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러지의 눈동자가 갈 곳을 못 찾고 흔들리고 있었고 풍에 걸린 사람처럼 떨고 있었다. 아가리에 넣은 단검이 썩을 걸 염려하고 그대로 손목을 돌려 검을 세로로 세웠다.
경악을 하며 신음 소리를 내는 버러지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두 손을 모아 비비기 시작했고 뜻하는 바가 닿지 않아 난 그대로 놈의 목구멍 깊숙이 검을 밀어 넣으려했다.
단검을 쥔 손목에 매서운 속도로 사슬이 감겼다. 동시에 눈앞에서 질질 짜고 있던 갈치를 낚아채고 물러났다. 곧 가디언이 몰려와 나를 에워쌌다.
송사리마냥 징그럽게 무리 지어 나를 노려보는 데 썩 관대해질 수 없는 눈초리였다. 더구나 여기서 날 더 열 받게 하는 건 갈치주제에 천운을 타고났다는 거다. 내 생애 이런 식으로 방해받는 일은 손에 꼽혔는데, 오늘이 그런 드문 날이었다.
잘려나간 귀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를 가디언 중 한 명이 건네는 천으로 막고 물러선 갈치가 소리쳤다.
“죽이지 마라!!! 상처 없이 산채로 끌고 와!!!”
귀보다 저 혀를 먼저 도려냈어야 했다. 멀쩡한 내 귀까지 오물로 가득 차 버린 느낌이다.
사슬에 감긴 팔에 힘을 주었지만, 지금의 내게 있어 약점이기도 한 힘겨루기는 처음부터 무리라는 것을 알았다. 겨우 견디는 것도 슬슬 한계에 다다르자 다리에 힘이 풀려버렸고, 이내 조금 주저앉자 또 다른 가디언이 내게 달려들려 하자 팽팽하게 당기는 힘에 몸을 맡겼다.
거의 날아가다시피 끌려가 몸을 박기 직전 몸을 회전시켜 사슬을 당기고 있던 놈을 짓밟아 뒤로 넘어갔고, 처음 반대쪽에서 나에게 달려드는 놈은 방향을 잃은 채 서성이다 나를 발견하고 급히 뛰어오는 게 보였다.
사슬을 잡고 있던 놈도 반격을 하려 몸을 돌렸고, 같잖은 놈들이 나란히 공격하려는 데, 나도 주저 없이 길게 허공에서 흩날리고 있는 사슬을 잡아끌었다.
내 팔목을 휘감았던 사슬에 걸린 작은 칼날이 순식간에 눈앞의 가디언의 목을 꿰뚫었고 난 그대로 남은 사슬을 올가미 형으로 만들어 목이 박혀 쓰러지는 놈의 머리통을 짓밟아 달려오는 놈의 머리통에 감았다. 그리고 두 무릎으로 목을 잡은 뒤 그대로 땅바닥에 내리 꽂았다.
우득-
부러지는 소리가 나더니, 땅바닥에 꽂은 놈은 목이 돌아간 채 움직이지 않았다. 나 역시 무게를 실어 공격할 수밖에 없던 터라 약간의 충격으로 하체가 흔들리는 느낌을 받았지만, 그대로 일어나 뻗은 두 놈을 짓밟고 고개를 들었다.
단검을 쥐고 있는 손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상상보다 더 약해 빠져 실망스럽다.
“잡아야해……. 당장…….”
어디서 버러지 우는 소리가 들린다. 철철 흐르는 피를 제대로 막지도 못하면서 지껄이는 놈을 잠시 무시했다.
총 4명. 앞에서 모두 처리한 두 놈과는 그 차이가 명확한 놈들이다. 이제는 침 까지 흘리며 내게 삿대질을 하고 있는 버러지가 가디언을 재촉했고 개중 한 명이 선두로 천천히 내 앞으로 다가왔다.
반격할 생각을 하지 않고 잠시 서 있자 내 눈앞까지 다가왔다. 내 뒤에서 죽어있는 동료를 바라보던 가디언은 깊은 살기를 품고 주인의 명을 무시한 채 하늘 높이 검을 치켜들었다. 섬광처럼 번뜩이는 날이 내리치는 그 순간이었다.
바닥에 쓸리는 사슬소리와 함께 거대한 그림자. 나를 뒤덮는 그 검은 물체에서 순식간에 창백한 손이 튀어나와 내리찍는 검 날을 맨손으로 잡았고, 다른 한 손으론 가디언의 목을 쥐고 들어 올리더니 들고 있던 날을 빼앗아 그 정수리에 꽂아 넣고 내던졌다.
칼날이 뿜는 섬광보다 눈부신 은발이 눈앞에서 휘날렸다. 벽에 박힌 족쇄를 통째로 뜯고 나온 모양인지 팔목에 연결된 족쇄 끝에는 거대한 돌덩어리도 함께 붙어 있었다.
그는 한 마리의 은빛 짐승과 같이 서 무미건조한 얼굴로 경악하고 있는 공작과 더불어 가디언들에게 하나하나 시선을 보내더니 이내 무시하고 뚝뚝 피를 흘리는 자신의 손을 들어 바라보았다.
맨손으로 검을 막은 탓에 깊게 파인 상처에서는 쉴 새 없이 피가 흘렀고 고통조차 못 느끼는 것인지 떨림도 없이 뒤 돌아 이번엔 나를 바라본다.
장난스러운 미소 따윈 어디에도 없이 조금은 성이 난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놈이 내 앞으로 시뻘겋게 물든 손을 내밀었다.
나를 바라보는 선명한 붉은 눈동자가 불처럼 타올라 일렁이기 시작했다. 피가 넘치는 팔을 내 입가 근처까지 내밀었지만, 내가 아무런 반응이 없자 문은 이를 드러내며 위협하는 들짐승처럼 노려보더니 흐르는 방향을 따라 혀를 이용해 핥은 뒤 상처를 깊게 빨아들이는 것이 보였다.
그 행위를 멈추고 문은 다시 내게 피가 흐르는 손을 내밀었다. 놈이 뜻하는 바는 알고 있었지만, 난 이미 그 어떠한 과거와도 얽힐 수 없는 맹세를 하였기에 과감히 외면했다.
이미 놓아줬어야 할 목줄을 쥐고 있는 이상. 그가 스스로 목을 끊을 수 없다면 그에게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고 지나치려 했다.
