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화 (24/35)

슈레이의 말을 들은 나비는 표정을 굳혔다. 왜냐하면 3왕자는 죽었다고 알려졌기 때문이다. 또한 암부에 왕족이 가담하고 있다는 것은 상당히 놀라웠다. 더 믿기 어려운 것은 그가 단순히 왕족이기 때문은 아니다. 로던프 란 그란스는 백치라 익히 알려진 인물이다. 

제 이름 석자 쓰는 것도 할 수 없고 배변도 종종 가리지 못해 늘 곁에는 그를 가엾이 여긴 문호가 붙어 다녔다. 

나비는 눈만을 돌려 란을 바라보았다. 앞치마를 메고 있는 폼이 카인관의 여직원과 비슷했다. 나비도 잠깐 슈레이가 질이 좋지 않는 농담을 한 것이 아닌지 생각해 보았지만, 검은 머리카락과 대조되는 황금빛 눈동자에는 확연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태양처럼 빛나야 할 황금빛이 발해 있는 것을 확인하고 곧 그가 암부의 수장이라는 것도 눈치 챘다. 덧붙여, 그들이 자신과 슈레이를 주시하고 있다는 사실까지도. 

여직원과 잠시 눈빛을 교환한 란은 이곳으로 가져와야 할 음식이 담긴 그릇을 받아 천천히 다가왔다. 그는 제법 어울리는 웃음을 짓고 있었다. 

숨기는 것이 그만큼 능한 자란 소리였다. 

“2인 분 나왔습니다! 그런데, 두 분은 타지에서 오신 모양이죠?”

“네. 맞습니다. 추천을 해 줘서요.”

나비 역시 웃음으로 화답했다. 

무언가 숨기고 있다는 것을 란은 눈치 채고 있었다. 란은 나비를 바라보다 슈레이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주 잠깐 웃음이 사라졌지만, 다시 미소 짓곤 물었다. 

“그 고마우신 분이 누구실까요?”

곁으로 인기척이 느껴지진 않지만 제법 많은 수의 암부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칼날이 꺼내지는 소리가 미약하게 들려왔고 문은 어느새 닫혀져 바깥세상과 단절되었다.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살기들이 카인관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지만, 눈앞의 인물만은 머리에 꽃이라도 키우는 것처럼 허술하게 웃음 지었다. 

“그분이 누구기에, 트란슈의 기사가 카인관까지 오신 걸까요?”

란은 이미 슈레이의 정체를 간파했다. 

단순히 트란슈의 기사로 알고 있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공식적으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원로들 사이에서는 이미 차기 왕이 누구인지는 결정되어 있었다. 

트란슈는 왕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다. 때문에 왕비가 그 대변인의 역할을 맡는다. 때문에 나라가 혼란스럽고 내전이 일어나거나 침략을 당하게 되면 가장 먼저 목숨을 내 놓는 자리가 왕비의 자리이다. 

로던프와는 다르게 트란슈는 동성애가 보편적인 나라다. 왕비가 남자라는 것은 전혀 걸림돌이 될 것이 아니다. 때문에 란은 슈레이와 대동한 아름다운 사내가 왕비일 것이라 짐작했다. 

어쨌거나, 제법 무모한 자들이 아닌가. 

제대로 된 호위기사도 대동하지 않고 뻔뻔하게 들어와 자리를 차지하였다. 정체를 알아본 것은 들어온 순간부터 눈치 챈 란이 좀 더 빨랐다. 

“카인관이 타국에서까지 유명해 져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글쎄요. 말했듯 소개만 받았을 뿐입니다.”

“제게 알려주실 수 없는 분이십니까? 알려주신다면 직접 보답 해 드리고 싶은데요.”

란의 웃는 표정이 약간 뒤틀렸다. 나비는 여유롭게 포크로 음식을 찍어 입에 넣었다. 혀에 닿는 음식물이 끔찍할 정도로 맛이 없었다. 결국 삼키지 못하고 입에 담고만 있자 보다 못한 슈레이가 입을 열었다. 

“라마.”

“!”

라마의 이름을 들은 란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그의 예기치 못한 반응에 놀란 것은 슈레이와 나비였다. 

하지만 충격을 받은 듯한 란에게 쐐기를 박듯 슈레이는 말을 이었다.

“자네에 대한 것은 라마에게 익히 들었다. 그래서 나는 이곳에 온 것이다.”

“그 말을 나보고 믿으라는 건가.”

동요로 가득한 얼굴로 말하는 것 치고는 경계가 제법 단단했다. 

“에덴에서 만났으니까. 네가 모르진 않을 텐데.”

가나가 라마라는 것에 확신을 두고 던진 말이었다. 둘 중 어떤 것이 진짜 그의 이름인지는 모르겠지만, 라마라는 이름은 주위의 모든 암부들이 술렁일 정도로 영향력이 있었다. 

