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2/35)

나뭇가지를 둘러싼 검기를 내보내고 손에서 놓고 물러나자 문이 천천히 일어나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목이 따끔거리는 모양인지 팔을 들어 자상이 남은 곳을 쓰다듬는데, 그곳을 쓸어내리던 문의 입 꼬리가 올라갔다. 

그리곤 고개를 치켜드는 데, 안 그래도 맛이 간 놈이 어딜 잘못 얻어맞았는지 불쾌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왕 너무 좋아.”

해맑게도 이상한 말을 지껄이면서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어린아이처럼 웃었다. 하지만, 그런 사심 없던 웃음도 잠시. 

금세 뱀처럼 혀를 드러낸 문은 벌떡 일어나 내 앞으로 다가왔다. 

또래에 비해서도 덩치가 큰 편에 속하던 문은 성장기로 접어들면서 웬만한 성인 남성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자랐다. 

덕분에 상대적으로 또래의 신체조건에 미달되는 나는 문이 가까이 다가온다면 눈높이를 올려야했다. 

“그런데 그거 뭐야? 까만 거.”

눈으로 검기를 본 모양이다. 검기는 성질에 따라 달리 나타나는 데, 나 같은 경우는 검기의 성질이 어둠이기 때문에 검은 빛을 띠는 것이다. 

보통 검기는 일반사람들은 볼 수가 없는데, 스스로 검기를 쓸 줄 아는 인간이여야만 검기의 속성을 파악할 수 있다.

단, 검은 검기는  알려진 검기와는 성질이 달라 문처럼 예민한 놈이 아니면 느낄 수 없다. 

물론 작정하고 기를 숨긴다면 얘기는 달라지지만 말이다. 

“가져와.”

고개를 까닥이며 나뭇가지로 날려버린 시라소를 가리키자 문이 재빨리 뛰어가 바닥에 박힌 시라소를 들고 내 앞에 다가왔다. 

길게 설명을 하는 것 보다 한 번 눈으로 확인시켜주는 것이 빠르기 때문에 난 문이 가져온 시라소를 들었다. 

알려진 명성답게 그 무게는 마치 깃털을 쥐고 있는 것처럼 가벼웠다. 

날을 한 번 바라보고 문을 바라보았다. 두 손으로 검을 쥐고 그대로 목을 잘라내버릴 생각으로 검기를 불어넣자 검은 기들이 시라소를 감싸고 섬광처럼 뻗었다.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한 문의 목 바로 앞에서 시라소를 거두면서 기를 없애고 쥐고 있는 시라소가

바르르 떨며 얼떨결에 검을 쥔 문은 조금은 놀란 듯 시라소를 바라보았다. 

“스푼…….”

알아들을 수 없는 혼잣말을 하는 것 같아 그 부분은 짚지 않았다. 

“그게 검기다.”

“검기? 까만 게?”

“너 같은 경우는 붉은색이다. 열감이 높은 속성이니 제대로 조절하지 못하면 스스로를 태울 거다. 다음 대전이 끝날 때 까지 익혀.”

“그럼 나도 왕처럼 까만 거 할 수 있어?”

“넌 붉은 색이라니까.”

“까만 게 좋아.”

내 말을 어디로 들었는지, 개소리를 해대는 문이 한심해 다시 설명하는 것을 포기했다. 

백날을 설명해줘도 눈에 보이는 것만 믿고 배우는 놈이니. 검기를 사용하다보면 알아서 자신의 성질을 파악하게 될 것이다. 

다만, 시기적으로 빠른 감이 있었다. 

내가 문의 검기를 본 것이 이보다 2년은 후다. 하지만 문은 내가 알고 있던 시기 때의 문보다 훨씬 앞서 성장하고 있었다. 

폭주가 잦았던 것이 본인의 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으니, 이번에도 아마 괜찮을 것이다. 

아마도. 

더는 해줄 말이 없으니 그대로 뒤 돌아 가려는데, 내가 걸어가자 검에 정신이 팔려있던 문이 생각 없이 내 뒤를 따라붙으려 했다. 

난 잠시 멈춰 그런 문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 멍청아. 다음 대전에 준비해.”

“나 할래!! 검은 거!”

대전에는 관심이 사라지고, 검기에 홀려버린 것인지 바로 생떼를 부리려고 하기에 두말 할 것 없이 살기를 드러냈다. 

흠칫 놀라는 문이 눈앞까지 다가왔다가 순식간에 뒤로 물러났다. 

그 모습에 살기를 지우지 않고 끝까지 노려보다 등을 돌린 나는 더는 쫓아오지 않는 문을 뒤로 하고 걸음을 옮겼다. 

  

처연하게 눈앞에서 사라지는 라마를 바라보던 문은 시선을 시라소에게 돌렸다. 확실히 무게감이 달랐다. 가볍다는 것은 변함이 없었지만, 겨우 깃털 한 조각 같던 것이 스푼정도로 무게감이 바뀐 것이다. 이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마음에는 들었다. 어찌되었건 왕이 직접 손에 쥐었던 검이니까. 애초부터 주인에게 돌려줄 마음도 없이 사용 직후 버릴 예정이었지만, 마음이 바뀌었다. 라마의 손길이 탔다는 그 이유하나만으로 문은 시라소를 놓을 생각이 없어졌다. 

“검은 거.”

무심코 문이 중얼거렸다. 자신의 왕이 직접 보여주었던 그것. 왕의 모든 것을 가지고 싶은 문에게 있어 검은 것은 왕의 명령에도 자제가 쉽지 않은 것이었다. 그게 무엇일까. 그 작은 몸 전체를 감싸고 있던 검은 기운들. 소름끼치도록 위험하지만, 들끓는 탐욕을 멈출 수 없을 만큼 매혹적이기도 한 그것. 

그것을 감싸고 서늘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작은 왕만 생각해도 짜릿해지는 흥분이 느껴졌다. 무심코 혀를 내밀어 마른 입술을 핥고 굶주린 맹수처럼 눈을 번뜩였다. 당장 뭐라도 베고 싶었다. 차오르는 살기를 감출 길 없어 시라소를 질질 끌며 다음 먹이를 찾아 움직였다. 

“멈춰라.”

