는 현실이 대담함을 끌어냈다.
예준은 그의 다리 사이로 몸을 완전히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백시후가 뭐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고개를 밑으로 수그렸다. 유두 위로 입술을 대자마자 전류같이 짜릿한 감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윽?!”
당황한 듯한 상대의 반응을 느끼며 예준은 길고 촘촘한 속눈썹을 밑으로 내리깔았다. 입술에 닿는 살덩이는 따뜻하고 보드라웠다.
환희 속에서 예준은 그것을 가볍게 지분거렸다. 삼키지 못한 숨이 시후의 피부 위로 내려앉았다. 끄트머리가 떨리는 신음이 예준의 귓등을 긁었다.
상대 역시 똑같이 달아올랐음을 알아차리자 애무는 더 농도 짙게 변해 갔다. 혀를 내밀어서는 유두를 가볍게 쓸었다. 살살 쓰다듬으니 말랑했던 것이 점차 딱딱해졌다.
예준은 다시 입을 벌려서는 유륜째 삼켰다. 입 안으로 들어오는 유두를 혀로 핥아 댈 때마다 시후가 허리를 비틀었다.
예상보다 더 격렬한 반응이었다. 예준의 머릿속에 느낌표 하나가 떴다.
‘설마.’
제 추측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가슴을 더 세게 빨아 보았다. 그러면서 슬쩍 체중을 실어 내리누르자 시후가 “으흑!” 하고 신음하며 무릎을 세웠다. 아랫배가 눌리면서 몸 안에 있던 바이브레이터들을 건드린 모양이었다.
예준은 봐주지 않고 계속 유두를 빨다가 놓았다. 옅은 분홍빛이었던 유두는 어느새 불그스름하게 익어 있었다.
발딱 선 살덩이를 보는 순간 난폭한 본능이 눈을 떴다. 한 손으로 가슴을 틀어쥐어서는 다시 유두에 입술을 갖다 대었다. 볼록하게 올라온 것을 짓씹자마자 시후가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예준의 이마를 밀었다.
“그만, 해.”
수갑의 쇳소리를 들으며 예준은 시선을 올렸다. 어느새 그의 입술은 타액으로 번들번들하게 젖어 있었다. 예준은 자신도 모르게 혀로 아랫입술을 축이며 시후의 얼굴을 살폈다.
꼼꼼하게 훑는 시선이 못마땅했는지 시후가 양미간을 좁혔다. 날카로운 표정에도 예준은 기죽지 않았다. 상기된 뺨과 일그러진 입매, 그리고 풀린 눈빛이 무얼 뜻하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예준은 아직 빨지 않았던 다른 가슴을 주무르며 입꼬리를 올렸다.
“형, 가슴 예민하네요. 성감대였나 봐요.”
“갑자기 깨물어 놓곤 기세등등하긴.”
“지금 아니면 언제 기세등등하겠어요. 형이 묶였을 때 하고 싶은 거 다 해야지.”
“하고 싶은 게 이거?”
“네.”
보란 듯이 예준은 근육으로 알맞게 부푼 가슴을 끌어모아 주물렀다. 그럴 때마다 시후의 잘생긴 얼굴에 여러 가지 감정의 빛이 빠르게 스쳤다.
“형 가슴 만지기. 계속 허락 안 해 줬었잖아요.”
“남자 젖 빨아 봤자 뭐가 좋다고.”
“……나도 그 단어 써도 돼요?”
“무슨 단어.”
예준의 눈꺼풀이 빠르게 깜빡였다. 잠시 후 읊조리는 목소리가 한결 낮아져 있었다.
“……젖, 이요.”
조용히 대답하자 시후가 입꼬리를 비스듬하게 올렸다. 위아래로 계속되는 자극에 숨이 거칠었지만, 평소의 성격 나쁜 웃음을 못 그릴 정도는 아녔던 모양이었다.
“얼굴 빨개졌네, 아가야.”
“익숙해지도록 노력할게요.”
그리 말한 예준은 시후가 뭐라고 대꾸하기 전, 아래로 고개를 수그렸다. 이어 그가 한 행동은 타액으로 촉촉해진 ‘젖’을 빠는 것이었다. 잔뜩 피가 몰려 붉게 익은 젖꼭지를 혀로 굴렸다. 그러다 젖은 소리를 내며 빠니 시후의 목이 뒤로 꺾였다.
