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화 (18/35)

가나라고 들은 바 있지만, 그것으로 불리는 걸 허락받지는 않았기에 벤은 풀 네임을 물었다. 그러나 가나는 답을 할 수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라마의 이름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벤은 침묵하는 가나의 행동이 이상했다. 그는 가나가 말을 하지 못한다는 소식을 들은 바 없기 때문이다. 덧붙여 그가 한스덴의 양아들이라는 것과 출신에 대해서도 들은 바 없다.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벤이 들은 바 없는 것은 그가 검밖에 모르는 고지식한 사람이라는 것도 있었고, 세간의 소문에 그다지 관심이 없다는 것도 이유였다. 

“저는 작위가 기사이니, 백작의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 없습니다. 혹시 아버님과 제 작위가 낮아 불리시기 꺼려지시는 겁니까.”

그의 아버지 베펠은 이러한 점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살고 있는 인간이었지만, 벤은 달랐다. 위계와 질서를 중요시했고 그것이 흐트러지는 것을 매우 싫어했다. 특히 신분간의 위계질서는 기사의 품위와도 연결되기 때문에 함부로 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자존심은 상하지만, 백작의 사람이 원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따라야 했다. 

가나는 고개를 저었다. 말을 할 수 없다고 말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펜은 가지고 있었지만, 적을 수 있는 종이가 보이지 않아 의사를 전달할 수도 없었다. 

“저와 이야기도 하기 싫다는 겁니까.”

가나가 아니라고 고개를 다시 저으려는 순간, 벤은 몸을 돌려버렸다. 상한 자존심을 회복시켜줄 시간조차 주지 않고 돌아서 버린 것이다. 자작의 작위를 부끄러워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장차 백작의 자리를 물려받을 이가 입 한 번 열 생각을 하지 않으니, 자신을 무시하는 것 같아 불쾌했다. 

돌아선 자신을 부를 생각도 하지 않는 것 보니, 무시하고 있다는 것에 확신하고 자리를 옮겼다. 가나는 그런 벤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달려가 붙잡을 수도 있었지만 그러진 않았다. 그걸 상대가 원하지도 않을 것이며, 설명할 수 있는 길이 너무도 어렵기 때문이다. 

벗을 만들기 위해 이번 연회에 온 것이 아니니, 가나는 그저 오늘이 운이 없는 날이었다고 생각했다. 

창을 바라보았다. 달이 떠 있었다. 가나는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것처럼 가슴이 답답했다.

“우리 저택에 가면 하녀가 하나 있는데, 출신이 글쎄 보던이라고 하더라니까?”

“보던? 거기가 어딘데?”

“우리 아버지한테 들은 이야기인데, 더러운 들개들은 모두 그곳에서 빠져나온 거라던데?”

“들개를 하녀로 쓰고 있다니, 자네도 참 안됐어.”

“내가 미쳤어? 그런 쓰레기를 거두게? 진작 모스로 팔아버렸지.”

가나가 듣고 있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그들은 수다를 멈추지 않았다. 어린 아이들은 영악하게도 무엇이 먹잇감이 될 것인지 정확히 알고 물어뜯고 있었다. 가나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테라스 밖으로 나왔다. 그들은 가나가 피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크게 웃으며 들리지도 않는 험담을 계속했다. 

그들은 테라스로 나간 가나를 흘겨보더니 고갯짓을 해 돌아갔다. 신분을 믿고 버티고 있는 가나가 불쾌했다. 

어떻게 해서든 적을 더 만들어 싶어 그들은 방금 전까지 가나와 함께 있었던 벤에게 다가갔다. 

벤은 여자아이들에게 인기가 좋아 가나와 떨어져 얼마 지나지 않아 꽃에 둘러싸여 난감해 하고 있던 차였다. 그 모습이 어쩐지 배가 아파왔지만, 최연소 기사작위를 가진 상대를 적으로 돌려서 좋을 건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경. 잠시 이야기를 나누시지 않겠습니까?”

“아, 좋습니다. 레이디,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겨우 꽃밭에서 빠져나온 벤은 숨을 돌렸다. 백작의 자제와 함께 있을 땐 근처에도 다가오지 않던 사람들이 멀어지는 순간 다가와 질문공세와 호감을 표현하니, 당황한 건 벤이었다. 

“인기가 좋으시군요.”

“조금 힘들었는데, 감사합니다.”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무엇이 말입니까?”

“방금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잖습니까. 잠잠하던 레이디들이 어째서 갑자기 몰려들었는지.”

“그거야,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중이었으니 끼어드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겠죠.”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한 명의 레이디가 가까이 다가와 홍조를 감추지 않고 말했다. 

“레논가의 여식 세르나입니다. 연회가 낯설어 그러니, 경께서 리드를 해주시지 않겠습니까?”

“아……. 죄송합니다. 저도 연회가 처음이라, 도움이 되질 못할 것 같습니다.”

“어머,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괜찮습니다.”

“저는...”

거절을 어려워하는 벤을 바라보던 사내들은 호탕하게 웃더니, 자신들이 해 주겠다며 말했다. 그러나 레이디는 불쾌함을 감추고 잠시 침묵하더니 가지고 있던 부채를 들어 왼쪽 뺨에 댄 뒤 벤을 바라보며 부채를 열었다 닫고 새침하게 뒤돌아 지나쳤다. 

“레이디께서 화가 나셨군요.”

“네?”

벤이 뜻을 알 수 없다는 듯 묻자, 입을 열었던 사내가 말했다. 

“왼뺨에 댄 것은 싫다고 단호하게 거절한 것이고 경을 보고 부채를 열었다 닫지 않았습니까?”

“그것도 뜻이 있는 겁니까?”

“당신, 정말 나쁘다는 뜻이죠. 미움 받아 버렸군요.”

“어쩔 수 없는 것이죠. 그보다, 그 이야기는 뭡니까.”

“레이디는 더러운 걸 싫어하지요. 특히 천박한 것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죠.”

“모욕적이시군요.”

“경을 두고 하는 건 아닙니다. 옆에 있던 것이 문제였지요.”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그분을 왜..”

“그분이라니요. 이렇게 소식에 약해서야. 그 들개야 말로, 귀족들의 수치가 아니겠습니까.”

벤은 입을 열지 않았다. 사내는 벤의 경청하고 있는 모습에 기회를 잡은 것이라 확신하고 말을 멈추지 않았다. 

“보던의 들개 출신으로, 운 좋게 한스덴의 양아들로 들어왔습니다. 그냥 천민도 아니고 더러운 들개였단 말입니다. 듣기론 들개출신은 죽은 사람의 사체도 뜯어 먹는다고 하더군요. 역겨운 놈. 덧붙여 말도 못하는 벙어리라고 하더군요. 문호가 될 수 있었던 것도 백작의 작위를 이용했다고 합니다. 저런 근본도 모르는 쓰레기가 연회에 있으니, 물이 흐려지는 겁니다. 그러니 경께서도...”

“그대의 집안 작위는 남작이라고 들었습니다. 아닙니까.”

잠자코 듣고 있던 벤이 입을 열자, 사내는 말을 멈추고 벤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눈앞까지 다가온 벤은 거대한 키로 위협하듯 노려보았다. 

“예?”

“그리고 그대는 그 어떠한 작위도 없다고 들었습니다.”

“경?”

“그대는 나를 경으로 부르는 것도 허락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감히 작위도 없는 귀족이 백작 가문과 문호를 함부로 올리다니, 남작의 휘장이 그리도 굳건하던가. 공식으로 죄를 묻기 전에 눈앞에서 사라져라.”

벤의 위압감에 당황한 사내는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벤은 한숨을 쉬고 고개를 돌려 가나를 찾았다. 

자신이 얼마나 무례했는지 알기에 사과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연회장 안에서는 가나를 찾을 수 없었다. 자신의 언동에 상처받아 돌아가 버렸을 수도 있지만, 다행이 한스덴 백작은 아버지와 이야기 중에 있었다. 그렇다는 건 아직 가나가 자리를 떠나지 않았을 거라 생각했다. 

시선을 돌려 쫓은 보람이 있었는지, 테라스에 있는 가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벤은 그곳으로 걸어갔다. 

