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 1장, 궤도(1) (2/25)

제 1장, 궤도

(1)

기념비적인 개강 첫날부터 이렇게 비좁은 술집에 가득가득 들어차 좋다고 술을 처먹다니. 존재론적 관점에서의 회의가 든다.

12시 40분. 술집 마감이 20분 남았는데도 꾸역꾸역 술병을 비우고 있는 청춘들은 창문 밖에서 봐도 짜증이 났다. 그 와중에 창문에 흐릿하게 비치는 내 몰골이 꽤 괜찮아 보여서 마음이 조금은 누그러졌다.

“한이 왔니? 잠깐만.”

빨간 앞치마를 두른 선배가 양손 가득 맥주병을 들고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카운터와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으며 그를 향해 피식 웃었다.

“앞치마 뭐예요. 안 어울리게.”

“안 어울려?”

그가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 맹숭맹숭한 대답에 더욱 웃음이 났다.

“아니, 그냥. 선배 키에 그런 걸 하고 있으니까 좀 웃겨서요.”

“원래 입던 거에 어제 누가 토해서. 빨래 돌렸거든.”

이런 미친. 웃는 얼굴이 순간 경직되었다.

“누가요?”

“몰라. 처음 보는 손님이었어. 신입생이겠지.”

하여간. 이래서 이런 술집이 싫다. 그런 대형 사고를 친 사람은 보통 와서 사과를 하지도 않는다. 그럼 상한 알바생의 기분은 어디서 보상받으라고?

“저기요!”

어느 테이블에서 손을 흔들자 선배는 재빨리 그곳으로 달려갔다. 네, 맥주 두 병에 소주 한 병이요? 어쩌죠? 그런데 저희가 15분 뒤에 마감이라서요. 부드럽고 상냥한 말투로 상대의 주문을 반려시키는 솜씨가 좋았다.

나는 가만히 앉아 귀족 행세를 하기가 민망해 잠바를 벗어 두고 팔을 걷어붙였다. 손님이 떠나간 테이블로 다가가 빈 병들을 대충 한쪽으로 모아 두고 접시들을 겹쳐 들었다.

“형이 할 테니까 앉아 있지, 왜.”

“됐어요. 뭐 대단한 일 하는 것도 아니고.”

선배는 몇 번 나를 만류하다 마지막 테이블 계산을 해주러 카운터로 떠났다. 그렇게 큰 호프집이 아니어서 테이블이 많지 않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나는 서둘러 문 쪽으로 다가가 OPEN 표지판을 뒤집었다. 길 잃은 행인이 들어올 엄두도 내지 못하도록.

“안녕히 가세요.”

잔뜩 취한 채 뭉쳐 있는 한 무리에게 건성으로 인사를 건네고서야 드디어 이 공간에 둘만 남을 수 있게 되었다.

“안주 대충 남은 거 준다?”

나는 네, 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차피 이 집에서 파는 안주는 대체적으로 별맛이 없었다. 단골손님들조차 맛있는 안주를 기대하고 오는 곳은 아니었다. 알바생을 보러 왔으면 왔지.

선배는 묵묵히 술병과 빈 접시, 음식물과 쓰레기들을 치우고는 그 긴 팔로 쓱쓱 행주질도 했다.

제육볶음과 계란 프라이 두 개, 공깃밥과 땅콩 부스러기가 테이블 위에 놓였다. 팔다 남은 맥주에 선배가 소주를 부어 대충 휘젓는 것을 보며 나는 땅콩을 주워 먹었다.

“선배, 밥은 먹었어요?”

“이제 먹으려고.”

새벽 1시 20분. 나는 이제야 선배의 온전한 관심 대상이 되었다. 그마저도 제육볶음과 반쯤 나눠야 했지만.

그는 다짜고짜 용건을 꺼내 놓았다.

“이번엔 또 뭐가 문젠데?”

“뭐가요?”

“헤어졌다며, 또.”

그가 말을 꺼내기 전까지 나는 그 건에 대한 것은 잊고 있었기에 잠시 바보처럼 입을 벌려야 했다.

