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9/35)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란이 다가와 내 어깨를 부여잡았다. 나를 바라보는 눈에는 경악과 가까운 것이었다. 그는 다급하게 나를 붙잡고 흔들었으며 이내 강하게 힘을 주어 나를 자신과 가까이 끌어당겼다. 

“설마 놈이 네게 모든 걸 드러냈다고?!!”

“…….”

“대답해!”

“놔.”

“라마!”

나를 부르는 놈의 손을 잡아 떼어내기 위해 손을 올리려 했지만 그런 나보다 먼저 란의 손목을 부여잡은 이가 억지로 란의 손을 떼어내 던져버리고 나의 어깨를 잡아 그 품에 닿게 했다. 

“놓으라잖아. 이 멍청아.”

문이었다. 잘도 나를 감싸 안은 채 입을 여는 모습이 잠에서 덜 깨어난 표정하나 없는 얼굴로 란을 노려보았다. 어느새 은아까지 다가와 나와 문의 앞을 가로막았고 마치 내가 적대감을 보이는 놈들은 모두 천적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인지 감췄던 살기마저 내뿜고 있었다. 

그런 두 돌대가리들을 바라보다 때리는 것도 귀찮아 나를 잡고 있는 문의 손을 밀쳐 떼어냈다. 그리고 앞을 가리고 있는 은아를 옆으로 밀어 나와 쉽게 감정을 보이는 애새끼를 바라보았다. 

황당하기보다 분노에 가까운 얼굴로 나를 발견한 란이 다가오려 했지만, 은아의 살기를 눈치 챈 문호가 그런 란에게 달려들어 놈을 막았다. 란은 그런 문호가 마냥 귀찮은 모양인지 거칠게 흥분하며 떼어내려 했고 난 그런 놈을 보다 못해 입을 열었다. 

“진정해라.”

“네가 그것을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을 것이다. 너한테 그것을 알려준 놈이 누구야!”

“진정하라고 했잖아.”

“라마!”

“성가신 놈. 정말 지지리도 말을 안 듣는군.”

문호에게 붙잡혀 조금은 허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란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난 팔짱을 낀 채 놈에게 좀 더 다가가다 뒤에서 움찔거리고 있는 두 돌 머리들에게 눈을 돌려 경고했다.

“한 번 더 나대면, 팔꿈치로 기게 할 줄 알아.”

쫓아오는 기척이 죽자 나는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려 란을 바라보았다. 보호받는 것에 더 어울리는 이 애송이는 분명, 왕의 그릇을 타고 났다. 하지만 놈은 왕이 되진 못한다. 인간의 왕은 때론 그릇만으로는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놈이 어째서 왕제의 신분으로 권력을 버리고 로던프의 혁명을 원하고 있는지는 듣고 싶지 않다.

보다 무거운 왕관을 쓰고자 하는 로던프의 혁명 따위는 내게 전혀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 역시 로던프의 혁명을 원하고 있다. 란이 원하는 것이 목적에 따른 혁명이라면 난 야망으로 움직이는 혁명. 때문에 나의 혁명이 이뤄지는 순간은 모든 걸 뒤엎었을 때다. 

나는 결코 인간의 그릇과 무게를 같이 할 수 없다. 

눈앞에서 발버둥치는 애송이는 그것을 알아야 했다. 나는 결코 인간에게 길들어질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때문에 완전한 아군도 될 수 없다는 걸 놈은 알아야 했다. 

“기회를 놓치지 마라. 모든 건 한순간일 테니.”

“무슨 소리지?”

어리석은 그릇. 속이 비어있는 그것을 거짓으로 가득 채워 나는 그토록 인간이 갈망하는 왕좌에 세울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나의 혁명은 시작된다. 

“왜 알고 있는가는 중요하지 않아. 속고 속이는 것. 그것이 누군가가 먼저다.”

란은 침묵을 유지한 채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질 못했다. 라마가 나간 이 공간은 그 어떤 때보다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았다. 깊은 사색에 잠겨 있는 란을 바라보던 문호는 답답한 것을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대체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어째서 그렇게까지 그 꼬마의 말에 귀를 기울이시는 겁니까.”

문호의 말에도 전혀 움직이지 않는 란을 바라보면서 문호는 방금 조용하게 휩쓸고 간 라마의 목소리를 기억했다. 그가 말하는 기회라는 것은 무엇이고 그는 무엇을 누구에게 속이고 있다는 것인가. 트란슈의 왕이 드론 행세를 하고 있는 건 대체 어찌 알고 있단 말인가. 

라마는 알고 있었다. 그것도 알고 있다는 게 당연한 것처럼 말했다. 슈레이가 범상치 않는 드론임은 느끼고 지레짐작한 것이 아니라, 그 본질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다.

그에 제대로 당황하기도 전에 굳어버린 자신과 왕제 란을 향해 라마는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왕이 되지 못한다면, 넌 종신의 잔재로 밖에 기록되지 않아.”

기가 막히는 말이었다. 지금의 로던프의 제정을 손바닥 위에 놓고 지켜보기라도 한 듯 여유롭게 듣는 이에 따라 사형까지 내릴 수 있는 말을 함부로 입에 올렸다. 그것을 적나라하게 듣고 있는 문호는 어디서부터 지적을 해야 할지 몰라 날뛰던 란을 잡은 채로 굳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나더러 당장 반역이라도 하라는 건가.”

란의 물음에 라마는 그를 비웃듯 입 꼬리를 올렸고 믿을 수 없는 거만한 모습으로 구름위에서 내려다보는 것처럼 말했다. 

“꼭 왕관이 있어야 왕이 되는 건 아니지. 절대자는 그 각인으로부터 시작된다.”

라마는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내뱉고 입을 다물더니 자신의 등 뒤에 있는 놈들을 바라보았다. 안 그래도 창백한 문이 이제는 혼이 빠져나간 얼굴로 늘어져 있으니, 그 모습을 보던 라마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 괴물에게 뭔가를 지시했다. 

그리고 괴물은 그 말을 알아듣고 반시체가 된 문을 안았다. 

“걱정은 마라. 나 역시 트란슈와 지금 얽힐 마음은 없으니까. 더는 할 얘기가 없는 것 같으니 나가겠다.”

휘둘리는 느낌을 감출 수 없는 라마의 말에 반박이라도 하기 전에 망할 꼬맹이는 그 말을 끝으로 한 마리의 짐승과 괴물을 이끌고 나가버렸고 결국 후 폭풍은 문호가 모두 감당해야 했다. 

  

영리한 꼬마라는 건 인정하지만, 겨우 14살 정도의 애송이가 뭣 모르고 지껄이는 것이니 란이 크게 마음에 두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는 로던프의 왕이 될 자가 아니던가.

