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화 (17/17)

6. 예준(2)

 발신자는 무미건조한 중년 여성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점잖으면서도 사무적인 말씨로 다짜고짜 용건을 꺼냈다. 느닷없는 목소리에 당황한 것도 잠시, 예준의 몸이 경직되었다.

 예준은 형이 운동장 구경을 하고 있음을 확인한 뒤 등을 돌렸다. 그리고 방금 접한 이야기를 다시 반복해 달라고 요청했다. 익명의 여성은 순순히 자신이 꺼낸 말을 되풀이해서 들려주었다.

“왜 그래?”

 뒤늦게 동생을 본 연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준은 통화가 끊어진 핸드폰을 주머니 안에 밀어 넣었다.

“아냐, 아무것도.”

 당연히도, 거짓말이었다.

 연우와 헤어지자마자 예준은 택시를 잡아야 했다. 그리고 핸드폰에 뜬 메시지에 적힌 주소를 읽어 주었다. 평창동에 있는 어느 주택의 주소였다.

‘왜?’

 예준은 택시 뒷좌석에 앉은 채 인상을 썼다. 그는 앞으로 내달리는 택시의 움직임을 느끼며 속으로 읊조렸다.

‘왜 날 보자는 걸까, 회장님이.’

 차는 평창동 골목을 타고 올라가 점차 위로 올라갔다. 여러 주택을 지나니 빼어난 풍광의 산이 나타났다. 인적이 드문 깨끗한 길에는 가로등만이 띄엄띄엄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위로 죽 올라가던 택시는 마침내 어느 기와집 앞에 멈추었다.

 예준은 대문 앞에 선 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솟대와 등불이 함께하는 대문은 한눈에 보아도 알 수 있을 만큼 고풍스러웠다. 시간을 거슬러 조선 시대 어느 대감댁으로 찾아든 것 같은 느낌에 예준은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유예준.”

 뜻밖에 익숙한 음성이 예준을 잡았다. 예준은 두 눈을 크게 뜬 채로 옆을 돌아보았다. 시후가 어이없다는 기색을 숨기지 않은 채 걸어오고 있었다.

“형?”

“네가 왜 여기 있어?”

 발치까지 다가온 시후는 손을 뻗어 예준의 얼굴을 감싸 잡았다. 버릇처럼 그의 뺨을 만지던 시후는 곧 알겠다는 듯 인상을 썼다.

“아버지가 너도 불렀던 거군. 왜 나한테 말 안 했어.”

“……형 신경 쓸까 봐요.”

“당연히 신경 써야지, 우리 아버지가 널 부른 건데.”

 두 사람을 같이 불렀다는 뜻이 되었다. 예준의 심장이 긴장감으로 떨렸다. 대체 왜 우릴 부르신 걸까?

“어디예요, 여긴?”

“아버지 별장.”

“아…….”

 별장이라는 단어에 예준은 눈동자만 움직여 집을 살폈다. 새삼 시후가 대단한 집안의 사람임을 체감했다. 유쾌하다고는 보기 힘든 감정이 일어났다. 한 발자국만 디디면 키스할 수 있는 가까운 거리임에도, 예준은 시후와의 멀고 깊은 간극을 느꼈다.

“……들어가 볼게요.”

“안 가도 돼, 이미 얘기 다 끝냈거든.”

“얘기라뇨?”

 예준은 무슨 말이냐는 시선을 건넸다. 뺨을 어루만지던 손이 아래로 떨어졌다. 시후는 손바닥을 펼쳐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내 연애를 눈치채셨더라고.”

 그 한마디에 예준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피가 빠른 속도로 식어 가는 기분이었다. 눈치채셨다고?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 아무 말도 나오질 않았다.

 정작 시후는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덤덤한 얼굴이었다.

“뭘 그렇게 놀라. 내가 식사 모임 자리 그대로 박차고 나온 거 너도 알잖아. 그때부터 쭉 감시했을 거야,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내려고.”

“설마……. 호텔에서 있었던 일까지 아시는 건 아니죠?”

“호텔 화장실에서 떡 친 거?”

 시후는 소리 내어 웃기까지 했다. 그런 시후가 걱정되어 예준은 인상을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형, 웃을 때가 아니잖아요.”

“호텔 일은 몰라. 그래도 우리가 티를 좀 내긴 했었나 봐.”

“아…….”

“그래, 연애를 하는 데 어떻게 티가 안 나겠어. 너랑 나 여기로 부르신 것도 마지막으로 확인하기 위함이었을 거야.”

 티가 났을 거라는 말에 예준은 부정할 수가 없었다. 그래, 어떻게 티가 안 났겠는가. 지금 당장도 마주하자마자 뺨부터 감싸 쥐지 않았는가.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할 때, 예준은 시후가 붉은색 입술을 움직이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래서, 내가 몇 마디 했지.”

 몇 마디 했다고? 예준은 그 말의 의미를 곱씹느라 한 박자 늦게 반응했다.

“네? 이미 뵈었어요?”

“응.”

“뭐……라고 했는데요?”

“아버지가 눈 감으시라고.”

“…….”

“도영이와 연우 씨, 곧 결혼할 사이지 않냐고. 괜히 두 집안 시끄럽게 만들기 싫으니 그리 아시라고 했지.”

“헤어지라고…… 분명 말씀하셨을 텐데요.”

 시후는 대답하는 대신 “흠” 하고는 눈을 가늘게 떴다.

“헤어지고 싶어?”

 예준의 얼굴이 바로 일그러졌다. 헤어지고 싶냐고? 그 질문을 듣자마자 콧잔등부터 시큰해졌다.

‘안 돼, 유예준.’

 여기서 울면 정말 꼴사나워진다. 목이 메어 와 예준은 마른침을 몇 번 삼켰다.

“유예준.”

“…….”

“예준아.”

“네, 형.”

 울컥 올라오는 감정을 간신히 견디고 있어서인지 목소리가 적 갈라졌다. 시후는 그런 예준을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협조해 달라고 했지, 내가. 넌 알겠다고 했고.”

 이게 무슨 말이지. 예준의 의문을 알고 있다는 듯 시후는 바로 말을 이었다.

“내가 피아니스트 유예준 후원자가 될 거라는 기사, 내일로 다 퍼질 거야. 우리가 얼마나 깊은 사이인지 소문낼 생각이거든. 아버지가 떼어 내지 못할 정도로.”

“그걸로 되나요?”

“안 될 시 연애한다고 공식 발표하자. 백도영, 아직 제 약혼 발표도 안 했잖아? 우리가 선수 치면 돼.”

“…….”

“아버지께서 더는 아무 말씀 못 하시더라고. 화가 단단히 나셨을 테니 굳이 들어가지 마.”

“이게 형이 말한 협조예요?”

“그래, 협조. 기사 뜨면 넌 꽤 골치 아파질 거야. 너한테 접근하려는 인간들도 생길 테고, 또 그만큼 좋은 기회들도 다가오겠지. 정신없어질 테니 전부 각오하고 있어.”

 예준은 그가 이미 다 계획을 짜 두었음을 어렵지 않게 직감했다. 언제부터 생각했던 걸까. 협조해 달라고 할 때부터? 아니면, 백 회장님과 그 지인들의 식사 자리를 박차고 나왔을 때부터? 의문을 담아 물끄러미 바라보자 시후는 예준의 손목을 그러쥐었다.

