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화 (20/35)

가나를 놓쳐버린 벤은 뒤늦게야 뒤를 쫓아 나갔다. 멀리는 가지 못해 가나는 다시 벤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화를 감추지 않고 잡힌 손을 빼냈지만, 그 손마저 잡혀 움직이지 못하게 하였다. 벤은 묵묵히 가나를 붙잡았고 가나는 필사적으로 빠져나가려고 했다. 

한줌에 잡힌 팔목을 빼내려 힘을 줘 보았지만, 정식 기사와 문호의 체력의 차이는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곧 한계를 드러냈다. 눈앞이 일그러지는 현기증이 가나를 덮쳤고 얼마가지 않아 그대로 벤의 눈앞에서 쓰러져 버렸다. 바닥에 쓰러지는 일 없도록 단단히 붙잡은 벤은 눈을 감고 있는 가나를 바라보았다. 

마치 숨만 겨우 내 쉬고 있는 인형과 같은 얼굴이었다. 

가나를 가볍게 안아든 벤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다가온 하인에게 차분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의술사를 데려와라.”

많은 눈물을 흘린 탓인지 몸이 지나치게 뜨거웠다. 이대로 열이 오르는 것이 결코 가나의 건강에 좋을 게 없었다. 될 수 있으면 이곳에서 차분히 안정을 취해 줬으면 했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아 보였다.

그러나 이런 몸으로 홀로 떠돌게 할 수 없었다. 그의 신분이 단순히 현자라 불리는 문호라는 이유만은 아니었다. 

가나를 침대에 눕히고 조금 물러나자 부름을 받은 의술사가 들어와 가나의 상태를 확인했다. 

“걱정하실 정도는 아닙니다.”

“열이 동반되고 이미 두 차례나 쓰러지셨습니다. 이래도 걱정할 정도는 아니란 말입니까.”

의술사는 가나의 상태를 진찰하던 손을 닦고 일어나 고개를 조금 숙였다. 

“몸의 병이 났다면 쉬이 고치겠지만, 마음에 난 상처는 그 어떤 명약이라도 소용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경께선 조급해하시지 말고 가장 안정을 느낄 수 있는 환경부터 만들어 주시는 것이 우선입니다. 지금은 육체와 정신 모두가 쇠약해진 탓에 병을 얻기 쉬우니 찬바람은 호전되실 동안은 맞지 않게 해 주십시오.”

냉정을 유지하라는 소리였다. 

의술사는 그 말을 남기고 이만 물러가 보겠다며 밖으로 나갔다. 그는 의술사였지만 소속은 왕궁에 종속되어 있으니, 신분계급으로 따진다면 벤과 위치가 비슷했다. 때문에 예의상 둘 모두 존대는 하고 있지만 누구하나 하대를 받을 위치는 아니었다.

그 이유로 나가는 의술사를 붙잡지 못하고 답답함을 감추지 않고 가나를 바라보았다. 속이 타들어 갈 것 같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안심이 되는 복잡한 심정이었다. 멀쩡했던 사람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버린 장본인의 얼굴을 구경하지 못한 것이 다행이라 생각했다.

저택으로 오기 전 라마라는 자를 조사해 보았다. 시간이 촉박했던 탓에 얻을 수 있는 정보는 많지 않았다. 

2왕자가 주었던 라마라는 자의 그림자를 추적해본 결과 백치 왕자라 불리는 3왕자의 전속 가디언 소속으로 최연소 가디언이 되었지만, 부전승 턱걸이였다. 

죽음의 이유는 분명치는 않지만, 수도를 어슬렁거리던 트란슈의 습격을 받아 도망을 치던 중 야누스 절벽에서 떨어져 시신도 건지지 못하고 그대로 떠내려가 버렸다는 것이다. 

야누스 절벽 끝에는 높이와 깊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폭포가 있고 그곳까지 가는 물살은 성인 한 명은 간단하게 집어 삼킬 정도로 매우 거셌다. 그뿐만 아니라 돋아난 거대한 돌덩이가 여기 저기 박혀 떠내려가는 중 돌에 부딪혀 형색을 알 수 없을 만큼 부셔져 버렸을 가능성도 있었다.

성인이 휩쓸려도 죽음을 면치 못할 곳에서 고작해야 14살인 정도인 어린 아이가 살 수 있는 가능성은 없었다. 

왕족의 전속가디언이긴 했지만, 주인은 백치라 유명한 3왕자였다. 때문에 어린 가디언 하나가 야누스 절벽에 빠져죽었다 하더라도 로던프는 전혀 손해를 본 것이 없었다. 

라마라는 소년은 확실히 죽음을 면치 못했다. 

현명한 문호는 지금은 힘겹겠지만, 곧 받아들일 것이다. 그 뒤 텅 비어버린 곳을 자신이 채워주면 되는 것이다. 벤은 조급해 하지 않고 그 어떤 때보다 신중하게 눈을 떠 가나를 바라보았다. 

“쉬이 잊으란 말은 감히 하지 않습니다. 허나, 제 이름은 벤. 불러주신다면 저는 대답을 해 드릴 수 있습니다.”

*

황금빛 꽃잎이 불어오는 바람의 결을 타고 흘러내렸다. 한겨울에도 꽃잎을 피우지만, 오직 트란슈내에서만 뿌리가 자라는 꽃나무였다. 오년을 뿌리를 깊게 박는 것에만 세월을 보내기 때문에 오년 동안은 나무로 보기에는 떡잎만 겨우 떨어진 싹과 같았다. 허나 육 년째가 되기 시작하고 그해 겨울이 오면 거대한 나무가 되어 황금빛 꽃을 만개한다. 

오랜 시간, 지금 만을 기다렸을 황금빛 꽃잎이 눈앞에서 아른 거렸다. 마치 누군가의 자상이 그려질 듯한 아련함에 천천히 떨어지는 꽃잎에 시선을 떼지 못했다. 

창 너머로 바라본 탓에 열린 창 사이로 꽃잎 몇 개가 들어와 품에 안겨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다 손을 뻗으려는 순간, 등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고 뒤를 돌아보기도 전에 주위에 있던 황금빛 꽃잎이 순식간에 검게 물들어 버렸다. 

시든 것도 썩은 것도 아닌, 그저 황금빛으로 빛나던 잎을 검게 만들어 버렸을 뿐이었다. 발에 닿는 모든 꽃잎을 그렇게 만들어 버린 장본인은 눈앞으로 천천히 다가와 뒤에서 껴안았다.

“왕에겐 까만 게 가장 잘 어울려.”

문이었다. 윤기가 흐르는 은발 머리카락은 새벽녘 떠오른 달과 같았다. 헛소리를 하는 것을 보니, 제정신이 돌아 온 것 같아 같았다. 어느새 눈앞으로 다가와 얼굴을 바라보았다. 무언가 확인하려는 듯 탐색하는 시선이었다. 

곧 창백하게 질린 큰 손이 내게 뻗었다. 볼까지 다가와 닿자 체온이 느껴졌다. 

“아프지 않아?”

“그래.”

짧게 대답하자, 문이 환하게도 웃었다. 그렇게 쓰러지고 3일을 앓아누웠던 놈이 말이다. 평생 병과는 거리가 멀 것 같았던 놈이 쓸데없는 짓을 하는 바람에 고생을 자초하고 있었다. 내게 멀어지려는 문의 손목을 붙잡았다. 손이 많이 가고 귀찮은 아이지만, 한 번 잡기로 작정한 뒤론 놓아줄 수 없었다.