지금까지 달려오고 있는 혁명의 정점에 서야 할 그가 겨우 애송이 말에 놀아나서는 안 됐다. 하지만 란은 라마가 나간 뒤로 단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의자에 앉은 채 정말로 그 말을 마음에 담아두고 고민하는 모습이었다.

문호는 그에게 물어볼 것이 많았지만, 그대로 문을 열고 나와 그의 사색을 더 이상 방해하지 않았다. 거슬렸다. 잔잔한 해수면에 돌을 던진 것처럼 자신이 왕이 혼란스러워 하는 것이 눈에 띄게 보이지 않는가. 

자신 역시 어쩐지 가릴 수 없는 초조함이 밀려오는 것 같아 잠시 걸음을 멈춰 숨을 고르게 쉰 뒤 생각을 정리했다. 그리고 당장 해야 할 일만을 생각하기 위해 차분하게 가다듬고 고개를 들어 다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

왕제 란이 트란슈 황제를 알고 있다. 

표면상 트란슈의 보위에 있는 건 원로원 중 하나. 때문에 왕권 보호가 아닌, 백성을 우선으로 하는 트란슈의 제도를 잘 모르는 로던프는 드러난 왕좌에 앉은 놈을 왕이라 의심하지 않는다. 

적장에 황제를 세우는 나라는 존재하지 않는다. 더욱이 왕을 속이는 나라 또한 없다. 하지만 트란슈는 독자적으로 그런 제도를 7대까지 유지해 왔고, 나 역시 과거 두더지 왕이 직접 얘기하지 않았다면 상상조차 하지 못할 것이었다.

하지만 사실상 제정 트란슈의 7대 황제는 트란슈 레이 더 바함. 그 빈틈이 없는 두더지 왕의 냄새를 맡았다는 건 트란슈와 직접 내통하는 자가 있었다는 말인데, 재밌게도 그 인물의 중심이 란이라는 결론밖에 나오지 않는다. 

이번 회담에서 란이 얻을 수 있는 건 많지 않다. 욕심을 버리고 그가 유의해야 될 건.

“맹수에게 고기를 먹여 잠재울 것인가 풀을 먹여 화를 돋울 것인가.” 

놈에겐 왕관은 어울리지 않는다. 하지만 비어있는 그릇을 거짓으로 채운다면, 왕관은 없더라도 왕좌는 차지할 수 있을 것이다.  

 “난 고기…….”

등 뒤에서 은아에게 안긴 문의 잠꼬대가 희미하게 들려와 내 입 꼬리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문도 알고 있는 답을 그 애송이는 결코 쉽게 풀 수 없을 것이다. 지금은 상대가 육식인지 초식인지 조차 파악하질 못하고 있을 테니까.   

문을 열고 나와 여길 들어오기 전부터 바드가 말했던 지가 지낼 건물로 향했고, 그곳은 왕제 란의 처소와 그다지 멀지 않는 곳이었다. 어렵지 않게 찾은 그 곳으로 들어갔고 생각보다 넓은 공간을 눈을 돌려가며 살펴보다 대충 의자를 끌고 자리에 앉았다. 

말 그대로 온 몸이 삐걱거리는 것 같아 신고 있던 신발을 벗어 던져버리고 욱신거리는 발을 뻗어 그대로 깊게 뒤로 앉아 고개를 뒤로 눕혔다. 피곤하다.

이대로 움직이고 싶지 않을 정도로 온 몸에 거대한 납덩이라도 붙이고 있는 것 같았다. 앞으로 체력이 붙을 때까진 늘 이런 식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체력적인 훈련보다 휴식이 중요하기에 귀찮은 것은 나중으로 미루고 난 고개를 뒤로 한 채 눈을 감았다. 

앞으로 2년 후 전쟁이 일어난다. 

유례가 없는 거대한 규모의 전쟁은 잔인하고도 지루하게 이어질 것이다. 그런 미래를 알고 있다고 딱히 도움이 되는 건 없지만, 그간의 전쟁이 얼마나 무의미했는가는 알 수 있었다. 

내가 18살이 되던 해. 

휴전을 선포하고부터 트란슈는 급속도로 성장하기 시작한다. 때문에 로던프는 그런 위기감을 느끼면서도 20년이 다 되도록 트란슈와의 휴전은 유지할 수 있었으나 그 중간 중간 작은 규모의 전쟁으로 조용할 날이 없었다. 하지만 그건 모두 타국과의 소소한 땅따먹기와 다름이 없었고 단 한 번의 패배도 허락하지 않았다.

전쟁이 잦을수록 로던프는 확실하게 혼돈의 길을 걷고 있었다. 승리는 했지만, 끊임없는 전쟁에 늘 백성들은 불안에 떨어야 했고 내신들 또한 서로를 견제하며 목을 뜯을 생각밖에 하질 않았다. 선왕이 죽고 나서도 살아남은 왕자들 중 한 명이 완전한 보위에 오르기까지도 3년이나 걸렸다.

백성이 왕에 대한 신뢰를 저버리기까지 3년만으로도 충분했다. 

대중은 전쟁으로 희생당하는 것이 두려워 보위에 오르지 않는 것이라 여겼고, 민심은 왕좌의 주인이 나타나고 나서도 나아지질 않았다.

선왕은 암살당한 백치 왕제 란을 왕좌에 세우려 했으나 이미 죽은 이는 결코 왕관을 쥘 수 없었다.

때문에 왕좌의 주인은 살아남은 왕자 중 왕의 그릇이라 합당하다 원로들이 입을 모아 칭찬하던 젠이 보위에 올랐다.  

로던프의 새로운 왕. 젠을 본건 그가 보위에 오른 그날이었다. 트란슈와의 휴정협정이 이뤄던 해. 겨우 소년티에서 벗어난 나이라고 들었다. 피비린내 나는 애송이 왕은 왕관을 쓰고 왕좌에 올라 초약을 읊었고, 확실히 놈은 왕에 걸맞은 위엄을 가지고 있었다. 

“그대가 전설인가. 젊군. 하긴, 18세 때 전설의 휘장을 달았다 했지.”

“그렇습니다.”

“로던프의 명예를 드높일 재목으로 전설에게 기대하는 바가 크다. 날 실망시키지 말거라.”

“예.”

“일전의 전쟁에서 그대의 활약은 잊지 않았다. 오늘은 이만 물러가도 좋다.”

왕위에 오른 젠은 신중했고, 현명했으며 기회를 아는 자였다. 때문에 나를 내려다보는 그 시선이 거슬렸어도 나는 오직 내가 지킬 수 있는 것만을 생각하였기에 내가 지키는 것을 위협하지만 않는다면 애송이 왕이 어떻게 나오든 상관이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지나치게 경계하는 흐름을 알면서도 묵인했다. 나는 오직 나의 것을 지키기 위해 검을 들었을 뿐이니까. 

