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스 로던프 제 1장군. 라마 드론.
하지만 드론은 성이 아닌, 최고 장군에게 하사된 칭호와 같은 것이다. 감히 장군의 이름을 부를 수 없는 자들은 드론이나 전설이라 일컫고, 그 칭호만으로도 제국의 긍지를 높이는 인물로 기록된다.
그는 숱한 전장에 승리하여 단 한 번의 패도 허락하지 않는 바. 드론의 위치에서 전설로 통해졌다.
드론과 전설의 칭호를 모두 달고 다니던 그의 나이 겨우 18세였다. 당시 어린 나이 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따르는 자들은 하나같이 그에게 광적으로 목숨을 거는 자들뿐이었으니 왕의 곁에 있는 충신들도 그만하지 못하랴.
때문에 왕의 시해와 내란의 원인으로 처단명령이 내렸을 때 그 하나를 붙잡기 위해 수천 명의 기사들을 잃을 만큼 군력의 피해가 상당했다.
어렵게 결박한 그를 모질게 고문하고 끝내 꿇지 않으려던 다리를 부러트리고서야 무릎을 꿇렸다. 단두대에 목을 떨어져 나가는 그 직전까지도 고고함을 유지하고 추하게 삶을 구걸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자신을 이곳까지 몰아넣은 간신들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특유의 무심한 눈동자를 굴려 세상을 비추더니 그대로 그 혀를 깨물어 자결하고 만다.
그런 그를 국민들은 검은 태양의 죽음이라 불리었고 역사 속에서 위대한 장군이 될 뻔한 역적 라마 드론은 간신의 손에 의해 그의 업적이 왜곡되어 희대의 악역으로 기록돼 오래된 저서에나 한 줄로 요약될 역사 속 인물이 되었다.
그가 다시 한 번 눈을 뜨지 않았었다면.
**
나는 될 수 있으면 저택과는 먼 반대 방향으로 걸었다. 어느새 해가 중천으로 뜬 하늘을 바라보면서 상당히 체력이 많이 고갈되었다는 걸 느꼈다. 마음 같아선 당장 길바닥 위에서라도 쓰러지고 싶었지만, 다리를 질질 끌고서야 골목으로 들어가 그늘 밑에 앉아 숨을 골랐다.
그렇게 웅크리고 앉아 벽에 등을 기댔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고민했다. 당장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다. 내 나이는 고작해야 12살. 어린아이를 쓸 만큼 손이 부족한 곳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계속 도둑질만 하고 살아갈 수도 없는 일이다.
마음만 먹는다면, 둔해 보이는 인간의 주머니를 털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당장은 굶을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겠지만, 그것은 도둑고양이나 하는 짓이다.
나는 들개.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골목에 꿇어앉은 무심코 정면을 바라보았다. 빛이 닿는 그곳은 낮이라는 걸 알게 해 주었지만, 내가 앉아 있는 곳은 그런 빛조차 받지 못한 어두운 곳이었다.
알고 있었다. 내게는 저 빛을 보는 것도 사치라는 것을.
기침이 새어나왔다. 오래전부터 나는 꽤 많은 병을 달고 살았었다. 특히 천식과 같은 질병은 지금보다 훨씬 어릴 때부터 앓아 왔던 것이다. 나는 이 병으로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겼고, 그럴 때 마다 이상할 만큼 운이 좋아 겨우 살아남았다.
병이 악화 되어 당장 죽을 것 같아도 다음날 기적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눈을 뜨곤 했다. 그저 운이 좋다고만 생각 할 수밖에 없었다.
15세 이후로 지나갔다고 생각한 그 고비는 앞으로 몇 번이고 찾아올 것이다.
목을 찢어놓는 듯한 기침이 멈추지 않자, 나는 입을 틀어막고 잠시 멈춰 벽에 몸을 기댔다. 열이 들끓기 시작하면서 눈앞은 제멋대로 일그러지고 있었다.
“…….”
목 안쪽이 찢어졌는지 입안에서 비릿한 피 냄새가 느껴졌다. 난 결국 서 있는 것조차 하지 못하고 천천히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들을 죽음까지 몰고 간 원인인 내가 지금 없어진다면, 그들은 앞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늘을 바라보았다. 푸른 하늘임은 분명했지만, 내게는 단두대 앞에 섰던 날처럼 그 어떤 빛도 보이지 않았다.
어디선가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난 눈동자를 돌려 그곳을 바라보았다.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 두 명의 사내가 천천히 내가 있는 곳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그들은 나를 바라보았지만, 의례 그렇듯 거지 꼬마에게 관심이 없다는 듯 지나쳤다. 나는 그들에게 눈동자를 굴리지 않았다.
살아야 할지 죽어야 할지 좀 더 생각해보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이었다.
나를 지나갔어야 할 발자국이 멈춘 건 그때부터였다. 걸음이 돌려졌고 함께 있던 자는 내게 다가오는 사내를 말리려는 듯 했다.
“이봐, 꼬마. 나랑 같이 갈래?”
“란! 이런 아이를 데려가서 어쩌려고 그래?!”
생각하는 걸 그만두고 눈을 들었다. 나는 눈앞에 있는 자를 알고 있었다. 알고 있던 것 보다 낯선 기분이 들었지만 말이다.
과거, 내가 전설이었던 당시, 나를 가장 골치 아프게 하는 집단이 있었다. 그들은 속칭. <암부>라고 불리는 자들이었고 그들이 하는 일은 의뢰를 받아 처리하는 일이었다.
그들의 움직임은 마치 안개처럼 그 형태마저 드러나지 않는다. 실제로 그의 배후는커녕 세력조차도 파악되지 못한 상태니까.
