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13/35)

난 손을 내리고 문에게 다가갔다. 때릴 줄 알았는지 움찔 거리며 고개를 뒤로 빼는 문의 머리카락을 잡아 앞으로 당겼다.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하고 손을 들어 문의 이마를 짚어보았다. 내 병은 이렇게 불시에 찾아왔지만, 다행이 전염은 되지 않았었다. 곁에 있었던 가나도 걸리지 않았던 것이지만, 당시에 곁에만 있던 가나와 지금 나와 입을 맞춰버린 문의 사정은 달랐다. 

그래서 혹시나 하고 이마를 짚어보았지만, 다행이 열은 전혀 없는 것 같았다. 바로 증세가 나타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조금은 안심하고 문의 머리카락을 놓아 주었다. 

“.....”

손을 놓자 문은 내 손목을 붙잡았다. 그리고 나를 바라보았다. 뚫어져라 나를 향하는 붉은 눈동자를 나는 읽을 수 없었다. 

“피곤하니, 오늘은 나가라.”

“아파?”

“......”

“아프냐고.”

“그래, 그러니까..”

나가. 라고 말하려고 하는데, 문이 갑자기 내 몸을 안아 올렸다. 이게 무슨 짓인가 하고 어깨를 잡아 밀어내려 했지만, 문은 오히려 손을 들어 내 뒤통수를 짓눌렀다. 아프다는 말에 어째서 이렇게 반응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두 발로 서 있는 것 보단 나았지만, 이렇게 무방비한 상태는 원하지 않았다. 

“물 더 줘?”

“…….”

“아프면 뭘 해야 해?”

“내려놔”

“싫어. 그러니까 가르쳐줘. 아니, 그냥 내가 대신 아프면 좋겠는데.”

나를 고쳐 안던 문이 내 목덜미에 코를 박았다. 목덜미 사이로 들어오는 숨에 놀라 나도 모르게 몸이 경직되었다. 여전히 잔기침이 새어나왔고 입술이 타들어 가는 것처럼 메마르기 시작했다. 이대로 열이 계속 오른다면 그나마 가지고 있던 정신도 놓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뜨거워……. 이게 살아 있는 거구나.”

“덥다.”

문이 웃기 시작했다. 갑자기 내 옆구리에 손을 끼워 넣더니 허공에 나를 띄워 바라보았다. 이제는 얼굴조차 잘 보이지 않는다. 이리저리 몸이 옮겨지는 탓인지 현기증까지 느껴졌다. 그만하라고 발길질을 하려해도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내 꼴은 문의 손에 잡혀 바동바동 대는 것 밖에 보이질 않을 것이다. 

나를 바라보고 있던 문이 다시 품으로 데려와 끌어안았다. 이번엔 숨이 막혔다. 도저히 내버려 둘 수 없어 손을 들어 문의 볼을 잡아 당겼다. 눈을 번뜩이고 노려보자 흐려졌던 시야가 잠시나마 선명하게 변했다. 

내가 화가 났음을 그제야 알아차린 문은 조심스럽게 나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 순간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라마, 할 이야기가…….”

뭔가가 성큼성큼 내 앞으로 다가온다. 겨우 닿았던 발이 다시 한 번 허공에 띄워 졌다. 문이 다시 나를 안은 것이다. 

“상태가 왜 그래? 어디 아픈 건가?”

문에게 안겨 있는 나에게 손이 뻗는 게 느껴진다. 목소리로 그가 란이라는 걸 알았지만, 문은 내가 란을 볼 수 없게 자신의 어깨에 내 머리를 짓눌렀다. 

“만지면 죽여 버릴 거야.”

낮게 경고하는 듯한 문의 목소리가 들린다. 얼굴을 확인 하지 않아도 그가 무슨표정을 짓고 있는지 상상이 갔다. 난 하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문.”

“…….”

“하아……. 문…….”

신음하듯 부르자 문의 몸이 움찔했다. 하지만 곧 나를 붙잡는 손에 힘이 들어가고 빠득거리는 이가 갈리는 소리도 함께 들렸다.

“싫어. 싫다고.”

“조금은 괴롭구나.”

그제야 나를 짓누르던 손에서 힘이 풀려난다. 난 상체를 들어 고개를 돌렸다. 문의 손에서 벗어나지 않고 란을 바라보았다. 

“할 말이란 게 뭐지.”

여기까지 온 이유가 있음에도 말을 꺼내지 않고 바라만 보고 있자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허나, 란은 대답을 하지 않고 시선을 다른 곳에 머무르더니 좀 더 앞으로 다가왔다. 경계가 심한 문이 이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난 그런 문의 눈을 손으로 가렸다. 

“진정해라.”

이를 드러냈던 문이 입을 다물었다. 난 문의 눈을 가린 채로 다시 란을 바라보았다. 더는 다가오지 말라고 고개를 젓자 걸음은 멈춘 상태다. 병에 걸린 나보다 예민한 문은 약간의 기척에도 지나치게 반응했다. 

“눈에 띄어도 너무 띄었어.”

“움직인 모양이군.”

“일전에 내가 이곳에 오기 전에 말했었지. 나는 방패가 될 수 없다고.”

“그럼 검이 되면 되겠군.”

“…….”

“요령껏 상대해봐”

젠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무투대회에서 우승한 문을 두고 입질을 시작한 모양이다. 문의 검술을 봤다면 쉽게 길들일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걸 알 정도로는 충분하다. 움직인다고 해도 서두를 필요가 없으니 지금은 문을 탐색하는 정도일 것이다. 용병이었다면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호쿠 소속에 있는 문은 싫다고 해도 왕궁에 묶인 몸이니까. 물론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표면상 이야기지만 말이다. 

란은 한 번 가면을 들킨바 있다. 때문에 젠도 그를 주시하고 있다. 섣불리 움직이는 짓은 하지 않을 것이긴 하지만, 지금 사정을 걱정해야 하는 건 문이 아닌, 란이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정체를 들키면서 란은 검과 방패를 모두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란은 문을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던 탓에 그것을 무시하려고 했지만, 속아줄 정도로 내가 여유로운 것도 아니었다. 

결국 두 손을 든 란이 귀찮다는 듯 곁을 지키고 있던 자를 불러 몇 가지 지시를 한 뒤 물렸다. 할 이야기가 모두 끝났음에도 란은 물러나지 않고 나를 다시 바라보았다. 

“언제부터 그런 상태였던 거지? 치료가 우선이다. 이쪽으로 와.”

란이 내 앞으로 손을 뻗었다. 저건 지금 나를 안겠으니 자신에게 넘어오라는 뜻이었다. 문은 눈을 가리고 있어 그 모습을 보지 못했지만, 목소리만으로 충분히 화가 났는지 진정됐던 살기를 내뿜기 시작했다. 

“시중을 들 놈들은 많다. 너는 네가 할 일이나 해.”

“그런 짐승 품에서 대체 무슨 치료를 하겠다는 거야? 백자 너도 주인을 잃기 싫으면 당장 넘겨라.”

문은 쓸데없이 검기를 낭비하면서 내 손에 눈이 가려졌음에도 불구하고 눈을 번뜩이고 있었다.

“한 발자국만 더 와. 그 대가리 터트려 줄 테니까.”

