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발로 뛰어와 문에게 다가갔다. 더럽혀진 적이 없던 은발이 검붉은 색으로 물이 들 만큼 피에 절여 있었다. 상처가 있을까 싶어 여기저기 훑어보았지만, 다행이 뒤집어 쓴 피는 모두 타인의 것이었다.
문이 손을 뻗었다. 내 팔목을 잡더니 나를 끌어 당겼다.
코앞까지 다가온 문은 아무런 소리를 내지 않는 짐승처럼 킁킁거리기 시작했다. 어떤 냄새를 맡는 것인지 목덜미까지 닿아 코를 묻고는 감겨진 붕대가 사라져 적나라하게 드러난 목을 혀로 핥았다.
익숙지 않아 피하려 했지만, 손바닥으로 얼굴을 짚고 있던 탓에 물러날 수조차 없게 만들었다.
“문?”
문은 내 팔목을 끌어와 그곳에 코를 박았다. 상처가 난 곳은 모두 알고 있는 것이다. 손에 감겨있던 붕대가 풀렸다. 베어진 손바닥에 압박이 사라지자, 상처를 틈타 피를 흘리고 있었다.
문은 그곳에 입술을 대었다. 혀를 놀려 상처를 훑기까지 한다. 상처가 혀가 닿을 때 마다 알 수 없는 찌릿함에 움찔거리자 문은 눈을 올려 나를 바라보았다.
“속아 줄 수 있어. 얼마든지. 당신은 약속을 지켰으니까.”
“약속?”
“응. 약속. 서약. 맹세.”
“무슨 소릴 하는 거지?”
영문을 모를 소리를 하고 있었다. 나는 문과 약속을 한 기억이 없다. 지시를 내리거나 명령을 내린 적은 있어도 서약과 맹세를 한 적은 없다.
그 비슷한 것이라면 들개의 서약. 늑대가 되어 한 주인을 모시겠다는 것이었는데. 이것 역시 내가 한 것이 아니라 문이 제멋대로 한 서약이 아니었나.
과거에도 나는 문과의 약속을 지킨적 없다. 멋대로 죽지 말라는 그 약속조차 어기고 스스로 혀를 깨물어 자결했다.
내가 알아듣지 못하고 인상을 쓰자 문은 설명 대신 미소를 지으며 뭔가를 건넸다.
정원에서 뚫어져라 보고 있던 흰 장미꽃 한 송이였다. 내내 바라보고 있던 것 같더니 꺾어온 모양이다. 받으라는 듯 내밀자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잡았다. 가시 하나 없는 흰 장미꽃을 받자 더 없이 기쁘다는 듯 문은 웃었다.
재차 약속이 무어냐고 물어도 문은 대답하지 않았다. 웃는 낯만 계속 보여주더니 잠이 온다며 칭얼거렸다.
그리고 침대에 기어들어가려고 하기에 씻고 오라며 엉덩이를 걷어찼다.
놀란 망아지처럼 뛰어가 씻고 돌아온 문은 물기를 닦지도 안은 채 다가왔다. 말리고 오라고 할까 하다 그만두고 일어나 마른 천을 찾았다. 기다렸다는 듯 문은 그런 내 앞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하는 행동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어리광을 피우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한바탕 놀다가 와서 지치기라도 한 것인지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얼굴만 내밀고 있었다. 웃는 낯이 금방이라도 쓰러져 잠이 들것 같다.
문을 끌어와 일단 침대에 앉게 만들었다. 마른 수건으로 천천히 젖은 얼굴부터 닦아 주었다. 늘어트린 머리카락이 살짝 열려진 창문에서 들어오는 바람에 의해 조금씩 말라 휘날린다.
눈에 띄는 상처는 보이지 않았다. 역시 뒤집어쓰고 있던 피는 모두 타인의 것이었다. 어떤 놈들의 것이었는지는 곧 알 수 있었다.
문은 갑자기 내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손을 뻗었다. 그곳에는 용병왕의 팬던트가 있었다. 남은 세 개 중 하나였다. 하루아침에 빼앗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다른 주에 있는 용병왕의 팬던트를 어떻게 손에 쥘 수 있었는가에 의문이 뒤따랐다.
그 순간, 문의 손에서 두 개의 팬던트가 더 떨어졌다.
“너……. 대체!”
“삼천 구백.”
이것은 단순히 용병왕의 머리만 베어낸 것이 아니다. 피를 뒤집어쓰고 온 문의 모습이 떠오르자 소름이 끼쳤다. 기를 잠재운 문이 수 적으로 열세인 상태로 교전을 했다면 그 자리에서 죽을 수도 있었다.
만약 자신의 기를 억지로 깨웠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자아를 잃고 죽기직전까진 미치는 것을 멈출 수 없을 터.
문의 멱살을 잡아끌었다.
요령 좋게도 손을 잡은 남은 용병의 머리만 쳐서 전력을 상실한 놈들을 제압할 수 있었겠지만, 그 과정이 조금이라도 틀어졌다면 지금의 난 문의 시체를 잡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합이 팔천 이백.”
“누가 너보고 전력을 키우라고 했나?”
이를 드러내는 걸 참지 못하고 문의 멱살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눈을 떼면 무모한 짓을 하는 문에게 신경질이 났다.
"이따위 짓을 하라 했냐고!”
쉬이 분노를 억누르지 못하고 큰 소리를 내고 말았다. 문은 대답이 없었다. 나 역시 더 험한 소리가 나오기 전에 입을 다물었다. 죽을 수 있었다. 허무할 정도로 어이없게도 말이다. 그런 죽음을 수도 없이 봐 왔다.
파고드는 섬뜩함에 손이 떨릴 정도였다.
웃는 낯이던 문이 내가 잡은 팔목을 잡아끌어 당겼다. 그리고 예고 없이 입을 맞추자 잡은 멱살을 밀어냈지만 오직 힘만으로 나를 뭉개듯 올라탔다.
짓누르는 힘이 거세지자 결국 손을 들어 얼굴을 쳐냈지만, 꿈쩍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손이 잡혀 전혀 힘이 들어가질 못하고 있었다.
머리를 부여잡고 더욱 깊게 입을 맞춘 문은 멋대로 내 입안으로 들어와 혀를 끄집어내기 시작했다. 감겨오는 혀에 단맛이 느껴졌을 정도로 질척함이 가득했다.
문은 집요하게 입안을 훑고 있었다. 간절함이 느껴질 정도로 내게서 가져가려고 하고 있었다. 그럴 수 없다는 걸 모르겠다는 듯.
“난 뭐든지 해. 당신을 지키려면.”
입을 뗀 문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입가인 미소를 여미고 있었다. 늘 달래주거나 지켜주는 것에만 익숙했던 나를 안심시키려고 두들겨 주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까 당신도 내게 뭐든지 주란 말이야.”
