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화 (29/35)

검은 태양  

흘러들어온다. 풀이 스치는 소리가 바람결을 타고 귓불을 더듬는 듯 했다. 나는 검을 쥔 채로 내 키 만한 바위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눈을 감고 온 몸의 잡음을 덜어내고 지나치는 모든 것에 집중했다. 벌레 따위가 기어가는 소리가 들릴 쯤 나는 눈을 떠 소량의 기를 검 날에 스며들게 만들었다. 

아직은 검 전체를 기로 덮는 것은 할 수 없었지만, 날을 뒤덮은 기들이 일렁이는 것이 손 끝에 느껴졌다. 바위를 바라보았다. 단단한 바위의 취약한 결을 따라 눈동자가 올라가자 검을 쥔 손도 올라갔다. 

그리고 나는 망설임 없이 바위를 향해 검을 내리쳤다. 그리 힘을 준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바위는 마치 두부를 가른 것처럼 부드럽게 잘려 양쪽으로 갈라졌다. 

바위를 베어내고 기를 잠재웠다. 

“하아…….”

조금이라도 빼낼 수 있던 기의 양이 어긋났다면 나는 그 자리에서 죽었을 것이다. 체력과 정신력 소모가 심한 탓에 잠깐 바위를 가르기 위해 사용한 기에 의해 아찔한 피로감이 느껴졌다. 

뚝뚝 땀까지 흐르면서 약간의 현기증이 느껴졌지만, 이것은 지금의 내가 얼마나 엉망이 되어버렸는지 증명하는 것이었다. 

인기척이 느껴졌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그곳엔 문과 은아가 있었다. 은아는 어쩐지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으로 꼼지락 거리고 있었고 문은 어느새 눈앞까지 다가왔다. 

아무렇지 않게 검을 넣고 문을 지나치려고 했지만, 한 걸음을 떼는 순간 다시 한 번 현기증이 엄습했다. 균형을 잃고 쓰러진다고 생각하는 순간, 내 배를 받친 것은 문의 손이었다. 그대로 잡아 밀어내려고 했지만, 문은 배를 감싸더니 그대로 두 손으로 안았다. 

문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쳤지만, 문에겐 이렇다 한 표정이 없었다. 그는 갑자기 내 목덜미까지 다가와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킁킁 거리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적나라하게 맡자, 땀으로 인해 불쾌한 냄새가 날 것 같아 얼굴을 밀어 냈다. 

“뭐 하는 짓이야.”

냄새를 맡는 걸 그만두지 않으려기에 묻는 것이었다. 그러나 문은 답이 없었다. 그의 시선이 조금 올라가 내가 갈라버린 바위를 향했다. 

문은 기를 사용하지 않아도 시라소로 충분히 바위를 가르고도 남을 녀석이었다. 그러니 저것이 신기할 법도 없을 것이다. 무엇에 의문을 품는 것인지 대충을 알 것 같았다. 

“두 마리 와 있어. 당신을 찾아.”

“두 마리?”

“시끄러운 벌레들.”

아아. 

슈레이와 나비를 말하는 듯 했다. 알겠다며 내려놓으라고 했지만, 문은 눈동자만을 굴려 나를 바라보았다. 미소 짓지 않는 얼굴로 다가와 짧은 입을 맞추고 그대로 안은 채로 걸음을 옮겼다. 싫다는 말 대신이었다. 

*

“뭐야, 어디 아프기라도 하는 거야?”

“얼굴이 창백합니다. 당장 의술사를 불러 오겠습니다.”

문에게 안겨 안으로 들어와 두 놈들을 보자마자 내게 한다는 소리가 저것이었다. 소란을 피우기 전에 문에게 나를 의자에 앉게 하라 손가락질 했다. 문은 천천히 걸어가 붉은 의자에 나를 조심히 내려놓았다. 

“필요 없다.”

“말대답하는 거 보니, 당장 죽지는 않겠군.”

슈레이가 밖으로 나가 의술사를 불러오려는 나비의 손목을 잡았다. 놓으라는 말도 무시한 채 끌어당기자 끌러오지만, 당장이라도 화를 낼 기세였다. 그 모습에 혀를 차며 말했다.

“너도 소란 피우지 말고 앉아라.”

“거봐, 미움 안 받으려면 말 듣는 게 어때?”

슈레이가 웃으며 말하자 슈레이를 노려보던 나비가 다시 염려로 가득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슈레이는 단숨에 나비의 팔목을 잡아끌어 자신의 옆에 앉도록 만들었다. 불만으로 가득한 표정을 짓던 나비였지만 재차 큰 소리를 내진 않았다. 

내 양 옆으론 문과 은아가 섰다. 

슈레이는 그런 은아를 향한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좋지 않는 시선으로 문과 은아를 바라보는 슈레이를 집중시키기 위해 짧게 손을 마주쳤다. 

“할 말은?”

“쿠웨드가 움직였다. 이번 해적 소탕 건으로 단단히 벼르고 있던 모양이더군.”

“므헨은 어떻지?”

“황태자는 암살당해 이 빠진 왕이 필사적으로 저항중이지. 우리 쪽과 루카디아에게 동맹을 요청했어. 즉시 지원병 투입을 바라고 있지만, 쿠웨드 쪽에서도 므헨 정벌을 위한 지원병을 요청하더군.”

므헨은 작은 섬나라로 쿠웨드와 가장 가까이 붙은 소국이다.

거침없이 므헨을 침공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부족한 전쟁 물자를 채우고 세력을 넓히고 군사권을 확보하고 앞으로의 전쟁의 본보기로 삼기 위해서였다. 

명백한 도발이었다. 

손을 잡지 않으면 필시 이렇게 점령당할 것이다. 

트란슈가 해적을 소탕해 전쟁 물자를 빼돌렸다고 생각하고 있기에 조급한 것이겠지. 

“쿠웨드는 므헨에 사신을 보낼 것이다. 전쟁을 속전속결로 끝내 버려야 할 테니까.”

“사신을?”

“혁명을 위해 움직일 놈들 말이다.”

“!”

잠시 슈레이와 나비는 숨을 들이켰다. 내 말에 놀란 것인지 눈동자가 커지더니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하. 하하…….”

슈레이는 자신의 팔을 쓸어내리며 나를 괴물 바라보듯 쳐다보았다. 

“그래서 카인관에 가라는 것이었군.”

“암부가 므헨의 황태자 암살에 성공하였으니, 쿠웨드는 전적으로 그들을 신뢰할 것이다. 그러니 넌 므헨의 동맹에 응하고 향후 쿠웨드의 도발에 전면으로 맞서라.”

“그들이 강화조약을 깰 거라 이 말이지.”

“므헨과 손을 잡으면 루타디아의 지원도 가능해지니 열세에 몰리더라도 버틸 수 있을 거다.”

“…….”

슈레이가 잠시 침묵하더니 시선을 들어 나를 향했다. 그는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대체 넌 어디까지 알고 있다는 거지?”

“아무것도.”

과거 트란슈는 쿠웨드의 협박과 지원을 동시에 받으며 로던프를 침공하려 했다. 로던프의 역습을 노리려던 쿠웨드의 계략에 놀아난 과거와는 달리, 전쟁의 주체가 되어야 하는 트란슈의 입장이 뒤바뀐 것이다.

때문에 나는 예측이 가능 할 뿐이지 결과를 확신한다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나는 질 전쟁에는 나서지 않는다. 그것이 드론이었던 내가 전쟁에서 무패 할 수 있었던 이유였다. 

슈레이는 등을 기대고 조금은 여유로운 자세로 능숙하게 화제를 돌렸다. 내게 더는 그것에 대해들을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네 기사 작위가 공식 승인 됐다. 권신들 승인 받느라 골 좀 아팠다고.”

“수고했다.”

“네가 자꾸 잊어먹는 모양인데. 나, 왕이거든?”

“옥새를 가져라. 그것이 왕으로써의 최소한의 증명이다. 옥새가 없는 왕은 허수아비일 뿐이지”

“맞는 말이라서 화도 안 나네. 그런데, 왕이 되면 널 가질 권력도 생기는 건가?”

