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화 (14/17)

 Side Story

3. 시후(1)

 새로 바꾼 커튼이 바람에 하늘하늘 움직였다. 연녹색 커튼이 부드럽게 흔들릴 때마다 열어 둔 창문 안으로 아침 햇살이 우르르 밀려왔다.

 시후는 어쩐지 웃음이 올라왔다. 화사한 색감의 커튼이 자신과 퍽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살면서 자신의 집에 저런 밝은 색깔의 커튼을 달 날이 올 것이라고 생각조차 못 했다. 차분하다 못해 차가운 계통의 색을 가진 인테리어만 늘 추구해 왔으니 말이다.

 까만 눈동자가 커튼에서 다른 곳으로 더디게 움직였다. 곧 시후는 나른한 눈매를 접은 채로 그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시야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피아노 의자에 앉아 악보를 보고 있었다.

 갈색 머리칼과 색소 옅은 눈동자를 가진 남자는 부드럽고 단정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런 남자는 제 뒤에서 흔들리는 커튼과 아주 잘 어울렸다. 흡사 패션 화보에 나온 모델 같은 모습에 시후는 만족감을 느꼈다. 평소 눈길조차 주지 않았던 밝은 컬러의 커튼으로 바꾼 보람이 있었다.

 뒷배경 덕에 제 싱그러운 매력이 더해진 청년은 이윽고 피아노 연주를 시작했다. 어느 유명 영화의 BGM으로 삽입된 재즈곡이 공간 전체를 에워쌌다. 익숙한 멜로디를 들으며 시후는 들고 있던 커피 잔을 입술에 갖다 대었다. 혀를 촉촉하게 적시는 커피가 평소보다 향긋하게 느껴졌다.

“형.”

 잠시 후, 다정다감한 목소리가 시후의 귓등을 건드렸다. 방금까지 거실을 울렸던 피아노 연주만큼이나 듣기 좋은 음색이었다.

“연주 어땠어요?”

 그렇게 묻는 남자는 피아노 의자에 앉은 채 미소를 그리고 있었다. 화사한 얼굴에 담긴 건 애정이었다. 분명하고 거대한 사랑에 시후는 그를 바라만 보았다.

 상대는 여전히 웃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이마를 덮고 있던 머리카락이 그의 고갯짓에 가볍게 흔들렸다. 시후가 대답할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뜻이었다.

 시후는 바로 답하는 대신 그의 옆으로 다가가 허리를 수그렸다. 가까이 몸을 붙이니 잔잔하게 웃던 상대가 숨을 들이마셨다. 빠른 속도로 붉어지는 목덜미를 응시하던 시후는 곧 그의 귓바퀴에 입술을 갖다 댔다.

“좋아.”

 시후는 다음 말을 덧붙이기 전에 일부러 뜸을 들였다. 상대의 긴장감을 부추기기 위함이었다.

“네 피아노 연주.”

 말을 마친 뒤 시후는 그의 귀마저 빨갛게 변하는 과정을 즐겁게 감상했다. 잘 익은 사과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상대방이 두 팔로 허리를 끌어안았다. 와락 안은 채 제 가슴에 얼굴을 파묻는 모습에 시후는 자신도 모르게 남자의 이름을 불렀다.

“유예준.”

“정말 좋았어요?”

 예준은 시후의 몸에 얼굴을 묻은 채로 웃었다. 맞닿은 부위에서부터 진동이 은은하게 퍼져 나갔다. 간지러운 감각에 시후의 눈 부근이 꿈틀거렸다.

 그는 조용히 생각했다. 언제쯤 안 귀여워질까, 유예준은.

“나는요?”

 한 번 더 질문을 건네며 예준이 고개를 들었다. 올려다보느라 눈이 더 동글동글하게 변해 있었다.

“나 좋아해요?”

 갈망을 숨기지 않는 질문이었다. 시후는 예준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넘겼다.

“어떤 것 같아.”

“대답 피하는 거예요?”

 도발적인 물음에 시후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것 봐라, 하는 시선을 던지자 예준은 빙그레 미소 지었다. 하루하루 날이 지날수록 유예준은 시후를 대함에 있어 더욱 능숙해졌다. 어떤 말로 그를 자극하면 되는지, 또 어떤 애교로 그를 달래면 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예준을 보고 있자니 속이 훤히 꿰뚫리는 기분이 들었다. 시후는 어이없다는 듯 바람 빠진 소리를 뱉은 뒤 손을 움직였다. 머리를 정리해 주던 손이 상대의 목 뒤를 잡아 고정했다.

 그런 채로 시후가 한 행동은, 서로의 입술을 포개는 것이었다. 그는 제 입술에 닿는 보드라운 촉감을 즐기며 고개를 느릿느릿 기울였다. 허리를 감싸 안고 있던 예준의 팔 힘이 강해졌다. 예준은 긴 속눈썹을 깜빡이더니 입을 벌렸다.

 그의 뜻을 읽은 시후는 유쾌함을 느끼며 상대의 벌어진 입 안으로 혀를 밀어 넣었다. 이것이 자신도, 예준도 원하는 바임을 확신했다.

 시후의 생각이 옳았다. 예준은 제 입 안으로 들어온 혀를 빨아당겼다. 서로의 혀가 타액으로 흠뻑 젖을 만큼 진한 딥키스였다. 젖은 물소리가 귓등을 긁는 것을 느끼며 시후는 눈을 감았다. 한없이 야릇한 감각이 목뼈를 찌르르 울렸다.

 열기와 흥분으로 이루어진 분위기에 질식하기 직전, 시후는 먼저 입술을 떼었다. 시후 자신의 것인지, 예준의 것인지 모를 액체로 입술이 반들반들 빛났다. 그는 버릇처럼 붉은 혀를 내밀어 아랫입술을 핥았다.

“대답이 됐을까?”

 그 모습을 올려다보고 있던 예준의 갈색 눈동자에 빛이 반짝였다. 기이할 정도로 형형한 눈빛을 드러낸 채 예준이 말을 건넸다.

“응. 대답이 됐네요, 충분히.”

 시후는 “흠” 하고 만족 어린 소리를 내었다. 그가 배부른 고양이처럼 나긋나긋한 표정을 짓자 예준이 키득거렸다.

“꼭 연인 같다, 우리. 안 그래요?”

 웃음과 함께 혼잣말에 가까운 음성이 시후를 자극했다.

 그 순간, 보기 좋게 올라가 있던 시후의 입꼬리가 일직선으로 바뀌었다. 예준의 목덜미를 감싸고 있던 손 역시 잘게 꿈틀거렸다.

“아.”

“……아.”

 예준이 당황한 듯 소리 내자 시후 역시 따라 중얼거렸다. 이런, 실수했다. 동요하는 기색을 들키고 만 시후는 언제 흔들렸냐는 듯 평정심을 되찾았다.

 그러나 예준의 눈동자는 이미 미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머뭇거리다가 긴 속눈썹을 밑으로 내리깔았다. 허리를 감싸 쥐고 있던 팔 힘이 풀어졌다.

“미안해요, 형. 부담 주려던 건 아니에요.”

“네가 왜 미안…….”

 반사적으로 날카로운 목소리를 내었던 시후는 입을 닫았다.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어느새 밑으로 내려간 예준의 팔이 무기력하게 느껴졌다.

 그 순간 어디선가 핸드폰 진동 소리가 들렸다. 예준은 피아노 위에 있는 자신의 핸드폰을 돌아본 뒤 밝게 말했다.

“형 핸드폰인가 봐요. 전화 오는 것 같은데.”

“……그래.”

“같이 찾을까요?”

“아니, 쉬고 있어.”

 목 뒤를 감싸고 있던 손가락이 예준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가벼운 스킨십이 마음에 드는지 예준이 입술을 올려 잔잔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 모습에 시후는 가슴에 가시가 박힌 듯 따끔거림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통증을 내색하지 않은 채 발걸음을 움직여 침실로 걸어갔다.

 창문을 열지 않은 침실은 벌써부터 후덥지근하게 익어 있었다. 7월이 되자마자 뜨거워진 온도 때문이었다. 답답한 공기 속에서 시후는 걸음을 멈춘 채 중얼거렸다.

“……짜증 나게.”

 백시후 본인에게 하는 말이었다. 그는 왜 예준이 사과를 했는지 알고 있었다.

 섹스 파트너라기엔 감정이 깊고, 애인이라기엔 서로 간의 사이에 벽이 쳐져 있는 기묘한 관계.

 뭐라 지칭하기 힘든 관계가 계속되는 나날 속에서 시후는 제 이야기를 꺼냈다. 아버지와의 사이, 집안에서 바라는 백시후의 모습 등등.

 예준은 등을 바로 편 채 경청하는 얼굴을 했다. 갈색 눈동자엔 한없이 진지한 빛이 떠올라 있었다. 시후가 말을 마쳤을 때야 그는 연붉은색의 입술을 움직였다.

‘전에 형이 나한테 한 말 기억나요? 내 애정이 싫다고 그랬어요. 무겁고 질척거린다고, 질색이라고.’

 예준은 조용히 덧붙였다.

‘거기다 대고 난…… 형이 날 어디까지 받아 줄지 궁금하다고, 그런 소리나 해 버렸네요. ……미안해요. 형이 이렇게까지 힘든 줄 모르고 한 말이었어요.’

 시후는 받아치고 싶었다. 누가 힘들다고 했나. 그 정도는 아니다. 그러나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다시 삼킨 건, 예준이 예쁜 미소를 그렸기 때문이었다. 그 얼굴에 홀려 말문이 막힌 사이, 예준이 다시 입술을 달싹였다.

‘이제 부담 주지도 않고, 부추기지도 않을게요.’

‘…….’

‘나 때문에 가족분들 눈치 보지 마요. 형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아요.’

 예준이 했던 말들을 회상하며 시후는 인상을 썼다. 미련한 유예준. 그 아이의 순애가 그로 하여금 전에 없는 죄책감을 불러일으켰다.

‘차라리 화를 내든가.’

 왜 매번 웃기만 하고 끝내 버리는 건가. 예준이 답답해서, 그리고 그런 그를 답답해하는 자신에게 성질이 나서 시후는 목이 콱 막혀 왔다.

 멈췄던 핸드폰 진동이 다시 울렸다. 시후는 한 손으로 머리를 헝클어뜨린 뒤, 다른 손으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새까만 눈동자에 신경질적인 빛이 퍼져 나갔다. 그것도 잠시, 시후는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와 핸드폰을 귓가에 대었다.

