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화 (22/35)

뭔가 위에서 압박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강하게 짓누르고 있지는 않지만 몸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 불편한 무게감에 눈을 뜨자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창백한 낯빛으로 웃고 있는 문이었다. 

언제부터 깨서 바라보고 있었었는지 내가 눈을 뜨자 기다렸다는 듯 얼굴을 비벼왔다. 자기가 정말 개라도 된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머리를 밀어내고 품에서 나오려고 했지만, 이제 열이 다 내려 움직일만한 모양인지 내 허리를 잡고 놓아주질 않았다. 

오히려 힘을 주어 끌어 당겨 무릎위에 앉게 만들었다. 

“좀 놔라.”

“왜? 쉬 마려?”

대체 날 뭐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인지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어떻게 열이 내린 것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더는 등 뒤에서 데일 것 같던 열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이것은 다행이지만, 문은 날이 갈수록 어리광이 심해지고 있었다. 교육을 잘못시킨 기억은 없는 것 같은데, 어디서부터 문제였는지 잘 모르겠다. 

계속 무릎위에 앉아 있을 수 없었기 때문에 문의 볼을 잡아당기고 일어나려고 했지만, 아프다며 신음하면서도 손을 놓지 않았다. 

“아프면, 놓으면 될 것 아니냐.”

문을 고개를 저었다. 말이 통하지 않아 이제 막 나은 아이를 두들겨 팰 수도 없어 난감해하고 있는데,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리고 리노가 들어왔다. 

“어?! 깨어났어?!”

자신을 가르쳤다던 사람에게 다녀온다더니, 빈손이었다. 몇 번 리노를 봤음에도 경계를 하던 문은 리노가 가까이 다가오려고 하자 짐승이 손톱을 세우듯 시라소를 집어 들었다. 그만 두라고 얼굴을 바라보자 곧 경계망이 허물어지고 내 머리에 얼굴을 비볐다. 그럼에도 리노가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이를 드러냈다. 

나하고만 있었을 때는 몰랐지만, 지금의 문은 상당히 예민해져 있는 상태였다. 적어도 송사리와 잉어정도는 구분할 줄 알아야 하지만, 지금 문은 나 외에 다가오는 놈들은 모두 적이었다. 

어쩔 수 없이 문을 막는 것 대신 손을 들어 리노의 걸음을 막았다.

“빈손이군.”

“아……. 약은 필요 없어……. 그나저나 정말 열이 내린 거라고?”

“네가 준 약이 효과가 있었다.”

“약 이라고……. 다른 것은?”

“다른 것?”

따로 문에게 준 약은 없다. 내가 했던 것은 약을 먹였던 것과 더러워진 얼굴을 닦아 준 것뿐이기 때문이다. 

빈손으로 들어왔다면 머리에는 무언가를 채우고 왔을 것이다. 그러나 리노는 바로 말하지 않고 계속해서 말꼬리를 흐렸다. 

“다른 것 뭐?”

“아니 그게…….”

“네 스승에게 무슨 이야기를 들었지?”

“…….”

리노는 내 물음에 대답을 미루고 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인상을 쓰더니 나를 바라본다. 그리고 무엇을 생각한 것인지 손을 들어 입을 막고 괴로운 듯 눈을 감고 인상을 썼다. 신음소리까지 들려오자 좋은 소리를 듣고 온 것은 아니라는 건 알았다. 

설마 약이 필요 없다는 것이 다른 뜻인가 싶어 다급해져 문의 얼굴을 밀어내고 리노의 멱살을 잡아끌었다. 

“말해. 뭘 듣고 온 것이냐.”

“…….”

“여기서 혀를 끄집어 내 줄까.”

“꼬맹이.”

“라마다.”

“너……. 몇 살이냐?”

“그걸 왜 묻지?”

“성인식도 안 치렀지?”

“…….”

리노는 더욱 괴로운 듯 머리를 감쌌다. 마치 무언의 시련을 홀로 견뎌야 하는 듯 그대로 벽에 머리를 박기까지 했다. 그런 리노의 잡은 멱살마저 놓치고 그의 정신 나간 행동을 바라보는 데, 문도 좋은 구경이라도 난 듯 내 등 뒤에서 지켜보았다. 

“그런데!!! 왜 저게 열이 내린 거냐고!!!”

“알아듣게 설명해라. 열이 내린 건 네가 준 약 때문이다.”

“그러니까 약은 필요 없다니까!!”

“그럼 뭔데.”

“……. 으아아아악!!”

리노는 있는 머리카락을 다 뽑아버릴 생각인지 머리를 쥐어짜고 괴로움에 몸부림을 쳤다. 곱게 땋여있던 머리카락이 지저분하게 엉켜 버렸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더는 참지 못하고 리노에게 다가가 가볍게 정강이를 차주고 진정시켰다. 벽에 머리를 박는 것 보다 충격이 컸는지 미치고 팔딱 뛰며 고통을 호소했다. 

“내 인내심을 시험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지금은 열이 내렸지만, 곧 언제 속에서 터질지 몰라. 겨우 진정은 시킨 모양이지만, 확실한 치료법은 아니라는 거지.”

