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백시후
시후는 자신이 양심 있는 삶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게 그가 양심적인 사람이었으면 절대 유예준에게 추파를 던지지 않았을 테니까. 담배를 피우건 말건, 얼굴이 단정해서 보기 좋건 말건. 저보다 훨씬 어린 애한테 성욕을 느꼈을 리 없었다.
그 사실을 인정한 지 오래였기에, 백시후는 예준과 자신과의 관계에 별다른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았다. 그저 가끔, 미치긴 했다고 실소나 몇 번 흘리는 게 다였다.
‘거슬려.’
그랬던 백시후가 이제 와 새삼 불편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제 마음을 쿡쿡, 찌르는 감정을 마주하며 한 번 더 생각했다.
‘거슬린다.’
연신 시후의 신경을 곤두세우게 만드는 원인 제공자는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남자였다. 상대는 두 손을 공손하게 모은 채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언뜻 덤덤한 것 같은 얼굴이었으나 안경 너머로 보이는 눈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시후는 인상을 쓴 채 고개를 비스듬하게 기울였다. 백화점 사건 이후로 연우는 그와 관련된 말을 꺼내지 않았다. 어쩌다 만나도 백도영의 비서로서, 그리고 회사의 일원으로서 깍듯하게 인사할 뿐이었다. 할 말이 많지만 차마 못 하겠다는 눈빛이나 던지면서.
아무 말 없는 상대의 태도가 답답했다. 속으로 네 동생 역시 즐기고 있다고 반박해 보았지만 후련해지지는 않았다. 짜증에 눈꼬리가 신경질적으로 올라갔다. 험악해진 얼굴에 옆에 있던 이가 낮게 속삭였다.
“회의 중이잖아. 표정 관리해야지.”
화사하기 짝이 없는 미소를 머금고 있는 남자, 동생 백도영이었다. 한창 브리핑 중인 임원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도영은 입술만 움직였다.
“우리 아버지, 눈치 백단이시다. 바로 형 뒷조사 들어갈 수도 있어.”
“……살다 살다 너한테 표정 관리하란 소릴 다 듣는군.”
“알았으면 반성하고.”
“…….”
얄밉게 이죽거리는 동생의 읊조림에 불쾌감이 짙어졌다. 그러나 구구절절 옳은 말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아버지 귀에까지 들어가 일이 커지는 건 생각만 해도 피곤한 일이었다.
시후는 진지하게 경청 중인 아버지의 얼굴을 한 번 살핀 뒤 표정을 정리했다. 여러 사람을 신경 쓰려니 피곤함이 올라왔다.
침대에 누워서 유예준 머리나 만지면 좋겠다. 강아지 털을 쓰다듬으며 안정을 찾는 사람들처럼, 자신 역시 예준을 만지작대며 휴식을 취하고 싶었다.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손에 예준의 따뜻하고 부드러운 머리털이 만져지는 것 같았다.
‘……따뜻하고, 귀엽고.’
부드럽고, 다정하고.
유예준과 연관된 표현들을 하나씩 떠올리며 시후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경직되어 있던 안면 근육이 풀어지며 입꼬리에 은은한 미소가 감돌았다.
덕분에 시후는 평온한 상태를 찾을 수 있었다. 회의를 마친 후 임원들과 대화를 나눌 때도, 아버지에게 인사를 할 때도, 그리고 자리에서 벗어나려는 유연우를 막아설 때도 마찬가지였다.
놀라서 굳은 연우 앞에 선 시후는 점잖은, 하지만 특유의 오만한 느낌이 없지 않아 서린 얼굴로 말을 건넸다.
“한 대 치시죠.”
“네……?”
“아니면 물벼락이라도 날리겠습니까? 물컵 갖다 줄까요?”
느닷없는 발언에 시후 뒤에 있던 사람들이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물벼락이라고?’
당황해하는 분위기 속에서 도영이 눈꼬리를 휘었다.
“여기서 이러면 곤란하지.”
그런 뒤 도영은 시후의 비서들에게 눈짓했다.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음을 직감한 비서들은 곧장 사람들과 함께 자리를 피했다. 회의실 문이 닫히고 세 사람만이 남았을 때, 시후는 팔짱을 꼈다.
“쳐요.”
“……아닙니다.”
침묵하던 연우가 마침내 한숨 쉬듯 읊조렸다. 시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 때나 오는 기회 아닌데. 맞아 주는 성격이 아니라서.”
“연우 형, 내가 대신 해 줄까? 말만 해.”
도영이 생글생글 웃으며 연우의 옆에 바짝 붙었다. 제 연인의 수심이 안타까우면서도 이 상황이 못내 재미있다는 반응이 역력하게 드러났다.
