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노는 문의 중심부를 가리키며 머리 위에서 시끄럽게 짖어댔다. 어찌나 목청이 크던지, 발자국 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고요했던 리노가 맞는지 의심스럽다.
이상하게도 말이 없었다고 생각한 놈들이 주절주절 수다쟁이가 되어 귀를 괴롭게 만드는 데, 리노도 그중 한 사람 몫을 차지했다.
일어난 중심부가 흉물스럽지만, 자고 있어나면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생리적 본능에 가까운 것이니 하지 않겠다고 생각해도 막아지는 것이 아니다. 저도 달린 놈이라면 그것을 알 텐데도 길길이 날뛰는 것을 보니, 떨어진 게 아닌지 의심이 갔다.
“당장 떨어지고 옷이나 입어!”
손가락질 하며 문에게 옷을 집어 던졌지만, 문은 눈앞까지 날아온 옷을 무시하고 오히려 약을 올리려는 듯 내게 달라붙었다.
“저건 너무 시끄러워.”
문의 말에 동감한다.
내 목둘레를 감싸더니 늘러 붙은 문은 흐느적거리며 품에 파고들었다. 곱절은 큰 몸이 안으로 구겨 들어오려고 시도를 하니, 조금 밀려났지만 기어이 배꼽 주위까지 얼굴을 묻고 있었다.
“아직도 졸린 것이야?”
“응…… 졸려……. 몸이 이상해…….”
잠이 유독 많은 아이가 칭얼거리며 품에 파고들었다. 리노를 크게 경계하지 않는 것을 보아하니, 그가 침을 놓았다는 사실 조차 모르는 듯 했다. 강제로 기를 잠재운 탓에 몸에 영향이 간 것인지 깨어났음에도 쉬이 정신을 차리진 못했다.
속에 가둬둔 것이 언제 터져버릴 진 모르겠지만, 그전에 합방을 해야 한다. 그러나 당장은 잠을 고파하는 문을 쓰다듬어 주며, 흘러내려간 이불을 다시 끌어다 주었다.
“둘 다 일단 내 스승님을 만나봐. 적어도 그분이라면…….”
“그자는 신용할 수 없다.”
“내 스승님이야. 이번 조언도 그분이라고 말 했잖아.”
“정말로 그의 조언이었나?”
뚜렷하게 떠오르는 건 없지만, 분명한건 리노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의 스승이 훌륭하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거다.
“직접적으로 언급한건 아니지만, 힌트를 주셨으니까. 분명 다른 해결방법을 아실거야. 적어도 나보단 낫겠지 그러니까…….”
“재워야 하니까 이만 나가 있어라.”
됐으니, 어서 나가라고 손짓했다.
어이가 없다는 표현을 표정으로 보여주더니, 울분을 토하듯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다 진정이 되었는지 나를 바라보았다. 말을 하려면 조용히 하라고 검지를 들어 입술에 붙였다. 나갈 생각이 없는 것 같아, 한숨을 쉬고 조용히 말했다.
“너 정도로 충분하다.”
“…….”
리노는 잠시 나를 바라보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밖으로 나갔다. 그가 나가자 방안은 한결 조용해 졌다.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들여왔다. 자고 있는 모습을 보자니, 나 역시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눈을 감아 버렸다.
**
오후 늦게야 눈을 떴다. 이렇게까지 편히 잠을 잤던 것이 오랜만이다.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는데, 문이 어느새 깼는지 얼굴을 내밀었다.
무슨 냄새를 맡는 것인지 가까이 다가왔다. 그새 시력이라도 더 안 좋아진 걸까 싶어 인상을 쓰자 그런 내 이마에 문의 입술이 닿았다. 이마에 닿았던 것이 코끝으로 내려오더니 입술 부근에서 멈춰 또 다시 킁킁 거리기 시작했다.
“뭐 하는…….”
입을 열려는 순간 부딪치는 입술. 힘으로 밀고 들어오려고 했지만 내치지 않고 손을 들어 부드러운 머리카락 속으로 밀어 넣었다.
