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화 (28/35)

*

다음날 이반은 전날 엔도의 말대로 2왕자와 마주하게 되었다. 센티아 공작의 신임을 얻는 다는 것은 생각보다 빨리 일을 진행시킬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막혀진 공간을 선호하지 않는 2왕자는 한 곳에 머무르기보다는 지금처럼 바깥공기를 맡는 것을 더 좋아했다. 

“그대인가. 나를 찾는다는 이가.”

엔도가 2왕자를 압박하고 공작이 자리를 마련해 준 덕분에 2왕자를 눈앞에 둔 이반은 한량하다는 소문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다른 왕족을 만나보지 못해 비교할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왕자 중 죽은 3왕자를 제외하고 가장 무능력하고 어리석다는 꼬리표가 붙어도 왕족은 왕족이었다. 

눈이 부실정도로 아름다운 금발과 에메랄드 눈동자. 순간, 무언가를 닮았다고 생각했지만 곧 의식에서 멀어져 버렸다. 

압력을 받고 이 자리에 있는 것이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2왕자의 불편한 표정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자신도 모르게 넋을 놓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서둘러 이반은 두 손을 들어 가볍게 예를 보인 뒤 먼저 자리에 앉게 했다. 야외에서 이야기를 진행하기에는 듣는 귀가 많았지만, 이곳은 고위 관직들이나 오가는 곳이다. 때문에 목숨이 아까운 자들이 함부로 입을 가벼이 할 수 없는 곳이기도 하다. 

또한 급히 서둘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지금은 그저 얼굴을 익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곳에 오기 전 엔도는 몇 가지 일러준 것이 있었다. 오래전에 죽어버렸다는 2왕자의 후손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아 제법 영특하여 어린 나이에도 글을 알고 있었다는 것 밖에 남은 것이 없지만, 여자 쪽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그녀에겐 몇 가지 버릇이 있었다. 무언가를 집중 할 때 오른쪽 검지손톱을 만지작거린다거나 잘 웃지만, 가장 먼저 눈웃음을 먼저 친다. 말을 할 땐 톤이 높지 않고 차분한 편이며 호기심이 많아 대화를 하는 도중에도 자주 풍경에 시선을 돌린다.

‘죽은 인간에 대한 환상은 소소한 것이라도 큰 의미를 부여하기도 하니까. 2왕자에게 신뢰를 얻는 건 쉬울 것이다. 물론, 네가 제대로 한다는 전제지만.’

이반은 오른손 검지 손톱을 잡았다. 지금 눈치를 채지 못한다 하더라도 상관없었다. 

“로던프와 트란슈 외교로 몇 가지 논의드릴 게 있습니다.”

상상했던 것 보다 눈썰미가 좋았던 2왕자의 시선이 곧 이반의 손을 향해 머물렀다. 그리고 별말 하지 않고 그는 자리에 앉았다. 2왕자가 앉자 이반 역시 자리에 앉았다. 

“그 문제라면 어제 사신을 통해 얘기가 끝난 걸로 아는데? 뭘 논의 한다는 거지?”

“쿠웨드는 이미 한 번 므헨의 황태자를 암살한 상태고 므헨은 지속적으로 쿠웨드에게 그 책임을 묻었으나 갈등을 빌미 삼아 세력을 넓히기 위해 므헨을 침공. 점령에 성공한 바 있습니다.”

“그만큼의 군사권을 확보 했다는 뜻이군.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지?”

“그들은 다시 한 번 전쟁을 서두르고 있습니다.”

“…….”

“쿠웨드는 로던프의 독단적인 정치적 행위에 반발하기에 앞서, 같은 방법으로 움직일 것입니다.”

겁을 먹을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염려 정도는 할 것이라 생각했다. 차분히 말을 이어나가던 이반과 그것을 듣고 있던 2왕자는 잠시 눈앞에 있는 찻잔을 바라보더니 그것을 그대로 들고 일어났다. 

의도를 파악하기도 전에 2왕자에 손에 있던 찻잔이 그대로 기울려 이반의 정수리에 떨어졌다. 

“네 놈이 어디에서 뭘 믿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협박할 상대를 잘 못 고른 듯하다.”

비운 찻잔을 내려놓고 그대로 등을 올리자 이반은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협박이 아닙니다. 저 역시, 제 몫을 하려는 것뿐입니다.”

“…….”

“로던프는 제게도 소중한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일개 트란슈의 백작이 주제넘게 타국의 안위까지 염려하는 건가?”

“트란슈 백작이기 전에 로던프의 백성이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2왕자가 그 이유를 묻는다면 이미 이야기는 모두 끝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예상대로 2왕자는 등을 보이던 몸을 돌리기 시작했고 이반을 바라보는 듯 했다. 그에게 무성한 의문 가운데 단 한마디만을 기다리고 있던 이반은 순간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발목을 잡아 세웠던 2왕자가 이반의 등 뒤를 바라보더니, 왕족의 체면도 버린 채 급히 그곳으로 달려갔기 때문이다. 

이반을 스치고 사라진 2왕자의 황당한 행동을 짐작할 수 없었던 그는 불안함을 숨기지 않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등 뒤를 바라보았다. 

달려간 2왕자는 상대적으로 작은 소년의 팔목을 잡고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의 소년의 얼굴이 보이는 순간, 일순간 쌓아 놓았던 모래성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란이 로던프에 돌아오기 전에 봐야 할 놈들이 있었다. 앞당겨진 전력을 채워 줄 한가한 놈들을 찾기 위해 앞서 늘어져라 자고 있다가 내가 움직이자 벌떡 일어나 있는 문을 바라보았다. 

“얌전히 기다려라.”

“또?!”

싫다고 다가와 붙잡고 매달리기 전에 발을 들어 얼굴을 막았다. 미약한 신음소리와 함께 뻗어 나오던 손과 몸이 멈췄다. 

“이번에도 어기면.”

발을 내리자 반사적으로 손을 뻗으려는 문을 노려보았다. 허공에서 손이 멈추더니 공황상태가 되어 눈을 끔뻑였다. 

“은아랑 바꿀 줄 알아.”

“!!”

순식간에 울상이 되어 고개를 저었다. 싫다는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할 정도로 그것만은 싫다는 듯 온 몸으로 표현했다. 

말로는 설명이 되지 않았던 모양인지 필사적인 표정을 짓자 보다 못하고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었다. 진정하라는 뜻이었다. 

“알겠지?”

“응.”

정말 알고나 답하는 것인지 의심이 됐지만, 곧 돌아올 예정이기 때문에 답답하겠지만 문을 이곳에 잠시 묶어 두었다. 워낙 눈에 띄는 놈이니 같이 돌아다녀봤자 좋은 꼴을 보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가장먼저 만나야 할 놈은 신관 소속에 있는 모르페다. 현자에 가까운 인물 치고는 말도 많고 시끄러운 녀석이지만 고양이 손이라도 필요한 상황이니 어쩔 수 없었다. 직접 움직이기에는 신분상 제약이 따를 것이다. 내란이 시작되고 세력이 분산되어야만 본격적으로 들어갈 것이다. 