이미 문의 머릿속에서 란은 갈가리 찢겨 형체도 남아나질 않았을 것이다. 란도 그런 문의 살기를 충분히 감지하고 있었지만, 그는 곁을 지키는 자들이 검을 들이대고 물러나라고 해도 말을 듣지 않았다. 

도저히 보고 있잖니 비위가 상해 난 문의 눈을 가리고 있던 손으로 그의 귀를 잡아 당겼다. 

“아아아!!”

귀를 잡아당기자 비명을 내지르며 나를 바라본 문의 얼굴에 주먹을 박아 주었고 그대로 손목을 발로 차 품에서 내려와 옷을 정리했다. 고통이 희석되기도 전에 나를 놓친 문이 다시금 내게 손을 뻗으려 했다. 

“멈춰.”

낮게 읊조리자, 나를 향해 뻗은 문의 손이 움직이질 못했다. 

지지리도 말 안 듣는 똥개를 보지도 않고 란을 노려보았다. 

“너도 나가.”

“콜록.”

기침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머리에 통증까지 느껴졌다. 허공에서 손이 멈춘 문이 우물쭈물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고 란도 나갈 생각을 하지 않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더는 상대하기 귀찮아 뒤로 도는 순간 가슴에 통증이 느껴졌다. 순간 숨이 쉬어지지 않으면서 무릎이 접히자 놀란 문이 내게 손을 뻗어 잡았다. 

“하아…….”

머리가 울리기 시작한다. 

“라마! 젠장, 독이라도 중독 된 건가?!”

특정한 이유 없이 찾아온 병은 독극물에 대한 중독이라는 의심까지 품게 했지만, 란의 예상은 틀린 것이었다. 일일이 짚어가며 지적해줄 힘이 없어 막히는 숨이라도 진정해 보려고 했지만, 결국 안에 있는 위액이 한꺼번에 목구멍을 타고 쏟아졌다. 

더러움이 묻을까 문을 밀어냈지만, 내 몸을 붙잡고 있는 문은 나를 바라보았다. 무어라 말 한 마디 못하고 토를 하고 있는 나를 안더니 뒤로 물러났다. 앞으로는 란이 급히 달려왔다. 

“이 멍청한!! 지금 그 상태가 안보여?! 라마는 당장 의원한테 데려가야 한다!”

문은 말없이 웃으며 시라소를 꺼내 허공을 가르듯 휘저었다. 그는 입술을 핥으며 먹잇감을 노리는 노련한 맹수처럼 눈을 번뜩인다. 하지만 그 모습이 마냥 위태로울 수밖에 없었던 것은 굶주림에 사냥이 아닌, 무언가를 지키려는 몸부림이었기 때문이다.

눈앞이 바람과 함께 베어지면서 란이 다가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문의 몸이 경직되어 있었다. 나도 몸이 늘어지면서 당장이라도 정신을 놓을 것 같아도 그건 알 수 있었다. 나를 안은 문은 바들바들 떨며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두려움조차 몰랐던 문을 기억하고 있는 나는 죄책감을 느끼며 늘어지는 손을 들어 문의 옷깃을 잡았다. 이대로 내가 정신을 잃는다면 아무도 문을 제어할 수 없기 때문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때와 장소가 맞지 않는 곳에서는 폭주만은 막아야 했기에 떨고 있는 문을 잡았지만, 붉은 눈동자를 내린 문은 나를 더욱 깊게 끌어안을 뿐 내 의중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마음 편히 아프지도 못하는 이 상황이 낯설지 않으면서도 짜증났다. 

란의 등 뒤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문만을 경계하고 있던 란과 그 외의 것들은 하나같이 놀라 뒤로 물러나 그를 바라보았다. 

문 역시 우두커니 서 있는 그림자를 바라보고 잔뜩 경계하는 듯 했지만, 곧 힘을 주고 있던 손에 여유가 생겼다. 나 역시 들어오는 이를 확인하고 그제야 눈을 감을 수 있었다. 

**

“넌 에덴의…….”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에덴의 괴물이었다. 란은 그를 알아보고 일제히 괴물을 향해 검을 향하는 이들을 저지했다. 여전히 거대하고 위협적인 덩치였지만, 시선을 내리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아담한 크기의 은쟁반이 들려 있었다. 

은쟁반 위에는 맑은 물과 천이 있었는데, 괴물은 무어라 설명도 없이 문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거대한 덩치와 어울리지 않게 발소리도 거의 나지 않을 정도로 총총총 걸어가는데, 경계를 하고 이를 드러낼 줄 알았던 문은 어느새 느슨해져 괴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전혀 보여주려 하지 않았던 라마를 품을 벌려 보여주었다.

마치 라마가 자신의 것이라도 된 듯 행동하는 문의 모습이 란이 보기엔 거슬렸다. 

괴물은 능숙하게 침대로 걸어가 탁자위에 은쟁반을 내려놓고 이불을 벌렸다. 그리곤 문에게 손짓을 하자 문은 엉거주춤 일어나 란을 경계하며 뒤로 걸어가 라마를 침대에 눕혔다. 

등을 돌리고 있어도 시선은 이곳에 있다는 듯 종종 시선을 란에게 돌리는 데, 란은 그 모습을 볼 때마다 악이라도 쓰고 싶을 지경이었다. 라마는 당장 궁에 있는 의원의 치료를 받아야 했다. 열을 내고 기침을 하는 것으로 보아 단순한 감기일줄 알았는데, 토를 하지 않았는가. 더욱이 통증이 느껴지는 듯 가슴을 움켜쥐기도 했다. 

만에 하나의 가정에 음독과 관련이 있다면 지금 붙어 있는 저 괴물과 짐승의 목을 베어서라도 라마만은 살려야 했다. 

괴물은 은쟁반 물에 수건을 헹군 뒤 물을 짜내고 곱게 접어 라마의 머리위에 올려 주었다. 문은 그것을 보고 배우기라도 하겠다는 듯 유심히 바라보더니 곧 잘 따라해 어느새 라마의 머리엔 두 개의 수건이 차곡차곡 놓여졌다. 

“크라운은 저희가 모시겠습니다.”

어느새 나타난 모르페는 란에게 돌아갈 것을 부탁했다. 란은 고개를 끄덕이고 문 밖으로 나왔다. 의술에 지식이 있는 모르페라면 안심이 되긴 하지만 어쩐지 쫓겨났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모르페는 란이 나가자 천천히 크라운을 향해 걸어왔다. 자신을 주시하는 문을 바라보며 걸음을 멈추다 팔짱을 낀 채로 바라보았다.

“상태가 어떤지 봐야한다. 크라운께서 이대로 눈을 뜨지 못하는 건 나도 바라지 않으니까.”

탐탁지 않다는 표정이었지만, 모르페는 멈췄던 걸음을 옮겼다. 문은 그런 모르페에게 눈을 떼지 않았지만, 이를 드러내는 일은 하지 않았다. 그 나름대로 자제를 하고 있다는 뜻이었는데, 그동안 문을 봐왔던 모르페는 이렇게 되기까지의 크라운의 고생이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문을 상대하고 있으면 아프지 않을 수 없겠다고 생각하면서 안색을 살피는데, 상태는 생각보다 심하게 진행되진 않았다. 눈에 띄는 증세는 열이 들끓는 것과 반대로 식은땀을 흘리고 있다. 정신을 잃은 와중에도 기침이 나오고 있었고 이미 한 차례 토까지 한 상태다.

