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개
00001 Overture
1568해(海).
실리스 로던프 광장 가운데에 거대한 단두대가 세워졌다. 그 위로 온 몸을 쇠사슬로 감싸고 끔찍한 상처로 가득한 사내가 올라왔다. 그는 넝마가 된 모습으로 다리까지 절며 걸어오다 단두대 앞에 강제로 무릎이 굽혀진다.
사내를 바라보고 있는 자들은 손가락질을 하며 욕을 퍼붓기 시작했고 더러는 쥐고 있던 돌멩이를 던져 분노를 표현했다. 일부의 돌이 사내의 머리를 맞혀 피를 흘리게 하며 조롱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눈물을 훔치는 자들도 있었고 뛰어 올라가려는 자를 붙잡는 이도 있었다.
정숙을 알리는 첫 번째 깃발이 올라왔다.
장내는 어느새 폭풍이 휩쓸어 가 버린 듯 조용했다.
“실리스 로던프의 제 1장군. 라마 드론. 나 로던프 젠 그란스는 일국의 왕으로써. 그대. 라마 드론의 강제 영면을 명한다.”
단두대 앞에 무릎 꿇린 사내는 앳돼 보이지만, 38세의 나이로 드론으로 전설이라 불리었다. 한때는 실리스 로던프의 명예로운 장군이었기도 했다.
그러나 영광도 한 순간에 무너져 버렸다. 왕의 시해와 내란의 원인이라는 죄목으로 친우와 일가를 몰살당했고 그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빼앗겼다.
더는 잃을 것 없이 모든 발톱이 뽑혀 무능력해 졌으나 그는 손톱이 뽑히고 온갖 고문으로 피를 토해내더라도 울부짖지 않았다. 치욕스럽게 무릎을 꿇리고 어리석은 자들의 손가락질을 받았다. 고문의 후유증으로 다리를 절었으며 인두에 그을린 두 눈은 이미 제 구실을 못하고 있었다.
최후에는 목마저 내 놓아야 하는 상황까지 왔음에도 그는 목숨을 구걸하는 다른 죄인들과 달랐다.
오히려 태연하게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인두에 그슬려 눈꺼풀과 안구가 녹아 검게 썩어 들어가면서도 시선이 향한 곳은 하늘이었다. 그런 사내의 의연한 모습에 지켜보고 있던 군중들이 술렁이고 있을 정도였다.
마지막까지 허세를 부리며 패악을 떤다고 생각하던 왕의 대변인은 차갑게 전언을 펼쳐 그의 마지막을 비웃으며 입을 열었다.
“왕을 시해하려는 죄. 일국의 내전의 원인인 그대. 라마 드론은 죄를 물어 신의 가호조차 허락받지 않으니 그대로 영면하여 지옥으로 향하라.”
차갑게 일렁이는 목소리. 그 목소리를 끝으로 그는 자신의 청각마저 희미해져가는 걸 어렴풋이 느꼈다.
아무런 반응 없이 하늘을 바라보고 있던 그의 고개가 천천히 내려왔다.
대변인은 마주쳐질리 없는 썩은 눈과 맞닿은 순간, 굶주린 짐승과 한 우리에 갇혀버린 것 같은 공포감에 들고 있던 전언서조차 손에서 놓치고 말았다.
감히 태양을 본 죄.
섬뜩하게 느껴지는 목 위에 있는 것이 단두대의 칼날이라는 걸 그는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정수리를 타고 올라오는 소름에도 침묵했다.
어째서 여기까지 와 버린 것일까. 무엇이 자신을 이곳으로 이끌었던 것일까. 손에 쥐었던 모든 것이 베어져 흩어지고 나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들개가 인간이 되려했던 죄의 무게는 이토록 무거운 것이었다.
죄목은 왕의 시살과 내란 조정과 모란.
실제로 왕은 시살되지 않았지만, 지독했던 전쟁에 투입되고서도 살아남았던 드론은 눈 깜짝할 사이 억울한 누명이 씌워져 왕의 면전 앞에 무릎 꿇게 되었다. 치욕적인 죄목이었지만, 그는 변론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그들이 가장 먼저 그에게 빼앗았던 것은 자신의 살점과 다름없던 가족들이었다. 눈앞에서 아버지와 어머니, 여동생을 잃었다.
인간의 왕은 자신의 무엇이 그토록 두려웠던 것일까.
왕은 총명하고 성군이 될 재목이었으나 그 누구도 믿지 않았다. 의심이 될 만 한 자는 반드시 죽인다. 어린 시절부터 왕제들의 시살에 위협을 받아왔던 그를 이해 못하는 건 아니었지만, 필요 이상의 칼날은 자신의 목까지 노린다는 걸 그는 알았어야 했다.
“라마 드론. 마지막으로 그 입을 여는 것을 허락한다.”
왕의 허락이 떨어지자 그의 입에 물려있던 재갈이 풀렸다. 침 범벅이 되었던 재갈이 떨어져나가자 턱에 심한 고통이 느껴졌다. 그는 평온한 얼굴로 익숙한 기척을 쫓아 고개를 돌렸다. 일그러진 눈은 보이지 않았지만 인간의 왕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지옥에 떨어진 자신에게 손을 뻗어준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사랑스러웠던 여동생. 끝까지 자신을 믿어 주고 편이 되어주었던 단 한 명의 친우까지.
아무런 죄도 없는 그들의 목이 지저분한 땅바닥에 굴러다니는 것을 보면서 난 무슨 생각을 했더라.
그래, 다시는…….