깊숙이 내려앉은 목소리였다. 문은 그 목소리에 반응했는지 우뚝 멈춰 눈알을 돌렸다. 뒤에 뭔가가 있다는 건 확실하지만, 맡아본 적 없는 벌레의 냄새였다. 어쩐지 여태까지 보았던 오물들보다 더 고약한 향을 풍기는 것 같았다. 

“이름이 문이라고 했던가.”

우뚝 멈춰서 아무런 예를 차리지 않는 문의 행동에 동행하고 있던 거친 갑옷을 입은 사내가 고함을 치듯 외쳤다. 

“이 건방진 놈! 이분은 제 1왕자 로던프 젠 그란스님이시다! 당장 고개를 숙여 예를 다하라!!”

문은 고개를 돌려 건성으로 뒤를 바라보았다. 붉은 눈동자가 젠의 시선에 들어오자 그는 잠시 숨이 막혀버린 듯한 통증을 느꼈다. 확실히 위험한 짐승이다. 그 누구에게도 길들여지는 것을 허락하지 않은 몰아치는 불길과 같은 눈동자. 단순히 피가 흐르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못했다. 그는 불이었다. 닿으면 온 몸을 휘감아 재로 만들어버릴 위험한 불길. 

문은 다소 느긋하게 젠의 앞으로 걸어갔다. 두 눈은 똑바로 젠을 향하고 있었고 그의 빈손은 뻗어 아까부터 시끄럽게 쪼고 있는 참새새끼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건장한 기사인 그가 한 순간에 목을 허락당해 잡혀버린 것이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다른 기사들이 검을 꺼내 문의 목을 노렸다. 똑바로 젠을 향하는 붉은 눈동자. 혀를 칠 정도로 살기를 감추지 않고 젠의 코앞까지 다가온 문은 꺽꺽거리며 숨넘어가는 놈을 끌어다 한순간 힘을 주어 단번에 비틀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기사들이 일제히 검을 들어 문에게 달려들려 했지만, 젠은 손을 들어 그들의 움직임을 강제로 막았다. 

거품을 물고 눈이 뒤집어진 기사. 문은 기사를 더는 잡지 않고 그대로 벽을 향해 던졌다. 둔탁한 깨지는 소리가 들렸지만, 누구도 그곳으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문의 입 꼬리가 길게 올라갔다. 

‘죽여 버릴까?’

젠이 눈썹을 찡그렸다. 정확히는 알지는 못한다고 해도 사냥감 정도로 치부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는 듯 했다. 그런 것도 모자라 당장 먹을지 나중에 먹을지 상당히 고민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이미 그는 자신의 목을 노리고 있는 검이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왕자라고 했다. 

욕구를 참지 않고 지금 당장 휘두른다면 이놈을 포함 모두의 목을 벨 수 있다.

그렇게 된다면 막을 길 없이 차오르는 이 번들거리는 살기도 잠재울 수 있지 않을까. 특히 단무지색 머리카락을 하고 있는 벌레가 거슬렸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저 낯짝을 보고 있으면 눈앞에서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 죽여 버리자. 거슬리니까.’

주위에서 문을 위협하는 기사들이 날을 세웠다. 이미 그들은 문에게 공격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그가 조금만 더 움직인다면 수십 개의 검을 박아 넣을 생각인 것이다. 

문의 창백한 손이 젠의 목덜미를 향해 뻗었다. 저 목을 잡아 비틀어 시라소를 이용해 반으로 갈라버릴 생각이었다. 그 직전에 본능적으로 젠의 눈앞에서 손이 멈췄다. 문의 등줄기가 오싹하게 하는 살기가 느껴졌다. 

익숙하고도 거센 살기가 느껴본 적 없는 공포마저 만들고 있었다. 

젠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문이 눈앞에서 멈추자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그는 무언가에 반응하는 듯 했고, 잠시 부들부들 떨더니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그곳으로 젠도 시선을 돌렸지만, 이리저리 움직이는 기사들과 호쿠와 플라이 무리들이 전부였다. 개 중 어린아이도 끼어 있었지만, 사람들 틈에 가려 잘 보이진 않았다. 

“쳇…….”

혀를 차던 문이 손을 뒤로 보내고 등을 돌렸다. 문은 자신의 왕이 구더기를 너무 좋아해서 큰일이라고 생각했다. 정말 이해하기 힘든 취향이다. 

그는 매우 아쉬운 듯 걸음을 옮기며 빠르게 눈앞에서 사라졌다. 

“괜찮으십니까?!”

“물건이군. 그런데 왜…….”

대체 왜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인지 알 길이 없던 젠이 다시 한 번 문이 바라보았던 곳으로 시선을 보냈지만, 특별한 점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외전 1. 창백한 달빛의 오마쥬  

2년이 넘도록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전쟁이 조정기간을 거치면서 조금은 숨을 고를 수 있는 시간이 주워졌다. 17세로 어린 나이의 드론을 처음엔 못마땅해 하던 놈들도 크고 작은 전쟁에서 전승하자 감히 드론의 나이를 짚는 자가 없었다. 

드론이 이번 전쟁을 끝으로 전설까지 받게 된다면 필시 전쟁의 신으로 추앙받게 될 것이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드론의 존재만으로도 그들의 사기는 혹된 훈련과 전쟁으로도 절대 꺾이지 않았다.

“드론이시다!”

무기를 점검하고 있던 자들이 하나 둘 일어나면서 서늘하게 지나치는 드론을 바라보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다른 드론보다 키와 체구가 작은 탓에 처음에는 드론을 받아들였어야 할 실리스 로던프의 기사들이 먼저 조롱을 일삼았었다. 

치욕스럽고도 상스러운 말을 아끼지 않고 퍼붓던 기사들이 드론을 비웃으며 거부했고 심지어 전쟁 도중에서조차 드론을 호위하려 하지 않았다. 드론을 둘러싸고 보좌했어야 할 기사들이 멋대로 진열을 무시하고 드론을 홀로 적장 앞에 세웠다. 

어린 드론은 죽을 것이다. 트란슈 놈들뿐만 아니라, 아군 역시 죽음을 의심하지 않았다.

단신으로 나선 드론의 검 날이 족히 백이 넘는 트란슈의 목을 차례차례 베면서 이를 지켜보던 이들은 경의를 넘어 공포를 느끼기 시작했다. 

저 작은 몸이 조각조각 흩뿌려지는 것을 상상하고 물러나 있던 기사들 역시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다는 듯 몸을 떨어왔다. 