“가자, 이만.”

 가볍지만 어쩐지 뿌리칠 수 없는 악력이었다. 예준은 그를 따라가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어둠에 잠긴 별장은 조용하기 이를 데 없었다. 사람 한 명 없을 것 같은 고요함에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예준은 가만히 응시하다가 고개를 돌렸다. 한없이 부정적인 감정이 가슴을 저릿하게 했다.

 예준의 단정한 얼굴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본인조차 자각하지 못한, 어두운 그림자였다.

                                                                                                                                                                                         ***

 차 안은 정적으로 에워싸여 있었다. 침묵 속에서 예준은 차창 밖을 보았다. 크고 작은 빌딩들이 저마다 빛을 내고 있었다. 예준이 익히 알고 있는 서울의 야경이었다.

 매번 보아 왔던 풍경을 접하니 아까의 일이 문득 꿈처럼 느껴졌다. 별장을 떠올리자 무릎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제 손등 위로 도드라진 서너 갈래의 핏줄을 보며 예준은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이렇게 가도 되는 건가. 백 회장님은 분명히 자신을 불렀다. 그분과 대화해야 했던 거 아닐까. 하지만 뭐라고? 형과 사귀는 게 맞다고, 형을 사랑한다고 말했어야 했는가.

“기분 상했나?”

 예준의 정신을 깨운 건 시후였다. 갑자기 침묵을 깨는 목소리에 예준은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시후가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기분 상했냐고요?”

“그래.”

 시후는 여전히 시선을 붙인 채 입술만 움직였다.

“협조라고 해 놓고 단독 행동해서?”

“그런 거 아니에요.”

 반사적으로 부정한 예준은 귓가가 홧홧하게 달아오름을 느꼈다. 그의 눈에 골이 난 어린아이처럼 보였을 것이라는 사실이 민망했다. 지금의 제 심리를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 예준은 여러 번 입을 닫았다, 열었다를 반복하다 겨우 한마디 했다.

“내가 어떻게 감히 그래요.”

“감히, 라.”

“형한테 마음 상한 게 아니라…….”

 예준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제대로 이야기하고 싶은데 잘 되질 않았다. 당혹감과 부끄러움으로 머릿속이 엉망진창이었다.

 몇 초간의 정적이 흘렀을 때였다. 시후가 차를 멈춰 세웠다. 운전기사는 익숙하게 갓길로 차를 대었다.

“내려.”

“저요?”

“그래, 너.”

 말을 마친 뒤 시후는 먼저 차 문을 열고 나갔다. 예준은 차창 바깥으로 시선을 옮겼다. 어느새 운전기사는 시후에게 허리를 수그려 인사하고 있었다. 그와 대화를 마친 시후는 한 손을 올려 제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이어 시후는 창을 내려다보며 입 모양을 내었다.

‘내려.’

 아까와 같은 지시는 담백하기 짝이 없었다. 예준은 조심스럽게 뒷좌석의 문을 열고는 바깥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서늘한 가을바람이 몸을 감싸 돌았다.

“형, 왜 그러는…….”

“남해, 동해.”

“?”

“선택해.”

 시후는 “서해는 없어, 내 취향이 아니거든”이라는 덧붙임으로 예준을 더 의아하게 만들었다. 형이 대관절 무슨 말을 하는지 도통 모르겠다. 갑자기 바다 이야기는 왜 하는 건가.

“……동해요.”

 일단은 대답하자 시후는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느슨하게 당겨 둔 넥타이를 완전히 풀었다. 이어 목까지 잠근 단추를 두 개나 푸는 행동에 예준은 눈만 깜빡였다. 형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겠다.

“동해는 왜요?”

“가려고.”

“간다뇨? 어딜……. 설마 바다 가자는 거예요?”

“어차피 주말이잖아. 너 수업도 없고.”

“수업 있어도 안 가면 그만이긴 한데…….”

“안 돼, 그건. 공부는 충실히 해 둬야지.”

 시후는 보기 좋게 세팅해 둔 머리카락을 거칠게 헝클어뜨렸다. 숱 많은 흑발이 이마 전체를 덮었을 때, 그는 한마디를 더 했다.

“후원자 보람 있게 해 줘. 연애하느라 나태해지는 건 사양이야.”

“…….”

“면허 있지? 네가 운전해 봐.”

 고가의 차를 아무렇지도 않게 맡긴 뒤, 시후는 등을 돌렸다. 그때까지 예준은 말없이 시후의 등을 바라보고 있었다. 넓고 곧은 등. 한 번도 무너진 적 없을 게 분명한 그 몸을, 한참이고 응시만 하던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형한테 마음 상한 거 아니에요, 나한테 상한 거지. 내가 너무 어린애 같아서요, 그래서 화가 났어요.”

“너 어린 거 맞아.”

“알아요, 알아서 더 화나요.”

 예준은 제 운동화를 뚫어질 듯이 내려다보았다. 그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게 느껴졌다.

“형하고 너무 차이 나니까, 내가…….”

“당연한 소리를 하고 있어.”

 단호한 말투가 차가웠다. 칭얼거림 따위는 받아 주지 않겠다는 상대방의 태도에 예준은 입을 다물었다. 고개를 든 얼굴 위로 열기가 확 끼쳤다.

“9년이야, 너랑 내 나이 차이가. 그 9년 동안 내가 쌓아 온 게 몇 개인데. 여기까지 올라오느라 내가 노력한 게 얼마큼인데. 차이 나야 당연한 거 아냐?”

 시후는 다음 말을 느릿하게 덧붙였다.

“네가 금방 따라잡을 정도면 오히려 열받지, 안 그래?”

“그래도 빨리 따라잡고 싶은걸요. 그래야 나도 형을 지키니까.”

“내가 누구 보호를 받아야 할 정도로 약해 보이나?”

 마지막 질문에 예준은 어깨를 늘어뜨렸다.

“……아뇨.”

 시후의 말은 무엇 하나 틀린 데가 없었다. 백시후라는 잘난 남자가 되기까지 그는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했을 것이다. 한참 어린 자신이 그런 당신과 동등해질 확률은 지극히 낮았다. 이런 말을 꺼내는 것 자체가 시후에게 모욕적으로 느껴질 수 있을 만큼.

“유예준.”

 그때, 시후가 조용히 말을 꺼냈다.

“넌 재능 있는 애야.”

“무슨…….”

“빈말 아냐. 네가 해낸 성과를 기억해, 그리고 네 연주가 날 사로잡았다는 점도.”

“…….”

“너에게 그만큼의 재능이 없었다면, 내 호텔에서 연주하게 두지 않았을 거야. 아무리 네가 좋다 해도 그건 별개의 문제거든.”

 예준의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좋다’라는 표현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목소리 때문인지, 아니면 재능 있다며 똑바로 바라보는 시선 때문인지 모르겠다. 쿵쿵, 뛰는 심장 소리와 함께 시후의 다음 말이 귀를 울렸다.

“9년 후의 너는, 지금의 나를 넘고도 남을 거야.”

 시후가 미소 지었다. 남들에게는 전혀 보여 주지 않는 얼굴이었다.