“그래서 약을 찾으러 간 것이 아니었나.”

“약을 쓸 수 없어.”

“효과는 보았다.”

“약 때문이 아니라니까! 너희들 정말 아무 짓도 안했다고?”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내가 그렇게 바라보자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 리노는 자신의 입으로는 도저히 말하고 싶지 않는 다는 듯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하지만 설명할 놈이 자신뿐이니, 싫어도 입을 열어야 하는 건 리노였다. 

“백자의 몸은 이미 이질적인 기들에 점령당하고 있어. 두 개의 성질이 다른 기들이 안에서 헤집고 있으니까 그릇이 견디지 못하는 거지. 이 기들이 융합에는 세 가지를 예측할 수 있어. 첫 째, 이질적인 기를 짓누르고 지배한다. 둘 째, 이질적인 기에 지배당하고 삼켜진다. 셋째, 두 가지 기를 최소한만 남겨두고 빼낸다. 지금 백자의 상태는 두 번째에 가까워. 이것은 자신을 삼키고 있는 기가 그만큼 지독하다는 것이지. 이런 기는 함부로 뺄 수도 없어. 그러니까 지배를 하는 것과 당하는 것. 그 둘 중에 하나를 골라야 해.”

“지배를 하면 된다는 거군.”

“그렇게 되면 목숨은 보장할 수 없게 돼. 어쨌든 두 가지 모두 융합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니까.”

이 결론이 났다는 것은 다른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다. 내가 침묵하고 답을 기다리자 잘 말하고 있던 리노가 입을 다시 다물고 문을 바라보았다. 내 등 뒤에 다시 붙어 목덜미에 코를 박고 떨어지지 않는 문은 느껴지는 리노의 시선에 눈을 들어 바라보는 듯 했다. 

그 어떠한 중증 환자를 보더라도 눈을 돌리지 않는 리노이기에 위협하는 듯한 붉은 눈을 마주하고도 시선을 피하진 않았다. 

때문에 짐승은 흥분하지 않고 노려보기만 했다. 

“융합이 되는 방법이 있어, 가장 안전하고도 가장 확실한 방법이지.”

“그게 뭐지.”

“…….”

“리노.”

“그 이름 부르지 마라니까.”

“빨리 말해라.”

“백자를 숙주로 삼고 있는 기들이 모두 꼬맹이 네 것이렷다?”

“라마다. 그리고 난 네놈보다 나이가 많다. 어린것아.”

“그래…….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네.”

사실을 말하고 있는데도 믿지 않았다. 

“백자의 기들은 서로 섞이지 못하고 있는 상태지. 성질이 다른 두 기들이 융합이 되기에는 한 그릇 만으론 부족하니까.”

“…….”

“너 역시, 백자의 기를 받아야 한다는 뜻이다.”

“시도는 해 봤지만, 불가능 했다.”

“다른 방법이 있어.”

“말해.”

“…….”

리노가 입을 뻐끔 거리다 말았다. 인상을 쓰자 더는 숨기지 않겠다는 듯 한숨을 쉬더니 체념하는 듯 다시 목에 힘을 주었다. 

“둘이……. 합방을 하는 것이다.”

잠시 말을 하지 않고 빤히 리노를 쳐다보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던 리노는 고개를 끄덕였다. 

“별 것 아니군.”

“그래, 다른 방법을…… 뭐?”

난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의 팔을 잡아끌어 당장 저택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겨우 합방만으로도 해결이 되는 것이었다는 걸 알았다면 어제 끝내버렸을 것이다. 내 이끌림대로 문이 엉거주춤 끌려오자 놀란 리노가 다가와 앞을 가로 막았다. 

“자, 잠깐!!! 뭔가 너 오해하고 있는 거 같은데! 합방이라는 건 손잡고 그냥 자는 게 아니라고?!”

“알아.”

“아니, 내 생각엔 넌 아무것도 몰라.네 몸으론 무리야! 그러다 네가 크게 상처 입을 수도 있다고! 저 짐승이 자제라는 게 가능 할 것 같아?!”

물론 한 번 고삐가 풀려지면 막기는 힘들 것이다. 내 몸이 얼마나 견뎌 줄 수 있는지도 문제다. 그러나 쉬운 해결 방안을 알았고 견딜 수 없다곤 해도 나는 죽는 게 아니다. 며칠 동안 활동하는 것이 조금 불편해 질뿐이겠지. 무엇하나 문제가 없었다. 

“그렇군. 너도 따라와라.”

“뭐라고?”

“합방이 끝나면 내 몸을 봐주란 소리다.”

“농담이지? 그런 농담 난 진짜 싫어해!”

“그러면 발렌티노 세라이어 저택으로 와라. 말은 해 두지.”

밖으로 나가 말을 가지고 왔다. 그 위에 올라타 문에게 손을 뻗었다. 날 빤히 바라보던 문은 내 손을 잡고 뒤에 올라탔다. 리노가 머리를 붙잡고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쪽으론 눈길도 주지 않고 저택으로 향했다. 

