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화 (14/35)

처음 문을 본건 가나를 만나기 전이다. 그때의 나는 지금보다 훨씬 작았고 어렸다. 건강도 좋지 않았지만 몸이 좋지 않을 때 마다 들개 무리로 들어오는 식량에 변화가 있었다. 누가 지시를 했던 것인지 먹을 수 있는 건 모두 넣어 끓인 죽이 그때마다 쓴맛이 느껴질 정도로 풀이 들어갔었다. 

배가 고프기에 반항하지 않고 먹었지만, 그것을 먹고 나면 나와 비롯해 같은 증상의 아이들까지 원기를 되찾을 수 있었다. 

내가 문을 본건 그날따라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몸이 약해져 식량을 받아가는 것조차 하지 못하고 구석에 박혀 있을 때였다. 

그 누구도 내 몫의 그릇을 챙겨주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그날 하루치 음식은 포기 하고 있었다. 멀리서 바라보는 것도 지쳐 몸을 웅크려 가만히 있는 내 앞으로 무언가가 다가왔다. 

익숙지 않는 기척이었다. 놀라는 것조차 하지 않고 그것을 바라보았다. 달빛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문…….”

무심코 내뱉은 단어였다. 언제부터인가 그는 정말로 문이라고 불리고 있었지만 나는 그 당시에는 전혀 알지 못하고 지껄였던 것이었다. 

흘러내리는 백색의 머리카락에서 빛이 흘러나오고 있다고 생각했다. 문은 웅크리듯 앉아 나를 바라보았다. 붉은 눈동자가 나를 샅샅이 훑어보는 것 같았다. 

그때의 문은 지금보다 훨씬 작고 여자아이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문 같은 사람은 처음 봤기에 나는 죽을 때가 다 됐다고 생각했다. 문을 죽음의 사자라고 생각하고 조금은 체념하고 있을 때였다. 

창백한 손이 내게 뻗었고 온기와 함께 턱이 올라갔다. 무언가가 입안으로 들어왔다. 그것은 조금 식은 묽은 죽이었다. 올라오는 역한 풀냄새에도 넘어가는 죽을 막을 수 없었다. 뿌리치지도 못하고 그것을 다 받아먹자 곧 뭔가가 올라왔다. 

결국 몇 숟가락 흘러 들어갔던 죽이 역함과 함께 올라와 토해냈다. 

한 번 토해내자 기력은 놀라운 속도로 빠져나가 벽에 몸을 기대는 것조차 힘들었다. 

문은 눈앞에서 사라졌다. 곧 나는 죽을 것이라 생각하고 눈을 감았다. 몸이 벽을 타고 흘러가듯 떨어지고 곧 바닥에 닿을 거라고 생각하는 순간, 머리에 온기가 닿았다. 

썩은 풀냄새 같은 것이 올라왔고 입안으로 또 다시 죽이 들어갔다. 

이제 이런 고문은 받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 순간, 입안에 달콤한 열매가 들어왔다. 그것은 입안에 들어가자마자 녹았고 단맛이 썩은 비린내를 모두 잡아 주었다. 

나는 그날을 기억하고 문을 바라보았다. 내가 알기 훨씬 전부터 정말로 문은 나를 지켜주고 있었던 것이다. 이유를 모르겠다. 수많은 들개 중 어째서 나였어야만 했는지. 

문도 그날을 회상하는 듯 약간 볼이 붉어진 채 나에게 덧붙여 설명했다. 손바닥으로 작은 원을 만들더니 말이다.

“작았어. 처음엔 고깃덩어리인지 알았어.”

“그 정도로 작진 않았다.”

갓난아기 정도의 크기로 허공에 빚어내는 문에게 말했다. 문은 고개를 저었다. 

“마녀가 말했어. 말라가는 고깃덩어리는 양젖을 주면 산다고.”

마녀라면 내가 5살이 되어 죽을 때까지 나를 길러준 노파였다. 문이 그 노파를 기억할 리가 없다. 노파가 죽고 나서야 나는 들개 무리에 들어갔으니까.

하지만 문은 노파의 일그러진 얼굴까지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얼굴에 커다란 반점 같은 것이 있었는데, 그 점이 얼굴 전체를 덮고 있어 흘러내는 듯한 얼굴이었다. 

노파는 때문에 바깥출입을 잘 하지 않았고 종종 밖으로 나가면 노파의 얼굴에 놀란 사람들이 마녀라고 소리쳤다. 

다정한 노파였다. 입은 거칠지만, 갈라진 손으로 어렴풋이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던 것을 기억한다. 

“네가 어째서 노파를 기억하지?”

“두발로 걷든 네 발로 걷든 상관없어. 들개는 갓난아기를 좋아해. 부드럽게 씹히니까.”

“…….”

