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화 (31/35)

자리에서 일어난 론 타이는 그대로 몸을 돌렸다. 돌아가는 길에서도 그의 머릿속에는 얼굴을 알 수 없는 14세 애송이가 괘씸했다. 쿠웨드의 함대는 400여척 괴멸되었고 사상자만 10만명을 넘어섰다. 유례가 없었던 완벽한 패배였다. 

살아 돌아온 장수들의 목을 친 것은 본보기였다. 이후 제독이 될 자들에게 경각심을 심어주기 위해 보는 앞에서 참수시킨 것이다. 

이와 같은 어이없는 패전은 다시 있을 수 없겠지만, 분한 마음이 삭히질 않았다. 당장 눈앞에 데려와 사지를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정도였다. 

어린아이에게 조롱당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던 론 타이는 참수당한 제독을 대신할 인재를 찾아야만 했다. 적당한 인물이 곧 떠오르자 걸음을 멈춰 고개를 약간 돌려 뒤를 따르던 자에게 명했다.

“긴사이를 데려와라.”

“하오나, 폐하. 긴사이의 근신(謹愼)기간이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바다를 다루는 놈 중에 긴사이만 한 놈이 떠오르지 않는다. 상관없으니 끌고 와.”

“예.”

론 타이 역시 내키지 않았다. 해적의 후예로 태어나 버릇을 못 버리고 해적질을 일삼았다. 이를 막기 위해 보낸 장수의 머리까지 베어버린 놈이다. 이후 한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렸다. 여자들은 모두 잡아다 성욕을 채웠고 그러나 흥분이 가해지면 겁탈하던 여인의 배를 갈라 사체를 범하는 둥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짓을 서슴지 않았다. 

어린 아이가 말을 탄 자신의 앞을 가로 막았다며 말발굽으로 짓밟아 터트려 죽인 자다. 성정이 잔인하고 난폭하나 한 번 뱉은 건 무슨 일이 있어도 무르거나 되풀이 되지 않았다. 그 부분을 높이 사 장수를 벤 해적의 후예임에도 직접 작위를 주었다. 

그를 인정하는 장수는 그리 많지 않았지만, 소리 높여 반대하는 이도 없었다. 은연중에도 그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이 두려운 것이다. 

*

“근신 중에도 장군의 주위에선 비명소리가 끊이질 않았다던데.”

마지못해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자가 눈동자를 들어올렸다. 타고난 사냥꾼의 얼굴이었다. 그 어떠한 감정도 없이 사람을 베는 것이 너무도 익숙해진 탁한 눈이었다. 지루함 외에는 표정이 거의 드러나지 않았다. 

“무료해 미칠까 싶어, 가벼운 여흥입니다.”

“의외로 통이 작은 자가 아니던가.”

“…….”

“고작 냇물에서 여흥이라니. 자고로 사내란 큰물에서 놀아야 체면이 살지.”

론 타이는 삐딱하게 앉은 채로 긴사이를 바라보았다. 왕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탁한 노란 눈동자. 피를 머금더라도 물들지 않는 검은 머리카락이 얼굴의 반을 가리고 있었지만, 그가 교활하고 영민한 맹수임을 숨기진 못했다. 

“해전의 지휘권을 주십시오.”

“허락한다. 단, 숙청은 금한다.”

“쳇.”

긴사이는 아쉽다는 듯 혀를 찼다. 론 타이가 짚고 넘어가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눈에 거슬렸던 자들의 목이 일제히 날아가 땅 위를 뒹굴고 있었을 것이다. 쓸모없는 자들이지만, 이 이상 아군의 머릿수가 줄어드는 것은 바라지 않았다. 

“트란슈 제독을 생포해 데려와라.”

“숨만 붙으면 되는 것입니까.”

“혀는 자르지마. 대화정도는 나눠보고 싶으니까.”

“알겠습니다.”

긴사이는 상대가 누구든 무자비하게 학살을 우선으로 삼는다. 심문해야 할 것이 있으니 필시 살려 보내라는 놈의 팔과 하지를 잘라 머리와 몸통만 있는 놈을 던져 놓았다. 

더욱이 혀도 잘라 심문을 하지 못했고, 생포해 온지 하루 만에 사망했다. 때문에 명을 이행하지 못한 벌로 근신 명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이성보다 본능이 앞서는 자이기 때문에 생포해 데려온다고 해도 말 그대로 숨만 붙어서 데려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명은 반드시 지키는 자이다. 팔과 하지를 자를지언정 혀를 자르는 일은 없을 것이다. 

론 타이는 긴사이에게 한 가지 숨긴 것이 있다. 

그것은 트란슈의 제독이 고작 14살의 솜털조차 빠지지 못한 어린아이라는 점이다. 

긴사이가 상대가 어리다고해서 깔보거나 봐줄 일은 없을 것이다. 그 증거로 상대가 될 트란슈 제독의 그 어떠한 것도 묻지 않고 물러났다. 

그럼에도 어리다는 것을 숨긴것은 무슨 일이든 예외라는 것이 생길 수 있는 법이기 때문이다. 

*

요란스러운 소리와 함께 등장한 이는 슈레이와 그 뒤를 따른 나비였다. 그는 큰 보폭으로 걸어와 내 앞에 섰다. 

“뭐지.”

수도에 있어야 할 놈이 뻔질나게도 드나드는 것 같아 슬슬 육전의 상태가 걱정되었다. 트란슈가 왕의 신분을 철저히 숨기는 곳이라고 하더라도 그의 지도력까지도 숨겨야 하는 것은 아니다. 현세의 가장 큰 전력이 되어야 할 놈이 서신만으로도 충분한 곳에 나타난 것이 내키지 않았다. 

“400척 이상……. 격침 시켰다는 것이 사실인가?”

“그것을 확인하러 온 건가.”

“그런데도 이쪽의 피해는 고작 부상자라고?”

설마 전서를 받지 못했나 싶어 인상을 쓰자 황당한 얼굴을 숨기지 않던 슈레이는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더니 의자를 끌어와 털썩 주저앉았다. 

“대체 어떤 요술을 부린 거야?”

“전술이겠지.”

“화포가 있긴 하나, 사격할 때 명중률도 좋지만은 않다. 더욱이 정비하는 시간이 오래 걸려. 상대적으로 속공을 하는 쿠웨드에게 당할 수밖에 없었어. 그런데도 너는 어떻게……!”

“조선공이 왕보다 낫더군.”

“…….”

슈레이는 트란슈의 강점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다른 장수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제 몫을 다 한 것은 조선공과 화포를 다루던 놈과 그리고 배의 가장 밑바닥에서 죽기 살기로 노를 저은 자들뿐이었다. 

이번 해전의 승리의 공로는 모두 그들에게 있었다. 

“느린 배가 어째서…….”

“느리기 때문이다.”

“…….”

아무리 애송이 왕이라고는 하지만, 이 정도까지 몰랐다는 것은 해전에는 손을 놓고 있었다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 답답한 모습에 설명의 필요성까지도 느끼지 못하기 전에 나비가 입을 열었다.

“느리다는 건 그만큼 무겁다는 것이고, 무겁다는 건 단단하여 내구력이 높다는 것입니다.”

나비가 보다 못해 입을 열자 슈레이가 반발하듯 말했다.

“알고 있다. 배가 튼튼하다는 것 정도는. 그러나 예전엔 전혀 먹히지 않았던 배로 대체 어떻게 승리할 수 있었냐는 것이다. 적선을 매수한 것도 타국의 지원을 받은 것도 아님에도 대승을 거뒀다. 이것이 이해가 안 돼.”

나비도 그것에 공감한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나를 바라보았다. 

안에 있던 자들을 모두 물리고 대화를 계속했다.

“근접전으로 빠르게 치고 들어온다면 화포도 무용지물이잖나.”

“근접전은 이쪽의 화포의 사정권이다.”

“하지만 재정비에 들어갈 땐 무방비한 상태가 된다.”

“2차 포격은 속공보다 빨라.”

“나눠서 포격한다는 건가? 그만한 화포를 한 면에 집중 시킨다면 배가 쏠릴 위험도 있어!”

“양면.”

예상했던 대로였다. 