자신의 무례함을 어떻게 용서받아야 할지 고민하면서 문을 열자 소리를 들은 가나가 고개를 돌려 벤을 바라보았다. 

그저 사과만 하면 끝날 것이라 생각했지만, 얼굴을 보자 그 답지 않게 당황했다. 

“바람이 차갑습니다. 안으로 들어오시지요.”

가나는 벤을 바라보다 눈동자를 내려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벤은 그가 단단히 화가 났다고 생각했다. 결국 그 옆으로 다가선 벤이 어색한 침묵을 느끼고 서 있었다. 어디를 바라보는 것인지 알 수 없는 가나의 시선을 따라가 보았지만,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결국 바라보는 건 가나의 얼굴이었다. 

곱슬곱슬한 금발머리카락이 귀까지 덮고 있었다. 가늘고 작은 체구와 흰 피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어쩐지 초조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레이디 이상으로 불편했지만, 벤은 물러서지 않았다. 

“사교에는 서툴러 제가 실수를 범했습니다. 마음에 두고 계신다면, 부디 너그럽게 생각해 주십시오.”

벤의 말에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던 가나가 시선을 돌렸다. 차가운 눈동자였다. 그러나 아름다웠다. 에메랄드를 눈앞에 두고도 이렇게 아름답다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말이다. 

가녀린 몸과 수려한 얼굴과 잘 어울리는 근사한 눈동자였지만, 어쩐지 상처가 있어보였다. 손가락질 하던 귀족들 때문일까. 혹 자신의 언동이 상처가 된 것일까. 

“죄송합니다.”

솔직히 말하는 벤의 태도에 가나는 조금 놀랐다. 

자존심이 강한 사람으로 보였다. 귀족들이 의례 그렇듯 사과라는 것을 모를 것이라 생각했고 사과를 받아야 할 이유도 찾지 않았다. 

그러나 기사신분으로 누구보다 자존심을 챙겨야 할 그가 먼저 고개를 숙였다. 

가나는 외곬으로 생각하는 사람의 뜻밖의 행동에 잠시 가만히 있더니, 곧 고개를 저었다. 

그가 무례를 저지른 것은 자신이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도록 한 행동에도 문제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럼, 용서해 주시는 겁니까?”

용서라는 거창한 말은 부담스러웠지만, 가나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딱딱하게 굳어 있던 벤의 표정이 풀리더니 미소가 지어졌다. 

“아, 혹 체스를 좋아하십니까?”

가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얼마나 미안했는지 말이 없을 것 같던 그가 익숙하지 않으면서도 노력하며 말을 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가나는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하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종이가 없었다. 

“새로 들어온 체스 말이 있는데, 상대가 없어서……. 문호께서 허락하신다면, 함께 두고 싶습니다.”

결국 가나는 대답할 방법을 찾기 위해 짧게 고민하다 벤의 손을 잡았다. 놀란 벤이 움찔 거리기도 전에 그의 손바닥 위에 검지로 글을 썼다. 

벤은 그제야 가나의 뜻을 알고 그가 쓰는 글자에 집중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아, 신경 쓰는 건 맞지만, 결코 다른 이유는 아닙니다.”

<거절하겠습니다.>

가나가 벤의 손을 놓았다. 

잠시 전해 졌던 체온이 멀어지려하자 벤은 자기도 모르게 가나의 손을 붙잡았다. 

“문호를 불쾌하게 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저, 저는 그저, 그러니까.”

가나의 눈동자가 또렷하게 벤을 향했다. 말수가 적을 뿐이지, 말문이 막힌 적은 없던 벤이었지만 그 시선에 더욱 해야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벤이 무어라 할 말을 찾으려던 사이, 벤에게 잡힌 손을 힘을 주어 빼냈고 그대로 그의 곁을 지나갔다. 벤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의 자신이 행동이 얼마나 무례했는지 재기도 전에 자신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깨닫지 못한 탓에 어지러운 머리를 헤집은 그가 가나의 뒤를 눈으로 쫓았다. 테라스에서 나가버린 가나는 시선이 닿지 않는 곳으로 숨어버렸다. 

레이디를 대하듯 손을 잡아 버렸다. 거절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되묻기 까지 했다. 그러나 그런 자신의 부끄러움보다 잡힌 손이 빠져나가는 아쉬움이 더욱 컸다. 

좀 더 알고 싶었다. 문호에 대해 좀 더 이해하고 싶었다. 그러나 섣불리 다가설 수 없는 것은 그런 자신의 마음에 혹 또 다른 상처를 줄까 염려되어서이다. 상대는 문호이자, 어엿한 사내임에도 상처 받는 것에 마음이 쓰였다. 

이 마음이 허락할 만한 사이도 아니지 않는가. 

자신이 왜 그렇게 문호에게 마음이 쓰이는 것인지 고민하다, 결국 비슷한 해답을 찾아냈다. 벗이 되고 싶은 것이다. 자신보다 올곧은 문호와 말이다. 

그런 것이라면 이해가 갔다. 거절당한 것에 속 쓰리고 알고 싶어 초조한 것도 모두 이해가 갔다. 

***

가나는 테라스에서 나와 연회 안 안으로 들어왔다. 따뜻한 온기가 가득한 연회장 안이었지만, 이곳은 테라스 밖보다 살얼음을 걷는 것과 같았다. 

천천히 자리를 옮긴 가나는 한적한 테이블 옆에 서 있었다. 

“어디서 개 냄새가 나는 것 같군.”

가나를 지나치면서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그 소리가 조금은 커 곁에 있는 자들까지 시선이 가나에게 닿았다. 

“어머, 고약해라.”

레이디는 부채로 얼굴을 가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들과 그녀들은 저들끼리 수군거리며 가나를 배척하기 시작했다.

“내말 들어봐. 이번에 우리집안 명견들 사이에 짖지도 못한 들개 한 마리를 주어다가 던져 줬는데, 글쎄 우리 개들이 그 들개를 물어뜯어 시원하게 죽여 버렸다는 거 아니야. 그 벙어리 들개는 죽는 순간까지 소리 한 번 내지 않고 죽더군. 정말 쓸모없는 개라니까.”

그 소리를 들은 이들은 웃기 시작했다. 누구의 이야기를 빗대어 하는 것인지 알기 때문이다. 

한스덴은 그 소리를 듣고 가나를 발견 하게 되었고 모욕당하는 자신의 아들을 위해 걸음을 옮기려던 순간이었다. 한스덴의 어깨를 붙잡은 베펠이 고갯짓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어느새 성큼 다가온 벤이 있었다. 

“자고로 맹수는 짖지 않는 법입니다.”

벤이 말했다. 듣는 이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개가 짖는 이유는 두려움 때문이죠. 아주 시끄럽고 거슬리게 말입니다.”

눈치를 보던 귀족 자제들이 물러났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던 베펠이 한스덴에게 말했다.

“좋은 벗이 될 거라, 그랬지요?”

“그렇군. 든든하겠어.”

“걱정마십시오. 제 아들놈입니다. 문호에겐 큰 힘이 될 겁니다.”

한스덴은 그제야 안심하듯 웃었다. 베펠은 그제야 한스덴의 얼굴에 빛이 난다며 놀렸다.

두 아이들의 모습에 한스덴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가디언으로 데려온 아이들에게조차 정을 주지 않으려던 아들이었다. 요령이 없는 아이들은 처음부터 무관심한 주인에게 다가오기는커녕 더욱 더 어려워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벤은 오히려 그런 가나에게 다가와 편이 되어주었다. 

부디 딱딱하게 굳어버린 아들의 심장을 녹여주길 바랄 뿐이었다. 

연회가 늦어지자 한스덴은 가나에게 지정된 방으로 돌아가 쉬라고 말했다. 가나는 그렇겠다고 고개를 끄덕였고 옆에 있던 베펠은 벤에게 다짜고짜 어른들의 시간이니 방으로 가라면서 밀었다. 

급하긴 하나 사이가 좋은 벗이 되려면 이렇게라도 떠밀어야 한다는 걸 알기 때문이기도 했고 요령 없는 아들에게 기회를 만들어 주려는 것도 있었다. 