먼 곳을 돌아갈 필요 없이 일반통행을 택했다. 트란슈의 사신으로 왔기 때문에 고귀관직들이나 오갈 수 있는 곳을 지나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절대로 발목이 묶일 수 없는 곳에서 예기치 못한 상황이 벌어졌다. 순식간에 인기척이 느껴진다고 생각하고 적당히 떨쳐내려는 순간, 묻지도 않고 다가온 자는 다급히 내 손목부터 잡아 돌렸다. 

놀란 것은 상대의 정체를 확인하고 나서부터다. 

“너! 살아 있었어?!”

“…….”

“역시! 그럼 그렇지! 너 같은 놈이 죽을 리가 없지!”

나 같은 놈이라는 게 뭐지? 라는 의문이 들었지만, 묻진 않았다. 대신 잡힌 팔목에 힘을 주어 뿌리쳤더니, 손을 놓친 놈이 황당한 표정을 짓고 바라보았다. 아니, 내려다보았다. 

성격만으로 예측하한다면 이런 행동을 지적하고 화를 낼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는 흑심 없이 깨끗한 웃음을 짓고 장난스럽게 내 머리카락을 멋대로 비볐다. 

“건방진 건 여전하구나.”

“이게 무슨 짓입니까.”

“반가워서 그렇지. 자칸도 그렇고 이놈이고 저놈이고 네가 죽었다는 소리만 해대니까. 그동안 어디에 있었던 것이야?”

“사람 잘 못 본 것 같습니다.”

“너만큼 건방진 꼬마가 어디에 있다고. 밥은 먹고 나 다니는 거야? 전혀 안 컸잖아.”

키를 가름하려는 듯 내 정수리 부근에 손으로 자신의 배 부분까지 선을 그었다. 그리고 갑자기 내 양팔 겨드랑이에 손을 넣더니 번쩍 들어올렸다. 

“봐. 심각하게 가볍다고.”

“…….”

대체 이놈은 어디에서 갑자기 나타난 것일까. 

“이쪽은 신관 쪽인데, 그 곳에 볼일이라도 있어?”

“내려놓으십시오.”

“그런데 신관 쪽은 지금 아무도 없을 텐데? 팔라딘(성기사)의 세례를 위해 당분간 자리를 비운 상태니까.”

그 말을 듣고 나도 모르게 인상이 써졌다. 

하필이면 지금 팔라딘의 세례를 하고 있을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같은 기사지만, 팔라딘과 궁중 기사는 그 의미부터 달랐다. 로던프의 기사는 실력만 있다면 천민도 호쿠의 자격을 얻어 기사단 입단을 도전할 수 있지만, 팔라딘은 그럴 수 없다. 철저히 교단에 의해 구성되기 때문에 애초부터 신관이 아닌 자들은 가질 수 없는 작위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그 수가 적어 대두되지 않아 지금이 그 시기였다는 걸 놓치고 말았다. 헛걸음 했다는 실망감 이전에 문에게 돌아갈 생각부터 했지만, 2왕자는 날 놓아주지 않았다. 

“언제까지 들고 있을 겁니까.”

그만 내려놓으라고 재차 말했다. 같은 말을 한 번 이상 말하는 걸 선호하지 않아 불쾌감을 숨기지 않고 있었지만, 2왕자는 말없이 나를 들고만 있었다. 

이런 몸으로 돌아오고 나서부터 자주 이런 상태가 되곤 하지만 결코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드론이었을 땐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벌어지고 있어 놀라긴 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제 이런 일은 안당해도 될 나이이지 않는가. 벌써 14살이다. 체구가 좀처럼 자라지 않아 한두 살은 더 어려보일 수 있겠지만, 성인 남자가 생각 없이 손을 뻗어 안을 시기는 지난 것이 오래다. 

“과자 먹으러 갈래?”

“…….”

이놈이 내 말을 전혀 들을 생각이 없다는 건 알았다. 미약한 기척이 느껴졌다. 2왕자 너머로 몇 명의 인영이 모습을 감추는 것이 보였다. 직접 확인해 보지 않았지만, 꺼림칙한 것은 사실이었다. 사라진 그림자까지 눈으로 쫓는 사이, 점점 시야가 멀어지는 것 같더니 양쪽 겨드랑이에 넣던 팔을 빼고 한 손으로 가뿐하게 나를 안고 어디론가 가기 시작했다. 

멀지 않는 곳으로 가 정원을 배경으로 마련된 의자에 앉게 한 뒤 다과를 준비하라 일렀다. 곧 이어 지시를 받았던 다과상이 차려졌고 2왕자는 개중 끔찍하게 달아 보이는 것을 접시에 담아 내 앞으로 밀었다. 

“…….”

문이라면 아마 좋아할 것이다. 

은아도 그렇겠지. 

딸기로 장식이 되어 있는 것을 바라보던 나는 어서 먹으라는 압박을 주고 있는 2왕자의 웃는 낯을 외면하고 작게 조각을 내어 입 안에 넣어 보았다. 

예상대로 머리가 아플 정도로 달았다. 대체 이런 것을 어떻게 먹는 것인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하하하하! 싫으면 말로 하라고.”

“…….”

“특이한 녀석. 보통 아이는 과자를 좋아하잖아.”

한 번 넘기는 것도 쉽지 않아 더 입에 넣을 생각은 애초부터 하지 않았다. 2왕자는 놀리는 것 같으면서도 내 얼굴을 확인한 그가 내밀었던 접시를 가져가 시종에게 치루라 명했다.

2왕자는 재차 다과상을 물리고 신선한 과일을 가져오라 하였다. 지시를 들은 시종들이 물러나 명을 따를 동안, 2왕자는 다소 부담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제대로 이야기 한 번 나눠 본 적이 없고, 2왕자의 주저리를 들었던 것은 딱 한 번 그가 만취해 있었을 때 그 한 번. 

지금 내게 이렇게 친근감을 표할 어떠한 계기도 없다는 얘기다. 

“이름이 아마. 라마였지?”

“사람 잘못 보셨습니다.”

“널 처음 본 것이 10살 정도였으니까. 지금은 12살쯤 되려나? 그땐 정말 작았는데. 지금도 작지만, 처음 봤을 땐 걷는 것도 아슬아슬해 보였다니까.”

“14살입니다. 그리고 보행에 문제는 없었습니다.”

“역시, 라마가 맞잖아.”

내게 문의 바보력이 옮은 모양이다. 

작다는 것에 크게 신경을 쓰진 않지만, 지속적으로 짚고 넘어가다보면 신체적인 결함에 불리함을 느끼게 된다. 과거 나는 15세가 되면서부터 눈부신 성장을 하게 된다. 키는 생각보다 자라진 않았지만, 근육과 체력만큼은 다부졌다. 30세가 넘어가면서부터는 전쟁으로 다져진 몸은 웬만한 상처는 간지러울 정도였으니까.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다르니, 다부진 몸을 가진 전설이었던 나를 떠올려서는 안 된다. 나는 앞으로 수천 혹은 수만 가지의 결함을 가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늦기 전에 내게 더욱 더 혹독한 훈련의 필요성을 느꼈다. 

모르페를 만나는 것은 뒤로 하고 일단 문에게 돌아가야 했다. 내게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을지 몰라도 기다림은 길게 느껴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할 얘기가 없으면 이만 일어나고 싶습니다.”

“불허한다. 앉아.”

“…….”

“앉으래도?”