“몰라요. 저 싫대요.”

밥술을 뜨려다 말고 그가 푸스스 웃었다.

“네가 싫게 행동했겠지.”

“제가요?”

“응. 너 못되게 굴잖아. 여자애들한테.”

“누가 그래요?”

“뭘 누가 그래. 딱 보면 알지.”

그가 피로가 묻은 눈으로 건배를 권했다. 나는 맥주잔에 가득 차 있는 소맥을 원샷 했고 그는 반 정도 남긴 채로 잔을 내려놓았다.

“그래도 이번엔 좀 오래갈 줄 알았는데.”

“왜요.”

“그때 왜, 내가 일하는 카페에 왔었잖아. 너랑 잘 어울렸어. 성격도 쿨해 보이고.”

“쿨하긴 쿨했죠.”

오늘 아침 일을 떠올리며 건성으로 답하자 그가 입꼬리를 올려 웃어 보였다.

“그래, 그래서 이제 한이 네가 좀 제대로 된 연애를 하나 싶더라니까.”

“…….”

그다지 듣고 싶었던 말은 아니었던지라 웃음으로 넘겼다. 어느새 그의 밥공기가 절반이나 비어 있었다. 말할 때 우물거리지 않아서 먹는 줄도 몰랐는데. 말라비틀어진 밥알과 고추기름이 가득한 제육을 한입에 넣는 그를 보며 감탄했다. 저런 음식을 참 깔끔하게도 먹는다.

“너 되게 좋아하는 것 같던데.”

“누가요, 누나가?”

“응.”

“설마.”

코웃음을 치자 그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왜 웃냐는 듯이. 나는 해명하듯 손을 내저었다.

“그 누나 그런 사람 아니에요.”

“…….”

“쿨한 타입이에요, 선배 말마따나.”

“그거랑 상관없는 거야.”

“…….”

“그날 너를 엄청 예뻐하는 눈으로 보더라.”

“…….”

“사랑스러워하는 얼굴이었어. 몰랐니?”

웃기시네. 그런 사람이 장단 맞추라고 하겠어요? 나는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땅콩과 함께 꾹 삼켰다.

“선배가 잘못 봤겠죠.”

“왜 계속 부정해? 아니길 바라는 사람처럼.”

그 장난스러운 말투에 나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그런 사람이 저를 차 버릴 리가 없으니까요.”

그렇게 둘러대고 말았는데, 왠지 목구멍이 꽉 조여드는 것만 같았다. 자연스러운 호흡법을 까먹은 것처럼 내 숨소리가 내게 가장 크게 들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는 눈을 접어 웃고는 다 먹은 그릇을 주방으로 가져갔다. 나는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선배는…… 연애 안 해요?”

“나? 글쎄.”

본격적으로 술을 먹자는 듯 요리한 지 오래되어 촉촉함 없이 그저 버석한 먹태와 닭튀김을 들고 온 그가 어깨를 한 번 으쓱했다.

“인기가 없어서.”

그건 겸손을 넘어선 기만 같은 말이었다. 그는 카페 알바를 하다가 길거리 캐스팅을 당한 전적도 있다. 작은 키가 절대 아닌 내가 올려다봐야 할 정도로 키도 크고, 캐스팅 담당자가 한 달을 쫓아다니게 만들 정도로 잘생겼다.

“시간도 없고.”

아, 하지만 이건 진실이다. 그는 바쁘니까. 월화수는 호프집, 목금은 프랜차이즈 햄버거 가게, 주말은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옆에서 보기에 미련하기 짝이 없다.

“모델 일 하면 시간 넘쳐날 텐데 왜 안 하는데요.”

따지는 듯 들릴지도 모르겠으나 단순한 궁금증이었다. 그는 항상 많은 것을 숨기니까.

“알려지는 거 싫다니까. 피곤해, 그런 거.”

“웃겨. 누가 보면 드라마 주연 배우라도 하라는 줄 알겠어요.”

그가 소리를 내어 웃었다. 목구멍으로 술을 꿀떡꿀떡 넘기는데 그의 나른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냥 이게 좋아. 지금이 좋고.”