그런 속 깊은 아버지의 마음을 알 리가 없는 벤은 어머니가 술을 너무 많이 마시지 않게 감시를 하라고 했다며 자리를 버티려 했다. 그러나 베펠은 여기까지와 아내의 잔소리는 필요 없다며 기어코 벤을 밀어냈다. 

가나는 이미 밖으로 나가 보이지 않았고 벤은 그 뒤를 아버지의 떠밀림에 나가면서도 먼저 나간 가나를 찾았다. 그러나 눈앞에서 가나는 멈춰 있었다. 이유가 무엇인가 하여 시야를 넓혀 보았더니, 그의 앞에는 2왕자가 서 있었다. 

“기사. 아폴리네르 벤 폴리앙 감히 2왕자를 뵙습니다.”

무릎을 꿇어 자신의 신분을 밝히던 벤은 가나를 자신의 뒤로 보내 손을 잡아 내렸다. 그 힘에 무릎을 꿇게 된 가나 또한 벤과 함께 고개가 숙여졌다. 

“아, 그 최연소 햇병아리 기사.”

잠시 벤에게 시선이 닿았던 2왕자는 다시 가나에게 시선이 향했다. 곱슬거리는 황금빛 머리카락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무언가 생각하게 하여 속을 뒤틀리게 만드는 것 같았다. 

“너는 왜 신분을 밝히지 않지?”

벤은 입을 열지 못했다. 왕족이 말하는 중에 끼어들면, 상황은 더욱 걷잡을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먼저 묻지 않은 한 절대로 말을 해서는 안 된다. 그것 기본적인 법도였다. 

때문에 문호에 대해 오해를 할 수 있는 상황임에도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대의 시종인가? 아주 건방진 놈이로군.”

“시종이 아닙니다.”

그제야 2왕자가 묻기에 대답할 수 있었다. 기회를 잡은 벤이 멈춤 없이 설명했다. 

“백작가문에 작위는 문호입니다.”

“그걸 왜 네가 말하지? 저놈은 벙어리라도 되는 것이냐.”

“…….”

벤은 입을 열지 않았다. 2왕자는 그 침묵의 이유를 금방 알아 차렸다. 자신이 말한 대로 어린 문호는 벙어리라는 것이다. 

잠시 말이 없던 2왕자는 어린 문호를 바라보았다. 어딘가 낯이 익은 얼굴이었다. 단 한 번도 본적이 없는 얼굴임에도 묘하게도 말이다. 

그리고 엉뚱하게도 저 어린 문호와 비슷한 또래의 아이도 생각났다. 온통 까만색으로 물들인 듯 검은 것이 얼굴은 하얗고 저 아이만큼은 아니지만, 예쁘장한 놈이었다. 

그 검은 것은 벙어린 아니었지만, 말수가 적었다. 그러고 보니 최근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백치의 가디언이 원인으로 혹 무슨 사고라도 당한 것이 아닐까. 

“그놈 이름이 뭐더라...”

2왕자의 중얼거림에 벤은 2왕자를 바라보았지만, 2왕자는 그런 아이에게 시선을 두지 않고 고민했다. 

그러고 보니 고민해 봤자 이름을 들은 바도 없었다. 곁국 자신의 곁을 지키던 자칸에게 시선을 돌렸다. 거대한 덩치에 황색 머리를 한 이국적인 사내였다. 

“넌 아느냐?”

“무엇을 물으시는 것인지…….”

“그 백치 놈의 까만 꼬마 말이다. 조사 하라고 했던 거 같은데.”

“라마라고 합니다.”

일순간 가나의 고개가 올라갔다. 그의 몸은 굳은 듯 하면서도 떨기 시작했고 벤은 그런 가나의 상태가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그의 손을 붙잡았다. 

가나의 손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라마? 이상한 이름……. 요새 안 보이는 것 같던데, 이유가 뭐지?”

“사고로 야누스 절벽에서 떨어져 죽었습니다.”

“뭐?!”

2왕자는 순간 놀라 큰 소리를 냈다. 그 뒤에야 자신의 앞에 있는 두 꼬마를 바라보더니 이야기를 중단하고 인상을 쓰더니 그대로 연회장 안으로 들어갔다. 

벤은 큰 탈 없이 지나간 왕족에게 한시름 놓고 일어났다. 그러나 가나는 일어나지 않았다. 손을 잡고 있었지만, 인간이 가져야 할 체온이 느껴지지 않았다. 

안 그래도 작은 몸이 앉아 있으니 더 없이 작아보여 안쓰러웠다. 

“일어나십시오. 2왕자는 들어갔습니다.”

가나는 움직임이 없었다. 어쩐지 아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하여 자세를 숙여 가나를 바라보았다.

“문호?”

벤은 순간 숨이 멎어 버리는 것 같았다. 처연하게 흐르는 것이 눈물이라고 깨닫기도 전에 가나는 울고 있었다. 

소리도 없이 흐르는 눈물은 마치 세상을 찢는 듯한 절규가 들리는 듯싶었다. 

가나의 울음에 당황한 벤은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 생각하여 그의 어깨를 붙잡아 힘을 주었다. 

“문호! 절 보십시오.”

바닥을 향하던 눈동자가 어렵게 벤을 향해 올라갔다. 계속해서 흘러내리는 눈물과 초점이 보이지 않는 눈동자였다. 언제부터 이렇게 울고 있었던 것일까. 서러워 견딜 수 없이 가슴이 아플 정도로 얼마나 홀로 삼키고 있었던 것일까. 

울음소리 하나 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결국 어깨를 끌어 당겨 품에 안아버렸고 가나는 힘없이 벤에게 기대어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그날 보았던 산과 같았던 등이 라마가 맞았다는 것이다. 자신이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같은 공간에 있었음에도 라마를 붙잡지 못했다. 만약 그때 더욱 필사적으로 라마를 불렀다면, 더욱 필사적으로 달려갈 수 있었더라면…….

라마가 죽었다는 말은 듣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 자신이 죽인 것이다. 가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보던에 버려진 들개가 라마에게 거둬졌을 때.

용병이 들이닥쳤을 때 죽었어야 할 자신이 라마의 짐이 되었을 때. 

운명을 빼앗듯 한스덴 저택에서 라마와 헤어져야 했을 때. 

다시 한 번 마주한 그를 붙잡을 수 없었을 때. 

그런 라마를 두고도 안주한 현실에서 자신만 살아 있다는 걸 깨달았다. 

지독한 고통이었다. 

“라……. 라마…….”

눈물이 끊임없이 나왔다. 이대로 몸에 있는 수분을 뽑아내 죽고만 싶었다. 라마가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만으로도 자신을 지탱하고 있던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벤은 놀랐다. 

벙어리 인줄만 알았던 문호의 입에서 목소리가 나온 것이다. 생각보다 여리고 아름다운 미성이었지만, 자신도 모르게 울컥할 정도였다. 

그는 자신을 억누르는 슬픔에 기절하는 순간까지 그 이름을 불렀다. 

다른 말 한 번 없이 오직 라마라는 이름만 부를 뿐이었다. 

어쩌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어떤 이를 말이다. 

죽은 이를 부르며 슬퍼하는 문호가 안타깝지만, 한 편으로는 이런 사람을 버려두고 홀로 죽어버린 라마라는 자가 괘씸했다. 이 세상에 없는 자를 주고 원망하는 것은 쓸모없는 것이니 그저 더 큰 상처가 되지 않고 잊히길 바랄 뿐이었다. 

소리 없는 절규에 쓰러져버린 문호를 안아들고 맹세했다. 

작은 속을 정 없이 뚫어놓은 구멍을 자신이 채워 주겠노라고. 자신은 그 어떤 때라도 문호를 혼자두지 않을 것이며 보이지 않는 곳에서 죽지도 않을 것이다. 다시는 속울음밖에 못하는 사람을 아프게 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기사의 맹세는 목숨을 거는 선약. 

죽을힘을 다해 살 것이고, 품에 안은 이를 지킬 것이다. 

***

잔이 깨졌다. 