“도영 씨와 연애하는 제가, 무슨 자격으로 탓하겠습니까.”
시후는 상대의 말을 바로 이해했다. 저쪽 역시 나이 차 많은 커플인 건 매한가지였다. 도영보다 훨씬 연상인 자신이 시후를 어찌할 자격이 없다는 뜻이었다.
시후는 그가 생각이 많은 사람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남들은 제 얼굴에 침 뱉기건 뭐건, 일단 화부터 냈을 것이다. 한참 어린 동생에게 감히 손을 대냐며.
“알고 계시죠? 예준이가 자기 오피스텔로 돌아간 거.”
“압니다.”
모를 리가. 지난 주말에도 종일 그곳에서 예준과 시간을 보냈다. 유예준이 저를 묶고 가슴골에다 좆을 비볐다는 사실을 알면, 이 남자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화를 내도 자기한테만 내라더군요. 저 혼자 좋아서 쫓아다니는 거라고.”
“……예준이가 그렇게 말했습니까?”
“네.”
열이 오르는지 연우는 손바닥으로 제 이마를 짚었다. 손목에 찬 시계가 반사되어 말갛게 반짝였다. 무심결에 그쪽으로 시선을 보냈을 때, 연우는 피로한 목소리를 내었다.
“이런저런 신세 진 일이 많다고 하더라고요. 러트가 왔을 때도 도와주셨다지요? 자칫 큰 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었는데, 막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
“사과도 함께 드리겠습니다. 예준이가 계속 쫓아다녔을 테니, 분명 곤란하셨겠지요.”
시후는 별소리를 다 듣겠다는 얼굴로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정중하기 이를 데 없는 상대의 태도에 불쾌해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래서 그는 팔짱을 풀며 바람 빠지는 듯한 실소를 흘렸다.
“신세라, 흐음.”
바지 주머니에 한 손을 집어넣었다. 그런 채로 연우를 향해 상체를 살짝 내미는 자세가 퍽 거만했다.
“예준이한테 러트가 왔을 때 말입니다. 그때 내가 뭘 했는지 압니까.”
“무슨…….”
“억제제를 안 먹였습니다. 일부러.”
그는 잘못 들은 게 아님을 알라는 듯 분명한 발음을 내었다.
“억제제가 듣지 않을 것 같아서 안 먹인 게 아닙니다. 다분히, 내 욕심 때문이었죠.”
연우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썹 사이에 힘을 주었다.
“궁금했거든요. 이게 정말 러트가 맞는 건지, 베타인 애가 왜 러트가 온 건지.”
시후는 부드럽게 말을 덧붙였다.
“정말로 러트라면, 이제 어떻게 되는 건지.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내버려 뒀던 거고.”
“왜 갑자기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거죠?”
“연우 씨가 사과할 필요는 없단 뜻이죠. 그쪽이 생각하는 바와 달리 나는 꽤, 개자식이거든.”
“…….”
묵직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연우는 혼란스러운지 눈동자가 좌우로 흔들리고 있었다. 이 상황에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모르겠다는 반응이었다.
시후는 그의 복잡한 심경을 이해했다. 유예준은 분명 자기만 나쁜 놈이라고 열과 성을 다해 주장해 댔을 것이다. 그런데 사실은 그게 아니었단다. 러트 온 애에게 약을 주기는커녕, 가만히 놔두었단다.
“때리고 싶으면 언제든지 연락해요.”
침묵을 깨뜨린 사람은 시후였다. 그때까지 얼이 빠진 얼굴을 하고 있던 연우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눈 밑에 존재하던 그림자가 더욱 짙어졌다.
“왜 자꾸 맞겠다고 하세요.”
“오해 있을까 봐 말해 두는데. 맞는 취향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닙니다.”
시후는 높낮이가 없는 목소리로 담담히 말했다. 당황했는지 연우의 뺨이 삽시간에 빨갛게 변했다. 난처한 기색이 묻어나는 얼굴에 시후는 소리 없이 미소 지었다.
“농담입니다. 먼저 물러가도록 하죠, 바로 다음 일정이 있어서.”
그러고는 등을 다시 꼿꼿하게 펴며 천천히 덧붙였다.
“일이 이렇게 되어서 유감입니다.”
‘유감’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설마 유예준이 유연우의 친동생일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차라리 외양이라도 서로 닮았으면 금방 알아차렸을 텐데. 제 형과 달리 부드러운 느낌을 가진 예준의 얼굴을 떠올리며 시후는 작게 혀를 찼다.
“형.”