“예.”

 그의 까만 머리카락이나 붉은 입술이 움직이자 한없이 건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말씀하세요, 아버지.”

 시후는 평화로웠던 주말이 틀어졌음을 바로 직감했다. 안면 근육이 자연스레 굳어졌다.

                                                                                                                                  

                                               ***

 그로부터 두 시간 뒤였다. 시후는 경직된 표정으로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정면에 펼쳐져 있는 건 높다란 산이었다. 안개가 낀 푸른 산맥은 우거진 녹음으로 아름다움을 자랑했으나 시후는 어떠한 감흥도 일지 않았다.

“시후 왔니?”

 시후를 부르며 나타난 사람은 등산복 차림의 아버지였다. 노년에 접어든 나이임에도 군살 하나 없는 아버지는 상당히 맵시가 좋았다.

“무슨 일로 여기까지 부르셨어요?”

 시후는 어깨 너머로 보이는 산을 곁눈질했다. 불편함이 계속되고 있었다. 이 평온한 주말을 방해한 사람이 바로 아버지였기 때문이었다.

 할 말이 있으니 나오라는 지시에 시후는 전화로 말씀 달라고 답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못 들은 척했다. 심지어는 별장 뒤에 나 있는 등산로 앞으로 오라는 덧붙임까지 건넸다.

 덕분에 시후의 신경이 송곳처럼 곤두세워져 있었다. 제집에 여우 같고 토끼 같은 예준이를 두고 나왔다는 사실에 퍽 속이 쓰렸다. 기다리고 있을 테니 맘 편히 다녀오라는 예준의 풋풋한 얼굴을 떠올리며 시후는 입을 열었다.

“개인 일정이 있습니다. 말씀 듣고 곧 가 봐야 해요, 그러니…….”

“무슨 일정?”

“…….”

“응? 무슨 일정이 있을까.”

 아버지의 옆으로 등산복을 든 사람이 다가왔다. 아버지는 새 등산복을 집어 들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뭐, 연애라도 하니?”

 시후는 당황하지 않았다. ‘연애’라는 단어를 뱉을 때 아버지가 능글맞은 목소리를 내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는 둘째 아들이 연애할 리가 없다는 강한 확신이 서려 있었다.

“그런 게 아니면 이 아비랑 산 좀 가자. 몸이 찌뿌둥해 죽겠다.”

 그러면서 아버지는 등산복을 시후에게 건넸다. 갈아입으라는 뜻에 시후는 한숨이 나왔다. 예준에게 금방 돌아오겠다고 말했건만 벌써 일정이 꼬이고 있었다.

“갑자기 등산은 왜…….”

“내가 형도 오라고 했어.”

 한마디 하려 했던 시후는 입을 닫고 말이 들려오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멀지 않은 곳에 동생, 백도영이 서 있었다.

 도영은 핸드폰만을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둥글게 휘어진 눈동자가 샛별처럼 반짝거렸다. 꼴사나운 얼굴에 시후는 그가 제 애인과 연락하고 있음을 바로 알아차렸다.

“나를 왜?”

“왜긴. 가족끼리 오붓하게 등산하자는 거지.”

 그렇게 말하는 도영의 왼손 약지에는 반지가 끼어 있었다. 기다란 손가락에 잘 어울리는 반지에 시후는 어쩐지 입 안이 쌉쌀했다. 별다른 대꾸 없이 말끄러미 응시하기만 하자 도영이 비로소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미혼일 때 자주자주 만나자. 결혼하면 잘 못 만나게 된대. 각자 가정에 신경 쓰느라 바쁘다나.”

 미혼, 결혼. 저런 단어를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백도영이 타인처럼 낯설게 느껴졌다. 한때 결혼은커녕 연애에도 관심 없어 보였던 제 동생이 맞나 싶었다. 시후는 등산복을 받아 들고는 동생 옆으로 다가갔다.

“다정한 두 부자끼리 오붓하게 가면 되지. 나는 왜 끌어들여?”

“음, 왜 그래? 형, 등산 싫어해?”

 산뜻하고 맑은 음색에 시후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자 도영은 고개를 비스듬하게 기울이더니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싫으면 아버지한테 말해.”

“뭘.”

“바쁘니 가 보겠다고, 다음부턴 아버지 멋대로 하지 말라고 해. 그런 다음 뭐, 자리 박차고 가 버리면 그만이지. 어때, 쉽지 않아?”

 두 형제는 서로 시선을 마주했다. 시후의 서늘한 눈길에도 도영은 기죽는 기색 하나 없었다. 오히려 여우처럼 눈꼬리를 휘며 의미심장한 말을 덧붙일 뿐이었다.

“왜, 바르고 잘난 아드님은 그런 반항 못 하나?”

“도영아.”

 시후는 평상시처럼 ‘백도영’이라고 부르는 대신 다정한 호칭을 사용했다. 물론 기쁘거나 유쾌해서 나온 이름은 아니었다. 그는 제 동생에게 눈을 고정한 채 입술만 올렸다.

“죽고 싶으면 계속 입 놀려.”

“계속 놀려도 안 죽을 것 같은데? 형, 아버지 앞에선 아주 모범적인 아들이잖아. 연기하느라 바쁠 텐데, 하하, 어디 나 건드릴 수나 있겠어?”

 도영은 한 손으로 시후의 어깨를 도닥이기까지 했다.

“제발 좀 죽여 봐, 생각만 해도 재밌으니까.”

 말을 마친 뒤 도영은 아버지 쪽으로 빠르게 걸어 나갔다. 작은형도 같이 가기로 했다느니, 등산 마치고 술 마시러 가자느니 등 재잘재잘 떠드는 그의 안색은 해사하기 짝이 없었다.

 그 꼴을 감상하던 시후는 불현듯 담배가 태우고 싶어졌다. 예준과의 관계가 깊어진 이후부터 자연스레 끊었던 담배였다. 오랜만에 입에 담고 매캐한 연기를 깊게 빨았다가 뱉고픈 충동이 일었다.

 시후의 손가락이 꿈틀거렸다. 마음을 다잡듯 천천히 주먹을 그러쥐자 손등 위로 여러 갈래의 핏줄이 사납게 돋았다.

                                                                                                                                                                       ***

 어린 시절부터 시후가 들어왔던 평은 대개 비슷했다. 속을 모르겠는 사람. 화 한 번 안 내는, 그래서 더 무서운 인간.

 일부러 감정을 숨기거나 억누른 건 아니었다. 시후는 연기가 아닌 실제로도 무감각한 성격이었다. 엔간하지 않은 상황이 벌어져도 늘 그의 마음은 잔잔한 호수와도 같았다. 뛰어난 평정심 덕분에 무언가에 휘둘릴 일 역시 거의 없었다.

 그렇기에 시후는 체한 듯 속이 울렁거리는 스스로의 상태가 신기했다. 좀처럼 동요하지 않아 왔던 자신이 모처럼 짜증이 나 있었다.

 헛웃음을 뱉은 뒤 시후는 눈동자를 옮겼다. 거기에는 그를 한없이 부정적인 상태로 몰아넣은 사람, 백도영이 서 있었다.

“와, 시간 잘 가네요. 벌써 저녁 식사할 때라니.”

 그렇게 웃는 도영 역시 시후처럼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후였다. 헐렁한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은 그는 정장 차림의 시후와 달리 한없이 가벼워 보였다.

“너야 시간 잘 갔겠지. 등산 내리 그 애 이야기나 하고.”

“제가 좀 주책이죠? 하하, 아버지 닮았나 봐요.”

“날 닮아?”

“그럼요, 우리 부모님 금실 좋은 거 누가 모르나. 애처가 아버지, 아들이 그대로 닮아 버린 거죠.”

“별소리를 다 해.”

 민망했는지 아버지가 왼손으로 입을 막으며 헛기침을 했다. 그런 아버지의 네 번째 손가락에도 반지가 끼어 있었다.

 시후는 화기애애하기 짝이 없는 두 부자 모두 반지를 끼고 있음을 새삼 깨달았다. 어쩐지 제 텅 빈 네 번째 손가락이 가시가 박힌 듯 따가웠다.

“그쪽 어른들한테도 인사 잘 드리고. 예의 바르게 행동해.”

“아무렴요, 제가 한 붙임성 하잖아요. 예의 바르게 사근사근 잘 모실게요.”

 그렇게 말하는 도영의 안색이 화사했다. 그는 벌써 연우와 예준, 유 씨 형제의 부모님과도 몇 번이나 만남을 가졌다. 낯빛이 밝은 걸로 보아 예준의 부모님에게도 좋은 평을 받은 게 분명했다.

 시후는 신나 죽는 도영의 옆얼굴을 관찰하다 손목으로 시선을 옮겼다. 불쾌감에 검은 눈썹이 찌푸려졌다. 오전에 나왔건만, 벌써 어슴푸레한 저녁이 찾아오고 말았다.

‘하.’

 백도영에 대한 욕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저 녀석만 아니었으면 예준과 휴일을 마음껏 즐겼을 것이다. 같이 식사를 하고, 낮잠을 자거나 영화를 보고. 어쩌면 바깥으로 드라이브를 하러 갔을지도 모른다.

 관자놀이가 지끈거리는 걸 느끼며 시후는 숨을 몰아쉬었다. 더는 여기서 노닥거릴 시간이 없었다. 지금이라도 돌아가 예준과 시간을 보낼 것이다.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순한 얼굴을 떠올리며 시후가 입을 열었을 때였다.

“어서 들어가자. 안에 손님들 기다린다.”

 아버지가 정면에 보이는 한식당을 턱짓했다.

“특히 시후, 등산 힘들었다고 퍼지지 말고.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해, 알겠지?”

“……저 말입니까?”

“그래. 저 양반들 눈에 잘 보여야 하거든.”

 잘 보여야 한다고? 시후는 도영을 돌아보았다. 도영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기도 누군지 모른다는 얼굴이었다. 물처럼 말간 낯짝을 마주한 시후는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아, 그렇게 나온다고?’

“윽.”

 그 순간, 도영의 뻔뻔한 표정이 허물어졌다. 눈썹을 꿈틀거리는 동생을 그대로 응시하며 시후는 알파 페로몬을 풀었다. 해일처럼 도영을 덮친 페로몬은 그대로 그의 목젖을 짓눌렀다. 숨이 막힌 건지 도영의 목울대가 불안정하게 꿈틀거렸다.