“예전에 크라운께서 천식을 앓았거나 발작을 일으킨 적이 있었나?”

“응.”

문은 기억하고 있었다. 뼈 밖에 남은 것이 없었던 여자를 잠재우고 밖으로 나왔을 때, 작은 왕이 바닥에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었다. 

고깃덩어리처럼 작은 왕은 조금만 방심을 하면 기침을 했고, 심하면 피가 섞인 토를 한 적도 있었다. 보던의 들개 소굴에선 조금 나아진 듯 했지만, 종종 끓는 열에 못 이겨 사경을 헤매는 일도 많았다. 

필시 죽는다 생각해도 숨은 쉬고 있었다. 

약한 들개를 바라보고 있을 때면 이유를 알 수 없는 쾌락이 올라왔다. 살심과는 다른 감정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죽이고 싶다는 욕구로 착각하고 밟아 버릴까 생각했다. 발로 짓밟아 터트려 죽여 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검은 머리카락과 검은 눈동자. 자신과 정 반대의 색이었지만 굉장히 깨끗했다.

그 깨끗한 살덩이를 찢어버리려는 순간, 고깃덩어리 왕은 울지도 않고 기침을 뱉었다. 이윽고 몸을 부르르 떨기 시작하더니 더 이상 움직이질 않았다. 

그날을 회상하며 문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과 비슷했다.

“아무래도 면역력이 약해져서, 재발한 것 같다. 몸이 차가워지지 않았으니, 걱정할 정도는 아니야. 약을 만들어 올 테니까 크라운께서 신경 쓰지 않도록 행동에 주의해. 특히 너.”

모르페는 손가락을 들어 문을 가리켰다. 

문은 자신이 주목 받았다는 것에 불쾌한 듯 표정을 일그러트렸지만, 모르페는 물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약을 가져 올 동안, 아까처럼 사고치지 말고 가만히 있어.”

모르페는 그렇게 약을 만들 재료를 구해야 했기에 밖으로 나갔다. 문은 다행이 큰 소리 한 번 내지 않고 가만히 앉아 크라운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마 자신이 말한 것 대부분을 못 알아들었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문득, 모르페는 복도를 걷다 멈췄다. 과거 크라운이 천식에 의한 발작을 일으킨 적이 있다고 문이 답했다. 천식은 치료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면역력이 없는 어린아이일 경우는 조금이라도 치료가 늦어지면 사망해버린다. 의술에 전혀 지식이 없는 문이 크라운을 치료했을 리는 없다. 

지금까지 발작이 없었다는 건 운이 좋았거나 치료를 받았다는 것인데, 크라운은 보던의 들개로 태어나 자랐다고 했다. 보던에는 의원이 없다. 황폐한 땅과 버려진 들개들이 전부인 그곳에서 의료적 치료를 받기란, 불가능에 가까웠을 것이다. 

그저 기가 막히게 운이 좋았다는 것 밖에 설명이 되지 않았다. 모르페는 멈췄던 걸음을 옮겼다. 과거는 지금 중요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

정신을 놓고 계속 잠만 잘 줄 알았던 라마가 의외로 빨리 눈을 떴다. 모르페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문은 어느새 네 번째 물수건을 접어 라마의 머리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그리고 라마가 깨어난 것을 알고 그제야 입을 벌려 웃었다. 

“…….”

라마는 눈동자를 몇 번 굴리더니, 자리에서 일어나는 듯 상체에 힘을 주었다. 그가 몸을 일으킬 수 있도록 은아가 손을 뻗어 부축했고 라마는 숨을 고른 채 등을 기대앉았다. 간간히 나오는 기침을 뒤로 하고 머리위에서 두둑하게 떨어지는 물수건을 바라보다 은아와 문을 바라보았다. 

“붉은 열매가 먹고 싶구나.”

“열매? 알았어! 따 가지고 올게!”

“어떤 건지는 알고 말하는 거냐.”

문은 벌떡 일어났다 다시 주저앉았다. 모른다는 거다. 라마는 조금 웃더니 고개를 돌려 은아를 바라보았다. 

“가서 함께 따 가지고 오너라.”

은아는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붉은 열매가 있는 곳은 이곳과 그리 멀지 않았기에 은아는 자리에 일어나 문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뭐라도 하고 싶었는지 문은 헐레벌떡 나갔지만 아마 5분도 되지 않아 한 아름 붉은 열매를 안고 돌아올 것이었다.

그 정도로도 충분했다. 

“언제까지 쥐새끼처럼 숨어 있을 거지.”

문과 은아가 나가고 적막한 가운데, 라마가 입을 열자 빛이 닿지 않은 곳에서 검은 인영이 나타났다.

***

문은 한 아름 붉은 열매를 안고 라마가 있는 곳 까지 달려왔다. 그가 은아와 함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지만, 라마는 그곳에 없었다. 들고 있던 열매가 한꺼번에 바닥에 떨어졌고 문은 그곳으로 달려가 라마를 찾았다. 

침대 밑까지 구석구석 찾았지만, 아무도 없는 방은 창문만 열려 있을 뿐 그 어디에도 작은 왕은 없었다. 

비슷한 일을 기억하고 있는 문은 눈동자를 굴리더니 열려진 창을 바라보고 시라소를 들었다. 문의 잠잠하던 입 꼬리가 깊게 올라갔다. 그를 둘러싼 검붉은 기운이 어지럽게 휘감겼고 흐릿하게 남아 있는 왕의 냄새를 쫓아 창밖으로 뛰어 내렸다. 

백자는 우승하자마자 한 소년에게 달려갔다. 들고 있는 것은 분명 푸른 장미였지만, 손을 내밀쯤에는 검게 물들어 있었다. 

단숨에 정상까지 올라간 그를 보면서 경이로움도 느꼈지만, 단순한 복수가 우선이었다. 무투 대회 특성상 살인을 불문율에 부친다 해도 죽일 필요는 없었다. 죽인다 하더라도 사지를 갈기갈기 찢어놓을 필요도 없었다. 

허나, 백자는 단 하나 뿐인 친우를 죽인 것도 모자라 갈기갈기 찢어 놓았다. 그 사실이 참혹할 만큼 슬퍼서 같은 모습으로 백자를 죽이고 싶었지만, 그는 참았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그의 소중한 것을 같은 방법으로 빼앗는 것만이 이 참담함을 달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을 알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이름조차 알 길 없는 플라이 소속의 검은 소년. 백자와 마찬가지로 보던 출신의 들개로 꽤 오래전부터 알아왔던 사이라 보고 받았다. 

애완동물쯤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전달받았지만, 그건 단순히 애완동물을 상대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연인을 대하듯, 심장을 대하듯 조심스럽지만 그 마음은 강렬했다. 가족이 아닐까 생각해 봤지만, 그건 아니었다. 단순히 동료애나 정이 들었다고 보기엔 둘의 관계를 표현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것만은 분명했다. 

백자에게 있어 검은 소년은 유일한 존재이다. 

1왕자가 백자를 지켜보고 있다는 것은 부담스러웠지만, 백치 왕자의 플라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무방비하게 누워있는 검은 소년을 백자가 보는 그 자리에서 조각을 내버려도 됐지만, 예기치 못한 것들이 한꺼번에 일어났다. 