“넌 괜찮으냐.”

“응. 괜찮아.”

그 말에 거짓이 없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다. 대답을 들을 것도 없이 안색만 봐도 상태를 알 수 있었지만 다 나았다는 확신이 필요했다. 

문의 손을 놓았다. 허나 물러나지 않고 다가와 의자에 앉아 있던 내 앞에 앉아 무릎위로 머리를 기댔다. 

“졸리면 침대로 가라.”

“…….”

싫다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대답도 없었다. 대신 무릎에 머리를 비비며 숨기곤 떨어지려하지 않았다. 한동안 열로 사경을 헤매더니 어리광이 늘어버렸나 보다. 부드러운 은발이 실타래처럼 늘어져 목덜미 위로 붉은 선이 드러났다. 

저 붉은 목줄을 달아버린 탓에 문의 세계가 되었어야 할 모든 것을 빼앗아 버렸다. 후회 했었다. 그 누구보다 자유로워야 할 아이를 강제로 속박시킨 것에 죄책감마저 느꼈었다. 

지금과 다를 것 없었지만, 내게도 문제가 있었다. 

소유욕이 강한 들개인 탓에 한 번 내 것이 되어버린 것은 울며 애원해도 풀어줄 생각이 없었다. 이제 문을 놓는다는 건, 내가 죽는 다는 것이니까. 

새털과 같이 부드러운 은발을 쓸어내렸다. 손에 닿은 자상에는 열기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노래하는 것처럼 울어버릴까. 절규 하는 것처럼 웃어버릴까. 때가 되면 알 수 있는 것들이지만, 걱정되는 것은 그 모든 시련을 홀로 견뎌야 할 문이었다. 

그때까지, 내가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주고자 했다. 밀어내지 않고 빛이 나는 것 같은 머리카락을 바라보고 있다가 쓸어내리고 있던 손날을 세워 그대로 내리쳤다. 

“악!”

막 잡은 송어마냥 펄쩍 뛰며 문이 고개를 들었다. 통증이 느껴지는 머리통을 붙잡고 울상을 짓곤 날 바라보았다. 저 눈동자를 가리기 전에 손가락을 내려 바닥을 가리켰다. 창 너머 안쪽까지 날아온 검게 물들어 버린 꽃잎들이 주위에 어지럽게 뿌려져 있었다. 

“치워.”

오리처럼 입술을 내밀고 싫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으나, 궁시렁 거리면서 쭈그리고 앉아 바구니처럼 손을 오므려 하나하나 꽃잎을 담아냈다. 

턱을 괴고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데, 방 문 너머로 노크소리가 들렸다. 집사장의 목소리가 떨어지기도 전에 잠잠히 닫혀 있던 방문이 벌컥- 열렸다. 꽃잎을 줍다 말고 문도 그곳을 향해 바라보았고, 나 역시 들어오는 인물을 확인하자 절로 인상이 써졌다. 

“서신을 보낸다고 했을 텐데.”

“자리를 만들어 준건, 가나 너를 내 옆에 두기 위해서였다.”

"가서 기다려."

"기다리는 건 성미에 안 맞아."

슈레이였다. 나비는 어디에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한가롭게 이곳을 드나들 정도로 시간이 남아도는 것도 아닐 텐데도 그는 나갈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내가 있는 곳으로 가자. 빨리 이쪽으로 와.”

“시끄럽게 하지 말고 나비에게 가.”

“나비? 왜 내가 그래야 하지? 난 널 데리러 온거다.”

슈레이가 성큼 성큼 내 앞으로 걸어오는 가 싶더니, 곧 그대로 걸음이 멈췄다. 이유는 목 끝에 닿아 있는 시라소의 검 날이었다. 

“문.”

문의 이름을 불러 겨우 슈레이의 목이 날아가는 걸 막자, 보란 듯이 다가온 문이 한 손으로 나를 들었다. 빼앗기지 않으려는 먹잇감을 품에 넣는 짓과 같았다. 차라리 이 편이 아이를 달래는 것에 효율적이라 벗어나지 않고 슈레이를 바라보았다.

그런 나를 바라보자마자, 분노를 감추지 않고 슈레이는 문을 노려보았다. 

“당장 가나를 내려놔.”

“구역질나니까 닥쳐 구더기.”

“네놈이 명을 재촉하는구나.”

기어이 슈레이가 검을 쥐었다. 한 번은 일어났어야 하는 일이었으나, 여기서 문의 이성이 더 맛가버리면 귀찮아 지기 때문에 시라소를 쥐고 있는 문의 손등을 강하게 발로 내리쳤다. 시라소가 허공에 떠올라 돌자, 그대로 품을 빠져나와 문의 등을 짓밟아 바닥에 떨어지기 전에 시라소를 잡았다. 

날이 선 시라소가 섬광과 같이 뻗어 슈레이가 잡고 있던 검을 내쳐버렸다. 슈레이의 검이 바닥에 요란하게 떨어져 굴러갔다.

이제 검을 들고 설 칠일은 없는 그의 눈앞에서 시라소의 날을 천천히 거두었다. 이 상황이 믿겨지지 않는지 슈레이는 손에서 놓쳐버린 검을 찾지 못하고 비어버린 손을 바라보더니 나를 보았다. 

“내 것은 건들지 마라.”

“네가 내 것이다.”

“난 네놈의 것이 아니다.”

“가나!”

“말귀가 알아먹어지면 다시 와라.”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되자 문 밖의 집사장에게 고갯짓을 하자, 들어와 슈레이의 겉옷을 건넸다. 본인도 잠시 이성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실감한 것인지 허튼소리 하지 않고 겉옷을 집어 밖으로 나갔다. 

꽤 많은 부분에서 혼란스럽고 황당할 것이니, 정리정도는 필요할 것이다. 

“우…… 우…….”

발밑에서 무슨 소리인가 하여 내려다보았더니, 등을 밟고 있는 줄 알았던 문의 머리가 있었다. 더럽게 말을 듣지 않는 똥개의 머리를 짓눌러 주자, 발밑에서 파닥거리던 것의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문의 머리 위에서 내려왔다. 재빠르게 앉아 코를 붙잡은 문은 내 눈치를 보며 눈을 굴렸다. 

“죽이지 말라고 했을 텐데.”

이름을 불러 막지 않았다면, 시라소의 날에 베어 나간 것은 슈레이의 목이었을 것이다. 이번엔 그 자리에 내가 있어 최악의 상황까지는 막을 수 있었지만, 앞으로 이런 일이 없을 거라는 보장은 없었다. 

“…….”

그래서 문에게 알아듣게 일러뒀었다. 의심이 많고 불안감을 쉽게 느끼는 아이를 위해 귀찮아도 몇 번이고 확인도 시켜줬다. 그러나 전혀 학습이 되지 않는 문의 행동에 솔직히 말하자면 짜증이 났다. 관심을 받기 원하는 어린아이처럼 같은 행동을 반복하고 있었다. 언제까지라도 그런 어린아이 같은 행동을 막아줄 수 없기에 초조함이 앞섰다. 

“말을 하면 좀 들어.”

“싫어.”

