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화 (25/35)

“놈들은?”

“배를 탔습니다. 다른 움직임이 없는 것으로 보아, 거짓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슈레이가 먼저 손을 내밀 것이라 생각해보지 않았던 란은 지금 상황이 혼란스러웠다. 이후 돌아간 그들이 다른 움직임은 없었지만, 꺼림칙한 기분은 떠나질 않았다. 입안에 돌가루라도 씹히는 기분이었다. 

라마를 알고 있다는 것도 그랬다. 

에덴에서 마주했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이 정도까지 이야기가 오갔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렇게나 곁에 두었음에도 라마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는 것이 고통스러울 지경이었다.

“라마는?”

“……죄송합니다.”

차라리 시체를 찾지 못한 것이 나았다. 적어도 살아 있다고 생각할 수 있으니까. 란은 더는 묻지 않았다. 더는 일을 미룰 여유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놈에게 클라운 닉스를 붙여 놓고 수상한 행동을 보이는 즉시 같이 있던 자를 죽여라.”

“알겠습니다.”

란은 일어났다. 자리를 뜨기 위함이었는데, 밖으로 나가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렸다. 들어온 이는 익히 얼굴을 아는 자였다. 차고 있어야 할 대검을 들고 좁은 카인관을 열심히 훑어보았다. 

결국 소득이 없었는지 성큼성큼 문호의 곁으로 다가왔다. 경박스러운 행동은 여전했지만 오늘따라 유난을 떨어 문호도 궁금하던 차였다.

“혹시, 은아 여기 안 왔습니까?”

“못 봤는데……. 너랑 검을 연습하러 간 것이 아니었어?”

“그럴 예정인데 아까부터 안보이네요. 덩치도 큰 게 어디에 숨은 거야…….”

**

“곧 이곳으로 오겠군.”

보이지 않는 곳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트란슈의 바람은 너무도 시리고 비릿해서 쇠사슬에서나 나오는 냄새가 맡아진다. 끊을 수조차 없는 사슬이 온 몸을 옥죄는 것 같았다. 

문은 언제부턴가 나의 모든 것을 가져갔다. 언제부터 어떤 방식이었는지. 그것은 대충 알겠다. 하지만 아직도 의문이 가는 것이 있다. 

그것은 ‘왜.’ ‘어째서.’ 라는 것이다.

같은 질문을 문에게도 던진 적이 있다. 문의 대답은 내가 왕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겨우 그런 단순한 이유 때문에 과거의 그날. 달은 떠오르지 못했던 것일까.

문은 과거의 나를 알고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가 기억할 수 없었어야 할 아득한 과거를 알고 있다. 

노파는 당시, 보던에서 버려진 어린 들개를 주웠다. 노파가 어떠한 변덕으로 버려진 들개를 주웠는지는 모른다. 버려진 들개는 같은 무리에서 태어나거나 무리의 대장에게 구성원으로 인정받지 않는 이상, 배척당해 죽임을 당한다. 

나는 체구가 비슷한 들개가 죽어 있는 것을 보고, 그 옷을 뒤집어썼기에 후각에 민감한 놈들에게 사냥당하지 않을 수 있던 것이다. 처음부터 내가 보던의 들개 무리가 아니었다는 걸 아는 놈들은 없었다. 하지만 그것을 문이 알아버렸다. 

아니,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다면, 어째서 나를 사냥하지 않았던 것일까.

문에게 내가 왕이 될 수 있던 것은 놈에게 내가 목줄을 채웠기 때문이다. 들개는 배가 곯지 않아도 사냥을 하는 특성이 있다. 또한 사냥을 할 때도, 당할 때도 무리는 짓더라도 우두머리나 배우자가 아니면 서로를 지키지도 않는다. 

목줄을 채우지 못하면, 사냥당하는 것이다. 물론 목줄을 채웠다 하더라도 조금이라도 빈틈이 보인다면 문은 나를 죽였어야 한다. 

그러나 목줄을 채우지 않던 그 때도 문은 나를 죽이지 않았다. 

머리를 감싸 쥐었다. 수면 깊이 가라앉아 있는 흙먼지가 쌓인 기억들이 떠오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극이 필요 했다. 

기억을 떠올릴 아주 작은 자극이. 

기의 흐름이 억지로 잠재워져 있다는 것을 알아버렸지만, 문은 정작 자신의 잠든 기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내가 가진 검은 것을 탐내고 가지고 싶어 하던 모습과는 모순된 행동이었다. 반면, 나의 기가 제압당해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눈치 챈 후로는 드물게도 감정을 드러냈다. 

내가 말한 감정은 단순한 희로애락이 아니다. 

문이 가지고 있던 가장 근본적인 것.

등을 두들기며 달래고 있던 내 어깨를 잡아 거칠게 밀어냈다. 나를 바라보고 있는 붉은 눈에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러나 슬픔보다 분노가 느껴지는 것이었다. 아니, 단순한 분노뿐만 아니라 또렷한 증오와 집념이었다. 