문의 곁을 차갑게 지나가려는 그 때, 내 팔목을 잡아 돌린 손이 멋대로 턱을 집어 들었고 강제로 입을 덮는 살덩어리가 집요하게 내 입을 파고들려고 시도했다. 예상 못한 상황은 아니었지만, 지금의 나에겐 격렬하게 파고드는 문을 밀어낼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매우 거칠게 들어오는 문은 끝내 내가 입을 열지 않자 고약하게도 내 입술을 씹어버렸고 잠시 고통에 움찔거리는 순간 그 틈을 파고 들어와 비릿한 피를 내 목안으로 억지로 밀어 넣었다.
놈의 피였다.
상처를 깊게 빨아대는 것 같더니, 삼키지 않고 그대로 입에 머금고 있었나 보다.
구역질이라도 올라올 것 같은 역겨움에 놈의 안면을 뜯어낼 기세로 검을 든 손을 휘젓자, 계속 내 손을 주시하고 있었는지 문은 냉큼 떨어져 나를 바라보았다.
원치 않던 더러운 기분에 난 손을 들어 입을 닦았고 입안에 고여 있는 피를 침과 함께 혀로 뱉어냈다. 문 또한 그런 나를 바라보더니 남은 피를 입가에 흘리면서 혀를 내밀어 핥았고 속이 뒤집어 지는 나와는 달리 빌어먹을 정도로 활짝 웃는다.
그리곤 내게 다가와 한쪽 무릎을 꿇더니 내 손을 잡아 올려 손등을 자신의 이마에 대고 입을 열었다.
“들개 왕은 죽어 늑대의 왕이 되었노라.”
들개의 서약이었다. 스스로를 늑대로 칭해 단 한 마리의 들개만을 왕으로 모신다는 맹약.
그 영혼까지 함께 묶여 죽음으로도 왕을 거스를 수 없는 이 서약은 절대로 함부로 할 것이 아니었다.
과정은 엉망이었지만, 이 빌어먹을 똥개는 목줄을 채웠던 닉스를 기억하고 그의 주인이었던 나를 죽여 들개의 서약으로 오직 자신의 왕으로 다시 태어나게 만들었다. 적어도 놈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어울리지 않는다.
주인이 아무리 나라 할지라도 문은 누군가에게 종속될 대상이 아니다.
과거 나는 겨우 문을 제어할 수준이었고, 온전히 지배한다는 건 불가능한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문은 그 스스로가 끊을 수 있는 목줄을 내게 쥐어준 것도 모자라, 들개의 서약으로 영원한 족쇄를 허락했다.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는 나는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한숨과 함께 침묵했던 입을 열었다.
“넌 평생에 단 한 번의 기회를 잃었어.”
영원한 자유를 빼앗겼다. 서약엔 강제성도 있어 받은 자는 거부할 권리가 없다.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난 문에게 잡힌 손을 뿌리칠 수 없었다.
낙담한 듯 암울하게 말하자 문은 더욱 꽃처럼 화려하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단 한 번뿐인 기회를 잡은 거야.”
당장 저 웃는 낯짝을 두들겨주고 싶지만, 문의 손에서 흐르고 있는 피가 거슬려 난 문이 이마에 댄 내 검지로 이마를 튕겨낸 뒤 떼어냈다. 문의 문제는 나중으로 미루고 조금 피곤해져 보이는 의자에 앉아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가디언과 넋 놓고 우릴 바라보고 있던 갈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클라운.”
순식간에 눈앞에 나타난 마스와 모르페. 특히 마스는 그 거대한 덩치로 바닥을 갈라버릴 만큼 뛰어 내려왔기에 그 존재감이 배가 되었다. 갑자기 나타나는 두 녀석의 출현에 놀란 가디언들이 경계하기 시작했고 마스는 당분간 쓰지 말라 했던 대검을 어깨에 걸린 채 나를 바라보았다.
“일찍도 불러준다. 명령은?”
거슬리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지적하는 것도 오늘은 조금 지치는 것 같다.
체력도 애들 수준이라 이건가.
“공작을 제외. 한 놈도 남김없이 쓸어버려라.”
“클라운 크라운.”
모르페와 마스가 동시에 대답하고 그대로 달려드는 가디언을 향해 날렵하게 검을 휘둘렀다. 날뛰는 놈들을 보며 문 또한 명령을 내려달라는 뜻인지 두 눈을 빛내며 나를 바라보고 있다.
그것을 의식하고 있던 내가 올라오는 두통의 원인인 놈에게 손가락을 까딱하자, 들뜨며 다가오는 문의 이마에 거한 꿀밤을 먹여준 뒤 아프다며 징징대는 놈을 무시했다.
내 앞에 구부정한 등을 보이며 앉아 있는 문을 바라보았다. 싸움 구경에 절로 엉덩이가 들썩이는지 몇 번으로 앞으로 튕겨나갈 것처럼 들었다 놨다는 반복하면서 장난감에 한눈파는 아이처럼 눈을 빛내고 있었다.
뚝뚝 흐르고 있는 제 손에 피를 잊어버린 모양인지 지혈도 되지 않은 상처엔 관심도 주지 않고 클라운이 날뛰는 모습만 넋을 잃고 구경하고 있었다. 체력이 괴물 같은 놈이라 저 정도 상처라도 문제는 없겠지만, 아직도 입안에서 맴도는 피 냄새를 기억하면서 한숨을 쉬었다.
내 숨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문이 나를 바라보았다. 장난기가 가득한 얼굴. 문은 지독히 단순하지만 흑과 백. 그 두 갈레의 뚜렷함이 누구보다 선명한 놈이었다. 좋고 싫고 가 분명하기에 놈을 떼어낸다는 것에 의심을 하지 않았다.
문을 지배하고 있는 건 유희.
스스로의 즐거움만을 찾아 즉흥적으로 행동한다. 하지만 내게 묶이는 것이 어째서 그의 즐거움이 되는지 알 도리는 없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황을 어느 정도 정리한 클라운이 산채로 던져놓으라는 갈치를 내 앞에 데려왔고, 명령대로 갈치는 내 손에 귀가 잘리고 입안이 걸레가 된 것 외에는 상처하나 없이 그 고개를 땅바닥에 박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궁지에 몰린 병든 쥐새끼를 보는 것 같아 불결함 그 자체였다.
“지하실로 안내해라.”
흠칫 몸을 떠는 갈치를 무시하고 등을 돌려 나가자 갈치는 마스의 우직한 손에 목덜미가 잡혀 내 앞으로 질질질 끌려가듯 지하실을 안내했다. 어쨌든 지하실까지 함께 지워버리라는 주문을 받았기에 마지막까지 확실하게 불태워버리기 위해 지하실 문까지 다다르자 그동안 덜덜 떨기만 하던 갈치가 입 꼬리를 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용케도 몸을 비틀어 마스의 손에서 떨어져 문 앞까지 다가가 그 손잡이를 잡고 나를 바라본다.