차를 마시려 손을 뻗었을 뿐인데, 손에 닿은 작은 잔이 힘없이 깨져버린 것이다. 깨진 잔해는 손에 상처를 냈고 뚝뚝 떨어지는 핏방울이 바닥에 떨어졌다. 

“이런, 피가!”

“별 것 아니니, 호들갑 떨지 마라.”

“피가 나오는데 무엇이 별 것이 아니야?!”

나비는 멋대로 내 손을 잡으려고 하기에 쳐내고 의자에서 내려왔다. 피가 나오는 부분을 다른 이가 건네주는 천으로 받아 감았다. 가려울 정도로 작은 상처다. 유난을 떠는 것이 보기 싫어 외면하다 나는 치워지는 깨진 잔을 바라보았다. 

불길해지긴 했지만, 더는 시선을 두지 않았다. 

한 단어를 뱉고 한 걸음을 걸어도 죽을 자리인 내게 불길하지 않는 것 따위는 없으니 말이다. 그러나 염려는 되었다. 

이 불길함이 자신만을 향한다면 문제가 없는 것이지만, 그 반대라면 서둘러야 하기 때문이다. 

축제의 마지막 밤이 다가왔다. 

생각보다 기다림은 길지 않았다. 곧 그녀석이 나타날 것이다. 설마 내 쪽에서 먼저 놈에게 다가가려는 건 생각도 못해봤지만, 지금 와서 다른 계획을 짤 수도 없었다. 

과거가 바뀌지 않았다면, 유곽의 나비와 놈이 마주칠 날은 바로 오늘일 것이다.  

“오늘이 축제의 마지막 날이란다. 손님을 받지 않을 터니, 밖에 나가 보지 않으련?”

나비가 다가와 물었다. 

그러고 보니 나비와 녀석이 어떻게 만났는지는 생각이 나질 않았다. 그저 축제의 마지막 날 놈과 나비가 우연히 만나 눈이 맞았다는 것이 내가 알고 있는 것에 전부였다. 

유곽 안에서 만났는지, 축제를 즐기던 차에 만났는지 확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어떤 절세미인도 앉지 못했다던 그의 옆자리까지 차지할 만큼 나비를 향한 놈의 애정은 극진했다고 했다. 

마냥 보기에 좋은 그림 속 꽃과 같았다면, 타국의 견제까지 받을 일은 없었을 것이다. 나비는 아름다웠다. 그 어떤 제국의 황비들도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또한 나비는 영리한 녀석이었다. 타국의 황비가 여우라면, 그런 여우의 목을 물어뜯을 수 있는 늑대처럼 말이다.

때문에 감히 그녀들은 나비를 자극할 엄두도 내질 못했다. 그는 슈레이의 든든한 조력자이자 아군이었고, 가장 면밀하고도 빠른 정보통이자 기회주의자였다. 

트란슈에서는 동성혼이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여지고 있으니, 남성이 황비가 되는 것이 자연스러울 수 있었다. 로던프의 입장에선 트란슈의 황제 다음으로 골치 아픈 사내가 황제 다음에 버금가는 권력을 쥐고 있는 것도 모자라, 그렇잖아도 이성적인 인간을 더욱 날카롭게 날을 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러했다. 

내부결속으로 이미 안에서 썩고 있는 로던프를 눈치 챈 나비는 내전을 틈타 역습을 하게 된다. 그 결과 로던프는 늙은 왕을 잃었고 남은 왕자가 왕권을 쥐게 된다. 그것이 로던프 젠 그란스. 

애송이라고 생각했던 젊은 왕은 트란슈의 뜻대로 움직여 주진 않았다. 그러나 로던프는 꽤 골머리를 썩고 있었다. 나 역시 내전에 휘말려 전쟁에 투입되었던 장군으로써 그날의 전쟁이 얼마나 질기고 끔찍했는지 낱낱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나는 나비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로던프는 움직이기 시작한다. 노련한 늑대와 같다고 생각했지만, 나비는 자신을 나방으로 비유하였다. 독 가루를 품고 있으니, 언젠가 트란슈의 유일한 약점이 되어 제 낭군까지 목숨을 잃게 할지도 모른다 말했다. 

그렇기에 나비는 검을 들었다. 

제 살길을 찾아 도망가는 로던프의 황비와 그 여식들에게는 나올 수 없는 패기였다. 차례로 목을 쳐 내리던 나비는 신기에 가까운 무예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것도 단신의 몸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황제의 정체를 알기 위해선 심문을 빙자한 고문을 통해 알아내야 했기에 당장은 죽이지 않았다. 

트란슈는 왕의 존재는 숨기지만, 황비를 숨기진 않는다. 때문에 전쟁이 발발하면, 가장먼저 죽을 자리가 황비의 자리다. 그 어떤 자리보다 목숨이 가벼울 수밖에 없을 자리였다. 그러나 그 어떤 이라도 앉힐 수 없었던 자리. 

이미 기력을 다한 나비의 날개가 꺾일 것이라 확신한 17장군의 그를 붙잡기 위해 다가왔다. 살아야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비는 그 틈을 타 가진 검으로 17장군의 심장을 뚫고 자신 또한 같은 방법으로 자살을 선택한다. 

이로써 로던프는 트란슈를 제압할 수 있었던 유일한 기회를 잃어버렸다. 

***

“가나야?”

동그랗게 눈을 뜬 나비가 얼굴을 가까이 다가왔다. 그는 손을 뻗어 내 이마를 짚었고 걱정스럽다는 듯 눈썹을 찡그렸다. 

“왜 멍하나 했더니, 열이 오르는구나. 예서 기다려라. 약만 사 가지고 오마.”

함께 축제에 나가보기도 전에, 나비는 나를 앉혀놓고 나가버렸다. 굳이 내가 함께 있지 않아도 만날 인연일 테니, 따라갈 생각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가서 나비와 만난다면 함께 돌아올 것이고 이곳에 먼저 들어온다면 돌아올 나비와 마주할 것이니까. 

그저 늦지만 않으면 되었다. 

나비의 말대로 열이라도 오르고 있는 것인지 시야가 바르지 못했다. 앞으로 1년. 나의 이야기가 시작되려면 조금은 더 기다려야 한다. 그러나 그 기다림이 초조할 수밖에 없는 것은 나는 그 어떤 때보다 불안전하기 때문이다. 

교묘하게 과거가 뒤틀렸다. 이것이 기우가 아니라면, 나에겐 아직 뭔가를 바꿀 수 있는 기회가 남아 있다는 뜻이다. 

그 생각이 끝나기가 무섭게 문이 열렸다. 

유곽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차림새만 보아도 알았다. 들어온 건 장신의 살점이 제법 붙어 있어 출렁거리는 돼지였다. 두 개로 겹쳐진 턱살을 숨기지 않고 들어온 그는 살갗에 갇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눈동자를 부지런히 굴렸다. 

유곽 안에는 나뿐이었다. 축제의 마지막 날이기도 했고, 오늘은 손님을 받지 않기로 했기 때문이다. 좀 전까지 나비가 있었지만, 약을 사러 간다며 나가버렸다. 

“뭐야, 나비. 나비는?”

혼잣말로 나비를 찾던 돼지는 육중한 몸을 틀어 나비를 불렀다. 그러나 대답하는 자는 없었다. 저대로 내버려 두면 알아서 나갈 것 같아 관심을 끊었지만, 돼지는 곧 앉아 있던 나를 발견하고 성큼 걸음 했다. 

“나비는 어디 있느냐.”

“외출 중이다.”

“뭐?”

“오늘은 손님을 받지 않는다 하니, 나가라.”

돼지가 비웃었다. 

그가 입을 열 때마다 구역질나는 땀 냄새가 나는 것 같아 불쾌했다. 닿기라고 한다면 기분이 나빠 손가락이라도 베어버릴 것 같았지만, 문에게 자제하라고 했던 내가 그럴 순 없었다. 

“내가 누군지 알고 헛소릴 지껄이느냐.”

이를 갈며 다가온 돼지를 바라보았다. 신분은 높아 보이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본디 금수로 태어나야 할 것이 사람으로 태어났으니 세상을 부조리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놈은 손을 뻗어 앞섶 겉옷을 붙잡아 끌어 당겼다. 