뜻밖의 대답이 들려왔다. 잠자코 듣기만 하던 녀석이 일어나 천천히 내 앞으로 다가왔다. 허리를 약간 숙여 붉은 눈을 가까이 들이댄 놈은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이었다.

말을 하면 못 들은 척 한 적은 있어도 이렇게 명령을 불복종 하는 일은 없던 문이었다. 명을 잊고 슈레이이 목을 치려했던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분노가 일어나는 것 같았다. 그 영향을 받은 것인지 내가 쥐고 있던 시라소가 시퍼렇게 날이 서 공명을 시작했다. 

내 살기를 온전히 받고 있으면서도 표정에 변화를 보이지 않던 문이 손을 뻗어 시라소의 날을 움켜쥐었다.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인지 알 수 없어 바라보는 데, 날을 쥐던 손에 힘이 들어가자 시라소가 문의 손바닥에 상처를 내고 피를 흘리게 만들었다. 문은 시라소의 날을 들어 자신의 목 부근까지 가져오곤 붉은 눈동자를 들어 올려 나를 바라보았다. 

“할 수 있어?”

“…….”

나는 숨을 쉬는 것을 잊어버리고 문을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을 죽일 수 있느냐고 묻고 있었다. 내가 대답이 없자 문은 시라소의 날을 쥔 손으로 힘을 주어 목 부근까지 밀어 넣으려고 했다. 가차 없이 주인의 목을 깊숙이 파고들려는 시라소의 날을 보자 나는 결국 검을 놓고 말았다. 

내가 놓자 문 역시 시라소의 날을 놓았다. 

멈추지 않고 손에서 피를 흘리던 문은 아픔이 느껴지지도 않는 것인지 웃고 있었다. 흘리는 피에 양이 늘어날수록 머리가 아파오는 것 같았다. 결국 보다 못한 나는 엊그제 집사장이 가져왔던 치료용 도구 상자를 뒤져 붕대를 집어 들었다. 

손을 잡아 물병에 담긴 물로 피를 씻어내자, 생각보다 상처가 깊지 않았다. 빠르게 손바닥 위로 상처를 감았고 단단하게 묶어 지혈했다. 회복이 빠른 녀석이니, 곧 피는 멈출 것이다. 

없던 상처도 스스로 만들어 버리니, 짜증이 올라왔다. 

가만히 있던 문이 손을 뻗어 내 양쪽 뺨을 잡았다. 찬찬히 내 눈을 바라보는 불길이 애처롭게 일렁이고 있었다.

“뭐가 그렇게 불안하다는 거지?”

“버릴 거니까.”

내 뺨을 잡고 있던 손이 내려갔다. 힘없이 떨어지는 손만큼이나 탓하는 듯한 눈이 나를 향하다 바닥을 바라보았다. 그런 문의 답답한 모습에 나 답지 않게 조금 언성을 높였다.

“난 내 것은 버리지 않아. 대체 몇 번을 말해줘?”

“버리게 할 거잖아.”

그날, 만약 아이가 살아 있었다면 내게 이런 말을 했을까. 

체념한 듯한 목소리였다. 

모든 걸 알고 말하고 있진 않을 것이다. 그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마치 모두 꿰뚫고 있는 듯한 태도에 놀란 건 사실이었다.

바닥을 바라보고 있던 붉은 눈동자가 올라갔고 온전히 나를 향했다. 

“구더기가 그렇게 좋으면, 가지고 놀아.”

“…….”

“눈앞에서 짓밟아 줄 테니까.”

적의가 향하고 있는 것은 슈레이만은 아니었다. 아무것도 모를 것이라 생각했던 아이에게 남김없이 들켜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아이의 그런 행동에 웃음이 나왔다. 곤란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정말로 온전히 내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어버렸으니까. 

잘 감춰왔다고 생각했는데, 그러지도 못한 모양이었다. 아이에게 약속했던 모든 것을 나는 지킬 수 없다. 방금 전 시라소를 들고 있던 내가 그것을 증명해 버렸다. 나는 문을 죽일 수 없다. 

그것이 문을 불안하게 만드는 이유였다. 

머리통 속에 나밖에 없다는 것이 투명하게 보일 정도로 솔직한 사랑스러운 아이다. 그 속은 백지와 같아서 얼마든지 원하는 색으로 물들일 수도 있다. 

순백한 백지위로 더러운 오물을 떨어트렸다. 눈이 부실정도로 하얀색이 빛조차 닿을 없는 검은 빛으로 만들어 버린 것은 나다. 

오물위에 피어난 연꽃 같은 문이 옷깃을 잡아내려 입을 맞췄다. 입술이 맞닿은 채로 달래듯 말했다.

“내가 가진, 모든 걸 주마.”

나를 껴안은 문은 그대로 나를 들어 올려 탐하듯 입술을 맞댔다. 어느새 침대 위에 눕게 된 내 위에서 빠져나갈 수 없도록 머리를 움켜쥔 문은 진득한 입맞춤을 계속했다. 그럼에도 내 몸을 어루만지는 손이 지나치게 부드러워 간지러울 정도였다. 

모든 걸 준다는 말 뒤로 하지 못했던 말을 속으로 내뱉으며 나는 눈을 감았다. 

‘그러니, 날 용서해라…….’

얼굴위로 뭔가 뚝뚝 떨어졌다. 그것은 물이었다. 눈을 떴다. 눈앞에 문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하던 행위를 모두 멈추고 일그러진 얼굴로 눈물을 흘리던 문이 나를 끌어안았다. 

그 마음이 가슴 깊은 곳 까지 전해져 아려오기 시작했다. 속마음을 들여다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용서를 하길 바라는 것도 싫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소리 한 번 내지 않고 울고 있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괜찮으니, 자라.”

그런 내 말에 문이 약간 움찔거리는 게 느껴졌다. 곧 바로 나를 껴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덜덜 떨기까지 하는 커다란 놈이 안심할 수 있도록 뒷머리를 숨소리에 맞춰 쓰다듬어 주었다. 

보통 사람이었으면 심장까지 익어 죽었어야 할 열병을 앓고 깨어 난지 얼마 되지 않아 수면을 유도하는 손길을 쉽게 받아들였다. 

곧, 잔잔한 숨소리가 귓가에 들리자 잠이 들었다는 걸을 알게 되었다. 

“무거워…….”

덩치가 커다란 놈이 몸 위에서 껴안은 채로 잠이 든 바람에 무게감이 느껴졌다. 잠든 사이에 밀어내려 시도를 해 봤지만, 벗어나지 못하도록 손에 힘을 주는 바람에 포기했다. 

여과 없이 이대로 낮잠을 자야 하는 상황에 한숨을 내쉬다 문을 바라보았다. 나만 보면 지랄하는 개처럼 발광하는 통에 맞아도 꼬리가 떨어질 때까지 흔드는 똥개를 보는 것 같아 얼굴을 의식하고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피부는 하얗긴 하지만, 여인처럼 백옥이라기 보단, 창백하다는 것에 가까웠다. 살갗이 얇고 약해서 곧 잘 화상을 입곤 한다. 트란슈는 해가 길지 않아 문의 얼굴에 화상자국은 보이지 않았다. 유일하게 피가 돌고 있는 곳은 붉은 눈동자와 입술뿐이라 피부 다음으로 시선이 가는 곳은 입술이었다.