“그때의 난, 그런 네가 참 자랑스럽겠지.”

 쿵, 쿵, 쿵.

 귀 아래 자리한 혈맥이 뛰는 소리가 요란할 때, 예준은 운동화 신은 발을 움직였다. 다음으로 그가 한 행동은 시후를 세차게 끌어안는 것이었다. 그의 품 안으로 들어온 시후는 픽, 하고 웃었다.

“왜 이래. 뭐, 감동이라도 받았어?”

“엄청요.”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며 예준은 시후의 향을 길게 들이마셨다. 그의 몸에서 페로몬 향과 향수 냄새가 한데 섞여 은은하게 풍겼다. 차갑고 세련된 향임에도 예준은 꼭 따뜻한 차를 마신 듯 온기를 느꼈다.

“아.”

 가만히 향을 느끼던 예준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붙였던 몸을 급히 뗐다. 얌전히 그의 포옹을 받아 주던 시후는 왜 그러냐는 듯이 눈썹을 찡그렸다.

“미안……. 누구한테 사진이라도 찍히면 어떡해요.”

“이제 와서?”

 시후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몰랐나 본데. 밖에서 틈만 나면 포옹해 댔어, 요즘.”

“…….”

“얼굴 빨갛다.”

“꼭 그런 걸 짚어야 해요?”

“응, 그러면 더 빨개지거든. 이거 봐, 이제 목도 빨개.”

“아. 형, 하지 마요.”

“창피해하지 말고 그냥 안아.”

“…….”

 시후는 “어서” 하고 손가락을 까딱, 움직였다. 오만하기 이를 데 없는 동작에 배인 건 애정이었다.

 예준은 어쩐지 마음이 시큰거리는 자신을 느꼈다. 살며시 다가간 그는 시후의 어깨에 턱을 괴었다. 그러자 시후는 “옳지” 하고 읊조리며 예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회장님 화나신 건 어떡해요.”

“뭐, 어쩌겠어.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도 있잖아. 이제 곧 그 말을 톡톡히 체감하시겠지.”

“정말 내일 기사 낼 거예요?”

“내야지. 아버지 입장으로선 다행일걸. 너 건드리면 연애설 내겠다고 했으니.”

 예준은 그만 웃음이 터졌다. 열애설이라니. 한때 사진 한 장이라도 잘못 찍힐까, 경계하던 백시후는 어디로 간 걸까. 무모할 정도로 대담한 이 발언은, 깊어진 자신들의 관계를 증명한다고 볼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하하, 난 9년 뒤에도 형보다 부족할 것 같아요.”

“칭찬으로 받아들이겠어.”

 대꾸하는 시후의 목소리는 한없이 가벼웠다. 그의 덤덤함에 전염된 걸까, 예준은 한결 진정된 자신을 발견했다.

‘그래.’

 예준은 조용히 생각했다. 그래, 일단은 현재에 집중하자. 형은 바다에 가고 싶다고 했고, 나는 거기로 형을 데려가야 한다. 그래, 집중하자. 그러자, 묵은 체증이 내려간 듯 속이 후련해졌다.

 예준은 미소를 띤 채 시후의 어깨에 이마를 대었다. 그런 예준의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은 느릿하면서도 부드러웠다.

                                                                                                                                                                                         ***

 차가 도착한 곳은 어느 이름 모를 해변이었다. 창을 보며 감상하던 시후는 어둠 속에서도 희게 부서지는 파도를 향해 말했다.

“저기로 가자.”

 예준은 순순히 운전대를 돌려 해변으로 향했다.

“운전 잘하네. 기사 해도 되겠어.”

 예준이 열어 주는 차 문을 나서며 시후가 나직이 한마디 했다. 고저 없는 목소리였으나 분명한 농담임을 예준은 알았다.

“정말요? 사실 많이 떨렸어요.”

“왜?”

“이 차……. 가격을 알거든요.”

“네가 부숴뜨려도 상관없을 가격대지.”

“…….”

“이제 이 정도는 익숙해져야 해. 그래야 너도, 나도 편하지.”

 그 말에 예준은 살짝 웃었다. 익숙해져야 한다니. 고가의 시계 선물을 받고 어마어마하게 비싼 차를 몰았는데도 형은 만족스럽지 못한가 보다.

 예준의 미소를 본 시후는 고개를 젓더니 먼저 앞장섰다. 바다를 향해 걸어가는 그의 머리카락이 자유분방하게 나부꼈다. 예준은 그를 따라 한 발자국씩 더디게 따라갔다. 모래 위로 두 사람의 발자국이 하나둘씩 생겨났다.

 새까만 바다는 요란하게 소리 내며 파도를 쳤다. 흰 포말을 감상하던 예준은 천천히 눈동자를 위로 올렸다. 마침 하늘 위에 크고 둥근 보름달이 떠 있었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 덕에 보름달은 오색 빛을 찬란하게 내고 있었다.

 예준은 그 아래로 다시 시선을 내렸다. 저 멀리 수평선을 가로지르는 바다가 달빛을 듬뿍 머금고 있었다. 황금색으로 물든 바다를 응시하고 있자니 손가락 끝이 간질거렸다. 예준은 아무도 없는 바닷가에 시후와 단둘이 있음을 새삼스레 느꼈다.

 별안간 뺨에 무언가가 닿았다. 얼굴을 돌린 예준은 시후가 제 뺨을 손가락으로 찌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시후는 손가락으로 그의 볼을 누른 채로 눈을 가늘게 떴다.

“왜 그래요?”

“그냥. 웃는 게 예뻐서.”

“……형도 웃어 봐요.”

“나?”

“응. 형도 웃는 거 예쁘거든요. 나도 보고 싶어요.”

 볼을 누르고 있던 손가락이 눈가로 올라왔다. 눈물점이 박힌 눈 부근을 가볍게 쓸어내린 뒤 시후는 바람 빠진 소리를 옅게 내었다. 만족감이 예준의 가슴속에서 서서히 퍼져 나갔다.

“예뻐요.”

“말을 말자.”

 시후는 가볍게 한마디 한 뒤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시후의 옆얼굴에도 달빛이 내려앉아 있었다.

 예쁘다는 말은 괜한 빈말이 아니었다. 흰 달빛을 머금은 뺨, 눈꺼풀에 달린 검고 긴 속눈썹, 호선을 긋고 있는 입술이 예뻤다. 너무 예뻐서, 혈관이 부풀고 심장이 터져 버릴 것 같았다.

“아주 잡아먹겠네.”

 예준의 마음을 읽었는지 시후가 담담한 목소리를 내었다. 예준은 당황해하지 않았다.

“그래도 돼요?”

“먹고 싶어?”

 일부러 놀리기 위해 짓궂게 말했음이 분명했다. 그 의도를 알아차린 예준은 한발 늦게 웃음을 터뜨린 뒤 고개를 끄덕였다. 입꼬리는 올라가 있으나 눈동자는 진지하다 못해 엄숙했다.

 어둠 속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쨍강, 부딪쳤다. 그러는 동안 파도는 끝없이 밀려들었다, 뒤로 빠져나갔다가 다시 밀려오기를 반복했다.

 쏴아, 쏴아아.

 규칙적인 소리가 정적을 부드럽게 흔들었다.