가족 따윈 만들지 않기로 했었지.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다.
가족을 만들지도 친우를 만들지도 않을 것이며,
연인을 만들지도 왕을 모시지도 않을 것이다.
당장이라도 자신의 목을 쳐내길 원하는 자들이 울부짖자 이곳에 더는 미련 없는 그의 마르고 갈라진 입술이 열렸다.
남은 생이 입마저 막아버리기 전, 겨우 내뱉은 것은 그 어떠한 변명도 원망도 구원에 대한 구걸도 아니었다.
절규로 가득해야 할 비명대신 들리는 목소리는 등줄기에 섬뜩함이 느껴질 정도로 차분히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네놈들의 왕에게 전하라. 나는 들개가 되었다. 그대는 더 이상 나의 왕이 아니니. 내게서 마지막 충성은 바라지 말라.”
들개는 주인을 모시지 않는다.
그는 더 이상 인간을 왕으로써 대우할 그 어떠한 이유도 명분도 없었다. 더는 자신의 것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들개가 입 꼬리를 들어올렸다.
단 한 번도 본적이 없던 미소였다. 이를 본 자들은 숨 쉬는 법도 잊어버린 채 넋을 잃고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뒤늦게 그 미소의 뜻을 알아차린 인간 왕이 자리에서 일어나 다급하게 소리쳤다.
“당장 막아라!!”
들개에겐 들리지 않았다. 당황 가득한 그 모습도 들개에겐 보이지 않았다.
지켜보고 있던 자들이 인파를 뚫고 달려왔다.
들개의 갈라진 입술 틈사이로 붉은 혀가 빠져나왔다. 그것을 강하게 깨물자 잘린 혀가 말려 들어가 죽음을 허락했다.
세상은 멸망해 버린 듯 침묵했다.
1568해(海).
끝내 굴복시킬 수 없었던 짐승이 스스로 숨을 거두었다. 그것은 이제 낡은 서책 속에서나 존재할 단 몇 장으로 기억될 역적이 기록되는 순간이었다.
***
“라마!”
누군가가 나를 부른다. 그리고 느껴지는 인기척. 나는 본능적으로 바닥을 더듬거렸다. 눈앞까지 다가오는 그림자를 느끼고 바닥에서 잡힌 것을 집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멱살을 잡아끌어 눈알에 박아 넣으려던 순간이었다.
“라마!!라마!!”
나를 부르는 그 가녀린 목소리에 우뚝- 손이 멈췄다. 그리고 바라보았다. 오직 자신의 이름만을 울부짖으며 버둥거리는 금발에 가까운 밀빛 머리카락.
고작 12살 정도의 꼬마의 얼굴이지만, 난 이 녀석을 기억하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잊고 지냈던 어린 시절. 내가 보다 선명하게 기억하는 건 이 꼬마가 어른이 됐을 때지만, 내 눈을 의심했다.
내가 꿈을 꾸고 있었던 것인지 미쳐버린 것인지 제대로 판단하기 위해 혼란스러움을 억누르고 가나를 바라보았다.
“라마?”
소년이 제대로 말할 수 있는 것은 내 이름이 전부였다. 소년의 이름은 가나. 눈앞에 가나가 있다는 것이 확실해지자 멱살을 쥐고 있던 나의 손에 힘이 풀렸다.
그대로 손을 뻗어 가나의 어깨를 잡아 끌어안았다. 죽었다는 것도 믿을 수 없었지만, 이렇게 살아 있다는 것도 믿을 수 없었다.
정수리까지 설움이 타고 올라왔지만, 그를 안은 손을 풀 수 없었다. 역적으로 몰려 나를 지키다 개죽음을 당한 것을 기억한다. 지금 눈앞에 있는 이가 그렇게 죽은 가나라는 것이 믿겨지지 않았다. 그러나 환상이 아닐 것이라고 몇 번이고 되새겼다.
가나는 살아 있다. 그 품이 따뜻하다. 목도 제대로 붙어 있었고 입과 코로 숨을 쉬고 심장은 뛰고 있다. 가나는 내 이름밖에 내뱉지 못하지만,
그래. 가나는 지금 살아 있다. 그렇다면 가족들 역시 살아 있다는 소리다.
모든 걸 잃었던 자신이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던 때로 돌아왔다.
“여긴 어디지.”
가나를 안았던 손에 힘을 풀고 어깨를 잡고 물었다. 가나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곤 내 이름이 전부였다. 하지만 가나는 어린 시절부터 글을 알고 있었다. 귀족만이 배울 수 있는 글을 어떻게 가나가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들개소굴로 들어왔을 때부터 가지고 있는 능력이었다. 덕분에 가나에게 글을 배울 수 있던 나는 들개 출신에서 유일하게 글을 아는 장군일 수 있었다.
<보던>
가나가 손가락으로 흙을 파 글을 썼다. <보던>은 내가 들개였을 시절 존재했던 곳이다. 지도에서조차 사라지기 전 용병이 들어와 보던의 들개들을 한 마리도 남김없이 잡아갔다. 평생을 들개로 살았어야 할 아이들을 용병으로 강제 입단시킨 건 단순한 이유였다.
추후에 있을 전쟁의 방패로 쓰기 위해서다.
당시 그때 나의 나이는 12살 정도.
난 가나를 바라보았다. 가나와 나는 서로 태어난 날짜는 모르지만, 체구가 엇비슷해 동갑내기로 보였다.
