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왕
습하고 어두웠던 감옥에서 내 뒤를 따라 문은 나왔다. 그는 갑자기 쏟아지는 빛줄기에 눈이 부신지 눈을 감고 고개를 틀었다.
그러다 결국 빛을 견딜 수 없다는 듯 눈을 뜨지 못하자, 보다 못한 나는 문의 손을 잡아끌어 당겼다. 엉뚱한 짓을 하기 전에 내가 쓰고 있던 가면을 벗어 문에게 씌워 주었다.
눈부심이 조금은 덜한 모양이었는지 빙글빙글 춤을 추듯 걸어와 내 주위를 정신없이 돌면서 걸음을 맞춰 움직였다.
어지럽게 돌고 있던 문이 어느새 얌전해져 나를 내려다보는 게 느껴졌다. 그 시선이 거슬려 눈을 올려 바라보자 가면에 의해 가려진 눈동자는 보이지 않았지만, 어쩐지 비웃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나를 관찰하듯 바라보던 문이 갑자기 앞을 가로 막았다.
“병아리는?”
“…….”
“작은 것도 있잖아. 어디 있어?”
손으로 허공을 빚어 덩어리를 만들더니 병아리를 찾았다. 무슨 뜻인지 생각해 보다가 밀빛 머리카락을 가진 가나가 떠올랐다. 될 수 있으면 기억하는 것도 하고 싶지 않았지만, 문의 말대로 작은 병아리 같은 녀석이었다.
“없다.”
“왜 없어? 죽어버렸어?”
“…….”
한스덴 웨이라면 가나를 죽도록 내버려 두진 않았을 것이다. 지금쯤이면 따뜻한 요람 안에서 평온하게 잠이 들었거나, 속을 따뜻하게 하는 음식을 먹고 있을 것이다. 지금은 그렇게 살고 있을 것이라고 믿고 싶었다.
내가 대답을 하지 않고 옆으로 비켜 지나가자 문은 재촉하지 않고 내 뒤를 따라 걸었다.
“그럼 뭐 하고 놀아?”
순수한 광기의 색을 담은 붉은 눈동자가 검은 천 뒤에서 번들거리는 것을 느꼈다. 난 문이 말하는 놀이에 대한 의미를 알고 있었다.
덕지덕지 상처를 덮고 있는 몸을 하고도 그는 지친 기색하나 없이 그에겐 생소할 겉보기에 평화로운 오던의 거리를 흥미로운 듯 구경하더니 흥분에 들뜬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하지만, 난 그 물음에도 대답할 수 없었다. 용병단에 들어가 신나게 날뛰어야 할 놈이 이른 목줄이 채워져 내 옆을 서성이고 있다. 그의 운명에서 한 없이 멀어지는 지금의 상황이 놈에게도 나에게도 전혀 이득이 될 만한 것은 없었다.
문에게 있어 용병단에 들어가지 못한 건 그의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어버렸다는 것을 의미하니까.
과거 온전히 길들여지지 않았던 문은 유일하게 살아남은 내 사람이었다. 친우도 가족도 모두 잃어버린 내게 유일하게 남은 것이 문이었다.
문의 목을 둘러싼 붉은 흉터.
그 가느다란 목줄로 인해 순수하기만 했던 백색의 광기는 시간이 지날수록 나의 색으로 온전히 검게 물들 것이다. 과거와는 조금의 접점도 허락하고 싶지 않았던 나는 머릿속을 헤집듯 들어오는 진득한 환멸을 느끼며 구역질이 올라올 것 같은 것을 참고 걸었다.
그 순간이었다.
문이 앞으로 튀어나와 상체를 숙여 나를 바라보더니 웃음기 어린 얼굴로 눈앞으로 다가와 내 손을 잡았다.
“미치는 건 내가 대신 해 줄게.”
“…….”
“왕께선 왕좌에 앉아 돼지처럼 살이나 찌우라고.”
천박한 말투로 과거에는 그 누구에게도 내뱉은 적이 없었던 것을 지껄였다. 마치 절대로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내게 각인시키는 듯한 웃음과 함께. 문은 내 손등에 입을 가져다 댔다. 들개에겐 복종의 의미가 있는 행위였다.
난 그런 문을 바라보다 잡힌 나의 손에 시선을 돌렸고, 그대로 들어 손등으로 문의 얼굴을 옆으로 쳐 냈다.
반복적인 폭력에도 피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맞은 그가 고통에 몸을 숙여 얼굴을 감싸며 내 손을 놓자 난 춤에서 손수건을 꺼내고 들개의 타액이 닿은 손등을 닦아냈다.
“지저분한 몰골로 날 만지지마.”
닦은 손수건을 버리고 웅크려 얼굴을 감싼 채 앉아 있는 문을 내려다보다 그 곁을 지나쳤다.
내가 걸음을 옮기자 언제 아팠냐는 듯 문이 일어났다. 나의 뒤를 따라 붙으며 문은 자신의 몸이 얼마나 더러운지 자각을 못하는 모양인지 이리저리 몸을 훑어보다 팔을 들어 냄새도 맡는다. 이미 들개 생활에 익숙해진 그는 아직도 자신의 오염 정도를 모르는 눈치였다.
***
“굉장해! 난 이거!! 난 이거!!”
문이 입을 크게 벌리며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데, 그것은 세공이 단조로운 듯한 대검이었다.
문은 무기상인의 가게에 들어서자마자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침까지 흘려대며 구경을 하는데 시끄러운 그를 무시하고 몇 번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발견한 구석진 곳에 있는 날까지 검은 빛을 내고 있는 두 개의 단검을 들었다.
과거 나는 단검에는 큰 관심이 없었었다. 실제로 내가 들고 다니던 것도 체구에 맞은 장검에 속하는 검이었으니까. 하지만 이런 난쟁이 같은 몸으로 그 검을 소화하기에는 체력도 체구도 따라주질 않을 것이다.
그래서 선택한 두 개의 단검을 들고 몇 번 쥐어보고 휘둘러보는데 무게도 크기도 적당해 몇 번의 싸움에서 상한 기존의 단검을 던져버렸다.
그리고 고른 두 개의 검은 단검의 가격을 지불하고 가게를 나가려고 했다. 장검을 눈에서 떼질 못하고 침을 흘리며 바라보는데, 나갈 생각을 하지 않자 결국 적당한 크기의 장검을 골라 가격을 지불한 뒤 문에게 던져주었다.
하지만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다는 듯 가게를 나오자마자 문의 입술이 오리처럼 나와 투덜거리고 있었다.
쓸데없는 욕심을 부리는 문을 바라보다 검지를 까딱거리며 부르자 금세 밝아져 내 앞에 다가오는 문의 목덜미를 잡아 내린 후 그의 볼을 움켜쥐고 바라보았다.
“뭐가 불만이라고?”
“…….”
내 물음에 문이 고개를 저었다. 꼬리를 말고 들어가는 문을 보면서 그 볼에 손을 놓았고 그에게 멀어져 걸어갔다.
**
“마침 오는 군.”
카인관에 들어가 지하로 내려오자마자 나를 기다렸다는 듯 란이 다가왔다. 그의 옆에 붙어 있는 문호는 낯짝이 창백하게 변해 있었다. 내게 할 말이 있는 것 같지만, 무시하고 그를 지나쳤다. 그리고 나에게 그들이 제공해준 방 안으로 들어갔다. 욕실로 들어가자 내 앞에서 기어 나와 여긴 어디냐며 시끄럽게 물어대고 있는 문의 엉덩이를 걷어 차 밀어 넣었다.
“한 군데라도 더러우면 가죽을 벗겨버릴 줄 알아.”
참는 것도 한계가 있어 대충 밀어 넣고 문을 닫았다. 돌아서서 침대 위에 앉아 무기 장에서 사 가지고 온 검은 단검을 들어 날을 살펴보았다. 손 안에서 돌려도 보고 미끄러지듯 던져도 보면서 손에 익으려던 차. 문을 두들기는 소리와 함께 란이 들어왔다.
