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란슈 사신의 말에 날카롭게 날이 서 있던 눈동자들이 모두 란에게 꽂히기 시작했다. 긴장감이 숨을 쉬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여기서 단 한마디를 못하거나 엉뚱한 대답을 한 다면 제일 먼저 추방당할 대상은 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과 1왕자는 전혀 동요가 없는 표정이었다. 트란슈 사신이 속내를 읽을 수 있는 것은 걱정과 염려가 가득한 눈의 4왕자와 사신에게 모욕당한 불쾌감을 숨기는 것이 서툰 2왕자 뿐이었다.
사람을 보는데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었던 그였지만, 백치라 알려진 란의 태도는 소문과는 달랐다.
“3왕자는 대답해 주십시오.”
트란슈 사신이 대답을 재촉했다.
2왕자는 그럴 줄 알았다면서 저놈은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알아듣는 것도 힘이 드니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 하겠다고 나섰다. 하지만 트란슈 사신의 표정은 사뭇 진지했다.
“나는 2왕자에게 이번 물음에 답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단칼에 2왕자의 말을 잘라낸 트란슈 사신의 태도에 말문이 막혀버린 2왕자는 추가로 받은 굴욕에 이를 바득 갈았다. 어차피 대답한 번 못할 녀석에게 무엇을 기대하는 것인지 4왕자를 제외한다면 모두가 그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듯한 눈치였다.
허락된 침묵의 시간이 지나자, 곧 란의 입술이 작게 열렸다.
2왕자와 4왕자만 몰랐던 란의 겉껍질이 얇게나마 벗겨지는 순간이었다.
“로던프의 수수료 건은 시세에 따른 것으로 그것이 높은 것은 트란슈의 환율이 낮은 것을 의미하니, 로던프 수수료만으로 해결될 건은 아니다.
수수료 인상은 어쩔 수 없는 것이나 그 한계를 정해야 한다. 적정선이라면 우리 역시 트란슈의 입장을 따르도록 하겠다. 단, 환시세를 고려하지 않는 수수료를 요구한다면 외교를 단교하는 것으로 판단하겠다.”
란의 목소리는 차분하고도 고요한 바다를 보고 있는 것처럼 감히 속내를 내다볼 수 없었다. 단호하고도 명백한 그 말에 2왕자는 듣고 보았던 것을 모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지금 3왕자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은 백치 왕자가 아니었다.
트란슈 사신역시 당황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같잖게 의견을 내세운다면 몇 번이고 짓밟을 생각이 있었으나, 란이 내뱉는 것은 의견이 아닌, 현재 트란슈가 겪고 있는 경제란이었다.
실질적으로 지난 전쟁으로 인해 환율이 많이 떨어진 상태이다. 때문에 수수료 건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지 않는가. 이는 수수료면제나 감면만으로 해결될 사항은 아니다.
“하지만 그대가 지적한 이동물자에 대한 건이 있으니 출국 수수료 건은 면제하도록 하겠다. 단, 불법체류에 있어 감시를 강화하여 그들의 처벌에 있어 트란슈의 입장은 듣지 않겠다.”
“수수료를 면제하다니!! 그것은 네 생각만으로 간단히 정해야 할 것이 아니다!!”
2왕자가 거세게 반발하며 소리쳤다. 그 역시 이번 사항에 있어 자세히 모르고 있다는 뜻이다. 2왕자는 말도 안 되는 말을 지껄이고 있는 3왕자를 보고만 있을 수 없어 소리쳤지만,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주위의 시선이 곱지만은 않았다.
심지어 지금까지 중립을 유지하고 있던 왕마저 혀를 차기 시작했고, 1왕자는 불쾌한 것을 봤다는 듯 인상을 쓰고 있었다.
“2왕자는 트란슈가 로던프가 아니라는 것을 간과하고 있군요. 회담에 있어 그 기본조차 모르는 이가 이 자리에 있는 이유는 트란슈를 조롱하겠다는 겁니까.”
“지금 뭐라?!”
비난이 담긴 트란슈 사신의 언행에 발끈한 2왕자가 소리치며 일어나자 그를 지켜보던 1왕자는 낮게 으르렁거리며 그를 노려보았다.
“2왕자는 왕족으로써 체통을 지키라.”
간략하게 짓누르자 1왕자의 기세에 치욕스러운 얼굴을 지우지 못하고 자리에 앉았지만, 이미 눈치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지칠 정도였다. 그는 온몸을 부르르 떨며 분함을 삼키고 있었다. 그런 2왕자의 모습을 바라보던 트란슈 사신은 3왕자 란에게 시선을 돌렸다.
“모르는 이도 있는 것 같으니 설명을 요합니다.”
2왕자가 고개를 들어 란을 바라보았다. 란의 눈이 번뜩이기 시작했으며 그의 입가가 올라갔다. 백치주제에 어쩌다 제대로 말하는 것뿐일 것이라 생각하려 했지만, 란의 비웃음에 화가 나기보다 소름끼쳤다.
숨겨왔던 이를 드러내는 짐승을 눈앞에 맞닥뜨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등을 보였다간 당장이라도 목덜미를 뜯겨 죽을 것만 같았다.
“이동물자에 있어 트란슈는 인계를 주지 않기 때문이다. 트란슈는 처음부터 끝까지 매매가 결정된 물품은 책임을 지고 전달한다. 이는 다른 나라에선 국경을 넘기 전 인계를 주고 물건을 넘기는 것과 다르지. 때문에 매매에 있어 수수료건의 감면을 요청한 것. 이중 수수료가 드는 이유이기도 하겠지.”
란의 말에 트란슈 사신의 입 꼬리가 기분 좋게 올라갔다. 그의 시선이 로던프의 왕에게 향했다.
“로던프는 드디어 금빛 날개를 얻었군요.”
“으아아악!!!!”
“고정하십시오!! 2왕자님!! 옥체가 상하십니다!!”
손에 잡히는 물건은 모두 던지고 보는 2왕자의 패악에 당황한 신하들은 그를 붙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장성하여 기사들과도 그 실력을 견주어보는 2왕자의 괴력에 모두들 떨어져나가기 일수였다.
2왕자는 곱씹을수록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했다. 제 손을 벗어난 물건들이 곁에 있는 자들에게 상처를 내도 분풀이가 되지 않아 그대로 침상으로 걸어가 그 위에 주저앉았다.
쓸모없는 백치에게 호화스러운 별호를 붙여 말한 사신의 목소리가 귀에서 떠나질 않았다. 모든 이들의 시선이 란에게 집중되었고 자신은 오히려 뒷전에 물러나 입을 닥치고 있으란 소리까지 들었다.
씹으면 씹을수록 역겨운 맛이 나는 기억에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생각했다. 하지만 곧 생각은 정리되었다. 그 백치가 감히 자신을 속이고 있었다는 것이다.
놈은 백치가 아니다.
믿을 순 없지만, 분명 그건 백치가 보일 행동이 아니었다. 논리 있게 좌중을 압도하는 설득력과 곧은 허리. 언제나 죽어있던 눈동자가 번뜩일 땐 자신의 숨통마저 조여 오는 것 같았다.
뱀처럼 간사한 것은 왕과 1왕자만으로도 벅찼다. 그러나 내적으로 신경을 써야 할 놈이 추가가 된다는 것은 차후 그가 얼마나 큰 걸림돌이 될 것이라는 걸 쉽게 예측하게 했다.
하지만, 그가 지금 이를 드러낸 이유가 무엇인가. 여태껏 숨겨왔다면 제 손에 죽을 때 까지 숨겨둘 것이지, 뒷배를 봐줄 사람도 없는 놈이 무슨 배짱으로 이를 드러내고 있단 말인가.
“그것이 미친 것이 아니면, 이성을 잃었다는 것이겠지.”
코웃음을 치던 2왕자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잠시 잠재운 채 이마를 짚고 단시간 생각해 보았다.
1왕자와 손을 잡은 것은 아니다. 그런 것은 서로 물어뜯으려는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란에게 우호적이었던 왕마저 3왕자 란에게 경계심을 가지게 되었다.
‘제 사람입니다.’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란의 목소리. 단 한 번도 곁에 있는 자들을 언급하지 않았고 제 어미가 눈앞에서 죽었을 때에도 미동조차 하지 않던 놈이 처음 반응을 보인 순간이었다.
