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4화 (35/35)

외전. 1 그 후 ②  

잠에서 깬지는 오래됐지만, 몸에 힘이 들어가질 않아 일어날 수 없었다. 밑이 끈적이는 것도 기분 나빴지만, 따끔거리는 통증이 더 좋지 않았다. 

날 이렇게 만들어 버린 원인은 본래 잠이 많았던 터라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고 옆에서 자고 있는 듯 했다. 

앞이 보이질 않으니 씻으러 갈 수는 없더라도 닦아내기는 해야 할 것 같아서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손목이 잡혀 그대로 문의 몸 위로 안겨버리고 말았다. 

잠버릇이라고 보기에는 날 벗어나지 못하게 잡는 것이 수준급이다. 

“왜? 배고파? 양젖을 줄까?”

“…….”

빠져나가려고 발버둥을 치자 잠이 깨지 못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대답이 없자 내 등을 살살 문지르던 손이 머리카락을 넘기고 뒤통수를 잡아와 입을 맞췄다. 

“읏…….”

입을 맞추면서 손은 나의 밑을 훑고 있었다. 따끔거리는 곳을 지나 엉뚱한 곳에 닿는 것 같아 놀라서 손을 뻗자 웃음소리가 들린다. 그 웃음소리가 놀리는 것 같아 벗어나려고 했지만, 멋대로 밑 부분을 잡아 훑는 바람에 바들바들 떠는 것이 전부였다. 결국 참지 못하고 놓아달라고 말하려고 문의 머리카락을 잡았다.

“문…….”

“미치겠네…….”

“뭐……?”

새삼 더 미칠 것이 뭐가 있는가 싶었지만, 좀 놓아달라고 말하려는 것이 입 밖으로 제대로 나오지 않아 답답해지려는 데 나를 잡아 돌려 눕힌 문이 내 위에 올라타 있음을 짐작했다. 보이진 않지만 이 상황이 부담스러워서 그를 밀어내려고 했지만, 잡힌 팔목과 눌린 허벅지로는 꿈틀거리는 것도 버거웠다. 다시 한 번 그를 받아내는 것은 몸이 버티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사양하고 싶었다. 

“문. 그만…….”

“자각이 없는 거야?”

그만 하라는 말에 답이 엉뚱해서 무슨 헛소리인가 싶어 가만히 있었더니, 뺨을 훑던 손이 이마를 훑더니 턱을 들어 올리고 입을 맞추고 떨어졌다. 이대로 물러나는 가 싶었더니 귓가로 다가와 목덜미에 입술을 묻더니 그 상태로 중얼 거린다. 

“수컷들은 대체로 그런 얼굴로 이름을 불러주면 불이 붙거든.”

“뭐? 잠깐! 문, 문! 진정, 진정해라!”

“발버둥 치지 마. 흥분되니까.”

있는 것이 힘 밖에 없는 것인지 억누르는 것을 벗어날 수 없었다. 두 다리가 다시 벌려지고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예민해진 곳을 건드렸다. 붓기가 가라앉지 않아 쓰린 부근에 다시 한 번 충격이 가해지자 다시 한 번 범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게 만들었다. 

“우읏…….”

“듣기 좋은데?”

소리를 내고 싶지 않아도 나도 모르게 기어 나오는 바람에 문이 저런 식으로 언급할 때 마다 수치스러워서 입술을 깨물게 했다. 언제 그런 나를 본 것인지 밑으로 쉴 세 없이 파고들면서도 입술 부근을 쓸어주며 말했다.

“깨물면 안 돼. 입 벌려봐. 그래. 그렇게 혀 내밀어. 응, 그렇게.”

내밀어진 내 혀를 감싸 입에 담은 문은 그대로 입맞춤을 하여 더는 내가 입술을 깨물지 못하게 만들었다. 입 안을 가득 채우는 타액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못하고 흘러내리고 있었지만, 입을 뗄 수는 없었다. 

질퍽거리는 소리가 밑에서부터 요란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더 이상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깊숙한 곳부터 뜨겁게 달아오르는 부근에서 간헐적으로 견디기 어려운 쾌락으로 문의 어깨를 붙잡고 매달리게끔 만들어 버렸다. 