 그것도 잠시, 도영 역시 제 페로몬으로 시후의 페로몬을 막아 내었다. 두 알파가 호흡을 멈춘 채 시선을 교환했다. 베타는 느끼지 못하는 긴장감이 시후의 목뼈를 꾹꾹 찔렀다.

“……먼저 들어가세요. 곧 따라 들어가겠습니다.”

 몇 초 지나지 않아 시후는 평상시의 담담한 말투를 사용했다.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은 그는 전혀 기 싸움을 한 사람 같지 않아 보였다.

“하하.”

 도영이 재미있다는 듯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더니 제 형 옆에 바짝 붙어서는 능글맞은 목소리를 내었다.

“먼저 들어가요, 아버지. 저도 형하고 같이 들어갈게요.”

“바로들 들어와라?”

 아버지는 별생각 없는 얼굴로 사람들을 따라 걸음을 움직였다. 멀어져 가는 아버지를 지켜보다 도영은 부드럽게 말했다.

“우리 아버지, 참 제멋대로이시지? 말도 없이 약속을 잡고 말이야. 그것도 꽤 중요한 약속 같던데.”

“다 알고 있었지?”

“약속 말이야? 그럴 리가. 이건 나도 모르는 일이야.”

“…….”

“말씀하시는 거 들어 보니 음, 영감들한테 형 소개해 주려나 보던데.”

 도영은 고개를 기울이며 제 형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었다.

“뭐, 그럴 만하지. 이렇게 잘난 아들 자랑 안 하고 배기겠어?”

“백도영.”

 경고하듯 동생의 이름을 부르며 시후는 눈을 가늘게 떴다.

“왜 자꾸 사람 속을 긁지. 네가 바라는 게 뭐야.”

“속이 긁히긴 했어?”

 도영이 의미심장한 말을 건넸다.

“근데 왜 아직도 여기 남아 있어?”

“뭐?”

“속 긁혔다며. 기분 잡쳤다는 뜻 아냐, 그거? 그런데도 왜 아버지 곁에 있으려는 건데? 당장 자리 박차고 나가면 그만이잖아.”

 시후는 능력 없는 직원을 볼 때나 짓던 표정을 그렸다.

“손님들 기다린단 말 못 들었나? 분명 회사와 관련된 분들이겠지. 내 기분 때문에 비즈니스를 망칠 순 없어.”

“음, 역시 말 잘 듣네. 아버지가 형을 아낄 만해.”

 빈정거리는 말투에는 조롱기가 다분했다. 시후는 도영의 의도를 알 수 없었다. 그저 골탕 먹이려고 자신을 여기까지 데려온 걸까. 그렇다면 왜? 제 애인의 동생과 붙어먹는 게 싫어서?

 시후는 오전에도 원했던 흡연을 다시 갈망하게 되었다. 그는 담배 한 대 피우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먼저 걸음을 움직였다.

 무시하겠다는 뜻을 비치자 도영이 “하” 하고 바람 빠진 소리를 내었다. 그러든 말든 계속 앞으로 향하는 시후의 등에 대고 도영이 이렇게 말했다.

“언제까지 그렇게 살려고?”

“…….”

“응? 언제까지 아버지의 잘난 아들로만 남아 있을 거냐는 소리야.”

 한 옥타브 낮아진 도영의 음성이 울렸다.

“그렇게 숨기고 사는 거, 안 힘들어?”

 시후는 고개만 돌려 동생을 위아래로 훑었다. 그의 눈길이 도영이 끼고 있는 반지로 고정되었다. 그것도 잠시, 시후는 도영을 외면한 채 앞으로 걸어갔다.

 끈적끈적한 오물을 뒤집어쓴 듯 한없이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안 힘드냐는 동생의 질문에 여러 가지 말이 치받쳐 올랐으나 시후는 삼켜 냈다.

‘됐다.’

 상대하지 말자. 말 섞어 봤자 달라질 게 있나.

 그래, 달라질 건 없었다. 자신은 예준을 혼자 두고 여기까지 왔다. 도영이 말한 대로 ‘잘난 아들’의 타이틀을 지키기 위해.

 거기까지 생각한 시후의 눈 밑에 청회색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시후는 안내하는 종업원을 따라 걷다가 핸드폰에 뜬 메시지를 확인했다. 긴 속눈썹에 반쯤 가려진 눈동자가 미미하게 흔들렸다.

[아직 못 와요? 많이 피곤하겠어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이따 봐요, 제가 안마라도 해 줄게요.]

 예준의 메시지들이 핸드폰 액정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시후는 마지막 덧붙임을 읽었다.

[고생이 많아요. 보고 싶어요.]

 시후는 결국 “시발” 하고 중얼거렸다. 날카로운 음색과 내용에 놀란 종업원이 그의 안색을 살폈다.

 그러거나 말거나 시후는 핸드폰을 움켜쥔 채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경직된 얼굴에 무언가를 꾹꾹 눌러 참는 표정이 떠올랐다.

                                                                                                                                                                       ***

‘그렇게 숨기고 사는 거, 안 힘들어?’

 도영의 말이 계속해서 머릿속을 맴돌았다. 시후는 신경질적인 미소를 머금었다. 제 형이 제대로 열받았다는 사실을 아는지, 도영은 이제 그를 건드리지 않았다. 대신 모른 척 구석에 앉아 청주만 들이마실 뿐이었다.

 그러나 도영과 달리 다른 손님들은 시후의 상태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저 술에 취해 떠드느라 바쁜 그들은 모두 거래처 회사의 오너들이었다.

“아휴, 힘들다. 주말에도 회사 이야기나 해야 하고. 언제쯤 쉬나아, 쯧쯧쯧.”

 한 명이 긴 한숨을 쉬며 젓가락질을 했다. 장미꽃 모양으로 장식되어 있던 노루 고기 중 한 점이 그의 입 안으로 들어갔다. 말을 꺼낸 이는 그것을 질겅질겅 씹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빨리 자식 놈들한테 물려주고 싶은데 말이야. 쉽지 않아, 아주.”

“왜 쉽지가 않아?”

“왜긴? 정 회장, 그걸 몰라서 물어? 자식놈들 말이야, 뭐 하나 완벽하게 해내는 게 없어. 그게 영 믿음직스럽지가 않다, 이 말이지.”

 그 말에 정 회장이라는 사람은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 회장은 상대의 빈 잔을 채워 주며 제 자식 이야기도 함께 꺼냈다. 누구는 이래서 안 된다느니, 이놈 새끼는 술을 너무 좋아해서 문제라느니, 누구누구는 모 프로젝트를 말아먹었다느니.

 자식이 주제로 되자 오너들의 얼굴이 모두 새빨갛게 변했다. 마치 누가 목이라도 조른 듯 숨쉬기가 힘들다는 반응들이었다.

“이런. 자식들이 웬수구먼, 우리 다.”

 가만히 듣던 아버지가 점잖게 한마디 했다. 그러자마자 맞은편에 있던 이들이 가자미눈을 보였다.

“우리? 우리이? 저 양반이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자식 농사 떡하니 성공했으면서, 무슨 우리?”

 아버지는 우리 아들들도 부족한 게 많다며 겸손함을 보였다. 그러나 시후는 아버지가 빈말을 하고 있음을 단박에 알아차렸다. 그 말을 하는 아버지의 표정이 자신이 진심이라고는 하나 담기지 않은 접대용 말을 꺼낼 때마다 짓는 표정과 똑같았기 때문이었다.

 시후는 자신과 아버지가 많이 닮았음을 새삼스레 느꼈다. 헛웃음을 삼키고 있는데 누군가의 시선이 뺨에 달라붙었다. 정 회장이 어느새 은근한 미소를 머금은 채로 시후를 응시하고 있었다.

“시후 군은 차암 인물도 훤하지. 몸도 아주 다부졌고. 보기 드문 훌륭한 청년이야.”

 그러면서 정 회장은 혼자 호들갑을 떨었다.

“안 그래요? 자식 둔 아비 입장으로서 허허, 참 부럽달까. 이런 잘난 아들을 두고 있는 우리 백 회장이 말이야, 부러워.”

“……감사합니다.”

 시후는 예의 바르면서도 감정 없는 목소리를 내었다. 선을 긋는 말투에도 정 회장은 전혀 기분 나빠하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각 잡힌 자세가 마음에 든다는 표정을 지으며 시후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 시후 군은…… 만나는 사람 없나?”

 정 회장의 눈동자에 반짝이는 건 욕망이었다. 시후는 당황하지 않았다. 올 게 왔다, 하고 귀찮음을 느낄 뿐이었다.

 그에게 제 자식이나 형제 등을 엮어 주려고 시도한 사람은 한두 명이 아니었다. 우성 알파에 미혼, 갖춰진 요건들도 뛰어나다. 상등품에 욕심을 내는 사람들이 많은 건 당연한 이치였다.

“거참, 이 사람. 정 회장네는 아들밖에 없으면서 뭘 관심을 보여?”

“왜? 우리 아들, 오메가야. 알파와 오메가! 얼마나 합이 잘 맞는데?”

“허어어참, 남녀가 서로 합을 맞춰야지. 오메가라 해도 남자는 남잔데, 큼큼. 자네, 아버지한테서 우리 딸 얘기 좀 들었나?”

 다른 사람들도 앞다투어 한마디씩 던졌다. 저마다 시후를 훑는 눈길들이 은근했다. 아버지는 너털웃음을 흘리며 술잔을 기울였다. 말리기는커녕, 이 상황이 재미있다는 반응이었다.

 시후는 왜 아버지가 손님들에게 잘 보여야 한다고 말했는지 이해했다. 이들에게 저를 자랑하는 한편, 이들의 자식 중 한 명과 저를 이어 주려는 목적이 분명했다. 시후는 왁자지껄 떠드는 이들에게 말하고 싶었다.

‘정말 내가 좋은 상품처럼 보입니까?’

 그 생각이 미치자 헛웃음이 올라왔다. 섹스를 놀이처럼 해 댔던 백시후의 과거를 알았다면, 하다못해 꼬인 그의 성격을 조금이라도 간파했다면, 누구도 제 귀한 자식을 엮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시후는 지겨워하는 표정을 숨기고자 눈꺼풀만 밑으로 내렸다.

 뻔한 상황에 손가락들이 제멋대로 꿈틀거렸다. 술잔을 움켜쥔 자신의 손가락을 응시하던 시후는 문득 예준이 보낸 메시지를 떠올렸다.