그것도 꽤 격렬한 반응이라서 뇌리에 박힌 것이 떠나지 않았는데, 곧 2왕자는 이마에 있던 손을 내려 무릎을 치게 되었다.
유난히 검은 머리카락이 대조되는 흰 얼굴을 가린 소년.
플라이의 제복을 입고 있었고 란의 전속 가디언이라고 들었다. 그 뒤에 있는 괴물같이 덩치가 큰 놈은 용병. 란이 제 사람이라 감싼 것은 후자 쪽 용병이 아닌, 툭 건드리면 울 것 같던 작은 플라이소년이었다.
“보모노릇이 아니면, 키워서 잡아먹겠다는 거겠지. 자칸.”
“네.”
표범과 같은 인상의 황색 머리카락을 땋은 이국적인 남성이 2왕자의 앞에 나타나 무릎을 꿇었다.
“3왕자 가디언 검은 소년에 대해 조사하라. 3왕자와의 관계까지 철저히.”
“알겠습니다.”
자칸이 눈앞에서 사라지자 2왕자의 입 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
문은 들어오는 햇살을 피해 뒹굴며 누워 색색거리는 숨을 내쉬고 있었다. 어찌나 단잠을 자고 있는지 그 모습이 짜증이 날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아까부터 내가 머물고 있는 방에 덩치가 소만한 은아 뿐만 아니라, 범 크기의 문까지 있어 답답해 돌아버릴 정도였는데, 회담이 끝나자마자 달려온 란과 그 뒤를 쫓아온 문호까지 빽빽이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면 이렇게 짜증이 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대체! 생각이 있는 겁니까 없는 겁니까!!!! 제가 누누이 말씀드렸잖습니까!! 그 입 좀 닥치라고!!!”
“거참, 왕자한테 닥치라니. 전대 문호가 무덤에서 기어 나오겠어.”
“지금 농담할 상황이 아닙니다!”
문호가 비속어까지 써 가며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자 그것을 듣고 있던 란은 침을 튀기며 자신을 비난하는 문호에게 시선을 피하고 얼굴에 묻은 침을 닦았다. 반성이라곤 쥐뿔도 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이제 어쩌실 겁니까. 당장 과녁이 되실 분 아니십니까.”
“글쎄, 라마. 넌 어떻게 생각해?”
북적 북적한 방안에 갇혀 있는 듯한 더러운 기분인데, 란은 내게 말을 걸었다. 내게 대답을 바라고 물어보는 것은 아닐 것이다. 자신도 그 문제에 대해 충분히 곤란해 하고 있으니까. 뭣 때문에 이런 멍청한 행동을 한진 모르겠지만, 이 상태론 전쟁이 앞당겨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의 행동이 꼭 그릇된 것만은 아니다. 적어도 경각심은 갖게 만들었을 테니까. 회수만 잘 한다면 큰 문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 모든 걸 함축시켜 그 둘을 바라보던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 방에서 나가.”
라마의 끈적한 시선에 백기를 든 란이 밖으로 나가자 그 뒤를 문호도 따라 나갔다. 누구보다 가벼운 것 같은 란의 등을 바라보면서 문호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 걸음을 빨리했다. 어느새 란의 옆까지 따라온 문호가 물었다.
“무모했어. 시기 자체도 불안정할뿐더러 1왕자의 시야에서 벗어나실 수 없을 거다.”
“그래. 그걸 바란 거니까.”
“…….”
태평하게 말하고 있지만, 선뜻 이해가 가질 않자 얼굴을 구기며 고민하던 문호가 번뜩 떠오른 것이 있는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란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가벼운 미소가 걸려있었다.
“제정신입니까? 그 꼬맹이가 뭐라고!?!”
“소리 줄여. 너까지 과녁이 되는 건 나도 꽤 버거우니까.”
“대체 당신은 왜!!”
문호가 답답함에 소리를 지르려하자 란이 발을 멈추고 문호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아까까지 걸려있던 웃음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 낯선 란의 모습에 당황한 문호가 말을 못 꺼내고 있자 란은 정색을 풀고 입 꼬리를 올리곤 문호의 붉은 머리카락에 닿은 꽃잎을 털어주었다.
"인재인 것은 인정해. 하지만 화합될 수 없는 인재는 독이야. 네가 독을 직접 끌어안을 필요는 없으며 그러지 않을 놈이라는 거 알고 있어. 하지만 라마에 관해선 마치 딴 사람이 된 것처럼 행동한다고.”
“거기까지.”
란은 두 손을 들어 문호의 양쪽 어깨를 가볍게 붙잡고 웃으며 문호의 입을 닫게 만들었다.
“라마는 탐낼만한 인재다. 지금 녀석을 빼앗기는 건 내 쪽에서 손해라고. 그렇게만 알아둬.”
잡은 어깨의 한쪽을 두들기더니 이내 떨어진 란은 그대로 뒤 돌아 걸어가 버렸다. 문호는 그런 란의 등을 바라보면서 밑에서부터 올라오는 불안한 기운에 일그러트린 미간을 펼 수 없었다.
***
란과 문호가 나가자 방안은 쥐죽은 듯 조용했다. 하지만 내 속에선 요란한 구더기 떼들이 바글거리기라도 하는 듯 거북함이 밀려왔다.
짓누르려하지만 쉽게 되지 않았다. 다시는 반복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면서도 과거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 내 화를 부축이고 있었다.
이곳에 놈이 있다.
그 낯짝을 본 것만으로도 억눌렀던 것이 당장이라도 터져 나올 것처럼 아우성치기 시작한다.
잘 견디고 있다고 생각했던 이성이 무너지려는 순간 등 뒤에서 나를 껴안는 문의 손이 느껴졌다. 늘어져라 자고 있던 놈이 그새 일어난 것인지 잘도 스멀스멀 기어와 치근대고 있었다. 잠에서 덜 깬 모양인지 작은 신음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그리곤 내 목덜미에 살덩이가 맞닿는 느낌과 함께 빨고 있다는 것이 느껴져 손을 들어 문의 이마를 향해 박아주었다. 답 없는 돌 머리에 내 손이 더 아팠지만, 문도 타격이 가지 않는 건 아닌지 붙었던 입은 떨어져 나갔다. 하지만 여전히 손은 내 온 몸을 두른 채다. 거기다 합세해 은아까지 앞으로 다가와 내 얼굴을 더듬거렸다.
참는 것도 한계다.
말 안 듣는 놈들에게 제일 좋은 건 폭력에 의한 교육임을 알기에 두 멍청이를 친히 훈육하기 위해 움직이려는 순간 문이 내 몸에서 약간 떨어져나가면서 내 손을 잡아들어 손바닥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나를 채우며 드러난 붉은 눈동자.
“놀까?”
“…….”
“응?”
“놔.”
말을 듣지 않고도 웃음이 나오는지 내 손을 놓지도 않은 채 큭큭 거리고 있다. 덕분에 나를 감싸고 있던 악의를 조절할 수 있었으니 두들겨 주는 건 그만두기로 했다. 대신 잡힌 손을 거칠게 빼내면서 그대로 일어나 문의 손안에서 빠져나왔다.
단단해진 이성에 당장 걸리는 건 무투대회다. 해년마다 열리는 대회가 아닌 만큼 꽤 큰 행사다. 때문에 로던프 전체가 흥에 겨워 눈이 멀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우승자에게 있어 영광스러움만 남는 무투대회에 강제적으로 문은 출전을 강요받을 것이다.
눈에 띄는 녀석이니 상황을 복잡하게 만들지도 모르지만, 체질에 맞는 훈련이 부족했기에 이번만큼 좋은 기회는 없다.
의자에 걸쳐진 모습이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문에게 시선을 돌리자 아직은 해가 닿지 않아 눈을 동그랗게 뜰 수 있는 문이 방긋 웃었다.
실없이 웃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지만, 문은 아직도 졸린 모양인지 바닥에 앉아 손을 뻗어 기지개를 폈다. 그 모습이 흡사 고양잇과 짐승 같아 덩달아 나른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난 문에 대해 빙산의 일각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보라곤 생각했지만, 이정도로 바보일 줄은 몰랐었던 것처럼.