상대의 흥분이 독처럼 전염되어 갔다. 예준은 한층 짙어진 눈빛을 보내며 손가락으로 남은 유두를 건드렸다. 손톱으로 긁어 대고, 꼬집어 올리기도 하는 동작이 집요했다. 불처럼 뜨거운 열기 속에서 예준은 유륜 주위를 잘근 깨물었다.
“윽……!”
여린 살갗에 잇자국이 금방 생겨났다. 시후는 수갑으로 묶인 양손을 위로 들어 올렸다. 천장을 향해 주먹을 쥐었다, 폈다 반복하는 손가락들이 미미하게 떨고 있었다.
“밑, 세기라도, 줄여……!”
“싫어요.”
산뜻하게 답한 예준은 곧바로 시후의 가슴 위로 올라탔다. ‘툭’ 하고 소리 내며 가슴골에 얹어진 건 예준의 성기였다. 핏줄이 사납게 돋아나 있는 좆은 이미 번들번들하게 젖어 있었다.
“슬슬 괜히 묶여 줬다, 싶은데.”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도 있잖아요. 형도 즐겨 봐요.”
“그게 이럴 때, 후, 쓰는 말인가. 세기 좀 윽, 줄이라니까.”
턱을 치켜들며 시후는 눈을 꽉 감았다. 찌푸려진 눈매에 서린 붉은빛이 예술적이었다.
그 누구도 백시후의 저런 얼굴을 보지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예준의 가슴을 찔러 왔다. 다리 사이의 것이 저릿해질 정도로 강렬한 희열이 치받쳤다. 예준은 분수처럼 터지는 감정을 말로 표현하는 대신 하반신을 움직였다.
젖은 살이 달라붙었다가 떨어지는 소리 속에서 시후가 눈을 내리떴다. 그의 가슴골 사이에 얹어진 성기가 느릿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굵직한 살덩이가 피부를 쓸고 지나가기를 반복하자 시후의 입술 사이로 바람 빠지는 듯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하.”
그가 웃느라 내는 진동이 예준의 성기를 타고 전해졌다. 짜릿한 자극에 모든 신경이 아래로 훅 쏠렸다.
한층 민감해진 예준은 시후의 몸 아래 울리는 심장 맥박 또한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쿵쿵, 빠르게 뛰는 소리마저 야해 숨이 거칠어졌다.
예준은 제 머리를 한 번 거칠게 헤집고는 좆질을 이어 나갔다. 보기 좋게 갈라져 있던 가슴골이 빠르게 젖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게 제 쿠퍼액이라는 사실에 머릿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스윽, 슥!
가슴 사이를 비비던 성기가 점차 옆으로 각도를 바꾸었다. 시후는 여전히 인상을 쓴 채로 허리만 들썩였다. 정말로 가슴이 성감대가 맞는지, 예준이 조금만 움직여도 뚜렷한 반응을 보였다.
예준은 그런 시후의 표정을 살피며 제 성기 기둥을 한 손으로 쥐었다. 그런 채로 이어 간 행동은, 귀두를 볼록한 유두 위에 갖다 대는 것이었다.
몇 번이고 씹히고 빨렸던 유두는 선홍빛을 유지하고 있었다. 퉁퉁 부은 그곳을 문질러 대자 시후의 몸이 크게 꿈틀거렸다. 누가 봐도 한창 느끼고 있는 반응에 예준은 웃음을 삼켰다.
꾸욱.
귀두로 꾹 누르자 유두가 안으로 살짝 들어갔다. 파묻힌 살덩이의 딱딱함을 즐기며 예준은 밑으로 손을 내렸다. 남은 유두를 쓰다듬는 손가락들의 움직임은 부드러운 곡을 연주할 때와 비슷했다.
감질났는지 시후가 앓는 신음을 흘렸다. 그것도 잠시, 양미간을 좁히며 단어 하나를 툭 뱉었다.
“변태.”
그렇게 말하는 시후야말로 열기에 완전히 사로잡힌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언제나 깔끔하게 넘겼던 머리카락은 잔뜩 헝클어졌고, 그 아래 희었던 이마 역시 붉은빛으로 옅게 물들어 있었다.
“그 말만큼은 형한테 듣고 싶지 않은 걸요.”
“난 남 젖통에 좆 비벼 본 적은 없어.”