먼저 회의실 앞문으로 걸어가던 참이었다. 시후의 발길을 잡은 건 의외로 도영이었다. 그때까지 그는 흥미롭다는 듯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었다. 허공에서 두 형제의 눈빛이 쨍강, 부딪쳤다.
“예준이와 헤어질 생각은 없는 거야?”
도영은 “유감이라며?” 하고 덧붙이곤 눈웃음을 그렸다. 이미 제 질문에 어떤 답이 나올지 알겠다는 눈빛이었다.
속이 꿰뚫린 것 같은 기분은 달갑지 않았으나 하는 수 없었다. 시후는 한쪽 입꼬리를 비스듬하게 올렸다.
“그래서 때리라는 거야.”
* * *
현관문으로 들어서자마자 반가운 인사가 귀를 울렸다.
“다녀왔어요?”
시후의 눈매가 나른하게 풀렸다. 인사를 건넨 이는 현관문 앞에 서서는 두 손까지 공손히 모으고 있었다. 꼭 퇴근한 주인을 맞이하는 강아지 같은 모습이었다.
개를 키운다면 이런 기분일까? 온몸의 신경이 느슨해지면서 몽글하게 풀렸다.
“진짜 기다리고 있었네?”
“형이 원했으니까.”
예준의 말대로였다. 훅 올라온 충동에 시후는 메시지 하나를 보냈다.
[먼저 집에 가서 기다려.]
상대방의 스케줄 따윈 고려하지 않은 일방적인 지시였다. 그런데도 예준은 기분 나빠하기는커녕 이렇게 대답했다.
유예준 [왜요? 빨리 내 얼굴 보고 싶어서?]
당돌하다 못해 뻔뻔한 질문에 헛웃음이 올라왔다. 날이 갈수록 유예준은 능청스러워지는 면이 강해졌다. 원래도 이랬던 애인지, 아니면 바뀌어 가는 건지는 모르겠다. 꼬리뼈가 이유 없이 간질거리는 걸 느끼며 그는 이렇게 답장했었다.
[그래.]
“얼굴 보고 싶다고 했잖아요. 그렇죠?”
“낮에 이미 답했던 거잖아.”
“목소리로 또 듣고 싶어서.”
“안 됐네. 두 번 답하긴 싫거든.”
구두가 반쯤 벗겨지던 찰나, 강하고 단단한 힘에 허리가 휘어졌다. 비칠대던 것도 잠시 따뜻한 체온이 그를 감싸 안았다.
기습 포옹을 당한 채 시후가 고개를 뒤로 돌렸다. 급하게 벗겨진 구두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혀를 차는데 “형” 하고 웃음기 어린 음성이 뺨에 달라붙었다.
“진짜 나 보고 싶었어요?”
“까분다.”
“난 형 보고 싶었어요.”
“…….”
나직하지만 분명한 속삭임에 시후는 예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서로의 거리가 지나치게 가깝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자각했다. 맞닿은 상대의 가슴이 얼마나 빠르게 뛰는지, 바라보는 눈동자가 어떤 빛깔로 일렁이는지 세세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 순간 열기가 목을 타고 머리 꼭대기까지 치받쳤다. 이내 두 팔을 올린 시후는 예준의 목을 끌어안아 당겼다. 서로의 입술이 거칠게 부딪쳤다.
시후는 고개를 옆으로 꺾으며 벌어진 입 안으로 제 혀를 밀어 넣었다. 젖은 점막을 훑는 동안, 허리를 쥐고 있던 상대의 손이 움직였다.
툭, 투둑.
손가락들은 정장 재킷 단추를 풀더니 그 안으로 불쑥 파고들었다. 조끼 위를 지분거리는 손길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상체를 빳빳하게 굳히자 손길이 더욱 진득하게 변했다. 허리를 쓰다듬고 척추를 따라 오르내리는 감각이 흥분을 부추겼다. 참지 못한 시후는 먼저 입을 떼는 수밖에 없었다.
“하아.”
예준은 어깨를 씨근덕대는 그의 뺨에 키스했다.
쪽, 쪽, 쪽.
뺨에서 턱으로 떨어지는 선을 따라 미끄러져 내리는 입술이 부드러웠다. 그것이 기어코 귀 부근으로 향했을 때, 시후는 움찔거리며 예준 쪽으로 기대었다.
‘아, 시발.’
욕 나올 정도로 좋다. 퇴근하자마자 쏟아지는 입맞춤이 짜릿했다.
“너, 윽, 내일도 일찍 와.”
거칠게 중얼거리자 예준이 키득거렸다. 은은한 숨결을 받은 부위가 훅 달아올랐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옆으로 젖혀 피했으나 예준은 봐주질 않았다. 오히려 예상했다는 듯 휘어진 목덜미에 입술을 갖다 대었다. 강하게 빨아들이는 힘에 신음이 참아지질 않았다.