[보고 싶어요.]

 그 순간, 욕이 목구멍까지 치받쳐 올랐다. 계속해서 저를 두고 떠드는 손님들을 향한 욕인지, 아니면 아버지를 향한 건지. 그것도 아니면 머저리처럼 앉아 있는 스스로에게 하는 말인지는 모르겠다.

 문득 얹힌 듯 속이 와락 쑤셨다. 불쾌감에 시후의 눈꼬리가 점차 신경질적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보고 싶어요, 보고 싶어요, 보고 싶어…….

 애정이 잔뜩 담겨 있던 마지막 메시지가 계속해서 머릿속을 맴돌 때, 시후는 마침내 고개를 들었다. 정 회장이 침까지 튀기며 아버지에게 제 자식을 어필하고 있었다.

“거참.”

 아버지는 은은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우리 시후는 남자한테 관심 없어.”

“어허? 백 회장이 어떻게 알아? 알파는 다아 오메가한테 끌리는 법이야, 그게 남자든 여자든 말이지.”

“이 사람 참, 남자 데려오는 건 도영이로 족해.”

 가볍기 짝이 없는 아버지의 어투에는 제 둘째 놈을 잘 알고 있다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올라간 입꼬리 역시 여유롭다 못해 자신만만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응시하던 시후의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폭탄처럼 터졌다. 자신도 모르게 입술이 움직일 만큼 강력한 폭발이었다.

“저.”

 목소리를 내자마자 모든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시후 쪽으로 향했다. 승자의 미소를 머금고 있었던 아버지도, 그때까지 한마디도 안 하던 동생도 마찬가지였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어쩐지 얹힌 체증이 내려간 듯 속이 후련해졌다. 가뿐해진 상태를 느끼며 시후는 눈을 몇 번 깜빡였다. 삽시간에 바뀐 제 변화가 당혹스러울 정도였다. 한마디 했다고 이렇게까지 마음이 편하다니.

 동요하던 것도 잠시였다. 몇 초 지나지 않아 시후의 입가에 웃음이 떴다.

“몸이 좋지 않아서요, 죄송합니다.”

“뭐라고?”

 아버지가 의아해하는 목소리를 내었다. 대관절 고분고분했던 제 둘째 놈이 왜 이러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그러나 시후는 거기에 대답하는 대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닫힌 문 앞으로 걸어가자 등 뒤에서 “어어”, 

“저, 저런!” 하고 당황해하는 반응들이 터졌다.

문에 손을 대었던 시후는 고개만 돌려 정 회장을 바라보았다. 느닷없이 찬물이 끼얹어진 분위기에 정 회장은 입만 벙긋거리고 있었다.

“아드님께선 저보다 더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겁니다. 회장님께서 굳이 주선하지 않아도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아버지의 얼굴에 경련이 일어났다. 황당함과 당혹감 그리고 괘씸함 등, 부정적인 감정으로 눈썹이 구겨지기까지 했다. 시후는 그런 아버지의 반응을 오래 살피지 않고 걸음을 움직였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모두 놀랐는지 그 누구 하나 쫓아오지 않았다. 시후는 소나무들이 심어진 마당에 도착해서야 걸음을 멈추었다. 중요한 모임을 난장판으로 만들어 버렸다는 사실에 뒤늦은 두통이 올라왔다. 마음속의 또 다른 자신이 조용히 물었다.

 후회되나?

“아니.”

 시후는 건조한 음색으로 스스로에게 단호히 대답했다. 후회되지 않는다. 그저 일그러진 아버지의 미간이 계속 생각날 뿐이었다. 지금 뭐 하는 짓이냐며 당장이라도 쫓아 나와 호통칠 아버지가 쉽게 그려졌다.

 그 순간 뒤에서 누군가 급하게 뛰어오는 소리가 울렸다. 그쪽으로 몸을 돌린 시후의 눈꼬리가 가늘어졌다. 아버지가 아니었다. 동생 도영이었다.

“형.”

 도영은 그를 부른 뒤 숨을 골랐다. 동생이 호흡을 가다듬는 동안 시후는 한쪽 호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거만하기 이를 데 없는 자세에 도영은 못마땅한 듯 인상을 썼다.

“……사람들한테 지시해 뒀어. 아버지 뛰쳐나갈 것 같으면 무조건 막으라고.”

“지시한다고 네 말을 들을까? 다 아버지 사람들인데.”

“형!”

 도영이 와락 짜증을 냈다.

“여유 있는 척 좀 하지 말지? 영감들 말에 수틀려서 일어난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아, 됐다. 나랑 그만 말씨름하고 빨리 가.”

“가라고?”

“그래, 가라고. 이참에 아버지 기대를 끊어 버려. 형, 아까 봤지? 아버지 말 고분고분 잘 들어 봤자 소용없어. 까딱 잘못하면 바로 결혼이야.”

“…….”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과 결혼하고 싶어? 아니잖아.”

 가만히 듣던 시후가 붉은색 입술을 움직였다.

“백도영.”

 그는 다음 말을 느릿느릿 덧붙였다.

“난 너의 그런 점이 싫어.”

 도영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의 이마 위를 덮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나부꼈다. 몇 시간의 등산에도 한 치 흐트러짐 없는 시후의 머리와 달리 자유분방한 모양새였다.

“내가 고맙단 말을 잘못 들었나?”

 시후는 너스레를 떠는 도영의 얼굴 쪽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너는 세상에서 네가 제일 잘났다고 생각해. 그러니 늘 자기 멋대로지. 나를 여기로 끌고 온 것도 네 멋대로, 나한테 가르치려 드는 것도 다 네 멋대로.”

“……내가 여기 형을 끌고 온 건 형한테 제대로 알려 주고 싶어서였어.”

“아버지가 날 휘두르려고 하는 거? 이런 적이 한두 번인 줄 아나. 굳이 네가 이 상황을 보여 주지 않아도 잘 알고 있어.”

“잘 아는데 왜 참아?”

 두통이 다시 일었다. 시후는 짜증을 숨기지 않는 눈길을 던졌다. 몇 시간이고 유지하고 있던 평정심에 금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너랑 내가 같은 처진 줄 아나 봐? 백도영, 아버지는 널 편애해. 네가 제멋대로 살든, 남자를 끌고 들어오든 다 봐준다고. 온갖 특권은 다 누리면서 사는 주제에 지금 날 가르치려 들어?”

“…….”

“네가 뭔데. 백도영 네가 대체 무슨 자격으로?”

 낮게 깔린 음성이 적, 갈라졌다. 거칠게 드러내는 분노에 도영이 눈을 부릅떴다. 이렇게까지 화를 내는 둘째 형을 처음 봐서인지 그는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서로에게 내뱉은 말들이 공중에서 떠도는 동안 두 형제는 침묵을 지켰다. 고요 속에서 시후는 상대방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날카로움과는 거리가 먼, 유들유들하고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은 자신과 정반대였다. 그 사실을 새삼스레 느끼며 시후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잠시 후, 묵직한 정적을 깨뜨린 사람은 백도영이었다. 도영은 한 손으로 제 머리를 거칠게 헝클어뜨렸다. 일그러진 입매에 답답해하는 기색이 묻어났다.

“나도 무시하고 싶어. 형 좆되든 말든, 신경 끄고 싶다고.”

“…….”

“그러다 마음에도 없는 사람 만나게 되든, 평생을 아버지의 트로피로 살든 말든, 내 알 바 아니다 싶은데. 그게 안 돼.”

 말하면서 도영의 턱이 경련하듯 꿈틀거렸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자체가 아주 낯뜨거워 미치겠다는 반응이었다. 그는 손바닥으로 제 이마를 짚기까지 하며 낮게 중얼거렸다.

“좋아하는 사람 숨기고 사는 거, 힘들잖아. 그게 어떤 기분인지 아니까, 가만 못 두겠다고.”

“…….”

“형, 예준이 좋아하잖아. 아냐?”

 도영은 그렇지 않냐는 표정을 지었다.

“하고 싶은 대로 살아. 그런다고 인생 망가지지 않아.”

 시후는 대답하는 대신 도영의 어깨 너머를 눈짓했다. 정장 입은 남자들이 급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이 무슨 말을 할지는 안 들어도 뻔했다. 당장 다시 돌아오라는 아버지의 지시를 건네줄 게 분명했다.

 시후는 도영 앞으로 가까이 다가가서는 그의 어깨를 부드럽게 도닥였다. 툭툭, 다정히 두드리는 손길에 도영은 감동하거나 좋아하는 대신 오히려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뭐 하는 짓이냐는 얼굴을 향해 시후는 빙긋 미소 지었다. 그러고는 긴 다리로 도영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아, 씨!”

“남의 휴일 망쳐 놓곤 말은 잘하는군.”

 뒤에 있던 사람들이 당황해 움찔거렸다. 시후는 그들에게 시선조차 두지 않은 채 입술만 움직였다.

“말만 하지 말고 행동으로 보여. 나 하고 싶은 대로 살게, 똑바로 도우라고.”

“……오?”

“갈 테니 네가 알아서 뒷수습해. 그 정돈 할 수 있지?”

“아하하.”

“웃지 마. 예준이와 연우 씨 아니었으면 너 가만 안 뒀어.”

 도영은 언제 투덜거렸냐는 듯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다. 여우같이 빙글빙글 웃는 얼굴이 화사했다.

“고맙지? 형 이렇게까지 생각해 주고. 동생 참 잘 뒀다, 백시후.”

 시후는 한 대 더 걷어차려다가 관두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최대한 빨리 여기서 벗어나는 게 급선무다. 곧 예준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 온몸을 두르고 있던 불쾌감이 빠르게 가시고 있었다.

“여긴 내가 어떻게 해 볼 테니까, 형은 이만 가 봐.”

 시후는 고맙다느니, 미안하다느니 등의 인사치레를 건네지 않았다. 그저 당연한 듯 고개 한 번 까딱인 후 제 차가 있는 쪽으로 걸어갈 뿐이었다.

 점차 속도를 더하는 걸음걸이를 알아차렸는지 등 뒤에서 도영이 소년처럼 키득거렸다.

                                                                                                                                                                       ***

 예상한 대로 아버지에게서 전화가 왔다. 시후는 핸드폰을 내려다보다 전원 버튼을 눌렀다. 잘생긴 얼굴에 피로감과 후련함이 섞여 떠올랐다.