그런 아슬아슬한 경계를 지켜보던 것이 얼마나 지났을까. 

동맹에 가까운 트란슈와의 휴전과 잦은 전쟁에서의 승리로 어느 정도 표면적인 안정을 찾았을 때 놈이 나타났다. 인간들 사이에서 자신의 체취를 속이고 군림하고 있던 자. 자칭 슈레이라 불리던 젊은 장군이 내 앞에 나타난 것이다. 

 “라마 드론……. 아니, 이제는 전설이라 불러야 하나.”

맹금류와 같은 눈동자였다. 전쟁 당시에도 눈에 띄는 실력자였으므로 직접적인 나와의 대치에서 살아남았던 놈이라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다. 다시 만난 놈은 피와 살에 굶주린 듯한 매의 눈을 하고 있었고 그 차가운 눈은 오로지 나만을 담고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난 타인에게 별다른 관심을 가지지 않았었다. 맹금류의 눈을 가지고 있고, 대치했던 적장의 장군이라고 없던 호기심이 생겨나진 않았다. 오히려 조금은 귀찮을 정도로 거슬렸을 뿐. 

그가 왜 로던프에 있는지는 궁금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나에게 묻고 싶은 것이 많은 듯 눈동자를 일렁이며 내 앞을 가로 막아 물러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매정하네. 그래도 한땐 검을 맞대던 사이였는데 말이야.”

“돌아가라. 휴전이긴 하나 너와 나는 적이다.”

그대로 지나치는 나의 어깨를 잡아 세우는 슈레이. 결코 웃음을 보인 적 없었던 그가 가벼운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으나 그것이 얼마나 거짓으로 가득차 있는지 나는 알고 있었다. 놈의 눈은 전혀 웃고 있질 않았으니까. 

“재밌는 거 하나 가르쳐 줄까?”

“필요 없어.”

놈의 손을 쳐내고 앞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슈레이는 말을 멈출 생각이 없었는지 나를 붙잡지 않은 채 그대로 입을 열었다. 

“로던프는 몰락할 것이다.”

“…….”

“나의 나비의 날개를 자른 대가는 치르게 할 생각이거든.”

헛소리를 내뱉고 있는 슈레이의 말에 잠시 멈춘 나는 고개를 돌려 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유난히 눈에 띄는 그의 손가락에 걸린 반지. 그것은 트란슈 왕가의 상징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가 장군이라면 그의 태생이 왕족이라 고해도 놀랄 것은 아니었기에 막 시선을 돌리려는 차, 슈레이가 입을 열었다. 

 “나는 트란슈 레이 더 바함. 제국의 7대 황제에 오른자. 나는 로던프의 멸망을 원한다.”

그대로 눈을 뜨고 고개를 바로 해 바로 앉았다. 휴식에 도움을 주지 않는 과거의 기억이 머릿속을 헤집자 도저히 다시 눈을 감고 있을 수 없었다. 

미래는 변한다. 그것은 은아만 봐도 알 수 있다. 은아는 결코 에덴을 나갈 수 없는 운명이었다. 삶도 죽음도 오직 그곳에서만 허락받았다. 하지만 내 눈앞에 우두커니 서서 잠에 취해 기절한 문을 안고 있는 건 살아 있는 은아다. 

2년 후 1차 트란슈와의 대전에 죽음을 예약해 놓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또 다른 은아의 과거일 뿐이다. 난 내 손에 쥐어진 것에 죽음을 허락하지 않는다. 

은아를 바라보다 거슬리는 몇 가지가 눈에 들어왔다. 곳곳에 드러난 상처들은 그렇다 쳐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신이 말도 안 되게 더러웠다. 그러고 보니 찬 물로도 씻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기에 저 몰골을 보니 하루 이틀 안 씻은 게 아닌 것 같았다. 

물론 거기 세트로 안겨서 세상모르고 자고 있는 개새끼도 마찬가지다. 더러운 두 곰들을 두고만 볼 수 없어서 잠시 생각했다. 

난 저 놈들을 씻길 체력이 남아 있지 않다. 이런 체력으로는 문 하나 씻기기도 벅찰 것이다. 덩치가 상당한 두 놈을 깨끗하게 씻겨줄 인간이라면 기본적인 체력이 있는 놈이 적당할 것 같은데, 운이 좋게도 난 그런 놈 하나를 알고 있었다. 

**

마스는 오랜만에 크라운의 부름을 받아 그동안 훈련한 것을 보여줄 수 있다는 기대감에 잔뜩 흥분해 있었다. 그리고 도착한 크라운이 있는 방으로 들어가자 자신의 눈앞을 가리는 거대한 괴물에 놀랐다.

바로 검을 빼 저 괴물에게 당했을 크라운을 생각하며 복수를 다짐하고 막 검을 휘두르는 순간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래다.”

그 목소리를 따라 밑을 바라보니 정말로 그 밑에 살아 있는 크라운이 보였고 그에 조금은 안심했지만, 아까는 정말 요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사태를 파악하기엔 설명이 너무도 부족한 크라운을 바라보았다. 

“대체 저 괴물은 뭐야?!”

“문의 아우라더군.”

“뭐어?!”

크라운의 말에 화들짝 놀라 괴물을 바라보니, 마치 거짓이 아니라는 듯 그의 손에는 하얗고 창백한 것이 들려 있었다. 처음엔 그냥 덜 빤 걸레 같은 것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문이었다. 

저 미친개가 난동도 안 부리고 안겨있을 정도의 인물이라면 아우라는 설정이 결코 거짓으로만 볼 것이 아니었기에 마스는 혼란스러웠다. 

그런 마스를 크라운은 더욱 혼란을 넘어 혼돈에 빠지게 만들었다. 

“아니, 내가 왜!?!”

“씻기는 것에 재능이 있더군.”

“하?”

“제대로 씻겨 놔라.”

저 거만한 꼬맹이의 당연하게 자신에게 향하는 하대와 명령은 부글부글 속이 끓을 정도로 어이가 없고 화가 났지만, 마스는 투덜거리면서도 이상하게도 거부할 수 없는 그 어처구니없는 명령을 따라 소매를 걷었다. 

잠꼬대를 하며 날뛰며 반항하던 문과는 달리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덩치는 말 한 마디 하지 않고 얌전하라는 크라운의 명을 듣고 정말로 온순한 양이라도 된 듯 조용히 욕실에 따라 들어와 다소곳이 앉아 움직이지 않았다.

덩치는 컸지만, 생각보다 온순했기에 꽤 빨리 목욕을 끝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스에게 있어 문제는 지금 욕실 밖 마룻바닥에 뻗어 있을 문이다. 예민한 놈이라 조금만 건드려도 깨어나 발광을 해대니, 전만 해도 목욕을 다 시키기까지 얼마나 신경을 곤두세우며 문이 깨어나지 않게 조심했던가. 

