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예준(1)
예준은 선반 위에 올려 둔 것들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을 받고 있는 것은 케이스에 잘 간직된 시계들이었다.
하나는 시후가 처음으로 선물해 준 시계였다. 그는 재밌게도 예준이 잠든 사이 손목에 저것을 채워 버렸다. 눈을 뜬 예준은 제 손목에 채워진 시계를 보고 의아해했다.
어리둥절해하는 예준을 보며 시후는 소리 내어 웃기까지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 같다며 웃어 대는 시후는, 그런 그야말로 소년처럼 풋풋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재밌어하던 시후를 회상한 예준은 자신도 모르게 부드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제 갈색 눈동자는 그 옆에 놓인 시계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눈길을 받는 시계는 눈이 부실 만큼 화려한 디자인을 하고 있었다. 곳곳에 다이아몬드들이 촘촘히 박혀 있었으며, 시계 정중앙에는 초록 에메랄드까지 자리잡혀 있었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강한 존재감을 표하는 이것 역시 시후의 선물이었다. 예준은 시계 선물을 받게 된 발단, 어느 병원 연주회를 떠올렸다.
***
병원 로비에는 인공 잔디와 꽃으로 이루어진 작은 정원, 그리고 누군가 기부한 그랜드피아노가 있었다. 그곳으로 예준은 천천히 발길을 움직였다. 깨끗한 흰색 와이셔츠에 여름 정장 바지를 입은 채로.
해당 병원은 재능 기부 참여자들의 신청을 받아 연주회를 선보이곤 했다. 예준은 그 참여자 중 한 명으로, 환자들 앞에서 피아노 연주를 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을 지켜보는 관객들에게 인사한 뒤 건반 위로 손가락을 올려 두었다. 얼마 있지 않아 흘러나오는 피아노 선율은 물처럼 매끄럽기 그지없었다.
젊은 연주자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훌륭했다. 연주가 끝나자마자 나오는 세찬 박수들이 그 증거였다.
예준은 자신을 보기 위해 원형으로 둘러싼 사람들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허리를 숙여 인사하던 예준은 문득 누군가를 발견했다. 손뼉을 치는 인파들 속에서도 눈에 확 띄는 미남, 시후였다.
반가움과 놀라움 속에서 여러 생각이 들었다. 형이 어떻게? 지금은 평일 낮이지 않는가. 회사에 있어야 할 사람이 왜 여기 있을까.
예준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 시후는 한쪽 입꼬리만을 올렸다. 네가 왜 놀라는지 알고 있다는 얼굴이었다.
“형.”
병원 관계자와 대화를 끝내자마자 예준은 곧바로 시후에게 뛰어갔다. 시후는 비서로 추정되는 사람들과 함께 서 있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여러 사람을 거느리는 그는 쉽게 대할 수 없는 위압감을 풍겼다.
“안녕.”
어딜 가도 드러나는 존재감에 예준은 그가 새삼스레 신기했다. 어떤 인생을 살면 저렇게 독보적인 분위기를 낼 수 있는 걸까. 나도 저 나이가 되면 저런 사람이 될 수 있는 걸까.
답이 없는 생각들에 매몰된 사이 시후가 걸음을 움직였다. 그는 예준의 발치까지 다가와서는 어깨를 툭, 건드렸다.
“잘하더라.”
“아, 고마워요……. 그런데 회사는…….”
“마지막은 익히 들어 본 곡이던데. ……그래, 차이콥스키. 「호두까기 인형」.”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시후는 예준에게 눈짓했다. 맞냐는 물음이 담긴 눈동자는 놀라울 정도로 다정했다. 예준은 그 부드러운 시선을 받으며 요동치는 제 심장을 느꼈다.
저 다정을 얼마나 갈구해 왔는가. 그의 사랑을 받고, 그의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어 했던 나날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때마다 선을 긋거나 밀어내었던 시후는 한창의 여름이 돼서야 예준을 받아들였다. 자신과 연애하지 않겠냐는 달콤한 제안까지 건네며.
그렇게 ‘애인’이 된 백시후는 전보다 짙어진 감정을 보여 주고 있었다. 예준은 꼭 꿈을 꾸는 것 같은 감미로운 기분에 휩싸였다.
“네, 맞아요. 「호두까기 인형」 중 ‘꽃의 왈츠’예요.”
“‘꽃의 왈츠’……. 실제로 들으니 더 좋더라.”
시후는 담담하게 평했다.
“네가 연주해서 그런가. 귀엽던데.”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네가 연주해서 실제로 더 좋다는 건지, 아니면 네가 연주해서 귀엽게 느껴진다는 건지 모르겠다. 아리송한 기분에 예준은 눈만 빠르게 깜빡거렸다.
지켜보던 시후는 더 짙은 미소를 머금었다. 긴 속눈썹이 드리운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가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할 때 으레 짓는 표정이었다.
***
시후가 기습적으로 연주회를 찾아오고 난 뒤였다. 며칠이 지났을 무렵, 시후는 작은 케이스 하나를 쥔 채 나타났다. 당시 예준은 시후의 집에 설치된 피아노 앞에 앉아 있던 참이었다.
“왜 그래요?”
무언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예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언뜻 보기에는 무뚝뚝한 얼굴이었으나 자세히 살피면 절대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평소보다 유난히 빛나는 눈, 웃음이라도 눌러 참고 있는지 가늘게 꿈틀거리는 입꼬리, 그리고 살짝 상기된 뺨. 장난을 치기 직전의 모습이 분명했다.
‘또 뭘 하려고.’