트란슈 역시 다르지 않았는지 끝이 보이지 않는 벽처럼 서 있는 드론을 뚫지 못해 당황했지만, 그가 철인이 아닌 이상 수로 밀어붙이면 된다고 생각했는지 끝임 없이 단 한 명의 드론을 죽이기 위해 달려들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를 것이 분명한 상황임에도 드론은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적들의 목을 베었다. 몸을 움직이는 것을 최소화 하면서 유연하게 휘날리는 검 날이 신기에 가까울 정도로 춤을 추고 있었다. 

단칼에 목을 베더라도 드론의 몸은 이미 피로 뒤덮어 있었다. 악귀와 같은 모습으로 지켜보는 자들을 전율케 했다. 

허나, 단신으로 승부하기엔 적들이 너무 많았다. 결국 등 뒤를 허락하고 만 드론에게 검 끝이 빛나자 이를 지켜보던 로던프의 기사들과 호쿠들은 일제히 일어나 검을 들었다. 그제야 드론을 따르기 위해 움직이려 했지만 이미 때는 늦어버렸다. 

그대로 드론을 잃을 것을 절망하려는 순간, 드론에게 검을 올리던 자가 비명조차 없이 반으로 갈라졌다. 

적나라하게 튀는 피를 손으로 가린 드론의 앞에 선건 달에서 뽑아낸 실과 같은 머리칼을 가진 자였다. 아름다운 자였다. 눈앞에서 그를 보았다면 평생 그 어떤 미인을 보더라도 감히 아름답다 말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들은 그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거친 용병 중 짐승과도 같은 몸놀림으로 눈앞에 있는 자들의 허리를 동각 내는 야만스러운 검술은 오직 용병 왕만이 쓰는 것이다. 

품격이라곤 느껴지지 않는 상스러운 검술이었다. 그저 베고 조각내고 찢어내는 것뿐인 그의 검술은 도살일 뿐이라는 평도 있었지만, 아무도 그런 용병왕의 검과 마주할 용기는 없었다. 

그들은 돼지가 되고 싶지 않았으니까. 

요동치는 명검 시라소가 공명하기 시작하면서 주위에 둘러싼 자들을 모두 베어냈다. 살인을 즐기기라도 하는 듯 입가엔 미소를 잃지 않고 드물게 크게 소리쳐 웃으며 발작적인 학살을 시작했다. 

본격적인 전쟁에 앞서 단순한 도발에 생각지도 못한 사상자를 낸 트란슈가 뒤로 물러난 건 그때부터였다. 

도망가려는 걸 눈치 챈 용병 왕이 그 뒤를 쫓으려고 했지만, 드론이 몸을 돌리자 그의 걸음도 멈췄다. 

저 짐승을 다룰 수 있는 자가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흥분에 차 있던 용병왕의 발길을 돌린 건 확실히 어린 드론이었다. 모두가 지켜보고 있었지만, 트란슈를 상대로 단신으로 승리한 것보다 짐승의 주인을 믿을 수 없었다. 

피를 뒤집어 쓴 드론은 자신의 뒤를 따르지 않던 기사의 앞에 다가왔다. 무언가 잘못됐다고 생각한 기사는 그대로 뒤로 물러섰다. 변명이 나오기 전에 드론의 검이 올라갔다. 그리고 가차 없이 기사의 목을 베어냈다. 

기사 중 최고의 실력을 자랑하던 그가 단 한 번의 휘둘림으로 목이 굴러간 것이다. 뿜어져 나오는 피와 함께 몸뚱이가 힘없이 쓰러졌다. 

굴러가는 머리를 용병왕은 털 공을 가지고 노는 고양이처럼 툭툭 건드리고 있었다. 

칼을 내린 드론이 눈을 돌리자 들고 있던 고개가 모두들 숙여졌다. 당장 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가 그들을 갉아먹고 있었다. 

“아직도 살고 싶은 자가 있으면 나와라.”

섬뜩한 그 목소리에 바들바들 떨고 있던 이들의 무릎이 굽혀졌고 머리를 바닥에 박았다. 드론은 그 모습을 시리도록 차가운 눈으로 내려 보다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그런 드론의 발자국 소리도 듣지 못한 자들은 이미 자리에서 드론이 사라진 뒤에도 고개를 들지 못했다. 

걸음을 옮길 때 마다 피로 그려진 발자국이 그려졌다. 천천히 자신의 천막 안으로 들어가던 라마는 조금 지친 듯 검을 내려놓고 의자에 앉았다. 

숨을 토해낼 때 마다 피비린내가 올라왔지만, 라마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 라마의 천막 안까지 들어온 문은 그렇게 날뛰고도 쌩쌩한 모습으로 라마의 천막을 둘러보았다. 특별한 것은 없었다. 침대와 책상. 그리고 의자가 전부인 천막이었다. 

“넌 후방에 배치 됐을 텐데.”

책상위에 올려 있던 사과를 멋대로 들어 베어 물고 있는 문을 상대로 말하는 것이었다. 그런 라마에게 관심도 없다는 듯 문을 사과를 마저 깨물고는 남은 잔해는 바닥에 던져 버렸다. 

“돌아가 자리를 지켜라.”

그 소리에 문은 성큼 성큼 다가와 손을 뻗어 라마의 머리카락을 쥐었다. 힘을 주어 머리에를 뒤로 당기자 라마는 놓고 있던 검을 들어 문의 목에 댔다. 깨끗한 목에서 피가 흘러내렸지만, 아랑곳 하지 않고 문은 그대로 라마의 입술을 탐했다. 

깊게 탐닉하듯 들어오는 입술에선 사과향이 고스란히 들어왔다. 

“당신은 살아야해.”

속삭이듯 말하고 있었다. 감정을 온전히 드러내지 않는 문은 자신의 목에 드리워진 검 따윈 보이지 않는 다는 듯 라마를 짓누르고 그의 입술을 핥아 올렸다. 

잠시 그런 문을 바라보고 있던 라마는 들고 있던 검에 힘을 풀고 바닥에 놓았다. 라마는 손을 들어 짐승의 머리카락을 잡았다. 그대로 칼을 쑤셔 넣을 줄 알았던 문은 예상치 못하게 들어온 손을 느꼈다. 