백치 왕자라고 믿고 있었던 3왕자의 태도가 전혀 다른 것이다. 그의 언변은 그동안 보았던 백치왕자의 어떤 것도 없었다. 더 그가 경악한 것은 신관 소속으로 현자에 가까운 모르페가 직접 방문한 것이다. 

제국 역사상 100년에 한 번 꼴로 나타난다는 현자는 왕 조차도 경어를 사용해야 한다. 모르페는 그 차기 현자로써 부족함이 없는 자이다. 신관에 있어야 할 그가 직접 걸음을 한 것이 오직 검은 소년을 위한 것이라는 것에 그는 경악했다. 

그는 고민했다. 당장 죽이는 게 맞는 것인지 그들을 파고들어 봐야 할 것인지. 무엇이 옳을까 저울질 하고 있었다.

하지만 곧 그 저울질은 어느 한 쪽으로 강하게 기울었다. 검은 소년이 자신의 존재를 알아차린 것이다. 기척을 숨기는 것은 짐승을 속이는 것도 가능한 자신이 고작해야 13살 정도인 어린 아이에게 말이다. 

그러나 저울질 하고 있었던 것은 그 뿐만은 아니었다. 

**

기척을 숨기는 것이 익숙한 자였다. 숨소리마저 공기와 동화되어 살아 있다는 것 자체를 없애는 놈의 은신 술은 닉스를 능가할 정도였다. 기사긴 하나, 그림자처럼 움직여야 할 놈들 중 은신하는 따라올 자가 없었다. 이놈한테 유일하게 볼만한 것이었다. 덕분에 문과 은아를 감쪽같이 속여 넘길 수 있었으니까. 

나는 아마도 모든 것을 의심하고 있을 녀석을 바라보고 고민했다. 은닉을 위해서는 저놈의 목을 베고 뒤처리는 란에게 맡기면 되는 것이다. 간단한 고민에 쉬운 정답이었지만, 조금 걸리는 것이 있었다. 

그가 한스덴 웨이의 측근이라는 것이다. 기사의 신분으로 왕궁소속이기 전에 한스덴 웨이의 외동 딸 레이첼의 약혼자이기도 하다. 

아직은 레이첼이 어려 약혼식조차 이뤄지지 않았지만, 곧 그렇게 될 것이다. 레이첼의 수줍게 발그레 했던 두 뺨을 떠올리면서 손에 힘을 풀었다. 

“3왕자와 무슨 관계냐.”

“전속 플라이다.”

“지금 그걸 대답이라고 하는 건가.”

날카롭게 날이 선 눈동자였다. 그의 감정이 어떤 것인지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인간적 감정이 모두 메말라버린 들개에게도 망설임이라는 것이 생겼다. 

“더 들을 것도 없겠군.”

그 역시 뭔가를 망설이는가 싶더니, 다가오는 기척을 느끼고 나에게 손을 뻗었다. 거칠게 끌어와 고의로 흔적을 남기면서 창밖으로 뛰어내렸다. 

짐짝처럼 나를 들곤 말에 올라탔다. 내가 비록 플라이 소속이긴 하나 왕궁에 종속된 것으로 허락이 떨어지지 않는 이상 궁 밖에 나가는 건 금지되어 있었다. 그것을 잘 알고 있을 그였지만, 어느새 나는 궁과는 꽤 멀리까지 떨어졌다. 

아무리 백치라고 알려진 왕족의 플라이라고는 하지만, 이건 도가 지나친 행동이었다. 여차해서 그가 거슬린 자들은 이것을 빌미로 목을 칠 수도 있다. 

나만큼 적이 많았던 것을 기억한다. 하지만 그보다 더 걸리는 게 있었다. 그건 문이었다. 검기를 사용해 본지 얼마 되지 않는 아이다. 거기에 문의 검기는 기존에 자신의 성질에서 변질된 본 적도 없는 것이었다. 

몸 안에 저랑 비슷한 놈들이 이성을 잃고 날뛰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때문에 각인이 남아 있다고 해도 이성을 잃기는 쉬울 것이다. 제어가 되지 않으면 내 목소리를 듣고 싶어도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입을 열었다. 

“날 놓고 도망가라.”

마지막 경고였다. 

지금은 무능한 란처럼 폭주를 한 문을 상대할 수 없다. 나 역시 문의 손에 갈가리 찢겨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저 그런 최악의 상황까지는 막아야 했다. 

그는 검대로 내 머리를 강타했다. 진하게 울리는 통증과 함께 눈앞이 붉게 변했다. 내 머리에서 뭔가가 흘러내렸고 난 고개를 들 힘마저 잃어버릴 것 같았다. 

그렇잖아도 고열과 기침으로 몸이 말이 들지 않아 고역스러웠는데, 상처가 생기고 난 뒤부터 이미 오늘 안에 회복될 거라는 기대를 버려야 했다. 

“입 닥쳐. 지금 죽여 버리기 전에.”

나를 내려다보는 눈에 독기가 서려 있었다. 붉게 변해 악귀로 가득했고 금방이라도 나를 말대로 죽일 수 있다는 듯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가 도착한 곳은 야누스 절벽으로 처음과 끝으로 알려진 곳이었다. 밑에는 물이 흐르고 있지만, 급류기 때문에 한 번 휩쓸리면 살아남을 수 없다. 

나는 그가 어째서 이렇게까지 분노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일차원적인 복수를 생각할 만큼 어리석은 자는 아니었다. 때가 아님에도 섣불리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뒤를 봐 주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왕족 중에서도 영향력이 있는 놈이었겠지. 짐승을 길들이는 데 가장 유용한 방법은 지속적인 폭력이 동반하는 각인이다. 이번을 빌미로 이성을 잃고 날뛰는 문을 길들이기 원하는 놈이 친우를 잃어 실의에 빠진 그를 움직이게 했을 것이다. 

그것을 생각하고 진득한 화기를 짓누르고 힘들었다. 내게서 문을 빼앗아 가려는 놈의 그림자가 그려지자 살의를 감출 수 없었다. 

“너는 착각하고 있다.”

결국 이 녀석도 그에 의해 이용당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날, 결정적으로 시라소는 공명하지 않았다. 이질적인 붉은 기운이 남발하고 용솟음쳤던 것은 문이 아니었다. 

“그래, 착각하고 있었다. 설마 그 녀석이 그렇게 처참하게 죽을 일은 없다고 말이야.”

말에서 내려온 그는 침통함을 감출 수 없다는 얼굴로 멱살을 잡은 채로 들었다. 아무렇지 않게 나를 든 채로 날이 선 검을 뽑아 허공을 내리 쳤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검기조차 담지 못하는 평범한 검이었지만, 충분히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곳에는 나와 녀석 말고도 몇 사람이 더 있었다. 하나 같이 노련하게 움직이는 것으로 보아 충분히 훈련된 용병들로 보였다. 

“왔군.”

멀리 있던 용병단이 기척을 눈치 채고 검을 들었다. 긴장을 늦추지 않고 보이지 않는 기를 쫓았다. 

“가엾지만, 저놈이 보는 앞에서 죽어줘야겠다.”