나 역시 암부 녀석들의 정보를 통해 사로잡는 건 할 수 없었다. 어쭙잖은 놈들이었다면 얼마든지 산채로 잡아 배후를 캐물었겠지만, 하나같이 일당 왕의 기사 열 명의 몫을 하면서 충성심이 대단했다.
그런 그들은 오히려 죽이는 게 더 쉬울 정도였다.
드물게 싸움 도중 부상을 입었던 것을 기억하면서 좀 더 그들에 대한 기억을 끌어 올려 보았다.
암부가 하는 일은 용병과 다름이 없었지만, 문제는 그 <의뢰>라는 것의 내용이었다.
내가 암부의 뒤를 캐던 결정적인 이유가 왕족 중 한 명도 암부의 손에서 암살당해서였으니까. 그들은 차례로 귀족을 물갈이 시키고 왕족을 살해하면서 세력을 모으고 선동을 해 로던프 내에서 혁명을 계획했다.
백치라 불리던 3왕자가 암살했다. 선왕이 죽기 전 왕좌의 재목으로 지목 된 탓에 암부의 의뢰인은 다른 왕자들일 것이라는 추측이 난무했으나, 백치왕자의 죽음에 어떤 이도 깊이 있는 수사를 하진 않았다.
3왕자의 죽음에 석연치 않는 부분은 확실히 존재 했다. 그 부분을 짚고 넘어가려 했지만, 잦은 크고 작은 전쟁으로 3왕자의 암살 뒤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 그들에게 신경을 쓸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언젠가 딱 한 번 본적이 있었다. 암부의 우두머리로 보였던 정체불명의 남자. 들개의 본능이었을까. 그 당시, 얼굴을 가리고 있어 정체를 알아 볼 수 없었던 놈을 다시 만난 기분이 들었다.
바로 눈앞에서.
놈은 작아지는 바람에 병으로 쓰러진 내게 같이 가지 않겠냐며 물었다.
그때 나는 어떤 대답을 했는지 기억나질 않았다. 정신을 차렸을 땐 나를 품에 안은 그가 더 깊은 어두운 곳으로 걷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점점 더 멀어지는 어두운 곳을 바라보다 눈을 감았다.
**
<카인관>은 장사가 더럽게 안 되는 식당 중 하나였다. 식당이 장사가 잘 안 되는 이유는 따로 없었다. 그냥 맛이 없었다. 음식 맛에 그다지 민감하지 않던 나조차도 스푼을 내려놓았을 정도였으니까.
그가 나를 안고 도착한 곳은 그런 <카인관>이었다.
그는 카인관 안쪽으로 들어가 지하로 통하는 계단을 내려갔고 작은 문을 열었다. 과거 이곳을 검열 때 여긴 흔한 창고에 불과했다. 그리고 이런 지하 통로는 전혀 발견된 바 없었다.
“거지꼬마는 널리고 널렸는데, 왜 하필 그런 허약한 애를 고른 거야!!”
“궁금하면 이 녀석 눈을 보지 그래.”
“눈?”
“그보다 어떻게 됐지.”
“상황이 좋지만은 않아.”
나를 안고 있던 놈은 딱딱한 판 위에 깔린 담요 위에 나를 내려놓았다.
들끓는 열을 뒤로하고 놈을 바라보았다. 나는 이놈을 알고 있다.
들개의 기억력은 단순해서 산산 조각이 나 연결되지 않는 것은 의미가 없어진다. 그런 것은 기억이라고도 볼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조각난 기억에서 연결고리를 찾게 된다면 놀라운 속도로 이어 붙어져 하나의 <그림>이 완성된다.
퍼즐과 비슷한 것이다. 엉망으로 맞춰져 무엇인지 알 수 없었지만, 올바른 곳에 끼워진다면 어째서 그런 그림이 그려져 있었는지 알게 되니까.
그래서 나는 알게 되었다.
눈앞에 있는 놈이 누구이고 그렇게 행동한 까닭과 후에 어떠한 폭풍을 몰고 올 것인지를…….
그는 내가 열이 있다는 것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모양인지, 가벼워 보이는 웃음을 하고 물었다.
“열이 나서 제정신은 아니겠지만, 대답은 해 줘야 겠어. 그래야 널 받아들일 수 있거든.”
“…….”
“꼬마야. 넌 혁명이 뭐라고 생각 하지?”
“주인의……. 목을 물어뜯는……. 개.”
죽기 전, 나는 간신들로 인해 내전을 조성하는 반란군과 반역을 일삼으려는 혁명가라고도 불리었다. 뒤로는 암부수장이라는 말이 나돌 정도였기에 그들은 나를 죽이는 것이 나라를 지키는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그때의 나는 시대의 혁명가도 영웅도 악당도 아닌, 던져준 썩은 고기에 만족하는 똥개에 불과했다.
“하지만 나는 개가 아니다.”
더는 개 흉내를 낼 수 없다.
“개가 아니면, 뭐지?”
“나는 들개.”
과거 개였던 나는 천리를 달려 똥을 먹었다. 하지만 나는 들개. 만리를 달려 고기를 뜯어먹을 것이다.
눈동자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나를 내려다보고 있던 놈의 얼굴에 일그러짐이 느껴졌다. 기침은 잦아들었지만, 목소리가 나올 때 마다 피를 토해내고 싶었지만, 이번엔 내가 물었다.
“목적과 야망으로 나눠 넌 어느 쪽인가.”
“목적이다.”
“난 야망으로 움직인다. 때문에 주인은 모시지 않아.”
“…….”
“혁명은 돕겠다. 하지만 명령은 듣지 않아.”
“네가 말하는 혁명은 뭐지.”
