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8/35)

  괴물과 아이 (외전)  =========================================================

괴물은 존재했다. 무엇 때문에 존재하고 있었는지 종종 잊어버리지만, 괴물은 꽤 오랫동안 이곳에 있었다.

인간은 싫었다. 그들을 보면 괴물은 단지 죽일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살육만이 목적인 외형은 인간과 같지만, 알몸임에도 아무런 것도 걸치지 않았지다. 또한 아무것도 먹지도 않았다. 

그들이 입지도 먹지도 않으면서 생존할 수 있는 건 고작해야 몇 년. 세상에 태어났을 때 부터 거대한 몸을 가지고 죽을 때 까지 일정하게 고정된 크기에서 더 이상 자라지 않는다. 

괴물에겐 감정이 없고 본능만이 우선이다. 그들에게 있어 생존의 이유는 눈 앞의 인간을 사냥하는것. 

때문에 괴물들은 끊임없이 인간을 사냥했고 그것을 결코 멈추지 않았다. 

그런 무수한 괴물들 중 한 마리에 불가한 그는 그날 역시 본능대로 인간을 살육하고 있었다. 

그러나 괴물이 늘 죽이는 것 밖에 생각하지 않던 인간에게 약점을 허락하면서 밀려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무리를 지어 공격하는 괴물들의 특성들 때문에 인간을 상대로 패하진 않았지만, 그 무리 사이에서 살아남은 건 큰 상처를 입은 지금의 괴물 뿐이었다.  

인간에 대한 이 깊은 분노는 그의 태초부터 시작되리라. 

괴물은 인간의 무언의 목적으로 인해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 목적에 있어 괴물은 부적합했고 때문에 에덴에 버려진다. 그리고 괴물은 인간들에게 있어 제거 대상이 되었다. 

예전이라면 특정 인간의 특징을 보고 살육했다면 지금은 본능적으로 위협의 존재를 알아챈 괴물은 나약한 인간, 작은 인간, 커다란 인간, 털이 많은 인간 등 가리지 않고 사냥했다.

배가 전혀 고프지 않았지만, 분노의 원점이 그들이기에 원초적인 살육을 끊지 않았던 것이다. 

큰 부상을 입은 괴물은 몸을 질질 끌고 여기저기를 배회했다. 괴물에게는 보금자리 따윈 없었다. 잠을 자는 것조차 학습되지 않은 괴물은 그저 본능을 따라 인간을 죽이기 위해 움직일 뿐이었다. 

그들의 외침대로 그는 그저 괴물일 뿐이었다. 

“아…….”

작은 사람이었다. 

들끓는 살육 심에 그대로 달려들어 죽이려고 했으나 괴물은 이미 큰 부상을 받아 더는 움직일 수 없는 몸이 되어 쓰러졌다. 하지만 눈만은 쪼그려 앉아 있는 작은 인간을 죽이기 위해 번뜩이고 있었다. 

소스라치게 놀라 도망가거나 날카로운 것을 들고 괴물의 목을 도려내야 할 작은 인간이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게 보였다. 

괴물은 눈을 치켜들어 작은 인간을 바라보았다. 땅을 긁는 손에는 힘이 남아 있어 당장이라도 저 작은 인간을 찢어버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순간, 눈앞에 다가온 작은 인간은 자신의 목을 덮고 있던 천을 풀어 겁에 질린 듯 주저하면서도 조심스럽게 천을 괴물의 목에 걸어주었다. 

“춥지 않아?”

작은 인간의 불투명한 한 쪽 눈. 

“이거 먹을래?”

붉은 열매. 

작은 인간은 괴물의 목에 목도리를 감아 주었고 품에 있던 붉은 열매를 놓아 주었다. 

그런 작은 인간의 머리통 옆으로 괴물의 날카롭고 커다란 손이 당장이라도 으깨버릴 작정으로 뻗어 있었지만, 그대로 멈춰 움직이지 않았다. 

괴물은 처음으로 자신이 추웠다는 것과 배가 고팠다는 것을 배웠다. 

작은 인간은 밤이 되면 늘 비좁은 골목에 숨어 있었다. 괴물을 발견하면 인간들의 얼굴에서 볼 수 없었던 표정을 지었고 손을 들어오라고 까딱 거렸다. 그것을 보면 괴물은 어느새 몸을 감춰 사라진 괴물을 찾아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는 작은 인간을 지켜보곤 했다. 

그 날이 반복되어 이제는 밤이 되면 늘 그 자리에 작게 웅크린 작은 인간을 보기 위해 괴물은 달려갔다. 그런 괴물은 단 한 번도 본적이 없던 표정을 짓는 작은 인간과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작은 인간은 그 비좁은 골목에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기다려도 작은 인간은 작은 몸을 보다 작게 웅크리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고, 괴물은 그런 작은 인간이 왜 오지 않는지 초조했다. 이제는 숨지 않고 골목을 배회하던 괴물이 3일 째 되던 밤. 작은 아이처럼 커다란 덩치를 구겨 작은 아이처럼 앉아 있던 그때 작은 인간은 다시 한 번 그곳에 나타났다. 

 “미안, 조금 늦었어.”

괴물은 손을 뻗었다. 자신을 어지럽게 만드는 이 작은 인간을 당장이라도 터트려 죽이고 싶었다. 하지만 괴물은 생각과 다르게 부드럽게 작은 아이의 볼을 어루만져주었고 작은 아이는 보다 맑은 얼굴로 괴물을 바라봐주었다. 

“그러니까 너랑 나랑은 친.구.!”

알 수 없는 말을 종종 하는 아이를 바라보던 괴물은 멍 하게 아이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괴물을 가리켰다가 다시 자신을 가리키며 마지막에는 꼭 ‘친구’라는 말을 했다. 

 “따라 해봐. 친.구.!”

고개를 갸우뚱 하던 괴물은 평생 포효를 할 때 말고는 열어 본 적이 없던 입을 서서히 열었다.

“치……”

“응응!!”

“…….”

“친.구! 너랑. 나랑. 친.구!”

“…….”

“친.구!”

“…….”

“아이참, 왜 말을 안 해? 우린 친구라니까?”

괴물은 말이 없었다. 아이도 지친지 포기하고 그대로 앉아 턱을 괴고 괴물을 바라보았다. 

“친구는 많으면 좋아. 그러니까 너랑 나랑은 친구야. 네가 말을 못해도. 친구.”

작은 인간은 방긋 웃으며 괴물을 바라보았다. 뜻을 알 리 없는 괴물은 그런 작은 인간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그 뒤 작은 아이는 괴물에게 여러 가지를 가르쳐 주었다. 특히 작은 아이는 괴물을 볼 때면 ‘은아’라는 소리를 했고, 곧 괴물은 그것이 자신을 부르는 이름이라는 것을 알았다. 

“은아 잘 어울린다! 이제 집만 만들면 되겠다!”

아이가 가져다준 옷을 도움을 받아 걸친 은아는 불편하고 괴로워 당장 몸에 걸친 것을 던져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은아의 덥수룩하고 긴 머리카락까지 땋아주며 엄지를 치켜들며 방방 뛰고서 웃는 아이 때문에 그대로 주저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새로운 상처를 달고 온 아이를 바라보던 은아는 커다란 손을 들어 아이의 상처가 난 볼을 만져주었다. 잠시 상처 때문에 놀라 움찔거리던 아이도 곧 은아의 손에 그 얼굴을 맞기고 이제는 옷을 입어 멀끔한 은아를 바라보며 부어 떠지지 않는 눈으로 밝게도 웃었다. 

 그 커다란 몸이 쉴 수 있는 공간을 찾기 위해 여기저기를 은아와 함께 다니면서 다른 괴물들을 만나는 등 위험한 적이 한 두 번도 아니었지만, 그때마다 은아는 아이를 지켜주면서 어느 순간부터 괴물들에게 조차 배척받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은아는 상관이 없었다. 그의 곁에는 언제나 웃고 있는 아이가 있었으니까. 

“추우니까 꼭 이걸 깔아야 해. 습지니까 자주자주 바꿔주고. 내말 알겠지?”

잘은 모르겠지만, 바스락 거리는 풀 위에 앉은 아이가 은아에게 이리로 오라며 손짓했다. 커다란 몸을 구겨 아이의 옆에 앉은 은아는 묘한 짚의 감촉에 불편한지 웅크린 자세로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겨우 찾은 보금자리. 허물어진 집 바닥에 이런 창고가 있을 줄은 몰랐다. 습하고 지저분했지만, 청소를 마치고 나니 은아가 편히 발을 뻗을 수 있을 만한 공간이 마음에 들었다. 짚을 구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많았지만, 마침 기사들이 에덴에 와 있었기에 함께 들어온 말들을 위한 짚을 훔쳐 올 수 있었다. 

웅크린 채 적응 못하는 은아를 보며 잠시 웃던 아이는 멍 하게 앞을 바라보다 두 눈을 감고 입을 열었다. 

“나 말이야……. 사실 모스야.”

은아는 말이 없었다. 불편한지 엉덩이를 들썩거리는 게 느껴진다.

“도적단 중 한 명이 나를 샀는데, 난 다른 모스처럼 건강하질 못해서 실수를 하게 돼……. 그때마다 아팠어. 매일이 매일이 아팠어. 그 사람에게는 모스가 많으니까 그때 말이야. 커다란 것들에게 던져졌었어. 은아처럼 크지만, 전혀 다른 것들이었어. 다른 모스도 어서 죽이라고 했으니까. 겨우 도망쳤어……. 마침 기사들이 커다란 것들을 노리고 있었거든……. 모두들 운이 좋은 모스라고 말했어…….”

아이가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은아는 그런 아이를 바라보다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은아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아이는 마치 그것이 괜찮아. 괜찮아. 라고 말해주는 것 같아 너무도 서러웠다. 

“난 모스가 아니야……. 모스가 아니었어……!”

아이는 모스가 아니었다. 아이는 평민의 자식이었다. 평화롭게 살아가던 아이를 납치한 건 부족한 모스를 채우려던 악질 유괴범들이었다. 이유를 모른 채 팔려온 아이는 하루에도 몇 번씩이라도 집에 데려다 달라고 외쳤지만, 그때마다 모진 채찍이 아이의 몸을 휘감았고 그런 아이를 볼 때마다 주위의 모스들 조차 차가운 시선으로 노려보곤 했다. 마치 죽어라 죽어라. 어서 죽으라고 하는 것 같았다. 

그 순간이었다. 

“치…… 구…….”

침묵하던 은아의 목소리가 아이의 귓가에 울리기 시작했다.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기어코 아이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은아의 손을 잡은 아이는 엉엉 소리 내며 울며 은아의 품을 파고들었다. 

“집에 가고 싶어……! 엄마 보고 싶어……!”

은아는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품에 파고들며 울부짖고 있는 아이를 보면 가슴 어디간가 콕콕 찌르는 것 같았다. 은아가 할 수 있는 건 손을 뻗어 그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는 것뿐이었다. 

아이는 어차피 약하고 죽이려했던 모스였기에 도둑이 자신을 찾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때문에 은아의 보금자리에서 지내기로 했다. 고기를 먹지 못하는 아이의 체질상 식량은 늘 은아가 한 아름 붉은 열매를 따오는 것으로 해결했다. 

모스로 살면서 늘 배불러 먹어본 적이 없는 아이는 은아가 따온 붉은 열매를 배가 부를 만큼 먹고 짚단에 누웠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평온함에 아이의 얼굴엔 생기가 차올랐고 상처로 덕지덕지 했던 몸은 이제는 제법 깨끗하게 아물었다. 