“…….”

“성실하게 일해서 등록금 내고, 방세 내고.”

아니, 그러니까 그놈의 등록금 방세 때문에 일주일 중에 단 하루도 못 쉬고 젊은 나이에 뼈 삭도록 일하고 있는 거 아니냐고.

“가끔 네가 여자 친구랑 헤어진 날이면 이렇게 술 사 주면서 위로도 해 주고.”

“…….”

위로. 그런 건 필요도 없는데 그럼 선배는 그 부질없는 친절을 어디다 날리고 있는 거지. 아까워 죽겠다.

“선배 그다지 좋은 상담가는 아니에요, 알아요?”

“그럼 너는 왜 맨날 헤어지기만 하면 나 찾아와.”

“…….”

“한아, 벌써 몇 번째니?”

그는 말끝마다 웃는 버릇이 있다. 소름이 돋도록 다정하게.

이 세상의 주인공은 나라고 진심으로 믿는 자기중심적인 내가 여자 친구를 사귀는 이유는 헤어지기 위해서다. 그리고 내가 여자 친구와 헤어지는 이유는 단 하나다.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밥 먹을 시간도 없는 선배를 찾아올 수 있으니까.

“연애도 못 하고 청춘 날리고 있는 선배보단 낫잖아요.”

내 삐뚜름한 말에도 그는 그저 여유롭게 웃어 보였다.

“제대로 된 연애를 해, 한아. 제대로 된 연애를.”

이별을 반복할 때마다 그가 내게 하는 말이다. 제대로 된 연애를 해야지, 한아. 매번 다른 방식으로 헤어졌다고 꾸며내어 이야기를 해도 항상 돌아오던 말. 제대로 된 연애.

제대로 된 연애. 뭔데, 그게. 그런 게 따로 있나.

“선배가 했던 그런 거 말이에요?”

“…….”

괜히 심통이 나서 던진 말에 그의 손이 멈추었다. 잠시 나를 바라보던 그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래.”

“…….”

그의 과거를 건너 건너 전해 들은 내게 이것을 쥐고 휘두를 권리가 없다는 것쯤은 나도 안다. 하지만 그는 그런 것은 괘념치 않는다는 듯이 잠깐의 멈칫거림 후에는 그저 미소를 지었다.

“내가 했었던, 그런 거 말이야.”

“…….”

나는 자연스러운 정적을 싫어하지 않는다. 오히려 분위기 파악 못 하고 지껄이는 머저리들을 혐오하는 편에 가깝다. 그런 놈들의 이마에 문신처럼 박아 주고 싶다.

‘입 다물고 있으면 중간은 간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이 나 혼자서만 껄끄러운 정적이 반갑지 않아서 몇 번이고 입술을 떼었다 붙이기를 반복했다. 그럼에도 마땅히 꺼내 놓을 말이 없어서 또 술만 들이켰다.

그와 나는 대강 이런 사이였다. 마주 앉아도 공통된 화제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전공도 다르고 취미도 다르고 하다못해 선호하는 교수 스타일이나 지금까지 들어온 교양 수업도 달랐다. 지지난 학기 그를 따라서 ‘프랑스 문학사’를 들었다가 학점부터 영혼까지 털렸었다.

나의 이별이라는 테마로 우리는 달이 바뀔 때 종종 술자리를 해 왔으나 그도 나도 여자에 대한 것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늘 ‘제대로 된 연애’를 못 하는 나는 늘어놓을 건덕지조차도 없었고.

“한…… 일곱 번쯤 헤어졌나, 네가?”

술자리를 대충 정리하고 밖으로 나와서 담배를 피우는 나를 보며, 그가 손가락으로 숫자를 헤아렸다. 나는 코웃음을 쳤다.

“오늘로 열 번째인데요.”

맙소사. 그런 눈이었다, 선배는.

“정말 남의 시선 같은 건 신경 안 쓰는구나.”

“남들이 아는 건 여섯 번이긴 해요. 지난번이랑 지지난번에 만났던 앤 아무도 모르고, 선배만 알아요.”

