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화 (19/35)

“놀자.”

=

피 웅덩이위에 엎어져 있는 시체를 밟고 소년은 걸어갔다. 뼈마디가 드러날 정도로 말라 있는 여인에게. 

한 때는 길고 아름답던 백색의 머리카락은 모두 빠져 앙상한 모습이었다. 숨을 쉬는 것인지조차 알 수 없는 여인을 소년을 내려다보았다. 

여인은 매우 말라 있었다. 뼈마디가 모두 드러날 정도로 흉측하게 마른 그녀의 하반신은 검게 그을려 있었고 뱃속에 있어야 할 것은 밑으로 빠져나와 썩어가고 있었다. 

소년은 그대로 바닥에 앉아 여인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어쩐지 눈이 부셔 앞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손을 뻗어 여인의 얼굴을 만져 보았다. 

여인은 미동이 없었다. 그러나 숨은 쉬고 있었다. 껄떡 거리며 금방 죽어버릴 듯한 물밖에 나온 붕어마냥 겨우 심장이 뛰고 있었다. 

살아 있는 여인의 붉은 눈동자가 천천히 움직여 소년을 향했다. 눈동자가 마주치자 소년은 기쁨에 웃어 보았다. 안아 달라 조르는 아이처럼 여인의 팔을 잡아 자신의 뺨에 대어도 보았다. 

그러나 여인은 소년이 잡고 있지 않으면 닿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주……."

힘겹게 입을 여는 여인을 바라보던 소년은 무엇을 말하려는지 궁금해 고개를 옆으로 까딱였다. 

“죽여……주……”

여인은 또 다시 눈에서 비를 내리고 있었다. 

여인의 온기 없는 손을 잡고 있던 소년은 멍 하니 여인을 바라보다 이내 다시 활짝 웃었다. 

"응!"

그리고 들고 있던 날카로운 유리조각을 단숨에 여인의 목 위를 향해 박았다. 미약하게 뛰고 있던 심장이 그대로 천천히 멈추었고 잠시 움직임이 보였던 붉은 눈동자가 탁해지더니 이내 빛을 잃어버렸다. 

뺨에 닿은 여인의 차가운 손도 바닥에 떨어졌다.  

소년은 숨이 멎은 여인을 바라보다 천천히 고개를 내려 이마를 맞닿았다. 빛을 잃어버린 그녀의 붉은 눈동자와 마주쳤다. 

소년은 작게 속삭이듯 말했다. 

“잘 자.”

여인의 고요한 눈에서 한 줄기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렇게 해서 소년은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단 한 번도 밟은 적 없는 땅을 걸으면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좁은 공간이 세상에 전부였던 소년에게 끝이 보이지 않는 하늘은 너무도 경이로웠다. 

넋을 놓고 걷고 있는 데, 무언가 소년의 발밑에 닿았다. 밑을 내려다보았다. 보자기에 잔뜩 싸여진 그것은 움직이기까지 하였다. 무엇인가 하여 호기심에 소년은 몸을 숙여 보자기에 감춰진 것을 펴 보았다. 

그리고 소년은 소스라치게 놀라 저도 모르게 보자기를 놓아 버렸다. 빠른 속도로 뒤로 물러나면서도 눈을 떼지 못한 소년은 처음으로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을 느꼈다. 

보자기가 꾸물거리기 시작했다. 경계를 하며 천천히 다가가 다시 한 번 그곳을 들여다보았다. 검은 머리카락과 검은 눈동자. 그럼에도 하얀 피부를 가진 아주 작은 고깃덩어리 같은 것이었다. 

손가락을 들어 볼을 찔러 보았다. 작은 고깃덩어리는 찌르는 것이  귀찮은 듯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것을 바라본 소년의 뺨은 붉게 물들었다. 

"……먹어 버릴까?"

말랑하고 부드러웠다. 보기만 해도 맛있어 보였는데, 건드리고 나니 허기짐이 더해졌다. 

손톱을 세운 손을 막 뻗으려는 순간이었다. 고깃덩어리가 갑자기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다가가는 걸 멈춘 소년은 기침에 맞춰 몸을 움찔 거렸고 세웠던 손톱을 집어넣고 바닥을 짚어 고깃덩어리를 바라보았다. 

숨소리가 거칠고 기침을 끊이지 않는 것이 곧 죽을 것 같았다. 소년은 일단 고깃덩이를 잡아들었다.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인상을 쓰던 소년은 기침을 멈추지 않는 고깃덩어리를 품에 안고 무작정 달렸다. 

보던의 어느 곳을 달려도 버려진 이들의 손을 잡아주는 사람은 없었다. 기침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소년은 일순간 소름이 돋았고 더 이상 달리는 것을 그만두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아무런 치료를 받지 못한다면 이대로 품안의 것은 끝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본능만 쫓는 짐승과 같은 소년이라도 품에 안은 것을 버리지 않았다. 

걷는 것을 그만두고 주저앉아 보자기에 싸여 있는 것을 바라보았다. 눈을 감은 채 움직이지도 않고 있는 작은 것의 입가에 귀를 대 보았다. 숨소리가 들려왔다. 죽여 달라고 원했던 여인이 미약하게 내뱉던 것과 비슷했다. 

손을 들어 얼굴을 만져 보았다. 말랑하고 부드러웠지만, 온기가 전혀 전해지지 않았다. 소년이 손을 치우려는 순간이었다. 작은 손이 소년의 검지를 붙잡은 것이다. 힘 하나 들어가지 않아 잡은 것이라기보다 얹은 것에 가까웠지만, 소년은 그것에 큰 감명을 받았다. 

다 죽어가면서도, 죽여 달라 하지 않았다. 곧 숨이 넘어가면서도 자신을 붙잡아 주었다. 소년은 작은 것을 품 속 깊은 곳으로 끌어안았다. 

“대신 하면 좋을 텐데.”

소년이 중얼거렸다. 

무엇이든 대신 해 주고 싶었다. 살아가는 것도 죽어가는 것도 아파하는 것도 슬퍼하는 것도 그녀가 원하지 않는 것이라면, 그 무엇이든 말이다. 얌전히 있길 원했다. 원하는 대로 해 줬더니, 자신만을 두고 도망가 버렸다. 

그대로 놓아 준 것에 후회는 하지 않지만, 두 번은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 

“비켜라.”

가래가 끓는 듯한 목소리였다. 사람이라곤 볼 수 없던 보던에서 처음 만난 타인이었다. 그러나 고개를 들어 확인을 해 보니, 차라리 송장이라고 부르는 것이 적당한 웬 노파가 소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노파의 얼굴에는 큰 점이 있었고 허리는 구부정하며 걷는 것도 버거운 것인지 지팡이를 짚고도 걸음이 매우 느렸다. 

움직일 때마다 고통을 느끼는지 비킬 생각을 하지 않는 소년을 지팡이로 옆으로 치면서도 비틀거렸다. 

소년이 비키지 않자, 노파는 눈을 흘기며 노려보았다. 썩어가는 시체 냄새를 맡고 있는 것 같은 소년은 노파의 체향에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그러나 일어나지 않고 노파를 붙잡은 것은 온전히 품에 있는 것 때문이었다. 

노파는 자신을 붙잡은 소년을 바라보았다. 소년은 이렇다 하는 말을 하지 않고 일단 품안의 것을 보여주었다. 

“젖동냥보단 차라리 양젖을 먹여라.”

“양?”

소년은 양이 무엇인지 몰랐다. 노파는 설명해 주는 것도 귀찮았다. 결국 무시하고 노파가 안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품에 있던 작은 것이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잠잠했던 기침과 함께 몸이 부르르 떨더니 이번엔 손에 든 것도 없이 신물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소년은 노파를 붙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양이 뭐야?”

노파는 소년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시력이 좋지 않아 지금껏 실루엣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던 노파는 눈앞의 것의 머리가 이제야 새하얗다는 걸 알아차렸다. 

노인은 아니었다. 아직 어린 아이가 이정도로 머리가 샜다는 것은 인간이 견딜 수 있는 고통을 넘어선 고문을 당했다는 소리밖에 되질 않았다. 

보던에서라면 흔한 일이었다. 보통은 머리가 새기도 전에 죽어버리겠지만, 소년은 운 좋게 빠져 나왔을 것이라고 착각했다. 그것을 확신하게 하는 건 단순히 하얀 머리카락 뿐은 아니었다. 살면서 제 구실 한 번 못하던 노파의 콧구멍을 뚫고 들어오는 것은 고약한 마약 향이었다. 

“양이 뭐냐니까?”

노파는 지팡이를 들어 소년의 머리통을 내리쳤다. 놀란 소년이 통증에 약간의 소리를 냈지만, 물러나거나 노파를 잡은 손을 놓지는 않았다.

노파는 소년의 손목을 잡았다. 영문 모를 표정을 짓고 있는 소년을 보지 못하는 노파는 그대로 소년의 팔을 끌어 집 안으로 들어갔다. 쇠약한 노파의 손에서 벗어나지 않던 소년은 품안의 것이 떨어질까 염려 되어 안으로 들어가면서도 몇 번이고 고개를 숙여 바라보았다. 

노파는 집안에 들어오자 소년을 놓고 절뚝거리면서 낡은 서랍장까지 걸어가 문을 열었다. 수전증도 있는 것인지 덜덜 떨어가며 잡은 것은 이상하게 생긴 풀이었다. 그것을 잘게 찢어 절구로 빻더니, 뜨거운 물을 가져와 거름에 한 번 걸러 조금 우려져 나온 것을 가져왔다. 