결국 다시 엉덩이를 붙였다. 다시 앉힌 이유를 묻기 위해 시선을 맞췄다. 법도에 따르면 왕족의 눈을 마주치는 자는 그 자리에서 목을 쳐야 마땅하지만, 내게 그런 것을 일일이 따질 정도로 왕족의 예우는 남아 있지 않았다. 

“루카디아에서 들여온 것이다. 과즙이 많지만 그다지 달지 않지. 먹어봐.”

어느새 시종이 가져온 과일 중 연한 분홍빛이 도는 과일을 내게 보냈다. 한 입 크기의 것으로 손질이 어렵고 루카디아에서 밖에 자라지 않아 일반 백성들은 이름조차 들어 본 적 없는 과일이었다. 

나 역시 딱 한 번 먹어 본 게 다였으니, 뚜렷한 맛은 기억나지 않지만 나쁘진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대시 내밀어진 접시 위에 담겨진 과일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데, 그런 내 앞으로 거대한 손이 다가오더니 포크로 찍어 멋대로 입안에 밀어 넣으려고 해서 고개를 뒤로 뺐다.

“어린 아인 거절하는 거 아니야. 자, 아 해봐.”

“거기 두십시오. 알아서 먹겠습니다.”

“안 먹으니까 하는 소리잖아. 노려만 보면 알아서 입으로 들어간다고 이 녀석이 그러든?”

대답 없이 인상을 쓰자, 입에 넣는 건 포기하고 내 손에 과일이 찍힌 포크를 쥐어 주었다. 이런 식으로 철저히 아이 취급을 당하는 것은 단언컨대 단 한 번도 없었다. 

물밀 듯 밀려오는 굴욕에 바들바들 손을 떨자, ‘넌 많이 먹어야한다.’고 말한 뒤 비어 있던 다른 손에도 과일이 찍힌 포크를 쥐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그대로 접시위에 가만히 내려놓았다. 

단순히 내게 과자를 먹이기 위해 데려온 것은 아닐 것이다. 무슨 꿍꿍인 것인지 침묵하고 바라보았다. 보통은 이정도만으로도 가면을 벗고 본론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먹어보라니까 왜 놔?”

“…….”

“로던프에선 자라지 않는 거니까 지금 안 먹으면 영원히 맛을 못 볼 수 있다고.”

태연하게 다시 내 손에 포크를 쥐어주더니, 재차 권했다. 

“할 말이 무엇입니까.”

“넌 거짓말하거나 입을 다물 것 같으니까 별로 묻고 싶지 않아.”

“묻고 싶은 것이 없다면 이제 일어나도 되겠습니까.”

“불허한다.”

얼굴에 멋대로 힘이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결국 한숨을 쉬고 의자에 등을 기대앉았다. 그가 귀족의 신분이었다면 타국의 사신을 사적인 자리에 오랫동안 잡아 둘 수 있는 명분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왕족이니 얘기가 달라진 것이다. 

빠른 길을 택하려다 오히려 발목을 잡힌 기분은 썩 좋은 건 아니었다. 소득 없이 시간만 보내게 됐다는 것이 짜증스러울 뿐이다. 

잠잠하던 2왕자가 미소를 짓더니 입을 열었다. 

“출신이 어디지? 형제는 있어? 부모는?”

“제가 거짓말을 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럼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면, 상으로 과자를 줄게.”

말도 안 되는 거래였다. 일단 상으로 달아놓은 과자는 단맛을 싫어하는 내게는 차라리 거짓말을 하고 싶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런 나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2왕자는 호쾌하게 웃으며 시종에게 작은 목소리로 지시했다. 곧 시종은 손바닥정도의 상자를 들고 와 2왕자에게 건넸다. 

상자는 2왕자의 앞에 놓여졌다. 

“고향이 어디지?”

“보던.”

지어내고 싶은 건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사실을 말했다. 

“부모나 형제는?”

나는 잠시 멈칫 했다. 보통 보던 출신이라고 한다면 ‘들개’나 ‘쓰레기 무덤’을 떠올랐을 것이다. 모스보다 못한 취급을 받는 것이 보던의 들개들이기 때문에 적어도 오만한 2왕자의 얼굴에 불쾌감 정도는 나타날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는 놀라울 정도로 차분한 얼굴로 빠르게 되물었다. 

“없습니다.”

“하긴, 들개는 자식이 걸음만 떼도 더 이상은 돌보지 않는다지. 그래서 버려진 거군.”

걸음마를 떼는 것을 지켜본 부모조차 없었기에 버려졌다는 말은 틀린 것이지만, 정정해 주진 않았다. 그랬더니 갑자기 2왕자의 눈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손을 뻗어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것이 아닌가. 

“어린나이에……. 혼자서 힘들었겠구나.”

“…….”

“가엾게도……. 지금은 어디에서 머물고 있지? 아, 신관의 견습생으로 들어간 것인가?”

내가 트란슈 사신이라는 사실조차 모르는 눈치였다. 알고 있었다면 그렇게 태연하게 내가 ‘라마’라는 것을 확신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내가 신관 쪽으로 향하는 것을 떠올리고 멋대로 견습생으로 확신한 모양이었다. 멋대로 착각하게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신관은 꽉 막혀 있어서, 너 같은 어린애가 마음 둘 곳이 없을 텐데……. 아!”

또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2왕자는 웃었다. 

“이번에 최연소 문호가 너랑 같은 또래였던 것 같구나. 딱 한 번 본 것 같은데……. 얼굴은 기억 안 나지만 굉장히 작았으니까. 네 또래일 거야.”

“…….”

“내게 올래? 네 또래 문호도 만나게 해 주마.”

“거절하겠습니다.”

“어째서?”

“싫기 때문입니다.”

“내 밑이 싫은 거야? 문호가 싫은 거야?”

“…….”

2왕자는 내가 입을 다물 것을 예상 했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지금은 그런 태도를 보여야 현명하지. 하지만, 나는 어쩔지 모르겠지만, 어린 문호는 희생되게 하지 않아. 그러니 너는 안심하고 문호와 놀아도 된단다. 어린 아이는 외로운 것에 익숙해질 필요는 없으니까.”

나는 문호의 곁을 지키고 있던 기사가 떠올랐다. 문호는 외롭지 않을 것이다. 당장은 외롭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이미 그의 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존재한다. 외로움을 채울 수 있는 것은 얼마든지 있다. 문호가 그것을 채워 넣을 동안 나는 움직여야 했다

로던프는 멸망할 것이다. 예정된 수순이었을 뿐이지 이것은 복수가 아니다. 그 멸망과 시작이 과거엔 처참하게 잃어버렸던 것들을 지켜줄 것이다. 

2왕자는 한 번 자식을 잃은 바 있다. 그 때문인지 나이가 어린 문호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지금 문호에게 편이 많다는 건 나쁘지 않는 변화였다. 

“트란슈의 사신으로서 사사로이 로던프의 문호와 친분을 갖는 것은 원치 않습니다.”

그대로 난 자리에서 일어났다. 2왕자와 더는 할 이야기가 없었으며 문에게 돌아가 보아야하기 때문이다. 내 말에 놀란 2왕자를 지나쳐 돌아가려는 데, 손목이 잡혀 그럴 수 없게 되었다. 

“네가 트란슈 사신이라고?”

“네.”

“어떻게 하면 얼굴 색 하나 안변하고 그걸 숨기지?”