아까부터 거슬리더니, 이제야 할 이야기가 정리가 된 모양이다.
“네게 할 말이 있다. 잠시 시간을 내주겠어?”
탁자위에 접어져 있던 흰 수건을 들어 단검의 날의 곁을 따라 닦으며 고갯짓을 했다. 란은 그런 나의 고갯짓에 별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의 옆에서 불만족스러운 얼굴로 날 노려보는 문호를 향해 눈을 들어 바라보았다.
“용건은.”
“젠장!!! 말도 안 돼!! 저런 시건방진 낯짝을 보라고!!!”
탁자를 두들기며 흥분하는 문호가 고함을 지르자 귀가 아픈 나는 들고 있던 검을 들어 그대로 던져 그의 뺨을 지나가 벽에 박히게 만들었다.
“시끄럽게 떠들 거면 나가.”
날이 잘 서 있는 단검은 새것답게 깨끗한 소리를 내며 벽에 박혔는데 나는 천천히 일어나 문호의 등 뒤에 박힌 단검을 뽑았다.
그는 더 이상 시끄럽게 할 의사가 없어 보인다.
“네가 맡아줬으면 하는 게 있다.”
벽에 박힌 단검을 뽑아 돌려 허벅지에 묶인 검 집 안에 밀어 넣다. 고개를 돌리자 제법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는 애송이가 보인다.
본론으로 들어가려는 그의 말에 난 걸어와 다시 침대에 앉았다. 여러 가지로 정신적인 휴식이 조금 필요할 것 같았지만, 그러기엔 주위가 너무 어수선 했다. 어느새 란이 일어나 그런 내 앞까지 걸어 와 날 내려다보았다.
“통칭. 클라운. 아직까지 이들을 이끌 크라운의 자리가 공석이다.”
“더 지껄여봐.”
“인원은 3명. 넌 클라운의 크라운으로 그들의 훈련과 의뢰까지 맡아줬으면 한다.”
“주요 활동 목적은.”
“암살. 암부 내에서도 비밀리에 움직여야 한다.”
그의 말이 마침과 동시에 문호가 입을 열었다.
“고작해야 12살이야! 젠장, 정신 나간 거 아니냐고!”
손을 저어가며 소리를 높이는 문호를 바라보았다. 덩치에 맞지 않게 어린아이에게 약한 구석이 있긴 했지만, 설마 그 어린애라는 게 나를 가리킬 줄은 예상 못했다. 체구만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인간이 아님에도 말이다.
문호는 이번엔 나를 타이르듯 말했다.
“너는 거절해도 돼. 이건 터무니없는 이야기니까.”
난 검지를 들어 시끄럽게 짖어대는 문호를 가리키며 란에게 물었다.
“저거 원래 저렇게 시끄럽나?”
“미안하군. 대신 사과하지.”
란이 멋쩍은 듯 웃으며 사과하자 더 이상 관심 둘 생각은 없어 한심하게 잠시 바라본 뒤 눈을 돌렸다. 그러자 문호는 자신의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분해하며 밖으로 나가버렸다. 이제야 어수선함 없이 조용했다.
몸을 기울여 란을 바라보다 제안에 대한 대답대신 물음을 던졌다.
“이유가 뭐지.”
과거에 38세까지 살았다 하더라도 란이 보고 있는 나는 문호의 말대로다. 아무리 봐도 12살도 많이 쳐 줘야 하는 어린아이다. 그들 입장에선 꽤 출혈이 보일 무리수를 두는 것이 이상 했다. 나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그가 어째서 이런 제안을 하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는 그 이유를 물었다.
“짐승을 길들이는 데 재주가 있는 것 같더군.”
“그래서.”
“이건 도박이다.”
란이 손을 들어 내 턱을 잡아 올렸다.
“도박이란, 모든 걸 얻을 수도 잃을 수도 있지. 그리고 난, 얻는 쪽에 걸었다.”
그와 눈을 맞추면서 그가 정말로 과거 백치 왕제가 맞는지 이따금 다시 의심이 들었다. 깊고도 중후한 눈빛이었다. 애송이 주제에 온갖 쓴 맛은 다 본 것 같은 눈동자를 바라보다 그의 손을 쳐내고 일어났다.
“그렇다면, 내가 하는 방식에 참견마라.”
“쉽지 않을 거다. 언제든 조언은 구해도 좋아.”
“애송이 조언 따윈 필요 없어.”
내 말에 잠시 어이가 없다는 듯 실소를 터트리는 란은 일어나 부탁한다고 말한 뒤 문을 열고 나갔다.
클라운.
어떤 오합지졸들이 모인 곳인지는 몰라도 상황은 생각 외로 재밌게 돌아가고 있었다.
침대에 앉아 지금까지 내가 기억하고 있는 암부의 움직임을 기억해 보았다.
그들이 처음 모습을 드러낸 건 내가 이십대 후반에 막 들어서부터이었다. 3왕자를 암살 후 눈에 띄는 움직임 없이 그동안 어떤 일을 해 왔는지는 뚜렷하게 기록된 바는 없다. 그날, 그들은 움직였다.
가장 활발하게 움직였던 시기는 내가 서른을 넘기면서였다. 나는 내란을 조정하려 했다는 죄목으로 단두대 앞에 서게 되었다. 암부는 내게 몇 번의 협상을 목적으로 접근 한 바 있다. 란을 본 것도 그때였으니까.
물론 협상은 거절했다. 나는 그들과 손잡을 이유가 없었기에 몇 번이고 붙잡으려고 했었다. 죽이는 것은 어렵지 않았지만, 배후를 캐려면 반드시 산채로 잡아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쥐새끼마냥 빠져나가는 놈들을 번번이 놓치고 말았다.
그들 입장에서는 나만한 장애물은 없었을 터.
란이 말하는 혁명에 대한 목적이 내란이라면, 그 희생자가 된 내 입장이 우스울 정도다. 그러나 억울하다거나 원망해야 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단, 나는 이제 내 눈으로 모든 걸 지켜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뭘 생각해?”
고약했던 피딱지를 모두 지우고 알몸으로 등 뒤로 다가왔다. 그는 긴 팔로 내 목을 둘렀다. 문이었다.
당장은 이 녀석에 대한 것도 생각을 해 볼 문제인데, 오래 생각할 것 없이 난 왼손을 들어 검지를 앞으로 까딱거렸다.
그런 내 사인을 본 문이 수건 한 장 걸치지 않는 알몸으로 내 앞으로 와 상체를 숙여 날 바라보았다.
한결 깨끗해진 모습. 축축이 젖은 머리카락이 물방울과 함께 흩어져 있었다. 붉은 눈동자와 대조되는 창백한 피부와 어우러져 위험한 분위기를 품고 있었는데, 난 그런 문의 턱을 들어 올려 두 눈을 마주쳤다.
“문. 지금부터 내 말을 잘 들으면, 앞으로 재밌게 놀게 해 주마.”
“진짜? 뭐하고?!”
들뜬 문이 금세 얼굴이 환해져 물었지만, 난 대답을 하지 않고 턱을 쥔 손을 놓고 침대 위에서 일어났다. 흉한 알몸으로 돌아다니는 그에게 단검을 사면서 구매한 간단한 옷을 던지고 입고 따라오라고 말한 뒤 밖으로 나갔다.
계단을 내려가자 내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문호가 다가와 인상을 쓰며 자신을 따라오라며 앞장서 걸어갔다. 그의 옆에 있어야할 란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는 성으로 돌아간 것 같다.
볼 것 없이 그 뒤를 따르자 어느새 옷을 다 입고 따라붙은 문의 기척이 느껴진다.
문호는 어느 정도 걸어가다 작은 철문을 열었는데, 그 순간 그의 손이 조금씩 바들바들 떨고 있는 것이 보였다. 입술을 깨우면서까지 불안해하는 그가 문을 열자 코를 찌르는 곰팡이 냄새에 나는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저들이 클라운이다.”