“그래요? 꽤 좋아요, 이거. 형 젖통에 좆 비비는 거.”
흥분에 범벅이 된 혀는 매끄럽게 움직였다. 수줍은 소년 같던 평소 모습을 집어던지자 시후가 ‘이것 봐라?’ 하는 표정을 지었다.
“다음에 형도 제 가슴에 해 봐요.”
“……그건 또 끌리네.”
“이래서 형한테 변태 소리 듣고 싶지 않다는 거예요.”
“윽!”
엄지로 유두를 툭 튕기자 놀란 신음이 예준의 귓등을 긁었다. 그는 찌르르, 울리는 목뼈를 느끼며 양손으로 시후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대로 한껏 끌어모으니 가슴골이 한결 깊어졌다. 그 사이로 좆을 끼운 채 허릿짓을 해 대었다.
퍽, 퍼억, 퍽!
성기가 거친 마찰음을 내며 피부를 짓누르자 시후의 입술이 차차 벌어졌다. 제 위에 올라탄 이의 체중이 버거워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린 게 분명했다.
속눈썹이 길게 드리워진 예준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붉고 축축해 보이는 혀와 입 안을 보고 있으니 꼬리뼈가 저릿했다.
당장이라도 저 안으로 제 좆을 뿌리 끝까지 밀어 넣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커헉, 컥!’ 하고 숨 막혀 할 소리가 쉽게 예상되었다.
제 음모가 그의 날렵한 콧날을 찔러 대는 것도, 삼키지 못한 액체가 입술을 타고 흘러내릴 모양새도, 그리고 자지를 콱콱 조여 댈 목구멍의 힘 역시 자연스레 상상되었다.
예준은 혀 위까지 올라온 욕을 삼키고는 좆기둥에 감겨 오는 가슴을 주물러 대었다. 시후는 거친 숨을 계속 토하고 있었다. 나른하게 풀린 눈꼬리와 연신 꿈틀대는 입매는 점차 절정에 오르고 있음을 알려 주었다.
그 모습에 예준의 턱에 힘이 다부지게 들어감과 동시에 성기가 가슴에서 얼굴 위로 올라갔다. 축축하게 젖은 귀두는 힘이 빠져 있던 눈매에 닿았다. 평소보다 뜨겁게 달아오른 상대의 피부를 느끼며 예준은 인상을 썼다.
“하아, 큭.”
희뿌연 정액이 피부를 타고 흘러내렸다. 그것만으로 성에 차지 않았던 예준은 성기를 움켜쥔 채 시후의 얼굴에 비벼 댔다.
“으읍, 흡!”
숨 막혀 하는 소리는 시후의 것이었다. 크고 두툼한 음낭들이 얼굴을 눌러 댄 탓이었다. 불알을 쿡쿡 찌르는 것이 시후의 콧날임을 알아차리는 순간, 예준의 손등에 핏줄들이 뚜렷하게 돋아났다.
“하아, 하아, 하…….”
사정 직후 찾아온 여운이 머릿속을 몽롱하게 했다. 현기증과 함께 눈앞에 뿌연 빛무리가 보였다. 약에 취한 사람처럼 나른한 표정을 짓던 예준은 홀리듯 밑으로 시선을 내리떴다. 곧 갈색의 긴 속눈썹이 잘게 떨렸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제 하반신이었다. 오르내리는 탄탄한 아랫배 아래 푹 젖은 음모가 보였다. 그 밑으로 성기가 비릿한 정액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짙은 체향은 페로몬 향과 섞여 공간 전체를 지배했다. 자신조차 신경이 곤두설 정도로 강렬한 내음에 예준은 잠깐 호흡을 멈추었다. 아래를 바라보던 얼굴이 삽시간에 벌건 색으로 상기되었다.
한 대 맞은 듯 멍한 표정을 짓는 것도 잠시, 예준은 옆으로 물러섰다. 그러는 동안에도 충혈된 눈동자는 같은 곳만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아직도 낮은 신음을 흘리고 있는 백시후였다.
“윽…….”
턱을 들어 올리며 인상 쓰는 시후는 느끼는 것 같기도, 고통스러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미미하게 꿈틀거리는 눈꺼풀, 곧은 콧대, 매끈한 뺨은 온통 정액투성이였다.