그의 말에 나는 입 꼬리를 들어올렸다. 그의 물음으로 나는 내가 가야 할 길을 더욱 선명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암부의 베일에 가져진 명확한 목적을 알게 되었지만, 그것이 더는 나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제국의 멸망.“
그 말을 끝으로 나는 눈을 감았다.
“용병들이 움직인 모양이다. 이미 보던에 들개들을 모두 쓸어버렸어.”
적색의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은 사내 문호. 의자에 앉아 옅은 푸른색을 띄는 사내는 란이었다. 문호는 란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암부의 수장으로 이번 일을 알아야 할 의무가 있었다. 문호는 란의 무미건조한 그 얼굴을 볼 때마다 알 수 없는 감정이 몇 번이고 솟구쳐 올라왔지만, 그는 꽤 인내가 강한 남자였다.
“남은 들개들은?”
“없어. 어린애들까지 모두 잡아가거나 죽였어.”
문호는 한숨을 토하듯 말했다. 한 번은 벌어질 일이었다. 쓰레기 무덤이라 불리는 보던의 들개들을 언제든 없애버리려고 했었기에 각오한 일이었다. 끌려간 이들은 용병과 기사들의 훈련용 상대가 되어 죽거나, 앞으로 일어날 전쟁에 방패로 사용되어 죽을 것이다.
들개들 역시, 나라의 보호를 받아야 할 국민임에도 말이다.
란은 미소 지었다.
“보던을 쓰레기 무덤으로 만들어 버린 게 과연 누구일까. 너는 궁금하지 않나? 문호.”
장난스럽게 말하고 있었지만, 목소리는 이미 고통에 차 있었다. 문호 역시 그 마음을 알기에 감히 대답할 수 없었다. 지금은 막을 수 없었던 일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란은 지금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괴로워하고 있었다. 다만, 겉으로 그것을 모두 드러내지 않을 뿐이다.
그는 암부의 수장의 자리에 앉아야 할 그릇이자, 곧 혁명을 이뤄낼 사내였으니까.
“보던이 시작일 뿐이야. 앞으로 희생자는 늘어날 것이다. 다음은 에덴이겠지.”
“모두를 지킬 수는 없는 거니까. 이번일은 어쩔 수 없었던 거야.”
언제나 서늘한 눈동자를 굴리고 있어야 할 란의 시선이 한 곳에 머물었고 그런 란을 내려다보던 문호는 그 시선을 따라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는 암부로서 기초 훈련을 받고 있는 단원들의 모습이었다. 개 중에는 말도 안 되는 나이의 소년이 끼어 있었는데, 시선은 자연히 혼자 튀고 있는 그 소년에게 꽂혔다.
“란, 그런데 설마 저런 어린애를 진짜로 키울 거냐?”
"어린애?”
물음에 의문을 붙인 란을 내려다보던 사내는 눈살을 찌푸리며 다시 소년을 바라보았다.
고작해야 들고 있는 건 단검.
그 검으로 눈앞에 시비를 거는 몇 배나 덩치가 큰 남성의 바라보고 있는데, 저러다 울겠다 싶어 걱정이 됐다. 그러나 문호의 눈꺼풀이 닫히기도 전에 소년이 사라졌다. 놀라 몸이 앞으로 가울려 소년을 쫓았지만, 어디를 어떻게 가격했는지도 보이지 않았는데, 소년이 눈에 들어왔을 때에는 시비를 걸던 남성이 기절해 있었다.
혀를 내두를만한 빠르기와 정교한 움직이었다. 마치 인간의 명줄을 하나하나 다 기억하고 있다는 듯 소년의 움직임은 소름이 끼칠 정도다.
더 믿을 수 없는 건 그 누구도 소년을 가르친 바 없다는 것이다.
“이미 훌륭한 암부다.”
란의 말에 놀란 문호의 눈이 동그랗게 떠 졌다. 사람에 대해 이렇게 까지 좋은 평을 내뱉은 적은 단언컨대, 단 한 번도 없었던 란이었다. 그는 누구보다 냉정한 잣대로 사람을 판단하는 사람이었으니까.
보던이 지워지고부터는 웃음기 하나 없었던 란이 마치 자식자랑을 하듯 중얼거리며 웃자 그것을 바라보던 문호는 자신의 뒷목이 뻐근해 지는 것을 느끼며 무심코 손을 들어 목을 주물렀다. 당장이라도 소년이 들고 있는 단검이 자신의 뒤통수를 내리 꽂을 것 같은 묘한 위기감이 들었다.
“저런걸 대체 어떻게 길들일 건데?”
“길들여질리 없지.”
란은 자신이 손에 쥘 수 없을 것이라는 걸 순순히 인정했다.
맹랑하게도 소년은 그 작은 입술로 제국의 멸망을 내뱉었다. 그 때의 전율을 잊을 수 없던 란은 다시금 오싹한 기분이 척추를 타고 정수리까지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무슨 말이야?”
“그보다. 에덴은?”
“말 돌리기는, 아직 이렇다 할 움직임은 없어. 곧, 플라이를 앞세워 범죄자 박멸이라는 명목으로 뒤집어 버릴 준비를 하고 있는 것 같지만.”
“들개 중에 쓸 만한 놈들은?”
“저런 꼬맹이가 기준이면, 없어.”
“그렇겠지.” 라며 중얼거리는 모습이 영락없는 팔불출이다. 적어도 문호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그의 나이도 겨우 십대 중반. 결코 그런 모습을 보일 수 없는 나이임에도 그가 이토록 중후해 보이는 이유는 온갖 산전수전은 다 겪은 이유일 테다.
란이 일어났다.
