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화 (34/35)

란은 라마를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했다. 그는 로던프의 멸망을 원했었다. 목적이 아닌 야망으로 말이다. 그 말뜻이 이제야 이해가 가는 듯 했다. 소름은 전율처럼 온 몸에 퍼졌다. 란은 참지 못하고 이반을 지나쳤다. 그의 말이 사실일지는 몰라도 이것은 라마의 입으로 직접 듣고 싶었다. 처음부터 이것을 알고 있었는지 알고 있었다면 대체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묻고 싶었다. 

로던프의 기사의 위세가 시간이 지날수록 당당해졌다. 이를 맞서야만 하는 메르헨과 트란슈 입장은 말 그대로 죽을 맛이었다. 

슈레이는 젠 그란스의 죽음으로 모든 전쟁이 끝날 것이라 생각했었다. 나비는 그 반대였다. 젠 그란스의 죽음이 본격적인 전쟁의 시발점이 된다는 것이다. 나비의 예상이 적중하면서 로던프에서 심상치 않는 소식이 전해였다. 로던프에서 드론으로 이름을 떨치는 자가 있는데 그 이름이 라마라는 것이다. 

“냉정하게 행동하세요.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네가 메르헨을 믿는다고 내게 그것을 강요하지 마라. 나는 보이는 것을 믿으니까. 그러니 두 눈으로 확인하겠다는 것이다.”

“로던프의 저항이 거셉니다. 그렇게 충동적으로 나섰다간 역으로 당할 수 있습니다. 그들과 타협하여 협공의 기회를 잡으십시오. ”

“순진한 놈. 어차피 놈들은 로던프인들이다. 이번 전쟁이 끝난다고 우리와 손을 잡을 것 같으냐? 오히려 병력을 확보한 뒤 뒤통수를 칠지 몰라. 완전한 신뢰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2왕자가 부상을 입고 왕좌가 탈환될 동안 뒷짐을 지고 있으셨습니까?”

“그건 널 지키느라!”

“당신의 위선을 제 탓으로 돌리지 마십시오. 그것이 배신에 대한 명분을 주는 것입니다.”

슈레이는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나비는 그런 슈레이를 보고 그가 무슨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이 갔다. 메르헨을 믿지 않는다는 것은 핑계에 불과하다. 로던프의 드론으로 이름을 올리고 있는 라마를 확인하고 싶어 핑계를 대서라도 억지를 부리는 것이다. 

나비역시 라마의 소식이 마음에 걸리지 않는 건 아니다. 그러나 지하 감옥에서 문이 사라졌다. 슈레이나 라마가 생각하는 문은 철없고 잔인한 미친 사람 같으면서도 광기에 관해서는 순수한 어린아이와 같았다. 그러나 나비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문은 자신이 봐왔던 그 어떤 자보다 전세를 읽는 것에 탁월하고 계산적인 자였다. 짐승과 같은 본능 뒤로 섬뜩할 만큼 냉철한 이성도 갖추고 있다는 소리다. 무리 없이 탈출 할 수 있던 지하 감옥에서 하루 이상을 버틴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너는 정말 괜찮은 거야?”

슈레이가 염려하여 나비에게 물었다. 라마의 소식을 듣고도 놀라울 정도로 태연함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정상은 아닐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전 당신처럼 막무가내로 일을 그르치는 바보가 아닙니다.”

“와……. 진짜 한 번을 안 져.” 

“설마 이길 생각이셨습니까?”

네가?

라며 업신여기는 표정으로 바라보다 울화통이 터진 슈레이가 꽥꽥 소리쳤다. 이제야 이성을 찾은 듯한 슈레이를 보며 안심한 나비가 귀가 따갑도록 소리치는 모습을 보고 미소 지었다. 그것에 무안해진 슈레이가 입을 닫았다.

“일단, 그를 만나……!”

“응?”

갑자기 말을 끊는 나비의 행동이 이상해 슈레이가 의문을 달았다. 나비는 무언가를 보고 경악에 찬 얼굴이었고 슈레이가 뒤를 돌아보는 순간, 자신의 앞을 가로 막은 나비의 앞으로 검이 베여졌다. 메르헨의 기사 복을 입은 자가 슈레이의 등 뒤를 노리고 검을 내리치려는 것을 나비가 막은 것이다.

품안에서 쓰러지는 나비를 바라보는 것도 잠시, 미동도 하지 않는 슈레이를 베어내려는 자의 목이 누군가에 의해 잘려나갔다. 귀신처럼 나타난 그는 다시 모습을 감추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자에 의해 슈레이는 목숨을 건졌지만,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슈레이는 안고 있는 나비를 바라보았다. 그는 온몸을 칼끝으로 긁어내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확인하는 것도 겁이 날 지경이었다. 

“나...나..비...나비야..”

목소리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눈을 감고 있는 나비의 얼굴을 확인하고 그는 무너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뚝뚝- 눈에서 눈물방울이 흘러내렸다. 머릿속으론 의술사를 찾아가야 한다고 경고하고 있지만 온 몸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린 듯 움직여지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 건강하게 웃음 짓던 나비의 얼굴이 사라지지 않았고 곧 분노는 나비를 이 지경으로 만든 자에게로 갔다. 그는 메르헨의 기사 복을 입고 있었다. 그것을 기억하면서 나비를 살리기 위해 껴안은 손에 힘을 준 슈레이는 그들 모두 몰살시켜버리겠노라고 맹세하고 사람을 부르려 입을 여는 순간이었다. 

“숨막힙니다.”

“!!”

나비의 목소리에 놀란 슈레이가 그의 어깨를 잡아 품에서 떼어내 바라보았다. 

“아야야…….”

“어..어째서…….”

“왜요? 안 죽어서 실망하셨습니까?”

슈레이는 나비를 끌어안았다. 

“나비야……! 다행이다……. 나는 네가 죽는 줄 알았다!”

“멋대로 죽이지 마십시오. 그보다 좀 답답한데요.”

“대체 어떻게…….”

소란을 듣고 달려온 자들이 암살자의 사체를 치우는 것도 신경쓰지 않고 슈레이는 나비를 놓지 않았다.

격국 나비가 직접 답답하다고 해서야 놓아주고 다친 곳이 없는지 찾아보았다. 다행이 옷이 찢어진 것 외에는 피가 난 곳도 없었다. 나비는 말짱한 배를 보여주었다. 강철로 된 판이 몇 겹이나 배에 붙어 있었다. 덕분에 그 검에 베이고도 피 한 방울 안 흘릴 수 있었다. 

놀란 슈레이가 어떻게 이렇게 준비할 수 있는 것인지 물었다. 나비는 자신의 명줄이 짧을 것이라는 라마의 말을 늘 기억하고 있었다. 그를 두고 먼저 죽을 수 없었기에 어떤 방면으로든 암살만은 피하려 했던 결과였다. 

“준비성 정도라고 해 두죠. 그보다 저자는 메르헨의 기사가 아닙니다.”

“뭐?”

“가면이 없습니다. 메르헨은 로던프 암부 출신으로 기사단을 만들었습니다. 어설프게나마 알려진 갑옷의 형태까지는 따라했겠지만, 가면까지는 생각지 못한 모양입니다.”

“그럼 대체 누가 이런 짓을?!”

“트란슈와 메르헨의 관계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자들이겠죠. 짐작 가는 곳이 몇 개 있을 텐데요.”

슈레이는 어렵지 않게 이번 암살에 관련이 있는 자들을 떠올렸다. 

개중 가장 의심이 가는 곳이라면 역시 쿠웨드쪽이었다. 그러나 암살자는 쿠웨드인으로 보기에는 뼈대가 얇고 피부가 하얗다. 메르헨 혁명을 일으킬 때처럼 타국의 암살자를 고용할 수도 있겠지만, 급습한 실력치고는 허무하게 목이 베였다. 

