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왕자는 그대로 자칸의 곁을 지나쳤다. 눈을 질끈 감은 자칸은 사지로 향하는 주군의 발길조차 잡을 수 없다는 것에 절망했다. 괴로움이 그를 집어 삼키려는 순간, 머리위에 무언가 닿았다.
“부탁한다.”
가볍게 정수리를 두들기고 사라진 것은 2왕자의 손바닥이었다. 뒤늦게 눈을 뜬 자칸이 일어나 더는 보이지 않는 2왕자의 고별에 울음을 참고 고개를 숙였다.
*
2왕자의 거침없던 걸음이 느슨해졌다. 어느새 멈춰선 그가 천천히 눈동자를 옆으로 돌리자, 할랑한 자의 모습이 드러났다. 불길한 느낌의 회색 머리카락을 가진 사내는 미소를 머금고 천천히 2왕자의 눈앞에 나타나 건성으로 고개를 까딱였다.
“엔도.”
“초면에 낯가림은 예의입니다. 왕자님.”
“…….”
“하긴, 왕자님에게 전 초면이라기에는 익숙하겠죠.”
성큼 앞으로 다가온 엔도는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2왕자의 눈앞에 다가왔다. 물러나지는 않았지만, 코앞까지 다가온 엔도의 얼굴이 못마땅한 그가 눈썹을 찡그리자, 눈을 가늘게 뜬 엔도가 활짝 웃었다.
“그래서, 뭘 아셨슴까?”
“왕족의 몰살.”
“또?”
“원하는 게 왕좌인가.”
“엑~ 그딴 건 줘도 안 갖습니다.”
2왕자는 품에서 칼을 빼들었다. 엔도의 눈앞에 날카롭게 휘저었음에도 그를 눈치 챈 놈이 뒤로 고개를 젖혀 피한 뒤 한 발자국 물러났다.
“어우, 목이라도 벨 생각이십니까?”
가증스러운 연기를 하며 목을 쓰다듬던 엔도가 히죽이며 2왕자를 바라보았다. 그의 느긋한 움직임에서 실력을 충분히 인지한 2왕자는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엔도의 뒤를 밟은 결과, 2왕자가 가장 먼저 알아낸 것은 그가 공식적으로 사망기록이 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 주제에 신분을 숨길 생각도 하지 않으니, 그의 죽음을 아무렇지 않게 덮을 정도의 재력이 그에겐 있다.
어렴풋이 그 재력을 가진 자가 누구인지는 예상이 갔다.
“선왕의 명령인가.”
“호……. 생각보다, 머리를 굴릴 줄도 아시는 군요?”
“왕족 모독죄로 목을 치기 전에 말해라.”
“…….”
엔도는 자신의 목울대에 닿으려는 2왕자의 검 날을 바라보다, 갑자기 입 꼬리를 들어 올렸다. 그 모습에 긴장한 2왕자가 검 날을 비틀 듯 잡아 베어내자, 그것을 막은 것은 엔도의 검 집이었다. 검 날이 박히면서 떨어진 검을 거칠게 받아치며 밀어냈다.
날이 선 엔도의 검을 막았지만, 2왕자는 벽으로 몰아세워져 섬뜩하게 광명 하는 날을 바라봐야 했다. 엔도는 힘을 주어 날을 짓눌렀다. 불길한 무언가가 검을 타고 올라왔고 천천히 2왕자의 검에 균열을 생기게 만들었다.
“태양을 삼켜라.”
맞닿고 있는 것을 버티는 것이 고작인 2왕자의 귓가로 여유로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선왕의 마지막 유언이십니다.”
달콤하게 속삭이던 엔도가 2왕자의 검을 부러트렸다. 박살이 나면서 코앞까지 다가온 날에 얼굴이 박힐 것이라 생각한 2왕자가 눈을 질끈 감았다. 이대로 죽는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지만,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섬뜩한 웃음소리가 뒤를 이었다.
“허나, 당신은 태양이 아닙니다.”
“…….”
“이런 식으로 내전을 끝낼 생각이십니까? 아니면…….”
“닥…….”
“지키려고?”
2왕자가 미소 지었다. 엔도는 그 얼굴을 확인하고 가벼운 웃음을 지으며 가늘게 눈을 떴다. 그의 약점이 될 만한 것을 잡았다는 듯한 얼굴이었지만, 2왕자는 아직 모든 것이 확실하지 않을뿐더러 그가 아주 단순한 것을 예상만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너는 나의 형을 죽일 수 없어.”
“형제애라는 겁니까?”
“…….”
“그 형제가 당신을 죽이려고 하는데도 말입니까?”
“짐승은 이해하지 못하겠지.”
엔도는 미심쩍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렇지 않게 벽에서 떨어져 엔도를 지나쳐 가버리는 2왕자의 등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뭔가 이상한 것 같기는 한데, 묘하게 납득이 되는 상황이라 좀처럼 잡았던 감을 다시 놓쳐버린 듯 했다.
묘하게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지만, 진실과 거짓정도는 분간할 수 있다. 2왕자에게선 거짓된 것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왕자들에게 눈물겨운 형제애라니, 가당치도 않았다. 원수지간이라 제 손으로 죽일 거라는 말을 했다면 이렇게까지 의심이 되진 않았을 것이다. 하물며 권력욕에 빠진 2왕자의 입에서 나온 것이라 더 믿어지지 않았다.
어긋난 것은 그 뿐만이 아니었다. 입만 산 놈인 줄 알았더니, 머리를 굴릴 줄도 알지 않던가. 과거와 모순된 모습에 조금은 혼란스러웠다. 따로 손을 쓰지 않아도 알아서 제거가 될 것이지만, 그것이야말로 저 2왕자가 원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자신이 태양이 아니라는 말에 부정하지 않았다. 왕좌에 앉을 자격이 없다는 것을 스스로도 알고 있다는 것이다. 알고 있음에도 왕좌를 탐해왔었다는 것이라는 건데, 죽기를 각오한 자에게 어울리는 권력욕이 아니었다.
“알기 쉬운 놈인지 알았더니…….”
1왕자보다 속내를 알기 어려웠다. 그러나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는 약간의 흥밋거리를 위해 좀 더 두고 보기로 했다.
2왕자는 엔도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그의 걸음은 다시는 향할 길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곳으로 되돌아갔다. 그가 엔도의 눈을 피해 도착한 곳은
송창처럼 말라 죽은 눈을 하고 있는 이반의 앞이었다.
“나와 함께, 죽을 수 있겠느냐.”
이반이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는 놀란 얼굴로 2왕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이반에게 손을 뻗고 있었다.
“이 손을 잡을 수 있겠느냐.”
기어가듯 다가온 이반은 손을 뻗으려고 했다. 그를 지켜본 2왕자가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그러나 사는 건 아니다.”
멈칫한 이반이 불만스러운 듯 되물었다.
“잡으라는 겁니까? 말라는 겁니까?”
“잡으려고 뻗은 게 아니더냐?”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이반은 철창 안으로 들어온 하얀 손을 붙잡았다. 이반의 손을 잡은 2왕자는 다른 손을 뻗어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그의 행동에 놀란 이반은 흠칫 몸을 떨었지만, 아무렇지 않다는 듯 2왕자가 간수를 불러 철창을 열게 하였다.
왕자의 한마디만으로도 보잘 것 없던 자신은 선왕의 순장 대상에서 제외 되었다. 이토록 쉽게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
1왕자는 눈앞에 고개를 숙이고 있는 자를 내려다보았다.
“본래 문호에겐 허락되지 않지만, 그대는 부재중인 왕좌 대신이다. 최근 에덴에서 심상치 않는 기류가 느껴진다. 사병을 줄 테니, 그곳을 정찰하라.”
어린 문호에게 사병을 쥐어준 1왕자는 물러가는 그를 바라보다 눈을 돌렸다. 그곳엔 얼핏 미소 짓고 있는 듯한 엔도가 서 있었다.
2왕자와 문호를 반란군으로 만드려는 1왕자의 계략을 지켜본 그가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선왕의 서거 소식이 전해지기 훨씬 전부터 교류가 깊었던 탓이다.
“형제애라는 건 없는 겁니까?”
“쓸데없는 소리 마라. 왕사를 이끌고 반란군을 제한다. 너는 쿠웨드를 주시하라.”
“뜻대로~”
*
론 타이는 성난 황소처럼 다가와 아무말 하지 않고 콧김과 위압감만 내뿜고 있는 긴사이를 바라보았다. 그는 왕을 앞에 두고도 위협하려는 듯 목소리를 낮게 내었다.
“왕께선 해전에 모든 것을 저 긴사이에게 일임하셨습니다.”
“왕사까지 움직인 것은 내 예상 밖이다. 허나, 패전한 제독에게 지적 받고 싶진 않다.”
“더러운 소문을 흘려 트란슈의 왕사를 불러들여 기병에게 위치까지 발각되어 격퇴된 것 말입니까?”
론 타이가 그 말을 듣고 비위가 상한 듯 얼굴을 찡그리자, 이를 듣고 있던 권신들이 제독에게 고함치며 태도를 비난했다. 그를 수감시켜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자 론 타이가 손을 들어 그들의 아우성을 막았다.
“준비되지 않는 해전에서 적의 왕사까지 끌어온 왕과 젖먹이를 상대로 쩔쩔매는 제독. 그렇게 싫었다면, 패전하지 말았어야지.”
“두 번은 없습니다. 더는 방해하지 마십시오.”
“기대해 보지.”
*
눈을 떴다. 눈앞이 흐릿한 듯 싶어 바닥을 짚고 일어났다. 손바닥에 타인의 살이 닿았다는 걸 알고 바라보자 문이었다. 알몸으로 자고 있는 문과 다를 바 없는 내 모습에 현기증이 올라와 머리를 감쌌다.