문이 눈을 번뜩이며 눈앞의 슈레이를 바라보았다. 슈레이는 발톱을 숨기고 살기를 교묘하게 숨긴 짐승의 기척을 느끼지 못하고 실실 웃고 있었다. 옆에 있는 나비가 노골적으로 그를 노려보자 그것에 재미있어 하는 얼굴이었다. 

“나는 들개, 왕은 모시지 않아.”

“왕이 못 가지는 건 없어.”

“인간이 가질 수 없는 건 있지.”

“다음엔 옥새를 구경시켜주지. 그때까진 섣불리 움직이진 마. 아, 혹시 이반이라는 자를 알아?”

내가 대답이 없자, 바로 말을 이었다.

“갓 백작의 작위에 오른 햇병아리야. 양자로 들어와 가주가 죽자, 그 작위를 이어 받았지. 최근 로던프에 장기간 체류에 대한 승인을 받았다. 여기까진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트란슈에 체류할 동안 센티아 공작과의 비밀리에 접촉이 있었어. 움직임이 수상해. 냄새가 나.”

“쿠웨드 사주를 받은 건 아니다.”

“그렇게 확신이 가능한건 아니지 않나?”

“논점을 흐리는 건 무시해라.”

슈레이는 머리를 긁적였다. 미심쩍은 부분이 있다는 건 사실이지만, 내 말에 부정을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쨌건 넌 접촉은 삼가. 이반은 이쪽에서 주시 하도록 지시했으니까.”

슈레이가 등을 돌리기 전에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던 나비의 손목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나비가 무어라하기 전에 힘을 주어 끌어당기고 웃는 낯으로 나를 보았다.

“의술사를 불러주지. 당분간은 내게 맡겨라.”

그대로 나비를 끌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나비도 할 말이 많은 것 같은 표정이었지만, 슈레이에게 끌려 나가 그 어떤 것도 물을 수 없게 되었다. 

나는 조금 무거워진 몸으로 의자에 등을 녹아내리듯 기댔다. 쉽게 피로감을 느끼는 지금의 나로는 앞으로의 전쟁을 견딜 수 있는지가 관건이다. 전쟁은 전략과 지구력의 싸움이다. 어느 하나라도 뒤쳐진다면 허점이 쉽게 노출 될 것이다. 

“날 써.”

방심하고 있던 내게 문의 목소리가 들렸다. 조금 고개를 움직여 문을 바라보았다. 문은 내가 고개를 올리려하자 한 쪽 무릎을 굽혀 몸을 낮췄다. 때문에 고개를 움직이는 것 대신 눈동자만이 아래로 떨어졌다.

“당신 것이잖아.”

똑바로 향하고 있는 붉은 눈동자를 주시했다. 피가 흐르는 듯한 눈동자가 일순간 밝은 빛을 보이는 듯 했다. 나는 손을 들어 문의 뺨에 대 보았다. 살갗에 닿은 손바닥 쪽으로 문은 고개를 돌렸다. 웃어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저 아무런 생각 없이 미소 짓고 살았다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을 가져가고 의자에서 내려왔다. 문을 지나치려다 잠시 멈춰서 명했다.

“용병을 소집하라. 관찰병을 구성해 공방전에 대비한다. 지위는 직접 지시하겠다.”

문이 미소를 지었다. 그는 내 손을 붙잡고 손등에 입을 맞추며 숨결처럼 속삭였다.

“나의 왕을 위하여.”

*

빼앗겼다. 빼앗으려고 한다. 손 안에 쥘 수 있는 모든 것을 또 다시 허상으로 만들어 버리려고 했다. 정점에 와 닿았다고 착각하게 만들어 비웃듯 가로챘다. 2왕자와 함께 있는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라마였다. 돌아선 이반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 자신의 곁으로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 가늘게 속삭였다. 

“겨우 이 정도였나?”

“…….”

이반은 눈동자를 돌려 라마가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2왕자는 자신을 대할 때와는 확연히 차이가 보일정도로 다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상대적으로 가벼울 수밖에 없는 라마를 들어 올리는 것이 그가 왕족이라는 사실을 잊게 할 정도로 말이다. 

그는 늘 아무렇지 않게 손에 쥐곤 하였다.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다시 한 번 확인 당하자 쓴 것이 목구멍에 차올라 넘어올 것 같았다. 

“포크를 쥐어줘도 먹질 못하니, 나보고 더 어쩌라는 거지?”

젖어서 눌어붙은 이반의 머리카락을 떼어주던 엔도는 비웃듯 내려다보았다. 이반은 엔도를 바라보았다. 잿빛머리카락이 시야를 덮고 있었지만 그는 유연하고 아름다운 괴물이었다. 라마는 자신의 손에 쥔 마지막까지 가져간다. 눈앞에 있는 잿빛 짐승마저 등을 돌린다면 앞으로 영원히 달은 떠오르지 않을 것이다. 

“이용 할 수 없으면, 없애면 돼.”

“그러면 가질 수 없게 될 텐데?”

“난 가지고 싶은 게 아니야. 빼앗고 싶은 거지”

이반이 그렇게 말하며 엔도를 노려보다 등을 돌렸다. 그런 이반을 내려다보고 있던 엔도는 멀어지는 이반의 등을 바라보다 시선을 2왕자가 있는 곳으로 보냈다.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2왕자의 손에 들려 있는 작은 것이 더할 나위 없이 사랑스러워 보였다. 

“빼앗고 싶다라…….”

의미심장한 표정이 된 엔도 역시 몸을 돌리고 홀연히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2왕자는 기분 나쁜 기류를 느꼈다. 앞으로 로던프에 심상치 않는 바람이 불어올 것이다. 무의식적으로 위험을 감지한 그는 계승을 미루는 왕의 행적을 되짚어 보았다. 

1왕자가 보위에 오른다는 것은 누구도 의심할 사람이 없다. 그럼에도 왕은 왕좌를 내놓으려 하지 않는다. 마치 일부러 내란을 조성하는 듯한 행동이었다. 

최근 들어 성에 들어오는 낯선 자들이 늘었다. 트란슈와 쿠웨드의 사신을 제외하고도 신원이 불분명한 자들이 수시로 드나들고 있다는 것이다. 모두에게 아직 자신은 건실하다 말하려는 듯 각지에 사령들을 불러 왕의 건사를 바라는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노망이 들어 저러는 것이라면 이해라도 갔다. 2왕자가 납득할 수 없는 것은 1왕자였다. 권신들과 몇 번 부딪친 것을 제외하고는 실질적인 왕권은 모두 1왕자에게 있었다. 이번 회담도 그가 주체로 끝내지 않았는가. 

그렇다는 건 그 역시 내란을 기다리고 있다는 뜻이다.  

1왕자는 다름 아닌 선왕에게 숱한 암살의 위협에서 살아남았다. 

이번 내란으로 본격적인 물갈이기 시작된다면, 선왕을 시작으로 자신과 4왕자 또한 목숨을 부지하기는 힘들 것이다.

놈은 절대로 위협이 될 만한 씨앗은 남겨두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부분은 선왕과 똑같았다.

순간, 2왕자는 자신의 목이 잘려나가는 듯한 기분을 느끼고 목덜미에 손을 올렸다. 

“어?”

멈춰선 2왕자는 문득 이상한 상황을 목격한다. 두 명의 인영이었는데 하나는 작고 하나는 커다랬다. 작은 것과 큰 것 모두 낯이 익은 자들이었다. 

작은 것은 어린나이에 문호의 자리에 올라간 것도 모자라 전대 문호를 뛰어넘는 지혜를 가졌다 알려진 천재였고, 큰 것은 최연소 기사작위를 받아 그 실력을 따라올 자가 없어 1년도 되지 않아 1기사단에 배정받아 드론의 오른쪽 팔과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이 둘에게도 약점이라는 것이 있었으니, 천재적인 두뇌를 가졌음에도 스스로 입을 열수 없는 문호는 농아였다. 기사는 규율에 지나치게 집착하여 융통성이 없고 적이 많으며 사교에 능한 것이 아니라 친분을 가지는 귀족 또한 손에 꼽혔다. 

전혀 개연성이 없어 보이는 둘이었지만,공통점이라곤 대인관계가 전무하다는 것인 기사와 문호가 함께 있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았다. 

“안됩니다! 대체 뭘 하시겠다는 겁니까?!”