“…….”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바라보고 있다가 웃는 낯으로 괴로워하는 문을 끌어안았다. 불안하고 초조해서 가만히 있어선 견디지 못했던 모양이다
죽음과 가장 가까운 곳에 둔 것도 나다.
보이지 않는 곳에 있던 상처를 발견하고 나서야 알 수 있었다. 벼랑 끝으로 몰아세운 것은 나였음을.
기억에도 없는 과거에서처럼, 문은 또 다시 소리 없이 사라질 것 같아 불안했다. 자살을 하고 눈을 감는 순간조차도 그의 죽음을 의식하지 못했던 것처럼 허무하게 말이다.
문은 내게 다 주라고 말했다.
예전처럼 내가 견뎠어야 할 모든 고통까지도 넘겨달라고 애원했다.
뭐든지 주고자 했던 나였지만, 그것만은 할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곁에 있고 싶다. 거짓말을 해야 할까. 뭐든지 주겠다며 달고 맛이 좋은 과자로 우는 아이를 달래보아야 했을까.
“네겐 아무것도 주지 않아.”
문의 몸이 경직되었다. 내 어깨를 잡아 내린 문은 눈을 마주쳤다. 일그러지는 아이의 표정이 강제로라도 빼앗으려는 눈이었다.
“널 지킬 테니까.”
“……하…….”
잠시 멍하게 나를 바라보던 문이 결국 무너지듯 내 몸을 덮었다. 난 그런 아이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문은 목덜미 부근에서 칭얼거리듯 말했다.
“치사해…….”
다음날.
문은 전과 다름없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안심이 되는 반면에 놀라울 정도로 많은 부분은 양보하고 있는 아이가 안쓰러웠다.
은아와 함께 정원에 놀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는데 곁으로 리노가 다가왔다. 리노는 습관처럼 두 손을 소매 안쪽으로 감추고 나를 내려다보았다.
얼굴에 불만이 가득한 것을 보아하니, 어제 일을 되짚을 생각인 듯 했다. 듣기도 전에 질려버려서 한숨이 나왔다.
“하아…….”
“넌 한숨 쉴 자격도 없어.”
단단히 화가 났다는 것을 말하고 있었다. 얼굴은 확인해 보지 않아도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정도는 예상이 갔다. 리노를 바라보지 않고 문과 은아가 있는 쪽만을 지켜보았다.
은아는 두 손에 무언가를 담고 있었는지 문에게 보여주었다. 커다란 손이 열리자 작은 새가 눈에 들어왔다. 문이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며 묻자 은아는 손을 한 나무 위를 가리켰다. 저곳에 떨어졌다는 뜻일 것이다.
고양이처럼 은아가 가리킨 나무 위를 올라갔다. 하지만 곧 나무 위에서 떨어져 버렸다. 원인은 새 둥지를 지키고 있던 어미 새의 공격이었다. 바닥에 떨어진 문에게 맹렬한 공격을 퍼붓는 어미 새는 새끼를 지키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영문을 모르면서도 정수리를 지속적으로 쪼아대는 어미 새를 문은 공격하지 않았다. 대신 은아에게 아기 새를 받아 품에 안은 뒤 다시 그 나무 위에 올라갔다. 어미 새의 공격이 더욱 거세졌다.
둥지 안에 무사히 안착을 해 준 모양인지, 문은 나무에서 내려와 은아와 함께 후다닥 도망갔다. 집요하게 뒤를 쫓으며 쪼아대던 어미 새가 새끼들의 울음소리를 들었는지, 방향을 틀어 둥지 쪽으로 돌아갔다.
“내가 말했지. 죽을 수도 있다고.”
문과 은아에게 눈을 떼지 못하던 나에게 리노가 말했다. 그 목소리에 눈을 돌려 리노를 바라보았다.
“지금 네 상태를 전혀 이해를 못하는 것 같으니까 다시 설명해주지. 난 네게 두 개의 제약을 걸어 놨어. 기를 숨기는 것과 기가 빠져나가지 못하게 가둬 둔 것. 기는 생명과 연결되는 실과 같아서 어느 한 곳이라도 엉키게 되면 육체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돼. 한 번 엉키기 시작한 실들은 다시는 풀 수 없어. 네겐 앞으로 평생 자유롭게 기를 사용할 수 있는 날은 오지 않겠지.”
리노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내 얼굴을 바라보며 반응을 지켜보는 것 같았지만, 나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 고요했다. 고인 물처럼 흐름을 전혀 느낄 수 없는 것과 같은 상태다.
차가운 바람이 한 차례 불어왔다. 어느새 은아와 놀고 있던 문이 이쪽을 바라보며 웃으며 크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것을 지켜보던 은아도 작게 손을 들어 문을 따라 흔들었다.
“네 상태를 비유하자면 바다를 가로막은 댐이야. 육체가 견딜 수 있을 정도로 강했다면 어떻게 해서든 버텼겠지만, 이번에 네가 사용한 기로 작은 균열이 생겼어. 다시 한 번 한계 이상의 기를 사용하게 되면 가차 없이 댐은 부서질 거야. 산산조각 나는 거지. 그러니까 다시는 기를 사용하지 마. 절대 사용하지 마.”
“생각해보지.”
“생각 할 것 없어. 그냥 쓰지 마! 어제 넌 치료 중에도 경련을 하고 코피를 쏟았어. 이미 네 몸은 갇힌 기를 견디는 것만으로도 한계라고!”
“코는 다시는 안파도록 노력해보지.”
“진심으로 들어!”
“진심이다. 염려에 감사하고 있어.”
조금 언성을 높이던 리노가 입을 다물었다.
잔걱정이 많아 시끄럽긴 하지만 하고 있는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그날 억지로 끄집어 낸 기들로 인해 몸 구석구석까지 엉망이 되어 버렸다.
회복이 가능할지도 의문이 들 정도였으니까.
아슬아슬하게 한계를 넘지 않아 겨우 버틸 수 있었지만, 앞으로 기를 사용하는 것에 까다로운 벽이 세워져 버렸다.
그러나 한계만 넘지 않는다면, 단 몇 초라도 상대를 제압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앞으로 그 몇 초간이 내게 결정적일 것이다.
내겐 그 정도라면 충분하다.
**
슈레이로부터 서신이 도착했다.
집사가 건네주는 서신을 펼쳐 읽어 보았다. 내용은 쿠웨드가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쿠웨드의 주변 약소국을 상대로 침략하고 토벌 후 세금을 올려 받고 있다는 것. 무기와 식량을 더 들이기 위한 움직임이었다. 이런 움직임으로 보아, 쿠웨드의 병력이 그만큼 늘어났다는 것을 뜻한다.
등 뒤에서 문의 시선이 느껴졌다. 호기심인 것인지 서신의 내용을 읽고 있는 듯 했다. 글도 읽을 줄 안다는 것에 놀라움을 느끼기 전, 문에게 물었다.
“네가 통솔하는 용병단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앞서 보완해야 할 점은 뭐지.”
“무기와 식량.”
