란은 생각을 길게 잇지 않았다. 지독히도 길고도 지루할 게임이 될 테지만, 승리의 윤각을 볼 수 있는 건 3년도 채 남지 않았다. 그 첫 막은 트란슈의 왕이 확정이 되고부터.
만약 라마의 말대로 그가 정말로 ‘왕’이 된다면 가장 경계해야 할 대상은 로던프의 이 빠진 짐승이 아닌, 트란슈 레이 더 바함. 트란슈 제국의 새로운 태양일 것이다. 그것을 미리 알고 있다는 건 꽤 좋은 카드를 손에 쥔 것이나 다름없다.
그가 원하는 바와 자신이 향하는 목적은 비슷하다. 마음만 잘 맞는다면 손을 잡는 것도 불가능 할 것이 아니다.
라마가 바라는 것도 자신과 다름없을 것이다. 그러니, 당장 손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초조해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시간을 두고 천천히 길들이면 되는 것이니까.
**
눈을 뜨니 아침이었다. 일어나자마자 욕실로 들어가 간단한 목욕을 하고 나온 나는 가디언의 제복으로 갈아입고 상태를 점검해 보았다. 크게 나쁠 것도 없지만, 역시나 걸리는 게 있다. 생각보다 일찍 문관이 된 가나가 궁에서 나와 마주치게 되면 일은 상당히 복잡하게 돌아가기 때문이다.
가디언과 문관은 접점이 없어 크게 신경은 쓰지 않지만, 늘 예외라는 법도 있다.
바로 어제처럼.
얼굴을 가려야 하나 고민했지만, 그러다 들키면 더 곤란해지기에 조만간 이 문제는 제대로 해결해 보기로 했다. 플라이로 1년을 허비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가나의 기억 속에서 잊히거나 혹은 미화가 될 것이다.
그대로 잊히게 된다면 상관없지만, 멋대로 미화시켜 허튼짓을 할지도 모른다.
문제가 없어야 한다. 가나에게 있어 나라는 존재로 절대 문제가 되어서는 안 된다.
커다란 그림자가 나를 덮었다. 그리고 내 옆으로 다가오는 거대한 손. 그 손 위에는 곱게 접어진 손수건이 놓여 있었다. 그것을 받아들고 주머니에 넣었고 일찍 일어난 은아를 바라보았다.
“일찍 일어났군. 용병들에게 허가된 제복은 따로 없으니 지금 네가 걸친 것만으로도 충분할거다. 따로 부름을 받으면 성실히 임하도록.”
은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잘 듣는 아이다. 어디서 사는 어느 집 똥개보다. 훨씬.
덩치는 산만하지만 성격과 행동이 아기자기해 순한 녀석이 어느새 내가 일어난 침대로 다가가 이불을 정돈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감탄하며 바라보다 문득 구석에서 묘한 자세로 뻗은 놈이 눈에 들어왔다.
해가 뜬지가 꽤 됐음에도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흰둥이에게 다가가 놈을 내려다보았다.
"기상”
당장 밖으로 나가야 했기에 기상을 외쳤지만, 꿈쩍 한 번 안하고 배를 긁는 놈을 밟아 줄까 하다 침대를 다 정돈하고 야무지게 내 뒤에서 기다리고 있는 은아를 바라보다 무심코 입을 열었다.
“은아는 저렇게 말을 잘 듣는데……. 이 똥개새끼……. 확 바꿔버려?”
그리고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문의 눈이 번쩍 떠졌고 발딱 일어나 나를 바라보았다. 멍한 얼굴이지만, 잠에서 깬 것만은 확실하다.
문은 내가 무슨 말을 하기 전에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직행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축축하게 젖은 몰골로 나타나 은아가 건네주는 천으로 물기를 닦다. 그리고 은아가 건네주는 옷으로 갈아입다가 자꾸 손이 삐끗 거리자 은아가 옷 입는 걸 도와줘서 제복까지 완벽하게 입고 내 앞에 섰다.
뒤에선 은아가 그의 긴 머리카락을 빗으로 빗겨주고 있었다.
아침이긴 하지만, 들어오는 햇빛에 눈을 뜨지 못하고 있는 문이 억지로 실눈을 한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고 난 그런 문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허락이 떨어진 전투를 제외 두 눈을 감고 있어라.”
“응.”
화사하게 웃으며 단 1초의 고민도 없이 내뱉고 있지만,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문은 시력에 거의 의존을 하지 않았었다. 두 눈을 너무 혹사시켜 시력이 떨어진 이유도 있었겠지만, 시력을 의존하지 않고 육감만으로도 충분히 일상적인 생활은 물론 전투까지 가능했던 놈이다.
지금부터라도 두 눈을 혹사시키지만 않는다면, 최소한 눈을 뜨고 있을 때에는 시력을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다.
오랜 훈련으로 어쩔 수 없이 만들어진 과거의 문과 지금이 얼마나 차이가 있을 진 모르겠지만, 적어도 과거 목줄을 채웠을 때 문이 시력을 가지고 있었다면 난 결코 살아있는 문의 목에 목줄을 달진 못했을 것이다.
=
착실하게 눈을 감고 밖으로 나가는 내 발자국 소리를 따라 문이 나왔고 그 뒤를 은아가 이었다. 좋지 않는 구도로 막 발을 옮기려는 순간 누군가가 헐레벌떡 뛰어오는 게 보였다. 그는 보기만 해도 시끄러울 것 같은 오덴이었다. 문도 그 발자국 소리만 듣고도 누구인지 눈치 챘는지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려 뒤로 물러났지만, 그의 앞까지 다가온 오덴이 숨을 고르게 내 쉬고 진정이 됐는지 입을 열었다.
“너 좋게 말 할 때 따라와라.”
“아……. 귀찮아. 저 새끼는 지치지도 않나.”
“문!!!”
꽥- 소리를 지르는 오덴과 내 뒤에서 귀를 막고 서 있는 문. 시끄러워지는 걸 원하지 않기 때문에 난 팔꿈치로 문의 배를 쳤다. 강하게 친 것이 아니라서 충격은 없었지만, 강하게 쥐어터지기라도 한 얼굴로 입술을 내밀더니 입을 열었다.
“나도 플라이 할래.”
“이 미친놈아!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문의 말을 듣고 기겁을 하며 오덴이 외쳤다. 그런 놈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문은 불만에 가득 찬 얼굴로 플라이 하겠다고 고집을 쓰기 시작했다. 문을 부르는 이유는 알 것 같았다. 4년마다 행해지는 무투 대회가 코앞까지 다가왔으니 말이다. 트란슈 회담 다음 날부터 이어지는 무투 대회는 사흘 동안 이어지는 꽤 큰 행사이다. 가디언의 자존심이 걸려 있는 대회이기도 해서 그들 입장에서는 문이 필요한건 당연할 것이다.