깊게 빨아들이는 듯한 입이 떨어졌다. 문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무언가 납득이 되지 않는 다는 듯 다시 한 번 입을 맞댔다.
이것이 뭣 하는 짓인가 하여 인상을 쓰다 결국 뒷머리를 잡아 힘을 주어 밀어냈다. 겨우 떨어진 문은 대체 무슨 짓이냐 묻기도 전에 중얼거렸다.
“이상해.”
“무엇이?”
“이상하다고.”
물어도 대답은 반복되는 이상하다는 소리뿐이었다. 뒷머리를 잡은 손에 힘을 주고 있어도 문은 고개를 숙여 다시 한 번 입을 맞추려고 했다. 딱히 발정이 난 것도 아니다. 마치 입맞춤으로 뭔가를 확인하려는 듯 했다.
이제야 문의 행동이 이해가 갔다.
“까만 게 없어. 아니, 없는 게 아니라……. 이상해.”
더는 입을 맞추지 못하도록 뒷머리를 잡아당기는 대신 얼굴을 잡아 밀자, 한다는 소리다 저 소리다.
억지로 기의 흐름을 묶어 두었으니, 둔감할 법도 한데 잘도 알아차렸다. 보통은 본인의 몸부터 이상하다는 걸 알아야 하는데, 보다 먼저 예민하게 반응한 건 내 몸안에 있는 기의 흐름이었다.
문의 기처럼 억지로 깨어나지 못하게 한 것은 아니지만, 억제를 시킨 것은 사실이다. 내 기 때문에 영향을 받아 애써 재운 놈들을 깨울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자의적으로도 짐승이 내 기를 느끼지 못하게 할 수는 있지만, 문에게는 그건 별도의 문제다. 느끼지 못하게 할 수는 있어도 예전처럼 가져가지 못하도록 할 수는 없다. 어떻게 빼가는 지 몰라도 요령 좋게 가져가는 놈을 막을 수 없어 선택한 것이 리노였다.
문이 깨어나기 전, 맥을 짚고 물러나려는 리노의 손목을 붙잡았다.
문의 얼굴에 묻고 있던 머리를 들어 리노를 바라보았다.
“이것으론 안심할 수 없다.”
“뭘 생각하는 거야?”
“내게서 가져가지 못하게 만들어라.”
“……가장 확실한 방법이긴 하지만, 백자와는 달리, 제약된 기를 사용할 때 마다 고통스러울 거야. 정해진 이상을 사용하게 되면 목숨도 보장 못해”
“상관없다.”
그렇게 말하자, 리노는 인상을 쓰며 입을 다물었다. 나는 고민할 것 없다며 그의 잡은 손목에 힘을 주었다.
리노는 잠깐의 침묵을 깨고 고개를 저었다.
“……역시 안 돼. 백자는 융합되면 끝이지만, 넌 돌이킬 수 없어. 잠재운 건 깨우면 그만이지만, 양쪽으로 제약을 건다는 건 평생 그렇게 살아야 된다는 뜻이라고.”
“속죄할 수 있을 정도도 못되는 군.”
“네 병도 고칠 수 없게 돼.”
“네가 있으니, 적어도 병으로 죽지는 않겠지.”
“……날 신뢰하는 건 좋은데, 백자가 알면 가만있지 않을 거야.”
그 말에 문을 바라보았다. 이렇다한 표정 없이 잠들어 있는 문을 볼 때면 숨을 쉬지 못하는 가 싶어 놀란 적도 있었다.
더는 그런 염려 속에서 살고 싶지 않다. 빨리 합방을 한다면 좋겠지만, 문이 가지고 있는 기들을 온전히 받으려면 몸이 자라날 시간이 필요하다.
썩 내키지 않는 기다림이지만, 가장 확실하고 안전한 방법이라면 선택할 수밖에 없다. 그 시간이 올 때까진 어떻게 해서든 폭주만은 막아야 한다.