“나의 왕. 당신조차 내게서 왕을 빼앗을 순 없어.”

어렴풋이 살기가 지나쳤다. 온전히 나를 향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놀라웠다. 이정도 살기라면 기를 쓰지 않아도 상대를 제압하고 죽일 수도 있다. 

“미치는 건 쉽지만, 절제가 잘 안 돼. 경고하나 하지. 내가 만든 왕좌에서 벗어나지 마. 당신의 팔 다리를 뜯어서라도 앉게 만들 테니까.”

“사체가 들끓는 그런 곳에 말이냐?”

“걱정 마. 팔 다리가 없어도 내가 뭐든지 대신 해줄게.”

문은 나를 다시 한 번 끌어안았다. 애달픔이 느껴질 정도로 가련한 품속이다. 시린 쇠 냄새가 끊이지 않던 곳에서 유일한 단내가 나는 곳에서 비린내에 젖은 듯한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당신은 그저 살아 있기만 하면 돼…….”

아이는 나를 용서하지 못했다. 

나는 용서 받지 못했다.

문이 알고 있는 것이 어느 정도인지 솔직히 가늠되진 않는다. 내가 염두하고 있는 것은 단지 문이 알고 있기 때문은 아니다. 아무것도 설명해 주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면 그건 내가 죽기 전과 상황은 달라진 것이 없기 때문이다. 

강제로 뒤틀고 있는 상황이지만, 바뀌지 않는 것은 반드시 있다. 과거 보던에서 용병의 손에 강제로 끌려간 문은 얼마가지 않아 용병왕이 된다. 당시 그가 가진 전력만으로도 왕사를 위협할 정도였으니 차후 전쟁에서 드론이 된 나는 그런 용병왕의 협조가 필요 했다. 

때문에 그와 접촉했고 제어할 수 있는 목줄을 채웠다. 

그때와 지금은 다를 것이라 생각했었다. 보던에서 용병왕에게 끌려갔지만, 문은 과거에서처럼 용병들과 최소한의 타협도 없었기에 폐기처분이 내려졌다. 그것을 인재난에 허덕이던 문호가 발견해 란의 눈앞에 데려왔다. 

이른 목줄을 채운 탓에 문의 세계의 절대적인 존재가 되어버린 나는 원하지 않아도 그의 왕이 되어야만 했다. 

문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스스로가 들개임을 부정하고 늑대의 서약을 맺은 것이다. 이것은 왕이 된 자는 결코 거부할 수 없는 종속의 계약이었다. 하는 방법은 제멋대로지만, 착실하게도 내 손으로 버린 목줄을 쥐게 했다. 

과거 문이 가진 전력은 다시는 사용할 수 없는 것이었다. 애초부터 그것을 기대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용병왕이 되지 못한 것에 아쉬운 것도 없었다. 

그러나 문은 트란슈에 와 그 짧은 시간에 용병왕의 자리에 올라갔다. 이미 세 명분의 용병왕의 목을 쳤다. 사실상 트란슈 용병중 영향력 있는 놈이 문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만큼 문을 노리는 놈들이 생겨나고 있다는 뜻이다. 놈만 죽이면 세 명분의 용병왕이 가진 전력을 손에 쥘 수 있을 테니까.

이렇듯 변하지 않는 것도 있다. 아니, 더 뒤틀려 위험하게 변질되어 버렸다. 

과거에서도 지금에 와서도 나를 용서하지 않는 아이에게 내가 할 수 있는 건 모든 것이 변했다고 말하는 거짓말뿐이었다. 

말에는 힘이 있어 간절히 원하면 언령이 되어 이뤄진다. 내게도 그런 언령은 있었다.

울부짖지 못하는 아이를 달랬다. 

“죽지 않으마.”

문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한동안은 아무런 말도 없이 나를 껴안고만 있었다. 

**

평소대로 돌아온 문은 이리저리 정원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기를 사용하지 못하더라도 내가 있는 곳은 육감으로 알 수 있기 때문에 본인이 큰 불편함을 느끼진 않았다. 애초부터 기를 의지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월한 신체조건도 그것이 포함된다. 단, 햇빛에 약한 탓에 조금만 바깥에 있어도 피부와 시력이 손상되기 때문에 한여름에도 긴팔을 입고 눈을 가려야만 했다. 

다행이 트란슈는 해가 짧고 볕이 약해 기후가 찬 나라이기 때문에 로던프에 있었을 때처럼 두께가 있는 옷으로 매일 가리고 있을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눈이었다. 과거처럼 빠른 속도로 시력을 잃지 않으려면 조금이라도 눈을 보호해야만 했다. 이런 볕도 직접 닿으면 필시 좋지는 않을 터. 

평소에는 눈을 가리고 있으라는 명은 잊어버린 것인지, 말을 잘 듣지 않았다. 앞이 보이지 않아도 생활을 하는 데는 어떠한 지장은 없다. 그러니 딱히 불편해서 눈을 가리지 않는 것은 아닐 테다. 