예준은 그가 뒤척일 때마다 흔들리는 머리카락을 발견했다. 헝클어진 머리칼에도 정액이 방울져 맺혀 있음을 확인했을 때, 심장이 세찬 속도로 요동쳤다.
쿵, 쿵, 쿵!
예준은 뭐라도 말하려다 금방 관두었다. 입술 사이를 벌리자마자 팔딱팔딱 뛰는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아서였다. 켜켜이 쌓여 가는 숨을 목구멍 아래로 넘기는 동안 시후는 손을 움직여 시트를 쥐었다.
“하, 윽…….”
시후의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퉁퉁 부은 유두와 가슴골이 말갛게 번들거렸다. 그 역시 자신이 만들어 낸 작품임을 깨닫는 순간, 뜨거운 열기가 예준의 몸 전체로 번져 갔다.
그때 시후가 허리를 튕기며 무릎을 세웠다. 크게 벌어진 입술에서 거친 호흡과 함께 뚝뚝 끊기는 소리가 터졌다.
“이거 이제, 빼……!”
다급함이 없잖아 있는 음성이 예준의 귓전을 두드렸다. 그제야 시후의 몸 안에 집어넣었던 장난감들이 퍼뜩 떠올랐다. 밑으로 내려간 시야로 시후의 배가 들어왔다.
“윽, 하!”
괴로워하는 신음이 귀를 자극했다. 그러는 동안 배는 계속해서 들썩거리고 있었다. 예준의 좆이 극점까지 들어올 때마다 보기 좋게 부풀던 부위였다. 그 기억이 떠오르자마자 입 안이 바짝 말라 왔다.
벌겋게 충혈된 예준의 눈동자가 사납게 번득였다. 그는 거칠게 숨을 뱉는 시후에게 몸을 붙였다. 이어서 한 행동은, 아랫배에 손바닥을 얹고는 꾹 누르는 것이었다.
“윽!”
예상 못 한 상황이었는지 시후가 입을 꾹 다문 채 눈만 부릅떴다. 검은 동공에 서린 경악을 읽어 내자 예준의 가슴이 부글거렸다. 그를 더 괴롭히고 싶다는 충동이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꾹, 꾸욱!
예준은 하고 싶은 대로 행동했다. 아랫배를 누를 때마다 시후는 진저리를 치며 크게 버둥거렸다. 몸에 힘이 들어가면서 장난감들을 더 콱콱, 조이고 있음이 분명했다.
“헉, 그만, 후으, 눌……?!”
시후는 말을 제대로 마칠 수 없었다. 손가락들이 힘 있게 배를 압박했기 때문이었다.
시트를 내리치던 시후의 긴 다리가 일순간 굳었다. 절정에 오른 몸이 경련하듯 떨렸다. 예준은 한 번 더 사정할 것 같은 흥분감 속에서 그를 끌어안았다.
배를 괴롭히던 손가락이 아래로 내려갔다. 그것은 이내 발딱 서 있던 성기 끝부분을 움켜잡았다. 그리고 요도구 위에 힘을 주며 손을 천천히 돌렸다. 여전히 백시후를 강하게 포옹한 채로.
“!”
시후는 이제 신음조차 내지 못한 채로 사정을 하기 시작했다. 제 손가락 아래에 느껴지는 뜨거운 액체에 예준은 그쪽으로 눈길을 던졌다. 손가락을 떼자마자 흰 정액이 기둥을 타고 줄줄 흘러내렸다.
자극적인 장면에 예준조차 호흡하는 방법을 잊었다. 그 순간,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이 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빼 달라고 했지.’
사정도 했겠다, 이제 형이 원하는 대로 해 줘야겠다. 예준은 아무 말도 못 하는 채로 사정하는 시후 형의 다리를 벌렸다. 그러고는 분홍색 줄들을 한 번에 움켜잡았다.
“잠……!”
뒤늦게 무언가를 깨달았는지 시후가 뭐라고 말하려 했다. 그러나 때는 늦었다. 이미 예준이 그것들을 단숨에 뽑아 버렸기 때문이었다. ‘퐁!’ 하는 소리와 함께 에그들이 구멍을 벌리며 나왔을 때, 시후는 고개를 뒤로 확 젖혔다.
‘아.’
예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힘들어 보여서 한 번에 빼낸 거였는데, 그 자극이 지나쳤던 모양이다.