“숨긴 적 없습니다.”

“가디언이었는데, 어떻게?”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

어느새 놀라움을 숨기고는 2왕자는 내 손 위에 자신의 앞에 있던 상자를 쥐어 주었다. 그것은 과자가 들어가 있는 상자였다. 

“거절하겠습니다.”

“받아. 사실대로 말한 것에 대한 보상이니까.”

그는 내게 과자 상자를 안겨주더니 완전 속았다며 볼멘소리를 했다. 그러나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그는 다시 한 번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나는 그 손을 쳐내고 그에게 과자 상자를 내밀었다. 받으라는 뜻이었다. 

“단 것은 싫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상자를 받은 손을 놓으려고 했지만 2왕자는 손바닥으로 그대로 상자를 밀어 내 가슴에 닿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지금 당장 싫어한다고 나중에도 싫을 것이라는 보장은 없잖아. 가지고 있으면 언젠가 좋아질 날이 올 수도 있겠지. 원래 살아 있다는 건 변덕이 심한 것이거든. 그러니 받아. 정 싫다면 다른 아이에게 줘도 된다.”

그의 과거를 들었을 때 이상으로 놀라운 대답이었다.

“사신의 시간을 빼앗아 미안하군. 하지만 이곳엔 다시 오지 않는 게 좋겠어. 타국의 사신이 들어서 좋을 건 없는 얘기가 많이 오가는 곳이기도 하니까. 돌아가는 길은 알아?”

“네.”

“기특하군.”

2왕자가 등을 돌렸다. 눈앞에서 멀어지는 그를 바라보다 나 역시 등을 돌리고 돌아섰다. 그러다 문득 품 안에 있는 과자 상자에 잠시 시선이 머물렀으나 곧 문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서둘렀다. 

안으로 들어갔더니, 그곳에선 바닥에 앉아 잠들어 있는 하얀 것이 있었다. 무엇하고 있었던 것인지 창은 활짝 열어 놓고 머리 위에는 뭔가를 잔뜩 얹어 놓은 채였다. 어지간히 가만히 있질 못하는 놈인가 싶어 일단 열린 창문을 닫았다. 그 소리에 깬 것인지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머리위에 뭔가가 있다. 

“…….”

분명 다른 것을 보고 있었던 것 같은데 어느새 나와 문은 눈을 마주친 채 서로 말이 없었다. 그러다 하얀 옷을 입고 바닥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일어나라고 말하려는 데 덩치도 커다란 것이 두 손가락을 꼼지락 거리며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볼도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고 살금살금 눈치를 보고 있는 것이 얌전히 방에 있었으니 칭찬을 해 달라는 것이었다. 

들고 있던 과자상자를 문에게 건넸다. 문은 고개를 갸웃 거리더니 그것을 받고 냄새를 맡아보았다. 보통은 뚜껑을 열어 육안으로 확인하는 것이 먼저지만, 시력이 좋지 않는 탓인지 촉각과 후각에 먼저 반응하던 문은 내용물이 무엇인지 안 것인지 재빨리 뚜껑을 열었다. 

“오오!”

그 모습을 바라보다 의자를 끌어다 앉는데 아까부터 ‘저것’이 거슬린다. 

“맛있어!”

감탄사를 날리며 과자를 야금야금 깨물어 먹는 문의 머리 위에 있던 것이 조금 움직였다. 난 순간 멈칫하고 문의 머리 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을 더욱 유심히 바라보았다. 

“문.”

“?”

“그건 뭐지?”

손가락을 들어 아까부터 거슬렸던 것을 가리켰다. 문은 내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볼이 빵빵하게 부풀어 오를 만큼 과자로 차 있음에도 과자에 손을 대는데 그때 머리 위에 있던 것이 고개를 들어 총총총 문의 어깨위로 내려왔다. 

새였다. 그것도 아주 작은 하얀 새. 부리 끝이 노란색인 것만 빼고는 문의 머리카락과 색이 거의 흡사했다. 

새는 멋대로 내려와 문의 손가락에 묻은 과자 부스러기를 쪼아 먹기 시작했다. 문은 고개를 숙여 새를 바라보더니, 다시 날 본다.

“이거 뭐야?”

“멍청아 내가 먼저 물었잖아.”

새는 배가 찼는지 쪼아 먹는 것을 멈추고 고개를 돌리더니 다시 총총 뛰어가 문의 머리 위로 올라가 앉았다. 그 모습이 아주 자연스러웠다. 문은 도통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까딱이자, 정수리에 앉아 있던 새는 능숙하게 균형을 잡으며 미끄러지는 걸 방지했다. 

이번엔 문이 고개를 털자 새는 부리로 문의 머리카락을 붙잡은 채 떨어지지 않았다. 본인도 어지러웠는지 멈추고 눈동자를 들어 위를 바라보았다. 그런다고 새가 보이진 않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문에겐 유독 동물들이 잘 따랐다. 종류는 가리지 않고 작은 짐승부터 큰 짐승까지. 길들이는 것이 쉬운 것도 그만큼 짐승이 문을 잘 따르기 때문이었다. 은아 역시 그랬다. 문보다 곱절은 크지만, 늘 녀석 주위에는 뭔가가 가득 앉아 있었다. 

형님 아우 하더니, 별것을 다 닮는다 싶어 일어나 문에게 다가갔다. 떼어내지 못한 새가 불만스러운 표정이었다. 가지고 있는 커다란 손을 이용한다면 손쉽게 털어낼 수 있겠지만, 이 녀석은 그러지 않았다. 

뻣뻣하게 문의 정수리만을 지키고 있던 새에게 손을 뻗어 보았다. 고개를 든 새가 몇 번 주위를 살펴보더니 내 손가락 위에 올라탔다. 그대로 가져가 새의 상태를 보아하니, 특별한 문제는 없었지만, 날개 부분이 기묘하게 잘려나가 있었다. 이것은 일부러 잘라놓은 것이다. 

이것만 보아도 이 새는 누군가의 애완용 새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런 날개로 애를 쓴다면 날 수는 있겠지만, 오래 가진 않을 것이다. 운 좋게 우리를 빠져나와 이 창까지 날아온 모양이다. 

날개를 펼쳐 상태를 보던 내가 잡은 부위를 놓자, 새는 어느새 어깨를 타고 올라와 이번엔 내 정수리에 앉았다. 

머리에 똥이라도 싸면 큰일이기 때문에 때어내려고 손을 드려는 순간, 과자에 열중하고 있던 문이 뚫어져라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야.”

왜 그렇게 쳐다보냐며 묻자, 얼굴에 홍조를 띄운 문은 느닷없이 다가와 말했다. 

“라마 귀여워!”

“뭐?”

듣고 싶지도 않는 이유를 묻자, 문은 천진하게 웃으며 손을 뻗어 나를 들어 올렸다. 웃고 있던 낯짝을 지나 시선을 밑으로 내리자 내 발은 처참히 공중에 떠 있었다. 그대로 손을 들어 문의 정수리 부근을 향해 내리치자 환청 같은 신음과 함께 바닥에 내려왔다. 

바로 머리에 손을 올려 새를 쥐고 바라보았다. 지나치게 작고 부드러워 조금만 힘을 줘도 아파할 것 같았다. 잡힌 그대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새를 보다 내게 머리를 맞아 주저앉아 있는 문의 머리 위에 올려 주었다. 