“각오해라!! 네 놈들 모두 짐승의 밥으로 만들어 줄 테니!!!!”
지하실 안에 뭔가를 숨겨두고 있었는지 그것이 비장의 카드라도 되는 마냥 의기양양하게 소리치더니 문을 활짝 열어 나를 향해 삿대질 했다.
“당장 놈들을....?!!!!!”
삿대질을 하다 뒤를 돌아본 갈치가 얼어붙었다. 그의 뒤에는 지하실에서 미리 대기하고 있으라고 했던 닉스가 서 있었기 때문이다.
문을 가로 막아 앞을 잘 보이지 않아 손을 들어 옆으로 비키라는 듯 까딱이자 닉스는 고개를 숙이고 그 옆으로 몸을 돌렸다.
“미친, 저게 다 뭐야?!”
경악한 마스의 목소리가 울렸다. 모르페 또한 자신의 헐겁게 내려간 안경을 들어 올리면서 지금의 심리상태를 표현했다.
“키메라라고 불리는 것들이군요.”
“키메라?”
“인간과 짐승을 합쳤다고 보면 됩니다.”
“익……. 저딴 걸 왜 만드는데?”
“과거 전쟁무기로 쓸 용도로 이었죠. 하지만 치명적인 부작용으로 지금은 금지되어 중단됐습니다만, 이런 곳에서 진행되고 있었군요.”
눈에 들어오는 우리에 갇힌 놈들. 모두 체구가 작은 형체만 인간과 비슷한 것들이었다.
뿔이 있는 놈이 있는가 하면 온 몸을 털로 뒤덮은 놈도 있었다. 송곳니가 비정상적으로 길게 자라난 놈도 있었고 등뼈가 날카롭게 튀어나와 구부정한 자세로 땅을 파고 있기도 했다.
다양한 동물과 섞인 듯한 놈들은 하나같이 거친 눈동자로 이미 인간이길 포기한 것들뿐이었고 평상시에는 이곳에 풀어놓고 있었는지 우리에 가둬진 놈들이 발광을 하며 이를 드러내며 소리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울고 있는 것처럼 들리는 나는 좀 더 우리 쪽으로 다가가려고 하자 닉스가 내 앞으로 손을 뻗어 그 길을 막았다.
“위험합니다.”
“피비린내 나는 손 치워.”
“크라운.”
“명령이다.”
닉스가 내 앞을 가로막은 손을 내리고 물러났다. 그 와중에 맛이 간 문이 사방을 날뛰며 나보다 먼저 우리 앞으로 다가가 이를 드러내며 위협하고 있는 키메라를 바라보았다.
우리 안으로 손가락을 넣었다 뺐다 반복하면서 키메라 약을 올리며 즐기는 문을 뒤로하고 그 옆으로 다가가 우리안의 짐승들을 바라보았다. 겨우 가나의 또래로 보이는 젖먹이들을 바라보고 있자 나를 내려다보고 있던 문이 자세를 낮춰 내 손을 들어 올려 입을 맞췄다.
뭔가를 조르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던 놈이 기대에 가득 찬 눈으로 나를 담으며 입을 연다.
“미쳐줄까?”
대답은 손을 쳐내고 발로 얼굴을 밟아주는 것으로 대신했다. 이곳에 있고 싶지 않았다. 전쟁에 희생양일 뿐인 짐승들을 마주보고 있을 기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질질 짜고 있는 갈치 앞으로 다가갔다. 그가 도망을 가려고 뒷걸음질을 치려하자 마스가 그의 목덜미를 잡아 힘으로 짓눌러 무릎을 꿇게 한 뒤 움직일 수 없게 만들었다.
“너, 넌 대체 뭐지!!! 너 같은 어린애가!!”
놈의 기름진 머리카락을 쥐어 잘도 울어대는 아가리 속으로 단검을 집어넣어 아까부터 거슬렸던 혀를 도려내 떨어지게 만들었다. 기겁을 하며 악을 지르는 놈의 복부를 바로 차 버렸고 동시에 울컥 쏟아지는 토혈과 섞인 토사물을 피해 들고 있던 더러운 단검을 던져 버린 뒤 물러났다.
이미 인간적인 감정을 잃어버린 그들이지만, 최소한 잿더미가 된 영혼들이 그 눈물로 굳어지지 않도록…….
“불태워라. 남김없이.”
모르페가 내 말을 알아듣고 고개를 숙였다. 시끄럽게 짖어대고 있는 놈의 목덜미를 잡아 끌어 늘어지는 놈을 눈을 번뜩이는 키메라 우리 속으로 밀어 넣었다. 죽음에 대한 공포에 필사적으로 빠져나오려고 발버둥치고 있었다. 그런 놈에게 키메라는 울음소리조차 내지 않고 들러붙어 뜯어먹었다.
오직 피비린내만 진동하는 이곳에서 떨어지지 않는 두통이 올라와 그대로 나는 문밖으로 빠져나갔다. 익숙한 얼굴의 얼빠진 표정을 하고 있는 머저리 가디언 한 명이 서 있었다. 싸구려 위선자 행세를 하던 놈이었다.
“애송이에게 전해.”
그 가디언이 가일프라인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
란은 가디언이 전달하는 말을 들으며 웃음을 감출 수 없었다.
“목이 붙어 있고 싶으면 나대지 말라 했다고?”
“네. 그리 전하라 했습니다.”
가일프라인의 세력이 예전만 못하고 간교한 놈들에게 버림받은 위치에서도 모자라 수면위로 드러난 놈 중 가장 약한 놈이었긴 하나, 천하의 가일프라일 공작을 클라운 구성원만으로 쓸어버릴 줄은 상상도 하질 못했다.
가디언을 포함해 위장 시녀까지 자신의 사람으로 심어놓아 만일의 사태에 바로 개입을 할 수 있도록 해 놓았다. 라마가 다칠 일은 처음부터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안전한 상황이었다 하더라도 이번일은 그에겐 처음 주는 실전이었다.
적어도 궁지로 몰 정도까진 될 줄 알았는데, 이다지도 허무하게 무너질 줄은 예상 밖의 일이었다. 처음부터 라마는 문을 제외한 나머지 클라운을 이용해 숨통을 자르고 있었다는 얘기인데…….
“너무 얕잡아 본건가?”