상대가 장난기 있는 사람인 건 진작부터 알고 있었기에 예준은 평정심을 유지하기로 했다. 그러나 결심한 게 무색하게도, 예준은 몇 초 지나지 않아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별안간 시후가 그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더니 왼쪽 손목을 잡아끌었기 때문이었다.
“!”
뭐야? 당혹감에 예준의 손목이 움찔댔다. 시후는 진정하라는 듯 손목을 잡은 엄지로 피부를 지그시 눌렀다. 예준은 제 손목을 잡지 않은 시후의 다른 손을 살폈다. 손에 쥐고 있는 케이스가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다.
‘반지 케이스는 아냐.’
그걸 알면서도 어쩐지 프러포즈를 받는 것 같은 기분을 떨치기가 힘들었다. 별생각을 다 하고 있다는 사실에 민망함이 올라왔다.
‘무릎은 왜 꿇어. 손목은 왜 잡고.’
그것도 하필 왼쪽 손목을. 예준은 숨을 몇 번 고르고 나서야 차분한 목소리를 내었다.
“반지라도 껴 주는 줄 알았어요.”
“반지 아냐.”
“네, 알고 있…….”
“커플링은 같이 골라 봐야지. 다음에 맞추러 가자.”
“…….”
“왜, 반지 싫어?”
예준은 신음을 삼켰다. 아무렇지도 않게 ‘커플링’이라는 단어를 꺼내는 시후 때문에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가벼운 관계를 지향할 땐 언제고, 막상 연애하게 되니 시후는 그 누구보다 예준에게 진심인 사람이 되었다.
‘이래서 형이 날 밀어내려 했나?’
한 번 빠지면 걷잡을 수 없이 잘해 주는 자신을 알고 있어서? 그래서 밀어내려 했던 건가.
예준이 생각에 잠긴 동안 시후는 케이스 안에 있던 시계를 꺼냈다. 손목을 감싸는 이질적인 느낌에 예준은 밑을 내려 보았다.
“음……?”
“예쁘지?”
“…….”
예쁘냐고? 물론 예쁘다. 온갖 보석들이 박혀 있는 모양새나 핑크색 스트랩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화려해서 그렇지.
예준은 이런 보석 시계를 어디서 사 왔는지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정말 자신한테 주는 게 맞는지에 대한 의문점도 함께.
“병원 연주회 보고 떠올린 시계야. 그 곡과 잘 어울리겠더라고.”
“네, 곡하고는 잘 어울리죠. 나한테 안…….”
“우리 예준이한테도 잘 어울리고.”
시후는 자연스레 말을 끊어 버렸다. 제 깜짝 이벤트에 재미를 느끼고 있는 게 분명했다. 예준은 입술을 떼지 않은 채로 미소 지었다.
‘하여간 시후 형.’
전혀 그렇게 생기지 않아선, 놀리는 데에 매번 최선인 사람이다. 예준은 제 손목을 꼼꼼하게 확인하는 시후를 응시했다. 그는 이리저리 살피더니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시후가 한 행동은, 손등에 입술을 대는 것이었다.
피부 위에 닿았다가 떨어지는 입술의 감촉이 간지러웠다. 예준은 닿았던 자리가 불에 닿은 듯 뜨겁게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예쁘네, 잘 어울려.”
여전히 손목을 잡은 채 시후가 고개를 들었다. 예쁘다고 속삭이는 그의 붉은색 입술이야말로 근사했다. 예준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쳐다보다가 “네” 하고 읊조렸다.
“그렇네요…….”
그럼. 형이 예쁘다면 예쁜 거고. 잘 어울린다면 잘 어울리는 거다.
긍정적인 생각이 미치자 가슴이 빠른 속도로 뛰었다. 시후 형이 선물까지 사 왔다는 사실에 기쁨이 치솟았다. 비록 그 목적이 자신을 당황하게 만들기 위함이었지만 말이다.
“비싼 건 아니죠? 저 그런 건 부담스러워요.”
“응, 안 비싸.”
그렇게 말하는 시후는 낯빛 한 번 변하지 않았다. 너무 태연히 말하는 게 오히려 의심스러웠으나 예준은 넘어가기로 했다. 그래, 안 비싸다니 일단 믿자. 가격이야 나중에 찾아보면 되니까.
생각을 마친 예준은 기꺼이 선물을 받았다. 답례로 시후만을 위한 연주를 해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집 안 전체를 에워싸는 차이콥스키 곡에 시후는 만족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예준 역시 그런 애인의 반응에 기쁨을 느꼈다. 나중에 알아낸 시계 가격에 두통이 올라왔지만 말이다.
***
“하하.”
예준은 깃털같이 가벼운 헛웃음을 뱉었다. 시계의 가격을 보자마자 아찔해졌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가격을 안 이후부터 예준은 지금처럼 집에서 만져만 볼 뿐, 어디에 차고 갈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게 되었다.
시후는 그런 예준에게 태연히 말했다.
‘그게 뭐가 비싸? 부담 주기 싫어서 적당한 걸로 사 온 거야.’
‘…….’
‘그래서. 계속 집에만 두게?’
예준은 휘황찬란한 시계와 시후를 번갈아 본 뒤 이렇게 말했다. 형 앞에서만 차겠다고. 예쁘고 잘 어울린댔으니 이런 모습은 시후 형한테만 보이겠다고.
백시후는 고개까지 뒤로 젖히며 폭소를 터뜨렸다. 뭐가 그렇게 웃긴 건지 어깨까지 들썩였다.