생각해도 끔찍한 그날을 회상하며 은아를 헹궈주고 마른 천으로 물기를 닦아주면서 욕실 밖으로 나왔다. 

“뭐야? 왜 없어?”

주위를 아무리 둘러보았지만, 크라운은 보이지 않았다. 덤으로 문도 보이지 않았다. 놀란 마스가 뒤를 돌아 혹시나 날뛸 은아를 바라보았고 은아는 물기를 모두 닦은 알몸으로 뚜벅뚜벅 크라운이 앉아 있으라고 했던 곳으로 걸어와 신랑을 기다리는 새색시처럼 젖은 천을 곱게 접어 거대한 무릎 위에 올린 뒤 수줍게 앉아 있었다. 

   

당황은 역시나 마스의 몫이었다. 도대체 그 둘은 어디로 사라진 것이란 말인가?

마스가 은아를 데리고 목욕탕에 들어가자마자 밖으로 나왔다. 뻗어 있는 문이 걸리긴 했지만, 어차피 금방 돌아올 것이니 문제 될 건 없다고 생각했다. 

문이라면 몰라도 은아에게 맞는 옷이 과연 있을 진 모르겠지만, 나체로 돌아다니는 것 보단 나을 것이다. 

때문에 나는 그 둘의 옷을 구입하기 위해 잠시 자릴 비웠다. 오래 걸리진 않을 것이다. 궁 바로 앞은 상인들이 늘 즐비해 있었으니까. 

물론 이런 귀찮은 일은 시키면 되는 것이지만, 이건 내 버릇이었다. 내 것이라 생각한 것들은 끝까지 내 손으로 챙겨줘야 한다. 어쩌다 두 놈을 맡게 되었는지 신경질은 났지만, 후회하진 않는다. 

과거 모두를 잃었어도 사랑했다는 것을 후회하지 않았던 것처럼.

방에서 나와 기둥이 만들고 있는 복도를 지나면서 생각했다. 얼마 전부터 유독 거슬리는 것이 있었다. 과거 내가 한스덴 웨이의 양아들로 살아갔을 때에는 들은 적 없었던 지저분한 소문이 나돌고 있는 것이다. 플라이가 알고 지껄일 정도라면 이미 퍼질 대로 퍼졌다는 것인데, 질 나쁜 내용물을 기억하고 나도 모르게 이를 드러냈다. 

누가 건드리고 있는지는 대충 짐작은 갔다. 한스덴 웨이는 정이 많아 손발이 넓은 사람이었다. 양아들로서 처음 그들의 핏줄이라는 사람들을 마주했을 때, 유난히 내게 경멸의 시선을 보내던 버러지 놈이 하나 있었다. 

남자 아이치고는 예쁘장하게 생긴 얼굴로 주위를 속이며 온갖 여우 짓을 서슴없이 하던 놈이었는데, 어찌나 고약한지 말도 안 되는 것으로 나를 모함하곤 뒤로 빠지는 수작을 번번이 하였다. 

신분도 알 수 없는 내가 한스덴 일가가 된 것에 불만을 품은 놈은 노골적으로 나를 비난하기도 했고 저를 따르는 얼간이들과 이간질도 서슴지 않았다. 하지만 멍청해서 자기 꾀에 넘어가기도 한 놈이라 관심도 가지 않았다. 

따로 손봐줄 생각은 없었지만 버러지는 선이라는 걸 넘어왔고 나는 그에 대한 응징을 처절하게 해 주었다.

여동생 레이첼에게 마음을 두고 있었는지, 레이첼과 함께 있을 땐 더욱 지독하게도 나를 귀찮게 해도 일이 커지는 게 싫었고 한스덴 웨이의 핏줄이라는 이유로 묵인했었다. 나만 사과하면 끝날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놈의 도가 지나친 짓으로 레이첼은 상처를 입었고 나는 이성을 잃었다. 

그리고 그 쥐는 지금 생각해도 기억이 안날만큼 두들겨줬었다. 

핏줄이고 뭐고 눈에 뵈는 게 없어 당장 죽일 작정으로 팼던 것 같은 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레이첼은 울며 나를 말리고 있었고 내 손에는 시뻘겋게 변한 시체 같은 게 들려있었다. 

한스덴 웨이가 달려와 의원을 부르고 상황을 수습했고 그 일에 대해  엄히 꾸중을 들었지만 크게 번지진 않았다. 놈은 죽진 않았지만, 그 뒤로는 쥐죽은 듯 살면서 함부로 나를 건드리지 않았고 나중에는 내가 드론의 자리에 오르자 말도 제대로 못 걸었다. 보기만 해도 다리를 떨던 놈이 진드기처럼 내 옆에서 알짱거렸던 기억이 떠오르자 절로 얼굴이 찌그러질 것 같았다.  

가나가 지금 그 버러지를 만났을 것이라 생각하니, 짜증부터 올라왔다. 가나는 마음여린 아이니 쥐새끼가 아무리 건드려도 싫은 소리 한 번  안 할 것이다.  

성인이 되고 실력만으로 기사 자리까지 올라왔음에도 유약한 외모만 보고 덤비는 놈들도 봐줄 만큼 대책 없이 마음이 넓은 녀석이 아니었나. 

하지만 나는 당장 한스덴 일가를 마주할 순 없다. 그들과의 인연을 끊은 지금 이런 걱정도 무의미 하다는 건 알지만, 나는 가나가 행복해지길 원했다. 

그래야 응당 맞는 것이지만……. 

보고 싶다. 

내가 끼어들 틈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애써 지우려고 하는 가나를 한 번만 더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되기에 나의 걸음은 더욱 깊숙하고 외진 곳을 향해 걸어갔다. 들어왔던 곳으로 나가기 위해 걸음을 돌리자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멀리서 내가 들어왔던 궁의 뒷문을 통해 들어오는 인영들. 

궁에 드나드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곳이라 다른 이들이 들어오는 것에 놀랄 것은 없었지만, 난 본능적으로 몸을 숨기면서도 지켜볼 만큼 들어오는 이들에게 눈을 뗄 수 없었다. 말을 타고 들어온 이는 한스덴 웨이. 그 뒤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 작은 인영은 가나였다. 

“아드님이 자랑스러우시겠습니다. 어린나이에 문관 합격도 모자라 왕께서 직접 문호 작위를 하사하신다니, 가문의 영광이겠습니다.”

“내겐 보물과 같은 아들이지.”

“아들 없는 가문은 눈물이 앞을 가리겠습니다. 이러다 현자가 나올지도 모르겠습니다.”

