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색어린 리노의 말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런 웃음에 익숙하지 않는 모양인지 리노의 얼굴이 일그러졌고, 문은 신기하듯 나를 바라보았다. 문에 대한 치료를 대강 마치고 손을 놓아주었지만, 문은 내밀어진 자신의 손을 가져갈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럴 리가.”
리노를 보고 대답했다. 하지만 곧 무슨 생각을 하는 것 같더니, 내게 물었다.
“어디 소속이야.”
“들개.”
“들개?”
못 알아듣고 되물었지만, 설명을 해 주진 않았다. 냄새가 나는 문이 곁으로 다가오려고 하자, 손을 들어 막았다. 상처가 있으니 스스로 씻게 하면 덧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저대로 곁에 둘 수 없어 귀찮고 짜증나더라도 일어나야 했다.
“깨끗한 물과 옷을 가져와라.”
“이봐, 난 들개라는 소속 들어본 적도 없거든?”
“설명은 슈레이한테 들어.”
“하.”
리노는 잠시 말문이 막혀버린 듯 했다. 곧 무슨 말을 하려는 것 같았지만 결국 밖으로 나가버렸다. 문은 그런 리노를 바라보았다.
“죽이지 마라.”
내가 명령하자 붉은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번들거리는 살기가 피부로 느껴졌다. 노골적으로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걸 표현하고 있었지만, 무시했다.
“지금부터 그 어떤 자도 내앞에서 죽이지 마.”
“싫다면?”
되묻는 문은 표정이 없었다. 살육 덩어리인 놈을 바라보았다.
“내 손에 죽겠지.”
그 순간이었다.
저밀 듯 미소 짓은 문은 무언가에 취해 버린 듯 내게 다가왔다.
본인은 죽을 듯 기쁘다는 표정으로 말이다.
“좋아.”
그리고 속삭이듯이 입을 연다.
“당신 손에 죽어도 좋아.”
“…….”
진심이라면 안타까울 뿐이다. 미련 없이 살기를 드러냈지만, 문은 웃으며 다가왔던 머리를 뒤로 보냈다.
“하지만, 지금은 안 죽을래. 더 많이, 더 오래 보고 싶어.”
제발 말 좀 들었으면 좋겠지만, 문이 변하는 건 쉽지 않았다. 하지만 협상이라는 건 가능한 아이라서 최소한 눈 앞에서 죽이는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내가 곁에 있는 한 말이다.
불안정하게 성장하고 있는 문을 지켜보면서 파고드는 한숨이 깊어졌다. 생각보다 단순하면서도 생각보다 많은 것을 느끼는 아이다.
나에 대한 영향력을 잉크를 흡수하듯 물들이기 때문에 중심을 잡아주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욕심은 부리지 않기로 했다.
손을 뻗어 문의 팔을 붙잡았다.
별 힘을 주지 않았던 탓에 금방 이끌려온 문은 조금 당황한 듯 불편한 자세로 나를 바라보았다. 왜 손을 가져갔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지만, 그것을 차분하게 설명까지 할 정도로 여유가 있진 않았다.
문의 손바닥을 열어 바라보았다. 쓸리고 찢긴 것도 모자라, 마치 불이라도 데인 듯 곪아가고 있었다. 이건 벌어진 상처보다 지독한 것이었다.
“미련한 놈.”
아픔을 못 느끼진 않았을 것이다. 엄살도 많은 편이라서 작은 상처라도 생기면 봐 달라고 낑낑대던 놈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큰 상처라도 나면 아무렇지 않은 척 넘어가는 것도 버릇이었다.
결국 잡은 손을 놓지 않고 리노가 놓아둔 상자를 뒤져 상처를 씻어낼 때 쓰던 약을 아낌없이 쏟아 부었다. 그제야 잔 떨림이 느껴졌다.
“이제야 아프냐?”
“…….”
꿀 먹은 벙어리라도 된 것인지 말이 없다. 연고를 바르고 깨끗한 천으로 감았다. 그리고 몇 번이고 말을 해 줘야 알아먹는 놈 때문에 감은 천을 매듭짓고 입을 열었다.
“숨기지 마라. 아무것도.”
“…….”
“대답.”
“응…….”
문의 상태는 좋지만은 않았다. 본인조차 속아 넘어 갈 정도로 아무렇지 않은 척 하고 있었지만, 이미 정신과 몸은 한계까지 닿아 있었다. 여기까지 넘어오면서 앞만 보고 달려왔을 놈이니, 당연한 결과지만 이렇게까지 만들어 버렸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안 그래도 창백한 낯이 푸르기까지 하는 데 입술은 떨고 숨은 거칠었다. 난 의술사가 아니기 때문에 자상이 아닌 이상 문의 상태를 봐 줄 수 없다. 하지만 일단 씻겨야 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인기척이 들렸다. 리노가 따뜻한 물과 옷을 준비해 둔 것이다. 내게 물어볼 것이 많은 놈이었지만, 그는 무엇이 급한 것인지 순서를 알고 있었다.