시후는 한참을 키득거리더니 예준 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의 손이 닿은 곳은 예준의 둔부였다. 움찔거리는 예준을 더듬으며 그는 장난스레 말했다.
‘여우 꼬리라도 숨겼나, 싶어서.’
어디다 숨겼냐며 계속 지분거리듯 만지작대던 시후는 능글맞기 그지없었다.
자신만이 알고 있는 형의 악동 같은 모습을 회상하며 예준은 고개를 내저었다.
“……형이 더 여우 같은데.”
그렇게 중얼거리는 예준의 입꼬리가 보기 좋게 올라가 있었다. 동시에 빨리 시후를 보고 싶다는 갈망이 온몸 전체로 퍼져 나갔다.
예준은 제 머릿속을 울리는 생각을 계속해서 곱씹어 보았다. 보고 싶다, 보고 싶다, 보고 싶다. 시후 형이, 백시후가 보고 싶다.
그때, 꼭 예준의 말을 듣기라도 한 듯 핸드폰이 진동을 울렸다. 갈색 눈동자가 말갛게 반짝였다. 예준은 책상 위에 있던 핸드폰을 급히 거머쥐었다.
“형!”
― 아침부터 목소리 좋네.
낮게 깔린 시후의 음색이 나긋나긋했다. 예준은 반가움과 멋쩍음을 동시에 느꼈다. 너무 목청을 높였나.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는 사이 시후가 “음” 하고 말을 이었다.
― 부끄러워? 칭찬인데.
“……안 부끄러워요.”
― 거짓말. 헛기침한 건 뭔데.
예준의 귓바퀴가 불그스름하게 물들어 갔다. 정말이지 시후는 자신에 대해 알아도 너무 잘 안다. 그와 대화하고 있으면 한참 어린 아이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떨치기가 힘들었다.
― 밥은.
“먹었어요.”
― 거르지 말고 잘 챙겨 먹어.
“누가 그러는데요. 우성 알파 걱정하는 게 제일 쓸데없는 일이래요.”
― 흠, 누가?
“어떤 형이 그랬어요.”
너스레를 떠는 예준의 목소리에 웃음이 가득했다.
“잘생기고 멋진 형이에요.”
― 나보다?
그렇게 묻는 시후는 당황하거나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하나도 없었다. 잘생기고 멋지다는 표현을 당연하게 여기는 그의 반응에 예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시후는 스스로 그렇게 생각할 만하다. 남이 봐도 백시후는 굉장히 잘난 남자니까.
“음, 글쎄요.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 형 얼굴 다시 봐야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어이없다는 듯 웃는 목소리가 예준의 귓등을 긁었다.
― 뭐 하고 있었어.
“형이 준 시계들 보고 있었어요.”
― 아, 시계.
“네, 시계. 제 연주 듣고 형이 사 온 그 시계요. 예뻐서 보고 있어요.”
― ……그래, 예뻤지.
시후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묘하게 붕 뜬 음색을 보아 무슨 생각에 잠긴 것이 분명했다. 예준은 그가 말한 ‘예뻤어’가 시계가 아닌 다른 무언가를 지칭함을 알아차렸다.
그게 무엇일지 궁금증이 일어났을 때였다. 시후가 “아” 하고 금방 정적을 깨뜨렸다.
― 예준아.
“네, 형.”
― 부탁 하나 들어줄래?
예준은 눈을 크게 부릅떴다. 부탁이라는 단어는 시후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그보단 명령하거나 지시하는 편이 훨씬 자연스러운 사람이다. 놀란 예준의 귓구멍으로 부드러운 읊조림이 파고들었다.
― 네 예쁜 모습, 남들한테 자랑하고 싶은데.
190이 넘는 남자더러 예쁘다고 말하는 목소리는 여전히 평온했다. 놀리거나 빈말이 아닌, 진심으로 유예준을 예쁘다고 여기는 것이었다.
당혹감이 가시고 간질간질한 느낌이 몸 전체로 퍼져 나갔다. 예준은 한참 머무적대다가 겨우 한마디 뱉었다.
“어떻게요?”
예준의 감정을 읽은 건지 시후는 대답하는 대신 소리 내어 웃었다. 그는 언제부터인가 부쩍 소리 내서 웃는 일이 많아졌다. 귓불을 간질이는 음성에 간지러움이 더해졌다.
예준은 가만히 그의 웃음소리를 감상했다. 매끈한 뺨이 붉은빛으로 상기되어 갔다.
***
‘아.’
예준은 미간을 찌푸린 채 생각했다.
‘형 웃음소리가 좋긴 하지. 그래도 정신까진 놓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 근사한 음색을 감상하느라 제대로 의견을 내지 못했다. 넋이 나가 버린 듯한 예준에 시후는 ‘흠’ 하고 만족해하는 소리를 냈었다. 그러고는 동의하는 걸로 알겠다며 아무렇지도 않게 결론지었다.
그 결과, 현재 예준은 뜻밖의 장소에 서 있게 되었다. 이곳은 다름 아닌 호텔 홀로, 화려한 샹들리에와 명화 등으로 꾸며져 있었다. 갈색 눈동자는 여기저기를 훑다가 어느 존재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홀로 우두커니 배치된 검은 그랜드피아노였다.
피아노를 보자마자 손가락들이 반사적으로 꿈틀거렸다. 얼결에 주먹을 쥔 예준은 탄식을 뱉었다. 손바닥 안이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긴장한 자신을 깨닫자마자 아랫배가 은근하게 쑤셨다.
“왜 그래?”