아무래도 아까 뱉었던 라마의 말이 거슬렸나 보다. 그것을 알고 있는 라마는 누더기가 된 자신을 안고 있는 문의 정강이를 발로 찼다. 고통에 팔딱 뛰며 문이 물러나자 라마는 그대로 자리에 일어났다. 누더기가 된 옷을 벗자 나체가 드러났다. 나체도 옷만큼이나 상처로 너덜너덜 했다. 

가져온 깨끗한 물로 몸을 헹구고 있는 라마를 어느새 의자에 앉아 바라보던 문은 나오는 하품을 감추지 않고 있었다. 

후방에서 여기까지 달려오면서 한 숨도 자지 않았으니, 그는 이미 잠에 취해 곧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아까부터 돌아가라고 말하고 있지만 귓등으로도 듣지 않아 라마 역시 포기하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가서 목욕이라도 하고 오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이미 의자 위에서 곯아떨어진 상태였다. 

잘도 저런 곳에서 자나 싶어 내버려두고 라마는 자신의 침대로 향했다. 그 역시 내일을 위해 지금은 쉬어야 할 때이기 때문이다. 

지나치게 풀려 있는 것도 좋지 않지만, 쉰다는 것에 인색해도 좋지 않았다. 잠깐의 휴식을 위해 라마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만월이었다. 

달빛이 그대로 라마의 얼굴을 타고 올라왔고, 태평하게 잠들고 있는 그를 내려다보는 문은 희멀건 하게 변하는 살기를 감추지 않았다. 번들거리는 살육으로 가득 찬 붉은 눈동자가 고스란히 드러난 라마의 목을 향하고 있었다. 

저 목을 비틀어 베어낸다면 그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는 달콤한 향의 피가 나올 것이다. 이미 짐승의 눈으로 돌아간 문은 자신의 입술을 핥아 올렸다. 누군가가 먼저 죽이기 전에 자신의 손으로 없애 버리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들고 있는 검으로 어린 왕의 목을 치려는 순간이었다. 

깨어났다고 생각한 라마의 몸이 움직이더니 그대로 문의 뒷머리를 붙잡아 자신의 품속으로 당기는 것이다. 

시력이 좋지 않은 탓에 라마의 얼굴을 잘 보지 못하는 문은 오로지 청각과 촉각만으로 이 상황을 이해하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갑작스럽게 들어오는 체온을 이해하지 못하고 허무하게 떠 있는 손에서 검이 떨어져 버렸다. 그 답지 않게 당황한 것이다.

“괜찮으니, 자라.”

자신을 알아보고 말한 것인지 알 수 없는 라마의 말에 문은 그대로 깊게 라마를 끌어안았다. 

그는 두려웠다. 

그래서 타인의 검에 죽을 바에는 차라리 제 손으로 죽이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라마의 죽음은 문에게 원초적인 공포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죽이기 전에……. 죽지 마.”

라마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떨고 있는 짐승을 달래듯 잠이 들 때까지 머리를 쓰다듬어 줄 뿐이었다. 

 어둠과 불  

문은 본능적으로 젠에게 적의를 드러냈다. 감이 야생동물 수준이라 내 감정 이상으로 동요하는 문은 잡고 있는 목줄이 과거와 같이 헐거웠다면 그 자리에서 젠의 목을 물어뜯었을 것이다. 

그토록 진득한 살기를 본 것은 오랜만이었다. 평소엔 그저 맛이 간 상태로 여흥만을 쫓았기 때문에 큰 문제가 될 것은 없었지만, 이번만은 달랐다. 

적진을 앞에 세우고 백 이상의 목을 혼자 베었을 때 막을 틈도 없이 그들을 눈앞에서 쓸어버렸던 문과 겹쳐졌다. 그대로 두었다면 어떻게 해서든 젠을 죽였을 것이다.

그건 바라지 않았다. 

그렇게 되면 아무것도 알 수 없게 돼 버리니까.

경고만으로도 물러나게 했을 만큼 과거와 다르게 문의 목줄은 단단했다. 문제 될 건 일어나지 않았지만 거슬렸다. 

문을 훑어보는 그의 눈동자가 물건을 찾았다는 듯 번들거리자 과거와는 별개의 짜증이 올라왔다. 문이 경고만으로 물러나지 않았다면 이성을 잃어버린 건 내가 되었을 것이다. 

순간 자제를 못하고 나 역시 살기를 드러내고 말았으니까. 경고만으로 그쳐 예민한 문만이 알아차릴 수 있었지만, 만약 그 상태가 지속됐다면, 젠 역시 내가 보내는 살기를 알아차렸을 것이다. 

과거의 문은 지금보다 훨씬 자유롭게 살아가는 아이였다. 누군가의 제재는커녕, 제대로 된 말조차 따르게 하는 것이 어려웠다.

나 역시 다르지 않았다. 

이미 완전한 놈에게 목줄은 순간의 제재용으로 밖에 쓸 수 없었으니까. 

그마저도 흥분해 이성을 잃어버리면 듣지 않았다. 때문에 유일하게 그를 붙잡을 수 있는 나라 하더라도 온전히 문을 내 사람으로 만들 수는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난 내 것에 욕심이 많은 사람이다. 

들개의 서약까지 받게 되면서 문은 완전한 내 사람이 되었다. 그에게 세계는 오직 나 하나. 나 역시 문이 전부가 되면서 더는 내 것을 빼앗기는 걸 용납하지 않는다. 

물론 약간 말을 안 듣긴 했지만 문은 과거에도 내 사람이었다. 다만 이토록 진득한 소유욕이 생길 정도로 간절하진 않았다. 

당시에는 분수를 알지 못하고 인간이 되려 했던 내게 가족이라는 게 생겨버렸으니까. 그런 가족이 내게 세상의 전부였다. 

들개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는 공존할 수 없는 것이다. 내게 전부였다고 생각한 과거의 세상은 나로 인해 불합리한 오물에 더렵혀졌고 결과는 참담했다. 들개가 인간이 되려했던 대가는 이미 뼛속까지 알고 있었다. 

나는 들개. 두 번 다시 인간이 되려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는다. 

때문에 난 내 것에 집착했다. 문은 나를 들개로 만들어준 유일한 아이다. 

한스덴 웨이 일가의 생존이 분명해지면 나는 문을 데리고 이 세계에서 완전히 발을 뺄 생각이었다. 그전에 그들에게 위협이 될 수 있는 모든 요소를 제거해야 한다. 그것만이 지금 내가 이곳에 있는 이유니까. 