“아, 그…… 눈썹에 피어싱 있었던 친구.”

“아뇨. 그 누나는 그 전에, 공개 CC.”

그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못 말리겠다’와 ‘답 없다’ 그 사이 어디쯤의 미소와 함께.

이대로 집에 가기가 아쉬워 새 담배를 한 개비 더 꺼내 드는데 웃음기 서린 다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흠만 쌓아서 어떡할래, 한아.”

“…….”

나는 불을 붙이다 말고 파란색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있는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렇게 흠만 쌓아서 어떡할래…….

그 말이 귓가에 메아리쳤다. 나는 입술 대신 담배 필터를 세게 물었다 놓았다.

“그런 거 신경 쓰는 사람은 저 안 만나겠죠.”

“그래.”

그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건 또 너답다.”

그 뒤로 그가 몇 마디를 더 한 듯도 했으나 나의 머릿속은 이미 그의 음성으로 완전히 점령당해 있었다. 항해를 포기한 선장처럼 나는 그저 무력해졌다. 어쩌면 취했는지도 모른다. 술을 잘하는 편은 아니니까.

그렇게 흠만 쌓아서 어떡할래.

한아…….

나는 담배를 문 채로 웅얼거렸다.

“언젠간…….”

“응?”

“언젠간 올까요?”

“뭐가?”

“흠 같은 게 너무 신경 쓰여서, 지우고 싶어서, 후회하는 날.”

“…….”

“안 올 것 같아요, 그런 날은.”

불을 붙이고 보니 돗대였다. 나는 텅 빈 담뱃갑을 구겨 깡통에 던졌다.

              ***

대학생들이 시간표를 짤 때 선호 1순위로 꼽는 것은 대개 금 공강인데, 이상하게 개강 총회 같은 행사는 꼭 금요일에만 진행되곤 한다. 정의롭고 친절한 과대가 시간 되시면 들러 주시라며 나한테까지 연락을 돌렸지만 눈치도 없이 거기 가서 껴 앉을 철판은 아니었다. 

              과 내에서 내 콘셉트가 연애에 서투른 복학생 따위도 아니었고.

[개강 파티 2차 때 나 데리러 와.]

그런데 이 누나는 왜 이렇게 성가시게 구는 걸까, 콘셉트 맞지 않게.

이걸 답장을 해, 말아, 고민하던 나는 깔끔하게 끝맺는 게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헤어졌잖아.]

[장단 맞춰 준다며?]

[그래서?]

[오늘 민희도 온대. 와서 나한테 좀 매달려.]

뭘 하라고? 기가 막혀서 멍하게 핸드폰을 붙잡고 있는데 짧은 진동이 다시 한번 울렸다.

[헤어지고 싶으면 상대에 대한 최소한의 성의를 보여야지, 한아.]

[그 사람 많은 데서 누나 체면 세워 주는 게 최소한의 성의야?]

[싫음 헤어지지 말든가. 안 헤어질 거면 그냥 데리러 와.]

…….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지 생각해 보기로 한다. 내 열 번째 여자 친구, 공식적으로는 여섯 번째 여자 친구는 아주 쿨하고 이기적인 캐릭터이다. 그런 면에서는 나와 꼭 닮았다. 우리는 지난 방학에 과 스터디에서 만나서 사귀었다. 사귀자는 말은 누나가 먼저 했지만 나는 내가 선택했다고 믿었다.

‘네가 나한테 별 감정 없는 거 알아. 근데 네 감정 같은 건 별로 안 중요해. 나한텐 내가 제일 중요하거든.’

그 말에 나는 누나를 선택했다. 마침 여자 친구가 필요하던 차였는데, 그는 나에게 딱 맞는 여자였다.

그와 두 달 만나는 동안 나는 그의 쿨함을 넘어선 냉랭함에 가끔 감탄했다. 어른의 연애에 대한 고찰과 반성도 하게 되었다. 나도 꼭 저렇게 되어야지. 다짐도 했다.