등 뒤에서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예준을 웃음소리로 홀려 이 호텔로 데려온 장본인이었다. 예준은 긴장한 기색을 숨기고자 주먹 쥔 손힘을 풀었다. 그리고 언제 굳었냐는 듯 입술 가장자리를 끌어당기며 뒤를 돌았다.
시후가 예준에게 시선을 붙인 채 다가오고 있었다. 그런 시후의 뒤로 정장 입은 이들이 따라오고 있었다. 예준은 그중 몇 명은 낯이 익음을 바로 알아냈다. 병원에서도 마주쳤던 시후의 비서들이었다. 그들이 만들어 내는 위압감에 예준의 어깨가 무거워졌다.
“유예준.”
그때였다. 시후가 두 손을 내밀어 예준의 뺨을 감싸 쥐었다. 얼굴을 어루만지는 손길은 언제나 그랬듯 서늘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데도 예준은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신 듯 몸 안이 훈훈해졌다. 비로소 경직되었던 어깨가 조금이나마 풀어졌다.
“긴장했네.”
예준은 반사적으로 부정하려다 관두었다. 아닌 척 구는 게 더 볼썽사나워 보일 것 같았다. 눈썰미 좋은 시후한테 들통난 김에, 그는 순순히 인정하기로 했다.
“형 호텔이라고 생각하니 떨려서요. 망치면 안 될 것 같고, 무조건 잘해 내야 할 것 같고.”
솔직하게 말하자 시후의 눈이 가늘어졌다. 뜻밖이라는 반응에 예준은 바람 빠진 소리를 내었다.
“부끄러운 일이죠.”
“부끄러울 건 없지.”
시후는 여전히 예준의 뺨을 감싸 잡은 채로 덧붙였다.
“떨릴 것도 없지만.”
“하하, 그러게요. 머리로는 아는데, 그게 잘 안 돼요.”
“…….”
“시간 지나면 괜찮아질 거예요. 그리고 형, 여기 불러 줘서 고마워요.”
예준은 제 얼굴을 만지는 손바닥에 키스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단둘이 있을 때처럼, 손에 입을 맞추고 뺨을 비비고 싶었다. 그러나 이곳은 수많은 이들이 지켜보는 공간임을 알기에, 예준은 조용히 입술만 움직였다.
“이런 큰 호텔에서 연주도 해 보고. 귀한 경험이에요.”
“정말 고맙다고 생각해? 부려 먹는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고?”
시후는 손을 떼며 긴 속눈썹을 밑으로 깔았다.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침묵하는 얼굴이 고요했다. 아무래도 긴장한 예준이 신경 쓰이는 눈치였다.
‘아, 유예준.’
예준은 속으로 자신을 탓했다. 이게 무슨 꼴사나운 일이냐. 사람들 앞에서 한두 번 연주한 것도 아니지 않은가. 의연하게 행동해도 모자랄 판에 긴장이라니.
안 되겠다 싶어진 예준은 굳은 손가락들을 풀기 시작했다. 그가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를 반복하자, 시후는 “흠” 하고 뜻 모를 소리를 내었다. 그것도 잠시, 그는 예준의 팔을 잡으며 어딘가로 끌고 갔다.
“형?”
시후가 향한 곳은 다름 아닌 홀 화장실이었다. 남자 화장실로 들어가기 직전, 시후는 따라오는 사람들에게 눈짓했다. 그러자마자 그들은 일제히 멈춰 서더니 바로 등을 돌렸다.
예준은 그들이 무엇을 하려는지 보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다. 시후가 계속해서 그의 팔목을 잡아당겼기 때문이었다.
물풀처럼 휘감는 악력에 끌려 예준은 화장실 안쪽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깨끗한 공간에는 꽃향기가 은은하게 맴돌고 있었다. 얼결에 한 발자국 내디딘 예준은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발견했다.
갈색 머리가 보기 좋게 세팅되어 있었다. 곧은 이마를 드러낸 헤어스타일을 살피다 예준은 밑으로 시선을 내렸다. 시야 안으로 자신이 입은 정장이 들어왔다.
한눈에 봐도 알 수 있는 훌륭한 차림이었다. 두툼한 흉통과 날씬한 허리를 돋보이게 하는 정장은 시후의 작품이었다. 사람들에게 예쁘게 보이자며 옷을 살피던 시후의 진지한 얼굴이 떠올랐다.
그런 시후를 실망시킬까 봐 심장이 덜컹거렸다. 예준은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지나 바닥으로 시선을 떨구었다. 어서 몸의 긴장을 풀어야 한다고 여러 번 곱씹으며.
“후으, 읏.”
숨을 한 번 길게 들이마시는 순간이었다. 호흡하느라 부푼 가슴 위로 시후의 손바닥이 닿았다. 예준은 그대로 멈춘 채 정면을 응시했다. 손바닥은 정장 위를 느릿하게 문대더니 허리로 더디게 내려갔다.
“아.”
예준의 입에서 당황한 소리가 터졌다. 정작 희롱을 시작한 사람은 평온한 낯을 유지하고 있었다.
“뭐, 해요?”
“긴장 풀어 주려고.”
말이 끝남과 동시에 시후는 벽 쪽으로 예준을 떠밀었다. 얼결에 벽에 몸을 기댄 예준은 눈을 크게 부릅떴다. 놀랍게도, 시후는 벌어진 예준의 다리 사이에 제 무릎을 집어넣고 있었다. 허벅지에 수납되었던 예준의 성기가 뭉근하게 눌리고 말았다.
“뭐 하는 거예, 읏, 요.”
“두 번 답해야 할까.”