드물게 기사가 소리를 쳤다. 사람이 오고 가는 것이 적은 곳이라 망정이지, 품위를 잃고 소리를 치는 모습을 다른 사람이 보았다면 놀라는 걸로 끝나진 않았을 것이다. 

호기심을 지우고 괜한 일에 끼어들 생각이 없던 2왕자는 그대로 걸음을 돌리려 했다. 그러나 그런 2왕자의 발목을 기사가 붙잡았다. 

문호는 기사를 지나쳐 어디론가 향하려고 했다. 그러나 기사는 그것을 용납할 수 없다는 듯 앞을 가로 막았고 뒤이어 팔을 붙잡아 세우기까지 하였다. 

한낱 기사의 신분인 자가 왕의 대변인이라고 불리는 문호에게 보일 수 있는 무례함의 정도가 지나쳤다. 더구나 한줌에 잡히는 팔을 자신이 보기에도 험하게 잡고 있는 것 같아 두고만 볼 수 없던 2왕자는 그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문호와 기사는 2왕자의 존재를 눈치 채고 그대로 눈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그들 앞에 다가선 2왕자는 아직까지도 문호의 손목을 놓지 않고 있는 기사의 손이 거슬렸다. 어떠한 사정이 있다고 하더라도 기사된 자가 자신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 소년을 거칠게 잡아 세운다는 것은 보기 좋지만은 않았다. 

“어째서 소란을 피우는 거지?”

“죄송합니다.”

이유에 대해 묻고 있음에도 사과가 먼저였다. 원하는 답이 아니었지만, 문호는 말을 할 수 없으니 기사가 입을 열게 만들어야 했다. 좀 더 몰아세우려는 순간, 얌전히 있던 문호가 입을 연 것이다. 

“검을! 배우고 싶습니다. 허락하여 주십시오.”

“?!”

놀란 2왕자는 잠시 넋을 놓고 문호를 바라보았다. 결의에 차 있는 눈동자를 보고서야 정신을 차린 2왕자는 자신이 무언가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는지 의심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이전에 어린 문호가 검을 배우고자 청했다. 문호는 가디언 외에는 사병을 부리거나 용병을 고용하는 것을 할 수 없다. 그러나 기사의 보호를 받을 수 있으며 왕권을 이용할 수 있으니, 로던프에서 이보다 영향력 있는 관직자린 없을 것이다. 

무모하게 검을 배우고 싶다는 말을 할 정도로 나약한 자리는 아니라는 뜻이다. 하지만 놀란 건 단순히 문호가 검을 배우고 싶다는 것이 아니었다. 농아인줄만 알았던 소년이 제법 또렷하게 말을 하고 있지 않는가. 

혹시 자신이 잘못 알고 있는가 하여 곁을 지키고 있는 자칸에게 물었다. 

“말을 못하는 게 아니었나?”

“…….”

자칸이 고개를 숙였다. 그가 잘못된 정보를 가져올 리도 없었고, 분명 처음 보았을 때 그때도 옆에 있는 기사가 분명히 말했다. 그는 말을 하지 못한다고.

“검을 배우고 싶다고?”

“네.”

“문호에서 기사로 전직이라도 할 셈인가?”

“힘이 필요합니다.”

“문호의 작위는 기사보다 우위에 있는 상급고위관직이다. 지금 네 작위보다 힘이 되는 건 없어.”

“제겐 검이 그 힘입니다.”

2왕자는 묘하게 문호에게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어딘가 어렴풋이 자신과 닮은 듯 하다. 무언가 지키고 싶은 것이라도 있는 것인지 집착하고 열망하는 것이 자신이 어릴 때와 닮아 있었다. 그 때문일까. 청을 뿌리칠 수 없어 그는 고민하는 척 말했다. 

“하지만 문호는 문관이다. 정식으로 검을 배우게 할 순 없어.”

“…….”

눈에 띠게 실망한 표정을 짓는 것이 이제야 또래의 소년으로 보였다. 두 개의 포크를 모두 쥐어주고 나서야 또래로 보였던 라마보다야 나았다. 

“그보다 요즘 내가 검술에 흥미가 있으니, 문호께서 내 취미에 어울려주지 않겠나?”

“네!”

자신이 무슨 뜻으로 한 말인지 정확하게 파악한 문호의 얼굴에 꽃이 피어나듯 웃었다. 역시 아이라면 저렇게 웃어야 하는 법이다. 

반대로 기사 쪽은 일그러지는 표정을 지었다. 단순히 검에 대한 자부심 문제는 아닌 것 같았다. 저대론 검술 선생님을 하겠다고 나서지 않을까 생각 될 정도였으니까.

“제가 검을 지도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2왕자는 잠시 할 말을 잃고 기사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갑자기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어깨까지 들썩이게 되었다. 그러나 기사는 상당히 진지한 얼굴이었다. 

겨우 웃음을 삼키고 자신의 옆에 있는 자칸에게 물었다. 

“저 놈의 이름이 뭐였지?”

“아폴리네르 벤 폴리앙입니다.”

자칸에게 이름을 듣고 그제야 그런 이름이었다고 생각해낸 2왕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시선을 내려 벤을 바라보았다.

“검술 스승이라면 자칸으로 충분하다. 나도 있고.”

“하지만……!”

“왕족이 묻기 전에 입을 열다니, 그대는 1기사단 소속이라는 걸 감사해 여겨야 할 것이다.”

차갑게 내려 보자, 벤은 고개를 조아렸다. 단순히 겁을 주려는 것뿐이었지만, 엄격하고 예를 중시하는 그에겐 가장 위협적인 것일 테다. 

어지간히도 문호를 따르는가 싶었지만, 보는 눈이 많은 이곳에서 자중할 필요가 있었다. 2왕자는 걸음을 돌렸다. 

“가지.”

작은 소년이 벌떡 일어나 뒤를 따랐다. 2왕자는 잠시 문호가 가까이 올 때까지 기다리다 벤을 바라보았다.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었지만, 그는 잠시 망각한 기사도를 되짚어 볼 필요가 있었다. 

*

“이름이 뭐지?”

“....?”

“문호가 네 이름은 아닐 것 아니냐.”

뜬금없이 물어 조금은 놀란 가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2왕자는 요즘 어린 아이들은 굉장히 성장이 느린 것이 아닌지 염려 되었다. 배를 곯는 것도 아닐 텐데도 살이 붙지 않는 것은 생각보다 한스덴이 깐깐해 책만 읽게 하고 애를 쥐 잡듯 하고 있는 게 아닌지 의심 됐다. 

“가..나입니다.”

“가나. 좋은 이름이다.”

뜻을 알고 있느냐 물어볼까하여 얼굴을 바라보았더니 볼을 발갛게 물들이고 있어 엉뚱한 것을 내뱉고 말았다. 

“소중한 사람이 지어준 것이구나.”

고개를 먼저 끄덕이더니 작게 ‘네’라고 대답하는 모습이 영락없이 또래의 아이였다. 천재라고 불리는 가나는 어린 나이에 문호가 되어 열등한 자들의 견제를 받고 있을 것이다. 더러는 아직 어리다는 것을 이용하려는 자들도 있겠지. 

확실히 자신의 몸을 지킬 힘 정도는 필요해 보였다. 

“넌 가서 아이의 체구에 맞는 검을 가져와라.”

2왕자가 자칸에게 명하자 별 다른 대답 없이 고개만 숙이고 그대로 사라졌다. 2왕자가 가나를 데리고 간 곳은 주로 왕족이 검술 수업을 받을 때 쓰이는 넓은 관이었다. 시중을 드려는 하인들을 모두 손을 휘저어 물리고 거추장스러운 겉옷을 벗어 몸을 가볍게 한 2왕자는 가나를 바라보았다. 

“검을 본 적은?”

“네.”

“만져 본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닿아 본 적은 있습니다.”

“닿아 봤다니?”

“…….”

2왕자는 잠시 무슨 생각을 하는 것 같더니 성큼 성큼 가나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좀 전에 벤이 잡았던 팔목을 잡아끌어 보았다. 놀란 가나가 2왕자를 바라보는 데 벗어나려 힘을 주는 것 같지만, 전혀 악력이 잡혀지지 않았다. 