문은 내게 손을 뻗었다. 그날처럼 내 턱을 잡아 올리고 진득한 소유욕이 가득한 붉은 눈동자에 나를 담았다. 

“다행이야. 그때 씹어 먹지 않아서…….”

입 꼬리가 길게 올라간다. 나도 기억나지 않는 나를 기억하고 있는 문의 붉은 혀가 어느 순간 내 입술을 훑고 올라갔다. 

노파는 사람을 피하고 다녔다. 들개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사람들이 노파를 마녀라고 했던 것은 단순히 무너진 얼굴 때문이 아니었다. 죽은 사람도 살린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의술이 뛰어났기 때문도 있었다. 하지만 노파는 내게 의술을 가르치진 않았다. 배우고 자시고 할 것 없이 그 시기 때의 나는 고작해야 5살이었다. 

말을 하는 것도 서툰 아이에게 노파는 기본적인 몇 가지의 약초 활용법 말고는 알려주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노파의 무너진 얼굴은 사실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냥 어느 순간 의자에 앉아 움직이지 않던 노파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나는 죽었다고 생각한 그 시점부터 노파를 묻기 위해 맨손으로 땅을 팠다. 어린 아이가 파는 속도는 매우 느렸고 노파를 묻을 수 있을 쯤 팠을 때는 이미 노파의 몸에서 구더기가 기어 나오고 있었다. 

들끓는 구더기를 아랑곳 하지 않고 질질 끌어와 땅에 묻었다. 내가 노파의 집에서 나온 건 그 뒤였다.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던 과거였다. 외롭게 자랐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은 그 노파 덕분이었을까. 

아니면…….

나는 문을 바라보았다. 

“약초는 노파가 가르쳐 준 것이냐.”

“응.”

나를 보고 웃고 있던 문이 내게 손을 뻗어 눌어붙은 머리카락을 치워주며 말했다. 

“그 마녀, 송장냄새가 들끓었어.”

노파가 5년을 더 살았던 것도 문 덕분이었을까. 나는 이미 한 번 죽었다. 죽기 전 나는 앞만 보는 것만으로도 벅차있던 때였다. 

그때의 나는 뒤를 돌아보는 여유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보던에 버려진 아이가 거동조차 어려운 노파의 손에 자랐다. 들개가 되어 서도 나는 노파의 보호아래 있었다. 나는 알려하지 않았고 죽는 순간까지도 알지 못했다. 

“?”

문이 나를 바라보았다. 나 역시 문에게 눈을 떼지 않았다. 

그날, 나의 모든 걸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단두대 위에서 자살을 선택했다. 살고자 했다면 그 자리에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도망갈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살려고 하지 않았다. 

죽고 나서 이 아이가 어떤 심정이었을지 생각해 보지 않았다. 

문이 내 두 뺨을 잡았고 엄지를 이용해 눈가를 훑어주었다. 뚝뚝 흐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에 참담하고 절망스러웠다. 이제야 느끼는 뭔가가 도려지고 있는 통증이었다.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지만, 문은 그런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웃었다. 

“소리 내서 울어봐. 노래하는 것 같을 테니까.”

멋대로 입을 맞추면서 잘도 지껄인다 싶었다. 의식이 점점 멀어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눈앞이 흐려지고 입술이 떨어진 문이 나의 이마에 손을 짚는 것을 마지막으로 의식을 놓았다. 

그날, 누군가가 노래하는 것 같은 울음소리가 계속해서 귓가를 맴돌았다. 

*

한스덴 웨이는 잠시 말을 잃고 눈앞의 사내를 바라보았다. 

“뭐라고……?”

“플라이 소년은 야누스 절벽에서 떨어져 얼마 전에 사망했다고 합니다.”

자신의 외아들이 그토록 만나고 싶어 하는 ‘라마’를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이름만으론 쉽지 않았만, 정보는 이름 말고도 가나와 비슷한 또래의 소년이라는 것도 있었다. 에그와 플라이중에 가나와 같은 또래는 5명 정도 있었고 개중 4명은 에그, 1명이 플라이였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유일한 플라이에 소속된 소년이 야누스 절벽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소식을 전달받았다. 

“이런……. 그 어린나이에.”

한스덴 웨이는 진심으로 안타까움을 감추질 못했다. 어른에게 보호받고 자라나야 할 소년들이 그 힘든 훈련을 겪는 것도 모자라 변변치 않게 사고를 당해 죽는다는 소식은 가슴 아픈 일이었다. 

아이는 장례도 없이 그렇게 야누스 절벽에 묻혀 영원히 잊힐 것이다. 

“그러고 보니, 가디언이 필요하다고 자네가 그랬지.”

“주인님.”

한스덴 웨이는 자신의 심복이 눈치가 빠르다는 점을 이용하곤 웃었다. 