“멋대로 들거나 하지 마라.”

“부끄러워?”

생각을 좀 거치고 말을 하면 내가 문을 때리는 횟수는 눈에 띄게 줄었을 것이다. 볼을 붙잡고 늘어트리자 파닥거렸다. 

고통에 몸부림을 치면서도 벗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결국 손을 놓은 것은 나였다. 딱히 눈치가 없는 것도 아니면서 왜 생각 없이 구는 것일까. 

팔짱을 끼고 문을 바라보았다. 주저앉아 볼을 만지며 아프다며 징징거린다. 칭얼거림을 듣기 싫어 볼을 만져주었다. 징징대던 놈이 뚝 그치더니 이번엔 넋 놓고 바라보기에 물었다.

“왜.”

물어도 문은 대답 없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내 허리를 붙잡아 껴안았다. 이마를 잡아 밀어내도 떨어지지 않아 포기하고 양 볼을 잡아들어 보았다. 조금 붉어진 것이 눈에 띄었다. 

“그러니까 말을 좀 가려서 하라고.”

“그치만~”

“뭐가 그치만이야.”

“못해. 가리는 거. 라마는 치사하잖아.”

“치사?”

“캭-하다가 보들보들 하니까.”

‘캭? 보들보들?’

알아들을 수 없는 단어를 쓰는 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자 날 끌어안은 문이 배 부근에 얼굴을 가리고 떨어질 줄 몰라 했다. 어쩌다보니 들러붙게 만들어 버려서 적당히 좀 하라고 말할까 하다 멈췄다. 

유난히 머리가 동글동글한 문은 긴 머리에 감춰지지 않는 둥그런 뒤통수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손을 들어 만져보자 예상대로 부드러웠다. 새를 쥐는 것 이상으로 손에 잡히는 느낌이 좋았다. 

붙어 있는 아이가 잠시 품에서 움찔 거렸다. 촉각에 예민한 아이이니, 내가 뒤통수를 만지고 있다는 것쯤은 예전에 알았을 것이다. 이대로 잡아 당겨 떼어내는 것도 방법이지만, 그렇다고 순순히 떨어질 놈도 아니기 때문에 그대로 결 좋고 기분 좋은 머리통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미뤘던 칭찬을 해 주었다. 

“잘 기다렸다.”

나를 끌어안던 문의 손에 힘이 들어가더니 갑자기 고개를 들어 올려 나를 밀어내고 내 뺨을 잡아 내렸다. 

뭐라 막을 틈도 없이 입을 맞추고 이번엔 문의 손이 내 뒤통수를 감싸 점점 자신에게 파고들게 만들었다. 한줌에 잡혀 벗어날 수 없도록 가둬버린 문은 입맞춤을 멈추지 않았다. 대체 갑자기 왜 불타오른 것인지 몰라 인상을 쓰다 이마를 짚어 밀어냈다. 

그만하라는 뜻이었지만, 본능에 충실한 녀석이 이번엔 내 겉옷 안으로 손을 집어넣기 시작했다. 

갑자기 들어오는 손은 허리를 쓰다듬더니 좀 더 위로 올라가 어딘가를 지분거리며 만지기 시작했다. 이런 곳은 여자도 아니니 만져도 감흥이 없다는 걸 알 텐데, 집요하게 건드리고 만지작거리던 문은 입을 떼고 겉옷을 들어올렸다. 얼굴이 어디론가 향하는 것을 눈치 챈 내가 손을 들어 머리통을 내리치려다가, 멈췄다. 

문의 머리 위에서 필사적으로 떨어지지 않으려는 새가 보였기 때문이다. 

결국 때려서 막는 것도 하지 못하고 주저하는 순간 허공에서 맴돌던 손목이 잡혀 버렸다. 

“대체 왜 갑자기..!”

“그러게. 왜일까?”

장난스러운 말투였다. 

집요하게 손가락으로 건드렸던 부분에 촉촉하고 부드러운 뭔가가 닿았다. 놀라 움츠리자 웃는 소리가 들려온다. 놀리는 것이 분명해 그만 좀 하라고 말하려는 데 붉은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마치 밀어 낼 수 있다면 그렇게 해 보라는 것 같았다. 손목을 붙잡고 있는 손에 힘이 풀렸다. 그러나 나는 힘을 주지 못하고 그대로 손을 내리고야 말았다. 나를 향하던 붉은 눈동자가 천천히 감기더니 농익은 혓바닥만이 움직였다. 

그 묘한 감촉에 몸이 떨리는 것을 막을 수 없던 나는 문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러나 밀어내는 짓은 하지 않았다. 대체 왜 이런 곳을 입에 대는 것인지 이해가 안갈 뿐이다. 좋을 게 없는 행위임에도 문은 집요하게 허리를 감싸 안으며 양쪽 모두 건드리고 있었다. 

“문…….”

이름을 부르자 행위가 잠시 멈추었다. 고개를 든 문이 천천히 다가와 혀를 내밀었다. 그는 마치 고양이가 된 것처럼 나를 핥기 시작했다. 귓불과 목덜미를 핥던 것이 올라와 입술을 휘감았다. 그리고 턱 끝으로 다시 내려와 다시 목울대까지 내려왔다. 

“걱정 마. 안 아파.”

아픈 게 문제가 아니다. 능숙하게 내 허리를 잡아 올린 문은 그대로 일어나 침대까지 걸어가 눕혔다. 등 부근에 푹신한 것이 닿았지만, 자세가 좋지만은 않았다. 누군가를 내려다보는 일도 드물었지만, 누군가를 올려다보는 일도 없었던 내게 문의 얼굴이 보였다. 기분 나쁘지만은 않지만, 결코 좋다고만은 할 수 없었다. 

마치 굶주린 짐승이 식욕을 돋운 것 같은 느낌이기 때문이다. 아직 내 그릇이 문의 전부를 받기엔 너무도 작다. 모두 받아낼 수 없게 되어 넘치거나 깨져버리면 안될 일이기에 이대로 이성을 나가기 전에 진정시켜야했다. 

“그게 아니잖아. 멍청아. 떨어져.”

“내가 무서워?”

이마를 짚고 밀어내자 문이 말했다. 황당해서 멈췄더니 이마를 짚고 있던 내 팔을 잡아 손바닥에 입을 맞췄다. 뭐라 하기도 전에 혀를 내밀어 이번엔 핥기까지 한다. 

이니 손가락 두 개를 입에 물어 침을 잔뜩 묻히고 있었다. 내 손 끝에 닿은 혓바닥의 감촉이 힘을 주는 걸 방해했다. 

“무섭지 않아.”

“거짓말.”

“왜 무서워한다고 생각하지?”

성교에 대해 두려워한 적은 없다. 잘은 모르겠지만, 어디를 어떻게 하는 것은 나도 알고 있었으니까. 조금 고달프긴 하겠지만, 시간을 두고 천천히 길들이면 충분히 극복이 가능한 문제였다.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

바지 안쪽으로 불시에 뭔가가 들어왔다. 놀란 내가 문을 바라보다 시선을 밑으로 내리자 정확히 내 바지 안쪽으로 들어간 손이 보였다. 굵직한 팔목만 보이는 것이 조금 더 깊숙이 내려가 내 것을 움켜쥐었다. 