벤이 세게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보다 어린 아이도 뿌리칠 수 있는 힘에도 벗어날 수 있는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처음 보았을 때도 목을 덮을 정도의 상의를 입고 있던 것이 떠올랐다. 그대로 손을 들어 목 부근의 옷을 내려 보았다. 서서히 드러나는 흉터자국. 

“2년 정도 된 거로군. 이런 상처가 있으니 악력이 잡히지 않는 거겠지.”

“…….”

2왕자가 놓아주고 옷을 여며주고 손을 떼자 가나는 뒤로 물러나 고개를 들었다. 

“재활은?”

“하고 있습니다.”

“일상생활을 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겠지만, 오른손으로 검을 들기엔 깊은 상처다.”

“할 수 있습니다!”

“당연히 해야지. 왼쪽 어깨는 멀쩡하잖아?”

“?!”

2왕자는 자칸이 가지고 온 검을 받아 그대로 가나에게 던졌다. 어째서 이렇게까지 해 주는 것인지 영문을 알 수 없는 가나가 표정으로 묻자 2왕자는 태연하게 답했다.

“검을 쓰는 문호라니, 폼 나잖아~”

묵직한 검을 든 가나는 2왕자를 바라보았다. 

“왼손을 오른손처럼 써라.”

순수하기만 한 맑은 눈동자에 결의가 차자 눈이 부시도록 일렁이는 듯 했다.

“네!”

"그러면, 가볍게 놀까?"

기특한 대답에 웃는 2왕자는 자신의 허리춤에서 검을 뺐다. 당장 가나가 진검을 다루기에는 무리가 있어 당분간은 목검을 이용할 생각이지만 가나는 이미 한 번 검에 의해 상처를 받았다. 진검의 무게보다 두려움을 먼저 경험했기 때문에 혹여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공포를 받아들이게 만들어야 했다. 

“…….”

순식간에 2왕자의 검이 순식간에 바람을 가르고 가나의 눈앞에 드리웠다. 겁에 질려 움직이지도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던 초식 동물이 기습하는 날을 검집도 빼지 못한 검으로 들어 막았다. 두 손으로 잡아 막았지만, 작은 몸이 밀려나 넘어지면서 바닥에 구르자 놀란 것은 2왕자였다. 

저런 상처를 달고 있음에도 다가오는 검을 두려워하기는커녕 노련한 검사처럼 정확하게 방향을 감지하고 막기까지 했다. 도중에 멈출 생각이었던 2왕자가 순간적인 자제력을 잃을 만큼 정교하고도 빠른 방어였다. 때문에 2왕자는 힘을 빼지 못해 날아가다시피 넘어진 가나를 확인하고 나서야 실수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급히 검을 넣고 가나에게 달려갔다. 

“그러게 왜 막고 난리야! 쓸데없이 눈만 좋아서는!”

“…….”

가나는 자신의 팔을 바라보았다. 검을 막은 것만으로도 통증이 동반하며 떨리고 있었다. 그렇다고 제대로 막는 것조차 아니었다. 가나는 나약함이 여과없이 드러나는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라마는 지금의 자신보다 어린 나이였음에도 짐승에게서 지켜 주었다. 어떠한 사정으로 지금 자신을 멀리하고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짐승과 관련이 있다는 건 확실했다. 

그날 라마를 물고 가 버리는 짐승을 붙잡을 수 없었다. 자신은 라마를 구할 수 없었다. 그 사실이 가나를 미치게 만들고 있었다. 

“다시 한 번……. 부탁드리겠습니다.”

“?!”

가나는 검을 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2왕자가 검을 쥐는 형태. 그 자세. 내지르지 직전의 각도. 천천히 떠올리며 자세를 잡은 가나의 눈이 용맹한 매와 닮아 있었다. 

*

“욕의를 걸치십시오.”

2왕자의 곁으로 자칸이 다가왔다. 얇고 흰 욕의를 들고 맨몸으로 욕조에서 일어나는 2왕자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네가 보기엔 어떻더냐?”

“무슨 말씀이신지..?”

“애송이 문호 말이다. 처음 검을 잡고서도 막았지 않더냐. 결국 그 하나가 전부였지만.”

자칸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허술하게 걸치고 있는 욕의를 정돈해 주고 그가 온전히 욕조에서 나올 수 있도록 뒤로 물러났다. 

검을 쥐는 방법과 자세. 어린 문호는 처음 검을 잡아 본 것 치고는 확실히 재능 있는 인재였다. 눈썰미가 좋은 것인지 아직은 어려 힘은 부족하지만 곧바로 정자세를 취하는 것도 대단하지만, 검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도 대단했다. 

보기에는 유약하나 배짱이 두둑하여 겁이 없는 것도 재능이었다. 그 모습이 묘하게 자신의 주군과 닮아 있었다. 

하지만.

“한 손 만으로 검을 들기엔 한계에 부딪힐 듯합니다.”

“그건 꼬맹이 몫이지. 좌절하고 주저앉든, 벽을 뚫고 앞으로 나아가든.”

“저는……. 주군의 의중을 잘 모르겠습니다.”

자칸은 어째서 2왕자가 가나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기본적으로 권신들과 상위 관직들에게 거부감 같은 것이 있는 분이셨다. 

사정이 딱한 라마에게 온정이 가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한스덴 가에서 부족함 없이 자란 문호에게까지 보내는 관심은 과한 것이었다. 

“어리니까.”

“…….”

“썩어 문드러진 어른보다야 가능성이 있지 않겠느냐.”

자칸은 깨끗한 천을 가져와 물기가 떨어지는 2왕자의 몸을 닦아 주었다.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에 떨어지는 물기를 닦아 주면서 그는 드물게 미소를 지었다. 

“네.”

“아, 그런데 그놈은 마음에 들지 않아.”

“…….”

“처음 돋아난 뿌리부터 썩어서 올라오는 것 같거든. 수상한 게 그것만 있는 건 아니지만…….”

2왕자가 누구를 두고 하는 말인지 자칸은 곧 떠올릴 수 있었다. 겉보기엔 흠집 하나 없는 아이처럼 순수해 보였지만, 확실히 속내는 알 수 없는 자였다. 트란슈 백작의 작위로 사신과 함께 대동하지 않았던 것만으로도 수상하지만, 가장 의심쩍은 것은 그의 곁을 지키고 있는 자다. 

기척을 숨기는 것이 능숙하여 오히려 정체를 파악하는 대에 수월했다. 이쪽에 적의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자신이 생각하는 자가 맞는 다면 절대로 방심을 해서는 안 되는 자다. 

심각한 표정을 짓는 자칸을 바라보던 2왕자는 웃음을 짓고 그대로 곁을 지나쳤다. 눈앞에서 사라지는 2왕자를 쫓아 몸을 돌린 자칸은 말주변이 없어 묵묵히 주군의 뒤를 따르려 했다. 

그전에 2왕자가 멈춰 다시 고개를 돌려 자칸을 바라보았다. 색이 짙은 살갗에 황색 머리카락. 척 보기에도 로던프 인은 아니었다. 

자칸은 2왕자가 노예시장에서 데려온 아이였다. 

전쟁으로 멸망되었다는 이국의 아이가 노에 사장에 팔려나가려는 것을 사들인 후로 맹목적인 충성을 받고 있었다. 그런 것이 싫지는 않지만, 자유롭게 풀어준다고 해도 거절하고 곁을 따르는 것이 안쓰러울 뿐이다. 

데려올 땐 자신보다 작았던 것 같은 데 어느새 자신을 따라 잡더니 저 만큼이나 커 버렸다. 

‘아이가 자란 다는 것은 저런 것이겠지. 자라는 아이를 지켜본다는 건 이런 것이었겠지.’

“나는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

“옥새를 쥐지 못하는 왕가의 숙명이니, 네가 그런 표정 지을 건 없다. 이건 어린 4왕자도 각오하고 있는 것이니까.”

“…….”

“그래도 그 어린 것들이 자라 무엇이 될지는 지켜보고 싶다.”

“주군…….”

2왕자는 천천히 자칸에게 다가와 머리를 쓰다듬었다. 

“자칸, 너는 그때까지 곁에 있어주렴.”

자칸은 그대로 한 쪽 무릎을 꿇고 앉아 고개를 숙였다. 

“눈을 감는 순간까지.”