나를 들고 있던 녀석이 내 머리카락을 잡아 들어올렸다. 억지로 고개가 올라가자 상처를 건드린 모양인지 이제는 이마를 타고 핏물이 흐르는 게 느껴졌다. 

그 순간이었다. 눈앞에 있던 두 명의 용병의 목이 순간의 기척과 함께 떨어져 나갔다. 바닥을 뒹구는 두 개의 머리와 힘없이 쓰러지는 몸뚱이.

가볍게 땅바닥에 내려앉은 이색적인 달빛이 거미줄처럼 휘날렸다. 붉은 눈을 드러내자 천천히 상체를 든 문이 서 있었다. 삐딱하게 서서 기본자세는 모두 무시하고 언제 빼앗았는지 용병이 들고 있었던 대검을 손에 쥐었다. 

“내가 말했잖아.”

문은 입을 열었지만, 눈은 들고 있는 용병의 대검을 바라보고 있었다. 

“구더기는 기어오르기 전에”

이윽고 천천히 걸어와 들고 있던 대검을 바닥에 끌더니, 그대로 어딘가를 향해 집어 던졌다. 내 바로 옆에서 자세를 잡고 있던 용병의 몸뚱이에 대검이 꽂혀 넘어가 바닥에 박혔다. 

“밟아 터트리라고.”

천천히 문의 머리끝부터 올라오는 검붉은 검기. 그것이 문을 온전히 집어 삼키기 전에 막아야 했다. 

고열과 기침으로 숨쉬기가 힘들었지만, 그런 내 몸보다 문이 더 걱정이었다. 문이 내 쪽을 바라보았다. 나를 확인하려는 듯 시력이 그다지 좋지 않는 눈을 굴렸다. 붉은 눈동자가 내 온 몸을 쓸어보고 있었다. 

“왕은……. 가끔 이해할 수 없어.”

문이 중얼거렸다. 무슨 뜻으로 뱉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나를 바라보는 붉은 눈동자가 화가 나 있는 것 같았다. 금방이라도 피를 쏟아낼 것 같은 눈으로 천천히 몸을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런 문을 지켜보고 있던 살아 있는 용병들이 일제히 긴장했다. 

호쿠를 상대로 타격을 받지 않을 것이라 기대한 것은 아니지만, 한 명일 뿐이니 충분히 제압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하나같이 ‘속았다’라고만 생각했다. 다시는 귀족 놈들과 얽히지 않을 것을 맹세하면서 의뢰자를 에워쌌다. 

상황이 그들에게 좋지 않았던 것은 단순히 백자를 죽이라는 의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의뢰자는 의뢰자가 한 소년을 죽이는 과정에 누구도 개입되게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 개입되는 놈이 용병왕을 죽인 백자라는 사실만 못 들었을 뿐이다.

C정도의 레벨로 적당한 선금도 받았지만, 이건 못해도 A이상의 의뢰였다. 

문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흡사 귀신이 달려드는 것 같은 공포마저 느껴졌다. 용병들은 자신의 목이 달아나기 전에 검을 들어 문을 막았다. 일제히 한 사람의 공격을 막기 위해 노련한 용병 4명이 움직였다. 

겨우 막기는 했지만, 성인 4명의 검을 밀어내고 있는 문의 힘은 무시무시했다. 일격에 목이 날아간 것이 환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대로라면 몸통이 분리 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는 수 없이 검을 막고 있는 용병 중 한명이 주머니를 뒤져 뚜껑을 열었다. 

뚜껑을 열자마자 지독한 가스와 함께 뿌연 연기가 올라왔다. 연막을 치기 위해서지만, 이 안에는 소량의 마약도 섞여 있었다. 이 마약은 몸을 마비시키는 성분도 있기 때문에 마약에 익숙해지기 위해 훈련한 용병이 아닌 이상 중독되면 한동안 몸을 움직이는데 제한이 있을 것이다. 

호쿠는 왕궁 기사단과 직속되기 때문에 함부로 죽일 수 없는 신분이다. 그렇다고 털끝하나 다치지 않게 잡아놓을 수는 없으니 손이나 다리 한 두 개쯤은 잘려나가도 어쩔 수 없었다. 

뭔가가 움직였다. 용병을 밀어내는 힘이 줄어 그대로 돌파한 용병의 짧은 비명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살아 있는 용병은 자신의 발밑으로 굴러온 동료의 머리를 보았다. 

연막을 친 것이 도리어 그들을 공포로 몰아넣고 있었다. 다시 한 번 다른 용병이 움직이는 기척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리고 또 다시 짧은 비병과 함께 뭔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눈앞에서 견딜 수 없는 이질감이 느껴졌다.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 문을 유일하게 달려들지 않는 용병이 바라보았다. 문은 연막에도 아무렇지 않는 다는 듯 검을 휘저어 앞을 확인 한 뒤 걸었다. 

서 있는 용병은 보이지 않는 다는 듯 그를 지나쳤다. 자신이 한 발자국이라도 움직였다면, 문은 그대로 기척을 베어버렸을 것이다. 겨우 살아남은 용병은 그것을 확신했다. 문이 눈앞에서 자신을 지나쳤지만, 움직일 수 없었던 이유였다. 

*

문은 머릿속까지 갉아먹고 있는 마약에 불쾌했다. 몸이 잡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고 있지만, 상관하지 않고 연막을 뚫고 나왔다. 

그리고 눈앞에는 자신의 왕이 있었다. 

추하도록 아름다운 붉은 피를 뒤집어쓰고 병든 개가 된 왕이 구더기 손에서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그 모습이 가여웠다. 하필 잡혀도 구더기의 손이라니. 하지만 문은 왕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짜증이 났다. 견딜 수 없는 화였다. 그 이유를 묻기 전에 구더기를 밟아버려야 했기에 시선을 조금 위로 향했다. 

구더기가 왕을 집어 들고 검을 높게 들어 올렸다. 

“…….”

그리고 검은 단 숨에 왕의 어깨를 파고들었다. 거칠게 뽑아낸 검에서 다시 한 번 왕의 피가 섞여 나왔다. 검을 털자 문의 뺨에도 왕의 피가 묻었다. 

문은 그러니까 이해할 수 없었다. 

“정말 구더기가 좋은 건가?”

문은 그대로 시라소를 들어 허공과 땅을 가르듯 내리쳤다. 이번엔 왕의 목을 노리던 구더기의 검을 든 팔이 한 순간에 잘려나갔다. 

비명조차 없이 무릎을 굽힌 구더기에게 다가가 어깨를 관통당해 피를 흘리고 있는 왕을 빼앗아 그 멱살을 잡아 올렸다. 

발은 구더기의 안면을 짓밟고 있었다. 으깨버리듯 힘을 주자 그제야 비명이 흘러나왔다. 

시라소를 한 번 더 휘저었다. 구더기의 한 쪽 다리가 떨어져 나갔다. 이제 구더기는 꿈틀거리는 것이 전부일 것이다. 

문은 그대로 라마를 바라보았다.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라마는 축 늘어진 빨래 같았다. ‘씻겨주면 원래대로 돌아올까?’라고 생각하다 이마까지 끌어당겨 두 눈을 마주쳤다.

“왜 봐줘. 이딴 구더기. 왜.”