“그렇다면 라마는 어디있지? 말해.”

자신을 노려보는 란을 바라보던 슈레이는 약간의 소리를 내며 비웃듯 웃었다. 동시에 곁에 있던 암부의 검이 모두 슈레이의 목울대를 향했다. 검 끝이 겨우 살갗에 닿지 않고 있었지만, 란이 손짓한다면 그들은 일제히 검날에 힘을 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슈레이는 두려움이 없었다. 

“내게서 굳이 확인하고 싶은가?”

나비는 로던프 란 스란스가 침착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짐작하는 것 보다 훨씬 전부터 계획을 했던 것처럼 신중하고 이성적인 사고를 할 것이라 확신했다. 가벼운 도발에 넘어가지 않고 사사로운 감정에 놀아나지 않고 우리가 이곳에 온 이유를 듣고자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란은 누구보다 빠르게 수하의 검을 빼앗아 슈레이의 목울대를 향해 뻗었다. 

짙은 살기에 놀란 나비가 목구멍에 넘기지 못했던 음식물을 삼키고 차고 있던 검을 들어 막았다. 힘과 기술. 그 어느 것에도 밀리지 않고 막은 나비는 란을 바라보았다. 살기를 거두지 못하고 거칠게 검을 짓누르며 란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분노와 원망, 절규가 참혹하게 뒤섞인 표정이었다. 

“우린 대화를 하러 온 것입니다. 검을 거두십시오. 지금 이자를 죽인다면, 저야 감사합니다만 후에 피를 보는 것은 그쪽입니다.”

나비가 타이르듯 말했다. 물러설 기세도 아니었지만, 더 이상 힘을 주지도 않았다. 조금만 더 말을 해 본다면 흥분을 가라앉힐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도움하나 주지 못할망정 방해를 하는 것은 속이 뒤틀린다는 걸 숨기지 않고 건들거리고 있는 슈레이였다. 

“절벽에서 떨어져 죽었다지?”

“그만 하십시오! 그 이야기를 하러 온 것이 아니잖습니까.”

나비가 말렸지만, 슈레이는 도발을 멈추지 않았다.  가나라고 알고 있는 소년이 라마라는 이름도 가지고 있다고 확신을 둔 모양이다. 멀쩡히 살아 있는 소년이 죽었다고 생각한 란의 반응이 재밌어 죽는 표정이었다.

나비는 더는 저 입을 벌리지 못하게 뭐라도 쑤셔 넣고 싶었지만 맞닿은 검에 힘이 들어갔다. 

“내가 죽이기라도 했나? 야누스 절벽 밑으로 내가 밀었어? 곁에 있던 건 네놈일터. 그러고도 지켜주지도 못한 주제에 뭘 하겠다고?”

기어코 도발에 넘어간 란은 나비의 검을 초인적인 힘으로 뿌리쳐 던져버리고 그대로 지나쳐 슈레이에게 달려갔다. 암부 모두 그런 란을 말리지 않았고 슈레이 또한 앉은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검이 눈앞에 드리워져 꿰뚫려는 순간, 슈레이는 탁자를 걷어차 들어올렸다. 그릇이 쏟아지면서 요란한 소리를 내며 깨졌다. 

슈레이의 안면을 향해 날아오던 란의 검은 닿기도 전에 탁자에 박혀 떨어지지 않았다. 대신, 그런 탁자를 짓밟은 슈레이의 검 끝이 란의 목울대에 닿아 피를 흘리게 만들었다. 

일제히 암부들이 검을 들었다. 웃음을 멈춘 슈레이가 입을 열었다.

“움직이지 마라. 목이 날아가는 건 어려울 게 없으니까. 허나 3왕자가 두 번 죽는 걸 원하는 놈이 있으면 마음대로 해도 좋다.”

뒤늦게 슈레이가 눈을 돌려 암부들이 얼굴을 확인했다. 그리고 다시 란을 바라보았다. 반격조차 할 수 없는 상황임에도 진득한 살기는 전혀 지워지지 않는 채다. 3왕자가 젊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어렸다. 허나 수장이라는 놈이 이정도 도발에 넘어가 목을 내 놓았다는 것에 실망이 갔다. 

이런 자와 손을 잡을 들 무슨 이익이 있을까.

“라마는……. 죽지 않았다.”

란의 입이 열렸다. 검에 닿아 피를 흘리고 있음에도 두려워하는 내색조차 없었다. 

“야누스 절벽에서 떨어지고도 살아남은 자가 있었던가?”

“닥쳐…….”

“왜 화를 내는 거지? 틀린 말도 아니잖아. 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테니까 화를 내는 것이 아닌가.”

그때였다. 