앞으로 2년 후 전쟁이 일어난다. 트란슈의 침공으로 시작된 전쟁은 로던프의 수치스럽게 무뎌진 발톱마저 드러내게 할 것이다. 

내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시간이 허락되는 순간까지 버티면서 문의 대전을 지켜보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

문의 상태가 이상했다. 

어디가 이상한 것인지 파악이 되지 않았지만, 붉은 기운에 이물감이 낀 느낌이었다. 명검 시라소의 이름값이 아깝도록 땅바닥에 질질 끌며 걸어온 문은 고개를 들어 눈동자를 돌렸다. 나를 찾고 있는 듯 했다. 하지만 기척을 숨겼기에 좋지 않은 눈으로 나를 찾기란 어려울 것이다. 

대전에 상대가 올라왔다. 시작을 알리는 목소리가 떨어지기도 전에 문은 다리를 박차 그대로 돌진해 순식간에 정확히 상대의 목을 도려냈다. 

대전은 특별한 규칙 없이 실전과 같은 조건이기에 문의 그러한 돌발적인 행동에 문제는 없었다. 하지만 전례가 없는 대전에 당황한 이들은 모두 할 말을 잃어버린 듯 조용했다. 대전에 있어 시작과 끝을 담당하는 자 역시 자신의 위치를 망각하고 넋을 잃고 문을 바라보았다. 

문은 천천히 시라소를 질질 끌고 굴러간 머리를 들었다. 그리고 눈동자를 굴리던 문은 정확히 내가 있는 곳을 향해 자른 머리를 잡아 던졌다. 

고개를 까딱거려 피하자 잘린 머리는 뒤쪽으로 날아갔고 내 주위에 있던 자들은 비명을 지르며 흩어졌다. 

문은 나를 향해 손을 흔들며 해맑게도 웃고 있었다. 

“설마 저게 네 주인이었냐?”

생쥐는 부러진 칼은 안중에도 없이 잘 보이지 않아 손바닥으로 해를 가리며 조각난 검이 날아간 곳을 바라보았다. 자신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백자는 붉은 눈을 드러낸 채 웃고 있었다. 어딘가 날이 서 있는 모습이다. 

란을 발견했다. 3왕자. 백치라고 알려졌지만, 재밌는 놈이다. 그도 그릇이긴 하다. 

하지만 아직은 불안전한 그릇. 어쩐지 조금은 부족한 듯싶어 시야를 넓혀 보았다. 그리고 순간 온 몸이 경직되는 듯한 살기를 느꼈다. 

육안으론 잘 보이지 않는다. 그 어떠한 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저곳에 뭔가가 있다는 것만 확실할 뿐이었다. 번뜩이는 그것이 사라졌다. 툭-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을 끄는 쇳소리에 생쥐는 고개를 돌렸다. 

“그래, 저것이 네 주인이란 말이지.”

탐이 났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백자를 죽이고 그곳에 가 봐야 할 것 같았다. 순간이지만 압도당했다는 기분은 꽤 강렬한 희열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백자도 아는 모양이었다. 거슬린다는 듯 가차 없이 검을 휘저었고 역시나 타격이 굉장해 맞닿은 지면이 박살이 났다. 

검기를 제대로 사용하지 않고 있었다. 오직 본인이 가지고 있는 힘만으로 저 정도 위력을 낸 것에 솔직히 놀랐다. 

가지고 있는 성질도 자신과 비슷하지만, 어딘가 이질적이다.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검기를 사용조차 하지 못하면서 자신의 검을 동강내 날려버렸다. 

칭찬할만한 실력이었다. 

하지만

“애송아. 검기란, 이렇게 사용하는 거다”

부러진 검을 들어 손바닥으로 날을 훑었다. 범인(凡人)은 다시 태어나도 느낄 수 없는 붉은 기였다. 문은 생쥐가 흘려보내는 붉은 기를 똑똑히 보았다. 그것은 작은 왕이 가지고 있던 성질과는 다르지만, 구현되는 방법은 비슷한 것이었다. 

순식간에 생쥐가 눈앞에서 사라졌다. 기를 쫓아 검을 들어 막았지만, 동강난 검이라곤 믿기지 않을 만큼 묵직한 일격에 휩쓸려 뒤로 물러났다. 빠르고 정확한 검 날이 다시 한 번 뻗었고 정확히 그것을 막았지만, 가차 없이 문의 어깨를 파고들었다. 그것은 검이 아니었다. 

뒤로 물러난 문이 자신의 어깨를 바라보았다.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베어나간 듯 파헤쳐진 어깨에는 붉은 불길이 살을 파먹고 있었다. 그곳에 손을 올리자 불은 곧 꺼졌다. 

습관인 듯 생쥐는 자신의 목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문을 바라보았다. 정확히 그의 목줄이다. 

예쁜 목줄이었다. 깨끗하고 정확하게 언제든 도려낼 수 있도록 채워진 붉은 목줄은 금방이라도 피를 뿜고 머리가 바닥에서 뒹굴게 할 것 같았다. 

생쥐가 탐내는 것은 저 목줄이었다. 

도살하는 데 이보다 즐거운 건 없었다. 절대적인 힘으로 짓누르고 무방비한 상대를 무참히 찢어버린다. 

빠르고 정확하게 부위를 도려내고 피를 뿜게 하는 것만이 시궁창 생쥐에겐 달콤한 치즈와 같았다. 하지만, 어쩐지 눈앞의 백자는 쉽게 조각나지 않았다. 

분명 너덜너덜 걸레조각이 되었음에도 어디 한 곳 나가떨어진 게 없었다. 자신의 움직임도 못 쫓아 겨우 드리워진 검을 막는 수준임에도 그 수준이 놈의 팔다리를 지켜주고 있는 것이다. 

꽤 집요한 놈이었다. 

“귀찮아. 그냥 죽으라고.”

이번엔 꽤 깊게 들어갔다. 백자의 머리에서 피가 흘러내리기 시작한다. 일반적인 도축에 슬슬 질려 생쥐는 자리에 서서 묻은 피를 털어냈다. 

더는 시간을 끌기 싫어 잘라내기 좋은 목을 치기로 했다. 어차피 넝마가 되어 움직임이 둔하니, 저 예쁜 머리가 데굴데굴 굴러가기 전에 잡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막 목을 향해 내리치려는 순간,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 검이 아닌, 손이 검기를 잡은 것이다. 

