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권-프롤로그 (1/25)

프롤로그

고학번이라면 봄 학기 개강에 나름의 낭만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이제 제법 화장이 손에 익은, 더 이상은 새내기가 아니게 된 ‘헌내기’들과 두꺼운 전공서를 또다시 구매해야 하는 수고스러움, 자연스레 따라붙는 권태로움, 어디에든, 어떻게든 소속되어 있는 신분 같은 것 말이다. 

              푸르른 생명력과 먼지 냄새를 동반하는 묘한 분위기도 마찬가지고.

“한아. 잠깐 얘기 좀 해.”

하지만 내게 주어진 것은 낭만 따위가 아닌 지리멸렬한 현실이었다. 철제 사물함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익숙하고도 낯선 저 여성의 얼굴을 보자니 한숨부터 튀어나왔다. 올 게 왔구나.

“할 말 없는데.”

나는 오른손을 휘휘 내저으며 비키라고 손짓했다. 그는 가벼운 한숨과 함께 한 발자국 옆으로 물러났다. 아직 눈치가 있는 걸 보면 상당히 이성적이었다, 다행이게도.

“그런 식으로 통보해 버리는 게 어딨어?”

“누나, 나 수업.”

“그래, 알아. 3층 강의실. 15분 남았잖아.”

집념 있는 여자다.

“지하에서 교재 사 가야 돼.”

“그 교수님 책 안 사도 돼. 족보랑 프린트만 보고 들어가면 A+이야.”

직진하는 게 자존심이라고 믿는 여자.

멋있고, 매력적이고, 이기적이고, 가끔은 조금 피곤하다.

그가 고개를 들어 말문이 막힌 나와 시선을 맞추었다.

“한아, 네가 나 별로, 어쩌면 하나도 안 좋아했던 거 알아.”

“…….”

“그래도 대체 어떤 미친놈이 헤어지자는 말을 코인 노래방에서 해? 그것도 노래 부르다 말고.”

“누나, 소문 못 들었어?”

“…….”

“나 원래 내 멋대로야. 하하 호호 웃다가 다음날 찬바람 쌩.”

“…….”

“내 별명도 알잖아.”

“그래, 알지. 화공과 걸레. 아무리 그래도…….”

“누나 친구랑도 똑같이 헤어졌어. 이렇게.”

그의 표정이 구겨졌다. 그럴 만했다. 그는 나의 전전전전 여자 친구, 그러니까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당신의 옛 절친에 대해서는 내가 모르고 있는 줄 알았을 테니까.

“누나도 뭐 나를 그렇게 죽을 만큼 사랑했던 건 아니란 거 안다는 뜻이야.”

“서한.”

“우리 처음 사귈 때 누나도 그렇게 말했잖아. 내가 누나를 좋아하든 안 좋아하든 그건 별로 안 중요하다고. 누나한텐 누나 마음만 중요하다고.”

“…….”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그 말이 참 좋더라.”

여자는 팔짱을 끼고서 나를 노려보았다. 대충 계산을 해 보는 눈빛이었다. 나랑 지금 헤어지면 본인에게 어떤 영향이 있을지. 그것이 득일지, 실일지.

학교 휴게실에서 머리끄덩이를 붙잡고 싸웠다던 그 절친, 내 전전전전 여자 친구에게 엿을 먹이기 위한 의도라면 득일 테다. 어차피 그는 이번 학기가 막 학기고, 솜털 보송한 애기들 사이에서 소문이 나든 말든 관심 없는 게 그의 캐릭터이므로.

“헤어지자는 거 진심이야? 너 지금 나랑 헤어지면 우리 과 신기록 달성이야. CC만 여섯 번.”

“상관없는데. 안 헤어진다고 여섯 번이 다섯 번 되는 것도 아니잖아.”

“그건 그렇네.”

그가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곤 다시 입을 열어 내게 물었다.

“민희랑도 이렇게 헤어졌다고?”

맞다, 이름이 민희였지. 나는 아까부터 계속 애매하게 기억 속을 맴돌고 있던 이름을 찾아내 기뻤다.