입을 맞출 때 조금 까칠한 것 같더니, 해가 질지 않는 대신, 겨울이 길기 때문에 문의 입술은 바싹 말라 피가 고여 있었다. 

기분이 묘했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바라볼수록 타인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머리카락과 마찬가지로 속눈썹까지 하얀색이다. 

잠들어 있는 문의 모습은 실력 좋은 화가의 명화에서나 나오는 여신과 닮아 있었다.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 통에 이질감을 느껴졌다. 

살아 있는 게 맞을까? 라는 의심이 들 정도였다.

“문.”

결국 조바심을 이기지 못하고 문을 불렀다. 

바보 같은 행동이라는 것을 깨닫기도 전에 문의 입술이 조금 열렸다. 

“응…….”

잠이 든 와중에도 내 목소릴 듣고 답하는 모습이 더할 나위 없이 사랑스러웠다. 이래서야 나도 문과 다를 것 없지 않는가. 

나 역시 끊임없이 확인 받고 싶어 한다. 이렇게 품에 들어오고 싶어 안달하는 아이가 안심을 하고 안겨 있으면서도 초조해 하고 있는 건 나였다.

문을 힘을 주어 끌어안았다. 그 품에 파고들어 나갈 생각도 하지 않았다. 익숙한 체향이 맡아졌지만, 안심을 하고 잠든 문만큼도 못하는 뒤늦게야 숨겨두었던 소유욕을 드러냈다. 

정말 놓을 수 있을까. 

이 아이를 다시 놓아 줄 수 있을까.

나는 그런 내 물음조차도 제대로 답할 수 없었다.

*

나는 이미 몰락해 버린 귀족의 이름을 빌리고 있었지만, 철저한 신분제기 때문에 백작의 신분을 빌리고 있기에 기사의 작위를 얻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다. 

일개 기사에서 귀족 작위를 얻는 것은 어려웠을 테지만, 귀족들을 중심으로 기사서임이 이뤄지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실력만으로도 평민이 가디언이 되어 호쿠에 오르면 때에 맞춰 하급 기사가 될 수 있는 로런프와는 다르게, 신분이 강요 되는 트란슈의 기사는 상대적으로 질이 떨어졌다.

기사는 귀족 신분의 말석이 된다. 때문에 천민이나 혹은 평민의 신분에서 나처럼 몰락 귀족의 이름을 빌리거나, 입양이 된 자들이 가장 먼저 얻으려는 작위이다. 

그 문제점을 인식한 트란슈는 무분별하게 주었던 기사 작위에 조건을 덧붙였다. 기사임을 증명해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그것은 곧 예견된 전쟁을 말하는 듯 했지만, 로던프에서 내전이 일어나기까지 앞으로 일 년. 내전 중에 트란슈의 공작을 틈타 전쟁이 발발하고 로던프는 왕을 잃고 만다. 당시 17사단에 있던 나는 다음해 2월, 전쟁 통에서 나비 손에서 죽은 17장군을 대신해 그 작위를 받았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트란슈는 생각했던 것 보다 다가올 전쟁에 대한 대비는 보이지 않았다. 그 전쟁은 일 년 안에 준비할 수 있는 규모도 아니었다. 

전쟁에 대한 준비를 완전히 하지 못한 트란슈가 내전을 틈타 역습을 먼저 공작한 전쟁에서 로던프는 허무하게 왕을 잃고 수많은 기사와 드론을 잃었다.

수적으로나 기사의 질적으로나 우세인 로던프가 급습을 당한 것 치곤 초반에 밀렸다는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타국의 개입이었다. 

떠오르는 국가는 많지 않았다. 가능성이 있는 곳은 트란슈와 로던프를 사이로 두고 있는 라이나프와 오래전 트란슈를 침략하기 위해 손을 잡았던 쿠웨드가 있다. 

두 나라 모두 중립적인 성향이었으나 쿠웨드는 이미 한 번 트란슈와 적대적인 관계가 된 이력이 있는 나라다. 그러나 중립을 지키던 라이나프의 개입으로 로던프가 먼저 발을 빼고 쿠웨드가 정벌 당하면서 실질적 손해는 온전히 쿠웨드가 받게 되었다. 

그것에 앙심을 품고 있을 쿠웨드가 로던프 내전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쉽게 예측이 가능했다. 

라이나프가 떠오른 것은 중립을 지키려는 그들이 로던프의 독단적인 내전으로 쿠웨드와 전쟁이 발발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트란슈와 로던프를 사이에 두고 있기 때문에 두 국가 중 전쟁이 일어나기 시작하면 피를 보는 것을 피할 수 없는 것도 라이나프이다. 복합적인 이유로 중립을 지킬 수 없다면 자신을 지켜줄 왕이 없는 라이나프의 권신들은 전제대로 움직일 것이다.

자국민을 보호하기 위한 국가 책임으로 그들은 6가지의 전제조건을 들고 있는데, 이는 정당한 권위, 정당한 명문, 정당한 의도, 최후의 수단, 수단의 비례성, 마지막으로 합리적 전망을 들고 있다. 

최후의 수단이 로던프의 몰살이라 할지라도 궁극적인 목적이 침략이 아니기 때문에, 합리적 전망으로 강대국인 로던프의 국력이 약해지는 것을 우선으로 삼을 것이다.

란이 기다리는 것도 중립을 지키는 라이나프의 움직임이었다.

로던프의 3왕자의 사망 소식이 들려왔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암부에게 살해를 당했다는 소문이 돌면서 내전의 흐름을 타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 흐름을 읽기에 지금의 나는 시야가 좁았다.

*

“뭐라고?”

간단한 서신으로 불러들인 슈레이는 진행 중인 로던프의 내전을 내가 알고 있다는 사실에 놀란 눈치였다. 확실히 공식적으로 알려지지 않는 사항을 몰락 귀족의 신분으로는 알 수 없는 것이지만, 내 출생이 로던프의 에덴이라고 알고 있기에 그 문제는 함묵하고 다시 물었다.

“암부와 손을 잡으라니?”

“말 그대로다.”

“그들과 교류가 없다. 의도를 알 수 없는 명분이 없는 자와 나보고 준비되지 않는 전쟁을 감수하라고?”

“그만한 가치는 있을 것이다.”

“전쟁이……. 애들 놀이 정도로 알아?!”

눈앞에 앉아 있던 슈레이가 거칠게 일어나 큰 소리를 냈다.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문이 다가오려고 하자 난 손을 들어 막고 눈을 돌려 문을 바라보았다. 나대지 말라는 명령이었다. 움직임을 멈춘 문을 확인하고 나서야 슈레이에게 시선을 돌렸다. 

“앉아. 애처럼 굴지 말고.”

전쟁에 대해선 누구보다 나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준비되지 않는 전쟁이 얼마나 큰 희생을 가져 오는 것인지 눈앞에서 직접 확인 한 바 있으니까. 그러나 백 명의 희생이 두려워 만 명을 희생시킨 전쟁 또한 봐왔었다. 

나는 지난 전쟁에 있어 드론으로 단 한 번의 전투에서도 패배한 적이 없다. 승패는 준비된 병사와 무기가 아닌, 때에 맞은 올바른 선택과 결단이었다.

“지금 암부를 손에 쥐는 것이, 이후 개입될 나라의 지원을 받게 될 것이다.”

“…….”