이는 임무를 완수한 뒤 그 자리에서 자결하라는 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쿠웨드인은 개인주의가 강하고 굴복하지 않는다. 

다혈질에 난폭하지만 두드러지는 특징은 개인주의가 강하다는 것과는 별개로 제 사람은 끔찍이 아낀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자신의 것’에 예민한 성향 탓인 듯하다. 그 예로 타국에서는 태형에 처해도 마땅한 짓을 제 것이 저지른 다해도 웬만한 일이 아닌 이상, 관대하게 넘어갈 정도로 배포가 두둑하다. 

때문에 해전에서 희생된 영혼을 달래기 위해 신사를 만들어 이름을 새긴 비석까지 만들어 안치하여 왕이 직접 명복을 빌어준다고 한다. 그러니 적어도 임무를 완수하고 자결하라는 명령은 내리지 않을 것이라는 거다. 

“로던프라는 건가?”

“이번 내전의 배후겠지요. 엔도라는 자가 그 주축일겁니다.”

“그런데 어째서 놈은 탈환한 왕좌를 차지하지 않았던 걸까. 이번 내전에서 승리한다면, 결국 왕좌에 앉게 되는 건 라마일 텐데.”

“왕좌는 상징적이니까요. 끌어내지 않는 이상 벗어날 수 없는 족쇄와 다를 바 없습니다. 당신도 비슷한 것을 차고 있으니, 그 의미를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겠죠.”

“우리 소중한 제독에게 그런 족쇄를 차게 할 수는 없지. 메르헨과는 적극 협력하겠다. 하지만, 협력하겠다는 건 그때뿐이다. 로던프 왕좌가 탈환되고 제독의 안전을 확보된 즉시 경계태세에 들어간다. 메르헨과도 마찬가지다.”

“이의 없습니다.”

라마를 향한 이질적인 집착을 지켜본 바 있다. 이성이 송두리째 날아가 버린 듯 흥분하던 그 모습에서 제독을 손에 쥐면 절대로 놓아줄 생각이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덧붙여 문을 살려둘 생각도 없다는 것도. 

란은 암살에 능숙한 자들로 문의 행방을 쫓게 하고 발견 즉시 처형하라 명령 내렸다. 그건 단순히 죄인을 향하던 눈이 아니었다. 그 모습을 보고 확신할 수 있었다. 로던프의 내전이 끝나고 그 왕좌의 주인이 바뀌더라도 로던프는 라마와 문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애초부터 들개를 배척해왔던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 일로 로던프와 대적관계가 된다고 해도 상관없다. 라마는 이미 트란슈를 구해준 영웅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하군.”

슈레이가 턱을 짚고 무언가 풀리지 않는 게 있다는 듯 고심하는 얼굴을 하였다. 이를 보고 나비가 이상하게 생각해 물었다. 

“무엇이 말입니까?”

“계절이 바뀌어 정체되었다고 하나, 쿠웨드측으로부터 도발이 없어. 로던프 내전에 크게 관여하는 것 같지도 않고.”

“내전이 가속화되길 기다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기엔 너무 조용하단 말이지.”

“하고 싶은 말이 정확히 무엇입니까?”

“사신을 보내겠다.”

나비는 황당해 말이 나오지 않았다. 저런 앞 뒤 계산도 못하는 사람을 챙겨야 한다는 것에 눈앞이 깜깜해졌다.

급기야 슈레이는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이를 불러, 쿠웨드에 사신으로 갈 것을 명했다. 

“적국에 사신으로 도발이라도 할 생각이십니까? 그도 아니면 과자라도 같이 보내 달래보려고요?”

“그거 좋은데? 이봐, 특산물이라도 챙겨 가라.”

“대체 갑자기 왜 사신을 보내신다는 겁니까?!”

“예감이 좋아. 놈들은 확실히 이쪽 과자에 손을 댈 거니까. 너는 잔말 말고 내 옆에 있어.”

되도록 멀리 떨어지고 싶습니다. 라며 중얼거리던 나비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슈레이가 당장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길이 없기 때문이다. 정체된 해전과 쿠웨드에서 무슨 관계성을 찾은 것이란 말인가. 

예상할 수 있는 것이라곤 잦은 해전의 패배로 열이 받은 긴사이제독이라는 것뿐이다.

“!”

나비는 마치 머릿속에 불꽃이 튀는 듯 했다. 정체된 해전과 직접 지원을 하지 않는 쿠웨드. 마치 폭풍전야와 같은 고요함이 두 국가를 에워싸고 있었다.

“설마…….”

“알겠으면, 다신 내 앞을 가로 막지 말아.”

“누가 가로 막는 다는 겁니까? 갈길 가십시오. 안 막…….”

습니다. 까지 마치려고 했던 나비의 뺨에 슈레이가 손을 올렸다. 나비는 잠시 말문이 막힐 동안 슈레이는 천천히 고개를 내려 나비의 어깨위에 올렸다. 그는 숨을 깊게 내 쉬더니 손을 들어 나비의 뒷덜미를 끌어안듯 당겼다. 

“네가 영리해서 다행이었지만, 차라리 아둔한 자였다면 더 좋았겠다 싶다.”

자신대신 나비가 몸을 던져 칼을 받은 것에 심상치 않게 놀랐던 슈레이였다. 이번에는 나비가 지혜로워 무사할 수 있었지만, 다시 이런 일이 생기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전장위에서 자신의 옆자리는 그런 곳이기 때문이다. 

“다시는 그런 짓 하지 마.”

“……. 저도 이것이 없었다면 안했습니다.”

나비가 이제 그만 떨어져 달라는 말을 이었지만, 슈레이는 듣는 척도 하지 않고 팔에 힘을 주었다. 

*

“이제 눈이 좀 떠지냐? 대체 나랑 전생에 무슨 원수를 져가지고 쌍으로 나한테 그러냐? 응?”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건 리노였다. 그가 왜 여기 있는 것인지는 궁금하지 않다. 

“……문은?”

“똥개 생각밖에 안 나냐? 지금 네 상태가 어떤지 알기나 해?”

목소리를 최대한 낮춰 말하고 있지만, 흥분으로 날이 서 있었다. 나는 그런 리노를 바라보다 눈동자를 돌려 문을 찾았다. 방안에는 없나 보다. 눈을 굴릴 힘도 없어 감아버리자, 리노의 한숨 쉬는 소리가 들렸다. 

“하여간 말 더럽게 안 들어. 의술사 말은 말 같지도 않지? 이 짓도 때려치우든지 해야지.”

“리노.”

“부르지 마. 아무것도 안 들어.”

“부탁이 있다.”

리노가 내 말에 놀란 듯 눈동자가 커졌다. 

  들개  

“안 돼. 절대 할 수 없어.”

외면하고 돌아서려는 리노에게 겨우 팔을 뻗어 붙잡았다. 

“어차피 남은 시간이 내겐 별로 없어.”

“없긴 왜 없어!”

“리노.”

“죽게 하지 않아. 제약된 기를 사용하지만 않으면 절대 안 죽어. 여기서 좋은 약과 침을 쓰면 네 몸도 곧 회복 될 거라고!”

희망고문 정도다. 리노가 말하는 좋은 약과 침을 써 겨우 몸을 가눌 정도가 되더라도 그것이 전부일 것이다. 그런 몸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는 어쩌면 태어났을 때부터 죽었어야 할 운명이었는지 모른다. 지금 나의 몸이 천천히 바스라지고 있음을 느낀다. 기의 제약이 그 이유의 전부가 아니다. 

나는 늘 후회를 쫓고 있었다. 과거에도 미래에도 어쩌면 현재까지 와서도.

고통을 받고 있는 문을 돌아보지 못하고 40년이 되도록 후회만을 쫓다 겨우 알게 된 것이다. 