*

그 뒤로도 2왕자는 자주 가나와 어울리곤 하였다. 하루가 다르게 목검을 휘두르는 것이 능숙해지니 지켜보는 것이 지루하지 않았다. 하지만 너무도 검을 배우는 것에 너무도 열정적인 탓에 2왕자가 제때 끊어내지 않으면 그 작은 손에 피가 묻어나올 때 까지 목검을 휘둘렀다. 

어째서 가나는 검에 집착하는 것일까. 

그렇게 해서라도 강해져야 하는 까닭이 무엇일까. 

2왕자는 오늘도 간혹 자칸에게 자세 교정을 받으며 허공에 목검을 휘두르는 가나를 지켜보았다. 

그러다 벌떡 일어나 집중하고 있는 가나의 손목을 붙잡았다. 덜덜 떨리던 손은 잡히자마자 목검을 떨어트렸고 손바닥을 확인한 2왕자는 품에서 천을 꺼내어 휘감아 주었다. 깨끗했던 천이 붉게 물들이는 것은 핏물이었다. 

“왼손마저 못 쓰고 싶은 거냐?”

“…….”

“조급해 한다고 순서를 무시할 수는 없는 거다. 적당히 하라고 전에도 말 한 것 같은데.”

“죄송합니다.”

“알면 되었다.”

미련을 버리지 못한 듯 떨어트린 목검으로 시선을 돌리는 가나의 머리를 토닥여 주던 2왕자가 웃으며 말했다. 

“놀이에 다시는 안 끼워 준다?”

“!”

재빨리 목검에 시선을 치우고 2왕자에게 시선을 오늘은 들어가 보겠다며 곧 바로 밖으로 나갔다. 서둘러 나가는 저런 어린아이의 모습에서 어느 누가 한순간에 현 정세를 뒤엎을 수 있는 문호로 보겠는가. 

“저도 끼워 주시겠습니까?”

“!”

타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칸이 검을 들려 하자 손을 들어 막은 2왕자는 등을 돌려 목소리의 존재를 바라보았다. 

천천히 다가온 이는 썩은 뿌리로 자라나고 있는 독초와 같았다. 

“트란슈의 사신도 돌아간 걸로 아는데. 네놈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들어주셨으면 하는 청이 있기 때문입니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이반은 바닥에 떨어진 목검을 쥐었다. 목검의 날 부분을 바라보던 이반은 능숙하게 허공에 휘저어 손잡이 부분을 잡은 뒤 2왕자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꽤 즐거워 보이는 놀이를 하고 있더군요.”

“네놈과 할 얘기는 없다. 죄를 물어 문책하기 전에 이 나라에서 떠나라.”

“그러실 수 없을 겁니다.”

“뭐?”

2왕자는 어이가 없어 이반의 곁으로 성큼 다가가 그를 서늘하게 내려 보았다. 그 위압감만으로도 이반은 숨이 쉬어지지 않았지만, 태연한 척 바라보았다.  

“네놈의 그 알량하고도 더러운 주둥이로 왕족인 나를 능멸하느냐?!”

이반은 웃으며 목검을 놓고 그 손을 들어 품에서 어떤 것을 꺼냈다. 그곳으로 시선을 돌리던 2왕자는 믿을 수 없는 것을 보게 된다. 

그것은 왕의 옥새가 찍혀 있는 것으로 이것이 회수되지 않는 한 로던프 어디라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으며 그 권력을 행할 수 있는 것이었다. 또한 이것을 가지고 있는 한 왕을 제외하고 모든 것들에게 왕과 동등한 권력을 휘두를 수 있게 된다. 

어째서 왕은 한낱 타국의 백작 애송이에게 저런 것을 내린단 말인가. 단순히 위조된 것을 보여줄 수 있지만, 지금 상황에 그것이 더 말이 되지 않았다.

‘이 나라는 대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것인가!’

결국 평정심을 잃어버린 2왕자가 소리를 높였다. 

“네놈이 이걸 어찌!”

“알아보셨다면, 이제 놓으시지요.”

“그것이 무얼 뜻하는지는 알고나 있는 것이냐?”

“옥좌에 가장 가까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

어이를 상실한 실소를 내 뱉던 2왕자는 그대로 멱을 던지듯 놓고 뒤로 조금 물러났다.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왕의 이름을 빌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는 것 같지만, 2왕자는 더는 그 부분을 언급하지 않았다. 어차피 선택한 놈이 짊어져야 할 숙명이기 때문이다. 

“연민조차 가지 않는 놈이로군.”

“유감입니다. 저는 누구보다 2왕자님께 깊은 유대감을 느끼고 있습니다만.”

“뭐?”

“9년 전. 한 명의 아이가 보던으로 도망을 쳤지요.”

“무슨……!”

놀라는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2왕자를 바라보던 이반은 자신이 성급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더는 눈앞의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겨우 5살이었던 아이는 무능한 아버지를 둔 탓에 어미는 살해당했지만, 기지를 발휘해 겨우 죽음에서 벗어 날 수 있었습니다. 겨우 아버지를 찾았지만, 무능한 그는 눈앞에 나타난 자신의 아이마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두려워 모르는 척 하는 것일지도.”

“…….”

이반의 목덜미에 자칸이 뻗은 검 끝이 닿았다. 그러나 그는 2왕자 반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비웃듯 미소 지었다. 그 모습을 참을 수 없는 것은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던 자칸이었다. 

그러나 이반은 목덜미에 칼이 들어와도 동요조차 없이 2왕자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 나약하고도 겁 많았던 아버지의 이름은 로던프 반 그란스.”

더 이상 헛소리를 듣고만 있을 수 없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하는 연인과 그 여인 사이에 둔 하나 뿐인 아이를 잃는 과정까지. 그 모든 것을 지켜본 자칸은 자신도 억누를 수 없는 분노에 검날에 힘을 주었다. 단숨에 목을 잘라버릴 작정이었다.

자칸의 검이 이반의 목을 베어 버리려 하자, 기척조차 느낄 수 없었던 곳에서 인영이 튀어나와 그런 자칸의 검을 막아 사정없이 내리 쳤다. 압도적인 힘에 의해 검을 쥔 손이 튕겨져 나갔지만, 곧 바로 검에 힘을 주고 반격 했다. 

맞닿은 검이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고 나서야, 자칸은 눈앞의 자의 존재를 눈치 챌 수 있었다. 살기를 교묘하게 숨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섬뜩함이 지배하자 자칸의 검에도 무게가 실렸다. 그 순간, 2왕자는 소리쳤다. 

“자칸!”

무게를 싣고 있던 자칸의 검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멈췄다. 

“물러나라.”

명을 거역할 수 없는 그가 입술을 깨물고 검을 거두자 여유롭게 미소 짓고 있던 자도 검을 무르고 뒤로 물러났다. 경계를 풀지 않고 자칸이 2왕자의 곁으로 다가가 그들을 노려보았다.

2왕자의 혈색이 눈에 띄게 창백해져 있었다. 그리고 곧 눈동자가 커져 놀란 표정이 되어 버린다. 

어째서 그런 표정을 짓는가 하여 보았더니, 맞은편에 문호가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두고 온 목검을 가지러 다시 돌아온 듯싶었다. 

그리고 마치 그에게 들으라는 듯 이반은 입을 열었다. 

“아버지.”

2왕자는 이반에게 눈길을 돌렸다. 그러나 혼란스러움을 숨기지 못하고 시선을 피한 채 그대로 이 자리에서 나가기 위해 걸음을 돌렸다. 스쳐 지나가는 그를 지켜보던 이반이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또, 도망치시려는 겁니까?”

“…….”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멈칫 하던 그가 그대로 앞으로 걸어 나가 가나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가나는 자신이 들었던 것을 믿지 못하고 2왕자의 얼굴을 바라보았지만, 핏기하나 없는 얼굴로 스쳐지나가는 그를 가로 막을 수 없었다. 자칸이 서둘러 그 뒤를 쫓았다. 

2왕자를 아버지라고 불리는 자와. 그런 자의 발언에 부정하지 못하는 2왕자. 가나는 이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분명한 것은 지금의 왕권을 뒤엎어 버릴 수 있는 얘기였다.

“실로 겁 많은 사내가 아니던가. 안 그렇습니까?”