아이는 모스로 태어나 오랜만에 은아가 가져온 물로 목욕도 했고 예전에 늘 엄마가 말했던 것처럼 여자아이는 깨끗하고 단정하게 있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고 말끔히 씻은 아이는 몰라보게 귀여웠다. 물론 지저분한 은아도 씻겨주었지만, 씻는 게 익숙하지 않는 은아가 발버둥을 치는 바람에 꽤 오랜 시간이 걸려야만 했다. 

“우와…….”

오도도 떨고 있는 은아를 마른 천으로 말리고 그 얼굴을 보자 아이는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가 본 사람 중에 은아가 최고 멋있어.”

진심이라는 듯 두 눈을 반짝이는 아이를 보던 은아는 뜻을 모르겠지만, 왜인지 부끄러워 머리를 긁적이며 일어났다. 

“응? 어디가? 열매 가지러?”

은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전 따왔던 열매가 모두 떨어져 따오기 위해 은아는 급히 밖으로 나갔다. 빨리 오라는 소리도 듣지 못하고 부끄러움에 나온 은아는 탐스럽게 익어갔던 열매를 기억하고 조금은 먼 곳에 있는 그곳을 향해 달려갔다. 다녀오면 한 아름 열매를 안겨주고 웃음으로 보답할 아이를 위해. 

**

“……?”

품안에 가득 열매를 따고 돌아온 은아는 짚 위에 자신을 기다리고 있어야할 아이가 보이지 않았다.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은아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아이를 찾았지만, 끝내 안에서는 발견을 하질 못하고 그대로 열매를 안은 채 밖으로 나갔다. 

여기저기를 아이를 찾기 위해 헤매는 도중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난다. 불길한 그 소리를 쫓아 다가가니, 처음 아이를 만났던 골목에 도착했고 검은 인영이 은아의 눈 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인영 밑에 깔린 아이까지도.

순식간에 올라오는 살심에 품에 가득한 열매를 떨어트리고 그대로 그 검은 인영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곳을 지키고 있던 다른 인간들이 방해해도 오직 은아의 눈에게는 인영에게 깔려 빛을 잃은 눈에서 흐르고 있는 눈물밖에 보이지 않았다. 

뱃속을 파고드는 창을 무시하고 곁에 있던 인간들이 들고 있던 창을 빼앗아 줄줄이 오직 힘만으로 그들을 갈라버렸다. 짓밟고 으깨고 찢어버리고! 

이성을 잃어버린 듯한 울음이 포효했고 놀라 달아나려던 아이를 덮치고 있던 놈의 목을 쥐었다. 소리치고 울고 있었지만, 벗겨진 하반신에는 아이의 피가 묻어나와 흐르고 있었다. 그대로 바닥에 짓이겨 쓸어버리자 안면이 벗겨진 인간은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그런 놈을 바닥에 눕혀 몇 번이고 발로 밝아 형체도 알아 볼 수 없게 으깨는 모습은 그것을 지켜보고 있는 자들로 하여금 원초적인 공포를 끌어올려 도망가게 만들었다. 괴물로 돌아온 그는 눈이 뒤집어 진채 시체가 된 놈을 계속해서 짓밟았고 그 사지를 손으로 찢어발기고 주먹으로 쳐내고 있었다. 

 이제는 괴물의 손과 발에서 그 충격을 못 이기고 피가 나오고 있었고 그것을 알 리가 없는 괴물은 계속해서 형체도 알아 볼 수도 없는 시체를 향해 손을 뻗었다. 

 “으…… 은아…….”

우뚝-

괴물의 손이 멈췄다.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가 돌아갔고 뒤집혔던 눈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곤두섰던 머리털이 내려가고 드러났던 송곳니도 모습을 감췄다. 

은아는 그대로 뛰어 아이를 안았다. 아이의 다리사이에서는 계속해서 피가 흘리고 있었다.

“으…… 아……. 지…… 집에……. 가자…….”

은아는 그 소리를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서 집으로 가 아이를 쉬게 해 주고 싶었다. 돌아가서 짚도 새로 갈고 아이가 좋아하던 열매도 다시 가득 따와 한 아름 안아주고 물도 많이 길어와 좋아하는 목욕도 실컷 하게 해 주고 싶었다. 

은아는 아이에게 해 주고 싶은 것이 너무도 많았다.

괴물이 잠을 잔다는 말도 들은 바 없다. 여러 가지로 괴물처럼은 안 보이는 괴물을 바라보다 아이의 시체가 점점 식어 감을 느끼면서 방금 전 손에 스쳤던 붉은 천을 짚 사이로 빼내어 바라보았다. 

전체적으로 낡았지만, 세탁을 한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다. 이렇다 하는 오물이 묻어 있지 않았고, 길이나 모양으로 보아 아이용 목도리 같았다. 그 밑은 자수로 주인의 것으로 보이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는데, 곧 이 목도리의 주인이 내 옆의 아이의 것과 가깝다는 걸 알았다. 

“은아..”

내 목소릴 들은 것인지 조용히 잠들어 있던 괴물이 번쩍 눈을 뜨고 고개를 들어 아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무슨 생각인지 갑자기 상체를 일으켜 아이에게 다가가 냄새를 맡는 것처럼 킁킁 거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괴물이건 개새끼건 한 가지만 하라고 하고 싶다. 

하지만 곧 생각하던 것과 다른 모양인지 실망한 눈으로 뒤로 빠지더니 이번엔 내 쪽으로 돌렸다. 그리고 그 시선이 점점 내려가더니 내가 쥐고 있는 목도리로 향했고 괴물은 나와 목도리를 번갈아가며 바라보았다. 

상황을 보아하니, 놈은 아이가 죽은지도 모르는 모양이다. 어쩌면 죽음이 무엇인지도 모를 것이다. 그렇다면 괴물이 지금처럼 인간과 가까운 행동을 보이는 이유가 내 옆의 아이라는 뜻이다. 

나에게 우호적인 이유도 모두 이 아이 때문이라는 것. 

괴물은 2년 후 죽는다. 

15세 때 트란슈를 상대하던 중 갑자기 괴물이 내 앞으로 뛰어 들었었다. 그리고 무모하게 내 앞을 가로막았고 트란슈가 내지르는 검을 모두 받으면서 넝마가 되어 죽었다. 꿈틀거리며 조금은 살아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죽은 괴물의 시체를 밟고 뛰어가 괴물의 등장에 흐트러진 놈들을 모두 베고 확인한 괴물은 그 숨통이 끊어져 있었다.

무표정으로 죽어 있는 괴물을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처음 만남부터 이상했지만, 괴물은 인간을 감싸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를 감쌀 이유가 없는 괴물이 내 앞을 가로 막았다는 게 너무도 말이 안됐다. 

그래서 당시엔 그냥 돌아버렸다고 생각했다. 죽을 때가 다 돼서 객기를 부렸다고만 생각했다. 가엾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갑자기 끼어들어 짜증이 올라왔었다.

때문에 기억에 크게 남아 있지 않았는데, 당시 괴물의 죽음이 나를 아이와 겹쳐보아 지키려던 것이었다면 그 행동에 조금은 이해가 간다.  

서로를 살게 해 주었던 것이다. 아이도 괴물도 하지만 지금 아이가 죽은 이상 괴물은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때 괴물은 죽어버렸던 것이겠지. 

이곳에서 일주일 째. 

괴물의 행동은 일정했다. 시간이 되면 붉은 열매를 따오고 짚을 갈아준다. 저녁이 되면 아이의 시체를 데리고 잠시 사라지고 그 뒤 데리고 온 아이의 시체를 눈에 띄게 깨끗하게 씻긴 채 다시 내 옆에 눕혀 놓았다.

그리고 난데없이 나를 안고 데려간 곳은 맑은 물이 들어있는 통이었고 괴물은 조심스럽게 차갑다 못해 시린 물 안에 나를 집어넣었다. 

몸에 괴물의 손이 닿으려고 하기에 쳐냈지만, 어느새 물을 내 머리위로 부어버렸다. 시리다 못해 찢어질 것 같은 물의 온도에 도저히 참지 못하고 통 안에서 나왔고 한기가 들자 가까이 있는 괴물의 머리통을 사정없이 주먹으로 박았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 짜증났지만, 문 이상으로 설명해도 못 알아들을 것 같아 포기하고 젖은 옷을 벗어 쥐어짰다. 

아직 애새끼 몸이라 질병에 취약한 몸인데, 이 날씨에 찬물을 끼얹었으니…….

차갑게 굳어가는 아이의 시체와는 반대로 예상대로 물기를 모두 닦고 짚단 위에 올라갔을 쯤 나는 고열이 나기 시작했다. 

내가 15세 정도만 됐으면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15세 전까진 빌어먹을 정도로 병을 많이 걸렸었다. 기본적인 체력에는 문제가 없었던 것 같은데 면역력은 그야말로 지나가는 병아리 뒷다리 수준. 조금만 무리해도 신경통이 날 정도로 말도 안 되는 몸이었는데, 그게 또 이상한 게 15세가 되면서 병에 취약했던 몸이 점점 면역력을 기르기 시작하더니, 18살이 넘어가서는 웬만한 돌림병도 지나칠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은 앞으로 2년은 더 있어야 한다. 때문에 발발 떨고 있는 손을 한심하게 바라보았다. 

고열에 시달리면서 시간은 일주일 정도가 더 지났다. 

열이 높은 나를 이상하게 바라본 괴물이 안절부절못하더니 근 일주일간 하루에도 몇 번이고 붉은 열매를 가져오고 짚단을 새로 갈고 나만 들고 다시 찬물이 들어간 통으로 집어넣으려고 하던 것을 겨우 놈의 얼굴을 발로 차 막았다. 그리고 일어날 정도는 열이 잡혀 슬슬 나갈 준비를 했다. 

보름을 하루 남겨두고, 미친개 잡으러.

괴물이 자리를 비웠다. 그동안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곳에서 일어나 몸에 붙은 짚을 털어내고 괴물이 늘 사라졌던 곳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과연, 이정도면 문이 날 보름이 가까워질 동안 못 찾는 것도 이해가 갔다. 냄새론 찾을 수 없는 지하로 연결되어 있는 곳이다. 

어느 정도 위로 올라오자 까마득하게 높은 천장이 보였고 그곳을 꽤 오랫동안 다시 오르고 나서야 빛이 닿는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쇠로 만들어진 문을 열고나서야 지상과는 한참 멀어진 곳에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공들여서 신중하게 고른 괴물의 보금자리답게 문이 닫히자 내가 나온 곳은 그저 허물어져 가는 집의 바닥 한 가운데일 뿐이었다. 깨진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작은 빛. 그 빛을 따라 걸어가 깨진 창문 사이로 드러난 풍경을 바라보았다. 

14일 만에 보는 바깥 모습이었지만, 내가 보는 건 지하보다 더 깊은 어둠속 같았다. 온통 피바다였다. 사람의 흔적 따윈 찾아 볼 수 없었고, 생명체 따위는 처음부터 존재하지도 않는 다는 듯 널린 건 오직 시체뿐이었다. 괴물이고 사람이고 서로 뒤엉켜 바스러진 모습이었다. 

밖으로 나와 상황을 살펴보니, 생각보다 더 심했다. 지저분하게 훼손된 사체들. 하나같이 정신없이 난도질한 모습이었는데, 대부분 목 부근이 잘리지 않았다면 목숨만은 부지했을 상처였다. 처참하게 괴롭힌 다음에서야 목숨을 끊었다는 것인데, 이런 질 나쁜 장난질을 좋아할 만한 인간은 한 사람 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세상을 덮는 붉은 달. 

