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열 번째 연애가 그렇게 끝나 버렸어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세상은 한 치의 오차 없이 그대로였다.
쿨하고 이기적인 누나는 그날 이후로 연락을 해 오지 않았다. SNS 친구도 끊겨 있었다. 역시 호탕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언제쯤 열한 번째 연애를 하면 좋을까 고민하며 개강 첫 주를 보냈다. 아무나 만나던 이전과는 다르게 내게도 나름의 규칙이 생겨서인지 이젠 적절한 상대를 찾기가 힘들었다.
내가 만나선 안 될 여자 친구는 상당히 여러 부류가 있다. 열 명의 전 여친의 친한 친구여선 안 되고, 집착형이어선 안 되고, 너무 인싸여도 안 되고, 새내기? 그건 절대 안 되고.
시간이 갈수록 괜찮은, 잘 헤어질 만한 여자 친구를 찾는 일은 어려워졌다. 선배의 말대로 내게 흠만 가득 쌓여서인지도 모른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터놓고 할 만한 마땅한 지인조차 없었다. 어디서든 잘 융화되는 능글맞은 성격도 못 되었고 나의 얄팍한 경력을 은근히 동경하는 이들에겐 들려줄 이야기가 없었기에.
“얘는 한이, 서한. 과는 기공. 잘생겼지?”
“화공입니다, 형.”
“아아, 그랬네. 아무튼 공대에서 제일 인기 많은 애야, 얘가.”
민재 형의 말에 나는 어디 숨을 곳을 찾고 싶어졌다.
그와는 농구부 할동을 하며 알게 되었는데, 그 당시 주장이었던 민재 형은 지금은 총학생회 일을 하고 있었다. 그는 ‘인맥이 곧 자원이다’라고 굳게 믿고 살았으며, 그 정도면 자원이 될 법도 한 인간관계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었다. 형이 선거에 출마하는 그림이 내 눈엔 선명히 그려졌다. 딱 정치인 그릇이었다.
“나도 얘처럼 생겼으면 CC 다섯 번씩 하고 그랬을 텐데, 어?”
나는 그만하시라며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최소한 겸손하고 소심해 보이게.
어차피 이런 술자리에서 그가 나를 띄워 주는 것은 그 자신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이다. 나는 적당히 고개만 끄덕이고 부끄러워하는 척만 해 주면 되는 것이다.
“야, 봐라. 신입생 애들 벌써 반한 표정이다.”
전혀 그래 보이지 않았다. 그네들도 아니라며 손을 내저었다.
“한이 벌써 새 여자 친구 생기는 거야?”
“제가 신입생분들을 어떻게 사귀어요. 저 진짜 유병장수 해요.”
“뭐 어때. 서로 좋아하면 됐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그는 절대로 신입생을 사귀지 않을 것이다. 소문이 어떻게 나는지 아니까. 명성을 귀하게 여기는 그가 그런 짓을 할 리가.
“솔직히 잘생겼지?”
그가 유들유들 웃으며 제 앞에 앉아 있던 신입생에게 물었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며 손등으로 머리를 짚었다. 내가 왜 그의 정치적 기반 구성에 이용당해야 하는 거지.
내가 농구부 신환회에 이렇게 느지막이 참석한 것은 내게 있는 선배와의 유일한 연결 고리가 민재 형이기 때문이다. 선배와 민재 형은 고등학교 동창이다. 그것도 있는 집 자제들을 죄다 모아 놓고 입시 경쟁을 시킨다는 명문 사립 고등학교.
그런 학교를 나왔으면서 선배는 등록금을 벌겠다고 아르바이트를 세 개씩이나 한다.
‘장시현 이 새끼는 순 바보야, 바보. 저 좋다는 여자도 안 만나, 잘나가는 집안 지원도 못 받아, 하다못해 내가 과외 일 알아봐 주겠대도 싫다네. 편하게 사는 법 같은 거 좆도 몰라요.’
잔뜩 취한 민재 형의 불평에도 선배는 허허실실 웃었다. ‘땀 흘려 버는 돈의 진미를 민재는 모르지.’ 그런 말과 함께.
물론 바쁘고 지친 선배가 이런 술자리에 나올 확률은 희박했다. 그 낮은 확률에만 기대를 거는 것은 아니었고, 민재 형에게서 이따금 나오는 선배에 대한 이야기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나는 선배가 생각하는 것보다 선배에 대해서 조금은 더 안다. 아버지가 법조계에 높으신 분이라는 것, 그래서 국가 장학금을 받을 수 없어 아르바이트를 한다는 것, 고등학교 때부터 잘생긴 걸로 유명했다는 것, 성격도 좋아서 빼빼로 데이 때 받은 빼빼로가 이듬해 발렌타인데이까지 남아 있었다는 것.