그제야 귓구멍이 트였는지, 슈레이는 말없이 자리에 다시 앉았다. 나는 그에게 이후 개입하게 될 두 나라를 예로 들었고, 그들이 목적으로 두고 있는 몇 가지를 일러두었다. 

이는 트란슈가 원치 않더라도 전쟁은 반드시 일어난다는 전제가 깔려 있는 것이다. 그제야 준비라는 핑계가 무의미 하다는 것을 깨달은 슈레이는 진지하게 내 말을 경청했다.

“하지만, 암부는 로던프 내에서도 알려지지 않는 집단이다.”

“카인관으로 가.”

“카인관?”

“가서 라마라는 자를 아느냐 물어봐라.”

슈레이는 잠시 대답을 미뤘다. 침묵을 지키던 그가 의문이 담긴 목소리로 물었다. 

“그들의 배후엔 누가 있는 거지?”

“직접 확인해 보면 알 것이다.”

“한 가지 더. 대체 넌 어디까지 알고 있나.”

슈레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뒤늦게 들어와 그의 옆에 말없이 선 나비의 시선도 함께 느껴졌다. 둘 모두 묻고 싶은 것이 많은 것 같은 표정이었지만, 신중하게 물음을 고르고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닮았다. 예전에는 몰랐지만, 이 둘은 서로가 너무도 닮아 있었다. 

“후회할 짓 하지 말고 있을 때 아껴줘라.”

“?”

“너희 둘은 잘 어울리는 군.”

“뭣, 뭐?!”

슈레이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되물었고 나비가 나를 불렀다. 둘을 보고 웃어줬더니, 부끄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서로를 바라보다 고개를 돌려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인기척조차 희미할 만큼 잠자코 있던 나비가 경악하며 슈레이를 향해 삿대질을 했다.

“지금 저것과 나를 두고 하는 소리더냐?!”

“저것?”

“모르시겠습니까? 당신을 두고 하는 소립니다.”

“네놈이 주인을 앞에 두고 실성을 한 모양이구나.”

보는 앞에서 투덕거리기에 시끄러워 그대로 탁자 위에 손을 내리쳤다. 그 소리에 놀란 슈레이와 나비가 일제히 나를 돌아보았다. 곧 서로를 알게 될 것이다. 그러기도 부족한 것이 시간이니까. 

“나비를 데려가라, 부족한 네놈의 언변을 대신해 줄 것이다.”

확실히 위기 대처에는 능한 것이 나비였다. 슈레이라고 부족한 것은 아니지만, 협상과 동맹을 하기에는 성질머리가 좋지 않았다. 또한 머리를 굴리는 것도 좋아하지만, 그 만큼 몸을 굴리는 것도 환영하는 놈이라 수가 조금만 틀어지면 검을 들고 무력을 이용하려 할 수도 있다. 

때문에 그에게는 나비가 필요 한 것이다. 무술은 일반 용병 정도지만, 화술이 능한 탓에 유리한 쪽으로 그를 잘 구슬릴 수 있을 것이다.

슈레이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길지 않는 시간이었지만, 나비가 그에게 얼마나 필요한 존재인지 알기까지는 충분한 시간이다. 때문에 나비와 동행하라는 내 제안에도 쉽게 거절을 할 수 없는 것이다.

나비 역시 또 다시 전쟁이 일어날 것을 안다. 트란슈의 희생을 최소화하기엔 제 반쪽이 의심스러우니 홀로 보낼 수 없을 터. 그 역시 동행에 거절을 말하지 않는 이유였다. 

그쪽에도 머리가 잘 돌아가진 않지만, 말이 통할만한 문호가 있으니 두 멍청이가 정도만 지킨다면 손을 잡는 것이 가능하다. 

내 말은 들은 나비가 긴 소매에 손을 감췄다. 

“그 라마라는 자는 대체 누구지?”

“보던의 들개……. 에덴에서 슈레이와 안면이 있고 그와 혁명에 대해 모의한 바 있다. 이정도만 기억해도 된다.”

“그들이 라마라는 자를 믿지 않는다면?”

“그럴 리는 없다.”

“반대로 그들이 일개 사신의 말을 믿지 않겠다며 라마를 데려오라고 한다면?”

“그럴 수도 없다. 라마는 야누스 절벽에서 죽은 걸로 되어 있으니까.”

“가나. 너는…….”

“서둘러라. 벌써 움직이는 놈들도 있어.”

내 말이 떨어지자, 슈레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나를 내려다보는 눈빛이 느껴졌다. 

“나머진 후에 다시 듣지.”

슈레이가 내 옆을 지나쳤고 나비 또한 한숨을 쉬다 내게 시선을 보낸 뒤 슈레이의 뒤를 따라갔다. 

“문.”

“응?”

온전히 나간 둘의 흔적을 무시하고 문을 불렀다. 그는 고개를 숙여 내 앞까지 다가왔고 옆에서 꾸무럭거리는 놈의 멱살을 잡아내려 시선을 맞췄다.

“사흘 안으로 용병을 풀어 국경 너머 정찰을 보내라. 또한 무역 항구에서 무기와 식량이 수입되고 있는지 알아보고 소집할 수 있는 용병 수를 가늠해 보고해.”

습관처럼 문에게 드론이 된 것처럼 명령을 해 버렸다. 

예전과는 달리, 전쟁을 치룬 바 없고, 내사에 대해 전무한 문에겐 지금 말한 것을 해석하는 것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정식 기사의 훈장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제약이 따르지만, 역시 직접 움직이는 수밖에 없다. 

“아니다. 아무 것도 아니…….”

“이년 전부터 무기와 식량은 쿠웨드 쪽으로 쌓이고 있어. 식량은 항구를 통해서만 하지만 무기는 국경 반대편 소국에 들여서 그것을 다시 역수입하고, 또다시 나눠 빼돌리고 있었어.”

눈속임을 하고 있기에 슈레이가 이제야 타국의 움직임을 알아차렸다. 늦은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른 것도 아니다. 로던프의 눈을 피하려면 슈레이쪽 항구와 경로를 통하는 것이 안전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쪽에서도 의심을 사게 되면 로던프와 화합될 수 있으니, 일부로 국경 너머 소국까지 돌아 무기를 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따로 명하지 않는 것에 대답하고 있는 문에게 놀라 바라보았다. 문은 눈앞에서 무릎을 꿇고 내 손을 잡았다. 

“사천 삼백. 세 주를 넘어 각각 왕 구더기 대가리를 따면, 삼천 구백. 왕사 금군 일 만 천 사백. 합이 일 만 구천 육백.”     

잡은 내 손등에 입을 맞추고 눈만을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듣고 있어도 믿을 수 없어 잠시 말문이 막힌 내게 문은 손등에 입술을 붙인 채로 말했다.

"또?"

천진하게 되묻는 얼굴을 바라보다, 손을 뻗어 문의 이마를 짚어 보았다.

“열은 없는데…….”

적어도 열 때문에 헛소리를 하는 건 아니라는 소리다. 되는대로 지껄이는 게 아니라면, 왕사를 배제하고도 남은 전력이 용병 팔천 이백을 손에 쥐었다. 

손을 거두고 문을 바라보았다. 옛날에도 문은 이상하게도 상식적인 선에선 바보가 맞았지만, 지도자로써 갖춰야 할 통찰력이 뛰어났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수많은 전장에서 실전을 경험을 하지 않았다면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떠오르는 의문점을 미루고 다시 물었다.