2왕자를 자극시키고도 태연하게 웃고 있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그 말이 불쾌해 가나는 반사적으로 인상을 쓰게 되었다.

‘겁이 많다고?’

죽음을 예견하고도 의연한 모습이었던 2왕자다. 그런 그에게 겁이 많다는 것은 노골적인 모함이었다.

가나는 2왕자에 대해 모욕적인 말을 늘어놓자 불쾌함을 숨기지 않고 그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웃으며 다가오는 이반을 코앞에서 본 가나는 자신보다 큰 남자의 얼굴이 낯익다는 걸 알았다. 

“오랜만입니다. 가나.”

“…….”

“이런, 설마 당신도 저를 못 알아보시겠습니까?”

어렴풋이 떠오르는 것은 있지만, 확실한 현상이 잡히진 않았다. 하지만 분명한 건 자신이 눈앞의 사람과 안면이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일방적으로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 그 증거였다. 

그러나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떨어져 있는 단검을 줍기 위해 이반을 무시하고 곁을 지나치자, 이반은 그런 가나의 팔목을 붙잡았다. 

“이반.”

“!”

강하게 끌어당기며 코앞까지 다가오고선 가나에게 강요했다. 이제야 그림자만 잡혀져 있던 형체가 온전히 드러났다. 

“이거 놓으십시오!”

“어? 이제 말도 제대로 하잖아?”

가나는 입을 다물고 팔을 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잡힌 것은 오른 손. 악력은커녕 어깨조차 힘을 줄 수 없는 팔을 잡혀 발버둥을 치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반이라고 불러봐. 그럼 놓아주지.”

자신을 가지고 장난을 치듯 재촉하고 있었다. 하지만 무언의 압박과 집착이 느껴져 오기로라도 입을 닫은 가나는 힘을 주려고 애썼다. 

“너는 내가 명령하는 대로 짖기나 해.”

팔목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더니 그대로 잡아 당겨 두 눈이 마주쳤다. 광기서 서린 눈동자를 마주 본 가나는 억제 할 수 없는 욕망에 휩싸인 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었다. 힘을 줄 수 없는 팔 대신 입을 벌렸다. 그리고 자신의 팔목을 붙잡고 있는 자의 손을 강하게 깨물었다. 

“큭?!”

고통에 놀란 그가 가나를 던지듯 팔을 털어내자, 손에서 벗어난 가나가 바닥을 구르더니 떨어진 목검을 집어 들었다. 아릿한 통증이 손끝까지 느껴졌지만, 흔들림 없이 자세를 잡아 목검의 끝이 이반의 목덜미에 향했다. 그 정확한 검술에 놀라 곁에서 방관하던 엔도가 작은 탄성을 지를 정도였다. 

이반은 검을 막아주기는커녕, 느긋하게 구경을 하고 있는 엔도가 못마땅했다. 목검으론 이렇다한 상처조차 남기지 못할 것이지만, 이것이 진검이라 했어도 엔도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을 것이다. 

애초부터 그는 자신의 목숨 따윈 안중에도 없는 자이기 때문이다. 또한 여전히 자신의 말은 듣지 않는 가나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가질 수 없다면 빼앗으면 된다.’ 

“그깟 이 빠진 늙은이의 비위를 맞추기가 더 쉽다는 건가?”

이반은 가나를 향해 비꼬듯 말했다. 그러나 흔들림조차 없는 얼굴로 가나는 말했다. 

“라마.”

“!”

“그 분만이 나의 왕이다.”

이반은 마치 온 몸의 피가 순식간에 얼어붙는 듯 했다. 웃는 낯을 지워버리던 그는 가나의 아름다운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맑은 호수와 같이 아름다운 초록색 눈동자에는 깊은 원망과 고독으로 뒤덮인 눈동자로 내려다보는 자신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그려져 있었다.

‘빼앗을 수 없다면 부셔버리면 된다.’

서늘하게 식어가는 이반의 시선을 눈치 챈 가나가 흠칫 놀랐다. 이반이 한 걸음 다가오자 그대로 가나는 목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정확히 이반의 정면을 노리던 목검이 가볍게 이반의 손 안에 잡혀 버렸다. 

강하게 휘둘렀기 때문에 어린 가나가 아무리 악력이 없다 하더라도 통증을 못 느낄 수 없었다. 그러나 살기에 지배당한 이반은 초점을 잃은 눈동자로 가나를 내려다보았다. 

가나는 살인마를 눈앞에 둔 기분이었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그 역시 정면으로 노려보면서 눈을 돌리지 않았다. 

가나의 눈동자는 녹음이 깨끗한 눈동자였다. 자신의 눈동자와 바꿀 수 있다면 좋을 것 같았다. 2왕자의 눈동자도 초록색이니, 저 눈동자만 가진다면 자신은 추접한 짐승이 아닌 고귀하고도 완벽한 왕으로 다시 태어날 것 만 같았다. 

그렇게만 된다면 달을 손에 쥘 수 있다. 

저 눈동자만 뽑아 버린다면..!

가나는 눈앞에 드리우는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정확히 자신의 눈동자 안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검을 놓는 것을 하지 않는 가나가 순간 섬뜩함에 몸이 굳어 움직이지 못하고 다가오는 손가락을 바라만 보았다. 

“문호!”

등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 벤이었다. 점점 걸음이 가까워지는 소리가 들리자 코앞까지 닿았던 손가락이 멈췄다. 이반은 고개를 천천히 돌려 목소리가 들리는 쪽을 확인하더니, 목검을 쥐고 있던 손도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 이반은 미소를 짓고 가나를 바라보았다.

“오늘 즐거웠습니다. 다음에도 같이 놀도록 하죠. 문호.”

이반이 점점 멀어지더니 그대로 밖으로 나갔다. 그런 이반을 수상쩍게 바라보던 벤은 이내 시선을 가나에게 돌리고 곧바로 그곳을 향해 달려갔다. 

“괜찮으십니까?”

가나의 창백한 낯을 확인하고 벤이 물었다. 별 다른 상처는 없었지만, 어딘가 지쳐보였다. 벤은 방금 전 자리에 있던 자가 누구였는지 기억하려 했지만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아니, 애초부터 저런 자가 있었던가. 

“방금 그자는 누구입니까.”

가나는 대답 대신 심호흡을 하고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다시 떴다. 벤은 그런 가나의 표정을 확인하고 입막음을 당했다. 

고요했다. 마치 폭풍 전야를 연상케 하는 침묵이었다. 

그대로 밖으로 나가려고 하자, 아직 묻는 것에 대한 대답을 듣지 못한 벤이 그를 붙잡았다. 

“이 이상 2왕자와 연관되지 마십시오.”

“어째서 입니까.”

되물어 볼 것이라는 것을 기대하지 않았던 벤은 가나의 물음에 조금 놀랐지만, 티내지 않고 바로 답했다.

“왕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

“1왕자를 적으로 돌려서는 안 됩니다.”

가나는 대꾸조차 없이 그대로 밖으로 나갔다. 벤이 그대로 뒤를 쫓아 그의 손을 붙잡았다. 뿌리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지만, 평소보다 강하게 쥐어 자신의 눈앞까지 끌고 왔다. 이를 물고 자신을 올려다보는 것 마저 눈을 뗄 수 없이 아름다웠다.  

무모할 정도로 겁이 없는 어린 문호를 두고만 볼 수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1왕자는 선왕이 직접 작위를 인정한 문호를 눈엣가시로 여기고 있다. 1왕자가 왕위에 오른다면 내란을 틈타 가장 먼저 문호의 목숨을 노릴 것이다.

“어찌 이리, 어리석은 행동을 하시는 겁니까!”

“…….”

“그는 대적할 수 없는 자입니다! 모두를 위험에 빠트리고 싶으신 겁니까!!”

“그 정도의 각오도 없을 줄 아셨습니까.”

“……!”

“경께선, 나를 비롯해 한스덴 가를 모욕하고 있다는 것. 알고 계십니까?”

가나는 자신의 팔을 쥐고 있는 오른손을 왼손으로 잡아 강하게 떼어냈다. 벤은 또 다시 그를 화나게 했음을 자책했다. 