커가면서 성장의 차이는 보였지만, 같은 나이라는 걸 감안하고 이곳을 보던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을 본다면, 용병이 들이 닥쳤던 밤이 멀지 않았다.
믿기는 힘들지만, 확실히 나는 그날의 어린 시절로 돌아와 있었다. 터무니없이 작은 손이 그것을 증명하려는 듯 했다.
지금 보니 정말 말도 안 되게 작은 손바닥을 보면서 주먹을 쥐었다. 하필이면 이때로 돌아오다니. 상황이 좋지 않다. 지금의 나는 보던의 골목에서 웅크려 소매치기를 준비하던 중이었던 같다.
당시 나는 들개소굴에서 거둬들인 아이들 중 한명에 불가했지만, 강제로 용병단에 들면서 병에 걸리고 부상을 입었다. 죽음을 의심하지 않았던 그때 나를 지옥에서 꺼내준 사람은 나의 가족이었던 한스덴 일가.
인간을 싫어했던 내가 이를 드러내고 위협해도 마치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듯 손을 뻗었다. 더는 마음을 닫을 수 없었기에 그들을 가족으로 인정했고 지키기 위해 14살 때 기사단 입단을 선택한다.
그 과정에서 전쟁 중 잃은 드론을 대신해 지휘하여 승리로 이끌고 그 공로로 명예 장군 드론으로 임명되었다.
출신을 생각하면 절대 오를 수 없을 곳이었지만, 실력과 운만으로 그 곳까지 기어 올라간 자리였다. 그러나 그 자리는 세간에서 말하는 것 보다 훨씬 더러웠다. 후에 있던 일들을 생각하자 의식하지 않아도 이가 갈렸다.
“오늘이 며칠이지.”
<열둘. 타오름 달 열하루>
나는 안면이 일그러지는 것을 느꼈다. 용병단이 멋대로 휩쓸고 간 그날을 하루 남겨둔 그 날.
오늘이 바로 내가 12살. 타오름 달 열 하루째 되는 날이었던 것이다. 첫 전쟁보다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는 그날. 나는 가나의 손목을 강하게 쥐었다. 내게서 빼앗아가지 못할 것이다.
나는 인간이 되어야 할 그 무엇도 가지지 않을 테니까.
“오늘 우리는 이 마을 떠난다.”
가나가 나를 바라보았다. 그는 내 이름을 부르는 것도 잊은 채 나의 어깨를 붙잡고 다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곳을 나가는 순간 들개의 표적이 되어 죽음을 피할 수 없다. 가나는 그것을 말하고 싶어 하는 듯 했다.
실제로 이곳을 빠져나가려던 놈들은 모두 추격당한 들개에게 물어 뜯겨 죽었으니까. 배신자는 죽을 때 까지 쫓아가 즉시 처리한다.
그것이 들개의 규칙이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그들이 우리의 뒤를 추격하기 전에 용병들이 들이닥칠 것이라는 걸.
“너는 나만을 믿어.”
가나의 눈빛이 조금 흔들리는가 싶더니 조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난 그런 가나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그래, 이 바보 같은 녀석은 늘 이렇게 특별한 이유도 없이 나를 믿었었다. 단지 다 죽어가고 있던 놈을 들쳐 엎고 들개소굴로 데려왔다는 것에 비하면 그가 나에게 주는 신뢰는 과한 것이다.
난 가나의 손목을 잡고 마을을 벗어나기 위해 들개의 눈이 있는 곳을 피해 골목 안쪽으로 들어갔다. 난 애초부터 왕을 모시지 않았다. 때문에 과거로 돌아온 지금도 인간의 왕을 상대로 복수를 생각하고 있진 않다. 눈앞에 있으면 어쩔 진 모르겠지만, 난 순간의 복수보다 중요한 것을 알고 있었다.
당장은 죽지 않겠지. 하지만 용병 단에 들어가면 들개는 길들여지고 길들여진 들개는 기사단으로 들어가 늑대로 길러진다.
“똥개만도 못했지.”
내가 중얼거리자 가나는 뭔가 불안한 듯 나를 보았다. 난 그런 가나를 이끌다 익숙한 인기척에 가나를 끌어당겨 안고 걸음을 늦춰 입을 막았다. 숨도 쉬지 않고 벽에 붙어 어둠에 섞여 골목 앞으로 지나가는 놈을 바라봤다.
하얀 들개다.
다행이 우리 냄새를 맡은 건 아니다. 나이는 10대 초중반. 머리부터 발끝까지 색이라곤 흰색과 붉은 눈동자가 전부였다. 존재만으로도 눈에 띄는 녀석은 힘도 기술도 또래의 그 어떤 들개들과 비교가 불가했다. 하지만 하얀 들개 역시, 용병에 끌려가는 것은 피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다른 들개들과 비교가 불가하다는 것은 차후 저놈은 용병 왕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놈이 용병 왕이었던 시절, 왕궁에서 정식으로 기사단 입단을 권유 받은 적이 있었다. 쉽게 거절은 어려우니 자신을 죽일 수 있는 자가 있다면 들어가겠다고 했다. 결과는 왕궁 기사단장의 머리가 날아가고 나서야 끝났다. 대전에 있어 그 어떠한 의의제기도 할 수 없었지만, 당시 그건 대전이 아니라 그저 도살이었다.
후에는 왕의 목을 베고 싶어 안달이 났다는 소문이 돌곤 했는데, 내가 보기엔 그건 소문이 아니라 놈이 그렇게 지껄인 것이 맞았다.