“뭐가 되어도 좋으니 건강하게만 자라준다면 바랄 것은 없지.”

가나는 영리한 아이었다. 하지만 설마 저런 어린 나이에 문관이 됐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열에 들 떠 초점조차 못 마주치던 그날. 내가 말했던 것을 기억해준 모양이다. 

하지만 이렇게 빨리 궁에서 만나게 될지는 생각도 못했다. 지금 마주치는 일은 없어야했기에 당황도 뒤로하고 난 조금씩 뒤로 물러나 나가야 할 곳을 찾았다. 

가나는 건강한 모습이었다. 열꽃으로 가득 했던 얼굴도 생기가 넘쳤고 살도 올라 있었다. 이제는 들개시절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귀족자제의 모습을 한 가나가 너무도 사랑스러워 보였다.

예상치 못했지만 마지막으로 볼 수 있었다는 것에 만족했다. 

한스덴 웨이는 말에서 내려와 직접 가나를 내려준 뒤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가나의 얼굴이 조금은 붉게 달아올라 웃고 있었다.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입 꼬리가 올라갔고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그래, 처음부터 걱정은 필요하지 않았다. 슬퍼할 겨를도 없이 사랑을 주는 가족이 있었다.

나는 이제 그대로 뒤 돌아 그들과 멀어졌다. 등을 돌리고 이것을 마지막으로 영원한 이별을 맹세했다. 그 순간이었다. 등을 돌렸던 내 뒤로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린 것은…….

“라마!!! 라마!!!”

말을 하지 못하는 가나가 유일하게 혀를 움직여 내뱉을 수 있는 말. 그것은 나의 이름이었다. 기를 쓰고 내뱉고 있는 목소리는 어느새 잔뜩 눈물에 젖어 애처롭게만 들려온다. 꽤 먼 거리고 더구나 등을 돌렸음에도 나라는 걸 안 것인지 숲을 헤치고 달려오는 게 느껴졌다. 

당장 앞으로 달려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에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옮겼지만, 뒤를 쫓다 넘어진 것인지 가나의 비명 섞인 목소리가 내 걸음을 멈추게 만들었다. 당장 넘어진 가나에게 뛰어가려 반사적으로 나는 몸을 돌렸고 그 순간, 무언가가 내 입을 가리고 배에 팔을 둘러 잡은 채 어둠속으로 끌고 갔다. 

한스덴 웨이는 갑자기 소리를 치며 달려가는 가나를 쫓았다. 처음 가나를 만난 날. 열에 들뜬 얼굴로 미약하게 중얼거렸던 단어를 외치며 뛰어가는 모습은 애처롭고도 절박한 모습이었다. 그러다 급히 뛰는 바람에 돌부리라도 걸린 모양인지 가나가 넘어졌고 뒤쫓아 오던 한스덴 웨이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에 단숨에 쫓아와 가나를 안았다. 

하지만 가나는 그런 한스덴이 보이지 않는 모양인지 눈물에 가득 얼룩진 모습으로 어딘가를 향해 바라보고 있었고 뒤늦게야 한스덴이 가나의 시선이 향한 곳을 바라보았지만,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라마……! 라마!!!”

울음 섞인 절규와 다름없었다. 고개를 틀어가며 뭔가를 찾고 있었지만, 가나의 눈에도 더 이상 라마는 보이지 않았다. 마치 방금 전 보았던 것이 환영이라고 말하고 싶은 듯 기어코 달려간 그곳에는 라마의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잊을 수 없는 등이었다. 자신을 살리기 위해 그 작은 몸으로 자신을 업어주었던 등. 다시 만날 약속을 하였지만, 뒤 돌아서 사라지는 그 작은 등은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을 것이라는 듯 손을 뻗어도 닿지 않았다. 

망연자실한 눈물로 라마의 이름만을 읊고 있는 가나를 바라보던 한스덴은 미어지는 가슴을 못 참고 그대로 가나를 껴안았다. 

“이제야……. 이제야 목소리를 들려주는 구나……!”

한스덴은 울먹이듯 말하며 가나를 껴안았다. 

이토록 선명한 목소리는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었다. 말을 하지 못한다는 것에 마음 깊이 안타까워하던 한스덴에겐 가나의 목소리는 기적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곳을 바라보며 환영에 홀린 듯 외치는 목소리였지만, 한스덴 웨이는 아들의 목소리를 들었다는 것만으로도 기뻤다. 

가나는 그런 안도하는 한스덴의 품에 안긴 채 눈물을 흘리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다. 그 어디에도 찾아 볼 수 없는 라마의 흔적.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 그 작은 등이 머릿속에서 떠나가질 않았다. 

“에고,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랍니까!?”

“뭔가를 찾은 것이야. 그 라마라는 것이니?”

한스덴이 달려온 사내에게 말하고 가나에게 물었다. 가나는 그런 한스덴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가나를 바라보던 사내는 잠시 머릴 긁적이더니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찾아요? 누굴 말입니까?”

“자네는 못 봤나?”

“나무나 돌을 착각하신 것 아니신지? 궁 뒤를 오갈 수 있는 자는 왕족의 허가가 떨어져야 하는데, 최근에 허가가 떨어진 건 기사와 가디언 외에 백작님뿐이고 가디언은 에덴에서 도착한지 얼마 되지 않아 내관에 있지 이런 곳에서 서성거릴 시간이 없을 겁니다. 또 기사들은 자존심이 강해 정문을 선호하니 아마도 잘 못 보신 걸 겁니다. 더구나 사람이나 동물이 있었다면 응당 기척이라는 것이 있어야 하는 데, 전혀 없잖습니까?”

한스덴도 그 말에 동의 했다. 이곳은 함부로 드나들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왕족의 허가가 떨어진 기사와 가디언들과 소환을 부름 받은 귀족들뿐이다. 가나가 몸부림을 치며 달려갈 때도 전혀 살아 움직이는 것에 기척을 느낀 바 없어 아직은 몸이 나약한 가나가 뭔가에 착각한 것이 거의 확실해 보였다. 

한스덴은 큰 손으로 가나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었다. 착각이라고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내지 않고 품에 있던 손수건을 꺼내 가나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사람을 시켜 이곳을 지나갔던 이들을 조사하라 일러주마. 라마라 했던가? 그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는지 알아봐 줄 테니 이제 그만 울 거라.”

다정한 그 목소리에 안심이 된 것인지 가나는 눈물을 멈추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

어둠으로 강제로 나를 끌고 온 놈은 빛이 보이는 틈에서 사라지는 한스덴과 가나를 바라보고 그제야 숨을 내뱉었다. 나의 입을 가리고 있는 그 손이 거슬려 쳐내고 품에서 빠져나오려 하자 놈은 허리를 감은 손에 힘을 주어 내 귓가로 다가왔다. 