“더 자자.”
문의 목소리가 들렸다. 깨어난 것을 보기도 전에 단단한 손이 내 머리를 끌어안고 품으로 당겼다. 살이 맞닿았다는 것에 밀어내려고 했지만, 허리까지 쓰다듬던 문은 잠이 덜 깬 것인지 귓가에서 히죽대고 있었다.
하는 수 없이 머리통을 있는 힘껏 쥐어박자, 외마디 소리와 함께 팔을 풀었다. 곧장 빠져나와 옷을 입고 정돈하면서 문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동안 고통이 사라진 것인지 아직도 잠이 깨지 않는 얼굴이었지만, 나와 시선이 맞자 웃었다.
창백할 정도로 새하얀 몸 위로 흘러내리는 은발에 나긋한 붉은 눈동자의 문을 바라보고 있으면 홀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라마.”
“?”
갑자기 나를 불러 정신을 차리고 문을 바라보자, 어느새 눈앞까지 다가온 문이 내 눈높이에 맞춰 상체를 숙였다.
나체로 나와 맑게 웃으며 말했다.
“예뻐.”
그리곤 얼굴을 가져와 뺨에 비벼대는 통에 간지러워 손을 뻗어 밀어냈다. 밀려나지 않으려고 끙끙대는 모습을 무시하고 밖으로 나오려는 데, 문이 뒤를 따르려고 했다. 결국 걸음을 멈추고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는 문의 상의를 집어던졌다. 옷을 받은 문이 멍청하니 바라보자, 입으라고 말했다.
그제야 꾸역꾸역 문은 옷을 입었다. 엉성한 모습을 보다 못해 다가가 정돈을 해 주었다. 결 좋은 머리카락도 잠버릇이 심했던 것인지 뻗어있어 손으로 만져주었다.
헤실헤실 대는 걸 멈추지 않았던 문이 멍하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번엔 또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여보.”
순간, 문의 뻗친 머리를 정돈하던 손을 멈췄다. 눈을 반짝이고 얼굴을 붉히는 문을 바라보다 멈췄던 손을 움직여 마침내 뻗친 머리를 가라앉힐 수 있었다.
“왜.”
문이 웃었다. 전 보다 활짝 웃더니 가볍게 입을 맞추고 떨어졌다. 이게 아침부터 미쳤나 싶어 주먹을 말아 쥐고 있는데, 등 뒤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고개를 돌려 확인하자 그곳에는 놀란 얼굴의 나비와 감탄하고 있는 슈레이가 나란히 서 있었다.
그리고 등 위에서 어깨를 감싸는 문은 제멋대로 웃기 시작한다. 일단은 귀찮게 들러붙고 있는 문을 쥐어박았다.
“용병 왕이랑 그런 사이였던 거야?”
“그런 사이?”
“여보 당신 하는 사이를 뭐라고 부르더라? 나비야, 뭐였지?”
나비가 못마땅해 하는 얼굴로 슈레이를 노려보았다. 슈레이는 뭐가 그렇게 기쁜 것인지 기분 나쁜 얼굴로 이번엔 나를 놀리듯 말했다.
“밤 상대로 유혹한다더니, 말 그대로였군. 안 그러냐? 나비야?”
나비는 그것을 못 견디고 결국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것을 바라보던 슈레이가 탁자까지 내리치며 더욱 크게 웃었다.
한참을 호쾌하게 웃다 멈춘 그가 말했다.
“혼인식은 아직 이지? 거하게 치루 게 해 주마.”
“필요 없어.”
“뺄 것 없어. 둘 다 내 밑으로 엮으려는 거니까. 네 낭군에게도 트란슈 시민권을 주지. 남작정도라면 적당하려나?”
“간밤에 기병이 움직였다는 것을 들었다.”
말을 돌리자, 재미없다며 중얼거리던 슈레이가 어깨를 으쓱하며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아아, 신경 쓸 건 없어. 송사리였으니까. 제독이 나설 정도는 아니었어.”
“그래서 왕사가 나섰나?”
“너는 트란슈의 소중한 제독이니까. 그것을 지켜주는 게 왕이고 국가다.”
“상대가 적의 제독이었다면, 트란슈가 잃어버렸을 것은 왕과 국가다.”
“승리한 전투인데, 비약이 너무 심하지 않아?”
“네놈의 무모한 행동으로 쿠웨드는 찾아낼 것이다.”
슈레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나는 덧붙였다.
“나비를”
“나비? 걔가 뭔데?!”
“네겐 뭐지?”
“…….”
슈레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나는 그가 나비를 잡으러 가는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
다급히 나온 슈레이는 나비를 찾았다. 당장 이곳에서 위협이 덮치진 않을 것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초조함을 감출 수 없었다. 끈질기게 나비를 찾은 끝에 먼 바다를 보고 있는 나비의 등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애써 찾아 헤매었다는 게 무색할 만큼 멀지 않는 곳에 서 있던 나비에게 천천히 다갔다.
“다가오지 마십시오. 당신을 상대할 기분 아닙니다.”
그 말을 듣고도 슈레이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천천히 다가가 손을 뻗어 나비에게 닿으려고 했다. 그것을 안 나비는 거칠게 그 손을 뿌리쳤다.
“조롱하고 나니 속이 시원하십니까?”
“아아. 응. 시원해.”
슈레이의 그 말에 맘이 상할 대로 상해버린 나비가 분함을 억누르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그 모습을 들키기 싫다는 고집스러움이 그 얼굴을 가리게 만들었다. 울음소리를 내고 싶지 않아서 인지 이를 악물고 있기도 하다. 저러다 치아가 상하는 게 아닌가 걱정이 먼저 앞서는 것이 슈레이의 맘이었다.
그는 나비의 손목을 잡아 당겨 품에 껴안았다. 그에 놀란 나비가 굳어 움직이기 않자, 장난스럽게 웃고 놀리기만 할 줄 알았던 슈레이가 가지러한 나비의 뒤통수를 문질러 주었다.
“뭐 하는…….”
“부끄러워 할 필요 없다. 사내라도 실연당하면 울어야지.”
“누가 운다는 겁니까!”
펑펑 울었던 주제에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고 큰소리를 치고 있었다. 그래그래- 라며 뒤통수를 문지르며 놀리는 듯하자 나비는 놓아주려 하지 않는 슈레이의 무방비한 손목을 깨물었다.
“엇!”
고통보다 놀랐다는 것에 가까운 탄성과 함께 놓아줄 것이라 생각한 나비였지만, 머리 위로 또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개 좋아하는지 어떻게 안거야?”
“예?”
황당한 질문에 물었던 것도 놓고 나비는 슈레이를 바라보고 말았다. 이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팔을 흔들면서 나비의 눈가를 훑어주며 그는 웃고 있었다.
“소…….”
“응?”
“소름끼칩니다.”
“너무 좋아서?”
“…….”
일순간 욕과 함께 닭살이 올라오는 듯 했다. 나비는 형용할 수 없는 기분에 슈레이를 밀어냈다. 가볍게 떨어져 나간 슈레이가 울음을 멈춘 나비를 살펴보았다. 조금은 진정이 된 것인지 숨을 고르게 내쉬며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 모습을 따라 나비가 향하고 있는 바다를 보았다. 좀 전까지 전쟁터였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고요했다.
“포기해라.”
“…….”
“너도 어렴풋이 느끼고는 있었을 거 아냐. 그 둘 사이에 비집고 들어갈 틈은 없어.”
“그런 식으로 말하면 좋습니까?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난 상관없어. 당신이라고 불러주는 종자도 있으니까.”
“……?”
처음엔 뭘 말하는 것인지 알아듣지 못하다가 뒤늦게 눈치 챈 나비가 버럭 화를 냈다.
“당신은 그저 호칭에 불가합니다!”
“그래그래, 나중엔 여보로 바꿔줘.”
“당……!”
하마터면, 또 다시 당신이라고 부를 뻔 했다. 하지만 그 호칭 이외엔 떠오르는 게 좀처럼 없어 입을 다물고 고집스레 먼 바다에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 모습이 귀여웠던 슈레이가 웃었다.
“웃지 마십시오.”
“왜? 이 재미난걸!”
“…….”
하나도 재미없다며 얼굴까지 붉히고 궁시렁 거리는 모습마저 사랑스러웠다. 중증이다 싶어 웃는 걸 그만두고 지그시 바라보았다.
“보지 마십시오.”
“낭군에게 너무 많은 걸 요구하는 거 아니야?”
“누가 낭군이라는 겁니까?”
“7대 황제. 트란슈 레이 더 바함. 네가 기어오를 수 있는 나무다.”
나비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슈레이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나비의 표정이 무표정으로 돌아가 고요해지자 이를 지켜보고 있던 슈레이의 입가에 드리워졌던 미소가 사라졌다.
그리곤 그대로 뒤 돌아 가려고 하자, 슈레이가 손을 뻗어 나비의 손목을 붙잡았다.
“이봐.”
“못 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뭐라고?”
“…….”
“나비야.”
“그만가시지요. 해야 할 일이 많지 않습니까.”
“평생 앓아가며 살 생각이야? 안 된다는 거 알잖아!”
나비는 잡힌 손목을 바라보더니, 고요히 눈을 감고 다시 떴다. 여기서 화를 내는 것은 슈레이를 자극하는 것 밖에 되지 않는 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라마보다 슈레이에 관해 더 많은 걸 알고 있다는 것이 불만이긴 하지만, 금방 눈이 뒤집힐 것 같은 남자를 안정시키는 것이 우선이었다.
쉽게 화를 누그러트릴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나비는 침착하게 조곤조곤 말했다.