검기를 잡을 수 있다는 터무니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생쥐는 당황했다. 눈앞에 드리워진 붉은 눈동자 혀를 드러내며 입술을 훑던 백자는 웃고 있었다. 

“잡았다. 생쥐.”

으깨버리듯 잡은 검기를 바라보자 백자의 손에서 검붉은 무언가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것은 주인의 손까지 갉아먹고 있었다. 생쥐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부러진 자신의 검을 놓고 본능적으로 생쥐가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히죽거리던 백자가 날렵하게 검을 수직으로 내리쳤다. 

“큭……!”

옆으로 피했지만, 타격이 있다는 건 하나 밖에 없었다. 

검붉은 검기. 듣지도 보지도 못한 황당한 검기가 백자를 둘러싸고 있었다. 

**

시라소의 주위가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문의 손끝이 꿈틀대더니 다시 한 번 하늘을 가르듯 내리쳤다. 땅바닥이 갈라지면서 재주 좋게 피하는 생쥐를 잡아 찢어놓고 있었다. 문과 다를 것 없이 너덜너덜 해진 생쥐는 쥐고 있던 부러진 검을 던져버렸다. 

툭툭 자리를 털더니 조금은 질린다는 표정으로 문을 바라보았다. 

“헷갈리니까 숨기고 그러지 말라고.”

검기를 쓸 수 있으면서도 감췄다고 생각한 것인지 파먹기 시작하는 검붉은 색을 바라보면서 우두커니 서 있었다. 

여유를 부리고 있던 생쥐도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듯 생쥐는 새로운 검을 꺼내들었다. 하지만 그런 생쥐한테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잠깐 이성을 잃고 있었던 문은 자신의 손만을 바라 볼 뿐이었다. 

그런 문을 기다려줄리 없던 생쥐는 검 날을 세워 특유의 붉은 기를 강렬하게 불어넣었다. 검기를 사용할 수 없는 자들은 존재조차 자각하지 못하고 저 불길에 태워질 것이다. 

생쥐가 땅을 박차 그대로 문을 향해 돌진 했다. 문은 그때까지도 그 어떠한 움직임 없이 자신의 손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문의 알 수 없는 행동에 나 역시 절로 인상이 써 졌다. 

지금 이상으로 문이 더러워진다면 내가 직접 나설 생각이었다. 

생쥐의 불길이 문을 삼켜버리려던 순간이었다. 생쥐의 계산대로 목이 날아갔어야 할 곳에 검붉은 기에 삼켜지려는 검 날이 그것을 막았다. 

문의 입 꼬리가 길게 올라갔다. 그는 무엇이 기쁜지 스스로도 감당 할 수 없을 만큼 환희에 차 있었다. 

검붉게 번지던 것이 서서히 생쥐의 불꽃을 잡아먹기 시작했다. 검 날이 서서히 녹아들자 당황한 생쥐가 검을 떼고 뒤로 물러났다. 

명검이라 알려진 생쥐의 검 날이 눈에 띄게 녹아내리고 있었다. 

생쥐는 그런 자신의 검을 두고 항의하려는 듯 소리쳤다. 

“이거 귀한 건데 어쩔 거야!”

문은 그런 생쥐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리고 자각도 하기 전에 폭발적으로 검붉은 기운이 시라소를 덮쳐왔다. 명검 시라소가 아니었다면 그대로 문이 보내는 검기에 휩싸여 형체도 남아 있지 않았을 테지만, 시라소는 지금을 바래 왔다는 듯 비명을 지르듯 공명하고 있었다. 

생쥐는 저런 식으로 검기를 사용하라고 가르친 기억이 없었다. 터무니없는 기에 그대로 짓눌려버릴 것 같은 압박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검붉은 기에 짓눌리고 있는 건 생쥐만 있는 게 아니었다. 

문 또한 서툴게 각성한 검기에 서서히 갉아 먹히고 있었다. 

“저게 대체 다 뭐야…….”

란은 두 눈으로 보고서도 믿을 수 없다는 듯 문을 바라보았다. 질려버린 듯 혀를 차면서도 문의 검기에 압도당한 듯싶었다. 올라오는 소름을 감출 수 없었는지 서늘한 팔목을 잡아 감추고 있었다. 

검기에 미쳐버린 문은 붉은 눈을 뜨고 생쥐를 바라보았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다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 알게 된 생쥐가 식은땀을 흘리며 무뎌진 검에 힘을 주었다. 조금만 잘 못 맞아도 순식간에 팔과 다리가 떨어져 나갈 것이다. 

숨 쉬는 것조차 조심스러운 대련장을 바라보고 있던 나는 한숨을 토해냈다. 더 멍청해진 문을 볼 것도 없이 나는 몸을 돌렸다. 란은 그런 나를 느끼지도 못한 채 침을 꿀떡이며 그들을 지켜보았다. 

밖으로 나가자 술렁임과 함께 함성이 터져 나왔다. 결과는 내가 예상했던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꽤 먼 곳까지 걸어가면서 지금은 발길이 닿지 않아 스산한 곳에 섰다. 그 때, 요란한 바람이 일어나더니 검붉은 기에 침식되고 있는 멍청한 개 한 마리가 하늘에서 내려왔다. 

시간이 잠시 멈춰버린 듯 사뿐히 눈앞에 내려앉은 문은 웃음을 흘리며 혀를 내밀어 자신의 입술을 핥았다. 

그동안 억눌려 있던 짐승의 본능이 깨어난 듯 느릿하게 일어나는 문이 삐딱하게 서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혀를 집어넣고 다시 입을 열었다. 

“라마. 놀자.”

짙게 그을린 붉은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던 문은 눈앞까지 다가와 허리를 숙였다. 시라소의 비명소리가 목 끝까지 닿자 그를 지켜보고 있던 나는 손을 들었다. 

눈썹을 움직이며 으르렁 거리는 문이 흥분에 발톱을 세우려 했지만, 난 그를 나무랄 이유가 전혀 없었다. 뻗은 손이 눈높이에 맞춰 숙여진 정수리를 쓰다듬었다. 내 손길에 움찔거리던 문이 꺼져가던 눈을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놀라고 이해할 수 없다는 그의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나자 침묵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잘했다.”

앞서 시킨 대로 착실하게 검기를 익혔다. 