어설픈 고양이로는 상대도 안 된다는 듯 보란 듯 성을 불태웠다. 더구나 심어놓은 가디언의 정체에 그 배후까지 눈치 채고 이렇게 당돌하게 충고할 정도면, 더 이상 어린애로만 봐서는 안 될 문제였다.
암부 안에서 자랄 때까지 묶어놓는 것도 괜찮지만, 이 상태로는 평생이 걸린 다해도 온전히 자신의 사람으론 쓸 수 없을 것이다. 한 살이라도 더 어릴 때 자신의 각인을 새겨 넣어야 하는데, 이번일로 그 계획까지 들켜버려 솔직히 조금은 난감하다.
어떻게 해야 그 검은 짐승을 곁에 둘 수 있단 말인가.
“어렵군…….”
태어난 후로 무엇 하나 가로막힌 적이 없었던 란은 최초로 풀 수 없는 난제에 고민했다. 하지만 그는 문제가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집착하게 되는 자신을 인정하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 빠져들었다는 생각에 어이없는 웃음을 지었다.
성은 모든 게 불타올라 그 흔적을 지워간다. 시간이 지나면 한순간에 허물어져 재조차 바람에 휘날려 어느새 뿔뿔이 흩어지겠지. 그렇게 된다면 성을 기억하는 이 또한 없을 것이고 성 또한 기다리는 이 걱정 없이 주저앉을 수 있을 것이다.
불타오르는 성에서 나오자 뒤를 따라오는 문은 손을 뻗어 내 배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자각하기도 전에 무너지는 몸을 문이 본능적으로 알아채고 손을 뻗은 것이다. 나를 잡아준 것이 조금만 늦었다면 나도 모르는 새에 바닥에 쓰러졌을 것이다.
나의 온 몸을 끌어안은 문의 체온이 높았다. 상해로 인한 발열을 하고 있는 것인데, 어쩌면 나보다 더 쓰러지고 싶을 놈이 용케도 두 다리로 멀쩡히 서서 나를 안고 있었다.
“너무 작아서 금방 부서져 버릴 것 같아.”
그런 말을 하는 주제에 숨이 막힐 정도로 끌어안는 문은 내 뒤통수에 손을 짚고 짓눌러 목에 코를 박기 시작했다. 혀를 내밀어 그곳을 쓸어내리는 것 같아 더럽다고 말한 것 같은데 문은 그만 두지 않았다.
놈도 나도 사소한 것으로 힘겨루기를 할 만큼 힘이 남아도는 게 아니기 때문에 알아듣지도 못할 대화를 포기하고 그대로 눈을 감아버렸다.
***
문은 품안에서 어느새 잠들고 있는 라마를 바라보았다. 작고 가녀린 몸. 어린 왕의 손은 너무도 작아 조금만 힘을 주어도 깨져버릴 것 같아 극도로 조심스럽게 안고 있던 문은 눈앞에 서 자신을 노려보는 검은 똥개 닉스를 바라보았다.
왕에게 버림받았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멍청한 똥개를 바라보는 데, 똥개의 눈이 왕에게 고정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그를 비웃듯이 바라볼 수조차 없게 끌어안아 막 그를 지나치려 할 때였다.
“그분은 네놈 따위가 함부로 할 분이 아니다.”
이를 드러내며 당장이라도 검을 뽑을 것처럼 닉스의 검을 쥔 왼손은 힘이 들어가 있었다. 하지만 문은 그가 뽑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지금 왕이 깨어나는 걸 원하지 않을 테니까.
문은 그런 그를 비웃으며 왕을 안은 팔을 풀지 않은 채 등을 숙이고 얼굴을 들이댔다.
서로를 노려보는 눈동자.
닉스는 오직 맹수의 본능만이 남은 눈동자의 문의 서늘함에 저도 모르게 식은땀이 흐르는 듯싶었다.
문은 본인도 모르는 닉스의 상태를 알고 있었다.
잔뜩 힘을 주고 있는 어깨와 피하지 않고 바라보지만 공포에 흔들리는 눈동자. 교묘하게 어둠으로 가리고 있지만, 상대가 될 수 없는 맹수 앞에서 공포를 짓누르고 있었다. 도망을 치거나 두려워 한다는 것을 들키면 그대로 목덜미가 물려 죽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걸 알면서도 바락바락 대드는 것이 기분 나쁘지만은 않았다. 몇 번 가지고 놀다 죽는 다른 장난감보다는 튼튼할 것 같은 것도 마음에 들었다.
눈앞에서 벌벌 떨고 있는 사슴새끼의 목을 물어 뜯어버린 다면 그 비명소리는 얼마나 달콤할까.
속으론 그것이 궁금해 당장이라도 덮치고 싶었지만, 지금은 굶주리지 않은 문은 아직은 생각할 정도의 이성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 사슴을 덮친다면 기껏 품안에서 잠든 왕이 깨어난다는 걸. 그것을 알기에 매섭게 노려보고 입맛을 다시던 얼굴을 풀고 활짝 웃었다.
당황한건 닉스였다.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바라보더니, 틈이 너무 많아 어디가 진짜인지 모를 정도로 깨끗하게 웃는데 맹수의 웃음은 어린아이의 웃음보다 순수하다.
“다음엔 꼭 놀자.”
아쉽다는 듯 날카롭게 지나가는 문. 닉스는 그 자리에서 한 동안 움직일 수 없었다.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피비린내가 난다며 자신을 밀쳐내던 크라운이 저 야수 같은 놈의 팔에서 흐르는 피 냄새를 맡지 못하고 그 품에서 편히 잠들고 있었다.
그 모습이 머리에서 떠나가지 않던 닉스는 문이 사라지고 나서야 몸을 돌려 사라진 그곳을 바라보았다.
**
암부내로 들어와 라마의 방으로 곧장 향한 문은 조심스레 침대위로 라마를 내려놓았다. 움직임 하나 없이 눈을 감고 있는 라마를 웅크려 앉아 두 손으로 턱을 괴고 한참을 바라보던 문은 얼마 전 라마에게 쥐어주었던 꽃이 생각났다.
그 당시, 거리를 지나다 인간하나가 잔뜩 꽃을 안고 다른 인간에게 건네주는 걸 보았다. 그것을 받았던 여자는 조금 놀란 것 같더니 이내 활짝 웃으며 울고 있었다. 어째서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 진 몰랐지만, 그 뒤로 둘은 서로를 껴안으며 입을 맞췄다.