“생각할 시간을 주십시오.”
“생각?”
“제겐 모든 것이 갑작스럽습니다. 당장은 못들은 것으로 하겠으니 답을 내놓으라. 재촉하지 마십시오. 부탁입니다.”
슈레이가 손목을 놓았다. 그는 일어나 나비의 앞에 섰다.
“그럼 내 등만 보고 따라와라. 모든 것이 정리된다면, 내가 돌아봐 줄 테니.”
“…….”
나비가 대답하지 않아도 앞으로 걸어갈 것 같더니, 갑자기 우뚝 멈춘 슈레이가 고개를 돌려 나비를 바라보았다. 흠칫 놀란 나비가 영문 모를 표정을 짓자 슈레이가 방긋 웃었다.
“방금 나 좀 멋지지 않았냐?"
“…….”
갑자기 슈레이가 성큼 뒤로 물러 나비의 옆에 섰다. 무슨 수작인가 싶어 나비가 그 모습을 지켜보자, 아무렇지 않는 듯 웃더니 덧붙였다.
“아까건 취소다. 이래야 내가 너를 볼 수 있거든.”
“소름끼칩니다.”
“멋진 거다.”
“적당히 하십시오.”
“반하겠냐?”
나비가 기겁을 하자, 아무렇지 않게 웃던 슈레이가 이제 가자며 걸음을 옮겼다. 변덕이 많은 어린 아이 같은 점이 많은 슈레이가 진심으로 자신을 배려하고 있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쉽게 화를 가라앉힐 것이라는 기대를 하지 않았지만, 도리어 자신을 안심시키기 위해 웃어넘기지 않았는가. 나비는 흘깃 슈레이를 바라보았다.
장난기 가득했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져 있는 옆모습은 마치 다른 사람을 보는 것 같았다. 언제나 심통을 부리며 놀리는 듯한 표정에 익숙한 나비에게 그와 나란히 걷는 다는 건 새삼스레 긴장되게 만들고 있었다.
*
나란히 들어오는 나비와 슈레이 사이에서 발전이 있다는 걸 어렴풋이 느꼈다. 따로 지적하지 않아도 당연히 그래야 했기 때문에 내가 짚는 건 다른 문제였다.
“에덴의 반환요청이 묵살 당했다?”
“맞아. 때문에 로던프 측에서 정찰병까지 대치시켜놨어. 빌어먹을 놈들. 모스건도 그렇고, 전쟁을 빌미 삼아 이쪽의 말은 아예 들을 생각도 안한다는 거겠지.”
로던프의 비협조적이고 일방적인 태도에 불만이 많다는 얼굴이었다. 로던프가 쿠웨드의 손을 잡았다는 건 확실시되고 있었다. 허나, 단지 그것만 걸리는 건 아니었다.
“정찰병이 용병이었나?”
“왕사였다.”
“…….”
“뭐가 더 문제가 있는 거야? 왕사를 대치시키는 게 그렇게 이상할 일도 아니잖아.”
전쟁의 방패로 쓰기 위해 과거 로던프는 보던을 쓸어버리면서 수많은 들개들을 잡아 강제로 집영시켰다. 앞서 전쟁이 일어난다면 최전방일 수 있는 에덴에서 애써 수집한 용병들을 대신해 부러 왕사를 앉혀 놨다는 것이 거슬렸다.
그렇다는 건, 에덴에서 정찰하고 있는 놈들이 타국과의 전쟁에 쓸 용도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고 보니, 이상하긴 하군요.”
나비가 말했다. 슈레이 역시 조금 생각하는 것 같더니, 무엇이 이상하다는 것인지 뒤늦게 알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분명 그 휘장은 2왕자의 사병이었다. 여지껏 전쟁에 소극적이었던 자가 느닷없이 정찰병이라니, 확실히 냄새가 나네.”
나비가 의문을 품고 다시 물었다.
“내전을 가속시킬 이유가 있는 겁니까?”
1왕자의 정찰병이 움직였다는 것은 2왕자 역시 정면으로 부딪치고 있다. 그가 정면으로 부딪칠 수 있는 건 왕좌를 위협하는 것. 이반이 떠올랐다. 늦지 않고 깨달아 다행이라 생각하면서도 2왕자의 미래 역시 뻔히 그려지는 듯 했다.
“이유야 만들면 되겠지.”
눈치가 남다른 나비가 내 말을 듣고 바로 이해했다. 그의 표정이 조금 바뀌더니, 정리를 하려는 덧붙였다.
“1왕자군요. 하지만, 그가 왕위에 오른다면 뜻대로 될 일을…….”
어째서 정작 왕좌에 앉는 것을 미루고 있는 것인지 이해가 안 된다는 것이었다. 역시 이것까지는 타국인이었던 나비가 예상하기엔 접근이 쉽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결점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왕좌에 앉기 전에 걸림돌이 될 만한 것들은 최대한 골라낼 것이다. 아군 역시 마찬가지다. 자신의 위치에 대한 위협을 느끼는 순간, 제거되어야 할 대상이 되는 것이다. 앉은 자리에서 끌어내 꼭두각시를 끼워 맞추면서까지 견제하는 것은 어린 시절, 선왕으로부터 끊임없는 암살에 영향이 컸다. 그것이 전부라고는 할 수는 없지만, 일부는 될 수 있다.
“왕좌에 오르기 전 모든 걸 정리 할 것이다.”
“어리석군. 두려움에 떠는 개들이 궁지에 몰리면 이를 드러낼 텐데.”
슈레이의 말에 부정하지 않았다. 이를 드러내는 개들을 물어죽일 들개라면 그는 얼마든지 가지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긍정도 하지 않는다.
“당분간 해전은 염려할 것이 없으니, 육전 지원에 힘써라.”
“이쪽은 루카디아의 지원도 있으니, 네 사정보단 낫지. 연승을 하였으나 이정도의 규모로는 오래가지 못해. 차라리 육전과 합세하면 어때?”
“전에도 말했지만, 바다를 빼앗기면 끝이다. 조금만 견디면 되니, 돌아가라.”
“견디다니? 무얼 기다리고 있다는 건가?”
꼭 말해줘야 하나 싶어 침묵하다 나비도 슈레이도 도통 모르는 얼굴이기에 한숨을 내쉬었다. 일일이 설명하는 것도 고된 일이다 싶을 무렵, 등 뒤에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건 뭐, 떠 먹여주는 고깃덩어리도 아니고. 돌대가리야 뭐야. 구더기는 뇌가 없나?”
제법 큰 소리로 떠드는 문의 목소리에 일순간 정적이 유지됐다.
슈레이의 얼굴이 천천히 올라가 문을 바라보았다. 처음부터 문에게 호의적이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적개심을 드러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지금, 그 말은 나 들으라고 한 소리인가?”
“귓구멍은 뚫렸나보네. 쓸모없으니까. 귀찮게 하지 말고 꺼지라는 소리는 못 들었어?”
“네놈이 용병 왕이라고 천하를 등에 업은 것 같나?”
“구더기 왕은 종류가 많아서 외우기 귀찮지만, 목을 베면 꿈틀거리는 것이 똑같더라.”
문이 갑자기 왜 시비를 거는 것인지 이해가 가질 않아 그쯤 해 두라고 바라보았다. 그런 내 시선을 눈치 챈 문이 인상을 썼다. 슈레이는 문의 도발에 넘어가지 않는 것을 별개로 기분이 상해버렸는지 이를 드러내자, 나비가 중재에 나섰다.
“그대는 상관이 무엇을 기다리는지 알고 있다는 건가.”
당연히 모를 것이라 생각했다. 전세를 읽는 법에 능숙한 슈레이와 보다 시야가 넓은 나비조차 짐작을 못하고 있는 부분이 아니던가. 하물며 현지인조차 깨닫지 못하는 것을 보던에 들개로 오랜 세월 살아왔던 문이 알고 있을리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나 역시 트란슈와 전쟁을 치룬 바 없었다면 생각하지 못했을지도 모를 것이기 때문이다.
문은 나비의 질문에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눈동자를 내려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혹한.”
진심으로 놀랐다. 드러나진 않았겠지만, 이 상태에서 말이라도 걸었다면 제대로 입을 열지도 못했을 것이다. 정확하게 알고 있는 문의 말에 나비와 슈레이가 이제야 깨달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문을 향해 있던 적개심도 사라진 채 말이다.
“쿠웨드는 기후가 따뜻한 나라다. 트란슈의 겨울을 경험해본 적 없을 테니, 해전은 곧 고착상태에 돌입할 것이다.”
“확실히…….”
슈레이가 납득 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비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은 곧 우선순위에 놓을 것을 결정했다. 나는 그들에게 메르헨의 지원을 요청해 보라 명했다. 에덴의 정찰병들에 대해 언급한다면 지원을 미루진 않을 것이다.
또한, 은아가 그곳에 가 있으니, 놈이라면 눈치를 챘을 터.
먼저 자리에 일어났다. 뒤따라오는 문을 의식하면서 보는 눈이 적은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곳에서 멈춰 손을 뻗어 문의 머리카락을 잡아 당겼다.
코앞까지 다가온 문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말해.”
“무얼?”
시치미를 떼고 있었다.
“뭘 알고 있어.”
“…….”
문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잡고 있는 내 손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대답하지 않고 내 손을 잡아 손등에 입을 맞췄다.
“죽여 버리고 싶어.”
나를 뜻하는 것인가 싶었지만, 손등에 입술을 붙인 채 덧붙였다.
“젠. 엔도. 가나. 슈레이.”
“문.”
“당신을 전장에 세운 구더기 왕을 그 자리에서 베어버리고 싶었지만, 참았어. 가장 맛있는 걸 먼저 먹어야 하니까.”