비린내 나는 피를 가득 머금은 개를 찾기 위해 고개를 들어 하늘을 향해 눈을 감았다. 시간이 멈춰버린 듯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지만, 곧 나는 멍청한 미친개가 어디에서 거품을 물고 있는지 그 미약한 울음소리를 찾기 위해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들리는 희미한 비명소리. 

그대로 눈을 뜬 나는 빠르게 벽을 타고 뛰어올라 그곳을 향해 달려갔다. 

귀를 자극시키는 울부짖는 목소리. 그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자 눈에 들어온 것은 반복되는 피를 뒤집어 쓴 탓에 어둠에 물들여버린 멍청한 개 한 마리가 난동을 부리고 있었다.

앞서 달려가 모른다며 울부짖던 놈을 빠르게 뒤따라가 등 뒤로 다가가 그 목을 한 번에 베어 떨어트렸다. 목이 떨어지자 분리된 몸에선 피가 솟구쳤고 문은 그런 사체를 몇 번이고 헤집더니 허탈한 듯 일어나 고개를 숙이고 잠시 서 있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어 검을 바닥에 질질 끌고 어디선가 들리는 인기척을 향해 걸어갔고 놈이 가는 곳 마다 꼬리를 말고 숨어 있는 놈들이 발견됐다. 

발견한 놈들은 플라이였다. 문을 보자마자 그대로 주저앉아 오줌을 지리는 놈들도 있었고 그 자리에서 튀는 놈들도 있었다. 문이 쫒는 건 도망가는 플라이의 등 뒤였다. 단 한 번의 칼질만으로 등을 베어 넘어트린 뒤 자빠져 헐떡이고 있는 플라이의 머리통을 집어 들어 뭔가를 속삭이기 시작한다. 

그러자 원하는 대답이 나오질 않았는지 그대로 든 머리를 벽에 박았고, 얼굴의 형체가 사라지도록 몇 번이고 문은 그것을 반복했다. 이윽고 안면의 뼈마저 무너져 반은 사라져 버리자 그대로 피로 물든 시꺼먼 손을 놓았고 쓰러지는 사체를 밟고 지나가 뒤를 바라보았다. 

문이 바라보는 건 오줌을 지리고 있는 플라이였다. 흡사 악귀라도 된 것처럼 구부정한 허리로 칼을 질질 끌며 다가갔고 오줌을 지린 놈은 경기를 일으키려는 듯 발발 떨더니 극도의 공포심으로 게거품을 물기 시작했다. 

문은 그런 플라이가 아무렇지도 않는다는 듯 눈앞까지 다가와 몸을 숙이고 자빠진 플라이에게 다가와 속삭였다. 바로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이라 이번에는 문이 하는 말이 똑똑히 들렸다. 

“왕은……. 나의 왕은 어디 있지?”

낮은 목소리. 

생긴 게 닮지 않았다면 문이라고 생각하지 못할 목소리였다. 칙칙하게 갈린 목소리가 충분히 문의 상태를 말해주고 있었고, 그에겐 꽤 독한 약이 된 듯싶었다. 

대답 없는 플라이를 바라보던 문이 이번엔 한손에 쥔 검을 치켜들어 기절한 놈을 향해 뻗었다. 그대로 목에 찔러 넣으려는 순간 도저히 피비린내를 견딜 수 없어 입을 열었다. 

“문.”

문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천천히 내려간 손과 올라오는 고개. 붉은 만월이 나를 담고 있었다. 그대로 문의 손에서 떨어지는 검. 문의 얼굴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멍해 있었다. 그 모습에 훌쩍 바닥으로 내려왔고 그러자마자 문이 달려들어 나를 그 품 깊숙이 껴안았다. 

오직 보름 가까이 베는 것 밖에 하질 않았는지 눈에 띄게 몸이 말라있었다. 더럽고 불결해 당장 밀어내려고 힘을 주었지만, 뼈밖에 남지 않은 놈이 힘은 어찌나 강한지 고열에 시달렸던 내가 아직은 밀어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정강이라도 차 버릴 생각에 발을 들어 올렸지만, 귓속을 파고드는 이상한 소리에 그 마저 하지 못하게 되었다. 

“흐……. 으……."

문이 울고 있었다. 

마치 아이로 돌아간 것처럼 서럽게, 서럽게 소리 내며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나를 놓지 않고 곡소리를 내며 울기 시작하는 문이 나의 여기저기를 피로 묻히고 다니자 잠자코 바라보는 것도 한계가 올 쯤. 설상가상 어디선가 살기를 품은 인기척이 다가온다. 위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모양인지 헤매고 있지만, 곧 귀찮아 지는 상황이 벌어질 것이다. 하지만 문은 나를 안은 채 전혀 움직일 생각을 하고 있지 않고 있다. 

보름가까이 떨어져 있어도 깨달은 바가 없었는지 들러붙은 문을 몸을 밀어내 머리통이라도 박아주려는데, 그의 몸이 이상하게 떨려온다. 

앙상하게 마른 몸. 

보다 심각한건 크고 작은 상처가 가득한 몸뚱이에서 피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이런 몸을 하고도 잘도 그동안 휩쓸고 다녔구나 싶을 정도다. 문도 살아 있는 이상 철인은 아닐 터. 엉망인 몸이 긴장이 풀리면서 무너지기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문. 나를 봐라.”

 “…….”

이대로 문마저 넋을 잃어버리면 애초에 교육이고 뭐고 필요가 없게 되어 버린다.

문이 눈물에 젖어 늘어진 모습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얼마나 울어댔는지 눈과 코가 붉게 부어올랐고 현기증이 나는 모양인지 나를 바라보는 시선에 초점을 제대로 맞추질 못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내 말이 이제는 들리는 모양인지 착실하게 고개를 들어 경청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헛고생 시킨 건 아닌 것 같지만, 지체할 시간은 없다. 

“아무 소리 내지 말고 나를 놓아라.”

초점을 맞추지 못했던 붉은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일그러지는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지만, 그것은 눈동자와 같은 붉은 색이 아니었다. 

아무런 울부짖음이 없었지만, 그 모습이 마치 가나를 떠나보냈을 때와 같은 환청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괴로웠다. 나를 안고 있던 손에 힘이 풀리기 시작한다. 그 동시에 정신이라도 잃어버린 것인지 문이 내 앞으로 몸이 무너졌다.  

스스로 손을 놓았다. 

나를 안고 떨어지지 않으려던 본능을 억누르고 내 목소릴 들었다. 손을 놓으면서 싫다고 말하려는 듯 뚝뚝 눈물을 흘리고 있었지만, 장하게도 내 말을 들은 것이다. 

미칠 수 있을 만큼 미쳐 보았을 테니 이로서 문은 내 목소릴 듣지 못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았을 테고 이 경험은 문이 자람에 따라 각인으로 남아 훗날 나를 둘러싼 위험에서 문 스스로를 지킬 수 있을 것이다. 

“잘했다.”

쓰러진 문을 쓰다듬었다. 

보름이 다 되도록 잠에 들지 못한 채 넝마가 된 몸으로 날뛰었으니, 쓰러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이대로 잠들어 내일을 기다려도 되겠지만, 상황은 그다지 태평할 수 있는 편은 아니었다. 

 “놈을 포박하고 데려와라.”

지금까지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던 트란슈 제국의 기사의 휘장이 보였다. 트란슈의 은둔거지로 이용하고 있었던 에덴에서 날뛰고 있던 문은 눈에 띄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문의 실력을 보아 인재에 헐떡일 놈들이 보고만 있지는 않을 터. 상황이 잠잠해지자 두더지처럼 기어 나오는 놈들을 바라보니, 몇몇은 눈에 익은 놈도 있었다. 

특히, 말을 탄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저 이국의 기사는 꽤 오랫동안 알고 있었다. 

당시 트란슈 제국에 소속되어 있다고는 생각하질 못했으나 내가 놈의 정체를 안 것은 1차 대전 때 놈이 드론의 목을 베어버렸을 때였다. 

닮았다고만 생각했지 정말 놈일 줄은 생각하지 못했는데, 2차 대전 때 내게 목이 베인 적장의 공석을 채운 놈이 나를 알아보자 그제야 안면이 익은 놈이라는 걸 알았다. 저 놈이 있기에 결코 난 전쟁이 끝났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휴전을 약속할 때. 나를 바라보던 그 눈동자는 채워지지 않는 목마름으로 이글거리고 있었으니까.

“웬 꼬마도 같이 있습니다.”

“쓸모가 있는 건 백자뿐이다. 놓아줘라.” 

놈의 명을 들은 것들이 기어와 손을 뻗었다.  

“치워.” 

내 말에 다가오던 것들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박장대소를 하며 입을 열었다. 

“너무 무서워서 미쳐버린 거냐? 안심해라 꼬마야. 네게는 볼일이 없으니.”

경고를 무시하고 문에게 손을 뻗는 그것을 내가 들고 있는 단검으로 밀어내 올려쳐 그대로 잘려나가게 만들었다. 불시에 당한 놈이 기겁을 하며 솟구치는 손목을 잡고 뒤로 넘어졌다. 

“더러운 놈.”

그대로 일어난 나는 문의 앞에 섰고 트란슈 기사들은 하나같이 덜떨어진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더니 품에 감춰두었던 검을 하나 둘 들기 시작했다. 말에 올라타고 있던 놈도 잠시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가 싶더니 입 꼬리를 올려 웃으며 입을 열었다. 

“여기가 에덴이라는 걸 잊고 있었군. 저 검은 짐승도 함께 포박한다.”

일제히 내 주위를 둘러싸는 두더지들의 동선을 확인했다. 

단검이라는 취약적인 무기를 가지고 있는 이상 직접적인 근거리 공격이 가장 이상적이다. 

때문에 예전의 나라면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오기만을 기다렸겠지만, 그런 인내심을 가지고 있기엔 신체적인 조건이 너무도 열악하다. 무엇보다 열이 남아 있는 몸이라 조금만 움직여도 나 역시 무너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의 허점을 공략하려 했지만, 좀처럼 발견되지 않는 모양인지 저마다 서로 눈빛을 교환하는 것이 보였다. 

움직일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옷깃의 움직임을 따라 눈을 돌리자 어느 놈이 먼저 나설지는 대충 감이 잡혔다. 이윽고 근육의 움직임에 따라 앞과 뒤를 지키고 있는 놈들이 동시에 검을 들어 길게 뻗으려 했다. 

그들이 움직이려 하자마자 눈앞에 있는 놈의 미간에 들고 있던 단검을 던져 박아주었고 그대로 땅을 짚은 채 주저앉아 길게 내 뻗는 검을 향해 발길질을 해 쥐고 있던 손에서 떨어지게 만들었다. 

손에서 검을 놓쳐버린 멍청이를 향해 허공에서 맴도는 검의 날을 세워 올려 차 잡은 뒤 목을 향해 뚫어 주면서 앞으로 쓰러지는 놈의 머리를 검 날이 놈의 숨통을 완전히 끊어버릴 수 있도록 짓눌러 주었다. 

“대, 대체!!”

난 눈에 띄게 당황해 하는 두더지들을 바라보다 유일하게 눈 빛 하나 바뀌지 않는 말 위의 사내에게 눈길을 돌렸다. 

될 수 있으면 놈과 말을 섞는 건 하고 싶지 않았다. 전쟁 당시 적대적인 관계라고 생각했지만, 놈은 적으로서 나를 보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여인을 대하듯 조심스럽기까지 했는데, 뻔히 의도가 보이는 놈을 상대하는 건 전혀 내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 때문에 몇 번이고 무시했었다. 

