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인
라마는 침묵했다. 처음부터 입을 열 생각 따윈 없었다는 듯 그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앉아 움직이지 않았다. 라마의 고의적인 침묵에 란은 눈을 감은 채 두 개의 엄지로 미간을 짓눌렀다.
라마의 입을 통해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인지했기 때문이다.
“라마. 네가 무슨 생각으로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너는 아직 어리다.”
“난 네놈보다 나이가 많아.”
“하……. 아직도 그 소린가.”
잠자코 앉아 있던 라마가 일어나 성큼성큼 란을 향해 다가왔다. 미간을 짚고 있던 란의 손이 내려갔고 어느새 눈앞까지 온 라마를 바라본 란은 거칠게 자신의 멱살을 잡는 손을 막지 않았다.
“애송이, 끌려거든 도살장에서나 해.”
작게 으르렁 거리는 목소리.
돌려 말하는 것 따위는 좋아하지 않는다는 듯 거칠게 말하는 라마의 눈동자는 섬뜩하게 번뜩이는 맹수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강렬한 그 모습에 눈을 떼지 않던 란은 작게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본래 다른 놈들에게 맡긴 것이지만, 죽어버렸으니 네가 움직여줘야겠다.”
“대상은”
“가일프라인 공작.”
가일프라인 공작.
기억에 없는 놈이다. 아마 내가 용병단의 개로 길들여질 동안 암부가 없애버린 귀족 중 한 명일 터. 그렇다면 이들은 왜 그들을 하나하나 처단하고 있었던 것일까. 내가 이곳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난 과거 내가 알고 있던 암부의 존재와 많은 부분에서 오류를 보인다는 것을 알았다.
그 첫 번째가 의뢰라고 생각했던 암부의 암살이 처음부터 그들의 독단적인 살인이라는 사실이다. 처음부터 의뢰자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당연하다.
나조차도 꼬리조차 잡을 수 없었던 암부를 무슨 재주로 찾아가 의뢰까지 한다는 말인가. 설사 한다하더라도 암부가 먼저 접근하지 않는 이상 불가능하다.
두 번째는 암부는 이미 한참 전부터 귀족들을 상대로 물갈이를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다만 그 존재가 암부라는 사실이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밝혀졌을 뿐. 철저하게 오물을 제거하고 있었던 그들은 부지런 하게도 움직이고 있었다.
“공작의 목을 베고 그 지하실을 불태워라. 어렵진 않을 거다.”
나를 바라보고 있는 란의 모습이 수상쩍었지만, 난 대답을 대신해 잡은 멱살을 놓아주고 뒤 돌아 밖으로 나갔다. 자세한 정보는 모르페가 알아서 전달할 터. 시끄러운 놈들은 필요 없다. 클라운 구성원만으로도 충분한 이번 임무에 무엇에 초점을 맞춰야 할지 파악한 나는 그대로 돌아 가장 안쪽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
라마가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문호가 그 문을 열고 들어왔다. 흐트러진 옷깃을 정리하고 있는 란을 노려보면서 문호가 참고 있던 입을 열었다.
“나도 그 꼬맹이 맘에 들진 않아.”
“너 답지 않은 모호한 말을 하는 군. 문호.”
“왕께선 임무로 그 꼬맹이, 죽일 생각이잖아.”
“그새 정이라도 든 건가?”
“그 꼬맹일 곁에 두겠다는 놈은 바로 너였어!!!”
큰 소리를 치는 문호. 옷깃을 모두 정리한 란은 고개를 들어 그런 문호를 바라보았다. 문호는 자신의 왕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라마의 변화도 당황스러웠지만, 보다 당황한건 그런 라마를 대하는 자신의 왕은 전혀 다른 사람이 돼버린다.
변화가 나쁘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이건 너무 성급한 것 아닌가.
“대체 무슨 생각인거야. 놈이 얼마나 악질인지 잘 알고 있잖아.”
“죽일 생각은 없다. 네 말대로 내 곁에 둘 아이니까.”
“그럼 대체 왜…….”
“누군가 말하더군. 짐승을 길들이는 데에는 그 각인이 필요하다고.”
누군가랄 것도 없다. 그런 말을 한 놈은 라마밖에 없었으니까. 문호는 잠시 어이없다는 듯 란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그 머릿속을 읽을 수가 없어 자신은 당장이라도 달고 있던 문호라는 칭호를 집어 던지고 이대로 증발하고 싶었다.
“고통으로 길들일 수 없다면, 나로서 각인으로 길들일 수밖에.”
“설마 몰이를 하겠다고?”
“상처하나 없이 길들이는 건 어려울 테니까.”
“그거 진심이야?”
란은 웃기만 할 뿐. 문호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답하지 않아도 문호는 이미 모든 걸 해석한 듯 지끈거리며 올라오는 편두통에 부디 빌어먹을 꼬맹이의 안녕을 기원하면서 한숨을 내뱉었다.