“모두 네가 죽일 이유는 없는 자들이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
문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려 나를 바라보았다. 체격차이가 큰 탓에 문이 손등에서 떨어져 허리를 펴자, 적나라하게 차이가 드러났다. 내 두 뺨을 붙잡은 문을 바라보았다. 대체 무엇을 알고 있는 것일까. 문이 내게서 무엇을 읽고 있다는 것인가. 불가능 했다. 내가 먼 그곳에서 돌아온 것을 알고 있을 수 없다.
“찾을 수 없어. 당신의 미래는 끝나지 않았으니까.”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는 듯 속삭이던 문이 두 뺨에 손을 놓고 웃으며 나를 안아 들어올렸다.
“말했잖아. 아무것도 하지 마. 나의 검은 태양.”
내려놓으라고 말을 할까 했는데, 눈앞이 일그러져 잘 보이지 않았다. 감이 귀신같은 놈이라 들킬 수 없어 입을 닫고 손날을 세워 그대로 머리통에 내리쳤다. 통증에 움찔거리는 사이 손에서 내려와 등을 돌렸다.
“멈춰.”
따라 붙으려는 문을 불러 세웠다. 묻고 싶은 것이 많다. 하지만 나에게 그럴 여유가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무슨 이유에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이 초조함은 단순한 의구심만이 키울 수 있는 건 아니다.
문에게 이런 이질적인 기분은 전부터 느껴왔던 것이다. 아이는 대답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언제나 몇 번이고 말하고 있었는데 내가 그것을 보질 못하고 듣지 못하고 지켜주질 못했다.
“대기해.”
문이 걸음을 옮겼다. 내게 손을 뻗는 것이 느껴지는 존재감이었다. 난 등을 돌려 그 손목을 붙잡았다. 그리고 눈을 떠 놈을 바라보았다. 놀란 듯한 붉은 눈동자가 보석처럼 일렁인다.
“말 들어.”
천천히 문의 손을 놓았다. 문은 나를 거역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처음 그에게 새겨놓았던 각인. 목둘레에서 사라지지 않는 붉은 실처럼 그를 단단히 옭아매는 사슬과 같다. 등을 돌려 밖으로 빠져나왔다. 강렬한 태양이 일순간 눈앞을 덮치자 아릿한 현기증이 느껴진다. 그러나 아랑곳하지 않고 걸음을 재촉했다.
모든 것이 변할 것이다.
나를 제외한 모든 것을 변하게 할 것이다.
*
“이번에도 대장선을 앞장세우겠다. 허나, 치탄과 너희들은 따로 2군에 상선하라.”
“제독과 함께 하게 해 주십시오.”
치탄이 고개를 숙이고 다른 배에 오르는 것을 거부했다.
곁에 있던 다른 수군 장교들 역시 긴장을 늦추지 않고 나와 함께 승선할 것이라는 의지를 내비췄다. 그 모습을 지켜보다 헛웃음을 나왔다. 처음에는 못마땅해 하는 놈들이 언제 이런 충심을 길렀는지 꼬리를 달면 흔들 기세였다.
“요란 떨지 마라.”
“이들은 화포에 가장 능한 자들입니다. 또한 제독께서는 앞세울 1군에 3군으로 채우라 명하셨다 들었습니다. 활을 다루는 자들 역시 같은 명을 내리셨습니다.”
“이것도 전략이다.”
“죽으러 가는 것이 어찌 전략이라 말씀하시는 겁니까!”
“명령이다.”
“제독!”
“치탄. 그대는 영리한 자다. 지금 이 자리에 그대가 섰다면, 나를 이해해 줄 것이다. 그대들이 가슴에 얹은 돌의 크기쯤은 짐작한다. 덜어줄 수는 없으나, 함께 할 수는 있다. 이것이 덜 죽어 승리할 수 있는 전략이다. 나는 전쟁에 패할 생각은 없다. 허나, 살려는 생각도 없다.”
“저 역시!”
치탄이 소리를 높였다.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예상했기에 그 말을 가로 막고 덧붙였다.
“바다를 빼앗기면 끝이다. 머리가 잘리면, 꼬리로 흉내라도 내. 그대들이 무엇을 지키고자 하는지에 우선하라.”
여기서 번복할 것은 없다.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자, 치탄이 뒤를 따라 붙었다.
“제독. 지금 여기서 제독을 잃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2군이 앞서겠습니다. 3군과 합세해 대장선이 후에……!”
“그대에게 나만한 아들이 있다지.”
“!”
내 말에 치탄은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같은 출생도 같은 나라도 아니었지만, 아군이라 불리는 놈들의 사정은 손바닥 뒤집듯 훤히 알고 있었다. 자식 놈이 몇이고 가족이 몇이고 연인이 있고 부모가 있고……. 누구하나 사정없는 놈이 없는 것들이 생지옥에서 견디고 있었다.
“지금 나랑 감정놀음 하자는 것인가.”
“제독…….”
“명령 불복종은 참형이다. 내게 꼬리를 자르라 말하지 마라.”
“…….”
“2군에 문을 태워라. 있으면 정신만 사나우니까. 아, 아이에게 알리진 않았으니, 함구하고.”
당장 죽을 생각은 없지만, 전장에 선다면 사는 것이 곧 죽는 것이 된다.
나는 살기위해 죽고자 하는 것이다. 하지만 문을 잃을 수 있는 곳에 세워두고 싶지 않았다. 나보다 문으로부터 위협받을 2군이 더 걱정되지만, 전장에서 아군의 수를 줄이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
해전에 대한 경험은 나 역시 전무하다 시피 하다. 때문에 물길이 들어오는 시간, 나는 시간. 수면의 위치의 높낮이가 달라지는 시기 등. 트란슈를 둘러싼 모든 해역 일대의 바다를 머릿속에 그려 넣었다. 눈을 감고도 암초 하나하나의 위치까지 파악할 수 있게 되면서 나는 연이은 패전을 한 쿠웨드가 선택 할 수밖에 없는 전술을 가설해 보았다.
물길이 바뀌는 시간은 약 1시각. 수면이 급경사를 이뤄 깊어지는 구간에서 기묘한 울림이 있다 전해졌다. 또한 수심이 깊은 곳에서 흰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고 정박해 있던 함대가 잔잔한 바다 위에서 약간의 흔들림이 보였다.
이상 현상에 대한 지식은 많지 않지만 우스갯소리로 들은 바 있다. 바다가 솟구쳐 올라 보이지 않았던 섬이 떠올랐고 잿빛 재가 비처럼 뿌려져 근방에 있던 어부들이 송장이 되어버렸다.
이는 바다의 신이 영역을 침범한 인간들에게 벌을 내렸다하여 그 일대는 오래전부터 고기잡이가 금지 되었던 곳이었다. 바다가 솟구쳐 올랐다는 기형현상이 그 한 번이 아니라는 소리다.
이쪽의 함대는 그 속도가 느려 폭탄을 짊어지고 오는 함대를 피하게 된다면 진열이 흐트러져 자칫 화포의 사정거리를 잃거나 틈을 파고 드려는 적의 함대에 궤멸할 수 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속도가 느린 대신 내구력이 높아 웬만한 충격에도 견딜 수 있다.
“이제와 옛 기록서를 어찌 찾으시는지?”
한 아름 기록서를 들고 온 이에게 아무 곳이나 내려놓으라고 지시하고 내 키를 넘어서도록 쌓인 기록서를 하나하나 훑어보았다. 그곳에서 나는 그간의 해상에서 나타난 기이한 현상들을 수집하였다. 그 날짜와 시간을 짚고서 120년 전과 60년 전에도 이와 같은 현상이 일어났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나는 수군 장교들을 불러들여 이것을 짚었다. 처음에는 내 말을 알아듣는 것도 못하는 놈들이 거듭된 우연으로 연관성을 찾고 집중하기 시작했다.
주기는 60년. 그 전조 현상으로 수증기가 피어오르고 재가 날리며 그 근방의 물고기는 모두 사라져 잡을 수 없게 된다. 바다 끓기 시작하고 약 40초 후. 빠른 속도로 용솟음치면서 폭약이 터지듯 흩뿌려진다. 그 일대는 포탄이 터지는 것 보다 더한 충격을 받을 것이다.
용솟음을 설명을 마쳤지만, 섣불리 받아들이지는 못하겠는지 하나같이 덜떨어진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여기서 몇 명은 지금 하는 말이 무엇인지도 못 알아들은 듯 했다.
치탄마저 넋을 놓고 있자, 해도 위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용솟음이 일어날 부근을 따라 들어와 그 중심점에 멈췄다.
"1차는 이곳으로 적의 함대를 유인하는 것을 우선으로 한다.”
“그 용솟음이 아군의 함대까지도 위협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적에게 유리한 근접전이 되고 맙니다. 수가 많기 때문에 그렇게 되면 화포만으로 방어하기에는 병력이 부족합니다.”
생각했던 것 보다 예리한 지적이었다. 치탄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몇 가지를 간과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이쪽에서 나포된 함대의 수는 3대. 함포의 위력을 알았으니, 그들은 화포를 실을 것이다. 허나 쿠웨드는 화포의 충격을 견딜만한 함대를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 함대를 이용한단 말씀입니까!”
“공격력이 높은 만큼 선두에 놓고 개중 한 대는 앞으로 나아갈 폭탄으로 쓰겠지.”
폭탄으로 쓸 함대는 나포하면서 잡아들인 트란슈인 포로를 이용할 것이라는 걸 알고 있기에 치탄은 크게 분노했다.