“아들의 또래라면 좋은 벗이 될 수도 있겠군.”

한스덴 웨이는 에그에 있는 4명의 소년들을 모두 가디언으로 채용하여 데려올 생각이었다. 심복의 깊은 한숨소리가 꽤 먼 곳까지 들리는 듯싶었다. 그 4명의 에그 중 아들이 찾고 있는 ‘라마’라는 소년이 있기를 조금 기대했다. 

“주인님. 왕궁 연회에 참석하라는 전언입니다.”

집사장은 간결하게 말하고 친필로 적힌 편지를 내밀었다. 왕가의 인장이 들어간 것으로 전언을 받는 자는 이틀 뒤에 있을 공식 연회에 반드시 참석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명령에 가까웠다. 

내역에는 다행히 어린 딸과 몸이 약한 아내는 없었지만, 자신과 아들은 똑똑히 적혀 있었다. 최연소 문호를 받게 되면서 주목받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공식 연회에 참석하는 건 이르다고 생각했었기에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혹여 말을 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아들이 상처 받는 일이 생길까 걱정스러웠다. 

“네가 원하지 않는다면, 아버진 거절할 수 있단다.”

하지만 무엇보다 아들의 의견이 먼저였다. 한스덴 웨이는 가나에게 종이를 내밀었다. 참석한다면 종이에 사인이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었다. 가나는 한스덴 웨이와 그가 들고 있는 편지를 바라보았다.

잠시 아무런 행동이 없던 가나는 집사장이 건네주는 펜으로 사인을 했다. 참석하겠다는 것이었다. 

“어쩔 수 없군. 이걸.”

“네 주인님.”

한스덴 웨이의 사인도 들어간 편지를 받은 집사장이 그대로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즉시 궁으로 보내야 했기 때문이다. 

한스덴은 가나를 바라보았다. 고요하게 앉아 어느새 책을 읽고 있었다. 가나는 무언가를 배우는 걸 좋아했다. 처음엔 간단한 단어정도만 알고 있다는 것도 놀라웠는데, 가르침을 받는 순간부터 습득하는 속도가 빨라지더니 어느새 자신의 스승까지도 뛰어넘어 문호의 한 자릴 차지했다. 

거기다 이제 배우기 시작한 검술도 재능이 있다고 하니, 무엇하나 부족함이 없었다. 말을 하지 못한다는 건 가나에게 큰 장애가 못됐다. 한스덴은 절대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희망적인 것은 가나가 아예 소리를 낼 수 없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라마라는 단어를 똑똑히 발음하였으니, 곧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도 있었다. 그러니 조급해 할 것은 없었다. 

“네 또래의 가디언을 데려올 생각이란다.”

가나는 들고 있던 책에서 눈을 떼고 한스덴을 바라보았다. 처음엔 정을 주지 않고 울기만 했었다. 뭐가 그렇게 슬픈지 눈동자를 굴려가며 뚝뚝 울기만 했던 아들이다. 그런 아들의 눈동자에 오랜만에 빛이 들어왔다는 걸 본 한스덴은 조금이라도 더 기쁘게 해 주고 싶었다. 

가나는 책을 덮고 한스덴에게 다가가 옷을 붙잡았다. 

“꼭 만날 수 있을 거야.”

가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스덴은 조금 기운을 차린 것 같은 가나를 보고 라마라는 아이에게 감사했다. 그리고 진심으로 그 네 명이 에그 중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견습생에 가까운 에그라 하더라도 왕궁에 소속되어 있기 때문에 전속 가디언으로 빼오는 건 말처럼 쉬운 건 아니었지만, 그리 오래 걸리진 않았다. 한스덴은 왕궁 내부에서 심상치 않는 바람을 느꼈다. 사소한 것에는 신경을 쓰지 않을 만큼 말이다. 

원인은 곧 드러났다. 국왕의 잦은 부제가 그것을 설명했다. 

한스덴은 그제야 모든 귀족을 모으는 연회를 여는 것도 알 수 있었다. 국왕의 건강이 눈에 띄게 나빠지기 시작하면서 차기 국왕에 대한 논란이 끊이질 않고 있는 것이다. 

국왕에겐 네 명의 왕자가 있다. 가장 유력한 왕의 후보는 1왕자. 하지만, 그 뒤를 치고 들어오는 2왕자의 기세도 만만찮다. 영특함은 4왕자도 마찬가지지만, 아직 어리기 때문에 왕위에 오른다면 그 목숨부터 위협받을 것이다. 