그는 제게 중요한 일이 생기면 가차 없이 데이트를 연기했고 멋대로 예매해 둔 공연이나 영화를 취소시켰다. 함께 드라이브를 하던 중에 누나가 인턴으로 일하고 있는 회사에 일이 생겼다며 그대로 차를 돌려 원주까지 끌려갔다 온 적도 있었다.

원주 터미널에 덩그러니 버려졌던 그날의 기억은 아직도 참 시리기만 하다. 콧물을 흘리며 새벽 버스를 타고 돌아온 나는 몸살에 걸렸었다. 누나는 그다음 날 교환 기간이 다 되어 가는 기프티콘이 있다며 나를 프랜차이즈 피자집으로 불러냈다. 몸살엔 역시 피자가 최고라면서.

방학에 만나기 시작한 우리의 연애가 개강도 전에 공개 연애로 바뀌게 된 것도 누나의 독단적인 결정이었다.

그는 인턴이 끝난 기념으로 머리를 하겠다고 서초의 미용실로 나를 끌고 갔고, 그곳에서 세 시간째 세 잔의 커피를 마시고 있을 때였다. 원장의 안내를 받아 미용실 안쪽으로 들어온 한 여성이 지루해 녹아내리기 직전인 나를 보고 못 볼 꼴이라도 본 것처럼 눈을 크게 떴다.

그렇게 나의 열 번째 교내 연애는 여섯 번째 공개 연애가 되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사람은 누나와 민희 누나, 내 전전전전 여자 친구의 클래식 동아리 동기이자, 세상 제일가는 마당발이었다. 그리고 누나는 알고 있었다. 그 여자가 그 시간대에 그 미용실에 예약되어 있었다는 것을.

덕분에 나는 다음 날 새벽 2시, 발신자 번호 표시 제한으로 부재중 전화 세 통을 받고 잠을 설쳐야 했다. 누나는 스토커 아니냐며 얼른 발신자를 조회해 보자고 했지만 묘하게 만족스러워하는 미소가 내게 자연스레 진실을 알려 주었다.

나는 그런 누나의 캐릭터를 존경했다. 사람이 어쩜 저렇게 빈틈없이 이기적일 수가 있을까. 내가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드디어 여자 보는 눈이 생겼구나. 앞으로는 누나 같은 여자만 만나야지. 누나한테 여동생 없냐고 물어볼까? 사촌이라도.

여러모로 누나는 내게 완벽한 여자 친구였다.

……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게 웬 날벼락.

[한아, 11시까지 와. 나 12시 버스 탈 거니까.]

과연. 존경받아 마땅한 이기심이다. 나는 탄식했다.

              ***

CC(Campus Couple)는 여러 가지 단점을 동반한다. 첫째, 유명해진다. 둘째, 적이 생긴다. 셋째, 두 번 이상 하면 소문이 제곱으로 불어난다. 넷째, 다섯 번 이상부터는 나를 인간으로도 안 보는 사람들이 생긴다. 오죽하면 별명이 화공과 걸레겠는가.

나는 거의 걸어 다니는 안줏거리였다. 그것도 아주 쫄깃쫄깃하고 자극적인. 매운 닭발 정도 되려나.

2학년 과대는 아무리 단체 메시지라지만 시간이 되시면 오라고 개강 파티 장소까지 보내 놓고 진짜 올 줄은 몰랐는지 나를 보자마자 표정을 구겼다. 내가 무슨 오염 물질이라도 되는 듯 머뭇거리는 그들의 태도에 순간 욱하는 마음이 들었으나 그래, 오죽하면 저러겠나 싶어 이해하기로 했다.

“안녕하세요, 오빠.”

“응. 오랜만이다.”

과대는 죽상으로 내게 인사를 건넸다. 나는 대충 웃어 보였다. 진정성 있는 미소를 보여 봤자 돌아오는 건 뒷담화뿐이다. 게다가 그가 나를 싫어하는 것은 나름 합당하다. 그는 나 때문에 친구를 잃었다. 물론 나도 그의 친구 덕분에 한 학기가 부단히 고단했지만 그것까지 나의 과실이라고 하자.