가장 빨리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았으니 지체할 이유는 없었다. 빠른 속도로 달려 저택까지 닿은 나는 말에서 내려와 문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마중을 나온 집사에게 겉옷과 검을 던지고 말했다.

“리노가 찾아오면 내가 나올 때까지 다른 곳에 대기 시켜라. 나를 찾는 놈이 있다면 부재상태라고 전하고 위층에는 아무도 올려 보내지 마라.”

“예.”

짧은 대답으로 고개를 숙인 집사를 뒤로하고 문을 잡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뭣 모르는 얼굴로 따라오던 문을 데리고 방안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라마?”

열이 내린 것도 그 때문이었을까. 가장 먼저 리노를 찾은 판단이 잘한 것이었다. 그러나 좀 더 빨리 알았더라면 이렇게 서로 고생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문을 데리고 와 침대에 앉게 만들었다. 내 목을 조이고 있는 끈을 풀어 단추를 하나하나 열며 문 위에 올라탔다. 

“라마???”

“하자.”

문의 얼굴을 잡고 그 위에 입을 맞췄다. 그 와중에도 나는 단추를 모두 풀어 옷을 벗어 던졌다. 문은 잠시 얼어붙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아랑곳하지 않고 문의 바지 쪽으로 손을 보냈고 그 위를 덮어 보았다. 

문의 몸이 잠시 움찔,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손에 모두 잡히지 않을 정도로 묵직했다. 이것을 받아낸다면 상당히 고달플 것이란 걸 알고 있었지만, 손을 옮겨 바지를 내릴 생각으로 춤을 잡는 순간이었다. 

문은 벌떡 일어나 내 어깨를 잡아 밀고 나를 떨어지게 만들었다. 

“왜 그러지?”

문은 고개를 좌우로 휘저었다. 뭐라 말은 안하면서 인상을 쓰고 있었다. 부푼 것을 보아하니, 풀어주면 될 것 같아 그곳에 입을 대려고 고개를 움직이니 어깨를 잡고 있던 손이 이번엔 얼굴을 잡아 밀어냈다. 

“뭐야.”

그 행동이 짜증이 나서 문의 손을 치우고 바라보았다. 

“하지 마.”

“어?”

문은 벌떡 일어나 내 옆을 지나 도망을 쳤다. 문을 열고 나가버리는 뒷모습을 보자 어이가 없어 말이 안 나온다. 도로 잡아와야 할 것 같아 벗은 옷을 다시 걸치고 밖으로 나갔다. 

“문.”

이름을 부르자 계단을 서둘러 내려가고 있던 문이 화들짝 놀라 천천히 나를 돌아보았다. 감히 도망가려는 놈을 바라보다 정색하고 손가락을 까딱였다. 당장 오라는 소리였지만 두 손을 들고 꼼지락 거리고 있던 문은 겁에 질린 듯 하면서도 고개를 저었다. 

나를 거부하는 것 같아서 열 받아 입을 열었다. 

“이리 안와?”

놀란 문이 재빨리 도망가 버렸다. 

설마 저 녀석이 거부하고 도망을 갈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해서 당황했다. 잡으려고 쫓아가자 더 멀리 달아나버리는 놈을 잡기 위해 쫓았더니, 정원으로 나가버렸다. 그리고 곧바로 나무위에 올라가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따라 올라가 끄집어 내릴 수도 있었지만, 강압적으로 몰아붙였기 때문에 놀란 것이라 생각하고 화를 일단 가라 앉혔다.

심호흡을 하고 가지 사이로 숨어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는 곳을 바라보았다. 

“문.”

잎사귀가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안에 있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숨어있는 것이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일단 놀란 문을 달래주기 위해 말을 걸었다. 

“내려와야지”

“…….”

잎사귀 사이로 얼굴이 삐져나왔다.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우물쭈물 못하는 것이 단단히 놀란 모양이다. 대체 왜 놀란 것인지 말이라도 해 줬으면 하지만, 저 상태로는 짖는 것도 고작일 것 같았다. 

“어서.”

손을 뻗었다. 문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고 나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그러나 곧 얼굴만 빠져 나왔던 것이 몸까지 나왔고 두툼한 가지 위에서 안절부절 못하다 천천히 내려왔다. 쭈굴쭈꿀한 얼굴로 엉거주춤 내 앞까지 다가오는 녀석을 보자 속이 터져 머리를 쥐어박으려다 멈췄다.

내가 뻗은 손을 문은 잡았기 때문이다.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있는 문은 긴장이라도 하고 있는 것인지 땀까지 흘리고 있었다. 밖에 있는 것은 좋지 않을 것 같아 일단 끌어 당겨 다시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방까지 가기 싫어하는 녀석을 억지로 끌어 데리고 가 이번엔 입구를 등지고 의자를 끌어 앉아 앞에 문을 세워 놓았다. 

“금방 잡힐 거면서 도망은 왜가.”

“…….”

시선을 피하고 답을 하지 않았다. 

인상을 쓰고 답을 재촉하다 한숨을 내쉬고 오늘은 물러나기로 했다. 대신, 들어야 할 답은 제대로 듣고 싶었다.