뒤늦게 그를 왕족에서도 경계를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이미 손을 쓸 수 없을 지경으로 거물이 버린 후였다. 권신들조차 그의 눈치를 보았을 지경이고 왕이 직접 암살자들을 보냈지만, 내가 죽기 직전까지도 용병 왕은 버젓이 살아 있었다.
들개가 지나가고 그 기척이 사라지자 난 가나의 입에서 손을 내렸다. 그제야 가나도 숨을 쉬었고 그대로 뒤로 물러나 도망가려는 순간이었다.
장난스러운 말투였지만, 어딘가 살의가 느껴지는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기 때문이다.
“라마, 거기서 뭐하는 거야?”
난 나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어 피 맛을 보고야 말았다.
방금 전 분명히 지나가는 걸 확인했는데, 어디에서 기척이 밟혔는지 하얀 들개는 천천히 눈앞으로 걸어왔다. 난 일단 가나를 내 뒤에 보냈고 그런 우리를 바라보는 거대한 놈을 올려다보았다.
나를 바라보는 것이 어쩐지 익숙하다 느껴졌지만, 나는 들개의 우두머리인 그와 교류가 거의 없었다. 존재감이 큰 녀석이라 그런 것이라고 결론짓고 다른 생각은 하지 않았다.
내 몸은 하얀 들개를 상대하기에는 신체적으로 불리했다.
뒤로 숨어들던 그 기척까지 못 알아차릴 정도로 감각이 제대로 돌아오지도 못했다. 이런 몸으로 저 놈과 상대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겠지만, 그건 과거의 나였을 때 이야기다.
“여기서 뭐하냐고 묻고 있잖아. 라마.”
대답 없이 물러서는 우리 앞으로 걸음을 돌린 놈이 이를 드러냈다.
두려움에 가나가 내 옷을 당기며 고개를 저었다. 나는 그런 가나의 손을 떼어내고 물러나 있으라고 말했다. 그리고 멋대로 그어놓은 구역에서 벗어난 우리를 바라보며 송곳니를 드러내는 들개를 바라보았다.
녀석의 이름은 <문>.
달빛만 보면 미친다고 해서 지어진 것이라고 알려졌지만, 놈은 하루 종일 미쳐있다는 게 맞는 말이었다.
미친놈한테 달을 뜻하는 이름이라니. 그 이름이 어울리는 건 녀석의 백색의 머리카락뿐일 것이다.
“길을 비켜라.”
“어딜 가려고?”
문이 내 앞까지 다가왔다. 녀석과 나는 서로 왕래는 적었지만, 안면은 익어 있었다. 이대로 도망친다고 해도 얼굴을 알고 있으니 반드시 쫓아 올 것이다. 사람을 죽이는 거 외에는 반응이 크지 않는 놈이다. 오히려 허술할 만큼 자유분방하게 살아가는 그가 졸린 눈을 비비며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댔다. 입은 웃고 있다. 단순히 이 상황이 즐겁다는 소리다.
무엇이 그를 즐겁게 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서 발목을 잡힐 이유는 없었다. 용병단이 들어오려면 이른 새벽. 해가 지고 있는 지금 도망치지 않으면 가는 길목에서 그들을 마주칠 것이다. 그것만은 피해야 한다.
다행이 문을 뒤따르던 다른 들개는 보이지 않는다. 이럴 땐 늘 독단적으로 움직이는 그가 고마워지는 순간이었다.
난 늘 허벅지에 차고 다니던 날이 선 단검을 들었다. 당시 이 단검은 소매치기를 할 때 그 주머니를 엮은 줄을 끊는 역할을 했지만, 지금은 좀 다르게 쓸 것 같다.
내 몸의 추정 나이 12세. 체력도 근력도 눈앞의 문과 나는 비교할 바가 못 된다. 들고 있는 검도 싸구려 단검. 뼈를 뚫고 들어갈 힘이 없으면 어린아이 몸으로 살상력을 가지는 건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이 불리한 것만은 아닌 것은 문은 충분히 방심하고 있다는 것과 나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실리스 로던프 제 1장군의 드론의 칭호를 달았던 통칭 전설이었다는 것이다.
수많은 살상경험을 쌓아왔고 그 전투에서는 나보다 큰 놈들은 얼마든지 존재했다.
내가 든 단검을 손가락으로 비틀어 빠르게 바로 잡았다. 다행히 싸구려치고는 날이 제대로 서 있다.
“놀아 줄 거야?”
비웃는 듯 웃으며 그가 검을 들었다. 문이 든 검은 장검. 보기엔 유리해 보이겠지만, 장검은 장검만의 단점이 있다. 몸이 가볍다는 것에 그나마 감사를 해야 하는 걸까. 난 그가 자신감에 넘쳐 나불거리고 있는 사이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놈을 상대로 전력을 다하지 않으면 이쪽에서 당한다.
진심으로 그의 눈앞까지 다가가 그의 눈알을 빼 내 버릴 심상으로 검을 들이댔다.
예상대로 반사 신경이 예민한 그가 방심한 틈에서도 검을 들어 막았고 난 손목을 비틀어 맞닿은 검을 스친 뒤 그의 뺨을 긁어냈다. 그러자 문은 장검을 나를 향해 휘저었고, 그런 검을 코앞에서 아슬아슬하게 피해 뒤로 물러났다.
생각보다 몸은 훨씬 가벼웠다. 안 쓰던 근육을 푼다면 예전의 나로 돌아가는 건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전에 넘어야 할 산이 많고 적어도 이곳에서 살아남는다는 한에서.
“뭐지……?”