그저 꽃을 쥐어줬을 뿐인데, 놀라운 변화에 자신도 작은 왕의 그런 얼굴을 보고 싶었다. 우는 것 까진 아니더라도 놀라는 것 정도는 보여줄지도 모를 테니까.
전혀 상상이 되지 않지만, 분명 태양보다 눈이 부실정도로 아름다울 것이다.
잠시 멍하게 라마를 바라보고 있던 문은 문득 뭔가가 떠올랐는지 잠시 방으로 나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디서 따왔는지 문은 그 크고 넓은 품 안에 가득 각가지 색의 꽃잎을 안고 펼치듯 라마에게 뿌렸다. 그것을 알 리가 없는 라마는 햇살이 창밖에서 스며드는 따뜻한 온기에 저도 모르게 뒤척였다.
그 모습을 히죽거리며 바라보던 문이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볼에 붙은 꽃잎을 떼어내려 했다. 그 순간, 보다 따뜻한 온기를 찾은 라마가 문의 손에 스스로 볼을 비비더니 그대로 편안한 듯 작게 웃었다.
문은 그에 움찔, 손을 떨다 빛에 녹아들 것 같은 눈부심에 술렁이듯 요동치는 심장을 가라앉힐 수 없었다.
무거웠다. 뭔가가 위에서 짓누르는 느낌인데, 거북하고 무거운 느낌에 가위라도 눌린 것인가 하여 억지로 눈을 떴더니, 눈앞에는 은빛 실타래가 가득 흘러내리고 있었다.
더러운 살덩이가 올라와 있는데, 누구랄 것 없이 머리통을 잡아채고 배를 걷어차 주었다. 별 다른 충격은 받진 못했는지 그저 손을 풀 정도만 움직인 놈을 바라보다 내 방이 조금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짙은 꽃향기가 난다.
상체를 올리자마자 내 위로 떨어지는 다양한 꽃잎들. 이 많은 꽃잎이 어디에서 들어왔나 싶어 창밖을 바라보았지만, 근처에 꽃나무는커녕 수풀도 보이지 않았다. 빛은 들어온다고 하지만, 엄연히 지하와 가까운 방이라 바람에 꽃잎이 바람에 실려 들어올 일도 없다.
대충 누구 짓인지 감이 잡히자 멀쩡하던 머리가 지끈거렸다.
손바닥으로 꽃잎을 쓸자 바닥으로 떨어지는 그 양이 많기도 하다.
“졸려…….”
문이 눈을 비비적거리며 다시 나를 안아버리려고 하고 있었다.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모양인지 꽃잎에 뒤엉킨 모습으로 내게 손을 뻗는데 그가 다가올 때마다 피 냄새가 진동했다.
난 그런 잠에 취해 있는 문의 손목을 잡아 바라보았다. 길게 찢어진 손바닥은 제대로 지혈도 되지 못한 채 아직도 조금씩 피를 흘리고 있었다.
피가 부족해 죽지 않는 것이 신기할 정도다. 어지간히도 침대를 더럽혀놓고 있는 피가 거슬려 대충 시트를 찢어 놈의 손에 감아주었다. 움찔 거리는 놈이 이제야 고통을 느끼고 잠에서 깨어났는지 천천히 눈을 떠 나를 바라본다.
“그만 일어나.”
알아서 의원을 찾아갈 생각은 안하는 놈이다. 그러니 귀찮아도 암부에서 알려준 의원에게 데려다 주기 위해 몸을 일으키려는 데, 긴 손이 내 배를 둘러 깊게 안았다.
“라마…….”
보던에 있었을 때 말고는 이름을 부르는 일은 없었던 것 같은데, 아직도 잠에서 덜 깼는지 내 이름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또 무슨 짓을 하려나 싶어 가만히 머리통을 바라보는 데 실실 쪼개고 있던 놈이 고개를 들어 올려 나를 바라보는 눈이 조금은 멍 한 듯싶었다.
“예뻐.”
나도 모르게 주먹이 문의 안면을 향해 박혔다.
지금 누가 누구보고 예쁘다고 지껄이는 것인지 기가 찼다. 농담으로도 그런 소릴 들어본 적이 없어 당황스러울 정도다.
넋 나간 듯 웃으며 개소리를 하던 문이 고통에 끙끙거리더니 다시 고개를 숙이고 내게 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머리카락을 잡고 당겨보아도 도통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고 무게로 내 하체를 짓누르고 있어 힘으로 밀려나가지도 않았다. 근처에 두들겨줄 무기도 없었고 손으로 쥐어박기에는 골격의 차이가 커서인지 때리는 내가 더 아파 중단하고 놈을 떨칠 방법을 생각해 보았다.
“하아……. 떨어져라.”
“…….”
“문.”
“싫어…….”
얼굴을 파묻으며 말했다.
죽고 싶어 환장을 했을까. 눈 뜨자마자 반항하는 문의 머리통을 바라보다 지저분한 모습과 더불어 훤히 드러난 목덜미 안쪽으로 자잘한 상처가 보였다. 약을 바르지 않았으니 아무리 회복이 빠른 녀석이라도 상처가 모두 낫기까지 시간이 걸릴 것이다.
더욱이 지금 더러워서 나을 상처도 곪아가기 직전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나는 손을 들어 문의 머리통을 잡았다. 또 때리는지 알았는지 문의 어깨가 반사적으로 흠칫 거렸다.
“씻겨 줄 테니 일어나.”
“!”
내 하체에 묻고 있던 고개를 번쩍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저번에 쥐어줬던 가면은 어디에 뒀는지 쓰지도 않고 있었다. 때문에 적나라하게 붉은 눈동자를 마주볼 수 있었다.
밝은 곳을 좀처럼 싫어해서 이렇게 눈을 크게 뜬 적은 거의 보지 못했는데, 그 눈이 지나치게 부담스럽다. 냉큼 일어나 옷을 벗어던지며 목욕탕으로 들어가는 문은 내게 손짓을 하며 ‘빨리! 어서!’를 외쳤다. 어지간히도 급해하는 게 귀찮지만, 씻겨주기 위해 팔을 걷었다.
이라도 있으면 큰일인데…….
기분 나쁘게 웃으며 나를 내려다보는 문의 몸뚱이를 바라보았다. 덩치가 거대한 건 그렇다 쳐도 불결할 정도로 더러운 오물덩어리를 보고 있자니 없던 화도 날 지경이었다. 이 따위 더러운 몸으로 내 침대에서 뒹굴고 있었단 말인가. 그것도 나를 껴안고서.
현기증이 날 정도로 내 몸도 결코 깨끗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일단 순서가 중요했기에 손가락을 들어 밑을 가리켰다.