소년의 품에 안겨 있는 작은 것의 입안에 그것을 밀어 넣는 데, 요령 좋게 목구멍까지 밀어 넣자, 거칠던 기침소리가 조금은 옅어졌다. 

“운이 나빠. 오늘이 고비다. 체온이 떨어지면, 바로 죽을 테니 잘 안고 있어라.”

노파의 말에 소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심신이 지친 노파는 천천히 소년과 멀어져 자신의 흔들의자에 앉았다. 그것을 바라본 소년은 천천히 노파의 곁으로 다가갔다. 

코가 남들보다 예민한 소년에게 노파의 체향은 견디기 힘들었다. 목구멍에 헛구역질이 올라올 지경이었고, 노파도 그러한 소년의 상태를 알기에 멀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도리어 먼저 다가온 소년은 노파가 의아해하기도 전에 물었다. 

“양이 뭐야?”

노파는 귀찮아 살점하나 없는 손가락을 들어 벽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양의 문양이 수놓아진 낡은 양탄자가 걸려 있었다. 

소년은 천천히 양탄자를 바라보았다. 뿔이 있고 복슬복슬해 보이는 몸통에 얼굴이 까맣게 표현된 짐승의 그림이었다. 

기침이 멎어 곤히 잠이 든 작은 것을 바라보던 소년에게 노파가 물었다. 

“동생이냐?”

“아니.”

“이름은?”

“몰라.”

“정들기 전에 제자리에 놓고 와라. 얼마 못 살 거다.”

“내가 주웠어. 내거야. 그리고 살 거야. 내게서 도망치지 않았으니까.”

잠시 입을 다물고 소년을 바라보던 노파는 한숨을 내쉬며 흔들의자에 몸을 기댔다. 그리곤 곧 잠들 것처럼 굴더니, 작게 입을 열었다. 

“이름정도는 지어 줘라. 죽고 나면 기억 할만한 것이라도 있어야지."

소년은 자신의 이름도 없었음에도 곧바로 품에 있는 작은 것의 이름을 생각했다. 하지만 고민이 길지는 않았다. 언젠가 여인이 속삭여준 자장가에서 나왔던 단어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라마(Ramah).”

“뜻은 알고나 지은 게냐?”

“높은 곳.”

노파는 뜻을 제대로 알고 있는 소년에게 조금 놀랐지만, 의연하게 앉아 눈을 감았다. 노파가 눈을 감자 마치 미라처럼 보였다. 옅은 기침도 멎은 라마를 품에 안고 있던 소년은 갑자기 벌떡 일어나 노파에게 다가가 절대 놓지 않을 것 같던 라마를 안겨 주었다. 

노파는 체온이 낮은 품에 들어오자 뒤척이는 라마를 바라보다 소년에게 눈길을 돌렸다. 소년은 아무런 말없이 숨을 죽이며 어디론 가를 바라보더니 이내 라마에게 다가와 이마에 입을 맞추곤 노파를 바라보았다. 

“죽이지 말고 가지고 있어.”

멀어지는 소년의 행동이 이상하다고 생각하던 그때, 창이 깨졌다. 바닥을 바라보니, 누군가가 돌을 던져 버린 탓이었다. 

“마녀는 나와라!!!”

노파를 찾는 소리였다. 얼만 전 보던에선 집단 전염병이 퍼져 지금 상황에선 살아 있는 것 들이 기적이었다. 증세는 모두 하나같이 같았는데, 두통과 기침과 함께 구토와 복통이 동반하게 되는데, 이때 상태가 악화되면 객혈을 하고 몸의 일부가 검게 썩어가면서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병이었다. 

병명과 원인을 알 수 없었지만, 얼마 전 첫 전염병이 퍼졌던 곳에 노파가 나타났다는 소식을 들은 이들이 노파의 짓으로 생각하고 퍼지기 시작하는 전염병을 막기 위해 들개처럼 달려온 것이다. 

“이대로 그냥 불을 질러!”

“진작 저 마녀를 죽였어야 했는데! 횃불 가져와!”

다섯이나 되는 장정들이었다. 모두 한 때는 다른 지역에서 활동하던 도둑이었거나 살인자들이었다. 이미 국가로부터 쓰레기 무덤이라고까지 불리는 보던에선 흔한 사람들이었다. 때문에 그들의 행동을 막는 이들은 없었다. 

횃불을 가져온 이들이 낡은 집에 불을 붙이려는 순간이었다. 무언가 창 안쪽에서 날아와 그대로 횃불을 가지고 있던 사내의 목을 발로 차 버렸다. 어찌나 요령이 좋았는지 목뼈가 뒤틀려 쓰러지는 사내는 미동이 없었다.

횃불이 바닥에 떨어지기 전에 주운 이는 고작해야 8살 정도 되어 보이는 어린아이였다. 달빛을 닮은 하얀 머리카락과 횃불을 옮겨 담은 듯 빛이 흐르는 붉은 눈동자. 소년을 바라보던 이들 중 한 명이 놀라 소리를 치려고 하자, 소년은 그대로 입을 연 사내의 눈앞가지 다가와 들고 있던 횃불을 그대로 사내의 안면에 박았다. 사내는 뒤로 넘어지면서 열기에 벗어나려고 했지만, 안면을 횃불위에 박은 채 목을 짓밟고 있는 힘에는 벗어날 수 없었다. 

장정 한 명이 고작해야 8살 정도의 소년의 발아래에서 숨을 쉬지 못하고 늘어져 버렸다. 발을 떼고 안면을 발로차자, 제대로 된 비명도 지르지 못했던 사내의 얼굴이 처참하게 타버려 살점이 녹아내렸다. 

소년은 남은 이들을 바라보며 손가락을 입에 댔다. 

“조용히 해.”

소년은 웃었다. 소년의 발밑에서 순식간에 목숨이 끊어진 두 명을 바라보고도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남은 장정의 합이 셋. 소년 한 명을 상대로 겁을 먹기엔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백발과 적안은 결코 정상이 아니었다. 그들은 마녀가 소년으로 모습을 바꿨다고 생각했다. 죽이지 않고 간다면 더 한 저주를 받을 것이라 지례 짐작하고 의심했다. 

그 의심과 어리석음이 자신의 명줄을 댕강 잘라내고 있다는 사실은 그들은 알지 못했다. 

소년에게는 이렇다한 무기가 전혀 없었다. 그렇기에 더욱 방심한 이들은 소년을 에워싸기 시작했고 손에 든 칼과 몽둥이로 위협하듯 허공에 휘둘렀다. 

일제히 한꺼번에 소년에게 달려들었다. 소년의 눈동자가 빠르게 돌아갔고 그대로 바닥을 치고 올라와 달려들던 이들의 등을 밟고 중심에서 빠져나왔다. 흐트러진 이들은 소년을 찾기 위해 어지럽게 움직였고, 개중 단검을 쥔 자에게 빠른 속도로 다가간 소년은 자신을 발견한 단검이 눈앞으로 다가오자 옆으로 고개를 비틀어 피했다. 

단숨에 단검을 쥔 손목을 잡아 비틀어 날을 세워 그대로 사내의 한 쪽 눈동자에 박아 넣었다. 

비명을 지르려고 하자, 눈에 박았던 단검을 거칠게 뽑아내어 그대로 입안에 밀어 넣는다. 천천히 밀어 넣어 목젖까지 잘게 잘라내는 수법이 잔인하여 살인에 익숙한 이들마저도 눈살을 찌푸릴 정도였다. 그리고 결국 식도까지 파고든 단검은 그 어떠한 소리도 나오지 못하게 만들었다. 

경련을 하듯 뒤틀던 사내의 몸에서 떨어진 소년은 피투성이가 된 모습으로 남은 이들은 바라보았다. 

그 모습에 놀란 한 사내가 소리를 지르며 도망가자 그대로 입에 박힌 단검을 뽑아 던졌다. 깨끗하게 목덜미에 박힌 단검에 의해 쓰러지는 사내. 

도망조차 가지 못하고 발발 떨어가며 얼어 있는 이를 바라보았다. 오줌을 지려가고 있었지만, 그는 감히 살려달라는 소리조차 하질 못했다. 

소년은 다시 한 번 검지를 들어 입술에 댔다. 

“쉿…….” 

붉은 눈동자가 천천히 곁에 서 있는 자들을 훑어보았다. 눈앞에서 순식간에 당한 동료를 바라본 이들은 마치 자신이 거대한 괴물의 눈앞에 있는 것 같은 공포가 느껴졌다. 단순히 배가 고프지 않기 때문에 물어뜯기지 않을 뿐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피비린내가 나는 주변임에도 벗어나지 못한 사내가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그는 원초적인 공포에 미쳐버린 듯 중얼거리며 눈물을 흘리며 발작 하듯 웃었다. 그러나 그것은 소리가 없었다. 

소년은 조금씩 흥분되는 것을 느꼈다. 억압된 곳에서 짓눌러 억지로 자제를 했던 탓인지 한 번 느끼기 시작한 흥분은 천천히 고조되고 있었다. 소년의 숨소리가 거칠어 졌다. 이미 온 몸이 검붉은 피에 뒤엎인 소년은 한 마리의 들짐승의 모습이었다.

허기가 지시 시작하는 짐승처럼 천천히 미쳐가는 사내에게 다가갔다. 녹슬어 버린 붉은 눈동자에선 비릿한 향이 느껴지는 듯싶었다. 