“웬일로…….”

과대는 말끝을 흐렸다. 번역하자면 이거다.

‘너 같은 양아치 새끼가 어리고 연약한 새내기들이 가득한 이 신성한 곳에는 왜 오고 지랄이냐.’

“누구 찾아오셨어요?”

‘또 누구를 꼬시려고.’

그러나 이 정도 환대는 내게 그저 가벼웠다.

“선배들 어디 있어?”

“아, 선배들. 2층에 계세요.”

“응, 땡큐.”

고학번과 신입생 테이블을 분리한 과대에게 지금만큼은 조금 고마워졌다. 무슨 꼴을 보일지 모르는데 새파란 새내기들 머릿속에 나를 각인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어떤 방식으로도.

“뭐야? 서한?”

2층에 올라가자 이미 거나하게 취한 동기, 선배 무리가 보였다. 나를 알은체하는 사람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잘 지내셨어요, 형.”

“어, 너 웬일이냐? 원래 이런 데 안 나오잖아.”

“야 야, 여자 친구 데리러 왔나 보지. 한아, 너 혜주 누나랑 사귄다며?”

“둘이 언제 그렇게 된 거야? 너 인마, 진짜 능력 좋아.”

이미 헤어졌는데 사람들은 이제 어떻게 사귀게 되었냐고 묻는다. 다음 주에도, 다다음 주에도 나를 우연히 마주치는 사람은 또 묻겠지. ‘혜주랑 사귄다며? 어떻게 된 거야?’

누나는 가장 구석 테이블 상석에서 소맥을 말고 있었다. 차분한 검은 원피스 아래의 창백한 피부 결과 대조적인 장면이었다. 나는 그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웃고 떠들던 분위기가 차차 잦아들었다. 누나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동기가 팔꿈치로 누나의 팔을 툭툭 쳤다.

“누나.”

누나가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보았다. 한없이 차갑고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데리러 왔니?”

“…….”

“아님 매달리러 왔니?”

주변의 소음이 잠잠해졌다. 일부러 가장 안쪽 자리에 앉았을까. 누나는 그럴 만한 사람이었다.

“매달리러.”

이미 고요하다고 생각했는데 내 말을 끝으로 술집 2층은 말 그대로 싸늘한 정적에 잠겼다.

“누나, 나가서 얘기하자.”

“여기서 해.”

나는 가볍게 한숨을 쏟아냈다. 장단 맞춰 달란 게 진짜 연극까지 한 판 하자는 거였나?

“여기서 해? 진짜?”

그 흔한 술렁거림도 없었다.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무릎이라도 꿇고 헤어지지 말자고 빌면 돼?”

모두가 이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럼 우리 안 헤어지는 거야?”

“…….”

잠시 나를 노려보던 누나는 가방과 가디건을 챙겨 기다란 테이블을 빠져나왔다. 나는 초롱초롱한 동기들의 시선을 애써 외면했다. 방금 이 장면 녹화해서 연극부에 가져가면 주연은 따 놓은 당상 아닌가 생각하며.

우리는 나란히 서서 비좁은 계단을 내려갔다. 사람들은 누나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제각각 흥분한 숨을 토해냈다. 야, 들었냐? 둘이 뭔데? 난 둘이 사귀는 것도 몰랐는데 저게 뭔 소리야? 뭔 소리겠어. 서한 또 걸레 짓 하다 걸린 거겠지.

선명하게 귓가를 파고드는 말들에 누나가 멈칫, 걸음을 멈추고 나를 돌아보았다. 복잡한 얼굴이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그의 어깨를 잡고 부드럽게 밀었다.

복잡할 게 뭐 있어, 누나. 그냥 내일이면 또 다른 이야기로 대체될 가십일 뿐인데.

“언니! 가시게요?”

누나와 친한 2학년 후배가 쪼르르 달려왔다. 그 뒤에 서 있는 나를 보고는 어색하게 한 번 고개를 까딱거렸다.

“응. 유진이 계좌로 돈 조금 보냈어.”