“정말 직접 씻긴다고?”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소매를 걷고 일어나는 나를 의심한다는 듯 리노가 물었다.
처음엔 도와줄 생각으로 움직이려고 하자 나는 경고 했다. 손이나 다리 하나 날아가고 싶지 않으면 그만 나가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런 충고를 믿을 수 없다는 눈초리로 리노는 되물었고 나는 두 번 답해주진 않았다.
날뛰는 문을 보고 싶다면 뜯어 말리진 않았다. 팔 하나 다리 하나 날아가더라도 어느 쪽이든 한 쪽만 있으면 상관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리노는 구석에 찌그러져 있는 문을 흘깃 바라보곤, 한숨을 내 쉬었다. 감당할 수 없는 짐승이라는 것쯤은 잴 수 있는 영특한 놈이다.
리노는 알겠다며 깨끗한 천과 옷을 내려놓고 밖으로 나갔다. 사람을 시켜 방안에 놓은 커다란 물통 안에선 뜨거운 물의 증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예전에는 몸 한 번 제대로 만져본 적이 없었던 문이었다.
그러나 어찌 된 것인지 회귀하면서는 몇 번이고 문을 씻겨 준 것 같다. 다 큰 사내를 씻긴다는 건 내키지 않았지만 들짐승 같은 놈은 씻는 걸 좋아하지 않아 스스로에게 맡겼다간 냄새나서 곁에 둘 수 없을 것이다.
난 구석에 있는 문을 바라보았다.
“이리 와.”
문이 고개를 젓는다.
물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 때문인지 몰라도 배를 타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고, 목욕도 자주 하지 않았다.
당시엔 잦은 전쟁으로 몰랐었는데, 유독 그에게 피비린내가 고약했던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몸이 아픈 탓인지 유난히 오늘은 더 씻기를 거부하는 문에게 다가갔다.
커다란 몸이 구겨져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겁은 왜 먹은 것인지 내 눈치를 보고 있는 문을 바라보다 나도 모르게 웃어 버렸다. 그런 나를 낯설다는 듯 바라보지만, 곧 움츠렸던 몸에 힘이 풀리는 문에게 손을 뻗었다.
“아프지 않을 거다. 그러니 이리 와.”
“그럼 해줘.”
문은 갑자기 뭔가를 해달라고 했다. 일단은 씻기는 게 우선이기 때문에 무엇인지는 듣지 않고 그렇게 하겠다고 달랬다. 그러자 문은 내 손을 잡고 일어나 얌전히 따라와 옷을 모두 벗었다.
짐승의 사체에서 묻은 피와 살점들이 붙어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전쟁 당시 보았던 문의 몸에 나 있는 빼곡한 상처들에 비하면 오물이 묻은 것을 빼곤 깨끗했다.
하지만 곧 저 하얀 몸 전체에 상처가 생길 것이다.
하나 둘 늘어나는 상처가 온 몸을 덮고 마르지 않는 피들이 흘러 짐승을 울부짖게 만들 것이다.
그렇게 버틴 것일까. 그렇게 온전히 혼자서 버텨온 것일까.
알몸인 문을 통 안에 들어가게 하고 깨끗한 천으로 몸을 닦아 주었다. 굳은 피가 떨어지지 않아 몇 번이고 문질러 털어내고, 은발을 더럽히고 있는 것들도 씻겨냈다.
몇 번을 그렇게 닦아주자, 문은 밤하늘의 달빛처럼 맑아 졌다.
살결이 마치 아이의 것처럼 부드러웠다. 태양에도 화상을 입어버릴 정도로 피부가 약한 탓이다.
이제 대충 씻긴 것 같아서 닦아 주었던 천을 빼 내고 통 안에서 나오라고 말하려는 순간이었다.
빠져나가는 내 손을 붙잡은 문이 나를 바라보았다.
“해준다며.”
“무얼?”
문은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조금 의아한 시선으로 문을 바라보았고, 그런 시선을 눈치 챈 녀석이 미소를 짓더니 시선을 아래로 옮겼다.
그리고 그것을 따라 내 고개도 내려갔고 거기서 나는 흉물스러운 것을 보게 된다.
낯빛이 흙색이 되어 가는 느낌을 온전히 느낄 수 있었던 순간이었다.