*

또 당했다. 

몇 번이나 당했고 몇 번이나 정신을 잃었다. 전에는 상상할 수조차 없었던 일을 당하면서도 이상하게도 수치심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부끄러움까진 없진 않았다. 눈이 보이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발정 난 짐승마냥 들러붙던 놈이 아무리 옆을 더듬거려도 닿지 않았다. 볼일 다 봤으니 나가버렸나 싶어 괘씸했지만, 옆에 있었어도 불안했을 것 같다. 땀에 절여있는 몸을 더 이상 눕힐 수 없어 바닥을 짚고서라도 강제로 일어나려고 했다. 뭐라도 좋으니까 몸을 닦고 싶다. 

“엇.”

갑자기 몸이 떠올랐다. 익숙한 손길에 그가 누구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았다. 방에 없는 줄 알았는데 내가 기절한 사이 씻고 온 것인지 익숙한 향 말고도 좋은 향이 곁들어져 있었다. 

씻고 싶다고 말하지 않아도 문은 나를 안고 적당한 온도로 데워진 물 안으로 넣어 주었다. 따듯한 물이 닿으니 기분이 나아지는 듯 했다. 문은 내 팔을 잡아 부드러운 천으로 문질러 닦아 주었다. 씻는 것 정도는 혼자 할 수 있지만 내가 한다고 해도 말을 들을 놈이 아니기 때문에 내버려 뒀다. 

“다리 벌려봐.”

물론 예외는 있다.

“여긴 내가 직접 하겠다”

“그래?”

“그래.”

말을 어디로 들은 것인지 내 무릎을 잡고 힘을 주어 벌리려고 해서 나는 뒤로 물러나 무릎을 세워 잡았다.

“직접 한다니까!”

“부끄러워?”

“그래! 그러니까 혼자 하게 내버려 둬.”

“꽤 깊이 들어가서 빼내기 힘들 텐데. 그걸 혼자 하겠다는 거지?”

“…….”

웃음소리가 들린다.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 같아 외면했더니 장난스럽게 웃던 문이 내 손을 잡아와 위에 부드러운 천을 올려 주었다. 

“직접 해 봐.”

“…….”

보이지 않아도 알고 있다. 내가 닦는 걸 직접 보려는 듯한 불편한 시선이 느껴졌으니까. 나가 있으라고 해도 왜 라는 답밖에 나오지 않아 포기하고 차라리 내가 등을 돌렸다. 등 뒤에서 적나라한 시선이 느껴졌지만 애써 무시하고 배 안에 가득 찬 것 같은 것을 빼기 위해 천천히 무릎을 벌리고 손을 밑으로 내렸다. 처음엔 천으로 닦고 꾹꾹 누르면서 빼 냈지만, 아직도 안에 가득 담는 듯 불편했다. 얼마나 싸댔는지 미끈거리고 걸쭉한 것이 계속해서 나와 닦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러는 사이 등에 문이 달라붙었다. 

“떨어져라.”

“그거 다 안 빼면 배탈이 날거야.”

“안에다 그렇게 싸댄 게 누군……!”

차마 더는 입을 열 수 없어 입을 다물었더니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책임져 주겠다며 내 몸을 끌어안아 데려가 천천히 손을 내려 밑으로 넣었다. 손가락 하나가 무리 없이 들어가 안을 헤집자 몸은 당연하듯 움찔 거렸다. 

내벽을 긁듯 빼내자 묵직하게 자리 잡고 있던 것들이 서서히 밖으로 빠져나갔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몸이 멋대로 달아오르기 시작해서 미칠 것 같았다. 고개를 숙이고 신음을 참는 것만으로도 벅찰 쯤 안쪽을 차지하고 있던 손가락이 빠져나갔다. 동시에 내 몸도 늘어져 잡아주지 않으면 앉아 있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매달려.”