“앉아.”
냉큼 앉는 문. 기웃거리는 고개로 나를 바라보는 데 난 그 머리통을 잡아 욕조 안에 가득한 물을 떠 부었다. 찬물이 조금 추운지 부르르 떨고 있었지만, 상관없었다. 지금 흐르고 있는 게 어서 다시 물을 부어 희석시키라고 소리치고 있었으니까.
비누를 집어 들어 머리통에 문지르니 서서히 거품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난 그것을 손으로 박박 긁었다. 짐승이라면 말 외에는 시켜본 적 없는 목욕이지만, 하는 방법은 다를 것 없었다.
거품을 내고 문지르고 헹군다.
문은 앉은 자세로 움직이지 않고 기분이 좋은지 그르렁 거리는 이상한 소리도 내고 있었다. 물로 헹구자 그대로 고개를 좌우로 털더니 손을 들어 눈을 비볐다. 그 와중에 비눗물이 눈 안으로 들어간 모양이다. 급히 다시 한 번 물을 떠 머리에 부어주자 고개를 숙인 문은 그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굉장한 노동이었다. 머리까지는 대충 씻긴 것 같은 데, 문제는 놈의 몸뚱이였다. 괴수처럼 넓고 거대한 등을 바라보고 있잖니 질려버릴 것 같았지만, 씻겨주겠다고 말을 했으니 무를 수도 없이 부드러운 수건으로 거품을 묻혀 놈의 등을 긁듯 닦아주었다.
창백한 피부에는 자잘한 상처가 굉장히 많았다. 특히 등 부분에 상처가 집중돼 있었는데, 대부분 최근에 만들어 진 것들뿐이었다.
이런 상처를 달고 있었으니 손에 베인 상처가 아무렇지 않았던 것이겠지. 지속적인 고통에 익숙한 놈이다.
등을 모두 닦고 나머지는 알아서 하라고 그 앞으로 거품이 묻은 수건을 던져주려는 데, 문은 눈을 감은 채 그대로 졸고 있었다. 찬물을 그렇게 부었어도 몸이 뜨겁다 싶었는데, 아무래도 열이 들끓기 시작하면서 반 기절을 해 버린 상태인가 보다.
이 큰 놈을 옮길 자신이 없어 잠시 어떻게 할까 생각해보다, 힘을 쓸 놈이라면 잘 알고 있기에 그대로 일어나 욕실 밖으로 나갔다.
**
“젠장! 내가 왜! 시커먼 사내놈 몸뚱이를 닦아줘야 하는 데?!”
하는 김에 나머지 목욕까지 모두 마스에게 시켰다. 징그럽게 투덜거리면서도 열심히 손을 움직이는 게 보여 시끄러워도 참고 나올 때 까지 기다렸다.
나중에는 찬물을 보더니 애가 애를 죽인다며 소리치다 내게 발로 까이고 물을 데우고 와 더운 물로 헹궈주기까지 했다. 문을 직접 헹구고 들고 나와 방에서 툴툴거리며 닦아주기도 하는 것 같다. 의외로 쓸데가 많은 놈이다.
마침 물도 데워놨겠다 나는 빈 욕실에 들어가 남은 더운 물로 목욕을 끝내고 나왔다.
그 과정 중 내 침대를 차지하고 있는 문을 발견하고 아직도 나가지 않고 있는 마스를 바라보았다.
“바닥에 눕히라고 한 것 같은데.”
“이 피도 눈물도 없는 애새…… 크라운. 이 녀석 열 끓고 있는 거 안보여?! 일단 의원 불렀으니까 기다려봐.”
찬 수건을 머리에 올려주기까지 하는데, 간호하는 게 보통이 아니다. 마스의 의외의 면에 조금은 신기해 있자 놈이 다가왔다. 굉장히 거슬리는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는데, 그 거대한 손이 내 머리통을 향해 다가오더니 새알 쥐듯 잡았다.
“너도 무리마라. 아직 어리니까.”
언젠가 보았던 한스덴 웨이의 눈과 비슷하다. 난 그런 눈을 바라보다 그대로 발을 들어 놈의 정강이를 차 주었다. 순식간에 올라오는 고통에 약한 녀석이라, 그대로 몸을 숙이고 긴 신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무릎을 짚는 마스를 지나치며 다시 한 번 제대로 새겨 주었다.
“난 네놈보다 나이가 많아.”
대체 몇 번을 말해줘야 아는 걸까. 이놈이고 저놈이고 한 번에 알아듣는 우등생이라곤 눈 씻고 찾아봐도 없다.
침대를 차지하고 있는 문에게 막 다가가려는데, 방문이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그렇잖아도 소만한 것들이 두 명이나 있어 들어오지 말고 용건을 말하라고 하자 밖에 선 놈이 혓바닥이 반 토막이라도 났는지 반말을 지껄였다.
“왕이 보자 신다. 올라와라."
귀찮지만, 지금 내 방에 있는 게 더 짜증이 날 것 같아 문 밖으로 나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나가기 전에 아직도 아픈 곳을 문지르고 있는 마스를 바라보았다.
“마스.”
내 부름에 흠칫 놀라는 마스는 그대로 굳어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답지 않게 놀라는 놈을 몇 초 바라보다 손가락으로 꽃잎으로 더러운 바닥과 침대를 차지하고 있는 문을 가리켰다.
“올 때까지 확실히 치워놓도록.”
“아~예.”
여전히 어설픈 대답이 거슬리지만, 확실한 대답을 듣고 그대로 고개를 돌려 밖으로 나갔다. 그보다 문밖에서 반 토막 난 혀를 놀리던 놈이 보이지 않는다. 그 놈에게도 확실히 일러둘 게 있었는데, 눈치가 빠른 놈이었는지 이미 토낀 후였다. 아쉽다 싶어 혀를 차고 나를 찾는다는 란의 방으로 느린 걸음을 옮겼다.
어느 정도 걸었을까.
익숙한 문을 열자, 대기하고 있던 자가 미리 내가 온다는 정보를 받은 모양인지 날 보자마자 안으로 안내했다. 안내를 받고 또 다른 문을 열고 들어간 곳에는 의자에 앉은 란이 있었다.
내가 들어오자마자 그는 웃으며 반겼다. 그 옆에 늘 시끄럽게 떠들고 있었던 참새는 어느 방앗간을 헤매고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궁금하지 않아 물어보지 않고 의자에 앉았고 내가 앉자 란이 그 입을 먼저 열었다.