달빛에 닿아 서늘할 정도로 창백한 손이 뻗어졌다. 이대로 눈앞의 사내를 갈가리 찢어버리는 상상을 하고 있는 소년의 입가엔 참을 수 없는 웃음이 번져갔다.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사내는 더 크게 울며 더 조용히 웃었다. 

“이놈아!!!”

등 뒤에서 나는 큰 목소리에 한 남자의 명줄이 끊어지는 직전에 멈추었다. 소년은 느리게 움직이더니 눈동자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허리가 굽고 얼굴에 반은 점으로 뒤덮인 송장과 같은 노파가 지팡이를 짚고 서 있었다. 

“잠 다 깨서 너 찾는다! 빨리 라마 안 받고 뭐해?!”

불안한 자세로 라마를 안고 있는 노파는 곧 떨어트릴 것처럼 굴었다. 놀란 소년이 한 걸음에 그곳으로 다가가 손을 뻗었다. 그러나 자신의 손에 피가 잔뜩 묻은 것을 알고 그대로 거둬 급히 옷에 손을 문질렀다. 

그러나 옷에도 피가 묻어 있어 닦이는 것 보다 새로 묻는 것이 더 많았다. 

안절부절 못하는 소년을 바라보던 노파는 한심하다는 듯 한숨을 쉬더니 짚고 있는 지팡이를 들어 소년의 머리통을 쥐어박았다. 

그제야 조금 진정하고 노파를 바라보던 소년은 다시 라마를 바라보았다. 정말로 잠에서 깬 라마는 검은 눈동자를 굴리며 소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게 알아보고 있는 것인지, 노파의 품에서 나오고 싶은 듯 손을 뻗어가며 소년에게 안아 달라 재촉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소년은 피에 더럽혀진 손으로 라마를 잡지 못했다. 자신은 극도로 허기가 진 상태였다. 라마는 아주 맛있는 고깃덩어리처럼 생겼으니, 이성을 잃어버리면 가장 먼저 물어뜯어 버릴 것이다. 

“아직 안 돼.”

소년의 눈은 안아 달라 재촉하는 라마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나랑 놀 수 있게 되면……. 그때,”

라마의 작은 손이 기어이 소년의 낡은 옷깃을 잡았다. 그대로 고개를 숙여 자신을 잡은 작은 손등에 입을 맞췄다. 

녹슨 피가 흐르는 것 같던 붉은 눈동자에 생기가 가득했다. 

“왕으로 모셔줄게.”

소년은 라마를 놓고 뒤로 물러났다. 지금은 잡을 수 없는 작은 손을 애써 외면하고 밖으로 나갔다. 노파는 그런 소년을 잡지 않았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 같던 소년은 그 뒤로 며칠에 한 번씩은 얼굴을 비추었다. 그러나 라마를 직접 마주치거나 품에 안는 일은 하지 않았다. 마치 의식적으로 피하는 느낌이었다. 

노파는 그런 소년의 사정을 묻지 않았다. 

대신에 라마에게 필요한 약재나 치료법을 소년에게 조금씩 가르쳐주었다. 소년은 의외로 영리했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육안으로 구별이 힘든 약재도 한 번의 틀림도 없이 구해왔기 때문이다.  

더 많은 걸 가르쳐 주고 싶었지만, 노파에겐 그럴 시간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라마가 이곳에 온지 1년이 지난 후 부턴 소년은 아예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다. 

종종 창틀에는 구하기 어려운 약재가 놓여 있을 뿐이었다. 

꺼지기 직전엔 촛불처럼 노파는 오랜 시간 흔들의자에 앉아있었다.

마른 장작과 같은 손이 천천히 가까이 다가온 라마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여태껏 한 번도 하지 않는 행동이었다.

그 후, 노파의 손이 천천히 미끄러져 내려가듯 떨어졌고 크게 숨을 쉬던 노파는 그렇게 다시는 움직이지 않았다. 

노파가 죽었다는 걸 알기까지는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였다. 의자와 맞닿은 곳에서 떨어지는 수많은 구더기들이 노파의 사체를 파먹고 벽과 바닥을 기어 다니고 있었다. 

라마는 그 시점부터 작은 몸으로 노파를 잡아 질질 끌어 마당까지 데려왔다. 따라 나온 구더기들이 노파의 입에서까지 기어 나오고 있었다. 

상처 하나 없던 작은 손이 딱딱하게 굳은 땅을 파기 시작했다. 몇 분을 그렇게 파자, 돌에 걸려 피가 흐르기 시작했지만, 라마는 멈추지 않았다. 성인 한 명이 누울 수 있을 만큼 파자, 시간은 하루가 훌쩍 지나가고 있었다. 

구덩이 밖에서 나온 라마는 노파의 사체를 파 놓은 곳에 밀어 넣었다. 그리고 흙을 덮었다. 라마는 앉아 한 동안 흙이 덮인 곳을 바라보았다. 더 이상 이곳에 있을 이유가 사라진 라마는 그대로 마당을 천천히 빠져나왔다. 

라마가 떠난 그곳에서 다시 한 번 스산한 바람이 불어왔다. 흘러내리는 은발을 숨기지 않던 이가 나타났다. 그는 느린 걸음으로 라마가 묻어 놓은 노파의 무덤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려 낡고 쓰러져 가는 집을 향했다. 

사체 냄새가 고약한 집에 불을 만들어 던지자, 기다렸다는 듯 활활 불타기 시작했다. 

갈 곳이 없던 라마는 들개 소굴에 들어오게 되었다. 작은 덩어리 같던 때보단 성장한 것 같았지만, 여전히 작고 연약했다. 그냥 내버려두어도 될 일이지만, 정신을 차리고 나면 소년의 손에는 노파가 가르쳐주었던 약재를 뽑고 있었다. 

그런 자신에게 불만을 품으면서도 뽑은 약재를 손에 놓지 않고 들개들에게 먹이기 위해 끊이던 솥 안에 모두 쏟아 넣었다. 

잊었다 하면 그런 행동을 하는 소년 때문에 취사담당 들개는 곤욕을 치러야 했다. 애초부터 말릴 생각도 못했지만, 질 나쁜 장난치고는 들개들의 건강이 눈에 띄게 좋아졌다.

소년은 오늘도 한 아름 약재를 뽑아와 씻지도 않고 그대로 솥 안에 밀어 넣었다. 소년이 솥 주위에서 벗어나자 달려온 들개들이 익숙하게 흙을 덜어냈다. 

소년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른 들개들은 모두 제 밥그릇을 내밀고 있는데 정작 먹어야 할 라마가 보이지 않았다. 

한동안 상태가 좋지 않던 거 같더니, 죽어버린 것일까. 

그 생각을 하자 어쩐지 등 뒤로 벌레가 기어 다니는 기분이 들었다. 붉은 눈동자가 부지런히 라마를 찾았고 곧 구석에 찌그러져 있는 작은 인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사람의 눈에 띄지 않는 습하고 어두운 곳이었다. 

낡은 그릇에 죽을 뜬 소년은 천천히 라마에게 다가갔다. 눈을 감고 있는 작은 라마는 열이 오르고 있는 것인지 전혀 움직임이 없었다. 작게 벌어진 입술에서 겨우 숨을 쉬고 있어 살아 있다는 것만 느끼게 했다. 

곧 숨을 멎을 것 같던 것의 눈꺼풀이 올라갔다. 축축하게 젖은 눈동자가 소년을 향했다. 가슴의 뭔가를 짓누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 눈동자에 사로잡혀 움직일 수 없게 되었을 때, 라마는 입을 열었다. 

“문…….”

문이라고 말했다. 

그 뜻을 알지 못해 빤히 바라보다 곧 소년은 자신을 부르는 말이라는 걸 알았다. 

살려야 했다. 

문은 무작정 손 안에 든 죽을 라마의 작은 입에 밀어 넣었다. 하지만 쓴 풀 내가 역한지 그대로 다시 토해내고 말았다. 먹지 않으면 죽어버릴 것이다. 

문은 얼마 전 탐스러워 따 먹어 보았던 붉은 열매가 떠올랐다. 지나치게 달아 그대로 뱉어내고 말았지만, 쓴 죽을 삼키지 못하는 라마에겐 도움이 될 것 같았다. 한 아름 따가지고 와 죽과 함께 먹였더니 정말로 효과가 있었다. 

다 받아먹고 지쳐서 잠이 든 라마를 문은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문…….”

문은 라마가 지어준 자신의 이름을 곱씹어 보았다. 곧 그의 입가에 웃음이 지어졌다. 좀 더 불러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기쁨에 어쩔 줄 모른다는 얼굴로 라마를 바라보았다.

약을 먹어 열은 내렸지만, 간간히 나오는 기침은 들릴 때 마다 문을 소름 돋게 만들었다.  조급함에 안절부절 못하던 문은 체온이 떨어지면 죽을 것이라는 노파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래서 곤히 잠들어 있는 라마를 잡아끌어 안았다.

품에 안기면서 작은 손이 문의 옷을 붙잡았다.

  

언령  

“길드는 무의미해지고, 사실상 용병왕은 그놈 하나다. 부족한 전력을 채우는 데에, 그만한 인재는 없겠지. 너 같은 꼬맹이가 오라고 한다고 꼬리치며 올 녀석이 아니야.”

단호하게 슈레이가 말했다. 나비 역시 그 말에 동감한다는 듯 받아치는 것이 없었다. 어쩐지 눈앞에는 하얀 꼬리가 떨어져 나갈 때까지 흔들고 있는 똥개의 모습이 훤히 보이는 것 같았지만, 일일이 그것을 말해주진 않았다. 