“제독. 1군과 함께 2군이 나설 수 있도록 허락해주십시오. 방패가 되어 적의 궤도로 진입할 수 있는 길을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단순히 길을 만들어주는 것이야말로 적이 원하는 바다. 네놈이 방패막이로 주춤하는 동안 시야가 가려진 아군 쪽으로 거침없이 진격할 수 있는 건 적의 함대다. 또한, 용솟음 구간까지 적의 함대를 방패만으로 어떻게 유인하겠다는 거지?”
“…….”
나는 기록서를 덮고 해도를 펼쳤다. 곳곳에 박힌 단단한 암초와 그 근방으로 화망을 치듯 넓게 분산 된 함대가 그려진다. 그리고 그 앞에 대치하고 있는 대장선과 이곳으로 몰려오는 적의 함대.
결정적으로 용솟음을 칠 구간을 마지막으로 눈동자를 들어올렸다.
“열을 지켜라. 무슨 일이 있어도 닻을 올리지 말 것이며 충격에 대비하라. 장거리 사격권에 명령이 떨어지는 즉시 화포를 가하라.”
대장선이 사격권에 진입해 있다 하더라도 명령이 떨어진다면 주저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제야 조금은 말귀를 알아먹은 것인지 이를 물고서도 대답은 잘 하였다. 대장선에 오르기 전, 2군과 1군의 깃발을 바꿔 달았고 문에게 먼저 오르라고 명했다.
의심이 많지 않았던 문은 그대로 2군인지도 모르고 함대에 올랐고 나는 뒤늦게 1군에 올라 2군과 멀찍이 떨어져 선두에 섰다. 멀리서 적의 함대가 빠른 속도로 이곳으로 오는 것이 관측되었다.
예상했던 나포된 트란슈의 함대 3대 역시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
긴사이는 멀리서도 확인 할 수 있는 선두를 지키고 있는 있는 트란슈 함대를 확인하였다. 1군이라 보기엔 곁에 있는 몇 안 되는 함대에 이번엔 대장선이 보이지 않았다. 이쪽의 전략을 눈치 채고 뒤로 돌아선 것이라면, 현명한 선택이다. 하지만 그간의 연승으로 사기가 높아진 트란슈가 이번에도 반드시 대장선을 선두에 세울 것이라 확신했던 만큼 실망감이 들었다.
애초부터 진열을 흩트려 놓는 것이 목적이었으나, 아쉬움이 사라지지 않아 입맛을 다시는 중. 긴사이의 눈에 띈 것은 2군의 함대 중에 서 있는 어린아이라고밖에 볼 수 없는 체구의 사람이었다.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려는 차, 이쪽에서의 위협사격이 시작되기도 전에 일제히 돌아선 대장선이 함포를 포격했다. 그에 진격하려던 쿠웨드 3군의 함대가 여지없이 포격당해 암초와 부딪혀 궤멸되었다.
넓게 퍼지려는 것을 방해하는 듯 곳곳에서 포격과 함께 화살이 쏟아졌고 이에 쿠웨드는 2군까지 피해를 보면서 불리해보이려는 차, 긴사이는 2군의 길을 열어 나포했던 트란슈 함대 3대를 내보냈다.
진격하는 3대의 함대에는 다량의 화포가 장착되어 있었다.
모두 트란슈에서 빼앗아 온 것이었다. 회포의 위력은 알더라도 사용하는 방법이 서툴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진격하는 양 쪽을 차지하고 있던 함대가 일제히 선두로 빠져나와 함포를 사격했다. 명중률은 조잡하여 물길을 건들리는 것이 전부였지만,
나와 함께 선두를 지키고 있던 2군의 함대 중 하나가 뒤 이어 포격하는 포탄에 주춤했다.
그 사이, 빠른 속도로 치고 들어오는 쿠웨드의 함대가 일제히 속도를 붙여 접근했고, 포탄에 격파된 함대의 갑판위로 올라타면서 빠르게 육탄전을 벌이기 시작한다. 쿠웨드는 예로부터 전사족이라 알려졌을 만큼 피부가 검고 근육질이다. 덩치가 크고 힘이 좋고 민첩하기까지 한다. 본성이 사납고 다혈질이라 활과 같은 장거리 공격력은 약하나, 근접전으로 들어가면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제독. 2군의 함대 중 한 대가!”
트란슈가 근접전에 약하다는 것을 알고 일부로 노린 것 같은 데…….
“더 울어봐. 더 소리쳐보라고! 아, 미안. 목이 날아갔구나.”
근접전이라면, 이쪽도 대책이 없던 건 아니다.
문을 따르는 용병 중 한 명이었던 놈이 갑판위로 기어 올라오는 적의 목을 차례로 치기 시작했다. 저자가 있는 함대는 2군이긴 하나, 3군과 노를 젓는 자를 제외하고 대부분이 용병의 단원들이었다. 문의 명령 하에 철저하게 물갈이 당한 놈들은 하나같이 제정신인 것들이 없는 것이 유일한 단점이다.
“멍청아. 그놈은 우리 편이다.”
“그럼 헷갈리게 알짱거리질 말던가. 귀찮게. 그냥 다 죽이면 되는 거 아니었어?”
“날아간 아군 머리만큼 네놈이 땜빵 해.”
“젠장, 대장 보고 싶다.”
“나도.”
아, 유일한 단점은 아니다.
멍청하니까.
“저쪽은 신경 쓸 필요 없다.”
트란슈의 함대가 튼튼한 것이 장점이긴 하나, 느린 것이 단점이다. 한 번의 포격에 주춤하는 사이 쿠웨드의 함대가 벌떼처럼 들러붙어 머릿수로 밀어붙이고 있었다. 당장은 걱정할 것이 아니지만, 이대로 지속된다면 버티는 것이 고작이게 되어 버린다.
이미 다른 함대에서 또 다른 육탄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저쪽은 버티지를 못하고 있는 것인지 아군의 비명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도망치는 아군을 잡아 목을 베는 쿠웨드는 저력을 과시하며 거침없이 검을 휘젓고 있었다.
쓸 만한 놈들은 제멋대로 뭉쳐 다른 함대에서 육탄전을 벌이고 있으니, 지금 열세에 몰리는 함대에는 3군 소속으로 선두에 오른 자들이다. 연이은 승리와 고된 훈련도 쿠웨드의 전사들을 상대로는 제대로 검을 겨누기 전에 등을 보이게 만들었다.
겁쟁이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다.
짐승을 눈앞에 두고도 검을 겨누지 못해 등을 보이는 것은 스스로를 사냥감으로 만드는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뿐이다.
전력이 약한 함대라 하더라도 이쪽은 단 한 척 배도 양보할 수 없으며 단 한 명의 사상자도 치명적이다. 더는 희생을 늘릴 수 없던 나는 오줌을 지리며 기어가는 아군의 머리를 치려는 적을 바라보다 활과 화살을 빼앗아 갑옷 사이로 드러나는 목을 향해 쏘았다.
화살은 깨끗하게 적의 목을 관통하여 아군의 목을 자르기 전에 쓰러졌다. 들고 있던 활을 던져버리고 발포 명령을 내렸다.
즉시 깃발이 교차되어 올라갔고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근방에서 육탄전을 벌이던 함대의 근접 포탄이 터졌다. 포탄을 맞은 쿠웨드의 함대가 격파되었고 그 충격으로 뒤쪽에서 올라오던 쿠웨드의 함대를 밀어내면서 적의 함대가 떠밀리는 힘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기울려 뒤집어졌다.
근방에 있던 2군의 함대가 합세하면서, 어느새 전세는 역전되어 쿠웨드의 2군을 집어 삼켜갔다. 그러나 나포된 함대에서 다시 한 번 함포가 포격되면서 다시 한 번 물길을 열어주었다.
두고만 볼 수 없었던 이쪽에서 함대를 격파시키는 것을 우선으로 삼았다.
“최대한 거리를 두어 함포만으로 격침시킨다.”
“웬만한 포탄에도 버티기 때문에, 근접 포격을 하심이!”
“예정대로 한다.”
“이 상황에서 용솟음을 기다리신다는 것입니까! 함대 중 폭탄이 있다고 하신 것은 제독이십니다! 이들과 함께 자멸이라도 할 생각이십니까!”
검을 들어 그대로 놈에 겨눴다. 지체할 시간이 있었다면 그대로 목을 쳐 버렸겠지만, 검을 물리고 놈의 가슴에 달려 있는 상관의 상징으로 달려 있는 문양을 손으로 잡아뗐다.
알고 있었다. 지금 이 배에 오른 2군의 어느 누구도 죽고자 하는 생각은 없다. 그러나 간절히 살기 원한다면 간절히 죽고자 하는 마음으로 싸워야 하는 것이다. 간절함을 두려움이라 말한다면, 그것은 방패가 될 수도 검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검도 방패가 될 수 없는 것은 아군의 발목을 잡는 족쇄나 다름없다. 나는 그것을 끊어냈다.
놈을 외면하고 갑판에서 필사적으로 화포를 장전하고 있던 자에게 던졌다.
이미 끝난 이야기에 계속해서 토를 달아 전세를 악화시키는 놈은 필요치 않았기 때문이다.
얼떨결에 받아 영문을 모른 듯 했지만, 나를 바라보는 눈은 적어도 망설임이라는 것이 없었다.
“예정된 구간에 집중 사격한다.”
“예!”
장거리 방어전으로 나서자 예상대로 쿠웨드가 거세게 밀어붙이기 시작한다. 나포한 함대를 선두로 길을 열고나면 곧바로 파고드는 식으로 목적은 역시 육탄전이었다. 하지만 함포 3대가 실을 수 있는 화포는 한정되어 있다.
포탄이 떨어졌는지, 정신없이 쏘아 올리던 화포의 위력이 떨어졌다. 그 즉시 이쪽의 화포발포 또한 멈췄다. 세 대의 함대 중 어느 쪽이 폭탄을 짊어진 것인지 판단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이성적인 판단력을 상실해 버린 놈이 눈앞에서 알짱거리기 시작했다.