“조달 방법은?”
“…….”
문이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모르는 것인가 싶어 눈을 마주쳤더니, 미소지었다. 내가 묻고 있는 질문에 대한 답을 알고 있다는 소리다. 곧 입은 열렸다.
“옆 빼내기.”
문은 정확히 답을 알고 있었다. 부족한 군량을 조달하는 방법에서 그 위험도가 높아 흔히 쓰이진 않지만, 지금 트란슈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계략이었다.
쿠웨드는 자신의 주변에 있던 약소국을 침략한 바 있다. 그 결과 식량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확보가 되었을 터. 이제 항구를 통해 들이는 무기만 채우면 될 것이다.
조만간 큰 교역이 오갈 것이다. 트란슈를 사이에 두고 무기를 조달 받는 방법은 기밀을 유지하고 항구를 통해서다. 우리가 중간에서 빼돌려야 하는 것은 그것이었다.
그전에, 문에게도 당장 해결해야 할 점이 몇 가지 있다.
일단 늘어난 용병단의 문제다. 각 주마다 각각 나누어져 있던 길드를 통일한다는 건 문에게 왕사와 대등한 전력을 등에 업었다는 소리다. 문이 통솔하고 있는 길드만 해도 6개. 혼자서 담당 할 수 있는 2개의 길드를 제외한다면 나머지 4개의 성격이 다른 길드에서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반발이 일어나거나 내적분열이 일어날 수 있다.
왕에게도 그 우위의 자리. 상제가 존재한다.
문이 그런 상제라면, 각 주의 6개의 길드를 통솔할 왕이 필요하다.
“6개의 길드 중 눈에 띄는 놈들이 있었나?”
상제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왕이 될 자를 고르는 것이다. 조금 멍청해도 좋으니, 일단 우선시 돼야 할 것은 충성심이다. 마음에 우러나왔던 공포에 의하던 상관없다. 상제의 말에 절대 복종을 할 자를 골라야 한다. 인재를 고르는 건 그 다음 문제다.
“음…….”
문이 조금 고민하고 있는 듯 했다.
그 많은 용병들 중에 눈에 띄는 놈들을 고르라는 것이 무리지 않을까 싶었다. 역시 직접 눈으로 보고 찾는 것이 나을 것 같아 대답을 기대하지 않고 시선을 돌리자 문이 입을 열었다.
“있어. 그래서 알아서 하라고 던져놨어.”
“뭐?”
태연하게 그렇게 말하는 문은 자신이 지금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모르겠다는 듯 다시 말했다.
“들러붙는 게 귀찮아서 죽여 버린다고 했는데, 글쎄 한 놈이 ‘절 죽여도 영혼이 되어서라도 쫓아다닐 겁니다.’ 이러잖아. 한 놈이 그러니까 나머지 놈들도 다. 나중엔 서로 죽여 달라고 하질 않나…….”
진드기 보다 더 끈질겼다며 혀를 내두르는 문은 질려버린 듯한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처음에는 황당했지만, 듣고 보니 의아함이 뒤따랐다.
문의 말이 사실이라면, 우선순위에 두고 있는 충성에 가까운 인물들이라는 소리다. 하지만 그들은 문의 무엇을 보고 그런 충성심을 보인 것일까.
빤히 문을 바라보았다. 내가 바라보는 걸 알았는지 등 뒤에서 히죽거리며 웃고 있다. 아무리 보아도 쉬는 것 없이 빛깔 좋은 꼬리를 흔들고 있는 것 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런 문에게 충성심이라니.
생각해보니, 과거에도 문은 이와 비슷했다.
하나같이 드론 이상의 실력자들이 문의 밑에서 간이라도 빼줄 듯 충성을 맹세했었다. 내 주변에 있던 놈들이 대부분 배신을 했다는 것과 비하면 보는 눈이 없는 건 나였다. 그러나 당시 나는 들개의 버릇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배신에 이유를 묻지 않았다.
들개는 본디 자신과 배우자 밖에 지키지 않기 때문이다. 무리를 지키는 것도 하지 않으니, 신변에 위협을 느낄 때 배신을 하는 건 당연한 것이었다. 그들은 들개가 아닌, 인간이었지만 나에겐 그게 당연한 것이었다.
그 당연한 것 때문에 나는 배신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무슨 생각해?”
문이 내 얼굴을 잡아 올렸다.
눈을 마주치게 하고 웃으며 물었다.
“아무것도.”
“그럼 내 생각이라도 해.”
“문.”
“응?”
손을 뻗어 코를 잡았다. 때릴 줄 알았는지 조금 놀란 문의 코를 잡고 입을 맞췄다. 손이 감겨오기 전에 입을 떼고 말했다.
“한 번 보고 싶구나.”
“뭘?”
“네게 간이라도 바칠 놈들.”
“윽.”
문의 얼굴이 드물게 일그러졌다. 나는 떨어지려는 문을 붙잡았다.
“소집해라. 직접 보겠다.”
“싫어. 어떻게 떼어낸 놈들인데.”
“그래? 은아.”
근처에 있었던 모양인지 내 목소릴 들은 은아가 들어왔다. 트란슈 특유의 소매를 가린 복식이 매우 잘 어울렸다.
“아무래도 너와 둘이서 가야겠구나.”
“어? 어?!”
당황해 하는 문이 파닥대기 전에 밀어내고 은아에게 손을 뻗었다. 수줍은 소녀처럼 거대한 손이 내 손바닥 위로 올라왔다. 잡을 수 있는 건 검지뿐이었지만, 얌전한 은아를 끌기엔 충분했다.
“알았어! 가져올게! 나도! 나도 가!”
얼마나 당황한 것인지 물건을 대하듯 가져 온다고 말하고 있었다. 딱히 원하지 않는 일을 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무리 하지 않아도 돼.”
문이 세차게 고개를 젓고 은아를 잡고 있는 내 손을 낚아 채 잡았다. 그리고 심술 가득한 표정으로 은아를 바라보는데, 은아는 비어있는 자신의 손을 바라보다 덥석 문의 손을 붙잡았다.
모양새가 좋지 않아 손을 털어 문을 떨쳐내려고 했지만, 문도 은아도 도저히 잡은 손을 놓으려 하지 않았다.
하루아침에 불러들일 수 있는 놈들이 아닐 것이니, 적당한 시간을 주려고 했지만 문은 곧바로 나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 뒤를 이어 은아도 따라나왔다. 문은 은아가 잡은 손을 떨쳐 내려고 몇 번 흔들었지만 소득이 없자 표현 할 수 있는 가장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은아는 별 생각이 없는 무표정이었다. 놔 달라고 해 봤자 자신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안 문은 나를 바라보았다. 손을 놓아달라고 말해주라는 눈치였다. 본인 역시 내 손을 놓을 생각이 없으면서 말이다.
“움직이는 거 불편해!”
“그럼 너부터 놔.”
“싫어.”