나는 또 다른 후회를 쫓고 싶지 않다. 

“이이상 추한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다.”

“싫어. 결과가 뻔한 데 그걸 내가 왜해!”

“기는 사용하지 않겠다.”

“그건 당연히……!”

내 말이 무슨 뜻이었는지 뒤늦게야 알게 된 리노가 새파랗게 얼굴이 질려 나를 보았다. 

당장 원하는 대로 해 주지 않으면 이 자리에서 제약된 기를 풀어버리겠다는 것이었다. 그에게 이런 식으로 요구하고 싶지 않았지만, 시간을 더 이상 끌 수 없었다. 

“협박하지 마.”

“필사적인 부탁이다.”

멀리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것이 가까워지기 전에 리노를 붙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바들바들 떨리는 것조차 막을 수 없었다. 리노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묵묵히 품에서 침이 들어 있는 통을 꺼내고 내게 다가왔다. 

“순식간에 끝나. 물고 있어.”

그러면서 내 입안으로 자신의 검지와 중지를 밀어 넣었다. 혀끝 안으로 깊게 넣는 것 같더니 일순간 온 몸에 불이 붙은 것과 같은 통증이 느껴졌다. 입안에 들어온 것을 리노의 손가락이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깨물어 버렸다. 목 안으로 피가 흘러들어와 비릿한 향이 났지만, 그마저도 옅어질 만큼 불길에 먹히면서 제정신을 붙잡기 힘들었다. 몇 차례 경련을 하듯 몸을 떨자 입안에서 손가락이 빠져나갔고 리노가 물러갔다. 동시에 문이 열리고 엔도가 들어왔다. 

나를 집어 삼키던 불길이 빠른 속도로 잦아들었고 엔도가 다가오기 전에 손을 들어 피를 닦아 냈다. 눈을 떴다. 좀 전까지 흐릿하기만 했던 시야가 제대로 자리를 잡아 깨끗하게 보였다. 

“피라도 토한거야?!”

내게 묻은 리노의 피를 오해한 것인지 엔도가 다가와 손을 뻗었다. 난 그 손이 닿기 전에 쳐내고 상체를 일으켰다. 갑자기 일어나는 내 행동에 놀란 엔도의 얼굴이 보였다. 몸이 가뿐하다. 이중으로 제약을 걸어 놓으면서 날뛰던 기들이 힘을 쓰지 못하는 것이다. 만약 내가 제약된 기를 사용하려 한다면 종잇장처럼 찢길 몸이 되어 버렸지만, 좀 전의 상태론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곧 바로 침대에 내려왔다. 문 밖으로 나오자 엔도가 따라 붙었다. 

“신을!”

급히 내게 신길 신발을 가려오라고 명하면서 따라 붙더니 이대로 돌아다니면 안 된다고 말했다. 난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가져오라는 건 어쨌지?”

“곧. 원하신 대로.”

완전한 종말. 어쩌면 내가 원하는 것과 다를지 모를 것이었지만, 그의 대답은 곧. 이었다. 엔도는 신을 가져온 자에게 넘겨받고 미소 지으며 무릎을 굽혀 내게 신을 신겨주려 손을 뻗었다. 난 그것을 바라보다 발을 들어 올려 그대로 그의 손을 짓밟았다. 

맨발에 닿은 느낌마저 끔찍한 듯해 발을 떼고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폈다. 개중 느긋하게 등을 기대로 있는 아이에게 다가갔다. 갑갑한 것을 그렇게나 싫어했던 놈이 갑옷과 투구를 그럴듯하게 입고 있어 웃음이 날 지경이었다. 

“안아라.”

맨발로 땅을 밟고 싶지 않으니, 안으라는 것이었다.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고 엔도는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다는 듯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선이 곱지 않아 고개를 땅에 박으라고 명령하려는 차, 아이는 거추장스러웠던 갑옷을 벗어던지고 투구만 뒤집어 쓴 채로 내게 손을 뻗었다. 

최근에 결박을 당한 흔적이 고스란히 손목에 남겨져 있어 짜증이 올라왔다. 여기서 더 얼마나 상처가 생길 수 있단 말인가. 

그 순간, 아이의 목에 검이 드리웠다. 엔도였다.

“감히 어디에다 손을……!”

검이 목을 노리고 있자 나는 손을 뻗어 검 날을 붙잡았다. 살갗에 검날이 파고들기 전에 엔도를 노려보았다. 분노를 삼킬 수 없었다. 여기서 아이에게 상처를 만들었다면 나는 이 자리에서 엔도를 죽이려 했을 것이다.

“아, 내가 깜빡했네. 나의 왕은 날을 붙잡는 게 취미였지? 알았어. 원하는 걸 가져다줄게. 돌아올 동안 극진히 모셔라. 그러면 온정을 베풀어 자결하게 해 주마.”

날을 쥔 손에 힘을 빼자 엔도는 검을 물렀고 그대로 등을 돌렸다. 뒤늦게야 나온 리노가 호들갑을 떨며 달려와 손을 봐 주었다. 내 시선은 천천히 올라가 아이에게 향했다. 투구 밖으로 목을 타고 흐르는 것이 붉은 색임을 알고 놀랐다. 

목을 감싼 상흔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입술이라도 깨물었던 것일까. 베이지 않았던 손을 뻗었지만, 그대로 고개를 옆으로 돌려 버렸다.

피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대로 방문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어째서인지 뒤따라오는 이는 없었다. 리노마저 들어오지 못한 방안에서 나를 안고 서 있던 아이가 그대로 깊게 껴안았다. 어깨가 닿지 않도록 행여나 상처가 있는 손이 스치지 않도록 허리를 잡고 엉덩이를 받쳐 끌어안고서도 말을 하지 않았다. 

무어라 말을 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얼마나 울부짖고 있었는지 들리지 않아도 들리는 것 같았다. 

이제는 멀쩡히 움직일 수 있는 나를 침대 위에 조심히 내려놓으면서 감추지 못한 붉은 눈으로 쓰다듬듯 바라보았다. 피가 흐르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 시선에는 꽃향기가 맡아졌다. 손을 뻗었다.  어딜 얼마나 강하게 깨물어 피를 흘렸던 것인지 염려하여 투구를 벗길 원했지만, 그것을 바라지 않는다는 듯 붕대에 감싸진 내 팔을 조심히 잡았다.

*

로던프는 반란군과 역적을 압도하고 몰아냄으로써 라마드론의 존재를 알렸고 몰살당한 왕족으로 부재중인 왕좌에 앉아야 할 자는 라마밖에 없을 것이라 세간은 목소리를 높였다. 이에 엔도는 피의 숙청으로 권신들을 걸러내 전원 일치된 의견으로 라마의 이름을 새로운 왕족으로 올리게 된다. 

하지만 모두 엔도의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쿠웨드가 긴사이의 일을 문제 삼아 제기하면서 이를 무시하자 동맹을 끊고 트란슈와 동맹하여 전쟁은 교착상태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예기치 못한 변수는 때를 가리지 않았다. 해방을 위해 모스가 일어난 것이다. 로던프 내에 있던 트란슈 출신의 모스들이 해방운동을 계기로 교착상태에 있던 전쟁이 기울기 시작했다. 

전세가 역전되는 걸 두고 볼 수 없었던 엔도는 모스의 해방운동을 반역으로 변질시키면서 용병들을 이용해 일반적인 학살 명령을 내렸다. 로던프 인들에게 들개 다음으로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던 모스들은 조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간절한 희망이 짓밟히면서도 해방을 외쳤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트란슈는 즉각 모스의 학살을 멈추라고 경고했지만, 기다렸다는 듯 모스를 인질로 트란슈의 발목을 붙잡았다. 