늘어진 팔을 멋대로 어깨에 올리더니 그대로 일어난다. 반동 탓으로 돌리고 문을 끌어안자 아이를 안 듯 가볍게 걸어가는 문이 천을 가져와 내 몸을 감싸주었다. 포근하게 감싸지는 천 때문인지 졸음이 몰려오는 것 같다. 내 등을 쓸어주는 손길이 감싼 천 보다 부드러워 뜻하지 않게 잠이 들고 말았다. 

외전. 1 그 후 ③ 完  

음식을 넘기지 못하면 양젖을 가져와 먹이거나 잠이 들지 못하면 싫다고 말하지 못할 때 까지 껴안아 달래듯 잠을 재워버리는 것이 일상이 되어 버렸다. 다리가 불편하고 눈이 불편해 마음대로 움직일 수는 없어 답답한 것만 빼면 견딜 만 했다. 

그 날 뒤 문은 강제로 나를 범하진 않았다. 대신, 허락 할 때까지 집요하게 건들거나 졸라댔다. 받아내는 것도 한 두 번이지. 이대로 가다간 정말 형체도 없이 먹혀버릴 것 같아서 단호하게 거절했다. 

“싫어?”

“적당히 좀 해. 이대론 몸이 버티질 못한다고.”

“…….”

대답이 없다. 어제만 해도 기절한 사이 몇 번이나 박아댔는지 일어나서 통증을 확인하고 다시 정신을 놓았을 정도였으니까. 발정도 이만하면 짐승을 넘어 괴물 수준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보채 허락하게 만들고 안아버리니 다 받아내야 하는 내 쪽 사정이 좋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문이 떨어졌다. 때리고 욕해도 떨어지지 않아 이번에도 틀렸다 생각했는데 별 말 없이 놓아준 것도 모자라 그대로 밖으로 나가버린 듯싶다. 

내가 잘못한 것도 없으면서도 묘한 기분이 들었다. 몸이 버티지 못한 것도 사실이지만 차라리 원하는 대로 내버려 둬 버릴 걸 그랬다. 그날 뒤 문은 나를 안지 않았다. 식사를 가져오거나 몸을 닦아주는 일은 거르지 않았지만, 평소처럼 제멋대로 허락을 받아내 범하는 일은 없었다. 

처음엔 몸이 고단하지 않으니 좋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니 이것도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불안이 지속되자 끈기도 없는 놈이라며 화가 났다가 늦게 오는 날이면 로던프 쪽으로부터 위협을 받은 것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오늘도 문은 평소와는 다르게 늦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고 눈을 가리고 있던 붕대를 풀었다. 어렵게 왼쪽 눈을 떠 보자 정확치 않지만 뭔가가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이정도면 충분 할 듯싶어 거리감을 그려가며 손을 짚고 밖으로 나갔다. 이곳이 어디인지 모르니 방에 나와서부터는 경계를 했다. 인기척이 들리는 것 같아 기척을 숨기고 벽에 몸을 기댔다. 

“아무래도 왕께선 가만두지 않을 것 같지?”

“밀입국을 시도한 놈들을 살려 보낼 수는 없으니까.”

“운도 나쁘지. 하필 지금 시기에 걸리다니.”

‘왕? 밀입국? 걸렸다고?’

말소리가 멀어지면서 천천히 이곳을 빠져나가면서 걸음을 서둘렀다. 타국에 제대로 된 절차도 없이 들어왔으면서 괜찮을 리 없었다. 더구나 나의 신분은 대역죄인. 문은 타국의 용병왕이다. 나는 죽는 다해도 상관이 없지만, 문까지 휩쓸렸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문을 찾아야만 했다. 하지만 이곳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넓었고 사람도 많았다. 이들의 눈을 피하는 건 어렵지 않았지만, 그렇다 보니 조금만 방심해도 방향을 잃어버릴 것만 같았다. 왼쪽 눈만으로는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아 더욱 답답하게 만들었다. 일단은 문을 찾는 것이 우선이다. 이곳 어딘가에 분명히 있을 것이다. 

‘밖인가?’