당황스러워 그대로 손을 뻗어 바지 밑으로 들어간 손을 붙잡아 떼어내려고 했지만, 내 것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읏!”

아무에게도 잡힌 것 없는 부분을 적나라하게 붙잡혀 이제는 정말 바들바들 떠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다. 문의 어깨를 잡았다. 왜 이렇게 민망한 짓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역시, 무섭지?”

“…….”

뭘 확인하고 싶어 하는 것일까. 

문은 내 귓가에 속삭이듯 물었다. 난 나도 모르게 감고 있었던 눈을 떠 문을 바라보았다. 아아. 그래. 

붉은 눈동자를 보고서야 알 것 같았다. 

그 말 그대로였다. 저 굶주린 짐승은 지금 필사적으로 식욕을 참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본심이 보이면 사슴이 도망을 칠 것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사슴의 이야기다. 

이 멍청한 늑대는 눈앞에 있는 것이 사슴인지 들개인지 분간도 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어깨를 잡고 있던 손을 떼고 그대로 문의 목덜미를 잡아 내렸다. 그리고 붉은 입술과 맞닿아 그대로 깨물었다. 놀란 문이 움찔거리며 내 바지 속에 있는 손을 떼려고 하자 다른 한 손으로 그 손을 막았다. 

떨어져 나가려던 손이 멈추고 나 역시 잡고 있던 것을 풀었다. 

그리고 천천히 문의 바지춤까지 손을 뻗어 안으로 들어갔다. 입술을 깨무는 것은 멈추고 벌어진 이 사이로 혀를 집어넣었다. 달콤한 향이 나는 것 같다. 

안으로 들어간 내 손은 상대적으로 커다란 것을 찾아 기둥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천천히 부풀어 오르며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던 나는 입 안을 헤집고 있는 혓바닥을 찾아 입에 물었다. 목구멍 안으로 채 넘어가지 못한 침샘이 흘러내리고 있었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다시 한 번 붉은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문의 약간 거칠어 진듯한 숨소리와 젖은 듯한 붉은 눈동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는 더 이상 내게 두렵냐며 묻지 않았다. 이를 세워 내게 다가와 목덜미를 물었다. 그 아릿한 통증이 느껴지는 순간, 조금은 머리가 어지러웠다.

“문…….”

“아.”

“!”

갑자기 힘을 주어 움직이는 바람에 중심부에 힘이 들어가 버렸다. 눈앞이 어지럽다고 느끼는 순간, 결국 내뱉고 말았다. 내가 쥐고 있던 것에도 미지근한 것이 분출이 되었는데, 손을 빼 바라보자 묽고 진득한 것이 손가락 끝에서 손목까지 흘러내리고 있었다. 

“하아…….”

문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분명 문의 손에도 묻었을 것이니 이쯤에서 빼 달라 말하려는 데 날 내려다보는 것이 예사롭지가 않다. 

“그쯤 해. 멈출 수 없게 되니까.”

“…….”

자의로 물러나는 걸 기다릴 수밖에 없어 똑바로 바라보고 말하자 잠시 말이 없던 문은 입술을 깨물더니 갑자기 힘을 풀고 내 위를 뒤덮었다. 그러더니 원래대로 돌아와 귓가에 징징거리기 시작했다. 

“빨리 좀 커라~!”

나를 안고 떨어지지 않으려는 아이에게 일단 씻으라고 말하고 싶지만 결국 그 말도 미루고 한 손으로 등을 두들겨 주었다. 용케도 아직까지 문의 머리위에 있던 새가 고개를 들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엇이 그렇게 호기심을 자극을 시켰던 던인지 고개를 갸웃 거리더니 총총거리며 뛰어와 조금 들어 올린 손에 몸을 기댔다. 

예뻐라 한 적 없는데도 사람을 잘 따르는 새였다. 어느 집 똥개와 같은 모습에 나도 모르게 손가락으로 부리 부분을 쓸어주자 새를 파르르 떨며 눈을 감았다. 

*

우리는 트란슈로 돌아갈 채비를 끝냈다. 쿠웨드의 사신 역시 이번 회담에 대해 실망적인 입장을 숨기지 않았지만 당장 어찌할 수 없었기에 조국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어리석은 것. 네놈들은 곧 후회하게 될 것이다.”

트란슈와 쿠웨드는 강화조약을 맺고 있다. 빼앗긴 전쟁 물자에 대한 보복심과 보상심리는 조만간 강화조약을 전혀 쓸모가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 쿠웨드는 조롱하듯 내려다보는 시선을 돌린 뒤 그대로 등을 보였다.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려고 했다간, 위에서 덮칠 불기둥을 놓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은 굳이 언급하진 않았다. 

그렇게 나도 돌아가려 마차에 올라타려는 데, 뭔가가 급하게 이곳을 향해 뛰어오는 게 보였다. 

“문호께서 무례하게 행동한 것에 대한 사과의 뜻으로 이번 만찬에 초대를 하시고 싶다 하셨습니다. 바쁘지 않으시다면, 꼭 참석해 달라는 청이 있었습니다.”

“성의만으로 사과를 받았노라 전해라.”

거절을 하고 올라타려는 데, 전언하던 이는 내게 무언가를 건넸다. 그것은 왕의 전언서였다. 문호는 직접 왕에게 주청하여 왕에게 이번 만찬에 사신을 초대할 수 있도록 허락받은 것이다. 이것은 그 허락에 대한 전언서였다. 일국의 왕이 직접 전언서를 보내왔다면 거절이 쉽지 않아진다. 내가 거절을 한다면 그것은 문호뿐만 아니라 왕의 귀에도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렇게 된다면 소소한 일도 트집이 잡혀 커질 수 있었기 때문에 여기까지 생각해낸 문호에게 이번엔 내가 손을 들었다. 어차피 이번 일이 지나면 더는 나를 묶어 둘 명분이 없으니, 차라리 이대로 끝내버리는 것이 나았다. 

결국 마차를 타고 향한 곳은 만찬을 마련해 놨다는 문호의 저택이었다. 

나 역시 그곳은 익히 알고 있는 곳으로 그리웠다면 그리웠고 잊고 싶다면 잊고 싶었던 곳이다.

문을 데리고 함께 들어가자, 우리를 마중 나온 것은 예상대로 문호였다. 그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반겼다. 

문을 확인하고 잠시 멈칫 거린 것 같지만, 그 후로는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문호는 어느 한 곳에 들어가라 손짓했고 내가 들어가자 따라 들어오려는 문을 손을 들어 막았다. 

“뭐하는 짓이야 이거.”

불편함 심기를 여과 없이 드러내는 문에게 체구의 반도 안 되는 문호가 단호하게 손바닥으로 앞을 막고 그 옆에 마련된 방을 가리켰다. 문이 그 손을 따라 시선을 돌렸지만, 곧 콧방귀를 뀌며 무시하려하자 다시 한 번 문의 앞길을 막은 문호는 다시 옆방을 가리켰다. 

보다 못한 내가 입을 열었다.

“문. 가서 기다려라.”

“…….”

싫다는 것을 얼굴에 사용할 수 있는 근육을 모두 사용해 말하고 있었지만, 머리 위에 새를 얹고 있어 호소력이 조금 부족했다. 잔말 말고 가서 기다리라고 했더니 풀이 죽어 몸을 틀다가 다시 문호를 노려보았다. 