“나의 왕.”

신음과 같은 그 소리를 끝으로 놈은 강제로 내 어깨를 잡아 돌린 뒤 벽에 닿게 했고 손을 들어 내 고개 바로 옆으로 양 팔을 뻗어 내리친 뒤 나를 가뒀다. 결코 태양을 바라볼 수 없는 문이었다. 성가신 개새끼 한 마리가 식은땀을 지저분하게 흘리며 나를 노려보는 데, 그 눈은 광적으로 이글거리기 시작했다. 

“그 눈으로 가둘 수 있는 건. 나야.”

나를 똑바로 바라보는 붉은 눈동자. 날이 서 있는 그것은 칼끝과 다름없었다. 분노만으로 가득한 것으로 숨을 내뱉으며 으르렁 거리는 놈을 지켜보다 손가락을 들어 건방진 눈동자에 찔러주었다. 

불시에 눈에 힘을 주고 있다 당해 악 소리를 내며 눈을 감싸고 떨어지는 지켜보다 가나가 사라진 곳을 향해 눈을 돌려보았다. 

그곳엔 가나가 없었다. 

뭔가가 내 손목을 잡았다. 잡힌 흰 손을 바라보다 시선을 내려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눈을 들어 나를 바라보는 문이 보인다. 잔뜩 날이 서 있는 눈동자가 당장이라도 피를 원하는 듯 했다. 숨기지 못하는 문의 눈빛에 나는 스스로 눈을 감고 빛이 보이는 곳을 향해 등을 올려 문을 바라보았다. 

“왜 나왔어.”

“그냥. 왕이 어디가나 하고.”

“열이 오를 테니 돌아가 기다려라.”

 “……. 죽일 거야.”

 잔뜩 쉬어 있지만, 그만큼 강렬한 살기를 숨기지 않고 문은 입을 열었다. 

문의 날카로운 눈동자가 번쩍 뜨여 나를 바라본다. 

그의 입 꼬리가 올라갔고 유난히 붉은 혀로 입술을 핥더니 머리를 쓸어 올리곤 빛이 향하는 곳을 노려보았다. 

 “왕을 미치게 하는 벌레는 내손으로 갈가리 찢어 내장을 파먹을 거야.”

 "……."

 “놈의 팔과 다리를 뽑은 뒤 그 목을 잘라 발로 짓밟아 터트릴 거야.”

난 대답을 하지 않았지만, 문은 그 손에 힘을 주어 향했던 곳의 시선을 돌려 몸을 숙인 채 나를 올려다보았다. 턱 끝을 향해 떨어지는 놈의 땀이 입이 열리자 그대로 땅바닥에 떨어져 바닥을 적셨다. 

"나의 작은 왕. 인간이 되려 하지 마”

상태가 좋지 않은지 흐르는 땀으로 전해지는 열기가 나를 숨 막히게 만들었다. 내가 그런 것이다. 영원히 자유를 바랄 수 없게 날개를 부러트리고 하늘조차 그리울 수 없게 빛이 들어오지 않는 철장 안에 가둬버린 건 나였다. 

가나를 위해 문을 희생시켰고 결국 문에게 있어 나만이 세계일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일일이 상기시켜주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초조해 하는 게 거슬릴 정도로 눈에 보이는 문은 기어코 나를 들개의 왕좌에 억지로 앉혔다. 

그대로 발을 들어 나의 팔을 붙잡고 있는 놈의 배를 찼다. 웅크리면서도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는 문을 내려다보다 그렇잖아도 짠맛이 느껴지는 듯한 입가를 닦았다. 

“더러운 손으로 날 만지지마.”

내 말에 무심코 자신의 손을 들어 바라보는 문. 피가 굳어 본인이 보기에도 더러웠는지 자신의 옷에 손을 닦아보지만, 그렇다고 떨어져 나갈 것들이 아니었다. 그런 바보 같은 모습을 바라보다 이곳에서 나오기 위해 몸을 돌리자 문이 벌떡 일어나 내 등을 안았다. 

“씻겨준다고 했잖아.”

얌전히 기다리고 있으라는 말은 떠오르지 않는지 본인이 원하는 쪽으로만 기억력이 좋은 녀석이 들러붙었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이길 자신이 없어 결국 두들겨 패주는 것도 귀찮아져 묵묵히 바라보는 데 눈을 감고 있는 문이 창백한 얼굴로 들뜬 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러게 들어가 쉬고 있으라고 해도 죽어라 말을 안 듣는 놈. 

손을 들어 문의 뺨을 툭툭 건드리자 내 어깨에 얼굴을 비볐다. 

“미안…….”

미약하게 들리는 목소리. 

사과라는 것도 할 줄 아는 짐승이었나 싶어 놀라 놈을 바라보자 어느새 감은 눈을 뜨고 문이 나를 향했다. 내 배를 감싸고 있는 문의 손을 잡았고 잔뜩 겁에 질려있는 문에게 말했다. 

 “나는 들개……. 절대 인간이 될 수 없다.”

나의 목소리에 내 어깨에 묻었던 고개를 들어 올려 나를 바라보았다. 가나를 의식할 필요가 없다고 말해주려고 했지만, 보다 빨리 문은 내 손을 한손으로 모두 감싸 올려 자신의 입에 대었다. 그리고 속삭이듯 입은 연다. 

 “당신은 들개. 나의 절대자.”

문을 데리고 궁 밖까지 나갈 기운도 없었고 계속 거지꼴로 다니게 할 수 없어 우리는 돌아가기로 했다. 원하지 않던 재회도 있었지만, 생각보다 가나는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 이제 내게 남은 걱정은 두 놈들을 향해 있었다.

방으로 들어가자 무릎을 꿇고 다소곳이 앉아 있는 은아가 먼저 보였다. 저 상태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기척이 들리자 고개를 번쩍 들어 날 바라보는 것이 문을 확대 시켜 놓은 것 같다. 

멀끔한 모습에 흡족했지만, 나체로 일어나려 하자 흉물스러운 것을 보기 싫어 손바닥을 들어앉으라고 말했다. 말대답 하나 하지 않고 다시 곱게 앉는 모습이 내 뒤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문 보다 나았다. 

“말을 좀 하고 가지!! 저 놈이 날뛰면 누구보고 감당하라고!! 그런데 이 조합은 대체 뭐야?!”

아직도 방에 있었는지, 마스가 흥분을 가득 채운 침을 튀기며 물었다. 분명 제대로 된 설명을 해 준 것 같은데, 또 물어보는 통에 살짝 짜증났지만, 들러붙은 문을 밀어내고 은아에게 다가갔다. 몸집이 워낙 커서 앉아 있음에도 상체의 길이는 서 있는 나보다 컸다. 

“문의 아우다.”