순간 현기증이 올라와 그렇잖아도 좋지 않았던 시야가 처참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반사적으로 올라오는 두통에 손목이라도 잘라버릴까 했지만, 이제와 소란은 참아야 했다. 

“그럼 네가 나비 대신이다.”

돼지는 품에 넣어 두었던 단검을 빼 내게 보여 주었다. 허공에 긁어내리듯 휘젓더니 썩은 눈알을 굴려 나를 훑어보았다. 기름을 비집고 나오는 혓바닥이 뱀처럼 노련하게 움직였고 그는 나를 잡아 힘을 주어 벽에 가두었다. 

발아래를 바라보았다. 허공에 떠 있었다. 돼지를 바라보았다. 그는 단검을 들어 날을 내게 보이며 웃고 있었다. 

“나비의 날개도 내가 달아주었다. 선홍빛으로 물드는 것이 황홀할 정도였다. 너도 달아주마. 네놈의 것은 특별히 크고 아름다울 것이다.”

이대로 당해줄 생각은 없었지만, 소란을 일으키고 싶지도 않다. 단검을 들고 끈으로 고정된 앞섶을 베어내더니 쇄골을 따라 천천히 검 끝으로 살갗을 긁었다. 

그것을 따라 시선을 돌리자 흥분한 돼지는 곁으로 다가와 더러운 숨을 내뿜었다. 

“비명을 질러야지. 응? 울어봐. 어서.”

붉은 피가 흘러나왔다. 

오물로 채워진 들개에게도 붉은 것이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비집고 들어오는 살점들이 몸을 더듬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를 돌려 세워 등을 보려 하자, 놈을 바라보았다. 나와 눈이 마주친 돼지는 잠시 움직이지 않았다. 

손을 뻗어 돼지의 볼 부분을 만져 보았다. 볼 부근을 만지던 나는 귓불 부근으로 내려와 거칠고 끈적거리는 살갗을 쓸어내렸다. 

숨소리가 더욱 거칠어진 사내는 들고 있던 단검을 던지고 내게 다른 한 손도 뻗으려 하는 순간이었다. 

겨우 살점 속에 숨어 있는 목을 찾아낸 나는 그대로 돌아 발을 건뒤 사내의 뒤에 올라타 목 부근을 무릎으로 잡아 반동을 이용해 넘어트렸다. 거대한 몸이 넘어지면서 요란한 소리를 냈지만, 체중과 함께 안면을 바닥에 박힌 돼지는 꿈틀거리는 것조차 하지 않았다. 

잠시 돼지 위에서 앉아 있던 나는 바닥에 떨어진 단검을 들었다. 

그리고 그대로 박힌 단검을 빼 등 뒤에서 훔쳐보고 있던 놈을 향해 던졌다. 돌아 볼 것 없이 던진 단검은 사내의 목 바로 옆에 박혀 있었다. 

지금은 감각이 둔해진 탓에 언제부터 지켜보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어둠에 숨어 있던 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가명은 슈레이. 

트란슈의 최연소 장군이라 알려진 그는 천천히 내 앞으로 다가왔다.  

그의 진짜 이름은 트란슈 레이 더 바함. 

제국의 7대 황제의 자리에 오른 자.  

흑단과 같은 검은 머리카락과 자유롭게 올라간 입 꼬리, 흔들림조차 없는 자색 눈동자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에덴의 들개……. 라고 했던가?”

내게 다가온 슈레이는 손을 뻗어 나의 턱을 잡아 들어올렸다. 그 뒤에서야 나비가 들어왔다. 나비가 돌아오고 슈레이가 모습을 드러냈으니, 더는 이 꼴로 있지 않아도 되었다. 

턱을 잡고 있는 손을 밀어내고 돼지의 등 위에서 내려오려던 나의 팔목을 붙잡은 슈레이는 그대로 허리를 감아 당겨 입술을 박았다. 

어째서…….

피가 마를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기분 나쁜 감촉이 온전히 입술에 닿았고 진득하게 눌어붙은 것은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대로 붙어있을 수는 없어 얼굴을 잡아 떼어내려던 차, 눈앞까지 달려온 나비는 내 몸을 잡고 놈의 가슴을 밀어낸 뒤 힘을 주어 떼어냈다. 

“죄송하지만, 오늘은 문을 닫았습니다.”

곧잘 들려오던 나비의 중성적인 미성이 아니었다. 

짙게 가라앉아 있는 목소리가 섬뜩하리만큼 살기가 끼어 있었다. 나는 아무리 몸이 어리다고 하나 이제 14살이다. 그런 나를 힘 하나 들지 않고 한 팔로 안고 있는 나비는 필시 남성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과거, 신기에 가까운 무예를 보여주고도 드러나지 않았던 사내다움이었다. 하지만 매달려 있는 내 상황이 내키지 않았다. 무어라 한 소리를 하고 싶지만, 몸에 전혀 힘이 들어가질 못하고 있었다. 

“그 아이, 열이 있던데.”

“당신이 상관할 바 아닙니다.”

“왜 아니지? 난 내 것의 상태를 묻는 것인데.”

뭐가 네놈의 것이라는 거냐고 말했지만, 목소리가 작아 나비에게 조차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결국 빨래처럼 매달려 있는 것이 문제라 생각하여 빠져나오려고 했지만, 생각보다 나비는 강한 힘으로 나를 붙잡고 있었다. 

나비의 눈이 날이 선채로 낭군이라고 불렸던 사내를 향하고 있었다. 

“이 아이는 사고파는 물건이 아닙니다.”

“유곽의 사람은 돈으로 살 수 있다. 그 값이 얼마냐가 다를 뿐이지. 네놈 역시 마찬가지 아니냐.”

“물건도 주인을 고르는 법입니다.”

둘 모두 대놓고 적의를 드러내고 있었다. 잠시 입을 닫던 슈레이의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아마 그때 나는 한 번 물었다 놓쳐버렸었지. 그때 다짐 했단다.”

슈레이가 검을 뽑았다. 일반인에겐 절대로 뽑지 않았던 검이었다. 어느 시점에서 이성이라는 것이 나가 버린 것인지 자신의 반쪽을 알아보지 못하고 검 끝을 들이 댄 것이다. 허나 기가 막힌 건 나비역시 품에서 검을 빼 실력의 차이와 힘의 차이가 분명하지만, 뒤로 물러나 튕겨지면서도 슈레이의 검을 막아냈다. 

허공에 칼을 휘저은 슈레이가 나를 붙잡은 채로 뒤로 물러난 나비에게 다가왔다. 

그럼에도 그의 시선은 온전히 나에게 닿아 있었다. 

“이번에야 말로 절대 놓치지 않아.”

슈레이와 에덴에서 마주한 것은 과거에는 없었던 일이었다. 놈과 내가 만나는 건 나비가 죽고 전장 위에서다. 

접점의 시기와 장소가 문제였을까. 피곤할 만큼 악화되고 있는 상황을 더는 지켜볼 수 없었다. 

보이지 말아야 할 상대에게 살기까지 품고 있는 두 놈이 돌이킬 수 없는 짓을 하기 전에 나비의 얼굴을 밀어내고 품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슈레이가 나비의 목을 베기 전에 일어나 앞을 가로 막았다. 

빠른 속도로 다가오던 슈레이가 멈췄다. 

그리고 그는 내게 손을 뻗었다. 

“이리 와.”

당연하듯 나를 부르고 제 손에 닿을 것처럼 굴고 있었다. 

“내일 와라.”

슈레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기다려주마.”

허나 곧 풀려 미소를 지었다. 나비는 그러지 못했다. 당황스러움을 숨기지 않고 일어나려는 데, 눈앞까지 다가온 슈레이를 내 턱을 잡아 두 눈을 마주 했다. 

“기꺼이, 데리러 오지.”

슈레이는 나비에게 보란 듯이 내 턱을 들어 주둥이를 대려기에, 손으로 막았다. 그러자 막은 손 위로 짧은 입맞춤을 하고 물러갔다. 