문의 눈을 가릴 천을 들고 바깥으로 나갔다. 

눈을 굴려 문을 찾아보았다. 멀리 있지 않는 곳에 문이 쭈그려 앉아 뭔가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그리고 또 습관처럼 눈을 비비고 있어 한숨을 내뱉었다. 무엇을 저리 골똘히 생각하는 모습으로 보고 있는 것인가 하고 바라보았더니, 흰 장미가 가득하게 핀 화단이었다. 

문이 꽃을 좋아 했던가. 

저리도 눈을 떼지 못하고 있으니, 부르는 것도 망설이게 되었다. 

그런 내게 집사가 다가왔다. 그들이 돌아왔다는 소리다. 

“문.”

문을 불렀다. 내가 부르는 소리에 흰 장미꽃을 뚫어져라 보고 있던 문이 고개를 돌려 나를 찾았다. 곧 일어나 내게 다가오자 나는 한 발 먼저 걸음을 뗐다.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멈춰 문을 바라보았다. 

나와 눈이 마주친 문은 활짝 웃고 있었다. 눈을 비비고 있던 것이 생각나 들고 있던 천을 건넸다. 

“써라.”

“…….”

잠시 천을 바라보고만 있던 문은 그 짧은 침묵을 깨고 손을 뻗어 천을 쥐고 자신의 눈을 가렸다. 난 그런 문을 바라보다 다시 등을 돌려 앞으로 걸어갔다. 

**

나비와 슈레이가 들어왔다. 동시에 부가적으로 달고 들어온 것도 있었지만 막진 않았다. 단지, 조금 입막음을 위해 검지를 들어 입을 가리고 내렸을 뿐이다. 

“수고했다.”

“주인을 부려먹고 한다는 소리가 그게 다냐? 서러워서 못살겠네.”

의자를 끌어 슈레이가 앉았다. 그 옆에 자연스럽게 서 있는 나비의 모습만 보아도 둘이 보낸 것에 적어도 실이 되는 건 없었다. 

“3왕자가 암부의 수장인 것은 어떻게 안거지?” 

“그걸 내게 묻겠다고?”

“아, 그래. 질문이 조금 잘못됐어. 라마가 네 진짜 이름인가?”

“…….”

“빈틈이 없어 보이는 놈의 역린이 눈앞에 있었군. 기뻐해야 될 일이겠지만, 딱히 흥이 나진 않아. 던져준다는 목도 그 뜻이었나?”

“소감은?”

“나쁘진 않아. 하지만 좋지도 않았어. 시기상으로 이르기 때문에 당분간은 지켜만 볼 생각이다. 조만간 제대로 된 교섭이 오갈거야. 직접 오겠다는 데?”

“잘 됐군.”

“만나 볼 텐가?”

“아니.”

“그래? 놈은 그러길 원하고 있을 텐데…….”

마음에도 없는 말을 내뱉고 있다는 것은 나를 떠보고 있다는 것이다. 나비도 내게 물어볼 것이 많다는 모습이었다. 그 둘의 모습이 닮아있어 지켜보다 입을 열었다.

“그런데 저건 왜 달고 온 거지?”

“뭐?”

슈레이와 나비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다 천천히 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놀란 슈레이가 벌떡 일어났다. 

“대체 저것이 왜?! 미행당한 건가?!”

그들이 바라본 것은 거인이라 불릴 정도로 커다란 것이었다. 기척을 숨기고 있던 놈이라면 몰라도 저 정도의 덩치에게 뒤를 밟혔다는 것을 몰랐다는 것이 놀라웠다. 그래서 필요에 의해 데려온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야생동물 수준으로 뒤쫓아 이곳까지 온 모양이었다.

“진정해라.”

검을 빼려고 하는 슈레이에게 지시했다. 놈은 내 말 조차 이해를 못한다는 표정으로 내게 시선을 돌렸다. 

“저건 에덴의 괴물...!!!”

슈레이가 목청껏 소리치는 걸 멈췄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가며 괴물과 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무엇이 생각났는지 검을 집어넣었다. 

“아……. 그래. 그때 그 괴물이었군.”

“…….”

“너는 이것도 염두에 두었나?”

“수고를 덜었군. 더는 할 얘기는 없을 테니, 돌아가라.”

“…….”

기분이 상한 듯했다. 슈레이는 그대로 밖으로 나가버렸다. 

딱히 계산적으로 한 것은 아니었지만, 은아가 이 둘을 보게 되면 쫓을 것이라는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괴물은 후각과 청력이 예민하다. 들개수준으로 발달되었으니 미약하게라도 내 냄새를 맡았다면 본능적으로 따라왔을 것이었다. 

하지만 은아가 찾아오지 않아도 조만간 데리러 갈 예정이었다. 

“가나.”

조용하던 나비가 불렀다. 