좀처럼 사람과 가까이 하지 않는 그가 일어나 소년에게 다가갔다. 우악스럽게 넘어트린 사내가 뿜어낸 피에 기겁을 하는 소년에게 손수건을 꺼내는 것이 보였다. 문호는 그 모습이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더 황당한 것은 소년의 반응이었다.
란이 다가가 손수건을 내밀자 그것을 거칠게 낚아채고는 손에 조금 튄 피를 닦더니 다시금 란에게 집어던지며 그를 지나치는 게 아닌가.
목숨이 열두 개는 돼 보이는 소년을 향한 문호는 어느새 자신의 곁을 찬바람을 내뿜으며 지나가는 소년을 쫓고 있었다. 그 뒤통수마저 바라보게 만드는 소년은 멀리서 보는 것 보다 더욱 어려 보였다.
기껏해야 열 살 전후. 말도 안 되는 나이에 말도 안 되는 행동을 보여주는 소년을 쫓던 눈을 돌려 란을 향해 바라보자 그는 10년 치 놀랄 것을 오늘 다 보여주겠다는 듯 입을 벌리고 굳어 버렸다.
란이 웃고 있었다.
**
암부에든지 보름정도가 지나서였다. 짧은 그 기간 동안 내가 그들의 속내를 꿰뚫어 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암부의 역사는 길지 않았고, 나를 마지막으로 더는 모집을 하지 않는 그들은 단 한가지의 <목적>을 위해 꽤 긴 준비가 필요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들이 말하는 혁명에 대한 <목적>은 란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암부사이에서는 전혀 알려지지 않는 란의 풀 네임은
<로던프 란 그란스>
내가 단두대 앞에 서기 전 암부에 의해 살해당했다고 보고된 왕자 중 하나였다. 그러나 그의 신분은 놀라운 것이 아니었다. 보다 기가 막힌 건 내가 드론이었던 시절, 종적조차 잡을 수 없던 암부의 수장이 로던프의 왕자 로던프 란 그란스였기 때문이다.
그제야 나는 의문스러웠던 3왕자의 죽음에 종지부를 찍었다.
덜떨어지고 백치라 알려진 그는 왕족 중에서도 눈에 전혀 띄지 않을뿐더러, 그 외모 또한 박색이라 알려져 있다.
체력 또한 저질이라 조금만 움직여도 앓아누운 다며 유희인 사냥조차 나가지 않았다. 말을 타지 못한다는 것도 이유도 검을 사용할지도 모른다는 것도 조롱의 대상으로 충분했다. 알려진 대로는 그는 왕가의 유일한 수치였다.
나는 전설이었던 당시, 백치라고 알려졌던 그를 만나본 적이 있었다. 앞머리가 긴 푸른 머리카락으로 얼굴의 반을 가리고 있었다. 희미한 존재감에도 묘하게 눈길을 끌자 자세히 지켜보았지만, 그는 알려진 바와 다를 바 없었다.
아무런 장애물이 없는 맨바닥에 넘어지기도 하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기도 했다. 제 몸도 가누질 못해 잘 부딪혔고 덕분에 상처도 많았다.
학업에는 당연할 정도로 진전이 전혀 없어 어린 4왕자조차 따라오질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에 띄었었다. 다른 이들은 모르겠지만, 내 눈에는 백치 왕자의 행동에서 이질감을 느꼈다.
그런 이질감을 알기도 전에 백치 왕자는 살해당한다.
그러나 3왕자의 죽음까지도 묘한 이질감은 떨칠 수 없었다. 당시의 나는 그가 다른 이면이 있다는 것만 느낄 뿐 암부의 수장이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의 죽음은 오히려 왕가에서 달가워하는 눈치였기에 수사를 중단되었고 우연한 사고라고 종결되었다. 백치 왕자의 죽음에도 암부의 수사는 적극적이질 못했다.
백치왕자는 태생부터가 천하다고 알려졌지만, 그건 소문에 가깝기 때문에 확실하진 않았다. 내가 알고 있는 건 그의 어머니는 가난한 이국의 공주였고, 팔리듯 이 나라에 시집을 왔다는 것뿐이다.
백치 왕자 주제에 유명할 수밖에 없던 그의 일화 중 하나는 선왕이 죽기 전 차기 왕의 그릇으로 백치 왕자 란을 선택하면서였다.
이는 왕이 란을 낳고 죽은 이국의 공주를 진심으로 사랑해서라고 떠들어댔지만, 그건 아니었다.
선왕의 망령이 쓰인 선택이라 일컫는 그것을 난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선왕은 욕심이 많은 자였다. 영원히 치세가 지속 될 수 있도록 불사할 수 있는 약물이나 주술을 알아보라 할 정도로 말이다.
란을 선택한 것은 제외한 남은 그릇들에게 던지는 경고 같은 것이었다. 누구라도 왕좌를 노리거나 빼앗으려 한다면, 차라리 머저리에게 나라를 쥐어주고 말아먹어버리겠다는 심술이었다.
하지만 3왕자는 백치도 아니었고 말을 타지 못하지도 않았고 무술을 못하는 것도 아니었다. 암부의 수장인 그는 궁에서 보았던 초점 없는 눈동자는 온데간데없이, 가장 그 자리에 잘 어울리는 인간이 되어 서 있었다.
위험한 냄새를 풍기고 있는 그릇이다.
가볍게 웃고 있지만, 이것은 그가 뒤집어쓰고 있는 가면의 일부분일 뿐이다. 나는 그것을 알 수 있었다.
그가 정말로 혁명에 성공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것을 알기도 전에 나는 단두대 앞에서 죽어버렸으니까.
“라마.”
단검을 정리하고 있는 나에게 방금 전까지 머릿속에서 떠다니고 있던 문제의 백치 왕자 <란>이 다가왔다. 사실을 말하자면 그는 차라리 백치로 살았을 때가 더 나은 사람이었다.