 먼저 입을 맞춘 사람은 예준이었다. 열이 올라 뜨거워진 손으로 시후의 어깨 전체를 그러쥐었다. 시후는 예상했다는 듯 가만히 서 있어 주었다.

 이윽고 예준은 달빛에 흐릿하게 보이는 시후의 입술 위로 제 입술을 갖다 대었다. 그런 채로 그는 입술을 느리게, 한없이 느리게 비볐다. 말캉한 감촉을 원 없이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서로의 숨이 어떤 식으로 가빠지는지 확실히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끈질긴 행위였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서늘한 체온이 뒷목에 닿았다. 그의 목을 물풀처럼 휘감은 시후의 손가락들이었다.

 목덜미를 감싼 손이 고개를 수그리도록 만들었다. 벌어진 예준의 입술 안으로 뜨거운 것이 밀려 들어왔다. 그것이 시후의 혀임을 깨닫자마자 현기증이 일었다. 어지러움에 예준은 눈을 감았다. 그런 와중에도 제 입 안 이곳저곳을 탐하는 혀에 제 혀를 갖다 대는 행위를 멈추지 않았다.

 서로의 혀가 얽히며 나는 소리가 귓등을 자극했다.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것 같은 쾌감이 폭죽처럼 터졌다.

“……이만 안으로 들어가요.”

“안 어디?”

“어디든요. 그렇게 해 줘요, 여기서 해 버릴 것 같아서 하는 말이에요.”

 애가 끓어 견딜 수 없어 하는 음성이 목구멍에서부터 터져 나왔다. 예준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고는 이내 한마디를 더 했다.

“참기가 힘들어요.”

 예준은 상대방의 눈동자에서 즐거움이 퍼지는 걸 똑똑히 목격했다. 재밌어하는 그를 당장에 덮쳐 짐승처럼 엉겨 붙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갈망이 더해지고 더해졌을 때, 시후는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끊어 보려고 했는데.”

“…….”

“안 되네.”

 시후의 손에 들려 있는 건 담뱃갑이었다. 그는 자신을 열망에 찬 눈으로 바라보는 예준을 놔둔 채 담배를 꺼냈다. 그러고는 희고 긴 그것을 예준의 입에 물려 주었다.

 달각.

 시후는 라이터를 꺼내서는 불을 피워 주었다. 담배의 끄트머리가 빨갛게 빛날 때, 시후는 입술만 움직였다. 무언의 뜻을 읽은 예준은 여전히 시후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담배를 빨아들였다. 희멀건 연기가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자 시후는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래.”

 시후는 뜻 모를 소리를 하더니 입술 사이에 걸려 있는 담배를 가져갔다. 이어 그것을 제 입에 물더니 그대로 등을 돌려 걸었다. 예준은 천천히 멀어져 가는 시후를 바라만 보았다.

 담배 연기를 흘리며 걸어가는 시후는 흡사 어느 영화의 한 장면에 나오는 배우 같았다. 창백한 보름달과 검은 바다, 그리고 가까이 다가왔다가 이내 사라지는 흰 파도. 아름답다 못해 꿈처럼 몽롱해지는 풍경 속에 시후는 자연스레 섞여 있었다.

 예준은 어쩐지 점차 호흡하기가 힘들어지는 자신을 발견했다. 심장이 걷잡을 수 없이 두방망이질 치기 시작했다.

 쿵, 쿵, 쿵, 쿵.

 머리가 울릴 정도로 강렬한 박동을 느낄 때였다.

 시후가 고개만 돌려 예준을 바라보았다. 그는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꺼내더니 연기를 뱉었다. 때마침 불어온 바람에 까만 머리카락이 보기 좋게 흔들렸다.

 다음으로 시후가 한 행동은, 입술을 붙인 채 미소를 건네는 것이었다. 옅은 미소의 파급력은 거대했다. 예준의 시야 안으로 오로지 백시후라는 존재만이 들어왔다.

 평상시에는 볼 수 없는, 자유롭게 흩날리는 머리카락.

 밤하늘만큼 새까만 눈동자.

 다정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날카로운 콧날.

 그와 정반대로 부드럽게 느껴지는 입술의 곡선.

 자석에 이끌리듯, 예준은 그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다급함을 숨기지 않은 채 다가간 예준은 시후의 손을 잡았다. 그새 땀으로 젖어 있는 예준의 손을, 시후는 불쾌한 기색 하나 없이 내려다보았다.

 잠시 후, 시후는 예준의 손가락 사이에 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덤덤한 터치만으로도 예준은 눈앞이 아찔했다. 빨갛게 물든 그의 귓바퀴로 시후의 웃음소리가 달라붙었다.

“한 모금 더 빨래?”

“……네.”

 예준은 바짝 말라 오는 입술을 움직였다.

“빨게 해 줘요.”

 시후의 얼굴에도 흥분한 기색이 섬광처럼 스쳤다. 그는 몇 초 동안 뚫어질 듯이 상대를 응시하더니 다시 담배를 예준의 입에 물려 주었다.

 두 사람은 하나의 담배를 나눠 피우며 시선을 교환했다. 긴장감이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채로. 그것이 언제 터질지 모르는 채로, 그렇게 담배를 피웠다.

                                                                                                                                                                                         ***

“시후 형.”

“……왜.”

“안으로 들어가자고 한 건……. 여길 말한 게 아녔어요.”

“그래서 싫어?”

“아뇨……. 좋아요.”

“…….”

“너무 좋아요. 저 좀, 변태 같죠.”

“좀이 아니라 아주.”

“하하.”

 차로 돌아간 시후는 왜인지 뒷자리에 앉았다. 그는 의아해하는 예준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안으로 들어가자며.’

 그러고는 와이셔츠 단추를 하나 더 푸는 것으로 제 의도를 보여 주었다. 커다란 느낌표가 예준의 머리를 강타했다.

“후…….”

 예준은 흥분으로 떨리는 숨을 뱉었다. 그러자 시후는 예준 쪽으로 상체를 돌리더니 고개를 나긋하게 까딱였다.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보라는 듯 말끄러미 응시하는 시선이 자극적이었다.

 뜻대로 움직이기 직전, 예준은 잠깐 시선을 다른 데로 돌렸다. 차창 너머에 있는 바다가 눈에 들어왔다. 사람 한 명 보이지 않음에도 긴장감이 팔뚝을 찌르르 울렸다. 은밀하고 야하다는 말 외엔 표현할 길이 없는 상황이었다.

“유예준.”

 콱 잠겨 있는 음성이 예준의 귓등을 때렸다. 동시에 서늘한 손이 턱을 잡아 돌렸다. 정면으로 들어온 시후가 한쪽 눈썹만을 올리고 있었다.

“날 두고 한눈을 파네?”

‘감히’라는 단어가 붙어도 이상하지 않을 오만한 말투였다.

 예준은 몇 초 동안 그와 시선을 섞다가 기습적으로 입술을 붙였다. 힘으로 밀어붙인 탓에 시후의 뒤통수가 창문에 부딪혔다. 쿵, 하는 소리에 예준은 급히 상대의 뒤통수를 손으로 감싸 안았다. 손바닥을 간질이는 머리카락이 부드러웠다.