“소란 피우지 말고 얌전히 따라가.”
조용히 입을 열자 내 목소릴 들은 오덴이 놀란 듯 날 바라보았다. 하지만 곧 울상이었던 문이 성난 표정으로 오덴을 노려보았다. 갑작스러운 살기에 놀란 오덴이 바라보자 문이 말했다.
“내거니까 보지 마.”
“뭐, 뭐?”
“눈알 뽑아버린다 호구.”
“뭐? 야! 호쿠라고 내가 몇 번을 말해!!”
귀가 따가울 지경이라서 문에게 어서 가라고 고갯짓을 했다. 반항기 가득한 표정으로 혀를 차던 문은 구부정한 걸음으로 밖으로 나갔다. 그러면서도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는데, 부르면 당장이라도 달려올 기세였다.
시끄러운 두 놈이 사라지자 주위는 한결 조용해 졌다. 제 성질에 못이긴 문이 괜히 앞에 있는 돌멩이를 걷어차면서 사라지자 나 역시 몸을 돌려 내가 가야하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란의 전속 가디언이 되었지만, 기본적인 행사에는 참가해야하기 때문에 아마 본인이 싫다고 해도 강제로 참가시키게 될 것이다. 눈에 띄어서 좋을 일은 아니지만, 실전이 필요한 문에게는 당분간 본인의 결점과 장점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경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실전 경험은 지금도 충분하지만, 스스로에게 제약을 둔 일은 없었기에 처음엔 당황할 것이다. 하지만 적응이 괴물 같은 놈이니 알아서 잘 할 것이니 걸리는 부분은 없다.
어느 정도 왕자의 처소까지 걸어가자 미리 밖에 나와 있는 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에게 다가가 뒤에 섰고 란은 기다렸다는 듯 걷기 시작했다. 앞에 있을 트란슈 회담을 대비해 왕과 왕자와 원로들이 한 대 모이는 자리에 아무리 백치라도 자리는 지키고 있어야 했기에 그곳을 향해 걸어갔다.
한동안 말없이 걸어가던 란이 눈을 내려 나를 바라보았다.
“무투 대회에 너도 나갈 건가?”
“아니.”
“저것도 안 나가나?”
눈을 올려 은아를 바라보던 란이 다시 시선을 내게 돌렸다. 내가 별 말이 없자 혼자 답을 내린 모양인지 잘도 지껄이고 있었다.
“…….”
“그럼 지금 이 자리에 없는 그 백자만 나가겠군. 실망인데?”
"앞이나 똑 바로 봐.”
실실 웃으며 내 말에 앞을 향해 바라보며 걷는 란은 회의실에 가까워지자 자신의 뒤를 따르는 자들이 늘어났음에도 좀처럼 표정을 지우지 않고 들어갔다. 무투 대회에 란이 신경을 쓰는 이유는 알고 있었다. 다만 놈이 이렇게까지 문을 거슬려할 이유는 없다는 것이 문제다. 처음부터 자신의 개가 아니라는 이유 때문일까. 하지만 이것은 이유를 채우기에는 모자라다.
실실 웃고 있던 란의 얼굴이 갑자기 일그러졌고 그 걸음 또한 멈추었다. 나 역시 란의 뒤를 따라가고 있었기에 걸음을 멈추자 어디선가 파리가 앵앵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백치가 이곳에 왜 온 거지?”
뒤로는 기사들을 이끌고 걸어오는 파리는 네 명의 왕자 중 한 명이었다. 란이 세 번째 왕자라고 알고 있으니 생김새로 보아 명줄이 얼마 안남은 두 번째 왕자가 분명하다. 여색과 마약에 빠져 분탕한 생활을 즐기면서 주제에 야망은 높아 왕권을 탐내는 탐욕스러운 인물로 알고 있다.
난 대부분의 시간을 전장에서 보냈기 때문에 2왕자를 직접 대면할 일은 없었다. 더욱이 명줄이 짧아 암부였는지, 혹은 다른 세력에 의해서였는지는 몰라도 사망소식을 들은 바 있다.
“주제에 너도 왕자라는 것이냐?”
듣는 이가 백치로 알려진 란이 아니었다면 충분히 문제를 삼을 수 있는 언행이었지만, 란은 그저 저 소릴 듣고도 멍한 표정으로 묻는 말에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속으론 칼을 물고 있을 테지만, 백치 연기가 제법이었다.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는 란을 보다 다시 2왕자를 바라보았다. 그저 덜떨어지고 야망만 높은 놈인 줄 알았지만, 백치라며 모욕하는 형제를 보는 눈에 경멸만 들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본인조차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지만 말이다. 한껏 란을 모욕하던 놈의 시선이 문득 내게로 향했다.
“응? 이건 또 뭐야?”
순간 실실거리기만 하던 란의 얼굴이 미세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
2왕자의 면상이 내 눈앞까지 다가오자 은아가 먼저 움찔 거리며 움직이려 했다. 난 그런 은아의 발을 치고 그 이상 움직이지 마라 신호를 보냈다. 문처럼 미친 망아지는 아니라서 잠자코 있으라는 신호에 민감해 곧 멈췄다. 하지만 살기를 감추는 것은 서툰 모양인지 왕자를 노려보는 눈빛이 금방이라도 양손으로 잡아 찢을 기세다.
그런 살기도 못 알아차리는 2왕자는 눈치도 없이 눈앞에서 알짱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내 익히 가디언의 호위를 받을 거라는 얘기는 들었지만, 고작 젖먹이 애송이한테 호위를 받는 왕자라니! 어울려! 딱 네 수준이지 않느냐?! 어디서 출신도 모르는 잡놈을 데려와서……. 감히 왕족을 모욕하느냐.”
무겁게 목소리를 깔고 2왕자는 매처럼 눈을 뜨고 란을 노려보았다.
“네 목이 떨어지면, 어린 가디언에게 받게 할 생각이냐? 네 아무리 백치라도 상식이라는 건 있어야지. 당장 정식 기사로 바꿔라.”
2왕자는 나를 신경 쓰는 듯 했다. 대답 없이 미소만 짓고 있는 란을 바라보더니, 인상을 쓰며 다시 나를 내려다보았다. 기분 나쁜 시선이다.
“정식 기사를 구할 때까진 내 기사를 빌려주지. 어린 가디언은 내게 넘겨라.”