노곤하게 앉아 있는 문의 뒤에 다가간 은아는 그의 늘어진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땋고 있었다. 이제는 익숙해진 모양인지 은아의 손길에도 크게 반응하지 않고 하품을 해대는 문의 머리카락은 은아의 손에 곱게 땋아져 어깨 아래로 늘어졌다.
은아는 용병으로서 훈련을 받게 될 것이다. 성질이 온순한 녀석이니 큰 걱정은 없다. 훈련 시간 외에는 나와 함께 움직이기 때문에 신경이 쓸 일은 없지만, 문제는 태평하게 앉아 또 졸고 있는 문에게 있었다.
당장 내일부터 시작될 무투대회에 강제로 출전하게 될 것이다. 일일이 쫓아다니면서 두들겨줄 생각은 없다. 하지만 무투대회는 문에게 있어 체질적인 특성을 가장 잘 훈련할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에 출전을 해야 옳다.
“문.”
“……?”
목소린 들린 모양인지 꾸벅 졸고 있던 문이 퍼뜩 정신을 차리더니 몽롱한 눈을 떠 나를 바라보았다. 은아 역시 꾸지람을 들으려고 준비하는 아이처럼 옆에 쪼그려 앉아 나를 바라본다.
“앞으로 사흘간. 노는 걸 허락한다.”
“진짜?! 오오!!! 진짜?!”
내 말에 잠이 달아났는지 붉은 눈동자에 생기가 돌았다. 빛에 약한 눈이라 미약하게 햇빛이 들어오자 금세 닫아버렸지만, 얼마나 몸이 근질거렸는지 알만했다. 그렇게 날뛰고도 말이다.
“단, 정해진 무대 위에서. 내가 일러준 규칙대로 행하되 명이 떨어지는 즉시 중단한다.”
“무대? 무슨 무대?”
“바드에게 듣지 않았어?”
“바드? 그건 또 뭐야?”
“호쿠. 네 직속상관이다. 이름정돈 외워.”
“싫어. 난 왕뿐이야.”
단호하게 말하는 문.
요지는 그게 아닌데 알아듣는 것을 개 똥구멍으로 듣는다. 입술을 내밀고 ‘왜 왕은 왜 만날 구더기들을 상대해? 구더기 좋아? 구더기 싫어. 난 싫어 구더기. 징그럽단 말이야.’라고 쉴새없이 조잘거리고 있다. 그러다 은아에게 시선을 돌리고 ‘너도 구더기가 좋냐?’ 라고 묻는데, 은아는 도통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자부심 높은 호쿠 우두머리에서 구더기로 추락해버린 바드가 불쌍해질 지경이다. 상관에게 있어 부하의 신임은 그 집단이 가진 전력이다. 문에게 구성원이란 기대를 걸고 있다면 매우 유감이니 당장 포기하라고 말하고 싶지만, 쉽게 놓아주진 못할 것이다.
무투대회를 나간다면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터. 문을 제거하려던 용병왕도 틀림없이 문의 존재에 탐을 낼 것이다.
순간, 잠깐이지만 짜증이 스쳐지나갔다. 그것은 문의 얼굴에 상처를 봤을 때와 비슷한 감정이었다.
“왕? 화났어?”
나조차 영문을 모를 내 감정을 문은 알아챈 것인지 내 앞으로 기어와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 당장 뜨고 있기도 힘들 텐데 말이다. 붉은 눈이 더 붉게 변하기 전에 난 문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쳐 밀어냈다.
“영리하게 굴어. 거짓말도 능력이다.”
“난 거짓말 못해.”
“알아.”
“알아? 어떻게?”
“난 너보다 나이가 많으니까.”
이해는 안 갔지만 납득하는 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의외로 순진한 만큼 다른놈들과 달리 내 말에 의문을 달지 않는다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시간은 생각보다 빨리 흘렀다. 무투대회의 시작으로 주위는 소란해지고 열기는 광적으로 달아오르고 있었다.
이 무투대회를 끝으로 트란슈는 남은 2년간 착실하게 병력을 쌓아올릴 것이다. 내가 15세가 되는 해. 참혹하다고밖에 알려지지 않았던 전쟁을 시작으로 3년간 지옥을 경험한다.
그 뒤 트란슈와 휴전협정을 맺으면서 전쟁의 잔재로 로던프에 균열이 일어나게 되고 내가 20살이 넘어가자 웅크리고 있었던 암부들이 등장한다.
로던프의 맥이 끊어지는 순간 나타난 암부들이 보여주었던 궤적을 추측한다면, 그들이 원하는 건 혁명.
란이 트란슈와 내통하고 있다면 궁극적인 목적은 통일일 것이다.
암부가 등장하게 된 건 공화국을 앞당기면서 부패한 귀족들을 처단하기 위함이겠지만, 로던프의 위업을 이룬 위인은 마침내 로던프를 향해 적기를 든다.
내전의 원인을 내게 찾았던 제 1왕자이자, 당시 로던프의 왕관을 쓰고 있던 놈은 내가 38세가 되던 해.
나를 단두대 앞에 무릎 꿇게 만든다.
그 후의 이야기는 알고 있는 바 없다. 란이 혁명에 성공을 했는지, 또 다른 전쟁이 시작되었는지. 통일은 이뤄졌는지.
아무것도 섣불리 예측할 수 없는 미래지만, 이것 하나만은 분명하게 단정지을 수 있었다.
로던프는 멸망할 것이다.
"왕? 뭐해에?"
창밖을 보고 있던 내 밑으로 문의 얼굴이 보였다. 그리고 내 옆에 드리워지는 그림자는 은아의 것이었다.
은아가 있는 것은 상관이 없지만, 문은 지금 여기에 있으면 안 된다. 때문에 창백한 문의 낯짝에 홍조가 돌자 손을 들어 이마를 쳐 주었다.
"넌 여기 있으면 안 되잖아."
"왕도 안 오잖아."
"때가 되면 갈 테니 가 있어."
불안한 모양인지 일어나지 않기에 그대로 잡아 엉덩이를 차 주었다. 몸이 근질거린다는 얼굴로 잘도 내 눈치를 보던 녀석이 꾸물거리는 게 짜증났다.
"더 맞고 갈래?"
고개를 좌우로 흔들던 녀석이 비로소 밖으로 나갔다. 오덴이 문을 찾느라 혈안이 되어 있었는지 금세 문을 발견하고는 냉큼 데려가는 게 보였다.
“마스.”
대기하고 있던 마스가 눈앞에 나타났다. 큰 덩치와는 다르게 민첩한 그 모습에 그동안 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무투대회가 있을 동안은 란에게 붙어있을 필요가 없으니 굳이 은아가 눈에 띌 필요는 없었다.
“은아의 검술 훈련을 책임져라. 얌전한 아이니 잘 따를 것이다.”
은아가 내 말을 알아듣고 나를 바라보았다.
은아의 신체구조 특성상 약점이 많으니 그것을 보완해줄 기술이 필요했다. 다행이 은아는 학습이 가능했기에 무리는 아닐 것이다.
그렇게 알고 나가려는 데 큰 손이 내 소매를 잡아왔다. 말은 알아들었지만, 이해까지는 시간이 걸리는 모양이다. 난 손을 뻗어 은아의 큰 손등을 두들겨 주었다.
“데리러 오마. 얌전히 이놈 말 듣고 있어.”
나의 말에 은아가 잡은 소매를 놓았다.
은아를 뒤로하고 방에서 나오자 뚜렷하게 느껴지는 타인의 숨소리가 거슬렸다. 지금의 나를 경계할 녀석은 없었기에 사신보다 이 기척의 존재를 파악하는 게 우선이다.
천천히 나무가 우거진 인적이 드문 곳으로 들어가 걸음을 멈췄고 고도로 훈련받은 놈의 숨소리가 끊기는 순간 움직여 내 몸을 숨겼다.
표범과 같은 인상의 긴 황색 머리카락을 땋은 이국적인 갈색피부의 남성이 모습을 드러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예상치 못한 내 움직임에 당황한 녀석이 몇 번 그렇게 두리번거리는 놈을 바라보다 난 몸을 돌려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놈의 이름은 자칸.