시후가 얼굴을 가까이 내밀었다. 그의 속눈썹이 얼마나 까맣고 긴지 알 수 있을 정도로 코앞이었다. 금방이라도 입을 겹칠 것 같은 아슬아슬한 거리에서, 시후는 나긋나긋한 음색을 흘렸다.
“한 발 빼 줄게.”
희열인지, 긴장인지 모를 감각에 목뼈가 찌릿하게 울렸다. 예준은 돌발 행동을 시작한 이의 이름을 부르려고 했다. 그 순간 시후는 손가락으로 예준의 아랫입술을 쓸었다. 예민한 피부 위를 비비는 손길에 불길이 일어나는 듯했다.
“아…….”
예준의 입술이 벌어지면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끄트머리가 파르르 떨리는 신음 소리가 재미있는지, 시후가 눈꼬리를 휘었다. 그는 다른 손 역시 올리더니 예준의 턱선과 그 아래로 떨어지는 목덜미를 만지작대었다.
“시후, 형.”
“응, 말해.”
안 되겠다 싶어 예준은 시후의 팔을 움켜잡았다. 시후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자신이 만지고 싶은 대로 피부를 지분댔다. 만져진 모든 부위가 정전기가 일어난 것처럼 찌르르했다.
“그만해요.”
“왜?”
“여기 형 호텔이잖아요.”
흥분을 억누른 채 예준이 간신히 한마디 하자 시후는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비스듬하게 고개를 기울인 채로 상대를 응시하는 시선엔 그 특유의 여유로움이 서려 있었다.
“내 호텔 화장실 하나 통제 못 할까.”
나직한 음색이 예준의 귓구멍을 파고들었다. 제 귀에 달라붙는 읊조림에 예준은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통제? 그 순간 떠오른 건 시후의 뒤에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 사람들이 조치를 취한 걸까. 하지만 뭘 알고 어떻게…….
의문이 길어지려는 찰나 시후의 무릎이 더 깊숙하게 들어왔다. 예준은 반사적으로 상체를 앞으로 수그렸다. 평정심이 흔들리고 알파의 페로몬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시후는 제 어깨에 얼굴을 묻은 예준의 목덜미 뒤를 잡았다. 천천히 목선을 주무르는 손길이 의외로 다정했다. 시후의 어깨에 이마를 대고 있었던 예준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긴장으로 경직되어 있었던 몸이 열기에 한없이 들뜨기 시작했다.
“안, 돼요.”
“왜, 누가 들어올까 봐?”
“…….”
“안 들어와. 뭐, 들어온다 해도 달라질 게 있나. 재밌는 구경이나 하는 거겠지.”
“구경?”
시후가 예준의 귓바퀴에 입술을 갖다 댔다. 이어 홧홧하게 달아오른 귀에 댄 채로 숨결과 속삭임을 함께 흘려 넣었다.
“상원 그룹 차남과 피아니스트와의 열애. 그것도 화장실에서 뒤엉켜 있는. 당연히 재밌는 구경 아니겠어.”
예준은 눈썹 사이에 힘을 주었다. 귀 아래 팔딱팔딱 뛰는 제 혈맥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고개 들어.”
“하아…….”
“그렇지.”
예준이 고개를 들자 시후는 한쪽 입꼬리를 비스듬하게 당겨 올렸다. 눈을 가늘게 뜬 채로 미소 짓는 그의 얼굴에 뿌듯한 기색이 풍겼다. 예준은 흐트러진 호흡을 내뱉으며 그런 시후를 가만히 응시했다.
제 애인은 독과 같았다. 위험하기 짝이 없으나 도저히 거부할 수가 없는 남자. 결국, 그의 존재감은 제 가슴 전체를 지배해 영혼을 흔들 것이다. 무력하며 달콤하고, 짜릿하기까지 한 굴종이다.
예준은 뒤통수를 벽에 갖다 대며 두 눈을 감았다. 와이셔츠 단추 풀어지는 소리가 귓등을 긁었다. 누군가 들어올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계속되는 흥분이 섞여 가슴속에서 부풀어 올랐다. 한없이 야릇한 느낌에 신음 소리가 저절로 흘러나왔다.
“읏…….”
시후의 낮은 웃음이 귓불을 건드렸다. 여유로운 그를 잡아채 엉망으로 만들고픈 충동이 솟았다. 예준은 인상을 쓰며 마른침을 삼켰다. 목울대 움직이는 소리가 어느 때보다 선명하게 들려왔다.
버클 풀리는 소리와 함께 속옷 안으로 손이 들어왔다. 손가락은 귀두에서 기둥으로, 기둥에 난 혈관을 따라 미끄러지다가 음낭을 건드렸다.
머릿속이 새까맣게 타들어 가는 것 같은 쾌감에 예준은 시후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그의 손등 위로 푸르스름한 핏줄들이 사납게 돋았다.
“……형.”
“그래.”
시후는 조용히 답하며 계속해서 손을 놀렸다. 그가 손바닥으로 성기를 쓰다듬을 때마다 참을 수 없이 짜릿한 쾌감이 치솟았다. 평소보다도 달뜬 몸이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이러다 금방 사정할 것 같다는 직감에 소름이 돋았다.
“윽!”
성기를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느낌에 예준은 앞으로 고개를 수그렸다. 바로 눈앞에 시후의 얼굴이 있었다. 그의 눈동자에 비친 제 형상을 알 수 있을 정도로, 그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숨결을 생생히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웠다.