구석에 찌그러져 폼을 잡고 있는 세 사람. 그들 앞으로 걸어가 몸집이 가장 큰 사내부터 안경을 쓴 놈을 차례로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이 녀석이 마스. 그리고 모르페다. 한 명은 보이지 않군.”
문호가 성의 없게 그들에 대해 설명하고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이내 찾을 수 없다는 듯 혀를 차고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어둠에서 빠져나온 괴물처럼 큰 사내가 허리춤에 손을 올려놓고 문의 낯짝을 빤히 바라보았다.
“뭐야? 온다는 크라운이 이런 애송이라고?”
놈의 눈에는 내가 보이지도 않았는지 문을 크라운이라고 착각했다. 상체를 숙여가며 문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더니 의미를 알 수 없는 휘파람을 불고는 웃기까지 한다.
무식한 덩어리의 반응이 거슬렸는지 히죽거리며 웃고 있던 문의 눈빛에 살기가 돋는다. 탐색당하는 입장이 썩 마음에 들진 않는 모양이었다. 문은 내게만 들리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저 기생충. 눈알 뽑아도 돼?”
“참아.”
“쳇.”
어둠에서 또 기어 나오는 안경을 쓴 얼간이. 그는 모르페다. 그는 문의 상체와 하체를 번갈아 가며 훑어보곤 미약하게 눈을 찌푸리다 펴면서 입을 열었다.
“전 상관 없습니다.”
문호는 그들의 착각이 상당히 난처한 듯 말을 잇지 못했다. 난 문의 앞으로 걸어 나와 엄지로 아까부터 구석에서 거슬렸던 놈을 향해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저건 뭐지?”
뒤늦게 나라는 존재를 눈치 챈 마스와 모르페는 놀란 듯 그제야 날 바라보았고, 특히 마스라는 멍청이는 귀가 찢어질 듯한 큰 소리를 내며 놀라 내게 삿대질까지 하며 소리 쳤다.
“이건 또 뭐야?!! 하! 이딴 젖먹이를 클라운에 들이겠다고?! 너 제정신이야?!”
“반대다.”
“뭐?”
난 빠르게 그의 등 뒤로 가 마스의 오금을 발로 찼다. 넘어지려는 그의 뒤통수에 훤히 드러나는 급소를 칼 등으로 내리치자 단 한 번의 급습만으로 뻗어버린다. 허점이 곧 죽을 자리가 된다는 걸 판단하기엔 훈련이 부족한 상태였다.
허접한 놈의 머리카락을 붙잡아 들어 올려 그 목에 검을 들이댔다.
어디를 어떻게 자르면 깔끔하게 도려낼 수 있는지 알고 있었다. 놈이 내 말을 거스른다면 단 한 번의 망설임도 없이 베어낼 생각이었다.
“멈춰. 머리가 굴러가는 걸 보고 싶지 않으면.”
기절한 덩어리가 아닌, 모르페와 이제야 모습을 드러낸 겁쟁이 놈에게 하는 마지막 경고였다.
주위에 있는 모든 이들이 숨을 죽이고 나를 노려보았다. 특히 모르페는 얼굴에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나를 표독스럽게 노려보는데, 그는 안경을 치켜 올리며 서늘하게 문호에게 시선을 돌렸다.
“설명주시겠습니까.”
그에 문호는 기절한 덩어리 위에 앉아 있는 나에게 삿대질을 한다. 그러더니 또 다시 얼굴이 붉어지며 피를 몰리게 하면서 고함을 질러댔다.
그를 보고 있으면 정말 당장이라도 저 혀를 뽑아 닥치게 만들어 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순간 올라오곤 했다.
뭘 먹고 저렇게 시끄러운 걸까. 내 과거 기억 속 문호는 좀 더 입이 무거운 자였는데 말이다.
“빌어먹을! 나라고 저런 꼬맹이를 통제 안 되는 너희들한테 붙여주고 싶은지 알아!?!”
“설득력이 없습니다. 언제부터 클라운이 보육원이 된 겁니까.”
“따지려거든 왕에게 따져!”
습관적으로 안경을 치켜 올리던 놈이 문호와 짧은 대화를 끝으로 냉담하게 뒤돌았다. 그런 모르페의 반응에 당황한 문호가 잡으려 입을 열었다.
“어디가?!”
“클라운에 저런 크라운은 의미 없습니다.”
“이봐! 일단 설명을 더 들어!!!”
“장단 맞춰드리기 불쾌하니 저는 빼 주십시오.”
모르페가 문고리를 잡으려 하자 난 단검의 날을 잡고 그대로 던져 그가 잡으려던 손잡이에 박아 넣었다. 역시나 새로 산 검답게 깨끗한 소리를 내며 박히는 데, 이번에는 그것을 빼기 위해 일어나진 않았다.
대신 천천히 뒤돌아 나를 바라보는 모르페를 비웃었을 뿐이다.
“손이 많이 가는 애송이로군.”
내 말에 모르페의 눈빛이 일그러지고 있었다. 본격적으로 훈련에 들어가지 않아 클라운에 대한 소속감이 적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내가 속한 무리에서 멋대로 균열을 만들고 발을 빼려는 짓을 가장 싫어한다.
차라리 온 몸으로 싫다고 덤빈 마스가 훨씬 비위에 맞았다. 지금 모르페가 나가도 클라운에 영향을 미칠 것은 없으며, 딱히 붙잡을 정도의 인재도 아니기에 상관없었다. 그러나 본보기로도 살려서 보낼 수는 없다.
기절한 마스 위에 앉아 고민했다. 지금 저 놈의 목을 칠 것인지 말 것인지.
“난 네놈들보다 나이가 많아.”
“저 핏덩어리가 무슨 소릴 지껄이는 겁니까? 문호.”
문호도 얼간이 같은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고 모르페는 낯짝은 화를 견딜 수 없다는 듯 그을렸다.
곧 아무하고도 말이 통하지 않음을 깨닫고 문호는 포기한 듯 한숨 내뱉으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는 이렇게 될 것이라는 걸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규율은 지엄한 법. 등을 돌리고도 살 수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 마라.”
“클라운의 규율에는 이런 것도 있습니다.”
모르페가 움직였다. 그는 내 앞으로 천천히 걸어와 가늘고 얇은 장검을 들었다. 가볍기 때문에 속도가 늘어지지 않는 대신, 내구성이 약해 자주 교체를 해야 하는 단점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형식적인 단점에 불가했다.
깨끗하고 빈틈이보이지 않는 완벽한 자세. 하지만 지나치게 방어적인 자세를 보아 좋게 말하면 신중하고 계산적인 놈이다. 나쁘게 말하자면 살상능력은 기절한 마스보다는 낫겠지만, 구석에 박혀 있는 겁쟁이 보다는 떨어진다는 얘기가 된다.
놈은 클라운에 있는 것에 자랑스러워 정도는 아니다. 내 밑에 있어야 할 놈들이 있으나 마나한 것들이라면 굳이 시간을 들여 수고는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아까부터 이상하게 겁쟁이가 눈에 익다. 막 그 기억이 떠오르려는 데, 내 앞으로 모르페의 검이 화살처럼 뻗었다.
그의 검은 정확히 내 목을 겨냥하는 데, 같잖지도 않아 고개를 틀자 검이 눈앞에서 빗나갔다. 다시 한 번 허공에서 내 정수리를 향해 검이 뻗는다, 슬슬 일어나보려는 차 눈앞에서 검날이 부딪치는 소리와 일순간 튄 불꽃과 함께 내 몸이 허공에 띄워졌다.
나를 그렇게 만든 건 문이었다.
“왕. 그러다 땅바닥에 목 굴러간다?”
문은 한 쪽 손만으로 나를 잡은 채 가볍게 모르페의 검을 밀어냈다. 바닥을 바라보자 내발이 땅에 닿지 않고 있었다.
“내려놔.”
망할 들개 녀석이 솟구치는 충동을 참을 수 없는지 나를 내려놓을 생각을 하지 않고 쪼개고 있었다.