그러면서 2왕자는 내 팔을 붙잡았다. 아무렇지 않게 끌려 올 것이라 생각했던 모양이었는지, 크게 힘이 들어가지 않는 손이 란에게 붙잡혔다. 2왕자는 이 손의 주인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놀란 얼굴이었다.
“거절합니다.”
“뭐?”
“제 것입니다.”
란은 표정 없는 눈으로 2왕자를 바라보다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강렬한 힘에 놀란 2왕자가 저도 모르게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며 벗어나려 용을 쓰고 있었다.
백치라도 왕자인지라 기사들은 함부로 움직이지 못했다.
그렇게 끙끙거리며 벗어나려하는 왕자를 바라보던 란이 손을 놓자마자 꼴사납게 뒤로 넘어진 왕자는 자신을 부축하는 기사들을 밀치고 일어나 란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네놈이 감히!!!”
반항 없이 멱살을 잡힌 란의 표정이 좋지만은 않았다. 연기를 할 생각이 없는 것인지 그의 늘 초점 없던 눈은 똑바로 눈앞의 2왕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런 란의 표정을 믿을 수 없는 2왕자는 황당하다는 표정만 지을 뿐이었다.
“지금 뭣 하는 짓이냐.”
대치한 두 왕자의 뒤에서 그들을 단 한 마디로 장악하는 목소리. 소름이 돋도록 차갑게 노려보는 금빛 눈동자는 왕의 그릇으로 의심할 수 없는 기백을 가지고 있었다. 단단한 그 발걸음이 떨어지자 잔뜩 굳은 2왕자는 저도 모르게 잡았던 멱살과 말아 쥔 주먹을 내려놓았다.
"혀, 혀, 형님."
그는 로던프 젠 그란스. 실리스 로던프의 제 1왕자이자, 왕권 계승에 정점에 올라와 있는 자.
왕가의 상징인 금빛 머리카락이 그 위엄을 드러내고 있었다.
태양의 신이 직접 빚어 낸 것이라 불리는 그의 금발이 보는 이들을 눈부시게 만들었지만, 난 눈앞이 암흑으로 갇힌 것 같았다.
12살로 돌아가 보던의 들개로 눈을 뜨기 전 마지막까지 울렸던 로던프 왕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 싶었다.
‘나 로던프 젠 그란스는 일국의 왕으로서.’
시리도록 차가운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지만, 당시 달군 불에 눈이 지져지는 바람에 그 고귀하다는 낯짝 한 번 제대로 구경하지 못했다. 왼쪽 고막이 터져있어 오른쪽으로만 들어온 그의 목소리가 가볍게 내 목을 감싸왔었다.
‘그대. 라마드론의 강제 영면을 명한다.’
강렬하게 뒤통수를 얻어맞는 충격이 들었다.
한 번의 흔들림도 없는 오만한 목소리.
놈은 저 주둥이로 나온 검으로 나의 모든 것을 베었고 불태웠다. 놈은 나를 영면시키려 하였고 마지막까지 드론이라 불리며 놈의 개 취급을 했었다.
죽어가던 똥개가 아슬아슬하게 본능 되찾지 않았다면, 나는 그날 죽어서도 놈의 똥개가 되어 꼬리를 흔들고 있었을 것이다.
모든 발톱이 뽑혔던 나였지만, 눈앞에 있었다면 잇몸으로 물어서라도 죽였을 놈.
그 놈이 눈앞에 있다.
“뭣 하는 짓이냐 물었다.”
뒤늦게 1 왕자의 앞을 막고 있었다는 것을 눈치 챈 2왕자는 황급히 란의 목덜미를 잡은 손을 놓고 물러나 자신을 노려보는 1왕자의 시선을 피하기에 바빴다. 2왕자는 1왕자 젠의 눈 밖에 나는 걸 원치 않았기에 조금은 비굴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3왕자를 호위하는 자가 가디언이라 소식 듣고 이참에 바, 바꿔 주려 했을 뿐입니다.”
되먹지 못한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니면서 2왕자는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두려운 것이다. 기백만으로 상대를 짓눌러 공포를 느끼게 할 수도 있지만 젠은 지금 살기를 전혀 드러내고 있지는 않다. 위엄마저 두려운 것이라면 2왕자의 간이 작다는 것 말고는 할 말이 없다.
2왕자의 설명을 듣고 1 왕자 젠은 시선을 돌려 란을 바라보았다.
“가디언을 호위로?”
란이 대답을 하지 않자 그의 눈길이 란의 뒤에 있는 나와 은아에게 향하려 했다. 하지만 란의 몸의 더욱 빨리 반응해 은아까지는 가릴 수 없었어도 내 앞을 가로 막아 젠의 시선이 나에게 향하지 못하게 가로 막았다.
“제 사람입니다.”
다시 연기할 맘이 있는 모양인지 말투는 어눌했지만, 내용은 전혀 아니었다. 때문에 늘 ‘예’라는 대답뿐인 3 왕자가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자 2 왕자와 젠은 상당히 놀란 듯한 눈치였다.
치밀하게 움직여야 할 때에 이런 감정놀이는 도움이 되질 못한다. 란에게 있어 이런 행동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난 그만 놈이 닥쳐주길 바랬다. 이성을 간신히 붙잡고 있는 놈이 란 뿐만은 아니니까.
“빠른 시내에 기사로 바꿔라.”
“......”
“왕자의 호위는 그 목숨과 직결된다. 가디언으로는 왕자를 지킬 재목이 못돼.”
“제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말하는 란을 바라보던 젠은 숨이 막히는 침묵을 만들어 내어 눈앞에서 노려보고 있는 란의 본 모습을 알고 있는 듯 했다. 어렴풋 느끼고 있었던 것이 수면위로 드러나 볼 수 있게 되었는지 젠의 얼굴에서 피어나는 작은 웃음은 여유로울 뿐이었다.
“감히 제 1왕자의 명을 거절하는 것이냐?! 형님, 3왕자는 지금 로던프의 왕족을 우롱하는 행위를 하고 있습니다. 왕족의 신분으로 가디언이라니요! 제아무리 백치라 하여도 이건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말이 안 되는 건 제 2왕자의 혓바닥이다.”
“네?”
젠은 눈을 돌려 시끄럽게 짖어대고 있었던 2왕자를 노려보았다.
“감히 왕자를 눈앞에 두고 백치라 칭하다니. 2왕자의 혀는 고귀한 왕족이자 로던프의 3왕자를 세간에서 떠도는 별호로 놀림거리로 만들었다.”
“…….”