“일전엔 수고 했다. 첫 임무치고는 확실하게 처리했더군.”
“용건.”
“급할 건 없지. 뭐든 천천히 갈수록 정확한 법이니까.”
“시기를 놓치는 것만큼 어리석은 건 없다. 쓸데없는 소릴 할 거면 일어나겠다.”
“몸은 괜찮나? 약에 중독되었었다 들었는데.”
딴소릴 지껄이는 란에게 시선을 치우고 대답을 하지 않았다. 일어나 미련 없이 밖으로 나가려는 찰나 란은 다시 한 번 그 입을 열었다.
“왕궁 가디언에 들어가라.”
그 소리에 잠시 멈춰 앉은 나는 고개를 들어 란을 바라보았다. 나를 바라보며 잠시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던 란이 자리에 일어나 내게 다가왔다. 다가올수록 점점 높은 곳에서 나를 내려다보았지만, 물러나지 않고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자 갑자기 낯짝에 힘을 풀더니 다시 입 꼬리를 올렸다.
“추천서는 문호가 제출했으니 처음엔 견습생으로 들어갈 거야. 정식 가디언이 된다면 내 옆에 둘 테지만, 그전까지는 견습생으로서 단독으로 움직이어야 하는 입장이지. 때문에 지금 가지고 있는 검술도 철저히 숨기고 될 수 있는 대로 눈에 띄지 않아야해. 경우에 따라선 치욕적일 수도 있는 임무다. 이를 견딜 수 있겠나.”
“네놈이 방해만 하지 않는다면.”
“위험할거다. 가일프라인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네놈 걱정이나 해.”
“내 사람 걱정이 먼저지. 필요한 게 있으면 주저 말고 내게 말해라.”
걱정한다는 놈이 상대를 짜고 치는 판 위에 올려놓았나.
불쾌한 건 한 두 개가 아니었지만, 나도 녀석을 믿지 않으니 어쩔 수 없다.
필요하다는 게 당장 없다고 말하기엔 조금 걸리는 게 있긴 하다. 혼자 움직일 수 있게 도움을 주지 않는 놈이 눈에서 아른거리는 것 같았지만, 애써 무시하고 없다고 말하려는 차.
누군가가 급히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라는 명이 떨어지자마자 튕겨 나오듯 들어온 남자는 새파랗게 질 있었다.
란이 먼저 무슨 일이냐고 물었고 놈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소리쳤다.
“백자가 날뛰고 있습니다!”
처음엔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곧 이어 모스에서도 가일프라인도 문을 백자라고 불렸던 것이 생각이 났다. 방금전만해도 잘 뻗어있던 놈이 갑자기 날뛰긴 어딜 날뛴다는 걸까 싶어 일어났다.
옆에서는 주절주절 거리며 도저히 말릴 수 없다느니, 사람 하나 죽을 뻔 했다느니, 그런 괴물은 처음 본다느니,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쉴 세 없이 떠들고 있었다.
란도 사태를 파악하기 위해 함께 움직였고 내 방에 가까워질수록 짐승의 포효에 가까운 소리가 귀에 박히기 시작했다.
무슨 일인가 싶어 문을 열었더니, 열자마자 옆에서 시끄럽게 떠들고 있던 놈은 그대로 뒤로 숨어 보이지 않았고 란과 더불어 따라온 놈들은 그대로 얼어붙어 지금의 광경을 넋을 놓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의원으로 보이는 놈은 어디를 어떻게 차인 것인지 그대로 기절해 있었고 마스는 여기저기 뜯기고 긁히고 차이고 온 몸이 성한 곳 없이 문과 대치를 하고 있었다. 힘으론 도저히 짓누를 수 없었는지 검은 뽑지 않았지만, 생각만큼 제압이 되지 않아 본인도 당황한 모양이었다.
상황을 보아하니 의원이 들어와 손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깨어난 문에 의해 사달이 난 것 같은데, 엉망이 된 내 방을 잠시 둘러보았다.
그 와중 란은 문을 바라보더니 위험하다며 내 앞으로 팔을 가로막았다. 그 손을 쳐내고 앞으로 다가갔다.
정신이 없었던 탓에 내가 들어온 지도 몰랐던 마스가 나를 발견하고 흠칫 거리며 위험하다 소리치는 걸 무시했다. 문이 언제 너희들한테 안 위험한 적이 있어나 싶다.
제대로 눈을 뜨지도 않고 다가온 놈들을 모두 적으로 생각한 모양인지 문이 빠른 속도로 내게 달려드는 게 보였다.
란이 뒤에서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난 란이 움직이기 전에 손을 들었고 그대로 세워 달려오는 똥개의 머리통을 쪼개듯 내리 찍었다.
“?!!”
기세 좋게 달려온 문이 정수리를 제대로 찍힌 뒤 머리를 감싸고 주저앉았다. 왜 아픈 것인지 이유를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머릴 감싸며 갸우뚱 거리고 있는 놈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 턱을 잡아 올렸다.
달려오려던 란은 이미 그 걸음을 멈춘 상태다.
“날 봐.”
그제야 붉은 눈이 드러났고, 눈이 부신 지 찡그리고 있다 날 바라본 문이 피어나듯 웃곤 나를 향해 손을 뻗어 껴안았다.
문은 결국 이렇게 될 수밖에 없게 만들어 버린다.
“딱히 필요하진 않지만, 이 녀석도 함께 데려가겠다.”
“지금 백자를 가디언으로 데려간다고?”
란이 내 말이 납득이 안 된다는 듯 되물었다. 백자라는 호칭이 귀에 거슬리기 시작하지만 따로 언급하지 않고 귀찮게 껴안고 비비고 핥고 있는 문의 얼굴을 때려 진정시킨 뒤 란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이 문의 행동 하나하나를 쫓고 있는 게 보였다.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안 돼. 놈을 데려가면 위험은 배가 된다.”
“명령은 듣지 않는다.”
“라마!”
“번복은 없어.”
란은 뒤집힐 수 없는 선명한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흑요석처럼 맑은 검은 눈동자.
가시가 돋아난 모습이었지만, 그 본질은 순수했다. 그래서 원했었다.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날을 세우는 소년에게 의지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그가 그러면 그럴수록 점점 더 멀어지는 것 같은 기분을 지울 수 없던 란은 깊은 한숨을 내 쉬었다.
“라마. 지금의 난 무능력한 존재다. 때문에 일이 일어나도 궁에선 널 완전히 보호할 수가 없어.”