더 들을 것도 없는 것 같아 그대로 밖으로 나가려 하자, 슈레이가 몸을 일으키고 나비가 소리쳤다. 

“가나!”

“말 좀 빌리겠다.”

나비의 말을 무시하고 밖으로 나갔다. 걸음을 옮겨서 가기에는 거리감이 있으니 적당한 말을 고르고 고삐를 끌어당겼다. 슈레이가 타고 다니던 말이었다. 검은 빛에 윤기가 흐르고 체구가 좋아 보이는 것이 보기 드문 명마다. 슈레이가 그 말은 사나우니 다른 말을 권했지만, 아랑곳 하지 않고 그대로 올라타 고삐를 쥐었다. 

어쩐지 조금은 놀란 표정으로 날 바라보던 슈레이는 다른 말을 가져와 저도 올라타 내 옆에 섰다. 

“네가 죽으면 곤란하니까 함께 해 가주지.”

“네놈 걱정이나 해.”

고삐를 틀어 그대로 출발했다. 뒤를 돌아보니 나비도 오고 싶다고 말한 모양이었는지 나비를 뒤에 태운 슈레이가 함께 달려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도착한 곳은 처음 길드원을 보았던 그곳이었다. 어디선가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것 같다. 분명 사람이 오가는 곳임에도 주위는 스산하기 그지없었다. 곁으로 다가온 슈레이가 말했다. 

“이제 남은 용병왕은 놈뿐이라, 사실상 놈의 독재지. 대개는 이정도 무력을 손에 쥐면 왕권에 도전할 법도 한데 이렇다한 움직임도 없어. 군력을 모은다거나 정치에 반하는 짓도 하지 않지. 속을 알 수 없으니 이쪽도 함부로 움직이지 않는 거다. 거기다 스스로 나타나기 전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답지 않게 길게 말하는 슈레이를 무시하고 말에서 내려왔다. 피 냄새가 들끓는다. 익숙한 그 냄새를 따라 걷다보니, 사람이 없는 한적하고도 넓은 곳이 나왔다. 커다란 나무가 있었고 그 밑에는 바위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깊게 후드를 눌러쓴 얼굴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 앉아 있다.

그리고 그 주위에는 여러 개로 조각이 난 사체들이 즐비했다. 나를 뒤따라오던 슈레이가 무언가를 느끼고 내 앞을 가로 막았고 나비 역시 뛰어와 검을 들었다. 

바위 위에 앉은 것이 짙은 살기를 내뿜었다. 잦은 전쟁에 익숙한 슈레이 마저 긴장하게 만들고 있는 살기였다. 

침묵이 계속되었다. 마치 덫에 걸리길 기다리는 것처럼 그것은 움직이지 않았다. 검을 끌어 안은 채로 미동이 없는 그를 바라보며 슈레이가 입을 열었다.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군.”

그런 슈레이의 말을 들은 나비는 식은땀까지 흘리며 쥔 검에 힘을 주었다. 

“움직임이 없는데, 이대로 물러서도 되지 않겠습니까?”

“좋다. 천천히 뒤로 간다.”

앞에서 답답하게 꾸물거리며 뭐하나 싶어 그대로 돌아 앞으로 걸어갔다. 놀란 두 놈이 나를 불렀지만, 멈추지 않았다. 

나를 부르던 두 명의 다급한 목소리와 발소리가 귀를 따갑게 만들었다. 

우두커니 앉아 있는 놈에게 다가갔다. 놈에게 다가갈수록 더욱 짙은 피 냄새가 코를 찔렀다. 검에서는 채 굳지도 못한 피가 천천히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것은 내가 다가오자 그대로 일어나 검을 바로 쥐었다. 그리고 허공에 들어 그대로 나를 향해 뻗으려는 순간이었다.

“문.”

문의 시라소의 날이 목 바로 옆에서 멈추었다. 벗겨진 후드로인해 드러난 달빛과 같은 머리카락이 천천히 어깨를 타고 흘러내렸다. 이제야 이성이 돌아온 문은 고개를 들어 두 눈을 동그랗게 뜬채 나를 바라보았다. 

아직은 온전히 제정신이 돌아오지 못한 것인지 입까지 벌리며 멍하게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그런 문에게 손을 뻗었다. 

“데리러 왔다.”

그 말을 끝으로 문은 시라소를 놓고 내게 손을 뻗었다. 내 목덜미에 코를 박고 끌어안은 문은 그동안 꽤 불안했던 모양인지 한동안 나를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저 놈은!?”

“저 사람은?!”

문을 알아본 슈레이와 나비가 동시에 입을 열자, 서로 놀란 표정으로 마주 보았다. 

“네가 백자를 어떻게 아는 거지?”

슈레이가 나비에게 물었다. 나비는 황당한 얼굴로 말했다. 

“가나의 가족이라 들었습니다. 유곽에 오기 전 한 번 본 적도 있습니다. 그러는 당신은 어찌 아는 겁니까?”

“백자가 가족이라고?”

이번엔 슈레이가 나를 바라보는 듯싶었다. 그러나 입 한 번 열지 않고 진득하게 껴안고 있는 문을 바라보았다. 창백한 살갗에 상처가 난무했다. 열이라도 나는 모양인지 닿는 곳 마다 데일 것처럼 뜨거웠다. 

처음부터 나를 알아보지 못한 것도 이 열병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비틀거림 하나 없이 내게 다가온 문은 재롱을 떠는 고양이처럼 온 몸을 비볐다. 

그대로 얼굴을 잡아 밀어내려다 멈추고 턱을 잡아들었다. 

눈이 조금 풀린 문은 무엇이 그렇게 좋은 것인지 나른한 얼굴이었다. 사방에 뿌려진 사체 조각들은 어떤 놈의 짓인지 알만 했다. 열이 올라 볼이 달아올라있었다. 뺨에 묻은 피가 거슬려 손가락으로 닦아 주었다. 

아직 굳지 않는 피는 닦여 창백한 살갗을 드러냈다. 

“어지럽진 않으냐.”

좀처럼 내릴 것 같지 않아 물었으나, 뺨에 닿은 내 손을 잡고선 입을 맞췄다. 

“괜찮아.”

문이 말했다. 정상적인 답변이라 어딘가 위화감이 들었다. 아무래도 제정신이 아닌 것 같으니 조만간 리노를 한 번 더 봐야 할 것 같았다. 제대로 일어나라고 말하려는 데 문이 갑자기 몸을 일으키더니, 시라소를 집어 들었다. 

눈은 정면을 향해 있었고 그제야 나는 뒤에 있는 두 명의 존재를 인식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날이 선 모습으로 검을 들고 있었다. 

그들을 바라보던 문은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잠시 붉은 눈동자를 굴려 나를 보았다. 

“하아…….”

그리고 체념한 듯 내뿜는 한숨. 뭔가 거슬려 미세하게 안면이 일그러지자 붉은 눈동자가 다시 한 번 정면을 향했다. 

“버러지들은 또 왜 달고 왔어?”

오늘따라 가라앉은 목소리로 문이 물었다. 설명을 해 줄까 하다가 포기했다. 

“필요하니까. 죽이지 마라.”

“팔이나 다리 하나쯤은 괜찮지?”

장난스러운 말투였지만, 진심이라는 걸 모르는 이는 없었다. 적어도 여기에는. 

때문에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것인지 눈에 띄게 표정이 좋지 않는 슈레이가 입을 열었다. 

“교육이 덜 된 모양이군. 사리분별 하나도 못하는 것을 보니.”

문 정도는 아니지만, 슈레이 역시 검을 겨루는 것에 쾌감을 느끼는 놈이다. 눈앞에 제대로 된 상대가 있으니 검을 맞대 보고 싶은 것도 이해하지만, 때로는 자신이 불나방이 된지도 모른 채 뛰어드는 경우도 있다. 

실패가 적을수록 그 위험은 배가 될 수 있다. 

그의 말대로 문은 지금 사리분별을 못하고 있는 상태다. 그가 봐 준다고 해도 목숨 줄을 운에 맡겨야 하는 최악의 상황까지 올 수 있었다. 

결국 문이 더 흥분하기 전에 시라소를 들고 금방이라도 망아지마냥 뛰어 가려는 정강이를 강하게 차 주었다. 

오랜만에 고통인지 화들짝 놀란 문이 그대로 몸을 숙여 다리를 붙잡고 낑낑거렸다.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주저앉은 문의 뒷덜미를 붙잡았다. 

볼만한 얼굴이 된 슈레이를 똑바로 보고 말했다. 

“자극에 약한 아이다. 건들지 마라.”

“가나 넌 이쪽으로 와라. 그 놈은 이제 쓸 수 없는 놈이다.”

이제는 대 놓고 문을 배제하며 슈레이는 내게 손을 뻗었다. 문의 곁에서 벗어난다면 당장이라도 들고 있는 검을 휘두를 기세였다. 고통에 낑낑대는 와중에도 슈레이의 말을 들은 것인지 갑자기 멈춰 움직이지 않았다. 

“가나?”

되묻듯 말하고 붉은 눈동자를 굴려 나를 바라보았다. 난 그것에 답을 해 주지 않았다. 그러나 문은 어떻게 해석을 한 것인지 갑자기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다. 마치 우월감에 빠져 눈앞의 것을 비웃듯 말이다. 그리고 손을 뻗어 내 허리를 휘감아 나를 끌어 당겼다. 

“저 놈 죽여줄까?”

“필요한 놈이다.”

죽이지 말라 했다. 마음에 들지 않은 대답임에도 미소를 짓고 다시 물었다. 

“그럼 난?”