라마의 눈이 아래로 향했다. 참담함을 감추지 않는 눈동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문이 손에 힘을 주었다. 라마의 시선이 문을 향했다. 

“날 지금 누구 대신으로 보는 거야.”

라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곧 풀리고 손을 뻗어 문의 머리카락에 손을 얹었다. 

"널 대신할 건 없다."

"……."

"그러니 잃지마라. 난 널 잃는게 두려우니까."

문이 쥐고 있던 시라소에 힘이 풀렸다. 한 손으로 잡고 있는 라마를 두 손으로 끌어안기 위해 시라소를 놓으려던 순간이었다. 

바닥에서 꿈틀거리고 있던 구더기가 힘을 주어 일어났다. 라마의 뒷덜미를 잡아 그대로 문의 손에서 빼앗아 뒤로 던져 버렸다. 그리고 그 뒤는 처음과 끝이라는 야누스 절벽이었다. 

*

문은 시간이 멈춰 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눈앞에서 사라지는 왕을 쫓아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그대로 땅을 걷어차 절벽 밑으로 떨어지자 수직으로 떨어지는 작은 왕이 보였다. 문은 다시 한 번 손을 뻗었다. 그제야 왕을 붙잡은 문은 달아나려는 라마를 품에 껴안아 머리를 감쌌다. 

*

라마를 던져버린 그는 설마 백자가 뛰어들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야누스 절벽에 떨어진 사람치고는 살아 돌아온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백자는 그 어떠한 주저함 없이 던진 직후 바로 뛰어 들었다. 

그는 뒤 늦게 절벽 밑을 바라보았다. 당연하지만 그 어디에도 백자와 소년은 보이지 않았다. 

백자는 강했다. 고용한 상급 용병을 모두 잃고 자신의 팔 다리를 가져갈 만큼. 하지만 그 역시 허무하게 죽었다. 친우의 죽음에 대한 복수는 백자의 죽음만큼이나 허무했다. 뚝뚝 눈물이 떨어졌다. 그런 그의 앞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고개를 들 생각을 하지 않고 있자 그림자의 주인은 몸을 숙여 그의 턱을 들어올렸다. 

“……!”

청빛이 도는 검은 머리카락과 황금 눈동자. 미소 짓고 있는 그는 자신이 알고 있던 백치 왕자 로던프 란 그란스와 같은 얼굴이었다. 

“짜증나 미쳐버리겠군.”

미소를 짓고 있는 얼굴로 턱을 든 손이 그의 목으로 다가왔다. 이윽고 힘을 주어 들어 올리자 숨 쉴 구멍이 막혀버린 그가 신음을 내뱉은 채 허공에 떠올랐다. 잘려나간 팔과 다리에선 피가 흘러내렸다. 바닥을 물들여가는 피 냄새에 짐승들이 곧 달려올 것이다. 그것을 알고 있는 문호가 다가와 그를 말렸다. 

“란! 진정해!”

이놈이 죽는다면 그동안 공들이며 쌓아온 일이 망가질 수 있었다. 젠의 눈에 더 이상 띄어봤자 좋을일 없다는 걸 란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를 집어 삼키려드는 분노는 쉽게 사그러들지 않았다. 

문호가 란의 손목을 잡았다. 그는 한 나라의 왕자가 아닌, 자신의 수장으로써 그를 막고 있었다. 란은 부들부들 떨더니 문호에게 잡고 있던 놈을 집어 던졌다. 문호가 숨을 헐떡이를 그를 안고 란을 바라보았다. 

그는 더 이상 미소 짓지 않았다. 

“라마를 찾아라.”

란은 야누스 절벽 밑을 바라보더니 뒤따라 온 암부에게 명령했다. 클라운이 이미 움직이고 있을 테지만, 수색인원은 많을수록 좋을 것이라 생각했다. 

“시체라도 좋으니까. 찾아내.”

문호는 란의 목소리에 괴로움이 차 있다는 걸 눈치 챘다. 그 역시 자신의 손에 기절한 놈을 당장 죽이고 싶을 정도로 화가 났다. 하지만 이럴 때 일수록 이성을 유지하고 있어야 할 입장인 그는 기절한 놈을 옮기라 명하고 절벽 밑과 물살을 쫓아 문과 라마를 찾아보라 명했다. 

죽었다는 가설은 세우고 싶지 않았지만, 문호는 란의 바람과는 반대로 차라리 시체를 찾지 않았으면 했다. 그렇다면 적어도 어딘가에서 살아 있을 것이란 희망이라도 있을 테니까. 

처음부터 속을 썩이더니, 마지막까지 이렇게 뒤집어 놓고 가는 두 꼬맹이를 생각하던 문호는 참담함에 손으로 눈을 가렸다. 

“죽여 버리겠어.”

“?!”

란은 문호에게 끼우고 있던 붉은 반지를 던졌다. 늘 품에 쥐고 있던 어머니의 유품과 같은 것이었다. 문호는 그제야 ‘죽인다’는 뜻을 알아차렸다. 시기상조인 발언에 놀란 문호가 란에게 말했다. 

“일러! 지금은 아니야! 일단 진정하고 내말 들어.”

“명령이다.”

“란!”

“명령불복종은 사형이다. 문호.”

“차라리 죽여. 눈앞에서 주군이 죽는 꼴을 보는 바에야 주군의 손에 죽는 게 더 낫다.”

란은 문호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살기가 들어있었다. 저런 이성적이지 못한 눈을 가지고 시작한 전쟁은 패전한다. 문호는 란을 죽게 할 수 없었다. 

그는 손을 뻗어 란의 손가락에 붉은 반지를 끼워 주었다. 이로서 명령은 불복종했다. 문호는 자신의 목을 내 놓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란은 자신의 손가락에 끼워진 붉은 반지를 바라보았다. 그는 갑자기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잃는 다는 것에 무뎌져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은 좀……. 힘들어.”

문호는 란을 바라보았다. 그는 조금 안심하고 숨을 내 쉬었다. 

“그 둘은 최선을 다해 찾겠습니다. 그러니, 당신은 뒤를 보지 말고 앞으로만 가십시오.”

문호는 수장인 란을 바라보며 확실히 말했다. 망설이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 둘이 죽었다고 해서 자신들의 오랜 계획까지 무너지게 할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어릴 적부터 정이 많은 탓에 걱정은 들었지만 영리한 분이니 곧 자신의 말을 알아들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란은 자신의 말에 올라타 성으로 돌아가기 위해 말의 고삐를 돌렸다. 

막 가려던 것을 잠시 멈추고 잠깐이지만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다시 앞을 바라본 란은 말을 타고 성으로 돌아갔다. 

*

급류에 휩쓸리면서 문은 라마를 안고 있는 손을 풀지 않았다. 물살이 점점 빨라지면서 수면 위로 잠깐 떠오르면서 눈앞이 폭포임을 알아차렸다.

문은 라마를 바라보았다. 기절을 해 버린 것인지 죽어버린 것인지 체온조차 느낄 수 없는 물속에서 라마는 눈을 뜨지 못하고 있었다. 

조급해진 문은 쥐고 있는 시라소에 힘을 주었다. 거친 급류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시라소를 벽에 박으면서 휩쓸리는 것을 막았다. 명검 시라소가 공명하면서 박힌 상태로 벽을 가르다 멈췄고 간신히 폭포 밑으로 떨어지는 걸 막은 문은 앞을 바라보았다. 