“네가 이용하고 있는 건 기분 나쁘지 않아. 그가 화가 내는 건 너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

“우리가 모를 것이라 생각하지 마라. 척 하는 것도 신물 나지만, 그럼에도 기다리는 것은 네게 직접 듣고 싶어서다.”

“…….”

“가나. 문호인 그와 무슨 관계인지는 묻지 않으마. 난 널 신뢰하니까.”

잠자코 듣고만 있다가 슈레이가 나간 곳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비에게 눈을 돌려다. 

“가서 주인이나 모셔라. 저대로 나가면 골치 아플 테니.”

“……하. 성가셔.”

나비도 동의 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대화를 할 의지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말을 길게 잇지 않았다. 그 말대로 내가 직접 입을 열기까지 기다리려는 것이지만, 아마도 나는 평생 말을 해줄 일은 없을 것이다. 

나비가 나갔다. 문 앞에 있는 건 우두커니 서 있는 은아 뿐이었다. 

멍하니 서서 무얼 하고 있나 싶어 은아를 불렀다. 

“이리 와라. 여기까지 잘 찾아 왔구나.”

뿌리가 깊은 나무처럼 서 있던 은아가 천천히 움직였다.

눈앞으로 다가온 은아는 잠시 나와 문을 뚫어져라 바라보더니,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커다란 손바닥에 담겨진 것은 붉은 열매였다. 은아는 그것을 내게 뻗었다. 난 붉게 익은 열매를 바라보다 말없이 손을 뻗어 한 알을 집어 먹었다. 

“맛있구나.”

은아의 눈이 망울져 일렁였다. 

문은 오랜만에 만나는 은아를 알고 있으면서도 낯가림을 하는 것인지 어색해 하는 것 같았다. 내 옆에서 떨어지지 않고 서 있는 문이 좀 더 붙었다. 귀찮게 들러붙어 밀어내려는 순간, 은아가 단숨에 손을 뻗어 나와 문을 끌어안으려고 했다. 

반사적으로 문의 머리를 짓밟고 자리에서 벗어나자, 곁에서 사라진 나를 문이 찾기도 전에 은아가 문을 끌어안았다. 

“으억!”

과연, 잡혔다간 내 갈비뼈가 으스러졌을지도 모를 힘이었다. 

“아우야 이것 좀 놔!! 숨!! 나 숨!”

은아의 얼굴을 밀어내며 품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끅끅 거리며 눈물을 흘리는 은아는 놓아줄 생각은커녕, 더욱 힘을 주어 문을 끌어안았다. 발버둥 치며 고통스러워하는 문이 손을 나를 향했지만, 나 역시 오랜만에 본 은아가 건강한 모습이라 기분이 좋았다.

“당분간은 그렇게 있어줘라.”

끈질기게 안고 있는 은아에게 벗어나는 걸 포기한 문은 아예 벽에 등을 기대듯 앉아 있었다. 표정엔 불만이 가득했지만, 은아는 놓아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밀항을 할 때 짐칸에 몸을 숨길 수 있었어도 저런 몸으로 이곳까지 들키지 않고 왔다는 건 그동안 마스와 게을리 안하고 훈련을 한 모양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를 따라 은아도 문을 안고 있던 채로 일어났다. 매달려서 나오질 못하는 문이 더욱 불만족스러운 얼굴이 되어 있었다. 눈을 가리고 있어도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가는 알 수 있다. 

로던프 복식을 입고 돌아다니게 할 수 없으니, 은아에게 맞는 옷을 만들어야 했다. 그러려면 천이 필요하다. 아랫것들을 시켜도 될 일이지만, 바깥일을 봐야 하는 것도 있으니 직접 사러 가기로 했다.

은아가 따라오려고 움직였다.

“기다려.”

다시 떨어진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안절부절 못하는 표정으로 은아는 우두커니 서 있었다. 성정이 순하고 여린 은아는 쫓고 싶어도 말을 하면 잘 들었지만, 매달린 것은 달랐다. 기어코 은아의 품에서 벗어나 나를 따라오려 곁으로 다가오자 명했다.

“너도 은아 곁에 있어.”

“싫어.”

생각조차 해보지 않고 싫다고 말하는 아이의 머리통을 과감히 쥐어박았다. 문은 요즘 들어 훈육을 하지 않아 상당히 제멋대로 행동하고 있었다. 가차 없는 폭력에도 예전 같았다면 금방 회복했겠지만, 기를 잠재운 문에게 약간이지만 기를 넣어 쥐어박아 통증에 쉽게 벗어나질 못하게 했다. 

때문에 문은 맞은 부위를 막고 쭈그려 앉아 고통에 신음했다.  

그 모습에 은아는 더욱 안절부절 못하고 혹이라도 난 듯한 문의 머리통을 허둥지둥 바라보았다. 만지지도 못하니 어찌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듯 했다. 