“나랑 그렇게도 합방이 싫은 것이냐?”

“아니!”

대답은 곧잘 해서 화가 치밀진 않았지만, 사라진 건 아니다.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고 서 있음에도 앉아 있는 나보다 작아 보이는 문에게 다그쳤다.

“그럼 도망을 왜 가.”

“...니까.”

“뭐?”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작으니까…….”

“…….”

화나가서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내 몸이 작아서 놀라 도망을 갔다는 것이다. 설마 그런 이유로 거부당했다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차라리 처음이라 당황했다고 말했다면 시간을 두고 가르쳐가며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문의 말은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고깃덩어리는 조금만 아파도 죽는 댔어. 그러니까 싫어.”

“지금 안하면 네가 죽어.”

“라마가 아파하며 죽는 게 더 싫어.”

“겨우 그런 걸로 아프지도 죽지도 않아. 조금 불편할 뿐이지.”

“쥐고 흔드는 것만 해줄게……. 아프지 않게……. 응?”

허락이 떨어지길 바라고 있는 눈이었다. 결국 이 방법까진 쓰지 않으려고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의자를 끌고 그 위로 올라와 문의 눈높이에 맞췄다. 두 눈을 마주볼 수 있게 되자 문의 멱살을 끌어 귓불을 깨물었다. 

“내가 널 원한다고는 생각 안 해 본 것이냐?”

작게 속삭이곤 깨물었던 귓불을 핥았다. 몸을 부르르 떨어도 손이 움직이지 않자, 귓불을 핥던 것을 멈추고 두 눈을 마주치고 붉게 달아오른 입술을 핥아 보았다. 

“넌 가만히 누워 있기만 해도 된다.”

그 말을 하자 천천히 문의 손이 올라왔다. 나를 안고 뒤에 있는 침대로 간다면 모든 게 완벽하게 될 일이었지만, 문은 이번에도 내 어깨를 붙잡고 조금 밀어냈다. 

이렇게까지 유혹을 하는데도 넘어오지 않아 오랜만에 제대로 화가 올라오자 얼굴이 썩어버릴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고개를 숙인 문은 나를 붙잡은 채로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작으면 안 돼!! 더 커져야 해! 참는 건 힘들지만, 힘들어 미쳐버릴 것 같지만!!”

숙였던 고개를 들어 올리고 당황스러울 만큼 단호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안 돼. 그러니까 나의 작은 왕. 당신도 참아.”

"……."

어이가 없어서 잠시 할 말을 잃어 버렸다. 정말 여러모로 대단한 놈이다. 살면서 단 한 번도 느낀 적 없는 굴욕감을 간헐적으로 주고 있다. 

눈을 가늘게 뜨고 문을 바라보았다. 손을 올려 놈의 머리카락을 강하게 움켜 쥐고 입술이 맞닿기 직전까지 다가갔다.

"참겠다?"

문은 삐질삐질 땀까지 흘려가며 두 개의 눈동자에 지진이 일어나는 것처럼 떨고 있었다. 강하게 움켜쥔 머리카락을 놓아주지 않자, 문은 손을 들어 내 팔을 붙잡았다. 

"라마……."

"호칭을 통일 시켜. 너한테 난 뭐지?"

"라마……. 작은 왕……."

"틀렸잖아. 멍청아."

머리카락을 잡은 손에 힘을 주어 잡아 당기자 아슬아슬하게 거리를 유지하고 있던 입술이 기어이 닿아 버렸다. 붉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반쪽이잖아."

"……."

입술을 깨물다 귓가로 옮겨 귓볼도 깨물어 보았다. 화들짝 놀라는 문은 내 팔은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더 깨물지 못하고 물러났지만, 멈추지 않고 나를 잡고 있는 문의 손을 핥아 보았다. 

"여보, 당신. 골라라."

"!"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문은 상체를 숙였다. 

그런 문을 바라보다 손을 뻗어 두 뺨을 잡아 올렸다. 적나라하게 붉어진 얼굴이 가슴속 어딘가를 간지럼피우는 것 같았다. 

빨리 낫는 길을 알았는데, 돌아갈 이유는 없다. 나 역시 원하는 것이고 문이 원하지 않더라도 강제라도 할 생각이지만 이왕이면 싫어하는 것 보단 좋아하는 쪽이 낫다. 

빨갛게 물이 든 얼굴을 뒤로하고 가까이 다가가 귓불을 깨무는 것 대신 속삭였다. 

“당신, 날 이대로 둘거야?”

문이 내 허릴 꽉 붙잡았다. 그리고 그대로 들어 올려 성큼성큼 침대가 있는 쪽으로 달려갔다. 내 뒷머리를 감싸 침대위에 놓더니 위로 올라탄 문은 그대로 입을 맞추고 겉옷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물러서지않고 그런 문을 다독이면서 천천히 의도하는 방향으로 향하게 만들었다. 가쁜 숨을 토해내며 떨어진 문은 잠시 나를 바라보았다. 