휴전 협정을 맺으면서 선전포고나 다름없는 말을 지껄이던 그 순간부터 놈은 내게 이질감을 느끼게 하는 존재일 뿐이었다. 

놈과 안면을 트기는 이르다고 생각하지만, 이대로 문을 데려가는 건 내가 용납하지 않는다. 그렇잖아도 피투성이가 되어 지저분해 있는 놈을 두더지들이 건드린다면 내가 불쾌해질 것 같다. 내 주위에 있었던 모든 이들이 나를 두고 착각하는 게 하나 있다면 그건 바로 내게 무언가 집착할 수 있는 욕망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잘못된 생각이다. 

난 내 것에 대한 욕심이 많다. 내 것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소중한 것이 드물었던 탓에 스스로도 비정상적일 정도로 집착하여 타인의 손길이 닿는 것조차 혐오한다. 

**

트란슈 기사를 눈으로도 쫓을 수 없는 몸놀림으로 두 명을 쓰러트린 소년이 소름끼쳤다. 

고작해야 10대 초반 어린애. 아무리 에덴의 생존자라고 하지만, 소년에게 죽임을 당한 놈들은 트란슈 기사들 중 상위에 속하는 실력자들이다. 그런 이들이 제대로 된 방어조차 못하고 무능력할 정도로 허탈하게 당하고 말았다. 

믿을 순 없었지만, 거짓은 아니기에 현실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하는 트란슈 기사들은 침묵한 채 전혀 움직임이 없는 소년을 향해 일제히 검을 들었다. 장군의 말대로 목숨만은 살려둘 것이다. 허나 결코 멀쩡하게 살아 있게 해줄 생각은 없었기에 그들의 검은 하나같이 매처럼 날카로웠다. 

허공을 가르는 쇠붙이 소리가 라마의 귓가를 울리게 만들었고 한꺼번에 달려드는 놈들을 뛰어넘어 내지르는 검을 밟고 바닥에 내려와 버려진 문의 검을 집어 들었다. 

동시에 그대로 날아오는 검을 유연하게 피하고 날을 흘려보내 앞을 가로 막는 놈의 얼굴에 날을 박아 넣는다. 얼굴에 검을 받은 놈을 방패로 앞에서 날을 세우고 있는 놈들을 향해 밀어내 그 배를 밟고 뛰어올랐다. 

라마는 섬광과 같은 속도로 몸을 회전시켜 눈앞을 가로 막는 무리 중 한 명의 정수를 향해 내리쳤다. 

골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라마의 손목도 시큰거리며 울리기 시작했지만, 그에 상관하지 않고 등 뒤를 내지르는 검을 파악하고 그 몸을 숙여 단번에 휘저어 복부를 가르자 고통을 상기한 놈이 터져 나오는 장기를 붙잡은 채 뒤로 넘어졌다. 

작은 소년이 보여주는 검술은 마치 예술을 감상하고 있는 것 처럼 아름다워 눈을 뗄 수 없었다. 제대로 움직임조차 잡지 못하는 걸 믿을 수 없다는 듯 주시했지만, 그 작은 몸은 시간이 지날수록 지친 기색 하나 없이 춤을 추듯 움직였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생각일 뿐. 라마는 상당히 지쳐가고 있었다. 고열에 시달려 열이 떨어진지 얼마 되지 않았고 그 덕에 몸이 무거워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아 쓸데없이 기술이 커지고 말았다. 

“하아…….”

내내 아무런 반응이 없던 라마가 굳게 다물고 있던 입을 열어 속을 채웠던 숨을 내쉬었다.

라마는 비명이라도 지르듯 올라오는 통증에 정신이 흐트러질 것 같았다. 

그 순간이었다. 

라마의 왼손에 투박한 사슬이 감겼고 그것이 끌어당기는 힘에 밀려 균형을 잃고 주저앉은 것은.

사슬의 끝에는 트란슈의 최연소 장군이라 부르는 슈레이가 서 있었다. 그의 입 꼬리가 반사적으로 올라갔고 살아남은 4명의 트란슈 기사들은 그 검을 들어 라마의 목 부근을 겨냥했다.  

팽팽하게 당겨지는 사슬. 기를 쓰고 감당하고 있지만, 어린아이의 몸으론 무리라고 말하고 싶은 것인지 바닥을 질질 끌면서 끌려가는 것이 수치스러울 정도였다. 이대로 잡혀 있을 수만은 없어 쥐고 있던 검에 힘을 주었다. 

지금의 나는 사슬을 끊는 것도 슈레이를 죽이는 것도 할 수 없다. 어째서 놈이 이곳에 배치된 것인지 이해는 가지 않았지만, 에덴에서 끌려간다면 용병에 집영되는 것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 나 혼자라면 상관없겠지만, 시기도 아닐뿐더러 문까지 끌려가게 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손목을 감싼 사슬에 힘이 들어갈 때 마다 파고드는 통에 피가 새여 나왔다. 머리가 울리고 있는 통에 시야마저 확보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그러나 벗어날 수 있는 기회는 얼마든지 있기에 말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슈레이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로던프는 에덴을 버렸다.”

차가운 목소리. 감정하나 섞이지 않았지만, 잔정이 많은 놈이 말하는 건 사실 뿐이었다. 굳이 말해주지 않아도 될 것을 말하고 있다는 건 나를 설득시켜 제 발로 걸어오게 할 생각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놈이 지껄일 때 마다 비집고 나오는 실소를 참기는 어려운 것이었다. 

 “그럼에도 남은 충성이라는 게 있는 것이냐.”

에덴은 로던프에게 있어 철저히 버려진 곳이다. 직접적인 타국에 개방을 허락할 만큼 그들은 잃어버린 땅 에덴을 되찾을 생각은 없는 것이다. 

로던프는 과거 용병들이 그러했듯 <보던>의 모든 것을 지워버린 것처럼, 치부라 알려진 에덴을 지워지길 원하고 있다. 남을 주기는 아까우니, 모든 걸을 한 번 밀어버린 뒤 입맛대로 다시 세울 생각인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에덴은 2차 대전이 터지고 휴전에 들어와서도 사라지지 않았다. 덧붙여 에덴의 땅을 포함한 로던프의 일부가 슈란트 제국에게 넘어가 다시는 찾을 수 없는 땅이 되어버린다.

에덴은 로던프의 땅이 되기 훨씬 전부터 트란슈 영토였다. 슈레이가 빼앗긴 땅 에덴을 되찾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슈레이는 에덴을 돌려받고 재건을 원하고 있었다.

나는 보던의 들개로 태어나 용병에 끌려갔다. 

15세 이전의 나는 형편없이 몸이 약했기에 크고 작은 부상을 당했고 그 과정에서 그들을 만났다.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사랑스러운 사람들. 그들을 사랑했다. 너무도 사랑했기에 나의 모든 것들 걸고서라도 지켜주고 싶었다. 

그래서 기사가 되었다. 로던프의 늑대로 살아가면서 나는 나의 사람들을 지켜주고 싶었다. 

그래, 단지 지켜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단두대에 오르면서 나로 인해 사라진 그들을 생각했다. 그리고 죽을힘을 다해도 끝내 지켜줄 수 없었던 그들에게 나라는 존재를 처음부터 지워버릴 것이라 다짐했다. 그렇게 하면 그들이 나를 그리워 할 것을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나는 들개. 왕 따윈 필요 없어.”

죽음을 원했었다. 그들의 기억 속에서 다시는 존재하지 않을 수 있는 건 그것뿐이었다. 하지만, 운명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흐르곤 한다. 문에게 있어 나는 그의 모든 것이 되어버린 것이다. 

가나를 살리기 위해 문에게 목줄을 채웠다. 한 사람을 살리고자 누구보다 자유롭게 날뛰어야 할 놈을 희생시켰다. 

문에게 있어 나는 세상의 전부다. 그러니 나 역시 세상의 전부는 문 이여야만 한다.  

칼을 들어 슈레이가 앉아 있는 말을 향해 던졌다. 목을 향해 던져 깊이 박히진 못했지만, 충분히 놀라 요동칠 정도는 됐었다. 말이 날뛰자 사슬이 느슨해졌고 나의 목을 향해 있던 칼날을 감겨있는 사슬을 당겨 막았다. 

하지만 내게 남은 칼이 없어 느슨해진 사슬로 반격을 하는 건 역부족이라 느끼며 다가오는 검을 더 이상 막을 수 없을 때, 눈앞에 드리워진 검을 든 두더지 한 마리가 가차 없이 날아가 벽에 박혔다. 

  

쓰러져 있어야 할 문이었다. 뒤에서 주먹으로 머리를 쳐 날려버린 것인지 문의 손등에는 철모에 박힌 돌기에 당한 상처로 피를 흘리고 있었다. 눈을 뜨고 있지 않았다. 내 목소릴 듣고 본능적으로 움직인 것인지 서 있는 폼도 정상이 아니었다. 이대론 위험하다. 

훈련이 잘 된 말이었는지, 금세 얌전해진 말 위해서 슈레이가 내려왔다. 놈은 느슨해지긴 했지만, 결코 놓지 않았던 사슬을 다시 한 번 잡아 당겼다. 

문이 내게 다가왔다. 문에게 드리워진 두 개의 칼날. 나머지 하나는 나를 향하고 있었지만, 나 역시 그대로 일어나 문을 잡았다. 

“문!”

이대로 한 번 더 날뛴다면 저들은 문을 죽일 것이다. 이미 나와 문이 빼앗은 목숨만 다섯이 넘었다. 슈레이 또한 예상하지 못한 출혈이었는지 문이 깨어나자 놈들의 움직임이 지나치게 예민해져 있었다. 

 “제대로 눈을 떠.”

앞으로 달려드려는 문을 잡아 말했다. 내 목소리를 들은 녀석이 조금씩 눈을 떠 앞을 바라보는가 싶더니 고개가 내려와 나를 향했다. 그러더니 그대로 무릎을 굽혀 주저앉아 내게 기대고 다시 그 눈을 감았다. 

날뛰려던 녀석이 무너지자 문을 향한 검 날이 다시 내게 향했다. 

그때, 벼락이 내리치는 듯한 충격과 먼지바람과 함께 거대한 그림자가 하늘에서 내려왔다. 

나와 문을 뒤덮는 거대한 그림자.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눈에 익은 괴물이었다. 아마 밖으로 나간 나를 찾으러 다니다가 나타난 것이겠지.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다. 다만 이런 상황까진 바라지 않았던 것뿐이지. 

지금 괴물이 나선다 해도 슈레이를 상대할 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놈들은 괴물의 약점을 손바닥 뒤집듯 꿰고 있다. 괴물의 등장에도 큰 동요를 하지 않던 슈레이는 익숙한 듯 검을 꺼내 바로 집었다. 

하지만, 분명 그들을 상대할 것이라 생각했던 괴물이 놈들을 지나쳐 빠른 속도로 내게 다가와 나와 문을 그 품에 안아 들고는 그대로 땅을 박차고 뛰어오르는 게 아닌가. 

인간을 보면 살육밖에 떠올리지 않도록 교육받은 괴물이 전세를 파악해 불리하다 싶은 상황에서 스스로 도망을 치는 것이다.

떼를 지어 공격하는 특성을 가진 또 다른 괴물들이 하나 둘 모여 슈레이를 공격하기 시작했고 약점을 파악하고 있다곤 하나 절대로 쉬운 상대가 아닌 괴물들을 상대하면서 우리를 쫓아올 여유까지는 없었다. 