눈동자를 들어 올린 란은 그대로 손을 들어 목울대를 향하고 있는 슈레이의 검 날을 붙잡았다. 날은 손바닥을 파고들어 많은 피를 흘리게 했고 여기서 더 힘을 준다면, 그대로 란의 손가락이 잘려나갈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검을 붙잡아 움직임을 잡은 뒤, 자유로운 다른 손으로 주먹을 말아 쥐어 그대로 슈레이의 안면을 강타했다. 

그대로 슈레이가 뒤로 넘어지자 검을 잡고 있는 손을 놓은 란은 천천히 그 곁으로 다가갔다. 

“살아 돌아갈 생각은 마라.”

“퉤- 아……. 혀 깨물 뻔 했네.”

입안이 터지기라도 한 것인지 붉어진 뺨을 가리지도 않고 슈레이는 피가 섞인 침을 뱉었다. 뚝뚝 손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란은 차갑게 그런 슈레이를 바라보았다. 탁자에 박힌 검을 힘들이지 않게 뽑은 란은 당장이라도 참수를 하려는 사형수처럼 눈을 번뜩였다. 그것을 지켜보고 있던 나비가 천천히 다가왔다.

“그를 죽인다면, 당신의 적은 트란슈 금군입니다.”

나비는 소매 안쪽으로 손을 넣어 가렸다. 뒤 늦게 누군가가 달려왔다. 헐레벌떡 다가온 그는 란의 손을 바라보고는 붕대와 의술사를 데려오라고 명했다. 지시를 하는 것이 익숙한 것으로 보아 수장 다음으로 가는 위치에 앉은 인물일 것이라 예상했다. 

“우린 뜻이 비슷한 당신들과 협상을 하러 온 것입니다. 제 주인이 멍청해서 역린을 건드린 모양이오나, 부디 똑같은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마십시오.”

듣고 보니 기분이 나빠진 슈레이가 항의를 하듯 말했다. 

“야, 너 말 똑바로 안 해? 맞은 건 나라고!”

“당신은 닥치고 찌그러져 있어.”

“너 주인한테 하는 말버릇이!!”

“고인에 대한 소식을 전해들은 것은 저희도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직접 찾은 것은 단순히 협력하려는 것도 있지만, 그것을 확인 차 온 것이기도 합니다. 제 주인 역시, 라마가 죽었다는 걸 믿지 못하셨기 때문입니다. 죽지 않았다면 살아 있겠다는 뜻이겠죠. 그러니 이곳에 없는 것도 분명 이유가 있을 겁니다. 그렇죠? 주인님.”

싸늘하게 내려 보는 나비의 눈은 주인을 보고 있는 종자의 것이 아니었다. 토를 달거나 이 재미난 걸 왜 방해하느냐며 헛소리라도 하는 날에는 들고 있는 검으로 찌를 기세였다. 작정하고 덤빈다면 상대를 못할 것도 없지만, 그 죽지 않았다는 라마가 걸렸다. 

나비가 죽는다면 필시 좋지 않는 일이 일어 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슈레이의 그런 불안은 늘 적중하였기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로 두 손을 들어올렸다. 

“아, 그래그래, 사과하지. 내가 말이 좀 지나쳤다 쳐. 어쨌거나 난 라마의 추천으로 이곳으로 온 건 사실이다. 그러나 너희가 굳이 손을 안 잡겠다고 해도 나한테는 별로 큰 타격이 될 만한 것도 없어. 그러니 믿지 않아도 상관없다.”

주저앉아 있던 슈레이가 벌떡 일어났다. 자리를 털고 적당히 앉을 수 있는 의자를 끌어와 엉덩이를 붙였다. 대화를 할 때 서 있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서이다. 

“그렇다면 왜 굳이 이곳까지 온 것입니까? 사신을 보내도 될 일일 텐데요.”

듣고 있던 붉은 색 머리카락을 하나로 땋은 사내가 물었다. 그 물음에 시큰둥한 얼굴로 슈레이는 답했다. 맞은 곳이 아파서 사실 입을 여는 것도 짜증이 나 있는 상태였다. 

“아까 저 놈이 말 할 때 넌 졸았어? 확인하러 왔다고 하잖아.”

“손은 잡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럼에도 소년의 생사를 확인을 위해 부러 왔다 이것입니까.”

“너희도 그랬을 거잖아.”

태연하게 말하는 슈레이는 붉은 머리 사내를 알고 있었다. 

백치의 곁을 늘 지키고 있었다던 문호였다. 문호는 왕 밑에서 가장 독립적인 작위를 가진 자이다. 

때문에 왕이라 할지라도 문호의 일에 참견할 수 있는 권리는 없다. 억지를 부린다면 죽일 수는 있겠지만, 그가 가진 작위를 없애버린다거나 그가 하려는 일을 명으로 막을 수는 없다. 