예기치 못했던 변수를 기회로 바꿔버린 것이다. 전세를 뒤집기에는 악랄하지만 탁월한 선택이었다. 

이에 용병들을 동원해 방패와 검을 동시에 사용함으로써 다시 한 번 전세는 로던프 쪽으로 기울였다. 

“간만이지? 몸은 좀 괜찮아?”

몇 개월 만에 나타난 엔도는 썩은 내가 지독한 들개의 탈을 뒤집어 쓴 이방인의 모습이었다. 그가 무엇을 흉내 내려고 하는지 알고 있었다. 

“널 부른 기억은 없다.”

“그런 소리하지 마. 오늘은 다정해지고 싶으니까.”

“…….”

“기분은 어때?”

“…….”

“오늘 뭐했어?”

대답을 들을 것도 아니면서 계속 물었다. 잦은 전쟁으로 지칠 법도 했지만, 내색하나 없이 웃고 있었다. 

“이제 당신의 시간이야.”

손을 뻗는다. 잡지 않자 그대로 팔목을 잡았다. 여유로워 보여도 조급하다는 것을 제대로 숨기지 못한 행동이었다. 

잡은 팔목에 힘을 주어 당기면서 몸이 떠오르자 단숨에 안은 나를 데리고 걸음을 옮겼다. 침묵하는 동안 줄을 지키고 서 있는 수많은 권신들과 기사들을 지나 황금으로 만들어진 왕좌에 천천히 나를 앉혔다. 

나는 서 있는 권신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러다 한 곳에 머물렀다 시선을 돌려 엔도를 바라보았다. 

그는 내 뒤로 다가와 속삭이듯 말했다. 

“이제 모두 당신 것이야. 라마. 나의 왕이시어.”

정면을 바라보게끔 한 뒤 엔도는 왕관을 넘겨받았다. 커다란 붉은 보석이 박힌 것으로 기존의 로던프 왕이 쓰고 있던 것과는 생김새가 달랐다. 화려하기 그지없는 왕관이 천천히 엔도의 손에 의해 내 머리 위에 얹으려던 순간이었다. 

멀리서 길고 날카로운 것이 날아와 머리위에 앉으려던 왕관을 날려버리고 등 뒤에 박히면서 자잘한 파편이 튀었다. 이에 엔도는 내게 파편이 가지 않도록 막고서 이것이 날아왔던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거침없이 던져진 것은 검이었다. 얼마나 강하게 던졌는지 벽까지 부수면서 단단한 보석이 박힌 왕관과 함께 박혀 버렸다.

나 역시 그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가장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검은 투구를 눌러쓴 장신의 아이였다. 권신들이 당황해 흩어지고 소란을 듣고 달려온 기사들이 그를 에워쌌다. 엔도는 좀처럼 알아보지 못하고 느릿하게 일어나 의문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이상하네? 아무런 냄새도 안 나는데. 마치 똥개 같잖아.”

납득할 수 없다는 듯 중얼거리더니 내게 시선을 돌렸다. 그에 반응한 아이가 걸음을 옮기자 기사들이 소란을 일으킨 것에 대한 변명을 요구했다. 그것을 들을 생각도 없는 아이가 무시하고 걸음을 옮기자 보다 못한 기사 중 한명이 검을 뻗었다. 단 한 순간이었다. 

단 한 번의 주먹질로 검을 내지르던 자의 안면을 구기고 튕겨져 나가기 직전 검을 들고 있는 팔목을 붙잡아 비틀어 검을 빼앗고 앞을 가로 막은 자들을 오직 힘으로 베어냈다. 

기사의 명예를 잊고 두려움에 다가서지 못한 자들이 주춤하는 사이, 검을 바닥에 끌며 내가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바닥을 끌면서 검이 지나간 자국이 생기고 섬뜩한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가 구면이던가?”

엔도가 내 앞을 가로 막으며 내려왔다. 

바닥을 끌던 검이 멈췄다. 무게감이 있어 보이는 검을 가볍게 쥐더니 그대로 휘두른 것이다. 바람을 베는 소리가 강렬해 지면서 엔도 역시 검을 들어 막았다. 엔도는 자신의 검에 맞닿은 묵직함에 감탄하면서 맞닿은 검이 튕겨나가기 전에 기를 사용하였다. 

그 영향으로 튕겨나간 아이가 쓰고 있던 투구에 금이 갔고 천천히 부서지면서 간신히 감춰두었던 달빛을 깎아 만든 듯한 은빛 머리카락을 늘어트린 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못 알아 볼 뻔했네. 똥개주제에 꽤 영악한 짓도 할 줄 알잖아?”

창백한 얼굴에서 유일한 색은 붉은 눈동자뿐이었다. 고요하게 내려앉았던 불길이 서서히 불타기 시작하면서 적대감을 억누르지 못한 시선에 오한이 들었다. 

“너 혼자서 뭘 어쩌려고? 넌 날 이길 수 없어.”

문을 둘러싸고 다수의 기사들이 재차 모여 들었다. 일제히 검을 들어 우두커니 서 있는 문을 위협하려 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내 위치를 확인한 문이 내가 있는 곳으로 다시 걸음을 옮긴 것이다. 

“에헤이, 거참 더럽게 말귀 못 알아먹네.”

문은 주위에 모여든 기사들이 뻗을 검을 단숨에 막고 열이 넘은 자들을 오직 힘만으로 밀어내 일제히 베어냈다. 피가 튀어도 흔들리지 않고 등 뒤를 노리는 자까지 몸을 숙여 목을 뚫고 그대로 비틀어 베어냈다. 뇌수와 함께 터져나온 것들이 난잡하게 바닥을 더럽혔다. 쥐고 있는 검에서 뚝뚝 피가 쏟아져 내리는 듯 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문은 오직 나만을 쫓고 있었다. 

“라마…….”

그런 문을 바라보고 있던 엔도는 나를 보지 못하도록 가로 막았다. 그에 피를 먹고 있는 검을 든 문이 말했다.

“비켜.”

“가엾게도. 미쳐버린 모양이군. 하지만 남의 것을 탐내는 건 안 되지.”

기를 실은 엔도의 검이 문의 어깨를 노리고 벼락처럼 내리 꽂았다. 재빨리 그것을 막았지만, 문이 가진 검이 부서지면서 어깨와 함께 통째로 팔을 잘라버리려는 검을 피해 몸을 틀었다. 그 사이를 비집고 다시 한 번 엔도가 검을 가로쥐면서 문의 복부를 베어냈다. 

이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는 엔도가 문을 베기 위해 검을 들고서 뛰어드는 순간, 기사갑옷을 입은 자가 뛰어와 힘겹게 엔도의 검을 막았다. 

문을 죽일 기회를 빼앗긴 엔도가 분노해 자신의 앞을 가로 막은 기사의 검을 튕겨내면서 베어내려고 하자, 그런 엔도를 둘러싸고 다수의 검 끝이 모여들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도 황당함을 감추고 잠복해 있던 자들을 움직인 주모자를 찾기 위해 눈을 돌리며 그는 찾을 수 있었다. 

황금색 머리카락. 녹빛 눈동자. 엔도의 생각대로였다면 빛을 잃고 나뒹굴어 구더기에 파 먹혔어야 할 가나가 군중 가운데에서 나타났다. 그는 엔도를 향해 일만의 온정도 담지 않고 말했다. 