창백한 낯짝의 2왕자를 무시하고 젠은 걸음을 옮겨 란을 지나쳐 회의실 문 안으로 들어갔다. 2왕자는 별 다른 말을 하지 못하고, 어찌나 당황했는지 금방 넘어질 것처럼 천천히 비틀거리며 뒤를 이었다.
2왕자의 기사까지 모두 안으로 들어가자 어느새 꽤 소란스러웠던 복도는 순식간에 모든 소리를 잡아먹은 듯 조용했다.
“아……. 들켰다.”
정적을 깨고 란이 난감한 표정으로 머릴 긁적였다. 백치에서 벗어난 그의 자유로운 모습이 왠지 낯설었다.
“데려왔습니다.”
오덴은 죽어도 제 말을 들은 것 같지 않던 문을 데리고 겨우 바드 앞에 세웠다. 고작 여기까지 데려오는 것만으로도 힘이 빠지는 기분에 오덴이 눈을 들어 문을 노려보았다.
여기까지 오면서 몇 번이고 눈을 뜨라고 말해도 들은 척도 하지 않았고, 넘어지고 깨져봐야 정신을 차릴 것 같아서 한 번 듣지 않기에 내버려 뒀더니 멀쩡히 눈을 뜬 사람처럼 척척 잘도 걸어 다녔다.
심지어는 눈앞에 있는 장애물을 피할 정도였으니, 오덴은 혹시 자신이 안 볼 땐 실눈을 뜨는 게 아닌지 의심했지만 여기까지 오면서 문은 정말로 눈을 뜨지 않았다.
“대체 에덴에는 왜 따라간 것이냐.”
바드가 물었다. 하지만 문은들은 척도 안하고 잔뜩 뭔가에 토라진 얼굴로 바드가 있는 쪽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 모습에 속이 터질 것 같은 오덴이었지만, 바드의 앞이라 함부로 언성을 높일 수 없었다.
“그 검은 소년에게 집착하는 이유가 뭐지.”
문이 반응했다.
눈은 여전히 뜨지 않았지만, 그의 고개가 바드의 목소리가 나는 쪽으로 조금 돌아간 것이다. 바드는 유독 검은 소년에게 민감할 정도로 반응하는 문이 거슬렸다.
그는 장차 자신의 뒤를 이어야 하는 재목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어린 아이와 소꿉놀이를 시킬 생각이 전혀 없었다.
만약 에덴에서 문이 검은 소년을 지켜주지 않았다면, 필시 검은 소년은 그곳에서 단명했을 것이다. 운 좋게 문의 눈에 들어 살아있는 소년을 생각하면서 차라리 에덴에서 죽었다면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모로 검은 소년이 거치적거리면서도 그런 소년을 곁에 두려하려는 3왕자가 의문스러웠다. 같은 의미로 문호 또한 마찬가지다. 심지어 잡아온 괴물역시 용병으로 신분을 세탁하여 곁에 두려 하지 않는가. 검은 소년과 괴물의 조합은 절대로 바람직하지 못하다. 그 틈에 문이 끼어 있다는 것에 바드는 더 생각할 것 없이 짜증이 났다.
백치라 알려진 덜떨어진 왕자를 모시게 하려고 여태껏 문을 봐 온 것이 아니다. 그는 이번 무투 대회를 계기로 자신과 함께 기사로 올라가야 할 재목이다. 성격엔 조금 문제가 있지만, 자신이 옆에서 봐 준다면 문제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왕이니까.”
“뭐?”
문의 목소리가 바드의 귓구멍을 쑤시듯 들어왔다. 자신은 분명 어째서 행동이 귀엽지도 않는 검은 소년을 곁에 두려 하는지 물었었다. 하지만 대답은 어이가 없어 자신의 귀가 잘못 된 것이 아닌지 의심까지 하게 만들었다. 귓구멍을 다시 후벼 파고 바드가 다시 물었다. 같이 듣고 있던 오덴도 놀라 제대로 된 말조차 꺼내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나의 왕. 나의 검은 태양.”
“로던프에서 네가 모실 왕은 오직 로던프 텐 그란스 왕 뿐이다.”
“그딴 늙은이 내 알바 아니거든?”
“문. 입 조심해라. 네놈이 지금 어디서 누굴 비하하고 있는지 아느냐?!”
“너나 닥쳐. 혀를 끄집어내기 귀찮아 목을 따 버리기 전에.”
“하! 네놈이 드디어 미쳤구나.”
“나 미친 지 이제 안 놈도 있었네?”
히죽거리며 바드의 속을 긁고 있는 문은 보기에도 많이 비뚤어진 모습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하루 종일 라마의 곁에 있어도 부족할 시간에 라마의 명령으로 호쿠들이 바글거리는 곳까지 왔지만, 같은 공간에 라마가 없다고 생각을 하니 당장이라고 숨이 막힐 것만 같아서였다.
이곳에 있기 싫었다. 문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라마에게 달려가고 싶었다. 자신의 왕의 곁에서 죽어도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문의 본능과도 같은 것이었다. 때문에 지금 이 상황이 짜증이 나는 건 바드 뿐만이 아니다. 문 역시 남은 인내심 박박 긁어내 겨우 이 곳에 서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건드리지 마. 돌아버리기 전에.”
눈을 뜨지도 않았지만, 당장이라도 바드의 목 줄기를 따 버릴 만큼 위협적인 목소리였다.
바드와 오덴이 대꾸를 하기도 전에 문은 밖으로 나가버렸고, 무투 대회에 대해선 말을 꺼낼 생각조차 못하게 만들어버린 문을 바라보던 바드는 잠시 문이 나간자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덴이 급히 문을 데리러 오겠다며 뛰어나가려하자 바드는 바로 그를 저지했다. 지금 무슨 말을 해도 문은 듣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어쩌면 자신이 당연히 그렇다고 생각한 것이 틀어진 것이 아닌지 생각하던 바드는 문득 무언가 떠올라 오덴을 바라보고 입을 열었다.
“그 검은 소년의 승급 성적이 부전승이라고 했었지.”
“예. 전 대전 모두 부전승입니다.”
“당시 검은 소년과 대전했던 놈들을 데려와라.”
“네.”
오덴이 고개를 작게 까딱이고 밖으로 나갔다. 그 적막 속에서도 바드는 검은 태양이라 말하던 문의 목소리가 아직도 메아리처럼 떠도는 것 같았다.