3왕자도 있지만, 그는 백치라고 알려져 있기 때문에 왕위는 논외의 문제였다. 결국 1왕자와 2왕자의 싸움이 될 것이지만, 지금 그 어떤 귀족도 누가 왕좌에 앉을지 단정 지을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을 눈치 채고 뒤로 빠질 귀족을 방지하려고 국왕은 반드시 연회에 참석하라 명령했다. 이번 연회는 그 윤각을 잡는 시작점이었다. 

그리고 이틀 뒤, 한스덴 웨이와 가나는 연회에 참석하기 위해 마차에 올랐다. 그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아내의 뺨에 키스를 해 주고 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한스덴은 다녀오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가나는 그 어떠한 인사도 없었다. 눈도 마주치지 않고 마차에 올라가려 했지만, 그런 가나의 손을 잡은 건 여동생 레이첼이었다. 

그것을 지켜보던 한스덴이 말했다. 

“걱정되는 모양이구나. 잘 다녀오겠다고 해 주렴.”

가나는 아직도 낯설다는 얼굴로 한스덴을 바라보더니 자신보다 한 참 작은 레이첼을 내려다보았다. 동그란 눈을 가진 레이첼은 가나에게 붙어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고 물었다.

“오빠 어디가? 레이첼도 데리고 가.”

가나는 그런 레이첼을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데려갈 수 없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런 가나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레이첼은 더욱 더 떨어질 생각을 하질 않았다. 평소엔 이렇게까지 보채지 않는 아이인데, 무엇을 느끼기라도 한 듯 가지마라며 떼를 쓰기 시작했다. 

결국 보다 못한 한스덴이 레이첼에게 다가갔다. 

“연회에 다녀오려는 것뿐이란다. 늘 그랬잖니. 사랑스러운 공주님. 조금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왜 레이첼은 못 가는데?”

“그건…….”

한스덴이 난감한 듯 머리를 긁적이자 레이첼은 더더욱 고집을 피워댔다. 아내 베라까지 레이첼을 달래려 했지만, 가나에게 붙어 떨어질 생각을 하질 못했다. 결국 가나는 레이첼의 머리위에 손을 올려 주었고 어색하게나마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레이첼은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가나를 바라보았다. 밝은 황금색 머리카락이 빛에 반짝이고 있어 태양 같다고 생각했다. 

그제야 떼를 부리며 같이 가겠다던 레이첼이 가나의 손을 놓아 주었다. 한 번 고집을 피우면 말릴 수 없는 레이첼이라도 오빠의 말이라면 곧 잘 들었다. 가나는 그대로 마차에 올라탔고 한스덴 웨이도 곧 뒤를 따랐다. 레이첼은 멀어져가는 마차를 바라보면서 붉게 달아오른 볼에 손을 대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어머니에게 달려가 손을 잡았다. 베라는 자신의 딸을 상냥하게 바라보았다. 레이첼은 분홍빛이 된 볼을 숨기지 못하고 말했다. 

“엄마, 엄마! 있지~ 레이첼은 크면 나중에 오빠랑 결혼할거야!”

그 말에 베라가 입을 가리고 놀랐지만, 곧 웃어버렸다. 오빠가 생기기 전에는 아빠와 결혼하겠다고 했던 레이첼이었기 때문이다. 이 소릴 들으면 한스덴이 실망하는 얼굴이 그려지는 듯 해서 베라는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기침은 확실히 줄었다. 토를 하는 일도 없었지만, 내 몸은 생각보다 쉽게 낫지 못했다. 몸이 건강해 지려면 아직 내게는 시간이 필요했다. 앞으로 2년 동안 죽기 직전까지 온갖 병으로 앓게 될 것이다. 

이것이 시작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과거처럼 누군가에게 보살핌을 받을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었다. 그리고 그게 문이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근력이 돌아오지 못한 탓에 최근 들어 땅을 전혀 밟지 못했다. 

원인 불명으로 갑작스럽게 찾아온 병 탓에 성장 속도가 늦어 내 몸은 아직 작았다. 그 탓에 상대적으로 이미 커다랗게 된 문은 나를 안아 놓아주질 않았다. 떨어지라고 말을 해도 듣지 않아 기어코 머리를 쥐어박게 만들었지만, 한 번 고집을 피우면 도저히 감당이 되질 않았다. 

더욱이 나를 왕에서 멋대로 배우자로 만들어 버린 탓에 본능적으로 주도권을 잡으려고 하는 것도 문제였다. 

일부로 당해주는 척 맞아주면서도 종종 힘을 써서 나를 짓누르곤 했다. 비위가 상해져 불쾌감을 어김없이 드러내면 알아서 물러났지만, 상습적이었다. 

무엇이 문제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대체 언제부터 나를 왕에서 배우자로 인식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과거랑 달라진 게 있다면 문의 목에 있는 선명한 목줄뿐이다. 

어디서부터 가르쳐야 될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좋아하는 여성이 생기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것이다. 일단은 그것에 희망을 걸었다. 