“읏.”
예준이 얼굴을 떼며 시선을 마주했다. 평소와 다를 것 없이 단정한 외양이었으나, 입술만은 말갛게 번들거리고 있었다. 시후는 그쪽으로 눈길을 주며 생각했다. 음란하다.
“이거 어쩌죠, 내일은 아르바이트 가야 해요. 일찍 시작해야 해서…….”
“관둬.”
“안 돼요, 돈 벌어야죠.”
“돈 줄게. 줄 테니까, 여기서 피아노 치도록 해. 시급…….”
시급당 얼마를 줄 것이라고 말하려던 찰나, 예준이 그의 두 뺨을 거머쥐었다. 순간 말문이 막힌 사이 이마에 입술이 닿았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는지 예준은 코끝, 양쪽 뺨, 그리고 입술에도 몇 번이고 뽀뽀했다.
“……전생에 개였나?”
간신히 읊조리는 목소리가 그새 잠겨 있었다. 예준은 재미있다는 듯이 웃으며 몸을 뒤로 빼었다. 금방이라도 섹스할 듯 굴어 놓곤, 어느새 아이처럼 천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식사 아직 못 했다고 했죠?”
무슨 식사. 진득한 스킨십에 머리가 제대로 굴러가지 않았다. 드물게 엉망이 된 사고는 ‘널 먹으라는 건가?’ 하고 질문하고 있었다. 시후가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기 직전, 예준이 수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장 좀 봐 놨어요.”
그 덧붙임을 듣고서야 집 안을 채우고 있는 음식 냄새를 알아차렸다. 예상 못 한 상황에 시후의 표정이 허물어졌다. 낮은 웃음소리가 그의 귀를 자극했다.
“……살림하라고 부른 거 아닌데.”
“기다리고만 있기 힘들더라고요. 빨리 형 밥 먹이고 싶어서.”
예준이 재잘거릴 때마다 진동이 은은하게 퍼졌다. 가슴에서 요동치는 이 감정은 무엇일까. 거품처럼 보글거리는 느낌이 낯설었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고개만 옆으로 돌렸을 때였다.
뺨에 입술이 닿았다. 도장처럼 꾸욱, 찍는 감촉에 시후는 눈을 크게 부릅떴다. 괜히 미간을 구기자 예준이 “흠” 하고 입꼬릴 당겼다. 네가 무슨 기분인지 잘 알고 있다는 얼굴이 자신만만했다. 그는 곧 시후의 빗장뼈에 손바닥을 얹고 부드럽게 도닥거렸다.
“씻고 와요.”
깃털처럼 가벼운 두드림이 빗장뼈를 찌르르, 울렸다. 먼저 몸을 뗀 건 시후였다. 욕실로 몇 발자국 걷던 그는 곁눈으로 예준을 살폈다. 예준은 어느새 식탁 쪽으로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저건 대체 왜 저럴까.’
시키지도 않은 일을 왜 사서 할까. 예전에도 그랬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청소부터 하려고 했지. 시간과 노력을 바쳐 귀찮을 법한 일들을 곧잘 해 주는 게 이상하다. 정말, 이상하다.
시후는 손등을 들어 제 뺨을 문질렀다. 입술이 닿았던 부위가 왠지 얼얼하게 느껴졌다.
설명할 길 없는 감정 속에서 시후는 손을 씻었다. 비누 향을 풍기며 식탁 쪽으로 다가가자 예준이 냄비를 든 채 미소 지었다. 가슴속 부글거림이 속도를 높였다.
“도와줄…….”
“다 했어요, 형은 그냥 앉기만 하면 돼요.”
시후는 한참 동안 서 있다가 느릿하게 앉았다. 차려진 음식들은 꽤 정갈하니 맛있어 보였다. 이것들을 다 손수 장 봐서 요리했을 예준을 상상하니 손등이 뜨거웠다.
미간을 구긴 시후는 예준의 손가락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의 앞으로 고기반찬을 밀고 있는 손가락들은 다행히 멀쩡했다.
“그러다 다치면 어쩌려고?”
예준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 다쳐요?”
“다치지. 화상 입거나, 아니면 칼에 베이거나.”
고저 없는 시후의 목소리가 무뚝뚝했다.
“다음부터는 하지 마.”
“집에서도 곧잘 해 먹는걸요. 초보 아니니까 걱정 안 해도 돼요.”
“집에서도 하지 마, 앞으로.”
“하하, 그럼 어떡해요. 굶어요?”