“여기에 네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엔도가 상처 입히지 못하도록 가나의 곁으로 그의 검을 막아낸 기사가 다가왔다. 그는 한스덴의 오랜 벗 베펠의 아들이자, 최연소 1기사단에 휘장이 부끄럽지 않는 아폴리네르 벤 폴리앙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역전되었을 것이라고 확신했던 전세를 뚫고 이곳에 들어온 이들이 있었다. 란과 문호 그 옆에는 은아와 슈레이 나비도 있었다. 죽었을 것이라 생각한 2왕자까지도. 성 너머에선 점령해 들어온 자들에 의한 함성소리가 끊이길 않았다. 비통에 찬 비명소리는 그 어디에서도 들리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을 체감한 엔도가 갑자기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다. 오직 그 웃음소리만이 스산한 정적을 깨고 있었다. 검을 붙잡은 엔도의 손에 힘이 들어갔고 그는 순식간에 몸을 숙여 바닥부터 베어내듯 몸을 돌려 바람과 함께 베어냈다. 엔도의 주위를 에워싼 자들의 목이 순식간에 떨어져 나가면서 무너지며 그대로 가나를 향해 검을 뻗었다. 이를 막기 위해 벤이 뛰어들었다. 

그러나 벤은 엔도를 당해낼 수 없었다. 맞붙은 벤의 검이 엔도의 기에 의해 녹아내리자 역부족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란과 슈레이의 검이 엔도의 목을 노렸다. 

“여기서 더 얼마나 추해 질 것인가. 엔도.”

란이 물었다. 

“난 좀 더 알아듣기 쉽게 얘기 해 줄게. 이 성은 함락 당했다. 여기에 네 편은 없어. 좋게 말할 때 검 내려.”

체통 있이 행동하지 못하겠냐며 한탄해 하는 나비가 이마를 붙잡았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가나의 말에 모두 들어 있었다. 로던프에는 엔도의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아무것도. 

문이 천천히 일어났다. 그는 찢어진 복부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아랑곳 하지 않고 있었다. 문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들고 있던 검도 놓고서 그대로 엔도를 지나쳤다. 그에게 시선 한 번 주지 않고 분노를 불태울 생각도 없이 내가 있는 곳으로 다가온다. 

천천히 느리게 다가오는 문을 바라보았다. 엔도는 무엇이 무너져 버렸는지 자신이 가진 모든 기들을 개방했다. 엔도를 겨냥하고 있던 란과 슈레이는 압도적인 살기에 놀랄 겨를도 없이 맞닿은 힘을 견뎌내지 못하고 밀려났다.  

재차 공격할 것이라는 생각과는 다르게 엔도가 향하는 곳은 문이 있는 곳이었다. 그런 엔도를 막기 위해 기사들이 몰려들었지만 바닥마저 녹이는 불길에 잡아 먹혀 감히 다가올 수 있는 자는 없었다. 

엔도는 그대로 검을 뻗어 문의 등을 향해 꽂아 넣었다. 문의 움직임이 멈췄다. 무릎이 꿇리면서 그대로 주저앉았다. 이를 지켜보던 모든 이들이 경악하며 바라보았다. 천천히 엔도가 문의 몸에 박힌 검을 빼자 다량의 피를 쏟아내며 문이 쓰러졌다. 

“나의 왕이야.”

엔도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나의 왕.”

나는 쓰러진 문을 바라보았다. 허물어지는 그의 몸을 바라보면서 곧 때가 올 것임을 알았다. 호화스러운 옷을 입고 사치스러운 금빛 왕좌에 앉아 있더라도 내게는 변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왕이 아니다.”

나는 왕이 될 수 없다. 인간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나는 추하고 비겁하고 겁이 많은 짐승이기 때문이다.

엔도는 내 말을 듣고서 잠시 가만히 서 있었다. 그리곤 잠깐 시선을 자신의 등 뒤로 보냈다. 그가 본 것은 당장이라도 자신의 목을 쳐낼 기세로 포위하고 있는 자들 뿐이었다. 가망이 없다는 것은 본인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다시 내게 고개를 돌린 엔도가 입을 열었다. 

뒤틀려 버렸다는 걸 알면서도 부정하려는 듯 조금은 처절하고 안타까운 목소리였다. 

“나의 왕이 된다고 말해.”

“…….”

“나의 왕이라고 말해.”

대답이 없자, 엔도는 검을 빼들었다. 그 행동에 놀란 란이 허튼짓하면 그대로 죽일 것이라고 엄포를 늘어놓았고 슈레이는 활을 가져오라고 했다. 그럼에도 안중에도 없이 엔도는 다시 한 번 대답을 재촉했다.

“왕이 되어줘. 그거면 돼.”

엔도가 눈물을 흘렀다. 그는 애원하듯 말하고 있었다. 때문에 흔들림 없이 말했다.

그러나 나는 그곳에 인간이 될 수 있는 모든 것을 버렸다. 

“나는 들개다.”

내 말에 눈을 감은 엔도는 깊게 눈물을 뽑아내고 짙은 상실감을 담고 있는 눈으로 검을 들어올렸다. 자신과 함께 나를 베어내려는 듯 했다. 그의 등을 향해 화살이 날아왔고 뒤늦게 란과 가나가 달려왔고 은아가 뛰어왔다. 그러나 그들은 엔도를 멈추게 할 수 없었다. 

눈앞에 날이 닿는다고 생각하는 순간, 검은 달이 떠올랐다. 

달빛을 깎아 놓은 듯한 아름다운 은발이 검게 그을려 더럽혀져 있었다. 엔도의 검이 내가 닿기 전에 그의 팔목을 비틀어 꺾은 문이 그대로 엔도의 복부를 가차 없이 주먹으로 쳐냈다. 검붉은 토혈을 하며 쓰러진 엔도가 비틀거리며 바닥을 짚고서 얼굴을 들었다. 

그 얼굴을 발로 차 버리자, 벽에 부딪친 엔도의 머리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그는 기를 제대로 사용하기도 전에 압도적인 힘에 눌려 마치 쥐약을 삼킨 것처럼 몸을 가누지 못했다. 

이대로 끝낼 생각이 없다는 듯 엔도가 일어났다. 내장에 이상이 생겨 피를 토하고도 두 발로 서 검을 쥐었다. 그를 향해 누군가가 달려왔다. 그는 이반이었다. 

“여기서 그만해! 너는 아무것도 가질 수 없어! 너와 나는 아무것도 가져서는 안 돼!”

“…….”

엔도는 나를 바라보았다. 내게 마지막으로 확인 받는 듯한 눈이었다. 그 시선을 외면하지 않자 엔도는 천천히 시선을 떨어트리고 고개를 숙였다. 

그런 엔도에게 다가가는 건 칠흑과도 같은 검은 달이었다. 엔도가 검을 들었다. 그대로 문에게 검을 내질렀지만, 꺾인 팔목으론 제대로 검을 다룰 수 없었다. 그대로 목이 잡혀 버둥거릴 힘조차 없이 매달리자 그대로 문의 검이 엔도의 어깨를 관통하였다. 

억누른 비명이 흘러나왔지만, 가차 없이 뽑아 이번엔 목을 관통하려는 듯 날을 세워 내리치는 순간이었다. 그 누구도 막아낼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문의 검을 막은 것은 가나였다. 왼손으로 쥔 검을 두 손으로 쥐면서 칼날이 녹아내리고 있음을 확인했다. 그러나 가나는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네게 죄인을 형별할 자격은 없다. 네 행동은 그저 살인이야. 그만 둬.”

검은 머리카락이 되어버린 문은 소름끼치도록 강렬한 기를 내뿜고 있었다. 그를 둘러싸고 있는 건 온전한 검은 것이었다. 문은 그대로 엔도를 놓고 천천히 가나를 바라보았다. 아름다움과는 별개로 붉은 눈동자는 굶주려 있는 들짐승을 보는 것 같았다. 

가소롭다는 듯 가나의 검을 튕겨내자 기력을 다해 막는 것이 무색하게 쥐고 있는 검을 놓쳐버리고 뒤로 넘어졌다. 통증을 느끼기도 전에 귓속으로 소름끼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쇠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였다.