말을 하는 것부터 믿기지 않았지만, 괴물의 행동은 도저히 납득이 가질 않았다. 

슈레이는 달려드는 괴물을 밟고 뛰어올라 목을 쳐내면서 바닥에 부드럽게 착지했다. 지금이 마지막 괴물이었다. 허공에 괴물의 피가 묻은 칼을 털어낸 뒤 넣은 슈레이는 괴물이 두 마리의 짐승을 들고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았다. 

“놓쳐버렸군.”

날뛰는 백자를 제압하기에는 놈은 너무 흥분해 있었고, 백자가 쓰러질 날 만을 기다렸는데, 지독하게도 견디고 있던 놈은 소년이 나타나자 맥없이 두 무릎을 굽혔다. 

안타까웠다. 

그 검은 짐승이라면 분명 큰 전력이 되었을 것이다. 아니, 그것을 떠나서 반드시 데려오고 싶었다. 지옥으로 만들어버린 이곳에서 살아남은 어린 짐승은 마치 과거의 자신을 보는 것 같았으니까. 

예상을 뒤엎고 솔직히 강했다. 어린 나이를 감안하면 말도 안 되는 기술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체력이 남아 있을 때 얘기고, 도통 허점을 보이지 않던 놈이 열에 들뜬 숨을 몰아쉬는 순간 잡을 수 있었다. 

이제 거의 다 됐다고 생각했는데, 괴물이 나타나 그들을 데리고 사라져 버렸다. 얼마든지 쫓아갈 수 있었지만, 뜻밖의 출혈과 근처까지 로던프의 가디언들이 들어오고 있어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다. 

“돌아간다.”

인연이 된다면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그땐. 

“절대 놓치지 않아.”

슈레이는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억지로 옮겨 뒤 돌았다.

**

괴물이 데려온 곳은 마른 짚이 가득한 보금자리였다. 땅이 꺼지는 듯한 기분과 동시에 도착한 괴물이 조심스럽게 문과 나를 짚 위에 내려놓았다. 옆에는 달라진 것 없는 창백한 아이의 시체가 눈을 감고 있었다. 

괴물이 허둥지둥 움직이기 시작했고 어디론가 나가 금방 나타난 괴물은 품안에 깨끗한 짚을 가득 들고 여기저기에 깔기 시작했다. 특히 피투성이가 된 문의 옆으로 많은 짚이 깔렸고 내 앞으로도 짚을 한 가득 부어 먼지가 날렸다. 

“은아.”

내 목소리에 괴물의 움직임이 멈췄다. 

확실히 반응하고 있다. 괴물은 온 몸을 움찔 거리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가 지어준 놈의 이름인가. 하지만 목도리에 새겨진 자수도 오래전에 새겨진 것처럼 보였었다. 자수의 솜씨로 보아 절대 아이가 했을만한 게 아니다. 

난 옆에 시들어 있는 아이를 바라보았다. 

장례의 의미도 모르는 놈은 점점 썩어 사라지는 아이를 계속해서 바라보았을 것이다. 나를 만나 죽음을 맞이할 2년을 매일을 지옥에서 살아야 했겠지. 어째서 아이가 사라지고 있는지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말이다. 

난 다시 괴물을 바라보았다. 마치 다시 한 번 불러달라는 듯 나를 바라보는 눈에는 간절함이 가득했다. 

덥수룩한 머리카락 때문에 잘 보이진 않지만 어떤 눈을 하고 있는지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난 간절히 바라는 이름을 다시 읊을 수 없었다. 거두면 안 될 것이었다. 인연은 여기서 끝나야 한다. 

“나는 인간 아이가 아니다. 때문에 네가 감쌀 이유는 없다.”

내 말을 알아듣는 건지 못 알아들은 것인지 빤히 나를 바라보던 괴물은 내게 손을 뻗었다. 습관적으로 얼굴에 다가오는 손을 밀어내자 물러난 손이 잠시 허공에 멈춰 있더니 괴물에게 돌아갔다. 

하지만 곧 괴물은 내 말을 못 알아들었다는 듯 일어나 부산하게 움직이기 시작했고 난 그런 어설픈 움직임의 괴물을 바라보다 이내 눈길을 돌렸다. 하지만 곧 괴물은 내게 다가와 붉은 열매를 들이댔다. 그 모습에 나오는 한숨을 막을 수 없었다. 

 **

문은 어둠속을 달리고 있었다. 등 뒤에는 푸른 손들이 문을 잡기 위해 뻗고 있었고 문은 그런 징그러운 것들을 피해 단 하나의 왕을 찾아 어둠을 헤맸다. 하지만 왕은 보이지 않았다. 

언제나 낡은 왕좌에 앉아 있어야 할 자신의 왕이 보이지 않았다. 

살면서 단 한 번도 느낀 적 없는 절박한 고통에 비집고 나오는 눈물을 의식하지 못하고 몇 번이나 앞을 방해하는 푸른 손들을 베면서 왕을 찾았다.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왕을. 

지금 찾지 못하면 그대로 사그라져 자멸해 버릴 왕이기에 기필코 찾아 품에 안아줘야만 했다. 

문이 눈을 떴다. 

눈앞은 희미했고 시야가 흐린 탓에 울렁이는 붉은 무언가가 앞을 가리고 있어도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잠시 패닉에 빠져 침묵하던 문이 이내 눈앞에 있는 것이 붉은 과일이며 그것을 쫓아 바라본 곳에는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 거대한 뭔가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 순간 비집고 들어오는 기억. 

왕을 붙잡으려 하던 벌레들과 겹쳐보이자 그대로 손을 뻗어 주먹을 내지르려고 했다. 하지만 그 순간. 그 무엇보다 달콤한 목소리가 문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문.”

신선한 충격이었다. 주먹을 내려놓고 고개를 돌리자 짚 위에 편안히 앉아 있는 자신의 왕이 보였다. 낡고 허름한 옷을 걸치고 있지만, 그동안 머리카락 하나도 보이지 않던 자신의 작은 왕이 분명했다. 감격한 문이 그대로 뛰어와 왕을 안으려 했지만, 왕은 그대로 발을 들어 문의 얼굴에 박아 더 이상 다가오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더럽게 어딜 달려들어.”

 익숙한 고통에 마냥 행복해진 문이 아픈 안면을 감싼 채 웃고 있자, 그것을 눈치 챈 것인지 왕은 고개를 돌리고 혀를 찼다. 그런 모습까지도 사랑스러워 놓칠 수 없었던 문이기에 낄낄거리며 얼굴을 가린 손가락 사이로 왕을 바라보는데, 자신의 머리 옆으로 뭔가가 다가왔다. 

손을 내리고 고개를 돌려보니 그것은 붉은 열매였다.

잠시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왕을 바라보자 그 모습을 본 왕은 덜떨어진 표정의 문을 위해 직접 입을 열어주었다. 

“인정한 모양이다.”

“에?”

“동족으로.”

“엑!?!”

라마의 말에 기겁하고 소리를 질렀다. 

두 손 가득히 담겨진 붉은 열매. 그렇잖아도 처음 눈을 떴을 때 본 것이 곰 같은 놈이라 불만이었는데, 이제는 그 덩치가 다소곳이 앉아 수줍게 열매를 들이대고 있었다. 

문은 온몸에 소름이 돋으려고 하자 당장 놈을 요단강으로 보내버리기 위해 날을 세우려 했지만, 배는 정직했다. 

꼬르륵-

고픈 배가 미친 듯이 울었고 입에서는 침은 반사적으로 흘렀다. 덩치의 눈치를 보던 문은 흘깃 바라보더니 빠른 속도로 손 안에 있는 붉은 열매를 하나 둘 입안에 밀어 넣기 시작했다. 

 “일어난다.”

 “우?”

더 있을 이유가 없는 나는 그 자리에서 일어났고 그게 무척이나 갑작스러웠는지 문은 입안에 가득 열매를 밀어 넣어 볼이 빵빵해진 채 라마를 바라보았다.

낯이 완전히 익진 않아 여전히 경계를 하고는 있었지만 그건 본인의 이야기였고, 라마가 보기에는 두 짐승이 도란도란 앉아 노닥거리는 것 밖에 보이지 않았다. 

정상적인 몸은 아니었지만, 여기서 지체했다간 여러 사람이 귀찮게 할 것이라는 걸 알기에 시간 엄수는 라마에게 개인적인 철칙과 같은 것이다. 

때문에 느긋하게 앉아 있는 문을 지나쳐 밖으로 나가려고 움직였다. 문 또한 그런 라마를 쫓아 헐레벌떡 일어나 쫓아갔다. 하지만, 그런 라마의 앞을 막는 이가 있었으니. 방금전만해도 도란도란 앉아 열매를 들이대고 있었던 괴물이었다. 

 “비켜.”

 “치구…….”

어눌한 말투. 무슨 말을 하고 있는 진 모르겠지만, 괴물과의 인연은 여기에서 끝내야만 하는 것이기에 우두커니 서 있는 괴물을 차갑게 지나쳤다.

라마가 지나가지 그 뒤를 문이 뒤따랐다. 뒤조차 돌아보지 않고 걸어가는 라마대신 문이 고개를 돌리자 괴물은 그대로 서서 밖으로 나가는 라마와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입안에 있는 것들을 모두 삼킨 문은 아무 말 없이 걸어가는 작은 왕의 작은 등을 바라보았다. 작은 등과 다를 것 없는 작은 머리통. 저렇게 작은 데 무슨 생각이 그렇게 많은 것인지 왕은 스스로를 한계까지 몰아세우고 있었다. 

언제나 이성보다 본능이 앞서는 문은 그런 작은 왕을 이해할 순 없었다. 

왕이 사라진 그날. 문은 다시는 왕을 못 볼 수 있을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빠져있었다. 그 불안이 얼마나 깊고 참혹한지 도저히 빠져나올 방도를 알 수 없었고, 점점 미쳐가는 자신을 짓누르지 못한 채 울부짖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왕은 다시 찾아왔다. 버려졌을 것이라 생각했던 그 절망의 순간에 나타나 지금 눈앞에 아장아장 걸어가고 있다. 

“안 올 줄 알았어.”

장난스러운 말투였다. 하지만 문은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었다. 무슨 짓을 해서든 찾았겠지만, 자신은 버림받았다고 생각했다. 언제나 그랬으니까. 

라마는 나란히 걷고 있는 문에게 눈길을 돌려 바라보다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명백히 무시하는 태도였지만, 문은 상관없었다. 대답을 바라고 입을 연 것은 아니었으니까. 더욱이 과거에 크게 연연하지 않기에 눈앞에 왕이 있으니 그것으로 된 것이었다. 

하지만, 작은 왕은 뜻밖에도 그 입을 열어주었다. 

 “네가 찾고 있었으니까.”

무심한 말투였다. 그 말 어디에도 애정이라는 게 담겨있지 않았지만 문은 점점 밝아지는 얼굴을 주체하지 못하고 활짝 웃은 채 라마의 두 겨드랑이 사이를 손으로 잡아 그대로 안아 올렸다. 

“잘 잡아. 단숨에 올라갈 테니.”

라마가 무어라 반박도 하기 전에 부상을 당했다고는 믿어지지 않게 문은 벽을 차고 뛰어 올라 지상으로 향했다. 