문이 밖으로 나가자 기다렸다는 듯 붕어들이 떼로 몰려와 문의 앞을 가로 막았다. 그들 중 리더로 보이는 정수리 쪽만 붉은 붕어 한 마리가 앞으로 다가와 왼쪽으로 턱짓을 했다. 하지만 눈을 감고 있는 문에게 그런 신호는 보이지 않았기에 앞을 가로 막은 놈들을 꼬챙이로 꽂아 버릴까 생각했다. 하지만 붕어를 상대하면 라마에게 가는 시간이 더 늦춰진다는 것이 문을 망설이게 만들었다.
곧 라마가 먼저라는 것을 깨닫고 문은 앞을 가로 막은 붕어 떼들을 아쉬운 맘으로 곁을 지나쳐 가려고 했다. 하지만 문이 그들을 무시하고 비켜 걸어가자 앞에서 팔딱거리던 놈이 손을 뻗어 문의 어깨를 잡아 세웠다.
“거, 새끼 더럽게 눈치 없네. 따라오라고.”
“…….”
생각해보니 라마는 얌전히 따라가라고만 했지 가서 놀지 마라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 라마의 흔적과 체취라면 지금도 코끝을 간질거리고 있기 때문에 이것이 남아 있는 한 조금은 놀아도 될 것 같았다.
그들이 문을 데리고 간 곳은 한적한 공터와 같은 곳이었다. 하지만 눈을 감고 있는 문이니 지금 간 곳이 어디라는 건 중요하지 않았다. 아무런 관심도 없다는 듯 헐렁하게 서 있는 문을 바라보던 붕어가 묵직해 보이는 둔탁한 무기를 들고 땅을 내리 찍었다.
“한 가지 묻겠어. 에덴에서 네가 죽인 놈들을 기억하나?”
“에덴?”
에덴이 뭔지도 모르는 문에게 저런 질문은 무의미 했다. 하지만 문이 에덴에 대해 알던 모르던 자신이 할 말에 집중하겠다는 듯 붕어가 잔뜩 살기를 띄우며 뻐끔거렸다.
“플라이 생존자들의 증언에 괴물이 아닌, 네 놈의 손에 내 형이 죽었다들었다. 바른대로 대답해라. 대답 하에 네놈의 명줄을 달리 하겠다. 푸른 눈동자에 갈색머리카락을 한 20대 남성을 죽인 적이 있는가.”
그러고 보니, 안에서 어떤 놈도 에덴에 왜 갔냐고 물었었다. 신나게 논 기억은 없지만, 날뛴 기억은 어렴풋이 남아 있어 문은 쉽게 과거 생각하기도 싫은 기억을 끄집어 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라마를 잃어버리고 발작처럼 날뛰던 그 때.
문은 곧 붕어가 자신에게 복수를 하러 왔다는 걸 알 수 있었지만, 복잡한 것엔 취미가 없는 문이었기에 그러던 말던 관심이 없었다.
흑과 백. 하나와 하나를 더하면 둘이 되는 것처럼 문은 단순한 것이 좋았다.
폭주할 때 역시 그런 성향이 변한 것이 아니라서 살아 있는 놈을 죽였다면 필시 먼저 앞에서 깝죽대던 놈 중 하나였을 것이다. 당시 자신의 왕을 눈앞에서 빼앗기고 문은 오직 왕만을 찾기에 정신이 없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라마를 찾던 중 무리를 만들어 귀찮게 했던 인간들이 생각났다. 하나같이 같잖은 놈들이라 얼굴은 기억나진 않지만, 라마를 찾는 데 방해를 하던 놈들이라 굉장히 짜증이 났던 것만은 확실했다.
“너는 멱딴 돼지 얼굴 기억해?”
“그게 네놈의 대답이란 말이지.”
여유롭게 웃고 있는 문을 바라보던 붕어 떼들이 잔뜩 화가 난 모양인지 저마다 둔탁한 음이 나는 것을 손에 쥐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앞을 방해했던 에덴의 돼지들도 비슷한 짓을 했었다. 다만, 그 전에 뭔가를 제안했던 것 같은데 그것을 무시하자 떼로 달려들었던 것이 기억났다.
“네놈은 호쿠가 될 자격이 없다. 죽어라.”
문의 주위를 둘러싼 붕어 떼들을 의식하면서 문은 갑자기 큭큭 거리며 고개를 숙여 웃기 시작했다. 문의 발작과 같은 웃음에 당황한 것은 붕어 떼들이었다. 문은 자신의 허리춤에 검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숨 막히는 적막 속을 웃음으로 가득 채우더니 숨을 고르게 내쉬고 숙였던 고개를 들어올렸다.
눈을 뜨지 않았음에도 창백한 피부와 대조되는 붉은 혀가 날름거리자 그것을 지켜보던 호쿠들은 긴장에 숨이 넘어갈 듯 눈을 뗄 수 없었다. 놈이 미친 것과 마찬가지로 부정할 수 없는 것이 저 시선을 돌릴 수 없는 아름다움이었기 때문이다. 문에게 형을 잃은 호쿠 역시 적대감을 가득 가지고 있으면서도 쥐고 있는 둔기가 떨릴 정도로 홀릴 것 같았다.
순식간에 눈앞에서 사라진 문은 자신의 뒤에 있던 호쿠 중 한명의 머리를 잡아 그대로 땅바닥에 내리찍었다. 안면이 강한 충격으로 박살이 나면서 땅바닥에 피가 고이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호쿠들이 경악을 뒤로하고 움츠렸던 무기를 들어 문을 경계했다. 단 한 번의 움직임으로 상대의 숨을 끊어놓은 문은 숙였던 허리를 들어 안면을 초토화 시켜버린 호쿠의 손에서 검을 빼앗고는 머리를 잡고 있던 호쿠를 손에서 놓았다.
푸른 날이 서 있는 검을 들고 혀를 내밀어 날을 핥는 문의 모습은 마치 여인과 관계를 할 동안 절정에 달하는 순간과 같은 기분이 들었다.
“놀자.”
속삭이듯 말하는 문의 목소리는 듣는 이에 따라선 마치 유혹을 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2왕자가 나를 바라볼 때부터 란은 연기를 할 마음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백치 연기를 할 생각이었으면 그런 식으로 나설 생각도 하지 않았을 테니까. 머리를 긁적이던 란이 나오는 웃음을 더는 감추지 않았다.
젠은 란의 정체를 알고 있다. 과거에도 란에 대해 어렴풋이 눈치를 채고 있었다하더라도 지금이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온전히 알맹이를 까 보인 건 아니지만, 적어도 백치를 연기하고 있었다는 것만은 확실하게 들켰으니까.
앞으로 무슨 일만 벌어지면 선상에 가장 먼저 오르는 건 란일 것이다.