내 말에 문은 자신의 가슴을 치며 웃으며 ‘맞아. 내 아우야. 아우.’라며 조잘거렸다. 꺄르르 웃는 모습이 놈의 정신연령을 말해주는 것 같아 골이 울리는 것 같지만, 무시하고 은아의 얼굴을 모두 가리고 있는 머리카락이 거슬려 바라보다 앞머리를 한 움큼 집어 들어올렸다. 

생각보다 사람 같은 얼굴이라 놀랐고 내 옆으로 다가와 내가 하는 행동을 지켜보던 문도 작게 탄성을 지른 뒤 놀라워했다. 본인의 얼마나 더러운지는 전혀 몰라 놀랄 것도 없는지 짧게 구경하다 금세 싫증이 났는지 떨어져 앉아 눈을 비비기 시작했다. 

습관적으로 눈을 비비는 행위 때문에 문은 자라면서 시력이 더욱 나빠져 눈앞에 있는 사람도 얼굴을 가까이 들이대 봐야 볼 수 있었다. 원래 시력을 의존하지 않는 놈이긴 했지만, 그 정도면 거의 실명에 가까운 시력이기에 난 은아의 머리카락을 손에 놓고 눈을 비비는 문의 손을 때려 떨어지게 했다. 

“넌 가서 이 녀석들 걸칠 옷이나 가져와라.”

마스에게 말하자 시킬 줄 알았다면서 툴툴 거리더니 마스가 나갔고 말은 저렇게 해도 지금까지 나가 있으라는 말을 하지 않은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씻기는 것 따윈 정말 하기 싫지만, 결국 나는 두 번째 소매를 걷었고 손을 까딱인 뒤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따뜻한 물이 가득한 통은 마스가 채워놓은 것인지 아직도 열기가 남아 김이 올라오고 있었다. 

“벗어야지 멍청아.”

그대로 앉아 기다리는 문이 내 말에 걸레짝같은 옷을 벗어던졌다. 옷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상처들이 예전보다 더 늘어 있었다. 몇 군데는 살점이 붙은 지 얼마 되지 않는 상처들로 그제야 잠잠했던 발열이 또 들끓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은아보다는 낫지만, 문도 결코 작은 놈이 아니었다. 앞으로 이보다 몇 배는 자랄 텐데 그때마다 씻겨달라고 하면 통에 넣고 돌려버리던지 해야겠나 싶다. 물을 떠 문의 머리에 부었고 뚝뚝 굳은 피가 물과 함께 씻겨 내려갔다. 적당히 식어서 그런지 굳지 않고 흘러내려가는 핏물을 바라보다 더 이상 나오지 않을 때 까지 물을 붓고 난 뒤 비누로 거품을 내어 문질러 주었다. 

흡사 개털을 비비고 있는 것 같았지만, 거품을 씻기고 나자 눈밭처럼 하얀 머리카락이 제 모습을 찾았다. 결이 좋은 머리카락이라 이렇게 한 번 씻기고 나면 참새새끼의 몸통을 손에 쥔 것처럼 부드러웠다. 

씻겨 줄 때마다 ‘헤헤헤’거리는 실없는 웃음을 뱉어내던 문은 저번처럼 도중에 쉽게 잠이 들지 않았다. 보면 하품을 끊임없이 하면서도 버티는 것 같은데, 예전에 마스가 씻긴 것을 기억하진 못해도 도중에 내가 사라졌다는 건 알고 있는 듯 했다. 

머리는 다 했고, 이제 몸을 씻길 차례다. 하지만 워낙 난도질을 당한 몸뚱이라 어쩔까 하다 그냥 물을 몸통에 붓자 문이 움찔거리며 가늘게 몸을 떨었다. 

 “아파?”

내 물음에 문이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별 상관은 없을 것 같아 계속 물을 부었고 머리통을 씻겼던 것과 마찬가지로 비누거품을 내고 상처부위를 최대한 피해가며 문질렀다. 몸을 닦던 하얀 천이 갈색으로 변할 정도로 씻긴 뒤 헹궈 문에게 던졌다. 

그곳은 알아서 씻으라고 말하자 주섬주섬 천을 잡아 정말 알아서 씻었다. 그리고 ‘아!’하는 탄성과 함께 뭔가 싶어 바라보자 문이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이거 커졌어.”

“빼.”

“??”

내 말에 고개를 돌려 밑을 바라보던 문의 얼굴이 조금 찌푸려졌다. 창녀인 어머니 밑에서 자랐으니 내 말을 모를 리 없다고 생각했지만, 표정을 보아하니 정말 모르는 것 같은 눈치다. 그렇다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인데, 문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도통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이걸 어떻게 빼? 뽕! 하고 뽑아?’라고 중얼거리고 있는 지금 이놈은 거짓말을 하질 못한다. 

방관은 해도 속이진 못하는 놈이기에 가변성이 없는 녀석이다. 16세 정도의 나이. 살인으로 성적 욕구까지 채웠던 과거와는 조금은 동떨어진 문은 자신의 가랑이 사이를 훑어보다가도 열이 오르는 모양인지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들뜬 숨만을 내 쉬고 있었다. 

밟아서 죽을 거면 이런 고민도 하지 않았다. 나 역시 기본적인 성욕에는 관심이 없어 뭐라 설명해주기는 난감했지만, 그냥 내버려두면 꽤 고통스러운 것만은 확실할 것 같았다. 

“본 적 없어? 쥐고 흔들잖아.”

“흔들어? 뭘?”

“…….”

“?”

뭔가 앞뒤가 안 맞는 것 같은 문의 행동이 혼란스러웠다. 창녀의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면 충분히 배우고도 남았을 것이다. 보고 배운 적 없던 나도 어느 순간부터 알고 있었던 것을 모른다는 건 말이 안 된다. 

그렇다면 내가 알고 있는 문의 과거가 왜곡되었다는 것인데, 분명 그때 문은 자신의 어머니가 창녀라고 했다. 기억을 더 더듬어 보면 창녀인 어머니가 문을 얌전하게 만들기 위해 창고에 가둬 마약을 태웠다고 했다. 

때문에 마약이라면 소량만 맡아도 발광을 할 정도로 싫어하지 않던가. 

잠깐. 

“얌전하게?”

뭔가 이상하다. 내가 중얼거리자 문이 고통에 차 조금은 괴로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난 그런 문에게 다가가 그의 손을 잡아 팽팽하게 커진 그곳에 손을 가져다 대 주었다. 움찔 거리는 몸이 얼마나 달아올라 있는지 알려주었다. 

“그때, 왜 빠져나오질 않았지. 너라면 충분히 나오고도 남았을 텐데.”