그렇게 청소년기를 보낸 선배는 대학에 와서 첫사랑을 만나 드라마를 방불케 하는 낭만적인 연애를 했다는 것.
“잘생기셨네요.”
골똘히 생각에 잠긴 나를 깨운 것은 맞은편에 앉은 모르는 여자의 말이었다. 젖살이 덜 빠진 얼굴에 날카롭고 화려한 화장. 아무리 농구부 매니저가 자주자주 바뀐다지만 한 번도 본 적 없는 걸 보아선 새내기일 것이다.
“솔직히, 잘생기셨다구요.”
그제야 방금 민재 형이 물은 질문에 대한 답이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당황스러움을 숨기고 분위기를 무마하기 위해 실실 웃으며 민재 형을 향해 물었다.
“……아, 이거 엎드려 절 받기 민망해서. 그냥 감사하다고 하면 돼요, 형?”
“안 하셔도 돼요. 평가를 바라시길래 해 드린 것뿐이니까.”
하지만 신입생은 민재 형의 몫이던 대답을 홀라당 낚아채 갔다. 톡 쏘는 말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입을 벌리고 있는데 그는 제 앞의 소주를 쭉 들이켰다.
캐릭터 독특하네. 나도 모르게 실소가 튀어나왔다. 민재 형의 짓궂은 질문이야 작년에 새로 들어온 새내기들 앞에서 했던 것과 완벽히 똑같았던 것이라 새삼스럽진 않았지만 이렇게 대꾸하는 애는 또 처음이라.
워어……. 민재 형이 장난스럽게 감탄하며 빙글빙글 웃었다.
“은지가 한이 맘에 드나 본데?”
아니라고 할 법도 한데 신입생은 나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없이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하지만 그다지 기뻐 보이는 미소는 아니었다.
“은지야, 조심해. 한이 나쁜 남자야.”
“그래요?”
“오, 소문쯤이야 상관없다?”
민재 형은 아주 재밌어 죽겠다는 눈이었다. 진짜 이걸 선배라서 꼽을 줄 수도 없고.
“그런 건 아니구요.”
주변 사람들은 이제 흥미롭다는 듯이 나와 민재 형, 그리고 신입생을 바라보고 있었다. 누가 바람 한 번 잡으면 단박에 소문으로 박제될 광경이었다.
곤란했다. 비록 내가 열한 번째 여자 친구를 찾고 있기는 하지만 이 신입생은 후보에조차 없어야 할 타입이었다.
보통 이 시간까지 술자리에 남아 화석 학번들과 술을 먹는 새내기들은 선배들과 친해지고 싶어 하는 이들이 대부분이라 곧 모임의 주도권 쟁탈전에 참여할 타입이 대부분이었다. 혹은 술에 미쳐 사는 술꾼이거나.
차라리 술꾼이라면 그나마 낫겠지만 어찌 되었든 이런 여자와 사귀게 되면 나는 그나마 하나 소속되어 있는 유일한 집단인 농구부에서도 쫓겨날 확률이 높아진다. 게다가 새내기라니.
헤어지고 나서 내가 졸업하기 전까진 학교에서 계속 마주칠 위험을 안고 살아야 하는 가장 위험한 존재. 매우 피곤해질 게 분명하다는 것은 경험으로 깨달은 바 있었다.
나는 그냥 취한 민재 형으로부터 선배 이야기를 좀 들을 수 있을까 해서 왔는데 이게 웬 낭패야.
이런 때 당황한 티를 내거나 극구 부인하면 주변인들이 더더욱 놀릴 맛이 난다. 태연하게 대처하는 게 최선이었다.
“은지 씨? 맞나. 은지 씨는 저 같은 스타일 안 좋아하실 것 같은데.”
“왜? 둘이 처음 보는 거 아냐?”
“신입생들은 저처럼 과거 있는 남자 만나면 안 되죠.”
“…….”
“민재 형이라면 모를까.”
민재 형이 당황한 듯 입술 끝을 조금 구겼다.
“사실 신입생들이 좋아할 타입은 민재 형처럼 든든하고 아는 거 많은, 그런 선배잖아요.”
“와, 한이가 비행기 태워 주니까 기분은 좋네.”
그가 비스듬히 웃었다. 기막힌다는 듯이.
“하긴, 한이 헤어진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여자를 만나겠어.”
“한이 형 또 헤어지셨어요?”
“일주일 전인가? 나 시현이랑 길 가다가 봤잖아. 한이가 길거리에서 여자랑 키스하는 거.”
……뭐?
“근데 그 상대가 진짜 보통 누나가 아니거든? 공과대 수석 입학에 우리 집이랑 집안끼리도 잘 아는 사이고. 유학 다녀와서 졸업이 조금 늦어지긴 했는데 말이야.”
나는 늘 민재 형을 통해 많은 정보를 얻는다. 심지어는 내 전 여자 친구에 대한 것들까지도.