“따라오지 마라. 거추장스러우니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마차를 준비하겠다는 집사를 물리고 마구간으로 향했다. 개중 아무 말이나 골라 고삐를 잡고 나와 등 위에 올라탔다.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니, 은아와 문에게 무엇이라도 먹게 하라고 명하고 그대로 저택 밖으로 나왔다. 

저택에서 얼마나 벗어났을까. 말을 멈추고 잠시 자리에 서 있었다. 상가에 도착하기 까지는 앞으로 더 달려야 했지만, 좀 전부터 진득하게 쫓고 있는 시선에 이유를 묻기 위해 소매 안쪽에 숨겨두었던 단검을 가차 없이 던졌다. 

아무도 없을 것 같던 나뭇잎이 가늘게 움직였고 그 사이로 짐승과 같은 황금색 눈동자가 번뜩였다. 놈은 내가 저택에 나온 순간부터 뒤를 쫓고 있었다. 저택에 있었다면 문과 은아가 모를리 없었기 때문에 기척을 숨기고 먼 곳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내가 놈의 정체를 알 수 있었던 것은 슈레이를 감시하기 위해 란이 붙여놓은 닉스의 신호 덕분이었다. 저택에 들어오는 순간 닉스는 나를 알아보았다. 놀라움이 스쳐가는 얼굴에 입막음을 하자, 닉스는 모습을 숨기는 동시에 눈동자를 바깥으로 돌렸다. 

또 다른 그림자가 있다는 것을 내게 알리는 것이었다. 닉스는 슈레이를 감시해야하기 때문에 사사로운 감정으로 움직여서는 안됐다. 자신을 뒤쫓은 것일지도 모를 은아를 막지 않았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어두운 곳에서 눈동자만 번뜩이던 짐승이 빠져나왔다. 회색빛 머리카락을 하고 있는 그는 아는 얼굴이었다.

문과의 대전에서 패배하고 죽은 것으로 되어 있었던 자다. 이름은 엔도. 작위는 기사. 드론이었던 나조차도 놈에 대해 아는 것이 적었다. 

지금은 2왕자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이반의 개라고 했던가.

놈이 갑자기 다리를 박차고 뛰어와 검을 휘둘렀다. 나 역시 그런 검을 막기 위해 단검을 들었고 말 등에서 튕겨져 나오듯 내려왔다. 내 앞으로 화살처럼 날아온 엔도는 장검을 내 목을 향해 휘둘렀다. 단검으로 막자, 이번엔 사선으로 치려는 것을 빠르게 고개를 뒤로 젖혀 피한 뒤 바닥을 짚어 조금 물러났다.  

 “왕……. 이랬던가?”

훈련이 잘된 놈이다. 천부적으로 재능을 타고난 것도 있지만, 검을 제대로 배웠기에 단순히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타격이 들어왔다. 막고 피했음에도 손목에 잔 떨림이 느껴졌다. 이 몸은 아직 힘만으론 상대를 제압할 수 없다. 

“이반의 개가 내게 무슨 볼일이지.”

“…….”

분위기가 변했다. 다시 한 번 바닥을 박차고 내게 검을 들었다. 눈앞까지 다가와 다시 한 번 검을 내리치자 그것을 막았음에도 힘에 의해 짓눌려 무릎이 굽혀졌다. 

검 끝에 불꽃이 튀었다. 목 부근까지 다가온 엔도를 단검만으로 막기에는 역시 역부족이었다. 결국 제어하고 있던 기를 단검에 흘려보냈다. 불길하다 여겨지는 검은 빛이 검을 타고 들어와 엔도의 기를 집어삼켰다. 엔도의 날이 순식간에 부식되어 바스라지자 낌새를 눈치 챈 놈이 날을 부러트리고 목을 치기 위해 단검을 휘두르는 내게서 벗어났다. 

“얼굴 좀 보러 온 거야. 자꾸 흰둥이가 방해해서 자세히 볼 수 없었거든.”

“네놈과 볼일은 없다. 눈앞에서 사라져라.”

“너무 그러지마. 난 단지, 왕의 얼굴이 보고 싶었을 뿐이니까.”

“꺼져.”

개소리를 해대는 통에 가만히 들어 줄 수 없었다. 내가 왕 노릇을 해야 할 상대는 문 뿐이다. 

“그렇게 말하면 당장 손에 쥐고 싶어지잖아.”

말로는 통하지 않는 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검을 들어 강렬하게 기를 뿜어내다. 위협의 의미가 아니었다. 부담을 감수하고도 제약당한 기를 억지로 끌어올리면 그만큼 폭발적인 힘을 낼 수 있게 된다. 

가볍게 눈앞에서 뛰어 올라 놈의 뒤로 향했다. 눈으로 쫓는 것을 실패한 놈이 갑자기 뒤에서 나타나는 내게 놀라 휘저었다. 그것을 곧 바로 피하고 드러난 허점을 향해 단검을 밀어 넣어다. 녹아내리듯 살점을 파고들자, 놀란 놈이 눈앞에서 뛰어올라 뒤로 물러났다. 놈의 복부는 검게 그을린 듯 달아올라 피를 흘리고 있었다. 흐르는 부분을 손으로 짚었지만, 손가락 사이로 피가 흘렀다. 