“음, 지금까지의 과정은 비슷했던 것 같은데.”

“……앞으로는 내가 하는 거에 달렸다?”

제 옛 절친과는 다르게 머리 굴러가는 속도가 장난이 아니었다. 나는 일부러 너그럽지만 단호한 목소리를 냈다.

“내가 질리게 굴어서 찼다고 해. 누나 친구처럼 사람들 다 모인 술자리에서 울고불고하면 나 진짜 스트레스받을 것 같아.”

그런 추태는 두 번 겪은 걸로도 진절머리가 난다.

“한아, 내가 그러겠니?”

그 도도한 음성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여자는 내가 학교에서 사귀었던 여자 중 가장 똑 부러지고 명확하다.

“여기 지나다니는 사람이 너무 많은데, 계속 얘기할 거야?”

내 말에 여자는 잠시 눈을 가늘게 뜨며 고민했다. 그러다가 결심이 선 듯 백색 조명에 반사돼 반짝거리는 입술을 열어 답했다.

“좋아, 헤어지자.”

YES! 역시 이번엔 상대를 잘 골랐다.

“대신.”

대신?

“내 장단 좀 맞춰.”

요구하는 여자의 모습이 너무 당당해서 말문이 막혔다.

“네가 질리게 굴어서 찼다고 하라며. 질리게 구는 연기 좀 하라구.”

……상대를 잘 고른 거, 맞겠지.

              ***

뭐 이렇든 저렇든 간에 내 여섯 번째 교내 연애, 비공개까지 합치면 열 번째 교내 연애가 끝이 났다. 나는 홀가분한 기분으로 강의실 가장 끝자리에 앉아 옆자리로 가방을 툭 던졌다. 주머니를 뒤져 주말 내내 꺼 두었던 핸드폰을 켜자 한참 동안 부재중 전화와 메시지를 알리는 진동이 이어졌다. 

              나의 얄팍한 인내심을 시험할 만큼 길게.

마침내 끝난 어마어마한 숫자의 알림을 손가락질 두 번으로 옆으로 밀어 버리고 메시지 창을 켰다. 조심스럽게 수신인을 입력하자 심장이 두근거렸다.

아, 이번엔 뭐라고 보내지.

[선배.]

이제 겨우 두 번째 글자를 입력하는데 주변을 채우던 웅성거림이 일순간 잦아들었다. 나는 번쩍 고개를 들어 그 원인을 찾아냈다. 교수의 얼굴이 저 멀리 보였다.

“반갑습니다. 여러분.”

교수는 차분하게 마커를 집어 들어 자신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칠판 위에 적었다.

“출석부터 부를까요?”

나는 집중력 결핍이 있는 사람처럼 달달거리던 손을 내려놓고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메시지를 뭐라고 보낼지는 조금 더 고민을 해 봐야겠다. 수업이 끝난 후 보내도 늦지 않겠지.

나는 턱을 괴고 앉아 나의 이름이 불리기를 기다렸다.

“서한.”

마침내 내 차례가 왔을 때, 나는 손을 들어 올리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 순간, 가장 뒷자리의 내게로 고개를 돌리는 수십 개의 시선을 마주해야 했다. 그 압박감에 기가 눌려 턱을 괴고 있던 팔을 빼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나의 앞앞 자리에 앉아 있던 여자 둘의 얼굴이 노골적으로 구겨졌다. 나 또한 그들의 얼굴을 안다. 몇 번째인지도 기억나지 않던 여자 친구들의 지인이었나. ……아님 동기들이었나.

‘아, 재수 털렸네.’

저들끼리 그렇게 수군거리는 소리를 분명히 들었으나 나는 그저 무력했다. 순간 능글맞은 척 그들에게 손 인사라도 할까 싶었으나, 학교 내 나의 평판을 모르는 바도 아니었기에 벌써부터 귓가가 간지러운 듯해서 그만두었다.

전공 수업도 아닌데 벌써부터 이래서 이번 학기는 또 어떻게 다니나.

“강의 계획서에 기재되어 있듯이, 중간고사 대신 팀 발표로 평가를 대체합니다.”