2왕자의 충성스러운 개새끼다.
“여기다.”
어둠에서 모습을 드러내자 자칸은 잠시 멈칫하더니 눈을 돌려 나를 확인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동자가 짐승의 것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표정이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 녀석이지만, 지금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내 존재에 대해 제대로 된 파악을 하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에 경계를 풀지 않고 내 행동을 주시하고 있었다.
섣불리 판단하지 않는다는 이 점이 마음에 들었었다. 2왕자가 살해당해 주인을 잃고 난 후부터는 어째서인지 내 소유권에 들어오진 않지만 주위를 맴돌던 녀석이었다. 특별히 귀찮게 하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내버려 뒀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자칸 역시 죽었었다. 정확히는 전쟁에 희생을 당했다는 표현이 맞았다. 주위를 맴돌던 녀석이 나를 지키기 위해 방패가 되어 죽었으니까. 지극히도 모시던 2왕자를 지키지 못했던 것에 한이라도 맺혀버린 것인지 그는 크지도 않았던 전쟁에서 허무하게 죽어버렸다.
하지만 이 모든 건 미래이자 과거의 일. 연연하지 않았기에 자칸을 마주대할 수 있었다.
“나를 찾는 게 아니었나.”
내가 입을 열자 내 태도를 눈여겨보고 있던 자칸이 뛰어올라 순식간에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저 대화라도 해보려고 했는데…….
자칸이 사라진 곳을 보던 난 한숨을 내뱉었다.
“거……. 새끼, 말이나 하고 갈 것이지.”
미행의 기척이 사라졌다. 일단 물러갔다는 뜻이다.
“이건 또 누구야?”
어디서 익숙하게 불쾌한 목소리가 들렸다. 긴 그림자와 함께 고개를 돌리니 화려하게 치장한 2왕자였다.
알려진 대로 사치와 치장을 좋아하고 여색에 환장하는 놈은 이미 축제가 시작된 이상 여색을 감출 필요는 없었는지 양 옆에는 모스로 보이는 여성을 끼고 있었다.
이곳으로 가는 길이라면 유곽 끝에 있는 화누곽 밖에 없으니 유희를 위해 그곳으로 향하는 듯싶었다.
2왕자는 무투대회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더불어 정치에도 큰 뜻을 품지 않으니, 지금처럼 회담과 무투대회가 겹치는 날이 그에겐 가장 곤욕스러울 시간일 터.
말하자면 그냥 피난 온 것이다.
“아아……. 맞아. 그러니까 네가 백치 놈의 딸랑이라고 했나?”
자기가 말하고 웃겼는지 박장대소를 하며 내 앞에서 깐죽거렸다. 입을 여니 구더기 썩은 내가 풍겨 그가 얼마나 술에 찌들어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술기운에 동공이 조금 풀린 놈이 웃는 것을 멈추고 다시 나를 바라보더니 갑자기 멱살에 손을 뻗었다.
“이렇게 작은 걸…….”
작게 중얼거리는 놈이 갑자기 내 목을 쓸더니 목덜미를 잡아 앞으로 끌어당겼다. 거의 안아버리는 꼴이 되어버려 잠시 숨이 막혀 밀어내려는데, 술에 취한 놈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일을 크게 하고 싶지 않았기에 보는 눈이 있어 쳐 죽이진 못했지만, 치렁치렁한 금속들이 얼굴에 닿을 때 마다 살심을 자극시켰다.
내 뒷목을 만질락 거리던 2왕자가 양 옆에 붙은 여자를 털어내 손바닥을 휘저었다.
“네년들은 가라. 나는 이놈이면 되니.”
그러며 나를 끌고 기어가는 데, 휘청거리지 않는 것으로 보아 생각보다 술에 깊이 취한 것으론 보이지 않아 함부로 손을 쓸 수 없었다. 결국 그대로 화누곽까지 끌려가 술상 앞에 나란히 앉게 되었으니.
최악의 기분이었지만, 자칸의 움직임을 파악할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이기에 얌전히 면전에 앉아 술을 퍼 마시는 꼴을 지켜보았다.
“더러운 놈……. 건들 놈이 없어 애를 건드려?”
남의 윤리의식을 따질 만큼 본인도 잘한 짓은 없는 것 같은데, 투덜투덜 거리며 술을 퍼마시던 놈이 내게 물었다.
“올해 몇이냐.”
“서…… 열 셋…….”
“하! 4왕자보다 어린놈을! 그것이 결국 갈 때까지 갔구나.”
쾅- 하고 내리치는 술잔.
예전에 생각했던 것과는 조금은 다른 것 같은 2왕자의 행동이 거슬렸다. 2왕자하면 왕족의 팔푼이 같은 것 밖에 떠오르지 않으니, 그에게 도덕적인 말을 듣는다는 건 상당히 이질적인 것이었다.
“자칸에게 들을 필요도 없겠어. 이걸로 그 엄한 목이나 감아라.”
라며 던져주는 원색의 비단 손수건. 턱 받침이라도 하라고 하면 얼굴에 족적를 남겨줄 생각이었으나 의아한 내 모습에 들이댄 거울 속에는 붉은 흔적이 드러난 내 목이 보였다.
얼굴에 작은 경련이 일어나는 걸 참았다. 목 주위를 지저분하게 만든 원인의 주인공을 머릿속에 그리자 달빛을 닮은 똥개가 떠올랐다. 돌아가면 제대로 손봐 줄 것을 예약하고 2왕자가 던진 천을 목에 휘감아 묶었다.
그런 내 행동을 술을 마시며 바라보던 2왕자가 내 앞으로 손을 뻗어 쓰다듬었다.
“그것이 살아 있다면 딱 너 정도였겠네…….”
어디서 약을 잘못 처먹은 게 아니라면 2왕자의 행동이 수상했다. 놈은 절대 이렇게 타인에게 다정한 놈이 아니었다. 잘 가다 옷깃이 스쳤다하면 객기부터 부리는 놈이 아니었던가.
멍청한 주제에 고집이 강하고 이루지 못한 꿈에 야망까지 품고 있는 비열한 놈이라 생각했는데, 이제는 무엇이 진짜인지 혼란스러웠다. 내가 알고 있던 기억에 균열이 일어났다는 표현이 맞았다.
보이는 것 보다 보이지 않았던 것이 더욱 선명하게 수면위로 떠오른다. 나를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있는 2왕자의 눈은 과거 나의 아버지 한스덴 웨이의 눈과 닮아 있었다.
2왕자의 국혼은 알려진 바 없다. 지저분한 여색에 빠져 있었으니 자식이 있다는 것도 이해가 가지만, 그동안의 성생활을 생각해 보면 결코 핏줄에게 다정할 인간은 아니다.
하지만, 여색의 이유가 따로 있다면 지금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야망의 목적이자 이유일 것이다.
“그땐 내가 미안했다. 놈을 수면위로 올릴 수 있는 방법이 그것뿐이었어.”
손을 거두고 턱에 팔을 괸 채 술을 마시며 중얼거리듯 사과했다. 왕족으로 자존심이 강한 그가 감히 내뱉을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마치 그날의 2왕자가 딴 사람이라는 듯 그가 뱉은 말은 모두 놀라운 것뿐이었다. 술을 마시면 인격이라도 변하는 것일까.
아니, 그렇지 않다.
그가 술에 취한 모습이라면 과거 얼마든지 보지 않았던가. 그때마다 보았던 추태와 객기는 잊고 싶어도 잊을 게 못되니, 분명 술 탓이 아닐 것이다.
“고요해서 마치 인형을 앞에 두고 얘기하는 것 같네.”
웃으며 그리 말하고 피곤한지 눈을 비볐다. 정신이 제대로 돌아오지 않는 모양인지 그러면서도 웃는 걸 멈추지 않는데 술을 들이 마시던 놈이 갑자기 제 무릎을 탁 치고 고개를 들어 말했다.
“내가 그 지옥에서 빼 주마. 대신 내 얘기 좀 들어줘야겠다.”
듣고 싶지 않았지만, 독한 술에 이미 찌들어버린 그가 곱게 나를 놓아주진 않을 것 같아 움직이지 앉고 지켜보았다.