과거 란의 공식적인 사망소식이 발표된 날 조차도 그가 백치라는 건 그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젠 역시 그 당시의 나와 다를 것 없었을 것이다.
“조심해라. 젠은 결코 누굴 봐줄 인간은 아니니까.”
“예상보다 더 멍청한 너만 하진 않겠지.”
“하하……. 틀린 말은 아닌데…….”
말 꼬리를 흐리던 란이 지그시 날 바라보았다. 놈의 그런 눈이 거슬려 눈을 올려 바라보자 이따금 바라보던 시선을 돌린 란이 내게 다가와 상체를 숙인 뒤 눈을 마주보았다.
“넌 젠의 구미에 딱 맞는 놈이거든. 나한테는 그것이 제일 불안해. 앞으로 몇 년 만 더 지나면 그런 놈들이 늘어날 거다. 그게 날 굉장히 열 받게 만들어.”
“남 걱정하기 전에 본인 관속 구경이나 잘 해두지 그래. 너야 말로 몇 년 만 지나면 기어들어갈 곳 같은데.”
“돌아가 기다려. 어디 싸돌아다니지 말고”
란이 손을 들어 내 머리카락을 헤집어 놓았다. 하지마라고 해도 안 듣는 것 같아서 난 잔뜩 헤집어 놓는 그의 손을 신경질 적이게 쳐내고 뒤로 한 발빠진 다음 그의 옆으로 비켜갔다.
정강이라도 때려버릴까 했지만, 란도 나름대로 고민이 되는 모양인지 여유롭게 포장한 웃음 뒤에는 상당히 복잡한 심경이 드러나 있었다.
“은아.”
내가 걸어가면서 은아를 부르자 거대한 덩치가 쫄래쫄래 내 뒤를 따라오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뒤로 나를 바라보던 란 역시 안으로 들어가는 걸 확인하고 쓴 맛이 나는 입을 달싹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계획에도 없었던 일이었을 테니 앞으로의 일에 그림자처럼 지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정면으로 부딪치려면 아직은 이르다. 예민한 신경전이 길어질 수밖에 없는 현실에 나 역시 순식간에 이성이 날아가 버릴 뻔한 것을 알았기에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앞으로 암부의 움직임이 앞당겨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이 앞으로 어떤 영향을 줄진 미지수지만, 로던프의 미래가 결코 밝아지진 않았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나는 분명히 또 사고를 치고 있을 문을 데리러가기 위해 방향을 틀었다. 작은 것에도 예민한 놈이기에 지금쯤이면 반쯤은 미쳐서 날뛰고 있을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에 대한 예상은 늘 틀리지 않았다.
미세하게 풍기는 피 냄새를 따라 움직이면서 도착한 그곳엔 시체더미라고 말해도 혼란스럽지 않을 것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저마다 겨우 숨은 붙어있어 꿈틀대고 있었지만, 보기에도 회생은 불가능한 상태였다.
그 와중에도 잔뜩 겁에 질리다 못해 파랗게 질려 있는 놈을 향해 들고 있던 둔기를 내리치려는 모습이 보이자 난 그대로 서서 날뛰는 똥개를 불렀다.
“문.”
우뚝- 문의 손이 멈추었고 그대로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해맑게도 웃으며 들고 있던 둔기를 던져버리고 패고 있던 놈도 무시한 채 내게 달려오는 게 보였다. 그 모습은 걸어 다니는 걸레랑 다를 바 없었다. 닿기도 싫어 달려오는 문을 피하고 그대로 허술하게 드러난 뒤통수를 단검의 손잡이로 강하게 내리 찍었다. 문에게 벗어난 놈은 실성을 해 그대로 오줌을 지리며 살려 달라 질질 짜고 있는데, 망할 개새끼는 태평하게 앉아 불이 나는 뒤통수를 잡고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
그 와중에 눈에 들어온 상처가 있었다. 예전에 만들어준 목줄 위에 길게 찢어진 상처가 거슬려 뒤통수를 잡고 있는 문에게 다가가 턱을 잡아 들어올렸다.
“낯짝은 왜 이래.”
“놀다가…….”
얼굴에도 조금 찢어진 자국이 있었는데, 그것이 신경에 거슬려 제멋대로 안면이 일그러지는 것 같았다. 호쿠 20명을 곤죽으로 만들어 놓고 이 정도 상처라면 양호한 편인데, 왜 이렇게 짜증이 나는지 알 수 없었다.
늘어진 시체들을 건드릴 취미는 없으므로 다시 밟아줄 마음은 없었지만, 알길 없이 나빠지는 기분이 풀어지지 않았다. 젠을 대면하고도 억누를 수 있었던 화기가 엉뚱한 곳에서 터져 나왔지만, 걸레짝이 된 문을 보면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더 보고 있다간 남은 인내심마저 폭발할 것 같아서 오줌을 지리고 있는 놈에게 다가가 그의 뒤통수를 발로 짓밟았다.
바들바들 떨면서 같은 말을 반복하던 놈이 바닥에 얼굴이 닫자 그제야 조금은 정신을 차린 모양이다.
괜히 신경질이 나서 이미 떡이 된 놈을 노려보자 가늘게 떨던 놈의 바짓가랑이에서 또 다시 소변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지병이 요실금이라도 되는 모양인지 추접스러운 모습에 밟고 있던 것도 그만두고 문을 보았다.
상대할 가치마저 사라진 놈에겐 더 이상 볼일은 없었으니까.
화가 났다는 걸 알고 있는 모양인지 문과 은아는 안절부절 못하는 표정이었다. 특히 문은 내 주위를 빙빙 돌면서 눈치를 볼 만큼 불안해하고 있었고, 저런 모습을 보고 있으니 지금 내가 누구한테 왜 화를 내고 있는지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다.
돌아가는 길.
습관처럼 나오는 한숨에 등 뒤에 두 놈이 움찔거리는 기척이 느껴진다. 그러더니 갑자기 문이 내 앞으로 걸어와 어디서 또 꺾었는지 들꽃 하나를 내게 내밀었다. 저번처럼 뿌리까지 뽑은 게 아니라 흙은 떨어지지 않았다.
“화났어?”
어느새 무릎을 숙이고 날 올려다보는 문은 꽃을 들이댄 채 동그랗게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때릴 거야?’ 라고 묻는 듯한 잔뜩 기죽은 눈동자였다. 아무래도 내내 반응이 없던 내가 불안했던 모양인지 무슨 말이라도 기다리는 듯한 문을 바라보다 꽃을 받고 줄기를 손가락으로 돌려가며 바라보았다.