“서울에 그 누나 앞으로 빌딩만 두 채에다가…… 아무튼 진짜 완벽한 사람이라 연애 같은 거엔 관심도 없어 보였는데.”
하지만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선배가 그걸 다 봤다고.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대화하는 것도…… 들었어요?”
내 굳은 표정을 본 민재 형이 다시 승자의 미소를 되찾았다.
“우리 한이 긴장했네. 멀리 있어서 그냥 둘이 키스하는 것만 봤어. 야, 나는 둘이 사귀는 줄 그때 알았는데 얼마 전에 혜주 누나한테 연락해 보니까 그새 헤어졌다더라?”
주변에 앉아 있던 사람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떠들고 싶어서 죽을 것 같은 표정들. 나는 어깨를 한 번 으쓱했다. 그래, 마음껏 물고 뜯어라. 방학 동안 안주 없어서 술 어떻게 마셨냐.
발 넓은 민재 형이 혜주 누나와 아는 사이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못 한 내 잘못이었다. 누나가 뭐라고 했을지는 모르겠지만 깔끔한 헤어짐을 이야기하진 않았을 것이다. 고로 오늘 밤새도록 귀가 가려울 예정이었다.
“그래도 한이 너 고생 좀 했겠던데? 그 누나가 워낙 잘나서, 남 배려하고 사는 법을 좀 모르잖냐.”
“…….”
“네일 아튼가 뭔가 하는 데 안 따라갔다고 차였다며, 너.”
하하하. 옆에서 웃음이 터졌다. 진짜예요? 와, 그 사람 너무한 거 아니에요? 그러게, 남자가 거기 가서 뭐 하라고. 그냥 기다리라는 거지. 좋아하는 만큼, 사랑하는 만큼.
긴장하고 있던 나는 맥이 빠져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허탈한 목소리로 물었다.
“시현 선배는 뭐래요.”
“시현이? 뭐가?”
“혜주 누나랑 저랑 그러는 거 보고, 뭐라고 안 했어요?”
“딱히? 장시현이야 워낙 남 일에 관심 없잖아. 지 살기도 바쁠 텐데.”
“…….”
“뭐, 청춘이네. 그러고 말았지.”
“…….”
청춘이네. 선배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나의 기분을 누군가에게, 심지어 나 자신에게조차 설명하는 일에 익숙하지 않았다.
“근데 너는 왜 시현이한테 선배라고 하냐? 간지럽게. 나한텐 형이라고 하면서.”
“시현 선배는 문창과잖아요. 거기 애들은 다 그렇게 부르던데.”
“너는 기공이잖아, 인마.”
화공이라니까.
텐션이 점점 가라앉는 게 느껴졌다. 오늘 선배에 대한 이야기를 더 들어 봤자 기쁠 것 같지가 않았다. 민재 형이 좀처럼 취하는 것 같지도 않았고.
“나는 문창과 걔네 그 문화가 너무 간지러워서 못 견디겠더라. 내가 운동부여서 그런가. 너무 상극…….”
“형, 저 가 볼게요. 연습 때 봬요.”
“어? 갑자기? 벌써?”
나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분위기 파악 같은 건 못 하는 척을 했다. 남이 말을 하든 말든 끊고 일어나 버리는, 약간은 싸가지 없는 후배 역할쯤.
“여기 안주 맛없어요. 다음에 ‘브릿지’ 가면 그때 불러 주세요.”
“브릿지 안주 맛있다는 애 내 주변에 너뿐이야. 거기 알바 하는 장시현도 거기 쓰레기 같은 재료 쓴다는 건 인정할걸.”
“입맛이 싸구려라 그래요.”
그리고 형들은 안주 필요 없잖아요. 딱 보니 오늘도 혜주 누나 얘기로 밤새우겠구만.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삼켜냈다.
그들의 원활한 술자리 토크를 위해서라도 메인 안줏거리인 나는 이쯤에서 빠져 주는 게 맞겠지. 먹태 씹어 먹는데 옆에서 황태가 살아서 펄떡거리고 있으면 술맛 떨어지잖아.
***
빌어먹을 화공은 수강 신청이 더럽게 힘들다. 공과대 특성인 것 같기도 하다. 도대체 왜 수업 개수도 얼마 없으면서 증원 요청도 다 씹냐고. 그럼 손가락 느린 애들은 뭐 듣고 졸업하라고? 방학에 공부를 할 게 아니라 수강 신청 연습을 해야 한다는 말이 수강 신청 기간만 되면 단톡방 곳곳에서 터져 나온다.
하지만 내가 헬(Hell) 강의로 유명한 ‘분리 공정’을 듣는 것은 수강 신청이 망해서라기보단 학교생활의 업보라고 할 수 있다. 모두가 듣고 싶어 하는 수업에 들어가면 나를 꿈에서도 보고 싶어 하지 않을 사람들이 너무 많다.