‘예준이 좋아하잖아.’

 도영이 건넸던 말 한마디가 남아 귓불을 간질였다. 시후는 그 말을 천천히 곱씹어 보았다. 예준이, 좋아하잖아. 좋아, 하잖아.

 그래.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햇빛을 받으면 더 찬란하게 빛나는 눈동자를, 피아노를 칠 때마다 흔들리는 갈색 머리칼을, 무언가에 집중하면 자신도 모르게 다물어지고 마는 입매를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자신과 시선을 마주할 때마다 발갛게 변하는 뺨과 들썩이는 큰 몸을, 당연히 예뻐할 수밖에.

“하.”

 시후는 헛웃음을 뱉으며 제 큰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우스운 일이다. 불과 얼마 전만 해도 자신은 예준한테 이렇게 말했다.

‘난 그런 애정 싫어. 무겁고 질척거리잖아, 질색이야.’

 그랬던 자신이 중요한 식사 자리까지 박차고 나갈 만큼 예준을 갈구하고 있다. 두 사람 사이에 그어 두었던 선이 어느새 지워진 모양이었다. 언제부터였을까. 그 뚜렷하고 강한 선이 지워진 건, 대체 언제부터였던 건가.

 그가 생각에 잠긴 사이 차는 속도를 늦추고 있었다. 차가 모퉁이를 돌자 시후는 무심히 옆으로 시선을 옮겼다. 창문 바깥으로 보이는 건 작은 공원이었다. 인적 없어 보이는 공원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별생각 없이 다시 눈동자를 돌리려던 찰나였다. 갑자기 시후의 눈 부근이 잘게 움찔거렸다.

“……멈춰요.”

 한참을 침묵했던 터라 음색이 살짝 갈라졌다. 동요를 숨기지 못하는 제 음성에 시후는 헛기침을 한 번 했다. 동시에 차가 멈추고 운전기사가 백미러로 의아한 시선을 보냈다.

“내릴 테니 이만 정리하고 퇴근해요.”

“네? 아니, 저…….”

 시후는 직접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갔다. 비라도 내리려는지 물 내음 섞인 바람이 불고 있었다. 축축한 공기가 닿은 부위들이 이유 없이 따끔거렸다. 시후는 정면으로 바람을 맞으며 공원으로 걸음을 움직였다.

 공원 깊숙한 구석에는 예준이 앉아 있었다. 어둠과 나무 때문에 하마터면 예준을 놓칠 뻔한 시후는 괜히 눈썹을 구겼다.

 그가 다가오는 줄도 모른 채 예준은 정면만 응시하고 있었다. 그런 예준의 손에 들린 건 담뱃갑이었다. 네모난 상자를 만지작대는 손가락에서는 초조함이 묻어나고 있었다.

“다른 데에서 피워.”

 주의 깊게 숨을 고르고 난 뒤 시후는 첫마디를 뗐다. 예준은 놀란 듯 “어!” 하고 소리 내었다. 올려다보는 동그란 눈동자에 기쁨이 번져 갔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시후에게 달려들었다.

 예준은 두 팔을 벌려 시후를 꽉 끌어안았다. 맞닿은 몸에서 누구의 것인지 모를 심장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시후는 상대가 얼마나 자신을 기다렸는지 포옹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여러 가지 감정이 한데 섞여 그의 손끝을 긁었다.

“피우려고 꺼낸 거 아니에요. 그냥, 만질 게 없어서 꺼낸 거죠.”

“담배 때문에 나온 줄 알았어.”

“아니에요.”

 계속 입을 다물고 있었는지 예준의 목소리가 살짝 쉬어 있었다.

“형 기다리다가 바람 좀 쐴 겸. 그래서 나온 거예요.”

 기다리다가. 그 말의 자연스러운 울림이 오늘따라 가슴을 저미게 했다. 시후는 아버지를 만났을 때부터 경직되어 있던 몸이 비로소 풀림을 느꼈다. 그 순간 예준을 어떻게 하고픈 열망이 강하게 솟구쳤다.

“아!”

 아무것도 모르는 예준은 황급히 시후를 놓아주었다. 말간 얼굴에 멋쩍어하는 웃음이 번져 갔다.

“덥죠? 형 반가워서 그만.”

 시후는 대답하는 대신 질문을 던졌다.

“힘들었어?”

“네?”

“기다리느라 힘들었냐고.”

 시선을 마주하고 싶은 건지 예준이 고개를 살짝 수그렸다. 속삭임이 시후의 이마를 타고 내려왔다.

“형 보고 싶어 힘들긴 했죠.”

“그런데 왜 기다렸어.”

“…….”

“힘든 데 왜, 기다리냐고.”

 시후의 건조한 음색에 예준은 의아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시후가 계속 질문을 던지는 까닭을 이해 못 하겠다는 반응이었다.

 예준은 바로 답하는 대신 눈길로 시후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곧 긴 속눈썹이 길게 드리운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좋아하니까 기다리죠. 알잖아요, 내가 형 많이 좋아하는 거.”

 망설이지 않는 고백이 정적을 울렸다. 시후는 매번 애정을 드러내는 상대방을 응시하다 눈을 반쯤 내리떴다. 시야 안으로 예준의 운동화가 들어왔다. 문득 밖에서 얼마나 기다렸을까, 하는 궁금증이 떠올랐다.

 알 수 없는 한숨이 턱끝까지 차올랐다. 시후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다.

 오로지 백시후라는 개인으로만 이루어진 삶을 원하는 남자. 타인과 함께하는 세계를 바라지 않는 남자. 그게 백시후였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틀에 박힌 삶의 권태 대신 짜릿함을 줄 누군가를 찾고 말았다. 그렇게 예준을 찾았고 예준과 가까워졌다. 사랑임을 인정하는 순간, 겪지 않아도 됐을 갈등과 시련들을 마주하게 될 것임을 알면서도. 결국은 타인과 가까워지고 만 자신은 예전과 확실히 달라져 있었다.

‘사랑?’

 시후는 방금 머릿속으로 떠오른 단어를 곱씹으며 손바닥을 펼쳤다. 예준은 익숙한 듯 상체를 굽혀 시후의 손에 제 뺨을 대었다. 닿는 얼굴이 뜨겁게 익어 있었다. 아무리 밤이라 해도 여름의 더운 공기가 괴로웠을 게 분명했다.

 그런데도 왜 여기서 기다렸던 걸까. 늦게까지 오지 않는 상대방 때문에 속이 갑갑했던 걸까. 심란함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바깥으로 나온 걸까. 뭐라고 설명하기 힘든 감정이 풍선처럼 둥글게 부풀어 올랐다.

“예준아.”

 시후는 상대방의 이름을 불렀다. 목구멍이 간질간질하다.

“유예준.”

 예준이 대답하는 대신 빤히 응시했다. 큰 눈동자와 긴 속눈썹이 시후의 가슴을 요동치게 했다. 시후는 한없이 고요한 목소리로 한 음절, 한 음절 토막 내어 물었다.

“연애해 볼까, 우리.”

 말이 끝나기 무섭게 예준의 눈이 와락 떨렸다. 허물어지는 표정을 보자 시후는 식당에서 뛰쳐나올 때 느꼈던 해방감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거대한 후련함을 경험했다. 짜릿짜릿한 쾌감이 찌르르, 빗장뼈를 울렸다.

“무겁고 질척거리는 그거.”

 언젠가 자신이 했던 말을 그대로 건네며 시후는 예준의 발치까지 다가갔다. 서로의 숨이 겹쳐질 만큼 코앞이었다.

“나랑 하자.”

 그 순간, 예준은 호흡을 멈추었다. 크고 단단한 손이 시후의 손목을 물풀처럼 휘감았다. 거센 악력은 아니었지만 왜인지 얼얼했다.

 두 사람은 침묵 속에 잠긴 채 시간을 보냈다. 비 냄새가 담긴 바람이 시후를 에워쌌다. 이러다 비를 맞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자신은 상관없으나 예준이 찬비를 맞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안 되겠다 싶어 들어가자고 말하려던 참이었다.

“……하아.”

 예준이 길게 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아래로 떨어지는 목선이 부드러워 시후의 마음을 자극했다. 더디게 떨어지던 머리는 마침내 시후의 어깨에 닿았다. 예준이 잘게 움직일 때마다 숱 많은 갈색 머리카락이 헝클어졌다.

 그의 손목을 잡고 있던 예준의 손이 가느다랗게 떨렸다. 그 떨림을 느끼며 시후는 잡히지 않은 손을 올렸다. 그러고는 예준의 등에 손을 얹고 가만히 쓸어 주었다.

 이것만으로 충분히 대답이 되었다. 시후는 잠시 숨을 멈추었다. 얼굴 위로 열이 퍼져 나갔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

“저 안 울었어요.”

 시후가 현관을 지나 거실로 걸어갈 때였다. 콱 잠긴 예준의 음성이 귓등을 자극했다. 끄트머리가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에 시후는 입술을 벌리지 않고 가만히 미소 지었다.

 예준은 뒤에 우두커니 서서는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불긋하게 열 오른 눈가와 그 위에 찍힌 눈물점이 묘한 기분을 불러일으켰다.

“울었냐고 안 물었는데.”

“물어보려 했잖아요. 표정만 봐도 알아요.”

 어린아이 취급받고 싶지는 않았나 보다. 제 눈 주위가 벌겋게 변해 있는 건 알기나 하고 저런 말을 할까.

 시후가 입꼬릴 당기며 “흐음” 하고 소리를 내자 예준은 헛기침을 했다. 이제는 매끈하던 뺨마저 붉게 상기되었다.

“담배 피울래?”

“……담배요? 형 끊었잖아요.”

“그러게.”

 시후는 날카로운 눈꼬리를 나른하게 접은 채로 덧붙였다.

“그런데 오늘은 좀 참기 힘드네.”

 상대방의 미소에 놀란 건지, 아니면 의미심장한 뉘앙스에 자극받은 건지 예준이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그것도 잠시, 그는 “잠깐만요” 하고 중얼대며 제 바지를 더듬었다. 시후는 고개를 가로젓곤 그의 앞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내가 꺼낼게.”

“무슨…….”

 예준은 말을 끝까지 마치지 못한 채 굳었다. 시후는 석고상처럼 딱딱하게 굳은 상대방의 반응을 즐기며 손을 움직였다.