걸쭉하게 술을 한 입 크게 마시더니 집어 던지고 새 술을 집어 마개를 열어 잔에 따라 내 앞에 놓았다.
“그리고 이야기가 끝나면 이것을 먹고 잊어라.”
맑은 술이 잔 위에서 넘실대고 있을 때 풀썩 앉아 벽에 등을 기댄 그의 시선은 열린 창 너머로 향해 있었으니 그는 마치 시를 읊듯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내겐 아이가 있었다. 생애 처음으로 사랑하고 사랑했던 여인의 아이였지. 제 어미를 닮아 어찌나 작고 곱던지 살아 있는 게 신기할 정도였어. 내 생애 가장 귀한 일을 꼽자면 그것일 테다.”
회상에 취한 듯 풀린 눈에서 웃음과 함께 눈물이 드러났다. 숨기려는 듯 고개를 돌렸지만, 감정과 술에 취해 제 몸 하나 관수하지 못하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어. 그저 내가 쥐고 있는 것들을 지켜주고 싶었을 뿐이었어.”
그는 웃고 있어도 울고 있는 것처럼 말했다. 기억을 되살리는 것을 괴로워하는 듯 했다. 어떤 심정일 것인지 이해가 갔기 때문일까. 그에게 동질감을 느끼는 것도 아니면서 나는 지루하고 긴 이야기를 무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어. 만남보다 헤어짐이 앞섰기 때문이다.”
로던프는 국혼을 하고 아들이 있는 왕자에게 암묵적으로 가장 먼저 왕좌의 특권이 주어진다. 확정이 될 수는 없겠지만, 가산점 정도는 주어진다는 소리다.
“시일이 지나 아이가 자란다면 이 섬뜩하고 역겨운 곳에서 나올 생각이었다. 난 누가 왕이 되더라도 관심도 없었어. 그러나……. 그들은…….”
어렵게 숨을 토해내듯 했지만 바로 말을 잇진 못했다. 그는 한 번 더 술을 입안에 털어 놓고 물기를 머금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를 앞에 두고 무언가를 투영하고 있는 듯 했다. 그는 손을 뻗어 내 뺨에 가져갔다.
“살점을 도려 내 봤느냐? 심장이 떼어져 나가는 고통을 아느냐? 나는 그때 죽었는데 살아야 한다는 지옥을…… 본 적이 없겠지……. 그렇다면 운이 나쁘구나. 불운을 모두 삼킨 지옥에서 사는 악귀를 봤으니.”
국혼을 마다하고 시일이 지나 아이가 자란다면 왕족의 신분에서 벗어 날 생각이었던 2왕자. 하지만 그런 2왕자의 모습을 탐탁지 않아했던 세력들은 2왕자의 여인을 암살하고 아이는 종적을 감추었다.
그는 우는 것을 멈추고 다시 웃었다. 그리고 술을 따르더니 보낸 자를 바라보듯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매우 영리한 아이였다 했다. 겨우 4살에 글을 읽고 쓰기도 했으며 잘 웃고 말도 곧 잘 했다고 한다. 본인도 어린 나이에 본 아이였지만, 그런 자신과 상관없이 그저 아이는 지켜주고 싶은 마음뿐이었다고 말했다.
2왕자는 다른 왕자들을 경멸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왕이 되려는 모든 이들을 미워하고 왕좌를 경멸하고 있었다. 자신이 왕위에 오른다면 가장 먼저 무고한 자의 피로 물든 왕좌부터 없앨 것이라 말하곤 그대로 눈을 감고 잠이 들었다.
손에서 떨어진 술잔에서는 채 비우지 못한 술이 눈물과 함께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를 그런 2왕자를 바라보다 내 앞에 놓인 술잔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것을 들어 마시고 내려놓았고 눈을 감고 일어나 몸을 돌려 나갔다.
하얗게 밤을 물들여 놓은 듯 어둠이 채울 그곳의 빛을 바라보았다. 비집고 나오는 의미 없는 웃음으로 예전의 삶의 모순된 진실에 허탈했다. 결국 세상은 힘 있는 자의 뒤틀린 진실에 뒤덮인다.
무고한 자들의 피로 살아가는 그들에게 영양가 없는 진실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겠지. 어째서 나를 죽였어야만 했는지. 내가 죽기 전 근거 없이 떠돌던 소문이 어디에서 나와 날을 세우기 시작했는지 이제 알 수 있었다.
힘없고 패배한 자의 입을 통해 겨우 알아낸 한 가닥 진실이었다.
고개를 숙인 난 손을 들어 내 심장 부근을 움켜쥐었다. 오물에 뒤덮인 세상이 비추는 곳을 짓밟고 눈을 떠 이를 드러냈다.
심장부근에 수놓아진 왕가의 상징을 떼어내 바닥에 버려버리고 걸음을 옮겼다.
**
"무투대회 특성상 살인도 허락하고 있으니, 생명에 위협이 될 것 같으면 기권해라. 무리해서 정상까지 올라가 개죽음을 당하지 않으려면 어중간한 녀석들은 내 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상대를 하지 못할 것 같으면 피하는 것도 능력이다."
바드가 무투대회 참가자들을 상대로 연설을 늘어놓고 있었고, 그의 뼈를 사무치게 하는 경고에 잔뜩 긴장한 것들은 큰 소리로 대답함으로써 긴장을 달랬다.
이제 슬슬 시작되는 무투대회에 순번을 호명하려는 데, 문이 열리면서 오덴이 먼저 그 모습을 드러냈다.
가벼운 목례와 함께 뒤를 따라 들어오는 은발의 사내는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힐 것 같은 화려함을 가지고 있었다. 보기엔 황홀해 마다할 이유가 없지만, 다소 유약해 보이기까지 한 아름다운 겉모습과는 다르게 단단한 근육질의 몸은 그가 얼마나 제대로 훈련된 호쿠라는 걸 말해주고 있었다.
단지 행실이 조금 껄렁해서 그것마저도 제대로 보이지 않을 뿐이다.
“순번을 호명하겠다. 제 첫 시합은…… 어?”
갑자기 바드가 첫 시합 순번을 말하려는 순간 멈춰 들고 있던 종이를 다시 한 번 바라보았다. 오덴이 그런 바드의 행동에 이상함을 느껴 왜 그러냐며 물었지만, 바드는 보고 있는 것도 못 믿겠다는 얼굴과 함께 깊은 탄식을 내뱉었다.
“약간의 문제가 있는 것 같으니 10조까지는 개별적으로 알려주겠다. 나머지는 장내에 붙일 테니 알아서 확인하도록.”
바드가 그리 말하고 낮은 단상에 내려와 문에게 다가갔다. 그리곤 문에게 따라 들어오라며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고 귀찮은 게 얼굴에 다 드러나는 문이 무시하자 오덴이 옆에서 소리를 질렀다. 그 꼴이 보기 싫어 겨우 방안으로 들어가자 바드가 심각한 얼굴로 문을 바라보았다.
“문. 무투대회 첫 시합은 너다.”
“좋은데?”
“좋지만은 않아. 문제는 상대다.”
“어떤 구더기? 필살기로 똥이라도 뿌리나?”
진지하게 말하고 있는 바드를 놀리듯 장난스러운 문의 말에 두통이 올라왔다. 그러나 바드는 침착하게 내용을 정리하고 알아듣기 쉽게 간결하게 말했다.
“다시 얘기 하겠다. 장위에 오르면 바로 기권해라.”
듣는 척도 하지 않는 문은 상대가 누구냐는 말에 대답도 하지 않고 연설을 하고 있는 바드가 지루해져 하품을 하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말이 길어지면 온 몸에 두드러기라도 나는 모양인지 뒷목을 박박 긁으며 힘들어 했다. 그런 문의 상태에 이야기를 길게 끌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바드는 본론으로 들어갔다.
“용병왕. 그게 네 첫 상대다.”
“왕도 종류가 있네. 구더기 왕도 있나?”
“넌 보던의 들개였다고 보고 받았다. 그 보던을 쓸어버린 당사자. 에덴 괴물의 약점을 알아낸 놈도 용병왕이다. 지금의 나로서도 그놈을 상대할 수 없어. 이제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나.”