교수가 수업에 대한 안내 사항을 이야기하기 시작하자 그제서야 나를 향했던 수많은 적의 어린 시선이 하나둘씩 거두어졌다. 저번 학기에는 필수 전공 수업에서 나를 보자마자 자리를 박차고 나간 학우도 있었으니, 이 정도면 무사히 넘어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리엔테이션 주간에 수업을 하는 교수는 강의 평가에 테러를 받는다는 것을 아는지 수업은 30분도 되지 않아 끝났다. 다음 수업까지는 한 시간이나 남아 있었다. 

              우르르 빠져나가는 학생들과 이따금 제게 눈을 흘기는 어렴풋이 아는 얼굴들을 모두 망연히 바라보다 강의실이 텅 비고 나서야 잊고 있었던 문자 메시지 생각이 났다.

[선배.]

입력창에는 두 한 글자가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나는 머리를 굴렸다.

[선배. 또 헤어졌어요.]

이건 좀. 마치 기다린 사람 같잖아.

안 그런 척해야 되는데.

[선배, 저 차였어요. 어떡해요? ㅜㅜ]

뭘 어떡해. 네가 한두 번 차여 봐?

나는 풀썩 책상 위로 쓰러지듯 엎드렸다. 한쪽 뺨을 차가운 책상 위에 대고 핸드폰 모서리만 만지작거렸다.

“어렵다.”

오늘은 수요일. 선배가 호프집 마감 타임 알바를 하는 날이다. 치킨도 팔고 골뱅이도 팔고 마른안주도 종류별로 팔고, 생맥, 병맥, 이것저것 다 파는 그런 호프집. 막 음주에 눈을 뜨는 새내기들이 득시글거리는.

3월엔 학교 앞 술집이 문전성시를 이루었지만 그만큼 진상 고객도 많다. 아직 자신의 주사가 뭔지 잘 모르는 새내기들도 그렇지만 저들끼리 술 처먹이며 낄낄대는 철없는 선배들도 둘째간다면 서럽다는 듯이 한몫 거하게 거든다. 

              옆에서 보는 것도 꼴사나운데 그는 늘 묵묵하게 그 진상들의 흔적을 치우곤 한다. 퇴근을 향해 느리게 달려가는 시곗바늘은 본 척도 하지 않으며.

이런 날 그의 퇴근 후 휴식 시간을 빼앗는 게 조금 잔인하게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원래 이기적이고 나밖에 모르는 놈인걸.

[선배, 저 술 사 주세요.]

나의 이기심은 메신저 창에 기어이 오늘 날짜가 적힌 선을 그으며 새로운 메시지를 띄워 보냈다. 답장은 금방 돌아왔다.

[개강 날부터 벌써?]

진동이 울리고 나는 체온으로 따뜻하게 달궈진 책상으로부터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이번엔 차였어요. 완전 비참하게.]

‘네가 질리게 굴어서 찼다고 하라며. 질리게 구는 연기 좀 하라구.’

전 여자 친구의 말을 떠올리며 나는 그 장단에 맞춰 주기로 결심했다.

[그러니까 여자 친구한테 잘해 줬어야지, 한아.]

절로 음성 지원이 되는 다정다감한 목소리를 떠올리며 무표정하게 답문을 입력했다.

[다 제 잘못이죠, 뭐. ㅜㅜ]

[형 오늘 아르바이트 새벽 1시에 끝나는데 그때도 괜찮니?]

얼굴에 번지는 웃음을 흐릿하게 만드느라 애를 썼다. 나도 모르게 손가락이 귀여운 캐릭터가 신나서 방방 뛰는 이모티콘을 향했으나 간신히 이성을 붙잡고 보내지 않기로 결심했다.

[‘브릿지’죠? 그쪽으로 갈게요.]

[그래, 너무 속상해하지 말고. 이따 보자.]

나는 여운을 만끽하듯 핸드폰 화면을 꺼버렸다. 창밖으로는 생기 넘치는 얼굴의 신입생들이 뛰어다니는 것이 보였다. 곧 꽃이 필 나무들을 보며 생각한다.

이것이 나의 낭만이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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