“라이나프의 움직임은?”

“조만간 교섭이 오갈 것 같아. 로던프에서 내란 기미가 보이니까.”

중립을 유지하고 있던 라이나프까지 로던프 내란을 신경쓰고 있다. 문의 말대로 쿠웨드는 라이나프와 접촉할 것이고 뒤를 이어 트란슈에 사신을 보내올 것이다. 

그리고 에덴을 조건삼아 요구를 해 올 것이다.

1년 후 전쟁은 일어난다. 이것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거슬리는 것은 암부의 움직임이었다. 그들은 지나치게 서두르고 있다. 쿠웨드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있다고 해도 지금 암부가 모습을 드러내는 건 시기상으로 너무도 이르다. 

암부는 백치 왕자였던 란을 살해하지만, 왕족의 치부로 알려진 그를 위해 왕사는 움직이지 않는다. 그것을 알고 있는 암부는 귀족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물갈이를 시작한다.

내적으로 나라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로던프는 선대왕을 잃고 내외 적을 모두 상대하면서 대부분의 전력을 상실해 버렸다.

또한 전쟁 중 차기 왕의 등극이 미뤄지면서 민심 또한 흉흉해져갔다.

1사단부터 17사단까지 팔만이 넘지 않는 기사단과 가디언을 이끌고 십만 명이 넘는 적들을 제압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희생도 만만찮았다. 민간인을 포함해 20만 명을 잃었다. 그것은 물건의 수가 아니다. 모두 살아 있는 자들의 목숨이었다. 

휴전은 두 나라 모두에게 후에 있을 전쟁에 재정비를 해야 하는 시기이지만, 로던프는 트란슈와만 전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로던프의 발톱을 뽑아버린 트란슈는 휴전이 되자마자 쿠웨드와 교섭을 시작한다. 그것에 대해 경고를 미루지 않았지만, 전쟁이 두려웠던 로던프는 필요이상으로 조심스러웠다.  

암부가 그전 까진 물밑에서 활동하던 놈들이 확실하게 목적을 드러내는 건 휴전 중에 있었다. 그들은 보위에 오른 젠에게 접근했다. 그들이 정확히 어떤 목적을 두고 혁명을 일으키려 하는지는 몰랐으나 확실한 건, 내가 그 목적에 방해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죽을 수 없었다. 남겨진 내 사람들을 두고 갈 수 없었다. 때문에 죽으라고 던져놓은 최전방에서도 승리를 표하고 살아 돌아왔다. 몇 번이고 그래왔다. 이 나라가 살아야 내 사람들이 살 것이라 생각했으니까. 

그러나 그들은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지워버리는 것으로 나라는 존재 자체를 역사에서조차 지워 버리고자 했다. 나중엔 그마저 쉽지 않으니, 역적으로 몰아세웠다. 그러나 난 침묵했다. 어리석게도 나를 믿어주길 바랬던 것이다. 끝내 믿지 못해 내가 죽어야만 하더라도 내 사람들만 건들지 않았다면 나 역시 죽음을 의연하게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수차례 전쟁으로 겨우 트란슈와의 휴전협정이 맺어 졌지만, 뒤이어 예상했던 쿠웨드의 침략이 시작되었다. 에덴의 최전방까지 쳐들어온 적을 상대했던 것은 다름 아닌, 백성들이었다. 

에덴을 치고 들어온다면 수도까지 오는 건 시간문제라고 생각했다. 

보다 못한 나는 전방 지휘권을 넘겨 달라 요청했으나 뒤늦게 돌아온 대답은 기다리라는 것이었다. 

보던의 들개들처럼 에덴 역시 지워버릴 땅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두고 볼 수 없어 사병을 이끌고 적장과 맞섰다. 보름 만에 에덴의 백성 5만 명을 잃으면서도 왕사는 들어오지 않았다. 

전장에는 승리했지만, 어느새 나는 에덴에 진주하여 쿠웨드와 역적을 모의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고 에덴을 침입하여 지배권을 확립. 뒤이어 수도 오던에 기습공격을 할 것이라 알려져 있었다. 

휴전 중 잠잠하던 왕사가 움직인 것은 그때부터였다. 내 목을 치러 에덴에 들어온 왕사를 피해 오던으로 돌아와 한스덴 일가의 안위를 살폈지만, 때는 이미 늦어버린 후였다.  

반격하는 과정에서 친우마저 잃고 전의를 잃어버린 나는 결국 무릎을 꿇고 말았다. 갖은 고문을 받고 난 뒤에 올라선 그곳은 광장 한 가운데에 있는 단두대 위. 

그리고 나는 인간으로써의 모든 것을 그곳에 버려두고 나왔다. 

“아무 생각 하지 마.”

문은 일어나 나를 한 손으로 번쩍 안아 들었다. 

발이 닿지 않은 밑을 보았다. 안겨 있는 것이 내키지 않아 문을 바라보았다. 

“그냥 숨만 쉬어.”

“내려 놔.”

내 말을 무시하고 나의 뒤통수를 잡은 문이 힘을 주어 끌어 당겨 목 부근에 이를 박았다. 힘을 주기 전에 귀를 잡아 당겨 떼어내고 주먹으로 턱 부근을 쳐 품에서 빠져나왔다. 너무 강하게 때린 탓인지 얼얼한 손을 털고 문을 바라보았다.

바들바들 떨며 주저앉아 턱을 쥐고 고개를 숙이고 있던 놈이 엉덩이를 걷어차인 강아지마냥 신음소리를 냈다. 

이를 박아버리려고 했던 목 부근에 손을 대 보았다. 침이 조금 묻어나올 뿐 저번처럼 피는 보이지 않았다. 

“한 번만 더 하면 이빨 다 뽑아버릴 줄 알아.”

“나보고 어쩌라고.”

“뭐?”

고개를 숙이고 있던 문이 벌떡 하고 일어나 내 앞으로 다가왔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뒤로 조금 물러나자 냉큼 다가온 문이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사랑스러운 걸 어쩌라고!! 좋은 걸 어쩌라고!! 입안에 넣고 계속 씹어버리고 싶은데!!”

큰 소리를 내던 문이 다시 눈앞에서 주저앉아 머리를 움켜쥐었다. 

“왜 그렇게 예뻐 가지고…….”

본인을 두고 하는 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 헛소리를 해 대는 문을 보고 있으니 보는 사람이 없어도 창피한 기분이 들었다. 

웅크리고 있는 채로 문은 움직이지 않았다. 결국 곁으로 다가가 일어나라고 말하려는 순간 창백한 손이 뻗어 내 손목을 붙잡았다. 눈앞까지 끌어당긴 문은 똑바로 두 눈을 마주쳤다.

약간의 틈만 있어도 들이대는 정도가 심해져 귀찮아질 지경이었다. 내가 가진 모든 걸 준다고 했다. 여기서 더 욕심을 부리는 문에게 나는 무엇을 더 줄 수 있는가. 

안절부절 못하는 문을 바라보다 순수한 탐욕과 욕망에 들끓는 눈을 본 순간 위협을 느끼고 시선을 조금 돌렸다. 

피하려고 한 것은 아니지만, 나 역시 부끄러운 말을 해 버릴지 모른다는 염려 때문이었다.