예상치 못한 내 반격에 잠시 어리둥절해 하던 문이 고개를 옆으로 까딱거리며 이유를 물었다. 그러나 난 대답하지 않았다. 문이 자신의 뺨에 흐르는 피를 의식하면서 엄지로 그것을 쓸어내리자 피는 번지며 뚝뚝 떨어졌다. 그의 눈동자처럼 붉은 피였다.
“그거 뭐야?”
지금의 나는 몸이 가벼운 만큼 속도는 괜찮지만, 힘이 떨어진다. 고작 검을 맞닿아 흘려보냈을 뿐인데도 손목이 부러질 만큼 흔들리고 있었다. 장기전으로 가면 내가 불리해진다.
그 전에 마무리를 지어야 한다.
“혀를 베이기 싫으면, 입 다물어라.”
단검을 얼굴위로 들어 날을 세웠다. 그런 내 모습을 바라보던 문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뱉었다. 잠시 늘어져라 웃고 있던 문이 숙인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일순간 들개의 눈빛이 바뀌었다.
집중을 하겠다는 것이다.
겨우 어린들개를 상대로 집중하는 놈의 그 판단만 보면 역시나 대단한 직감을 가진 자이다. 이 껍질 속에 본질을 보고 있었으니까.
“나랑 계속 놀 거지?”
“…….”
“응? 말해봐! 대답에 따라 널 왕으로 모셔줄게.”
장검을 휘젓더니 그가 내게 다가왔다. 위협적인 검 날을 바라보며 해가 떨어졌다는 걸 느꼈다. 재수 없게도 용병 놈들이 쳐들어온 그날은 문이 미치기 좋은 만월이었다.
미쳐 날뛰던 이놈을 잡은 건 용병 왕.
그 전까진 죽어라 용병을 썰며 피의 맛을 만끽했던 놈이 떠올랐다.
“?!”
날 보고 웃던 문의 시선이 다른 곳을 향했다. 그는 순식간에 나를 무시하고 그 뒤에 있는 가나를 향해 달려갔다.
길게 내지르는 검. 그 검이 가나의 어깨를 관통하려 했고 놀란 나는 그대로 뛰어가 그의 가랑이 사이로 빠져나와 일어선 뒤 그 검을 맞대고 밀어냈다.
이 빌어먹을 미친놈은 늘 이런 식으로 예상 밖의 상황을 잘 만들어내는 놈이었다.
그 과정에서 가나는 어깨를 검에 베여 피를 뿜어내며 넘어졌다. 가나의 팔이 날아가지 않도록 문의 검을 막은 결과, 나의 손목이 끊어질 것 같은 고통이 느껴졌다. 튕겨지는 힘만으로 밀려나간 나는 땅을 짚고 앉아 문을 바라보았다.
“문.”
내가 부르자 문은 방긋 웃으며 검을 어깨에 기대며 건성으로 서서 나를 바라보았다.
“나 불렀어?”
“이르지만, 목줄을 채워주마.”
미쳐버린 문에게 목줄을 채워줄 수 있었던 것은 죽기 직전 드론의 칭호를 단 나 밖에 없었다.
어떻게 길들였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어느 순간부터 그는 내게 목줄이 채워져 내 명만 들었으니까. 그날과 비교하면 많이 이르지만, 지금 그것을 따질 시간은 없었다. 나중에 얼마나 귀찮아 질지는 나 스스로가 잘 알고 있었지만 이대로 죽는 것 보다는 나으니까.
타오름 달 열 둘.
용병단이 들개의 소굴을 습격했고, 그곳에 있던 어린 들개들을 잡아갔다. 그 과정에서 많은 들개들이 끌려가거나 죽임을 당한다. 문은 만월에 이성을 잃고 용병단을 쓸어버리지만, 경험이 적은 탓에 용병 왕에게 붙들려 강제로 입영된다.
그곳에서조차 놈은 서열싸움을 하듯 기어코 용병 왕의 목마저 베고 그 우위에 오른다.
스스로가 용병왕이 되었던 문. 그 당시 나는 최연소 기사단의 장군이 되어 용병왕을 마주했다. 갑옷도 걸치지 않았고 좋은 검을 든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내가 만나 보았던 그 어떠한 상대보다 강했다.
문은 내 말은 잘 듣지 않는 놈이었으나 뱀처럼 간사하지 않았고 마지막까지 내게 목줄을 찬 들개로 살아남았다. 고집대로 기사가 되지 않아 그 목숨을 부지 할 수 있었던 유일한 내 사람이었다.
문은 나를 절대적인 왕으로는 모시지 않았다. 왕은 왕이었지만, 언제든 서열싸움에서 눌러 버리기 위해 기회를 넘보는 듯 했다. 그렇게 언제라도 하극상을 노리고 있던 문이지만, 내 수하로 둔 놈들 중에 날 배신하지 않는 놈들은 가나와 문. 이 둘뿐이었다.
완전히 길들여지지 않던 문은 살아남았고 가나는 그렇지 못했다. 이 점은 그가 얼마나 영리한 들개였는지 다시 한 번 깨닫게 해줬다.
하지만 지금은 그 또한 애송이.
용병왕도 먼 미래의 일이다.
단검을 들어 앞으로 달려갔다. 문은 장검이 뻗었고 동시에 난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그리고 문이 들고 있던 검 위에 섰다.
당황한 문이 검을 내지르자 난 검 위에서 뛰어올라 벽을 박차 몸을 회전 시켰다.
정확히 문의 목덜미를 향해 검을 내리 꽂았고 순식간에 목을 허락한 문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쓰러졌다.