방으로 돌아가려는 나를 붙잡은 건 나비였다. 단순히 화가 난 표정은 아니었다. 터져 나오는 것을 간신히 짓누르고 있는 표정으로 떨더니 눈을 감았다 뜨면서 진정하려는 듯 했다. 허나 나를 붙잡은 것에는 변명은 없었다.  

“너는 대체,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알고 그런 것이냐.”

“그러면 너는, 누군지 알고 검을 겨루려 했지? 상대도 안 된다는 것 정도는 알았을 텐데.”

“지금 나는 그것을 묻고 있는 것이 아니다.”

본래 나를 만나기 전에 인연이 닿았어야 할 놈들이었다. 뜻하지 않게 둘 모두 서로를 보기 전에 나를 먼저 만나 버렸다. 

나와의 인연보다 훨씬 질겨야 할 것이 그 둘의 인연일 테니까. 누구를 먼저 만났다는 그런 소소한 순서가 뒤틀린다 한들 달라지는 건 없다고 생각했었다. 

입술을 깨물고 분노를 삼키던 나비는 나의 어깨를 잡아 놓지 않았다. 이내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는 다는 듯 내 손목을 잡고 밖으로 나가려 했다. 나는 다리에 힘을 주고 버텼다. 

“뭐 하는 짓이지?”

“가자. 어디든 가자.”

“어째서?”

“그렇다면 내일 놈이 널 데려가는 걸 나보고 지켜보라는 것이냐!!”

답지 않게 흥분한 얼굴로 목소리를 높이는 나비를 바라보다 잡힌 팔목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내 비록 몸을 파는 신분이나, 지키고 싶은 것 한 가지는 있는 것이다.”

“그게 나라고 말하고 싶은 건가.”

더는 나비의 입술이 열리지 않았다.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 한 것이다. 연을 맺을 정인을 눈앞에 두고도 알아보지 못하고 눈앞에서 그을려버린 흔적만을 쫓는 장님과 같이 행동했다. 

슈레이 역시 비슷한 눈을 하고 있었으니 이놈과 다르지 않을 터. 어쩌다 서로를 향해야 할 시선이 내게 닿아 버렸는지 이해할 수 없지만, 이어진 연줄이 그렇게 얇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이들은 그저 착각을 하고 있을 뿐이며, 서로 약간의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문을 제외하고 나올 일이 없었던 한숨이 기어 나왔다. 

나비는 나를 끌어 당겨 가까이 두 눈을 마주 했다. 그리고 필사적으로 나를 설득시키려는 듯 말했다. 

“어떻게 그런 사람을 알고 있는지는 묻지 않겠다. 위험한 사내다. 그러니, 부러 잡히지 말고 도망을 가.”

“네놈이 보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그러니 섣불리 판단하지 마라.”

잠시 침묵하던 나비는 지그시 손에 힘을 주고 나를 바라보았다. 뜻대로 되지 않아 불쾌함을 감추지 않고 있었지만, 아까처럼 이성을 잃고 소리를 높이진 않았다. 

“그렇다면 나도 가겠다. 너는 내 사람이니까. 책임은 내게 있다.”

이 놈이고 저놈이고, 뭐가 제 사람이라는 것인지 물으려다 포기했다. 말을 한다고 들을 상대도 아니며, 둘 모두 고집이 강하니 하지마라고 하면 더할 놈들이다. 

결국 알아서 깨닫는 수밖에 없었다. 

처음부터 그렇게 됐어야 했기에 따라 오겠다는 나비를 내치는 말은 하지 않았다. 나비가 슈레이의 사람이 되는 운명은 바뀌지 않을 테니까. 당장 나비가 황비가 되지 않더라도 언젠가 그렇게 될 것이라는 것에 나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전에는 없었던 굴곡이 생겨버린 탓에 시작이 좋질 못했다. 

결국 둘 사이를 방해하는 입장이 돼 버린 나는 골치가 아파왔지만, 이것은 나중으로 미뤘다. 

“맘대로 해.”

붙잡고 있는 나비의 손을 털어내고 등을 돌렸다. 

***

열이 들끓고 있었다. 예상을 하고 나비가 준 약을 먹긴 했지만 쉽게 떨어질 생각은 하지 않았다. 몇 번이고 나비의 인기척이 느껴졌지만, 신음소리 한 번 내지 않아 잠이든지 알았는지 잠가둔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일은 없었다. 

1년만 버티면 되었다. 

병마에 시달리는 것도 15살이 되었을 때, 모두 극복이 가능했다. 지금이라고 다르진 않을 것이다. 

입이 말라오는 열기에도 숨소리 한 번 제대로 내지 않았다. 오랜 시간 그렇게 훈련받아 왔고 그렇게 버티는 것이 당연했기 때문이다. 눈을 감고 한 동안 움직이질 않았다. 그 때였다. 들어왔다는 기척은 없었는데, 무언가 앞에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눈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을 확인하려 눈을 떴지만, 시야가 일그러진 탓에 확인이 되지 않았다. 

타는 목마름이 혓바닥까지 굳게 만들어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눈앞의 것이 갑자기 사라지더니 몸이 조금 뜬다는 느낌과 함께 입 안으로 뭔가가 들어왔다. 

말라 있는 입술에 닿은 것은 물이었다. 그러나 받아먹는 것이 서툴러 정작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것은 적었다. 

갑자기 물을 주던 놈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잠시 물을 주는 것을 중단하는 것 같더니 순식간에 입술을 덮고 고스란히 목구멍 속으로 물이 들어왔다. 

넘어가는 물을 모두 받아먹고 나서야 손을 들어붙어 있는 얼굴을 밀어냈다. 

“하아…….”

소리 한 번 내지 않던 입 밖으로 신음이 튀어 나왔다. 지그시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그것은 눈앞까지 다가왔고 붉은 것과 마주쳤다. 

“…….”

지긋하게 느껴지던 통증이 희석되는 것 같았다. 눈앞의 것이 무언인지 알면서도 무작정 손을 뻗어 그것을 붙잡았다. 흘러내리는 무언가가 얼굴을 간지럽게 했다. 또렷하게 나를 향하고 있는 붉은 것이 탐이 날 정도로 아름다웠다. 

유일한 나의 것. 

“문…….”

눈을 떴다. 아침이었다. 몸을 일으키자 곧 새털처럼 가볍고 개운하다는 걸 느꼈다. 그러나 반사적으로 인상이 써졌고, 나는 창가를 바라보았다. 이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아무런 것도 없는 것 또한 아니다. 

열은 없어졌지만, 더한 통증을 느끼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밖에 소란이 있다는 걸 알고 내려가자 멀지 않아 원인을 알게 되었다. 

대치하고 있는 둘은 어제부터 이상하게 날이 서 있던 두 놈들이었다. 

“그 아이는 사고파는 물건이 아니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유곽의 것은 매매가 합법이다. 라고, 어제 말했던 거 같은데.”

“유곽의 것이라는 전제이겠지요.”

“것?”

“유곽의 소유가 아닌, 제 소유라는 겁니다.”

나비는 흐트러짐 없는 얼굴로 말했다. 기죽음 하나 없이 똑바로 슈레이를 향하면서 눈을 피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살기를 감추는 것에 능숙한 슈레이가 보는 눈이 많아 자제를 하고 있었지만, 그는 누구나 눈을 마주볼 수 있는 사내는 아니다. 과연 나비답다고 생각하면서도 상대가 어떻게 돌변할지 모를 상황에서 자극은 지나치게 무모한 행동이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슈레이는 감추고 있던 발톱을 조금 드러냈다. 

언제든 눈앞의 것을 쥐어 비틀어 버릴 수 있는 강하고 예리한 것이었다. 그러나 나비는 날뛰려는 짐승을 다루는 능숙한 사육사처럼 입술을 열었다. 

“그러니, 저를 사시면 됩니다.”

“…….”

슈레이는 잠시 말문을 닫더니, 곧 웃음을 내비췄다. 헛웃음이었다. 본인이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는지 몇 번 그렇게 웃더니 한 걸음에 나비의 눈앞까지 다가왔다. 

그리곤 나비의 턱을 잡아들어 품평을 하듯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기대에 못 미친다는 듯 혀를 차며 말했다. 