붉은 들꽃.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이 작은 꽃을 지켜보던 나는 고개를 돌려 문의 귀 옆에 꽃을 꽂아주었다. 문은 영문을 몰라 눈알을 돌려가며 나를 바라보는데, 그 모습이 굉장히 어울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와 버렸다. 그제야 문의 얼굴에서 나를 따라 웃음이 번지기 시작했다.
손가락을 들어 실실 웃고 있는 문의 이마를 튕겨주었다.
“다치지 마라. 짜증나니까.”
“응!”
눈이 부시지도 않는지 크게 눈을 뜨며 웃는 놈을 보자 내가 기력이 빨리는 기분이 들었다. 나를 발견하기 전까지 눈을 감고 있었던 문은 실제 싸움에서도 두 눈을 감고 있었을 것이다. 자신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필요한 것을 빠르게 흡수하고 있어 걱정할 것 없을 것 같다.
내가 걸음을 옮기자 벌떡 일어선 문은 이제야 눈이 부신 모양인지 다시 두 눈을 감고 은아와 함께 쫄래쫄래 잘도 쫓아왔다.
**
바드는 오덴의 보고를 듣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상당히 심기가 상했는지 잔뜩 인상을 쓴 채 다시 한 번 오덴의 보고를 되물었다.
“실성을 해?”
“예. 6명은 자살. 4명은 실종. 나머지 9명은 실성해 대화가 불가능합니다.”
바드는 오랜만에 느껴보는 허탈감에 뭐라 표현을 해야 할지 몰랐다. 검은 소년을 부전승으로 이끌었던 놈들을 데려오라고 했더니 총 19명 중 온전한 놈들은 단 한 명도 없다는 것이다.
더구나.
“호쿠 20명이 옷을 벗겠답니다. 이 중 1명은 실종. 6명은 뼈가 부러진 상태입니다. ”
“멀쩡했던 놈들이 갑자기 왜?”
“이유를 물어도 모두 함구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상태가 좋지도 않아서 추궁하기도 어렵습니다.”
지끈지끈 올라오는 두통에 시달리던 바드는 뭐 하나 제대로 된 것도 없는 것 같아 이마를 짚다 문득 생각났다는 듯 소리쳤다.
“문은!”
“예상하시다시피.”
또 사라졌다는 소리다.
만성신경통에 그대로 굴복당한 바드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오덴에게 나가보라고 손짓했다. 오덴은 안쓰러운 표정으로 바드를 바라보다 고개를 숙이고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호쿠 20명이 그렇게 된 것이 문이 나간 직후에 벌어진 일이다.
당한 놈들은 입을 닫고 있지만, 유력한 용의자는 문 밖에 없다는 걸 지나가는 에그도 알 일이다.
대체 그 망나니를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는 바드는 끙끙거리는 신음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였다.
엄숙한 회의에 가장 우위에 앉은 로던프의 이 빠진 늙은이가 들어와 자리에 착석했다. 그는 뱀처럼 독이 든 눈동자를 굴려가며 자신의 뒤를 이를 왕의 그릇이 될 네 명의 왕자를 훑어보았다.
명줄이 얼마 안 남았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왕위를 계승할 재목을 하루라도 빨리 고르라는 장로들의 말에 그는 상당히 자존심이 상해있었다.
가장 높은 곳에서 영원히 앉아 있을 것이라는 것에 의심한 적이 없었기에 그의 실망감은 더했다.
그들이 원하는 ‘재목’이라는 것은 이 중 가장 눈에 띄는 1왕자. 젠을 겨냥하고 있겠지만, 자신의 생각은 달랐다.
왕의 재목에 너무도 어울렸기에 빈틈이 없으면 없을수록 그에게 왕위를 더욱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 완전한 자에 대한 막연한 거부감은 떨어지지 않았다.
왕가의 상징이란 상징은 모두 달고 태어난 1왕자를 바라보던 늙은 왕의 시선이 이번엔 2왕자에게 박혔다.
왕의 시선이 자신에게 가 있다는 걸 눈치 챈 놈은 전생에 간신질을 하다 사형에 당한 놈처럼 굴기 시작해 왕의 시선은 오래가지 못하고 돌려버렸다. 그가 생각하는 2왕자는 이 나라 자신의 자존심인 로던프를 멸망시킬 놈이다.
왕의 시선이 이번엔 4왕자에게 향했다.
아직 어린 나이. 총명하고 영특하며 온화한 성격이긴 하나 14살. 어려도 너무 어리다. 왕위를 계승당한다면 필시 먼저 죽을 운명일터. 가장 가엽게 생각하는 아이이기에 더욱 죽음으로 몰아서는 안됐다.
비록 왕위 계승은 못시켜도 제 몫은 다 할 놈이니 장성만 한다면 걱정이 없었다. 어금니가 더욱 단단해지길 기다릴 수밖에.
왕의 눈이 뒤늦게 들어온 3왕자에게 향했다. 2왕자는 그런 3왕자에게 버럭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시끄럽다 눈치를 주자 길게 잇진 않았지만, 왕의 시선은 3왕자의 얼굴에 가 있었다. 푸른빛이 도는 머리카락.
그렇잖아도 눈에 띄지 않는 성격에 특별한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닌데다 ‘백치’라는 결점을 가진 3왕자는 말할 것도 없었지만, 왕은 그간의 노련함으로 직감이라는 것이 있었다.
가장 완전한 그릇.
그릇이란 무엇인가. 깨진 이가 없고 그 균형이 잘 맞아야 하며 빛깔 또한 아름다워야 진정한 그릇으로 쓸모가 있다. 하지만 완전한 그릇은 깨지기 쉽고 한 번 깨지기 시작하면 그 균열이 평생 뇌리에 박혀 결국 그릇으로써 더 이상 쓸 수가 없게 된다.
그렇다고 국보급 그릇을 깨졌다하여 개의 밥그릇으로 쓸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란과 젠을 비교하자면 그 그릇의 차이다. 완전한 그릇과 하자가 있는 그릇. 란 같은 경우는 이전만 해도 뭔가를 숨기고 있어 2왕자와 다름없는 간신에 불가했지만, 그가 들어오는 순간 느낄 수 있었다.
청량한 공기를 몰고 들어와 살포시 앉는 그의 모습은 과거 ‘백치’가 아닌, 껍질을 벗은 온전한 모습이었다. 무엇이 그에게 변화를 보이게 하는 진 모르겠지만, 그것이 계획된 것이었다면 지금은 시기상조일터.