뚝뚝 문의 볼을 타고 내려오던 물방울이 입술과 턱을 타고 떨어졌다.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어버린 채 그런 물방울 소리를 듣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하는 건지 알려 줬잖아.”
“…….”
내 손을 잡아당긴 문은 팽팽하게 달아오른 것을 감추지 않고 내 팔목을 혀로 쓸어 올렸다. 체온이 느껴지는 이질적인 느낌에 힘을 주어 당기듯 손을 뺐다. 이번엔 쉽게 빠져 나왔다. 달아오른 몸을 참을 수 없었는지 입술과 귀가 붉어진 문은 나른하게 통에 몸을 기댔다.
“해줘…….”
신음하듯 애원하는 목소리였다.
끊임없이 나를 상대로 유혹하는 그 목소리에 순간적이지만, 이성을 잃어버릴 것 같은 충격이 느껴졌다. 단 한 번도 문을 상대로 생각해 본적이 없었던 감정이었다. 아니, 그것은 응당 문 뿐만이 아니었다.
살아 있는 것에는 경험한 적 없는 느낌에 나는 조금 당황했다.
때릴까. 어딘가를 두들겨 패면 알아서 가라앉지 않을까.
엉뚱한 생각을 하면서도 그것으로 해결이 되지 않는 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라마…….”
재촉하는 듯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풀린 붉은 눈동자가 온전히 나를 향해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문이라도 그 짓을 또 해 줄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알아서 해결하라고 손을 떼고 일어나려는 순간 문이 긴 손을 뻗어 내 팔을 붙잡아 끌어 당겼다.
덕분에 문이 들어간 비좁은 통 안으로 내가 들어가고 말았고 많이 더럽진 않지만, 씻겼던 물 안에 들어왔다는 생각에 더러워 몸서리치며 나가려 하자 뭔가가 나를 짓물렀다.
“맞기 전에 놔.”
문이 나를 바라보았다.
“지켜. 약속.”
약속이라는 단어는 어디에서 배운 것인지 빠져나갈 수 없게 만들었다. 결국 입술을 깨물던 나는 한탄하듯 숨을 토해내자 문이 밀착하듯 내게 다가왔다. 그런 문을 손을 뻗어 막았다.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경고였다.
“움직이지 마.”
낮은 목소리로 말하자, 문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결국 나는 석상처럼 움직이지 않는 문을 보고서야 시선을 내릴 수 있었다.
육안으로 보기에도 단단히 달아오른 그것은 금방이라도 고통을 호소하듯 움찔 거리고 있었다. 성인의 몸이라 그 크기도 만만찮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흉물스러웠다.
남의 것을 본 다는 건 전혀 유쾌한 것이 아니었다. 하물며 저것을 만져야 하는 내 기분을 문은 전혀 헤아리질 못할 것이다.
그러나 제대로 알지 못한 채 한 약속도 약속이다.
약속은 약속.
문에게 욕정을 풀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줬지만, 내가 직접 풀어주는 짓은 해 본적이 없다. 쥐고 흔들면 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손이 가는 건 쉽지 않았다.
전쟁 때도 이런 식으로 긴장한 적이 없었는데 말이다.
어디선가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 웃음소리를 쫓아 고개를 들어보니, 문이 웃고 있었다. 저밀 듯 웃고 있었지만, 기분이 나빠져 표정으로 드러나자 갑자기 문이 손을 뻗어 내 뒷목을 감쌌다.
그대로 잡아 당겨 내게 입을 맞춘 문은 내가 무어라 하기도 전에 통 안에서 빠져나왔다.
통 안에서 빠져나온 문을 바라보았다. 길게 늘어트린 젖은 은발이 아슬아슬하게 몸을 가려주고 있었다. 그런 눌러 붙은 은발을 손으로 쓸어 올린 문의 그곳은 잠잠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토해내지도 않고 저런 게 가능하나 싶을 정도로 말이다.
문의 분위기가 위험해질 정도로 변해가고 있었다. 뚫어 져라 그것을 바라보던 내 앞으로 문이 다가왔다.
“아……. 잡아먹고 싶어.”
어느새 귓가로 다가온 녀석이 내 목을 물어뜯으려고 입을 벌렸다. 난 그대로 손을 들어 낯짝에 박아 주었고 문은 뒤로 물러났다. 끄응-거리는 강아지 소리를 내고선 말이다.
이성이 돌아와 나 역시 식은 몸으로 통 밖으로 나왔다. 아무래도 난 목욕을 한 번 더 해야 할 것 같았다.
***
“너희들 혹시 에덴 출신이야?”
내가 다시 한 번 목욕을 마칠 동안 많은 생각을 하고 정리를 하고 있던 모양이었는지, 개운하게 목욕을 마치고 나온 내게 리노가 물었다.