문의 눈은 이미 굶주림으로 맛이 간 상태였다. 이미 내 목소리 따윈 들리지 않는다는 듯 나를 안은 채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워낙 검사용에 있어 난폭한 녀석이라 야채도 자를 수 없는 검을 가지고도 사람을 베었다. 문의 그런 행동은 일방적인 도륙이었다.
힘으로 이놈을 제압하기에는 아직 내 몸은 완력이 떨어진다. 그렇다고 이렇게 고삐가 풀어진 모습으로 날뛰게 할 생각은 없었기에 난 그대로 손을 들어 손등으로 얼굴을 향해 박았다.
불시의 가격에 전혀 훈련이 되지 못한 문이 짧은 신음을 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 와중에도 나를 잡은 손을 놓지 않고 검을 든 손으로 통증이 전해지는 얼굴을 감쌌다.
“멋대로 흥분하지 마라.”
전혀 대답을 하지 않는 그를 바라보다 손을 들어 그의 멱살을 잡아끌었다. 그에 얼굴을 감싸던 손이 내려갔고 난 내 얼굴 옆까지 온 문에게 분명하게 말했다.
“목줄을 채워줬으면 내 목소리 정돈 들어.”
“으아아……. 나의 작은 왕은 너무 난폭해. 내 상판 아작 났어.”
우는 소리가 듣기 싫지는 않았다. 이제야 제정신으로 돌아온 모양이다. 멋대로 미치게 내버려 둘 수 없어 힘을 썼지만, 매번 이런 식이면 귀찮아 지는 건 나다. 아무래도 쌓인 것이 많았나 보다. 적당히 풀어줘야 덜 미칠 것 같다는 생각에 문의 머리카락을 쥐고 눈을 마주쳤다.
“날뛰어도 좋다. 단, 네놈의 검이 망가지면 머리털 다 뽑아버릴 줄 알아.”
결이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당기자 그런 나를 바라보던 문이 내 목덜미까지 얼굴을 들이대더니 작게 소리쳤다.
“멍.”
그 대답과 동시에 망할 놈이 나의 귓불 밑 목덜미를 혀로 핥았다. 맞기 전에 앞으로 뛰쳐나가는 놈을 바라보면서 난 차마 내 목을 만질 수 없었다.
침이 묻어 몸서리쳐졌다.
느긋하게 앉아 구경 할 곳을 찾는데, 구석에서 찌그러져 있던 겁쟁이 놈이 앞을 가로 막았다. 나를 내려다보는 놈에게 질려 그 옆으로 비켜 지나가려고 하자 이번엔 손을 뻗어 내 앞을 가로막았다.
“정체가 뭐지.”
“비켜.”
“네가 쓴 건 왕궁의 기사의 검술과 흡사하다. 다시 한 번 묻겠다. 네놈의 정체가 뭐지.”
12살 용병단에 강제로 입단 되었고 이후 한스덴 일가를 만나 14살 정식으로 기사단에 입단 하게 되었다.
당시 내가 배울 수 있는 검술은 보던에서 들개로 자랄 때 우연찮게 날뛰는 문을 보거나, 용병단에서 강제로 훈련 상대가 되어 버리거나, 기사단에 들어가 검을 배운 것이 전부다.
기사가 쓰는 검에는 허점이 많아 그동안 보고 배워왔던 모든 검술을 모아 버릴 건 버리고 쓸 만한 것을 익히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숱한 죽음으로 내모는 실전 경험을 수도 없이 쌓아 왔으니까.
변형이 많은 검술에서 잘도 뿌리를 찾아냈다. 눈썰미라도 보통이라 다행이라 생각한다.
드론이 되자마자 내가 한 일은 기존의 검술을 모두 변형시켜 훈련을 하게 했다. 반발은 없었다. 있었다면 그 자리에서 죽였을 것이다. 그 결과, 기사단 전력이 강해져 단 한 번의 패배도 없이 모든 전쟁에 승리할 수 있었다.
내가 그들에게 알려준 검술은 단순했다. 움직임이 최소한으로 마치 멈춰 있는 것처럼 움직이는 것이다. 시간을 끌 필요 없이 빈틈을 이용해 일격에 죽이는 것이다. 기존의 왕궁 검술처럼 화려하진 않았지만, 살상 능력은 그 어떤 검술보다 뛰어났다.
그러나 일격에 승패를 갈라놓아야 하는 검술도 완력이 부족하면, 저대로 구현할 수 없었다. 때문에 나는 아직 미흡한 부분이 많았다.
저 놈이 어째서 낯이 익는가 싶었다.
당시, 암부가 날 뛸 때 잠깐 눈에 띄었던 놈이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걸친 옷만 다르고 좀 더 어리다 뿐이지 놈이 틀림없다.
탐이 나는 인재였다. 이 놈 하나 때문에 주위에 있었던 수많은 기사들이 목을 내 놔야 했으니까. 잘 훈련된 놈들을 깔끔하게 처리 하는 모습이 타고난 암살자 인 것 같아서 꽤 감탄했던 것을 기억한다.
이런 놈은 사로잡는 것이 죽이는 것 보다 어려워서 당시에는 내손으로 없애버렸다. 일일이 죽인 놈들을 세가며 기억하진 않지만, 놈은 꽤 인상 깊었다.
묘하게 불타오르는 눈동자. 죽는 그 순간에도 그 눈동자는 빛을 잃지 않았다. 오히려 광활하게 불타 자신의 모든 걸 재로 만들어버렸다. 여태껏 봐 왔던 그 어떤 버러지보다 마음에 드는 눈이었다.
죽이는 게 아까울 만큼.
그래서 권했었다. 내 밑으로 들어오면 살려주겠노라고.
그랬더니 놈이 뭐라 대답했더라.
내 앞을 가로 막은 손 뒤로 물러나 그를 바라보았다. 짐승의 냄새가 난다. 어째서 란이 그때 짐승을 길들이는 것을 지껄였는지 알 것 같다.
나에게 정체를 묻는 놈에게 뒤늦게 대답했다.
“크라운. 네 놈들의 왕이다.”
놈의 이름은 닉스였다.
눈앞에 서 있는 닉스를 지나쳐 낡은 의자위에 앉았다. 다리를 꼬고 앉아 놈을 바라보는 데, 시끄러운 참새 같은 문호가 내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저 싸움을 멈춰!!! 저러다 정말 죽겠어!”
다급하게 손가락으로 문을 가리키며 말하는 문호가 소리 질렀다. 그의 반응은 이제 예상과 전혀 다르지 않아 이제는 지루할 정도다. 내가 반응이 없자 문호는 더욱 내 앞으로 나와 신나게 날뛰고 있는 두 놈을 바라보며 안절부절못하는데, 더는 듣기 싫어 입을 열었다.
“피를 묻힌 검은 부식되기 쉬워.”
“당장 말리라니까 무슨 소릴 지껄이는 거야?!”
“그딴 돌 머리로 잘도 문호의 칭호를 달았군.”
“그게 지금 말이라고 해!! 당장 멈추라고!!”
무식한 놈의 사고에 내가 혀를 찼고, 동시에 내 옆으로 장렬히 모르페가 벽에 부딪쳤다. 그 충격이 얼마나 큰지 그가 부딪친 벽은 균열이 일어나 바스라지고 있었다. 모르페는 그대로 자빠져 어떠한 움직임도 없었다.
문호는 그런 모르페의 모습에 놀라 달려가 그의 명줄을 확인하는 듯 맥을 짚고 있었다. 숨이 붙어 있는지, 문호의 안도의 한숨소리가 들린다. 그는 차라리 이대로 기절하는 것으로 끝난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모르페를 날려버린 장본인인 문은 아직도 몸이 풀어지지 않는 모양인지 팔을 휘두르더니 내 앞으로 걸어왔다. 그리고 자신을 노려보는 닉스와 마주치는 데, 문의 눈이 다시 한 번 광기로 번들거리기 시작한다.
그가 다시 한 번 채워지지 못한 광기에 먹히기 전에 입을 열었다.