“헐, 언니. 왜요. 안 그러셔도 되는데.”

“큰돈 아니야. 너네 회비 보태 써. 맨날 쪼들리잖아.”

손목에 견고한 감각이 느껴졌다.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내 손목을 꽉 붙든 누나가 나를 질질 끌고 밖으로 나갔다. 바로 술집 앞이 아니라, 조금 더 걸어서 벤치가 있는 곳까지.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만족했어, 누나?”

“…….”

그는 잠시간 말이 없었다. 여전히 묵묵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다 제 이마를 짚었다. 손톱에 붙은 화려한 파츠가 반짝거렸다.

“네 소문 안 좋게 내려고 그런 건 아니야. 엿 먹일 생각도 없었고.”

“응?”

“그리고 그동안 네가 한 짓도 있으니까, 완전히 내 잘못이라고 할 수도 없는 거겠지.”

“아까 사람들이 얘기한 거 때문에 그래?”

“…….”

“누나 잘못 아니야. 왜 그렇게 생각해.”

나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다가 진지한 누나의 표정을 보고 입을 꾹 닫았다. 누나의 목소리가 유독 가느다랗게 들렸다.

“네가 진짜 올 줄 몰랐어. 너는 나랑 비슷하다고 생각했으니까.”

“…….”

“너는 나만큼 자존심이 강하니까. 올 리가 없다고.”

그 말처럼, 누나와 나는 비슷하다. 잠깐의 연애 끝에도 나는 알 수 있었다. 그와 내가 동류의 인간이라는 것을. 그러나 원하는 것은 모두 가져야 속이 시원한 게 누나의 자존심이듯, 나의 자존심도 크게 다르지 않다. 나 또한 원하는 것을 모두 가져야 직성이 풀렸다. 그게 내 자존심이었다.

“오늘 개강 파티에 민희가 온다는 말은 거짓말이었어. 걔 공기업 취업 준비하느라 바쁘대.”

“어쩐지 안 보이더라.”

“……고작 그런 반응인 거야?”

누나는 조금 허탈하고 쓸쓸해 보였다.

“어떻게 말하면 되는데? 알려 주면 그렇게 대답할게.”

“너는 이렇게까지 나랑 헤어지고 싶니?”

“응.”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헤어지기 위해 사귀니까.

“나랑 헤어지면 아까 같은 소문이 한동안 계속 돌 거야. 남들이 나한테 왜 헤어졌냐고 물어보면 네가 나쁜 짓을 했다고 말할 거니까.”

“……누나가 그러고 싶다면 말릴 권리는 없겠지. 피곤해지기야 하겠지만.”

“나는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 안 해. 그때 강원도에 너를 버리고 일하러 간 것도, 아픈 너를 불러내서 내가 먹고 싶은 것만 먹은 것도, 쇼핑할 때마다 몇 시간씩 따라다니게 시킨 것도.”

“괜찮아. 나도 재밌었어. 누나 덕분에.”

“재미.”

누나가 웃긴다는 듯이 되뇌었다. 그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나는 진실 공방전 그런 거 싫어. 누나 마음대로 이야기해. 어차피 한 달 후면 다들 잊겠지.”

“…….”

“누나가 나만큼 이기적이란 거, 모르고 만난 것도 아닌데.”

“…….”

“여기서 쿨하게 관둬 버리자, 누나. 서로 캐릭터에 충실하자고.”

누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냥 내 얼굴을 한참 동안이나 바라보았을 뿐이다.

“한아.”

침침한 목소리로 그가 나를 불렀다.

“쿨하고, 이기적이고, 그래, 다른 건 몰라도…….”

“응.”

“너, 헤프진 않더라.”

“…….”

그의 손길이 천천히 나의 얼굴을 타고 올라와 머리를 쓰다듬었다.

“차라리 그랬다면 더 좋았을 거야.”

“…….”

부드러운 숨결이 턱선 가까이 느껴졌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입술이 닿기 직전, 가까워졌던 숨결은 흔들리고 있었다. 흐느끼는 사람처럼.

우리의 첫 키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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