붉은 눈동자가 마치 재촉하듯 일렁이고 있었다. 

당연한 물음에 당연한 대답을 하듯 서슴없이 말했다. 

“너는 내 것이지.”

더없이 기쁘다는 듯 더는 묻지 않았다. 그대로 강하게 나를 끌어안았다. 귀찮아 머리를 잡아 밀어내도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맘에 안드는 군.”

“동감입니다.”

슈레이와 나비는 이곳으로 와 제법 통하는 바가 있었는지 같은 감정을 공유하는 듯싶었다. 좋은 징조인 것 같아 내버려 두고 문을 바라보았다. 떨어지려 하지 않으니, 멀어지지 않고 그대로 품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조금 놀란 것인지 몸을 움찔거리더니, 품안에 나를 온전히 껴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몇 번이고 생각해 봤지만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이었다. 분명 원하고 있었다. 말해주길 원하고 있었고 닿아 있길 원했다. 하지만 밀어내지 않고 다가가면 이렇듯 한 번은 놀란 얼굴이 되었다. 

과거에는 볼 수 없었던 모습이라 나로서는 문의 속내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한 번 만 더 그러면 물어보려고 했었기에 막 입을 여려는 순간이었다. 

“가나! 당장 내게 와라!”

“그런 갑옷을 입고 어찌 안겠다는 것입니까? 가나, 이리로 오너라.”

서로 투덕거리고 있던 놈들이 일제히 나와 문을 바라보고 손을 뻗었다. 누가 연인이 아니라고 할까봐 하는 행동도 비슷했다. 하지만 묘하게 기시감이 느껴져 누군가가 그려지는 듯 했지만, 애써 무시하고 인상을 썼다. 

애초에 문은 나를 넘겨줄 생각은 없다. 귀찮아 지기 전에 먼저 말했다.

“싫다.”

가기 싫은게 사실이었다. 

꽤 오랫동안 자의든 강제적이든 안겨 있었던 탓에 익숙했고 자리를 잡기에도 편했다. 품이 넓은 탓에 상체를 움직이는 것도 편하고, 적당한 힘으로 안고 있어 답답함도 없었다. 무엇보다 가장 문을 안심시킬 수 있는 장소도 여기고, 내가 가장 안심할 만한 곳도 이곳이다. 

따로 길게 설명하기에는 말주변이 부족해 핵심만 말해줬음에도 둘은 알아듣지 못한 것인지 재차 넘어오라는 시도를 하였다. 

“싫다잖아. 이 버러지들아.”

겨우 진정이 되어 나를 안고 있던 문이 기어이 다시 입을 열었다. 대놓고 시비를 걸어 칼을 뽑게 만들려는 심상이었다. 몸부림을 치고는 싶지만, 나를 안고 있으니 그럴 수는 없고 그렇다고 눈에 거슬리는 것들이 사라질 생각을 하지 않으니 약을 올리는 것이다. 

그러다 화살은 다시 내게 꽂혔다. 나비가 입을 열었다. 

“피 냄새가 싫지 않으냐? 어찌 그곳에 있어!”

내게 결벽증상이 있다는 걸 알고 있는 나비가 말했다. 확실히 나는 더러운 걸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기본적인 청결에 대한 개념은 누구에게나 있고 나 역시 다르지 않다. 다만, 내가 기피하는 불결함은 타인이 가지고 있는 오물이 아니다. 

“혀를 잘라버리겠어.”

문이 중얼거렸다. 종이 다른 맹수에게 둘러싸여 먹이를 빼앗기기 직전의 짐승처럼 눈동자를 굴렸다. 한 손에 쥔 시라소가 공명하기 시작했다. 뭔가의 낌새를 먼저 눈치 챈 슈레이가 나비를 뒤로 하고 앞으로 걸어 나오려 하자 곧바로 나비의 물음에 답했다. 

“이곳이 편하다.”

말했듯 내가 가장 안심할 수 있는 곳은 문의 품속이다. 

다시 말해, 이곳에 있으면 문을 가장 먼저 통제할 수 있게 된다. 

시라소가 공명을 멈췄다. 정면을 바라보고 있던 붉은 눈동자가 느슨해져 나를 내려다보았다. 언제까지 서 있을 생각인 것인지 불만을 품고 바라보는데, 구름에 가려진 달빛이 드러나는 것처럼 문이 미소 지었다. 

“쪼개지 말고 빨리 가.”

“응.”

참지 못한 웃음을 흘리면서 나를 안은 문이 슈레이나 나비를 그대로 지나쳤다. 말에 올라타라고 지시하자 흑마의 등에 그대로 올라타 나를 앞에 앉히고 고삐를 쥐었다. 

말을 타 본적도 없어서 제대로 명마를 다룰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말을 듣지 않으려는 명마의 고삐를 가차 없이 틀어 자존심 강한 녀석을 제압했다. 

오직 본인이 가지고 있는 짐승적인 살기만으로 사나운 초식동물을 복종하게 만든 것이다. 

뒤늦게 슈레이가 뒤쫓아 오면서 자신을 따라오라 말했다. 문의 존재가 거슬리는 듯 했지만, 더는 그것을 입에 담지 않았다. 용병왕을 손에 쥔 것은 사실이기 때문에 전력으로 쓸 수 있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슈레이이가 도착한 곳은 오랫동안 방치 된 것이 분명한 낡은 성이었다. 

“발렌티노 베르너 세라이어. 작위는 백작. 이제부터 가나 네가 받을 이름이다.”

이곳은 이미 오래전 몰락해 버린 귀족의 이름으로 오랫동안 방치 되었던 낡은 성이었다. 

남은 건 백작이라는 작위밖에 없는 발렌티노 베르너 세라이어의 이름을 빌려 가나라는 이름 대신 발렌티노 에바 세라이어로 개명을 하라 말했다. 썩 마음에 드는 이름은 아니었지만, 가나의 이름을 빌리는 것 보단 나았기에 별 다른 말은 하진 않았다. 

“백자의 신분까진 보증할 수 없으니, 지금처럼 용병왕 껍질로 모습을 감추는 것이 좋을 것이다. 쥐도 새도 모르게 죽으면 곤란하니까.”

문을 노려보는 슈레이의 시선이 닿았음에도 무던한 문은 말에서 내려오자마자 정원이 마음에 드는 모양인지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던 거리며 탐색하기 시작했다. 

겉은 낡았지만, 오랫동안 관리를 잘 해 놓은 모양인지 내부는 매우 깨끗했다. 정원도 손질이 잘 되어 있어 주인이 없는 보이지 않았다. 

어느새 과실나무가 있는 곳 까지 가버린 문을 바라보다 등 뒤에 서 있는 슈레이가 서 있다는 게 느껴졌다. 

“에덴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

“우연이라고 말할 생각은 아닐 테고.”

“피곤하군. 나머진 서신으로 답하겠다. 둘 다 돌아가.”

대답이 없었다. 대신 내게 손을 뻗으려 하자 귀찮아지기 전에 움직여 사정거리에서 벗어났다. 마침 슈레이를 급히 찾는 이가 나타나 지체할 시간이 없어 그대로 발길을 돌려 성 밖으로 나갔다. 나비 역시 슈레이의 종속에 있으니, 싫어도 주인을 따라 등을 돌렸다. 

그제야 주위가 정리되어 조용해 졌다. 

“문.”

과실나무 위에 올라간 문이 바닥에 내려왔다. 빨갛게 익은 과실을 보여주고 웃고는 따가지고 온 두 개 중 하나를 내게 뻗었다. 

한 입 베어 물곤 맛있었는지 어서 받으라고 흔들며 재촉을 했다. 

뻗은 창백한 손에는 여기저기 베인 상처가 즐비했다. 열도 있었던 같은 데, 옛날부터 체력 하나는 당해낼 자가 없었던 문은 멀쩡하게 돌아다녔다. 대신 평소보다 예민해져 작은 자극에도 쉽게 흥분하기 때문에 조금 더 위험한 상태가 된다. 

어느새 한 손에 쥐고 있는 걸 모두 입에 넣고 삼킨 문은 과즙이 묻은 손을 핥으며 나를 보았다. 

“맛있어. 먹어봐.”

눈앞에 있는 과실을 바라보다, 문의 손목을 잡고 그대로 한 입 베어 물었다. 확실히 맛은 있었다. 

“…….”

이제 따라 들어오라는 말을 하려는 데, 고개를 들어 눈을 바라보자 곧 내 시선을 피했다. 

왜 저러나 싶어 손을 놓지 않고 조금 잡아 당겼다. 

“열이 오르는 것 같으냐?”

상태가 조금 이상한 것 같아 물었더니, 과즙을 핥던 다른 손으로 얼굴을 가린 문이 눈동자를 굴려 나를 보았다. 얼굴이 조금 붉어져 있었다. 

상태가 좋지는 않은 것 같아 안으로 들어갈 생각을 하던 내게 문이 말했다. 

“일부러 그러는 거야?”

“뭐?”

제대로 되묻기도 전에 과실을 손에 놓고 나를 잡아당겨 단숨에 입을 맞췄다. 단맛이 느껴지는 입맞춤에 또 시작이다. 라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진득한 입술이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고 내 등 쪽으로 손이 들어갔다. 그 순간적인 서늘함에 흠칫 놀라 인상을 쓰자 입술을 뗀 문이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다시 말해봐.”

속삭이며 문이 말했다. 

“떨어져.”

“그거 말고.”

"손 떼”

“말해봐. 응? 날 다 줄게.”

“……."

“라마…….”