물론 이런 강의를 듣는다고 해서 내가 그 사람들을, 아니, 그 사람들이 나를 완벽하게 피할 수 있다는 보장은 없지만 적어도 나보다는 수강 신청을 망친 자신의 손가락 탓이라도 한 번 더 할 수 있지 않을까.
아니나 다를까 수강 신청을 시원하게 말아먹고 온 사람들뿐이라 그런지 오후 수업임에도 불구하고 다들 퀭한 얼굴로 강의실에 앉아 있었다. 지난주 오리엔테이션 이후로 운이 좋게 다른 수업을 잡은 이들은 미련 없이 이 수업을 떨치고 나가서인지 낙오자들의 표정에는 더더욱 패배감이 감돌았다.
원래 이런 불행은 나누는 사람이 조금이라도 많아야 덜 서러운 법이다.
강의실을 둘러보던 나는 어딘가 낯익은 얼굴을 발견하고 시선을 멈추었다. 내가 눈으로 본 것과 머리로 인지한 것이 동일한 것이 맞는지 눈을 두어 번 깜빡여 확인해 보았다. 상대도 나를 알아봤는지 시선을 피하지 않는 걸 보면 맞는 것 같긴 한데…….
저건 이 불행의 행렬에 아직까지 참석해선 안 되는 얼굴인데.
은지, 운동부 신입 매니저였다.
***
맹세컨대 나는 신입생과 엮이고 싶지 않았다. 내 열한 번째 여자 친구는 혜주 누나처럼 쿨하고 못된, 무엇보다 졸업을 코앞에 둔 사람이길 바랐고, 앞으로는 그런 사람이랑만 대화를 하고 살 것이라고 다짐했다.
그런데 그와 내가 같은 팀플 조가 된 것은 정말 내 선량하고 진실한 바람과는 관계없는 일이었다. 심지어 2인 1조였다.
역시 강평 2.4점짜리 이런 거지 같은 강의는 듣는 게 아니었는데.
“안녕하세요, 한이 오빠.”
“…….”
나를 언제 봤다고. 아니, 뭐 얼마나 봤다고 이렇게 친근하게 부르는 거야.
“안녕, 은지야.”
“오빠 성이 뭐예요? 그때 제대로 못 들어서.”
“……서씨. 서한.”
“아, 네.”
나는 호구 조사를 당하는 사람처럼 얌전히 대답했다.
“전화번호 주세요.”
“……왜?”
“과제 안 하실 거예요?”
“너 1학년 아니야?”
“맞는데요.”
“그런데 대체 왜 이런 수업을 들어? 4학년도 기피하는 수업인데.”
“수강 신청 날 늦잠 잤어요.”
“…….”
“전화번호, 안 주실 거예요?”
“메일로 이야기하자. 메모지 있어? 메일 주소 적어 줄게.”
은지가 미친 사람을 보듯이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럴 만했다.
“저기요.”
“응.”
“나쁜 남자처럼 굴면, 재밌어요?”
농담인가 싶어 그를 쳐다보았으나 그는 한없이 진지한 표정이었다.
나는 정말이지…… 본질을 관통하는 모든 것들이 싫다.
“전화번호 줘요, 빨리.”
괜히 찔린 기분이 되어 키링이 달랑거리는 핸드폰을 받아 들어 전화번호를 찍어 주었다.
“이 수업, 많이 힘들 텐데. 수업 없어서 하이에나처럼 허덕대는 화공 애들이 안 듣는 이유가 있어.”
“다들 그렇게 말하더라고요.”
“학점은 신경 안 써?”
“1학년 땐 놀아도 된다고 그러던데요?”
“누가?”
“민재 오빠가요.”
……그 형 1학년 2학기 성적 장학금 받았어.
“1학년 전용 수업 같은 거 남는 자리 없었어?”
“있었는데, 자리 남은 건 뭐 이상한 거였어요. 윤리 어쩌고.”
그거 졸업하려면 필수로 들어야 되는 건데…….
“공학 수학은? 화공 계산이라든가.”
“못 잡았죠. 한 자리도 안 남았던데.”
이 수업은 절대 기초가 안 되어 있는 새내기가 버틸 수 없는 수업인데. 나는 조금 걱정이 되었다. 물론, 이 신입생이 아니라 이 신입생이 중간에 이 수업을 철회함으로써 내가 반사 손해로 팀원과 학점을 동시에 잃을 것이.
“……잘해 보자.”
그냥 내가 먼저 철회할까.
***
학교는 이과와 문과가 물리적으로 가까워지는 것을 고까워하는 게 분명하다. 혹은 이미 사이가 안 좋은 걸 알고 갈등 방지 차원에서 분리해 두었거나. 그렇지 않고서야 거의 30분을 걸어야만 겨우 저 멀리 문과대 건물 끄트머리가 보일 리 없다.