익숙한 기척이 먼 곳에서 느껴졌다. 나는 천천히 그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뭔가가 굉장히 많았다. 덩어리로 보여 잘 보이진 않았지만 말발굽 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면 대충 기사단 정도의 무리들이 한꺼번에 안으로 들어오는 게 얼핏 보였다.

나는 들짐승처럼 몸을 숨기고 모든 기척을 지웠다. 눈앞으로 지나가는 것들 중 누구도 내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런 내 앞으로 문과 비슷한 기척을 가진 자가 스쳐가는 것을 보았다. 나를 압도하는 선명한 존재감에 억눌려버릴 정도였다. 숨이 막힐 것 같은 살기까지 느껴지는 듯 했다. 저건 문이 아니라고 단정 짓고 천천히 뒷걸음질 치려는 데 잘 가던 놈의 말발굽 소리가 멈췄다. 내 숨도 멎어버린 듯 했다. 무슨 일이냐며 달라붙는 놈들과 주위를 둘러보는 듯한 그. 얼마가지 않아 말발굽소리가 다시 들려왔지만 나는 한동안 이곳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대체 어떤 곳에 들어와 있는 것인지 짐작이 가진 않았지만, 구조는 성과 비슷해서 나갈 수 있는 방법은 알게 되었다. 문제는 문이었다. 옅게나마 문의 기척이 느껴지는 것 같았는데 아무래도 착각이었나 싶다. 대체 이 바보는 어디에서 헤매고 있는 것인지 마음이 조급했다. 

대체 어디에……!

등 뒤로 인기척이 느껴진다. 목을 겨누는 것이 검임을 알았고 등 뒤에 불결한 살기를 억누른 자가 버티고 있음을 알았다. 

검을 세우며 위협하던 놈의 팔을 잡아 그대로 팔꿈치로 놈의 목울대를 쳐냈다. 소리가 들리기 전에 그의 목을 짓눌렀고 검을 쥔 손목을 꺾어 검을 빼앗아 놈의 목에 겨냥했다. 이런 반격을 당할 줄은 몰랐는지 일순간 당황했지만 잘 훈련된 놈은 금방 평정심을 되찾고 내가 쥔 검을 쳐내고 뒤로 빠져나왔다. 

이 이상 소란을 피울 생각은 없던 나와 마찬가지 인 듯 그는 따로 사람을 부르는 짓은 하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놈도 그다지 떳떳한 신분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나 나를 죽이는 것이 애초에 목적이었다는 듯 품에서 다른 검을 꺼내는 듯 했다. 

여기서 발각될 수 없었기에 장소를 옮기려 했다. 그러자 놈이 멋대로 달려들어 검을 치켜들자 그것을 막는 대신 몸을 틀어 피해 그대로 달렸다. 절름발로는 인기척이 없는 곳으로 향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따라 붙은 놈이 내 뒷덜미를 잡아 그대로 벽에 부딪치게 만들었다. 상체에 뼈가 울리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지만 곧이어 나를 베려는 듯한 검을 막았다. 

검을 쓸 수 없게 만들어진 몸이 더는 버틸 수 없다는 걸 알았지만, 여기서 죽을 수 없었다. 그 순간, 놈이 입을 열었다.

“한때는 드론이던 당신을 존경했고 경외심까지 가졌었다. 그러나 한스덴 일가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나라에 등을 돌린 것도 모자라 앙심을 품고 라이나프와 손을 잡으려 하다니. 그대에게 가졌던 나의 경외심에 배신감을 통감한다.”

“…….”

“반역자. 아직도 그 추한 목숨을 연명할 이유가 있는가?”

“…….”

“로던프는 그대가 살아 있는 걸 원치 않는다. 죽어라.”

내가 쥐고 있던 검이 날아가 버리고 그대로 내 목을 베어버리려는 검이 뻗어왔다. 이대로 끝이라는 생각과 동시에 바로 옆으로 나를 베려던 자가 벽에 짓이기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눈앞으로 뭔가가 많이 몰려들었고 좀 전에 느꼈던 뚜렷한 살기까지 눈앞에 있음을 알았다. 

“버러지 같은 놈이. 감히.”