정말로 지상까지 단숨에 올라온 문은 라마를 안은 채 낡고 허름한 집에서 빠져나왔다. 웬일로 내려달라는 소리 없는 라마를 기세 좋게 안고 가던 중. 그들을 기다리는 이들이 있었으니, 생각만 해도 끔찍한 수다쟁이 오덴과 더불어 다수의 호쿠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창백했고 문과 라마를 보자 하나 같이 검을 뺀 채 긴장하고 있었다. 저것들이 단체로 날구지하나 싶어 보았더니 시끄러운 오덴이 목청껏 소리를 질렀다. 

“이 멍청아!!! 당장 이쪽으로 달려!!”

느껴지는 기척. 그것은 살기에 가까웠다. 왕이 향한 시선도 문의 등 뒤였기에 그대로 고개를 돌린 문은 그 덩치로 잘도 쫓아온 괴물을 볼 수 있었다. 또한 괴물의 손에는 짚단위에 눈을 감고 있었던 아이의 시체가 들려 있었다. 

“전체 발검!”

바드가 소리쳤다. 일제히 호쿠들은 검을 빼 날을 세워 집었고 겨냥하는 이는 괴물이었다. 

플라이의 수가 비정상적으로 줄어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황급히 도착했지만, 이미 살아남은 수는 꼭꼭 숨어 지원을 바라고 있었던 놈들과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은 놈들을 합으로 6명이다. 

처음 행진에 300명이 조금 넘었고 예상은 150명으로 한 것에 비하면 이건 손해 정도로 끝날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해서 도착한 곳에는 그간 볼 수 없었던 문이 검은 소년을 안은 채 나타났고 그 뒤에는 괴물이 살기를 내뿜고 있었다. 

당연히 죽었을 것이라 생각했던 놈은 안 죽고, 살아 있을 것이라 의심하지 않았던 놈들은 전부 전멸하다시피 했다. 

모든 원인이 저 괴물에게 있다고 판단. 바드는 기필코 저 괴물의 명줄을 끊어버릴 것이라 다짐하고 혈도(血刀)를 외치려던 찰나였다. 

갑자기 문이 검은 소년을 내려놓더니 괴물에게 다가가는 것이 아닌가!

 **

문은 자신의 품에 안긴 왕을 내려다보았다. 내려놓으라는 명령도 없이 등 뒤에 있는 덩치를 바라보고 있는데, 쫓아온 머저리들 중 하나가 ‘발검’을 외치자 문의 어깨를 쥐고 있던 작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지만, 문은 그런 왕을 내려다 보다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왕의 뜻대로.”

사랑스러운 나의 왕을 위하여. 

문은 그대로 라마를 바닥에 고이 내려놓았고 덩치의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품에는 시체로 보이는 작은 아이를 안은 채 경직된 자세로 움직이지 않는 덩치를 바라보던 문은 그 손을 들어 멱살을 잡아 몸을 숙이게 한 뒤, 넉넉지 않는 팔로 그 목을 감았다. 

“문!!!! 이 미친놈아!! 당장 떨어져라!!”

오덴이 기겁하고 소리쳤다.

그는 바드에게 어서 혈도 명령을 외치라는 듯 다급하게 바라보았고 마찬가지로 문의 행동에 당황해 멈칫 거리던 바드가 혈도를 외치려는 순간 뻔뻔스럽게 웃고 있던 문이 사뭇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내 아우한테 검을 뽑는 놈들은 본인 내장 구경 시켜줄지 알아.”

그렇잖아도 당황해 하고 있던 호쿠들 전원이 이번엔 기겁을 하면서 입을 벌렸다. 전혀 안 닮았다. 저건 종족 자체가 틀렸다. 설마 의형제라도 맺었다고 말하고 싶을 참인지 도통 이해할 수 없는 발상을 하며 협박하는 문을 보면서 호쿠들은 한결같이 속으로 이렇게 외쳤다. 

‘저 미친놈!!’

하지만 괴물하고 눈을 마주치며 “아우야, 형 해봐 형.” 하며 낄낄거리고 있는 폼과 또 그런 문을 보며 아까까지 살기를 뿜고 있던 괴물이 온순해져 입을 달싹이는 것을 보고 바드는 손을 옆으로 펼쳤다. 

“납검.”

일제히 검을 들었던 호쿠들이 칼을 집어넣었다. 손해를 감수해서라도 괴물을 처단할 이유가 없었다. 더구나 문과 싸울 맘은 더더욱 없기에 내린 명이었지만, 저 대책없는 또라이를 어쩌면 좋을지 바드와 오덴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았다. 

“도착하는 즉시 저 망아지를 데려와라.”

바드는 오덴에게 명했고 더는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 호쿠들에게 남은 플라이를 데리고 귀환을 명했다. 바드의 밑에 있는 호쿠 중 오덴은 꽤 유능한 인물이었으나 이번 명령은 그 역시 자신이 없었다. 

오덴은 일단은 말은 해 둬야 할 것 같아 문의 앞으로 다가와 말했다. 

“일단 돌아간다. 그 부분은 따로 듣겠어.”

“아우야, 고기는 없든?”

말 그대로 오덴의 말은 개무시를 하며 괴물과 쑥덕거리는 모습에 열이 뻗힌 오덴이 꽥! 하고 소리쳤다. 

“너너너!!! 임마!! 이번 플라이 무리에 낀 것도 각오해!!!”

씩씩거리며 귀환준비를 위해 돌아서는 호쿠들과 오덴. 막 뒤돌아 걸어가려는 순간 서늘한 느낌에 당황한 오덴이 주위를 둘러보자 그의 시선이 멈춘 곳은 운 좋게 살아남은 검은 소년이었다. 

오덴은 그 자리에 있을 수 없어 발을 옮겼지만, 저 운 좋은 검은 소년은 그렇잖아도 불길했던 기운이 더 새까맣게 타고 있는 것 같아 꺼림칙함을 버릴 수 없었다. 오덴이 사라지자 웃는 낯을 유지하고 있던 문이 무표정으로 돌아와 은아의 목에 걸고 있던 손을 내리고 허공에 털었다. 

영 탐탁지 않는 얼굴의 문이 쩝쩝거리며 묘한 기운에 고개를 들어보자 망령이라도 불러 모으고 있는 듯한 작은 왕이 눈에 들어왔다. 그에 화들짝 놀란 문이 은아의 뒤에 그 모습을 숨었다. 

라마는 걸음을 빨리해 은아의 앞까지 다가왔다. 왜 시키지도 않는 짓을 나서서 일을 만드는 것인지 어김없이 올라오는 두통에 화기를 못 참고 손을 들어 검지를 까딱거렸다. 멀리 도망가는 일 없이 은아의 뒤에 숨어 고개만 내밀고 있던 문이 그런 라마를 본능적으로 두려워하고 고개를 저었다. 

“당장. 이리 와.”

라마의 입이 기어코 열렸다. 

문은 그런 왕의 명령을 어길 수 없어 잔뜩 어깨를 움츠리고 은아의 등에서 빠져나와 살살 눈치를 보며 앞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손을 뻗어도 닿을 거리가 아니니 그 모습에 속이 뒤집어진 라마가 발을 옮겨 문의 머리통을 자신의 두통만큼 쥐어박았다. 

눈앞에 별이 보이는 충격에 문이 자신의 머리통을 붙잡고 몸을 숙이자 더 때려봤자 달라질 것은 없어 속은 부글부글 끓고 있지만, 분노를 억제하고 주먹을 집어넣었다. 

문의 행동은 이해할 수 없었다. 닉스의 일만해도 들개의 서약을 걸만큼 자신에게 맹목적이지 않았던가. 그런 놈이 갑자기 아우를 만들고 형이라니. 

사실 형과 아우라는 단어를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놀라웠다. 

과거의 문이라면 절대도 일어날 수가 없는 일이다. 누군가를 보살피고 밑에 둔다는 개념조차 없는 놈이니까. 당장 죽일 것 같이 굴던 놈을 아우로 둔다니. 대체 어떻게 생긴 머릿속이여야 가능한 건지 라마는 당장 저 수박 같은 머리통을 쪼개 그 안을 보고 싶었다. 

“놈은 들개가 아니다.”

스스로를 은아라 알고 있는 저 놈은 절대로 들개가 될 수 없다. 그런 은아를 문이 완전히 받아들일 수는 없을 터. 결국 서로 짐밖에 되지 않아 둘 모두에게 위험이 될 수 있다. 더욱이 2년 후의 과거를 알고 있는 자신이기에 은아를 받아들일 생각은 없었다. 그저 죽지 않길 바랐다는 게 아니다.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스스로 희생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그래서 이번을 끝으로 다시는 에덴에 올 생각은 없었다. 

딱하지만, 때론 스치지 말아야 할 인연이라는 것도 있는 법. 이른 시기에 만났다면 반드시 바로잡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문이 이런 식으로 개판으로 만들지는 몰랐다. 

 “알아. 그래서 왕의 밑에 있을 자격이 되는 거니까.”

앉아서 머리를 감싸고 있던 문이 입을 열었다. 뭔가를 말하려는 것 같아 내려다보니 머리를 감싸고 있던 손 사이로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본다. 

 그 눈이 광기어린 집착으로 일렁이고 있었다. 

“인간은 필요 없어. 금방 망가져 버리거든. 짐승도 필요 없어. 그건 내가 용납 못해.”

“해서, 인간도 짐승도 아니니 이런 짓을 했다?”

“…….” 

문은 말을 하지 않고 손을 내렸다. 나를 바라보지 않았다. 다만 입술을 깨물고 뭔가에 화가 나 견딜 수 없다는 듯 바닥을 긁고 있는 손에 힘을 주었다. 

“난…….”

침묵하던 문이 입을 열었다. 그 말을 기다리고 있던 나는 문의 상태가 조금 이상하다는 걸 알았다. 분명 분노가 들어있었다. 몸을 부들부들 떨 만큼 치욕스러워하고 있는 분노였다. 하지만 그 안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두려움도 함께 보였다. 

“역겨울 정도로……. 나약해. 이대론……. 왕을 잃고 말거야.”

  

바닥에 주저앉은 채 잔뜩 풀이 죽어 있는 문의 모습에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어버렸다. 놈에게 있어 이번일은 스스로 자책을 할 만큼 독한 약이 되었다는 것이데, 솔직히 이정도 까지는 바라지 않았다. 

그저 깨닫기만 해도 좋겠다 싶었는데, 이제 눈앞에 찌그러져 있는 놈은 과거에 내가 알고 있던 문이 아니다. 

과거의 나. 

소중한 것을 지키고 싶었으나 모든 걸 잃어버린 나의 모습이 보였다. 절망적일 정도로 자신이 역겨웠던 그때. 나약함을 저주 했던 그 모습을 그대로 비춰주고 있는 문을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확실히 넌 날 얕보고 있어.”

그 말에 어깨를 움찔 거리는 문. 어울리지도 않는 짓을 하면서 머저리처럼 찌그러진 놈을 지나쳐 은아의 앞에 섰다. 아이의 시체를 안고 있던 은아는 상황을 전혀 알지 못하겠다는 듯 나와 문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이 녀석이 네 대신이라고?”

“…….”

문이 대답하지 않는다. 흘깃 뒤를 돌아 바라보았더니, 금방이라도 붉은 눈동자에서 비가 내릴 것처럼 촉촉이 젖어 들어가고 있었다. 부정하고 싶겠지. 하지만 그럴 수 없는 것이다. 단순하게 살아갈 놈이 생각이라는 걸 알게 되면서 꽤나 복잡하게 변하고 있었다. 

“좋다. 따라와라.”

은아와 문을 불러 따라오게 한 뒤 난 걸음을 옮겼다. 내가 향할 곳은 에덴에서 가장 핏물이 덜 스며든 땅이었다. 