“윽”

갑자기 귀 쪽으로 통증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기 전에 손을 들어 옆을 밀어보니 문의 머리가 잡혔다. 자근자근 씹고 있는 귀에서 통증이 사라지지 않자, 밀어내는 것을 멈추고 주먹을 쥐었다. 하지만, 그 손목까지 잡혀 귀를 물어뜯던 문이 무는 것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 

입을 떼고도 느껴지는 통증에 손을 들어 짚어 확인하자, 얼마나 세게 물었는지 피가 묻혀 나왔다. 

피를 보자 화를 감추지 않고 문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문은 뒤로 물러나지 않고 웃더니 내 앞으로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내가 밀어내지 못한다는 걸 알고부터 행동이 한층 더 집요해졌다. 눈앞까지 다가와 피가 흘러내리는 귀와 목을 핥으며 나를 안고 일어났다. 미열이 있긴 하지만, 이제는 이동을 해도 무리만 하지 않으면 된다는 걸 알고 있는 듯 했다. 

문은 나를 짐승의 털가죽으로 감쌌다. 머리까지 덮어씌운 탓에 멀리서 본다면 들짐승을 안고 있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궁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문이 향하는 방향은 점점 더 궁에서 멀어졌고 어느새 항구에 닿아 있었다. 

문의 등 너머에서 멀어지는 성을 지켜보다 입을 열었다. 

“트란슈로 가라.”

앞으로 1년 뒤 로던프에선 내란이 일어날 것이다. 간신들이 날뛰기 시작할 때에 국왕이 죽고 나라는 어지러워질 것이다. 한스덴 일가가 무사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트란슈의 도발로 1차 전쟁이 일어나면서 받는 피해를 최소화 시킬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그전에 확인해 볼 것도 있었다. 트란슈의 도발이 유리했던 것은 단순히 시기를 잘 탔던 것만은 아니었다. 

내란을 틈타 트란슈와 내통하는 자가 있었다는 소리다. 꽤 영향력 있는 자일 것이다. 짐작가는 사람이 없는 건 아니지만, 확실히 할 수 있다면 로던프가 지워지더라도 한스덴 일가를 지킬 방법이 생길 것이다. 

“트란슈?”

“북쪽에 있는 나라다. 확인할 게 있다. 하지만 그전에…….”

문은 필요 이상으로 눈에 띄었다. 나 역시 이 꼴로 북쪽에 있는 트란슈로 가고 싶진 않았다. 

그러다 문득, 저 멀리서 지나가는 유랑극단이 눈에 띄었다. 마침 북쪽으로 가는 배에 오르는 것을 확인하고 문의 귀를 잡아 속삭였다. 

“따라가.”

나를 바라보던 문은 배에 천천히 오르는 유랑극단을 바라보더니 입 꼬리를 들어올리며 대답했다. 

“멍.”

문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눈에 띄지 않는 곳이 없었다. 그런 자신을 모르고 멍청이가 유랑극단 쪽으로 접근하자 놈의 잡은 귀에 힘을 주었다. 

그제야 가던 걸음을 멈추고 날 바라보았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내가 덮고 있는 짐승의 털가죽을 문의 머리에 씌웠다. 그리고 유랑극단으로 보이는 놈이 뒤 늦게 앞을 지나가자 난 놈이 달고 있던 가면을 낚아 채 문의 얼굴에 붙여주었다. 

“벗지 마.”

문이 손을 들어 가면을 벗으려고 하자 바로 지적하고 끈을 묶어 고정시켰다. 그러자 문의 불만 섞인 목소리가 가면 안에서 울렸다.

“답답해!!”

“벗지 마라 문.”

“…….”

대답이 없었지만, 더 이상 칭얼거리진 않았다. 대신 불만이 가득하다는 걸음으로 단숨에 뛰어가 배에 올라타 유랑극단 무리에 합류했다. 

훔치는 김에 호패도 두 개를 손에 쥐고 품에 넣던 나는 문을 바라보다 한숨을 내 쉬었다. 잔뜩 얼어 있는 문은 배 한가운데에 서서 더 이상 움직이질 못하고 있었다. 

문은 물도 그다지 좋아하진 않지만, 배는 싫어했다. 단순한 멀미였다. 육감으로 사는 녀석이니, 바다 위를 싫어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내가 문이 배를 싫어하는 걸 알 수 있었던 계기는 과거 전방 출전을 허락받고 배로 이동을 하게 되면서다. 그때도 진득하게 내 뒤를 따라 붙던 문은 배 위에 올라타고부터는 구석에 박혀 움직이지 않았다. 

묘하게 조용하다고 생각했고 잠이 많은 녀석이니, 자는 줄 알았다. 하지만 구석에서 발견된 문은 시퍼렇게 질린 얼굴로 꼼작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유일한 약점이라는 것을 알고 얼마나 웃었던가. 