라마에게 달라붙어 있는 문이 거슬렸다. 자신은 옷깃을 스치는 것조차 조심스러운 소년에게 문은 아무렇지 않은 듯 다가갔고 더 화가 나는 건 라마가 그것을 허락했다는 사실이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 같은 짐승을 길들일 생각을 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짐승은 짐승일 뿐. 내재된 본능이 언제 터져 나올지 모르는 놈은 라마에게 있어 폭탄을 등에 지고 있는 것과 다를 것 없다.
라마는 살기를 드러내는 란을 아무 말 없이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가 분명하게 문을 향하고 있었다. 잠시 꿈틀거리던 문이 고통이 완화되었는지 다시금 뺨을 비벼왔지만, 몸에 열기가 많고 피는 계속 흘리고 있었다.
상태가 그러면서도 살기를 알아차리고 이를 드러내는 놈은 야생동물과 가깝다 해도 그 역시 아직은 어린 애송이.
애송이가 애송이에게 날을 세우고 있는 모습은 어린 맹수들끼리의 장난질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란은 문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문제가 생기면 위험인물로 간주. 그 즉시 처분하겠다.”
“무능력하면 방해나 하지 마. 그 곱상한 대가리 똑 따서 돌려버릴 테니까.”
서로를 노려보는 란과 문. 그 사이에 낀 나는 둘 모두 한심해서 그대로 비켜 앞으로 걸어갔다. 문은 갑자기 내가 움직이자 그대로 비틀거리며 나를 쫓아 걸어왔고 란도 잠시 흐름을 무시하고 내게 시선을 보냈다.
난장판이 된 방안을 바라보던 나는 뻗어있는 의원과 옆에서 쩔쩔매는 마스. 뒤에서 귀찮게 하는 란과 문에게 그 시선을 돌렸다.
잘 다가오던 문은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고 마스는 그대로 얼어 움직이지 않았으며 란은 시선을 피해 허공을 바라보았다.
난 올라오는 살심을 숨기지 않고 그들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특히 뭘 잘했는지 시끄럽게 떠들고 있는 문을 노려보았다.
“치워.”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던 문이 재빨리 움직이더니 쓰러진 탁자를 바로 세우고 바닥을 나뒹구는 물건들을 하나하나 치우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나는 나뒹구는 의자를 끌어 앉아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 뒤에 서 있는 란. 난 그를 겨냥하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 역시 알고 있어. 저 망아지를 데려가는 게 얼마나 귀찮은 일인지."
“…….”
“허나, 살아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간에 그 문제가 있다.”
“…….”
“그때마다 넌 그 문제를 도려내는 것으로 해결할 텐가.”
란은 잠시 할 말은 잃고 라마를 바라보았다.
소년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문을 바라만 볼 뿐 그 뒤 아무런 말을 해 주지 않았다. 강하게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에 단 한 순간도 라마를 놓치지 않고 바라보던 란은 잠시 후 라마가 일어나는 게 보였다.
그는 성큼성큼 걸어가 곱절은 커 보이는 짐승을 바라보다 유리파편이라도 박힌 것인지 길길이 날뛰던 야수를 단 한 번의 발길질로 잠재웠다.
문의 손을 잡아 박힌 유리파편을 빼 던지는 모습을 바라보던 란은 어쩐지 불편해지는 마음에 등을 돌려 자리를 떴다. 보다 복잡한 속이 드러나지 않도록 급히 사라지는 란을 눈치 챈 라마는 아직도 자잘한 유리파편이 박혀 있는 문의 손목을 쥔 채 잠시 비웃듯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애송이라는 거다.”
중얼거리던 라마를 빤히 바라보는 문. 그런 문에게 시선을 돌린 라마는 멈춘 손을 다시 움직였다.
“아파파파파!!”
“참아.”
망설임도 없이 손에 박힌 유리파편을 모두 뺐다. 감각을 못 느낄 정도로 열이 오르고 있으면서도 잘도 엄살을 피우는 문을 바라보다 손을 놓고 일어나 뻗어있는 의원에게 다가갔다.
발로 건드려보니 제대로 기절해 아직도 움직이질 못하고 있다.
시선은 마스에게 돌렸고 ‘가져다 버려.’라는 표정으로 고갯짓을 하자 아무리 눈치 없는 마스라도 대충 뜻을 알아차리고 의원을 들고 밖으로 튀었다.
과연, 상황에 따라 무식한 놈도 눈치 봐야 할 때가 있으니. 어느 정도 시끄러운 것들이 사라지자 이 사달의 원인을 해결하기 위해 바닥에 굴러다니고 있는 의원의 것으로 추정되는 상자를 들고 문에게 다가왔다.
“손.”
상자를 열고 손을 내밀라고 하자 문은 반사적으로 주먹을 쥔 채 펼쳐진 라마의 손바닥 위로 올렸다.
이게 미쳤나 싶어 바라보는 라마는 눈을 반짝거리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문에게 할 말을 잃어 그대로 손목을 잡아 비틀어 상처가 있는 부분을 바라보았다.
길게도 찢어졌다. 꿰매는 게 답일 것 같은 상처에 안에 있는 소독약으로 제 손을 씻고 상처 위로 아무런 예고 없이 들이 부었다.
문은 잠시 흠칫 거리기만 할뿐 아무런 미동조차 하지 않았고, 그것이 당연하듯 핀셋으로 실이 연결된 바늘을 든 라마는 멸균된 그것으로 천천히 상처를 꿰맸다. 익숙한 솜씨로 상처를 봉합하고 붕대를 감으면서 단시간 만에 마무리를 지은 라마는 뇌가 익어버릴 만큼 열이 오르고 있는 문을 바라보았다.
마취를 하지 않아 지독하게 아팠을 텐데도 표정은 이제 막 잠에서 깬 아기 같았다.
창백할 정도로 흰 얼굴에 열이 오르자 몽롱한 얼굴이 돼 버렸다. 그런 멍청한 얼굴로 치료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몸에 힘을 풀고 내 품에 기대 다시 눈을 감았다.
무게를 감당을 못해 주저앉은 채로 안고 있었지만, 나는 문을 떨쳐내지 않고 들끓는 열에 헐떡이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미 하나 뿐인 심장을 도려내 버린 내게 문은 자신의 심장을 반으로 쪼개 넣어주었다.
미약하게 뛰고 있는 두 개의 심장.
어느 한 쪽이 망가지면 나머지 한 쪽 또한 멈춰버릴 것이다.
문이 뻗은 두 손을 차마 뿌리칠 수 없었다. 그 손을 뿌리치는 순간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는 문은 그대로 홍염에 사그라질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