양지가 바르고 볕이 잘 들면 좋겠지만, 그것까진 바라지 않는다. 어느 정도 걸어가자 숲이 나왔고, 숲을 둘러싼 곳에는 피 냄새가 맡아지지 않았다. 

하늘을 보니 적당히 나뭇잎 사이로 빛이 내려오고 있었다. 옅은 빛에도 싫어하는 문이 인상을 쓰면서도 잘도 따라왔다. 

가던 길을 멈추고 난 잠시 바닥을 바라보았다. 발로 툭툭 건들면서 땅을 파 보는데, 비가 내리지 않았어도 숲이 있던 곳이라 적당히 축축한 것이 이정도면 됐겠다 싶다.

난 고개를 돌려 문을 바라보았다. 

“파.”

“?”

“이곳. 네 키 만큼 파라.”

발로 땅을 툭툭 건들었다. 문이 잠시 멍한 얼굴로 날 바라보더니 그 고개가 바닥으로 향했다. 

“나 아무것도 없는데?”

“손과 발이 달렸는데, 뭐가 더 필요하지?”

끙끙거리며 문이 두 팔을 걷고 내가 발로 짚던 곳을 손으로 파헤치기 시작했다. 

두 손을 이용해 이유를 묻지 않고 땅을 파자,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 팔짱을 끼고 물러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땅을 파는 솜씨가 수준급이다. 흡사 개 같은 모습인데, 어느새 머리통이 겨우 보일정도로 파들어 가는 모습에 이제는 됐다 싶었다. 

문이 흙투성이가 된 채 다 팠는지 구멍 위에서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내 옆에 있는 은아를 겨냥해 입을 열었다. 

 “그것을 묻어라.”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아이 역시 그것을 바라고 자신의 이름을 괴물에게 붙여준 것일 터. 은아는 두 번 다시 괴물이 될 수 없다. 평생 그 이름을 안고 과거와 함께 살아가야 한다. 그래서 잊으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잊어도 될 과거 따위는 어디에도 없으니까. 

그리워하되 후회하지 말 것이며, 잊지 못하되 연연하지 말아야 한다.  

문이 구멍 밖으로 빠져나왔고 은아는 잠시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내 말을 알아듣고 구멍 가까이 다가와 몸을 숙였지만, 미련이 남는지 손을 떼지 못하고 아이의 얼굴을 쓰다듬고 있는데, 그 모습을 바라보다 난 조금은 지저분한 내 겉옷을 벗어 아이의 몸 위에 덮어 주었다. 

“이제는 춥지 않겠지. 묻어줘라. 그 안에도.”

한 철의 반딧불 같은 인생을 살다 간 아이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다. 나머진 은아 스스로 결정해야 할 문제. 난 그대로 떨어져 은아를 지나쳐 숲을 빠져나왔다. 

문이 뒤따라오자 어느 정도 걷다 그대로 멈춰 몸을 돌려 그대로 문의 배를 발로 찼다. 기습에 놀라 허리를 숙이고 고개를 들자 그대로 땅을 차고 몸을 회전시켜 뺨 부근을 바로 차 주었다. 

그대로 땅바닥에 처박힌 문. 난 그런 기생충 같은 놈의 머리통을 잘근잘근 밟아 다시 한 번 차 주었고 그대로 몸을 숙여 놈의 머리통을 잡아 거칠게 들어왔다. 

“어지간히도 못 알아듣는 것 같으니, 마지막으로 설명한다.”

미친개를 거둔 기억은 있어도 병든 닭을 데려온 기억은 없다. 머리통을 쥐고 있는 손에 힘을 주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난 감히 네놈이 지킬 대상이 아니다.”

문의 눈동자가 나를 향한다. 난 이놈의 왕. 인간들에게 있어 왕은 보호를 받아야 하는 입장이겠지만, 나는 들개. 들개의 왕은 보호 따위는 필요치 않는다. 왕은 무리를 지키고 무리는 스스로를 지킨다. 서로를 지키는 건 부부로 연을 맺은 들개들 뿐. 

“똑바로 봐. 네놈이 왕이 누구 인지.”

“크큭큭…….”

문의 웃음소리가 입가에서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이제야 정신을 차린 모양인지 끊임없이 웃고 있어 머리통에서 그 손을 놓았는데, 갑자기 문은 그 고개를 들어 손을 뻗은 뒤 내 양어깨를 잡아 고개를 뻗었다. 

그 순간, 말캉하고 거친 무언가가 입술에 박혔다. 

   

집요하게 파고드는 통에 잠시 가만히 행동을 지켜보았다. 과거에도 몇 번이고 이런 행동을 보인 적이 있었다. 예전과는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기본적인 성격은 바뀐 것 같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까. 

보통 녀석이 이런 짓을 할 때에는 남은 여유가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어 하거나, 반항직전에 자주 보였으나, 과거 친우를 잃고서부터 더욱 빈번해질 정도로 뜬금없이 하는 경우도 많아서 딱히 왜 하는가는 모른다.  

처음엔 정말로 죽일 작정으로 패가며 나 또한 격렬하게 거부했었다. 하지만 번번이 이 짓을 막는 것만은 문에게 있어 학습이 불가능하고 이런 행동을 하는 문은 과거의 나조차도 떨쳐내는 게 힘들었기에 힘 뺄 필요 없이 알아서 떨어지길 기다렸다.

문이 곧 떨어졌고 그 순간에도 잘도 혀를 내밀어 내 입술을 훑고 지나가면서 나를 바라보았다. 반사적으로 난 축축한 입술을 손을 들어 닦았다. 지금은 문이 건드린 입보다 흙에 더러워진 내 양쪽 어깨가 더 거슬렸다. 

“이유를 모르겠군. 넌 이게 재밌나?”

예전에는 귀찮아서 묻지 않았던 것을 물었다.

문은 그대로 한 손을 들어 내 목덜미를 잡아 밑으로 숙이게 만들었다. 

붉은 눈동자. 

가까이 본 적이 없는 문의 눈동자는 핏물이 흐르는 것처럼 술렁이고 있었다. 

 “숨…….”

내 목을 잡고 있던 문의 손이 이내 내 뒤통수로 향했고 그에 힘을 주자 결국 문의 이마와 내 이마가 붙어 버렸다. 답답하고 짜증나는 행동이었지만, 일일이 문의 행동 하나하나에 반응했다가는 제정신을 유지할 수 없을 것이다. 인내로 짓누르고 놈을 바라보자 눈을 감고 있었다. 

 “숨?”

그리고 느닷없이 숨이라는 말을 내뱉었다. 내가 되묻듯 말하자 문은 눈을 감은 채 입을 열었다.  

“죽어갈 때 마다 숨을 넣어 줄 거야.”

그 말을 끝으로 문이 눈을 떴다. 그 눈동자는 오직 나만을 담고 있었다. 집요하게 입을 맞추는 행동에 묻지도 않았지만, 이유를 말해주지도 않았다. 그저 미치광이의 객기라고 생각했던 것이 문의 한 마디로 설명이 되자 잠시 나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친우를 잃고 무능력한 자신에게 절망한 나에게 거짓하나 없이 들어왔던 숨을 기억한다. 심장이 떼어지는 고통에 죽어가던 나를 놈은 나름대로 ‘살리기’위해 이 짓을 해왔다는 거다. 

“왕은 나.”

문이 내 뒤통수를 잡았던 손을 내리고 허리를 감싸 안아 끌어 내 배 부근에 얼굴을 박았다. 

“때문에 내가 지키는 건 나의 심장.”

문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그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로서 나는 예전의 문과 눈앞의 문이 다를 것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많은 부분이 변화되었다고 생각했었는데, 결국 예전에도 녀석의 세상은 내가 전부였던 모양이다. 

비집고 나오는 실소를 참을 수 없어 내뱉고 난 그대로 손을 들어 문의 뒤통수를 잡아 당겼다.

나를 향하는 저 붉은 눈동자를 가진 짐승을 향해 다시는 없을 입맞춤으로 가련하고 안타까울 수밖에 없는 나의 치부를 온전히 받아들였다. 

평온한 빛줄기. 그것을 받고 있는 시린 듯 한 푸른빛의 머리카락의 실리스 로던프의 왕제 로던프 란 그란스가 앉아 있었다. 축 가라 앉은 황금빛 눈동자는 내리는 빛줄기보다 눈부셨지만, 아무것도 담겨져 있지 않았고 그런 란을 보는 이들은 모두들 하나같이 백치 왕제라고 불린다. 

하지만 세간에 알려진 소문은 때론 그 본질조차 거짓으로 뒤덮인 경우가 많다. 백치 왕제라 불리는 란 역시 그런 왜곡된 세간의 소문의 주인공 중 하나였으나 진실을 아는 자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란은 멍 하니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백치라 알려진 것 외에는 란은 상당부분 감춰진 것이 많은 인물 중 하나였다. 들추려는 자들도 없었고 란은 알려지는 걸 원치 않았으니, 심지어 그의 외모 또한 왜곡되어 있었으나 정작 본인은 그런 소문을 즐기는 듯 했다. 

누군가가 문을 두들겼다. 란은 책을 덮지 않고 그대로 움직이지 않았고 문은 열리고 그에 사람이 들어왔다. 좀처럼 반응이 없던 란은 눈앞까지 다가온 거대한 그림자를 보고서야 책을 닫고 빛을 잃었던 초점을 바로 해 문호를 바라보았다. 

“전멸입니다.”

란은 일어나 창문으로 다가가 밖을 바라보았고 귀환 입성하는 가디언들의 행렬을 바라보았다. 개중(個中)에는 눈에 띄는 자들은 없었다. 그에 미련 없이 커튼을 친 란이 문호를 바라보았다. 

“클라운은 데려가지도 않았다더군요. 거기다 살아남은 놈들은 손가락에 꼽힙니다.”

“알아서 하겠지. 살아 있으면 된 거다.”

말은 그렇게 하고 있지만, 란은 초조해 있었다. 라마의 소식은 자신이 원할 때 마다 들을 수 있는 것이었지만, 그때마다 지독하게 다치고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구했다는 이야기뿐이었다. 

상당부분을 재조사해야 할 필요가 있는 보고였으나 라마가 부상을 입거나, 병이 난건 사실인 듯싶었다. 

 더욱이 보고 중 그를 거슬리게 하는 것은 라마가 직접 거둬들인 것에 대한 거였다. 

“사육에 재능이 있다곤 생각했지만, 설마 괴물까지 길들일 줄이야. 이참에 농장이나 차리라고 할까?”

“트란슈와도 접촉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문호의 말에 웃음기 가득했던 란의 얼굴이 굳어졌다. 책을 다시 펼쳐 느긋하게 읽으려 했던 손도 멈춘 채 눈을 돌려 문호를 바라보았다. 궁 안에서는 크게 흥분한 일도 없을뿐더러 더욱이 그는 본래 냉철하고 말이 적은 사내였다. 최근 몇 년 사이 말수가 급격하게 늘었지만, 결코 실언을 할 인간은 아니다. 

때문에 란은 심각한 얼굴을 잠시 유지하더니 책을 탁상위에 올려놓았다. 

“계속해라.”

“백자와 함께 잡혀 들어가기 직전까지 슈레이와 대치했고 최악의 상황까지는 안 갔으나 하마터면 이쪽이 먼저 개입할 뻔 했습니다.”

“라마는 어디 있지?”

“곧 이쪽으로 올 겁니다. 에덴의 괴물도 함께.”