 예준은 원했던 대로 시후를 먹기 시작했다. 타액으로 젖은 입술을 빨고 그 아래로 미끄러지듯 내려가 턱을 물었다.

 예준의 고개는 밑으로 차츰차츰 내려갔다. 꿈틀거리는 목젖을 빨고 귀 아래 살갗을 잘근잘근 씹어 보기도 했다. 겹쳐진 시후의 상체가 들썩이는 게 생생히 느껴졌다. 그 역시 들뜰 대로 들떴다는 증거였다.

“아.”

 탄성을 흘리며 예준은 상대의 와이셔츠 단추를 완전히 풀었다. 이어 그 안으로 쓰러지듯 얼굴을 파묻었다. 이마에 닿는 가슴에서 심장 소리가 울렸다.

 쿵, 쿵, 쿵.

 오래달리기를 한 사람처럼 거세게 뛰는 소리에 미소가 나왔다. 그 위에 뜨거운 숨결을 불자 시후가 예준의 머리카락을 움켜잡았다.

“아파요.”

“투정은.”

 시후가 코웃음을 쳤다. 그러면서도 머리카락을 잡은 손힘을 풀어 주었다. 예준은 그가 다시 제 머리를 움켜쥐도록 목을 세게 깨물었다. 시후가 비웃은 대로 투정이 맞았기 때문이었다.

 입 안으로 들어오는 피부를 즐기며 치아로 잘근잘근 씹자 다시 머리가 잡혔다. 시후는 예준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며 욕을 중얼거렸다. 쇳소리가 섞인 음색에 달뜬 기색이 역력하게 풍겼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밀착한 채로 하반신을 비볐다. 시후는 아예 한쪽 다리를 들어 올려 예준의 어깨에 걸터앉기까지 했다. 시후의 다리 사이로 몸을 집어넣으며 예준은 숨을 멈추었다. 좁은 공간 속 부푼 고간을 서로 문대는 이 상황이 감질났다.

“흐으.”

 뒤늦게야 예준은 쌓고 쌓은 호흡을 터뜨렸다. 그러는 동안 시후는 머리를 움켜잡았던 손을 내렸다. 희고 긴 손가락 사이로 머리카락 몇 올이 물풀처럼 휘감겨 있었다.

 예준은 꼿꼿하게 세운 그의 손가락에도 입을 맞추었다. 가볍게 키스하자 시후가 어이없다는 듯 바람 빠진 소리를 내었다.

“웃겨.”

“뭐가, 하아, 웃겨요?”

“발정 나서 서로 비벼 대는 알파들. 웃기지, 으음…….”

 예준이 힘있게 허리를 쳐올리자 시후는 신음을 흘렸다. 하반신을 맞닿은 채로 문댈 때마다 쾌감이 걷잡을 수 없이 더해져 갔다.

 그때, 시후가 인상을 쓰더니 입맞춤당한 손가락을 밑으로 내렸다. 손가락은 예준의 청바지 버클을 긁었다. 감질나 참을 수 없었던 건 그 역시 마찬가지였던 모양이었다. 서로 뜻이 통했음을 깨달은 예준은 더욱 과감하게 행동했다.

 시후가 바지를 속옷째 내리는 동안 예준 역시 시후의 벨트를 풀었다. 곧 손 안으로 매끈하면서도 탄탄한 살결이 잡혔다. 예준은 그것을 주무르며 원하는 대로 행동했다. 키스하고, 더듬고, 깨물어 보기도 하며 폭죽처럼 터지는 환희를 즐겼다.

“윽.”

 시후가 몸을 들썩이며 이를 악물었다. 그런 시후를 내려다보며 예준은 그의 발기한 성기를 단숨에 잡아 쥐었다. 손가락으로 몇 번 더듬자 끈적한 액이 손바닥에 닿았다.

“잘하네, 우리 예준이.”

“정말요?”

“그래…….”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예준의 귓등을 간지럽혔다. 예준은 미소를 머금은 채 손가락을 움직였다. 단정하게 깎은 손톱으로 요도구를 긁자 끈적한 숨이 그의 뺨에 달라붙었다.

 이 작은 구멍을 있는 대로 헤집어 대는 것을, 시후는 참 좋아한다. 그 사실을 진작부터 알고 있기에 예준은 예민한 살갗을 끈질기게 괴롭혔다.

“윽, 아, 씹.”

“좋아요? 곧 갈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비켜 봐.”

 그 말에 예준은 못 들은 척 귀두를 엄지로 힘있게 비볐다. 차 시트에 대고 있던 시후의 둔부가 크게 들썩였다. 시후는 뜻대로 진행되지 않는 상황에 짜증이 났는지 눈가를 찌푸렸다.

“비키래도.”

“가는 거 싫어요?”

 시후는 대답하는 대신 긴 다리로 예준의 어깨를 느릿하게 밀었다. 상대가 두 번이나 거부하자 예준은 순순히 뒤로 물러섰다. 짐승처럼 들러붙어도 모자랄 판에 왜 갑자기 멈추는 걸까. 의아함도 잠시, 예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후우.”

 몸을 일으킨 시후는 그대로 창문을 내렸다. 내린 창문 안으로 시원한 바람과 파도 소리가 밀려 들어왔다. 얼굴에 닿는 찬 공기에 예준은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누가 보면 어쩌려고요.”

“없잖아.”

“그래도…….”

“잊었나 본데 우리 이미 밖에서 혀 섞었어.”

“그렇지만 그건 키스고요, 이건…….”

“이건?”

 물으면서 시후는 한 번 더 놀랄 행동을 벌였다. 차 문을 두 손으로 짚더니 하반신을 예준 쪽으로 내민 것이었다.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을 만큼 탄탄한 둔부가 보기 좋게 올라와 있었다. 예기치 못한 도발에 예준의 색소 옅은 눈동자가 와락 흔들렸다.

“이건 뭘까.”

 한 번 더 물으며 시후는 고개를 돌려 시선을 마주했다. 잘생긴 얼굴에 성격 나쁜 미소가 떠 있었다.

“뒤치기?”

 듣는 사람을 흔들기 위함이었다면 매우 성공적인 발언이었다. 예준은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바지를 잡아 끌어내렸다. 한여름의 뙤약볕에 노출된 사람처럼 몸에 열이 감돌았다.

 예준은 근육이 보기 좋게 잡힌 둔부를 느릿하게 쓰다듬었다. 손바닥에서 배어 나오는 땀에 금방 미끄러워졌다.

“젤이 없는데, 괜찮겠어요?”

“새삼. 없이 한 적이 한두 번인가.”

“그래도 물어봐야죠. 말도 없이 형 맨구멍에 넣을 순 없잖아요.”

‘맨구멍’이라는 단어에 시후가 그게 뭐냐며 키득거렸다. 나지막이 웃는 그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흔들렸다.

 근사한 광경을 눈에 담으며 예준은 제 좆을 잡고 수음하기 시작했다. 성기를 위아래로 훑는 손등 위로 여러 갈래의 핏줄이 도드라지고, 긴 목에도 푸르스름한 핏대가 섰다.

“읏, 하아…….”