온 몸의 근육이 모두 끊어져 버릴 듯한 충격이 느껴졌다.
천천히 쓰러진 문 위에서 일어나자 가나가 자신의 어깨를 붙잡은 채 나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난 내가 든 단검을 허공에 털어 허벅지에 감긴 주머니에 꽂아 넣었고 앞에 기절해 있는 문을 내려다보았다.
죽진 않을 것이다. 목을 둘러싼 상처에서는 피가 흘렀지만, 이정도로 죽을 놈이라면 이렇게 무리하지도 않았다.
곧 때가 올 것이라는 걸 알기에 나는 근육통을 무시하고 가나에게 뛰어와 그의 손목을 잡아끌고 그대로 골목을 빠져나왔다.
***
“짜증나는 군.”
여기까지 달려오면서 이미 2명의 용병을 상대했다. 실력이라곤 힘만이 전부인 놈들이라 죽이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몸으로 문을 상대하고 2명의 성인남성을 쓰러트리면서 체력이 바닥을 드러낼 정도로 고갈돼 버렸다.
붙들린 가나 또한 숨을 제대로 못 쉴 정도로 힘겨워 하고 있다.
이대론 정말 얼마 못 버티고 쓰러질 것이다. 한계에 가까워진 나는 다시금 어둠에 숨어 가나를 감싸 안았다. 다행이 이번엔 용병들이 우릴 발견하진 못했다.
문을 상대로 쓸데없이 시간을 소비한 결과 자정이 지나버렸고, 용병들은 차례로 넘어와 멋대로 주위를 휩쓸고 있었다. 그러나 본질적인 문제는 나와 가나의 체력에 있었다.
가나는 이미 문에게 어깨를 베어 피를 흘리고 있었다. 손으로 잡았다 하더라도 그런 행위가 지혈의 의미도 되지 못했다. 옷을 찢어 상처 위쪽을 감아 두었지만, 모든 건 가나가 얼마나 버틸 수 있느냐다. 가나는 현기증이 몰려오는지 중심을 잡고 서 있는 것조차 힘겨워 했다.
체력이 많이 약한 아이였으니, 이 이상 버틴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가나가 거의 기절직전까지 와 버려 내가 안고 가다시피 했기에 나의 체력도 급격하게 떨어져 결국 이렇게 발이 묶이고 말았다.
이대로는 둘 모두 용병들에게 끌려가고 만다. 그 과정에서 가나의 상처는 생명과 직결되기 때문에 연약한 놈들은 훈련조차 견딜 수 없다고 판단한 그들이 가나를 죽일 수도 있다.
당장은 죽이지 않는다 해도 당장 용병 단에 강제집영 된다면 지금의 가나는 그곳에서 견딜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지 않는다. 치료를 해 줄만큼 친절한 놈들도 아니기 때문이다.
인기척이 들렸다. 가나의 입을 막고 벽에 붙은 나는 숨을 쉬지 않고 들어오는 자들의 수를 짐작해 봤다.
2명 정도. 하지만 공기부터 그 흐름이 달랐다. 어중이떠중이는 아니라는 소리다.
“빌어먹을, 우리가 왜 이딴 꼬맹이들을 잡아가야 하는 거야? 귀찮게 시리.”
“윗분들 명령이시니 어쩌겠어? 까라면 까야지. 계집들은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했으니, 자자 필요한 놈만 챙기고 죽이자고”
그들이 우릴 발견하지 못하고 지나가길 기다렸다.
앞으로 몇 초.
이 길만 지나가면 산이 있는데, 그곳에만 들어간다면 보던을 벗어나 가까운 수도로 가는 건어렵지 않을 것이다.
나는 냉정을 유지했다. 그 순간 그들이 어둠에 숨은 우리의 앞으로 지나갔고 다행히 나와 가나를 발견하지 못한 이들은 천천히 거대한 검을 질질 끌고는 눈앞에서 사라지려고 했다.
하지만,
툭-
가나의 몸이 힘없이 떨어져 작은 소리를 내 버렸다. 재빨리 가나의 허릴 감싸 안아 주저앉았지만, 귀가 예민한 용병 놈들이 못들을 소리가 아니었다.
“잠깐, 어디서 쥐새끼 소리가 나는데?”
“뭐야~ 어디 숨은 건데? 계집이면 살려는 줄게~!”
“기사님처럼? 하하하!”
난 이미 정신을 잃고 식은땀을 흘러내리고 있는 가나를 바라보았고 그를 조심히 벽에 기대게 한 뒤 허벅지에 넣어둔 단검을 쥐었다.
근육통과 피곤함에 나 역시 이대로 쓰러지고 싶었지만, 난 최대한 벽에 기대고 일어나 그들의 심장이 있는 가슴과 목을 바라보았다.
근접거리까지 온 두 명의 용병.
앞서 상대한 놈들과는 비교도 안 될 것이다. 어차피 인생에 죽고 살고에는 큰 미련이 없다. 하지만 당장은 가나가 살아야 했다.
때문에 난 내 목숨을 걸고 가나를 지킨다.
그림자가 코앞까지 다가왔고 나의 피는 차갑게 식어갔다. 그들이 가까워질수록 나의 피는 차갑게 식어 그들의 눈알에 박아버릴 검 날을 날카롭게 세워놓았다.
그 순간이었다.
“으아아악!!!”
막 단검을 쥐고 뛰쳐나가려는 순간 바로 앞 골목에서 뭔가가 튀어나왔다.