그럼에도 왕은 문호를 크게 견제하지 않는다. 문호는 누군가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권리가 없기 때문이다. 검을 들어서도 안 되며, 사적으로 기사나 용병을 고용할 수 없다. 그가 자신의 권력을 이용할 수 있는 건 유일하게 딱 한 명. 왕 뿐이다.

귀족들이나 내사관에게도 눈엣가시인 것도 그 이유였다. 문호는 왕의 내사관들의 처벌을 주청할 수 있는 유일한 관리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슈레이는 로던프에 차기 문호가 정해졌다는 소식은 들은 바 있었다. 최연소 문호라고 들었는데, 아직 그 이름도 들은 바 없다. 손을 잡는 다면 차라리 어린 녀석이 나았다. 영특하다고 해도 어린애이니, 그를 편으로 만들면 로던프의 내사일을 손바닥 위에 올렸다고 봐도 무방하다.

더구나, 지금 앞에 있는 문호는 이제 뭣도 아니다. 

백치의 곁을 지키다 문호 역시 죽은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자신이 손해 볼 것 같은 협상임에도 묘하게 입맛을 돋궜다.

“만약 여기서 널 죽이겠다면?”

란이 말했다. 이야기는커녕, 협력조차 하지 않을 것이란 소리였다. 

“넌 앞으로 나갈 수 있는 최고의 말을 잃는 거지.”

“너 같은 말 따윈 필요 없다.”

“돈 주고도 못 사는 명마라고?”

“시끄러운 말은 질색이거든”

“유감이네. 나는 주둥이 놀리는 게 유일한 낙인데 말이야.”

란이 다시 검을 들어올렸다. 이번엔 슈레이도 당할 생각이 없다는 얼굴이었다. 그 둘이 검을 든 순간부터 이미 협상은 결렬됐다. 

슈레이가 그렇게라도 말하려는 듯 나비에게도 검을 들라며 눈치를 줬다. 나비가 그런 슈레이의 곁으로 다가왔다. 명색이 종자이니 주인의 곁을 지키려는 듯하여 슈레이는 단숨에 길을 열어 나비를 안고 튈 생각이었다. 

그러나 나비는 검을 들지 않고 슈레이의 눈앞으로 다가와 주먹을 말아 쥐어 머리를 쥐어박았다. 지켜보고 있던 모든 암부와 란, 그리고 문호까지 그 모습에 얼어붙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보다 황당해 하는 것은 슈레이였다. 

“너 임마! 지금 누굴 때려!!”

“……. 이걸 그냥 확!”

“!”

반사적으로 주먹을 다시 들어 올리자 방어하기 위해 슈레이가 손을 들었다. 맞아봐서 알겠지만, 나비는 겉모습과는 다르게 알아주는 돌주먹이었다. 때린 곳을 정확히 또 때리려 하자 자신도 모르게 슈레이는 움츠려 들었다. 후에 부끄러운 행동을 했다는 사실을 알고 남자다움에 상처를 입었지만, 나비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분명하건.”

나비는 슈레이를 등지고 문호와 란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당신들이 로만의 후손인 이상, 그 누구의 손도 잡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저자를 죽이고 트란슈 금군까지 적으로 돌린다면, 불리한 쪽은 누구일 것 같습니까? 이것을 알기에 라마는 우리를 당신들에게 보낸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런 제 생각도 틀린 것 같습니까?”

란은 섣불리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나 대답을 미룰 생각도 없었다. 곧 결정을 내린 그는 쥐고 있던 검을 집어넣었다. 일사분란하게 란의 움직임대로 암부 모두 검을 넣었다. 

“네가 원하는 건 뭐지.”

나비는 란이 자신에게 묻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등 뒤에서 어느새 의자에 앉아 있는 슈레이는 아픈 머리를 문지르던 손을 내렸다. 곧 아무렇지도 않는 다는 얼굴로 다리를 꼬았다. 

“로던프의 멸망.”

저것이 기어이 매를 번다는 생각에 다시 한 번 돌주먹을 움켜쥐던 나비를 곁으로 란이 걸어왔다. 정확하게는 나비의 뒤에 있는 슈레이의 앞으로 다가온 것이다. 

“명령을 들을 건가.”

란이 물었다. 슈레이는 코웃음을 쳤다.

“듣지 않아. 대신, 협력은 하도록 노력해보지.”

“당분간은 이쪽 일이 끝날 때까진 기다려라. 후엔 직접 찾겠다. 나머진 그때 다시 듣도록 하지.”

“오래는 못 기다려. 이쪽도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

“노력하지.”

란은 손을 내밀었다. 슈레이는 그 손을 바라보다 마주잡았다. 강하게 쥐고 떨어진 두 사람의 악수는 무언의 협력관계가 체결되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슈레이는 일어났다. 여기서 더 할 일은 없기 때문이다. 그가 문을 열고 나가려고 하는데, 나비가 뒤쫓아 오지 않자 뒤 돌아 나비를 불렀다. 