아직은 서툴고 불안전한 것이지만, 얼마가지 않아 어렵지 않게 다룰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조금 이상한 것이 있었다. 문의 검기는 분명 붉은 색이다. 검붉은 검기는 열기가 강하다곤 하나, 불길처럼 태우는 것 보다 용암처럼 녹이는 것에 가까웠다. 

그것이 불길하긴 했지만, 추궁은 나중으로 미뤘다.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던 문이 쥐고 있던 시라소를 놓았다. 뿜어져 나오는 검기의 영향으로 손바닥의 살갗이 벗겨져 있었다. 아픔을 느낄 수 없다는 듯 문은 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자리에 앉아 무언가에 잔뜩 기대하고 있는 아이처럼 문은 말했다.

“까만 거 봤어?”

“그래.”

내 대답에 어디가 그렇게 기뻤는지 어린아이의 천진한 함박웃음을 하고 있었다. 그제야 멋대로 분출되고 있던 기들이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폭발적으로 쏟아냈기 때문에 한동안 움직이는 것도 버거울 텐데도 문은 잘도 웃어댔다.

“허나.”

쓰다듬던 머리를 향해 손바닥을 세워 강하게 내리쳤다. 

“악!!”

고통에 문이 짧은 비명을 지르며 자신의 머리를 감싸 쥐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 꼴은 뭐야.”

“?”

지금 자신이 얼마나 엉망인지도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어깨 상처에서 콸콸 피를 쏟고 있음에도 정신을 어디에다 두고 있는 것인지 문은 자신의 옷을 훑어보고 있었다. 여러 가지 상처가 눈에 거슬렸다. 손바닥이 어떻게 된지도 모르는 모양인지 온 몸에 묻은 흙과 피를 털어내기 위해 손으로 옷을 문질렀다. 

그 모습을 보다 못한 내가 문의 팔목을 잡아 세웠다. 

그대로 손바닥을 뒤집어 상태를 확인했다. 생각보다 깊지는 않았지만, 엄살이 많은 녀석이 잘도 이 손으로 시라소를 들고 있었다. 내 주머니를 뒤져 깨끗한 손수건을 꺼냈다. 자극을 최소화하기 위해 손바닥에 손수건을 감아 주자 문을 뚫어져라 그것을 바라본다. 

하루에 한 번씩 지능이 떨어지는 모양인지 몇 번이고 말을 해 줘도 다치지 말라는 말을 듣지 않았다. 손바닥을 감아주고 놓아주자 문은 그런 자신의 손이 신기하다는 듯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리고는 갑자기 손을 뻗어 내 손목을 붙잡았다. 

“가지고 싶어.”

“…….”

그대로 내 손 끝에 입을 맞추며 들개에게 허락된 광기가 붉은 눈동자 안에서 번들거렸다. 탐욕과 욕망이 들끓었지만, 무엇보다 순수한 소유욕이었다. 

“모든 걸 내게 줘.”

오로지 나만을 담고 있는 문은 어쩌면 애원하는 듯한 모습으로 나의 모든 것을 달라고 말했다. 무엇이 그를 이토록 재촉하게 하는 것인지 나는 알 수 없다. 과거 문은 자신의 손으로 나를 죽이고 싶어 했다. 문에게 있어 그 당시의 나는 완전한 왕이 아니었다. 그저 언제든 본능을 드러낼 수 있는 야생동물의 목줄을 잡고 있는 들개였을 뿐이다. 

그는 나의 무엇도 원하지 않았고 오직 제 손으로 죽이는 것에만 집착했다. 자신을 제어 할 수 있는 상대가 조금이라도 약해지는 날에는 어김없이 이를 드러냈으니까. 

그래서 착각하고 있었다. 

문은 지금도 나에게 언제든 목줄을 끊고 이를 드러낼 수 있을 것이라고 단정했다. 하지만 그건 나의 오만한 생각이었다. 더욱 단단하게 목을 죄고 있는 문을 바라보면서도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나의 모든 것을 달라는 문의 얼굴에 발을 박아주었다. 

잡혀 있던 손을 뿌리치고 등을 돌리고 몇 걸음을 떼다 멈췄다. 고통에 안면을 감싸고 있던 문은 멈춰선 나를 보고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왔다. 그것을 확인하고 나서 나는 걸음을 옮겼다. 

**

“엔도가……. 죽었다고?”

결과를 전달받은 자는 잠시 허물어지듯 의자에 앉았다. 그는 머리를 감싸 쥐며 평정심을 찾으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숨을 내뱉다 고개를 들었다. 

“시신은?”

“형체조차 없이 갈가리 찢겨…….”

“하…….”

천하의 엔도가 죽었다. 기사로 태어나 귀신으로 살아야 했던 놈의 유일한 유희였던 대전에서 말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떠들던 그녀석이 말이다. 회색빛의 머리카락에 술을 끼얹고도 기쁜 듯 웃었던 모습이 잊히지 않았다. 

더 기가 막힌 건 얼마나 지독한 놈이었는지 엔도의 시신조차 찾을 수 없게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엔도는 검기를 사용하는 몇 안 되는 인재였다. 그런 엔도를 어린아이 제압하듯 죽였다. 죽여도 죽지 않을 것 같은 녀석을 이 세상에서 지워버렸다. 

참담함을 감출 수 없던 사내는 친우의 죽음에 슬픔과 분노를 담아 눈을 떴다. 

“누구지……. 누가 엔도를 죽인거지?”

“백자입니다.”

“백자?”

“이름은 문. 들개 출신 호쿠 소속입니다. 제거 할까요?”

“아니, 그런건 의미 없어.”

“그러면…….”

“같은 걸 빼앗으면 되는 거다.”

자신의 주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대전에 이의를 두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을 정도의 이성을 가지고 있다는 건 다행이었지만, 다른 의미로 위험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주인을 막을 수 있는 그 어떠한 명분도 없었다. 

그 또한 주인을 곧 잘 따랐던 활달한 사내가 죽었다는 것에 믿을 수 없었으니까. 

**

결국 문은 마지막 대전에서도 상대를 쓰러트렸다. 당연한 결과였다. 거기까지 올라서면서 생쥐보다 강한 자는커녕 검기조차 볼 수 있는 자가 없었으니까. 여유롭게 검을 털던 문은 정점에 올랐다는 자각도 없는 모양인지, 들리는 함성에도 반응이 없었다. 