“뭐야. 아저씨야?”
헐레벌떡 도망가는 중년의 사내를 유유히 쫓아가는 용병들을 지켜보았다. 그들이 시야에서 멀어지자 깊은 숨을 내 쉬던 나는 동태를 살필 필요도 없이 가나를 들쳐 업고 빠져나왔다.
거친 숲으로 들어가 쉴 세 없이 발을 옮기면서 등 뒤에 들리는 비명소리를 무시했다.
보던은 용병들의 습격을 받은 이 순간부터 로던프 지도에서 지워진다. 병력 충당을 위해 들개들의 소굴로 알려진 보던을 습격한 용병들의 가차 없는 학살과 무자비한 강제 입단에 대한 결과였다.
그들을 사주하는 놈들이 왕의 기사단이라는 걸 알았을 땐 이미 꽤 많은 시간이 흐른 뒤였지만, 그때의 일은 오직 나만은 알고 있다. 그들은 쓸 만한 병력을 충당시켜 전쟁에 쓰기 위해 꽤 오래전부터 보던의 들개들을 노려왔었고 그 희생자들은 그것을 알길 없이 그저 죽거나 죽이거나 이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했다.
수많은 들개들을 잡아 왔지만, 전쟁의 방패가 되어 절반이 넘는 들개가 희생됐다. 지금 가나는 그 희생자들 중 하나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교묘하게 변해버린 톱니바퀴의 칼날은 가나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었다.
가나를 안고 가면서 어느새 비가 내리고 있는 숲을 바라보았다. 축축이 내리는 비가 가나의 열은 식혀주고 있었지만, 이대론 얼마를 버티진 못할 것이다.
“가나. 내 말 들려?”
가나는 대답이 없었다. 숨을 쉬고 있는 것인지 그렇지 않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체온이 남아 있으니 난 아직은 살아 있다고 믿고 싶다. 이 산만 넘고 조금만 더 걸어갈 수 있다면 곧 <그곳>이 나올 것이다.
“죽지마라. 어떻게 해서든 살아.”
다리에 힘이 풀리기 시작한다. 왜 하필 이런 어린 나로 돌아온 것일까. 15세 정도만 됐어도 이런 고생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난 입술을 물고 억지로 발걸음을 옮겼지만, 그대로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그 와중에 등에 있던 가나가 땅에 쓰러졌고 난 숨을 토해내고 땅을 짚고 일어나 가나를 바라보았다.
숨은 쉬고 있다. 보다 격렬하게 헐떡이며 열을 내뿜고 있었다. 난 그 머리를 안고 일으켜 세워 다시 안았다. 그제야 가나가 얼마나 열에 들끓고 있었는지 실감이 갔다. 나 또한 체력적으로 한계가 왔기에 몸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절망적인 기운이 올라오려는 순간 귓가에 무언가가 들렸다.
그것은 기적과도 같은 마차 소리였다.
***
“젠장, 뭔 비가 앞이 안보일 정도로 내려?”
서행하고 있는 마차를 몰고 가던 마부의 투덜거림이 들릴 만큼 근접한 거리의 마차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속도를 계산하며 바닥을 더듬고 돌멩이를 집어 서행하고 있는 말의 눈동자 바로 옆을 향해 힘껏 내 던졌다.
제대로 명중한 말은 갑작스러운 볼기짝의 통증에 놀란 듯 발버둥 치기 시작했고 마부는 놀라 요란한 말을 진정시키기 위해 고삐를 잡아 당겨 마차를 세웠다. 억지로 세운 마차에서 급히 내려와 말과 힘겨루기를 할쯤 난 숲에서 내려와 가나를 엎고 마차를 뒤덮고 있는 짚단 속으로 들어갔다.
찰나의 순간이었다.
멈췄던 마차가 잠시 후 움직이고 난 잠시 숨을 고른 채 가나를 바라보았다. 가나가 정신이 조금은 들었는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아직 열이 올라 지금 무슨 상황인지 잘 모르는 듯싶었다.
“자라.”
가나가 내 이름을 부르고 싶은지 잔뜩 쉰 목소리를 내고 있었지만, 난 그 입을 막고 손을 뗀 뒤 눈꺼풀을 내려 주었다. 깨끗한 천은 없었지만, 다행이 품안에는 훔친 손수건이 몇 장 들어 있었다. 난 그것을 단검으로 엇갈리게 찢어 길게 만든 뒤 가나의 어깨를 휘감아 주었다.
제발 그곳에 갈 때 까지만 버티면 좋겠는데…….
마차가 멈추는 걸 느꼈다. 어느새 아침인지 따가운 빛이 눈을 부시게 하자 일어나 가나부터 살펴보았다. 움직임이 없는 가나를 보면서 그의 코에 손가락을 대보자 미약하게 내쉬는 숨을 느끼고 안심하고 그를 업어 마차 밑으로 조심히 빠져나왔다.
마차가 가는 방향으로 가는 길을 짐작하건데 운이 좋게도 수도 <오던>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짚단을 조금 들어 올려 동태를 살피면서 익숙한 배경이 눈에 들어오자 곧 가고자 했던 오던에 도착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과거 용병이 된 나는 일년이 지나지 않아 오던에서 의뢰를 받던 중 큰 부상을 입었고 곧 죽어도 이상하지 않는 그 때에 나를 구원해준 <가족>이라는 존재를 만난다.