“야, 넌 여기서 터 잡고 살래?”

그런 슈레이의 의기양양한 표정이 꼴 보기 싫었지만 걸음을 옮겼다. 나비가 따라 나오는 것을 알고 그가 온전히 나가자 나비는 잠시 걸음을 멈춰 문호를 바라보았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나비는 좀 전부터 걸린 것이 몇 가지 있었다. 하지만 정말 물어도 되는 것인지 망설이다가 결국 입을 열고 말았다.

“혹, 가나라는 이름을 알고 계십니까.”

문호는 조금 놀란 듯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곧 평정심을 되찾았다. 그러나 그 정도의 반응만으로도 눈치가 빠른 나비는 문호가 가나라는 이름을 알고 있다는 걸 눈치 챘다. 

“알고 물으시는 것 아니십니까.”

“알고 있다면 부러 이름을 알고 있느냐 묻진 않았을 겁니다.”

“작위는 문호. 아직 어리긴 하나, 쉬이 손에 넣을 수 있는 자가 아닙니다.”

“…….”

나비는 잠시 생각에 잠기였다. 작위를 보면 도저히 자신이 알고 있는 가나와 최연소 문호와는 그 어떤 연관성도 찾지 못했다. 어리다는 것만 빼고는 살고 있는 환경도 작위도 대조될 수 없었다. 같은 이름일 뿐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지만, 라마라는 이름이 걸렸다. 

“라마……. 가나…….”

“네?”

문호가 나비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못 들어 다시 물었다. 그러나 나비는 웃으며 아무것도 아니라며 밖으로 몸을 돌렸다. 

머릿속에서 빠르게 맞춰지는 조각들로 인해 문턱을 넘기도 전에 나비는 한 가지 사실을 알아 낼 수 있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가나는 로던프의 최연소 문호의 이름이다. 라마는 로던프에서의 존재를 지우기 위해 트란슈로 넘어와 문호의 이름을 빌렸다. 단순히 이름만 빌렸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서로 안면이 있다는 것에 가능성을 두었다. 

적으로 두기엔 아까운 인재다. 안면이 있다면 필시 손에 넣으려 했을 터. 이번 일에 동행하지 않는 것은 단순히 트란슈에 일이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너 아까는 아주 신나게 때리더라?”

“…….”

나비는 갑자기 슈레이가 나타나 말을 걸자, 여태까지 생각했던 것이 뒤죽박죽 되어버린 기분이었다. 방해 받았다는 것에 불쾌함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자, 슈레이도 덩달아 눈살을 찌푸렸다. 

“뭐야 그 더러운 표정은.”

“방심하게 만드는 것 치곤 너무 바보 같아서 힘 조절을 못했습니다.”

“주인 머릴 쥐어박고도 미안하단 말은 한 마디도 안하지?”

“죄송합니다.”

“야……. 너.”

슈레이는 속에서 불이 날 지경이었다. 그러나 나비는 너무도 태연한 얼굴로 말을 가지고 오겠다며 헛간으로 향했다. 뒷모습을 보고 있잖니 달려다 뒤통수라도 때리고 싶었지만, 그만 뒀다. 어쨌건 중간에서 중제를 해 주고 결정적인 말을 해 준 덕분에 란과 손을 잡을 수 있었다. 

건방지긴 하지만 눈치가 빠른 편이니, 원하는 바를 따로 일러주지 않아도 곧 바로 말하고 행동하기도 한다. 

제법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괘씸하다는 생각도 뒤를 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 주먹은 진심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캉-

뭔가 굴러가는 소리가 들렸다. 슈레이는 말을 가지러 간다는 놈이 나타나지 않고 이상한 소리가 들리자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곳에서 마주한 것은 넘어진 나비를 가로 막고 있는 거대한 괴물이었다. 

산만한 풍채로 솟아 있는 괴물을 바라보던 슈레이는 지체 없이 검을 들었다. 쓰러진 나비를 구하기 위해 오직 괴물을 죽이기 위해 눈을 번뜩였다. 괴물은 단단한 피부를 가지고 있어 쉬이 상처를 입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런 괴물에게도 약점은 있었다. 목둘레는 살이 얇고 부드러워 베어낼 수만 있다면 죽일 수 있다.  

에덴에서 수차례 괴물을 섬멸했던 슈레이였지만, 그는 늘 괴물을 눈앞에 두었을 땐 긴장을 놓치지 않았다. 약점을 알고 있다고 해도 쉽게 쓰러트릴 수 있는 놈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동작이 빠르고 무리를 짓는 특성이 있어 소란을 일으킨다면, 어디선가 또 다른 괴물이 나타날지도 모를 일이다. 