참수당한 전 제독도 지금 애송이 왕도 트란슈의 함대를 쓸데없이 단단하고 느린 배로만 보고 있다는 것이다. 참담할일이 아닐 수 없다. 

잦은 패전에 분한 마음과 덧붙여 두려움이라는 것이 이들의 눈과 귀를 멀게 만든 것이다. 이것은 자멸하고 있다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양면을 사용한다.”

“양면이라고?”

“평저선이기 때문에 느린 대신 회전이 빠르다.”

배의 밑바닥이 평평한 특징인 평저선은 회전이 빠르기 때문에 양면에 화포를 대기해 회전하는 동안, 재정비에 들어가 일제히 포격이 가능해진다. 

하지만 그만한 숙련도가 부족한건 화포를 정비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저번 해전에선 3군으로 나눠 화망을 만들어 포격하였다. 

그물에 걸린 물고기를 집중적으로 잡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에 아군의 피해가 적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화망전술은 자주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화망을 형성할 정도로 좁은 곳으로 유인을 하는 것이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쿠웨드 역시 두 번은 같은 방법으로 유인 당하진 않을 것이다. 

때문에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다각도로 화포를 사용할 수 있도록 명중률을 높이고 재정비에 들어가는 시간을 최대한 줄이는 것이다. 

이것은 집중 훈련에 들어가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다행이 첫 승리로 사기가 높아진 수군들은 의욕이 넘쳤다. 

“그렇다면, 어째서 전 제독은 평저선을 이용하지 못했지? 그가 해전 경험이 없던 것도 아니었다. 평저선임을 강점으로 보진 않았어.”

“패를 확신한 자에게 승리란 없어. 전쟁에 살기만 바라는 놈이 무용지물이다.”

“이건 마치 전설을 보는 것 같군.”

슈레이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해전의 첫 승리가 수군의 사기만 올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내게 더 지원을 바라는 것이 없느냐 물었고 나는 그에게 돌아가라 말했다. 

“루카디아가 이번 해전의 승리로 동맹에 긍정적이다. 메르헨의 내전이 끝나면 이쪽에서도 지원이 가능해지니 조금만 더 견뎌라.”

슈레이가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그 뒤를 따라 나갈 줄 알았던 나비가 우두커니 서서 날 바라보았다. 무슨 할 말이라도 남아 있는가 싶어 이유를 물으려는 차, 갑자기 손을 뻗어 나를 끌어 안았다. 

그리고 내내 냉정한 얼굴로 서 있던 놈이 떨리는 목소리마저 숨기지 않고 말했다. 

“부디, 무모한 짓마라.” 

“나보다 네놈의 명줄이 더 짧으니 걱정할 건 없다.”

“곁에 있게 해 주면 안 되겠느냐. 너를 지켜주고 싶다.”

“네가 지켜야 할 것은 슈레이다. 그는 네가 없이는 죽어.”

“…….”

나비도 알고 있는 것이다. 

지금의 슈레이는 머리는 비상하나, 전술을 쓰기에는 경험이 부족하고 무엇보다 생각했던 것처럼 이성적이지도 못한 자다. 매사에 장난이 많고 여유로워 보이나 누구보다 불안정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립을 지키게 하고 이성이 무너지지 않게 잡아줘야만 하는 남자였다. 나비도 그것을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나비는 나를 놓고 떨어져 물러났다. 

“이번 해전의 승패로 로던프의 지원이 걸려있다 들었다. 다음 해전은 결코 적은 희생만으로 이길 수 없을 터. 승산을 바라지 않으마. 살아만 다오.”

“재 뿌리지 말고 나가.”

손을 휘젓자 가벼운 목례로 등을 돌려 슈레이를 뒤따랐다. 그런 나비의 등을 바라보고 있던 나는 어렴풋이 늘어지는 검은 그림자를 짐작했다. 

예정대로라면, 가볍다 못해 불안정한 슈레이의 본능을 깨운 것은 이 시점에 있었던 나비의 죽음이다. 

“닉스-”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를 내어 이름을 부르자, 늘어지는 검은 그림자가 형체를 드러냈다. 가벼운 바람과 함께 등장한 이가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굽히고 있었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자 천연할 정도로 그리움에 일렁이는 눈동자가 가장 먼저 들어왔다. 

“그 둘의 곁을 지켜라.”

닉스는 대답이 없었다. 그는 내 명을 듣고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 하였으나, 다시 고개를 들어 올려 나를 볼 땐 의미를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인간인 이상 감정을 숨기는 것은 제아무리 닉스라고 해도 어려울 것이라 생각했지만, 이처럼 쉽게 내 비출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어……! 어찌하여…….”

닉스가 다시 고개를 떨어뜨렸다. 바닥을 적시는 것을 확인하고 의자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갔다. 눈앞까지 다가왔다는 걸 눈치 챈 닉스가 고개를 들지 못하고 바닥만을 적시자,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들어올렸다. 

“저를……. 버리셨습니까.”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닉스는 바라보았다. 소리 높여 우는 것도 아님에도 그간 얼마나 위태롭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는지 알 것 같았다. 

“버리지 않았다.”

“이 세상에 없는 줄 알았습니다. 살아 계실 것 이라 하면서도 의심을 하였습니다.”

닉스는 내 손목을 붙잡았다. 

“어째서 제가 아니었습니까. 그럼에도 저를 버리지 않으셨다 말하는 겁니까.”

“그렇다.”

“…….”

나의 손목을 잡고 있음에도 힘을 주지 못하는 닉스를 똑바로 향해 바라보았다. 예나 지금이나 이 손에 쥐지 말아야 할 것은 반드시 존재한다. 튼튼해 보이는 모래성도 가벼이 손에 쥐면 쓰러져 버리듯 말이다.

“거둔 적 또한 없으니. 버린 적 또한 없다.”

내 손목을 붙잡고 있던 보잘 것 없는 힘에서 벗어났다. 

“내 곁을 맴돌지 마라. 넌 그들을 지켜라. 그리 명받지 않았느냐.”

“제 주인은 크라운. 당신입니다. 제가 지킬 분은 당신입니다.”

어찌, 내 곁에는 이렇게 고집만 쎈 놈만 있는 것인지…….

모질게 상처를 주지 못하고 한숨을 내 쉬자 그런 나를 보고 있던 닉스의 어깨가 움찔 거렸다. 닉스 또한 죽음을 면치 못했다. 그를 죽인 것은 다름 아닌 나였다. 내 곁에 있다면, 필시 그렇게 될 것이다. 은아와 문 역시 마찬가지다. 

들개로 태어나 인간이 되었던 나에게 남은 것은 몸통 없이 굴러다니는 수많은 인간들의 머리였다. 끌어안을 수조차 없었던 그들의 마지막을 지켜보면서 겨우 깨달았다. 

내 죄가 이토록 구역질 나도록 참혹한 것이었음을.

모든 것을 다 끊고도 놓을 수 없었던 것이 있었다. 외면할 수 없었던 것이 있었다. 나는 어쩌면 죄를 반복하고 있을지도 모를 것을 손에 쥐고 있었다. 

“나를 능멸치 마라.”

무릎을 꿇고 있는 닉스를 쳐다보며 천천히 허리를 들어 올려 노려보았다. 나를 향하고 있던 닉스가 창백해진 얼굴이 되었다. 

“내 명을 따르겠다면, 시키는 대로 해.”

그 말에 고개를 숙인 닉스가 눈앞에서 사라졌다. 명했던 대로 슈레이와 나비의 뒤를 따른 것이다. 고집 강한 아이는 엄하게 다스려야 했기에 뒷맛은 쓰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잠잠했던 내 곁으로 다가와 뒤에서 나를 끌어안은 것은 내 얼굴을 돌려 멋대로 입을 맞췄다. 얼굴을 밀어내자 온전히 모습을 드러낸 것은 달빛을 깎아 놓은 듯 새하얗지만, 붉은 눈만은 태양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문이었다. 

“당신을 지킬 나는?”

문이 되물었다. 얼굴을 밀어내던 손의 반향을 바꿔 문의 뺨에 닿았다. 

“넌 내가 지킬 것이니, 상관없다.”