귀족이었지만, 권력에 대한 욕심과 헛된 야망이 없었던 평온하고 조용한 사람들이었다. 부모님은 친절했고 여동생은 사랑스러웠다. 인간이라곤 들개와 쓰레기 같은 용병들뿐이었던 나에게 그들의 존재는 처음부터 받아드릴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은 포기하지 않고 나를 가족으로 여겨주었다. 용병 단에 묶여있던 내가 그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그 자격으로 기사단에 입단을 했을 때, 가족은 나를 얼마나 자랑스러워했는지 기억한다.
살아가면서 가장 행복했던 때를 기억한다면 그런 <가족>이 생겼다는 순간일 것이다.
사랑하는 가족들이었다. 소중한 단 하나 뿐인 그런 분들이었다.
반역이라는 모함으로 그들의 목숨마저 앗아간 인간의 왕 또한 기억하면서 서행하는 마차에서 뛰어내려 가나를 안고 그곳으로 천천히 몸을 옮겼다.
죽음에 그 순간을 기억한다. 단두대 앞에 섰을 때의 그 맹세를 기억한다.
나는 가족도 친구도 만들지 않을 것이다.
그 맹세를 기억하면서 입으론 집으로 향하는 길을 중얼거렸다.
“칸자스 길을 지나 스물세 번, 네 번째 초록색 기둥. 두 번째 집…….”
칸자스 길을 지나고 스물세 번째 집을 지나 네 번째 초록색 기둥을 바라보았다. 이곳을 지키는 신께 드리는 조각상 같은 것으로 아직 완공되지 못한 초록색 기둥을 바라보면서 그 2번째 집으로 향해 4시간 동안 기어가듯 걸어갔다.
10시쯤이면 아버지 한스덴 웨이가 입궁할 시간이다.
백작이었던 그는 꽤 유능한 분이셨으나 권력과 명예에는 관심이 없던 그는 나를 만나지 않았다면 그저 왕에게 충성을 바치며 살아갔을 충신 중 하나였을 것이다.
억울한 누명이 씌워진 나의 소식을 듣고 처형을 당할 것을 알면서도 나를 보호하기 위해 목숨을 버리셨던 분.
그는 내사 하관이긴 하나 마치 무관처럼 당당하고 기백이 넘치시는 분이셨다. 그럼에도 한없이 다정하고 따스했던 사람.
어머니 또한 마찬가지였다. 자애롭고도 고운 사람이었다. 언제나 다정한 그녀는 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었지만, 그 눈만은 그녀가 어떤 성정을 가진 분인지 알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녀라면 내 이름밖에 읊지 못하는 가나를 더 없이 사랑해 줄 것이다.
그런 어머니와 아버지 사이에서 나온 여동생 레이첼은 그 어떤 이 보다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한없이 순수하고 아름답던 아이. 상냥하고 고운 그 아이가 결혼해 가정을 이룰 때 까지 지켜주고 싶었는데, 나는 그럴 수 없었다.
끔찍했던 과거가 마치 환상처럼 지나갔지만, 내 입은 오직 <한스덴 웨이> 저택을 향하는 길만 중얼거리고 있었다.
“네 번째 초록색 기둥……. 두 번째.. 집...!”
골목을 지나 바라본 사무치도록 그리운 저택을 보면서 난 그곳으로 다가가 가나를 문 앞에 눕혀놓았다. 그들이라면 가나를 양자로 받아들일 것이다. 그들이라면 가나에게 끝없는 사랑을 줄 것이다.
굶주리지 않고 폭력을 당하지 않아도 되는 그 화목한 곳에서 살아가길 바라면서 가나를 놓고 일어나려하자 어느새 깼는지 가나가 내 옷깃을 잡았다.
“……라마…….”
잔뜩 쉰 목소리로 나를 바라보며 열에 들뜬 얼굴로 입을 열자 난 그런 가나의 뺨을 쓸어주었다.
“안심해……. 이제 괜찮아.”
“……라……마.”
뭔가를 눈치 챈 것인지 가나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며 내 이름을 반복해 말하기 시작했다. 난 그런 가나의 손을 붙잡았다.
“문관이 돼. 검을 잡지 말고 학문을 잡아. 넌 똑똑한 녀석이니까. 내 말. 알겠지.”
“라마……. 라마……. 라……마…….”
고개를 급하게 젓던 가나가 내 손을 꽉 잡아왔다. 열에 들떠 열꽃이 핀 얼굴을 보며 난 손을 들어 그 뺨을 쓸어주었다.
미안하지만, 여기서 영원히 안녕이다. 하지만 난 이것을 미리 말해줄 순 없었다.
“곧 데리러 올게. 그러니까. 살아.”
인기척이 들린다.
난 가나가 싫다며 울부짖으려고 하자 그의 목덜미를 쳐내 기절 시켰다. 그런 가나를 조심히 바닥에 눕히곤 눈물을 흘리는 얼굴을 바라보면서 뒤로 물러나 도망가듯 뛰어가 어둠에 숨어 지켜보았다.
예상대로 한스덴 웨이는 문밖으로 나와 궁으로 향할 준비를 하게 되었고 어린 레이첼을 안고 있는 여인은 한스덴 웨이를 배웅하는 데 그가 막 마차에 오르려는 순간, 쓰러진 가나를 발견했다.
급히 쓰러진 가나에게 다가간 한스덴 웨이가 가나의 상태를 알고 빠르게 안고 일어났다.
마부를 통해 뭔가를 지시하더니 가나를 안은 채 그대로 다시 저택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나는 완전히 뒤돌아 설 수 있었다.
삐걱거리던 쳇바퀴가 이제야 제대로 돌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