잠재운 것만으로는 안심이 가질 않았다. 또 다시 내 기를 빼앗아 애써 재운 것을 뒤흔들어 놓을 수 있다는 가정조차 허락하고 싶지 않았다.
리노의 팔목을 잡아끌어와 위협하듯 바라보았다.
“잔말 말고 해.”
“…….”
더 할 말이 없다는 듯 리노는 팔목을 잡고 있는 내 손을 붙잡고 다른 손으론 품에서 침을 꺼냈다.
“아플 거야. 혀라도 깨물지 않게 뭐라도 물고 있어.”
리노는 뒷덜미와 귀밑 약지 손가락과 어깨축에 각각 한 개씩의 침을 놓았다. 하나하나 꽂아 넣을 때마다 혈마다 기어 다니고 있던 기들이 움츠려 드는 것이 느껴졌다. 이윽고 하나씩 뽑기 시작한 리노는 마지막 뒷덜미에 박힌 침만을 남겨두고 나를 바라보았다.
“혀 조심해.”
대답하진 않았다. 리노가 마지막 침을 붙잡고 천천히 빼내기 시작한다. 이제야 사슬에 묶였다는 걸 깨달은 기들이 강렬하게 저항하기 시작했다. 온 몸 구석구석을 뒤집어 버리겠다는 듯 부딪치는 것들이 피라도 토해내고 싶을 정도로 날뛰었다.
팔 다리가 뜯겨져 나가는 기분이 들었지만, 녹슨 통증에 익숙한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목구멍을 타고 피가 들어오자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문을 바라보았다.
곧 깨어날 듯한 아이를 눈앞에 두고 나를 보지 못하도록 얼굴을 껴안았다. 리노는 온전히 침을 뽑아내고 나를 바라보았다.
당장 다가와 내 팔목을 잡이 진맥해보려 했지만, 난 무의식에 신경질 적으로 쳐내버렸다. 놀란 리노가 조금 뒤로 물러나자, 고개만 조금 들어 눈동자를 리노에게 굴렸다.
"성인식을 마칠 때까진 합방은 생각도 하지 마. 이런 상태로 너나 백자나 좋은 꼴은 못 볼테니까."
“알았으니……. 건들지 마.”
“까칠하긴... 기다려, 약을 가져올 테니까.”
리노가 밖으로 나갔다.
몸속을 헤집어 놓던 놈들이 벗어날 수 없다는 걸 알고 발악은 멈췄지만, 쉽게 수그러들진 않았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고 식은땀이 계속 나왔다. 눈앞은 어지러웠고 의식을 붙잡고 있는 것만으로도 힘이 들었다.
그 순간, 깨어난 문이 나의 허릴 붙잡았다. 허벅지 안쪽으로 고갤 묻어 비비며 갓 깨어난 고양이처럼 체온을 느꼈다.
잘 잤느냐고 묻고 싶지만 이대로 입을 열면 고통스러운 신음소리만 나올 것 같아 그만 두었다. 대신 머리카락을 천천히 쓰다듬어 주었다. 이대로 다시 잠이 들면 좋았겠지만, 갑자기 문은 일어나 내 손목을 붙잡았다.
그대로 침대에 눕게 만든 뒤 내 위로 올라탄 문은 뚫어져라 나를 바라보더니, 손을 뻗었다. 그리고 뺨 부근을 감싸더니 눈가를 문질렀다.
혹여 신음소리를 들은 것일까 염려 되었다. 그러나 말없이 눈가를 문질러 주는 것이 안심이 될 정도로 위로가 되어 뺨에 닿은 커다란 손바닥에 얼굴을 기댔다.
중간에 리노가 들어와 시끄럽게 했지만, 문을 다시 재웠다. 다행이 눈치를 채지 못한 것 같아 안심했다.
오후 늦게야 일어난 아이는 입가로 다가와 냄새를 맡는 것 같더니, 입을 맞춰다. 곧 이어 이상하다고 말하고 검은 것을 찾았다.
이제야 알았다. 어떤 식으로 내가 가진 것을 빼앗아 갔었는지.