상관의 문양을 내게 뜯긴 자였다. 내가 어리다는 이유로, 혹은 타국인이라는 것을 흠잡아 제독의 자리에 앉는 것을 마땅치 않아했던 자였다.
편을 들어줄 사람이 없으니, 두드러지지 않았지만 그에겐 나로 인한 신뢰감 따위는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다.
내 판단을 불신하고 다가오는 폭탄의 존재만으로 겁에 질려 뱃머리를 돌려야 한다고 외치고 이었다.
“제독! 피하셔야 합니다!”
“자리로 돌아가라.”
“제독!!”
이대로 물러난다면 싸움은 더욱 길어질 것이다. 재정비할 시간이 짧아질수록 불리한 건 이쪽이다. 혹한기가 올 때까지 소생하지 못하도록 최대한 많은 사상자와 함포를 격파시키는 것이 해전의 관건인 것이다.
바다의 상태가 이상했다. 수심이 깊은 곳에서부터 일제히 수증기와 함께 공기방울이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제 1대, 닻을 올릴 준비를 하라. 제 2대, 함포를 장전하고 대기하라.”
3대의 함대. 폭약을 품고 있는 것은 어느 쪽인가.
미묘하게 길을 열어주고 있는 적의 함대가 보였다. 1군이 단숨에 진격할 수 있도록 넓게 퍼지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느린 함대 중 두 대가 옆으로 빠지면서 가운데의 단 한 대만이 전속력으로 이쪽을 향해 돌진해 온다.
이를 지켜보던 이들이 포격명령을 재촉하였다. 그러나 아니다. 좀 더. 좀 더 기다려야 한다.
“제독!!”
“제독님!”
좀 더.
완전한 사격권에 들어올 때 까지.
*
“속도를 늦춰라. 함대가 괴멸 뒤 진격한다.”
“예!”
서서히 드러나는 어린 제독의 모습.
고독하게 서 있는 그는 체구는 작으나, 거인을 보는 것 이상의 존재감을 내뿜고 있었다. 녹슨 사슬을 보는 것 이상으로 비릿한 향이 코끝에서부터 올라오기 시작했다. 긴사이는 웃음을 참기 어려웠다. 조금만 있으면 저 것을 손에 쥘 수 있다 생각을 하니, 전율이 올라오는 듯 했다.
폭약을 심은 함대가 전속력으로 향했다. 폭약의 존재를 깨달았다고 하더라도 때는 늦었다.
“제독. 로던프에서 지원이.”
“이제와 형색은 갖추겠다는 건가? 낄 구간은 없다 전해라.”
“예!”
못마땅해 얼굴을 일그러트리던 긴사이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트란슈 제독을 손에 넣으리라 생각했다. 무슨 목적으로 로던프의 해상 지원을 받아들였는지 짐작이 갔다. 어린 제독을 탐내하고 있는 것이다.
긴사이는 론 타이의 명은 잊은 지 오래였다. 천하의 왕도 제 손에서 어린 제독을 빼앗아 갈 수 없다.
견제를 시작하면서 더욱 날카로워진 긴사이는 폭탄에 붙을 붙이라 명했다. 앞으로 몇 초. 단단한 제독의 함대를 날려버릴 강력한 폭탄이 터질 것이다. 그러나 침몰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 정도의 폭약으로 침몰 될 것이었다면 이렇게 애타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단숨에 갑판위로 올라 검을 겨루게 될 것을 기대하면서 긴사이는 긴장감을 늦출 수 없었다. 그는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고 당장 휘두르고 싶은 맘에 흥분되기 시작했다.
마침내 폭탄이 적의 함대에 근접하면서 강렬하게 터졌다. 거센 물기둥이 솟구치는 것을 확인하고 긴사이는 출격 명령을 내렸다. 이대로 좁아진 시야를 틈타 누더기가 됐을 갑판위로 오를 것이라 생각하는 순간, 눈앞에서 폭탄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강렬한 물기둥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먼저 진격하고 있던 1부대의 함대가 설명할 수 없는 물밑 폭발에 침몰되면서 이를 지켜보고 있던 긴사이가 갑판 앞까지 뛰어와 그것을 지켜보았다.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다.
“발렌!!! 놈은!!”
긴사이는 다급하게 제독을 찾았다. 이쪽도 충격의 여파를 피할 수 없어 배가 크게 흔들리면서 중심을 잃는 순간, 재와 함께 흩어지는 물기둥과 먼지 사이로 갑판이 뜯겨져 나가고 몸통의 절반이 파손되어 있었지만, 아수라장과 다름없는 그곳에서 귀신처럼 떠올라 있는 것은 분명, 제독의 함대였다.
마치 이번 수중폭발을 알고 있었다는 듯 말이다. 폭발이 끝나자, 전투 내내 뒤에서 구경만 하던 놈들이 일제히 다가와 연속적으로 화포를 발포했다.
이쪽의 함대는 수중폭발로 1군의 다수가 함몰되어 버렸고 장거리에서 쏘아 올리는 화포에 맞붙지 못하고 있었다.
“제독. 아무래도 함정이었던 것 같습니다!”
“발렌……. 발렌!!!”
가진 울분을 토해내듯 고함을 치던 긴사이가 분을 못 이기고 제독을 찾았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제독은 보이지 않았다.
“어디 있는 거지?! 어디!!”
속을 뒤집어 놓고서 보이지 않는 제독을 찾아 헤매는 사이, 배가 다시 한 번 기울면서 위협했다. 이미 근방의 1군의 다수는 격침된 후였다. 지원을 왔다는 로던프는 보이지도 않았다.
“퇴각한다.”
승산이 없다 결론을 내린 긴사이는 피가 묻어 나올 정도로 이를 물고 등을 돌렸다.
격침된 적의 함대 약 760여척, 전사자 23만여 명.
아군의 격침 함대 0. 전사자 34명. 부상자 145명. 실종자 1명.
대승을 거두고 돌아오는 대장선은 이미 침몰직전인 상태로 해안에 닿았다. 정박되자마자 뛰어 올라온 이는 문이었다. 불길함을 애써 지우며 곳곳을 파헤치듯 라마를 찾고 있었지만, 어디에도 작고 어린왕은 보이지 않았다.
문은 무언가 쿵-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 아찔한 공포를 억누르지 못하고 자신의 시선을 피하는 놈들 중 가장 개처럼 떨고 있는 자에게 다가갔다. 한 손만으로 다부진 사내의 멱살을 잡아들어 올린 문은 시퍼렇게 날이 선 눈으로 바라보았다.
“어디 있어.”
“흐……. 내, 내 탓이……. 내 탓이 아니야…….”
눈물을 흘리며 영문을 알 수 없는 소리를 하고 있었지만, 문의 눈이 가늘게 일그러졌다. 그는 이미 전후 과정을 듣지 않아도 알겠다는 듯 비릿한 소리와 함께 날이 빠져나오는 시라소를 쥐었다.
그대로 목을 쳐 낼 생각으로 망연자실 울고만 있는 사내에게 망설임 없이 시라소가 향했다. 그 때였다. 우직한 소리와 함께 갑판위로 무언가가 뛰어올라와 문의 시라소를 쥔 손목을 비틀 듯 잡았다. 문은 그대로 시라소를 가볍게 놓아 앞으로 튕겨 날 부분을 쥐어 그대로 자신의 손목을 잡고 있는 자에게 뻗었다.
“윽!”
생각지 못한 반격에 문의 손목을 놓쳐버린 상대를 베어버리기 위해 시라소를 바로 잡아 그대로 가로 질렀다. 시라소의 날 끝은 상대의 눈동자 바로 앞에서 멈췄다. 이유는 순식간에 문의 양 팔과 다리 그리고 목 부분에 굵은 사슬이 휘감기면서 정체가 불분명한 다수가 문에게 달라붙어 강제로 무릎 꿇리고 짓눌렀기 때문이다.
온 몸이 결박당하고서도 문은 이성을 잃어버린 짐승처럼 눈을 번뜩였다. 그런 문을 눈앞에 두고 있노라면 더는 움직일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위협이 느껴질 정도였다.
문은 또 다른 인기척을 느꼈다. 뒤 늦게 갑판위로 모습을 드러낸 이는 그가 익히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비위가 상해 다시는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버러지 중 한 마리였다.
란이었다. 그러나 그가 어째서 이곳, 트란슈에 있는지는 문에게 중요치 않았다.
“어째서 네놈만…….”
눈앞까지 다가온 란은 문을 내려다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는 그가 얼마나 분노를 억누르고 있는지 단편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라마는 살아 있었나?”
“…….”
“말해. 네놈이 물고 도망갔던 라마는, 살아 있었어?”
란은 표현할 수 없는 벅차오름과 분통함에 문의 머리카락을 잡아 들어올렸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며 물었다. 그러나 문은 대답이 없었다. 이를 지켜보던 란은 억누른 분노가 터져버리듯 문의 뺨을 가차 없이 주먹으로 내리쳤다. 붉게 달아오르는 뺨과 입안이 터져버렸는지 문의 입가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그러나 아무렇지 않는 듯 피를 토해내며 붉은 눈동자가 떠올랐고 이를 세운 문은 이야기를 나눌 필요도 없다는 듯 사슬에서 벗어나려는 듯 힘을 주고 있었다. 장정 6명이 결박하고 있음에도 힘이 부치는 듯 사슬이 바들바들 떨리는 것을 본 란은 그대로 문의 머리를 잡아 바닥에 짓이기듯 내리 꽂았다.