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무의미한 대화를 하고 있어야만 하는 것일까. 저택으로 나와 어디로 가는 것인지 말을 해주지 않아 마차는커녕 말도 없이 지금까지 걸어왔다.
걷기 불편한 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두 손을 모두 잡혀 있는 문보다는 나을 것이다. 그럼에도 고집을 피우는 놈 때문에 억누른 폭력성이 폭발하려는 순간, 낯선 인기척이 느껴졌다.
은아 역시 느낀 것인지 나와 문을 자신의 뒤로 보내고 기척이 나는 곳을 바라보았다.
숨어 있는 놈들이 둘. 아니, 넷 정도 인가.
하나 같이 범상치 않는 힘을 가진 놈들이다. 기를 숨기고 매복하는 것에 익숙하다는 것만으로도 보통은 아니다. 이런 놈들을 그냥 지나칠 문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걱정하는 것은 매복한 놈들의 역습이 아니었다.
흥분에 날 뛸 준비를 하고 있을 문을 바라보는 데, 의외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시린 듯 웃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미쳐있다는 건 맞는 데 문제는 짜증이 나 돌기 직전이라는 것이다.
문은 나를 뒤로 밀어내고 은아를 지나쳐 앞으로 나왔다. 순식간에 네 명의 인원이 문의 앞에 섰다.
“어딜 그렇게 혼자 싸돌아다니는 겁니까?”
그 네 명중 한 명이 물었다. 덩치가 크지만 은아 정도는 아니고 클라운 마스 정도였다. 전형적인 창을 쓰는 놈이라는 건 잡혀 있는 근육의 모양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런 점이 매력이지. 우리 대장은.”
뒤를 이어 말을 잇는 놈은 가느다란 몸과 차고 있는 검은 장검이었다. 검을 쓰는 자라고 보기에는 근력이 턱없이 부족해 보이나 앞에 있는 네 명중 가장 기척이 적고 발이 빨랐던 놈이다.
“날 죽이려고 오신 거라고! 너희들은 방해하지 마!”
“무슨 소리야. 날 먼저 죽이실 건데.”
저 둘은 그냥 바보 인가.
서로 아웅다웅하며 시끄럽게 굴던 네명이 일제히 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동시에 물었다.
“그래서 누굴 고르시겠습니까!?”
“…….”
문의 코앞에서 당장 자신들 중 골라 죽이라는 말에 문은 그냥 다 죽어. 라며 대답했지만, 그럼 순위를 정해 달라고 청했다. 덧붙여 길드에 대부분의 용병들이 원하는 바라고 답했다.
문은 눈앞에 네 명을 베어내도 전혀 즐겁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앞서 몇 번이고 비슷한 놈들은 벤 이력이 있기에 쉬이 검을 들지 못했다.
아무래도 처음 베었던 놈들보다 나중에 온 것들이 더욱 집요하게 붙는 게 원인인 듯싶다.
문이 이정도로 타인에 의해 당황하는 표정은 처음이었다. 확실히 그동안 보아왔던 놈들과는 달랐다. 나 역시 본적도 없는 분야의 인간들이었기 때문에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하는지 고민했다.
그러나 고민을 길게 잇기도 전에 체력적으로 한계가 있었다. 회복이 늦어진 탓도 있었다. 짧은 현기증이 느껴지자 바닥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육체적인 부담이 느껴졌다. 하는 수 없이 은아의 소매를 잡아 당겼다.
문을 지켜보고 있던 은아가 고개를 내려 나를 바라보았다.
난 그런 은아에게 손을 뻗었다. 서 있기 힘드니 안아달라는 뜻이었다. 은아는 망설임 없이 나를 들어 안았다. 바닥을 지탱하고 있던 다리가 떠오르자 누적되었던 피로감이 몰려왔지만, 몸의 부담은 훨씬 줄었다.
“그런데……. 아까부터 거슬렸는데, 너는 뭐지?”
개중 가장 발이 빨랐던 검을 든 놈이 순식간에 눈앞으로 다가왔다.
적의는 없었지만, 은아에게 안겨 있는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어린아이?”
라는 순간, 눈앞에 멀쩡히 서 있던 놈의 머리통이 바닥에 짓이기듯 박혔다. 그렇게 만든 것은 문이었다. 다량의 살기를 내뿜던 문은 용케도 머리를 박고도 기절하지 않는 놈을 노려보았다. 코앞까지 다가와 호기심을 드러내던 놈은 그런 문을 바라보고도 두려움도 없이 히죽 거렸다.
“그래, 그 눈이야. 그 붉은 눈! 소름끼쳐. 오싹오싹 해.”
황홀함에 미쳐버린 듯 말하는 놈에게 문이 시라소를 들었다.
“문.”
바닥에 내리 꽂은 놈을 갈기갈기 찢어버리려고 하려는 문을 불러 막았다.
짧게 혀를 차던 문은 시라소를 집어넣었다. 머리가 깨졌는지 피를 흐르는 놈의 멱살을 잡아 거칠게 세 명이 있던 쪽으로 던져버렸다.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마.”
문이 송곳니를 드러내며 위협하자, 일제히 네 명 모두 한 쪽 무릎을 꿇고 움직이지 않았다. 명령이 떨어지지는 즉시 절대적으로 행하는 모습은 독하게 훈련을 받은 개보다 더한 충성심이었다.
놀라웠던 것은 맞은 놈에게 그 어떠한 분노도 찾아 볼 수 없었다는 것이다. 나에 대한 적의감도 없이 오로지 문의 명만을 듣고 있었다.
익숙하지만, 귀찮아 죽겠다는 듯 그들을 바라보던 문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방금 전만해도 무게를 잡던 놈은 어디로 갔는지 냉큼 내 앞으로 다가와 손을 뻗었다. 말하지 않아도 자신에게 넘어오라는 뜻임을 알았다. 내가 굳이 넘어오지 않아도 데리고 가겠다는 듯 허리를 잡으려고 하자 그대로 발을 들어 얼굴을 박았다.
“더러우니까 만지지마라.”
문의 손은 바닥에 꽂아버린 놈의 피와 흙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손뿐만 아니라 옷도 마찬가지다.
“그치만!! 그치만!”
포기하지 않고 얼굴에 내 발이 박힌 채로 문은 힘을 주었다.
“뭐가 그치만이야.”
하지만 용납할 수 없는 행동에 다시 힘을 주어 얼굴을 박아 밀어 냈다. 나를 안고 있는 은아만 어쩔 줄 몰라 허둥대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문에게 갈 생각이 없다. 마음 같아선 뒷목을 잡아 호수에 던져버리고 싶지만 그럴 수 없으니 울상을 지어도 가지 않았다.
그렇게 옷으로 손을 비빈다고 해결될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 대신 물었다.
“저 놈들인가?”
“어? 어…….”