 신음을 흘리는데 시후가 물끄러미 예준의 얼굴을 응시했다. 자칫 수치스러움을 느낄 법한 자세임에도, 시후는 조금도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예준의 눈가와 뺨 그리고 입술을 어루만지는 눈빛에는 오로지 호기심만이 있을 뿐이었다. 예준이 언제 정액을 쌀지 궁금하다는 뜻이었다.

 여유가 담긴 시선에 동요한 건 오히려 유예준이었다. 빤히 바라보는 시후 때문에 옷이 몽땅 발가벗겨진 듯한 민망함이 일었다. 그러나 쳐다보지 말라는 말은 끝끝내 하지 않았다. 자신이 흥분으로 무너지는 모습을 그가 지켜보는 게 부끄러우면서도 좋았기 때문이었다.

 예준은 귓바퀴가 홧홧하게 달아오름을 깨달으며 긴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금방 찾아오는 사정감에 허리가 격하게 들썩거렸다.

“크읏……. 하!”

 발기한 성기에서 흰 정액이 흘러나왔다. 그러자마자 예준은 성기를 잡지 않은 손으로 시후의 엉덩이 골 사이를 벌렸다. 그리고 드러난 구멍 위로 정액을 발랐다. 손가락으로 주름을 문댈 때마다 쩌덕쩌덕 젖은 소리가 터졌다. 곧 시후와 더 난잡하게 엉킬 걸 생각하니 열이 올랐다.

“하아…….”

 시후가 숨을 토해 내며 어깨에 힘을 주었다. 불안정한 자세가 불편한지 계속해서 하반신을 꿈틀거렸다. 엉덩이가 위로 치솟으며 정액에 범벅이 된 구멍이 드러났다.

“형, 여기 정말 야해요.”

 읊조리는 예준의 머리카락에서 땀이 뚝뚝 흘러내렸다. 열린 창문으로 바람이 들어왔음에도 열기가 가시질 않았다. 가쁜 호흡을 뱉으며 예준은 구멍 안에 박아 둔 손가락을 빼냈다.

“네 목소리가 더 야해.”

 웃음기가 섞인 시후의 속삭임이 귓바퀴에 달라붙었다. 예준은 따라 웃고는 천천히 성기를 삽입했다. 젤이나 콘돔이 없어 평소보다 느리고 조심스러웠다.

“윽.”

“괜찮아요?”

“……계속 해.”

 혹시라도 시후를 다치게 할까, 신경이 곤두섰다. 예준은 몇 번이고 호흡을 고른 다음 서로의 몸이 바짝 닿도록 엎드려 기댔다. 엉덩이 골 사이로 파고들었던 성기가 더 깊게 밀려들었다. 아래 깔린 시후의 숨소리가 높아지며 점점 고조되어 갔다.

“하…….”

 상대 역시 흥분했음을 알아차린 순간, 간신히 유지하고 있었던 이성의 끈이 가늘어졌다. 허리를 쳐올릴 때 자신도 모르게 힘이 들어간 건 그 때문이었다. 예준은 계속해서 허릿짓을 하며 시후를 강하게 내리눌렀다.

 시후의 둔부가 위로 올라갔다. 움찔, 하고 떨리는 피부에 갈색 음모가 달라붙었다. 예준은 숨을 들이마시며 성기를 끝까지 집어넣었다. 제 예민한 중심 부위를 조이는 힘에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예준은 입을 크게 벌리며 시후의 귓바퀴를 빨았다. 그러고는 뿌리까지 밀어 넣었던 성기로 시후의 뒤를 쑤셨다.

 퍽, 퍼억!

 좁은 차 안에 마찰음이 선명히 울려 퍼졌다.

“윽, 시후, 형.”

 이름을 부르자 시후가 잘게 떨었다. 그의 떨림을 더 느끼고픈 충동이 사납게 일었다. 예준의 입술이 뺨에 닿았다. 이어 뜨겁게 달아오른 피부를 입술로 지분댄 뒤 다시 귀를 건드렸다. 간지러운지 시후가 고개를 아래로 수그렸다. 예준의 시야에 희고 긴 목덜미가 들어왔다.

 매끈한 피부를 보자마자 좆이 터질 듯 팽창해 버렸다. 러트라도 온 듯 하반신에 쏠리는 감각에 예준은 인상을 썼다. 그렇게 잠시간 눈썹을 구긴 채 침묵하던 그는 곧 상대의 목덜미에 입술을 대었다. 혀를 내밀어 피부를 핥자 시후의 신음이 한층 높아졌다.

 듣기 좋다. 어떤 음악도 시후의 교성을 이길 수 없을 것이다. 예준은 혀끝을 뾰족하게 세운 뒤 시후의 살결을 꾹꾹 찔렀다. 땀이 난 건지 짠맛이 옅게 났다.

“허리, 더 세게 흔들어.”

 감질난 건지 시후가 거칠어진 목소리를 내었다. 예준은 그런 시후의 얼굴을 상상했다. 벌겋게 피가 몰린 뺨과 흥분으로 충혈된 눈동자. 그리고 자신처럼 땀에 젖은 이마를 하고 있을 것이다.

 자극적인 상상에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였다. 예준은 이를 악물고 더 힘있게 내리찧었다. 핏줄이 우둘투둘 돋은 기둥이 내벽을 사납게 비볐다. 아래 깔려 있던 시후가 손톱을 세웠다. 단정하게 깎은 손톱은 창문을 몇 번이고 긁었다.

“하아…….”

 예준은 제 좆을 완전히 밀어 넣은 채로 하반신을 좌우로 흔들었다. 꿈틀대는 속살이 그의 것을 계속 우물거렸다. 수축하는 힘에 절정이 빠른 속도로 올라왔다.

“형, 시후, 형.”

“읏, 하아, 아.”

“여기 좋아요? 이쪽을 박으면, 더 조이는데.”

“윽!”

 예준은 손을 내려 시트를 더듬었다. 차 시트에 끈적끈적한 액체가 묻어 있었다. 방금 시후가 싸지른 액임을 어렵지 않게 알아차렸다.

‘미치겠네.’

 이대로 시후의 몸을 부숴 버릴 정도로 움직이고 싶다. 사나운 충동 속에서 예준은 입 모양으로만 욕을 했다. 그러고는 상체를 일으키며 두 손으로 시후의 골반을 부여잡았다. 좁은 내벽을 파헤쳐 가며 끝까지 박을 때마다 시후의 목덜미가 벌겋게 변해 갔다.

“윽, 흐, 끄……. 흑!”

 시후의 목구멍에서 짐승처럼 으르렁대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두 번째 절정이 왔음이 분명했다. 그가 오르가슴을 겪고 있는 과정을 지켜보며 예준은 숨을 멈췄다. 귀 아래 혈맥이 팔딱팔딱 뛰는 소리가 요란했다.

 잠시 후, 예준 역시 몇 번이고 허릿짓을 한 뒤 성기를 단숨에 뽑아냈다. 예민해진 속살이 잡아당겨지는 감각에 놀란 건지 시후가 “윽!” 하고 큰 소리를 내었다.

 좆을 빼내자 구멍이 작게 입을 벌린 채 우물거렸다. 주름에 달라붙어 있던 정액이 방울져 흘러내렸다.