아이를 안심시키기 위해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하지만 문은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그것을 증명하려는 듯 뺨에 닿은 내 손목을 잡아 힘을 주어 끌어 당겼다. 입을 맞추고 허리를 품어 끌어 당겨 엇나갈 수 없도록 만들어 버린다. 

붉은 눈동자가 온전히 나를 담고 있을 때 그는 입을 열었다. 

“수작부리지마. 나의 검은 태양.”

그가 화를 내고 있는 것인지, 슬퍼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눈이었다. 그 감정이 너무도 낯설어서 밀어내는 것조차 잊어버렸다. 

“아름다워.”

영문 모를 소리를 하고 있었다. 두 눈에 가둬 도망가지 못하게 잡아 놓으면서 귓속을 꿰뚫고 들어오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새겨놓고 있었다. 

“당신이 있는 세계는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고……. 잔혹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모르는 척 해. 나도 그럴 테니까. 하지만 허튼 짓 하지 마. 당신의 마지막은 나야.”

문이 나를 놓고 지나쳐 밖으로 나갔다. 나는 곧 심장이 뜨거워질 정도로 뛰어오른다는 것을 느꼈다. 손을 올려 통증이 오는 곳을 붙잡았다. 밑바닥에 깔려 있던 불길한 기억들이 모래바람을 일으키며 서서히 떠오르려 하고 있었다. 

눈을 뜨고 있을 수 없어 그대로 감아 버렸다. 나는 어째서 아이는 자란다는 걸 이제야 깨달은 것일까. 곁으로 은아가 다가왔다. 내가 걱정된 것인지 뺨에 커다란 손이 닿는 게 느껴졌다. 눈을 떠 은아를 보았다. 

“그가 무얼 알고 있는지……. 은아 너는 알겠느냐?”

“?”

무엇을 묻는 것인지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 은아였다. 그런 은아의 얼굴을 보니, 괜한 소리를 했다고 후회가 됐지만 마음 한 곳, 안심이 되었다. 

미소를 짓다 지우고 은아와 눈을 마주쳤다. 더는 곁에 둘 수 없다는 것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은아 너는 메르헨으로 가거라. 마스가 데리러 올 것이다.”

“치…… 치구.”

은아가 고개를 저었다. 가라는 말을 이해하고 제대로 의사를 표현했다. 제법 많은 것을 배워왔던 모양이다. 하지만, 아직 은아는 더 많은 것을 보고 들어야 한다. 하지만 이것만은 알고 있었다. 만남이 있다면 헤어짐도 있는 법. 소녀와의 만남과 긴 이별을 기억하고 있는 은아는 지금 나와 떨어진다면 영원히 볼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는 듯 했다. 

그랬기에 더욱 강하게 고개를 저으며 거부하러했다. 

은아는 아직 어렸다. 커다란 몸을 가지고 있기는 하나, 막 태어나 이제야 옹알이를 시작한 아이와 같다. 그래서 나는 달콤한 말로 아이를 다독이고 안심시켰다.

알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으로 착각 할 수 있도록. 더 많이 살아갈 수 있도록. 

“일이 끝나면 데리러 가마. 그땐 쭉 함께 있자. 그러기 위해 지금은 잠깐 헤어지는 것뿐이다.”

은아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이 기특하여 몸을 숙인 은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손을 뗐고 천천히 일어나 은아와 멀어졌다. 이제는 등을 보여야하기 때문이다. 

*

전쟁이 시작되었다. 

예고 없이 침략한 적군은 만만찮은 자였다. 지금까지 상대해 왔던 어느 장군보다 냉정한 판단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를 유인한다는 것은 포기했다.

멀지 않는 곳에 빼곡하게 보이는 적선 중 대장선이 눈에 띄었다. 포격이 무기인 트란슈와의 대치 중 대장선이 뒤로 물러나지 않은 것은 무모해 보이긴 하나, 그것은 쿠웨드가 해전에 강하다는 것을 과시하려는 것이기도 하였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다. 

“적선이 움직이지 않고 있습니다. 이쪽에서 먼저 공격하시는 것이!”

전 제독의 곁을 지켰던 장수 중 한 명이었다. 대부분의 장수들이 제독이 나라는 것을 확인하고 등을 돌렸을 때, 그들을 설득시켜 해전에 참전하게 만든 것도 이놈이다. 해전에 승리 후 나를 따르겠다며 대장선에 올랐다. 

이름은 치탄.

평저선이라는 것을 들은 것도 치탄의 입을 통해서였다. 조선공 중 벗이 있다는 얘기를 들은 것 같다. 97척의 함대는 모두 그가 속한 3군이었다. 치탄은 유능한 장수다. 그가 전세를 읽는 것에 자유로워진다면 트란슈 수군은 지금보다 더욱 강해질 것이다. 

“진열을 흐트러트리지 마라. 놈들은 기다리는 것이다.”

“무엇을 말입니까.”

“바다를.”

“물길을 말입니까!”

쿠웨드는 화포의 충격을 견딜 수 없는 가벼운 배를 가진 대신, 그 속도가 빠르다. 빠르게 치고 들어와 적의 갑판을 밟아 육탄전을 벌이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라면, 물길을 이용해 그 속도를 비약적으로 높일 것이다. 

때문에 이쪽에서 먼저 화포를 낭비하는 것은 무의미 했다. 하지만 물길이 바뀌길 기다리는 것은 그들 뿐만은 아니었다. 

*

긴사이는 멀지 않는 곳에 위치한 트란슈의 대장선을 바라보았다. 배포가 두둑한 것인지 선두에서 대치하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기회주의자가 아니라면 자신과 같은 부류라는 것인데 어느 쪽이든 쉬운 상대는 아니었다. 

전 해전에서 대패를 했다는 것이 조금은 이해가 갔다. 하지만 곧 물길이 바뀐다. 눈 깜짝한 사이에 갑판에 올라타 수적으로 밀어붙인다면 육탄전에 유리한 이쪽의 승리였다. 

수장의 목을 칠 수 없다는 건 아쉽지만, 벨 수 있는 것이 응당 목만 있는 것은 아니니까. 

그러기 위해선 적의 수장의 위치를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는 망원경을 쥐고 대장선을 훑어보았다. 방패로 가로 막혀 화포의 수가 가늠되지 않았다. 화포는 강력한 위력을 가진 만큼이나 치명적인 허점이 많은 무기다. 무게와 충격을 버티기 위해선 배가 단단해야 하는데, 배를 단단하게 만들게 되면 속력이 느려진다. 물살을 타고 최고의 속력을 내더라도 쿠웨드 함대의 절반 정도의 속력이다. 또한 한 번 사용한 화포는 일회성이 아닌 대신에 재정비에 들어가는 시간이 빨라도 120초가 소요된다. 

이전처럼 유인당하지 않고 물살을 타고 넓은 바다에서 치고 들어간다면, 제아무리 위력이 대단한 함포를 가지고 있다한들 쓰지 못한다면 의미가 없다. 말 그대로 저항이 불가한 어린아이의 손목을 비트는 것 보다 쉬운 것이다. 

망원경을 좀 더 들어 제독이 앉아 있어야 할 위치를 찾았다. 날아오는 화살과 탄환을 막기 위해 제독을 둘러 단단한 철갑방패가 세워져 제독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중 눈에 띄는 자가 있었다. 백발을 하고 있어 처음에는 노인인줄 알았다. 하지만 젊었다. 주름 진 곳 하나 없이 창백한 낯에 장신의 사내였다. 서늘하기까지 한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었는데, 제독을 상징하는 갑옷을 입고 있진 않았다. 

그 순간이었다. 붉은 눈동자가 천천히 고개와 함께 돌아 망원경으로 바라보는 자신의 눈과 똑바로 마주친 것이다. 일순간 알 수 없는 충격이 머리통에 가해지는 듯 했다. 백발의 아름다운 자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고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저곳에서 이쪽이 보일 리 만무하다 생각하면서도 그 오싹한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그 순간 움직임을 보이던 백발의 사내의 손에 화살이 들려졌다.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쏘아올린 화살이 눈앞까지 다가오자 화살은 긴사이를 보호하고 있던 방패의 틈을 파고 들어와 벽면에 박혔다. 