“가정부 고용하면 돼. 네 집으로 음식 잘하는 분 보내 줄게, 됐지? 이제 손 함부로 쓰지 마. 피아노 치는 사람이니 조심해야지.”
그러자 예준은 대답하는 대신 등을 곧게 편 채 생글거렸다. 정성 들여 음식 차려 놨더니 돌아오는 게 고작 잔소리냐는 무언의 뜻이 읽혔다.
사람 좋은 미소에 멋쩍어지기 시작한 건 시후였다. 왠지 유예준에게 밀리는 것 같은 기분이 없지 않아 들었다.
“……뭐 해, 밥 안 먹고.”
평정심을 가장한 목소리에 난처한 기색이 옅게 묻어났다.
“형 먼저 수저 들고요. 웃어른께 예의 지켜야죠.”
“웃어른……?”
“시장하시겠다, 이만 식사하세요.”
장난기가 다분한 존대였다. 어이없어진 시후는 이맛살을 구기며 예준을 밉지 않게 노려보았다. 예준은 즐거워했다. 반듯하니 잘생긴 얼굴은 환한 생기로 가득했다.
그 생기의 위력은 꽤 강력했다. 지켜보고 있던 시후는 어느새 황당함이 가시고 따라 즐거워지는 자신을 발견했다.
‘실없긴.’
애도 아니고.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입술 사이로 실소가 흘러나오는 걸 막을 수 없었다. 그는 한없이 긍정적인 감정이 몸을 휘감는 걸 느끼며 수저를 들었다. 섹스 대신 소소하게 대화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여기며.
* * *
식사를 마친 뒤 시후는 예준의 연주곡을 틀었다. 거실 전체가 느릿하면서도 농도 짙은 피아노곡으로 가득 채워졌다. 예준은 너무 자주 듣는 거 아니냐며 수줍어했다. 그러면서도 입꼬리를 꿈틀거리는 게 싫지만은 않다는 반응이었다.
소파에 누워 듣고 있으니 예준이 곁으로 다가왔다. 무슨 일을 벌일까 궁금해진 시후는 누운 채로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흰 가운 차림에 긴 다리를 쭉 뻗고 있는 그는 우아하며 나른한 느낌이 배어 있었다.
예준은 그런 시후를 덮치지도, 깔아뭉개지도 않았다. 물끄러미 응시하는 그에게 한 번 미소를 짓더니, 별안간 뒤통수를 감싸 올리는 것이었다.
“……뭐 해.”
질문하던 시후는 곧 상대의 의도를 알아차리게 되었다. 어느새 머리와 목 뒤에 손이 아닌 허벅지가 닿았기 때문이었다. 돌처럼 단단한 그 위에 머리를 댄 채로 시후는 피식거렸다.
“머리 쓰다듬어도 돼요?”
“마음대로.”
선선히 허락하자 머리카락 위로 손이 내려앉았다. 천천히 쓰다듬는 손길은 꽤 조심스러웠다. 나른함이 밀려온 시후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왜 이렇게 살살 만져. 다른 데는 잘도 물고 빨고 하면서.”
“……그러게요, 새삼 긴장돼서.”
진심이었는지 아래 깔려 있던 허벅지가 잘게 요동쳤다. 시후는 “흠” 하고 입꼬리를 올리며 옆으로 몸을 돌렸다. 뺨에 닿는 예준의 체온이 따뜻했다.
“너랑 연우 씨 말이야.”
한마디 꺼내자 머리를 만지던 손이 멈췄다. 시후는 계속 만지라고 지시하며 입술을 움직였다.
“꽤 닮았어.”
“정말요? 어디 가서 닮았단 말 못 들었는데.”
“외양 말고 하는 행동이.”
“……형 만났어요?”
“만났지. 치고 싶으면 치라고 했다. 물벼락 날리고 싶으면 그렇게 하라 했고.”
“절대 안 돼요.”
단호해진 말투가 귓전을 울렸다. 시후는 허벅지에 뺨을 괸 채로 눈동자만 위로 올렸다. 그를 내려다보고 있던 예준의 입매가 일자형으로 굳어져 있었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거부감이 올라온 표정이었다.
“왜 그런 말을 했어요? 형이 누구한테 맞는 거 싫어요.”
“상대가 네 친형이어도?”
“네.”
망설임 없는 대답이 꽤 마음에 들었다. 어째 유연우를 이긴 것 같은 기분에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러는 동안 예준은 낮게 한숨 쉬었다.
“나한텐 손 다치니 요리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그래 놓고 형은 어디 가서 맞을 생각 했어요?”
“……유예준.”