당황한 예준이 장난감들을 집어 던진 뒤 시후의 얼굴을 살폈다. 그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뜬 채 숨만 가쁘게 쉬고 있었다.
“하, 하아, 하…….”
“괜찮……아요?”
조심스럽게 묻자 시후가 인상을 썼다. 예준은 미안한 한편 벌겋게 변한 그의 뺨이 참 야하다고 생각했다. 웃음이 올라와 입꼬리가 꿈틀거렸다.
“유예, 준…….”
시후는 “씨발” 하고 욕을 중얼거렸다. 희미한 욕설에 묻어나는 웃음기를, 예준은 간신히 포착했다.
“방금 거 다시 해 봐.”
그 말을 듣자마자 예준은 안도와 함께 참았던 웃음을 흘렸다. 그러고는 여전히 발딱 서 있는 시후의 유두를 만지작대었다. 손가락에 닿는 도톰한 것의 감촉이 좋았다.
* * *
“패티시 생긴 거 아닌가?”
나지막한 속삭임이 목 뒤에 달라붙었다. 황급히 뒤를 돌아보는 예준의 낯빛이 토마토처럼 붉어졌다.
“너 말이야, 예준이. 가슴 만지는 패티시 생긴 거 아니냐고.”
“…….”
“끝도 없이 만져 대던데.”
목소리를 낸 사람, 시후는 창에 기대 차를 마시고 있었다. 찻잔 손잡이를 쥔 채 예준을 바라보는 그의 안색은 평소와 같았다.
그러나 예준은 음란한 광경이라도 목격한 듯 마른침을 삼켰다. 덤덤하다 못해 무심해 보이는 상대의 얼굴을 마주하고 있자니 몇 시간 전의 백시후가 떠오른 탓이었다.
헝클어진 흑발에 땀으로 젖은 이마, 그리고 체액이 덕지덕지 묻어 있던 잘생긴 이목구비와 가슴……. 이러다 또 서겠다.
예준은 급히 눈동자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눈만 마주해도 달뜨다니. 이러다 러트라도 올까 봐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하하!”
그런 예준의 긴장을 깨뜨린 건, 예상 못 한 상대의 웃음소리였다. 예준은 언제 시선을 피했냐는 듯 다급히 시후를 살폈다.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백시후는 분명 웃고 있었다. 그것도 크게 소리까지 내면서.
놀란 시선을 느꼈는지 시후는 “흠” 하고 헛기침을 하며 입을 닫았다. 그러나 올라간 입꼬리는 금방이라도 폭소할 듯이 꿈틀거렸다. 과연 몇 초 지나지 않아 시후는 고개까지 기울이며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
이마를 가리고 있던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흔들렸다. 보기 좋게 휘어진 눈동자나 호선으로 바뀐 입매 역시 더할 나위 없이 근사했다. 무엇보다 예준의 가슴을 요동치게 하는 건 목소리였다. 공간을 울리는 음성에 즐거워하는 기색이 풍겼다.
소리 내어 웃을 만큼 상대의 기분이 좋다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당혹감이 가셨다. “뭐예요” 하며 인상을 쓰는 예준의 입꼬리 역시 올라갔다.
“뭐가 그렇게 웃겨요.”
“웃기지.”
시후는 창문을 가리고 있던 커튼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잘생긴 얼굴에 생기가 가득했다.
“꼭 잘못한 애처럼 눈만 데굴데굴 굴리는데, 어떻게 안 웃겨?”
그러고는 목이 탔는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아, 재밌네” 하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그런 시후를 보고 있던 예준은 제 마음이 파도처럼 울렁거리고 있음을 느꼈다. 그를 만나기 전까지는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감정이었다. 굳이 비슷한 경험을 찾아보자면, 명망 있는 피아니스트의 연주를 직접 들었을 때 정도였다. 아름다운 선율에 벅차올랐던 감정이 지금과 흡사했다.
‘아니.’
색소 옅은 눈동자에 서린 빛 역시 잔잔하게 일렁거렸다.
‘그보다 더해.’
백시후의 웃음소리만큼 제 영혼을 흔드는 게 있을까. 머리부터 발끝까지 휘감는 이 행복감을, 백시후 말고 그 누가 준다는 것인가. 손가락 끝이 간질거렸다.
예준은 시후의 옆으로 다가가서는 살짝 몸을 기대었다. 서로의 팔이 천천히 겹쳐졌다.