문은 들고 있는 검을 바닥에 끌기 시작했다. 끌고만 있음에도 검은 바닥을 가르고 있었고 불길한 살기는 가나에게 집중되었다. 그런 문을 막기 위해 클라운이 달려와 막았지만, 폭주하고 있는 문을 막을 수 있는 놈들은 없었다. 

유독 나에 대한 것에 민감했던 문은 귀신같이 가나를 알아보았다. 나중에는 직접 죽이겠다는 말을 서슴치않게 했던 것이 떠올랐다. 이성이 나가 자의적인 판단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그들을 향한 뿌리깊은 감정이 본능처럼 문을 움직이게 하는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그런 문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뱉었다. 

“성가시게…….”

바라본 문의 몸은 서서히 부서지고 있었다. 그것은 강제로 깨워낸 기에 침식당하고 있다는 것이 맞았다. 그것을 당장 멈추게 할 수 없다는 것이 사무치도록 괴로워질 쯤 나는 벽에 박혀 있는 시라소를 쥐고 빠르게 도약했다. 예전에 그랬던 것 처럼 문의 앞에 선 나는 가나의 뒷덜미를 잡아 등 뒤로 던졌다. 놀란 가나가 내 이름을 부르는 사이, 떨어지는 대검을 시라소를 들어 막았다.

정말 손이 많이 가는 아이다.

손목을 타고 알싸한 통증이 고스란히 전해졌지만, 나는 문의 검을 막을 수 있었다. 나 역시 강제로 사슬을 끊어 기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주변으로 바닥에 균열이 일어나면서 조금씩 내려앉았다. 

"라마!”

내 이름을 부르며 가나가 다가오려 했다. 가나뿐만이 아니다. 란과 슈레이. 그리고 나비와 은아까지. 

내게 다가서려는 가나를 붙잡은 건 지금까지 그를 지켜주었다는 것이 확실한 한스덴 웨이였다. 한스덴 웨이가 가나가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붙잡으면서도 나를 알아 본 것인지 조금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살아줘서 고맙다는 말은 필요 없을 듯싶다. 대신, 나는 그들 사이에 단단하고 높은 벽쌓아 가로 막듯 낮게 말했다. 

“다가오지 마. 가나 너도 마찬가지다.”

나는 모두를 외면하고 오직 눈앞에 있는 문을 바라보았다. 들개가 되고부터 손에 쥔 모든 것을 포기하였다. 그러나 단 하나. 놓을 수 없을 것이 있었다. 

그것은 귀찮고 성가시며 가끔은 짜증나고 지저분하고 말도 듣지 않았다.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그 누구에게도 종속될 수 없을것이라 생각했던 아이가 스스로 들개의 서약으로 사고를 치면서도 아이처럼 웃으며 아무것도 남지 않는 들개에게 모든 것이 되어 주겠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어쩌면 그날, 보던의 들개로 눈을 뜬 날. 문을 본 순간 나는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에게 목줄을 채웠던 그날. 

네 곁이라면 어쩌면 다시 시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

시라소에 힘을 빼자 문이 쥐고 있는 검은 가차 없이 내 몸통을 꿰뚫었다. 검은 것에 갉아 먹히던 문을 끌어안았다. 나 역시 제약의 사슬을 끊어낸 결과 내 몸은 깨지기 직전의 도자기가 되어버린 듯 온 몸에서 균열이 일어나고 있었다. 난잡하게 휘몰아치던 기들이 문과 맞닿으면서 폭발하듯 터져나왔다.

그 순간만큼은 세상이 멸망해 버린 듯 고요했다.  

미세한 소리가 들려올 때 쯤 손끝부터 바스라지는 것이 보였다. 잿빛 재로 변하기 시작하면서 마치 광활한 불길에 아낌없이 태울 수 있었던 잔재와 같았다.

두렵다거나 슬프다는 기분은 들지 않았다. 요람보다 평온하다는 것이 맞았다. 

나의 육체에 한계가 왔음을 짐작한다. 주변은 그저 고요하고 고요하다. 그때 문이 검을 놓았다. 나 역시 재로 변해가는 손으로는 시라소를 쥘 수 없었다. 

그제야 먹구름이 거치고 눈이 부실도록 아름다운 달이 떠올랐다. 나와 다를 것 없이 으스러지기 시작하는 문을 바라보면서 나는 그에게 손을 뻗었다. 

문은 나를 알아보고 껴안았다. 어디에 있었냐며 칭얼거리는 소리까지 들려왔다. 그것이 듣기 좋아 웃어 주었다. 문 역시 아이처럼 웃어주는 것으로 대답하는 것 같다.

오랫동안 차갑게 했던 나를 용서해 줄 것 같지 않았던 아이가 애초부터 아무런 것에도 화가 나 있지 않았다는 듯 말이다.

"뭘 해 줄까? 말만 해 다 해줄게."

“아무것도 해 주지 않아도 된다. 이미 충분하니까. 그러는 너는 원하는 것이라도 있어?”

"이미 다 가졌어."

그렇게 마지막까지 문은 나를 깊게 끌어안았다. 서로가 품 안에서 사그라지는 것을 느꼈다. 재로 흩어지려는 자신을 기억하면서 눈을 감았다. 

               

백색의 공간. 

소리가 들리지 않는 그곳에서 나는 홀로 서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것도 없다. 어디에도 문이 보이지 않았다.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빨라지기 시작한 건 내가 없으면 또 혼자 괴로워하고 있을지 몰라 마음이 다급해져서이다. 

같은 공간을 헤매듯 얼마나 달렸을까. 인기척이 느껴졌다. 급히 그곳을 바라보았지만 문이 아니다. 그러나 사람으로 보이는 것이 앉아 있었다. 낯선 느낌은 없다. 그러나 문은 아니다. 그렇다면 저 사람은 누구일까.

앉아 있는 그를 바라보다 무언가에 이끌리듯 천천히 그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무것도 없는 백색의 세상이지만, 마치 물 위를 걷는 것처럼 느껴진다. 

서서히 다가가자 그것에는 망연자실, 죽음의 냄새만이 흐릿하게 남아 있었다. 그가 연신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처음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지만, 귀를 기울이고 나니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인지 알아 들을 수 있었다. 

“……믿지……. 않을 것이다. 가족을 만들지도……. 않을 것이며……. 연인……. 만들지…… 왕을 모지도 않을…….”

꺼져가는 목소리와 정확치 않는 발음이었지만 그 말을 이해하고 나서부터는 그의 옆에 앉아 그가 중얼거리는 소리만을 들었다. 

그것이 몇 백번, 몇 천 번, 몇 만이 되었을 때 나는 비로소 입을 열 수 있었다. 

“가족을 만들지도…….”

“가족이 되었고” 

“친우를 만들지도…….”

“친우가 되었으며”

“연인을 만들지도…….”

“연인이 되어 주었다.”

그는 입을 닫고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조그마한 빛에도 사그라질 것 같은 그에게 말했다.

“나더러 왕이 되어 달라고 하더군.”

침묵하는 그를 바라보았다. 눈이 멀고 귀가 멀었으며 더 이상 달릴 수도 검을 쥘 수 없는 더러운 들개의 모습이었다. 

그는 잠시 체념한 듯 내게 물었다. 

“너는……. 나인가.”

“그렇다.”

내 대답에 말문이 막혀버린 듯 가만히 있더니, 천천히 나를 외면하고 아무것도 없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곧 쓰러질 것 같은 목소리가 다시 들려오기까지 오래 걸리진 않았다. 

“미안하다. 아무것도……. 결국 아무도 지켜내지 못했다……. 지킬 수 없……”

“어리석은 것. 들개가 무언가를 지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부터 틀려먹었어.”

“…….”

“살아 있어.”

개중 쓸데없이 살아남은 놈도 있는 것 같지만…….

“네놈이 지킨다고 설치지 않아도……. 모두 제대로 살아 있어주었다.”