얼핏 눈앞에 옆으로 빠질 수 있는 공간이 보였다. 급류가 거칠긴 해도 정 반대로 휩쓸리지만 않는다면, 충분히 그곳으로 빠져나올 수 있을 것 같았다. 

문의 눈동자가 빠르게 박힌 돌들을 바라보았다. 어디를 어떻게 밟아야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는지 짐작하고 있었다. 지체할 시간이 없었기에, 가능성을 뒤로하고 바로 실행에 옮겼다. 

팔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통증과 붉은 피가 손에서 흘러내렸지만, 라마를 안은 손에 힘을 주었다. 시라소를 놓았다. 거센 물살이 문의 온 몸을 도려내듯 했고 솟아 있는 돌에 의해 몇 번이고 부딪히자 원하는 돌이 있는 곳으로 닿을 수 있었다. 다시 휩쓸리기 전에 눈앞의 박힌 돌을 발로 찼다. 그 반동으로 등 뒤에 있던 공간에 튕겨지듯 빠져나올 수 있었다. 

벽에 부딪혀 등에 충격이 갔지만, 문은 품에 안은 라마부터 바라보았다. 

“하…… 아……. 하……”

조금 지친 듯한 숨을 내 쉬던 문은 라마를 조심히 땅 위에 내려놓고 눈앞까지 다가가 숨을 쉬는 지 확인했다. 숨을 쉬지 않았다. 

얼굴을 바라보았다. 창백하게 질린 것이 곧 죽은 시체 같았다. 

“하…….”

거칠던 숨소리가 어느새 안정을 되찾았다. 문은 라마를 바라보다 그의 고개를 젖혀 코를 잡았다. 그리고 입을 맞추고 숨을 넣어주었다. 입술을 떼고 심장이 뛰는지 귀를 대어 확인했다.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다시 한 번 같은 방법으로 숨을 넣었다. 

심장소리를 확인하기 위해 입술을 떼는 순간 라마는 물을 토해 냈다.

라마의 새하얗게 질린 얼굴에 피가 돌기 시작했다. 하지만 눈을 뜨지 못하고 몇 번 기침을 하고 잠잠해지자 문은 라마의 가슴에 다시 한 번 귀를 댔다. 

이번엔 확실히 뛰고 있었다. 놀란 상태였던 문은 그제야 라마를 껴안고 안심한 듯 자신도 숨을 몰아 내쉬었다. 하지만 곧 기침을 시작하면서 점점 차가워지는 라마를 바라보며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문은 까마득하게 높은 절벽을 바라보았다. 맨 몸으론 힘들 것이라 판단한 문은 다행이 손이 닿는 곳에 박힌 시라소를 뽑아내고 라마를 안았다. 

험하게 사용한 것 치곤 날이 바로 서 있어 벽을 박고 올라가기에 충분했다. 급류에 휩쓸리는 것을 막기 위해 시라소를 이용한 결과 손바닥이 걸레가 되어버렸다. 이 손으론 검을 쥐는 것조차 할 수 없어 하는 수 없이 자신의 옷 중 일부를 찢어 검대를 잡은 손에 휘감았다. 

이렇게 해 놓은 다면 다 올라갈 때까지 검을 놓아 떨어질 일은 없을 것이다. 

문은 시라소를 벽에 박았다. 무식한 힘만으로 박은 시라소를 의지하며 천천히 벽을 기어 올라갔다. 현기증이 날 만큼 힘들고 천을 휘감은 손에선 피가 떨어졌지만, 벽을 기어오르는 걸 멈추지 않았다. 

천천히 신중하게 올라가던 문은 결국 정상에 닿았고 자신이 올라온 곳은 떨어진 곳의 반대편이라는 걸 알았다. 

돌아갈 생각이 없는 문은 그대로 라마를 확인하고 다시 일어났다. 올라오면서 몇 번이고 떨어질 뻔 했지만, 라마가 품안에서 전혀 움직이지 않아 여기까지 기어 올라올 수 있었다.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어서 막 걸음을 떼려는 순간 기척이 느껴졌다. 

예민해진 문은 그대로 기척을 쫓아 눈을 돌렸다. 

“백자를 찾……!”

소리가 새어나가기 전에 들고 있던 시라소로 놈의 목을 베었다. 빠르고 정확하며 소리조차 새어나가지 않는 몸놀림이었다.

떨어져 나가는 머리를 바라보며 문은 시라소에 묻은 피를 털어냈다. 이글거리며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검붉은 검기를 서서히 잠재웠다.

느껴지는 기척을 모두 피해 아무도 없는 곳으로 라마를 안은 채 그대로 달렸다. 

*

불빛이 보인다. 뭔가가 앞에서 타고 있는 것 같았다. 온 몸이 나른해서 움직이는 것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유난히 등 부분이 딱딱하고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눈앞에서 일렁이는 불길을 만을 바라보았다.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승리의 함성일까. 아니면 패전의 절규일까. 붉게 타오르던 불길이 거세져 무언가를 집어 삼키고 있었다.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는 약혼녀를 시작으로 여동생이 삼켜졌다.

그 뒤를 이어 나를 어머니가 집어 삼켜진다. 나를 불길에서 밀어내는 아버지를 마저 삼키면서 나는 주저앉아 불길만을 바라보았다.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슬프다는 것조차 자각할 수 없었다.  

모두를 집어 삼키는 불길이 점점 거세져 어느새 단두대 위에 서 있는 내 모습을 비춰주었다. 형편없이 망가진 몸으로 나의 목이 허공에서 떨어지는 칼날에 의해 잘려 나갔다. 

굴러가는 내 머리를 바라보면서 곧 내 머리위에 있을 칼날을 의식했다. 

무엇이 꿈인지 현실인지 알 수조차 없이 뒤엉킨 환상이었다. 

‘죽음으로도 벗어날 수 없어.’

광활하게 불타는 불길이 점점 사그라졌다. 어딘가로 깊게 빨려 들어가듯 사라지는 불길. 그리고 어느 순간 어둠만이 존재하는 그곳에서 기이할 정도로 하얀 손이 뻩어나왔다. 

흔들리는 손이 마치 연기와 같다고 생각했다. 

‘나의 왕.’

온전히 모습을 드러낸 건 문이었다. 달빛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처연한 모습으로 나를 끌어안았다. 

불길에 휩싸인 모든 것을 들고 있던 검으로 사라지게 만들었다. 나를 뒤엉키게 하는 것들이 모두 사라지자 정적만이 감돌았다. 

문은 내 얼굴을 잡아 두 눈을 바라보았다. 사라진 불길이 문의 눈동자 안에 들어가 있었다. 그 붉은 불길 속에 내가 있었다. 

‘당신은 나만을 위해 살아야 해.’

문은 나에게 깊게 입을 맞췄다. 더럽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밀어내야 한다는 것조차 떠올리지 못했다. 깊고 농밀하게 들어오는 혀에 희롱당하면서도 말이다. 

내 입술을 훑고 있던 문의 혀가 천천히 목을 향해 내려왔다. 나긋나긋 하게 내려오던 혀가 쇄골 부위를 휘감듯 머물렀다. 진득한 아픔이 느껴질 만큼 깨물기도 하면서 본격적으로 나를 탐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난 그런 문을 거부할 수 없었다. 나의 세계가 되어버린 문을 밀어낼 수 없었다. 