더 놀라야 하는 것은 문이 절대 아닐 것이라 장담했던 그가 낯익은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것이다. 벽을 향해 얼굴을 밟아 박으면서 옆에 있던 내게 피가 튀었다. 그렇게 몇 번을 형체도 없이 밟아대던 문이 내게 다가왔다. 나는 일순간 섬뜩함을 느끼고 말았다. 

“도망가려고 했던 거야?”

“…….”

“말해봐. 라마. 내게서 도망가려고 했어?”

나를 벽에 가둬두고 머리털이 바짝 설 정도로 강렬한 살기를 내뿜으며 묻고 있었다. 보이지 않았지만 화를 내고 있는 것은 알 것 같다. 하지만 나도 억울했다. 

“그게 아니다.”

“…….”

“널 찾으려고 했어.”

“찾아? 왜?”

“이곳의 왕이 밀입국자를 잡아 처벌한다고 했으니까.”

“그래서?”

“여기 있다간 무사할 수 없어.”

“나를 걱정해서 찾으러 다녔다고?”

“그래.”

말을 돌릴 필요 없었다. 그럴 여유도 없었다. 이만큼 소란을 피웠으니 사람이 몰려드는 건 순식간이기 때문에 빨리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러나 문은 진득했던 살기를 모두 없애고 내 얼굴을 잡았다.

“예뻐 죽겠네.”

“뭐?”

짧게 입을 맞추고 나를 잡아 안았다. 뭐라 말하기도 전에 문의 주위로 다수가 모여들었다. 

“전하. 나머지 밀입국자도 모두 잡아들었습니다. 전원 로던프인입니다.”

“잡아들인 구더기는 머리만 쳐서 로던프에 공물로 보내라. 쿠웨드와 트란슈에 경제봉쇄 요청 뒤 빠른 시일 내 로던프 공습을 준비한다.”

“예.”

저들이 말을 믿을 수 없어 문의 옷을 잡아 내 쪽을 보게 했다. 

“저것이 다 무슨 말이냐.”

“구더기가 기어오르니까 밟아버리려고.”

“그런 뜻이 아니잖아. 제대로 설명해. 저들이 왜…….”

문을 전하라고 부르는 것일까.

설마 용병들을 꾸려 나라를 사들인 다음 왕좌에 앉았다는 것일까? 하지만 그러기엔 기반이 너무 튼튼하다. 또한 나를 죽이려 했던 자가 라이나프와 내가 손을 잡는다고 했었다. 로던프에 버금가는 강대국이자 중립국인 라이나프와 나는 전혀 연관성이 없었음에도 말이다.

“그러니까 왕이 된다고 했잖아.”

문이 나를 안은 채로 걸음을 옮겼다. 나는 더 이상 물어볼 수 없었다. 

얼마 가지 않아 로던프의 왕의 사망과 함께 멸망되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라이나프의 왕을 암살하려 했다는 명분으로 공습하는 그들을 맞서기에는 휴전에 들어간 것이 얼마 되지 않았던 로던프는 버티는 것이 고작이었다. 더구나 기회를 엿보고 있던 트란슈가 공습에 가담하면서 라이나프는 완벽한 승리를 거머쥐게 된다. 처음부터 예정된 절차였다는 듯 말이다.

이로써 모든 전쟁이 끝났다. 

*

“이걸 먹으면 버틸 수 있다니까?”

“…….”

도중에 밖으로 나가버리고 늦게 들어온 이유가 모두 이것을 구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뿌리의 생김새가 손으로 더듬어 보니 꼭 사람 행색을 하고 있었다. 고작 이걸 구하기 위해 싸돌아 다녔다는 말에 그걸 들고 문의 이마를 내리쳤다. 

“네놈의 머릿속에는 그 생각 밖에 없는 것이냐?!”

“…….”

대답이 없다. 뭔가 잘못 말했나 싶어 뒤늦게야 그게 아니라고 말하려는 순간, 내가 쥐고 있던 이상한 뿌리를 빼앗아 가더니 입에 담고 씹는 것 같았다. 뭔가 불길해 빠져나가려고 하자 그대로 두 팔목이 붙잡히고 입이 맞춰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입 안으로 쓴 무언가가 침과 섞여 들어오는 데 멋대로 목구멍 안까지 밀어 넣는 바람에 꿀꺽 삼켜버리고 말았다. 입을 뗀 문이 유혹하듯 나긋하게 말했다.