그제야 긴사이는 들고 있던 망원경을 내리고 등 뒤를 바라보았다. 갑작스러운 한 개의 화살에 뒤늦게 놀란 자들이 소란을 피우려 하자 긴사이는 손을 들어 그것을 저지했다. 

제독의 목을 칠 수 없어 아쉬웠던 차에 제법 구미가 당기는 먹잇감이 눈앞에 있었다. 그는 손을 뻗어 박힌 화살을 뽑아 단 한손으로 부러트렸다. 

“전 함대. 속공에 준비한다.”

“알겠습니다.”

물길이 바뀌었다. 긴사이는 이미 제독의 생포 따윈 잊은 후였다. 그가 원하는 것은 백발의 아름다운 자의 목을 베고 피에 절은 키스를 퍼붓는 것뿐이었다. 

그런 번들거리는 욕구를 가라앉히지 못하고 물길이 변하는 시점에서 속공의 시작을 알렸다. 물살을 타고 빠르게 진격하면서 불화살을 퍼부었으나, 트란슈의 반격은 같은 화살의 대응이 고작이었다. 

가소로움에 콧김을 뿜던 긴사이는 지체 말고 돌격하라 명했고 탄력을 받은 함대가 떼를 이뤄 대장선 앞 까지 다가왔다. 그때였다. 앞을 바라보고 있던 적선의 뱃머리가 일제히 돌아가 면을 보이게 만들었고 방패로 가로 막혀 있던 것이 열리더니, 함포가 발포 되었다. 

사격권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돌격하는 1함대를 무참히 격발시키면서 발악하자, 예상하고 있던 긴사이는 바로 2함대를 출격시켰다. 뒤를 이어 2함대가 다가선다면 재정비를 해야 하는 트란슈의 가녀린 저항도 마지막이 될 것이다. 

그리 생각했다. 

한 면을 드러내고 있던 트란슈의 함대가 일제히 물살을 타고 제자리에서 회전하여 또 다른 면을 보이더니, 두 번째 포격이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시작되었다. 

놀란 긴사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것을 지켜보고 예상치 못한 반격에 말문이 막혀 버렸다. 

2번의 무차별적인 포격으로 물살 또한 거세져 속력을 늦출 수 없던 2함대가 1함대의 격침된 파편과 뒤엉켜 방향을 잃고 저들끼리 부딪쳤다. 고작 대장선 하나가 2함대마저 괴멸시키면서 대장선 뒤에 대기하고 있던 함대들이 대장선을 중심으로 펼쳐져 회전한 뒤 함포가 발포 되었다. 

휩쓸러 돌아간 쿠웨드의 대장선마저 함포에 위협을 받자 충격이 가해진 기체가 기울자 중심을 잃은 긴사이가 기둥을 붙잡았다. 

“이대로는! 후퇴하셔야 합니다! 3군의 함대까지도 물길에 휩쓸려 저들의 사정권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후퇴? 나보고 개처럼 등을 보이라고?!!”

눈앞에 격침되고 있던 아군의 함대가 저들의 무기가 되어 튀어 이들의 발을 묶어 사정권 안 이상으로 파고드는 것을 방해하고 있었다. 

긴사이가 타고 있던 대장선 앞까지 화포와 불화살이 쏟아져 내려왔다. 

다시 한 번 배가 크게 기울자 중심을 붙잡는 것이 고작이었던 긴사이는 고개를 들어 트란슈 대장선을 향해 바라보았다. 

어렴풋이 모습을 드러낸 제독의 정체를 그는 두 눈으로 확인하고서도 믿기지 않았다. 이쪽을 찢어발기고 있는 함대의 우두머리라는 것이 고작 14살 정도의 어린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죽을 때가 되어 저승에서 사자라도 내려온 것이 아니라면 본 것을 믿어야 했지만, 이번만큼은 쉽지 않았다. 

작은 몸에서 알 수 없는 기백이 느껴졌다. 그것은 백발의 사내에게 위협당한 것 이상으로 물밀 듯 차오르는 전율과 같은 소름이었다. 

“하…….”

짧은 탄성과 함께 긴사이는 전 함대 퇴각 명령을 내렸다. 

2차 해전 결과

쿠웨드 격침된 적의 함대 약 130여척, 전사자 2천여 명. 

트란슈의 격침 함대 0. 전사자 0. 부상자 0명. 

긴사이는 해전 대패 후 3일간 물 한 모금 삼키는 것도 할 수 없었다. 그는 한동안 피비린내를 삼켜낸 바다의 끝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뜻하지 않는 패배에 절망을 했다거나 상대의 기백에 짓눌린 것이 아니었다. 진열을 가다듬고 전략을 짠다면 97척의 상대의 함대를 전멸시키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던 것은 백발의 사내였다. 강렬한 존재감에 남자라는 것을 자각하면서도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목을 베어 눈부실 정도로 처연한 백지에 붉은 피로 더럽혀진 것을 본다면 흥분을 이기지 못하고 시간하고 말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섬뜩함을 잊을 수 없었다.

그저 어렴풋이 보았던 것뿐이다. 확인 할 수 있었던 건 아주 작은 몸에 온통 검은 색이었는데, 얼굴만은 하얀 어린 아이였다. 제대로 본 것도 아니었다. 고작해야 퇴각명령을 내린 후 멀어지는 사이의 몇 초간의 옆모습뿐이었다.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런 감정은 처음 느껴본 것이었다. 백발의 사내를 보았을 때도 자신은 다르지 않았다. 그를 바라보며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과 동시에 본능이 시키는 대로 놈을 잡으면 목을 베어 시간을 하고 바다에 던져 버린다는 생각을 하는 게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 어린 제독을 바라보았을 때 자신은 아무것도 떠올릴 수 없었다. 눈을 뗄 수 없어 고작 퇴각 명령만을 내뱉을 수 있었다. 멀어지는 시야와 소년을 가리는 방패. 그리고 백발의 남자. 

백발의 사내가 자신에게 활을 쏜 것은 단순히 도발만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우월한 존재감으로 소년을 감추려고 했던 것이다. 태양을 가리는 달처럼. 그 순백한 아름다움에 홀려 소년을 의식하지 못하게끔 말이다. 

“제독의 이름이 뭐지.”

“발렌티노 베르너 세라이어. 수군 제독으로 보름 전 임명받았습니다.”

“발렌……. 쓸데없이 고상한 이름이군.”

묘하게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라 생각하면서 그가 입 꼬리를 들어올렸다.

“나포한 함대는?”

“총 3척입니다.”

“함포를 싣는다. 개중 1척은 폭약과 함께 잡아들인 놈들을 밑바닥에 집어 쳐 넣어.”

“알겠습니다.”

사실 해전에는 변수가 많아 제독의 생사를 절대적으로 지켜갈 생각은 없었지만, 반드시 생포할 것이다. 눈앞에 무릎을 꿇게 한 뒤 그 섬뜩할 정도로 단정한 얼굴을 엉망으로 만들어 줄 것이다. 그리 마음이 바뀌었다. 

*

두 번째 해전 대승에 수군들은 일제히 열광의 도가니에 빠져들었다. 우직한 무게감을 자랑하던 치탄도 연속된 대승에 기쁨을 참지 못하겠는지 웃음이 걸린 얼굴이었다. 

“모두 제독의 목소리를 듣고자 합니다.”

“과음은 허락하지 않는다. 적당히 알아서들 하라”

“하지만……!”

그대로 안으로 들어가자 치탄은 따라 들어오지 못하고 발길을 돌리는 듯 했다. 제법 무거운 갑옷을 벗고 몸을 돌려 찬 물이 가득 담겨 있는 통을 바라보다 그대로 물을 떠 머리 위로 쏟아 부었다. 

겨울이 다가오고 있는 트란슈에서 물을 데우지 않고 사용하는 건 옳지 못한 것이지만, 피로감과 함께 열감이 느껴졌던 탓에 어떻게 해서든 몸을 식혀야만 했다.

대승을 거두고도 보잘 것 없는 체력이 금세 밑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다시 한 번 머리 위로 찬 물을 쏟아 부었다. 기분이 좋았다. 나른한 것이 이대로 있으면 곧 괜찮아 질 것 같았다. 

“죽고 싶어?”