어째서 에덴이 아닌, 로던프 수도까지 괴물이 내려 올 수 있었는지까지는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잠깐! 기다리십시오.”

괴물에 가려져 보이진 않지만, 나비의 목소리가 들렸다. 슈레이는 괴물의 목에 검을 박을 준비를 하다 눈동자를 굴려 소리가 나는 쪽으로 향해보았다. 

엉거주춤 일어나는 나비는 허리를 감싸고 서서 괴물의 앞으로 걸어나왔다. 

“괜찮아?! 젠장, 이쪽으로 달려!”

“별일 아니니, 검을 집어넣으십시오.”

“아둔한 놈! 네 놈 뒤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그래?!”

“아.”

나비는 뭔가 생각났다는 듯 통증을 느끼는 허리를 붙잡고 괴물을 바라보았다. 그는 모란꽃 향이 날 것처럼 웃으며 말했다. 

“아까는 감사했습니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 했습니다.”

나비의 말에 괴물이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비가 재차 고맙다며 말하고 혹 다치지 않았냐며 물었다. 이번엔 괴물이 고개를 가로 저으며 다치지 않았다며 표현했다. 이에 나비는 다행이라고 덧붙였다. 

이 모든 상황이 믿을 수 없는 슈레이는 잠시 얼어붙어 무어라 표현을 해야 하는 것인지 파악조차 하지 못했다. 

“고삐를 당기는 중 끊어져 놀란 말이 날 뛰었습니다. 발굽에 밟혀 크게 다칠 뻔 했지만, 이분이 나타나 말을 진정시켜 주셨습니다. 검은 대체 왜 든 겁니까?”

“왜냐고?”

슈레이가 묻고 싶었다. ‘왜 저 괴물은 나비를 구해 준 것일까. 아니, 그보다 왜 수도에 괴물이 내려와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닌 단 말인가. 저것은 괴물이 아닌가?’

슈레이는 찬찬히 괴물의 외형을 바라보았다. 괴물이라고 보기엔 지나치게 단정해 보이긴 하였다. 하지만 사람이라고 보기에는 덩치가 너무 컸고 귀 끝이 뾰족하게 늘어나 있어 괴물의 그것과 같았다. 

에덴에서 봤던 괴물처럼 짐승과 같은 소리를 내진 않지만, 사람이라 보기에는 지나치게 이질적이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슈레이는 이 괴물을 어디에서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괴물과 안면이 있을 턱이 없는데도 말이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먹을 부어 버린 듯 떠오르는 건 없었다. 곧 하찮은 것은 뒤로 하고 괴물의 곁에 있는 나비의 팔목을 잡아끌었다. 

“놈은 위험하다.”

“뭐 하는 짓입니까? 이거 놓으십시오.”

“한 번쯤은 주인 말을 들어. 죽고 싶지 않으면.”

“하! 그럼 죽여 보시던가요.”

거칠게 나비는 잡힌 팔을 뿌리쳤다. 가느다란 손목이 모래알이 흩뿌려지듯 멀어지자 자신의 마음도 몰라주고 밀어내는 나비에게 화가 날 지경이었다. 

마음 같아선 저것은 괴물이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청각에 예민한 놈이 나비와 가까이 있어 무슨 짓을 할지 몰라 고함조차 지르지 못했다. 

“당장 이리 오라니까!”

“알아서 갈 테니 먼저 가십시오.”

등을 돌리고 괴물에게 좀 더 가까이 가려고 하자, 참지 못한 슈레이가 움직였다. 뿌리침 당할 것 없이 그대로 안아 데려갈 생각이었다. 품안에서 말을 듣지 않는다면 기절을 시켜버릴 생각도 하였다. 

그것을 실행에 옮기려는 순간, 거대한 손이 슈레이의 팔목을 붙잡았다. 괴물의 손이었다. 

경계를 하지 않았던 것도 아님에도 너무도 쉬이 잡혀 버려 어안이 벙벙한 슈레이는 정신을 차렸지만, 잡혀도 검을 쥐고 있는 손이 잡혀 버렸다. 강한 통증이 느껴지자 그나마 쥐고 있던 검도 떨어트리고 말았다. 이대로 팔이 뜯겨나가도 이상하지 않는 상황이었다. 

“어?”

의문이 가득 담긴 목소리와 함께 눈앞에 나비가 나타났다. 

어느새 괴물의 손에 의해 슈레이와 나비는 손을 마주 잡고 있었다. 뭘 어떻게 놀라야 하는 것인지 모를 슈레이와 나비는 서로를 잠시 바라만 보았다. 

“치……구…….”

동굴에서 들리는 것과 같은 울림이었다. 고개를 들어 보니, 괴물이 무표정한 얼굴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고 있었다. 