떨떠름하게 대답하는 것으로 보아 맞는 듯 하다. 인원은 저게 다 인가. 총 네 명. 남은 두 개의 길드를 담당할 놈이 두 명 정도 더 필요하다. 곧 머릿속에서 몇 안 되는 놈들이 떠올랐다. 비록 다른 네 명에 비해 문의 명령에 절대복종은 하지 않겠지만, 용병을 이끌 왕의 자질은 충분히 가지고 있는 놈들이다.
하지만 이번 계교에는 시끄러운 놈들은 필요 없기 때문에 뒤로 미루고 찬찬히 네 명을 바라보았다. 시선을 바닥을 향하고 있어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짧은 순간 파악이 된 성격과 성향을 보아 적당한 놈은 역시.
나는 손을 뻗어 문에게 곤죽이 되도록 얻어터진 놈을 가리켰다. 문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하자 눈에 띄게 눈썹을 일그러트렸다. 눈동자에 압박을 주는 행동이기 때문에 좋지 않아 하지 마라는 뜻으로 손등으로 이마를 쳐 주었다.
“저놈이 적당하겠다.”
“응.”
문도 그렇게 생각한 모양이다. 영문을 모르는 세 명은 선택받은 한 명에게 진득한 적의와 부러움을 담아 시선을 보냈다. 선택 받은 놈은 당연하다는 듯 히죽거리며 슬금슬금 문의 곁으로 다가오려고 했지만, 낌새를 알고 노려보는 문에 의해 다시 고개를 숙였다.
발소리가 적고 눈치가 빠른 놈이다. 무모한 면도 보이긴 했지만, 그 대상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염려될 것은 없다.
사실 이번 계교에 가장 써먹을 만한 놈은 닉스지만, 아쉬워도 어쩔 수 없었다.
따로 명령을 하려는 것을 앞서 문이 쥐어터진 놈을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일말의 관심도 없다는 표정이지만, 그런 문의 시선이라도 받았다는 사실에 기뻐하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기병으로 해상에서 매복해 단숨에 쳐야 한다. 벙어리만 채워.”
“범선은 갤리온이면 되겠습니까?”
“캐러벨.”
“하지만 적제량이 좋지 않아 군선과 맞붙게 되면 불리할 텐데요.”
“그러니까 말 했잖아. 벙어리로만 채우라고.”
공격을 당했다는 것도 모르게 죽이며 싣고 있는 무기를 빼돌린다.
문이 짚고 있는 핵심이었다. 이제야 눈치는 챈 놈도 알았다는 듯 고개를 숙이고 명대로 하겠다는 말을 끝으로 앞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남은 셋도 뭔가를 시켜달라는 눈빛을 빛내며 문을 바라보았다. 문은 잠시 고민을 하더니 말했다.
“일당 백. 그 수준을 유지 못하는 놈은 죽여.”
명대로.
라는 짤막한 대답과 함께 셋도 사라졌다. 이제야 주위가 조금 조용해 졌다. 문이 용병을 지휘하는 모습은 처음 본 것은 아니다. 하지만 볼 때마다 놀라는 것은 당장 해야 할 것과 해야 하는 것에 대한 논점을 정확히 파악해 계교를 쓴다는 것이다.
개인의 육체적인 능력도 월등하지만, 문이 가지고 있는 재능은 단순히 몸을 쓰는 것만이 아니었다.
전략적으로 전쟁을 지휘하는 사고능력은 혀를 내 두를 정도로 천재적이다. 이렇다한 실전 경험이 적은 문에게 저 정도의 사고가 가능하다는 것은 보아도 들어도 믿기 힘들었다.
여기까지 왔지만, 내가 해야 할 일이 없을 정도로.
그러나 천재와 바보는 종이 한 장 차이라는 소리가 있다. 내게 다가와 손을 뻗어 데려가려고 하는 놈의 얼굴에 다시 발을 박았다.
얼굴이 발에 밟혔음에도 포기 하지 않고 허공에 팔을 휘젓는 문을 바라보다 다리를 내렸다. 기다렸다는 듯 나를 은아의 품에서 빼앗아 데리고 가 안아 버린다. 다가졌다는 듯 웃으며 얼굴을 비비기에 그만 좀 하라며 뺨을 밀어냈지만, 소용이 없다.
쿠웨드의 움직임에 짚고 넘어 가야 할 것이 있다.
과거 에덴에서 적을 치기 위해 급히 원군을 보내라는 드론의 지시가 없었다면 수도까지 밀고 들어온 적군으로부터 속수무책 점령당했을 것이다.
수도는 빼앗기지 않았지만, 그 과정에서 로던프는 선왕을 잃었다. 내가 15살 때 드론의 칭호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제 17사단 드론 첫 전쟁에서 잃고 그 지휘권을 죽어가는 드론에게 넘겨받았기 때문이다.
첫 전쟁이기 때문에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그날 로던프를 역습한 것은 쿠웨드가 아니라 트란슈였다는 것을.
이렇다 할 전쟁의 조짐을 보이지 않았던 슈레이가 갑작스러운 역습을 시도한 이유가 무엇일까.
로던프가 내전으로 흔들리고 있었지만, 쉽게 점령을 당할 나라는 아니었다. 준비되지 않는 전쟁이 어떠한 결과를 불러오는 것인지 모를 정도로 슈레이는 머저리가 아니다. 뒤를 봐 주던 나라가 있다 하더라도 성급하게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직접 확인 해 본 트란슈는 예상대로 전쟁에 조짐은 보이지 않았다. 당장 준비한다고 해도 1년 사이에 병력과 물자를 채우는 것에 한계가 있다.
전쟁은 호각을 다투었다.
3년.
발아래에 두었다는 트란슈를 상대로 지난 3년간 전쟁을 치렀다. 그럼에도 얻어낸 결과는 휴전.
라이나프의 움직임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분명 쿠웨드의 움직임을 가장 먼저 알아챘을 텐데 묵인하고 있다.
그렇다는 건 라이나프와 쿠웨드가 사전에 교접이 있었다는 뜻이다.
“라이나프는 무시해도 돼.”
“…….”
머릿속이 채 정리를 마치기도 전에 목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들어보니 문이 나를 내려다보고 웃고 있었다.
라이나프는 중립국이지만, 로던프와 맞먹는 군력을 가진 강대국이다. 그들이 누구와 손을 잡느냐에 따라 승패가 갈릴 정도로 영향력 있기에 마음 놓을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는 것이다.
문은 사태파악을 하지 못하고 멋대로 지껄이고 있었다.
“입 다물고 있어.”
안 그래도 체력이 떨어져 머리가 어지러운데 헛소리까지 들어오니 골이 울렸다. 그러나 문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웃으며 다시 말했다.
“그들은 절대 움직이지 않아.”
“장담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중립국이긴 하나, 전쟁은 묵인만으로 피할 수 없을 테니까.”
그렇다.
라이나프는 자국민의 안전을 가장 우선으로 삼는다. 전쟁에 희생이 될 수 있는 자국민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이번 전쟁에서 반드시 움직일 것이다.