수업이 끝나고 민재 형에게 갑작스러운 전화가 왔다. 제 친한 후배가 단과대 회장 선거에 출마를 한다나. 그래서 뭘 좀 붙여야 된다고. 혹시 도와줄 수 있느냐며.
내가 그런 자원봉사 같은 일을 할 리가 없었다. 졸업 요건인 봉사 활동도 헌혈로 다 채웠는데, 초코 파이 하나 안 주는 그런 일을 내가 왜.
“자, 나랑 시현이가 양쪽을 잡으면 한이 네가 테이프를 붙이면 돼.”
“…….”
선배가 나를 보고 고생이 많다는 듯 웃었다. 나는 전혀 웃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으나 따라 웃었다.
화학 공학, 문예 창작, 그리고 정치 외교.
이게 무슨 해괴한 조합이란 말인가.
하지만 싸늘한 봄바람과 황사 먼지 아래서도 선배의 미소를 보자니 좀 웃을 만한 것 같기도 했다.
“웬일이야, 서한. 이런 거 관심도 없고 잘 안 도와주잖아.”
“사람들 열 명, 스무 명씩 우르르 모이는 거 싫어서요.”
“그럴 만하지, 한이는.”
선배가 말했다. 나는 말의 의미심장함에 눈썹을 찌푸렸다.
“인기도 많고, 적도 많잖아.”
“좋은 뜻 아닌 것 같은데요, 선배.”
왜냐면 선배는 인기만 많잖아요. 그럼 나는 선배랑 비교했을 때 적만 추가된 쓰레기라는 뜻인데.
“원래 모든 일에는 반사 작용이 있는 법이니까.”
반사 작용. 나는 선배가 이 단어를 생리학적 관점에서 사용했을 확률에 대해 따져 보았다.
“형 팔 떨어지겠다.”
민재 형의 말에 나는 복잡한 생각을 미뤄 두고 서둘러 테이프를 뜯었다. 내가 입을 꾹 다물자 이번엔 민재 형이 떠들기 시작했다.
“야, 시현. 논술 과외 일자리 하나 들어왔는데, 진짜 할 생각 없어? 수학도 아니고, 영어도 아니고. 논술이면 할 만하잖아.”
“나 논술 못 쓰는데.”
“뭔 소리야. 너 문창과잖아.”
“민재야, 작문이랑 논술은 하늘과 땅이야. 처음부터 끝까지 다른 분야라고. 그리고 난 글을 가르치기까지 하고 싶지는 않다. 지금도 남는 시간 다 쏟아부어서 노트북 앞에 앉아 있는데.”
“그럼 아버지한테 좀 도와 달라고 하든가.”
“…….”
선배가 순식간에 입을 닫았다. 나는 슬슬 눈알을 굴리며 둘 사이의 기류를 살폈다.
“야, 우리 아버지가 네 걱정 하시더라. 대체 너 같은 애가 왜 학비 번다고 술집에서까지 일을 하는데.”
“걱정 감사하다고 전해 드려. 그리고 누가 보면 내가 떳떳하지 않은 일 하는 줄 알겠어.”
“장시현. 넌 왜 항상 좋은 길, 편한 길 놔두고 엇나가냐.”
“…….”
민재 형은 답답하다는 듯이 소리를 높였다. 지나가는 학생들이 우리를 흘깃흘깃 쳐다봤다. 포스터를 잔뜩 안은 채 말씨름하고 있는 화공, 문창, 정외. 그렇게 말해 놓고 보니 꼴이 우스웠다. 게다가 우리 셋 다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과 내에선 상당한 유명 인사였으니 시선이 쏟아질 만도 했다.
사실 선배가 유명한지 어떤지는 모르겠으나, 일전에 그가 후배들과 있는 모습을 보았을 때 그는 누가 봐도 과 인기 스타의 자태를 하고 있었다. 하긴, 이 얼굴인데 누가 싫어해. 대체 왜.
“모든 부모가 다 자식 학비 대 줄 의무 없는 건 알아. 그래도 너 정도 갖고 태어났으면 그거 적당히 써먹는 것도 효도야.”
“…….”
“입시도 이제 남의 이야기고, 솔직히 너희 부모님도 이쯤 됐으면 지금의 너를 받아들이실 때가 됐지. 이제 와서 뭐, 로스쿨 가라고 하겠어? 온종일 글만 쓰고 있는 애한테?”
“…….”
선배의 입꼬리가 삐뚜름하게 올라가 있었다. 아까 반사 작용 이야기를 할 때랑은 다른 미소였다. 내게는 잘 짓지 않는 표정. 육식 동물 같았다.
하지만 민재 형은 눈치를 못 챈 건지 계속 그를 다그쳤다.
“그 나이에 몇 년째 연애도 안 하면서 일만 하는 게 말이 되냐.”
“내가 연애를 하는지 안 하는지 민재 네가 어떻게 알아.”