무엇을 재촉하는지 알고 있었다. 다시 말해주는 건 어려울 것 없었지만, 뭔가를 더 건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은 끊임없이 확인받고 싶어 했다. 변하는 건 없음에도 말이다. 같은 질문에 같은 답을 늘 원했었다. 과거에 문은 나를 죽일 수 있는 사람은 자신뿐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것을 계속해서 확인받았다. 

나 역시 죽음을 선택할 수 있다면 문의 손이라도 상관없었다. 문은 최후의 나를 뜯어먹기 위해 나에게 종속되었을 뿐이니까. 일종의 계약과 비슷했다. 

스스로 목숨을 끊어 그런 문을 배신 한 것이 나다.

나는 그것이 마음에 걸렸었다. 

그렇다면 지금도 문은 나를 죽이길 원하는 것일까. 

속내를 알 수 없으니, 분명하진 않지만 문은 다시 한 번 확인 받고 싶어 했다. 그리고 나는 마땅히 그렇게 해 주고 싶었다. 

“너는 내 것이다. 나 역시, 네 것이다.”

“…….”

대답대신 문은 나를 깊이 끌어안았다. 불안함이 조금 달래졌는지 한 결 편안한 얼굴로 목덜미에 입술이 닿았다. 

뭔가 이상해서 문을 보려했더니 목에 이상한 감촉이 느껴졌다. 그대로 손을 들어 문의 머리를 밀어냈다.  

목을 물어뜯으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생생하게 느껴지는 얼얼함이 손끝에 닿았다. 

통증이 느껴지는 곳에 손을 떼고 바라보자 피가 묻어 나왔다. 피를 확인하자 화를 참을 수 없어 문을 노려보았다. 그는 미소를 짓고 있으나 단순히 즐기고 있는 표정은 아니었다. 

“내 거란 표시야. 라마도 내게 해 줬잖아.”

문은 말을 마치고 고개를 들었다. 적나라하게 목을 두른 붉은 자상이 눈에 띄었다. 오래전 보던에서 내가 직접 달아준 목줄이었다. 잊고 있던 것은 아니었지만 다시 한 번 지울 수 없는 자상을 확인하는 건 그다지 반길만한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나는 문의 고개가 내려가는 순간까지 눈을 떼지 않고 있다가 손을 뻗었다. 그대로 문의 멱살을 잡아 내리고 나를 가두려는 붉은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문의 미소가 사라지자, 내 입술의 끝이 올라갔다. 그대로 멱살을 잡아끌어 창백한 살갗에 눈동자 다음으로 붉은 입술을 맞닿았다. 그리고 있는 힘껏 깨물었다. 소스라치게 놀라는 문을 놓자 피 맛이 느껴졌다.

“부족하냐? 어딜 더 씹어줄까?”

위협하듯 말하자 깨물려 통증에 시달리는 문은 울상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정말로 원한다면 구석구석을 뜯어먹을 생각이었다. 

“아파…….”

상처를 봐 달라는 듯 붉게 달아오른 혀를 내밀었다. 스스로 뿌린 것을 거둔 것이라 말하려다, 목덜미 밑으로 드러난 상처가 보였다. 한숨을 내 쉬고 다가온 문의 이마를 짚어 보았다. 열이 나고 있다. 단순히 몸에 난 상처들이 원인은 아니다. 문은 수차례 전쟁에서도 병에 걸린 적이 없었다.

내가 과거에 목줄을 채웠던 것은 성인식을 끝내고 기사가 되었을 때 이었지만, 과거의 문은 마치 수명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단지 체력이 좋다는 것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눈앞의 들개는 어디에서 병을 얻었는지 열기가 가득한 숨을 내쉬고 있었다. 눈앞이 어지러운지 눈을 깜빡이다 이제는 비비기 시작했다. 

상처나 병이 타인에게 옮겨가는 것은 불가능 하다고 리노가 말했다. 그러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가 앓고 있었던 병을 똑같이 앓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몇 번이고 반복이 된다면 결국 우연이 아니었다는 걸 깨닫게 된다.

다시 내가 가져갈 수 있지도 않을까란 생각도 해 보았다. 가져갔다면 도로 빼앗을 수도 있을 터. 하지만 어째서인지 문의 기의 성질이 나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닮아 버렸다. 내 것을 거를 수도 없을 정도로 말이다. 정작 본래의 문의 성질의 화(火)를 밑바닥을 긁고 나서야 느낄 수 있었다. 

기의 성질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타인의 기를 그대로 모방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 어떠한 학문적 접근으로도 설명이 되지 않는 부분이었다. 여기까지도 골치가 아파오는데, 문제는 내가 견뎌야 할 고통까지 훔쳐간다는 것이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가져가고 있는 것인지조차 파악이 되질 않았다. 

눈을 비비는 문의 손목을 잡았다. 그렇잖아도 시력이 날이 갈수록 떨어지는 녀석이 자각을 전혀 못하고 있었다.

직접적으로 해에 닿으면 피부와 눈이 상해버리니 옷은 언제나 팔 다리를 모두 덮어 살이 노출되는 부위를 최소화 하고 있었다. 곧바로 화상을 입게 되어 따가우니 본인이 알아서 적당한 옷을 고르고 입었지만 문제는 눈이었다.

이대로 가면 앞으로 5년 이내에 후각과 촉각으로만 세상을 살아야 할 것이다. 직접 해에 닿지만 않아도 눈에 큰 도움이 된다. 나머진 조만간 리노에게 묻기로 하고 문을 잡아 성 안쪽으로 들어갔다.

해가 닿지 않아 눈을 뜨기 수월했는지 잔뜩 찌푸리고 있던 표정이 조금 풀렸다.

이미 몰락해버린 귀족이 살았던 곳 치고는 내부역시 깨끗했다. 곧 주인 없는 성이 거미줄 하나 없던 이유가 눈앞에 나타났다. 나이가 지긋한 노인이었다. 그는 자신을 집사장 루퍼라 소개했다.

그는 방이 있는 곳으로 나를 안내했고 그 뒤를 느리게 문이 따라왔다. 방에 들어오자마자 의자에 앉은 내게 저녁 식사시간을 알려주며 간단한 티를 내오겠다고 말했다. 하인을 불렀으니 곧 준비된 옷도 도착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더 필요하신 것이 있으십니까?”

루퍼는 단정한 옷차림에 그 어떠한 의문도 달지 않고 마지막으로 물었다.

“간단한 외상 치료용 약과 물품을 가져와라.”

“알겠습니다.”

나는 그가 최소한의 단어로 길게 말을 잇지 않고 깨끗하게 말을 마치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집사장이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문은 열이 펄펄 끓고 있음에도 호기심을 주체할 수 없었는지 방 안에 있는 모든 장식물을 건들었다. 

“문.”

화들짝 놀란 문의 등이 보였다. 그는 쭈그려 앉아 대답 한 번 없더니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이리 오거라.”

“…….”

구경하던 장식물 어디 한 곳을 망가지게 한 모양인지 내 눈치를 보더니 품 안에 감추었다.

선뜻 다가오지 못하는 문을 바라보다 손을 뻗었다.

“이리 와.”

한 번 더 말하자 우물쭈물하던 문이 일어나 내게 다가왔다. 무엇을 그렇게 숨겼나 싶어 바라보자 품에서 삐져나온 장식품 부스러기가 보였다.

“다치지만 않으면 되니, 숨기지 않아도 된다.”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품에 넣은 것들을 쏟아 부었다. 문의 손에 닿기 전까진 온전히 제자리에 있었던 장식품이나, 식물의 조각들이었다. 여기까지 오는 사이, 잘도 이만큼이나 부셔놨다고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내가 웃자 문도 따라 웃었다.

가까이 오라고 손짓하자, 문이 조금 더 앞으로 다가왔다. 좀 전처럼 코앞으로 다가오는 게 늦어 목덜미 부근의 옷을 잡아 당겼다. 그제야 눈앞까지 온 문의 이마를 짚어 보았다. 열이 떨어지기는커녕 이제부터 올라가기 시작했다는 듯 들끓고 있었다.

“미련한 놈.”

문은 눈을 감았다. 내 손길을 온전히 느끼고 싶다는 듯 뜨거운 이마와 반대로 차가운 손으로 내 손과 맞닿았다. 다시 가져갈 수 없는 것인지 문의 기를 따라가 훑어보았지만, 소득은 없었다. 

“난 괜찮아…….”

문이 중얼거렸다. 나대신 앓고 있으면서도 뭐가 괜찮다는 것인지 미소까지 짓고 있었다. 내 병은 15살이 되고나면 더는 진행되지 않는다. 17살이 되고부터는 돌림병도 지나칠 정도였으니까. 그러다 문득 거기서 의문이 생겼다. 

어째서 나는 15살이 되어서야 병에서 해방 될 수 있었을까. 보던에서 용병 단에게 끌려간 뒤로 내 곁에 있었던 것은 문이 아니라 가나였다. 문을 만난 건 내가 기사가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드론의 작위를 받고 나서다.

그때의 나의 나이 열다섯을 조금 넘긴 해였다.

그 생각을 끝으로 숨이 멎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럴 이유가 없다고 불가능 하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문의 버릇 몇 가지를 알고 있다. 그 중 하나를 꼽자면, 엄살 많은 아이면서 정작 지독한 고통은 숨기는 버릇이다. 아픔을 못 느끼는 것도 아니면서 약점을 숨기는 맹수의 본능과 같았다. 

그러나 마땅히 이유가 없었다. 나는 과거, 문과 들개 시절 때조차 접점이 거의 없었다.  