지금 날 굉장히 귀찮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 개가 되지 않을래?”
“주인은 모시지 않아.”
“목적도 인재는 필요하지만 야망에도 필요해. 특히 너 같은 꼬마한테는 보호자가 필요하잖아?”
일일이 그런 말에 자존심을 상해할 시간은 없었다. 웃고 있는 놈을 바라보는 데 란은 내게 무언가를 던졌고 난 그것을 받아들였다. 모양이 조금 변했지만, 내가 쥐고 있는 건 암부 특유의 가면이었다. 흰 바탕에 검은 물감으로 그려진 조금은 섬뜩한 모습의 가면이었다.
“네 야망에 나를 이용해. 주인이 아닌, 혁명가로서.”
백치 왕자 란에게는 절대 볼 수 없는 불타오르는 눈이었다. 그는 차갑게 일렁이는 푸른 불꽃이었다. 고요하고 광활하며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그릇. 난 그런 그를 바라보다 작은 실소를 터트렸고 그가 던진 가면을 뒤집어썼다.
“필요 없어.”
그렇게 대답하자,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란이 일어났다. 그는 손을 들어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려는 듯 뻗었다. 난 그런 손이 거슬려 손으로 막아 쳐냈고 그의 앞을 지나쳐 걸어갔다.
“문제가 있다?”
란은 굳이 내가 있는 곳 까지 와 문호와 이야기를 나눴다. 문호는 그런 내가 거슬렸는지 흘깃 바라보더니, 이내 다시 란을 마주보고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갔다.
“용병들이 떼로 붙들어도 못 잡다가 용병왕이 직접 잡은 놈이거든. 잠재력은 말할 것 없고 어려. 저 꼬마처럼만 우리 손에 들어온다면 유용하게 쓸 수 있는 놈이야. 그런데…….”
문호는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자리를 비키라고 눈치를 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폭력으로도 교육되지 않아. 대화조차 불가능 할 정도더군.”
“해서.”
“일단 만나보면 알거야. 그리고 직접 판단해. 저 꼬마는 대화라도 되지만, 놈은 그게 안 되거든. 그런 놈을 네가 길들일 수 없다고 판단된다면 계속 가둬두는 수밖에 없어. 그만큼 위험한 놈이니까.”
그들의 대화에서 꺼림칙한 기분이 떠나질 않았다. 만약 지금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의 미래가 송두리째 바뀌어버린다. 그것이 과연 옳은 것인지 그른 것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난 그것을 눈앞에서 확인하고 싶지는 않았다. 순리대로 흐르지 않는 미래를 두려워하는 건 아니었지만, 불길한 인연은 피하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능이 아니던가.
“라마. 어디를 가지.”
“내가 필요하진 않을 것 같아서.”
내가 서 있는 이 공간에서 빠져나가려고 몸을 움직이자, 문호와 대화를 하는 도중에도 내 기척에 얼마나 신경을 쓰고 있었는지 한 발자국 움직였을 뿐인데도 나를 불렀다.
집요한 놈이다.
“아니. 필요해. 안목이라는 건 중요하니까.”
“내 안목이 무슨 의미가 있지.”
“어쩐지 너를 닮았을 것 같으니까. 물론 그걸 떠나서 너 정도의 안목도 아쉬울 시기거든.”
란의 눈빛이 진지했다. 다른 이의 안목에 의미를 부여하고 의견을 존중하는 건 쉽지 않다.
또한 지금의 나보다는 컸지만, 그 역시 지금은 핏덩이.
스스로에게 내던지는 수많은 의문만으로도 벅찰 나이에 잘도 귀를 열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자문을 구할 상대는 나 같은 들개가 아니라, 삶의 무게를 재량할 수 있는 현자여야 한다.
그럼에도 그가 나를 옆에 두고 자문을 들어야 할 이유는 나 역시 그를 믿지 않는 것처럼 그 역시 나를 믿지 않고 의심하고 있다는 뜻이다. 어디서 무엇을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소소한 질문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고 해석하려는 것일 테다. 뱀처럼 간사한 짓이긴 하나 사람을 꿰뚫어 보는 것에 이만한 방법도 없다.
필요이상의 경계는 스스로를 위험에 빠트리게 만든다는 걸 알고 있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뒤집어 쓴 가면이 제 역할을 다해 주길 바랄뿐이었다.
“정말 꼬맹이랑 같이 가겠다고?”
“꼬맹이가 아니라, 라마다.”
문호는 기겁을 하며 나와 란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리곤 란의 말에 더욱 기가 차다는 듯 중얼거렸다.
“제대로 홀렸구먼.”
나를 바라보는 문호의 눈빛이 좋지 않다. 난 저 사내도 알고 있었다. 그는 검을 쓰는 문호로 유명한 자였다. 이름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다만 괴짜라는 평을 듣고 있었고 의술에도 꽤 지식이 많아 다른 왕자나 귀족들의 장난질에 자잘한 상처를 달고 다니는 백치 왕자 란의 주치의 같은 존재였다.
괴짜라는 평도 백치를 돌본다고 하여 떠도는 소문이었는데, 세간의 소문은 사실 조금은 더 악질적이었다.
백치가 문호를 홀려 남색을 한다는 소문은 심심하면 입방아에 오를 정도로 유명한 것이었다. 그런 소문을 가진 남자가 나를 대상으로 홀린다고 평하는 건 썩 유쾌하진 않았다.
문호는 어느새 앞장서서 성큼성큼 걸어갔다. 란은 당연하듯 내 손목을 잡아 걸어가는 데, 나를 잡고 있는 손이 싫어 몇 번이고 털어보고 힘을 주어 빼 보려 했다. 하지만 란의 손목의 인대를 끊어내지 않는 이상 놓을 생각이 없다는 듯 도리어 힘을 주어 그 곁으로 나를 끌어 당겼다.