문은 내 뒤에서 졸린 모양인지 몇 번이고 눈을 끔뻑이고 있었다.
“아니.”
“그럼 대체 슈레이를 어떻게 어디까지 아는 거야.”
“놈에게 물어.”
“왜 바로 슈레이에게 가지 않았어? 여기로 오는 것 보다 빨랐을 텐데.”
“들어야 할 것이 있기 때문이다.”
“뭐?”
내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허나, 곧 알게 될 것이다. 나는 문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졸리면 구석에 가서 마음 놓고 잠을 자도 될 것인데도 내게 떨어지지 않는 고집스러운 녀석을 바라보자 리노의 시선도 곧 문에게 갔다.
“저 짐승이 왜?”
역시 눈치가 빠른 놈이다.
잠이 들지 못하는 문의 얼굴을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자 문은 서서히 고개를 숙이더니 곧 내 다리 위로 머릴 눕혔고 그대로 잠이 들었다.
그런 내 모습을 바라보던 리노는 잠시 말을 잇지 못하고 바라보다 무심코 입을 열었다.
“길들이는 게 경이로울 정도네….”
문의 숨소리가 고요해 졌다는 것 확인한 뒤 리노를 바라보았다. 문을 바라보고 있던 리노는 내 시선을 느끼자마자 고개를 들었다.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놈에게 물었다.
“기(氣)의 성질이 변할 수도 있는가?”
“불가능 해. 사람마다 고유의 기(氣)라는 건 반드시 존재하니까.”
“정반대의 기(氣)라도?”
“대체 무슨 소릴 하고 싶은 거야?”
난 잠시 침묵했다.
움직임이 없는 문의 머리에 닿은 손에도 버젓이 전해지는 나와 비슷한 성질의 기(氣). 그러나 의문점은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내겐 그 어떠한 상처도 없어.”
“그거야, 네 짐승이 지켜줬겠지.”
“난 한 번 절벽에 떨어졌었다.”
“…….”
“하지만 보다시피, 내상은커녕, 조그마한 외상조차 없지.”
나는 야누스 절벽 밑으로 떨어졌었다. 아무리 그곳이 물 위였다 하더라도 어딘가 파헤치거나 찢긴 상처가 안 생겼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잠복폐렴이라고 했으나, 아슬아슬하게 목숨을 이어나갈 정도는 견딜 수 있었다. 그건 뒤늦게 약을 먹인 문 때문만은 아니었다.
뭔가가 안 좋은 쪽으로 변화되었다. 그것은 인정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불쾌한 것이었다.
“모르는 건가.”
“모르고 말고가 아니라, 말이 안 된다니까?! 애초부터 성질을 바꾼다는 자체가!”
신이 내렸다는 의술사 조차도 황당하다는 결론이었다.
나 역시 기우라고 믿고 싶었다. 그러나 꺼림칙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더 늦기 전에 알아야 했다.
“착각이겠지. 절대 그럴 수 없어. 아예 처음부터 불가능 하다고. 기(氣)의 성질이야 억지로라도 변할 수 있다 쳐도 그건 아니야.”
“나도 네 말이 사실이면 좋겠군.”
“진짜라니까!”
열변을 토하듯 내뱉는 리노의 말에 나도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고 결론지었다. 그저 나는 우연과 기회가 맞물려 지독하게도 운이 좋았다는 것 밖에 설명이 되지 않았다.
내 무릎에 태연히 누워 잠이 든 문을 바라보았다.
예전엔 그저 아무런 생각도 없이 본능에 따라 살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문은 그 어떤 이들보다 복잡하고 단순하며 본능적이고 이성적이었다.
흑과 백이 뚜렷한 놈인 줄 알았지만, 그 모두를 공존하고 있다는 것에 몇 번이고 놀라지 않았는가.
하지만 그 본질은 지나치게 순수해 무엇이든 쉽게 물들였고 반응을 보였다.
그 모습이 가나 이상으로 아슬아슬해 보인다.
“날 찾아온 게 그런 걸 묻고 싶었다는 거야?”
“속이 시원하진 않군.”
“가령, 그것이 가능 하다고 해도……. 그렇게 되면 너무 불쌍하잖아.”
그래서 그 가령을 막을 수 있는 방법 정도는 알고 싶었다.
나조차도 말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내가 침묵하자 리노는 더 입을 열지 않고 복잡한 표정으로 밖으로 나갔다.
손을 들어 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미동도 없는 들개는 움츠린 채 온전히 내게 기대어 있었다. 지치고 무너져 내리면서도 그렇게 웃던 아이였다.
문…….
“그러지 말아라…….”