“아니. 이번엔 당신이 틀렸어.”
“대체 뭐가 틀렸다는 거야!”
계속해서 부정하며 속을 긁는 통에 예민해진 내가 참지 못하고 소리를 높였다. 안겨 있는 상태에서 화를 내더라도 와 닿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지만, 지금 난 내가 안겨 있다는 것 마저 잊을 만큼 날이 서 있었다. 그만큼 전쟁은 비정하고 참혹한 것이기 때문이다.
“라이나프는 명령 없인 움직이지 않아. 그들은 핏줄과 혈통에 누구보다 예민하고 은(恩)을 아는 종속이거든.”
“은(恩)?”
“그러니 당신이 걱정할 건 없어. 모두 뜻대로 될 테니까.”
문이 말하는 은(恩)이라는 것은 먼 과거 로만에게 침략 당했지만, 트란슈에 원군을 요청해 독립할 수 있었던 것을 말하는 걸까.
그러나 이미 천년도 훌쩍 지난 이야기다. 지원군을 요청할 수 있겠지만, 트란슈가 라이나프의 병력에 독재권을 갖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문은 단지 나를 안심시키기 위해 되는대로 지껄이고 있는 것일까.
나를 바라보며 웃고 있는 문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좀처럼 읽을 수가 없었다.
“넌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가끔은 다른 생각을 해.”
“가끔?”
“평소엔 늘 당신 생각만 하니까.”
한 점 부끄러움 없다는 미소로 답하는 모습에 할 말을 잃어버렸다. 어물쩍 넘어가며 대답할 생각이 없으니 물어도 의미가 없다. 숨기는 것에 능숙하지는 않는 아이이니, 얼마가지 않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게 될 것이다. 조급해 하지 않고 입을 다물자 문은 무엇이 그렇게 좋았는지 내게 뺨을 비벼왔다.
“좋은 냄새…….”
깊게 끌어안고 목덜미에 고개를 묻으며 한다는 소리가 결국 저 소리다. 더러운 것을 애써 무시하면 나도 떨어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문의 옷깃을 붙잡고 놓지 않았다. 그나저나 예전부터 내게 무슨 냄새가 난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본인의 체향에 대한 자각이 없다는 건 당연하겠지만, 여성도 아닌 하물며 전직 장군에게 땀내 말고 날 것이 무엇이 있을까.
그러고 보니 은아도 나를 처음 봤을 때 냄새부터 맡았었지.
눈앞까지 다가와 킁킁 거리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적나라하게 맡고 있었다. 그땐 그냥 후각이 예민하게 발달되어 있으니 그럴 것이라 생각했지만 설마 정말로 내게 특유의 냄새라도 나는 건가.
괜히 신경이 쓰여 손을 들어 냄새를 맡아 보았다.
그러나 미약한 약초냄새와 약간의 피 냄새 말곤 아무런 냄새가 나지 않았다.
보름 후.
슈레이에게 또 다른 서신이 도착했다.
쿠웨드 측에서 해적 소탕을 위한 지휘권을 주라는 요청이 있었다는 것이다. 트란슈 해역에 골칫덩이인 해적을 소탕하는 대신, 해적의 약탈물자는 모두 쿠웨드가 가져가겠다는 것.
“확보 무기의 양은?”
“군자금 삼십만 일천 금. 무기 십만 육천.”
문에게 보고 받은 것은 트란슈가 2년을 소비하고 모아야 할 군자금과 무기의 양이었다. 이만한 양을 교역하고 있었다는 것은 쿠웨드가 작정하고 내일이라도 치룰 수 있는 전쟁을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이제야 이해가 갔다. 어째서 트란슈는 말도 안 되는 조건에서 준비되지 않는 전쟁을 서두를 수 있었는지.
“범선은.”
“바다 깊은 곳에.”
꼬리를 잡힐 만한 범선은 모두 흔적을 지워 버렸다. 문의 발 빠른 대처에 고개를 끄덕이고 슈레이에게 받은 서신을 불태웠다.
쿠웨드는 트란슈를 주시하고 있다. 이번에 다량의 무기와 군자금을 약탈당했으니, 속이 뒤집어졌을 테지. 다시 한 번 거대한 교역이 오갈 것이다. 해적 소탕을 빌미로 한 트란슈를 낚는 미끼로 말이다.
**
“무시한다.”
“쿠웨드, 그 야만족이 가만있지 않을 텐데.”
오후가 넘어 슈레이가 방문했다.
쿠웨드가 해적 소탕을 명분으로 협조를 요하고 있지만, 허락하는 즉시 트란슈 소유의 해역에 타국이 개입하게 되어 버린다. 슈레이는 쿠웨드에서 교역되고 있던 군자금과 무기를 빼돌렸다는 사실을 모르니 갑작스러운 쿠웨드의 요구에 갈피를 잡지 못하는 듯 했다.
“해적을 이쪽에서 소탕하였으니, 더는 타국의 개입을 허락하지 않는다. 전해라.”
“전부터 트란슈에 우호적이지 않았던 국가다. 최근 움직임이 수상해. 굳이 심기를 건드릴 필요가 있을까?”
“전쟁에 쓸 십만 육천 정도의 무기와 군자금을 약탈당했으니, 섣불리 행동하진 않을 것이다.”
“!”
놀란 슈레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만한 무기를 확보하고 있었다면, 놈들은 협조가 아닌 협박을 했겠지.”
“대체……. 언제부터…….”
모르고 있진 않았다. 수상쩍다는 건 얼마 전부터 슈레이도 알고 있던 것이었다. 문제는 규모다. 저 정도의 물량이 교역되고 있었다는 건 쿠웨드는 전쟁에 필요한 병력을 충분히 모았다는 뜻이 된다.
슈레이의 낯이 일그러지다가 곧 제자리를 찾았다.
대량으로 교역되고 있던 무기와 군자금이 지금 내게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어쩔 생각이지?”
슈레이가 물었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 것이지만, 대답을 원하는 듯 했다.
“무기를 빼돌렸다고는 하나. 병력이 줄어든 것은 아니다. 협박은 한다고 들을 놈들도 아니고.”
“여우가 하는 소린 못 들어도 범이 우는 소린 듣겠지.”
“범? 그게 무슨 뜻이지?”
슈레이가 알아듣지 못하자, 곁에서 듣고만 있던 나비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로던프입니다.”
“……!”
고개를 돌려 나비를 바라보던 슈레이가 그제야 깨닫고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이제야 온전히 내 말을 알아들은 듯 했다.
타국의 개입을 허락하지 않는 다는 것은 트란슈의 입장에서 당연한 것이지만, 이렇다한 교류도 없었던 국가가 터무니없는 조건으로 해적을 소탕해주겠다는 것은 누가 보더라도 수상했다.
이러한 실책을 내세우는 건 쿠웨드가 대량의 무기를 빼앗기고 얼마나 혼란스러워 하는가를 그대로 투영하는 것이었다.