지금은 내가 이른 목줄을 달아 온전히 내 것이 되어버려서 그런 선택을 해 버렸을 것이라 생각했다. 과거에는 지금처럼 이렇다한 선명한 목줄조차 달아주지 않았다. 물론 내 종속 하에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내가 문의 왕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폭주해 버리는 문을 약간 제어할 수 있을 정도였다. 예전의 나는 문과 들개의 서약 또한 하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나만 생각해.”

내 손에 닿은 열을 의식하자 어느새 핏빛 눈동자를 드러낸 문이 보였다. 

“나의 왕.”

혼란스러움을 감추지 않고 문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나를 왕이라 부르는 문의 붉은 눈동자는 흔들림이 없었다. 저 눈은 시력을 거의 잃고 나서도 변함이 없었다. 세상의 모든 것이 뒤틀려버려도 저 붉은 눈동자만은 온전히 나를 향할 것 같았다. 

나는 신음하듯 양손으로 문의 얼굴을 잡아들었다. 

답을 들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물었다.

“왜 그런 짓을 했지.”

그때의 문은 선명한 붉은 기운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가진 병을 가져갔다면 분명 부작용이 있었을 것이다. 그것을 알지도 못하고 순진하게 모든 병이 나았다고만 생각하던 내 자신이 역겨울 정도로 혐오스러웠다. 누군가의 희생으로 살아남았을지도 모르면서 누군가를 지켜주고 싶다 자만하고 말았다. 

내 것이라 생각했던 것 중 유일하게 살아남았다고 생각했던 문 역시 나 때문에 죽었을지도 모른다. 

결국 과거의 나는 모든 걸 잃어버렸고 빼앗겨 버렸다. 그것을 확인 받고 있는 것처럼 깊은 곳부터 녹슨 통증이 올라왔다. 

지금 내가 느끼는 고통은 이 모든 사실을 죽고나서야 깨달은것에 대한 자책감과 죄의식이었다.

“어째서, 대체 내가 뭐라고……!”

“왕이잖아.”

“하.”

헛숨과 함께 말문이 막혀 결국 문의 얼굴을 놓고 내 얼굴을 가려 버렸다. 결국 나는 같은 길을 걷게 되고 마는 걸까. 그걸 원하지 않았기에 트란슈에 와 슈레이를 만나놓고도 결국 비슷한 가시밭을 문에게 밟게 하고 있다. 

“말했잖아.”

얼굴을 가리고 있던 내 손목을 잡아 힘을 주어 당기면서 어느새 일어난 문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과거의 문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그에게 듣고 싶은 답을 들을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문은 거침없이 입을 열었다. 

“왕좌는 내가 만들어 줘.”

내 얼굴을 손끝으로 훑어주던 문의 입 꼬리가 길게 올라갔다. 그리고 눈앞까지 다가온 붉은 눈동자가 나를 불길 한 가운데에 갇히게 만들었다.

“앉아서 손끝만 움직여. 내가 대신 다 해줄게. 왕은 살만 찌우라고.”

또렷하게 보이는 붉은 눈동자를 거부 할 수 없었다. 나는 붙잡고 있는 손을 뿌리칠 수도 없었다. 무기력한 숨만 내 쉬면서 더는 묻지 않았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손을 뻗어 문의 열기에 달아오른 뺨에 닿았다.

“나는…….”

그것은 나 또한 목숨을 바치는 맹약.

“널 지킬 것이다.”

“…….”

잠시 아무 말도 표정도 없이 나를 바라보던 문이 이제야 무슨 뜻인지 이해를 했다는 듯 미소 지었다.

“왕이라서?”

그러나 아이는 그다지 좋은 머리를 가진 것이 아니라서 이해력이 떨어졌다. 

로던프에서는 동성혼은 금지하고 있다. 때문에 동성애 자체도 죄가 될 수 있었고, 그들을 처형까지 가능했다. 하지만 이곳 트란슈는 다르다. 동성혼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그 어떠한 처벌도 차별도 없었다. 로던프는 그런 트란슈의 풍습이 저급하다 손가락질하며 타국 문화를 비난했지만 뒤로는 많은 귀족들이 동성애를 즐겼었다. 

트란슈인을 납치해 강제로 모스로 만들어 개중 예쁘장한 소년들을 골라 변태적 행위만 일삼고 죽이는 귀족도 있었다. 

로던프는 트란슈의 그 어떤 것도 비난할 명목이 없었음에도 강대국이라는 것만 믿고 섣불리 행동한 대가는 참혹했다. 

겨우 멸망 직전에서 막아내어 소생할 수 있었지만, 내가 죽은 뒤의 일은 알지 못한다. 하지만 분명한건 알게 되었을 것이다. 휴전은 결코 끝난 전쟁이 아니라는 것을.

지금은 그 모든 잡다한 생각을 지웠다. 그리고 정확한 단어는 아니지만, 지금의 문이 가장 받아들이기 쉬운 단어를 생각해보았다. 손바닥에 닿아 있는 뺨을 어루만지면서 말했다.

“배우자로서다.”

“…….”

입을 벌린 채 바라보던 문이 순식간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고개를 숙였다. 땅바닥만을 바라보고 있어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내가 하는 말을 못 알아들은 것인가 싶어 바닥을 향하고 있는 얼굴을 잡아 들었다. 

붉은 눈이 마주치는 것 같더니 다시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싫은 것이냐?”

“아니!!!”

내 말에 화들짝 놀라 대답을 하는 것을 보니, 싫은 것은 아닌 것 같았다. 혹, 열이 올라 어지러워 그러나 싶어 걱정스럽게 바라보자 넋을 놓고 있던 문이 나를 붙잡아 그대로 끌어안았다.

“왜 그런 말을 해?”

듣기 원하는 소리를 해 주면 늘 이런 식으로 불안해한다. 늘 이유가 궁금했었는데 잘 되었다 싶어 물었다.

“어째서 불안해하기만 하는 거지.”

“…….”

부쩍 말이 줄어든 문은 나를 안은 채로 속삭이듯 말했다. 무언가 회상하는 것 같은 조금 젖은 목소리였다.

“달콤한 소릴 하면, 사라져 버리니까.”

“그런 적 없다.”

“응. 라마는 그런 적 없어. 하지만, 같은 소릴 하니까.”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나를 만나기 전에 어머니의 손에서 자랐다고 했다. 창녀였다는 소문만 듣고 그녀가 문의 손에 죽었다는 것만 얼핏 들어 알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들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아들의 손에 살해 되었다던 여인의 죽음은 자살이었다. 

그것도 아들의 손에 직접 죽길 원했고 그것으로 문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같은 말을 해 버릴 테니까…….”

“죽여 달란 말을 말이냐.”

“…….”

나를 안고 있던 문을 밀어내 얼굴을 마주 보았다. 내게 배운 눈물을 표정 없이 떨어트리고 있는 아이는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열기와 함께 어지럼증이 올라오는 모양인지 초점이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그러나 나를 붙잡고 있는 손에는 점점 힘이 들어갔다.

그의 말대로 나는 같은 선택을 했고 같은 상처를 줬다. 

얼마나 많은 톱니바퀴가 저 속을 헤집어 놓았을지 몰라 가슴을 어루만져 주며 달래주었다. 문이 말한 대로다. 짐작한 대로다. 

나는 앞으로도 같은 실수를 반복할 것이고 같은 상처를 줄 것이다. 그러나 더는 잃어버리고 빼앗기진 않는다.

나는 들개.

탐욕과 욕심이 많아 배를 곯지 않아도 이를 드러내는 추악한 짐승.

이해력도 좋지 않지만, 기억력도 엉망인 나의 반쪽의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말했지 않으냐, 너부터 죽여준다고.”

이제야 안심이 되는 것인지 그대로 고개가 숙여져 어깨에 닿았다. 의식을 잃어 늘어진 문을 받아 부드러운 머리통을 쓰다듬어 주었다. 더는 듣지 못할 테지만, 가라앉은 나의 달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니 걱정마라, 죽을 땐 함께일 테니까.”

 외면  

한스덴 웨이는 급히 걸음을 옮겼다. 그는 숨 한 번 고르게 쉬지 못하고 문을 열고 들어갔다. 

“가나!”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들어왔지만, 침상에 누워 있는 가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눈을 뜨지 못하고 있었다. 곁을 지키고 있었던 베펠의 외아들 아폴리네르 벤 폴리앙이 일어나 한스덴에게 예를 지켰지만, 그것조차 보이지 않았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가나의 상태를 보기에 정신이 없는 한스덴 대신, 함께 들어왔던 베펠이 벤에게 물었다. 

“오열한 뒤 쓰러지셨습니다.”

“오열?!”

의문을 다는 베펠과 마찬가지로 한스덴 역시 고개를 들어 벤을 바라보았다. 가나가 오열을 하고 쓰러질 만큼의 일은 과거엔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곧, 기억 속에서 가나가 감정을 드러냈던 유일한 단어가 떠올랐다.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이었기 때문에 한스덴에게도 잊을 수 없는 것이었다. 

“혹, 라마에 대한건가?”

한스덴의 말에 벤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알고 있을 거라는 생각은 못한 것은 아니지만, 주저 않고 원인이라 말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평정심을 잃지 않고 벤은 대답했다.

“네. 라마라는 자의 사망소식을 듣고 쓰러졌습니다.”

“오, 이런…….”

한스덴의 표정은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벤은 라마라는 존재가 가나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묻지 않았다. 궁금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죽은 자의 소식을 묻는 것은 조심스러운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펠은 신중한 아들과는 거리가 먼 아버지였다. 