믿을지 말지는 본인의 선택이니 알아서 생각하게 내버려 두었다. 그러자 안심이라도 되었다는 표정으로 눈을 감고서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살아 있다…….”

“…….”

그 모습을 보는 걸 마지막으로 나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일어나자 또 다른 나는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돌아가는 건가?”

“찾으러 갈 거다. 어디에서 또 말썽부리고 있을지 모르니까.”

“누굴 찾는다는 거지?”

“네놈은 알 필요 없다.”

“어린 나는 꽤 건방지군.”

“지금의 나는 네놈보다 나이가 많아.”

일어나 먼 곳을 바라보았다. 빛이 닿아 있는 곳에서 무언가 보이는 듯 했다. 태양은 졌다. 그러나 내일이 떠오르지 않는 달이 떠올랐다. 내게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멀리서 나를 향해 달려오는 것을 바라보며 그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멈춰 내가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네게도 하나쯤은……. 살아 있을지도.”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지만, 상관할 필요는 없었다. 다시 눈을 뜨게 되면 분명히 알게 될 것이니까. 

*

“라마 드론. 마지막으로 그 입을 여는 것을 허락한다.”

강렬한 볕 아래에서 타들어 가는 갈증을 느껴졌다. 귓속을 파고드는 삼엄한 목소리에 침묵하였다. 단두대 앞에 서 있음을 짐작한다. 그들은 내가 아무런 말이 없자 나를 끌고 강제로 일으켜 딱딱한 단 위로 목을 내놓게 만들었다. 

나는 내 목덜미 위에 서슬 퍼런 칼날이 지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정숙하던 주변이 환호와 울음으로 뒤섞이면서 사형 집행이 떨어지는 북소리가 울렸다. 

나를 붙잡은 자들이 단두대 밖으로 달아나지 못하게 억눌렀다. 눈앞에는 머리를 담아내야 할 통이 끌려오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어째서 나는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지 않았던 것일까. 

이곳에 오르기 직전까지 나는 들개가 되어 죽을 것을 맹세했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할 수 없었다. 어째서일까. 

겨우 몇 초. 꿈이라도 꾼 것인지 아니면 주마등 대신 보았던 것인지 알 길이 없지만, ‘어린 나’의 마지막 목소리가 잊히지 않았다. 

녹슨 소리와 함께 칼날이 떨어졌다. 모든 것이 느리게만 보이는 이곳에서 바람조차 울부짖는 순간, 날이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몸이 떠올랐다.

그리고 떠나가지 않던 어린 나를 뒤덮는 듯한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라마. 그러다 목 굴러 간다.”

인두에 지져진 두 눈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해 얼굴을 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나는 이 목소리가 그리웠고 그리웠으며 그리웠다는 걸 알았다.  

들개는 더 이상 태양을 쫓지 않았다. 

그저 내일이 오지 않는 달만이 떠올랐을 뿐이다.

-THE END-

외전. 1 그 후 ①  

바람이 불어온다. 물 냄새를 가득 품고 있는 이 바람은 눈앞에 깊은 호수가 있음을 알려주는 듯 했다. 평온한 한 낮에 그늘진 돌 위에 앉아 보이지 않아도 이따금 물고기가 뛰어오르는 소리에 호수가 얼마나 맑은 빛을 띠고 있을지 짐작이 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기다림에 지쳐 먼저 입을 연 것은 나였다.

“문.”

등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은 문이었다. 

오겠거니 하고 내버려 뒀더니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기에 말을 걸었다. 귀에 익은 발소리가 가까워지고 있다고 느낄 쯤에는 눈앞에 문이 있었다. 

“왜 진작 오지 않고?”

뒤에만 있었느냐 묻고 있었다. 문은 잠시 대답을 미루다 내 손을 잡아 뒤집어 손바닥에 입을 맞췄다. 틈만 나면 입부터 대는 녀석이라 새삼스럽게 신경은 쓰이지 않았다. 

“불러주면 좋겠다 싶어서.”

“미련하게…….”

“괜찮아. 기다리는 건 익숙해.”

그런 것은 익숙하지 않아도 될 것 같지만, 늦게 부른 내 탓도 있으니 더는 타박하지 않았다. 문은 용병왕의 신분을 버리고 죄인으로 참수당해야 했던 나를 이곳으로 데려왔다. 수배령이 떨어져 나와 문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을 것이라는 우려와는 달리 이곳에 온 뒤로 로던프의 소식은 전혀 들을 수 없었다. 

이곳이 어디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로던프의 국경을 넘어 타국에 들어왔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전쟁을 하러 가지 않는 이상, 국경을 넘어 타국으로 들어가려면 절차와 준비가 복잡하다. 그러나 나는 반나절 만에 이곳에 왔었고 그 과정 중 어떠한 제제도 없었다. 그렇다고 밀입국을 시도한 것 같지도 않다. 

이상한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눈이 안 보이는 것은 나와 다를 바 없는 문이다. 아무리 안 보이는 것에 익숙하다고 해도 타국에 들어오면서 익숙지 못하는 환경임에도 문은 아무런 제약이 없어 보였다. 그간 내가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어떠한 시술을 받아 시력이 좋아진 것일까. 

가진 의문이 머릿속에서 맴돌았지만, 거기서 생각하는 걸 멈췄다. 

문은 해가 떠 있을 때 오래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갑자기 몸이 떠올랐다. 

“나도 걸을 수 있다.”

“그래서?”

무슨 뜻으로 말한 것인지 다 알면서 뻔뻔하게 물었다. 눈이 보이지 않고 다리를 절고 있다고 해서 이런 식으로 옮겨 다니는 것은 내키지 않았다. 

“내려 놔.”

“가만히 안겨 있어. 넘어지기라도 하면 더 귀찮으니까.”

“안 넘어질 테니 내려 놔라.”

“그럼 손잡고 갈까?”

차라리 그것이 나을 것 같아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더니 더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내려놓지도 않고 안은 채로 손을 붙잡은 것이다. 황당해 입을 다물자 애초부터 내 말을 들을 생각이 없던 문은 성큼 걸어갔다. 

묵직하게 열리는 듯한 소리가 들렸고 안으로 들어갔다. 동시에 여러 명이 문의 뒤를 따라 붙는 것이 느껴졌다. 하나같이 기척을 죽이고 따라 붙어 이곳에 함께 데려온 용병 중 일부일 것이라는 게 내 추측이었다. 

문은 나를 안은 채 어딘가에 앉았다. 안겨서 왔기 때문에 느낌만으로는 이곳이 어디인지는 알 수 없었다. 문의 등 뒤에 있던 인영 중 한 명이 다가온다는 게 느껴졌다. 손을 뻗어 오는 것 같아 고개를 돌리고 쳐내려 하자, 문이 그런 내 손목을 잡았다. 

“가만히 있어. 눈을 보려는 것뿐이야.”

문 이외의 뭔가가 닿는 다는 것이 끔찍하게 싫었지만, 의식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인두에 짓눌렸던 오른쪽 눈꺼풀이 들어 올려졌다. 상처가 아물지 않아 어딘가가 찢어지는 고통이 전해졌지만 그런 내 상태를 알고 있는 것인지 곧 눈꺼풀이 내려갔다. 

내 눈을 살펴보았던 인영이 입을 열었다. 

“다른 쪽도 보겠습니다.”

곧이어 왼쪽 눈꺼풀도 올라갔다. 눈앞에 희미한 빛 덩어리 같은 것이 보였다. 눈에서 뭔가가 흐르는 것 같다는 생각과 동시에 내 눈꺼풀을 들고 있던 손이 치워졌다. 알싸한 고통이 눈에서 맴돌자 곧 문의 손바닥이 내 눈을 가렸고 차가운 무언가를 받아 그대로 눈 위에 덮어 주었다. 