……나는 선배의 이런 면이 참 인상 깊다.
사람 철렁하게 하는 말을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것.
문창과라 그런가.
“연애? 네가? 너 그때 희윤이랑 그렇게 헤어지고 지금까지 앓으며 지내는 거 누가…….”
“민재야.”
“왜.”
“입 좀, 다물어.”
“…….”
말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나는 선배의 그런 목소리는 처음 들어 봤다. 근 1년 만에.
선배가 나를 보며 다시 웃었다. 뭐랄까, 좀 살 떨리는 미소였다.
“애가 듣잖아.”
그는 나를 핑계 삼아 불편한 자리를 빠져나갔다. 얼떨결에 대화에 끌려온 나는 멍하니 그의 반듯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에겐 입을 다물래 놓고 정작 제가 입을 닫아 버린 선배의 입매는 확고하고 강인해 보였다.
“아이고, 좀 들으면 어때서? 한이가 남이야?”
민재 형이 투덜댔다. 터질까 조마조마하던 분위기가 조금 풀어졌다. 역시나. 날 선 정적을 깨 버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리고 명성에 결점 있는 걸로는 여기서 한이만 한 사람이 어디 있다고.”
나 왜. 나 뭐.
“네가 그렇게 발끈하면 한이가 뭐가 되겠어?”
나는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둘이서 나를 가지고 싸움을 하고 있었다.
민재 형의 논리에 선배는 어이가 없다는 듯 항변하려 했다.
“한이랑은 다르…….”
나를 방패로 막았던 그는 그제서야 둘 사이에 내가 있었다는 것을 ‘온전하게’ 인지했는지 다시 입을 닫아 버렸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한이랑은’ 뒤에 나올 말이 무엇이었을지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었다.
나랑 당신은 다르다, 나의 연애와 당신의 연애는 다르다, 그렇게 말하려던 것이다.
나의 흠 있는 연애와, 당신의 제대로 된 연애에는 차이가 있다고.
“관두자.”
노련한 민재 형의 태도에 빠르게 평정심을 찾은 선배가 민재 형의 어깨를 툭툭 쳤다. 하지만 그 이후로 열댓 장의 포스터를 더 붙이는 동안 그는 더는 평소처럼 웃지 않았다.
나 또한 민재 형의 말에 맞장구만 몇 번 쳤을 뿐 선배의 눈치를 살피며 새로운 화제를 꺼내지는 않았다.
오늘도 민재 형은 내게 선배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주었다.
그 여자. 선배 첫사랑의 이름. 희윤.
***
그 여자와 선배는 소문만 무성하다. 어느 정도냐면 심지어 그 사실조차도 일종의 정보에 해당한다. 제법 옛날 일이라, 소문만 무성하다는 것.
둘이 헤어지고 선배는 미루고 있던 군대를 갔다고 했다. 군대를 1년이나 미룰 만큼 예뻤다고도 했다. 이제야 내게서 제 이름을 찾은 그 여자, 그러니까 희윤이라는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게 학교를 다녔단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이별의 상실 따위는 자신의 일이 아니라는 것처럼. 그러다가 한 학기를 남기고 휴학한 뒤 어디론가 사라졌다고 한다. 근데 그게 또 때마침 선배가 복학을 할 시기였다고.
나는 소문이 와전되었을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 본다.
둘이 학생회관 앞에서 몰래 키스를 하다가 사진이 찍혀 SNS에 돌아다녔다는 것, 함께 커피숍에 가면 꼭 빨대를 하나만 가져갔다는 것, 서로에 대한 글을 써서 과제로 제출했다는 것.
그래, 그런 것들은 얼마든지 왜곡된 것일 수 있다. 원래 캠퍼스 커플이라는 것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인 경우가 많으니까.
하지만 오늘 그가 보여 주었던 태도마저 나의 이기심으로 무마시킬 수는 없었다.
‘민재야.’
‘입 좀, 다물어.’
차라리 욕을 했으면 나았을 것이다. 그 고압적이고 싸늘한 말은 좀처럼 잊기가 힘들었다.
‘애가 듣잖아.’
나의 존재로 책임을 넘기며 빠져나가면서도 얼굴에 미미하게 머물러 있던 그 짜증. 어떻게 하면 그것까지 모른 척할 수 있을까.
……나는 여전히 본질을 관통하는 것이 싫다.
그것은 대개 고통스러운 해답이다.
***
밤에는 종종 농구를 한다. 미친 듯한 양의 과제에 치여 살다가도 농구장에 나가 용수철처럼 튀어 오르고 나면 머리가 좀 맑아지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농구부 선배들에게도 그다지 살갑게 굴지 못하는 나는 늘 민재 형에게 손을 벌린다. ‘민재의 친한 후배’로 신원 확인 과정을 통과한다는 뜻이다. 그는 그런 측면에서 대단하다. 여자와 남자 모두를 잘 다룰 줄 안다. 그러면서도 만만하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 대학 생활을 해 본 사람들은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걸 공감할 것이다.