운이 좋은 놈이다. 내가 쥐고 있었던 것이 단검이 아닌, 시라소였다면 그대로 반 토막을 내 버렸을 것이다. 

“역시 대단해…….”

엔도는 통증이 느껴지지 않는 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닥치고 덤벼. 시간 낭비니까.”

이렇게 대량으로 기를 뿜고 상대할 시간이 길진 않았다. 이번엔 가차 없이 죽일 것이다. 날을 세워 든 나는 서서히 올라오는 통증도 무시하고 놈을 바라보았다. 엔도는 잠시 그런 나를 바라보며 움직임이 없더니, 허리춤에 검을 집어넣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

“그냥 지금 죽어.”

“무리하지 마. 슬슬 한계잖아?”

그 짧은 순간에도 눈치를 챈 모양이다. 제약된 기를 사용하게 되면 몸에 무리가 온다. 그러나 못 참을 것도 아니었다. 역시 리노 녀석이 호들갑을 떨었던 것이라고 생각하려는 순간, 몸 속 깊은 곳부터 뭔가가 올라왔다. 

“!”

곧 바로 입을 틀어막자, 강한 통증과 함께 뜨거운 것이 올라왔다. 검붉은 액체였다. 이윽고 온 몸이 부서지는 듯한 고통이 찾아왔고 입을 틀어막고 있다 순차적으로 밀려들어오는 통증에 나도 모르게 바닥을 짚고 말았다. 

눈앞으로 뭔가가 다가왔다. 손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아득한 통증이 나를 집어 삼키려는 득했다. 강하게 몸부림치는 기들에 의해 온 몸속의 장기들이 헤집어 진 듯하다. 

“이거, 흰둥이는 모르지?”

“…….”

놈이 눈앞으로 다가와 내 앞에 무릎을 굽혀 앉았다. 

그리고 내 턱을 들어 올려 눈을 마주쳤다. 그 손이 불쾌해 고개를 틀어 피한 뒤 비틀 거리며 일어났다. 

입가에 묻은 피를 손등으로 닦았다. 

“제약을 건 건 흰둥이 때문인가? 역시 그녀석이 방해잖아.”

“닥쳐.”

“흰둥이가 알면 어떻게 될까? 자신 때문에 주인이 죽어가는 걸 안다면 확, 미쳐버리지 않겠어?”

그 말이 비위가 상해 쥐고 있던 단검을 휘저었다. 그러나 다량의 기를 섣불리 사용한 덕에 체력이 바닥난 나를 놈이 거칠게 손목을 잡아 비틀었다. 나는 검을 놓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손가락에 힘을 주는 것이 전부였다. 

“당신이 그렇게 희생해도 어차피 문은 다른 사람의 것이 될 거야.”

“그 더러운 입에 문을 올리지 마.”

“…….”

갑자기 놈이 내 목을 붙잡고 바닥에 거칠게 내리 찍었다. 통증보다 등에 닿는 흙먼지가 불결해 견딜 수 없었다. 

놈의 강한 악력으로 내 목을 쥐어짜듯 잡았다. 나를 깔고 있던 놈은 습이 진 미소를 짓고 눈앞까지 고개를 내려왔다. 

“나의 왕이 되어줘. 그럼 난 당신에게 천하를 줄 수 있어.”

“필……요 없어.”

벗어나야만 했다. 이대론 위험하다. 처음부터 기를 사용하고 시간을 끌지 않고 죽였더라면 이 지경까진 오진 않았겠지만, 놈이 문을 상대로 한 도발에 넘어가고 고통을 우습게 본 내 실수였다. 

“왕이 되는 건 싫어?”

“너 같은 건 필요 없어.”

“그래?”

그는 잠시 무슨 생각을 하는 것 같더니, 내 목을 쥐고 있는 것을 그만 두지 않고 다른 손으로 턱을 들어올렸다. 닿는 곳 마다 역겨워서 기분 나빴다. 

“그럼 내 것이 돼. 지금부터 널 범할 거니까.”

다리 사이로 놈의 무릎이 들어왔다. 범한 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모를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에 강하게 놈을 밀어내려고 했다. 그러나 이미 한 차례 피를 쏟아낸 내게는 당장 여기서 놈에게 타격을 입혀 빠져나갈 정도의 힘은 남아 있지 않았다. 

“처음 맞지? 아니면 나 굉장히 화날 거야.”

거칠게 타인의 손이 허벅지 안을 잡았다. 그렇지 않아도 온 몸의 신경이 끊어 질 것 같은 통증을 호소하고 있던 탓에 작은 자극만으로도 버거웠다. 

“기대 이상이야. 아주 마음에 들어.”