문은 바디의 말에 조금 놀랐듯 했다. 이제야 문이 알아먹었다고 생각한 바드는 안심하고 바로 기권신청서를 작성하려고 했지만, 문은 그런 바드의 뒤통수를 후려치듯 중얼거렸다.
“뭐야, 되게 재밌게 놀 수 있다는 소리잖아.”
“문!”
“그래, 그 구더기란 말이지…….”
기쁨에 겨워 어쩔 줄 모르는 문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큭큭거리기 시작했다. 보던에서 있었던 모든 일들을 잊고 있었는데, 용병왕이라는 소리에 잊었던 일들이 모두 떠올랐다.
작은 왕에게 목줄을 받고 잠시 혼절했었지만, 금방 눈을 뜰 수 있었다. 등줄기에 땀이 흐를 만큼 목이 아파와 손을 댔더니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단 한 번도 이렇게 많은 양의 자신의 피를 본적이 없어 신기해 목에 난 상처를 따라 손으로 대 보았다.
이르지만 목줄을 채워준다는 작은 왕이 잊히지 않았다. 생각 없이 쥐어도 힘없이 비틀려 망가질 것처럼 생겼었다. 지켜줘도 죽을 것 같던 작은 왕이 단숨에 자신을 제압해 이렇게 단단한 목줄까지 채운 왕을 잊을 수 없었다.
황홀경에 빠져 다시 만나고 싶어 움직이는 데, 자신을 가로 막은 수십 명의 그림자를 볼 수 있었다.
보기만 해도 답답해 보이는 은색의 갑옷을 입고 있는 것들이 앞을 가로 막고 저들끼리 속삭이더니 자신에게 손을 뻗기에 가차 없이 뛰어올라 모가지부터 비틀었다.
기절해 있을 동안 작은 왕이 찾을 수 없는 곳으로 사라졌을 것 같아 초조했다.
하지만, 한 놈을 비틀면 또 다른 한 놈이 덤벼들고! 얼마나 즐거웠는지 모른다. 날뛰던 놈들이 하나 둘 조용해지자 바닥에서 꿈틀대는 놈들의 머리통을 발로 차 터트려보곤 흥미가 떨어져 몸을 숙여 숨이 붙은 놈들에게 물었다.
눈앞에 유희에 정신을 못 차리는 것 같아도 작은 왕에 대한 것으로 머릿속이 가득차 문은 이미 피로 곤죽이 된 놈의 멱살을 잡고 물었다.
“어디서 놀고 있어?"”
하지만 이미 기절을 한 것인지 죽어버린 것인지 대답 없이 늘어져버렸다. 뺨을 세차게 치다 이가 날아가 버릴 정도였지만 일어나지 않아 그대로 던져버렸다.
몸이 덜 풀어져 아쉽다 싶어 이제 막 생각난 작은 왕을 찾으러 일어나려는 데, 자신의 목에 은빛 사슬이 감겨 그대로 뒤로 넘어져 버렸다. 꼴사납게 끌려가기 전에 뒤로 돌아 사슬을 팽팽하게 잡아당기자 그 끝에는 차가운 눈의 중년의 남성이 바라보고 있었다.
놈의 손에는 눈에 보일 정도로 뿌연 연기가 나오는 통을 들고 있었다. 후각에 예민한 탓에 그것을 맡자마자 토기가 올라오고 온 몸이 마비가 되어버린 듯 했다. 무너지는 자신을 얼지로 일으켜 턱을 잡아들던 놈이 느끼해 보이는 웃음을 지었다.
귀가 울리는 바람에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무언가를 주고받더니, 향이 강했던 통을 눈앞까지 가져오는 바람에 결국 의식을 놓아 버렸다.
당시에는 이상한 향을 피우는 바람에 제대로 놀아보지도 못하고 정신을 잃었던 기억밖에 없지만, 그 뒤 제법 끈질기게 귀찮게 했던 놈과 드디어 놀아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온몸이 짜릿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죽여도 된다고 했지?”
“내말을 여태까지 어디로 들은 거야?! 네 상대는?!!”
“큰 구더기.”
저밀 정도로 아름답게 웃고 있는 문의 눈은 살육에 지배당한 사람처럼 강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문의 살육에 불타는 눈동자가 진득한 유혹을 하듯 번뜩이자 바드는 더 이상 말리려는 말이 안 나올 만큼 매료당해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문이 밖으로 나가려하자 퍼뜩 정신을 차린 바드는 재빨리 다가와 문을 붙잡으려 했다. 하지만 보다 빨리 잡으려 했던 문이 손을 뻗어 바드의 멱살을 잡아끌었고, 얼떨결에 차디찬 붉은 눈동자와 마주칠 수 있게 되었다.
나오려던 말문이 다시 막히려는 순간이었다.
“왜? 너부터 놀아줘?”
문의 비웃음 섞인 말에 정신이 아찔해지는 기분이 들어 바드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입을 열었다.
“빈손으로 올라갈 건가.”
바드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잠시 생각하던 문은 자신의 손에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는 것에 이제야 이해하고 바드를 놓아주었다.
돌이켜봐도 라마가 쥐어준 검을 어디에 뒀는지 생각이 나질 않았다. 왕에게 돌아가 사달라고 조르려고 생각하는 순간 오싹거리는 기분에 문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왕이 날 죽일 거야.”
그건 싫었다. 당장 숨이 멎고 차갑게 굳어간다면 다시는 왕의 얼굴을 볼 수 없게 되지 않는가. 죽는다는 건 그 작고 보드라운 따뜻한 몸을 다시는 만질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바드는 문이 온 몸을 부르르 떠는 이상한 행동에 눈을 떼지 않았다. 무기라면 창고에 가면 원하는 것을 고를 수 있다고 말하려고 했는데, 어째 말해도 들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하지만 빈손으로 무대를 오르기엔 상대가 용병 왕이다. 양손에 무기를 들고 있어도 대적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대가 아닌가. 더구나 빈손으로 올라가면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해 포기를 한다고 선언해도 실수라며 죽일지도 모른다.
놈은 그런 짐승이다.
하는 수 없이 바드는 허리춤에서 자신의 검을 빼 던져주었다. 소중한 검이기에 빌려주는 게 싫어야 하지만, 어째서인지 멋대로 손이 갔다. 순번이라면 문보다 한참 뒤기 때문에 상관이 없어서 그런 것이라고 합리화 시키면서 검을 던지자 문이 반사적으로 그것을 잡았다.
“써라. 쓰고 다시 반납해.”
“…….”
혹, 감격하고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을까 내심 기대를 하고 눈치를 봤지만, 문은 검집에 칼날을 빼 보더니 잠시 움직이지 않고 눈으로만 관찰했다.
대검을 맞닿고도 흠집하나 나지 않으면서 버티는 이 장검은 뛰어난 내구력에도 불구하고 가볍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어 검사라면 탐내는 100대의 검 중 하나에 속했다.
하지만 그 좋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검은 주인을 고른다. 때문에 자신이 이 검을 사용할 수는 있었지만, 어찌나 까다로운지 무게는 분명 가벼울 터인데, 휘두르고 나면 천근을 어깨에 얹고 있는 것처럼 무거워진다.
오만한 이 녀석이 자신을 주인으로 고르지 않았다는 뜻이 된다. 하지만 이 검을 탐내는 인간이 많은 만큼 우여곡절 끝에 자신이 얻을 수 있었던 위대한 검이다.
그 누구라도 빌려줄 생각이 없었지만, 문은 따로 요구하지 않아도 빌려주고 싶었고 그가 원한다면 기꺼이 줄 마음도 생겼다.
검을 쓰는 문이라면 그런 위대한 자신의 검을 못 알아볼 리 없다고 자신하고 감상을 마친 문이 이제 입만 열기를 기다리는 데, 문은 잔뜩 실망한 얼굴이었다.
“구려”
“뭐?!”
문의 눈에는 전에 라마가 대충 골라 던져줬던 검보다 훨씬 기대치에 못 미쳤다. 재밌는 검이라는 건 알겠지만, 예전에 보았던 대검보다 멋지지 않았고 쓸데없이 가벼워서 깃털을 들고 있는 느낌이다.