하루라도 빨리 움직여야 했다.
회귀하면서 뒤틀린 모든 것을 맞춰야 했다. 손끝이 차가워지는 듯 아려왔다.
문은 잠에 취해 있으면서도 앓는 듯 말하는 내 손을 붙잡았다.
***
밖으로 나온 리노는 잠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딘가 꽉 막히는 듯한 답답함을 느끼고 있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두 놈들이 들어왔다. 두 명다 환자였는데, 치료를 해줬음에도 불구하고 내복하고 있는 병이 언제든지 터질 것처럼 아슬아슬했다.
안면이 있던 것도 아니었다.
수많은 병을 치료했고, 그 때문에 의술사로서 가질 수 있는 모든 명성을 얻었다. 하지만 그만큼 많은 사람이 죽었다.
불치병도 있었고 치료 시기가 늦은 것도 있었다. 하지만 분명하게 깨달은 것은 자신은 절대로 신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살아 있는 것에는 그만의 수명이라는 것이 있고 인체는 치사량을 넘기면 반드시 사망한다. 그건 결코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런 의술사의 모든 개념을 뒤엎는 듯한 말을 들었다.
고작 열대여섯 정도의 어린 소년에게 말이다.
그것을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기(氣)를 통해 타인의 내상과 외상을 옮겨 간다는 건 이론적으로 말도 안 되는 것이다.
그게 가능하다면, 불치병자도 살릴 수 있고 죽어가는 자도 눈을 뜰 수 있다. 하지만 분명한건 어느 한쪽을 살리려면 다른 한 쪽이 죽는 다는 것이다.
하지만 소년은 절벽에서 한 번 떨어진 적이 있다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소년에게는 쓸린 외상조차 없었다. 찬물에 닿았다면 필시 잠복했던 폐렴이 재발해 손을 쓸 수 없게 됐을 것이 불 보듯 뻔했음에도 그러지도 않았다.
그에 비하면 짐승의 상태는 심각한 수준이었다. 외상 내상 할 것 없이 맥을 짚지 않아도 숨넘어가기 직전이다. 짐승답게도 체력이 인간 수준을 넘지 않았다면 벌써 몇 번이고 죽고도 남았을 것이다.
리노는 묵힌 숨을 내 쉬듯 입김을 뿜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두 마리의 들개가 쉬고 있는곳을 바라보았다.
슈레이를 알고 있다.
에덴의 들개이기 때문에 슈레이를 알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그도 아니다. 듣고 싶은 건 한두 개가 아니었지만, 그는 일단 지켜보기로 했다.
***
문은 꼬박 하루를 자고 나서야 일어날 수 있었다.
기후가 상대적으로 따뜻한 로던프에서는 볼 수 없었던 흰 눈이 내리자 발바닥에 불붙은 강아지마냥 눈 위를 뛰어 다닐 정도로 상태는 좋아졌다.
괴물 같은 회복력이라며 리노가 곁에서 혀를 찰 정도로 말이다.
내리는 눈을 혀를 내밀어 받아먹고 있는 문은 눈처럼 새하얗게 녹아들고 있었다.
“네 똥개는 기운도 좋네.”
“…….”
리노는 어느새 내 옆에 서서 따뜻한 차가 담긴 잔을 내려놓았다. 문의 것도 준비해 놓을 정도로 무른 녀석은 할 말이 많다는 얼굴이었지만 입 한 번 열지 않았다.
“안쓰러워?”
문을 지켜보고 있는 내게 리노가 물었다. 난 그런 리노를 바라보다 차에 시선을 옮기고 한 모금을 마신 뒤 내려 놓았다.
눈 밭 위를 뛰 놀던 놈이 갑자기 뭔가를 발견 한 것인지 자세를 낮췄다. 사냥감을 바라보는 것처럼 천천히 몸을 움직이더니 이내 빠르게 움직여 뭔가를 붙잡았다. 그제야 허리를 들고 일어난 문은 내게 시선을 돌렸다.
잡은 건 눈처럼 새하얀 토끼였다.
“선택일 수 있잖아. 저 녀석이 그렇게 원해서 말이야.”
“그러면 안 되는 것이니까.”
“…….”
그러면 안 되는 것이다.
문은 그렇게 되면 안 되는 것이었다.
그 누군가의 속박도 당하지 않고 무엇보다 자유로웠다. 마음껏 달려야 할 아이에게 족쇄를 채웠다. 다른 곳을 볼 수 없게 두 눈을 가리고 오직 이를 드러낼 수만 있게 만들었다. 결과는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참혹했다.
갖은 고문으로 세뇌를 당하듯 문은 나로서 각인 되고 말았다.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문을 희생 시킨 것이다.