일일이 놓으라고 말해주기도 짜증이 나서 그의 정강이를 차주려는 순간이었다. 란이 손목을 놓았고 길을 안내하던 문호도 멈춰 낡은 쇠로 된 문 앞에 섰다.
문호가 직접 자물쇠를 열고 그 문을 열었다. 쇠가 쓸리는 소리와 함께 그 안으로 들어가자 문이 닫혔다.
어디까지 이어지는 줄 모르겠지만, 끊임없이 내려갔고 네 개의 문의 자물쇠를 열었을 때 이곳이 어떤 곳인지 이제야 짐작이 갔다. 네 번째 문을 지나고부터 적나라하게 보이는 쇠창살.
그 안에 들어가 있는 몰골이 짐승과 흡사한 인간들이 즐비해 있었고 더러는 혼자, 더러는 다수가 함께 갇혀 있는 그들은 값나가는 노예로는 보이지 않는다. 모두 상처를 달고 있었고 치료 중에 있었다. 제정신이 아닌 모양인지 하나같이 맛이 가 있어 짐승처럼 행동했다. 가둬둔 이유는 따로 없었다. 치료 중에 누구라도 상처를 덜 입어야 했기 때문에 선택한 것일테다.
우리가 향한 건 쇠창살이 끊기는 마지막 방.
다시 한 번 자물쇠를 열고 들어간 그곳에는 눈을 가리고 입에 재갈을 물린 채 온 몸을 도배하듯 쇠사슬로 감아 놓은 은빛의 짐승이 쓰러져 있었다.
“조심하라고, 깨무는 걸로 끝나지 않을 테니까.”
문호가 경고했다. 란은 쇠창살을 사이에 두고도 지나친 경고에 의아한 바라보았다. 말을 아낄 필요는 없었기에 문호가 기분 나쁘다는 듯한 얼굴로 엄지를 들어 머리부터 발끝까지 결박시킨 놈을 가리켰다.
“창살 너머로 두 놈이나 잡아먹었어. 먹이 주러 온 놈들을 손에 걸린 사슬로 목뼈를 부러트렸더군. 힘이 장사야. 그리고 영리해. 상황을 이해하고 그 대처능력이 월등하지. 저 모양이라도 위험하니까 너무 가까이 하지 않는 게 좋아.”
“이름은?”
“몰라. 본인이 원하지 않으면 용병에게 고문을 당해도 입 한 번 열지 않았어. 소소한 기회라도 놓치지 않고 용병에서 잡히고도 다가온 고문관을 비웃으며 죽이더군. 덕분에 용병단에서도 폐기처분이 결정돼서 겨우 빼돌릴 수 있었어. 쓸 만하긴 한데 지금은 쓸 수가 없어. 그래도 그냥 두기엔 아까운 놈이라 혹시나 하고 너한테 보여주는 거야.”
주절주절 문호가 온 몸이 넝마가 된 채로 결박당한 짐승의 평을 늘어놓았다. 란은 은빛의 머리카락을 가진 짐승을 찬찬히 바라보더니 안전하게 그를 보호해 주고 있는 쇠창살 가까이 다가갔다. 이미 온 몸이 묶여 움직일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런 란이 불안했는지 문호가 손을 뻗어 란의 앞을 막았다.
“위험하다고 했잖아!”
“재갈을 풀어봐라. 이야길 나누고 싶다.”
“제발 적정거리를 유지해라. 네가 죽거나 다치면 곤란해지는 건 나니까.”
문호가 자신의 안쪽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자물쇠를 풀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그 뒤를 란도 따랐다. 나는 그 자리에 서서 그런 그들을 지켜보기만 했다. 짐승은 목이 불편한지 몇 번이나 컥-컥- 거리는 소리를 냈고 검은 안대로 눈이 가려진채로 문호에게 머리카락이 붙들려 강제로 고개가 들려졌다.
그 모습은 추하기보단 뇌쇄적일만큼 아름다웠다.
문호가 다가가 짐승이 문 재갈을 풀었고 재갈을 오랫동안 물고 있던 짐승의 입에선 피가 섞인 끈적끈적한 타액이 흘러내렸다.
“멍멍아. 주인 왔다.”
문호가 강하게 짐승의 머리카락을 잡은 채 그의 귓가에 속삭이듯 입을 열자 기침을 뱉던 것이 진정이 됐는지 침묵했다.
그런 짐승을 향해 란이 입을 열었다.
“이름이 뭐지.”
“……큭큭큭…….”
가장먼저 란은 이름을 물었다. 그러나 답은 짐승이 우는 소리였다.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홀려 버릴 것 같은 웃음소리였다. 그에 분위기가 한층 더 위험하게 변했다. 문을 붙들고 있는 문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상대방을 비웃는 듯한 그 웃음소리에 란이 거슬렸는지 그는 더는 물어보지 않고 차분히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무서워?”
잠시 웃기만 하던 짐승이 입을 열었다. 평소 말을 잘 하지 않고 비웃기만 하던 짐승이 입을 열었지만, 영 달갑지 않다는 듯 문호는 짐승의 머리카락을 더욱 강하게 잡아 당겨 불쾌감을 표현했다.
“말조심해라. 멍멍아. 그러다 정말 식용으로 쓰인다.”
“너 입에서 암내나.”
구역질 하는 시늉까지 하면서 혀를 내밀자 문호는 어쩐지 열이 받는 듯 했다. 란은 문호가 폭발하기 전에 짐승에게 다가가 그의 턱을 잡아들어 올렸다. 눈이 가려져 있지만, 짐승의 눈동자는 마치 란을 뚫어 버릴 기세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멀리에 있는 나도 느낄 수 있었다.