묵직한 것이 잡혀야 휘두르는 맛이 났던 문에게 있어 이런 애들 장난감 같은 것은 아무리 좋은 검이라도 성미에 맞지 않았다.
문이 검을 잡고 허공에 한 번 휘두르자 순간 검이 바람을 가르며 광명했다. 순식간이지만, 바드가 그것을 놓칠 리 없었고 자신의 손에선 단 한 번도 보질 못했던 검의 모습에 놀라 눈에 힘이 들었다.
하지만 문은 그런 바드의 상태를 알리가 없었기에 고맙다는 말도 안하고 구리다는 평만 남겨놓고 그대로 밖으로 나가버렸다.
이번에는 준비도 없이 충격을 받은 바드였다.
무투대회는 토너먼트 형식으로 최종의 승자를 배출시킨다. 우승자에게는 한 나라에서 이뤄줄 수 있는 소원 중 하나를 말할 수 있다. 물론 준우승 자에게도 상품은 있다. 다만 쓸 대 없는 희귀한 푸른 장미라는 것이 문제다.
어느 누구도 아름다움 밖에 의미가 없는 푸른 장미를 얻기 위해 무투대회를 출전하진 않는다.
그들의 목표는 우승. 그 이하는 의미가 없었다.
난잡하고 어지러운 무투대회의 열기를 바라보면서도 2왕자의 배경에 이질적인 균열이 일어나는 순간부터 내 머릿속은 복잡했다.
억지로 이어붙인 조각들이 그 틈새를 비집고 다시 섞여 들어간 기분이었다.
산산 조각나 멋대로 흩어진 조각들을 모두 모은다면, 내 칼날의 끝은 과연 누구를 향하고 있을까.
일순간이지만, 검기가 느껴졌다. 청량함과 가까운 검기에 머릿속을 배회하던 잡다한 것들이 모두 사라졌다.
어설픈 검기다. 아마 본인조차 익혔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듯한 검기였다. 그렇지 않고선 이렇게 제멋대로 날뛰진 않을 테니까.
눈을 돌려 수많은 무대 위에서 검기의 주인을 찾았다. 상대에 따라 당장 베어버려야 할 대상일수도 있을 테니까.
그리고 내가 멈춘 곳은 눈밭 같은 흰 머리카락을 날리고 있는 사내에게 머물렀다.
“기어이…….”
들고 있는 것은 100대의 명검 중 하나인 '시라소'였다. 검이 주인을 고른다하여 시라소의 주인은 깃털보다 가벼운 검 날로 바위를 벤다고 알려진 명검이었다.
생각보다 일찍 손에 넣은 것으로 보아, 본래부터 용병왕의 검이 아닌 모양이었다. 과거 문이 '시라소'를 얻게 되는 것은 용병왕을 죽이고 본인이 왕위에 오를 당시였으니까.
용병왕에게 빼앗았다면, 지금의 문이 시라소를 가지고 있을 수가 없다. 그렇다면 다른 경로가 있었다는 것인데, 시라소를 가질 수 있는 자들은 흔치 않으니 '바드'나'오덴'정도의 인물이 빌려줬을 것이다.
칼을 쥐는 법조차 제대로 모르는 놈이 휘적휘적 시라소를 몇 번 흔들더니 영 마음에 안 드는 지 삐딱하게 서서 검을 어깨에 걸쳤다.
그리고 상대가 올라왔다.
조금은 놀랐다. 설마 문의 첫 상대가 '용병왕'이 될 줄이야……. 의외였다.
**
문은 무대에 오르는 그 순간부터 눈을 감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내리쬐는 햇빛을 눈동자가 감당을 할 수 없기도 하였고 눈을 감으라는 왕의 명령도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눈을 감아도 그다지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기에 지금의 문에겐 시야로 보는 것 보다 오감을 이용해 느끼는 것이 더 와 닿았다.
“뭐야. 그 백자가 살아 있었다고? 아니면, 다른 놈인가?”
걸걸한 목소리였다. 익히 들은바 있는 목소리였기에 문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저 놈이 자신을 썩은 내가 진동하는 줄로 멋대로 온 몸을 휘어감아 입 한 번 열어보지 못하게 가둬놓았었다.
당장 죽이지 않고 가지고 놀 생각이었으나, 재갈을 풀자마자 사람이 죽어나가니, 문을 얌전하게 잡아둘 수 있는 건 무기가 될 만한 그의 모든 것을 결박하는 것뿐이었다.
덕분에 사지가 숨을 못 쉴 만큼 묶인다는 게 어떤 건지 똑똑히 알고 있는 문이 고개를 들어 크게 웃었다.
웃음을 주체하지 못하겠는지 어깨까지 들썩이고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몇 분을 웃다 숨을 깊게 내쉰 뒤 바삭한 입술을 붉은 혀로 쓸어내렸다.
“요란하게도 자랐구나. 외모만큼은 아까우니 머리정돈 깔끔하게 잘라주마.”
대검이었다. 휘젓는 것만으로도 큰 바람이 들어나는 거대한 대검을 든 용병왕은 대검의 크기만도 못하는 문을 바라보며 히죽거렸다.
저딴 애송이에게 질 수 없다는 자신감의 표출이었다. 허나, 조각내기에는 저놈의 존재가 아까우니, 정말로 죽이진 않고 적당히 썰어 발아래 짓밟아 목숨을 구걸하면 창녀처럼 굴릴 생각이었다.
마약에 약한 것 같으니, 조금만 자극해도 괜찮은 노리개가 될 것이라 생각했다.
제 까짓게 날뛰어봐야 애송이니, 객기를 부린다한들 소용없이 없을 터다.
그 순간이었다. 눈앞에 있던 문이 사라지고 다시금 코앞으로 나타나 섬광과 같은 검을 뻗었다. 짐승과 같은 움직임에 놀란 건 맞지만, 문을 처음 봤을 때에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기에 용병왕은 유연하게 몸을 돌려 검을 맞닿았다.
저런 가느다란 검 따윈 당장 부러져 버릴 것이라 생각했지만, 호각으로 맞닿고도 튕겨나간 쪽은 자신이었다.
놀랐다는 것을 부정하지 못하고 충격에 흔들리는 검을 잡고 있는 손을 바라보았다. 믿을 수 없었다. 등줄기부터 쓸어내리는 소름에 경악하고 백자를 바라보았다.
놈은 아무렇지 않는 듯 제멋대로 검을 쥐고 바라보고 있었다. 연신 ‘역시 구려.’라며 중얼거리고 있을 정도다.
뺨에 따끔거리는 통증이 느껴졌다. 용병왕은 그런 자신의 뺨을 훑어 보았다. 묻어 나오는 것은 피였다. 분명 몸을 틀어 검을 피했는데, 자신의 스쳐지나간 왼쪽 뺨이 검 날에 베여 피가 흐르고 있는 것이다.
뺨의 상처를 본 용병왕은 잠시 얼굴을 찡그렸다. 일그러지는 그의 머릿속에서는 말도 안 되는 가정이 그려지고 있었지만, 곧 그것을 부정했다. 고작해야 10대 중반정도의 애송이가 그것을 가질 수 없다.
하지만, 이 같은 상처를 자신에게 낼 수 있다면, 그건 필시 들고 있는 검이 이유일 것이다.
문은 잠시 떨어져 검 날에 묻은 용병왕의 피를 바라보다 킁킁 냄새를 맡아보았다. 이내, 오물 냄새라도 맡은 듯 기겁하더니 검을 털어 피를 땅바닥에 떨어뜨려냈다.
시라소의 존재를 눈치 챈 용병왕은 당장 문의 팔을 자르지 않는다면, 명검을 손에 쥐고 있는 문을 상대하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했다.
죽었다고 생각한 백자가 어떻게 살아남아 이곳에 서 있는지는 용병왕에겐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탐이 가는 인재고 아름다운 인간이긴 하나, 지금은 그저 대전 상대일 뿐이기 때문이다. 시라소를 손에 쥐고 있는 이상 살아서 보낼 생각이 없는 용병왕은 유감을 표하면서 그대로 대검을 높게 치켜들었다.
길게 끌 것 없이 문의 허리를 잘라낼 생각으로 빠르게 휘저었다.
그 순간까지도 눈을 감고 있던 문은 들고 있는 시라소의 무게감에 크게 실망을 하고 있는 상태였다.