“또 웃어 주면 안 돼요? 듣기 좋은데.”
열망을 담아 말했지만 쉽지 않았다. 시후는 언제 폭소했냐는 듯 모른 척 차를 마셨다. 아쉬움에 예준은 아이처럼 칭얼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형 자주 웃게 만들도록 노력해야겠어요.”
“자주 웃게? ……방법이 있긴 한데.”
“뭔데요?”
시후에게서 녹차 향이 은은하게 풍겼다.
“다음엔 네가 묶여.”
“그러면 웃어 줄 거예요?”
“음, 가슴도 만지게 해 줘야지.”
“그럼요. 얘기했잖아요, 형도 하라고요.”
“제 가슴골에 비비는 거”라는 마지막 덧붙임은 일부러 속삭이듯 읊조렸다.
“말 잘하네, 유예준. 이렇게 당당할 거면 얼굴은 대체 왜 빨개졌던 거야?”
“좀 심했나 싶어서…….”
“과하긴 했지. 아직도 얼얼하다, 여기.”
시후는 제 가슴 쪽으로 가볍게 눈짓했다.
“어디 그뿐인가? 빼 달라니까 배나 눌러 대고. 취향이 맞으니 망정이지,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면…….”
웬일로 그는 말을 끝마치지 않았다. 의아해진 예준은 눈을 느리게 깜빡거렸다.
‘다른 사람’이라는 단어가 나오자마자 가슴이 할퀴어질 각오를 하고 있었다. 또 형이 속을 후벼 파겠구나,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오히려 말실수했다는 듯 바로 입을 닫는 모습에 심장이 세차게 덜컹거렸다.
“형?”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처럼 천연하게 부르며 상대방의 얼굴을 살폈다. 무슨 생각인지 알아내고자 여기저기를 뜯어보는 시선이 집요했다.
달라붙는 눈빛이 부담스러웠던 건지 시후가 찻잔을 들지 않은 손으로 허공을 휘저었다. 그러고는 아예 예준에게서 등을 돌려 버렸다.
의아함이 깨달음으로 바뀌는 건 순식간이었다. 시후가 냉정하게 선을 긋지 않았다는 사실에 예준의 체온이 한층 올라갔다. 기쁜 나머지 콧등마저 시큰거릴 정도였다.
예준은 불그스름하게 상기된 뺨을 한 채로 미소 지었다. 꼭 시후한테 고백이라도 받은 듯 눈동자가 별처럼 반짝였다.
“등은 왜 돌려요.”
시후는 못 들은 척하며 차만 마셨다. 예준은 그의 등 뒤에 몸을 바짝 붙였다. 이 감정을 어떻게 드러낼까, 고민하며 시후의 목덜미 쪽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매끈한 살결에서 풍기는 건 예준과 같은 알파의 냄새였다. 본능적으로 경계해야 하는 게 정상인 것을, 폐부 깊이 들어오는 향에 몸만 동하고 있었다. 예준은 제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음을 느끼며 입을 벌렸다.
움찔.
시후의 몸이 가볍게 진저리를 쳤다. 예준은 귀 아래에 댄 입술을 미끄러지듯 내렸다. ‘촉, 촉’ 하고 소리 내며 움직이는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러다 엎겠군.”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는 시후의 목소리가 그새 쉬어 있었다. 예준은 그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은 채 두 팔을 뻗었다. 부드럽게 끌어안자 시후는 나른한 숨소리를 내었다. 그 끄트머리에 묘한 열기가 서려 있음을, 포옹한 예준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손을 넓게 벌려 상대의 몸을 쓰다듬었다. 뜨겁게 달아오른 손바닥에 느껴지는 꿈틀거림이 사랑스러웠다. 예준은 목에서 어깨로 떨어지는 선을 입술로 지분대며 시선을 올렸다.
때마침 열린 커튼 사이로 햇살이 와르르 밀려 들어왔다. 옅은 갈색 눈동자로 만들어 낸 빛은 확실히 전과 달리 온기를 품고 있었다.
가만히 빛을 응시하던 예준은 곧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산책하던 도중 들었던 생각을 다시 꺼내 곱씹었다.
‘봄이다.’
가슴속 전체가 훈훈하게 데워졌다. 햇빛이 몸 안으로 파고든 것 같은 따뜻한 온기였다. 예준의 입꼬리가 느리게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