과거, 상습적으로 문은 내게 입을 맞춰 왔었다. 단순히 애정 표현이라고 생각했었다. 아무리 들개라도 사내들끼리 입맞춤이 있었던 적은 없었지만, 15살 이후로 꾸준히 당해왔기 때문에 그 행위 자체를 문제 삼은 적은 없었다.
하지만 결국 이런 식으로 빼가고 있었던 것이다.
숨을 준다는 것이 이런 뜻이었던 것이다.
“어디 있어. 검은 거.”
초조한 표정으로 문이 물었다. 문은 자신의 기가 잠재워져 있다는 사실에는 아랑곳 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것으로 처음부터 검은 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는 이유가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라마. 어디 있어?”
양쪽 팔 안에 나를 가두고 다그치듯 다시 한 번 물었다.
“여기 있다.”
“……검은 거……. 어디에 숨겼어……?”
“숨기지 않았다.”
뚝-
얼굴위로 뭔가가 떨어졌다.
화를 낼 줄 알았더니, 하나 둘 떨어지던 눈물방울이 계속해서 떨어졌다.
“날……. 버리려고? 그러려고?”
무슨 바보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가 싶어 손을 뻗었다. 문의 얼굴을 붙잡아 끌어당긴 뒤 입술을 탐하였다. 놀란 녀석이 그대로 굳은 채로 움직이지 못했다.
입술을 떨어트리고 그대로 매달려 귓가로 다가갔다.
“너와 조금이라도 함께 있으려는 것이다.”
“…….”
“그동안 눈치 채지 못해 미안하다. 용서해라 문.”
문은 나를 깊게 끌어안았다. 그게 아니라며 울먹거리고 있는 녀석이 진정되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었다. 가만히 안겨 있던 나는 그런 문의 등을 가만히 두들겨 주었다.
**
항구를 통해 로던프에 들어온 슈레이는 제일 먼저 말을 구입했다.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 뒤를 지키는 자들을 제외하면, 구입해야 할 말은 모두 두 마리였다. 그러나 슈레이는 말 한 마리를 건네주려던 것을 멈추고 나비를 바라보았다.
처음엔 여성인줄만 알았다. 분명 나비가 남성 창기라고 익히 들은 바 있음에도 선이 곱고 표정이 나긋하여 영락없이 여성인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트란슈 전통 복장을 던져버리고 늘어트린 머리카락도 단정히 묶어 올린 나비는 이제 제법 사내티를 내고 있었다.
“말해두지만, 난 네놈 따윈 절대 태워주지 않는다.”
기예도 출중하고 영리하여 화법에도 능하니, 확실히 데리고 있는 다면 도움이 될 것이다. 허나, 제아무리 아름답고 영특하다고 한들, 제것을 탐내는 자를 곱게 볼 정도로 슈레이는 너그러운 사람이 아니었다.
“끔찍한 소리 하지 마십시오. 불결합니다.”
나비는 경악하는 얼굴을 숨기지 않고 슈레이에게 말을 빼앗아 가듯 가져가 곧 바로 올라탔다. 안정적으로 말 등 위로 앉은 나비는 능숙하게 고삐를 틀어 걸었다.
유곽에서 몸이나 파는 녀석이니, 볼만 한 것은 얼굴이나 몸뿐이라고 생각했던 슈레이는 이번엔 제법 놀라웠다. 검술은 어깨너머로 배워두었다 해도 말을 타는 것은 귀족들의 놀음이므로 유곽의 창기들이 배우기에는 수준이 너무 높았다.
슈레이 역시 말 위에 올라타 나비를 추월했다. 곧 죽어도 등을 보이겠다는 도발에 나비는 꾹 참으며 뒤를 따랐다.
싫어도 주인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그저 어서 일을 마치고 가나에게 돌아갈 생각만 머리에 가득 찼다.
슈레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음 같아선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가나를 제 곁에 두고 싶지만, 현실적으로 무리가 있었다. 에덴에서 사로잡는 것을 실패한 짐승이 용병왕이 되어 가나의 곁을 지키고 있다는 것이다.