“얼마 전에 혜주 누나 봤다. 학교에서.”
숨을 헐떡이며 이온 음료를 마시는 내게 민재 형이 다가와 말했다.
“무슨 일 있나 봐. 얼굴 안 좋아 보이던데.”
“…….”
어쩌라는 거지. 나는 그런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뭐, 한이 네 성격에 헤어졌으면 끝이겠지만.”
“…….”
“원래 보통 연인들은 이런 거 신경 쓰거든. 나와 헤어지고 상대가 어떻게 지내는지. 무슨 일 있는 건 아닌지 걱정도 좀 하고.”
나는 대꾸하지 않으며 무심히 입고 있는 얇은 티를 펄럭거렸다. 이른 봄바람이 싸늘하게 목 뒤를 스쳤다.
“네가 알아서 하겠지.”
민재 형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손짓했다. 술 마시러 가자.
“네가 그렇게 좋아하는 ‘브릿지’ 가기로 했어.”
오늘은 수요일. ‘브릿지’에 가기 좋은 날이다.
“너도 쌓인 거 있으면 술이나 마시면서 풀자고.”
“쌓인 거요?”
그런 건 딱히 없는데…….
야! 둘이 뭐 해! 가자!
농구공이 휙 날아왔다. 턱 그걸 받은 민재 형이 공을 두어 번 튕겼다. 퉁퉁.
***
남자들끼리의 가벼운 술자리라서 가겠다고 한 거였는데, 한 선배의 여자 친구가 합류하고 농구부 매니저들도 부르게 되면서 본격적인 모임이 되어 버렸다. 맥주나 마실 줄 알았던 나는 어느새 소주 뚜껑을 가지런히 모으고 있었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카운터에 가장 가까운 자리를 선점했다는 것이다. 선배가 잘 보이는 자리였다.
우르르 몰려 들어오는 우리를 본 선배는 잠시 놀란 듯 눈을 크게 떴으나 이내 자리를 안내해 주었다. ‘한이도 왔네.’ 내심 그 말을 기대했으나 그는 또다시 안주 주문의 늪으로 끌려 들어갔다.
선배는 원래 하던 짙은 남색 앞치마를 하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토를 해서 빨았다는, 소주 회사 로고가 선명하게 박혀 있는 그 앞치마. 묵묵한 모습과 나름 잘 어울렸다.
선배가 주문을 받고 사라지자마자 옆에 같이 온 농구부 선배들이 수군거렸다.
“민재 형, 저 알바생 아는 사람 맞죠. 그 국문과랬나.”
“어어, 문창.”
“여기 올 때마다 느끼는데 이런 데서 썩을 인물은 아니지 않아요?”
“몰라, 뼈 묻겠대. 여기.”
민재 형이 서비스로 나온 어묵탕을 퍼먹고 인상을 찌푸렸다.
“야, 장시현! 이거 너무 짜!”
“물 타서 끓여.”
주방 안에서 들려오는 무심한 선배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앉아 있던 놈이 웃으니 주변에서 시선이 쏠렸다. 나는 대충 둘러댔다.
“민재 형 표정이 웃겨서요.”
“얀마, 너 그거 욕이지.”
나는 그럴 리가 있냐며 어묵탕 국물에 찬물을 들이부었다. 인기척도 없이 젖은 손길이 어깨 위로 느껴졌다. 고개를 뒤로 젖히다가 선배의 단단한 배에 뒤통수를 부딪쳤다.
“많이 짜? 봐.”
그의 목소리는 어제와는 다르게 다시 다정함을 되찾은 채였다. 나는 그에게 잡힌 어깨가 저릿해 혀를 씹을 뻔했다.
“안 먹어 봐도 돼요, 선배. 방금 물 부었어요.”
나는 선배가 아무리 본인이 만든 것이라고 해도 이런 쓰레기 같은 안주를 먹기를 바라지 않았기에 숟가락을 새로 꺼내려는 그의 손을 저지했다. 그러자 그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했다.
“그래, 짜도 그냥 대충 먹어.”
“야, 너 이거 끓이다 남은 거 준 거지.”
“서비스에 정성까지 바라다니. 양심이 없네, 민재.”
나긋나긋한 목소리였다. 그의 손가락이 연주하듯 나의 어깨뼈 위를 두드렸다.
“그냥 먹자, 민재야. 여기 안주 때문에 오는 사람이 어디 있어.”
농구부원 상혁 형의 말에 민재 형이 나를 가리켰다.
“네 맞은편에 앉아 있다.”
“…….”
“한이가 여기 안주 좋아하잖아.”