“배보다 배꼽이 크겠군.”

유곽 최고의 창기를 조롱하듯 나비의 턱을 놓았다. 쳐내듯 놓고 사람을 불러 값을 지불하라 말하며 시선을 돌렸다. 

그 탓에 위에서 지켜보고 있던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저것이 나중에 어쩌려고 저러는 것인지, 나비를 무시하고 내 앞으로 걸어와 손을 뻗었다. 

달려와 안기라는 듯 말이다. 

“이리 와라.”

“저리 가.”

내가 오지 않자 걸음을 옮긴 놈은 내 이마에 손을 짚었다. 

“하룻밤 사이 열은 다 내렸구나.”

붙어 있는 손을 밀어내고 밑으로 내려가려 했다. 그러나 내 팔을 붙잡은 슈레이가 힘을 주어 끌어당기더니 그대로 안아들었다. 

가뿐하다는 듯 힘 하나 들지 않는 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과거에는 내가 이런 꼴을 하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슈레이는 웃는 낯을 일순간 지우더니 말했다.

“멈춰.”

나를 안고 있는 슈레이에게 다가오려던 나비를 향한 것이었다. 

“주인 말은 들어야지.”

내놓고 적의를 드러내고 있는 둘은 다시 한 번 대치하였다. 그 사이에 있던 나는 어제부터 거슬렸던 것을 짚다가 나를 안고 있는 슈레이의 얼굴을 향해 주먹을 내쳤다. 불시에 당한 주먹에 휘청거리자 품에서 내려왔고 그런 나에게 나비가 다가왔다. 그런 나비의 정강이를 쳤다. 문처럼 팔딱 뛰진 않았지만, 제대로 맞았는지 약간의 신음과 함께 몸을 숙였다. 

“나는 네놈의 것도.”

나비를 가리켰다. 나비가 움찔 거렸다. 

“네놈의 것도.”

슈레이를 가리켰다. 슈레이 또한 안면을 감싸던 손을 약간 내리며 움찔 거렸다. 

말 안듣는 똥개만도 못한 놈들을 번갈아 바라보며 분명히 말했다. 

“아니다.”

“그런 것 치곤 어제는 얌전하던데.”

통증이랄 것도 없었는지,슈레이는 여유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내게는 저 녀석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이 절대적이지는 않기에 그를 대처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망설임 없이 그를 버리는 패로 만들어 버릴 수 있다. 

그는 그것을 모르고 있었다. 

어느 누구라도 그런다. 스스로가 언젠가 버리는 패가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오만할 수 있는 것이고 어리석을 수 있는 것이다. 

“이곳에 오려면, 버리고 왔었어야지.”

고고하게 지키고 있던 자존심과 같던 미련을 버리고 왔어야 했다고 말하고 있었다. 

“버리기 전에 빼앗겼다.”

슈레이는 내 대답에 의문을 달 듯 물었다. 

“되찾고 싶은 건가?”

“없애야겠지.”

“…….”

그는 자신의 물음과 내 대답이 이어지지 않는 다는 것을 알고 잠시 침묵했다. 지켜보고 있던 나비도 마찬가지였다. 슈레이 이상으로 지금의 대화를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어렴풋이 내게 야망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 야망에 슈레이가 필요하다는 것도. 

“쉽지 않을 텐데.”

슈레이 또한 에덴에 있던 내가 로던프가 아닌, 트란슈에 있는 이유를 알아차렸다. 또한 어제의 만남이 결코 우연일 수 없다는 결론을 냈다. 그리고 그를 이용하려는 내 심중까지 읽어냈다. 

“검으로 써라.”

“쥘 수도 없게 하는 놈을?”

“원하는 머리정돈 던져주마.”

여기서 더 꼬리를 물었다면 나는 슈레이라는 패를 버릴 생각이었다. 당장 될 수 없는 패를 가지고 시간을 끌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슈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육체의 나이는 어려도 에덴에서 나를 한 번 보았던 놈이었기에 원하는 대답을 얻을 수 있었다. 

트란슈에선 기사단의 급수라는 것이 없으며, 호쿠라 하더라도 능력을 인정받으면 하급 기사가 될 수 있는 로던프와는 다르게 철저한 신분체계로 이뤄지고 있다. 

덕분에 용병이 발달하여 그 양과 질이 좋으니, 세력을 키우려면 그들을 잡아 둘 수 있어야 했다. 

그러나 나는 용병단에 들어가질 못했고 때문에 이곳에서 나비를 먼저 만나게 되었다. 마냥 손을 놓고 있을 수 없어서 문을 보내긴 했지만, 이미 용병왕의 머리를 몰래 따버린 놈이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을지 두고 볼 수는 없다.

얌전히 있으라고 했지만, 그럴 놈이 아니라는 걸 알기에 한시가 바빴다. 

그러나 슈레이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귀족으로 호적을 파 줄 테니 차라리 기사가 돼.”

“절차상 그것이 더 복잡하고 시간이 걸린다.”

“용병보단 낫겠지. 지금 그쪽은 나도 손을 못 대고 있거든.”

인상을 쓰자, 곁에 있던 나비까지 슈레이의 편을 들며 말했다.

“맞는 말이다.”

여전히 서로를 싫어했지만, 전보단 나아져 적어도 검을 맞대는 일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좁혀지는 것도 없었다. 

“지금 용병의 대부분의 길드가 붕괴되고 있어서 흩어지는 것도 문제지만, 뭉쳐져도 문제기 때문에 혼란스러운 상태다. 기사단조차 원인을 통제하지 못하고 있어.”

슈레이는 나비의 대략적인 설명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정정했다.

“제대로 물갈이를 하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하고 있어서 가만있을 뿐이다.”

“원인이 두려운 거겠지.”

비꼬듯 나비가 말했다. 

맞는 말이었다. 기사단이 움직이지 않는 건 말 그대로 두려워서였다. 

이미 커질 대로 커져버린 용병의 길드를 차례로 붕괴시켜버리는 그 원인에 대한 자상이 지나치게 그들을 짓누르고 있었다. 

그러나 왕이기 전에 기사이기도 한 슈레이에게는 자존심일 수 있는 부분을 나비가 건드렸다. 그는 금방이라도 검을 뽑을 것처럼 심기를 거슬려 하고 있었다. 

“그럼 네가 밤 상대라도 해서 유혹해 보던가.”

“…….”

“왜? 창기는 두려워 못하겠는가?”

심상찮은 두 기류가 부딪쳐 요란한 소리를 내고 있었지만, 곰곰이 말을 듣고 있던 나는 입을 열었다. 

“그거 괜찮군.”

내 말에 둘 모두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들을 보지도 않고 일어나 밖으로 나가려 했다. 나비가 먼저 다급히 입을 열었다.

“가나! 어딜 가려 하는 것이냐?!”

“용병왕을 데려와야지.”

“대체 어찌 말이냐?”

물음에 생각할 것도 없이 대답했다.

“밤 상대로 유혹해서.”

유난히 밝은 보름달이 뜬 밤이었다. 모든 소리가 달빛에 먹혀 버린 듯 고요했다. 곤충의 소리도 들리지 않는 그곳에서 인영이 드러난다. 

유일하게 빛이 들어오는 바위 위에 앉아 있는 그는 문이었다. 눈을 감고 감싸는 듯한 달빛을 받고 있던 문의 눈동자가 떠졌다. 

피 웅덩이가 일렁이는 듯한 붉은 색이었다. 

허공만을 바라보고 있던 눈동자가 오른쪽으로 돌아갔다. 일순간 덮치는 또 다른 인영. 

날렵하게 시라소를 든 문은 손잡이 부분으로 날을 막고 힘만으로 상대를 밀어냈다. 그는 트란슈 내에서도 알려진 바 없던 길드의 용병왕이었다. 

그는 뱀처럼 움직였고, 숨소리 한 번 내지 않고 다시 한 번 돌진했다. 검대로 받아치던 문은 눈앞을 베어내는 빠른 검을 피하기 위해 고개를 옆으로 움직였다. 덕분에 문의 머리를 감싸고 있던 천이 찢겨지고, 달에서 뽑아낸 실과 같은 은발이 흘러내렸다. 