“문.”
“쳇.”
내 부름에 문은 짧게 혀를 차더니, 닉스의 옆을 지나치며 내 옆으로 섰다. 나를 내려다보던 문은 멋대로 손을 내 머리통에 둘러 정수리에 고개를 박았고 그런 그가 귀찮았지만, 하는 짓이 칭찬해 주라는 재촉 같아서 손을 들어 그의 옆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이번만은 충분히 이놈 입장에선 칭찬받을 만 했으니까.
매일 체벌만 줘서는 교육이 안 되기에 적절한 당근을 주고 있는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닉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래, 아까 뭘 궁금해 했었지?
“착각이다.”
“뭐?”
“왕궁 검술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걸 믿으란 건가.”
“나는 네놈들에게 절대적일 존재. 감히 불신할 상대가 아니다.”
내 말을 들은 문이 옆에서 웃기 시작한다. 그 웃음소리가 이 공간을 채워 넣자 일순간 소름이 끼치도록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잠자코 멈춰 있던 문의 손이 나의 볼을 쓰다듬기 시작했고 그의 눈동자는 온전히 나를 향해 황홀하다는 듯 바라본다.
그 끈적이는 시선을 무시한 채 귀찮게 만져대는 문의 얼굴을 쳐내고 긴 침묵하며 긴 생각을 하려는 닉스를 바라보았다. 나는 닉스의 한계의 끝을 본 적이 있기에 아슬아슬하게 몰아넣을 수 있었다.
놈은 본능적으로 왕을 모시길 원한다. 목줄이 채워진 문과는 또 다르게 사슬을 원하는 것이다. 본능적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문과는 다른 의미의 짐승이었다.
과거, 내 손에 죽기 전 감히 암부를 배신하고 내 사람으로 들어왔다면 나는 아마 그 자리에서 더욱 끔찍하게 그를 베었을 것이다.
애초부터 그를 살려둘 마음 따윈 없었지만, 한 순간이라도 내 사람이 되기를 탐나하던 그 때를 기억한다.
닉스는 내 제안을 꽤나 매몰차게 거절했다.
목줄은 없이 암부 내에서 나돌아 다니며 주인을 찾고 있던 그가 내 제안에 잠시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였지만, 그는 자신을 억누르는 데에 익숙한 놈이었다.
본능을 짓누르는 그 눈빛이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본능에 충실하려는 일순간 비췄던 갈망의 눈동자도 마음에 들었다.
"마지막으로 묻겠다. 목줄을 원하나."
그리고 지금. 그의 눈동자가 갈망으로 일렁였다.
**
“하하하!”
경쾌하게 무릎을 치며 란은 성 안이라는 것을 잊은 듯 호쾌하게도 웃었다. 백치로 알려진 그를 아는 사람들이 이 모습을 보았다면 드디어 손을 쓸 수 없이 돌아버렸다며 기겁할 만한 것이었다.
“웃겨? 이게 웃기다고?!”
란의 웃음을 듣던 문호는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채 흥분하고 보다 음성을 높였다. 근엄하고도 엄격하다고 알려진 문호가 침을 튀겨가며 흥분하는 데에게는 그 이유가 있었다.
“그래서 정말로 라마가 그 짐승들을 길들였다고?”
“지금 그게 문제야?!! 그 정신 나간 것들이 입 한 번 뻥긋 안하고 견딘다니까?!! 더구나 닉스는, 하! 그 꼬맹이 흑마술사가 틀림없어. 하루도 아니고 고작 몇 시간 만에 개 패듯 길들인다는 게 말이 돼?”
“그들이 라마를 받아들인 건 단순히 그것 때문은 아닐 거다. 너도 알고 있을 텐데.”
란은 라마가 짐승을 길들이는 모습을 이렇게 구두로 밖에 들을 수 없다는 게 너무도 아쉬웠다. 그러나 문호는 거칠게 머리카락을 긁으며 짜증이 솟구치는지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서 믿을 수 없다는 거야. 고작해야 12살 정도의 꼬맹이한테…….”
문호는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보던 란이 직접 입을 열어 주었다.
“붉은 기운을 느꼈겠지. 실제로 그 어느 왕자들보다 그릇이 큰 아이다. 태생이 고귀했다면 왕위에 올라야 할 재목이지. 암부에 그냥 두기 아까울 정도군.”
“아서라. 고작해야 12살이라고.”
“문호. 자네 겁에 질린 건가?”
문호는 결국 폭발하여 꽥! 하고 소리를 지르며 밖으로 나가버렸다. 란은 그런 문호를 바라보며 웃다가 천천히 얼굴이 굳어졌다. 라마의 존재는 자신에게 독이 될 수도 약이 될 수도 있다.
그의 야망은 얼마의 피를 원할 것인가. 그리고 그 피의 대가로 피어날 혁명의 꽃은 어떻게 피어날 것인가.
자신을 바라보던 선명한 눈동자를 기억한다. 흑과 백이 뚜렷한 그것은 온전히 야망만을 위해 타오르고 있었다.
라마에게 원망과 분노라는 감정은 없었다. 그러나 위태로울 정도로 지독한 살기는 존재했다.
“아직은……. 이른 거겠지.”
옆에 두기에는 아직 때가 이르다. 란은 그것이 아쉬웠다. 한시라도 빨리 온전히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어야 안심이 될 거 같았다.
하지만 당장 자신의 옆에 온전히 두기에는 궁은 위험요소가 많았다. 이곳에 데리고 온다면 작은 라마가 걱정되어 견딜 수 없을 것이다. 더욱이 자신처럼 라마에게 탐을 내는 자가 생길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놈은 반드시 빼앗으려 들겠지.
당장은 감히 그 누구도 탐할 수 없는 자신의 요람 속에서 키울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라마 또한 간절히 자신을 원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다 자란 녀석이 온전히 자신을 따른다. 그리 생각한 란은 기분이 좋은 듯 미소 지었다.
**
문호는 씩씩거리며 걸음을 옮기다 이내 천천히 그 속도를 줄여나갔다. 불이 날 만큼 성을 내고 뛰쳐나왔지만, 그가 이토록 흥분한 것도 모두 란의 말을 부정할 수 없는 자신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아픈 부위인데, 사정없이 들쑤시는 자신의 왕 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워진 그는 그날의 일을 회상했다.
그날. 라마는 닉스에게 그 목줄의 유무를 물었다. 스스로 채운 목줄은 절대 끊어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당연히 그것을 거절할 줄 알았다.
하지만, 닉스는 그 무릎을 꿇었다.
“원합니다.”
기가차서 말이 나오질 않았다. 고립된 성격의 닉스 스스로 던져진 목줄에 목을 넣은 것이다. 더 믿을 수 없는 건 꼬맹이의 그 뒤 행동이었다. 그는 끈질기게 자신을 만져대는 미친개를 쳐내고 일어나 자신이 던져 벽에 박힌 검을 뽑아 무릎을 꿇은 닉스의 앞으로 천천히 걸음 했다.
그리고 한순간에 그 머리채를 잡아 꽤 긴 그의 머리를 단검으로 잘라낸 뒤 스스로 자신의 손목을 그어 닉스의 앞에 내밀었다.
“이것으로 너는 죽고 나로서 태어난다.”
선명한 붉은 피를 흘리는 라마의 팔목을 바라보던 닉스는 그 입술을 댔다. 그 모습에 머리카락이 쭈뼛거리면서 등줄기에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고작해야 12살. 하지만 그 작은 등 뒤에서는 그 끝을 알 수 없는 거대한 무언가가 자신을 짓누르며 노려보는 것 같았다.
**
불만이 가득 찬 표정의 두 애송이들을 바라본 나는 따로 번복할 생각이 없으므로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내 앞을 가로 막는 마스가 호소하듯 입을 열었다.
“그런 훈련.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데?!”
학습이 쉽지 않는 마스를 묵묵히 바라보고 있자 그런 내 모습에 위협이라도 느낀 것인지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두 손을 크게 벌려 작게 흔든다. 의미를 알 수 없는 행동이지만, 딱히 지적할 사항은 아니었다.