나는 하는 수 없이 문의 품에서 내려왔다. 내가 내려오자 문은 고개를 내려 나를 바라보았다. 다시 안으려고 엉거주춤 손을 뻗기에 그 손을 잡아 앞으로 끌어당겼다. 유랑극단의 동선을 확인한 뒤 얼핏 보면 그들의 일행처럼 보이기 위해 안으로 들어와 근방에 자리를 잡아 앉았다. 

그러고 보니 나는 맨발이었다. 거기다 걸친 옷이라곤 낡고 얇은 천 한 조각. 그것도 문이 입던 것이라서 상의만 걸쳐 바지도 입지 못한 채다. 꽤 암울한 상태였지만, 들개였을 때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배가 출발하기 시작했다. 천천히 움직이는 배에서 호패를 검열하자 나는 들어오기 전에 훔친 호패를 보여줬다. 

“뭐야, 너도 유랑극단이냐?”

호패를 검열하던 놈이 검사를 마치고 내게 호패를 던지며 물었다. 그는 천한 신분인 유랑극단이 올라탄 것에 불만을 품은 듯 했다.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말썽 일으키지 마라. 그랬다간 네놈들 다 바다에 던져버릴 테니까. 다음! 너 호패! 뭐야, 너도 유랑극단이야? 이런 젠장. 질 떨어지게.”

호패를 내놓지 못한 놈들은 선출해 그대로 바다에 던져졌다. 울며 분명히 가져왔다고 소리를 치는 놈은 두들겨 패가며 말이다. 난 등을 기대고 앉아 문을 바라보았다. 다행이 문은 얌전했다. 덜덜 떠는 것 같고 가면 안에 얼굴은 퍼렇게 질려 있겠지만, 꿀 먹은 벙어리 마냥 조용했다. 

“너희는 어디서 온 거야?”

그런 우리들 앞으로 주근깨가 가득한 소년이 다가왔다. 행색을 보아 유랑극단 소속인 것 같다. 난 그 소년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보던.”

“보던? 거기가 어디지? 그런데 이분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가렸지만, 거대한 덩치만큼은 가리지 못한 문을 바라보던 소년은 눈을 가늘게 하고 바라보았다. 품평을 하는 사람처럼 바라보더니 이제야 떠올랐다는 듯 말했다. 

“아빠?”

“아니다.”

“그럼 형?”

대충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뒤집어 쓴 짐승의 가죽이 신기한지 소년은 한참을 문을 바라보았다. 

“형, 안 답답해?”

평소라면 답답하다고 노래를 부르고 있던 문이지만, 대답하지 않고 미동도 없었다. 소년이 손을 뻗어 가면에 가자 나는 나지막이 말했다.

“피부병이 있어. 겉부터 곪아 안쪽까지 썩어나가는 병이야. 건들지 않는 게 좋을 거다.”

그 말을 들은 주근깨 소년의 손이 허공에 멈췄고 천천히 뒤로 빠졌다. 

당황한 소년은 뒤로 물러나면서 내 눈치를 살피더니 머리를 긁적였다. 형제라고 생각한 사람을 병에 걸렸다는 이유로 피하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는 듯 했다. 할 말이 필요 했는지 침묵 끝내 소년이 입을 열었다. 

“난 올라. 저기, 유랑 극단 단원이야. 형이 쓴 가면을 보니까 극단용이던데, 너희는 어디 극단 소속이야?”

호기심이 많은 소년이었다. 충분히 피할 법도 한데, 어느새 앞에 앉아 말을 걸고 있었다. 상대하기 귀찮았지만 괜한 이목을 끌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모든 물음에 대답은 필요 없기에 난 짧은 단어로 모든 대화를 끊어냈다.

“소속이 없다니……. 둘이서 여행하다니 정말 대단하네. 그보다 그 차림, 춥지 않아?”

한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워지고 있었다. 열이 끓기 시작한다는 걸 느끼면서 나는 대답을 하지 않고 벽에 등을 기댔다. 트란슈로는 하루 하고도 반나절이 지나야 도착을 할 것이다. 그때까지 몸이 견뎌주면 좋겠지만, 열이 오르는 것 외에는 기침이 나오지 않아 크게 나쁘진 않았다. 

“신도 없고. 기다려봐.”

눈앞에서 소년이 사라졌다. 주위가 조금은 조용해 진 것 같아 한숨을 내쉬었다. 문은 여전히 꼼짝하지 않았다. 

“문?”

멀미로 죽지는 않겠지만, 동상처럼 굳어 있어 이름을 불렀다. 이름을 부르자 문이 손가락을 움직여 반응했다. 단순히 멀미나 배를 싫어한다고 생각해 상태를 보기 위해 가면을 잡아 조금 들어 얼굴을 살펴보았다. 