 희고 긴 손가락은 예준의 허리를 만지더니 이내 골반으로 다가갔다. 그 위를 살살 쓰다듬는 손길은 어쩐지 진득한 느낌이 없지 않아 있었다.

 손가락들이 뒷주머니 안으로 불쑥 들어갔다. 놀랐는지 예준이 “읏” 하고 콱 잠긴 신음을 내었다. 귓구멍으로 파고드는 신음을 감상하며 시후는 뒷주머니에 있던 담뱃갑을 가져갔다. 그러자 예준의 매끈한 뺨이 빨갛게 변했다.

 시후는 예쁘게 물들어 가는 얼굴을 눈치채지 못한 척했다. 그러고는 선반 위에 두었던 재떨이를 꺼내 들었다. 예준이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를 내었다.

“일부러 자극한 거죠.”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는 음색에 축축한 흥분이 묻어났다. 시후는 새까만 눈동자를 움직여 예준을 바라보았다. 상대방은 여전히 우두커니 선 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라이터 좀 켜 줄래.”

 시후는 대답하는 대신 느릿한 목소리를 내었다. 예준이 양미간을 좁혔다. 잘생긴 얼굴 위로 열망이 섬광처럼 스쳤다. 시후가 좋아하는 모습이었다. 바르고 단정하게 생긴 저 아이가 자신으로 인해 동요하고 욕정하는 게 좋았다.

 몇 초간의 정적이 흐르고 예준은 바지 주머니 안으로 손을 넣었다. 잠시 후 긴 손가락 사이에 걸린 건 은색의 라이터였다. 언젠가 시후가 선물했던 라이터를 켜자 불꽃이 높게 솟았다. 시후는 담배를 입에 물고는 잘게 일렁이는 불을 향해 고개를 수그렸다.

 숨을 한 번 들이마시며 시후는 밑으로 내리깔았던 눈동자를 위로 올렸다. 올려다보느라 삼백안이 된 눈에 서린 건 음욕이었다.

 진득한 시선에 예준은 턱에 힘을 주었다. 호두 모양이 옅게 생겨난 턱이 귀여웠다.

 시후는 등을 곧게 펴며 오른손으로 예준의 턱을 툭, 건드렸다. 가벼운 터치만으로도 예준은 놀라 몸을 움찔거렸다.

“너도 피워.”

“……그럴까요.”

“목소리 잠겼다.”

“…….”

“참 티를 잘 내, 우리 예준이는.”

“무슨 티요……?”

 시후가 긴 연기를 길게 흘리며 웃었다. 그의 손에 걸린 담배 끝이 붉은빛으로 물들어 갔다.

“나한테 꼴린 티 잘 낸다고.”

 말을 마침과 동시에 시후는 예준의 아래를 대놓고 쳐다보았다. 예준은 헐렁한 회색 추리닝 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런데도 발기한 성기의 윤곽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시후는 일부러 바람 빠진 소리를 냄으로써 상대방의 얼굴을 벌겋게 만들었다.

 예준은 시후의 한 손에 들려 있던 재떨이를 빼앗듯 가져갔다. 수치심 때문인지 그는 입술을 몇 번 달싹이다 뱉듯이 말했다.

“재 떨어져요.”

“아.”

 시후는 그러냐는 반응을 일부러 무심하게 보이며 재를 털었다.

“저 줘요, 그거.”

“담배?”

“네.”

 시후는 새 담배를 꺼내 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1초도 되지 않아 그는 생각을 그만두었다. 예준이 두 손으로 재떨이를 든 채 입을 벌렸기 때문이었다. 살짝 벌어진 입술이 탐스러운 과육을 닮아 있었다.

 시후는 한없이 야릇한 기분이 제 몸속을 헤집는 것을 느꼈다. 저 입 안으로 혀나 성기를 밀어 넣고 싶은 충동에 호흡마저 흐트러졌다.

 씨발, 유예준.

 흥분 어린 욕설이 목구멍까지 치받쳤다. 똑똑한 아이다. 어떤 식으로 자극하면 백시후가 허물어지는지를 잘 알고 있다.

“…….”

 침묵 속에서 시후는 예준의 입에 담배를 물려 주었다. 예준은 촘촘하고 기다란 속눈썹을 밑으로 내린 채 흡연했다. 시후가 담배를 빼자 그의 입술 사이로 희고 긴 연기와 함께 읊조림이 흘러나왔다.

“형도 티 나요, 나한테 꼴린 거.”

“그래?”

 서로를 향한 욕망이 고스란히 드러난 지금, 담배 따위를 피울 여유가 없어졌다. 시후는 예준에게 눈길을 고정한 채 재떨이 위에 담배를 비벼 댔다. 거칠게 비벼진 담배의 몸이 꺾이고 삽시간에 불이 사라졌다.

“아깝게 왜…….”

 예준은 말을 끝까지 마칠 수 없었다. 시후가 담배를 재떨이 위로 던지더니 그대로 그의 목을 잡아 제 쪽으로 잡아당겼기 때문이었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수그린 예준의 입술 위로 시후가 입술을 겹쳤다. 자연스럽게 입 안으로 들어간 시후의 혀가 예준의 혀를 빨았다. 매운 담배 맛이 났다. 유쾌하다고 보기 힘든 맛에도 이상하게 군침이 돌았다.

 머릿속이 어지러워지는 걸 느끼며 시후는 고개를 기울였다. 그는 키스함과 동시에 발을 들어 예준의 종아리를 쓸어내렸다. 명백한 도발이었다.

“형.”

 먼저 입술을 뗀 사람은 예준이었다. 그는 서로의 숨결이 얼굴에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를 유지한 채 쉰 음색을 내었다.

“재떨이, 떨어뜨리겠어요.”

“떨어뜨려.”

“그러다 바닥에 재가…….”

“그럼 들고 있든가.”

 그러고는 “내가 뭘 하건” 하고 덤덤히 덧붙이며 몸을 예준에게로 더 가까이 붙였다. 바짝 붙인 하반신에 두툼한 것이 닿았다. 그게 예준의 성기임은 굳이 밑을 확인하지 않아도 알았다.

 시후는 여전히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채 눈을 깜빡였다. 그것만으로도 하체를 누르는 것의 크기가 더해져 갔다.

 어떠냐는 시선을 보내자마자 예준의 눈꼬리가 날카로워졌다. 순한 인상이 순식간에 바뀐 순간, 예준이 두 손으로 시후의 양 뺨을 거머쥐었다. 재떨이가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바닥 위로 재와 담배꽁초가 어지러이 흩어졌지만 두 사람 모두 관심 두지 않았다.

 예준은 날이 선 눈매를 한 채 시후를 응시하다가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시후는 신음을 삼키며 양미간을 좁혔다.

 예민한 부위가 거침없이 씹히고 빨림과 함께 페로몬 향이 공간 전체를 채우기 시작했다. 시후의 우성 알파 페로몬마저 내리누르는 존재, 예준의 페로몬이었다.

 거실을 에워싸는 묵직한 페로몬 향에 시후는 현기증이 일었다. 그가 오메가였다면 힘이 풀리고 단숨에 발정 났을 농도였다.

‘알파 되니 더 알기 쉬워졌어, 유예준.’

 당장이라도 쓰러뜨려 덮치고 싶다는 상대의 성욕을 고스란히 느끼며 시후는 목을 내어 주었다. 한참이고 목덜미를 탐하던 예준은 이번에는 귀를 애무했다. 그가 귓바퀴를 물며 귓구멍으로 뜨거운 숨결을 불어넣자 시후는 “음” 하고 소리 냈다.

“시후 형.”

 예준은 시후의 귀에 입술을 댄 채로 속삭였다.

“안고 싶어요.”

 부드러우면서도 힘 있는 음성이 귀를 어루만졌다. 시후는 바로 대답하는 대신 예준의 어깨를 그러쥐었다. 손등 위로 핏줄이 볼록하게 튀어나올 정도로 힘을 주자, 예준은 혀를 내밀어 귓불을 핥았다.

“읏.”

 기어코 시후는 새된 신음을 터뜨리게 되었다. 등 위로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것 같은 느낌에 인상을 쓰자 예준은 한 번 더 읊조렸다.

“허락해 줘요.”

“허락해 줘?”

“네.”

 뺨을 잡고 있던 손들이 아래로 향했다. 어깨를 훑고 팔뚝을 따라 손목을 쓰다듬는 동작이 은근했다.

“시후 형, 제발.”

 시후는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예준의 입에서 나오는 ‘시후’라는 제 이름이 더없이 야하게 느껴져서였다.

“좀 더 애원해 봐.”

 손목을 지분거리는 체온을 즐기며 시후는 느릿느릿 덧붙였다.

“보기 좋거든, 지금. 예뻐.”

 말이 끝나자 예준의 색소 옅은 눈동자에 빛이 돌았다.

“……이렇게요?”

“하아…….”

“이렇게 애원하면, 될까요?”

 손목을 건드리던 터치가 사라지더니 삽시간에 엉덩이가 잡혔다. 시후는 반사적으로 하체에 힘을 주며 입을 벌렸다. 둔부를 쥔 손들이 장난치듯 그 부위를 주물거렸다. 시후를 당황하게 만들기 위함이 분명했다.

 시후가 아무 말이 없자 손길이 더욱 진득해졌다. 예준의 양손은 급기야 엉덩이를 잡아 벌리는 행위까지 벌였다. 거부감과 흥분감이 뒤섞여 시후를 자극했다.

 꾹, 꾸욱.

 예준이 노골적으로 둔부를 애무할 때마다 바지 안에 숨겨져 있던 시후의 성기가 딱딱하게 부풀어 갔다.

 예준이 입꼬리를 당기며 미소를 보였다. 어쩐지 의기양양해 보이는 모습이 못마땅해 시후는 인상을 썼다. 예준은 그런 시후의 날카로운 반응에도 기죽지 않았다. 오히려 “아하하” 하고 청량한 웃음을 터뜨리더니 상대의 눈 부근에 입을 맞추었다.

“형, 눈가가 붉어요.”

“…….”

“흥분했죠?”

 잘난 척하긴. 시후는 몇 초 동안 눈을 마주하다가 결국 헛웃음을 뱉었다. 그러고는 예준의 어깨를 잡고 있던 손을 올려 제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렸다. 긴 외출에도 흐트러짐이 없었던 머리카락이 한순간에 무너졌다.

 결 좋은 흑발이 이마 전체를 덮는 순간, 시후는 제 까만 머리카락만큼이나 선명한 붉은 입술을 움직였다.