“나한테 그런 장난감 같은 칼을 쓰라니?! 그것도 5년을?! 말이 된다고 생각해?! 그건 훈련이 아니라 고문이라고!! 꼬맹이 네가 어려서 뭘 모르는 모양……. 크윽!!!”
입을 함부로 놀리는 놈이 거슬려 그대로 검대로 턱을 들어 올리듯 쳐 냈다. 고통과 나약함에 서툰 놈에게 그 절망을 교육시키기 위해 아파하는 턱을 잡고 몸을 숙이는 곰의 정수리를 내리쳤다.
큰 소리를 내며 쓰러지는 놈의 머리를 질근질근 밟자 아직 정신 줄을 잘 잡고 있는 그가 발버둥을 쳤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난 그대로 단검을 들어 그의 눈 바로 옆 바닥에 박아 주었다. 그의 요동치려던 몸이 일순간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어갔다.
“평생 기생충처럼 바닥을 기고 싶지 않으면 내 말, 잘 들어라. 너는 지금 그 무식한 힘의 단점을 전혀 보완하지 못하고 있어. 필요 이상으로 둔한 네놈은 곧 죽겠지.”
단검 술은 고도의 순발력과 민첩성이 필요한 것으로 힘을 우선으로 두고 있는 대검과는 근육을 사용하는 것부터 다르다. 여태껏 대검을 익혀온 그에게 단검을 던져준 것은 그가 단검의 장점과 대검의 장점을 모두 흡수하여 둘 모두가 가진 약점을 최소화시키길 원해서였다.
앞으로 상대한 놈들은 무궁무진 할 것이다. 걔 중에는 눈으로 쫓을 수 없는 놈들도 만날 것이며 한 순간의 허점을 노려 그 목줄을 따 버리는 놈들도 있을 것이다. 그 때, 그런 놈을 상대로 머저리 같은 곰이 살아남을 수 있는 가능성은 그다지 높지가 않다.
놈은 방대한 힘만을 믿고 있었다. 힘이 남아도는 탓에 대검을 휘두르는 속도는 빠른 편이지만, 쓸데없는 움직임이 많다는 것이 문제다.
더욱이 힘이 자랑이라고 하지만, 힘과 민첩성은 문이 우세했다. 문은 몸을 사용하는 것에 능숙한 놈이기 때문에 마스를 상대했다면, 그의 움직임을 익혀 어린아이를 제압하듯 가지고 놀았을 것이다.
먼저 손을 쓴 이유는 대검을 좋아하는 것과 힘이 남아도는 것이 비슷한 두 놈을 붙여 놨다간, 문이 자제를 못하고 가지고 놀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마스는 요란하게 휘두르는 대검이 일순간 드러낼 허점에 대한 방어를 전혀 하지 못한 상태다. 그것은 곧 실전에선 죽음을 뜻한다.
사냥에 성공한다면, 사기를 높여줄 제일 좋은 먹잇감이 되겠지.
“크라운. 그는 이미 기절했습니다.”
“…….”
그의 말에 다시 한 번 바라보니, 마스는 눈을 뜬 채로 얼어 움직이지 않았다. 머저리에 겁마저 많다니, 앞날이 깜깜하다 못해 제대로 있는지도 보이지 않는다. 괜히 기가 빨리는 느낌에 그대로 단검을 쥐고 일어나 마스의 등에서 내려왔다.
“하지만, 저 역시. 당신의 결정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습관처럼 안경을 들어 올리는 모르페가 불만을 토로했다. 귀찮으니 한꺼번에 혀라도 잘라버릴까 생각했지만, 그러면 괴성을 질러서라도 항의 할 것 같아 포기하고 바라보았다.
“마스의 약점이 민첩성이라면 저의 약점은 그 힘입니다. 헌데, 어째서 제게 그 어떤 검술도 배우지 마라는 겁니까.”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제가 재능이 없다는 말씀입니까.”
“스스로 몸을 지킬 정도는 알아서 훈련해라. 보다 네놈이 끌어올려야 될 건”
난 모르페의 앞으로 다가가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몸을 좀 숙여보라고 손가락을 까딱 거리자 모르페는 그 몸을 숙였다. 눈높이가 비슷해지자 난 그의 머리카락을 잡아 그 옆을 손가락으로 짚어 주었다.
“지략이다. 각자 임무는 정해졌다. 그러니 헛수고 하지 말고 저들의 신뢰부터 얻어."
할 말은 모두 마친 나는 이 이상 또 물어보면 그대로 발로 까 버리려고 모르페의 머리를 잡았던 손을 놓고 뒤 돌아 걸어 나갔다.
밖으로 나가자 어울리지도 않는 힘껏 나온 입술과 늘어진 어깨의 문이 그곳에 서 있었다.
이유가 뻔한 그 모습을 무시하고 지나치는 나의 뒤를 묵묵히 뒤 따르는 문. 방에서 멀어져 어느 정도 걸었을까. 잠자코 따라오던 놈이 갑자기 객기를 부리듯 내 팔목을 거칠게 휘어잡았다.
이전에 닉스를 굴복시키고자 사용했던 팔엔 그 상처가 아직 남아 있었고 붕대를 감았어도 아물기에는 이른 상처에선 어느새 피가 고이기 시작한다.
그 미세한 통증에 나를 잡아 세우는 문을 바라보자 그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내 왕은 욕심도 많지. 나를 두고 다른 개를 만들고 말이야.”
눈에 띄게 화가 난 듯한 놈이 피가 고여 붕대를 뚫고나와 흘러내리는 내 팔을 바라보았다. 그리곤 거칠게 들어 올려 고개를 숙여 그곳에 입을 대고 노골적으로 핥자 난 힘을 주어 그것을 빼내려고 했다. 하지만 완력으로는 아무리 나라도 문을 감당할 수 없다.
어쩔 수 없는 완력대신 기술을 써 조져놓을까 하는 도중 검은 손이 불쑥 튀어나와 문의 팔목을 잡았다. 문을 잡은 손은 어찌나 강하게 힘을 주고 있는지 내 팔목을 붙잡고 있는 문이 잔 떨림을 보일 정도였다.
“그 손, 놓아라.”
닉스였다. 그나마 다행인건, 닉스가 짐승을 알아보았다는 것이다. 문의 손이 아닌, 내 손목을 잡았다면 문은 그대로 닉스에게 검을 휘둘렀을 것이다.
문은 자신을 붙잡고 있는 닉스에게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눈이 번들거리며 혀를 날름거리기 시작했다.
놈의 이런 행동은 습관적인 것으로 상대를 사냥할 때 주로 보이는 모습이다. 그 미묘한 변화를 일찍 알아챈 나는 눈앞에서 더러운 피가 흩어지는 게 보기 싫어 자유로운 손을 뻗어 문의 귓불을 잡아당겼다.
여기서 흥분시키면, 자제시키는 것도 일이다.
“아야야야얏!!”
엄살을 피우는 문을 무시하고 더욱 강하게 잡아당기며 아직도 문의 팔을 부러질 듯 잡고 있는 닉스를 바라보았다.
“멍청이는 이 녀석 하나로도 족하다.”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닉스는 그대로 문을 잡은 손을 놓았고 난 그대로 골칫덩어리의 귀를 잡은 채 복도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비로소 보이는 공터 같은 풀밭위에서 문을 풀어주었다.
귀를 붙잡으며 몸을 웅크리고 앉은 문이 다시 한 번 내 팔목을 잡아 세웠다. 이번에는 아까처럼 무식하게 힘을 주진 않았지만, 그의 손에도 어느새 내 피가 묻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죄책감이라도 느끼는 것인지 어미 찾는 강아지마냥 나를 보았다.
“나로서는 부족해?”
“쯧.”
내가 혀를 차자 문은 그런 내 눈치를 보는 듯 눈으로 올려다보는 게 정말로 버려지기 직전 개새끼 같은 표정이었다.