가까이 얼굴을 붙인 채로 시후는 예준의 이목구비를 샅샅이 훑었다. 어루만지는 듯한 시선에 예준은 양미간을 좁혔다. 눈길이 닿았던 부위들이 이상하게도 따끔거렸다.
“형한테 키스하고 싶어요.”
읊조리는 목소리에 흥분한 기색이 가득 풍겼다. 민망함에 귀가 뜨거워졌으나 예준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제 크고 동그란 갈색 눈동자에 열망 어린 빛을 띄우기까지 했다. 키스하고 싶어요. 키스하게 해 줘요. 형 입술 빨게 해 줘요.
마음속에서 애원들이 빙빙 맴돌 때였다. 담담하던 시후의 얼굴이 희미하게나마 허물어졌다. 긴 속눈썹이 드리운 눈매가 가늘어지고 입가에는 보기 좋은 미소가 떴다.
시후는 대답 대신 입술을 살짝 벌려 주었다. 가만히 응시하는 그에게서 긍정의 기색이 읽혔다. 그의 시선이 보내는 열기가 뜨거워 숨이 막힐 정도였다.
예준은 제 가슴속에서 요동치는 희열을 느끼며 시후의 목을 감싸 잡았다. 연주에 대한 긴장이 풀린 지는 이미 오래였다.
***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화장실에서 그럴 생각을 해요.”
“즐겨 놓곤 아닌 척하긴. 덕분에 긴장은 풀었잖아.”
예준은 손바닥을 펼쳐 제 얼굴을 거칠게 쓸었다. 인기척이 들리는가 싶더니 커피 향이 은은하게 풍겼다. 고개를 든 예준은 커피를 내민 시후와 시선이 마주쳤다.
“마셔.”
그렇게 말하는 시후는 평소보다 편안한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세팅하지 않은 앞머리는 이마 전체를 덮고 있었고 꽉 조이는 정장 대신 헐렁한 니트를 입고 있었다.
예준은 머그잔을 받았다. 한 모금 마시니 향긋한 커피 맛이 입 안 전체를 채웠다. 시후는 제집의 소파에 앉아 있는 예준을 지켜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만족스러운지 입꼬리를 올리는 얼굴이 나긋했다.
“네 사진 왔는데, 보여 줄까?”
“사진이요?”
“응, 홈페이지에 걸 사진. 잘 나왔어.”
시후는 자연스레 예준의 옆에 앉았다. 보라며 핸드폰을 건네는 행위 역시 친근했다. 예준은 이 사람과 한층 더 가까워졌음을 새삼스레 느꼈다.
연애란 이런 거구나. 아무렇지도 않게 서로에게 기대고, 아무렇지도 않게 서로 가까이 몸을 붙이고. 가까운 사람끼리만 할 수 있는 행위가 기본인 관계, 이게 연애구나.
그 생각이 미치자 즐거움이 찌르르 빗장뼈를 울렸다. 예준은 제 심장이 기분 좋게 뛰고 있음을 느끼며 핸드폰을 보았다.
“음…….”
“별로야?”
시후는 예준의 어깨에 얼굴을 기댄 채 사진을 감상했다. 어깨에 닿는 상대방의 머리를 느끼자마자 예준은 온몸이 간지러워졌다. 괜히 헛기침을 한 번 한 그는 액정에 뜬 제 모습을 확인했다.
사진에 찍힌 자신은 한창 피아노 연주에 집중하고 있었다. 웃음기 하나 보이지 않는 얼굴이 낯설었다. 진지하기 그지없는 모습에 예준은 멋쩍기까지 했다.
“왜, 난 좋은데.”
시후가 손가락으로 예준의 팔을 건드렸다. 손톱을 세워서는 피부를 톡톡 두드리는 행위는 피아노를 칠 때와 비슷했다.
“내가 좋아하는 얼굴이야, 집중할 때 모습.”
“형이 좋다면 나도 좋아요.”
“거짓말, 민망하면서.”
“하하.”
예준은 바람 빠진 소리를 옅게 냈다. 눈치 빠른 애인은 그가 어떤 기분인지를 금방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다행이에요, 연주 안 망쳐서.”
“그래, 잘 해냈지.”
시후는 예준의 어깨에 기대고 있던 머리를 떼었다. 그러고는 다음 덧붙임을 아주 담담하게 했다.
“아버지도 좋게 보신 모양이더라.”
‘아버지’라는 단어에 예준은 눈을 크게 떴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그분이 좋게 보셨다고요?”
“연락 왔어. 가족 될 사람이라 챙겨 주는 거냐고 묻더라.”
“…….”
“우리 유예준 군, 잘생기고 바르게 생겼다고 칭찬하더군. 몰랐는데 아버지, 남자 얼굴을 좀 보나 봐.”
“무슨 그런 농담도…….”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며 예준은 시후의 표정을 샅샅이 훑었다. 어느새 시후는 핸드폰 사진만 말끄러미 감상하고 있었다. 매끈한 얼굴에는 부정적인 기색이라곤 조금도 서려 있지 않았다.
그런데도 예준은 시후에 대한 걱정에 가슴이 저릿했다.
그도 그럴 게 예준과 연애하기로 한 이후, 시후는 아버지에게 은근한 반항을 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건네는 선 자리를 물릴뿐더러 다른 기업의 자제들과의 만남 역시 일절 거절했다. 아버지인 백 회장은 그런 시후에게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별안간 왜 이렇게까지 피해 다니는지 알 수 없다는 뜻이었다.
예준은 뉴스에서나 보았던 백 회장을 떠올리며 한숨을 삼켰다. 날카로운 인상을 가진 백 회장은 묵직하고 서늘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런 아버지에게 시후가 크게 책 잡힐까, 심장이 덜컥거렸다.