예준은 말하라는 시선을 건넸다. 어두워진 안색에 걱정이 깔려 있었다.
시후는 그런 예준의 얼굴을 가만히 주시했다. 속눈썹이 길고 촘촘하여 묘한 느낌을 불렀다.
“왜 이렇게 날 좋아해. 왜 이렇게까지 좋아해서…….”
뜸을 들이는 입술이 잘게 달싹였다.
“자꾸 예쁜 짓만 하냐, 신경 쓰이게.”
말을 뱉자마자 옅은 후회감이 올라왔다. 뒷말을 덧붙이는 건 과했다. 마침 피아노 음마저 흐르고 있었던 터라 지나치게 로맨틱한 느낌이 나고 말았다.
‘미쳤군.’
의도치 않게 로맨틱 영화의 주인공이 된 것 같은 기분에 인상이 구겨졌다. 자리에서 일어난 시후는 그대로 음악을 껐다.
“신경 쓰여요?”
어느새 예준이 뒤에 바짝 붙어 있었다. 좋아하다 못해 애틋하기까지 한 음색이었다.
나지막한 숨결이 귓바퀴에 달라붙자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아무 말을 하지 않자 예준이 뒤에서 그를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읏…….”
“대답해 줘요.”
“같은 말 두 번 하고 싶지…… 아!”
예준의 왼손이 허리에서 아랫배로, 그리고 그 위를 따라 더디게 올라왔다. 시후는 숨을 길게 내쉬며 눈을 반쯤 내리떴다. 뼈가 볼록하게 도드라진 상대의 맨 손목이 시야 안으로 들어왔다. 저 피부를 무언가로 묶어 보고픈 열망이 솟구쳤을 때였다.
사락.
벌어진 가운 안으로 손이 파고들었다. 뭘 하는 건가 싶어 지켜만 보던 시후는 곧 턱에 힘을 주었다. 예준의 손이 맞닿은 곳은 다름 아닌 가슴이었다.
심장 소리를 듣기 위함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었다. 시후는 고개를 비틀어 뒤에 있는 이의 얼굴을 보았다. 열기 어린 정적이 감돌았다. 서로의 시선이 뒤엉키고 입술들이 달싹였다.
“형, 심장이…….”
“…….”
“심장이 빨리 뛰네요.”
예준의 입가에 설핏 미소가 떴다가 사라졌다. 거기에 시후는 말로 맞받아치는 대신 제 페로몬을 천천히 흘리기 시작했다.
페로몬은 예준의 가슴을 타고 목까지 올라갔다. 귀를 쓰다듬고 이어 양 뺨에 달라붙는 순간이었다. 별안간 턱이 잡히고 서로의 입술이 강하게 부딪쳤다.
“음.”
시후는 예준의 오른손에 의해 제 턱이 고정되었음을 빠르게 깨달았다. 가운 사이로 파고든 그의 왼손은 여전히 가슴을 만지작대고 있었다.
왠지 머리털이 쭈뼛, 서는 기분이다. 이러다 예준에게 완전히 속이 꿰뚫릴지도 모르겠다는 예감 때문일까.
손을 빼내기 위해 허리를 뒤틀었으나 예준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랫입술만 부드럽게 빨며 흥분을 부추길 뿐이었다.
기어코 입 안으로 밀려 들어온 혀의 감촉에 시후는 힘을 풀었다. 점막을 샅샅이 훑는 움직임이 생생했다.
‘그래.’
어디 한번 너 원하는 대로 움직여 봐라.
포기하자 거부감이 옅어지고 대신 희열이 자리를 차지했다. 똑같이 상대의 입 안을 탐하며 시후는 눈웃음을 그렸다. 새까만 눈동자가 성욕으로 보기 좋게 반짝였다.
페로몬들이 엉켜 들었다. 우위를 차지하고자 짓누르고, 깔리고, 다시 뒤집히기를 반복하는 동안 예준이 입술을 떼었다. 그는 시후가 숨을 고를 틈도 없이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었다.
치아가 귀 아래 혈맥을 긁자 등이 오싹, 하고 떨렸다. 시후는 가슴을 들썩거리며 고개를 옆으로 젖혔다. 도드라진 목선 위로 예준의 웃음이 달라붙었다. 순순히 목을 내어 주는 행동이 기뻤던 모양이었다.
사락.
가운 끈이 풀어지고 옷이 아래로 떨어졌다. 그러는 동안 예준의 입술은 어느새 어깨에서 빗장뼈로 향하고 있었다. 보드라운 것이 핥아 올릴 때마다 은은한 숨결이 젖은 피부에 닿았다.