상대는 그런 문의 모습에 눈에 띄는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수많은 용병왕의 머리를 베어버린 상대의 얼굴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아름답다는건 부정하질 못했다. 마치 이 세상의 것이 아니라는 것처럼 말이다. 

문의 검술이 그저 불규칙한 움직임을 보이는 단조로운 공격일 뿐이라고 생각한 사내는 크게 휘두르는 순간 드러나는 허점을 파고들어 움직였다. 

문의 목덜미를 향해 뻗는 검은 그대로 목울대를 뚫어버릴 것이라 확신하였다. 검 끝이 목을 둘러싼 붉은 띠와 같은 흉터에 닿으려는 순간이었다. 

그대로 눈앞에서 사라진 문에 의해 당황한 그가 주춤하는 순간, 바로 눈앞까지 문이 나타났다. 그의 숨소리와 체향까지 맡아지는 거리였다. 거기에 뜨거운 열기까지 더해지자 이것이 환상일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껏 그 어떤 상대와도 동요가 없었던 사내였지만, 붉은 눈동자와 마주치는 순간 등 뒤로 수 천 마리의 개미가 기어오르는 듯한 소름이 돋았다. 

여신과도 같은 얼굴에서 광기가 드러난 건 한 순간이었다. 비집고 올라가는 입 꼬리와 붉은 혀가 입술과 입맞춤하기 시작할 때, 문은 악귀로 돌변해 있었다. 

아름다운 악귀로 변한 문은 거칠게 검을 휘젓기 시작했다. 마치 놀아달라고 재촉하는 고양이처럼 상대가 검에 힘을 줄 때까지 기다려 주기도 했다. 

문의 그런 행동에 조급해지는 건 상대였다. 맹수의 앞발톱에 짓눌려 몸을 비트는 것이 전부인 자신의 처지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더 없이 신중했어야 할 순간, 극도의 공포감에 이성을 잃어버린 사내가 검에 힘을 주고 땅 위를 걷어 차 날아가듯 문을 향해 돌진했다. 

그러나 강하게 파고들어오는 칼날을 한 손으로 막아낸 문은 날을 비틀어 세워 흘려보낸 뒤 그대로 상대의 복부를 뚫어 날을 세워 옆으로 베어냈다. 

갈비뼈와 함께 베어나간 사내는 짐승의 신음소리와 핏덩이를 토해내더니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뚝뚝- 시라소의 날을 타고 피가 흘러내렸다.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는 검은 빛은 천천히 문을 타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발끝, 정강이, 허리, 가슴, 쇄골, 귓불, 그리고 정수리까지. 

은빛 실타래와 같던 은발은 어느새 칠흑과도 같은 검은 빛으로 변해 있었다. 

또 다시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달빛 또한 구름에 갇혀 세상은 온전히 검은 색으로 집어 삼켜졌다. 그러길 수 초. 

구름에 가려진 달빛이 모습을 드러냈다. 

공명하는 시라소를 끝으로 문을 물들이던 검은 빛이 시라소의 날을 향해 빨려가듯 사라졌다.  일순간 드러났던 칠흑과도 같은 검은 머리카락 또한 흔적을 감추었다. 

잿빛 과거 上  

“가만히 있어.”

그녀가 말했다. 짙고 고약한 향을 피우며 벽장만도 못한 공간에 밀어 넣고서 움직이지 말라고 하였다. 

마약을 섞은 향은 일시적으로 기분은 좋아질 수 있으나 몸을 마비시키고 장기간 흡입하면 정신을 갉아먹어 결국 미쳐버리게 만든다는 부작용이 있었다. 

몸을 움직이는 것이 둔해졌다고는 느꼈지만, 소년은 여인의 말을 잘 들었다. 사실 향을 피우지 않고 말로만 했어도 그녀의 요구를 들어줬을 테지만, 여인은 그것을 믿지 않았다. 

“넌 괴물이야. 넌 괴물이라고. 알아? 내가 괴물을 낳았어. 그러니까. 너는 이곳에서 나오면 안 돼. 영원히.”

역겨움에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소년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생각이라는 걸 할 수 있을 때부터 그래왔다. 이유는 소년도 몰랐다. 

타인의 목소리가 들려와도 나가지 않았다. 향 때문에 온 몸이 마비가 되어서가 아니다. 

비명이 들려도 나가지 않았다. 여인의 비명도 섞여 있지만, 그러지 않았다. 정신이 망가지고 있어서가 아니다. 

초점을 잃어버린 붉은 눈동자가 흔들린 것은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리면서였다. 

피투성이가 되어 엉망이 된 여인의 가늘고 하얀 손이 소년을 끌어안았다. 그녀는 끊어지는 것 같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의 왕…….”

이중적인 그녀의 모습에 익숙한 소년은 가만히 그녀의 품에서 움직이질 않았다. 

소년은 이곳을 못 나가서 있는 것이 아니다. 단지 자신을 괴물이라 부르는 여인과 조금이라도 오래 있고 싶었다. 

자신과 닮은 짙은 피 냄새가 싫지 않았다. 한 쪽 눈이 일그러진 여인은 그렇게 몇 번이고 소년의 달빛과도 같은 흰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그것이 기분이 좋아 눈을 감고 잠이 들려 할 때면 어김없이 하늘에서 비가 떨어졌다. 

하지만, 여인이 그런 모습을 보이는 시간은 매우 짧았다. 괴물이라 부르며 모욕하고 당장 죽일 것처럼 목을 조르고 그리고 며칠이 지나면 또 다시 왕을 부르며 껴안았다.

벽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가 그녀는 미쳐가고 있다고 말해주었다. 소년은 생각했다. 미쳐가는 것을 대신 해 주면 안아주지 않을까. 상처로 곪아 파고드는 눈동자의 고통을 대신 받아주면 왕이라고 불러주지 않을까. 

벽 너머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도 났고 그녀의 끓는 듯한 비명소리도 들려왔다. 소년은 처음으로 일어나 굳게 닫힌 문을 밀어냈다. 

달콤할 정도로 현기증이 나는 피 냄새가 소년을 반겨주었다. 갑작스러운 소년의 출현에 당황한 이들이었지만, 그들은 넝마로 만들어 버린 여인을 짓밟고 추하게 드러난 하반신을 숨기지 않으며 다가왔다. 

족히 다섯은 되는 사람들이었다. 

고개를 옆으로 까딱이며 쓰러진 여인을 바라보았다. 

“뭐야, 역시 숨겨놓고 있었잖아.”

“어미랑 똑같아. 제대로 라고.”

소년을 향해 더듬는 검은 손이 하얗다 못해 창백한 뺨에 닿았다. 침을 흘리는 이리떼처럼 모인 사내들은 하반신에서 흘러내리는 핏물과 끈적거리는 것을 닦지도 않고 소년에게 들이댔다. 

“꼬마야. 아저씨랑 놀까?”

“놀아?”

예쁜 목소리였다. 소녀인지 소년인지 알 수 없지만, 성별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붉은 눈동자가 굴러질 때마다 어쩐지 오싹한 희열이 느껴지는 듯 했다. 성욕과 욕망을 감추지 않는 추악한 사내들의 발정에도 소년은 쓰러진 여인을 바라보다 바닥에 굴러다니는 반짝이는 것을 쥐었다. 

“진작 내 놓을 것이지. 애도 들어서지 않는 년 박느라 힘들어 죽는 줄…….”

그리고 그것을 눈앞까지 다가오는 사내의 목을 향해 긁어버렸다.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한 사내는 칼에 베인 듯 드러난 목뼈와 쏟아지는 피를 막기 위해 본능적으로 손으로 가렸지만, 역류하는 피를 막지 못하고 그대로 쓰러졌다. 

그리고 몇 번 꿈틀 거리는 것을 끝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순간 정적이 찾아왔다. 

소년의 붉은 눈동자가 천천히 올라갔고 눈앞의 광경을 믿을 수 없는 네 명의 사내들은 말문이 막힌 채 소년을 바라보았다. 

쿨럭이며 하반신에서 나오고 있는 것은 어느새 말라버린 상태다. 

소년의 입 꼬리가 길게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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