용병왕이 되어버린 짐승이 가진 전력만 헤아린다면 사천이 넘는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세 주를 통솔하고 있는 용병왕까지 지배하에 둔다면 족히 삼천 구백 정도.
그 수만 헤아려도 충분히 왕사에 위협이 갈 정도이니, 적으로 두면 상당히 피곤해질 것이다.
왕사를 움직일만한 명분도 부족하지만, 움직일 수 있더라도 당장 용병왕을 내칠 수 있다는 확신도 서질 않는다.
확실히 전에 없던 용병왕의 출현에 지배받길 원하는 놈들이 매료당해 버렸다. 짐승의 존재가 그만큼 선명하고도 특별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짐승을 지배하에 두고 있는 것은 검은 들개.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던 눈동자가 이따금 소름을 돋게 만들었다.
암부와 손을 잡으라는 소리에, 처음에는 뭣 모르는 꼬마가 되는대로 지껄이는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암부는 로던프에서 독단적으로 움직이는 집단이다. 정체도 불분명하고 현재는 로던프 내부에서 귀족들을 대상으로 물갈이를 하고 있지만, 어떤 의도를 가지고 움직일지는 알 수 없다. 그들의 목적도 모르고 섣불리 움직였다간 뒤통수를 맞거나 적으로 돌릴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가나는 마치 미래를 예견하려는 듯 망설일 없이 말했다.
암부를 편에 둔다는 것은,
‘이후 개입될 나라의 지원을 받게 된다.’
떠오르는 나라는 많지 않다. 로던프에 앙심을 품고 있는 쿠웨드와 트란슈와 로던프를 사이에 두고 있는 중립국 라이나프가 있다.
라이나프는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 그들은 로던프가 세워지기 훨씬 전에 이제는 멸망한 로만과 천년 전쟁을 치룬 바 있다. 로만은 지금의 로던프처럼 라이나프를 침략해 지배하여 넓게는 세계를 발치에 두겠다는 야망을 가지고 있었다.
소박하게 살아가고 있던 라이나프의 선조들은 맹렬히 저항했지만, 로만은 가차 없이 그들의 뿌리까지 뽑으려 여자와 노인, 어린아이 가리지 않고 섬멸했다. 그러나 나라를 빼앗기지 않으려던 라이나프의 저항은 날이 갈수록 거세졌고 그 기세가 이국땅까지 퍼져 지원군을 불려들었다.
타국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천년을 이어왔던 전쟁의 승패가 기울었고, 비로소 로만은 붕괴되고 라이나프와 통일되어 흡수 되었다.
그러나 로만의 후손은 그 맥을 이어나가기 위해 라이나프에서 벗어나 다시 한 번 나라를 일으키는 데, 그것이 지금의 로던프가 되었다.
또한, 라이나프의 전폭적인 지원군을 보내왔던 타국은 바로 슈레이의 나라.
트란슈.
슈레이의 말발굽 소리가 멈추었다. 그는 <카인관>의 낡은 간판을 바라보며 말 위에서 내려왔다.
“평범하네요.”
발맞춰 말에서 내려온 나비가 말했다. 그 말에 슈레이 역시 동감하고 있었다. 겉은 다른 식당과 다름이 없었다. 이상한 점은 유독 들어오는 손님이 적다는 것 정도다. 암부가 사용하는 건물답게 들어오는 인기척은 거의 없었다.
“방심하지 마라.”
“본인 걱정이나 하십시오. 무슨 일 일어나도 절대 구해주지 않을 테니까.”
“뭐야, 바로 복수하기냐?”
슈레이는 비웃듯 물었다. 나비는 그런 그를 바라보지도 않고 인상을 썼다.
“친근한 척 하지 마시죠. 소름 돋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카인관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황당했다. 어느 누구한테도 들어본 적 없는 말이었다. 더욱이 종자는 자신의 눈도 제대로 마주치는 일이 없었는데, 나비는 상습적으로 주인을 보고 인상을 쓰는가 하면 모욕적인 말도 곧잘 내뱉었다.