내 눈을 살펴보았던 자가 입을 열었다. 

“왼쪽 시력은 겨우 살아 있는 것 같긴 한데……. 회복은 어렵겠습니다.”

문이 무언가를 받아 내 눈을 감싸 감았다. 붕대인 듯싶다. 눈 주위를 뜨겁게 하던 고통이 줄었다.

문은 말이 없었다. 주위에 있던 자들이 모두 물러났다. 앞을 보지 못하는 다는 것에 절망을 느낀 적은 없었다. 그러나 문은 그것이 아니었나보다. 이미 가망이 없는 나보다 자신의 눈에 더 신경을 썼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네가 신경 쓸 필요는 없다.”

“…….”

“너야말로 앞이 제대로 보이기는…….”

갑자기 턱을 잡아들어 문이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반항할 틈도 없이 다가와서 놀라 그의 이마를 짚고 밀어내려 했지만,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는 몸으로는 무리였다. 입을 맞추면서 나를 잡아 돌린 뒤 눕게 만들었다. 그제야 이곳이 침대가 있는 방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진득하게 입을 맞추던 문은 천천히 내게 떨어져 턱 밑으로 입술을 옮겼다. 이것이 무슨 뜻인지 모르지 않았기에 당황스러워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붙잡았다. 

“그만해.”

“내가 왜?”

“문.”

“라마는 나랑 놀아 줄 수 없어. 더 이상 왕이 될 수 없으니까.”

그 말에 가슴이 시큼 거리기 시작했다. 누군가의 왕이 된다는 것은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문이 나를 윗사람으로 온전히 받든 적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나는 단두대 위에서 보았던 ‘어린 나’의 왕이 되어달라고 했다던 목소리가 떠오른 것일까. 

지금 나의 존재가 하찮아 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지키고 싶은 것을 모두 잃은 내게 남아 있는 것 따윈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것을 확인 받고 나니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한 심장부근이 지속적으로 난도질당하는 것 같았다. 

들개조차 되지 못한 나의 존재에 구역질마저 느껴졌다. 

“그러니까 대신 해 주는 거야.”

문은 무기력하게 떨어져 있는 내 손을 들어 자신의 목에 두르게 만들었다. 내게 붙어 귓가에 조용히 속삭인다. 

“왕이 되어 줄게.”

그 말에 문의 목에 둘러진 내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나는 문을 밀어내지 않았다. 그를 붙잡았고 매달렸다. 문은 내 목덜미를 핥고 내려가더니 나의 바지춤을 쓸어 천천히 내렸다. 상처가 가득할 알몸이 되어버렸지만, 수치스러움 따윈 느낄 수 없었다. 

다리가 벌려지고 있음을 느꼈다.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것은 문의 손가락이었다. 허벅지부터 지분거렸던 손가락이 서서히 어디론가 향해가고 있었다. 목덜미에 닿아 있던 입술이 내려가 쇄골을 핥았다. 

눈이 멀어 감각이 예민해진 탓인지 나는 문이 조금만 움직여도 온 몸이 경련하듯 떨려오는 듯 했다. 문의 입술이 밑으로 내려갈수록 손에서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어 나도 모르게 힘을 주어 잡았다. 

문이 잠시 멈추고 나를 보는 듯하더니 허리 밑으로 손이 들어와 단숨에 나를 들어올렸다. 

“읏.”

그에 놀란 내가 신음을 흘렸지만, 아랑곳 하지 않고 나를 일으켜 부둥켜안았다. 안으면서도 자꾸만 밑을 파고드는 손가락에 허리가 들썩이는 듯하다. 손에서 빠져나갈 리 없는 자세에 나를 문을 더욱 강하게 붙들었다. 

갑자기 엉덩이 밑으로 뭔가가 흘러내리고 있음을 느꼈다. 차갑고 끈적거리며 달콤한 향이 났지만 놀란 내가 허리를 들썩이며 문을 끌어안자 그런 나를 달래듯 허리를 감싼 손이 뒤통수를 향해 짓눌렀다. 

“힘 빼.”

명령에 익숙하진 않았지만, 그 말을 들으려고 노력했다. 긴장도 잠시, 엉덩이 부근을 쓸고 있던 손가락이 서서히 밑을 파고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한다. 묵직한 느낌과 동시에 부드럽게 들어갔지만, 안쪽에 무언가 차 있다는 느낌이 생생했다. 

“무릎 세워. 허리 잡아 줄게. 천천히. 좋아. 가만히 그대로 있어.”

앞이 보이지 않아 매달리는 것 밖에 없었기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속삭이는 말에 집중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 사이 밑으로 더 들어왔다.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바르르 떨고 있자 문은 내 머리를 잡아 당겨 떼어내고 그대로 입을 맞췄다. 동시에 안쪽에 들어와 있는 손가락이 움직이면서 어딘가를 잘못 누른 것인지 아래가 짓눌리는 통증과 비슷한 것이 느껴졌다. 몸이 물고기처럼 튀어 오르자 안쪽을 차지하고 있던 손가락이 빠져나가고 나를 어느새 침대 위로 눕혀졌다. 

“고집 부리지 말고 소리 내.”

그 말을 끝으로 밑으로 손가락은 비교도 되지 못하는 굵직한 것이 파고드는 걸 시도 했다. 서서히 밀려들어오면서 꿰뚫는 통증과 살점이 찢어지는 듯 했다. 견디지 못하고 몸이 빠져나가려 했지만, 문은 나의 몸을 끌어안아 그대로 밀고 들어왔다. 

숨이 먹혀 들어가는 듯 했다. 숨 쉬는 법도 잊은 사람처럼 헐떡이자 내 몸을 감싸고 있던 문이 얼굴을 쓸어 올렸다. 

“괜찮아. 숨 쉬어. 천천히……. 잘했어.”

겨우 숨을 쉬게 되었지만, 배 안에 가득 차 있는 것에 대한 감각은 사라지지 않았다. 문이 갑자기 내 손을 잡아 밑으로 보냈다. 닿은 것은 깊숙한 곳에 닿아 있는 부근이었다. 놀라 손을 빼려고 했지만, 집요하게도 잡아 그 부근을 닿게 했다. 마치 확인이라도 시켜주듯 말이다. 그제야 말도 안 되는 짓을 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알겠어? 제대로 다 들어갔어.”

“…….”

“이 부근에 있을 거야. 느껴져?”

이번엔 내 손을 배 부분에 닿게 했다. 민망해서 손을 치우려하자 작게나마 웃음소리가 들린다. 

“문어 같아.”

“?!”

놀리고 있어 반박하기도 전에 갑자기 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열기가 밑으로 퍼지자 놀란 내가 문을 붙잡았다.

“갑자기 움, 움직이지… 윽.”

움직이지 말라고 하려고 했지만, 파고드는 강도가 심해져 그마저도 내뱉을 수 없었다. 들어갔다 나오는 것이 반복되면서 닿는 곳 마다 온 몸이 찔리는 듯 했다. 서서히 강도를 높이던 문이 내 두 다리를 잡고 빠른 속도로 움직이면서 더는 견딜 수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나를 잡아들어 올려 그대로 앉게 만들었다. 

“윽. 이제……. 그…….”

“정말?”

“…….”

갑자기 움직이는 걸 멈추더니 날 보는 듯 했다. 나는 그런 문이 보이지 않았지만,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런 나의 뒷덜미를 잡은 문은 힘을 주어 잡아 당겼다. 코앞까지 닿아 있음을 알고 떨어지려고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 한 마디가. 나를 붙잡았기 때문이다.

“라마. 원해봐.”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뒤로 물러나는 것도 하지 않았다. 대답을 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재촉하는 문이 달갑진 않았지만 결국 다시 붙잡을 수밖에 없는 건 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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