“가일프라인 공작. 40세의 나이로 공작의 칭호를 단 실리스 로던프의 검은 거미로 불리는 자입니다. 이런 말씀 드리기 죄송하지만, 그와 얽혀서 득 되는 일은 없습니다. 정확히 받은 의뢰가 무엇인지 듣고 싶습니다.”
모르페에게 가일프라인 공작에 대해 물었고, 사전에 준비된 것이 없음에도 막힘없이 답하던 모르페는 습관적으로 안경을 고쳐 쓰더니 내가 자리에 앉자 내게 다가왔다. 그리곤 내 앞에 차를 내려놓는데, 난 그것을 들어 한 모금 마신 뒤 답례로 입을 열었다.
“제거.”
모르페는 놀랐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고 동시에 불쾌감이 느껴지는 듯 얼굴을 찌그렸다.
난 그러거나 말거나 몇 모금의 차를 더 마셨고 귀찮게 물어보는 통에 슬슬 올라오려는 짜증을 짓눌렀다.
“가일프라인을 상대로 말입니까?”
“그렇다.”
“크라운. 그가 왜 검은 거미라 불리는 줄 아십니까. 어둠을 틈타 쥐도 새도 모르게 거미줄을 쳐놓고 그러다 걸린 먹이는 절대로 놓지 않고 바로 회수합니다. 특히 놈의 가디언들은 하나같이 암살에 특화된 자들로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닙니다.”
주절주절 시끄럽게 짖어대고 있는 모르페를 흘겨 바라보다 난 다시 차에 입을 댔다. 하지만 그새를 못 참고 미지근해져 입맛이 떨어져 그대로 차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뭐가 문제지?”
“앞에서 말씀 드렸잖습니까. 그는 검은…….”
“클라운에 문제가 있나.”
“…….”
잠시 침묵하던 모르페는 나의 앞으로 다가와 이미 식어버린 찻잔위에 뜨거운 차를 다시 부어주었다. 그는 능숙한 사냥꾼처럼 웃더니 그 눈을 예리하게 번뜩이고 있었다.
“없습니다.”
이제야 조용해진 공간이 마음에 들었다. 과거에는 전혀 그 맛을 알지 못했던 차는 꽤 그럴듯하게 입안을 헤집고 있었다.
그럼, 이제부터 어떤 식으로 우월감에 젖어 있는 놈을 짓밟아 줄까. 방법은 많지만 이건 꽤 신중해야 할 문제다. 정도에 따라 비명소리는 그 차이가 분명 할 테니.
“놈의 경로는”
“바로 모스에 들릴 예정입니다. 저택으로 돌아갈 때를 노리는 게…….”
별난 취미다. 보통 공작의 직위를 달고 함부로 나방소굴에 들어가진 않는데, 일꾼이 필요하다면 아랫놈들을 시켜도 충분할 것이다. 하지만 굳이 스스로 움직이려는 이유는 따로 있을 것이다.
놈은 나방을 고를 때 그 밑바닥부터 확인하려는 것이다. 나방의 용도가 그에게 얼마나 중요하고 구역질이 나는지는 설명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닉스.”
“예.”
모르페의 말을 자르고 닉스를 불렀다. 어둠을 틈타 숨어 있었던 그가 모습을 드러내자 내 옆에서 조용히 뻗어 자고 있던 문이 벌떡 일어나 나의 목을 휘감으려고 손을 뻗었다. 귀찮아 반사적으로 그 얼굴을 주먹으로 쳤지만, 적응해 버린 것인지 떨어지지 않고 붙어버린다.
그런 문에게 시선이 고정된 닉스를 바라보다 나를 보라고 탁자를 두들겼고 그는 다급히 눈동자를 돌려 나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숙였다.
“지하실 위치를 파악하고 그곳에서 대기하라.”
“알겠습니다.”
짧고 분명하게 대답하고 사라지는 닉스. 클라운 구성원 중 가장 일처리가 마음에 드는 놈이다. 조금 소심하다는 것이 큰 단점이지만, 그것을 덮어줄 장점이 많은 놈이므로 염려될 건 없다.
잠에서 덜 깬 것인지 눈을 감은 채 중얼거리듯 문이 입을 열었다.
“놀러가?”
문은 기대가 되는 듯 물었다. 그 얼굴이 싫었던 건 아니지만, 귀찮게 붙어있어 얼굴을 밀어냈다. 가진 인상을 쓰고 밀어냈음에도 문은 전혀 교육받지 못한 개처럼 더욱 엉겨 붙었다. 결국 손등으로 얼굴을 박고 나서야 떨어지는 문을 무시하고 모르페와 마스를 바라보았다.
“너희는 명이 떨어지지 않는 이상 항시 대기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