그럼에도 스스로를 드러내기 시작했다는 건 이른 전쟁을 치루고 있다는 뜻이 된다. 왕은 그것이 걸렸다. 지금 내란을 선동해봤자 좋을 건 없기 때문이다.
“듣거라.”
침묵하던 왕이 남몰래 웃음을 짓고는 엄숙하게 입을 열었다. 곧 왕위에서 물러나야 할 제왕이지만, 그 존재만큼은 이 자리를 차지한 그 누구보다 위엄했다.
“트란슈 회담에 앞서. 왕자들의 입장을 참고하겠다. 또한 이것을 계기로 왕위 계승에 있어 내가 직접 관여할 것이니 내 시험에 통과하지 못한 왕자는 로던프에서 추방하겠다.”
파도가 휩쓸고 간 듯한 숨 막히는 정적이 회장 안을 가득 채웠다. 로던프 왕의 충격적인 발언에도 불구하고 4명의 왕자들은 얼굴색하나 변하지 않고 고고히 앉아 있었다.
그런 적막을 깨고 트란슈 사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트란슈 특유의 손끝까지 가린 긴 소매의 전통 의복을 걸친 사신은 선두에 자리한 로던프 왕에게 예를 표했다. 왕의 착석하라는 손짓에 사신은 긴 의복의 끝을 펼쳐 자리에 앉았다.
“지금부터 로트(로던프, 트란슈) 회담을 시작한다.”
전쟁의 서두가 된 회담이 그 막을 열었다.
강한 신경전이 오가는 살벌한 회담에서 트란슈 사신은 보다 여유로운 표정으로 로던프 왕의 심기를 건드리고 있었다. 하지만 노련한 사냥꾼인 로던프 왕은 다른 꿍꿍이가 있는 트란슈를 주시했다.
“우호적인 관계 개선을 위해. 우리 트란슈에선 몇 가지 요구사항이 있습니다.”
“트란슈 사신은 요구사항을 말해보라.”
“그 첫. 모스로 강등되어 끌려간 자국민을 귀환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트란슈의 국민은 더 이상 로던프의 노예가 아닙니다.”
사신의 말을 들은 2 왕자가 누구보다 재빨리 그 입을 열었다.
“전쟁 전부터 국경을 넘어 로던프로 넘어온 자들이오. 이미 로던프 시민권을 가진 이들이기에 이들은 로던프 사유재산에 해당하니 그 요구는 기각한다.”
“시민권? 로던프는 개 취급하는 것들에게도 시민이라 부르십니까.”
“모스는 수많은 직업 중 하나일 뿐. 그것을 선택한 것은 그들의 몫일뿐이지 않소.”
2왕자를 노려보던 트란슈 사신은 그 시선을 거두었다. 이것으로 이겼다 생각한 2왕자의 얼굴에 작은 미소가 떠올랐지만, 그것을 듣고 있던 로던프 왕과 나머지 왕자들의 얼굴은 점점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첫 제안부터 심기를 건드릴 필요가 없는 것이고, 모스의 경우에는 제한을 두고 승낙하면 될 것을 2왕자가 단칼에 잘라 거슬린다는 것이었다.
시선을 돌린 사신은 엄중한 자세로 다시 입을 열었다.
“둘. 지난 전쟁으로 로던프에 손에 들어간 트란슈 유물의 반환을 요구합니다.”
“빼앗긴 유물의 수와 종류를 대어라.”
1 왕자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사신은 그의 말을 듣고 1 왕자를 바라보았다.
그가 로던프 왕권에 있어 가장 유력한 자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기에 그의 태도는 2왕자를 대할 때와는 조금 달랐다.
“총 삼천여점. 그 정확한 수와 종류는 문서화 한 것이 있으니 참고하여 돌려주십시오.”
“유감스럽게도 삼천여점 중 과반수 유물은 로던프에 존재하지 않는다. 외교로 처분된 상태라 사실상 로던프 내에 트란슈 유물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아. 소량의 유물도 원한다면 추후 사신을 통해 돌려주도록 하겠다. 하지만, 로던프에 남아 있지 않는 유물에 반환은 불가하다.”
“처분한 곳의 출처를 알려주십시오.”
“그것은 외교국가의 신용이 달려있어 불가하다.”
“그럼 남은 유물이라도 반환받겠습니다. 빠른 시내에 보내주시길 바랍니다.”
“그러지.”
퍽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었지만, 사신은 소량의 유물을 반환받는 것으로 물러났다. 그는 마지막으로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
“셋. 현재 트란슈는 로던프와 중립외교를 맺지만 물자 매매에 있어 그 수익금에서 정확한 배분이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인부와 상인들 사이에서도 그 문제로 갈등이 심화되고 있으니, 국경을 넘는 선에서 이뤄지고 있는 이중 수수료는 감면하고 수익금 배분을 정확하게 해 줬으면 합니다. 이것을 로던프와 트란슈의 지속적인 우호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발판으로 삼겠습니다.”
그것을 듣고 있던 4왕자가 조금은 작은 목소리로 자신의 의견을 내뱉었다.
“허나, 국경을 넘는 이중 수수료를 감면한다면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게 됩니다. 이는 불법 체류와 연결되기 때문에 입국과 출국의 수수료를 받는 것은 그것을 예방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는 다른 나라와도 크게 다르지 않는 제도입니다. 또한 배분에 있어 이동물자에 대한 비용은 로던프가 곱절은 손해를 보고 있습니다. 지리적 특성상 마차로 한두 시간 걸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배분은 그것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트란슈에서도 입국과 출국에 있어 이중 수수료를 들도록 하겠습니다. 4왕자의 말대로 불법 체류와 관련된 것이고 다른 국과 기밀한 제도라면 따르도록 하지요. 단, 수수료 인상에 대한 것에는 로던프의 그 어떠한 입장도 듣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동물자에 대한 건은 왕자가 잘 못 알고 있습니다.”
눈에 띄게 당황한 4왕자. 뭔가 실수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좀처럼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떠오르지 않았다.
“트란슈는 지금 로던프에게 협상을 빌미로 조롱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2왕자가 조금은 흥분하며 트란슈 사신의 태도에 대해 지적하자 쓴 웃음을 보이는 사신은 그런 2왕자와 4왕자를 무시하고 나머지 2명의 왕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표정을 보아하니 1왕자는 이미 그 답을 알고 있는 눈치였지만, 백치라 소문난 3왕자는 소문처럼 멍청해 보이진 않았지만,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조롱이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주기 위해서 웃음을 잃지 않던 트란슈 사신이 운을 띄웠다.
“저는 이 문제에 3왕자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