“됐어.”
시후는 핸드폰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걱정하라고 꺼낸 이야기 아냐. 내가 너한테 말한 이유는, 어디까지나 협조를 구하기 위해서지.”
그 말에 예준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협조……요?”
“독립하려고 하거든, 제대로. 그러려면 네 협조가 필요해.”
의미심장한 말에 예준은 시후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무슨 뜻이냐는 시선을 보내자 시후는 고개를 까딱였다.
“정확히는, 협조가 아니라 허락이겠다.”
아무래도 시후가 심상치 않은 계획을 짜고 있는 모양이었다. 의아함도 잠시, 예준 역시 그를 따라 미소 지었다. 손으로 감싸 잡은 머그 컵의 온기처럼 그를 향한 따뜻한 애정이 예준의 온몸을 에워쌌다.
“뭐든지요. 형 원하는 대로 해요.”
“아직 뭔지도 모르잖아.”
예준의 미소가 짙어졌다. 무엇인지 모르면 어떤가. 시후가 더 자유로워질 수만 있다면, 그게 무엇이든 상관없다. 제 마음속에서 요동치는 애틋함을 느끼며 예준은 시후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하.”
시후는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리더니 예준의 턱을 잡았다. 순순히 잡힌 예준은 느릿하게 눈을 깜빡거렸다. 일부러 천연한 표정을 짓자 시후는 턱선을 손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귀여워하는 기색이 묻어나는 터치였다.
“형도 해 줘요, 나한테.”
“얼굴 대.”
얼굴 대라고 말하는 목소리가 부드러웠다. 예준은 슬그머니 시후 쪽으로 뺨을 갖다 대었다. 그리고 시후가 제 볼에 입을 맞추기 직전, 얼른 얼굴을 돌려 입술을 포갰다가 떼었다.
쪽, 하는 소리가 정적을 긁었다. 시후는 당황한 듯 눈을 크게 떴다. 좀처럼 보기 힘든 표정에 예준은 뿌듯함을 느꼈다. 그것도 잠시, 시후는 언제 동요했냐는 듯 눈썹을 찌푸리며 덤덤한 얼굴로 돌아왔다.
“이게.”
볼이 꼬집힌 예준은 유쾌함을 참지 못하고 웃었다.
“아하하!”
“웃지 마.”
“왜요? 형 나 웃는 거 좋아하…….”
꼬집혔던 뺨 위에 따뜻한 것이 닿았다. 그것이 입술임을 예준은 곧바로 알아차렸다.
입술은 뺨에서 턱을 타고 미끄러지듯 오더니 곧 예준의 입술에도 닿았다. 자연스럽게 시작되는 키스에 예준은 순순히 입을 벌려 주었다. 손에 든 커피를 쏟지 않도록 조심하며.
***
과연 시후는 어떻게 독립하려는 걸까. 그는 이미 경제적으로도, 능력적으로도 잘난 사람이다. 그러니 시후가 말하는 독립이란 정신적인 면을 뜻하는 것이 분명했다.
친가족, 그것도 위압적인 아버지와 반목해야 한다. 쉬운 일이 아닐 테다.
하지만 예준은 어쩐지 시후가 정말로 금방 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애하자고 이야기했을 때부터, 시후의 내부에서 무언가가 바뀌었음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아주 작은, 그러나 확실한 무언가가.
큰형한테서 연락이 왔다. 수업이 언제 끝나냐는 질문과 덧붙여 저녁 식사를 함께하자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짧지만 동생에 대한 애정이 담겨 있는 메시지에 예준은 한숨을 쉬었다.
가족에게서 정신적 독립을 해야 할 사람은 시후가 아닌 자신일지도 모른다. 형의 메시지만 받아도 잘못한 사람처럼 몸이 굳어 버리니 말이다.
그날 늦은 오후, 예준은 오래간만에 큰형 연우를 만났다. 저녁 식사를 마칠 때까지 연우는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이따금 건강 질문이나 학교생활에 대해서만 간간이 물을 뿐이었다. 예준은 그가 의식적으로 시후에 관한 말을 꺼내지 않고 있음을 느꼈다.
식사를 끝내고 나오자 바람이 두 사람을 맞이했다.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에 가을 냄새가 묻어났다. 언제 이런 가을이 된 걸까. 예준은 시간의 빠름을 체감했다. 그토록 더웠던 여름, 시후와 새로운 관계를 맞이했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날씨 좋네.”
예준은 연우 쪽으로 몸을 돌리며 말을 건넸다. 마침 연우는 주차한 제 차로 걸어가던 중이었다.
“같이 캠퍼스라도 걸을래?”
연우는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짓더니 곧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대학 캠퍼스 주차장에 차를 세워 둔 뒤 길을 걸었다. 학교 운동장이 나타나고 그 가장자리를 따라 걷다 예준은 속도를 늦추었다.
그러자 큰형이 몇 발짝 앞서 걷게 되었다. 예준은 형의 까만 머리칼과 곧은 등을 응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형, 곧 결혼하잖아.”
연우의 발걸음이 느려졌다.
“갑자기 결혼 얘긴 왜 하는 거야?”
“그냥, 갑자기 생각나서. 프러포즈는 받았지?”
“……그렇지.”
연우는 멋쩍은지 헛기침을 한 번 했다. 둥근 귓바퀴가 불그스름하게 물들어 갔다.
“내가 먼저 했어야 했는데. 도영이가 한발 빨랐지.”