서로 마주 잡은 손이 거북해 둘 모두 떨어지려고 힘을 썼지만, 그것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듯 두 손이 떨어지지 않게 괴물이 잡고 있었다.

장정 두 명이 이를 물고 힘을 주어도 떨어지지 않자 슈레이는 과감히 포기 했다. 애초부터 인간이 괴물과 힘겨루기는 무의미 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자 괴물은 놀랍게도 나비와 슈레이의 손목을 놓았다. 막혀 있던 피가 흐르기 시작해 찌릿한 통증이 느껴졌지만, 자유로워졌다는 생각에 나비는 바로 손을 폈다. 그러나 슈레이가 잡은 손을 놓지 않고 그대로 잡아끌어 자신의 곁으로 오게끔 만들었다. 

“거북합니다. 놓으십시오.”

“넌 뒤로 물러나 있어.”

“뭐 하시려는 겁니까?”

나비를 등 뒤로 보낸 슈레이는 떨어트린 검을 쥐었다. 슈레이의 그런 행동을 이해할 수 없는 나비는 그의 팔목을 잡아 힘을 주어 당겼다. 

“왜 자꾸 이 사람을 위협하는 겁니까!”

“사람이 아니다. 저건 괴물이다. 본래는 에덴에 있어야 할 놈인데 대체 어떻게 빠져 나온 것이지?”

“괴물?”

나비는 거인을 바라보았다. 앞에는 그늘이 질 정도로 커다랗지만, 감사의 말에 얼굴을 붉힐 정도로 겸손한 평범한 사람이었다. 덥수룩한 머리를 자르지 않아 얼굴은 잘 보이지 않지만, 옷도 제대로 입고 있고 이렇다 할 꺼림칙한 느낌조차 들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갑옷을 입진 않았지만, 가슴에 달려 있는 장신구는 용병을 뜻하는 문양이었다. 소속이 없는 용병이 주로 사용하는 것으로 트란슈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다. 

“잘 보십시오. 용병입니다. 무소속 용병은 타국인도 많습니다. 저 분은 로던프 사람이 아니겠지요. 살의도 없는 사람에게 다짜고짜 검을 들이대고 인종이 다르다 하여 괴물로 몰아세우는 짓은 매우 위험한 행동입니다.”

“…….”

확실히 공격할 의사도 없어 보였다. 괴물의 특징과 닮았다고는 하나, 슈레이의 머릿속에 있는 에덴의 괴물들은 옷 하나 걸치지 않고 덥수룩한 머리카락에 떼를 지어 공격하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눈앞에 있는 것은 나비의 말대로 용병임을 뜻하는 것을 달고 있을뿐더러 무엇보다 말을 하지 않았던가. 

괴물이 짐승의 울음소리 외에 사람의 언어를 할 수 있다는 소리는 들은 적도 없다. 슈레이는 검을 내리고 허리춤에 넣었다. 모든 의심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소동이 일어나는 것을 원하진 않았다. 

“왜 어울리지도 않는 짓을 해서 사람을 곤란하게 하시는 겁니까.”

나비는 슈레이가 검을 넣었다는 안도감에 투덜거리듯 말했다. 자신의 안위 따윈 생각조차 안할 것 같은 사람이 무슨 바람이 불어 저리 예민하게 구는 것인지 궁금했다. 그러나 딱히 이유를 듣고 싶을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에 흘러가듯 내뱉고 말을 가지러 움직였다. 

하지만 몇 발자국 떼기도 전에 슈레이가 그 답을 했다. 

“싫으니까.”

“네?”

“난 내 것에 남이 손을 대는 걸 싫어한다.”

“소름끼치게 뭐라는 겁니까?”

“난 내 것은 반드시 지켜. 너 같은 것도 일단은 내 사람이니까. 영광인줄 알아.”

나비는 진심으로 살갗에 닭살이 올라올 만큼 소름을 느꼈다. 그러나 할 말은 다 했다는 듯 슈레이는 콧방귀를 뀌며 직접 말을 가지고 와 올라탔다. 이미 한 마리는 놀라 도망을 가 버렸으니 나비가 탈 것은 없었다. 

올라오는 소름에 얼어 있던 나비의 눈앞에 낯선 손이 뻗어왔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보니, 슈레이가 말 위에 올라타 손을 뻗고 있었다. 등줄기에서 개미가 타고 내려오는 기분이었다. 

“뭐해? 넌 걸어올 것이냐?”

“비위가 좀 약해서……. 저는 말 한 마리를 사겠습니다.”

“장까지도 걸어서도 못 간다. 그럴 시간도 없어. 일단 타.”

“싫습니다.”

“…….”

말대꾸를 한다며 시끄럽게 굴지 알았다. 그랬다면 소름은 거기서 끝났을지도 모를 것이었다. 그러나 슈레이는 작게 웃으며 나비의 머리통을 힘껏 비볐다. 