목소리가 들려왔다.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지만, 다가오는 상체에 가로 막혀 그럴 수 없었다. 눈앞을 가로 막고 있는 벽을 피해 고개를 들어 올렸지만, 얼굴을 보기도 전에 내 팔목을 잡아끌어 당기던 것은 어느새 나를 안고 찬물과 가장 멀리 떨어진 침소까지 데려왔다. 

물기를 닦지 않아 저곳에 내려앉고 싶지 않아 그대로 나를 안고 있는 놈의 목을 끌어안았다.

“싫어.”

“…….”

몸이 멋대로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열기가 올라오는 것이 느껴지는 것과 동시에 혀를 차는 소리와 함께 내 등이 침대에 닿았다. 그렇게나 싫다고 했음에도 물기를 닦지 않는 몸이 마른 침구에 닿자 인상이 써졌다. 

“싫다니까.”

일어나려고 손을 짚자, 이번엔 문이 내 목을 끌어안아 입을 맞췄다. 갑작스러운 입맞춤에 숨이 막혔지만, 밀어내지 않고 지켜보았다. 집요하게 입을 맞추더니 벌어진 입술 사이로 혀가 들어왔다. 고집스럽게 뒤엉켜 뭔가를 찾듯 더듬거리던 것이 한참동안 훑다 떨어졌다. 숨을 쉬는 것이 쉽지 않아 입이 떨어지고 나서야 깊게 참은 숨을 내뱉었다. 

“왜…….”

“?”

이마에 손을 가져다 보더니, 인상을 가득 쓰고 있는 문이 보였다. 

“가져갈 수 없어?”

문의 숨결이 귓가에 파고들 때마다 아릿한 고통이 느껴졌다. 어딘지 알 수 없는 통증에 당황하여 문을 밀어내려 손을 뻗었다. 서늘한 체온이 손목을 잡아끌어 당긴다. 열감에 어지러워  문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어린아이 같은 얼굴을 하고 있지 않을까. 

화내며 토라지거나 울며 보채지 않을까. 내심 그러길 기대하면서 어떻게 해서든 제대로 앞을 보고 싶었지만, 이제는 속마저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왜 가져갈 수 없게 해?”

어째서 가질 수 없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나는 보채는 아이에게 내줄 만한 것이 없었다. 마음을 주는 것도 몸을 주는 것도 모두 허락한 바 있다. 조금 시간이 걸려야만 줄 수 있는 것도 있겠지만, 나의 전부는 문의 전부이다. 

그럼에도 만족스럽지 못한 표정을 지었다. 눈살을 찌푸리고 입술을 깨물며 코앞까지 다가와 입을 맞췄다. 몇 번이고 안을 헤집고 숨을 가져가려 시도해도 내 숨은 멎지 않고 미약하게 새어나왔다. 

내 어깨너머로 무너지듯 고개를 숙이고 끌어안은 문은 바들바들 몸을 떨고 있었다. 불안이 가득한 아이처럼 말이다. 다 컸다고 생각했는데……. 분명 아까까진 아이는 자란다고 생각했던 것 같은데, 어른인 척이라도 했던 것일까. 

“줘…….”

“문.”

“라마.”

타이르듯 불러 봐도 통하지 않고 갑자기 어깨를 붙잡고 고개를 들어올렸다. 화가 난 얼굴이었다. 짙은 향에 취할 정도로 낮은 음성이었다. 

“줘. 억지로 빼앗기 전에.”

“다 가져가 놓고선, 무얼 또?”

“숨기는 거. 당신을 이렇게 만드는 거.”

내 뺨에 다가온 손이 열기를 움켜쥐듯 닿았다. 이제야 제멋대로 일렁이던 것이 멈추었다. 다시 예전처럼 돌아갈 생각은 없었다. 다시 내가 없이 내가 모르는 사이에 다가갈 수 없는 곳으로 먼저 가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이건 온전히 내가 견뎌야 했던 것이니까. 죽는 건 무섭지 않다. 하지만, 죽어버린다는 건 두렵다. 두렵고 고통스럽다. 생살이 도려 나가는 것 이상으로 그것은 나를 망가뜨릴 것이다. 

“줄 수 없어.”

내 말에 문은 몸을 움찔거렸다. 입안에서 무얼 깨물어 버린 것인지 입가를 타고 피까지 흘러나왔다. 더는 씹지 못하게 만들려고 손을 들어 입 안에 밀어 넣었다. 이를 세우지 않고 연 문의 입안은 얼마나 강하게 살덩이를 씹은 것인지 손가락을 타고 피가 흘렀다. 안쪽 살은 검게 보일 정도로 파헤쳐 있었다. 

“내가 미칠 테니까.”

고통을 대신 가져가고, 눈이 닿지 않는 곳으로 숨어 닿을 수 없는 곳으로 먼저 가 버렸다. 이제야 그것을 알았다는 것이 지금까지도 속을 썩게 하고 있었다. 

“내가 숨 쉴 수 없을 테니까…….”

“…….”

문은 대답하지 않고 나를 끌어안았다. 

차오르는 열 때문인지, 썩은 내가 진동하는 속 때문인지 알 수 없었지만 나는 코끝이 아려오는 것을 느꼈다. 눈 부분이 유난히 뜨거워짐을 느꼈다. 나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넓고 단단한 어깨에 기대 뒷머리를 짓누르고 허리를 감싼 손에 안심이 되어 가까스로 소리를 내는 것만은 참을 수 있었다. 

“울어도 돼. 이건 안 가져갈게.”

따가울 정도로 마른 눈물이 뜨거운 눈 밑으로 떨어졌다. 울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기도 전에 눈을 감아 버렸다. 내내 버텨왔던 것이 한순간에 무너지곤 한다. 들개로 다시 눈을 뜨고 한스덴을 처음 보았을 때도 나는 이렇게 문을 붙잡고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내내 나를 안고 있던 문이 내가 우는 걸 멈추고 늘어져 있자, 젖은 옷을 천천히 벗겨 마른 천으로 내 몸을 감싸고 들어올렸다. 한손으로 엉덩이를 받쳐 안고 다른 한 손으론 축축한 침구를 걷어냈다. 그리고 어디에서 가져온 것인지 마른 천을 대충 깔고 나를 앉혔다. 

물기가 가득한 머리를 닦아주더니, 갑자기 얼굴을 쓸었다. 

뺨에 붙은 손을 밀어 내고 고개를 돌렸다. 허공에 던져진 손을 바라보던 놈이 내 앞으로 무릎을 꿇고 앉아 나를 올려다보며 웃었다. 쓸데없이 눈에 띄는 외모에 웃기까지 하자 주변이 화사해지는 기분까지 들었다.  

“옷.”

“?”

“옷 가져와라.”

마른 천을 끌어당겨 얼굴까지 가렸다. 다 벗겨버린 바람에 지금은 알몸이다. 이대로 잘 수 없기 때문에 선반 어딘가에 있을 옷을 가져오라고 말했다. 

“추워?”

“그래.”

나는 분명히 춥다는 물음에 긍정적으로 대답한 것 같은데, 문은 옷을 가져오려 움직이지 않았다. 반대로 자신이 옷을 벗기 시작했다. 

“?”

몸이 정상이 아니라 머리가 돌아가지 않아 문의 행동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뭐 하느냐고 묻기도 전에 내 팔을 끌어당겼다. 반사적으로 문의 얼굴을 손으로 짚고 그것을 막았다. 

“뭐하는 짓이야.”

“춥다고 했잖아. 따뜻하게 해 줄게.”

“옷이나 가져와”

“이게 더 따뜻해.”

“그게 아니잖아 멍청아.”

“이게 맞아.”

힘을 쓰는 것만은 이길 수 없어 그대로 끌려와 품에 닿아 버렸다. 타인의 살갗에 닿는 다는 것이 익숙지 않아 잠시 내 뺨에, 내 몸에 붙어 있는 것이 무엇인지 자각하기까지 몇 초간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몸이 얼음장 같아.”

아무렇지 않게 말하면서 멋대로 마른 천 사이로 거칠고 커다란 손이 나의 허리를 붙잡았다. 그런 것에 놀라 몸이 움찔거리자 지금 이 상황이 내키지만은 않았다. 

“라마.”

“....?”