그 표정을 두고 지적하기에는 내 정신이 남아나질 않을 것 같아 복잡한 것은 모두 짓밟고 문의 머리카락을 잡아 턱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눈을 가린 검은 천을 벗겨 던진 뒤 그 붉은 눈동자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확인했다.
그리고 시선을 내려 적나라하게 보이는 붉은 자상. 흰 목둘레를 깨끗하게 덮고 있으면서도 처량하게 나를 바라보는 것 같은 눈이 거슬렸다.
금방이라도 핏물을 흘릴 것 같은 그 붉은 눈동자가 일순간 흔들리는 것이 느껴진다.
“달아준 목줄은 네 목이 떨어지지 않는 이상 사라지지 않아. 헌데, 뭐가 불안한 거지.”
적색 보석 같은 눈을 감아 감춘 문은 턱을 짚고 있는 내 손가락에 입을 맞췄다.
“사그라질 것 같은 왕의 모든 것.”
그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려왔다. 쓸데없이 감이 좋은 문을 당장이라고 쳐내고 싶지만, 어쩐지 그 모습에 눈을 뗄 수 없었다.
지저분하게 피가 물든 손을 빼내려 했다. 하지만 문은 내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작은 나의 왕. 당신은 단숨에 불타올라 순식간에 재가 돼 버릴 것 같아.”
“헛소릴 지껄일 정도로 돌아버렸군.”
문이 웃었다. 익숙한 웃음소리라고 생각했는데, 광기어린 웃음과는 달랐다. 대체 어디가 다른 건진 모르겠지만, 어린아이의 얼굴로 웃는 모습은 또래보다 어려보일 정도로 천진난만했다.
곱상한 얼굴에서 위험한 기운이 사라지자 순식간에 뒤집어진 모습에 당황스러울 정도다.
그러나 웃음으로 모든 불안을 숨기진 못했다.
난 아직도 미소 짓고 있는 문을 바라보다 손을 빼내어 그 이마를 손등으로 박아주었다. 크게 힘이 들어가지 않아 고통은 덜하겠지만, 그 웃음이 멈출 정도론 충분했다. 묘하게 감이 좋은 문의 눈동자를 다시 한 번 바라보았다.
나를 바라보는 문의 눈빛이 두고 온 가나와 겹쳐졌다. 어디 한 곳 닮은 곳 없는 둘임에도 눈빛만은 비슷했다.
단순히 내 곁에서 떨어지기 싫어 그런 얼굴을 했다고 생각했었다.
영원히 만날 수 없다는 것만을 불안해한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가나 또한 나의 불안전함을 눈치 채고 있었던 것일까.
다시는 만나서는 안 되는 가나를 생각하면서 비슷한 눈을 하고 있는 문을 바라보았다. 영리한 놈이다. 본능적으로 내 약점을 파고들어 그것을 이용하고 있다.
그걸 알면서도 걸려든 나도 문제가 있지만, 적어도 가나와 다르게 문은 죽지 않는다.
그것만으로도 나에겐 큰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알려주기에는 질이 나빠질 게 분명해 철저히 숨긴 뒤 그의 얼굴에 과감히 주먹을 박아주었다.
“끄아아아…….”
외마디 비명과 함께 커다란 덩치를 둥글게 말아 얼굴을 감쌌고 이번 것은 제대로 들어간 것인지 좀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코웃음 치며 그런 문을 바라보다 뒤로 반걸음 물러나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피가 흐르는 곳을 감았다.
“걱정마라. 내가 죽을 날이 되면 너부터 없애 줄 테니까.”
우뚝.
생각지도 않는 부분에서 문의 비명이 멈췄고 아까까지만 해도 요란하게 요동치던 몸에 힘이 빠진 채 그 고개가 들어 올려졌다. 역시나 반복학습에 의미가 없는 놈이 내 팔을 잡아끌어 그대로 품에 안았다. 막무가내로 놈의 품안에 들어온 나는 그 정강이라도 차 버리려 발을 움직이려 했다.
그 순간 문은 그대로 내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곤 꿀에 탄 술을 마신 듯 중얼거렸다.
“황홀해…….”
더는 망설이지 않고 그의 정강이를 쳤고 그는 날벼락을 맞은 꽁치처럼 튀어 올랐다. 난 그런 놈을 지나쳤다. 내 뒤를 급하게 따라오는 문이 보였지만, 기다려줄 생각은 없었다.
카인관 뒤로 나가 풀이 무성한 공터를 지나면 평범한 인가가 나오는 데, 그곳은 번화가와 연결이 돼 있어 꽤 복잡한 곳이었다.
카인관에서 나올 생각이 없었던 나는 다시 정문으로 들어가려고 했지만, 나답지 않게 급히 걸음을 옮기다 그만 사람과 부딪치고 말았다.
“아, 이런. 괜찮은 거니?”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숨이 멎을 것 같았다. 난 그대로 누구의 침이 묻어 있을지 모를 더러운 바닥에 주저앉은 채 일어날 수가 없었다. 숙인 고개조차 들지 못하고 바라본 땅바닥은 흔들림이 없음에도 시야가 흐릿해지는 충격을 받았다.
내 귓가에 흘러들어오는 익숙하다 못해 간절히 듣고 싶어 했던 목소리.
다시는 그 인연을 허락하지 않겠다고 맹세한 한스덴 웨이였다.
=
그는 나에게 무엇을 발견한 것인지 놀라 몸을 숙이고 내게 손을 뻗었다.
“이런, 다친 모양이구나. 손목에서 피가……!”
한스덴의 손이 내 팔목으로 뻗자 난 반사적으로 그 손을 쳐냈다. 절대 닿아서는 안 될 인연.
끊어질 줄 알았던 실이 아슬아슬하게 이어져 난 그것을 과감하게 잘라냈다.
그것이 간절하면 간절할수록 바라면 바랄수록 더욱 선명하게 끊어버리기 위해 날을 세웠다.
그럼에도 그는 나를 놓지 않았다.
“헤치려는 게 아니란다. 아무도 널 몰아세우지 않아. 그래, 우리 집에 가면 너와 같은 또래의 아들이 있단다. 일단 그곳에 가서…….”
다행이다. 확실하게 보살펴주고 있었다.
그의 품안에서 안전하게 자라고 있을 가나를 생각하며 다시금 내게 다가오려는 그에게 물러났다. 근처에 가나는 없는 것 같지만, 난 더 이상 이들의 앞에 나타서는 안 된다.
그를 바라볼 때 마다 눈앞에서 잘려나간 머리가 바닥을 뒹구는 듯 했다. 눈앞이 아찔해지는 것을 느끼고 나를 붙잡으려 하는 한스덴의 손을 거칠게 쳐냈다.
입술이 깨물려 피 비린내가 입안에서 퍼지고 있었다. 이제 나는 영원히 끊어버릴 인연을 위해 단 한마디만 하면 된다.
단 한 마디.
하지만 어째서 내 입은 떨어지지 않는 것일까.
“치료가 우선이란다. 나와 함께 가자꾸나.”
그가 손을 뻗는다. 그 어떤 것 보다 달콤하고 현기증이 날 만큼 매혹적인 유혹이었다. 결국 단 한마디도 뻥긋할 수 없던 나는 억지로 돌아섰다.
그를 마주할수록 나 자신을 짓누르는 것에 한계를 느끼기에 그대로 그를 무시하고 앞으로 걸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 때, 나의 손을 두려움 없이 나를 잡아주는 부드러운 손길이 느껴졌다. 희고 고운 손을 따라 고개를 들자 나를 안심시키려는 듯 옅게 미소 짓고 있는 여인이 보였다.
난 그녀를 보는 순간 온 몸이 얼어버린 듯 움직일 수 없었다. 그 연약한 손을 거부하지 못했다. 어느새 손수건으로 내 얼굴을 닦아주며 뺨을 쓸어주고 있었다.
말없는 다정함이 내게는 필요치 않는 인간적인 감정을 억지로 끄집어내고 있었다.