그리고 나는 몇 번이고 그에게 끊을 수 있는 목줄을 채웠지만, 베어낸 각인은 아물지 못하고 점점 더 곪아가지만 했다.
결국 문의 세상의 전부는 내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나의 전부가 되겠다는 문은 스스로가 의식하기도 전에 증명하고 있었다. 끊어내려는 목줄이 우습다는 듯 조이고선 나의 목을 물고 선 말이다.
그것이 너무도 가엾고 안쓰러웠다. 나 역시 세상의 전부는 문이지만, 문이 내게서 가져가지 말아야 할 것 정도는 있었다.
또 다른 토끼를 발견한 문이 다시 몸을 움직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감기에 들기 전에 데리고 들어가야 할 것 같아 몸을 일으켰다.
그때, 리노가 말했다. 이제는 식어버린 잔을 내려놓지도 않고서…….
“감춰. 그것 밖에 없어.”
귀를 붙잡은 토끼를 달고 칭찬이라도 해 달라는 표정으로 내 앞에 달려오기에 그대로 일어나 발을 들어 얼굴에 박아 주었다. 결국 잡은 토끼를 모두 놓친 문이 울상이 되어 나를 바라보았지만, 그대로 등을 돌렸다.
“씻고 들어와.”
뒤를 따라 들어오려 하기에 말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감춰라.
짐승조차 알 수 없게 숨겨라. 가엾은 아이를 위해서 감춰야 한다.
나는 그래야 한다.
***
“가겠다고?! 아, 아직 둘 다 무리해서 좋을 상태는 아니야!”
더는 이곳에 머물러 있을 여유가 없었다. 듣고자 했던 것은 모두 들었으니, 리노에겐 볼일이 없었다. 내가 만나고자 하는 사람은 정해져 있었다. 조급해 한다고 만날 수 있는 상대는 아니지만 내부에서 균열이 일어나기 전에 움직여야 했다.
“슈레이가 누군지 알고 있다고 했지. 너도 알다시피 만나고 싶다고 해서 만날 수 있는 인물이 아니야. 그와 무슨 관계인지는 모르겠지만, 트란슈는 타국인에게 호의적이지 않아. 침입자로 쫓길 수도 있다고.”
“너와 상관은 없다.”
“살려놓은 거 다시 죽는 꼴은 내가 용납 못해. 어른 말 좀 들어!”
“난 네놈보다 나이가 많아.”
“허…….”
나갈 준비를 모두 마치고 그대로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리노는 나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을 늦기 전에 찾으려는 듯 몇 번이고 고심하고 있었다. 그렇게 머리를 굴리지 않아도 조만간 또 보게 될 것인데도 말이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말해주진 않았다. 조만간 보게 됐을 때 그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수 있으니까.
나는 나가려던 몸을 멈췄다.
“조심해라.”
“뭐?”
“네게 가장 가까운 사람은 가장 먼 곳에 있는 놈이니까.”
“그게 무슨 소리야?”
“아무도 믿지 마라는 거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못 알아먹었는지 다시 되물었지만, 난 그대로 밖으로 나갔다. 리노가 뒤 늦게 내 뒤를 쫓기 위해 나왔지만, 이미 문과 함께 멀리까지 몸을 숨겨 우왕좌왕하며 우리를 찾고 있는 리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는 온전히 고개를 돌려 앞으로 걸어갔다. 문은 그런 내 뒤를 쫓아 걸었다.
트란슈는 여름이 짧은 나라이다. 대신 가을과 겨울이 길어 1년의 대부분이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이 정도 이면 보통은 식량 연도가 짧아 흉작이 오기가 쉽고 그 때문에 식량난에 시달릴 수 있으나 트란슈는 환경 적응에 뛰어난 인종이었다. 오래전부터 그들은 온실을 만들어 부족한 식량을 채웠고 기후가 좋지 않는 대신 희귀 광물이 많아 상인들의 기세도 활발했다.
그 때문인지 작은 나라임에도 유물이 많았고 듣지도 못한 발명품도 넘쳤다. 거기다 트란슈는 손재주가 뛰어난 인물이 많았기 때문에 도자기를 만드는 자라도 타국에서 훔쳐 데려갈 정도였다.
로던프는 일찍이 트란슈의 가치를 알고 몇 번이고 침략했고, 그 결과 식민지로 지배한 바가 있다. 그러나 트란슈의 반발과 이웃국의 방해로 트란슈는 로던프의 식민지화에서 벗어났으며 마침내 독립하게 된다.