난 눈을 떴다. 눈앞에는 문이 내 위에 올라탄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디서부터가 꿈이었는지 기억나질 않는다. 다만, 이것도 꿈일 수 있다는 가능성이 있을 뿐이다. 

난 손을 뻗어 문을 끌어안았다. 추위를 느끼는 아이를 위해서였다. 그는 아직도 두려워하고 있었다. 몇 번이고 말해줬는데도 머리 나쁜 아이는 시간을 두고 간헐적으로 증명해주길 바랬다. 

귀찮고 성가시지만, 그것으로 안정된다면 해주고 싶었다. 

“나는……. 네 것이다.”

그러니 너도 내 것이니, 제발 귀찮게 보채지 말라고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더는 목에 힘이 들어가지 못했다. 뻗은 손도 지탱이 어려워 무너지려고 하자 문은 그런 내 손목을 잡고 나를 바라보았다. 

놀란 표정이었다. 

듣고 싶어 했던 말이면서 무엇에 그리 놀란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곧, 저밀 듯한 미소를 짓던 문이 내 팔을 잡아 당겨 상체를 들어올렸다. 갑자기 몸이 일으켜진 탓에 현기증이 몰려왔다. 

그것을 불평하기도 전에 내 입술에 박히는 생생한 타인의 입술. 숨이 막힐 정도로 파고 들어오는 숨에 인상을 쓰기 전에 입술이 떨어져 나갔다. 곧 나는 맨살에 몸이 닿았고 문이 나를 깊게 끌어안았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언제 정신을 잃었던 것인지 다시 눈을 떴을 땐 문은 보이지 않았다. 야누스 절벽에서 떨어지면서 살 수 있을 거라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저 남겨진 아이들이 마음에 걸려 걱정이 되었을 뿐. 죽는 다는 걸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눈을 떴고 살아 있었다. 

단두대 위에 올라가 혀를 씹어 넘기고 자살하고도 눈을 뜬 것처럼 말이다. 

천장은 온통 돌무더기로 가득했다. 거대 동굴 같기도 했고 들짐승이 파 놓은 구덩이 같기도 했다. 좁지도 넓지도 않는 공간이지만 나는 추위를 느끼지 못했다. 눈동자를 굴렸다. 나를 살려 놓은 놈을 찾기 위해서였다. 

아직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것을 보면, 완전히 회복되려면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물에 빠진 것 치고는 상태가 양호했다. 천식으로 발작을 일으켰음에도 전처럼 계속해서 기침이 나오지 않았다. 

이따금 살아 있다는 것에 다시 의심했다. 그렇게 앓고도 지금 호전 됐다는 게 믿기지 않아서였다. 이렇다한 치료도 없이 말이다. 그때였다. 멀리 보이는 곳으로 인기척이 들리더니 뭔가가 다가왔다. 타닥타닥 하는 소리와 함께 잦아든 불길을 바로 세우고 내 곁으로 뭔가가 다가왔다. 

눈앞이 흐려졌다. 내 입가에 뭔가가 뚝뚝 떨어졌다. 쓴 물이 강제로 목구멍 안으로 넘어갔다. 

“아, 깼어?”

문의 목소리다. 뭔가를 쥐어짜듯 넣고 있던 것을 버리고 나를 바라보고 웃었다. 다부진 몸이었지만, 여기저기 가시에 찔리거나 긁힌 상처들이 많았다. 안 그래도 상처를 달고 사는 놈이라 단단히 주의를 줘도 저모양이다. 

그것보다 입안에 들어온 것이 써서 비위가 상해지기 시작했다. 토기까지 올라올 정도로 구역질이 올라오자 문은 그런 내 입안에 뭔가를 넣어 주었다. 검붉은 빛이 도는 작은 알갱이였다. 씹지도 않았는데 입안에서 녹았고 그것은 짙은 단맛을 내주더니 역한 냄새를 잡아 주었다. 

문은 바닥에 앉아 언제 잡아 온 것인지 짐승의 가죽을 벗기기 시작했다. 작은 짐승은 아니었다. 털가죽을 벗기자 빨갛게 달아오른 살점에서 모락모락 연기 같은 게 올라왔다. 짐승의 숨통을 단숨에 끊어놓은 문은 모피와 살덩어리를 분리시키면서 부지런히 움직였다. 나는 내가 왜 추위를 느끼지 못했는지 깨달았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것은 어느 거대한 짐승의 털가죽이었던 것이다. 감각이 무뎌진 탓에 이것에 둘러싸여 있다는 것도 느끼지 못했다. 

“…….”

나는 일어나고 싶었다. 힘을 주어 상체를 들려하자 고기를 손질하고 있던 문이 칼을 집어 던지고 내게 다가왔다. 다가오는 손길이 지나치게 부드러워 소름끼쳤다. 나는 이질감을 느끼며 그런 문을 의식하다 나를 만지는 손을 밀어냈다. 

하지만 문은 밀려나지 않고 오히려 손을 뻗어 내 목덜미를 잡았다. 눈앞으로 다가와 목덜미를 핥더니 아프지 않게 물기도 했다. 순간 소름이 올라와 얼굴을 밀어내려고 했지만 그보다 묻고 싶은 게 있었다. 

“내가 왜 살아 있지.”

문은 잠시 멈춰 조금 떨어진 뒤 나를 바라보았다. 놈은 나를 왕으로 보는 눈이 아니었다. 

“내가 지켜줬으니까.”

“…….”

나를 보고 웃었다. 내 손목을 들어 핥기 시작한다. 구애의 행동이었다. 나는 뿌리치기 위해 잡히지 않은 손을 들었지만, 그마저도 힘없이 잡혀버리고 말았다. 기가차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내가 묻고 싶은 건 어떻게 나를 살렸냐는 것이었다. 쓸데없는 것 까지 알게 되자 멀쩡하던 골이 울렸다. 

“난 감히 네놈이 지킬 상대가 아니라고 했을 텐데.”

“하지만 사실이야. 너는 내가 지켜.”

문은 나를 왕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저번에도 간간히 이름을 부르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지만, 나를 들개 왕으로 각인 시켰기에 크게 거슬리진 않았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문은 나를 왕이기 전에 배우자로 생각하고 있었다. 들개와 늑대는 그 누구도 지키지 않는다. 무리를 지키는 건 우두머리 들개 왕. 서로를 지키는 건 배우자 밖에 없었다. 문은 멋대로 나를 배우자로 선택한 것이다. 

바보인지 알았지만, 이정도로 돌대가리일 줄은 상상도 못했다. 

“문. 그건 여성에 한해서다.”

“상관없어. 라마는 처음부터 내가 없으면 안 되니까.”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머리가 울린다. 더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골치 아픈 이야기는 나중으로 미루기로 했다. 이곳이 어딘지 묻기 전에 쓴 맛이 강했던 것이 떠올랐다. 

“약초는 어디에서 배운 거지?”

“라마를 처음 봤을 때”

들개 시절 이야기 같지만, 떠오르는 게 없다. 내가 어떻게 들개 소굴에서 자랐었는지 조차 기억에 없지만, 문은 들개 시절의 나와 거의 접점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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