눈을 뜬 채로 숨까지 거칠게 내 쉬고 있는 문이 보였다. 

땀까지 흘리고 있었다. 단순히 더워서 흘리는 건 아니었다. 앞을 바라보고 있던 붉은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문.”

당장이라도 피를 흘러낼 것 같은 눈이었다. 아무렇지 않게 생각했었다. 멀미 정도로 가볍게만 여겼던 것이 뭔가가 이상하다고 느낀 건 그때부터였다. 설마 보던에서 용병에게 끌려갔을 때 배 위에서 무슨 일이라도 당한 것일까. 당시 문을 다시 봤을 때 사슬에 묶인 것을 회상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아니면 내가 또 모르는 문의 과거의 일인가. 

이유를 알아야 할 것 같아 막 말을 걸려는 순간, 내 앞으로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때 문이 반응해 시라소를 향해 손을 뻗으려 하기에 그대로 문의 품안으로 들어가 시라소를 조금 빼낸 문의 손을 잡았다. 

‘여기 있다. 난 여기 있어.’

흔들리던 붉은 눈동자가 돌아가 나에게 향했다. 

숨이 거칠어져 있던 것이 조금 잦아 앞을 바라보니 사라졌던 주근깨 소년 올라였다. 

“그래서 안 추웠구나. 그래도 아픈 형한테 너무 어리광부리는 거 아니야. 이거 옷이랑 약간의 음식. 피부병에 좋은 약은 지금 없는데, 물어보니까 카나 열매가 좋다고 하네. 트란슈에 도착하면 구할 수 있을 거야.”

올라는 내 앞으로 옷과 음식을 놓고 웃으며 말했다. 

어서 가 줬으면 했지만, 바닥에 쭈그려 앉아 턱을 괴면서 나와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뜬금없이 말했다. 

“너희 형제 되게 사이좋다. 부럽네.”

뭐가 그렇게 흐뭇한지 바라보고 있던 올라가 웃으며 물었다. 

“형이 좋아?”

“…….”

“나도 너만한 동생이 있었는데, 정말 귀여웠어. 너처럼 늘 안아달라고 어리광도 잘 부렸으니까. 조금 귀찮기도 했는데, 사랑스러웠어. 동생은 정말 사랑스러워.”

“그럼 가.”

동생이 있는 곳으로 가라는 소리였다. 올라는 웃던 얼굴로 나와 문을 바라보며 말했다. 

“못가. 죽었거든. 몸이 약했었으니까.”

“…….”

“그래서, 동생은 형이 좋아?”

올라가 다시 물었다. 난 그런 올라를 바라보다 이제 다시 잠잠해진 문을 바라보았다. 흔들리던 눈동자가 어느새 안정을 되찾은 듯 감겨 있었다. 

“싫진 않아.”

시끄럽게 떠들어대던 올라도 잠이 들쯤 나 역시 문의 품 안에서 잠시 눈을 붙였다. 생각보다 열이 떨어지지 않으면서도 한기가 느껴졌다. 목이 마르다고 생각할 쯤 갑자기 몸이 뜨는 기분과 동시에 물이 닿았다. 정신없이 마시고 눈을 떠 보니 내 이마에 붙은 머리카락을 넘겨주는 문과 눈이 마주쳤다. 

멀미로 나가 떨어진지 알았더니 이제야 진정이 된 모양이다. 

“이제 괜찮으냐.”

“괜찮지 않아.”

말대답을 하는 것을 보니, 괜찮은 것 같았다. 이유를 물어보지 않아도 될 것 같아 안심하고 마저 물을 삼켰다. 목이 탈 것 같았던 갈증이 사라지자 온 몸이 나른해졌다. 언제쯤 나아질까. 장기간 앓아본 기억이 없는 건 그 당시 나는 때를 맞춰 치료를 할 수 있는 환경이 갖춰져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이미 한 번 절벽에 떨어졌고 온기라곤 없는 동굴 속에서 지내다 짐승의 털가죽으로 버텼다. 

다행이 노파에게 배운 것인지 문이 가져온 약에는 효과가 있어 악화되진 않았지만, 눈에 띄게 호전되지도 않았다. 

지긋하게 앓아야 한다는 건 꽤 귀찮은 일이다. 

트란슈에 도착하면 의원부터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이질적인 기척이 느껴졌다. 문도 느낀 것인지 나를 안던 손에 힘을 주었고 그대로 기척을 피해 몸을 숨겼다. 

그 순간이었다. 강렬한 충격과 함께 배가 흔들렸다. 밤이 늦어 잠이 들어 있던 승객들과 선원들이 일제히 놀라 눈을 떴으나 아직 사태를 파악하지 못한 듯 했다. 