갑자기 문이 내 이름을 불렀다. 왜 그러나 싶어 문의 몸 위에서 얼굴을 들어 올리자 문 역시 고개를 올려 입을 맞췄다. 그리고 갑자기 허리를 잡은 손에 힘을 주어 나를 돌리더니, 밑으로 향한 뒤 다시 한 번 입을 맞췄다. 

쫓기듯 빼앗듯 초조함만이 가득했던 입맞춤이 아니었다. 꽃잎이 닿듯 옅게 내려 앉아 물감이 섞이듯 뒤엉키더니 잔잔히 어르듯 머금고 떨어져 눈가에 입술을 옮겼다.

“잘자.”

“긴사이가……. 졌다?”

긴사이의 패배를 접한 론 타이의 표정이 그늘로 짙어졌다. 그는 패전에 대한 소식을 듣고도 황당함도 분노도 드러내지 않고 침묵했다. 론 타이의 곁에 있던 자들은 모두 섬뜩한 긴장감에 마른침마저 목구멍 안으로 넘기질 못하고 있었다. 

론 타이는 침묵을 길게 잇기 시작했다. 그는 깊은 생각에 잠기였다는 듯 입 한 번 열지 않더니 긴사이의 다음 해전이 언제냐고 물었다. 

“보름 후입니다.”

“알겠다. 너는 물러가라.”

빠르게 물러나가는 자들을 지켜보던 론 타이가 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눈동자를 돌려 곁에 서 있는 자를 바라보았다. 

“일주일 후 긴사이는 트란슈를 급습한다. 은밀히 흘리고 다녀라. 또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왕을 조롱하고 영웅을 우상시하는 노래를 만들어 아이들이 부르도록 하라.”

“예.”

긴사이는 자존심 강해 자신이 사냥하지 않는 먹이는 먹지 않는 짐승이다. 귀족이 때론 목숨을 걸고 품위를 지켜내듯 말이다. 이번 패전으로 짓눌리기는커녕 강한 자극을 받은 상태일 것이다. 앞으로 그는 더욱 철저하게 계략을 꾸며 상대를 완벽하게 손에 쥘 것이다. 최후에는 갈기갈기 찢어놓아 형체도 알아 볼 수 없도록 만들어 놓고 저번처럼 머리만 내던질지도 모른다. 

그러기엔 아까운 자가 아니던가. 

그 긴사이를 상대로 완벽한 승리를 거머쥔 것도 모자라, 나이가 어리다는 것을 감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연륜이 묻어나오는 전술에 소름이 끼쳤다. 

조금이라도 발목을 잡을 수 있을까 싶어 긴사이를 보낸 것이었지만, 패전으로 고약한 짐승의 몸을 달아오르게 만들어 버렸으니, 멀쩡히 대화를 나누는 것은 불가능하다 생각했다. 

긴사이가 이번 해전에 끼어든다는 것을 혐오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이럴 작정이었고 흥미주의인 짐승을 달랠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짐승에게 자신은 절대적이다. 얼마나 충성스러운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번 일을 크게 염두에 두지 않았다. 

해전에 있어 전례가 없는 대승을 거둔 트란슈에도 파고들 틈은 있다. 첫 번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왕을 조롱하고 나라를 구한 영웅을 숭배하도록 하는 것이다. 왕이 전쟁 중에도 모습을 보이지 않는 다는 것은 목숨이 아까워 겁에 질려하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을 테니까.

그것은 트란슈의 역린이나 다름이 없다. 

왕을 조롱하고 제독을 찬양하는 노래가 어른과 노인, 여자와 어린아이 할 것 없이 입에 올리고 퍼트리게 만든다. 그리하면, 해전의 독재권을 가지고 있는 제독이 제아무리 충성심을 보인다 한들 트란슈 왕은 제독을 내적 존재로 위기의식을 느끼게 된다. 

왕이 그것을 의식하는 순간이 영웅이 죄인이 되는 것이다. 왕은 외적인 적과 내적인 적을 두고 싸워야 할 것이고 필요 이상으로 예민해 질 것이다.

일주일 후 급습할 것이라는 예고를 흘린 것은 제독이 아닌, 트란슈 왕을 잡기 위한 덫이다. 일부로 흘렸다는 것을 제독은 눈치 챌 것이다. 그러나 직접 해전에 가담하지 않는 왕은 소문만 듣고서 소문에 대응하라 할 것이고 제독은 그 명을 거절 할 수밖에 없다. 

앞으로 얼마나 있을지도 모를 해전에 식량과 무기를 낭비하지 않기 위해선 그 판단이 옳다. 그러나 트란슈의 왕은 죽을 것을 염려하여 이제껏 신분을 숨기며 살아왔다. 겁 많은 왕은 자신의 명이 묵살되었다는 것을 곱게 받아줄리 없다.

트란슈 왕을 조롱하는 노래가 빠른 속도로 트란슈 곳곳에서 들려왔다. 뒤로는 일주일 후 해역을 통해 급습할 것이라는 소문도 퍼트렸다. 

믿지 않는다면, 해역을 통해 들어와 마을을 공격할 것이고 소문을 믿고 대치되어 있다면 돌아서면 그만이다. 어찌되었든 단단한 짐승의 발톱을 뽑아버릴 수 있는 기회라 여겼는데,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왕의 사병?!”

“예. 마을을 둘러 모두 왕의 사병과 화포가 대치되어 있습니다. 기병의 함포에 이쪽 위치가 드러나 물러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독은?!”

“해전에 가담하지 않았습니다. 명을 받은 것도 없었습니다.”

“기가 차는 군.”

론 타이는 오랜만에 느껴보는 황당한 기분에 헛웃음까지 흘러나왔다. 왕을 조롱하는 노래에도 반응이 없더니, 이쪽이 흘린 소문에 왕사가 직접 움직였다. 노래까지 만들어 퍼트린 노력도 무색할 만큼 완벽한 대응이었다. 이렇게 된다면, 트란슈의 백성에게 왕을 조롱하는 노래를 부르게 할 수 없을뿐더러 사기만 높여준 꼴이었다.

충성을 다하는 신하와 그런 신하를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왕이라니. 

신뢰를 하는 것뿐만 아니라 급습한다는 소문을 듣자마자 왕사부터 대치시키는 행위는 제독을 보호하기 위함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중립을 지켜주는 자가 있다는 건가.”

왕이 이성을 잃지 않도록. 보다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제독을 이간질시키는 자들을 사전에 차단해주는 자가 왕의 곁에 있다는 것이 예상되었다. 

“트란슈 레이 더 바함. 인복이 많은 자로군.”

*

칙칙한 곰팡이 냄새만이 가득한 철장 안에서 이반은 무릎을 세워 끌어안으며 밖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말라 비틀어버린 송장마냥 더럽혀진 채 아무도 오가지 않는 철창 밖만을 향해 있었다. 

“뭐가 빼주겠다는 거야…….”

앞으로 보름 후. 자신은 늙은 로던프 선왕의 시신과 함께 산채로 묻힐 것이다. 죽는 것이다. 사체 냄새가 진동하는 검은 그림자가 눈앞까지 다가와 있음을 확신 했다. 이반은 그날 이후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라마에게 속아 희롱 당했다고 생각했다. 그는 처음부터 자신을 이곳에 빼 낼 생각이 없다. 삶에 대해 구걸하는 자신의 모습을 최후까지 즐기는 것이다. 그렇게 확신했다. 

억울함과 분노가 뒤섞였지만, 그를 가장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은 예정된 죽음에 대한 공포였다. 그는 조그마한 소리에도 화들짝 놀라곤 하였다. 이미 정신력으로 견디기엔 한계에 부딪혀 미치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내가 왜 죽어야해. 난 안 죽어. 난 죽지 않을 거야. 내가 왜 죽어야 하는 데.”

이반은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어째서 자신이 죽어야 하는지 끊임없이 물었다. 

얼마나 그렇게 되뇌고 있었을까. 멀리서 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에는 생쥐가 내는 소리인지 알았으나 곧 사람의 인기척이라는 걸 깨달았다. 등에 땀이 절여질 정도로 긴장하고 있는데, 철장 밖으로 소리의 정체가 서서히 드러났다. 

순장까지 보름이 남았는데, 그 사이에 앞당겨 진 것일까. 