“그래, 네가 이겼어.”

 엉덩이를 잡고 있던 악력에 힘이 더해졌다. 예준은 숨을 크게 토해 내더니 시후를 안아 올렸다. 제 긴 다리가 허공에 뜨는 걸 느끼며 시후는 눈을 가늘게 떴다. 아홉 살이나 어린 애한테 안기는 게 익숙한 삶이라. 예전이라면 상상도 못 했을 일이었다.

“안 무거워?”

“네, 전혀.”

 진심인지 예준은 힘 하나 들이지 않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시후는 “흠” 하고 중얼거리며 짚고 있던 그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근육의 단단함이 더할 나위 없이 훌륭했다. 서둘러 예준의 몸을 탐하고 싶어 신경이 송곳처럼 곤두섰다.

 욕구가 몸을 키우자 시후의 페로몬 역시 예준만큼이나 짙어졌다. 두 페로몬은 서로 우위를 차지하고 싶다는 듯 팽팽하게 맞서기 시작했다. 어떨 때는 예준의 페로몬이 시후의 페로몬을 누르기도, 또 어떨 때는 시후의 향이 예준의 향을 짓뭉개기도 했다. 마운팅으로 제 서열이 높음을 증명하는 짐승들과 다를 바 없는 싸움이었다.

 두 사람은 엉켜 침대 위로 쓰러졌다. 부드러운 매트리스가 등에 닿는 걸 느끼며 시후는 제 쪽으로 예준을 잡아당겼다. 예준은 웃음을 터뜨리곤 순순히 상체를 기울였다.

 서로의 이마가 자연스레 맞물렸다. 그런 두 사람에게서는 똑같은 담배 냄새가 났다. 시후는 예준을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해 냈다. 지금과 달리 추운 겨울날이었다.

‘그때도 예뻤지. 예쁘고, 야하고.’

 당시 예준은 반듯한 얼굴을 한 주제에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어울리지 않는 그의 모습에 시후는 오히려 관심이 생겼다. 뭐 하는 애일까. 무료하기 짝이 없었던 일상의 리듬이 빨라지고, 모처럼 즐거움이 올라왔던 때를 시후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무료함을 없애기 제격이라고 생각했던 상대방은, 이제 애인이 되어 있었다. 시후는 ‘애인’이라는 새로운 관계를 가만히 곱씹어 보았다. 아직은 이 단어가 주는 무게감이 낯설었다.

“음.”

 생각에 잠겨 있던 찰나, 시후는 낮은 소리를 내며 한쪽 눈을 찡그렸다. 별안간 예준이 그의 넥타이를 잡아 올렸기 때문이었다. 팽팽해진 넥타이 위에 고정된 핀이 반짝거렸다.

“나한테 집중해요.”

 속삭이는 예준의 목소리가 다정다감했다. 딴생각 좀 했다고 넥타이를 잡아당기는 거친 행위와는 어울리지 않는 음성이었다. 시후는 손가락으로 제 넥타이핀을 만지작대는 예준을 올려다보았다.

“집중하고 있어.”

“거짓말.”

“정말인데. 우리 첫 만남을 생각하고 있었거든.”

 시후가 오른손으로 예준의 티셔츠를 잡아 올렸다. 헐렁한 편이었던 티는 어렵지 않게 올라가며 탄탄한 상반신을 보여 주었다. 시후는 그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피부를 꾹꾹 눌렀다. 움찔거리는 동요가 마음에 들었다.

“네 생각을 한 거잖아. 너한테 집중한 게 맞지.”

“갑자기 왜 그 생각이 들었어요?”

 넥타이가 느슨해지고 단추가 하나둘씩 풀어졌다. 여름용 와이셔츠가 벗겨지고 있음을 느끼며 시후는 입술을 떼었다.

“그러게.”

“뭐예요, 그게.”

 예준은 입꼬리를 당겨 올리더니 시후의 가슴팍으로 고개를 파묻었다. 시후는 상대의 티셔츠 안으로 밀어 넣었던 손을 아래로 툭 떨어뜨렸다. 유륜 위로 닿은 부드러움에 힘이 빠진 까닭이었다.

 보드랍고 촉촉한 감촉이 예준의 입술임은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았다. 그 입술은 유두를 머금더니 좌우로 느리게 비벼 대었다. 입술 사이에 끼인 유두가 빠른 속도로 단단해졌다.

 예준은 움직임을 멈추더니 이번에는 뜨거운 숨결을 불어넣었다. 민감한 부위에 가해지는 열기에 시후는 허리를 살짝 들어 올렸다.

“잘하네.”

 시후가 조용히 칭찬하자 예준이 유두를 문 채로 웃었다. 맞닿은 부위로부터 퍼져 나가는 진동이 지독히 자극적이었다. 가슴이 빨린 것만으로도 정액을 싸지를까, 시후는 슬쩍 다리 사이를 오므리려고 했다.

“안 돼요.”

“하.”

“숨기지 말고 그냥 싸요. 싸 봤자 어차피 또 발기하잖아요.”

 예준은 기가 막힐 정도로 눈치가 빨랐다. 알파가 된 이후로 예민해진 감각, 그리고 시후와의 수없이 많은 섹스 경험으로부터 얻은 눈썰미 덕분이었다.

 시후의 다리 사이로 손이 파고들었다. 긴 손가락들이 피아노를 치듯 안쪽 허벅지를 톡톡 두드렸다. 가벼운 터치만으로도 시후는 흥분해 버리고 말았다.

‘큰일인데.’

 시후는 “윽” 하고 잇새 소리를 내며 생각했다. 평소 섹스하던 때보다 더 빠르게 몸이 들떴다. 러트가 왔을 때와 비슷한 감각에 약간의 짜증마저 일었다.

 자신을 통제해야 상대방을 컨트롤할 수 있는 법이다. 그게 되지 않을 시 눈치 빠른 유예준에게 꼼짝없이 당할 것이다. 흥분이 일어남과 별개로 자존심이 구겨졌다.

 그래서 시후는 손가락으로 예준의 머리를 헤집었다. 갈색 모발을 헝클어뜨린 뒤 귓바퀴를 부드럽게 지분댔다. 기습적인 애무에 예준은 윙크하듯 눈가를 찌푸렸다. 경련하듯 꿈틀거리는 뺨은 그 역시 쾌감에 휘말렸음을 알려 주는 증거였다.

“형, 일부러 만진 거죠?”

“응, 너 기분 좋으라고.”

“그것만은 아니잖아요. 나 다 알아요.”

 시후는 성욕으로 풀린 눈매를 한 채 조용히 물었다.

“뭘 아는데.”

“사정할 것 같으니까 괜히 나 괴롭히는 거잖아요.”

 예준이 미소 지었다. 호선이 된 입술이 타액으로 반들거리고 있었다.

“솔직하지 못하네요, 시후 형.”

“그러는 넌 너무 솔직하고.”

“하하.”

 귀를 만지던 시후의 손이 목덜미 뒤를 한 번에 잡았다. 그런 채로 그는 예준의 입술에 제 가슴을 내밀었다.

“말 그만하고 여기에 입 놀려 봐.”

 놀란 듯 예준이 눈을 크게 떴다. 당혹감에 흔들리던 눈동자에는 곧 기이할 정도로 형형한 빛이 번득였다.

 시후는 저 눈빛을 자주 보았다. 피아노 연주에 한껏 집중했을 때, 혹은 자신이 작곡한 곡을 분석할 때 드러내는 눈빛이었다.

 잡아먹을 듯 노려보던 예준은 입 모양으로 뭐라고 중얼거렸다.

‘욕?’

 시후는 너 지금 욕한 거냐고 물을 수 없었다. 언제 입을 달싹였냐는 듯, 예준이 곧바로 가슴을 빨았기 때문이었다. 머리카락이 피부를 간질임과 동시에 오른쪽 유두가 단숨에 흡입당했다. 살짝 들려 있던 시후의 허리가 둥글게 휘어졌다.

 뜨거운 타액이 유두를 흠뻑 적시는 게 생생히 느껴졌다. 예준은 살덩이에 침을 묻히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혀를 단단하게 세워서는 유두를 위아래로 긁으며 쾌락을 부추겼다. 노골적으로 제 한쪽 유두를 애무하는 혀놀림에 시후는 거칠게 숨을 토해 냈다.

“아……!”

 탄성과도 같은 소리를 낸 시후는 금방 이를 악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윽, 미친.”

 예준의 목덜미를 쥐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숨통이 막혀 고통스러울 텐데도 예준은 하던 행위를 멈추지 않았다. 몇 초간 참던 시후는 다시 입을 열었다.

“깨물지, 마.”

 그 말에 예준은 눈동자만 올려 시후를 응시했다. 날카롭게 빛나는 눈은 꼭 발정기의 짐승을 연상케 했다. 예준은 유륜 주위로 입술을 움직이더니 곧 살갗을 깨물었다.

 깨물린 피부 위로 옅은 잇자국이 생겨났다. 그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는지 예준은 같은 부위를 몇 번이고 물었다가 놓기를 반복했다. 그러고는 아까 그랬듯 유두를 짓씹으며 젖은 소리를 내었다. 질척한 타액 소리에 시후는 “하” 하고 헛웃음을 흘렸다.

“말 안 듣네.”

 예준이 물고 있던 유두를 뱉었다. 여러 번 물리고 빨린 통에 그것은 선홍빛으로 짙게 변해 있었다.

“말 듣고 있어요. 형이 그랬잖아요, 형 젖꼭지에 입 놀리라고.”

“내가 그런 단어도 꺼냈나?”

“꺼냈죠.”

 예준은 숨 쉬듯 다음 말을 덧붙였다.

“젖통 좀 잘 빨라고도 했고요.”

 기가 막힌 시후는 한쪽 입꼬리만 올렸다. 이제는 부끄러워하는 기색도 없이 음담패설을 뱉는다. 한때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던 숫총각은 어디로 간 건지. 이런 음란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으로 변모한 게 만족스럽기도, 또 아쉽기도 하다.

 여러 감정이 섞인 제 마음을 느끼며 시후는 빈정대듯 말했다.

“이게 잘 빠는 건가, 사돈총각.”

 시후는 예준이 순간이나마 흔들리는 모습을 느긋하게 감상했다. 예준은 유독 ‘사돈총각’이라는 명칭에 약했다. 그 단어를 들을 때마다 꼬인 관계에 심란해하면서도 욕정을 느껴 버리는 탓이었다. 시후는 그런 예준에게 네가 배덕감을 느끼는 것이라고 친절히 알려 준 바 있었다.