“날 원해봐. 그럼 라마도 나로 가득 찰 테니까.”

“…….”

“원하지 않으면 안 해.”

선택권을 줘도 결국 거부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얄밉게 굴었다. 아직도 형체가 잘 보이진 않지만, 어쩐지 문의 얼굴이 조금씩 선명해지는 듯하다. 인상을 쓰고 바라보자 어느 순간 나는 붉은 눈동자와 마주 하고 있었다. 나는 손을 뻗어 문의 목을 끌어안았다. 아이처럼 웃는 소리가 귓가에서 맴돌았다. 

  외전. 2 백야 ①  

“라…라마……. 라마…….”

점점 사라지는 라마를 바라보는 가나는 심장이 쥐어뜯기는 고통이 느껴졌다. 이윽고 터져 나오듯 울부짖으며 가나는 라마에게 뛰어갔다. 

본능적으로 저 둘에게 휩쓸리면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한스덴과 벤이 겨우 가나를 잡았지만, 가나는 점점 사라지려는 라마를 향해 손을 뻗었다. 

닿지 않았다. 

등을 보이던 그날처럼 자신의 손을 여전히 라마의 등에 닿지 못했다. 이제야 겨우 닿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지금에 와서야 함께 있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라마!!! 라마!!!”

라마의 이름 밖에 부르지 못했던 그날로 돌아간 것처럼 가나는 끊임없이 라마를 불렀다. 

이 광경을 믿지 못하는 건 슈레이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는 보다 충격을 먹었을 나비를 잡아 끌어안았다. 그가 잡지 않았다면 나비 역시 불나방처럼 저 곳으로 뛰어들었을 것이었다.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나비를 쓸어주면서 그는 자신의 어리석음에 탄식했다.  

이런 것이었다면 어린 그를 제독으로 전장에 세우지 않았을 것이다. 

이럴 것이었다면 유곽에서 데려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토록 허무하게 보내야 했을 것이었다면 에덴에서 그를 만나지 않았어야 했다. 

모두 자신의 탓인 것만 같아 슈레이는 나비를 끌어안고 눈을 감아 버렸다. 그 역시 맺혀 흐르는 눈물을 달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린문호의 절규가 듣는 이들의 가슴을 찢어 놓는 듯 했다. 

란은 문과 함께 사라져가는 라마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그런 란을 붙잡은 것은 전 문호였다. 저런 것에 휩쓸린다면 살아 있는 인간에겐 치명적인 상처를 입힐 수 있었다.

그 증거로 그들의 주위는 파헤쳐져 균열지고 있었다.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곁으로 다가가서는 안 된다는 걸 말해야 했지만, 문호 역시 란을 붙잡아 두는 것 말고는 입을 열 수 없었다. 

“안 돼. 안 돼…….”

“이미 늦었어. 더 이상 접근하는 건 위험해!”

“살릴 거야. 살릴 수 있어!!! 이거 놔!”

소리를 지르는 란을 바라보던 문호는 그대로 주먹을 들어 가차 없이 란의 안면을 향해 내리쳤다. 그의 돌아간 얼굴을 바라본 문호는 그대로 란을 놓고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주군을 더는 막지 않습니다. 이것으로 메르헨은 주인을 잃고 나라는 황폐해질 것이며 전쟁이 끊이지 않을 테지요. 메르헨의 국민들을 외면하고 고통 받게 하실 생각이시라면 가십시오. 하지만 최후에 참견하는 것은 그가 가진 들개로써의 마지막 긍지를 더럽히는 짓임을. 주군께선 아셔야 합니다.”

란은 그대로 움직이질 못했다. 

그는 엎드려 있는 문호를 바라보았다. 가슴을 짓이기는 통증이 숨을 막히게 했지만, 입술을 깨물던 란은 라마를 향해 등을 돌렸다. 그러나 한 발자국 떼는 것도 힘들었다. 