그리고 손을 뻗어 무언가를 건네받았고, 옅은 회색 액체가 든 작은 병과 연결된 바늘을 가차 없이 목덜미에 박았다.
바닥에서 짓눌린 문은 일순간 느껴지는 통증에 움찔거리다 이내 발악하고 힘을 주어 자신을 짓누르던 자들을 떨쳐냈다. 괴력에 튕겨나가듯 떨어진 자들이 뒤늦게 사슬을 붙잡았지만 문은 어느새 시라소를 쥔 채 란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란은 그 어떠한 방어도 하지 않고 서 있었고 기다렸다는 듯 문은 온 몸에 경련과 마비가 동반되기 시작했다. 숨 쉬는 것조차 어려워질 정도로 허덕이다 결국 시라소를 놓치고 시야가 닫히면서 란의 눈앞에서 쓰러졌다.
란은 자신의 어깨에 얼굴을 박은 채 정신을 잃은 문을 바라보았다. 일말의 감정도 없이 자신에게 기대어 있는 문을 이대로 죽여 버리고 싶었지만 보는 눈이 많았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란은 의식을 잃은 문이 바닥에 쓰러지지 않도록 안고서 물음을 던진 자를 바라보았다. 왕의 곁을 지키던 자다. 그가 황비가 될 자라는 걸 모르지 않는 란은 웃으며 말했다.
“불붙은 망아지마냥 날뛰기에 잠시 잠재웠을 뿐입니다. 위험한 자이니, 그 이상은 가까이오지 마십시오.”
“그를 어찌할 생각이십니까.”
“이 자는 신분을 속이고 트란슈에 도주했던 대역 죄인입니다. 후에 죄를 물은 뒤 참형할 것입니다.”
그대로 갑판 밑으로 내려가더런 란의 눈앞을 가로 막은 것은 나비였다.
“이곳은 트란슈. 메르헨의 법은 트란슈 내에선 그 어떠한 효력도 발생할 수 없습니다.”
나비가 말을 끝맺자 트란슈의 사병들이 올라와 란의 주위를 둘러쌌다.
일식
눈을 가늘게 뜬 란은 미소를 지었다. 그를 자극시킬 마음이 없는 나비는 이대로 그가 물러나는 시늉만 해도 대화가 가능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란은 물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당장이라도 문을 난도질 시켜버릴 독기를 가득품은 얼굴이었다.
교섭을 위해 트란슈에 방문했던 그가 문을 보자마자 이토록 난폭하게 구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이런 방법을 쓰게 해 서는 안 되는 것이다.
“지금 나를 막는다는 건 그대가 메르헨과 척지는 것이 될 수 있다.”
“용병왕은 온전히 트란슈 소속입니다. 트란슈 인을 타국이 개입해 처벌하는 건 용납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란이 문을 처벌하는 것을 허락하게 되면 그 여파가 곧 트란슈 전체로 번질 수 있으며 라마 역시 그 선상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나비는 척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단호히 입장을 설명했다.
그런 나비에게 더는 말을 하지 않던 란은 천천히 다가와 우월한 덩치로 나비를 내려다보았다.
“그게 아니겠지. 내게 숨기는 것이 몇 가지 더 있지 않나.”
짐승이 위협하듯 눈을 번뜩이자, 시선만으로 제압당하고 있음을 느꼈다. 란은 이대로 물러서지 않는다면 무력을 사용하는 것도 망설이지 않겠다는 뜻을 내비췄다. 몇 초 나비와 눈을 맞대고 있는 사이를 눈높이가 대등한 자가 비집고 들어왔다.
슈레이였다.
그는 나비를 뒤로 보내고 이를 드러내는 짐승과 맞붙었다. 갑판 위와 그 둘레에는 어느새 왕사가 둘러싸고 있었다.
“진정 트란슈는 메르헨과 등을 지겠다는 건가.”
마지막 경고를 하듯 란이 물었다. 그 물음에 슈레이는 결박당해 움직이질 못하는 문을 바라보았다. 그는 정말로 문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늘 라마의 곁을 지키며 다가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 그랬다. 이쪽이 그것에 눈감아 줬다면 제대로 지켜냈어야 했을 것 아닌가. 분노가 올라오는 건 슈레이도 다르지 않았지만 란에게 넘길 수는 없었다.
지금 란의 손에 넘겨지면 죽는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용병왕은 이번 해전에 공로가 크다. 때문에 참형은 반대한다. 허나, 죄를 지었다면 처벌이 마땅하다. 사건 진상이 파악될 동안 용병왕은 구금시키겠다. 이것이 메르헨을 대하는 마지막 트란슈의 예우다.”
슈레이는 문을 구금시키라 명했다. 트란슈의 사병들이 갑판으로 올라와 문의 얼굴에 천을 씌워 가리고 결박하고 있던 몸에 사슬을 묶었다. 지켜보고 있던 란이 문에게 붙어 있던 자를 물리자 문은 그대로 끌려 내려갔다.
슈레이는 란을 바라보며 나비에게 나지막이 속삭였다.
‘제독을 찾아라.’
나비가 그 뜻을 알고 고개를 끄덕이고 뒤로 물러나 갑판에 내려갔다. 란은 그런 나비에게 시선도 주지 않고 슈레이에게 한 걸음 다가왔다. 그는 속일 생각하지 말라는 듯 조금은 성이 난 듯한 모습이었다.
“라마는 어디 있지.”
“저번에도 말했지만, 라마는 에덴에서 본 것이 마지막이다.”
“속일 하지 마라. 저것이 있다는 건 라마 또한 이곳에 있었다는 것이다.”
“어째서 그에게 집착하는지 모르겠군. 그도 대역 죄인이라는 건가?”
“…….”
일순간 대답을 미루고 아픔을 느끼는 듯한 표정을 짓는 란을 확인했다. 그가 얼마나 라마를 쫓고 있었는지 단편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듯 하다. 그렇다는 건 적어도 라마에게는 편이 될 수 있는 인물이라는 얘기였다.
갑판엔 라마가 없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것인지 슈레이도 깨닫고 있었다. 그것을 부정하고 싶었기에 그는 라마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을 것이다.
“발렌티노 베르너 세라이어.”
슈레이가 낮게 입을 열었다. 이해할 수 없는 단어에 의문이 생긴 침묵이 이어지자 말을 이었다.
“트란슈 수군제독이자, 그대가 라마라 칭하는 자다.”
“……! 지금, 라마를 전장에 세웠다는 건가!?”
저 말도 안 되는 수군의 병력을 이끌도록 했다는 말을 믿을 수 없던 란이 큰 소리를 냈다. 이성을 잃기 직전인 란과 대조될 정도로 슈레이는 라마가 실종 되었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도 침착함을 유지했다. 그는 믿고 있기 때문이다.
“제독은 단 한 번의 전투에도 패한 적 없다.”
“그렇다면 그 제독은 어디 있지?”
“물어보면 알겠지.”
“…….”
구석에서 바들바들 떨고 있던 자를 억지로 끌고 와 면전에 무릎을 꿇렸다. 상관을 상징하는 것이 뜯겨진 채로 오줌지린 개 마냥 고개조차 들지 못하고 있었다.
“2군 함선에 제독은 보이지 않는다. 정황을 설명하라.”
“그, 그것이…….”
그는 어떻게 해서든 이 상황을 무마시키기 위해 머리를 굴려보았지만, 자신을 내려다보는 비릿한 시선에는 일말의 피할 수 있는 여지를 주지 않았다. 그에 절망감을 느낀 이가 주체할 수 없이 몸을 떨며 자신을 짓누르는 눈동자를 견디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제, 제 탓이 아닙니다! 그건 사고였습니다!”
필사적으로 자신을 변호했지만, 안타깝게도 연약한 변명은 자신을 지켜주질 못했다.
눈앞에 폭탄이 다가오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제독은 닻을 올리지 않았다. 이대로 다가오는 폭탄과 부딪힌다면 제아무리 튼튼한 함선이라도 침몰을 막을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제독은 닻을 올리고 뱃머리를 돌리는 대신 함포 사격 명령을 내렸다.
폭탄과 함께 죽을 생각이 아니라면 할 수 없는 명령이었다.
“이 자리에서 모두를 죽일 생각입니까!”
그 말에 동의한다는 듯 함포를 장전하는 것은 단 한 사람뿐이었다. 그의 멱살을 잡아 던지면서 제독을 바라보았다. 분명한 명령 불복종이었다. 나이어린 제독이 드디어 무엇이 우선인지 분간하지 못하고 패악을 떤다 생각했다.
표정이 거의 드러나지 않았던 제독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순간, 닻을 올리기 전에 폭탄을 짊어진 함선이 코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대로 끝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갑판 위가 극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한다. 겨우 중심을 잡는 것이 고작에 팽팽하게 박힌 닻에 함대가 급회전하며 한 것이다.
그리고 일순간 터져 나오는 괴음. 이대로 귀가 찢어져 버릴 것 같은 폭발음이었다. 제독은 전 함포 장전명령과 동시에 사격신호를 내렸다. 이에 멀찍이 던져 놓았던 놈이 달려와 함포를 쏘아 올렸고 폭탄과 함께 다시 한 번 커다란 괴음이 동반하면서 용솟음치기 시작한다.
제독은 그 후 닻을 올리라고 명했다. 이대로 머물렀다간 광대한 폭발에 휘말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폭발의 위력을 보아, 만약 아군이 있는 함대까지 도망을 쳤더라면 단숨에 수십 척을 잃을 수 있는 것이었다. 닻을 올리고 등을 보이지 않는 건 그의 예상대로 여기서 죽을 각오를 하고 막은 것 밖에 설명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처럼 눈앞에서 폭탄이 터지고도 선체의 절반 정도 밖에 손상되지 않았던 것은 폭발과 동시에 해수면 밑에서부터 광활한 용솟음이 동반했기 때문이다. 규모가 컸던 용솟음 안으로 코앞까지 다가온 함대를 함포로 이용해 밀어내면서 그 반동으로 배가 기울이며 멀어졌다. 이대로 닻을 올리고 물살을 타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는데 눈앞에서 벌어지는 두 번의 폭발에 넋을 놓은 것이 문제였다.