붉은 눈동자가 눈물이라도 맺힌 듯 젖어 있었다. 그 눈이 보석처럼 어여뻐 나도 모르게 넋을 잃고 말았다. 갑자기 표정을 일그러트린 문은 괴로운 듯 나를 끌어안았다.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울먹이는 목소리였다. 마지막까지 억누르려는 최후의 몸부림과 같았다. 어지간히도 나도 사랑을 받고 있는가 싶어 얼굴이 달아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아프지 않을 거다.”

그렇게 귓가에 속삭이자 나의 다리 사이로 문의 무릎이 들어왔다. 아프게 하고 싶지 않다는 말이 무색할 만큼 다리 사이로 손가락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내 머릴 붙잡고 놓지 않는 문은 질척거리는 소리가 날 만큼 진하게 입을 맞췄다. 이윽고 입 안으로 말캉한 혀가 비집고 들어왔다. 입안을 헤집고 있는 따뜻한 혀에선 꿀이라도 떨어지는 듯 달콤했다. 

허나, 모두 목구멍으로 넘길 수 없어 목 부근까지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입술이 떼어졌다. 다리 사이를 들어오던 것이 지그시 허벅지를 짓눌러 벌리기 시작한다. 

떼어진 입술이 턱을 순서로 목으로 내려가 쇄골을 훑어 가슴에 닿았다. 

“!”

가슴 부근에 닿은 혀끝이 농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극에 놀라 문의 머릴 붙잡자 붉은 눈이 나를 쳐다보았다. 

“소리……. 참지 마.”

그 말을 끝으로 통증에 놀란 나는 반사적으로 경련하고 말았다.

“읏!”

가슴을 이로 깨문 것이다. 유혹한 것은 나지만, 아무래도 민망해서 얼굴을 손으로 가렸다. 어쩐지 달아올라 있을 것 같아 당장 앞을 보는 것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내 손등위로 문의 손이 올라왔다. 

그리곤 잡아 얼굴에서 떼어 내고는 가슴을 핥고 있던 입이 목 부근으로 다시 와 그곳 또한 깨물었다. 허벅지를 짓누르던 손은 중심부 까지 닿아 쓸어 올리기 시작한다. 

“!”

“부끄럼쟁이네……. 뭐, 상관없나…….”

어떻게 하는 것인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문은 어디를 어떻게 자극해야 되는 것인지 잘 아는 것처럼 움직였다. 

자위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녀석이 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어 슬슬 불안해 졌다.

자제 못하는 짐승 밑에서 추하게 헐떡이는 것 보다, 문을 눕히고 가르치는 게 나을 것 같아 손을 뻗으려는 순간이었다. 

“읏!”

“힘 빼. 이렇게 안하면 나중에 더 아파.”

방심하던 사이 엉덩이 사이로 뭔가가 들어왔다. 큰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뭔가가 들어가고 있다는 것은 확실하게 느껴졌다. 

“아직 하나 밖에 안 들어갔어.”

뭐가 들어가고 있다는 것인지는 대충 알 것 같았다. 눕히고 나서 스스로 입구를 벌려 놔야 생각했던 나를 비웃듯 좁은 곳을 향해 비집고 손가락 하나가 더 들어오려고 하고 있었다. 

“읏……!”

“좁아…….”

문이 인상을 썼다. 

재차 들어오려던 손가락이 멈추고 들어가 있던 손가락이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 나오는 것만으로도 그 부분이 뜨거운 통증에 시달리자 문의 어깨를 붙잡았다. 설마 그만 두는 것 아닌가 싶어 바라보자 방금 빠져나온 손가락을 혀로 핥더니 시선이 나에게 향했다. 

침을 묻힌 손가락이 다시 한 번 좁은 입구로 향했다. 침이 묻은 손가락은 처음보다 어렵지 않게 들어갔다. 이번엔 두 번째 손가락도 들어갈 준비를 하며 천천히 사이를 파고들었다. 

“대……! 대체 너 이걸 어찌!”

참다못해 문의 어깨를 붙잡고 물었다. 안 그러면 이대로 주는 대로 받고 신음만 흘릴 것 같아서였다. 

남색은커녕 여색에 대한 흥미도 없을 것 같은 녀석이 어찌 이렇게 능숙하게 풀어줄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아름다운 아이이니, 과거에도 비슷한 경험을 당한 적이 있단 말인가?

“걱정 마. 내겐 당신이 처음이야.”

살 속을 파고 든 손가락을 움직이면서 잘도 말하고 있었다. 이대로는 너무 빠져들어 위험할 것 같아 문의 머리카락을 붙잡았다.

“그건 돼…… 됐으니까 빨리…….”

“…….”

나를 바라보던 문의 손가락이 빠져나가고 자신의 바지춤을 내렸다. 길게 솟아 있는 그것을 확인하기도 전에 입구에 닿자 몸이 경련을 하듯 떨려왔다. 

나를 안은 문이 준비가 덜 된 그곳을 향해 들어오려는 순간이었다. 

“!”

들어오기 진적에 문이 눈앞에서 쓰러졌다. 힘없이 내 몸 위로 쓰러진 문의 목덜미에는 침이 박아져 있었고 근처에는 땀에 절여 씩씩거리는 리노가 서 있었다.