가령 해적소탕을 빌미로 방심하게 만든 뒤 해역을 통해 트란슈를 치고 내전으로 혼란스러운 로던프를 역습한다는 가설쯤은 누구나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쿠웨드는 과거 로던프와의 교전에서 항복을 선언한 뒤로 그들과의 전면전은 피하고 있었다. 트란슈를 전쟁의 서두로 놓고 로던프의 발톱을 모두 뽑아내 후에 여유롭게 목을 쳐낼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것이 충분한 병력과 무기를 손에 쥐고도 지금까지 몸을 웅크린 이유였다.
“조만간 쿠웨드 측에서 회담을 요청할 것이다. 허락하되, 조건을 붙여.”
“조건?”
“소탕한 해적 일부분이 로던프 소유의 해안으로 도주한 것이 확인 되었으니, 로던프 측 협조를 조건으로 회담은 삼국 모두 참여한다.”
“과연, 그러면 놈들도 어쩔 수 없겠어.”
이제야 모두 납득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지만, 나는 말을 마치지 않았다.
“사신으론 내가 가겠다.”
“?!”
슈레이와 나비 둘 모두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곧 평정심을 되찾은 슈레이가 애써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회담은 나비와 내가 간다. 너 같은 어린애가 나설 수 있는 자리가 아니야.”
“네놈이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이 있군.”
등 뒤에서 문이 조금씩 소리를 내며 웃고 있었다. 그 웃음소리만이 방안을 채워 넣고 있을 때 나는 눈앞에 있는 슈레이를 바라보았다.
“명령을 하는 건 이쪽이다.”
“뭐?!”
흥분에 내게 다가오려는 슈레이의 목덜미에 시라소의 날이 세워졌다. 내내 웃으며 등 뒤에 있던 문이 뻗은 것이다. 손가락 하나. 한 발자국. 미약한 움직임이라도 보였다간 그대로 목이 날아갈 것이다.
본능적으로 슈레이도 그것을 알고 있는 것인지 굳어버린 듯 움직이지 않았다.
“문.”
이름을 부르자, 문이 미소 지으며 천천히 시라소를 내렸다.
서늘함이 느껴졌는지, 침을 한 번 삼키던 슈레이가 자신의 목을 감싸 쥐었다.
“쿠웨드의 병력은 강하다. 네놈이 자릴 비우면 어쩌잔 거지?”
“…….”
“당분간 군비와 세력 확장에만 집중해라. 또한 네놈은 아직 왕이 된 게 아니다.”
로던프에서만 내전이 일어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트란슈 역시 왕의 계승이 매듭지어지지 않아 권신들 사이에서도 갈등이 깊으니, 모두 시일 내에 해결해야 할 것들 뿐이었다.
그것을 알고 있기에 더는 고집을 피우지 않고 수긍하겠다는 듯 인상을 썼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다.”
뜻대로 되지 않아 불편한 심정을 그대로 드러내던 슈레이가 물었다.
“대체 넌……. 어디까지 알고 있는거지?”
미지의 생물이라도 보는 듯한 눈을 하고 있는 슈레이에게 그 물음에 대한 답은 정해져 있었다.
“아무것도.”
“…….”
슈레이는 더는 묻지 않고 그대로 일어났다.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 다는 것은 그의 자존심을 상당부분 짓밟아 놓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어떠한 말도 나는 해 주지 않았다.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던 그가 한숨을 토해내듯 숨을 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비를 데리고 가.”
“필요 없어.”
“회담에 너 같은 어린애를 보낸다면 놈들이 트란슈를 우습게 볼 거라고!”
“아니오. 그러진 않을 겁니다.”
슈레이의 항변에 답을 한 것은 잠자코 있던 나비였다. 두 손을 포개어 소매에 가린 모습으로 나와 슈레이를 바라보던 나비는 좀 더 앞으로 다가왔다.
“적어도 로던프는 트란슈를 우습게보지 못할 것입니다.”
“그걸 어떻게 확신하지?”
“로던프는 트란슈보다 좀 더 개방적인 나라입니다. 듣기론 천민도 호쿠자격을 따고 능력만 인정을 받으면 기사의 작위까지 주기도 한다고 하더군요.”
“그건 단지 명목상일 뿐이라는 걸 네 머리로는 모르겠냐?”
“올해 14살 쯤 되는 문호도 있으니 적어도 그 명목만을 탓할 순 없을 겁니다.”
“…….”
사실이냐고 묻는 듯 나비를 보던 슈레이가 천천해 내게 고개를 돌렸다.
“사실이다.”
“하. 미쳤군. 고작 14살한테 그런 고위 관직자릴 줬다고? 결국 이용당하고 있을 뿐이잖아.”
“…….”
내 기억 속에서 떠오르는 것은 밀빛 머리를 한 작은 소년과 그 소년이 자라 맑은 눈동자를 강인하게 일렁이는 건장한 청년의 모습이었다. 눈을 뗄 수 없었던 황금 빛 머리카락을 끝으로 눈을 감자 어느 순간 머릿속에 가득 차 있던 소년이 사라졌다.
“만만히 볼 자는 아니다. 네놈의 앞길을 제일 먼저 방해할 녀석일 테니까.”
“점수가 후한데? 아는 사이라도 돼?”
“아니. 모른다.”
슈레이는 의심에 가까운 눈초리를 보내왔고, 나비는 의심과 확신이 있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나는 한치의 망설임 없이 모른다 답했다. 더는 추궁할 것이 없다고 생각한 것인지 슈레이가 뒤돌았다.
그는 잠시 멈춰 움직이지 않고 말했다.
“데리러 가지. 그동안 털끝 하나라도 다치지 마.”
“헛소리 하지 말고 나가.”
“이놈이고 저놈이고 하여간, 주인이 걱정해도 듣지를 않아!”
나비가 슈레이의 말을 듣고 혐오스럽다는 표정을 짓고 그의 곁에서 물러났다. 그 모습이 약이 올랐는지 물러서는 나비에게 다가가 손목을 잡았다. 그리곤 나비가 채 놓으라기 전에 밖으로 나갔다.
한 때는 만남이 조금 뒤틀려져 버린 탓에 인연이 닿지 않으면 어쩔까하는 염려도 있었지만, 더는 그런 생각은 들지 않았다.
**
짐작했던 대로 쿠웨드 쪽에서 회담을 요청했다.
조언대로 슈레이는 미리 모의했던 조건을 붙여 쿠웨드와의 회담을 승낙했다. 물러설 곳이 없던 쿠웨드는 불편함을 숨기지 않았지만, 삼국 회담에 응했다.
로던프 역시 이번 회담에 응했지만, 협정에 협위를 붙여 회담은 로던프에서 이뤄질 것을 권고했다.
예상하던 것이지만, 이 순간 나는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로던프에 다시 발을 들여서가 아니다. 그곳에서 마주하게 될 인간의 왕 따위가 걸려서는 더욱이 아니다.