눈앞이 뿌옇게 변하는 걸 느끼며 시후는 한 손으로 제 이마를 감쌌다. 흰 손등 위로 여러 갈래의 핏줄들이 사납게 돋았다.
당장이라도 유예준을 덮치고픈 충동을 꾹꾹 누르는 동안 척추 위로 촉촉한 것이 닿았다. 혀로 추정되는 그것은 끝을 단단히 세워서는 피부를 간질였다.
“읏…….”
“여기 좋아요?”
나직하게 속삭이며 예준은 같은 부위를 한 번 더 빨고 핥았다. 예민해진 피부가 몇 번이고 씹히자 몸에 힘이 들어갔다.
더는 참을 수 없겠다, 싶어진 시후는 뒤를 돌려고 했다. 그 순간 타액으로 번들번들하게 젖어 있을 부위 위로 입김이 닿았다. 예준이 후, 하고 바람을 불자 찌릿찌릿한 감각이 몸 안으로 깊숙하게 파고들었다.
“대답 안 들어도 알겠네요.”
“으스대긴.”
“하하.”
인기척에 시후는 고개를 돌려 예준을 보았다. 어느새 그는 무릎을 꿇은 채 양손으로 시후의 허리를 잡고 있었다. 뭘 하려는 거냐고 물으려는 찰나 예준이 같은 행위를 이어 나갔다.
척추를 따라 쓸어내리는 혀는 지나치게 자극적이었다. 그것이 아래를 타고 엉덩이에 닿았을 때는 현기증마저 올라올 정도였다.
“어디까지 핥으려는, 흑!”
입에서 기어코 새된 신음이 터지고 말았다. 허리를 잡고 있던 손들이 어느새 엉덩이를 쥐어 벌렸기 때문이었다. 드러난 구멍 위로 혀가 닿았다. 축축한 살덩이가 주름을 문대고 핥아 대자 한쪽 무릎이 꺾였다.
“유예, 준……!”
시후는 다짜고짜 아래를 빨기 시작한 이의 이름을 불렀다. 그의 목소리에 서린 흥분을 알아차린 걸까. 예준은 픽, 웃고는 손가락으로 구멍 주름을 만지작대었다. 진득하게 문질러 대는 손길에 감질난 구멍이 꿈틀거렸다.
“형 속살도 보여요. 색이 참 예쁘네요.”
“……시끄러워.”
“빨아도 되죠?”
“실컷 빨아 놓곤 이제 와 허락, 윽!”
길게 뻗은 혀가 구멍을 핥았다. 오소소 돋은 소름에 말을 마치지 못했다. 시후가 진저리치는 사이 예준은 치아로 주름을 긁었다. 따끔한 감각이 번지자 구멍이 뻐금거리며 젖은 안을 보여 주었다.
유예준은 그 안으로 혀를 뿌리까지 밀어 넣었다. 단단하게 선 혀가 아래를 헤집어 대자 시후의 고개가 뒤로 꺾였다.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고 일직선이었던 입꼬리가 무너졌다.
예준은 구멍을 핥던 혀를 빼낸 뒤 부푼 주름 위에 입술을 갖다 대었다. 그런 채로 ‘추웁’ 하고 소리가 날 정도로 강하게 빨아들였다. 격렬한 흡입력에 시후의 자지가 꼿꼿하게 섰다. 작은 요도구에서 흘러나온 액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헉, 흑! 하아, 하아, 하……. 하아…….”
예준이 얼굴을 떼자마자 시후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귀 아래 혈맥이 요란하게 팔딱거렸다. 흐려진 시야 안으로 들어온 건 바닥에 떨어진 제 액체였다. 안이 빨린 것만으로 액을 질질 싸 댔다는 사실에 시후는 헛웃음이 나왔다.
“씹, 왜 이렇게 잘 빨아.”
“좋은 선생님을 둬서요.”
다정다감한 목소리에 시후는 미간을 구기며 예준과 시선을 마주했다. 예준은 입술을 닦지조차 않은 채 미소를 보였다. 그 역시 잔뜩 흥분했음을 본능적으로 감지했다.
시후의 눈꼬리가 한층 날카로워졌다. 검은 눈동자에 서린 빛이 기이할 정도로 형형하게 번득거렸다. 말캉한 것에 의해 애무당한 안이 간지러워 참기가 힘들었다. 당장이라도 이 당돌한 녀석의 좆을 아래에 밀어 넣고픈 열망이 강하게 솟았다.
“유예준.”
상대의 이름을 부른 시후는 잠시 가쁜 숨을 가다듬었다.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느낌이란 이런 걸까? 오소소 돋은 소름이 없어지질 않았다.
“혀 말고, 후, 다른 걸 줘.”