“라마라는 사람이 대체 누구기에 이지경이 된단 말입니까? 사교계에서도 들어본 적이 없는데, 오열할 정도로 아끼던 자랍니까?”

“아버지.”

벤이 눈치를 주어 막았지만, 이미 입 밖으로 나온 말이었다. 

한스덴은 가나를 바라보았다. 열은 없었지만, 지나치게 땀을 흘리며 몸을 떨고 있었다. 그리고 겨우 들리는 목소리로 사경을 헤매며 단 한사람의 이름을 울부짖고 있었다. 목소리 한 번 제대로 들어본 적 없는 가나의 입에서 가장 선명하게 들렸던 단어. 유일하게 입 밖으로 낼 수 있는 단 한사람의 이름. 

찾아준다 약속했지만, 결국 그러질 못했다. 

“아들에겐 유일한 존재였을 것이네.”

“백작께서도 모르시는 겁니까?”

“성에서 라마라는 자를 아들이 봤다곤 했지만, 결국 찾아주질 못했어. 아들또래라 듣고 가디언 중에 있을 줄 알았지만 그도 아니었네. 늦기 전에 좀 더 빨리 찾았다면 좋았을 것을…….”

한스덴은 안타까움에 말을 잇지 못하고 가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마음속에 있던 유일한 사람을 잃어버린 것에 대한 아픔을 이렇게도 이른 나이에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 구멍 같은 것이기에 평생 아물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 두었다가는 뻥 뚫린 가슴을 끌어안고 평생을 살아가야 할 것이니, 남은 사람들이 그 자리를 채워줘야 한다. 

몇 년이 지나고 나서야 겨우 마음을 연 아들이기에, 그 자리를 채워 주기까진 얼마만큼의 시간이 필요할지는 짐작이 가질 않는다. 하지만 반드시 해야 할 일이기에 한스덴은 가나의 찬 손을 붙잡았다. 

“아폴리네르 벤 폴리앙.”

“네.”

한스덴은 가나의 손을 놓지 않고 눈길조차 돌리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뒤에서 듣고 있던 벤은 그의 말에 집중하여 대답했다. 

“내 아들의…….”

“…….”

“벗이 되어주게…….”

벤은 잠시 대답을 미루고 가나를 바라보았다. 

쓰러진 뒤 창백한 표정으로 단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며 눈을 뜨지 못하는 가나를 바라보며 그는 심장 부근이 욱신거리는 통증이 느껴졌다. 

저리도 애달프게 부르는 사람을 외면한 라마라는 자가 죽어서까지 가나의 속을 헤집고 있는 것이 불쾌했다. 그는 이미 가나의 사람이 되기로 맹세했다. 절대로 죽지 않을 것이며 곁을 지켜주겠다 서약했다. 

그렇기에 라마의 자리는 가나에게 이제 없다.

“유일한 사람이 되겠습니다.”

벤은 흔들림 없는 눈동자로 대답했다. 

“기사의 맹세는 목숨을 바치는 것. 누군가의 사람이 된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대화를 듣고 있던 베펠이 지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벤이 감정에 이끌려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아버지인 그가 가장 잘 알고 있었지만, 중요한 것은 다시 한 번 짚어주는 것이 그의 버릇과 같은 것이었다. 

문호의 사람이 되려면 그 목숨을 바치라는 것이었다. 

바꿔 말하면, 왕을 지켜야 할 기사에게 왕보다 문호를 위하라는 뜻과 같았다. 듣는 귀가 많았다면, 내력을 키운다는 오명을 쓰고 참형을 받아도 이상하지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 법도에 예민하던 벤은 단 한 번의 흔들림 없이 답했다.

“네.”

가나는 서 있었다. 하지만 그곳이 땅 위인 것인지 허공인 것인지는 분별이 불가능 했다. 주위는 어두웠고 빛 하나 없었다. 그는 그저 어둠 속에 서 있기만 할 뿐이었다. 아무런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을 때 뚝뚝-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어디에서 들리는 것인지도 모른 채 우두커니 서서 소리를 의식했다. 걸음을 옮겼다. 소리를 쫓아 천천히 다가가자 희미하게 들리던 물방울 소리가 점점 짙어지고 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그 곳에는 작은 인영의 그림자가 보였다. 

그것을 확인한 가나는 순간 온 몸이 얼어붙는 기분과 함께 소름이 느껴졌다. 알고 있는 등이었다. 너무도 잘 알고 있는 것이었다. 

“……!”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이름을 부르려고 입을 열었지만, 유일하게 말할 수 있었던 이름이 나오질 않았다. 마치 목구멍이 사라지기라도 한 듯 쉰 소리 한 번 나오질 못했다. 목을 쥐어짜고 소리를 내보려고 했지만 헛수고 였다.

물에 젖은 인영이 일어났다. 그리고 천천히 앞으로 걸어가 버렸다. 

가나는 그를 잡기 위해 손을 뻗었고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달려가 잡아 보려 했지만, 아무리 걸음을 옮겨도 거리가 좁혀지지 않았다. 초조함과 간절함이 가나를 좀먹기 시작했다. 눈물을 흘리고 애원을 하듯 입을 열었지만, 아무것도 닿지 않았다.

그 순간, 인영이 우뚝 섰다. 

그에게 다가가려 했지만, 어디선가 불길이 번져 앞을 가로 막았다. 불길은 그를 집어 삼키기 시작했고 인영은 잿더미가 되어 사라져 버렸다. 

“!!!”

가나는 눈을 떴다. 눈앞이 흐렸지만, 앞에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뒤늦게야 눈앞에 있는 사람이 큰 소리로 자신을 부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가나에게 어떠한 의미도 될 수 없었다.

“진정하십시오. 탈진으로 다시 쓰러질 수 있습니다.”

가나는 초점조차 흐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 시야를 넓혀 주위를 둘러보았다. 곧, 낯선 곳에 왔음을 깨닫고 몸을 일으키려 하자 그것을 지켜보던 벤이 손을 뻗어 부축을 해 주려 했다. 그러나 가나는 불에 댄 것처럼 날카롭게 벤의 손을 쳐냈다. 마치 몸에 닿는 것 마저 싫어하는 사람처럼 벤을 밀어내고 스스로 일어났다.

그것에 감정이 상할 법도 한데, 벤은 스스로도 어색한 웃는 낯으로 가나에게 물을 권했다. 그러나 가나는 대답이 없었다. 

“성에는 개인 의술사를 부릴 수 없어, 가까운 저희 저택에 모셔왔습니다. 백작께서 대신 연회에 참석 할 동안, 이곳에서 치료를 받으시면 됩니다.”

벤의 목소리가 가나에겐 들리지 않았다. 아니, 그는 들려도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일어나 방에서 나가버리려 했다. 벤은 고집스러운 가나의 행동이 혹 그의 건강에 영향을 미칠까 염려되어 나가려는 그의 팔을 붙잡았다.

“아직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가나는 자신을 붙잡고 있는 벤의 팔을 바라보았다. 단단히 잡고 있는 그의 손에 있던 시선이 천천히 올라가 벤을 바라보았다. 똑바로 바라보는 눈동자에는 아무런 감정이 들어가 있지 않았다. 가나는 다시 한 번 잡힌 손을 힘을 주어 빼려했다. 그러나 벤은 그것을 놓아주지 않았다.

“쉬셔야 합니다. 백작의 명이기도 합니다.”

가나는 현기증이 몰려왔지만, 잡힌 손을 빼낼 생각밖에 하질 못했다. 당장 나가야 했다. 물에 젖어 추위에 떨고 있을 라마를 찾아야 했다. 어디선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라마를 불러야만 했다. 

가나는 라마의 이름을 부르려 입을 열었지만, 목에선 쉰 소리밖에 나오질 못했다. 다시는 이름을 부를 수조차 없을 거라는 생각에 조급함을 감추지 못하고 발버둥치기 시작했다. 

“진정하십시오! 진정, 진정하십시오! 문호!”

갑자기 가나가 발버둥을 치자 놀란 벤이 그를 불렀다. 그러나 가나의 고개를 문만을 향해 나갈 생각만 하고 있었다. 뭔가를 내뱉으려 하려는 듯 재차 쉬어버린 목소리가 나왔다. 그것이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 벤은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입술을 깨문 벤이 소리쳤다.

“죽었어!!!”

이대로는 다시 쓰러지고 말 것이다. 벤은 팔 안에서 발버둥치는 가나의 두 어깨를 잡아 자신을 바라보게 만들었다.

발버둥이 멈췄다. 가나는 눈을 들어 벤을 바라보았다.

벤은 자신이 말실수를 했다는 걸 깨달았다. 죽은 자의 허상을 섣불리 건들어서는 안 되는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하게 된 실수였다. 

그러나 이미 한 번 내뱉은 것을 무를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제 이 세상엔 없습니다.”

가나의 표정 없던 얼굴이 점차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 마……!”

그러나 가나는 필사적으로 입을 열었다. 이미 쉬어버린 목에선 기대할 수 없었던 목소리였다. 

“라마!!! 라마!!!”

두 눈을 부릅뜬 가나는 온전히 라마의 이름을 불렀다. 그제야 커다란 눈에선 눈물이 흘러내렸다. 가나는 몇 번이고 벤을 원망에 찬 눈으로 노려보며 라마의 이름을 불렀다. 그것이 얼마나 날이 선 절박함과 분노였는지, 굳게 잡고 있어야 할 가나의 어깨에 있던 벤의 손이 가나에게 힘없이 내쳐질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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