“죽으려고 환장을 했어?!”

몸을 일으키자, 힘없이 늘어진 문이 보였다. 하지 않겠다는 놈을 겨우 달래서 여기까지 왔는데 고지를 눈앞에 두고 물거품이 되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두통이 올라오려고 하자 머리를 감쌌다. 또 일어나길 기다려야 한다는 생각에 짜증까지 치솟는 기분이었다. 

자고 있는 중이라도 시도를 해 볼까 했지만, 그런 내 골을 울리게 만드는 건 상황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버린 방해꾼 리노였다.

“사람 말은 끝까지 듣고 가라고! 지금 네가 어떤 상태인지 알고나 그래?!”

뒤늦게야 집사장과 시종들이 들어와 리노를 데려가려 했지만 상체를 일으킨 난 손을 저어 모두 나가라고 신호했다. 맥이 빠져버려서 화낼 힘도 나지 않았다. 나를 끌어안고 잘 자고 있는 문을 바라보다 생각보다 옷이 얇은 것 같아 이불을 끌어다 덮어 주었다. 

“내말 듣고 있어?!”

리노가 시끄럽게 짖어대자 문의 목덜미를 찔렀던 침을 뽑아 그대로 놈에게 던졌다. 마음만 먹었다면 눈동자 위에 꽂을 수 있었지만, 창처럼 날아간 침은 리노의 뺨에 작은 생체기만 남기고 벽에 박혔다. 

“…….”

이제야 입을 닫아 조용해 졌다. 

죽고 싶어 환장했냐는 말을 그대로 돌려줘 볼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방해를 받아야 하는 이유가 먼저였다. 

리노를 바라보았다. 내 시선을 받은 리노는 자신의 뺨에서 흐르는 피를 의식하고 있으면서도 나를 피하지 않았다. 일찍이 배짱이 좋은 놈이라는 건 알았지만, 생각보다 훨씬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온 놈이다. 

“네놈은 지금 필요 없다.

“너 정말로 할 생각이었어?”

“그걸 방해한 게 너다.”

리노는 심호흡을 하며 땀을 훔쳤다. 여기까지 숨도 쉬지 않고 달려온 탓에 긴 대화를 앞서 준비가 필요한 모양이었다. 

“조금만 늦었어도…….”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는 듯 리노는 몸서리쳤다. 

“잘 들어. 두 성질의 기가 혼합이 되면 전혀 다른 성질의 기가 형성돼. 백자라면 자연스럽게 삽입과 동시에 받아들일 수 있겠지만, 넌 아니야. 네가 받아들일 기는 기존의 백자의 것과 네 것이 혼합된 전혀 다른 기라고! 넌 그 작은 몸에 이질적인 불한당 같은 놈들을 세 개나 담아내야 하는데, 이걸 억지로 집어넣게 된다면 대체 어떻게 될 거라고 생각해?!”

“감안했던 부분이다.”

“난 누구하나 희생을 하라고 합방을 말한 게 아니야. 백자도 지금 당장 어떻게 될 정도로 심각한 건 아니기 때문에 당장 하라는 소리도 아니었다고.”

설득하려는 듯 말하는 리노의 말도 이해가 갔지만, 뻔히 아는 해결방법을 두고도 마냥 내 몸이 자랄 때까지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들어오는 기들은 충분히 다스릴 자신이 있었기에 문은 유혹한 것이었다. 

“질질 끌 필요는 없지.”

“있어. 백자를 숙주로 삼고 있는 기들을 담으려면, 그만큼 완전한 그릇이 필요해.”

“난 불완전하지 않다.”

“최소한 성인식까진 치러. 지금 그 작은 몸으론 받기도 전에 망가져버린다고. 애초부터 그만한걸 달고 있는 놈을 대체 뭘 믿고 받을 생각인거야?! 보는 것만으로도 흉기 더만.”

문을 바라보았다. 

잠들어 있는 녀석은 조금의 미동도 없이 고요하게 숨만 내 쉬고 있었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인가. 내 몸의 성인식까진 앞으로 3년이나 남았다. 그러나 앞으로 터질 전쟁까지는 1년 정도의 시간밖에 없다,

“시간을 두고 천천히 길들여. 지금 네가 백자랑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그럴 수가 없다.”

이런 몸을 가지고 그 전쟁을 문이 견딜 수 있을까. 

나 때문에 모든 게 뒤틀려 버린 아이가 죽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을까. 

나에겐 문에 대한 모든 것이 불확실한 미래가 되어 버렸다. 

중얼거리듯 말하자, 리노는 잠시 입을 다물고 나를 바라보았다. 곧 그는 생각을 마친 것인지 소매 속으로 손을 감추고 물었다. 

“대체 뭘 그렇게 초조해 하는 거야?”

나는 문에게 무엇도 대신 해 줄 수 없다. 그런 내가 고통을 덜어줄 수 있는 방법을 알았다면 망설일 이유가 없는 것이다. 

나는 이미 한 번 죽었다. 다시 눈을 뜨지 않았다면 좋았을 것이라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이제는 그럴 수조차 없다. 