“눈에 띄진 않았겠지.”

“호쿠 바드에게 입막음을 했으니 새어나가진 않을 겁니다.”

이제야 조금은 한시름 놓은 듯 란이 의자를 끌어 앉았다. 하지만 초조한 건 변하지 않아 잠시 생각을 좀 하더니 고개를 들어 문호를 바라보았다. 문호는 갑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란을 의식하고 마주보았다. 

“그런데, 왜 갑자기 존대야?”

“여긴 궁입니다. 왕자님”

“단 둘이 있을 땐 편하게 해라. 새삼스럽게 무슨.”

“제 걱정은 마시고 본인 연기나 똑 바로 하십시오. 더욱이 제발 이런 책 좀 안 보시면 안 됩니까.”

로맨스 물로 베스트셀러에 오른 [황태자의 첫사랑]을 교묘하게 표지를 가려 들고 다니는 것을 모를 리 없던 문호였기에 가끔 이런 식으로 철없이 구는 란을 타박했다. 궁이 아니었다면 신나게 비난했을 테지만, 직책이 있고 왕궁이다 보니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이곳에 라마와 더불어 괴물을 부르는 것도 조심스러워 신경이 곤두서 있는데, 란은 그저 태평한 얼굴이었다. 

아무리 백치 왕자에 관심이 없어 이곳에 드나드는 사람이 적다곤 해도 궁이다. 궁이 왜 궁이겠는가. 조금만 이곳을 벗어나도 굴러가는 눈들이 천이 넘는다. 

 마치 자신만 조급한 것 같아서 문호가 불만을 토해 내려 그 얼굴을 바라보자 어느새 직접 커튼을 친 창문에 다가가 밖을 바라보는 란의 얼굴이 결코 태평한 모습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넌 이곳으로 들어가라. 길은 하나뿐일 테니 헤매지는 않을 것이다.”

궁의 뒷문이었다. 과거에도 이곳을 종종 이용했었기에 길이 열 개라도 헤매진 않을 것이다. 다만 이 길의 끝이 왕의 처소와 매우 가까운 정원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이곳을 사용했던 것도 빠른 보고를 하는 수단으로밖에 쓰질 않았으니까. 

이곳에 들어가면 어떠한 문제로 나를 기다리는 놈이 있다는 얘기인데, 바드가 일체 그 일에 대해 묻지 않는 것과 인연이 있다면 나를 오라 가라 할 놈은 그놈밖에 없다. 

아마도 내 뒤에 서 있는 문과 은아가 그 문제의 중심일 것이다. 

문은 본래는 오덴에게 끌려가 한바탕 잔소리를 들었어야 했지만, 바드가 먼저 나와 함께 가는 것을 명했다. 영문을 모르는 오덴은 그런 바드를 억울하다는 듯 바라보았고 바드는 번복하지 않았다. 

덕분에 두 덩치를 데리고 가야하는 내 입장은 꽤나 피곤하게 되었다.

그날 에덴에서 나를 따라온 은아에 대해 그는 더 물어보지 않았다. 문 역시 특별한 문책을 당하지 않았고 의문이 많은 시선임에도 결코 입을 열지 않던 바드가 결국 속내를 숨길 수 없었는지 숨을 한 번 토해냈다. 

“한 가지 묻지”

“…….”

막 문으로 들어가려던 나를 세우는 바드. 놈은 의심이 가득한 눈으로 진실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에게 딱히 숨길 것이 없던 나였기에 그대로 들어가려던 것을 멈춰 놈을 바라보았다. 

“에덴에서 어떻게 살아남은 거지.”

결국 궁금한 것이 그것이었나 싶어 허탈한 실소를 뱉고 대답을 하지 않고 그대로 문 안으로 들어갔다.

내 뒤를 따라오는 문과 은아. 특히 문은 많이 피곤한지 어느 순간부터 은아와 같이 입을 닫고 있는 듯 없는 듯 나를 따라오고 있었다. 

늘어지는 하품을 참을 수 없었는지 내 등 뒤에서 천천히 걸어오던 문의 발이 꼬여 비틀거렸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날뛰다 하루도 채 기절하지 못하고 깨어나 지금까지 걸어왔으니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문은 본래 잠이 많은 아이였다. 

낮에는 활동이 제약되기 때문에 할 일이 없어 잠이나 자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늘 나른하고 여유로워 보였던 것도 그냥 단순히 잠이 많은 것뿐이었다. 

반쯤 정신이 나갔을 땐 그런 모습은 찾아 볼 수 없지만, 내가 알고 있는 문은 상당히 게으르고 잠이 많으며 지지리도 말을 안 듣는 똥개랑 다를 바 없다. 

어지간히 정신을 못 차리는 것 같아서 손을 뻗어 놈의 팔목을 붙잡았다. 

“똑 바로 걸어. 그대로 강냉이 날아가고 싶지 않으면”

“졸려…….”

“눈 비비지마. 더럽게. 은아. 그쪽 잡아라.”

내 말에 은아가 눈을 비비는 문의 손을 잡았다. 문은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은아에게 잡힌 손을 흔들었지만, 멍청해진 문은 은아의 손을 쉽게 털어내진 못했다. 결국 제풀에 지쳐 거북이처럼 걷는 문을 데리고 꾸역꾸역 도착한 문 앞에서 문의 손을 놓았다. 그러자 놀란 듯 문이 반사적으로 내 팔목을 잡았고 조금은 잠에서 깬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놔.”

“왜?”

반문하는 문이 짜증이나 그대로 손을 털자 문의 손이 떨어져 나갔다. 울상인 얼굴이지만, 상관없었다. 난 다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기 위해 손을 뻗었고 그 순간 내 팔에 감기는 문의 손보다 몇 배나 거대한 손이 이끌어 문의 손을 맞잡게 만들었다. 

황당함에 고개를 들어 은아를 바라보았다. 문은 기절할 듯 웃으며 그런 은아의 등을 치기 시작했고 ‘잘한다! 그래야 내 아우지!’ 하며 실성하듯 조잘거렸다. 이것들이 쌍으로 미쳤나 싶어 그대로 둘 모두 머리에 주먹을 박아주었다. 

찌그러져 있는 둘을 무시하고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뒤늦게 쫓아오는 걸음이 두 개로 늘어나자 나오는 건 한숨뿐이었다. 내가 어쩌다 저런 것들이랑 같이 다녀야하나 싶다. 한심한 두 멍청이를 내버려두고 막 걸어가려는 데, 예상대로 미리 마중을 나온 이가 있었다. 

붉은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은 문호였다. 그는 터벅터벅 걸어와 꽤 건방진 얼굴로 날 내려다보았는데, 뒤에 있는 은아를 보고 흠칫 놀라더니 나를 의식하곤 다시 헛기침을 했다. 

“따라와라.”

그 말을 끝으로 걸음을 옮겼고 얼마가지 않아 더 이상은 길이 익지 않는 곳에 도착하였다. 궁의 문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허름한 문을 열고 들어가자 그곳에는 여유롭게 의자에 앉아 등을 보이는 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바다를 닮은 푸른 머리카락. 꼴에 왕제라고 걸치고 있는 옷은 비단이었으나 왕제치고는 수수하다 못해 허름한 곳에 있는 그가 이제야 백치 왕제 그 자체로 보였다. 

내가 알고 있는 백치 왕제의 모습은 바로 저 모습이다. 늘 고개를 땅바닥을 향해 있었고 앞머리가 긴 편이라 고개를 숙이면 얼굴의 반이 가려져 버리는 데, 그 모습이 음침하다 못해 불결하다며 천대받다시피 했다. 

거기다 어수룩한 행동까지 여지없는 백치 왕제였는데, 지금의 그는 도저히 세간에서 종종 웃음거리로 화제가 되는 백치 왕제라고는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호오……. 이게 에덴의 괴물? 생각보다 평범한데? 난 또 검은 박쥐 날개라도 달린 줄 알았지.”

호기심 어린 표정의 란을 지켜보던 문호가 어이가 없다는 듯 반론했다. 

“그런 게 있으면 마족이죠.”

“전설의 생물을 보나 했더니, 거참 아쉽네.” 

문호의 말을 듣고 은아를 관찰하던 란은 입맛을 쩝쩝 다시다 관찰에 흥미를 잃었는지 이번엔 문에게 시선을 돌렸다. 졸음이 가득한 문은 아직도 눈을 비비며 끔뻑이고 있었고 눈앞까지 다가온 란은 보이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저건 또 상태가 왜이래?”

웬일로 얌전한 문을 보며 그는 놀란 듯 손가락으로 문을 가리키며 나를 바라보았다. 거기다대고 해줄 말은 없어서 무시하고 의자를 끌어 앉아 란을 바라보았다. 

“무사 귀환을 축하한다. 그리고 고생했다.”

란은 웃으며 말했고 난 저놈의 웃음이 거슬려 절로 인상을 쓰고 놈을 바라보았다. 할 이야기를 질질 끄는 건 싫어한다. 그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본론을 이야기 하지 않는 란을 더는 두고 볼 수 없어 노려보는데, 그는 알겠다며 두 손을 들고 휘젓더니 입을 열었다. 

“축하할 일이 또 생겼군. 승급도 축하한다.”

“취소시켜.”

“그래, 당연히 취소 시켜주…… 뭐?”

“플라이로 있을 생각이다.”

그는 난감한 듯 머리를 긁적이더니 이미 혼미상태인 문을 가리켰다. 

“저게 호쿠인데, 네가 플라이를 유지하겠다고?”

“짜증나게…….”

“아, 아, 알았다고.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이제야 본 이야기를 하겠다는 듯 란은 잠시 눈치를 보더니 문호가 문을 열어 밖을 확인하고 문을 닫고 고개를 끄덕이자 란이 입을 열었다. 

“이번 승급으로 너와 문. 그리고 저 괴물까지 내 밑으로 둘 수 있었다. 내 전속 가디언으로서. 단, 괴물은 시기상조이니 비밀에 부쳤다. 소속을 용병으로 옮겨 놓았으니 저 정도면 타국의 덩치 큰 용병으로 보이는 건 문제가 없을 것이다.”

“둘 모두 네 개로 쓸 수 없다.”

“알고 있어. 그 개의 주인부터 나를 따를 생각을 하지 않으니까.”

“…….” 

“일단은 움직임을 최소화한다. 너도 오랜만에 푹 쉬라고”

“트란슈 회담.”

내 목소리에 란의 웃는 얼굴이 급속도로 무너졌다. 문호도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굴리고 있었고 란 또한 진심으로 놀란 듯 눈썹을 일그러트렸다. 

“네가 그걸 어떻게…….”

“결국 드러날 것을 염려한다면 오히려 당당해져라. 그게 덜 의심받을 테니” 

“좋아. 트란슈와 마찰이 있었다고 들었다. 그러니 내 그림자 밑에 숨어 있어라.”

“같은 말을 또 하게 하는군.”

“놈은 네 얼굴을 알고 있어.”

“문제 될 건 없다.”

“네가 접촉한 자가 누군지는 아느냐.”

누구냐고?

당연히 알지. 일국의 장군인줄만 알았던 트란슈의 갑옷을 입고 기세가 당당했던 젖비린내 나는 애새끼. 이름은 슈레이. 과거 나에게 장군이라 속이고 트란슈의 태양을 그 알량한 손바닥으로 당당하게 가린 자가 아닌가. 

난 비웃으며 천천히 그들만이 알고 있다고 자만하는 그 이름을 입에 올렸다. 

“트란슈 레이 더 바함. 제국의 7대 황제에 오른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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