자신을 끌고 갈 것이라고 생각한 이반은 고개를 드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이반.”

낯선 목소리에 놀라 반사적으로 이반의 고개가 올라갔다. 그곳에는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2왕자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동공이 확장 될 만큼 놀란 이반은 떨고 있는 몸이 일시적으로 멈춰 넋을 놓고 말았다. 

“이라고 했던가?”

“…….”

눈으로 보고서도 믿기지 않았다. 2왕자는 대답이 없는 이반을 바라보더니 철장 안으로 손을 뻗었다. 멀지 않는 곳에 있던 이반은 그 손에 이끌려 천천히 다가갔다. 커다란 손은 이반의 머리카락에 머물렀다. 쓰다듬어주는 손길이 다정하다는 것을 알고 그는 뜻 모를 설움이 복받쳤다. 

“놀리곤 했어.”

“?”

“양과 같이 복슬 거려 손가락에 걸리곤 했으니까. 조금만 머리 손질을 하지 않아도 폭신폭신해져 버렸거든. 그것만은 닮지 않기를 그녀는 바랐지만, 유일하게 그것만이 닮아 있었다. 그런데 너는…….”

“…….”

“부드럽군.”

가느다란 실타래와 같이 늘어지는 결 좋은 이반의 머리카락이 손가락에 걸리는 일 없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다.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던 2왕자의 손이 창백히 질려 있는 이반의 턱을 잡아들어 올려 두 눈을 마주쳤다. 

“녹음이 짙은 눈동자. 옅은 금빛 머리카락. 웃는 방법. 우는 방법. 모두 아이가 5살 때의 모습이 기억의 전부지만, 너는 아니다.”

“…….”

이반의 머릿속에서 단 한명의 인간이 떠올랐다. 애써 부정하고 싶었지만, 눈앞에 아른 거릴 정도로 잔상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2왕자는 왜 알아보지 못했던 것일까. 이렇듯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으면서 왜 그는 알아보지 못했던 것일까. 

곧 답은 나왔다. 

“모르는 척……. 하신 겁니까.” 

“…….”

무언의 긍정이었다. 

이대로 목이 날아가도 이상하지 않는 상황이었다. 2왕자는 떨고 있는 이반을 바라보았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얼굴이었다. 한편으론 어째서 이런 상황까지 온 것인지 자각하지 못해 억울함이 사무친다는 표정이기도 하다. 

다시 한 번 그것을 확인한 2왕자는 이반의 턱에 손을 뗐다. 왕좌를 차지하기 위해서 이용할 수 있겠다 싶었지만, 그만두었다. 

2왕자가 그대로 등을 돌리려 하자, 철장을 붙잡은 이반이 소리쳤다. 

“살려주십시오!! 사칭할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그자, 그 엔도라는 자가!!! 그가 시킨 겁니다!! 저는 아무것도 모르고 시키는 대로만 했을 뿐입니다!”

2왕자가 멈췄다. 이반은 죽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2왕자를 보낼 수 없어 필사적으로 다시 말했다.

“그는 저를 이용하고 버렸습니다. 저는 그자에게 속아……. 엔도는 당신의 아이를 이용하고 있습니다. 그를 이용해 내전을 일으켜 왕권을 위협할 생각입니다! 또한 라마라는 자도 내전을 이용해 침공할지도 모릅니다. 그는 트란슈와 손을 잡고 로던프까지 손에 쥐려 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당신이, 당신의 저를 이용해 왕이 된다면……!”

“내가 왕이 된다면, 너는 나중에 죽겠지.”

“……!”

“그러니, 지금 죽어라.”

온정을 베풀어도 은을 모르고 등에 칼을 꽂는 어리석은 자를 뒤로하고 2왕자가 사라졌다. 벼랑 끝에서 붙잡고 있던 앙상한 나뭇가지가 뿌리째 뽑혀졌다. 

멀리서 들리는 듯한 절규를 외면하고 걷는 중 갑자기 2왕자가 자리에서 멈췄다. 뒤를 따르던 자칸이 주군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곁으로 좀 더 다가왔다. 

“엔도. 놈을 조사하라.”

“예.”

불길하다 생각한 건 언제나 틀리지 않았다. 뻔한 거짓말로 왕족임을 사칭하려 했지만, 꽤 많은 걸 알고 있었다. 자신에게 아이가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 아이가 금발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또한 정체를 알 수 없는 자의 소행으로 아내와 아이가 암살당했다는 것도. 

공식화 시키지 않고 비밀리에 부쳤던 그것을 이토록 면밀히 안다는 것은 암살에 가담했던 자로 가정 할 수 있다. 

자칸이 곁에서 사라지자, 2왕자의 멈췄던 걸음이 다시 옮겼다. 

그날 그녀와 아이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자들에 의해 확실히 살해당했다. 이제 5살 밖에 되지 않았던 아이와 아름다웠던 그녀의 안면이 참혹하게 벗겨져 나간채로 말이다. 

이것은 단순히 아이의 죽음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다. 

또한, 이번 4왕자의 암살도 그날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

“검은 악마……. 그 악마는 대체 뭐지?!”

센티아 공작은 공포와 절망에 젖어 외쳤다. 빛이 삼켜진 곳에서 천천히 걸어나오는 발소리가 섬뜩하다 느낄 쯤 잿빛과도 같은 머리카락을 가진 사내가 나타났다. 그는 비웃음을 머금은 얼굴로 태연하게 눈동자를 굴려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악마를 데려와라. 내 앞에 악마를! 그를 무릎 꿇려!!!”

“검은 태양.”

“뭐?”

“악마 같은 저속한 존재가 아니시다. 그분은.”

엔도의 눈동자가 차갑게 돌아가 온 몸에 붕대를 감고 중심부가 잘려나가 제대로 앉는 것조차 할 수 없는 센티아 공작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이제껏 자신이 모아왔던 인형들과 그분을 같은 취급하려는 것이 거슬렸다. 또한 이런 자에게 그분이 직접 모습을 드러낸 것 또한 짜증이 솟구쳤다. 

엔도는 천천히 몸을 돌리고 센티아 공작의 눈앞까지 다가왔다. 흠칫 거리며 놀란 그는 엔도의 광기가 도는 눈빛을 바라보고 뒤늦게 사람을 불렀지만 아무도 응답이 없었다. 그 섬뜩한 기운이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센티아 공작의 기름진 얼굴을 잡아 벽에 박은 엔도는 나른한 손길로 그의 몸을 훑듯 내려왔다. 살집이 많은 끔찍한 느낌의 지방을 지나 숭고한 자의 흔적이 남은 중심부로 내려갔다. 지혈을 해 놓듯 꽁꽁 감겨진 붕대를 뜯어내자 그곳이 드러났다. 꿰맨 자국마저 예술적이다. 

그곳에 손을 옮기자 센티아 공작이 고통에 몸이 놀라 움찔거렸다. 엔도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런 버러지 같은 자의 몸에 그분의 흔적이 있다는 것이 너무도 거슬렸다. 그분의 성정답게 단호하고도 깨끗하게 잘려나가 있었다. 그대로 손톱을 세운 엔도는 살을 파먹듯 움켜쥐고 그대로 그 흔적을 고스란히 뜯어냈다. 

비명조차 자유롭게 지를 수 없던 센티아 공작의 몸이 경련을 하듯 떨었고 입가에 침을 흘러내며 고통스러워했다. 그 모습을 보이지 않는 다는 듯 들짐승이 뜯어 먹은 듯한 흔적은 뒤로 하고 그대로 센티아 공작을 놓았다. 

몇 차례 경련을 일으키던 센티아 공작은 바닥에 널브러져 움직이지 않았다. 뜯어낸 살점에 입을 바라보던 엔도는 황홀하다는 듯 혀를 내밀어 베어진 자국을 따라 쓸어올렸다. 그의 가늘고 하얀 목덜미의 맛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들어 참는 것이 어려워지고 있었다. 

센티아 공작을 뒤로 하고 뜯어낸 살점을 액체가 든 병에 넣어 뚜껑을 닫은 뒤 소중히 숨에 넣었다. 

“적당히 살려놔.”