제독은 재차 닻을 올리라 명했다. 이를 따른 것은 역시 처음 함포를 장전하고 명령대로 사격한 자였다. 작위를 빼앗기고 바들바들 떨며 중심을 잡는 것이 고작인 자신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힘겹게 닻을 올리는 것에 제독 역시 가담하자 그것을 지켜본 자들이 하나 둘 닻에 달라붙어 올리기 시작했다. 힘을 합해 모두가 닻을 끌어올리자 반동으로 팽팽했던 배가 크게 기울면서 그대로 침몰 되려는 것처럼 한쪽으로 쏠렸다.
용솟음 구간에서 튕겨져 나오는 암석과 파편들은 무기가 되어 함대를 덮쳐왔다. 닻을 올리던 자들을 차례로 부상을 입기 시작했다. 눈앞에서 아군이 쓰러지는 것을 지켜보면서 그는 이 지옥에서 벗어나고 싶은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때였다.
갑판위로 겨우 올려놓았던 닻이 굴러오면서 아슬아슬하게 눈앞에서 비켜가 바다에 빠졌다. 이미 한 쪽으로 기울러진 함대에 닻의 무게가 더해지면 침몰은 당연한 순이었다. 정말로 끝이라는 생각과 동시에 눈앞으로 제독이 달려왔다. 그는 작은 몸으로 닻을 끌어 올리는 것 대신 그대로 검으로 닻을 끊어냈다.
쇠로 되어 있는 닻의 줄을 단 한 번에 끊어낸 것이다.
기울던 배가 무게감이 덜어지자 오뚝이처럼 일어나려 기우뚱거리기 시작했다. 충격에 잠시 시야를 빼앗겨 겨우 기둥을 붙잡고 버티는 자신의 눈앞에서 제독이 난간에 매달려 있었다.
그대로 달려가 손을 뻗으면 제독을 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일순간 밀려오는 것은 이 지옥에서 살아남은 자신에게 떨어질 명령불복종에 대한 처벌이었다. 해전은 대승할 것이다. 적의 함대는 예정대로 큰 피해를 입을 것이고 재정비할 동안 겨울이 찾아와 해전은 소강상태에 들어설 것이다.
난간을 겨우 붙잡고 버티고 있는 제독의 가녀린 손가락이 서서히 미끄러져 내려가고 있었다.
물살을 타던 배가 다시 한 번 흔들리면서 겨우 용솟음 구간에서 빠져나올 쯤 난간에 붙은 하얀 손가락은 보이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을 들은 슈레이는 그대로 검을 뽑아 더 이상의 변명도 듣지 않고 놈의 목을 쳐냈다. 발밑으로 굴러가는 겁에 질린 머리통을 발로 차면서 검에 묻은 피를 털어냈다.
“수색을 방해할 것이면, 이 나라에서 나가라. 이후 메르헨과의 동맹은 없던 것으로 하겠다.”
*
눈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눈동자를 굴려 천천히 주위를 살펴보았다. 낯선 공간. 죽음과 가까워졌었다는 걸 기억한다. 몸을 일으키려고 힘을 주자 통증이 엄습했다. 겨우 손을 짚어 상체를 들어 올리는 것만으로도 아찔한 현기증이 느껴졌다.
기를 제한한뒤 조절해 사용을 한다고 해도 몸에 부담은 상상 이상이다. 더구나 용솟음치는 곳에서 난간조차 제대로 붙잡지 못하고 떨어져 버렸다. 발밑으로 뭔가가 휘감긴다는 느낌과 함께 추락하면서 나는 자각조차 하지 못하고 죽어버렸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쇠가 쓸리는 소리가 들리면서 목 부근으로 무게감이 느껴졌다. 팔목역시 마찬가지다. 아직도 눈앞이 흐릿해서 몇 번 눈을 깜빡이다 손목을 바라보았다. 뭔가가 달려있다. 양쪽 발목 역시 마찬가지다.
목 부근을 둘러싸고 있는 것에 손을 대 보았다. 차갑고 딱딱한 느낌이 쇠로 만들어진 고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이제 깨어났어?”
“…….”
좁아진 시야 탓에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목소리만으로도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눈앞까지 다가와 턱을 들어 올리더니 낮은 음성으로 속삭이듯 말했다.
“드디어 당신을 손에 쥐었어.”
엔도였다.
자잘한 과정은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결과적으로 놈의 손에 붙잡히고 말았다. 턱을 타고 올라오는 구역질나는 손길에 힘을 주어 쳐냈다. 그 작은 반동으로 머리가 통째로 울리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스스로도 몸에 열감이 느껴질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다는 걸 깨닫고 벽에 등을 기댔다.
목구멍이 말라 비틀어져 버릴 것 같은 갈증이 느껴졌다. 나는 내게 날을 세우며 다가오는 손이 닿기 전에 입을 열었다.
“물.”
눈앞에서 멈춘 손.
커다란 손이 천천히 물러나면서 조금은 회복된 시야로 웃고 있는 엔도가 보였다. 그는 조금만 기다리라며 잠시 문 밖으로 나갔다. 그의 뒤를 지켜보면서 손을 들어 눈을 문질러 보았다. 손목에 힘을 줄 때마다 묵직한 쇠붙이에 달린 사슬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정신을 유지하기 힘든 상태에서 주위를 좀 더 둘러보았다.
창문은 보이지 않는다.
입구는 오직 눈앞에 있는 문하나.
숨구멍조차 보이지 않는 이 방에 있는 것이라곤 지금 내가 앉아 있는 침대가 전부였다. 이곳이 트란슈인지 로던프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문이 걱정되었다. 예민하고 불안정한 아이가 지금 어쩌고 있을지 대충 예상이 되자 두통까지 밀려오는 듯 했다. 오래 묶여 있을 수 없으니 이곳에서 나와야 했지만 지금 내게 이 사슬을 모두 끊어낼 힘이 부족하다.
그 사이, 엔도가 물컵을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천천히 내게 다가와 컵을 건넸다. 난 손을 뻗어 물을 받아 마셨다. 그런 내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모두 마신 컵을 쥐고 손을 내렸다.
난간을 붙들고 있던 내 발목에 무언가가 휘감기는 듯한 느낌이 들었었다. 빨려 드는 것 같은 그 힘을 버티지 못하고 손을 놓아버린 것을 떠올리면서 엔도를 노려보았다.
“네놈 짓인가.”
부정하지 않았다. 그는 미소를 잃지 않고 다가와 내 손을 잡아 올려 등에 입을 맞췄다. 닿는 것이 싫어 그대로 손을 들어 뺨을 쳐내자 엔도의 고개가 돌아갔다.
“역겨우니까 건들지 마.”
“아아…….”
사력을 다해 쳐냈으나, 뺨에는 붉은 자국만 남았을 뿐 어떠한 상처도 내지 못했다. 엔도는 천천히 고개를 바로하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이 일순간 일그러진다고 생각하는 순간 내 목을 결박하고 있는 사슬을 잡아 그대로 침대 위로 무너트렸다. 내 위를 점령하면서 그는 코앞으로 다가와 말했다. 입술을 움직일 때마다 맞닿아 고개를 돌리고자 했지만, 거친 손이 턱을 잡고 놓지 않았다.
“이제 내 것이 돼야 하는데, 익숙해 져야지.”
엔도의 어깨를 짚어 밀어내려고 했지만, 이미 몸은 만신창이가 되어 있어 압도적인 힘에 무기력하게 제압당했다. 그런 나를 비웃듯 엔도는 턱을 잡은 손에 힘을 주어 두 눈을 똑바로 마주친 뒤 무릎을 내 다리 사이로 밀어 넣고 있었다.
사슬을 붙잡고 있던 손은 멋대로 내려가 상의만 겨우 걸치고 있는 내 다리 사이를 더듬고 있었다. 그것이 기분 나빠 그의 손목을 붙잡아 막았지만, 사타구니 안쪽까지 들어오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온 몸에 뱀이 둘러진 것 같았다. 그는 혀를 내밀어 나의 입술을 핥았고 썩은 생선이라도 씹는 것 같은 불쾌함에 몸서리 처졌지만, 물러서지 않고 손에 달려 있는 사슬로 목을 노리고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 팔목이 허무하게 잡히면서 나를 뒤집은 그가 머리를 침대에 박게 만들고 등을 짓누르고 있었다. 그는 내 등위에 올라타 무게를 실어 움직이지 못하게 한 뒤 목에 달린 사슬을 잡아 당겼다. 그에 강제로 머리가 올라가면서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자 귓가로 다가와 말해다.
“상냥하게 대하고 싶으니까 더 이상 날 난폭하게 만들지 마.”
“큭.”
이를 물고 버티지만, 귓가에 달라붙는 숨소리와 함께 몸이 밀착되었다. 벗어나려 힘을 줘 봐도 목에 걸려 있는 사슬이 팽팽하게 당겨 숨을 쉬는 것이 고작이었다. 목덜미를 핥으며 허리를 쓸어 넘기는 손. 강제로 무릎을 세워 엎드리게 한 뒤 무릎을 밀어 넣어 다리를 벌리게 만들었다. 치욕스러운 자세에 몸을 비틀었지만 용납하지 않는 다는 듯 사슬을 당기고 턱을 잡아들어 올려 숨구멍을 압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