생쥐를 상대하고 다음 대전을 기대했는데, 실망한 모양이었다. 마지막까지도 허무할 만큼 지루해하는 게 얼굴에 모두 드러나 있었지만 아무도 그런 문의 속마음을 알지 못했다. 

정점에 오른 자는 특권이 내려지는데, 그 어떠한 소원이든 한 가지를 들어준다는 것이다. 그것이 왕이 되고 싶다는 것이라도 말이다. 단 한명에게만 허락되는 특권에 모두들 문이 입을 열기만을 기다렸다. 

대전을 지휘하고 있던 자가 문에게 소원을 물었다. 

“소원은 한 가지 뿐이니 신중하……!”

대답도 없이 느닷없이 준 우승자에게 가야 할 푸른 장미를 문이 낚아챘다. 돌려주라는 말을 꺼내기도 전에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문은 오래 걸릴 것도 없이 나를 찾았다. 그대로 땅바닥을 박차고 내 앞까지 뛰어올라온 문 덕분에 주위의 모든 인간들의 시선이 내게 머물렀다. 

비위가 상해 아무렇지 않게 벗어나려 했지만, 문은 내 팔목을 잡았다. 그리고 들고 있던 푸른 장미를 내밀었다. 

푸른빛이 영롱했던 장미는 문이 흘러보는 검은 검기에 의해 검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나를 바라보고 있던 문은 옅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원해.”

나의 모든 걸 가져야 한다는 확답을 원하고 있었다. 

문의 손에 든 검붉은 장미가 이제는 완전한 칠흑과도 같은 흑장미가 되어버린 그것을 바라보았다. 

모두가 숨을 죽이고 이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절로 나오는 한숨을 막을 길이 없던 나는 손을 들어 문이 내밀고 있는 장미를 받았다. 내 앞에 있던 문을 바라보았다. 

그는 웃고 있었다. 

더 없이 기쁘다는 듯. 

확실히 문은 가지고 있어서는 안 될 기를 가지고 있었다.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검은 빛은 나의 영향을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검기라는 것이 성질과 다른 것을 익힐 수 있는 것이었나. 

과거의 나였다면, 불가능 하다 생각했다.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사람마다 특성이라는 것이 있고 그 특성에 맞춰 검기가 발현된다. 이건 처음부터 정해진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 그런 타고난 성질을 바꾼다는 건 애초부터 말이 안되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그런 말 되지 않는 일은 일어나고 말았다. 문을 둘러싸고 있는 검붉은 검기가 그것을 의미했다. 문의 성질은 열감이 높은 속성으로 그 특성은 불과 같았다. 

지금도 그 속성을 유지는 하고 있었지만, 과거에는 광활하게 불타는 불길이었다면 지금은 침묵하며 안으로 파고들어 녹여버린다. 

어느 쪽이라도 쉽게 볼 수 없지만, 지금의 문은 과거보다 위험했다. 두 개의 검기가 부딪치기라도 한다면 문은 자신의 검기에 먹혀버릴 수도 있다. 

검붉은 검기는 마치 과거의 용병 왕이 될 수 없는 문에게 보상이라도 되는 듯 했다. 

그날, 내 손에 쥐어준 검은 장미는 시들지 않았다. 무투대회에서 우승하고 보름이 지났음에도 말이다. 물 한 방울 주지 않고 병에 꽂아 넣었지만, 처음 봤을 때와 다를 것 없었다. 

문은 과거와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 듯하다. 불길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지만, 나 역시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건 사실이다. 

나는 용병에 입단해 큰 부상을 입고 한스덴 일가를 만난다. 그 인연으로 기사단에 들어가 드론이 된다. 그 당시 나의 나이 15살. 

과거였다면, 13살인 지금 용병이 되어 큰 부상을 입었던 시기이다. 그 당시 부상을 입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지금보다 검술 숙련도가 떨어지긴 해도 성인 용병 다섯 이상의 전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내가 쓴 패배를 맛볼 수밖에 없었던 원인 중 하나가 병 이었다.

“콜록…….”

기침이 새어나왔다. 

나는 그 시기가 왔음을 짐작한다. 당시 용병 생활이 순탄치만은 않았기에 자신이 병에 걸릴 수밖에 없다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때의 상황과는 다른 지금도 같은 증세가 보였다. 

원인을 알 수 없는 고열과 기침. 

여기서 더 악화되면 나중엔 토기를 하고 쓰러져 숨을 쉬는 게 괴로워 질 만큼 앓아버린다. 어릴 때부터 가지고 있던 천식으로, 들개였던 시절에도 앓은 적 있는 병이다. 

그래도 예전보다 처음부터 강도가 심한 것은 아니라는 것에 희망을 가져 볼 뿐이었다. 

“콜록.”

내 반복적인 기침 소리에 문이 다가왔다. 

“?”

병이라는 걸 모르고 살았을 아이였을 테니, 내 몸 상태를 이해하진 못해도 예민하게 반응했다. 슬슬 열도 들끓기 시작하면 두 발로 서 있는 게 고작일 것이다. 

문은 앞으로 다가와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손을 들어 내 이마를 짚으려 했다. 하지만 닿는 게 싫어 그 손을 쳐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푹푹 찐 문어 같아.”

“문어…….”

빨갛게 익어서 나온 문어가 생각났다. 얼마 전 상단을 통해 란이 들여왔다던 문어를 맛있게 먹더니, 문은 나를 두고 비유하고 있었다. 

찬 물이라도 마셔야 될 것 같아 탁자에 있는 주전자에 손을 뻗었다. 눈앞이 조금 흐린 것 같더니 방향을 잘못 잡아 손잡이를 놓쳤지만, 어느새 창백한 손이 엎어지려는 주전자를 잡았다. 

기척을 감지하는 것 마저 형편없어 졌다는 걸 느끼고 위기감이 들었다.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아 문에게 나가라고 명령하려는 순간, 주전자를 들어 물을 입안에 털어 넣던 문이 내 턱을 잡아 올려 입을 맞췄다. 

입에서 목구멍 안으로 물이 들어왔고 손을 들어 문의 얼굴을 밀어냈지만, 그 팔목마저 잡혀 버렸다. 

하는 수 없이 발을 들어 문의 정강이를 향해 강하게 차버렸다. 고통에 움찔하던 놈이 떨어져 나갔지만 결국 물은 모두 목구멍 안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흘러내리는 물을 닦아내고 문을 노려보았다. 

“더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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