간이 부은 것이 아니라면,
“저게 미쳤나…….”
곱게 봐줄만한 구석은 외모뿐이었다. 가나만 아니었어도 자신의 취향을 그대로 그려놓은 것 같은 나비에게 빠져 저런 굴욕적인 말도 달콤한 꿀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허나 지금은 그저 저 위아래 모르는 미친 종자를 어떻게 하면 쥐어박을 수 있을지 고민했다.
곧 슈레이는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자신은 지금 암부와 접근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로던프의 내전을 좀 더 지켜봐야 하는 것도 그 이유고, 쿠웨드와의 교섭이 먼저인 것도 이유였다. 무엇보다 암부는 믿을 수 없다. 때문에 이번일이 틀어진다고 해도 상관은 없었다.
그러나 만약 나비가 실수라도 하게 되어 일이 틀어지게 된다면, 그 잘못을 모두 나비에게 돌려 평생 성 내벽을 보수해야 하는 일을 시킬 작정이었다. 미워도 제 사람이라 버리거나 죽일 수 없으니, 이것이 슈레이가 줄 수 있는 최고의 벌이었다.
드물게 나비를 생각하며 기분이 좋아진 슈레이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나비는 갑자기 웃는 그가 기어이 정신이 나간 것인가 싶어 곁을 피했다. 정신병도 옮을 수 있다면, 피해야 하는 것이 옳다고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결국 한 테이블에 앉을 수 없는 슈레이와 나비의 곁으로 주문을 받는 직원이 다가왔다. 평범한 여성 직원이었다.
“간단한 점심으로 2인분으로 주십시오.”
나비가 주문을 마치고 가게를 눈으로 둘러보았다. 딱히 의심스러운 것은 없었다.
“내가 왜 네깟 놈이랑 마주보고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군.”
“같은 생각이라서 더 기분 나쁘군요.”
“넌 주인을 대하는 태도가 글러 먹었어.”
“주인도 주인다워야 주인이죠. 하물며 말도 사람을 가립니다.”
“짐승은 적당한 훈육을 하면 말을 아주 잘 듣지. 하지만 인간은 훈육만으론 고쳐 쓸 수 없는 짐승이라서 말이야. 너는 이번일이 틀어지면, 각오하는 게 좋을 거다.”
“…….”
나비가 대답이 없었다. 조금이라도 겁은 먹었다면 슈레이도 억한 심정이 조금은 풀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비는 차갑고 도도한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가게 안을 탐색했고, 슈레이의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야…….”
보다 못한 슈레이가 말을 걸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싸늘했다.
“말 걸지 마십시오. 일일이 대답하는 것도 짜증나니까.”
“…….”
슈레이는 속에서 열이 들끓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깨달았다. 나비는 표정을 보아, 그가 곧 폭발할 줄 알았으나 인내로 참고 이를 갈고 있는 모습에 새삼 질려 버렸다. 자기 자신을 억누를 수 있는 사람은 생각만큼 이용해 먹기가 쉽지 않다. 도발을 끊임 없이 하더라도 넘어와 주지 않으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인간적으로나 주군으로 삼기에는 괜찮은 사람일 줄은 모르나, 나비에게 슈레이는 가나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는 거머리 정도였다.
“어.”
갑자기 슈레이가 입을 열었다. 무언가 발견 한 듯 싶어 나비 역시 고개를 돌려가며 그가 향한 곳을 바라보았지만 눈으로 먼저 탐색한 것과 별 다른 점은 없었다. 설마 놀리는 것인가 싶어 인상을 쓰며 슈레이를 바라보자, 그는 역시 아무런 이상한 점이 없는 곳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네가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증명해봐라.”
“대체 누굴 보는 겁니까?”
“옆에 앉아 있는 검은 머리카락의 사내. 원래는 푸른색이었던 것 같은데 염색을 한 것인가?”
혼잣말로 중얼거리다 턱을 괴던 슈레이는 나비를 바라보았다.
“3왕자 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