“왜 아무 말이 없지.”

“……잘 빨았다고 생각하는데요.”

 고개를 숙이기 무섭게 예준이 시후의 양 가슴을 움켜서 모았다. 느닷없는 손길에 보기 좋게 갈라져 있던 가슴골이 더욱 깊어졌다.

“봐요.”

 그 말에 시후는 검은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억지로 모인 제 가슴이 온전히 시야에 들어왔다.

“안 빤 쪽은 말랑해 보이잖아요, 색도 옅고요. 제가 빤 유두는 완전히…….”

“완전히, 뭐.”

“…….”

 예준은 잠시 숨을 멈추었다. 자신이 뱉은 말에 흥분해 버린 모양이었다. 그는 몇 초간 침묵하더니 다시 입술을 열었다. 젖은 입술 사이로 한 옥타브 낮아진 음색이 흘러나왔다.

“발기했는걸요.”

“손 놔 봐.”

 시후는 예준이 놓아준 가슴 쪽으로 손을 움직였다. 매끈한 손가락이 예준에게 빨렸던 유륜을 더듬었다. 촉촉하게 젖은 그곳은 불그스름하게 익어 있었다.

 어느새 예준은 호흡조차 하지 않은 채 시후의 가슴만을 뚫어질 듯 응시하고 있었다. 양미간이 좁아진 이마는 예준이 얼마나 흥분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시후는 저 이마에 입술을 대고 싶은 열망을 느끼며 말을 건넸다.

“그래, 정정하지.”

 시후는 침대에 누워 있는 채로 고개를 기울였다. 흐트러진 흑발이 이마 위에서 흔들렸다.

“우리 사돈총각은 가슴을 잘 빠는군요. 누구한테 배웠습니까?”

 시후의 존댓말에서 상대가 당황하길 바라는 기미가 풍겼다. 예준은 아직 가슴 위에 대고 있던 시후의 손등 위에 제 손을 갖다 대었다.

“어느 형님께 배웠죠.”

“형님?”

“네, 이런 방면에 참 능숙한 분이에요.”

 손등을 부드럽게 감싸 쥐던 예준은 곧 시후의 손을 옆으로 치웠다. 그런 뒤 아직 빨지 않은 쪽 가슴을 어루만졌다.

“친절한 형님이시기도 하고요. 잘 가르쳐 주셨죠, 이것저것.”

“친절해요?”

“네, 아주 많이요.”

 가슴에 달린 유두에 손가락이 닿는 순간, 예준은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그래서, 제가 그 형님을 참 사랑해요.”

 검은 속눈썹이 길게 드리워져 있던 시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느낌이란 이런 걸까? 낯설기도, 간지럽기도 한 느낌에 그는 침묵을 선택했다.

 예준이 입술을 벌리지 않고 미소 지었다. 유두 위를 지분대던 손가락이 빳빳하게 세워졌다. 곧게 세운 손가락이 유두를 꾹 눌렀다. 안으로 파묻힐 것처럼 유두가 들어가자 시후는 낮은 신음을 흘렸다. 예준은 말랑했던 것을 꾹꾹 누른 뒤 두 손가락으로 꼬집어 올리며 흥분을 더해 주었다.

 그러는 동안 다른 손은 어느새 시후의 중심부를 잡아 쥐었다. 바지 위를 문대는 손길이 자극적이라 시후는 상체를 일으키려고 했다. 그러자마자 예준은 예상했다는 듯 단단해진 유두를 툭 튕겼다.

“읏.”

“빨아도 좋아하고 손가락으로 건드려도 좋아하고.”

 예준이 다시 양손으로 시후의 가슴을 움켜잡았다. 가슴 주변의 살을 끌어모아 주무르자 손바닥 아래 깔려 있던 유두들이 둥글게 굴려졌다. 약한 부위가 마구 비벼지는 통에 시후의 허리가 저절로 들썩거렸다.

“주물러도, 응, 좋아하네요.”

“네가 좋아한다는 거야, 내가 좋아한다는 거야?”

“하하, 우리 둘 다요.”

 귓바퀴에 닿는 웃음소리를 감상하며 시후는 길게 숨을 뱉었다. 가슴과 하반신을 만지는 손길 때문에 흥분이 빠른 속도로 더해지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유예준을 깔아뭉갠 뒤 그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잘근잘근 씹어 먹고 싶었다. 식욕인지, 성욕인지 모를 욕망이 강하게 솟구쳐 영혼을 흔들었다.

 시후의 알파 페로몬이 예준을 뒤덮었다. 유예준은 거부감 어린 표정을 하기는커녕, 오히려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만족스러워하는 반응을 보였다.

“더 흥분했네요, 형.”

“윽!”

 별안간 다리 사이를 손 대신 묵직한 것이 내리눌렀다. 그것이 예준의 무릎임을 아는 데에는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무릎이 성기를 지그시 누르며 압박감을 주었다. 고통과 쾌감이 한데 섞여 시후의 목을 덮쳤다. 목덜미에 달라붙는 감각들에 시후가 입을 벌려 숨을 뱉었다.

 꾸욱, 꾸욱.

 예준이 무릎으로 아래를 애무할 때마다 침대를 딛고 있던 시후의 발이 세워졌다. 힘이 바짝 들어간 발목 쪽으로 예준의 시선이 닿았다. 미소를 짓기 무섭게 예준은 시후의 바지 벨트를 잡아당겼다.

“……괜찮겠어요?”

“뭐가?”

 차가운 금속음과 함께 벨트가 풀어졌다.

“오늘 많이 피곤할 텐데.”

“후우.”

“회장님 뵈러 아침부터 나갔잖아요.”

 시후는 부지런히 움직이는 예준의 동작을 감상하며 물었다.

“안 괜찮다고 하면 어쩔 건데.”

“한 발 빼 주는 걸로 끝내려고요.”

“하.”

“손으로 하든, 입으로 하든. ……다른 방법도 있으면 그것도 좋고요.”

 말하면서도 자극받았는지 예준의 음색이 점차 쉬어 갔다. 시후는 헛웃음을 뱉곤 다시 입을 달싹였다.

“괜찮다고 하면?”

“…….”

“말해 봐, 유예준. 괜찮다고 하면 어쩔 건데.”

 예준은 대답하는 대신 시후의 브리프에 손을 갖다 대었다. 야릇한 상황에 젖은 브리프가 성기에 찰싹 감겨 있었다. 손가락이 귀두에서 기둥으로 떨어지는 선을 어루만지듯 훑었다. 말 대신 행동으로 보이겠다는 뜻이었다.

 지켜보던 시후는 입꼬릴 당기며 직접 속옷의 밴드를 잡아 쥐었다.

“우성 알파 컨디션 걱정하는 사람은 예준이 너밖에 없어.”

“나도 다른 알파 걱정은 안 해요, 형이니까 하지.”

 그렇게 읊조리는 예준의 얼굴이 불그스름하게 익었다.

“애인이니까……. 걱정하는 거예요, 당연히.”

 애인이라. 낯선 단어를 마음속으로 곱씹어 보던 시후는 즐거워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바뀐 관계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래도 예준 한 명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시후는 직접 속옷을 잡아 끌어내렸다.

 잠시 후, 침대 밑에는 여러 종류의 옷가지들이 널브러지게 되었다. 시후는 자신처럼 똑같이 옷을 벗어 던지는 예준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올려다보느라 흰자위가 살짝 드러난 눈에는 욕망이 잔뜩 서려 있었다.

 그의 시선을 받은 예준이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리고 벌어진 시후의 다리 사이로 제 굵은 팔뚝을 밀어 넣었다. 엄지가 귀두를 툭, 건드리자 시후는 인상을 쓰며 숨을 뱉었다. 왠지 머리털이 쭈뼛 서는 기분이었다.

“안 되겠다. 나도 네 거 만져야겠어.”

“왜요?”

“만지고 싶으니까.”

 그 대답을 오만하게 하며 시후는 상체를 일으켰다. 이불을 들치고는 곧바로 예준의 성기를 잡아채려는 순간, 예준이 손목을 쥐어 막아섰다. 왜 그러냐는 시선을 던지자 예준은 “음” 하고 소리 내며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빨리 대답해. 안 그러면 바로 덮칠 거야.”

 장난이기는 했으나 어느 정도 진심이 담겨 있는 소리였다. 고민하는 얼굴을 하고 있는 유예준이 더없이 예뻐 보였기 때문이었다. 눈에 달린 긴 속눈썹은 어쩐지 야하게 느껴졌고, 대체 뭘 생각하는지 연신 꿈틀거리는 목울대 역시 사람의 성욕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덮쳐지기는 싫었는지 예준이 금방 입을 열었다. 시후는 약간의 아쉬움 속에서 그의 말을 들었다.

“하고 싶은 체위가 있는데, 해도 될까요.”

“변태.”

“아직 무슨 체위인지 말 안 했는데요.”

“거울 보여 주고 싶네, 지금 네가 어떤 표정 짓고 있는지.”

“……뭐, 굳이 안 봐도 어떨지 예상 가긴 해요.”

“그래서. 하고 싶은 체위가 뭔데.”

 예준은 시후의 귀에 입술을 가까이 가져다 댔다. 잠시 후, 귓가에 달라붙는 속삭임에 시후는 턱을 치켜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예준은 눈을 반쯤 내리뜨고 있었다. 빨갛게 상기된 뺨에서 흥분과 수줍음이 묻어났다.

 시후는 입꼬릴 당기며 “흠” 하고 소리 냈다. 정말이지, 유예준은 자신을 자주 웃게 만드는 마법을 가지고 있었다. 어찌나 강한 마법인지, 거부조차 할 수 없겠다.

“변태 맞잖아.”

 한마디 툭 건네자 민망했는지 예준의 표정이 완전히 허물어졌다. 당돌한 제안을 한 주제에 풋풋하기 짝이 없는 반응이었다. 한없이 야릇한 희열이 시후의 손끝을 긁었다.

“그래.”

 시후는 이마 위로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젖히며 입술을 움직였다. 그는 여전히 미소 짓고 있었다.

“그럼 누가 올라타기로 할까.”

 허락임을 알아차린 예준의 눈동자가 별처럼 빛났다. 반짝거리는 눈을 보며 시후는 한 번 더 읊조렸다. 변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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