“폭주만 하지 않는다면 견딜 수 있을 거야. 그렇게 조급할 필요가 없다고.”

“시간이 없다…….”

“살면 얼마나 살았다고 벌써 시간 타령이야?”

“…….”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 손을 들어 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새털처럼 보드라운 머릿결이 손가락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달빛을 갈아 놓은 것 같은 은발을 검게 물들어 버린 것은 나였다. 침식과도 같은 그것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이 나를 괴롭게 만들고 있었다. 

“하아…….”

깊은 한숨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지 않고 확인하지 않아도 리노가 뱉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놓아둔 침은 육체적 뿐만 아니라, 기까지 강제로 잠재워 놓은 거야. 폭주로 깨어나게 하지 않는 이상, 헤집고 다니진 않을 거다. 당장 기를 사용하지 못하더라도 뭐, 야수니까 상관없겠지.”

“…….”

대답이 없자, 리노는 내게 다가와 갑자기 손목을 잡았다. 그러나 힘을 주어 끌어당기는 것이 아니라, 맥을 짚어 보는 듯 했다. 

“너도 많이 좋아지고 있네. 그러니까 전혀 급할 건 없어.”

“예전엔…….”

문을 바라보았다. 창백한 낯과 예전보다 마른 얼굴이 눈에 밟혔다. 

“살아 있었다는 게 그저 운이 좋다고만 생각했다.”

한스덴 일가를 눈앞에서 잃고 국가를 상대로 전쟁을 하게 되었지만 패배할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이정도 불리한 전쟁은 지난 몇 년간 수백 번을 해 왔기 때문이다. 나를 따르는 자들 역시, 왕사에 쉽게 무릎을 꿇을 만한 전력은 아니었다. 승리를 예감할 수는 없었지만, 패배 또한 단정 지을 수 없었다. 

하지만, 길어질 수 있는 전쟁에 앞서 정비가 필요했던 나는 에덴으로 향했다. 이미 잦은 전쟁으로 쑥대밭이 된 에덴은 거리 곳곳마다 시체들로 즐비해 있었다. 에덴은 땅을 밟는 것 보다 구더기가 밟히는 게 더 많을 지경이었다. 

생생하게 기억나는 것은 가나의 얼굴이었다. 그곳에 진주해 있던 로던프 왕사와 정비할 시간도 없이 주어진 전쟁은 수적으로 열세인 나를 몰아세웠다. 어째서 이 지경까지 와야 했는지도 이해하지 못하면서 한스덴 일가 몰살의 증오로 악귀처럼 날뛰었다. 

아군에서 적장이 되어버린 드론의 머리를 쳐내기 직전, 눈앞에서 가나의 목이 뒹굴었다. 수적인 열세임에도 대등하게 견주고 있던 내 쪽이 무너진 건 패배를 확정짓는 것이었다. 

순식간에 기사들은 드론을 에워싸고 가나에게 눈을 떼지 못하는 나의 머리를 땅바닥에 내리 꽂아 짓눌러 결박시켰다. 지속적인 고통이 느껴질 만큼 짓밟거나 침을 뱉고 모욕적인 말을 해댔지만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도 귀에 들리지도 않았다. 

그저 나는 몸통 없이 굴러가는 가나의 머리가 멀어지는 것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눈물을 흐르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모진 고문을 받고 두 눈을 잃고 더 이상 제대로 걸을 수 없을 만큼 다리가 망가져 버렸지만, 나는 가나의 굴러가는 머리를 본 그 때만큼의 강한 고통은 어떠한 고문에서도 느껴본 적이 없었다. 

단두대 위에 섰던 나는 목줄을 끊고 들개가 되었다. 스스로에게 죽음을 허락하는 순간까지도 나는 깨닫지 못했었다. 

그곳에는 문이 없었다. 

언제부터 문이 없었는지 기억을 되살려 보았다.

첫 전쟁에서 승리해 정식으로 1기사단 드론이 된 나는 앞으로 전쟁에 있어 용병왕의 협조가 필요 했을 때, 문을 만나게 되었다. 그때 나의 나이 15살. 문을 만난 기점부터 옅어진 병은 어느 순간에는 돌림병에도 지나칠 정도까지 호전되었다. 

돌이켜보면 이상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음에도 무던하게도 우연이라고만 생각했었다. 폭주를 일삼고 두 시력을 잃고 자제력까지 약해진 문이 아픈 상처를 숨기는 것이 능한 짐승임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저 힘으로 제압하려고만 했었다. 

“단순히 운이 좋은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닫지 못했다. 그래서 기억이 나질 않아. 언제부터, 어느 순간에 숨어버렸는지…….”

내게 죽지 말라며 애원하듯 문은 자신을 죽여 달라했다. 그런 아이가 안쓰러워 죽여 달라는 모진 말을 할 때면 달래듯 머리를 쓰다듬어 재우는 것이 전부였다. 

나는 단두대 위에 오르는 순간까지 문의 모습이 그려지지 않았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 이제는 알 것 같기에 문의 머릴 끌어안았다. 

**

하얀 꽃밭이었다. 