재촉하려는 듯 자신을 봐 달라 흔드는 문 때문에 결국 잡힌 손을 걷어 떼어내고 가늘게 눈을 떠 말해 주었다. 

“가서 거울이나 보거라.”

“?”

사랑스럽다거나, 혹은 예쁘다는 말은 문에게 더 잘 어울렸다. 조금 어릴 땐 여자아이 같은 생김새였으나 성장함에 따라 여성과 남성을 떠나 아름다웠다. 약간 맛이 간 것을 무시하면 미색만으로 여럿 홀리는 것은 일도 아니다.

그런 녀석이 수시로 주군 앞에서 재주를 부리고 애교를 피우기도 한다. 쉽게 길들일 수 있는 놈이 아니니 알아서 떨어져 나가는 게 대부분이긴 했지만, 곁에 두고 싶어 하는 마음이야 나 뿐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내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문은 고개를 갸웃 거리며 천진한 표정을 지었다. 얼굴에 무엇이라도 묻은 줄 알았는지 자신의 볼을 잡으며 문지르기도 해 보았다. 

턱을 맞은 탓에 그 부근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것이 마음이 쓰여 얼굴을 잡아 바라보았다. 다행이 붉어진 것 외에는 어디 한 곳 눈에 띄는 상처는 없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에는 붉은 혀가 깨끗한 치열 사이에 살짝 드러나 보였다. 상처를 보려던 것이 엉뚱한 곳에서 시선이 빼앗기자 놓으려고 했지만 손이 떨어지질 않았다. 문이 잡고 있어서가 아니다. 그냥 놓을 수 없었다. 

그런 내 손에 온전히 자신의 얼굴을 붙이는 문은 화사하게도 웃고 있었다. 마치 작은 내 손바닥 위가 세상의 전부라는 듯 말이다.

그런 문을 바라보다 결국 나오는 한숨을 막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난 널 원한다. 배우자의 뜻도 모르는 것이냐?”

“그럼 하게 해줘.”

“…….”

지금 문이 말하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것이 맞는다면, 정말로 알고 말하는 것일까? 

자위를 하는 방법도 모르던 아이가 동성애를 떠나 성행위 자체를 알고 있느냐에 대한 것에 의문이 들었다. 

단순히 쥐고 흔들기만 하면 끝나는 것이 아니다. 나 역시, 어디로 무엇을 넣어야 하는 것만 알 뿐 제대로 아는 것이 없다. 그렇다고 누군가에게 물어볼만한 것도 아니다. 

문은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얼굴로 어느새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하게 해준다는 건 뭘 말하는 거지?”

문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물었다. 남성간의 성행위를 보고 배운 적이 있고 그것을 원하고 있다면 나도 어쩔 도리가 없다. 이미 모두 주기로 했으니, 문을 상대로 아낄 필요는 없다. 다만 짐승이 되어버린 놈을 상대로 지금 내 몸이 제대로 견딜 수 있을지 문제다.

“쥐고 흔드는 거. 라마를 기분 좋게 해 주고 싶어.”

한 점 부끄러움 얼굴로 말하고 있었다. 붉은 혀가 피가 돌고 있는 까칠한 주인의 입술을 헤집고 들어갔다.

내가 생각했던 것이 아니라는 것에 조금 맥이 빠졌지만, 지나치게 선정적인 모습에 인상을 쓰며 말했다.

“그런 건 스스로 해결하는 거다.”

“라마도 해 줬잖아.”

“네가 하는 법을 모르니까.”

“라마도 해 본적 없잖아.”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있어?”

육체적 나이가 어린 탓인지 기본적인 성욕도 일어나지 않았고 그쪽으론 예전부터 관심이 없었다. 성욕이 아예 없던 건 아니다. 무뎌진 탓에 웬만한 자극으로는 해소가 되지 않기 때문에 흥미가 가지 않았을 뿐이다. 

“하게 해줘…….”

내 손끝을 혀로 핥고는 문이 애원하듯 말했다. 잠시 넋을 놓고 있던 나는 조금은 놀라 손을 떼고 소매 안쪽으로 감추었다. 

“라마…….”

“…바……밤.”

“응?”

“밤까진 기다려라.”

“왜? 부끄러워?”

결국 머리를 다시 한 번 쥐어박고 밖으로 나갔다. 뒤 따라오는 문의 헤실 거리는 웃음소리가 매우 거슬렸다.

떨어져 걸으라고 말했지만 문은 집요하게도 뒤에서 찰싹 붙어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걸리적거려서 재차 떨어지라고 하려는 데, 집사장이 걸어와 전할 말이 있다는 듯 눈앞에 서 있었다. 

“뭐지.”

“이것을.”

집사장은 내게 봉투를 넘겼다. 밀랍된 봉투를 바라보았다. 검은 봉투 뒷면에는 윈 이반이라는 이름이 작게 그려져 있었다.

“윈 이반?”

“최근 윈 에반의 사망으로 차남인 윈 이반이 그 백작의 작위를 세습 받았습니다.”

트란슈 내에서 왕족이라면 모를까. 귀족은 아는 사람이 없다. 더욱이 이미 몰락해 버린 백작가의 이름을 빌리고 있어 노출을 피하고 있음에도 마치 기다렸다는 듯 편지를 보내온 자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편지를 보낸 당사자의 신분만 말하고 고개를 숙이는 집사장에게 더는 들을 것이 없다고 판단한 나는 편지를 들고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갔다.

책상에 앉아 편지를 바라보았다. 문은 종이에는 별 관심이 없다는 듯 어디에서 가져왔는지 과일을 입에 물곤 침대에서 뒹굴었다. 

펀지의 가장자리부터 나이프로 뜯어 열어보았다. 한 장의 편지지가 들어있었다.

-친애하는 발렌티노 에바 세라이어 백작-

추후 대연회를 앞서 장원과 영지 대소사에 대해 발렌티노 에바 세라이어백작의 조언을 듣고자 청하는 바입니다.

붙임 말없이 짧고 간결한 문장이었다. 발렌티노 에바 세라이어 가문은 그 작위만 유지되고 있는 유령과 같았다. 작위는 남아 있으나 유령 가문에 영지를 내려줄 왕족은 없다. 때문에 백작의 작위로는 정확한 실세를 파악하기 어렵다. 그래서 내겐 기사 작위라도 필요한 것이다.

기사 작위를 승인받기 위해서는 조건이 필요했다. 눈에 보이는 결과를 내 놓으라는 것이다. 범죄자를 잡고 침입자를 토벌하는 하거나 토너먼트 대회에 나가 실력을 증명하는 것도 방법이다. 어느 것 하나 어려울 것 없지만, 지금 나는 이렇다 한 움직임을 보인 적이 없다. 

그럼에도 이 편지가 왔다는 것은 나를 알고 있는 자가 있다는 것이다. 

내 신분을 어디서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인지는 분명히 알 수는 없다. 다만, 거슬렸다.

“루퍼”

이름을 부르자 밖에서 대기를 하고 있던 집사장 루퍼가 들어왔다. 편지를 내려놓고 질 좋은 종이를 꺼내 간략하게 적어 봉투에 넣었다. 밀봉을 하지 않고 루퍼에게 뻗자, 두 손으로 편지를 받은 루퍼는 뒤로 한 발짝 물러나 명을 기다렸다.