 보고 있자니 가슴 안이 부글부글 끓었다. 예준은 시후의 둔부 위에 성기를 얹었다. 그러고는 손가락을 움직여 구멍 입구를 만지작댔다. 손끝에 닿는 촉촉하고 부드러운 감각에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몇 초 지나지 않아 예준은 시후의 둔부 위로 정액을 토해 냈다. 불투명한 액체가 흰 엉덩이를 끈적하게 더럽혔다. 그러는 동안 시후는 아까와 달리 신음을 내지 않고 있었다. 몸에 힘을 푼 채 숨만 천천히 들이마시고 있을 뿐이었다.

“하아…….”

 예준은 뒤늦게 시후처럼 숨을 크게 터뜨렸다. 달리기라도 한 듯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어 댔다.

 쿵, 쿵, 쿵, 쿵.

 몸 안을 울리는 심장 소리를 들으며 예준은 허리를 수그렸다.

“닦아, 드릴게, 요.”

“됐으니 숨부터, 후, 골라.”

 읊조리는 시후의 목소리가 콱 막혀 있었다. 듣기 좋은 음성이라고 생각하며 예준은 시후의 머리카락을 만지작대었다. 손가락에 감기는 흑발이 매끄러웠다.

 가만히 그의 머리를 만지작대며 침묵을 지킬 때였다. 갑자기 시후가 손을 위로 올리더니 문을 열어 버렸다. 열린 문 안으로 바람이 한꺼번에 밀려 들어왔다. 몸 전체를 감싸 도는 찬 기운에 놀라 예준은 석고상처럼 쩍 굳었다.

“아.”

 반면 시후는 평온한 숨소리를 흘렸다.

“좋다, 바람.”

 졸음기 섞인 음성에 예준은 뭐 하는 거냐는 질문을 삼켰다. 이미 창문을 연 채 섹스한 지 오래다. 들키려면 진작 들켰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니 포기하고 시후의 숨소리와 체온을 느끼는 게 옳을지도 모르겠다.

“……모르겠다.”

 혼잣말을 한 뒤 예준은 앞을 바라보았다. 눈앞에 검은 바다가 온전히 들어왔다. 끝도 없이 펼쳐진 바다를 응시하고 있자니 어쩐지 몸 전체가 울렁거렸다. 마치 바다 위에 떠 있듯, 울렁울렁.

 예준은 밑으로 시선을 내렸다. 그것도 잠시, 뒷좌석에 있던 휴지를 꺼내 시후를 닦아 주었다. 얌전하게 늘어져 있던 시후는 뜻 모를 웃음소리를 내었다.

“왜 웃어요?”

“그냥, 간지러워서.”

“하하.”

“넌 왜 웃는데.”

“그냥요. 형 웃으니 같이 웃음이 나와서.”

 그렇게 말하며 예준은 눈꼬리를 보기 좋게 휘었다. 시후는 안 봐도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알겠다고 중얼거렸다. 그러더니 오른손을 뒤로 빼내며 한마디 덧붙였다.

“손, 잡고 싶은데.”

 달콤한 제안을 예준이 거절할 리 없었다. 예준은 스스럼없이 그의 손 위에 제 손을 겹쳤다. 시후의 손은 후끈하게 열이 올라 있었다. 평소 서늘한 체온을 가진 사람답지 않은 뜨거움이었다.

 그게 자신과의 섹스 때문임을 알자, 묘한 희열이 예준의 몸 전체로 구석구석 번져 갔다. 예준은 손가락 사이로 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그러자 시후는 손가락을 구부리며 힘있게 손깍지를 해 주었다.

 단단한 스킨십에 예준은 다시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 예준의 머리 위로 바람이 스치고 지나갔다. 땀에 축 늘어져 있던 머리카락은 곧 천천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예준은 제 이마를 식혀 주는 바닷바람을 느끼며 더 힘있게 시후의 손을 잡았다.

 쿵, 쿵.

 맞닿은 손바닥에서 누구의 것인지 모를 맥박 소리가 울려 퍼졌다.

                                                                                                                                                                                         ***

“들어가자.”

 시후가 어느 식당을 가리키며 한 말이었다. 무심코 그쪽으로 고개를 돌린 예준은 적지 않게 놀랐다. 긴 손가락이 향한 곳은 바닷가 한구석의 허름한 식당이었다. 식당 앞에 어지러이 흩어진 그물, 낡은 티가 나는 간판 등을 발견한 예준은 멈칫했다.

“괜찮겠어요?”

 시후는 무슨 뜻이냐는 표정을 무심하게 지었다.

“밥 안 먹을 거야?”

“그런 말이 아니라…….”

“빈속으로 운전하기 싫어. 가자.”

 말을 마친 시후는 예준의 팔을 툭 치고는 먼저 걸음을 움직였다. 거리낌 없이 들어가는 모습에 예준은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저런 낡은 식당 같은 데에는 눈길도 주지 않을 줄 알았다. 그럴 줄 알았던 시후가 먼저 식당을 찾아갈 거라고는 미처 예상치 못했다.

 의아함 속에서 예준은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식당 내부는 작지만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등을 곧게 편 채 앉은 시후는 매운탕과 회를 주문했다. 시후보다 서른 살은 더 많아 보이는 식당 사장은 몇 번이고 허리를 구부렸다. 별안간 제 식당 안으로 들어온 청년의 위압감에 눌려 버린 것이 분명했다.

 어려워하는 티를 내는 사장님의 뒷모습을 보다 예준은 낮게 킥킥거렸다. 시후는 왜 웃냐고 덤덤하게 물은 뒤 핸드폰을 꺼냈다.

“네 기사 떴는데, 한번 볼래?”

“음……. 밥 먹고 볼래요. 지금 보면 얹힐지도 몰라요.”

“얹힐 것까지야. 별 내용은 아냐, 내가 널 밀어준다는 기사지.”

 그러면서도 시후는 핸드폰을 주머니 안으로 넣었다. 예준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짙어졌다.

 식사가 나올 때까지 두 사람은 정적에 잠겼다. 굳이 일부러 말을 꺼내지 않아도 될 만큼 편안한 고요였다. 예준도, 시후도 나른한 얼굴이 된 건 그 때문이었다.

 정작 침묵을 불편해한 건 주방에 있던 사장님이었다. 사장님은 “어흠” 하고 기침을 하더니 슬쩍 리모컨을 들어 TV를 켰다. 화면이 켜지면서 드라마의 한 장면이 나왔다. 예준과 시후 모두 그쪽으로 눈동자를 돌렸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그 앤 안 돼!]

 고급스러운 의자에 앉아 있던 중년 남성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분노로 붉어진 얼굴을 한 채 청년을 향해 삿대질을 했다.

[어딜 그런 근본도 모르는 애를……! 내가 너 그러라고 거기 보낸 줄 알아?]

 천둥 같은 고함에도 청년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그 모습을 가만히 보다 [아버지] 하고 태연하게 불렀다.

[흙이 없어서 참 안타깝네요. 뿌려 드릴 수 없으니 말이에요.]

[뭐, 뭐라고?!]

[허락받으러 온 게 아니라, 통보하러 온 겁니다. 제가 사랑하는 사람은 오직 그 애뿐이라고요. 그걸 아버지께서 아셨으면 해서 온 거예요.]

[아니, 이놈이?!]