아직은 숨이 붙어 있어야 할 이유가 있었다. 의식을 잃은 센티아 공작의 주변으로 몇 명이 붙자 빠른 속도로 치료가 들어갔다. 

그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던 작은 인영에게 다가갔다. 깊게 눌러쓴 후드를 내리자 아름다운 금발에 보석 같은 에메랄드 눈동자가 박혀 있는 어린 문호였다. 

그분을 끌어낼 정도의 가치는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곳까지 왔음에도 문호가 아닌, 4왕자만을 데려간 것이 그러했다. 직접 공들여 세뇌를 시켰음에도 들었던 것처럼 그를 이용해서는 그분을 손에 쥘 수는 없다. 

지금도 곁을 지키고 있을 하얀 멍멍이가 떠올랐다. 살심이 올라오자 저도 모르게 문호의 뺨을 훑고 있던 손이 가느다란 목을 향했다. 힘을 주어 움켜쥐고 있다는 것도 잊은 채 분노를 삭이던 중 숨이 껄떡거리는 소리가 들려와 시선을 돌렸다. 

그제야 어린 문호의 목을 사정없이 잡고 있다는 것을 알고 힘을 풀었다. 그제야 숨을 한꺼번에 몰아쉬던 문호는 아무런 동요 없는 얼굴로 눈물을 흘리며 입가에 침을 흘렀지만, 센티아 공작처럼 역겨워 보이진 않았다. 

가느다랗게 숨을 쉬던 문호가 흐느적거리는 몸으로 쓰러지려하자, 귀찮은 듯 엔도가 그의 멱살을 잡아 세웠다. 

“뭐, 간만에 인형놀이나 좀 해볼까.”

쿠웨드의 해전 지원과 동맹 요청이 재차 들어왔다. 이번 제안은 로던프가 해전에 가담한다면 트란슈 주권에 대한 우선권을 주겠다는 것이다. 1왕자는 이를 받아들였으나 2왕자는 해전을 가담하게 된다면, 이후 중립국가의 재제를 받아 최악의 수를 둘 수 있다 경고 했다. 찬성과 반대의 입장이 팽팽해지면서 두 왕자의 대립 구도가 형성 되었다. 

선왕이 서거한 뒤 왕좌의 부재는 권신들의 결속력만 높이고 있었다. 또렷하게 나눠진 세력이 부딪히자 모든 선택권은 상위 권력자인 센티아 공작에게 향했다. 

센티아 공작이 해전 가담에 표를 던지면서 1왕자의 손을 잡았다. 이후 2왕자의 세력에 가까웠던 자들이 차례로 숙청시킴으로서 문호 역시 1왕자의 권력에 힘을 보태였다. 

당연하게 그것을 받아들인 1왕자는 당돌한 기세로 대부분의 반대자들의 숙청을 끝낸 문호를 바라보았다. 선왕의 문호를 눈앞에서 본 것은 처음이었다. 애초부터 선왕의 잔재는 남김없이 지워 버릴 생각이었던 1왕자에게 선왕의 문호 역시 잔재일 뿐이었다. 

반대를 하던 권신들의 목을 차례로 베어내 자신의 권력이 될 왕에게 미리 아첨하려는 놈 치고는 지나치게 무미건조한 얼굴이었다. 

놀란 건 그것 뿐만은 아니었다. 생각했던 것 보다 어리다. 솜털도 빠지지 않는 얼굴로 표정 없이 앉아 있으니 마치 인형을 보는 듯 했다. 

“기특한 짓을 했더군.”

문호는 독단적인 권력권이 없다. 문호의 권력은 모두 왕으로부터 비롯되기 때문이다. 문호는 내사관들의 처벌을 주청할 수 있는 유일한 관리. 왕이야말로 문호가 가질 수 있는 최고의 권력이다. 1왕자는 그것을 탐탁해하지 않았었다. 마치 한 왕좌에 권력이 두 개로 나눠지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문호라는 직책부터 없애버릴 생각이었던 1왕자에게 어린 문호는 장당 태워내야 할 종이와 다름없었다. 서두르지 않았던 것은 단순히 문호가 눈에 띄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엔 다르다. 반대 세력의 권신들이 선왕의 권력을 업은 문호에 의해 숙청당했다. 서거를 한 뒤 왕좌에 문호가 앉아 권력놀음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장은 왕사를 거느릴 수 없는 문호가 이처럼 날뛰는 것을 두고만 볼 수밖에 없다. 센티아 공작이 문호의 뒤를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의 자릴 위협할 수 있는 씨앗임을 인지한 이상, 내전이 일단락되고 트란슈 점령이 끝나기를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 그가 가장 먼저 죄를 묻어 목을 칠자는 트란슈의 왕이 아닌, 눈앞에 앉아 있는 문호이기에.

“이번 문호의 공을 높이 사 조만간 어울리는 자리를 주도록 하지. 이만 물러가도 좋다.”

1왕자가 문호에게 눈을 흘기며 물러가라 손짓하자 앉아 있던 문호가 자리에 일어나 발소리도 없이 나갔다. 동시에 2왕자가 안으로 들어섰다. 2왕자의 시선이 잠시 나가는 문호의 등을 바라보더니 시선을 돌려 1왕자를 바라보았다. 

“1왕자를 뵙습니다.”

“이곳은 담소를 나누기엔 거창하군. 안으로 들어와라.”

2왕자는 1왕자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기 전 2왕자가 자칸에게 시선을 보내자, 그를 눈치 챈 자칸이 2왕자의 곁에서 떨어져 어디론가 사라졌다. 

마주 앉아 있는 1왕자와 2왕자에게 차를 내 오는 시종이 물러나가 1왕자는 차분히 한 모금의 차를 마신 뒤 2왕자를 바라보았다. 

제법 분위기가 많이 변하였다. 토끼의 배를 빌려 태어났다고는 하나, 그 씨가 맹수라는 것을 증명하듯 말이다. 

“굳이, 이런 식으로 나오셨어야 했습니까,”

“이쪽엔 유리한 조건이다. 겁에 질려 마다할 건 아니지.”

“애초부터 쿠웨드는 트란슈를 점령한 뒤 로던프를 치기 위해 전쟁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내전 또한 부추기고 있다는 것도 정녕 모르신다 하실 겁니까.”

“하고 싶은 말이 뭐지.”

“3왕자와 4왕자가 암살당했습니다. 내막이 확실한 현세에 내전엔 의미가 없습니다.”

“똑똑해 졌다 싶었는데, 착각이었나 보군. 이제와 나와 손이라도 잡겠다는 건가?”

2왕자는 1왕자의 말에 터트리듯 실소가 나왔다.  

이렇다한 감정이 없던 1왕자의 미간에 옅은 주름이 지어졌다. 

“왕좌에 앉아드리죠. 그 전까진, 형님의 손에 죽을 일은 없을 겁니다.”

2왕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가벼운 목례로 인사를 대신하고 그대로 밖으로 나갔다. 그 모습에 더 이상 2왕자의 어깨에 힘을 실어줄 것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불길함이 엄습했다. 

침묵을 지키며 앉아 있던 1왕자의 눈빛이 변하였다. 그는 시린 듯한 금빛 눈동자에 날을 세웠다. 그가 입을 열었다. 

“2왕자의 사병을 꾸려 에덴에 정벌케 하라. 이후 왕사는 2왕자를 반란군으로 대적한다.”

*

숨이 막혀왔던 공간에서 빠져나온 2왕자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자칸이 곁에 와 등 뒤를 따라 붙었다. 

“저택으로 돌아간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접점은 없었습니다.”

문호에게 가 있는 화살을 무리하게 자신에게 돌린 결과, 예정보다 빨리 자신의 목을 내 놓아야 할 때가 온 것이다. 그전에 4왕자의 암살에 대한 내막을 파헤칠 정도의 시간은 충분하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곁에 있다면 자칸 마저 개죽음을 피할 수 없을 터.

“자칸.”

“예.”

“앞으로 넌 문호의 곁을 지켜라.”

“!”

2왕자의 말에 놀란 자칸이 되묻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 다는 것을 알면서도 2왕자의 눈앞에 무릎을 꿇었다. 

“주군.”

자칸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2왕자는 발치에 고개를 숙인 그를 바라보았다.  

“명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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