“금일 안으로 답신을 받아와라.”

“알겠습니다.”

집사장 루퍼가 밖으로 나갔다. 겁도 없이 건드리는 놈이 어떤 녀석인지 나 역시 궁금했기에 초대에 응해줄 생각이었다. 침대에서 뒹굴고 있던 문이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놀러가?”

“그래.”

“나도 갈래!”

데려가면 쉽게 풀릴 문제도 어렵게 만들어 버리는 문이지만, 혼자 내버려 두는 것도 할 수 없었다. 처음부터 데려갈 생각이었다. 

가까이 오라고 손을 까딱하자, 문이 눈앞까지 다가왔다. 미리 준비해 놓은 천을 들고 문의 눈을 가렸다. 해가 있는 곳에서 움직일 것이니 눈동자를 보호해주기 위해서다.

“놀면 안 돼?”

“안 돼.”

제약이 있을 것이라는 걸 알아채고 묻는 문에게 짧게 답했다. 낯선 곳에서도 시력을 의존하지 않고 자유롭게 움직였던 녀석이다. 이렇게 눈을 가리고도 장애물 하나 부딪히지 않고 걷거나 날뛸 수 있으나 적정선에서 내가 막기가 쉬워진다. 더욱이 시력이 갈수록 떨어질 것이기 때문에 강제로라도 눈에 휴식을 줘야 했다. 

상태가 더 나빠지면 달빛에도 눈부심을 느꼈던 아이다. 나는 문이 적어도 세상을 두 눈으로 오래 바라봐 줬으면 했다.

눈을 가린 문은 불편함을 숨기지 않고 입술을 내밀었다. 무언의 항의처럼 보였지만, 그 모습이 귀여워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그러고 보니 머리카락이 많이 자라 있었다. 어깨 정도로 오던 달빛과 같은 은발이 허리까지 닿아 있었다.

“머리카락을 왜 자르지 않지?”

“왜?”

“내가 물었잖아.”

“라마가 문이라고 했으니까.”

“?”

무슨 뜻인지 알 길이 없었다. 그저 머리카락을 자르는 게 싫은 것이라 생각한 나는 눈을 가리기 위해 가져왔던 남은 천을 잘라 하나로 묶어 주었다. 목이 드러나는 바람에 붉은 자상이 눈에 띄었지만, 문도 시원한 것이 마음에 드는지 드러난 목덜미를 손으로 만져보았다.

윈 이반의 답장은 생각했던 것 보다 빨리 왔다. 오늘 오후라도 괜찮으면 초대에 응해달라는 것이었다. 이렇게까지 당돌하게 나가는 놈의 낯짝이 궁금할 정도다. 루퍼에게 외출을 할 것이니 간단한 채비를 하라 일렀다. 

얼마 지나지않아 몇 명의 시종이 들어와 의복을 걸치는 것을 도우려 했지만, 경계가 심한 문 때문에 물러가라고 하고 루퍼의 시중을 받았다. 

늙은이는 한줌 거리도 되지 않으니, 상관이 없다는 것인지 심한 경계를 하지 않는 문은 자신에게도 다가오는 루퍼를 피해 내 곁으로 왔다. 

문에게 역한 냄새는 나지 않지만, 넝마와 다름없는 옷을 걸치고 있으니 새 옷으로 갈아입는 건 불가피했다.

문이 입어야 하는 건 로던프에서 호쿠에게 배급 되었던 제복과 비슷했다. 백색으로 목 위까지 감싸 살갗을 모두 가려 단정하고 절도 있어 보이게 하는 것으로 루퍼가 신경을 쓰고 가져왔다는 게 느껴졌다. 

“이 녀석은 내가 알아서 하겠다. 나가 있어.”

루퍼가 짧은 대답을 하고 밖으로 나갔다. 눈을 가리고도 잘도 내 옆을 찾아온 문을 바라보았다. 루퍼가 나간 것을 귀신같이 안 녀석이 슬금슬금 빠져나와 기지개를 폈다. 몸이 아직도 정상은 아닌 모양인지 조금은 늘어진 모습이었다. 

“응?”

따로 설명도 없이 문에게 다가가 눈을 가리고 있던 천을 풀어 주었다. 닫혀져 있던 눈꺼풀이  천천히 올라가 붉은 눈동자를 드러냈다. 바로 나를 찾아 바라보는 문은 반사적으로 웃고는 손을 움직이려 했다. 

“가만히.”

허공에서 나를 잡으려던 손이 멈췄다. 

그 사이 나는 문이 걸치고 있던 옷을 모두 벗기 좋게 풀어 주었다. 석상처럼 굳어 움직이지 않는 놈에게 냉큼 벗으라고 엉덩이를 걷어차자, 그제야 느리게 허물을 벗듯 움직였다.

속옷도 입지 않는 모양새로 알몸으로 서 있는 문에게 속옷부터 던져주었다. 주섬주섬 집어 또 입고 멀뚱히 서 있자 바지를 던져 주었다. 

“이거 싫어.”

입지도 않고 바지를 잡고 팔랑거렸다. 편한 옷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는 것인지 불만에 가득한 목소리였다. 

“입어.”

내 말에 오리처럼 입술을 내밀며 꾸역꾸역 바지를 입었다. 몇 번 다리를 움직여 보더니 여전히 싫다는 표정을 감추지 않는 놈에게 웃옷을 던졌다. 

“싫어~!”

이번에도 받고 싫다고 재차 말하던 문은 입으려는 시늉조차 하지 않았다. 생떼를 부리는 놈을 패면서 입히는 것도 좋은 방법이었지만, 괜한 화풀이를 할 수 있으니 어쩔 수 없이 다가가 잡고 있는 웃옷을 잡았다. 

“팔.”

“으~응…….”

직접 입혀 주겠다는 데도 표정을 찌푸리고 마지막 발악을 하자 눈을 들어 노려보았다.

“팔.”

꾸무럭거리며 옷에 팔을 집어넣었다. 나머지 팔도 집어넣고 앞으로 와 단추를 잠갔다. 목 위까지 감쌌다간 숨 막히다 볼멘소리를 할 것이니 두 개정도는 잠그지 않고 여유를 주었다. 그래도 성에 차지 않는지 목 부근에 검지를 넣어 벌렸다. 

옷이 작은 것도 아닌데 답답해하는 문을 바라보았다. 단정함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머리부터 발끝까지 더럽혀지지 않는 하얀색이 마치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이었다.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챈 문은 어느새 눈앞으로 다가와 내게 손을 뻗었다. 

머리끝부터 손가락을 대더니 천천히 내려와 볼 부근을 만졌고 목 부근까지 내려오던 것이 다시 올라와 입술에 닿았다. 

“신기해.”

그런 문의 손을 쳐냈다. 헛소리 하지 말고 따라오라고 문에게 고갯짓을 하고 밖으로 나갔다. 밖에는 루퍼가 준비해 놓은 마차가 놓여 있었다. 

“부디 무탈하시길 바랍니다.”

루퍼는 내게 걸칠 수 있는 흑색의 망토를 걸쳐 주었고 지팡이를 건넸다. 지팡이는 나의 체구에 맞은 것으로 땅을 짚는 것 외에도 쓰임새가 따로 있었다. 

넘겨받았을 때 어렴풋이 들리는 쇳소리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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