“나를 주인으로 모셔라. 당장 죽는 것 보단 나을 것이다.”
짐승의 대답을 기다리겠다는 듯 움직이지 않는 란.
난 그런 그의 행동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막 그 생각이 떠오르기 무섭게 짐승은 내 예상을 빗나가지 않고 입을 벌렸다.
짐승의 결박에서 자유로운 목과 입이 움직였고 눈이 가려졌음에도 불구하고 정확히 란의 목덜미를 향해 날카로운 송곳니를 박으려고 했다.
만약 뒤통수를 잡고 있는 문호가 그를 땅바닥에 내리 꽂지 않았다면 아무리 반사 신경이 좋은 란이라 할지라도 그대로 짐승에게 목덜미가 뚫리는 것을 허락했을 것이다.
짐승은 먹잇감을 놓쳐 바닥에 처박혔음에도 듣는 이가 소름 돋을 만큼 웃기 시작했다. 란은 닿지 않았음에도 섬뜩하게 뻐근해오는 자신의 목덜미를 쥔 채 물러나 짐승을 바라보았다. 그의 미간이 눈에 띄게 일그러지는 것이 보인다.
“젠장, 괜찮아?!”
문호가 소리쳤지만, 잠시 자신의 목덜미를 감싸고 물러난 란은 말이 없었다. 그 역시 짐승의 본능을 확인하고 놀란 듯 했다.
강렬하게 비웃고 있는 짐승을 내려다보았다. 바닥에 그 얼굴이 박혀 머리통에서 피를 흘리고 있음에도 반복적인 웃음만을 내뱉고 있었다. 란은 잠시 혼이 나간 듯 조금 더 뒤로 물러나 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라마. 네가 보기엔 어떤가.”
뚝-
끊임없던 짐승의 웃음소리가 멈추었다. 그의 목을 둘러싼 붉은 칼자국. 아직은 낫지 않아 조금이라도 힘을 주면 핏물이 고이는 목줄을 매고 있는 짐승을 바라보았다.
용병 왕이 됐어야 할 녀석이 용병에서 쫓겨난 것도 모자라서, 암부가 있는 곳 까지 오게 돼 버렸다. 문의 운명이 틀어진 것은 그날 보던에서 빠져나올 때 이른 목줄을 채울 때부터 알고 있었다.
원래대로였다면, 나는 용병에게 무기력하게 끌려갔을 것이고 그 과정에서 문을 만나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가나를 데리고 보던에서 나가버리려고 했고, 도주 중에 문을 만나고 말았다.
나는 또한 그런 식으로 문에게 선명한 목줄을 채워준 기억이 없었다.
나와 문은 보던의 들개로 자랐지만, 우리는 접점이 거의 없었다. 내가 그를 만나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게 된 것도 드론이 된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웃음을 멈춘 문은 고문을 당해 몸이 쇠약해졌음에도 몸을 짓누르고 있는 문호가 몇 번이고 힘을 줘야 할 만큼 괴물 같은 체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곳에 있으면서 제대로 먹지도 마시지도 못했을 텐데도 말이다.
바닥에서 꿈틀대는 놈보다 짓누르는 놈이 땀을 흘리고 있을 정도다.
온 몸을 감고 있는 쇠사슬도 문의 움직임을 방해하고 있었다. 거기에 머리 쪽은 찢어져 상처가 생겼는지 뚝뚝 피가지 흘리고 있었다.
여기서 더 힘을 줬다간 문의 몸은 망가져 버릴 것이다.
난 그런 문에게 다가갔다. 그런 내 행동에 기겁하는 문호가 오지마라고 소리 질렀다. 란은 손을 뻗어 내 가슴을 짚어 밀어내려 했다.
쓸데없이 요란한 그들의 행동에 비위가 상해 검대로 란의 손을 거칠게 쳐냈다. 그리고 시끄럽게 소리 지르는 문호의 가슴을 발로 차 버렸다.
충격에 문호가 문을 놓치고 뒤로 넘어갔다.
문호와 란은 내 행동에 놀랐지만, 섣불리 움직일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난 그들을 무시하고 문에게 다가갔다. 짓누르는 힘이 없어지자 서서히 몸을 일으키는 문은 고개를 나를 향하고 있었다.
짐승은 방금 전 본능처럼 웃는 것도 잊어버린 듯 나를 바라보았다.
짐승의 몸을 결박하고 있는 사슬을 끊어버렸다. 몸이 완전히 해방되자 문은 내게 손을 뻗었다.
그런 문의 행동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란은 낯짝이 흙빛이 된 채 내게 다가와 소리쳤다.
“라마!!!!”
란의 목소리가 차가운 감옥 안을 요란하게 울리게 만들었다.
내 목이 물어뜯길 것이라 예상한 것이다. 하지만 문은 그러지 않았다. 살기를 온전히 지우고 무릎을 꿇은 채로 나를 안았다.
체향을 맡기라고 하는 듯 내 목에 코를 박고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그런 문을 보고 란은 할 말을 잃어버린 듯 굳어버렸다.
내 목에 코를 박던 녀석이 입을 열었다.
“나의……왕.”
씻지 않아 끈적거리고 더러운 놈의 얼굴을 밀어내고 그의 눈을 감싸고 있던 천을 단검을 들어 잘라주었다.
문의 감겨있던 붉은 눈동자가 드러났다. 익숙하지 않는 빛을 피하면서 나를 바라보았다.