그러나 트란슈는 이미 많은 걸 로던프에게 빼앗겼고 잃어버렸다. 부족한 부분을 겨우 채워 넣고 있었지만, 로던프가 파 놓은 수많은 구멍을 막이려면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로던프는 트란슈를 언제든 다시 침략해 지배할 수 있는 속국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엄연히 독립된 나라임에도 발 아래로 트란슈를 두는 오만한 콧대를 내릴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로던프가 간과하는 것은 손톱을 세우는 어린 고양이가 사실은 성장하고 있는 건 맹수의 새끼라는 것이다.
시세를 읽어야 할 것 같아 유동 인구가 많은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내가 향한 곳은 상인들이 즐비한 곳이었다. 허나 아무런 준비도 없이 엿들을 수 있을 정도로 상인들의 정보는 값싸지 않았다.
상인들을 귀로 달고 다닐 수 있는 방법은 어렵지 않았다. 나는 근처 용병 고용소로 향했다. 트란슈는 인구가 많지 않아 다른 나라에 비해 용병의 수가 부족하다.
그 때문에 트란슈 용병만으로는 한계를 느껴 타국의 용병을 고용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용병으로 앓는 것은 고작해야 반 년 정도.
운이 좋았다.
징병제에서 지원병으로 바뀐 지 얼마 되지 않아 나 같은 어린아이의 손이라도 빌려야 야 하기에 용병이 되는 건 어렵지 않을 것이다.
“안 돼. 뒤에 있는 놈이라면 몰라도 너는 안 돼.”
생각지도 못한 거부였다. 나는 잠시 할 말을 잃고 앉아서 단호하게 거절하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뒤에선 문의 히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왜지?”
“아무리 손이 부족해도 너 같은 솜털 보송보송한 녀석을 쓸 정도로 고프진 않아! 당장 돌아가 엄마 젖이나 더 먹고 와 이놈아!”
결국 용병 지원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등 뒤에선 웃음을 참지 않는 문의 소리가 들려왔다.
무언가를 다시 하기 좋은 시기인건 사실이지만, 내겐 시간이 조금은 앞당겨져 있었다면 더 나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적어도 등 뒤에서 죽어라 웃는 있는 녀석에게 목줄을 채울 일은 없었을 테니까.
등 뒤에 있던 문이 갑자기 내게 다가와 고개를 내밀었다.
“솜털 날리면서 어딜 가?”
얼굴을 밀어내고 일단 자리를 구석에 모여 있는 상자 위로 앉았다. 문을 시킬 수도 있지만, 녀석을 단독으로 움직이게 하는 것은 득보다 실이 컸다. 처음부터 일이 매끄럽게 풀리지 않자 쓸데없이 머리가 복잡해 졌다.
“뭐가 궁금한데?”
눈앞에 선 문이 고개를 내리고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금방이라도 울컥 쏟아낼 정도로 붉은 눈동자였다.
난 고개를 저었다. 지금의 문으론 아무것도 시킬 수 없다. 어디를 어떻게 튈지 모르니 나조차 조심스럽기 때문이다. 그리고 쓸데없이 눈에 띄기 때문에 정보를 얻기도 전에 귀찮은 일에 휘말릴 수도 있을 것이다.
“명령해 보라고. 죽이는 게 더 쉽겠지만, 노력해 볼게.”
“얌전이나 있어.”
어디선가 꽃향기가 흘러나왔다. 거리에 있던 모든 이들의 시선이 꽃이 들어오는 쪽으로 향했다. 근처에 있던 상인들과 그들이 고용한 용병들 또한 마친 가지였다.
꽃들은 한 무리가 되어 긴 치맛단을 끌며 마치 수면위에 떠다니는 나비처럼 걸어오고 있었다. 개중 가장 눈에 띄는 붉은 옷을 입은 자는 면사포를 벗지 않았음에도 거리의 모든 이들의 시선을 받고 있었다.
유곽의 기녀들이었다.
“오늘밤은 유곽에선 축제가 열릴 것입니다. 상단께서는 유흥의 기름을 바르고 가시지요. 가시는 길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실 겁니다.”
“그, 그럴까? 그럼 오늘 한 번 들러보도록 하지.”
기녀들은 웃음을 흘려보내면서 사내들을 홀리고 있었다. 난 잠시 그들을 지켜보다 문득 문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졸린 모양인지 하품을 하고 있던 문은 내 시선이 느껴지자 고개를 내려 나를 바라보곤 웃었다.
다시 천천히 눈앞에서 사라지는 기녀들을 바라보았다. 내가 있는 곳을 기녀 역시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어느새 내 앞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문은 기녀들의 움직임에는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았다. 한줌에 잡아 죽일 수 있으니, 경계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것이다.
“우리는 손이 부족하니, 뜻이 있거든 유곽으로 오시오.”