벽이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비명도 들려왔다. 

“계집과 애들은 나란히 서서 밖으로 나와! 사내놈들은 모두 머리를 바닥에 박고 가만히 있어라. 허튼 수작하지마라. 머리 날아가고 싶지 않으면.”

해적이었다. 

트란슈로 항해하는 중 해적을 만나는 건 흔한 일이 아니었다. 

서민들도 탈 수 있는 작은 범선을 터는 것은 수지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해적은 귀족들이 즐겨 타는 유람객선을 노렸으니까. 

목적이 무엇이었는지는 식수와 식량을 옮기고 있는 부산한 모습을 보면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배에 있는 모든 것을 약탈하고 나면 알아서 떠날 것이라는 것도.

무자비한 해적들에게 대드는 놈들은 없었다. 선원들조차 바닥에 머리를 박고 움직이지 않았고 배 안에 있던 여성들과 아이들을 차례대로 밖으로 줄을 서서 나가기 시작했다. 

“가만히 말만 들으면 살려줄……. 잠깐, 거기 뒤에 뭐야?!”

돼지소리를 내던 놈이 나와 문이 있던 곳을 알아차린 듯싶다. 눈치가 남다른 놈이다. 

“당장 기어 나와!”

문이 나를 바라보았다. 난 고개를 저었다. 굳이 눈에 띄어 일을 곤란하게 할 필요는 없다. 해적은 가진 것만 털고 나면 알아서 물러 날 것이다. 

해적이 움직임이 없는 우리가 있는 곳으로 점점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발이 문의 그림자를 밟으려는 순간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 사람은 피부병이 있어요! 전염되어 옮기는 병이라 그곳에 격리 시켜 놓은 거예요!”

올라였다. 몸이 묶이고 바닥에 박힌 채로 말하고 있었다. 올라의 말을 들은 사내는 다가오는 것을 멈췄다. 그리고 낮게 욕을 하곤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시라소를 잡은 손에 힘을 주고 있던 문은 다시 한 번 나를 바라보았다. 차갑게 얼어있는 붉은 눈동자가 타오르기 시작했다. 난 무심코 그 눈을 바라보다 비친 달을 바라보았다. 

그렇다. 

오늘은 만월이다. 

난 당장이라도 날 뛸 것 같은 문의 손을 붙잡았다. 진정하라고 두 눈을 똑바로 마주보다 상황을 살폈다. 

그들은 누군가에게 보고하듯 사라졌고 돼지가 나가고 몇 분 뒤 다른 인물이 기어들어왔다. 금빛 짐승의 털가죽을 걸친 덩치가 큰 사내였다. 우람한 풍채와 냄새가 날 것은 같은 낯짝으로 다가온 놈은 해적의 선장이었다. 

“선장님……! 전염병입니다!”

“태워버리면 그만이다.”

선장은 거칠게 내 눈앞까지 다가와 우리를 내려다보았다. 내가 억누르고 있는 문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한계라는 소리다. 

난 고개를 들어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는 놈을 바라보았다. 그는 눈이 조금 가늘어지는 것 같더니, 이내 커다란 손을 내게 뻗었고 겨우 억누르고 있던 문은 그대로 자제를 잃어버렸다. 

나를 안은 채로 시라소를 휘두른 문은 사내의 목을 노리고 있었으나, 그런 문의 검을 막아낼 정도로 해적의 선장이라는 자는 보통 실력이 아니었다. 

비슷한 실력이라면, 나를 안고 있는 문이 불리한 상황이다. 하지만 문은 흥분에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만월에 미쳐가고 있었다. 

배 위에 올라와 상태가 좋지 않았으니 이성을 잃는 것도 쉬웠을 터. 더 막지 못한다면 상처가 생겨날 것이다. 나는 숨을 토해내듯 쉬었다. 

또 다시 검을 부딪치려 움직이는 문의 품에서 빠져나와 문의 손목을 잡은 채로 매달려 반동을 이용해 앞으로 뻗은 선장의 검을 발로 쳐냈다. 

문이 시라소를 놓지 않으려고 하자 난 어김없이 밑바닥까지 긁어 검기를 드러냈다. 검은 검기가 문의 손목을 감싸 삼키자 그제야 시라소를 놓았다. 그리고 바닥을 밟은 나는 문이 놓은 시라소를 잡아 날을 세워 선장의 목에 대었다. 

검 끝에 위협받은 선장은 턱을 들어 올렸고 다소 놀란 듯한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결과를 이해하지 못한 해적들이 움직이려고 하자 난 시라소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대로 해적 선장의 목에 상처가 생겨 피가 흘러내렸다. 

그리고 나는 마지막으로 경고했다. 

“움직이면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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