선배가 ‘그랬어?’ 하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더듬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괜찮은데요, 전……. 평소에 싱겁게 먹어서 나트륨 섭취가 가끔 부족할 때가 있거든요. 다들 그런 경험…… 없으세요?”
“…….”
“뭐랄까, 엄마 밥 같기도 하고…….”
마지막 카드로 꺼낸 어머니 찬스에 선배들은 반박하지 못하고 입맛만 다셨다. 그, 그래, 뭐, 어머니 손맛 같다는데. 사람마다 입맛은 다른 거니까…….
“한이 얘는 가끔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해.”
“지 얘기 안 하려고 그러는 거지, 뭐.”
상혁 형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이야기했지만 나는 멈칫하고 시선을 들어 올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귀가 조금 붉어져 있었다. 취했다는 증거였다.
같이 술을 많이 마셔 본 적이 없어 그의 주사가 뭔지 모른다. 단지 할 말 못 할 말 가리지 못하는 것만은 아니길 바랐다.
“너, 네 얘기 안 하잖아. 그렇게 CC를 많이 했어도 상대가 아무리 널 헐뜯어도 항변 한번 안 하고.”
“……할 말이 없어서 안 하는 건데요.”
“그런 사람이 어디 있냐. 연애하다 보면 서로 관점이 달라서 벌어지는 차이들이 있는데.”
상혁 형이 픽 웃었다. 꽤나 자조적인 웃음이었다.
대충 예상이 가는 시나리오가 있다. 저도 CC 하다가 평판을 조졌겠지. 하지만 나의 교내 연애는 평범한 그것의 형태가 아닌 경우가 많았으므로 그의 사례와는 사뭇 다를 것이다.
“그런 거 없이, 걔네가 하는 말이 다 맞아요.”
“…….”
그 말을 끝으로 정적이 찾아왔지만 능숙한 민재 형이 또다시 분위기를 잘 달래 놓았다.
소주를 연거푸 들이켰더니 알딸딸한 감각이 올라왔다. 커다란 쓰레기봉투를 단단히 묶은 선배가 술집 밖으로 나가는 게 보였다. 나는 비틀거리며 일어서 그를 쫓았다.
고장이 나 빛이 흐린 가로등 아래 그가 쓰레기봉투를 정갈하게도 주차해 놓았다. 나는 주체할 수 없는 발걸음으로 그에게로 걸었다.
“선배.”
“한아, 왜 나와 있어.”
나는 그의 다정다감함이 좋다 싫다 했다. 더 매정했으면 좋겠다가도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모든 생각이 녹았다.
“선배, 어제…….”
“어제?”
“어제 화내셨잖아요.”
“화? 그런 적 없는데.”
내가 입을 꾹 다물자 선배는 잠시 생각하는 듯했다. 그는 내가 취했다고 생각했는지 나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어제 민재랑 나랑 한 얘기 때문에 그러는 거면 신경 쓸 필요 없어, 한아.”
“…….”
“너랑 상관없는 얘기였어.”
“아니요.”
술에 취했다는 것은 잠깐의 착각이었을까. 몸은 녹진한데 이상하게 정신이 명료했다.
“그런 게 아니라요. 제가 궁금한 게 있는데요.”
이 말은 꼭 하고 싶었다.
“뭐가 그렇게 다른데요? 선배랑 나랑.”
“…….”
충혈되었을 게 분명한 눈자위를 비볐다.
이 생각으로 나는 밤새 한숨도 자지 못했다.
선배는 당황한 듯 굳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밤새 나를 괴롭히던 생각들을 토해냈다.
“어디가 다른 거예요? 제가 선배에 비해서 연애를 너무 많이 해서요? 너무 짧게만 만나서요? 아님 헤어지면 꼭 선배한테 와서 술을 사 달라고 해서요?”
“그런 뜻이 아니었어, 한아.”
“제가 너무 흠 있는 연애만 해서 저라는 사람 자체에도, 흠만 쌓인 거예요? 그래서 그날도 그렇게 얘기했던 거예요? 그렇게 흠만 쌓아서 어떡할래. 그렇게.”
“…….”
“선배랑 그분, 그 희윤이라는 분이랑 다르게.”
“…….”
“선배가 했던 연애랑은 다르게.”
선배는 그저 기다렸다. 내가 다 말할 때까지. 다 토해내고, 전의를 상실해 버릴 때까지.
“……그렇지 않아.”
고장 난 가로등이 차라리 확 꺼져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럼 내 얼굴이 안 보일 테니까.
“누군가에게 상처 주려고 한 말 아니었어.”
지금 내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알기가 두렵다. 그래서 그냥 눈을 감았다. 그랬더니 선배의 목소리는 마치 계시처럼 선명해졌다.
“네가 오해하는 게 있는 것 같은데…….”
“…….”
“한아, 가장 흠이 있는 건 나야.”
나는 어릴 적에 인문학 도서를 많이 읽어 두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그랬다면 지금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