누군가의 발길이 닿지 않는 그곳에서 문은 서 있었다. 그저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었다. 어째서 이런 곳에 서 있는 것인지는 의문조차 들지 않았다. 

뚝뚝- 무언가 떨어지기 시작한다. 하얀 꽃밭 너머를 바라보고 있던 문은 천천히 고개를 숙여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떨어지고 있는 것은 자신의 붉은 색 눈물이었다. 멈추지 못하는 붉은 눈물이 바닥까지 떨어지기 시작했고 하얀 꽃밭을 강렬한 붉은 빛으로 물들였다. 

하얀 꽃밭은 천천히 붉은 색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더 많은 피를 원한다는 듯 문의 주위를 에워쌌다. 하염없이 흐르던 붉은 눈물을 멎지 못하고 있는데, 무언가가 눈을 가렸다. 

눈이 가려진 채 등 뒤로 무언가가 닿았다. 그 익숙한 감촉과 체향에 붉은 눈물이 멎기 전에 미소 지었다. 

끌어안고 있는 이를 붙잡았다. 더는 놓치는 일 없도록 돌아서 품안에 가둬버렸다. 예상대로 문의 손안에는 작은 왕이 안겨 있었다. 물끄러미 자신을 올려다보는 얼굴이 사랑스럽기 그지없다.  

붉은 빛으로 물들던 하얀 꽃밭이 잿빛으로 물들기 시작하더니, 이내 짙은 검은 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세상은 눈부신 검은 색으로 뒤덮였다. 좀 더 얼굴을 보고 싶었다.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문은 작은 왕의 얼굴을 보기 위해 어깨를 붙잡고 조금 밀어 냈다. 눈이 마주친 왕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어째서 저런 표정을 짓는 것인지 궁금해 손을 뻗어 보았다. 뺨에 닿기 위해 가져간 손끝이 검게 그을린 듯 색이 바라면서 천천히 부서지기 시작한다. 

작은 왕이 고개를 저으며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마치 어둠에 먹혀들어가는 것처럼 몸이 사라지고 있었지만, 그런 자신을 바라보며 일그러트리는 왕이 걱정되었다. 

‘아, 왕이 아니었지…….’

보다 듣기 좋아하는 말이 있었다. 

손을 뻗어 보았다. 손목 정도밖에 남지 않아 라마에게 닿을 수는 없었지만, 이런 것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역시 울보잖아. 당신.”

그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라마는 서럽게도 울고 있었다. 하늘에서 꽃잎이 안기듯 품으로 뛰어든 것은 라마였다. 그런 라마를 껴안은 문은 더 없이 행복했다. 

이대로 시간이 멈춰 버렸으면 좋겠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좀 더 이곳에 있고 싶지만, 눈을 뜨지 않으면 저쪽에 있을 그가 외로워 할 것이다. 

그러니, 이제는 깰 시간이다. 

“…….”

귓가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얼굴이 끌어 안겨져 있어 설마 아직도 꿈속에 있을까 생각해 보았지만, 좋은 향과 따뜻한 체온이 말해주고 있었다. 

현실은 꿈보다 달콤한 것이라고-

허벅지 부근에서 비비적거리며 허리를 껴안았다. 어쩐지 나른한 기분이 들어 다시 잠들고 싶었지만, 꿈속에서 울고 있던 얼굴이 떠올라 감았던 눈을 번쩍 뜨고 일어났다. 

갑자기 일어나는 문 때문에, 라마는 조금 놀란 것인지 머리를 감싸고 있던 손이 떨어졌고 갈 곳 잃은 손목을 붙잡은 건 문이었다. 

어깨까지 걸쳐져 있던 이불이 천천히 내려가 한기가 올라왔지만, 아랑곳 하지 않고 라마를 바라보았다. 

눈이 붉어져 있었다. 

우는 것도 사랑스럽지만, 지켜보고 있으면 가슴 한 구석에서 저릿한 통증이 느껴진다. 우는 것 보단 화내는 게 좋고 화내는 것 보단 부끄러워하는 게 좋다. 하지만 문이 가장 좋아하는 건 라마의 웃는 모습이다. 

눈가가 부어 있는 것 같아 손을 뻗어 보았다. 순간, 문은 팔목까지 떨어져 나갔던 꿈이 떠올랐지만, 라마의 뺨 부근까지 간 자신의 손을 창백하지만 제대로 다섯 손가락 모두 붙어 있었다. 조심스럽게 뺨에 손바닥을 가져가 엄지로 붉게 달아오른 눈가를 문질러 주었다. 

물끄러미 자신을 보는 라마의 얼굴을 확인 한 문은 환하게 웃음지어 보았다. 

뺨에 닿은 손을 바로 쳐낼 줄 알았던 라마는 그런 문의 웃는 모습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틀어 오히려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순간,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은 충격이 느껴졌다. 

동시에 아랫도리의 통증과 본능을 못 이기고 나머지 손도 슬그머니 일어나 다가가려고 하자, 갑자기 등 뒤로 귀를 따갑게 하는 고함소리가 들렸다.

“야, 이 짐승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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