내가 가장 두려워할 정도로 긴장하는 것은 그들을 마주하고 남아 있을지도 모를 인간적인 감정들이었다.
남아 있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랄 뿐이다. 내게 있어야 하는 것은 들개로서 본능 그 이상도 아니다.
문이 눈앞까지 다가와 멋대로 턱을 잡아 올렸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그대로 내게 입을 맞췄다. 더 이상 가져갈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습관적으로 하는 것 같다. 혀까지 밀어 넣어 귀찮기 전에 이마를 밀어내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포기라는 것을 모르는 문은 집요하게 들러붙더니 기어이 내 위에 올라탔다.
“고민하지 마. 어차피 내거니까.”
그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아니, 오히려 어지럽던 것이 모두 정리가 될 만큼 명쾌하기도 하였다.
원래대로 돌아간 고개와 함께 문의 입술이 다시 한 번 닿았다. 흘러 들어오는 침을 모두 삼키지 못해 흘러내릴 만큼 농익은 입맞춤이 이어졌다. 나의 모든 걸 집어 삼키겠다는 듯 강하게 밀어붙이던 문의 손이 겉옷 안으로 들어왔다.
익숙하게 허리를 끌어안던 손이 올라가 가슴 부위에 닿았다. 여성이 아니니 아무것도 달리지 않았지만, 집요하게 한 곳을 건드리고 있었다. 입을 맞추고 있어 이상한 기분이 들어도 그만하라 말을 하지 못하고 있다가 참을 수 없어 머리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끅!”
이상한 소릴 내며 머리를 감싸고 입술을 떼던 문은 그렁그렁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하아……. 하아…….”
그러고 보니, 숨도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었다.
적당히 하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몰아쉬어야 하는 숨 때문에 말이 나오질 않았다. 대신 올라간 옷을 내리고 문을 보았다.
그러나 맞은 부위가 어떻게 돼 버린 것인지 문이 넋을 놓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
영문을 알 수 없도록 빤히 쳐다보는 문은 갑자기 얼굴을 붉히더니 코앞까지 더 다가왔다. 또 입을 맞추는 것인가 했지만, 초조함을 숨기지 못하고 말했다.
“라마가 좋아! 당신이 좋아!”
“…….”
“정말 좋아!”
“아……. 그래.”
고맙다고 해야 하는 건가.
온통 하얀 녀석이 볼을 잔뜩 붉히고는 필사적으로 말하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나 했더니, 결국 한다는 말이 좋다는 말이다. 모르는 것도 아니었지만, 적나라하게 드러내놓고도 확인사살을 해 버리니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과거에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모습이었다. 아직 나이가 어린 탓일까. 아니면 본래 성격이 이랬던 것일까.
어느 쪽이든 감당하는 것이 어렵다는 건 같지만, 불시에 급습해 오는 것은 지금이 더 했다.
“당신은?”
“뭐?”
“내가 좋아?”
“싫으면 곁에 두지도 않아.”
“그런 게 아니잖아.”
뭐가 아니라는 것인지 몰라 인상을 쓰자 초조해 하던 아이가 갑자기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좋아?”
같은 질문을 다시 하는 듯 했지만, 문의 질문은 지어졌다.
“병아리보다.”
무언가 내려앉는 듯한 충격이 느껴졌다.
“그걸 왜…….”
“살아 있잖아. 말 못하는 병아리.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
모를 것이라 생각했었다. 아니, 애초부터 가나에 대해 물어올 것이라 짐작조차 하지 않았다. 보던에서 도망치려던 그날. 나와 가나는 문과 마주치게 되었다. 목줄을 채워주기 전 가나의 어깨에 상처를 입힌 것은 문이었다. 문이 가나를 의식했던 것은 오직 그날뿐이었으리라 장담한다. 보통은 그 정도의 상처를 입어 치료가 늦어져 사망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문은 가나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듯 확신하며 말했다.
단순히 떠 보려는 말은 아니었다. 그런 요령은 없는 녀석이니 그저 생각하는 그대로 묻는 것이다.
“난 작은 왕이 전부야. 이렇게 만든 건 당신이니까. 네 전부도 내가 아니면 안 돼.”
“…….”
“거슬리면 죽여줄까? 병아리.”
“그러지 않아도 돼.”
“어째서?”
굳이 말로 해 줘야 하는 것일까. 그러나 아이는 확인받고자 원한다. 끊임없이 증명 받고 싶어 한다.
간헐적으로 말해주지 않으면 불안해하는 통에 새겨 줄 수밖에 없었다.
“필요 없으니까.”
“…….”
“내겐 문. 네가 전부다.”
그제야 문은 웃으며 나를 끌어안았다.
**
집사의 손이 거쳐지는 것을 마지막으로 로던프에 가는 채비를 마쳤다.
은아는 지금 로던프에 데려갈 수 없으니, 이틀 뒤 돌아올 때까지 집사를 따르고 있으라고 말했다. 처음엔 싫어하며 따라오려고 했지만, 이곳에 있는 걸 마스도 알고 있으냐 묻자 금방 수그러들었다.
예상했던 것 보다 훨씬 은아를 챙겨주고 있었던 것 같다. 은아를 집사에게 부탁하고 있던 사이 문이 들어왔다.
절제된 검은 색의 제복을 입은 나와는 달리, 문은 눈이 부시도록 하얀 옷을 입고 있었다. 얼핏 보면 마른 체격인 듯 싶지만, 날렵한 근육으로 잡혀 있어 단단해 보였다. 목을 죄는 것을 싫어한 탓에 단추를 모두 채우지 않아 목과 쇄골이 드러났지만, 헐렁한 그 모습 자체가 문이었다.
단지 문제는 지나치게 눈에 띈 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안 데려갈 수 없는 노릇이어서 잠시 문을 바라보며 고민했다.
“무슨 생각해?”
“너.”
“나도.”
라며 웃고 있는 아이를 보자니, 어쩐지 머리가 울리는 것 같다. 어쨌거나 이 모습으로 로던프에 들어갈 수는 없다. 호쿠 쪽 녀석들이 문을 알아보고 소란을 피운다면 발목이 잡히는 건 내 쪽이 되기 때문이다.
시치미를 떼는 것도 방법이지만, 고양이가 생선을 앞에 두고 가만히 있진 않을 것이다.
그래서 방울을 달아주기로 했다.
집사에게 후드가 달린 로브를 가져오라고 명했다. 약간 검붉은 빛이 도는 로브를 받고 문에게 던지자, 문은 잠시 로브와 나를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입어.”
덥다며 투덜거리는 것을 무시하자 꾸역꾸역 로브를 입은 문을 바라보다 다가오라며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재차 덥다며 투덜거리기 전에 멱살을 잡아 고개를 내린 뒤 뒤집어쓰지 않는 후드를 씌워 온전히 얼굴을 감췄다.
“난 내 것에 시선이 타는 걸 좋아하지 않아. 가리고 다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