깃털을 들고 싸워도 이보단 짜릿하리라. 미세하게 변하는 공기 중의 흐름을 타고 본능적으로 문이 땅을 박차고 뛰어오르면서 허리 쪽으로 휘두른 대검위로 올라탔다.
그런 문의 반사 신경에 놀랐지만, 유연하게 대검을 세운 용병왕이 다시금 대검을 높게 올려치자, 문은 가볍게 허공을 돌며 바닥에 착지했다.
그 순간을 노린 용병왕은 다시금 대검을 들어 바닥에 내리 찍었고 그 반동으로 공기는 칼날처럼 매섭게 바닥을 갈라놓기 시작했다.
이 경기를 지켜보면서 누구라도 용병왕의 승리에 이의를 달지 않았다.
단 한 사람만을 제외하고는.
용병왕은 문의 패배를 확신했다. 숨통을 완전히 끊어 놓지 않았다면, 최소한 불구로 만들어 놨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곧 흙먼지 사이로 드러난 문의 실루엣이 그의 예상과는 정 반대로 돌아갔다.
용병왕이 만들어낸 공기 중의 칼날을 튕겨내듯, 거센 바람과 함께 역으로 흙먼지 바람이 불면서 용병왕의 양쪽을 간단하게 베어버린 것이다. 이윽고 뿌연 시야 속에서 튀어나온 칼날.
그것을 막기 위해 대검을 들자 지독한 마찰음과 함께 손끝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덩치만 해도 곱절은 차이가 나는 애송이에게 힘으로 밀린다는 치욕스러움에 과감하게 받아치자, 눈앞을 가리고 있던 흙먼지가 사방으로 흩어져 시야가 확보되었다.
눈앞에 드러난 문은 용병왕이 예상했던 상태가 아니었다. 불구는커녕, 상처하나 나지 않는 모습으로 태연하게 시라소를 들고 있었다.
“네놈이 감히 이 나를 상대로 눈을 감아?!”
더욱이 용병왕이 놀란 것은 대전 초부터 지금까지 눈을 감고 있었던 문의 행동이었다.
처음엔 집중을 위해 잠시 눈을 감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스스로의 검에 확신을 가지기 위해 대전 전 눈을 감는 검사는 얼마든지 존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흙먼지가 사라지고 모습을 드러낸 문은 여전히 두 눈을 굳게 닫은 채 자신을 상대하고 있었고 용병왕은 그것에 분노했다.
자신의 뺨에 상처를 남겼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문을 살려 보낼 생각은 없었지만, 시라소를 무시하고 뼈하나 남기지 않고 갈아버릴 생각으로 들고 있던 대검을 휘저어 회오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는 용병왕만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기술 중 하나였고, 이 검술로 에덴의 괴물들의 약점까지 알아내는 쾌거를 이륙할 수 있었다.
괴물도 뼛가루 하나 남기지 않고 갈아버리는 이 검술은 본인에게도 큰 부담이 되기 때문에 웬만해서는 사용하지 않는 기술이었다.
장내에 거센 바람이 불어오자 그것을 지켜보고 있던 관중들은 첫 시합부터 경악을 금치 못할 수준에 환호했지만, 더러는 두려움을 느끼고 자리를 박차고 도망갈 정도로 위협적이었다. 실제로 관중을 에워 싼 돌기둥이 회오리바람에 뜯겨나가자 곳곳에서 비명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것을 느끼고 있던 문은 눈앞에 드리워진 거대한 회오리바람을 느껴보았다. 지나치게 시원한 것 빼고는 별것 아니라는 것이 그의 감상평이었다.
시라소를 든 문은 눈앞까지 다가온 회오리를 향해 검을 들었고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오직 한손으로 든 시라소를 깊게 베어 올리면서 장벽과도 같은 회오리바람을 소멸시켰다.
이를 숨 막히게 지켜보고 있던 1왕자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자리를 박차고 서서 난간을 붙잡았다. 모든 건 한순간이었다.
폭발음과도 같은 회오리바람을 검기를 담아낸 단 한 번의 휘두름으로 장내를 고요하게 만들어버린 것이다. 이내 땅을 박차고 섬광처럼 날아온 문은 눈앞의 대검을 잘라내면서 그것을 들고 있던 용병왕의 머리를 쳐냈다.
상대의 수준을 가늠하지 못한 용병왕의 최후는 눈뜨고 보기에도 처참한 모습이었다.
숨이 멎을 것 같은 일격에 떨어져 나가는 용병왕의 머리통이 땅바닥을 구르자 잘린 대검을 지탱하고 있던 머리를 잃은 용병왕의 몸뚱이가 힘없이 무너졌다.
호흡마저 허락하지 않던 장내가 순식간에 불타오르는 함성이로 가득 찼다. 가벼운 운동을 하고 나온 듯한 문은 태연하게 시라소를 어깨에 올려놓았고 고개를 돌려 관중석을 바라보았다.
무대에 올라 최초로 눈을 뜬 문은 어느 한 곳에 시선을 멈추더니, 저릴 듯한 미소를 지었다.
* * *
용병왕의 검술에 허점이 많았다고는 하나, 문은 기어코 눈을 감은 채로 용병왕의 머리를 잘라냈다. 비록 완성되지 못했다고는 하나, 쉽게 이길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생각보다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문이었지만, 그 움직임에도 아직은 미숙한 점이 눈에 들어왔다. 시라소를 제대로 사용할 줄도 모르고 검기의 사용법부터 엉성한 멍청이가 뭘 잘했다고 나를 발견하자마자 웃는가 싶어 놈을 무시하고 그대로 뒤 돌아 나왔다.
밖으로 나오자 미리 내가 오는 경로를 예상하고 넘어온 것인지 문이 내 앞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장내는 갑자기 사라진 문 때문에 더욱 혼란스러워 졌을 것이다.
앞으로 남은 대전까지는 시간이 있기 때문에 나오는 건 상관이 없지만, 지금 문을 상대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놈에게 내가 준 역할은 부족한 훈련을 남은 대전으로 대신하는 것이니까.
“봤어? 큰 구더기 죽는 거.”
“자리로 돌아가라.”
“봤잖아. 그렇지? 나의 작은. 왕.”
쓸데없이 흥분해 있다. 용병왕을 베고도 만족하지 못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만족과는 조금 다르다. 분수를 알지 못하고 내 앞에서 도를 넘는 자만을 하고 있는 것이다.
문의 붉은 눈동자가 먹이를 눈앞에 둔 짐승처럼 일렁이기 시작했다. 틈을 보이는 순간 목덜미에 박아놓을 이를 드러내면서 입술을 핥는 모습은 피에 굶주린 악귀와 같은 모습이었다.
“하아…….”
스스로가 인정한 내 앞에서도 본능에 누구보다 충실한 문을 바라보면서 나오는 건 한숨뿐이었다. 내 목소리는 들릴 것이다. 그것은 이성과 본능과는 다른 각인과 같은 것. 하지만 성장이 덜된 탓에 호기심을 두어야 할 존재 선정에 문제가 있는 문은 귀찮지만, 확실한 교육이 필요했다.
단검까진 필요 없다. 주위를 둘러보다 요란하게 휘젓던 용병왕이 끌고 온 길고 얇은 나뭇가지 하나를 주워들었다.
이정도면 충분할 듯싶다. 문은 그런 내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시라소를 어깨에서 내리고 내 눈앞으로 다가왔다.
“그러다 왕. 죽는다?”
그 말에 대꾸조차 하지 않고 돌대가리도 알아들을 수 있는 교육을 시작했다.
온전히 검기를 들고 있는 나뭇가지에 실어 칼날처럼 만든 뒤, 문의 눈앞으로 갈라내듯 휘둘렀다. 기세 좋게 막았지만, 검기의 기본조차 모르는 놈은 순식간에 잡고 있던 시라소를 놓쳐버렸고 그에 당황하는 놈의 배를 짓밟아 무너트린 뒤 목 위로 나뭇가지 끝을 들이댔다.
칼날과 다름없는 나뭇가지는 붉은 자상이 남은 문의 목에서 다시금 피를 흘리게 만들었다.
“죽을 테냐.”
내 말에 문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