문호는 어느새 검을 들고 있었다. 그리고 내게 물었다. 그 물음의 답은 란도 궁금해 하는 듯싶었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목줄을 채워준 기억밖에 없다. 내가 대답할 수 있는 건 한정되어 그들이 알아먹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일일이 설명하기도 귀찮기 때문에 자잘한 설명은 생략하고 본론만 말하기로 했다.
“각인이다.”
역시나 이해하지 못한다는 듯 나를 바라보고 있는 멍청이 둘.
그리고 아까부터 귀찮게 내 목 부근에 입을 대고 있는 문의 행동이 거슬려서 난 집요하게 핥고 있는 문의 턱을 잡아 떼어냈다.
축축하게 젖은 혀를 내밀며 나를 보고 웃으려고 하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 자비 없이 그 낯짝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불시에 가격을 당한 문이 자신의 한 손으로 통증이 오는 얼굴을 가렸다. 그제야 내 어깨에 고개를 묻고 얌전히 있자 내 설명이 납득이 간 모양인지 란이 숨을 토해냈다.
“그럼 이 개의 주인이 꼬맹이 너라고?”
문호가 물음을 다시 던졌다. 그 말을 듣고 있었는지, 고통에서 조금은 회복된 문은 스멀스멀 손을 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의 머리통을 감싸 안더니 대답을 대신했다.
“왕이다. 이 머저리야.”
<각인>
문의 목을 둘러싼 자상이 그것이다.
아직은 어리고 멍청해 불완전한 문이기에 손쉽게 목줄을 달 수 있었다.
그는 왕이 되려는 자만을 인정하고 그 대상을 시험하여 선택한다. 그가 왕을 선택하는 것은 간단했다.
대상이 죽일 수 있는 놈인지 그렇지 못하는 놈인지.
그 선택의 기로에서 용병왕은 이미 완성된 문에게 죽임을 당했고 그가 문에게 살해당한 뒤 왕이 되려는 자는 없었기에 문은 용병왕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성정이 잔인한 만큼 순수한 광기를 가지고 있는 그를 왕으로 인정한 용병들은 그와 비슷한 색으로 물들어 그 세력이 왕가를 위협할 정도로 거대한 무리를 이뤘다.
용병왕으로 완성된 문에게 뒤늦게 달아준 목줄은 그를 제어할 수는 있었어도 제압할 수는 없었다. 완전한 존재를 굴복시키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것이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모든 게 불완전한 형태로 균열이 일어난 그에게 목줄을 다는 것은 어린아이 손목을 비트를 것 보다 쉬운 것이었다.
각인이 분명하면 분명할수록 벗어날 수 없는 족쇄가 될 것이다.
당시 가나를 살리기 위해 문에게 달아놓은 목줄을 무시한 것도 이 녀석의 미래를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 노력도 물거품이 되어 문은 용병 왕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렸다.
나는 어쩌면 이 녀석의 미래를 송두리째 도려내 버렸을지도 모른다.
들러붙어 있는 문의 머리통을 뜯어내 발로 짓눌렀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그런 나를 바라보고 있는 란과 문호를 보고 입을 열었다.
“넌 이놈의 왕이 될 수 없어.”
왕이라는 단어에 민감할 란이 눈에 띄게 표정이 굳어가자 그런 란의 심중을 눈치 챈 문호가 벌떡 일어나 항의를 하듯 내 앞으로 다가왔다.
“이 건방진 꼬맹이가!! 말이면 다 되는지 알아!?!”
침을 튀기며 소리를 지르는 통에 짜증이 나 문을 짓밟고 있던 다리를 떼서 문호의 정강이를 향해 발길질을 했다. 문호는 불시에 당한 타격에 지독한 통증을 느끼고 몸을 숙였다.
무관처럼 용맹해 보인 다해도 어쩔 수 없는 문관인 그는 맥없이 차인 다리를 붙잡고 신음을 내며 찌그러졌다.
나는 란을 바라보았다.
“들개의 왕은 들개뿐이다.”
뒤에서 어느새 일어나 박수를 치고 웃고 있는 문.
앞에서 찌그러져 있는 문호가 아닌, 그런 문을 바라보던 란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그는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했다. 애송이 그릇의 얼굴이 굳어지면서 내 앞으로 다가왔다.
무엇을 말하려는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귀찮아 듣지 않기 위해 다가오는 놈을 비켜갔다.
“나 역시 들개. 하지만 왕은 모시지 않아. 짜증나게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그가 나를 여기까지 데리고 온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 심중을 찌르고 분명히 갈라 보여주자 보기 좋게 엉망이 된 표정을 지었다.
난 그를 두 번 다시 보지 않고 감옥을 빠져나왔다. 내가 나가자 뒤따라오는 문의 기척이 느껴졌지만, 이미 벌어진 일에 뒤 돌아보는 것 따윈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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란은 나가버리는 라마를 돌아보지도 못하고 서 있다가 그의 발소리가 점점 멀어지자 저도 모르게 입에서 웃음이 흘러나왔다.
자신이 길들일 수 없다고 말하는 라마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짜릿하게 올라오는 독점욕에 절로 몸이 떨렸다.
그런 자신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자신을 서늘하게 쏘아보는 그 눈동자를 기억했다.
“젠장! 망할 꼬맹이. 정말 저런 놈을 옆에 둘 거야?”
정강이를 차인 여운이 남았는지 절뚝거리며 일어나는 문호는 드물게 웃고 있는 란을 바라보면서 가진 인상을 다 쓰며 입을 열었다.
그에게 나오는 말은 온통 라마에 대한 악평뿐이었다.
무력하게 제압당한 자신이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어디를 어떻게 차인지도 모르는 문호는 절뚝거리며 란에게 다가왔다.
“못 둘 이유는 없지.”
“충분하거든?”
“아니, 절대로 내게 벗어날 수 없게 할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