잔인할 만큼 나 자신이 수치스러웠다.
들개로 태어나 늑대로 길들어져 사람이길 포기한 나에게 어머니가 무엇인지 알려주었던 그 작은 여인.
그 작았던 손에 잡힌 나는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손이 떨리기 시작한다. 그것이 두려움인지 그리움인지 나는 알 수가 없었다. 그 때 내가 생각할 수 있었던 건. 지금 당장 이 손을 뿌리쳐야 한다는 것뿐이었으니까.
나를 잡고 있는 그녀는 부드럽고도 강한 힘으로 끌어당겼다. 굳은 다짐에도 소용없이 떨어지는 발걸음은 과거의 어리석었던 내가 가장 행복하고도 그리웠던 그날을 갈망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보다 거친 손에 강하게 이끌려 딱딱한 품 안에 가둬진 것은.
그 억센 행동에 그녀는 나를 붙들고 있던 손을 놓쳐버렸고, 난 그들을 바라보지도 못한 채 품에 가둬졌다. 이윽고 녹슨 듯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내꺼야.”
장난스럽지만 위협적인 목소리. 나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끌어안고 있는 문은 그대로 나를 들고 일어나 더는 그들을 바라볼 수 없도록 안고 있던 내 머리에 힘을 주고 있었다. 고개조차 돌릴 수 없도록.
“베라, 이쪽으로! 거기 자네. 지금 그 소년은 부상을 당했네. 빨리 치료를 해야..!”
“더 지껄이면 그 혀. 잘라버린다?”
“그게 무슨?!”
대답할 맘이 없는 것인지 문은 그대로 돌아 빠르게 달려갔다. 뒤따라오는 한스덴이 보였지만, 난 그를 보고 싶지 않아 눈을 감고 그대로 문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그에 한스덴 웨이의 발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어느 정도 달리던 문이 걸음을 멈췄다. 묵묵히 그 손에 붙들려 있던 난 더는 붙어있고 싶지 않아 그에게 벗어나려고 몸을 움직였다. 하지만 그 걸음을 멈췄음에도 방향을 고쳐 안으면서까지 놓지 않는 놈이 이제는 거슬렸다.
놓으라고 해도 말을 듣지 않자 머리라도 쳐내려고 했는데, 그 순간 멋대로 바닥에 주저앉은 문은 그렇게 나를 뒤에서 안아 내 얼굴을 끌어당긴 뒤 손바닥으로 나의 눈을 가렸다.
처음엔 뭔가 싶어 그 손을 내리기 위해 잡았지만, 좀처럼 문의 손은 내 눈을 가린 채 떨어져 나가질 않았다. 어느새 내 어깨에 얼굴을 묻은 문은 작게 속삭이듯 입을 열었다.
“내가 대신 할 수 있는 건 미치는 것뿐이야. 우는 걸 가르쳐줘. 그것도 대신 해 줄게.”
빌어먹을…….
나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어 버렸다. 참으려 해도 도저히 억누를 수 없었던 내 안에 남은 인간적인 잔해가 일순간 터져 나오는 설움과 함께 쏟아지기 시작했다.
**
한스덴 웨이는 등을 돌리며 달려가 어느새 사라진 두 소년들에게 눈을 뗄 수 없었다. 그의 아내 베라 역시 같은 심정인 것인지 한스덴의 품속에서 같은 곳에 묶여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 그 둘의 앞으로 멀지 않은 곳에서 대기를 하고 있던 시종이 걸어왔다.
“자네 눈엔 그 소년이 어찌 보였나.”
시종은 방금 전 일을 회상하고 거리를 나도는 아이치고는 낡았지만 단정했던 옷차림을 기억했다. 그리고 고개를 숙이고 한스덴의 물음에 답했다.
“보살핌을 받는 아이인 것 같았습니다.”
“그래?”
“네. 마차가 수리되었습니다. 이만 돌아가시지요.”
“…….”
“주인님. 아가씨와 도련님께서 기다리십니다.”
“그래, 돌아가도록 하지.”
시종이 이끄는 곳으로 따라가면서 한스덴과 그의 아내 베라는 저도 모르게 소년이 사라진 그곳을 향해 다시 한 번 고개를 돌렸다.
차가운 빗줄기를 그대로 맞고 있는 듯한 그 외로운 눈동자가 잊히지 않았다. 그래서 미련이 남았다.
소년의 눈은 버림받아 더는 서 있을 수 없는 듯 나약해 보였다. 마치 데려가 달라고 소리치는 것처럼 애절해 보이기까지 했다.
양아들의 출생신고에 너무 감성적이 돼 버린 탓일까.
애써 소년에 대한 기억을 무르고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아들과 딸에게 가기 위해 온전히 그 몸을 돌렸다. 하지만 베라는 그런 한스덴의 이끌림에도 마지막까지 그곳을 바라보다 천천히 그와 맞춰 고개를 바로 했다. 그녀 역시 밤을 닮은 고요한 소년을 잊을 수 없었다.
**
란은 폭이 큰 걸음을 급히 옮기며 훈련장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들린 암부지만, 그는 다른 사람들을 이야기 할 틈도 주지 않고 이내 도착한 목적지의 문을 거칠게 열었다. 지독한 피 냄새가 먼저 그를 맞이했다. 20명도 넘어 보이는 건장한 놈들이 하나같이 피칠갑이 되어 뻗어 있는 데, 그 시체더미 같은 위를 까마귀 같은 소년이 고고히 서 있었다.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뒤늦게 쫓아온 문호도 그 시끄러운 입이 닫아버렸다.
그를 더 질려버리게 만든 건 라마는 단 한 방울의 피도 묻히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의 옆에는 이미 시체가 된 자의 얼굴을 짓밟고 걸어오는 문이 서 있었고 눈에 띄진 않지만, 클라운 들이 그를 보호막처럼 감싸듯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런 그들을 인식한 란이 입을 열었다.
“보고와는 좀 다르군.”
“다를 거 없어. 저 꼬맹이 혼자 처리한건 맞으니까.”
“모두 일대기사단 정도의 전력일 텐데.”
“그러니까 괴물이라고 했잖아.”
문호는 더 이상은 보기 힘들다는 듯 눈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참혹했다. 정말로 라마 스스로 한 짓이라고 보기엔 두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크라운이 되지못한 자들이 모여 시비를 걸었다고 했다. 모두 이미 암부로서 완성이 된 놈들이라 그들과 부딪치면 아무리 라마라도 큰 부상은 피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때문에 모든 일을 제쳐놓고 달려왔는데, 걱정해야 될 건 오히려 그 반대였다니.
앞으로 천천히 걸어오는 라마를 바라보던 그는 그의 옆을 지나치는 라마의 어깨를 잡아 세웠다.
“거칠군. 너답지 않는 행동이다.”
서늘했다. 마치 파충류의 눈동자를 보는 것처럼 아무런 감정이 없는 눈동자에 란은 순간 숨이 멎어버릴 것 같았다. 자신의 손에서 빠져나가는 라마. 그 뒤를 따르는 문은 히죽거리며 그를 따라갔다.
그 모습에 최초로 자신의 판단이 틀렸다는 것을 란은 인정하고 말았다.
따로 라마를 부른 란은 기척 없이 들어와 의자에 앉은 그에게 입을 열었다.
“전원을 죽일 필요까진 있었나.”
“쓰레기를 찾는 거면 휴지통이라도 뒤지지 그래.”
“이봐. 라마.”
“네가 들은 보고와 다른 건 없다. 내게 뭘 기대한 거지.”
“그럼 물음을 바꾸지.”
“…….”
“무엇이 널 그렇게 만들었지?”
자신이 없는 동안 무엇이 라마를 이렇게 만들어 버린 것인가. 그 찰나의 시간동안 변질된 라마의 모습에 깍지를 낀 손으로 입을 가리며 묻는 란은 자신을 향한 텅 빈 눈동자에 주목했다.
그 안에는 인간이라고 부를 무엇도 존재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