“문.”

내가 이름을 부르고 그것을 지적하자 어깨를 움츠려든 문이 꾸역꾸역 옆방으로 들어갔다. 들어가는 순간 감탄사가 들리는 것으로 보아 그 방에도 만찬이 차려져 있었나보다. 

보지 않아도 뻔히 상상이 가능한 표정을 생각하다 나도 모르게 웃자 시선이 느껴졌다. 문호였다. 그 시선을 무시하고 내게 지정된 의자에 앉자 문호 역시 천천히 걸어와 자리에 앉았다. 마주보는 편에 앉은 문호는 많은 것이 변해 있었다. 

나이프를 쥐는 것도 어색하지 않았다. 

“나쁘지 않다.”

“…….”

할 수 있는 말이 내 이름이 전부이니, 침묵만이 대답인 문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예법에 어긋난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무방비하게 하는 행동이었다. 지적을 하지 않고 차려진 음식을 조금 입에 담는 데 뭔가가 내 옷깃을 잡아 당겼다. 무엇인가 싶어 아래를 바라보았더니 작은 꼬마 아가씨가 올려다보고 있었다. 

“우리 오빠 친구야?”

그 천진한 미소를 본 순간, 떠올리기 싫은 기억들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숨을 쉬는 것도 잊은 채 바라보던 내가 정신을 차린 것은 급히 의자가 끌어지면서 생긴 소음 덕분이었다.

놀란 문호가 벌떡 일어나 당황스러워 했다. 내게 다가온 이 여자아이는 레이첼. 문호의 여동생이었다. 기억하고 있던 어린 시절과 변함이 없어 말문이 막힌건 건 내 쪽이었다. 

“오빠 놀자!”

문호가 당황스러워 허공에 팔을 저으며 내게 다가왔다. 이렇게 레이첼이 들어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왕의 전언서로 협박을 해 만찬에 초대하는 것을 생각해 낸 녀석이 말이다. 

“만찬에 참석했으니, 그대의 성의는 넘치듯 받았다. 나는 돌아갈 길이 바쁘니 이쯤에서 일어나도록 하지.”

“왜에? 벌써가? 레이첼이랑 놀자 까만 오빠야!”

나는 레이첼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고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대로 문을 데리러 밖으로 나가려는 데, 고요한 발걸음이 들리는 가 싶더니 레이첼이 뛰어가 그대로 안겼다.

“어머니!”

그녀는 어리광이 많은 막냇딸의 머리를 상냥하게 쓰다듬더니 이내 나와 눈이 마주쳤다. 뒤늦게 내가 시선을 돌리고 나가려고 했지만, 나를 알아본 그녀가 천천히 다가와 손을 붙잡았다. 

잡힌 손을 쳐내지 못하고 바라만 보자 어느새 양쪽 뺨을 잡아 쓰다듬던 그녀는 무언가에 안심하듯 웃음 지었다. 

“까만 오빠는 오빠 친구래요!”

레이첼의 말에 조금 놀란 듯 그녀는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말을 하지 못했지만 그만큼 표정이 풍부한 사람이었다. 그 순간 그녀가 내 목에 무언가를 발견 한 것이지 그곳으로 손을 뻗으려하자 다급히 손으로 그곳을 가리고 뒤로 물러났다. 

“돌아가겠다.”

결국 도망치듯 나와 문을 부르려는 순간, 뭔가가 등 뒤에서 나를 껴안았다. 

“라마…….”

기억해내기 전에 나가야만 했다. 그리워한다는 감정이 멋대로 생겨나기 전에 나는 돌아가야 했다. 잡힌 손을 뿌리치려는 순간, 귓가에 파고드는 것은 내 이름 외엔 결코 들을 수 없었던 목소리였다. 

“지....마.. 가..지마... 가지마. 라마.”

말을……. 했다. 

등 뒤에서 울리는 목소리는 환청이 아니라는 듯 계속해서 내게 외치고 있었다. 나를 붙잡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기…기다린…다고……. 데…데리러 온다고…약속…….”

내 이름을 부르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던 그가 내 뱉는 목소리였다. 과거를 선택하지 않는 것은 불확실한 미래를 그리게 만든다. 하지만 확실한 건, 무엇인가는 변화한다는 것이다. 나를 붙잡고 있는 가느다란 손목을 붙잡았다. 그대로 힘을 주자 내가 떼어내려 하는 것을 안 그는 내 옷을 붙잡으며 소리쳤다. 

“기다렸어……! 계속 이곳에서 기다렸어……!!” 

어눌하긴 하지만, 더듬는 것 하나 없이 마음속의 것을 그대로 말하고 있었다. 나를 붙잡는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울부짖기 시작하려는 아이처럼 서러움을 주체할 수 없다는 듯 말이다. 나 역시 울컥하고 무언가 올라오려고 했지만, 뒤를 돌아보진 않았다. 잡은 손에 힘을 주지도 못하고 있자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때였다. 

위압적인 기척과 함께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것의 정체를 확인하기도 전에 내 팔이 강제로 들어 올려졌다. 

그리고 무방비하게 문호의 손을 붙잡고 있던 내 손을 거칠게 잡아 떼어냈다. 그리고 내게 붙어 있던 문호의 가슴을 서슴없이 밀어 떨쳐낸 뒤 내 몸은 공중에 떠올라 단숨에 안겼다.

“윽?!”

“오빠!!”

문호의 신음소리와 놀라 소리를 치는 레이첼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손을 짚어 가로 막고 있는 시야에서 벗어나려 힘을 줬다. 그러나 커다란 품속에 가둬져 뒤를 돌아보는 것조차 할 수 없도록 뒤통수를 짓누르는 힘이 느껴졌다. 

쇠가 쓸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시라소가 공명하는 진동이 벗어나려 힘을 준 내 손바닥에서도 느껴졌다. 문이 시라소를 꺼낸 것이다. 

“문!! 문!! 안 돼!”

대답이 없다. 하지만 진득한 살기가 전해졌다. 

나를 향한 것은 아니었지만, 등줄기를 오싹하게 하는 소름이었다. 문은 문호를 죽일 것이다. 들개는 한 번 노린 먹잇감을 죽기 직전까지 절대로 놓지 않는다. 보던에서 도망치던 가나를 그때 문은 죽이지 못했다. 

“죽이면 안 돼! 문!!”

짓누르는 힘이 강해졌다. 시선을 밑으로 내리자 겨우 확인할 수 있는 시라소의 칼날이 세워졌다. 

걸음이 옮겨졌다. 

보이지 않아도 눈앞에 쓰러져 있는 작은 인영이 보이는 듯 했다. 품 안에서 발버둥 치던 나는 가까스로 벗어나 고개를 뺐다. 그리고 문을 말리는 몇 마디의 말 대신 손을 들어 문의 얼굴을 붙잡았다. 그대로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게 만든 뒤 입을 맞췄다. 걸음이 멈추었다. 

문의 붉은 눈동자가 천천히 내게 향했다. 나는 불타오르기 시작하는 그것을 잠재우기 위해 더욱 깊게 입을 맞췄다. 시라소의 날이 무뎌지면서 나를 끌어안았다. 