아무리 어렸어도 지금의 나 정도의 나이였다. 강제로 끌고 갈 만한 짐승이 아닐뿐더러 창고를 나올 수 있는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을 것이다. 체력과 연륜이 부족하단 이유론 설명이 되지 않는 부분이었다. 적어도 문에게 있어 가둬둔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것이니까. 

손을 맞잡고 그것을 쥐게 만들어 위 아래로 쓸어내리게끔 방향을 유도했다. 잠시 들뜬 숨과 함께 ‘헉’하고 내 뱉는 신음으로 상체를 숙여 내 어깨에 묻은 문이 진득하게 내 목덜미에 코를 박고 입을 열었다. 

내 말에 조금의 고민도 없이 문이 입을 열었다. 그만큼 그 기억이 생생하다는 것이다. 아무렇지 않게 물어도 의문 한 번 품지 않고 들뜬 숨으로 대답했다. 

 “얌……. 전하게 기다리라고 했어.”

 “누가?”

 “그…… 여자 읏…….”

 “그럼 왜 죽였어.”

 “……워”

문의 몸이 바들바들 떨려왔다.

이내 끈적끈적한 뭔가가 내 손에 닿은 느낌과 함께 잡고 있던 그것에 힘을 푼 문의 손이 뭔가가 묻었다는 혐오감에 몸서리치고 있는 내 손을 맞잡아 왔다. 그게 기겁하고 빼내려했지만, 잔뜩 늘어진 주제에 손힘은 풀지 않았다. 

 “원했으니까.”

문이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그리고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었는지 눈을 감고 잠이 든듯하다. 이제야 제대로 문을 알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문은 창녀의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나날이 망가지는 어머니와는 달리 화려하게 자라나는 문을 노리는 놈들이 있을까 염려한 그녀는 문을 창고에 밀어 넣고 마약을 태워 문을 향한 모든 시선을 단절시켜 그녀 스스로에게 돌렸다. 

그 때마다 썼던 마약은 망가진 그녀가 마지막으로 문을 지키기 위해 썼던 약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광기에 가득 찬 짐승이 된 문에게 죽임을 당하길 원했다. 결국 원하던 죽음을 맞았지만, 문에게는 낫지 않는 상처밖에 되질 않는 것이었다. 

단 한 마디만으로 왜곡되었던 과거가 제자리를 찾았지만, 그 끝이 더욱 쓰게 입안을 맴도는 것 같았다. 

문에게 벗어나 더럽혀진 곳을 깨끗하게 씻기고 끌고 가기에는 커서 밖에 있을 은아를 불렀다. 그 사이에 마스가 다녀왔었는지 은아는 멀끔하게 옷을 입고 있었다. 비록 긴 천을 두르고 걸친 것 밖에 되진 않았지만, 나체로 돌아다니는 것보단 나았다. 

어쨌거나 오늘은 이쯤에서 마무리가 된 것 같아 습관이 된 한숨을 내쉬고 나는 다시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란은 라마가 한 말을 잊을 수 없었다. 툭 건드리면 쓰러질 것 같은 작은 몸과 입으로 내뱉었던 모든 말은 또래의 소년들에게선 절대 느낄 수 없는 기백이 느껴졌다. 라마의 입을 통해 들은 것은 대현자의 그것과 비슷했다. 어린 소년에게서 왕의 기운과 현자의 기운이라니, 되씹어 보아도 어이가 없었지만, 애써 부정하지 않았다. 

라마는 슈레이의 정체를 알고 있다. 언제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는 궁금하지 않는다. 문제는 그가 어디까지 알고 있냐는 것이다. 슈레이가 왕족이라는 것만 알았다면 이런 고민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분명 왕의 그릇이라고 말했다. 

왕족이긴 하나 아직까지 그 계승을 이어받지 않는 그를 라마는 똑똑히 ‘왕’이라고 단정 지었다. 

왕권계승에 혼돈스러운 것은 트란슈도 마찬가지다. 더구나 먼저 태어난 왕자가 있기에 슈레이가 왕권을 물려받을 것이라는 예측은 쉽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또한 그의 출신도 문제를 삼을 수 있는데, 슈레이의 어머니는 에덴의 출신의 귀족이었다. 과거 로던프의 침략으로 에덴을 빼앗겼다. 빼앗긴 땅에서 태어난 어머니를 뒀다는 이유만으로도 슈레이가 왕위에 올라야 하는 것을 장로들은 적잖게 반대를 하고 있는 모양이다. 

로던프의 눈치를 보면서 슈레이를 왕으로 세우면, 불필요한 의심을 받아 후환이 두려울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런 그의 신분과 출신을 알고 있는 자라면 왕의 자리를 단언할 수 없을 터. 

“그러고 보니, 내가 왕족이라는 것에도 놀라지 않았었지.”

 표정에도 변화가 없었다. 마치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문호를 대할 때도 마찬가지다. 전혀 위화감이 없어 문제 삼지 않았던 부분이지만, 란은 다시 한 번 이 부분을 되짚어 봐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단순히 예견을 잘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한건 라마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라마를 지켜본지 1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 작은 꼬마의 심중을 알 수 없었다. 내뱉는 건 사실적이고 이성적이며 굉장히 객관적인 것 같은데, 조합해 보면 도저히 라마가 알 수 있을 법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마치 맹목적인 믿음처럼 라마가 그런다고 하면 그럴 것 같았다. 

왕위에 오르라고 충고 했다. 하지만 굳이 왕관을 필요치 않다 했다. 그가 들개의 왕이 된 것처럼. 분명한 각인을 넣으라는 것이겠지. 

라마가 정말로 미래를 알고 있고 자신에게 충고를 하는 것이라면, 란이 알아야 할 것은 딱 두 가지다. 

각인과 기회.  

속고 속이는 것. 둘 모두가 알고 있다고 해도 결국 이기는 쪽은 속이는 쪽이다. 

그것이 누구냐가 중요하다고 말했던 라마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듯싶었다. 마치 자신의 머리 꼭대기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것처럼 란은 순식간에 올라오는 소름을 견딜 수 없어 인상을 썼다. 

그러고 보니, 습관처럼 그가 내뱉는 말이 떠올랐다. 

‘나는 네놈보다 나이가 많아.’

농담같이 들려 넘어갔던 말이지만, 곱씹을수록 흘려 넘길 수 없어 당황스러웠다. 저 말이 사실이라면 라마는 미래를 볼 수 있거나, 미래에서 왔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건 정말 미치지 않는 이상 말도 안 되는 추리였다. 

라마에 대해서는 되짚어 보면 볼수록 머리만 아파오자 란은 자신의 손을 들어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혁명을 계획하고 그것을 차근차근 밟아가며 실행할 때 보다 더한 두통이 느껴져 이건 마치 뻔히 답이 보이는 문제를 두고도 답을 내지 못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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