낮게 읊조리는 목소리에서는 부끄러움과 웃음이 담겨 있었다. 그런 큰형을 응시하며 예준도 따라 미소를 지었다. 형의 옆으로 다가간 예준은 그의 목덜미에서 반짝이는 것을 발견했다.
“목걸이 받았어?”
“아, 응.”
“봐봐.”
연우는 양복 와이셔츠에 숨겨져 있었던 목걸이를 빼냈다. 반짝이는 다이아몬드는 형의 흰 목덜미와 잘 어울렸다. 이것을 고르기까지 심사숙고했을 도영의 얼굴이 어렵지 않게 그려졌다.
“신기해. 누구와 사랑해서 결혼까지 간다는 게, 정말 신기해.”
“나도 그래.”
연우는 목걸이를 다시 옷 안으로 집어넣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도영을 생각하는지 눈매가 놀라울 정도로 부드러워졌다.
“솔직히 말해서, 아직은 와닿지 않아. 꼭 꿈꾸는 것 같거든.”
“응, 나라도 그런 기분일 것 같아.”
예준은 잠시 숨을 멈추었다. 색소 옅은 눈동자에 빛이 일렁거렸다.
“연애만 해도 신기한데, 하물며 결혼은 어떻겠어.”
연우의 입술이 잘게 꿈틀거렸다. 그는 고개를 들어 예준을 정면으로 들여다보았다. 정말이냐는 시선에 예준은 말없이 침묵을 지켰다.
“……연애라고.”
먼저 눈을 돌린 사람은 연우였다. 그는 긴 속눈썹을 내리깔며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결국, 그렇게 됐구나.”
“형한테는 미안하게 생각해.”
“…….”
“진심이야. 우리 사이에 대해 말해 주지 못한 것도 미안하고, 또 형한테 걱정 끼치는 것도 미안해.”
“예준아.”
연우는 한숨처럼 말했다.
“상대는 보통 사람이 아니야.”
“응, 알아. 나한테 과분한 형이지.”
“……도영이 옆에서 일하면서 별의별 꼴을 다 봐 왔어. 유명한 재벌 자제들이, 뒤에서는 무슨 짓들을 하고 사는지 넌 모를 거야.”
“시후 형은 안 그래.”
“그래, 시후 씨가 그렇게 산다는 게 아니야. 하지만 설사 하지 않는다 해도, 그런 더럽고 폭력적인 일들에 익숙해져 있는 건 맞을 거야. 매번 그런 것들을 보고 들으며 살았을 테니까.”
“…….”
“난 내 동생이, 혹시라도 나쁜 일에 얽힐까 봐 걱정되는 거야.”
말을 마친 뒤 연우는 예준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반지를 낀 손가락이 예준의 날개뼈 위에 닿았다. 연우는 제 동생의 등에 손바닥을 얹고 가만히 도닥였다. 툭, 툭, 가벼운 터치가 울릴 때마다 예준의 마음도 함께 울렸다.
“……시후 씨는 잘해 주고?”
“응, 아주 많이.”
“하하.”
연우가 웃음소리를 내었다. 경직되어 있던 얼굴이 조금이나마 풀렸다.
“그래, 그런 것 같더라. 호텔 연주회도 열었던데.”
“알고 있었어?”
“당연하지. 시후 씨가 너 키워 주려고 하나, 싶더라.”
“시후 형이 키워 주기 전에 내가 알아서 커야지. 계속 도움만 받는 애이곤 싶지 않으니까.”
도움만 받는 애. 예준은 자신의 말에 씁쓸함을 느꼈다. 시후는 예준을 늘 원석 같다고 표현하지만 때로는 지금처럼 입맛이 써지곤 했다. 새삼 자신이 한창 부족한 연하 애인임을 자각해서였다.
언제쯤이면 그를 따라잡을 수 있을까. 아니, 따라잡을 수 있기는 한 걸까. 답을 알 수 없는 의문이 머릿속을 맴돌 때였다.
“도움 필요하면 형한테 연락해.”
등을 두드리던 연우의 손이 위로 향했다. 그는 바람에 흐트러진 예준의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었다.
“무엇이든, 알겠지?”
“형…….”
“내가 남자를 사귀게 되었을 때, 가장 마음에 걸리는 건 가족이었어. 가족들이 날 어떻게 볼지, 그게 가장 겁이 나더라. 그때 네가 그랬지, 걱정하지 말라고. 여차하면 네가 가족들을 설득해 주겠다고. 동생이 날 응원해 준다는 게, 참…… 힘이 되더라.”
앞머리를 넘겨 주는 손길이 다정다감했다.
“나도 그래, 예준아. 널 늘 응원해. 무슨 일이 있어도 언제까지나 네 편이야.”
큰형을 가만히 응시하던 예준은 숨을 길게 들이마셨다. 형의 연락을 받은 후부터 저렸던 가슴 통증이 마침내 사라졌다. 예준은 제 머리를 정리해 주는 형의 손을 잡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형이 이렇게 말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을지 알고 있다. 알고 있기에 예준은 연우가 진심으로 고맙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연우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동생의 인사를 받았다.
그때, 예준의 주머니 안에 있던 핸드폰이 진동을 울렸다. 계속되는 진동음에 예준은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내렸다.
“전화 오는 것 같은데? 받아 봐.”
“잠깐만.”
핸드폰을 꺼내 든 예준은 양미간을 좁혔다. 액정에는 전혀 모르는 번호가 떠 있었다. 정체불명의 발신자에 예준은 액정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알 수 없는 불길함에 등허리가 싸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