 아버지는 옆에 있는 물건을 잡아 던졌다. 그것이 벽에 부딪히는 소리가 천둥 같았으나 남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다시는 그 애한테 손대지 마십시오. 또 그 앨 건드리면, 아무리 아버지라 해도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아들의 대담한 발언에 아버지는 뒷목을 잡고 쓰러지는 시늉을 했다.

 멍하니 있던 예준은 자신도 모르게 홀린 듯 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처음 보는 건데도 이토록 집중하게 만들다니. 인기 드라마일 거라고 추측하다 예준은 “아” 하고 탄성을 내었다.

“저 남자, 형 닮았어요.”

 시후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고개를 기울였다. 몇 초 동안 TV를 보던 것도 잠시, 그는 나른하게 접히는 눈매를 한 채 한마디 했다.

“얼굴은 내가 더 나은데.”

 다른 사람이 했으면 우습기만 했을 말이, 시후가 하니 그럴듯하기만 했다.

“당연히 형이 낫죠. 얼굴 말고 성격이요. 왠지 회장님께도 저랬을 것 같아서요.”

“음.”

 시후는 부정하지 않았다. 예준은 기절 직전인 백 회장 앞에서 말을 늘어놓는 시후를 상상했다.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또박또박 말했을 그가 어렵지 않게 그려졌다.

“어젠 그렇다 쳐도……. 언젠가 회장님을 뵙긴 해야 할 텐데요.”

“만나서 뭐라고 하려고.”

 시후는 TV 쪽으로 눈짓했다.

“‘아드님을 제게 주십시오’, 뭐 이런 말이라도 하려고?”

“아, 형.”

“그때 꼭 나 불러, 재밌겠다.”

 어떤 일이 있어도 흐트러지지 않는 시후가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다. 예준은 자길 부르라는 말에 어이가 없어진 한편, 슬며시 고개 들려던 불안이 사라졌음을 깨달았다. 색소 옅은 눈에 뭐라 형언하기 힘든 감정의 빛이 일렁거렸다.

 두 사람이 다시 침묵에 잠겼을 때였다. 테이블 위에 여러 종류의 음식들이 차려졌다. 다행히, 회와 매운탕 모두 신선한 맛을 자랑하고 있었다.

 거구의 두 젊은이가 빠른 속도로 음식을 해치우기 시작했다. 구석에서 눈치 보고 있던 사장이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식사를 마치고 식당에서 나온 두 사람은 담배 대신 사탕을 입에 물었다. 예준은 자신처럼 막대사탕을 먹는 시후를 감상하다 사탕을 깨물었다. 향긋한 바닐라 맛이 혀를 촉촉하게 적셨다.

“유예준.”

 시후는 사탕을 문 채 조용히 말했다.

“나 그만 보고 바다나 봐.”

 그 말에 예준의 목덜미가 발갛게 익었다. 얼마나 뚫어질 듯이 봤으면 저런 말을 할까. 예준은 다급히 바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쿡쿡 웃는 음성이 귓불을 간질였다.

“그래, 그렇게. 매일 보는 바다가 아니잖아, 왔을 때 실컷 봐야지.”

“그만 놀려요.”

“내가 왜 놀렸다고 생각하지?”

“형만 쳐다본다고 놀리는 거잖아요. 어쩌겠어요, 자꾸 형만 눈에 들어오는데.”

“흠.”

“불가항력이에요. 형이 너무 좋아서 안 된다고요.”

 말을 마친 뒤 예준은 시후를 돌아보려 했다. 그 순간 크고 단단한 손이 예준의 눈을 가렸다.

“바다 보라니까.”

 한 옥타브 낮아진 음색이 놀랄 정도로 애틋했다. 예준은 급히 고개를 기울여 시후의 옆얼굴을 확인했다. 시후는 바다 쪽으로 시선을 두고 있었다. 매끈한 이마와 코 그리고 턱선은 당대 최고의 장인이 제작한 석고상처럼 완벽했다.

 뚫어질 듯이 응시하던 예준은 곧 그의 변화를 찾아냈다. 희어야 할 뺨이 지금은 불그스름하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 모습에 그의 입술이 뭉개질 정도로 마구 키스를 퍼붓고 싶어졌다.

 예준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바다를 응시했다. 시후 역시 자신과 같은 마음이라는 사실에 몸이 간지러웠다.

“갑자기 바다를 보게 될 줄은 몰랐어요.”

“나도 그래.”

“형도요?”

“그래, 너 만난 이후로 매사 이런 식이야. 충동적인 사람이 됐어.”

 바다가 햇살에 반사되어 하얗게 반짝였다. 투명하게 빛나는 윤슬을 감상하며 예준은 물었다.

“좋은 변화인가요?”

“글쎄.”

 파도가 밀려왔다. 거센 물살에 작은 모래알과 자갈들이 굴러다녔다.

“적어도, 심심하진 않아졌어.”

“하하.”

“예준아.”

“네, 형.”

“우리 미국 갈까?”

 고요 속에 시후의 목소리가 울렸다.

“뉴욕에서의 크리스마스 어때. 대형 크리스마스트리를 보자, 같이 걸으며. 그래, 너 보고 싶은 연주회 있으면 찾으러 가고.”

“…….”

“아니면, 다른 나라 갈까. 피아노는 독일이 유명하지?”

“어디든 좋아요.”

 가만히 듣던 예준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해외 얘길 해요?”

“어제 일에 마음 졸이지 말라고 하는 얘기지. 여차하면 한국을 뜨면 되니까.”

 예준은 다시 시후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시선을 받는 시후는 여전히 덤덤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쁘지 않잖아. 나간 김에 넌 공부를 해, 여러 아티스트들을 만나 보고.”

“형은요?”

“뭐든 하겠지. 백도영처럼 프리랜서로 일해도 되겠고. 아니면 너 공부하는 거 지켜보며 놀아도 되겠다.”

 생각에 잠긴 시후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상상하니 좋은데, 백수 생활.”

“안 믿어요, 형 백수 되는 거. 형 같은 일 중독자가 무슨 백수예요.”

 말을 마치자마자 예준은 두 팔을 버둥거리게 되었다. 시후가 미소 띤 채로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렸기 때문이었다. 햇빛을 받아 평소보다 옅어진 갈색 머리카락이 부풀어 올랐다.

 별안간 머리가 엉망이 되었으나 예준은 전혀 기분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한없이 애틋한 감정으로 손과 발이 저릴 정도였다. 해외로 나가자는 시후의 제안이 얼마나 귀한 건지 알기 때문이었다.

 머리를 헝클어뜨리느라 뻗은 손을 예준이 잡아당겼다. 품으로 잡아당기는 악력을 시후는 뿌리치지 않았다. 그는 허리를 수그리며 예준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예준은 손을 잡지 않은 팔을 내려 시후의 허리를 꽉 감아 들었다. 조금의 틈도 내주지 않겠다는 듯, 강한 포옹이었다.

 푸른 바다, 일정한 파도 소리, 그리고 소금기가 섞인 바람으로 이루어진 세상 속에서 오로지 단 두 사람만이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다.

 예준은 꿈같은 현실에 숨을 몰아쉬었다. 행복이 깃든 숨소리가 나른했다.

                                                            〈외전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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