용병 지원을 거부당한 것을 본 모양이다. 그들이 이처럼 일자리가 필요한 부랑인들에게 일자리를 주는 건 단순한 밑밥을 뿌리는 것과 같았다. 밑밥을 먹고도 가는 녀석이 있는가 하면, 밑밥에 정신을 못 차리고 바늘을 삼켜버리는 것들을 낚기 위해서다.
그것이 생각지 못할 정도로 어리고 볼품없어도 놓아줄 생각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시세를 아는 이들이 상단이라면 그것을 아무런 의심 없이 뱉어낼 장소 또한 필요하다.
향에 취한 이들의 속을 쉽게 엿 볼 수 있는 곳. 지금의 내 몸을 받아 줄 만한 곳.
나는 상자 위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지체 없이 문에게 앞으로 해야 할 것을 지시했다. 노력해 보겠다는 말을 믿어보기로 하고 나는 홀로 향을 쫓아 유곽으로 향했다.
“허드렛일을 해야 할 텐데.”
“알고 있어.”
축제가 있기에 일손이 부족한 유곽에서도 앞 다퉈 사람을 구하기 시작했다. 껍데기가 평범한 여성과 아이라면 싼값에 의심 없이 고용하기 때문에 유곽에서 일하는 건 어렵지 않다고 생각했다.
“허나……. 일단 거기에서 기다리어라.”
분을 짙게 칠한 나이든 여인은 잠시 자리를 비웠다. 문이 혼자 하도록 내버려 두고 온 것이 마음에 걸리지만, 얌전히 하라 했으니 고용이 될 때까지 큰 사고만 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잠시 나가있던 나이든 여인과 함께 익숙한 향이 들어왔다. 그는 화려한 붉은 나비였다. 면사포를 내린 그의 긴 금발이 눈에 들어왔다.
“고개를 들라.”
차가운 그의 목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어쩐지 머리가 아파오는 향이었다. 지나치게 독해 스스로도 좀먹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할 정도로 말이다.
“이름은?”
“가나…….”
“올해 몇 살이지?”
“열 넷.”
붉은 나비는 역할 정도로 강렬한 향과 함께 내 앞으로 다가왔다. 향에 눈살을 찌푸리자 내 턱을 잡아 찬찬히 뜯어보던 나비는 얼핏 웃음 지었다.
“사내를 안 적이 있느냐.”
“없다.”
“…….”
그는 잠시 말이 없었다. 늙은 여인과 시선을 마주치더니, 모르는 이들이라면 알 수 없는 신호를 주고받았다. 그리곤 천천히 일어나 나를 외면하고 밖으로 나가려는 듯싶었다.
“시중은 그 아이에게 받겠다. 가나. 따라오너라.”
이곳에서 ‘라마’라는 이름은 숨겨야 했다. 내 존재를 드러낼수록 이득이 될 것은 없기 때문이다. 가령, 나를 추적하고 있을 놈들의 방해를 사전에 막기 위함이다. 알고 있는 수많은 이름 중 아무 이름이나 댔으면 될 일이지만, 가나의 이름을 대고 말았다.
“출신이 어디지?”
“보던.”
나비가 움직임을 멈췄다.
붉은 옷을 입고 있는 그는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처연한 눈으로 동정을 하듯 바라보았다. 나의 볼에 손을 올려 조심히 쓸어내리기 시작한다. 볼에 닿는 미지근한 체온이 기분 나빴다.
“가엽게도…….”
이미 한 차례 용병들이 쓸어버린 보던의 소식을 들은 것이다. 로던프 내에서도 극비리에 진행되었던 들개 사냥을 나비가 알고 있다는 것에는 그다지 놀랍지도 않았다. 장차 첫 전쟁의 씨앗이 될 인물이니 그 정도는 당연한 것이니까.
기분 나쁜 손을 피해 고개를 움직였다. 트란슈는 동성혼이 가능하다. 황제의 자리에 오른 자 역시 마찬가지다. 오히려 이곳에서의 동성혼은 신성하다고까지 알려져 동성혼을 하도록 권유를 할 정도이다.
때문에 트란슈는 오랜 벗과 같은 사람과 혼인을 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동성혼에 대해 배타적인 시선을 가진 로던프와는 전혀 달랐다.
나는 기녀라 불리어 나비의 모습을 하고 있는 나방이 여자가 아닌, 남자라는 걸 알고 있었다. 트란슈에서 남자가 기방에 앉는 것은 흔한 일이다.
“고생이 많았겠구나.”
“…….”
손길을 피해 물러나자 나비는 웃으며 손을 거두었다. 그는 찬찬히 나를 바라보더니 뒤로 물러나 방 안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