듣고 싶지도 않는 음성이 계속해서 귀 속을 핥듯 들어왔다. 소름끼쳐서 도저히 견딜 수 없었지만, 놈은 내가 피할 수 없도록 목을 쥐어 잡고 힘을 주었다. 숨을 쉬는 것이 어려워지자 잡히지 않는 손으로 놈의 팔목을 붙잡았다. 

떼어내려고 힘을 주었지만 우스울 뿐이었다. 

허벅지를 강제로 벌려 안쪽 깊숙이 손가락을 뻗었다. 분명 한 번 다른 이의 손길이 닿은 적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혐오스러움이 느껴졌다. 

옷 위로 만져지고 있었지만, 혐오감에 몸서리치던 내가 비틀자, 이번엔 무릎으로 다리를 짓누르고 바지춤 안으로 손이 들어갔다.

“소리라도 내 보지 그래? 여긴 사람 발길이 거의 없으니 그렇게 부끄러워 할 필요도 없어.”

“윽!”

“더 해봐. 더 내 손에서 발버둥 쳐 보라고.”

아무래도 벗어나려 발악을 하는 행동이 더욱 녀석을 흥분하게 하는 모양이다. 놈은 정말로 이런 곳에서 나를 범할 생각을 하고 있는 듯 했다. 

여기서 더 마음을 어지럽혔다간 문이 알아차릴 것이다. 문의 성질과 비슷한 기를 가진 놈과 지금 마주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더욱이 놈의 입에서 문의 이름이 다시 한 번 나온다는 건 용납할 수 없다. 

난 잡힌 손목에 쥐고 있던 단검에 힘을 빼고 허공에 튕겨냈다. 그리고 단숨에 날을 잡아 쥐어짜듯 기를 뽑아내어 밀어 넣었다. 

무모하게 다시 한 번 기를 뽑아낸 탓에 코 밑으로 뭔가가 흘러내리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지금 나를 깔고 있는 쥐를 물러나게 하는 것에는 효과가 있었다. 

단검을 둘러싼 검은 기들이 뻗어 나와 엔도의 목을 겨냥했다. 이대로 조금만 힘을 주면 그대로 목을 뚫어버릴 것이다. 그것을 알고 있던 엔도는 천천히 내 목을 감싸던 손에 힘을 풀었다. 난 놈이 완전히 내게 떨어질 때까지 목을 향하던 검을 놓지 않았다.  

"역시 이런곳은 별로지?"

태연하게 내게서 떨어진 엔도는 목을 겨냥하고 있는 것이 두렵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그는 미소까지 여미며 말했다. 

“조만간 데리러 올게. 나의 왕. 흰둥이한테도 안부 전해줘.”

그대로 목을 향해 찔러 넣으려고 하자, 요령 좋게 피한 놈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억지로 끄집어 낸 기들이 수그러들었다. 서 있는 것도 힘들 정도로 무너져 내리는 통증에 주저앉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만약 문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폭주를 한 동시에 자아를 잃어버렸을 것이다. 난 내 손을 바라보았다. 날에 베여 피가 흐르고 있는 작은 손이었다. 

성인의 손이라고 볼 수 없는 이것이 비통할 정도였다. 주먹을 쥐자 아릿한 고통이 올라왔다. 자아를 잃어버린 문을 이딴 볼품없는 몸으로 제어할 수 있을까. 확신 할 수 없기 때문에 그전에 합방을 해야 한다. 그러나 완전하지 않는 그릇이 문의 기를 제대로 받지 못한다면 문은 더욱 혼란에 빠져버릴 것이다. 

부득이하게도 성인식까지 기다려야 하는 입장이었지만, 조급함이 조금 앞서는 듯 했다. 입술을 깨물어 진정시키고 바닥을 짚고 억지로 일어났다. 잔 떨림이 느껴지는 손을 천으로 감아 지혈한 뒤 도망가지 않고 서 있는 말 등에 올라탔다. 

가는 중에 리노의 집에 들러 의복을 갈아입고 몸을 씻은 뒤 상처위에 향이 강한 약초를 짓이겨 바른 뒤 천으로 감아 덮었다. 트란슈 의복은 소매가 긴 것이 특징이기 때문에 피 냄새를 감춘 내게 상처가 있다는 걸 눈치 채는 건 어려웠다. 

몸은 비명을 지르는 듯 했지만, 마지막으로 손자국이 선명한 목을 가리고 리노의 집에서 나왔다. 안에 시끄러운 녀석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간단하게 은아에게 입힐 옷을 만들 천과 검을 구입했다. 사용하기에는 단검이 편하긴 했지만, 치명상을 입히기엔 접근전으로 사용해야 할 단검은 지금의 내 몸엔 한계가 있다. 

무거운 장검은 오히려 방해가 되기 때문에, 내 몸에 맞는 가벼운 소검을 택했다. 

일을 끝낸 나는 말 위에 올라타 저택으로 향했다. 