가나는 벤이 자신을 염려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인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 말한 것을 정정할 생각은 없었다. 라마가 염원한대로 붓을 쥐어 문호가 되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각오를 잊은 적은 없었다. 자신을 그곳에 두고 갈 수 밖에 없었던 작은 등을 되돌리기 위해서라면 희생도 아깝지 않았다. 

“문호를 욕보게 할 생각은 결코 없었습니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 이상 2왕자와 관해서는 위기의식을 느끼셔야 합니다!”

“위기는 경께서 느끼셔야 합니다.”

“…….”

가나는 벤을 바라보았다.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그는 필사적인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얼마나 진심인지는 표정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벤이 이번 일에 벤이 끼어드는 걸 바라지 않았다. 

“가까운 시일, 전쟁이 일어날 겁니다. 설마, 자각이 없으신 겁니까.”

거세지는 내란의 기미로 눈이 멀어버렸다면 가나는 그에게 더는 할 말이 없었다. 허나, 다행이도 벤도 어렴풋이 그것을 느끼고 있었던 모양이다. 최근 들어 쿠웨드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이미 므헨을 침공하여 교전하고 있다. 므헨의 저항이 거세 완전히 점령당하진 않았지만, 타국의 지원 병력이 동원되지 않는다면 곧 므헨은 쿠웨드의 식민지화가 될 것이다.

쿠웨드의 므헨 침공은 시작일 뿐이다. 

“경은 자신의 본분부터 지키십시오.”

그대로 벤의 곁을 지나치는 가나였지만, 그는 더 이상 앞을 가로 막지 않았다. 전쟁에 대해서는 1기사단 드론의 오른팔인 그가 더 잘 알고 있을 것이었다. 그럼에도 짚어 준 것은 더는 자신의 일에 참견하는 일이 없었으면 한다는 표현이었다. 

홀로 걷고 있던 가나는 현 상황을 차근차근 정리해 보았다. 

후세가 있는 왕족에겐 왕좌에 앉을 우선권이 주어진다.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1왕자와 2왕자였지만, 후세를 이용하지 않았던 것은 단순했다. 

왕위를 물려줄 준비가 되지 않는 선왕에게 위협이 될 수 있는 왕자의 후세는 가장 손쉬운 표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이 약점으로 변질되기 쉽기에 후세를 이용해 왕좌에 앉은 선례는 없었다. 처음부터 2왕자가 왕좌에 집착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왕족의 권한을 모두 반납하려 했던 흔적까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2왕자의 눈앞에 나타난 이반은 자신이 잃어버린 2왕자의 후손이라고 칭했다. 2왕자는 그것에 반박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반이 정말로 2왕자의 후손이었다는 것일까. 

이반의 정체를 알 수는 없지만, 그가 등장한 것은 로던프의 내란을 부추기는 짓이다. 또한 어렴풋이 보아 확실하진 않지만 이반이 들고 있는 것에는 옥새의 인장이 찍혀있었다. 그것을 뜻하는 바는 잘 알고 있었지만 어째서 이반이 그런 행동을 보이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옥새의 인장은 확실히 왕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게 만드는 기밀문서와 같다. 그러나 태양을 쥐려 한다면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 기밀문서를 반납 당하게 된다면 목숨을 잃게 되는 것은 이반 자신이었다. 

그는 2왕자를 단순히 왕좌에 앉히기 위해 옥새의 인장을 쥐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자신을 대하는 모습에는 그러한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오히려 끝없는 자신감에 차여 있는 모습은 당장 왕좌를 빼앗을 역적의 무리와 닮아 있었다. 

그렇다는 건…….

“모르고 있다는 건가?”

“역시, 문호로군요.”

“?!”

갑자기 등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가나가 뒤를 바라보려고 했지만, 두 손이 뒤에서 잡혀 몸을 돌리 수 없었다. 두 팔목에 강한 압력이 느껴지자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돌려 위를 바라보았다.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회색 머리카락이었다.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에 감추어진 눈동자는 짐승의 것과 흡사했다. 

“이런, 이런. 다치십니다. 그렇게 발버둥 치지 마십시오.”

“…….”

이를 물고 벗어나려고 했지만 자신을 놓지 않자 이반에게 했던 것처럼 자신을 붙잡고 있는 팔에 이를 세워 깨물었다. 통증에 놀라서라도 놓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자신을 붙잡은 팔은 미동조차 없었다. 머리 위해서 까마득하게 내려다보는 압박감이 느껴지면서 비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어째서 그분이 당신을 그토록 싸고도는지 알 것 같군요.”

압도적인 힘이었다. 벗어 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가나는 입을 떼고 다시 한 번 힘을 주었다. 엔도는 자신의 손안에서 발버둥치는 가나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금빛으로 빛나는 머리카락은 정수리 부분은 하얗게 보일 정도로 깨끗했다. 단정한 금발에 얼핏 드러나는 하얗고 가느다란 목덜미. 빛과 어둠처럼 대조되는 묘한 기분이 드는 소년이다. 

엔도는 무심코 하얀 목덜미에 혀를 닿아 보았다. 꿀처럼 달콤할 줄 알았던 목덜미에는 의외로 아무런 맛이 나지 않았다. 이질적인 감촉에 놀란 가나가 몸을 움츠려들었다.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천재인지는 모르나 그 역시 아직은 어린 애송이였다. 그러나 가공된 그릇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가 검은 태양이라면 손에 쥔 것은 성배와 같았다. 만지면 깨질 것 같은 위태로움. 그러나 지켜보고 있으면 그 위엄에 눈을 뗄 수 없다. 

그러나 물조차 담을 수 없는 장식품. 깨질 것을 두려워 해 진열해 놓은 것과 다름이 없었다. 

“편이 되어 드릴 수도 있습니다. 돌려받고 싶지 않으십니까?”

인간이 가지는 가장 약한 부분을 사정없이 건드리는 악마처럼 속삭였다. 열망하고 갈망하고 숨기려 할수록 유혹에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귓불에서 목덜미까지 핥던 엔도는 한 손을 놓고 대신 턱을 잡아 돌렸다. 

“들개에게 빼앗긴”

“…….”

“라마.”

흥분을 하거나 손을 뿌리친다면, 그것은 강한 긍정이었다. 엔도는 그것을 기다렸지만, 어쩐지 가나는 이렇다 한 반응이 없었다. 오히려 두 눈을 마주치고 미소를 짓는 것이 아닌가.  

태양을 가지러한다면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하지만 대가를 치렀다한들 반드시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가나는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라마는 위험한 들개로부터 자신을 지켜주었다. 안락한 요람에서 벗어날 수 없도록 철저히 등을 돌리고 외면했다. 

“나를 이용해도 소용없어.”

라마가 지켜주지 않아도 그렇게 필사적으로 외면하지 않아도 자신은 무사 하노라고. 

무엇에도 흔들림 없이 당신의 곁에 동등하게 서 있을 수 있다고. 

증명해야 한다. 

“가질 수 없을 테니까.”

강한 긍정을 한 것은 엔도였다. 그는 단숨에 가나의 목을 붙잡았다. 힘을 주자 숨이 막혔지만, 가나는 괴롭지 않았다. 가질 수 없다. 은연중에 그것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너는 가질 수 없어. 더러운 짐승 따위가 손을 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

그렇게 가나의 숨이 넘어가지 직전. 엔도는 팔목을 잡고 있는 손과 목을 잡고 있는 손을 동시에 놓았다. 

“쿨럭……!”

바닥에 주저앉아 목을 붙잡으며 기침을 하던 가나를 내려다보던 엔도는 천천히 자세를 낮춰 가나를 바라보았다. 나약한 성배라고만 생각했던 것은 자신의 착각이었다. 이것은 들개의 눈이었다. 그의 곁에 있던 하얀 들개와 소름끼치도록 닮아 있는 눈빛이었다. 

상상 이상의 수확이었다. 

“상냥하게 대하려 했지만, 그럴 수 없는 점 미리 사과드리죠. 대신, 원하는 것을 가지는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

위험을 느낀 가나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대로 도망을 가려고 했다. 그러나 여유롭게 그런 가나의 몸을 잡아 돌린 엔도는 순식간에 그의 입을 가렸다. 발버둥치는 가나의 코앞에 품에서 새끼손가락만한 병을 꺼내 윗부분을 손가락으로 부러트린 뒤 가져가대자 맥없이 정신을 잃은 가나를 손에 쥐었다. 