말을 마친 뒤 그는 눈을 반쯤 내리떴다. 그러고는 무릎을 꿇고 있는 유예준의 다리 사이를 고집스레 쳐다봤다. 명백한 뜻이 담긴 시선에 예준이 마른침을 삼켰다.
그도 잠시, 예준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덤비듯 달려들었다. 크고 단단한 손이 좆을 콱 감싸 쥐는 걸 느끼며 시후는 눈을 감았다.
눈꺼풀 위로 뜨거운 숨결이 닿았다. 더한 쾌락을 마주할 것임을 인지하는 순간, 등줄기가 오싹, 하고 떨렸다.
* * *
눈을 뜨자 찾아온 건 어둠이었다. 시후는 나른하게 풀린 얼굴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몇 시인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무심결에 깬 것치고 정신이 맑다는 사실만 인지할 뿐이었다.
이대로 일어나면 되겠지만 어째선지 지금은 늘어져 있고 싶었다. 천장을 응시하던 눈이 천천히 가늘어졌다. 귓가에 들리는 옅은 숨소리 때문이었다. 규칙적으로 둘리는 숨결을 찾아 고개를 돌렸다.
어둠이 눈에 익자 잠든 이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예준은 시후 쪽으로 몸을 돌린 채 깊이 잠들어 있었다. 평온한 눈썹 모양과 살짝 벌어진 입술을 본 시후는 소리 없이 웃었다. 새삼 그의 얼굴이 애티가 나고 있음을 깨달아서였다. 본인은 어리지 않다고 투덜거릴지 몰라도.
노곤한 기분에 잠겨 있던 시후는 갑자기 “아” 하고 중얼댔다. 그러다 제 소리를 듣고 예준이 깰까 봐 바로 입을 닫았다.
잠깐 생각하는 표정을 짓던 그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랍을 열고 무언가를 꺼내는 동작 역시 고요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것을 손에 쥔 채 시후는 거울을 응시했다. 가운 차림의 자신이 웃음을 눌러 참고 있음이 보였다. 장난기 많은 소년 같은 모습에 눈썹을 꿈틀거렸다.
낯설기는 하지만 불쾌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힘을 푼 얼굴이 나쁘지 않아 보이기까지 했다.
검은 눈동자는 침대에 누워 있는 이에게로 다시 움직였다. 예준은 잠귀가 꽤 밝은 편이었다. 조금만 인기척을 내도 금방 일어날 것이다.
곤히 잠들어 있는 아이를 깨우고픈 생각은 없었다. 더군다나 그 몰래 하고 싶은 일이 있을 때는 더욱.
예준의 옆으로 걸어간 시후는 그의 손목을 천천히 그러쥐었다. 커튼 사이로 밀려 들어온 새벽빛이 두 사람의 피부를 감싸 안았다.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살결을 살피며 시후는 다른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내밀었다.
혹시라도 깨어날까, 긴장이 시후의 뺨을 긁었다. 그는 들고 있던 팔을 침대 위로 내려놓으며 천천히 살폈다.
옅은 빛 아래, 시계가 예준의 손목을 감싸 쥐고 있었다. 청색 가죽 스트랩과 안에 박힌 흰 다이아몬드들이 근사한 느낌을 만들었다. 시후는 입꼬릴 당기며 “흐음” 하고 소리 냈다.
기대 이상으로 잘 어울렸다. 거기다 예준의 손목을 무언가로 묶었다는 사실 역시 만족감을 불러일으켰다. 시후는 눈을 가늘게 뜬 채 한참 예준의 손목을 감상했다.
불쑥 떠오른 건, 예준이 선사해 준 수많은 연주였다. 첫 만남 때 들었던 <겨울>, 그리고 <물의 유희>. 사랑스러운 느낌이 묻어나던 <사랑의 인사>와 본인이 직접 작곡한 곡 등 다양한 선율들이 한데 섞여 귀를 자극했다.
이상한 희열이 가슴을 두드렸다. 시후는 귓구멍으로 파고들어 떼어지지 않는 기억들을 곱씹으며 눈을 감았다. 그러자 아이디어 하나가 퍼뜩 생각났다.
예준은 앞으로도 자신에게 많은 곡들을 들려줄 것이다. 각 곡에 맞는 시계들을 찾아 선물해 주는 것이 어떨까. 그 생각이 스치자 선물을 받고 놀람 반, 기쁨 반이 섞인 예준의 얼굴이 그려졌다.
시후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잘생긴 얼굴에 서린 미소가 한층 짙어졌다. 앞으로 있을 일들에 대한 기대감이 찌르르, 그의 손목을 울렸다.
<완결>
@nin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