들어서기 직전 말에서 내리기 전에 내 몸을 살폈다. 채 씻겨 내려가지 못한 피가 묻지 않았는지 꼼꼼히 살펴보다 없다는 걸 확인하고 그대로 안으로 들어갔다. 

말에서 내려온 나를 제일 먼저 마중 나온 집사에게 사들고 온 천을 던졌다.

“빠른 시내에 가져와라.”

“네.”

태연하게 안으로 걸어가려고 하자, 집사는 천을 든 모습으로 갑자기 내 앞을 가로 막았다. 

“?”

“이것을…….”

그는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내게 건넸다. 코 밑으로 또 다시 뭔가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받은 손수건으로 닦아 보니 그것은 피였다. 

고통은 잦아들 틈 없이 내 작은 몸 구석구석을 휘젓고 있었다. 현기증까지 몰려오고 있었기 때문에 이대로 들어갈 수 없었다. 리노가 어디 있느냐고 묻기도 전에 내가 왔다는 걸 안 문이 나타났다. 

고개를 돌려 코피가 흐르고 있다는 걸 보지 못하게 했지만, 가로 막고 있는 집사까지 밀치며 문은 내 앞으로 다가왔다. 

“…….”

말없이 내 손목을 잡아 비트는 통에 경련이 일어날 듯한 통증이 올라왔다. 문이 잡고 있는 손목은 엔도가 무자비하게 힘을 준 탓에 멍이 들어 있었다. 때문에 베였던 손바닥뿐만 아니라 손목까지 천을 감을 수 밖에 없었다.  

문의 눈이 그곳으로 돌아가려고 하자 난 다른 한 손으로 머리통을 내리쳤다.

“앗!”

“은아는?”

“뒤에. 그런데 그거 뭐야?”

“은아랑 함께 있으라고 했잖아.”

“아까까지 놀았어. 그런데 뭐냐고.”

“뭐가 말이지?”

“피잖아.”

쥐고 있는 손수건에 묻은 것을 말하는 듯 했다.

“아, 코피다.”

“코피? 그게 왜?”

“팠으니까.”

잡힌 손을 거칠게 쳐내고 소매 안쪽으로 손을 감췄다. 문은 전혀 내 말을 믿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멎지 않는 피 때문에 손수건으로 다시 코를 막았다. 이제는 눈앞이 울렁거리기까지 한다. 아무래도 들어가 쉬어야겠다는 생각에 걸음을 떼는 순간, 몸이 떠올랐다. 

밑을 바라보자 문이 나를 안아들고 있었다. 내려달라는 말 대신 속아주는 척 하는 문의 몸에 기댔다. 

언제부터 잠이 들었던 것일까. 눈을 뜬 건 꽤 깊은 밤이 되어서였다. 잠든 사이에 리노라도 왔다 간 것인지 통증의 강도는 줄었지만,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갈증을 참을 수 없어 억지로 몸에 힘을 주었다. 바닥을 짚고 겨우 일어나는 데 손바닥에 무언가 닿았다. 

조금 어지러워 잠시 눈앞이 흐릿했지만, 밑을 보니 붉은 열매가 주위에 가득했다. 여기까지 오느라 피곤했을 은아가 이만큼의 붉은 열매를 가져오게 만들만큼 걱정을 시킨 모양이다. 난처함이 뒤를 잇자 문이 떠올랐다. 

내 앞에선 모르는 척 하겠지만 가만히 있을 아이는 아니기 때문에 허튼짓하기 전에 잡아놔야 했다. 무엇보다 마음에 걸리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문을 노리는 자가 있다. 

그것이 누구인지 따로 알아보지 않아도 뻔했지만, 어떤 수를 쓸지 모르기 때문에 문이 약점을 잡히는 일이 없어야만 한다. 

또한 엔도는 조만간 나를 데리러 온다고 했다. 말 그대로 단순히 나를 납치하겠다는 예고일수도 있지만, 뒤에 문의 안부도 물어왔다. 

데리러 온다는 것이 내가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불안함을 참지 못하고 침대 아래에서 내려오려고 했다. 그때 갑자기 차가운 바람이 등을 쓸었다. 뒤를 돌아보자, 발코니와 연결된 창이 조금 열려있었다. 그리고 그곳으로 들어오는 인영. 엔도가 아닐까 경계한 것도 한 순간, 눈에 들어온 건 문이었다. 

“대체…….”

내가 놀란 것은 문이 들어와서가 아니다. 둥근 일륜이 모습을 드러내자 눈을 뜨기 전만해도 말끔한 모습이었던 녀석이 여기저기 피가 묻어 있었다. 또한 들고 있던 시라소에서도 채 마르지못한 뚝뚝 피가 떨어지고 있었다. 시라소의 검 끝을 끌며 다가오다 이내 놓았다. 검이 떨어지는 소리가 격렬하게 들릴 만큼 이곳은 고요했다. 

“그 꼴이 다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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