“뭐, 조금은 도움 됐으니까.”

그리고 손을 잡아 그대로 잡아 당겨 자신의 앞에 앉게 했다.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오는 나비였다. 

“꽉 잡아라. 여기서 최대한 벗어난다.”

“무슨……!”

슈레이가 호되게 말을 걷어차자 놀란 말이 급히 달렸다. 따가운 바람이 나비의 안면에 부딪힐 정도로 거칠게 말을 다루던 슈레이가 어느 정도 달려오자, 속도를 줄이고 뒤를 바라보았다. 

“괴물은 쫓아오진 않는 군.”

“이 짓의 이유가 고작 그 괴물 타령입니까?”

“죽이지 않는 건 네 말대로 적의가 없어서일 뿐이니까. 말해두는 데, 그건 절대 인간이 아니야.”

“그럼 따라오지 않으니, 저는 이제 내려주십시오.”

“참아. 항구까지 곧바로 갈 거다.”

놀리듯 말의 속도를 올리는 슈레이는 내려달라는 나비의 말을 무시했다. 무슨 변덕을 부리기에 이런 짓을 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나비는 불만은 가득했지만, 달리는 말에 뛰어내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항구까지 도착할 때까지 등 뒤에 슈레이를 놓고 함께 말을 타 버렸다. 

나비는 말을 세우자마자, 재빨리 위에서 내려왔다. 

슈레이도 그런 나비는 막지 않았다. 트란슈까지 향하는 배가 마침 때 맞춰 정박해 있었다. 슈레이는 표를 구매해 한 장은 나비에게 건넸다. 아무소리 하지 않고 표를 받은 나비는 슈레이의 등을 따라 배 위에 올라탔다. 

“대체 갑자기 왜 그러시는 겁니까?”

“내가 뭐?”

배가 출항할 동안 내내 침묵하던 나비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러나 무엇 하나 걸리는 게 없다는 듯 그는 천연덕스러웠다. 

“말해두지만, 당신은 제 주인 그 이상도 아닙니다.”

“뭐?”

“전 이미 마음을 준 이가 있습니다.”

“잠깐. 너 지금 무슨 개소리야.”

“저를 마음에 두셨다면 단념하십시오.”

“……하. 하!!!!”

살면서 이처럼 어이가 없어 본 적이 또 있었던가. 

슈레이는 지금 상황이 손에 꼽힐 정도로 황당했다. 그런 슈레이와는 달리, 나비의 표정은 진지하기 그지없다. 

이대로 넘어가지는 못할 것 같은 슈레이는 손가락을 들어 나비의 이마 정중앙을 콕 찍었다.

“넌 종자. 난 주인. 알아들었어?”

두어 번 더 찔러주려고 했지만, 나비는 불쾌한 얼굴을 잠깐 스치고 슈레이의 손을 피해 뒤로 물러났다. 

“네. 안심했습니다.”

노골적으로 안도감을 표현하자 슈레이는 어쩐지 지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다 문득 놀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모르는 것 같은데?”

“알아들었습니다. 종자와 주인. 상하관계가 뚜렷하…….”

슈레이는 나비의 턱을 잡아 돌렸다. 확실히 얼굴 하나는 봐 줄만 했다. 전체적으로 선이 부드러워 예쁘장하지만, 사내다운 티도 내고 있어 그 분위기가 묘했다. 가나나 백자 정도는 아니지만, 한 번 바라보면 시선을 돌리는 것이 어려울 정도였다. 

“넌 내가 소유하고 있어.”

“…….”

붉은 입술이 조금 열려 있었다. 하얗게 드러난 치열이 가지런해 보기 좋았다. 작은 입에 무엇을 바른 것인지 꽃잎을 올려놓은 것 마냥 애달프기까지 하다. 

“이제 그 아둔한 머리가 돌아가려나?”

미소 짓던 슈레이가 턱을 잡은 나비에게 다가갔다. 금방이라도 입술이 닿을 것 같은 거리에서 멈춰 바라보자, 잔뜩 긴장해 굳어 있는 나비가 보였다. 아름다운 사람이다. 반항하는 모습도 제법 귀엽지 아니하던가. 바락바락 손아래에서 대들 때면 얄미워서 쥐어박고 싶어지면서도 어디 한 곳 감히 때릴 곳이 없었다. 

어쩐지 이대로 계속 했다간 진심으로 손에 쥐고 싶어질 것 같아 입술이 닿기 직전에 떨어져 비웃듯 말하고 검지로 밀어냈다.

“그러니 놀지 말고 허기질 주인님이 드실 음식이라도 가져와라. 종자.”

놀림 받았다는 생각에 나비는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화를 내며 다른 곳으로 가 버렸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