그의 가진 미련이 당장이라도 등을 돌려 라마를 끌어안고자 했기 때문이다. 

뒤늦게 군중을 헤집고 나온 것은 리노였다. 그는 이마를 짚으며 달려왔고 참담한 현실에 탄성을 내질렀다. 

융화되어야 할 기들이 섞이지 못해 이리저리 헤집고 있었다. 애초부터 문의 기가 라마의 기를 압도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 사달이 벌어진 것이지만, 이것 누구의 탓이 될 수 없었다. 

이만큼이나 두 기들이 날뛰었으니 싫어도 제대로 섞이고 있을 터. 

사납게 물어뜯고 있는 검은 기를 떼어놓고 도중에 죽지 않는 다는 전제로 진정만 시킨다면 살릴 수 있는 쪽은 문이었다. 

그것을 알고 있기에 더욱 다급히 그 둘을 떼어놔야 했지만, 리노는 혼란에 방향을 잃은 듯 머뭇거렸다. 의술사로서 살릴 수 있는 생명이 있다면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제 목줄을 쥐고 있는 라마가 없는 이 세상에서 문이 살아갈 수 있을까.

혼란에 빠져 방황하는 사이 더욱 흉포해진 검은 기들이 신체를 갉아먹고 있었다. 그것이 불꽃과도 같아 마치 신체가 불에 타 재가 되어 흩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이대로 둘 모두를 잃기 전에 가망성이 있는 한 놈이라도 살려야 했다. 후에 원망의 말을 듣는다고 해도 의술사로서 더는 지켜볼 수 없었다. 리노는 자신을 도와줄 만한 사람을 급히 찾았다. 그때 먼 곳에서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은아였다. 리노는 그대로  달려갔다. 은아는 불안해하고는 있지만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르는 듯 했다. 잔인하지만 모르는 것이 나았기 때문에 설명을 생략하고 급히 은아를 붙잡아 당겼다.

“너. 나 좀 도와줘야겠다.”

“?”

사람이 다가가 떼어내기는 어려우니, 몸통에 사슬을 걸어 떼어낸 뒤 당장 침으로 시술에 들어가는 것이 리노의 계획이었다. 도중에 자신의 목숨도 보장할 수 없는 상황이 올 테지만 그것을 염려했다면 살릴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리노는 자신이 가진 의술을 모두 되짚어 보아도 라마를 살릴 수 있는 방도는 떠오르지 않았다. 그 어떠한 무모한 방법이라도 시도해 볼만한 것이 없다는 것이 그를 참담하게 만들었다. 

그가 막 달려가려는 차, 귀에 거슬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봐 의술사.”

리노는 자신을 부르는 곳에 시선을 올렸다. 이 참극의 원인 엔도였다. 그는 피를 뒤집어 쓴 모습은 육안으로 보기에도 얼마 견디지 못할 정도였다. 당장 움직이는 것도 버거운 그가 몇 차례 피를 토해냈지만, 살리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그대로 죽는 것이 그에겐 더 나을 것이다. 

“그 입 닥쳐라.”

“매몰차네. 의술사가 그러면 안 되지~”

살심을 억누르지 못한 리노가 침통을 들고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이대로 저 놈의 혈을 다 막아 피를 말라버리게 만들어 처참하게 죽이고 싶었다. 의술사의 본분을 잃고 살인귀마냥 달아오르는 살욕을 겨우 잠재울 수 있었던 것은 당장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리노가 등을 돌리자 엔도는 다시 입을 열었다. 

장난스러운 목소리였지만, 가늘게 갈라지는 목소리는 그의 남은 명줄을 말해주는 듯 했다.

“손가락 하나 까딱일 수 없네.  일어설 수 있게 해줘봐~ 넌 할 수 있을 거 아니야.”

“그냥 뒤져.”

“둘 다 데려오고 싶잖아?”

“…….”

“안돌아가는 머리 굴리지 말고…….”

“대체 무슨 생각……. 네놈 설마…!”

“빨리……. 시간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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