늘어진 가나를 안은 엔도의 입술이 길게 올라갔다. 

*

가나는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곳에 서 있었다. 주위를 둘러 봐도 빛 하나 새어 들어오지 않는 공간이었다. 

막연하게 서 있던 가나는 뭔가를 느끼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는 라마가 서 있었다. 라마를 불러보려 하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당황한 가나가 목을 붙잡고 소리를 쳤지만, 자신은 멀어지는 라마를 붙잡을 수 없었다. 

그때, 하얀 들개가 나타났다. 들개는 천천히 라마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가 들고 있는 것은 녹슨 검이었다. 

위험하다고 필사적으로 소리를 치고 달려가려고 했지만, 뭔가에 발목이 잡혀 그대로 넘어지고 말았다. 땅 위로 뻗어 나온 손이 자신의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이대로 라마가 하얀 들개의 손에 죽는다고 생각하고 필사적으로 그 손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라마!! 라마!!’

뒤를 돌아보라고, 제발 뒤를 돌아보라 염원하면서 달려갈 수 없는 발 대신 손을 뻗었다. 목소리는 끝내 나오지 않았다. 일순간 눈앞이 붉은 피로 뒤덮였다. 온통 검은 곳이라 생각했던 곳이 순식간에 하얗게 변해버렸다. 

백색의 공간 위로 피가 흘러내려와 가나의 눈앞까지 다가온다.

그대로 몸이 굳어 움직일 수 없는 가나는 피에 젖은 녹슨 검이 꿈틀거리고 있던 라마의 목덜미까지 내려와 꽂힌 것을 보았다. 

천천히 시선을 들자 그곳에는 비릿하게 웃고 있는 하얀 들개가 보였다. 

“으아아악!!!”

묶인 채 의자에 앉혀진 가나는 경련하듯 몸을 떨고 비명을 질렀다. 나중엔 꺽꺽 거리며 숨을 토해내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자 그런 가나의 곁으로 엔도가 다가왔다. 

“네가 가지지 못하면…….”

“…….”

“네가 지키지 못하면…….”

“…….”

“검은 태양은 죽는다.”

“....라...마..”

엔도는 그대로 가나의 얼굴을 들어올렸다. 눈물을 토해내는 눈에는 청량했던 초록색 눈동자가 죽어 있었다. 최면을 거는 듯 세뇌를 시키던 엔도가 물었다. 

“너의 태양을 죽인 자는 누구지?”

그 물음에 죽어 있던 눈동자가 순식간에 어둡게 내려앉았다. 더는 눈물을 흘리지 않던 가나의 입술이 깨물리면서 피가 흘러내렸다.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문.”

*

하루가 다 되도록 가나로부터 소식이 없어 한스덴은 초조함을 감출 수 없었다. 연회가 있다는 말로 아내와 딸에게 얼버무릴 수 있었지만 빨리 찾아야만 했다. 문호의 작위가 결코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반대하지 못한 자신의 잘못인 것만 같았다. 

뒤늦게 소식을 듣고 벤이 달려왔다. 소란을 키운다면 문제가 되기 때문에 벤은 자신이 직접 찾아본다 말했다. 한스덴은 고개를 끄덕이며 부탁한다고 말하고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자신 또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벤은 걸음을 돌리면서 인상을 썼다. 그때, 돌아서는 가나의 곁을 따라갔었어야 했다. 홀로 보내버린 자신의 탓인 것만 같아 괴로움이 더 했다. 

그러나 해가 넘어가도록 성 내부에서 찾을 수 없다면, 밖으로 나갔다는 게 된다. 문지기를 통해서 확인해 본 결과 문호는 이곳에 걸음하지 않았다. 몰래 빠져나갈 이유는 없기 때문에 가진 불안감이 최악의 경우까지 상상하게 만들었다. 

괜한 생각하기 싫었던 벤이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그때였다. 멀리서 익숙한 인영의 그림자가 눈에 들어왔다. 서둘러 걸음을 옮기자 문호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문호!”

재빨리 그의 앞까지 달려가 얼굴을 확인했다.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안도감과 함께 화가 났다. 지금까지 어디서 무얼 하고 있었기에 코빼기도 찾을 수 없어 걱정을 샀단 말인가. 

“대체 어디까지 간 것입니까! 성내에는 출입을 금하는 곳도 있다는 것을 모르시는 겁니까!”

“…….”

대답이 없었다. 어딘가 이상했다. 평소에도 말이 없긴 하지만 지금은 단순히 말수가 적다는 것과는 달랐다. 

“....문호? 왜 그러십니까?”

“...문...죽..문....죽일..”

“문호!”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는 가나의 어깨를 붙잡은 벤이 자신을 바라보게 만들었다. 반사적으로 가나는 얼굴을 들었지만, 참으로 맑은 호수와 같다고 생각했던 눈동자가 죽어 있었다. 일순간 소름이 올라온 벤이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을 주어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십니까?!”

“…….”

끝까지 대답이 없던 가나는 벤의 손을 거칠게 쳐 냈다. 이러한 거친 반응을 보인 적 없는 가나의 행동에 당황한 벤이 움찔 거리자 그대로 그의 곁을 차갑게 지나쳤다. 그때의 감정이 아직도 풀리지 않았던 것일 수도 있지만, 무엇인가 달랐다. 

*

예상대로 쿠웨드는 일방적으로 트란슈와의 강화조약을 깨면서 기습을 일삼았다. 그러나 트란슈는 쉽게 함락당하지 않았다. 매복하고 있던 기병(奇兵)을 중심으로 교전하면서 뒤이어 협력한 루카디아의 지원 병력과 합세해 버텼다. 피해가 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대수로운 것은 아니었다. 뜻밖의 열세에 몰린 쿠웨드가 주춤하면서 므헨에선 암부의 수장인 란을 주체로 혁명이 일어났다. 

므헨은 명칭이 바뀌어 메르헨으로 탄생되었다. 새로운 국가가 세워지면서 기존에 존재했던 왕권이 해체되었다. 그로써 현 메르헨의 정세는 왕권이 아닌, 원수의 지도하에 있게 되었다. 

절대적인 권력을 자랑하던 왕권을 없애고 원수의 자리를 만들어 버린 이유는 세습되는 권력을 막기 위함이었다. 말 그대로 그것은 ‘혁명’인 것이다. 

조급했던 쿠웨드는 루카디아로부터 선전포고와 함께 선공을 하지만, 트란슈와의 교전에서와 마찬가지로 매복하고 있던 기병의 수전으로 여세를 몰아 함락에 실패한다. 거의 모든 전쟁에서 전패하고 만 쿠웨드의 사기가 떨어지면서 전쟁은 한 차례 휴전 체제에 들어간다.

“일단은 네 말대로 해전을 봉쇄했다. 하지만 이렇다 한 정보도 없이 병력을 낭비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군.”

잦은 전쟁으로 제법 단단해진 슈레이가 얼굴을 내밀었다. 이쪽의 피해가 적었다고는 하나, 그것은 쿠웨드에 비해서였다. 몇 번의 교전이 오가면서 날이 선 사기와 다르게 기백이 쌓이고 있었다. 앞으로 몇 년간의 전쟁은 조만간 내가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는 모습으로 슈레이를 다듬을 것이다. 

“루카디아의 지원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

“전쟁은 속전속결이다. 길게 끌 생각은 없어.”

“네놈이 오만해지라고 백성이 왕의 자리를 내 준 것이 아닐 텐데.”

“쿠웨드는 장기간 전쟁을 할 수 있을 수 있는 병력도 물자도 부족해.”

나는 잠시 침묵했다. 빤히 바라만 보고 있으니 무엇이 어긋나 버렸는지 눈치를 채고 곁에 서 있던 나비에게 시선을 돌렸다.

“안 그런다고?”

“하아…….”

“이익!!”

결국 나비가 한숨을 쉬어버리자 슈레이가 얼굴을 붉혔다. 첫 전쟁에서의 승리로 지나치게 자신감이 차 있었다. 팔팔한 나이인 것도 있지만, 그만큼 실전 경험이 부족했다는 뜻이다. 감정기복이 남다른 만큼 그가 집중을 하지 못하면 이만큼의 허점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나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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