입을 뗀 나는 문의 이마에 머리를 댔다. 

“돌아가자.”

타오르기 시작했던 불기둥이 천천히 수그러들며 눈을 감았다. 

살기가 지워졌다. 

온순해진 아이의 머리를 끌어안자 걸음이 돌려졌다. 문의 등 뒤에서 문호가 내게 손을 뻗고 있었다. 그런 문호를 안고 있는 것은 여인과 소녀. 문이 시라소를 드는 순간 위험을 느낀 그녀들은 온 몸을 던져 문호를 감싸 안은 것이다. 

소녀가 울었다. 내 옆을 빠르게 지나가 그런 소녀와 여인 그리고 문호의 곁으로 뛰어간 이는 한스덴이었다. 그는 영문을 모르는 얼굴이었지만, 곧 내게 손을 뻗으며 가지 말라는 문호의 목소릴 듣고 그를 껴안았다. 

나는 눈을 감고 문의 목을 힘을 주어 끌어안았다. 문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내 허리를 붙잡는 손에 힘을 풀지 않고 마차와 말 사이에 연결된 줄을 끊어 말의 고삐를 쥐고 그 위에 올라탔다. 

말 위에 올라타게 된 나는 그렇게 한스덴 저택에서 멀어졌다. 

문은 말에서 내려 곧장 트란슈로 향하는 배에 올라탔다. 그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고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어떤 것도 묻지도 않았으며 들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트란슈에 도착하는 그 순간까지도 문은 나를 바닥에 내려놓지 않았다. 늦은 밤이 되어서야 저택에 도착했지만, 집사가 입구를 개방하고 마중을 나와도 눈길조차 주지 않더니 그대로 방으로 올라갔다. 

스스로 걸어본 적도 없었음에도 극심한 피곤함을 느낀 나는 방안에 들어와서까지 나를 내려놓지 않았다. 그렇게 잠이 많은 아이가 단 한 번도 눈을 감지도 앉아 쉬지도 않고서 나를 안고 있었기 때문에 피로가 누적되었을 것이다. 

“문.”

내려놓으라는 말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트란슈에 도착하고서 거의 처음으로 말을 걸었음에도 나는 다시 입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천천히 나를 향해 돌아오는 붉은 눈동자가 서늘하기 그지없었기 때문이다. 

어째서 화가 났는지 알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떼어내지 못한 내게서 망설임을 읽었던 것이다. 나조차도 자각하고 있지 못하던 것이었다. 끝내 뿌리치지 못한 채 이어진 끈을 자른 건  문이었다. 

“놔라.”

“…….”

문은 내 말을 듣지 않았다. 결국 손을 들어 가슴을 밀쳐내고 빠져 나오려고 하자, 그런 나를 비웃기라도 하는 듯 내 머릴 감싸 짓눌렀다. 아무런 표정 없는 인형마냥 의무적으로 하는 행동 같았다. 

“다음엔 죽일 거야.”

“안 돼.”

내내 침묵하던 녀석이 입을 열었다. 그 목소리가 섬뜩하게 느껴진 것은 처음이었다. 여전히 품안에 가둬진 나는 필사적으로 벗어나려고 했지만, 문은 그전에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상관없잖아. 죽여도.”

“죽이면 안 돼.”

“…….”

내내 짓누르고 있던 뒤통수에 힘이 풀리는 것 같더니, 거칠게 머리를 잡아당기는 힘에 의해 

가슴에 닿았던 머리가 떼어졌다. 고통은 없었지만, 놀란 건 사실이었다. 나를 내려다보던 문은 화로 가득한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시퍼렇게 날이 선 채 입 꼬리를 올리기 시작한다. 

“어째서?”

문이 이유를 물었다. 서늘한 시선이 닿자 온 몸에 한기가 도는 섬뜩함이 맴돌았지만, 그 물음에 대답을 미룰 수는 없었다. 

“그게 네 목줄이니까.”

“…….”

목을 감싼 붉은 자상. 사라지지 않는 흉터는 창백한 살갗위에서 더욱 깊게 파고드는 것처럼 붉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이것이 나의 추악하고 더러운 이기심의 정체였다. 

가나를 살리기 위해 나는 문에게 목줄을 달았다. 가나의 삶과 뒤바꾼 문의 자유. 그 누구보다 드높은 천공을 누벼야 할 아이의 목에 쇠사슬을 걸어 놓았다. 가나를 죽인다는 것은 그런 쇠사슬 끊고 내 손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다. 

나는 새를 사랑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진정으로 새를 사랑한다면, 날개를 자르지도 않을 것이며 우리에 가두지도 않을 것이고 사슬을 채우지도 않을 것이다. 

나는 손을 들어 문의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잡아 당겼다. 마주친 붉은 눈동자가 좀 더 가까이 닿았다. 

“목줄을 끊는다면 네 발목을 잘라버리겠다.”

그러나 나는 새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었다. 욕망하고 집착하며 소유하고자 한다. 자유를 갈망하는 새를 잡아 우리에 가둬 영원히 천공을 그릴 수 없도록 잔인하게 원한다. 

뒤통수를 잡고 있던 손에 힘이 풀리더니, 그대로 내 머리를 받쳤다. 그대로 문은 나를 끌어안았다. 깊이 끌어안고 주저앉아 내 목덜미에 고개를 박았다.

그런 문에게 나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죽이지 마.”

“응…….”

이제야 조금 안심이 된 모양인지 숨소리가 고르게 들려왔다. 어쩐지 무게감이 느껴진다 싶었더니, 그대로 문은 잠이 들어버렸다. 커다란 녀석이 주저앉으려면 침대에서 할 것이지 바닥에 엉덩이를 붙이는 바람에 낭패였다. 

긴장되고 날이 선 몸으로 여기까지 무사히 도착한 것만으로도 다행인 것이었다. 일으켜 세우거나 깨운다는 것은 포기하고 고개를 돌려 문을 보았다. 

눈을 감고 잠들어 있는 문의 머리를 쓰다듬어 보았다. 부드럽고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은아. 들어 와라.”

익숙한 인기척에 말을 걸자, 굳게 닫혀져 있던 문이 열렸다. 은아는 커다란 몸을 문 사이에 두고 고개만 조금 더 내밀어 보고 있었다. 

“조금 도와줘야겠구나.”

침대까지 옮겨야 하기 때문에 힘을 쓸 사람이 필요했다. 나는 근력이 좋지 않아 저곳까지 문을 들쳐 업고 갈 수 없기 때문이다. 

말끔한 차림새를 하고 있던 은아가 조심히 들어와 문을 들어올렸다. 매우 가뿐하게 들어 올려 놀란 건 내 쪽이었다. 

문이 낯선 상황에 깨어날 것처럼 인상을 쓰자 냉큼 손을 들어 머릴 쓰다듬었다. 그러자 인상을 풀고 다시 잠드는 것이 좀 전까지 날을 세우던 모습이 잠투정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주위에 살기가 없다면 예민하게 구는 아이가 아니기 때문에 은아의 손을 빌려 쉽게 침대에 눕힐 수 있었다. 가지런히 눕혀 갑갑해 보이는 겉옷을 벗겨 이불까지 끌어다 덮어주는 것이 하루 이틀 한 솜씨가 아니었다. 검술은 안 가르치고 가사를 시켰다면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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